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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와 배우 윤주상, 양희경 인터뷰

어떤 이야기는 반드시 세월을 필요로 한다. 캐릭터의 나이와 배우의 나이가 만나 생기는 주름진 굴곡 속에서만 온전히 전할 수 있는 감정이 <아침바다 갈매기는>에 담겨 있다. 나이듦과 빈곤의 문제, 쇠락하고 갈등하는 지역 공동체, 다문화가정 내부의 서글픈 역학 관계를 바라본 이 영화는 노련한 70대 배우들이 이끌어나간다. 얼굴만큼이나 목소리도 친숙해서 공교로운 조합, 윤주상과 양희경이다. 굵직한 연극무대와 안방 드라마를 수놓아온 베테랑들이지만 영화 주연작으로서는 실로 반가운 복귀이기도 하다. 곡진한 서사를 온몸으로 추진한 배우 윤주상과 양희경을 만나 어촌의 모진 풍파에 녹아든 과정을 물었다. 일평생을 예술하는 직업에 임해온 두 장인은 자기 앞의 생을 마주하는 짐짓 무던한 자세마저 닮아 있어 그들의 무연한 깊이를 가늠하게 했다. 보험 사기극을 꾸며 남은 가족들을 부양하고 자신은 마을을 떠나기로 한 어느 젊은 선원의 결심으로부터 <아침바다 갈매기는>은 어촌 마을의 내막을 펼쳐 보인다. 그러나 카메라가 주의 깊게 내려앉는 자리는 청년의 마음이 아니라 그를 조력하기로 한 나이 든 선장의 입장이다. 70대의 선장 영국(윤주상)은 15년을 자식처럼 함께해온 선원 용수(박종환)가 바다에 빠졌다고 신고한 이후로 예기치 못한 길고 지난한 소동에 휩싸인다. 보험금 지급 과정이 지지부진한 양상을 띠면서 아들을 기다리는 용수의 모 판례(양희경), 베트남에서 온 용수의 아내 영란(카작) 역시 각자의 이유로 서러워진다. 변덕스러운 바다에 둘러싸인 그들의 터전은 마을공동체의 긴밀함이 곧 족쇄와 상처의 원인으로 변모한 지 오래다. 고기잡이로 변변찮은 생계를 유지하는 장년층은 진즉 지쳤고, 젊은이는 마을을 떠나고자 한다. 떠나지 못한 어떤 청년은 스스로 죽음도 초래했다. 일찍이 영국은 아버지의 강한 저지에 불응하다 스스로 죽음을 택한 막내딸을 가슴에 묻은 바 있다. 마음의 무게에 반쯤 짓눌려 살아가는 그이건만 삶의 파도는 야속하게도 자꾸만 아픈 기억을 데려다놓는다. 사라지지 않고 살아내기 <아침바다 갈매기는>의 박이웅 감독은 데뷔작 <불도저를 탄 소녀>에 이어 이번에도 호감의 요소로 점철된 주인공을 구현하는 일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 우리는 정 붙이기 어려운 70대의 노선장, 구구절절한 말보다는 등짝을 한대 내리치는 것으로 마음을 전하는 것이 더 익숙한 류머티즘 환자와 동행하게 된다. 굵게 팬 주름과 상심한 입꼬리로 일관하는 두 주역은 영화의 서사를 단단히 밧줄로 고정해 정확한 감정 위에 정박하게 한다. 파도와 금빛 노을, 갈매기가 오가는 세계는 문득 정감 있다가도 생존이 급선무인 현실의 비정함으로 돌변하기 일쑤다. 비밀과 오해로 점철된 사기극, 뒤엉킨 상실의 아픔, 경제적·사회적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충돌하는 커뮤니티 내부를 다루는 박이웅 감독이 보편의 정서를 핍진하게 그리면서도, 인물의 내면세계와는 거리감을 유지해서다. 거칠고 압축적인 대사와 몸으로 인생을 부딪쳐온 이들의 정동은 바로 이런 순간에 불씨를 지핀다. 말하자면 <아침바다 갈매기는>은 일견 투박한 외연으로 쓰여진, 그러나 한번도 절절히 끓지 않은 적 없는 내연의 드라마다. 첨예한 사회적 문제를 건드리면서 결국 <아침바다 갈매기는>은 빈자리에 관한 영화로 수렴된다. 두 주인공이 보여주는 태도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소멸을 전제로 한 삶의 자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떠나지 못한 딸과 마침내 떠난 아들. 그들 사이에 여전히 남아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 이들은 점점 사라지면서도, 계속 살아간다. 전통적인 텔레비전 드라마의 세팅이 아니고서는 가히 희귀하다시피 했던 무대와 인물을 스크린의 한가운데로 끌어들인 <아침바다 갈매기는>이 가진 힘도 여기에 있다. 너무도 불완전한 자기 앞의 생. 어김없이 돌아오는 아침이면 그것을 다시 살아내기로 하는 사람들의 처연한 완력을 닮은 영화다.

다시 볼 때 더욱 놀라운!, <지선씨네마인드 HIDDEN TRACK> 1·2화 미리보기

1화 영화 <다크 나이트> 속 조커의 분장 뒤에 숨은 민낯 조커(히스 레저)의 짙은 분장 뒤에는 대체 어떤 인물이 숨 쉬고 있을까.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다크 나이트>는 고담시의 윤리관을 뒤흔드는 악당 조커와 그에 맞서는 배트맨(크리스천 베일)의 대결을 그린 슈퍼히어로 스릴러다. <지선씨네마인드> 초창기부터 박지선 교수가 꾸준히 언급했다는 작품으로, 21세기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악역에 조커의 이름이 빠짐없이 언급된다는 것만으로도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전사가 없고 “범죄자들도 예측하기 힘든 존재”인 조커를 분석하기 위해 박지선 교수는 조커가 구사하는 언어를 파고들었다. “이 도시는 급이 다른 (better class) 범죄자를 필요로 한다”는 조커의 발언에서는 악행에 대한 시혜적 태도를, 배트맨을 향한 “너는 나를 완성시킨다”는 대사에서는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도구로서 경쟁자를 인식하는 과도한 자존감을 발견한다. 한편으로 조커는 자신의 찢어진 입의 흉터에 대해 두개의 엇갈리는 이야기를 제시하는 병리적인 거짓말쟁이이기도 하다. 박지선 교수는 두 이야기의 공통점으로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상처를 “조커 본인이 만들지 않고서는 자랑 삼아 이야기할 수 없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그렇다면 정의를 관철하려는 배트맨과 검사 하비 덴트(에런 엑하트)는 극악무도한 상대의 함정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헤쳐나가야 할까? 12월4일, 고담시의 눅눅한 향기를 그대로 담아낸 미려한 삽화와 함께 펼쳐질 <지선씨네마인드 HIDDEN TRACK> 1화를 기대하자. 2화 범죄 스릴러 명작, 영화 <세븐> 속 연쇄살인범의 심리 박지선 교수가 기획 초창기부터 청했던 또 다른 작품인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세븐>은 인간의 7대 죄악을 테마로 삼은 연쇄살인사건을 다룬다. 촘촘히 짜인 수많은 복선에 감탄했다는 박지선 교수는 <세븐>을 “다시 볼 때 더욱 놀라운” 걸작으로 꼽기도 했다. 7일간 이어지는 여러 살인 현장은 배경도 범행 수법도 모두 다르다. 박지선 교수의 분석을 청하기에 이보다 완벽한 설정이 또 있을까. 하지만 의외로 박지선 교수의 눈에 먼저 들어온 인물은 사건을 해결하는 두 형사 밀스(브래드 피트)와 서머셋(모건 프리먼)이었다. 첫 사건 현장에서 혈기왕성한 모습을 보이는 밀스에게 서머셋이 “너무 차갑게 대한다”라고 안타까워하는 도준우 PD와 달리, 박지선 교수는 자신도 “밀스한테 조용히 하라고 말하고 싶었다”며 서머셋에 공감한다. 치밀한 연쇄살인사건을 살피는 데 즉흥적이고 다혈질적인 성격은 오히려 독이기 때문이다. 한편 죄악에 대한 주관적 해석과 범행 계획이 빼곡히 적힌 범인의 노트가 발견되자 박지선 교수는 범인이 ‘내현적 자기애’의 성향을 보인다고 말한다. “고립된 삶을 살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자기가 사람들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숨겨진 형태의 나르시시즘인 내현적 자기애는 지금까지의 범죄 양상과도 일치하는 독선적이고 완벽주의적인 성향을 수반한다. 불같은 형사의 직관과 냉철한 범인의 지략 사이의 대결. 그 끝의 충격적인 반전과 최종장에 대한 다면적인 해석은 12월11일 공개될 <지선씨네마인드 HIDDEN TRACK> 2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장윤미의 인서트 숏] 소의 삶

소 경매시장에 다녀왔다. 소들이 사고 팔리는 곳이다. 다들 소 경매시장이라고 하면 금방 떠오르는 풍경이 있을 것이다. 나 역시 텔레비전에서 종종 봤던 풍경이라 낯설지는 않았다. 수많은 소들이 통로쪽으로 엉덩이를 향한 채 일렬로 쭉 묶여 있고, 사람들이 돌아다니며 소들의 몸을 구석구석 살핀다. 그리고 경매가 끝나면 소들은 새로운 주인과 함께 트럭에 실려 떠난다. 현장에서 카메라를 들고 있는데 조금 난감했다. 밀폐된 공간에 수만 마리의 닭들이 사는 양계장이나 돼지들이 맞으며 끌려가는 도살장 앞에서 느꼈던 충격을 바로 받지는 않아서였다. 상대적으로 낫다는 착각이 들어서일까. 많은 인파가 내 시선을 흩트리기도 했다. 소에게만 집중하기 어려웠다. 우리는 카메라를 들고 여기저기 찍으러 다녔다. 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담고 있는데 몇몇 사람들이 말을 걸었다. 뭘 찍고 있냐, 유튜브 하는 거냐, 여기에 뭐 찍을 게 있냐. 그러다 한 무리의 젊은 사람들이 우리쪽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촬영하는 나를 잠시 쳐다보더니 그중 한명이 물었다. “이거 왜 찍어요?” 나는 카메라 화면에 여전히 반쯤 시선을 둔 채 말했다. 동물들 찍으러 다니고 있다고. 소, 돼지, 닭 등의 삶을 찍는다고. 아차, 동물의 ‘삶’이라니. 적당히 둘러대도 되는데 너무 진지하게 답을 해버렸다. 그냥 흘려들을 법도 한데 그가 되물었다. “얘네들한테 삶이 있어요? 죽는 게 삶 아니에요?” 잠시 정적…. 내가 뭐라고 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별 대답을 하지 않았던 것도 같다. 계속 이어가자니 초면에 깊은 대화가 될 것이므로. 여기서 내 진심을 드러낼 필요도 없다. “얘네들한테 삶이 있어요? 죽는 게 삶 아니에요?” 이상하게 그 말이 자꾸 맴돌았다. 그러게. 죽기 위해 태어난 동물들이 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죽임당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들이 있다. 그 사람들은 20대 초반 정도 됐을까. 소를 팔러 왔다고 했다. 아마 아침부터 농장에서 트럭에 타지 않으려는 소들을 힘들게 실어 여기까지 왔을 것이다. 연배가 있는 축산업 관계자들과 대화할 때면 소는 가축이고 이용하는 게 당연하다는 인식이 너무 견고하게 느껴져서 개인의 깊은 생각이 궁금해지진 않았다. 그저 경매시장에 관한 정보를 얻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젊은 사람의 말은 뭐랄까, 여운이 남아 자꾸 질문을 불러일으켰다. 정말 소에게 삶이 있는 걸까, 없는 걸까. 그런데 삶이란 뭘까. 삶이란 어떠해야 하나. 그럼 나는 소의 삶이 있다고 해야 할까, 없다고 해야 할까. 소가 겪는 일들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소에게는 삶이 없다고, 그에게 삶을 달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소에게 삶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도 지금 현재 온몸으로 살아내고 있는 존재를 부정하는 것 같아 망설여진다. 그러니까 이런 삶은 의미 없다고 말하는 건 무례하고, 이것도 삶이라는 말이 현실을 합리화하는 데 쓰이지는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더 묻지는 못했지만 말을 건 그에게도 묻고 싶다. 누구보다 가까이서 소를 돌보았을 그에게. 소가 저렇게 사는 걸 정말 당연하게 여겨서 던진 말인지, 당연하지 않은데 어쩔 수 없다고 여기는 건지.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삶’이라는 이 흔한 단어를 축산동물에 갖다 붙이니 ‘소의 삶’이라는 말이 얼마나 정치적일 수 있는지를 깨닫는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동물의 복지를 개선해야 한다거나 인도적인 도축이 필요하다는 식의, 결국은 축산업을 견고하게 하는 언어가 아닌 돼지의 삶, 닭의 죽음과 같이 동물의 편에 있는 언어를 적극적으로 쓰고 싶다. 발화하다 보면, 우리가 보고 있어도 보이지 않는 폭력이 서서히 보일지도 모르겠다. 경매시장에 있은 지 몇 시간이 흘렀을까. 카메라 프레임 한가운데에 소들을 담으며 인간들이 ‘아무렇지 않다’고 느끼는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나 역시 처음 경매시장에 들어섰을 때 애써 노력해야만 겨우 소의 표정이 보이고 그의 감정을 느낄 만한 상태로 진입할 수 있었으니까. 다시 카메라를 들고 소에게 다가간다. 눈에 익숙할 뿐, 사실 너무 이상하고 어지러운 풍경이다. 다리에 힘이 없는지 한 소가 주저앉았는데 머리에 끈이 매여 있어서 고개를 하늘로 쳐들고 있다. 얼마나 불편할까.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다. 한 소는 다른 소들보다 덩치가 작고 얼굴과 몸 곳곳에 버짐이 심하게 퍼져 있다. 얼굴의 끈이 닿는 부분에서 피와 진물이 흐르고 있다. 엄마 소와 같이 온 아기 소도 있다. 다리를 접고 앉은 아기 소는 사람들이 다가오면 자리에서 일어나 물러섰다가, 혼자가 되면 다시 주저앉기를 반복한다. 칸막이 옆의 엄마 소는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입에 거품을 잔뜩 물고 있다. 바닥에 침이 뚝뚝 떨어질 정도다.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통로쪽으로 엉덩이를 향한 소들이 늘어선 모습은 모욕적이다. 친구는 이를 두고 “대신 수치심을 느낀다”고 표현했다. 문득, 과거의 노예시장도 이렇지 않았을까. 당시에는 아무렇지 않았던 풍경이 지금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동물의 경매시장은? 잊히지 않는 소가 있다. 경매시장의 한쪽에서 수의사들이 소들에게 접종을 하고 있었다. 주사를 맞을 때마다 소들이 크게 울었다. 그중 한 소에게 자꾸 신경이 쓰였다. 칸막이 옆의 소가 주사를 맞으며 소리를 지르자 이 소는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알아채지 않을 수가 없다. 그 표정에 서린 공포, 두려움을. 소는 벗어나려고 버둥거리지만 줄로 묶여 있어서 도망칠 수 없다. 이제 자신이 주사를 맞을 차례가 되자 소는 수의사가 몸에 손을 대기만 해도 어쩔 줄 몰라 펄쩍펄쩍 뛴다. 주삿바늘이 몸에 들어가자 마구 소리를 지른다. 이제 수의사는 접종 완료의 표시로 파란 래커를 소의 이마에 뿌린다. 소는 또 깜짝 놀란다. 살아 있다. 살아서 느끼고 있다. 이마에는 대충 그어진 파란 줄이 남았다. 래커 칠은 직전에 본 인간의 어떤 행위보다 소를 함부로 대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 눈으로, 또 카메라로 소를 가까이서 보고 그의 표정을 보며 감정을 알아채는 건 사실 힘들다. 마음이 힘들다. 그렇다고 동물에게 신경 쓰기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비평] 모눈을 벗어나는 얼음처럼, <부모 바보>

영진(안은수)은 전과가 있다. 이 정보는 영화 초반부, 지각한 영진이 진현(윤혁진)에게 핀잔을 들은 뒤 밖으로 나가면 옆자리 이 과장의 빈정대는 대사(“전과 하는 애들은 다 이유가 있어”)로 전달된다. 이런 대사가 영화의 도입에 한번 기입되고 나면 관객은 그 내막을 궁금해할 수밖에 없다. 움직임은 굼뜨고 말은 어눌하며 늘 무표정한 영진은 대체 무엇을 숨기고 있는 걸까? 복지관장이 매일 캠코더를 들고 다니는 영진을 수상하게 여기며 ‘몰래카메라’를 연상하듯이, 자신을 변호하기는커녕 모든 종류의 오해와 왜곡에 스스로를 내놓는 이 미심쩍은 청년에게 혹시 험악한 폭력의 과거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우리는 내내 은밀하게 짐작한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는 진현의 말마따나 “잡범”이었다. 텔레마케팅 일을 하던 친구의 작업대출에 연루되어 6개월간 징역을 살다 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의 행위는 공적인 언어로는 사기이고 불법이지만, 동시에 제도의 사각지대에서 벌어진 유감스러운 사태의 일면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진현이 실소와 함께 영진더러 “잡범이네”라고 말할 때, 이 장면에는 어딘가 안도감이 있다. 진현은 이 순간 그 사실을 조금은 다행으로 여긴 건 아닐까? 진현과 관객이 공유하던 비밀스러운 오류가 정말로 오류였음이 드러나면서 이 장면에서는 희미하게나마 우정 비슷한 것이 느껴지기도 한다. 다음 장면에서 진현이 관장에게 직접 영진의 겸직 허가를 요청하고, 곧이어 그의 생일을 축하하며 푸짐한 식사까지 대접하니 말이다. 달리 말해 <부모 바보>는 ‘잡범’을 위시하여 내 주위에 편재하는, 동의할 수 없는 타자의 이질성을 (재)감각해나가는 과정을 비춘다. 내게 <부모 바보>는 유달리 불화하는 방식으로서 지탱되는 우정을, 그리고 그 우정을 지속하(고 또 어그러뜨리)는 어떤 도덕적 태도를 들여다보는 영화였다. 타자를 내가 어찌 할 수 없다는 감각 잡범답게도 영진은 자주 지각을 한다. 그런데 어딘가에 늦는다는 건 한편으론 적어도 다른 곳에(는)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여기 늦는다면 거기에는 늦지 않을 테니 말이다. 일종의 말장난이지만, 구태여 곱씹는 이유는 기실 이 영화의 관객이라면 영진이 누구보다 부지런한 인물임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끊임없이 이동한다. 방이 없으니 먹고 자고 누울 곳이 없으므로 늘 걸음을 옮겨야 한다. 그러다 어딘가에 (잠시) 정착하면 무거운 눈꺼풀을 끔뻑거린다. 이 영화에서 진현이 자는 장면은 나와도 영진은 겨우 졸 뿐이다. 그런데 이렇듯 영진이라는 빈틈을 통해 진현의 일상을 이루던 균열이 드러난다. 이렇게 말해보면 어떨까. 이 잡범의 흔적들이 지금 진현을 깨우고 있다고. 취침이 아니라 기상으로, 안락한 수면이 아니라 불안한 졸음으로 이끌고 있다고. 그러니까 <부모 바보>의 규칙은 이런 것이다. 마치 숨바꼭질처럼, 누군가가 사라지고 다른 이는 그를 찾아 헤맨다. 대개 영진이 뭔가를 (안 하거나) 한다. 그럼 진현이 그를 따라 나선다(와중에 겹쳐지는 순례(나호숙)의 이야기는 이와 반대 방향에 가깝다. 순례는 진현이 원하지 않음에도 그를 계속해서 찾아온다). 이를테면 어쩌다 진현의 집에 얹혀 지내게 된 영진은 자주 생라면을 부숴 먹는데, 그러다 라면 부스러기를 밟은 진현이 영진을 찾으러 주차장으로 나간다. 문제는, 찾더라도 그를 일시적으로 자리에 돌려놓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점이다. 타자를 내가 어찌 할 수 없다는 감각, 그리고 내가 그를 어찌 할 수 없으므로 그가 타자라는 사실을 이렇게 생경한 감각으로 그려낸 영화를 나는 근래에 본 적이 없다. 이는 <부모 바보>가 사회복지관이라는 장소를 주요 배경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과도 연결된다. 찾는(searching) 여정의 주체가, 다양한 민원인과 지역 주민의 방문을 받는 사회복지사 진현이라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그는 제도(와 그 바깥)를 가장 가까이서 목격하는 실무자이지만 이 적용과 집행은 탁상을 넘어서야 가능하다. 관장은 사무실의 자리 배치가 권위적이니 한번 바꿔보자, 는 말을 매우 권위적으로 한다(게다가 자리 배치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전혀 바뀌지 않는다). 이 끄떡없는 무대에서 진현은 누락된 현장을 발굴하는 일을 떠맡는다. 주체와 타자의 반복되는 대결을 불화라는 조건을 중심으로 다루는 한국 독립영화라는 점에서 얼핏 김덕중 감독의 <에듀케이션>이 머릿속을 스치기도 한다. <에듀케이션>에서 관객은 (그러고 보니 공교롭게도 사회복지학과 졸업생인) 성희(문혜인)를 경유하여 소년 현목(김준형)을 ‘못마땅해하는 동시에 측은해하는’ 양가적인 입장에 처하게 된다. <부모 바보>에서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상대적으로 어른인 진현의 입장에서 영진을 바라본다. 그러나 <에듀케이션>의 불화가 누적된 갈등을 마침내 물리적 충돌로 터뜨리는 발산으로 귀결된다면, <부모 바보>는 여태 가까스로 적층된 압력을 인물의 실종으로 순식간에 휘발시킨다. 전자는 상대가 여전히 눈앞에 있는 데서 대결하는 와중에 닫히지만, 후자는 그의 존재를 확신할 수조차 없게 된 사태에서 중단된다. 실상 타자와의 문제는 주체 내부의 문제와도 멀지 않다. 내가 주체적인 관찰자인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라는 사실이 발각될 때, 그야말로 세에서 가장 낯선 자신이 될 때의 까마득함이야말로 진정한 타자와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유심히 들여다보면 <부모 바보>에서 권력적인 시선을 가진 자는 진현이 아니다. 시점숏이 드문 영화이기도 하지만 영화에서 무언가 렌즈에 담고 포착해내는 인물은 영진이다. 그렇다면 영진이 조는 이유는 그가 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가설을 제안해볼 수도 있다. 그가 졸고 있다는 것은 표면적인 진술이다. 그보다 그는 자신의 앞을 회피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저항하고 있는 셈이다. 가령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은 둘의 정면 모습은 이 영화에서 두드러지게 반복되는 구도다. 평행하게 앉아 시각적 교류를 포기하기. 또 비슷한 구도의 장면이 등장하는 어떤 날, 진현이 영진을 향해 “차라리 니가 부럽다”라는 말을 던지자 영진은 역시 졸고 있는데, 이를 보고 진현이 자리를 떠나자 별안간 두눈을 뜬 채 앉아 있는 영진의 클로즈업이 담긴다(그리고 다음날 아침, 그는 또 말없이 사라진다). 그는 정말 졸았던 게 맞을까? 존재의 증빙과 사라짐 공간은 주체가 여기에 있을 때나 성립되는 현장이므로, 진현은 당연히 영진의 집에 가본 적이 없다. 영진이 아예 사라져버리자 그제야 진현은 영진이 노숙하는 다리 아래로 향한다. 조촐한 침낭과 여행가방, 페트병 등이 널브러져 있다. 그리고 쓰레기종량제봉투가 있다. 영진은 왜 그 어둡고 앙상한 곳에서마저 쓰레기를 모아두었을까. 잠깐, <부모 바보>에는 한밤중 청소차가 도시의 쓰레기봉투를 수거하는 장면이 두번 등장한다. 곧장 붙는 것은 진현의 수면 장면이다. 그 시간에 영진은 거처를 찾아 움직였을 것이다. 깊은 밤에 이동하는 자는 제대로 보지 못해 어렴풋한 흔적을 남긴다. 바닥에 떨어진 라면 부스러기, 점차 녹아 농으로 굳는 촛불, 흘러내려 물이 되는 얼음과 같은 상태야말로 영진이 스스로를 존재한다고 증빙할 수 있는 물리적 조건에 가깝다. 제도라는 모눈을 벗어나는 얼음처럼 영영, 그러나 이물을 남긴 채 그는 사라져버린다.

[기획] 할리우드는 AI 논쟁 중, 예술의 영역에서 AI의 사용은 반칙인가?

인공지능(AI)이 인간의 예술 활동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아직까지는 창작 활동의 기술적인 소도구로서 AI를 ‘사용’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고 여길 수 있지만, 문화예술 전반에 걸쳐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술 발전 속도가 빠르다. 현재 할리우드를 중심으로 영화계에서 일어나는 AI 논쟁은 과연 예술가를 위협하는 경고일까. 매일 새로운 뉴스가 쏟아지고 심지어 AI가 만들어내는 결과물의 퀄리티도 향상되어 영화의 미래가 어디로 튈지 호기심을 버리기도 어렵다. 2025년 현재 벌어지고 있는 영화제작 과정에서의 AI 기술 사용에 대한 흐름과 반응 역시 두려움과 기대가 뒤섞인 양상이다. 올해 아카데미를 장식할 것으로 기대되는 영화들 역시 AI 기술과 얽힌 논쟁을 피해가기 어렵다. 그렇다고 마냥 부정적으로 보거나 배척해야 하는 것인 양 침묵하는 건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AI 기술이 영화에 어떻게 접목되고 있는지 현실을 똑바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카데미 주요 후보작을 중심으로 최근 할리우드에서 불고 있는 AI 논쟁의 이모저모를 살펴보았다. 일종의 연기 코치로 활용된 AI 3월에 열릴 97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AI를 둘러싼 논쟁의 장이 되고 있다.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등 10개 부문 후보에 오른 브래디 코베 감독의 <브루탈리스트>와 13개 부문 후보에 오른 자크 오디아르 감독의 <에밀리아 페레즈>가 배우들의 목소리 연기 후보정 과정에서 AI 기술을 사용해 예술성 평가 논란에 직면했다. AI 기술을 제작 과정에 도입한 사례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AI의 도움을 받은 배우의 연기를 온전한 예술가의 결과물이라 볼 수 있는지, 즉 시상식 후보 자격을 얻을 만큼 가치 평가를 할 수 있는지가 논란의 핵심이다. 두편의 영화에는 공통적으로 우크라이나의 소프트웨어 회사 레스피처의 기술이 쓰였다고 한다. <브루탈리스트>의 에이드리언 브로디와 펄리시티 존스의 극 중 헝가리어 발음을 미세하게, 특정 모음 발음의 정확성을 원어민 발음에 가깝게 보정해줬다. 하지만 모든 과정은 수작업으로 이뤄졌으며(소프트웨어의 사용은 엔지니어의 몫이며) 배우들의 연기를 변형하거나 대체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제작진의 입장이다. 대안 기술이 있었을 수도 있으나 시간 단축을 위한 효율성 측면에서 AI의 도움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에밀리아 페레즈>의 AI 기술 사용 여부는 이미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공개된 바 있다. 주연배우 카를라 소피아 가스콘의 노래 연기 장면에서 보컬의 범위를 확장하기 위해 음성 복제 기술이 쓰였다. 프랑스의 뮤지션이자 영화음악을 공동 작곡한 카미유의 목소리와 혼합되었다고 한다. 이같은 신기술의 가용 범위만 들어서는 예술성에 관한 논의에 쉽게 답을 내리기는 어렵다. AI 기술의 사용 여부와 범위를 대중에 공개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면서 아카데미 주연배우 부문을 포함해 8개 후보에 오른 제임스 맨골드 감독의 <컴플리트 언노운>도 AI 후보정 기술의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호주의 VFX 회사 라이징선 픽처스의 머신러닝 캐릭터 툴셋 리바이즈가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와 <컴플리트 언노운>의 작업에 쓰였다. 이 툴셋은 2022년작 <엘비스>에서 오스틴 버틀러와 실제 엘비스 프레슬리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합성하기 위해 처음 쓰인 기술로 알려져 있다. 머신러닝을 기반으로 한 VFX 작업은 <듄: 파트2>에서도 극 중 프레맨 캐릭터들의 눈동자를 푸른색으로 바꾸는 과정과 웜 벌레의 라이딩 장면에서 누크 스튜디오의 카피캣이란 툴이 쓰였다. AI로 시간을 되돌린 배우들 배우들의 목소리 연기를 비롯해 시대상과 세계관에 충실한 ‘리얼리티’를 구현하는 데 있어서 AI 기반의 작업은 창작자가 써서는 안될 ‘반칙’의 개념이 결코 아니다.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신작 <히어>에도 AI가 영화 후반작업에 쓰였다. 이 영화는 주연배우 톰 행크스의 청년 시절부터 60대 시절까지의 모습을 한편의 이야기에 모두 담아내는 영화였기에 VFX의 기술적 완성도가 관객의 몰입도를 담보하는 중요한 ‘연출’ 요소 중 일부다. 디지털 메이크업이라고 하는 후반작업 공정을 통해 톰 행크스의 젊은 시절이 스크린에 구현됐다. <인디아나 존스: 운명의 다이얼>의 해리슨 포드, <아이리시맨>의 로버트 드니로 같은 배우들의 젊은 시절을 구현할 때도 유사한 디에이징 기술이 쓰였다. 사실 이는 단순한 ‘보정’의 개념을 넘어선다. 이 영화들에서 AI는 작업의 효율성뿐만 아니라 완성도에 초점을 두고 쓰였다고 봐야 한다. 우리가 흔히 ‘언캐니 밸리’라고 부르는 디지털 기술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인 것이다. 막상 영화를 보고 나면 아직은 AI도 불가능한 영역이 존재한다는 걸 오히려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까. 완벽한 실사라고 보기엔 육안으로 구분하기가 너무 쉽다. 어색하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톰 행크스와 해리슨 포드의 연기를 충분히 평가할 수 있다. 그들이 캐릭터를 온전히 해석한 감정 연기는 한컷의 이미지에 담겨 있지 않다. 그들의 연기력은 2시간 러닝타임의 맥락 안에서 존재한다. 하지만 한편의 영화 안에서 특정 기술이, 특히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AI 기술이 차지하는 물리적인 분량과 퀄리티에 관한 여러 합의가 필요한 시점인 것은 분명하다. AI가 대체하게 될 영화제작 파트는? AI라는 신기술은 어느 날 갑자기 도입된 것이 아니다. 수많은 예술매체 중에서도 21세기의 영화는 특히 기술집약적이라 할 수 있는데 왜 유독 AI 사용에 반감을 두고 있는 걸까. 가장 큰 문제는 창작자들의 일자리가 위협받기 때문이다. 최근 실베스터 스탤론의 신작 <아머>의 사례를 보자. 프랑스에서 실베스터 스탤론의 목소리 연기를 50여년간 도맡았던 더빙 배우 알랭 도르발이 지난해 세상을 떠난 후에 영국의 스타트업 일레븐랩스가 AI 기술을 사용해 도르발의 목소리를 복제, <아머>의 프랑스어 더빙에 활용할 계획을 발표했지만 배우 목소리의 복제 사용 허가와 관련하여 반발에 부딪혀 계획을 철회했다. 프랑스는 이를 계기로 정부 차원에서 규제를 만들 움직임을 보이는 중이다. 글로벌 더빙 시장 규모가 5조원이 넘는다고 하니 전세계 납품을 목표로 하는 넷플릭스 같은 OTT 플랫폼에서 특히 이런 기술 흐름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렇듯 AI의 공격적인 작업 과정에서의 도입과 입지를 영원히 막을 수만은 없다. 이미 AI는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부터 시작해서 작가의 시나리오 집필, 배우의 캐스팅, 촬영장에서의 배우의 연기, 후반작업은 물론 홍보 마케팅 분야에 이르기까지 쓰이지 않는 파트가 없을 정도다. 최근에는 챗지피티가 써낸 각본을 토대로 만든 스위스의 피터 루이지 감독의 영화 <더 라스트 스크린라이터>의 사례처럼 AI가 크레딧에 한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누군가는 시각특수효과 VFX 분야에 있어서 이미 실시간 렌더링과 버추얼 스튜디오를 제작에 도입해 혁신적인 비주얼 변화를 이뤄온 게임엔진과 AI가 왜 구분되어 논의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불만을 표할 수도 있다. 앞서도 지적했지만 영화의 예술성을 평가함에 있어서 AI만의 ‘독자적인 활약’이 가능한 영역이 아직까지는 많지 않아 보이는 게 사실이다. 시나리오작가가, 캐스팅 디렉터가 AI와 경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졌지만 규제와 합의를 통해 해결점을 찾게 될 것이다. 완성도에 대한 평가도 대중의 몫이 될 것이다. 최근에 <시빌 워: 분열의 시대>가 프로모션용으로 AI가 제작한 포스터를 공개했지만 대중의 반응이 미온적이었던 것, 새로 예고편을 공개한 <판타스틱4: 새로운 출발>의 티저 포스터가 AI 작업이 아니라고 해명해야 했던 사례를 생각해보면 AI의 결과에 대해 대중이 포용력을 발휘하는 데에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 같다. AI는 영화의 새로운 형식을 제시할까 데이터 기반의 학습을 통한 결과, 알고리즘이 선택한 결과물을 어떤 방향에서 활용할지에 대해서는 영화계가 시간을 갖고 더욱 깊이 있게 논의할 필요가 있다. <스프링 브레이커스>의 하모니 코린 감독은 AI라는 도구를 일종의 영화예술 해체용 도구로 쓰고 있다. 그는 영화 전체를 적외선카메라로 촬영한 2023년작 <아그로 드리프트>와 AI를 이용해 범죄자의 얼굴을 아기 얼굴로 바꿔 시각적 충격 효과를 주게 한 2024년작 <베이비 인베이전>에서 AI와 게임엔진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에게 AI는 “또 다른 붓이고, 또 다른 색이며, 이미지를 소리와 통합시킬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만약 현대미술 영역에서 이미 쓰이고 있는 알고리즘에 의한 ‘패턴’ 편집이 영화에 접목되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과연 영화의 관람이라 말할 수 있을까. 패턴 자체의 예술성을 평가할 수는 없어도 창작자가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지에 따라서, 한편의 영화를 완성하는 데 어떤 기여를 할지에 따라서 새로운 가치 기준이 만들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상영마다 편집 순서가 달라지는 영화는 과연 영화일까. 어차피 AI가 이 글의 마지막 문단을 읽지 못한다는 가정하에 이야기해보자면, 창작자의 관점에서 AI가 소도구에 머물려면 영화, ‘필름’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만’ 자유롭게 쓰이는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전세계 AI 산업의 법적 규제는 어떻게 진행 중인가 현재 전세계가 AI 산업을 둘러싼 법안을 두고 고심 중이다. 사람의 특정 데이터를 가지고 공공장소 이용이나 불법적인 아카이빙 구축을 제재하는 금지조항을 담은 AI법을 전세계 최초로 재정해 시행한 유럽연합을 시작으로 한국도 AI 산업 경쟁력 강화와 생태계 형성 발전 지원에 관한 ‘인공지능 발전과 신뢰 기반 조성 등에 관한 기본법’(AI 기본법)이 2026년 1월 시행 예정이다. 아직은 금지 조항 미흡, 보호 권한 모호, 국제기준 적용 등의 이유로 보완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큰 상황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AI 산업에 있어서 할리우드와 실리콘밸리가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어 관련 법안 제정에 사실상 업계 전체가 주목하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해 발의된 ‘SB 1047’ 법안은 제인 폰다, 알렉 볼드윈, 페드로 파스칼 등 수많은 할리우드 인사들이 지지를 표하기도 했는데 현재는 캘리포니아 개빈 뉴섬 주지사가 거부권을 행사해 보류 중이다. 캘리포니아에 세계 5대 생성형 AI 기업들이 본사를 두고 있는 만큼, 사실상 이 법안이 미국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규제가 될 가능성이 크지만 현재로서는 통과되기 어렵다. 비용이 1억달러를 넘어가는 AI 모델에 한해서 개발 업계가 문제 발생 시 책임을 지거나 중지 요청할 수 있는 의무를 담은 ‘SB 1047’ 법안을 찬성하는 쪽에서는 단순히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보호하는 것뿐 아니라 공공의 안전을 위한 필수적인 조치라고 보는 입장이다. 반대하는 쪽에서는 당연히 AI 규제가 혁신을 저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미국 영화, 텔레비전 및 라디오 예술가 연맹(SAG-AFTRA)은 2023년 파업의 핵심 쟁점이기도 했던 AI 규제에 대해 여전히 안전장치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현재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AI 기술을 활용한 ‘디지털 복제’(digital replicas)를 규제하는 두개의 법안에 이미 서명했다. 이탈리아는 자국의 더빙배우조합(ANAD) 소속 배우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보호하는 조항을 계약에 포함시킬 것을 의무화하는 AI 보호조항을 계약에 포함시킨 최초의 국가가 됐다.

대안적인, 실험적인, 동시대적인, 틈새들을 찾아서: 마이크로시네마의 짧은 역사와 현재

비상업적, 틈새(niche) 취향의 영화를 상영하는 소규모 공간을 뜻하는 마이크로시네마는 학문적으로 명료하게 정립된 개념은 아니다. 인가된 영화관, 전시 공간, 공연 공간뿐 아니라 대학 강의실이나 강당, 클럽, 사무실, 카페, 버려진 건물, 개인용 거주 공간도 포괄하는 마이크로시네마의 상영 실천은 북미와 유럽, 일본 등에서 각자 상이한 영화 문화 및 제도적 조건을 바탕으로 표준적 영화산업과 상업적 영화 공간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전개되어왔다. 1990년대 초 본격화된 마이크로시네마 실천 마이크로시네마라는 용어가 널리 쓰이기 전에도 마이크로시네마 실천의 역사적 전거들을 북미와 유럽의 비대중적, 대안적 영화 문화에서 발견할 수 있다. 1920년대와 1930년대 파리와 런던을 비롯한 유럽의 주요 도시에서 결성되었던 시네-클럽들, 아모스 보겔이 비영리적 회원제를 기반으로 1947년부터 1963년까지 운영하며 유럽의 실험영화, 전후 미국의 전위영화, 교육영화를 포함한 다큐멘터리를 포함하는 가치 전복적인 프로그래밍을 선보였던 시네마 16(Cinema 16)은 마이크로시네마의 선구가 되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미국 언더그라운드 영화 문화는 뉴욕의 앤솔러지 필름 아카이브(Anthology Film Archive)와 같은 전통적인 극장 공간뿐 아니라 대학 강의실, 영화감독의 집 등 다양한 비극장 공간들에서 번성했으며 이들의 상영 실천 또한 즉흥적이거나 비공식적인 프로그래밍 방식, 그리고 8mm 및 16mm 영사기, 텔레비전, 아날로그 비디오 등 제도화된 극장에서의 영사기를 넘어서는 장치들을 포함했다. 런던에서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에 걸쳐 런던영화감독협동조합(London Filmmakers Co-op)이 다수의 실험영화 상영 및 영사 퍼포먼스를 시도했고,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에는 무정부주의와 급진적 비디오 액티비즘, 반-예술 프로젝트가 뒤섞인 대항문화 운동의 허브였던 남부 런던의 브릭스턴에서 익스플로딩 시네마(Exploding Cinema), 키노 클럽(Kino Club) 등의 상영 콜렉티브가 활동했다. 미국과 캐나다의 주요 도시에서 마이크로시네마 실천이 본격적으로 펼쳐진 시기는 1990년대 초였다. 도나 드 빌에 따르면 이같은 활성화의 조건은 경제적 불황에 따른 예술영화전용관의 폐쇄와 예술에 대한 공적자금의 축소, 상대적으로 저렴해진 도시 공간 대여 비용, 그리고 비디오의 보급을 통해 증폭된 과거 영화의 접근 가능성 등이었다. 마이크로시네마라는 용어의 확산에 기여한 사례는 1994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실험영화 감독 레베카 바텐과 데이비드 셔먼이 아파트 지하에 불법적으로 설립한 토털 모바일 홈 마이크로시네마(Total Mobile Home Microcinema)다. 관객에게 5달러의 기부를 권유하며 4년 동안 운영된 이 자주적 ‘영화의 집’은 120회 이상 상영회를 열었고, 그중 대부분은 감독과 작가들이 100달러의 사례비로 참석했으며(그들 중 일부는 이를 수령하기를 거부하기도 했다), 이들은 상영 전후 수평적으로 관객과 대화했다. 대규모의 하향적인 영화 프로그래밍에 반발하여 브루스 베일리, 조지 쿠차, 너새니얼 도어스키 등의 실험영화 및 비디오를 소규모로 상영하고 관객의 집중을 촉진한 바텐과 셔먼의 실천은 미국의 대안적 영화 문화사에서 지금까지도 신화적으로 알려져왔다. 이들의 회고에 따르면 식탁에 앉아 떠올린 이 공간의 이름은 각 단어의 의미를 세심하게 염두에 둔 것이었다. ‘토털’은 영화의 가치와 취향에 대한 총체적인 규정의 불가능성을, ‘모바일’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관점’을, ‘홈’은 ‘잠정적인 자율적 지대’를 뜻하는 것이었고, 이들이 정의하는 마이크로시네마는 ‘영화 상영을 위한 작은 공간이자 행동의 범주’였다. 21세기에 설립되어 현재까지도 운영되고 있는 대안적, 비표준적 영화 프로그래밍 성향의 마이크로시네마 중 잘 알려진 두 가지 사례는 뉴욕 브루클린의 라이트 인더스트리(Light Industry)와 스펙터클(Spectacle)이다. 비평가이자 프로그래머인 에드 할터와 토머스 비어드가 시네마 16을 포함한 뉴욕 언더그라운드 영화 문화의 전통에서 영감을 받아 2008년 설립한 라이트 인더스트리는 실험영화와 비디오의 상영 및 퍼포먼스는 물론 뤽 물레, 재키 레이날 등 북미와 유럽의 영화사에서 상대적으로 덜 다루어진 감독을 재조명하는 상영과 대화, 그리고 영화미디어학의 주목할 만한 신간을 주제로 한 강연을 위한 플랫폼으로 정착해왔다. 특히 액트 업(Act Up), 디바TV(Diva TV) 등 1980년대와 1990년대 액티비즘 비디오의 상영을 포함한 퀴어시네마와 무빙 이미지 작품의 프로그래밍은 할터의 말에 따르면 “공유된 경험과 이해를 통해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한 것으로, 마이크로시네마 실천의 동기 중 하나인 비주류적인 공동체성에 호응한다. 2010년에 설립되어 공동으로 운영 중인 스펙터클은 틈새 취향의 추구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프로그래밍을 선보여왔다. 맥주를 포함한 음료 구입이 가능한 바를 지나 어두운 통로를 통해 마주칠 수 있는 25석 남짓의 작은 공간에서 영화사의 정전과 예술영화 시네필의 관심에서 벗어난 혼종적 장르영화, 성애영화, 비디오아트, 다큐멘터리 등이 매일 상영되고, 퍼포먼스와 워크숍을 포함한 특별 행사도 열린다. 이곳에서의 체험은 시네필리아의 종교성과 호응하지만 밀교적이거나 배교적이고, 제도적인 예술영화 공간에서 종종 강요되는 엄숙주의보다는 집중, 몽환적 상태, 자유분방함이 모두 허용된다. 새로운 공간들의 출현 라이트 인더스트리와 스펙터클이 언더그라운드 영화 문화의 전통을 갱신하는 반면, 최근 미국에서는 다른 형태와 제도의 마이크로시네마 공간도 생겨나고 있다. 비평가이자 영화 큐레이터인 조던 크론크가 2017년 설립한 아크로폴리스 시네마(Acropolis Cinema)는 LA 지역의 여러 영화관과 예술 공간을 잠정적으로 빌려 고전 예술영화와 실험영화는 물론 북미 내에 배급되지 않은 유럽 및 아시아 동시대 예술영화의 상영 및 감독과의 대화를 마련해왔다. 2021년 쿠엔틴 타란티노가 인수한 비스타 극장(Vista Theater)은 내부 정비를 거쳐 다시 개장하면서, 그가 이전에 인수한 캘리포니아 지역의 비디오 대여점이었던 비디오 아카이브(Video Archives)의 컬렉션을 상영하는 20석 규모의 마이크로시네마를 더했다. 예술영화를 서비스하고 있는 스트리밍 플랫폼 무비(MUBI)가 배급 작품들의 상영을 위해 제휴를 맺은 LA 지역의 영화관 중에는 비영리 비디오 대여점으로 2023년 다시 문을 연 비디오츠 파운데이션(Vidiots Foundation)도 있는데, 이곳의 35석 규모 영화관에는 무비 마이크로시네마(MUBI Microcinema)라는 이름의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예술영화전용관 및 배급망과도 연결된 이와 같은 새로운 공간들은 실험영화와 비디오의 소개를 지향하는 마이크로시네마, 고전영화를 전문적으로 상영하는 시네마테크 등 인가된 제도 내의 마이크로시네마 등과 공존하며 동시대 시네필들의 분화된 취향과 가치에 호소하고 있다.

[인터뷰] 주체성을 가지고, 사력을 다해, 최민영

전국실용댄스대회 우수상(10살), 대한민국청소년영화제 연기 우수상과 전국학생음악콩쿠르 성악부문 특상(11살), 뮤지컬 <보니 앤 클라이드><프랑켄슈타인> <킹키부츠> 초연 무대의 아역까지(12~13살). 진작 장래희망을 배우로 확정할 법한 경력이지만 놀랍게도 어린이 최민영의 꿈은 축구선수였다. 그러다 중학교 진학을 앞둔 어느 겨울. 최민영은 TV에서 노래하는 한 가수를 본 후 불현듯 “그게 어떤 곳이든 조명 아래 서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확고한 꿈을 가졌다. 변성기 이후 뮤지컬 무대에서 TV드라마로 자연스럽게 활동 영역을 옮긴 최민영은 드라마 <힘쎈여자 도봉순> <미스터 션샤인> 등에서 남성배우들의 아역으로 분했고, 예술고등학교 연극영화과에 진학해 극 연기를 배웠다. “재학 당시 희곡 <오장군의 발톱>을 통해 처음 연극을 접했다. 뮤지컬을 시작으로 드라마, 연극, 영화를 순서대로 경험하니 어느 것 하나 빠뜨릴 수 없이 소중하다. ‘기회가 되면 전부 하고 싶어요’보다 훨씬 강한 의지를 표하고 싶다. 나는 네 영역을 전부 소화할 줄 아는 배우가 되고자 한다.” 20살을 한해 앞둔 가을. 최민영은 한 뮤지컬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대상을 차지하며 주목을 받았다. 이후 47개국에서 TV시리즈 시청 순위 1위를 차지한 넷플릭스 시리즈 <엑스오, 키티>의 주인공 ‘대’로 캐스팅돼 두 시즌 내내 세계 각국에서 큰 사랑을 받았다. “할리우드를 경험하고 싶다는 막연한 꿈만 있었다. 그런데 언젠가 내가 갈 곳이라면 지금 경험해봐도 좋겠다 싶어 오디션 영상을 보냈고, 긍정적인 피드백이 왔다. 그다음부턴 이 작품에 꼭 캐스팅되어야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최민영은 <엑스오, 키티>와 대를 통해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혔다고 말한다. “나를 제외한 현장의 99%가 한국인이 아니다. 전세계 크루들로부터 매일 영감을 얻고 고유의 문화를 배운다. 배우에게 이만한 축복이 또 있을까? 쉽게 하기 어려운 경험 사이에 늘 둘러싸여 있으니 말이다.”13년차 배우 최민영을 통과한 수많은 소년은 크게 두 부류로 묶인다. 감정 표현에 서툴지만 우선 해사하게 웃고 보는 쪽과 비극의 당사자로서 주어진 운명 앞에 갈등하는 쪽. 이를테면 이들은 <레 미제라블>로 치면 앙졸라보다 마리우스에 가까웠고, <오페라의 유령>으로 치면 팬텀보다 라울에게 동했다. 최민영은 지금까지 “나아갈 방향과 품은 가치관이 분명하지만 사람과 상황으로 인해 내면이 흔들리는 캐릭터”에 관심을 가져왔다고 고백한 후 “내가 선택한 아이들은 중도에 방황하더라도 시작과 끝엔 주체성을 가지고 자기만의 길을 주도한다”는 확신을 내비쳤다. 차기작 <약한영웅 Class 2>의 대본 리딩날, 유수민 감독은 홀로 고민 중인 그에게 “우리 작품에 소비되는 인물이 없었으면, 모두가 입체적이고 힘이 실린 인물이었으면 한다”는 말을 건넸다. “그 말이 나를 다잡게 했다. 어떤 배역이든 내 연기가 작품 전체를 환기했으면 한다. 단 한 순간이라도 내가 선택한 인물이 죽어 있지 않도록 사력을 다할 것이다.” 올해 상반기에 만날 수 있는 <약한영웅 Class 2> 속 준태를 기대할 수밖에 없는 답이다. filmography 영화 2023 <드림팰리스> 2020 <네가 없으면> 드라마 2025 <약한영웅 Class 2> 2025 <엑스오, 키티> 시즌2 2023 <엑스오, 키티> 2022 <스물다섯 스물하나> 2021 <너는 나의 봄> 2020 <야식남녀> <이태원 클라쓰> 2019 <자백> 2018 <라디오 로맨스> <미스터 션샤인> 2017 <7일의 왕비> <시카고 타자기> <힘쎈여자 도봉순> 2016 <내일은 실험왕2> <운빨로맨스> <딴따라> <기억> <천상의 약속> 2015 <내일은 실험왕> 2014 <마법천자문>

라이징 스타 6인의 3문3답, 제가 가지고 싶은 초능력은요!

라이징 스타 배우들에게 세 가지 공통 질문을 던졌다. 애착 아이템을 진지하게 추천하거나 롤모델에 대한 애정을 절절히 고백하는 눈빛에 기자들이 웃고 울었다는 후문. 은근히 성격과 취향이 보이는 이들의 답변을 한데 모았다. 1. 갖고 싶은 초능력 2. 나의 촬영장 필수 아이템 3. 작업해보고 싶은 감독, 배우 김지안 1. 시간을 조종하는 능력! 시간을 멈출 수도 있고, 과거로 돌릴 수도 있고, 미래로 갈 수도 있는 가장 실용적이고 유용한 초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시험 기간이 일주일밖에 안 남았을 때 벼락치기를 할 수도 있고, 아침에 늦잠을 잤을 때 필요한 시간을 더 만들 수도 있으니까. (웃음) 만약 미래로 가서 어른이 된 내 모습을 본다면 지금의 나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어 있기를. 2. 무선 이어폰을 꼭 챙긴다. 연기를 하기 전에 미리 감정선을 다스리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배역에 몰입하기 위해서 플레이리스트에 담아둔 우울한 가사의 곡을 듣기도 하고, 필요할 땐 녹음해둔 대사를 계속 들으며 복기하기도 한다. 3. 더 성장해서 훌륭한 연기자, 어른이 된다면 <파묘>를 연출한 장재현 감독님의 오컬트영화에 꼭 다시 출연하고 싶다! 내가 얼마나 잘 컸는지 감독님과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이우빈 신재휘 1.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을 한번 가져봤으면. 좀 부끄러운 실수를 했을 때,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었을 텐데 하고 생각했던 순간으로 잠시 가보고 싶다. 그렇다면 미래에 대해 덜 불안해하며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2. 아주 매운 구강 스프레이. 에티켓용으로 가지고 다니는데 뿌리면 정신이 확 들어서 리프레시하는 데 도움이 된다. 3. 언젠가 애덤 드라이버와 작업하길 꿈꾼다. 애덤 드라이버는 독립영화, 상업영화, 뮤지컬에서부터 일상물까지 어떤 작품이든 유연하게 어울려 볼 때마다 신기하고 꼭 닮고 싶은 배우다. 박찬욱 감독님 작품에 출연한다면 정말 영광이겠다. <헤어질 결심>까지 보고 나서 이런 극도의 섬세함을 가진 연출자와 작업한다면 얼마나 배울 게 많을까 하는 생각을 다시금 했다. /이유채 오예주 1. 도라에몽의 ‘어디로든 문’ 능력! 내가 가고 싶은 곳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먼 현장도 바로 가고, 어느 힘든 날 요술 문을 통해 곧바로 내 방에 도착한 나를 상상하면 행복하다. 2. 물병. 고등학교 3학년 때 물을 자주 마시는 습관을 들인 뒤로 언제 어디든 가지고 다닌다. 기분이 좀 별로일 때는 캐릭터가 그려진 텀블러, 추운 날엔 따뜻한 물을 담은 보온병 등 찬장에 물병이 가득하다. 3. 김태리 배우님과 꼭 호흡을 맞춰보고 싶다. 선배님의 연기를 볼 때마다 압도되는 느낌을 받는데 <정년이> 때 그 에너지가 정말 컸다. 나도 홀로 빛나는 게 아닌 주변을 이끌면서 작품 전체를 살리는 배우가 되고 싶다. /이유채 장규리 1. 텔레포트 능력! 가고 싶은 곳이 너무 많다. 영화 보다가도 실제 장소에 가고 싶은 마음이 커져서 이 능력을 유용하게 써보고 싶다. 최근에 봤던 <노팅힐>과 <비포> 시리즈, <러브레터>에 나온 장소까지 가뿐하게 다녀오고 싶다. 우주도 가볼 수 있을까? (웃음) 2. 향수. 평소 향수를 무척 좋아한다. 날씨에 따라, 기분에 따라, 착장에 따라 다른 향수를 쓰는 편이다. 작품에서 배역을 맡으면 그 배역의 향을 정해두고 그것만 들고 다니기도 한다. 요즘엔 메종 마르지엘라 바이 더 파이어 플레이스가 최애! 3. 이와이 슌지 감독. 자연과 빛을 잘 다루는 연출자인 만큼 특정 계절을 담은 작품을 함께해보고 싶다. 겨울이 그대로 간직된 <러브레터>처럼. /이자연 진호은 1.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초능력. 단 10초여도 상관없다. 교통사고 같은 일이 벌어졌을 경우에도 과거로 돌아가 상황을 예방하고, 촬영 중에 연기 실수를 했을 때에도 바로 직전으로 돌아가 만회하고 싶다. 2. 구강 스프레이와 텀블러. 상쾌한 걸 선호해서 촬영 전에 반드시 뿌리는 편이다. 텀블러에는 아침마다 좋아하는 원두의 커피를 내려 담는다. 3. 류준열 선배님. 좋아한 지가 너무 오래돼서 이젠 이유도 없다. 그냥 좋다. 언젠가 형제 관계로 나란히 스크린에 등장할 수 있기를. 기회가 된다면 10작품쯤 함께하고 싶다! (웃음) /조현나 최민영 1.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을 바랐다. 한데 연기는 타인의 심연을 파헤치기 때문에 즐거운데 그 재미가 사라지면 배우로 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지금 가지고 싶은 건 <점퍼> 속 텔레포트 능력이다. 단 시간까지 되돌리며 순리를 거스르고 싶지는 않다. 공간 이동 정도만 적당히 하면 현장 가기 편하겠다. 2. 대본과 목베개. 여전히 종이 대본을 선호하지만 언젠가는 태블릿으로도 대본을 읽어볼 계획이다. 쪽잠을 정말 잘 잔다. 어릴 적부터 차에서 잘 자 버릇해서 졸리지 않아도 차에서 잠드는 데 소질이 있다. 그래서 어딜 가든 나의 애착 목베개를 가지고 다닌다. 3. 두 대니얼. 대니얼 데이 루이스가 은퇴를 번복한다면 그가 연기하는 걸 현장에서 두눈으로 목격하고 싶다. <해리 포터> 시리즈의 오랜 팬으로서 대니얼 래드클리프도 꼭 한번 만났으면 좋겠다. /정재현

[장윤미의 인서트 숏] 불탄 벽지

“곧 철거하나 봐요.” 캣맘의 문자에 다음날 바로 현장에 갔다. 성매매 집결지인 이 동네의 일부에 펜스가 생긴 지 한달, 펜스 안 건물들에 대한 철거가 시작되었다. 그동안 캣맘은 빈 업소를 은신처 삼던 고양이 순이와 회색이를 밖으로 유인하기 위해 공사 관계자와 구청에 요구하여 펜스에 구멍을 뚫어두었다. 예상보다 빨리 철거일이 다가오자 우리는 말 그대로 발을 동동 구르며 공사 관계자에게 철거 전 건물을 꼼꼼히 수색해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는 이런 일은 한두번 겪는 게 아니라며 우리를 안심시켰고, 마냥 믿을 수는 없었지만 믿어야 했다. 순이와 회색이가 살던 건물에 포클레인이 내리꽂혔다. 콘크리트가 쪼개지는 소리가 들렸다. 펜스 앞을 지키던 공사 관계자에게 달려가니 구멍으로 알록달록한 고양이가 먼저 나오고 시간이 좀 지나 거무튀튀한 고양이도 밖으로 나왔다고 했다. 정말이라고, 믿으라고 했다. 수색해서 나온 건 아니었구나 싶어서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어쨌든 너무 다행스러워서 눈물이 조금 났다. 그리고 펜스에 구멍을 뚫어두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직접 겪으며 절실히 깨달았다. 나야 캣맘을 조력하는 위치에 있을 뿐이지만 앞으로 계속 이런 일을 겪어야 한다니, 서글펐다. 고양이들은 오죽할까. 하루 만에 집이 사라진 그들을 생각하니 내 힘든 감정은 하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고양이들이 안전하게 탈출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이제는 내 일을 해야 했다. 유서 깊은 이 성매매 집결지의 건물이 무너지는 걸 촬영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일단 펜스보다 높은 곳에 올라가야 했다. 이 동네 대부분의 건물이 2층 높이로 옥상조차 없는 곳이 많아서 올라간다고 해도 촬영을 할 수 있을지는 확신이 없었다. 그래도 시도는 해보자 싶어서 평소 봐둔 빈 업소의 깨진 유리문을 통해 들어갔다. 2층으로 올라가는 나무 계단이 보였다. 하지만 거의 삭고 일부만 남아서 한발을 딛고 오르기도 불안했다. 얼마나 오래 방치된 건물인지 계단 옆에는 바닥을 뚫고 자란 나무들이 있었다. 나는 한 나무를 지지대 삼아 카메라 가방과 삼각대를 메고 낑낑대며 2층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천장이 없었다. 잘게 쪼개진 방, 화장실, 한때 홀이었을 공간도 있는데 머리 위로는 아무것도 없었다. 천장이 무너진 건가? 지붕이 날아간 건가? 언젠가 이 건물에서 화재가 났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불에 그을린 벽지가 보였다. 기괴하기도 하고 신비롭기도 한 이 풍경 속에 잠시 서 있는데 마치 이국의 유적지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힘들게 2층으로 올라오긴 했는데 철거 현장이 잘 보이는 곳까지 가려면 아직 위로 더 올라가야 했다. 이 동네는 건물들이 거의 맞붙어 있다시피 해서 폴짝 뛰기만 하면 옆 건물의 옥상으로 이동할 수 있다. 아마 경찰의 단속을 피해 이동하기도 쉬웠으리라. 옆 건물로 뛰어넘어가는 찰나 길 건너 지붕에서 쉬던 고양이들이 놀라 도망갔다. 미안…. 이제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가 더욱 잘 들렸다. 물탱크가 있는 작은 옥상이 보여서 그곳까지 올라가보기로 했다. 주위에 계단이나 사다리는 없었지만 옥상 주위로 쓰레기들이 산처럼 형성돼 있었다. 선풍기, 프린터, 세제 통 등등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많은 쓰레기들. 옥상까지 딛고 올라가기에는 높이가 부족해서 마지막에는 옥상 바닥에 매달린 채로 점프해 올라가야 했다. 장비를 먼저 위로 올리고는 온 힘을 다해 뛰어올랐다. 철거 현장이 잘 보였다. 지금은 죽고 없는 고양이 돼지, 그리고 순이와 회색이가 살던 집은 그사이 반 이상이 무너지고 없었다. 난간이 없는 옥상의 끝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촬영을 시작했다. 건물 위에 임시로 세운 허약한 재질의 가건물이 포클레인에 쉽게 뜯겨져 나오는 게 보였다. 건물이 무너지는 모습보다 무너지면서 드러나는 내부, 그러니까 평소에는 잘 볼 수 없던 업소의 내부, 그리고 포클레인에 끌려 나오는 온갖 잡동사니들에 눈이 갔다. 그게 무엇인지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마음 한쪽이 아련히 슬펐다. 물탱크가 있는 이곳은 추위와 바람을 피할 수도, 인간의 시선을 피할 수도 없다. 결국 공사 관계자의 눈에 띄었고 그는 멀리서 손으로 엑스 표를 해보였다. 나는 못 알아듣는 척하며 인사하듯 손을 크게 흔들어 보이고는 점심 식사를 하러 노동자들이 다 떠난 뒤에도 조금 더 앉아 있다가 내려왔다. 그리고 내려가는 길에 아까는 지나쳤던 옥상에 있는 한 가건물로 들어갔다. 매트리스가 깔린 빈방들이 있었다. 사진을 찍으며 계속 돌아다니다가 어느 순간 내가 어디로 들어왔는지 헷갈렸다. 괜찮아, 이 동네는 어느 문이든 다 연결되어 있으니까. 몇번의 경험으로 익힌 내 감을 믿고 가고 싶은 곳으로 계속 이동했다. 계단이 보이면 내려가고 문이 보이면 열어보고 문에서 문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탐험하듯 계속 통과해나갔다. 어두운 복도에 한 줄기 햇빛과 함께 보이는 뽀얀 먼지들, 바닥에 오래된 브라운관 텔레비전 하나, 방마다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른 인테리어, 금고, 신발, 달력 같은 것들, 뜯긴 벽지 뒤로 보이는 또 다른 벽지, 그런 것들. 수많은 사람들과 돈, 기쁨과 슬픔, 괴로움과 갈등, 온기 같은 것들이 한때 넘쳤을 공간. 그러다 좁은 복도의 끝까지 걸어갔는데 잠긴 문틈으로 내가 늘 걸어다니던 익숙한 골목이 보였다. 난 갇힌 걸까 혹은 저 골목과 연결되지 않은 아예 다른 세계에 들어와 있는 걸까. 열리지 않을 문을 한두번 흔들어보고는 돌아 나왔다. 다시 여러 방을 거쳐 계단을 오르내리길 몇번 반복했을 때 미로의 끝에는 내가 처음 들어왔던 깨진 유리문이 보였다. 깨진 유리문으로 나가려는데 주위에 붙은 스티커들이 눈에 들어왔다. 경찰서에서 붙인 여성피해신고 안내, “화재는 예방이 최선이다. 지하층에서는 잠을 자지 말라”는 소방서장의 안내, 명랑해 보이는 미키마우스와 미니마우스 스티커. 사진을 찍고는 다시 익숙한 골목으로 나왔다. 아쉽고, 안심되는 마음이었다. 멀리서 다시 콘크리트가 쪼개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며칠 뒤, 여전히 그날의 감각이 떨쳐지지 않는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불탄 그 건물 안으로 다시 한번 들어가보고 싶다.

[정준희의 클로징] 미디어와 대중(2) - 그들은 정말로 대중적 취향이 뭔지 알고 있을까?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 실로 명언에 가깝다고 늘 생각하는 속담이다. 한길이 평균적인 사람 키에 해당하니 열길이면 15m가 넘는 깊이다. 아무리 맑은 물이라 해도 그 정도 깊이면 그냥 수면 위에서 들여다본다고 알 수는 없다. 물 안으로 들어가보거나 그 물길을 수십년은 노 저어 본 경험이 있어야 알 법하다. 쉽지 않다. 그런데도 사람 속은 더 어렵다. 자연과학이 알아내고자 하는 게 ‘열길 물속’이라면 ‘한길 사람 속’은 심리학의 몫이다. 심리학은 한편으로는 자연과학적 방법론에 의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문학적 통찰에 의지한다. 사회과학이 그 중간에 위치해 있어서 인지 대체로 심리학은 사회과학에 속하는 걸로 간주된다. 최근 뇌과학이 거두고 있는 엄청난 성과에서 보듯 사회과학으로서의 심리학의 저울추는 인문학적 통찰보다는 자연과학적 방법론에 훨씬 더 기울어 있다. ‘열길 물속’을 알아내는 수단에 의존하여 ‘한길 사람 속’도 알아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뇌를 들여다볼 수 있는 길이 열렸으니 사람 속을 들여다보는 일도 한결 수월해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정말 그럴까? 넷플릭스가 텔레비전과 극장을 동시에 대체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올 무렵, 넷플릭스가 확보한 ‘빅데이터’가 사람들의 취향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게 해줄 것이며 결국 제작 방식에도 일대 혁신이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이 팽배했다. 넷플릭스 기술로 사람들의 뇌를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동시에 연결된 전세계 수억명의 이용자들이 토해내는 무시무시한 양의 ‘행동 데이터’가 그들의 마음속을 투명하게 비춰줄 것이다. 그렇게 알게 된 비법이 제작에 투입되면 마침내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를 만드는 연금술이 완성될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그로부터 10여년이 흐른 지금, 넷플릭스가 극장과 텔레비전을 모두 위기에 빠뜨린 건 맞지만 이들의 연금술이 최적의 제작 비법과 제작물로 이어졌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소위 빅테크 기업이 부리는 마법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다수 대중을 매료시키는 제작자로서 살아보지도 못했지만 나는 여전히 대중의 취향을 콕 짚어낼 수 있는 미디어 연금술이 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 대중을 ‘중2’ 취급하는 게 정답이라던 과거의 텔레비전 제작자도, 취향을 알고리즘화하는 게 비법이라고 주장하는 빅테크 미디어 기업도, 실은 ‘사람 속’을 잘 알아서가 아니라 그저 많은 대중을 자기의 앞에 모아놓을 수 있었기 때문에 성공했을 뿐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 앞에 모였던 건 기가 막히게 재밌어서라기보다는 그게 편리해서일 가능성이 높다. 일단 편리해지면 습관이 되고, 습관이 되면 그 안에서 재미를 찾는 게 대중이 아닐까. 예나 지금이나 콘텐츠의 경쟁력보다 더 중요한 건 미디어 창구의 경쟁력이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