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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9404)

영화 <친구> 빅히트의 빛과 그늘

영화 「친구」가 한국 영화사상 각종 흥행기록을모두 뒤바꿔놓으면서 충무로에 웃음꽃이 넘쳐나고 있다. 더욱이 「친구」의 빅히트는 99년의 「쉬리」와 지난해의 「공동경비구역 JSA」에 이은 3연타석 홈런이어서 영화계로 벤처자금이 쏟아져 들어오고 재능을 가진 젊은이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고 있다. 전국 관객 700만명 동원이 고급 중형차 뉴EF쏘나타 3천대 생산과 맞먹는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을 정도로 경제적 파급효과도 엄청나지만 영화계의 제작의욕 상승과 국민들의 문화적 자존심 고양은 돈으로 따질 수 없을 만큼 값지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 「친구」의 성공에 환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려의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구석도 있다. 가장 걱정스런 대목은 스크린쿼터 문제. 배급업계에 할리우드 직배사의 영향력이 줄어들었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직배사들의 엄포에 눈길을 내리까는 극장주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어서 한 영화의 독주는 다른 한국영화의 상영기회를 가로막는 측면도 있다. 현재 한국영화의 의무상영일수는 최소 106일. 그러나 「친구」가 전국 극장의 5분의 1에 달하는 117개 극장(160개 스크린)에서 상영되다가 8일 현재에도 전국 29개 주요극장에서 70일째 상영되고 있어 상당수 극장들은 「친구」 한편으로 올해 스크린쿼터의 절반 이상을 채우게 됐다. 여기에다가 올초까지 「공동경비구역 JSA」를 상영한 극장도 있고 「번지점프를 하다」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선물」 「인디언 썸머」 등 그런대로 관객 동원에 성공한 작품도 있어 하반기에 영화를 선보이려는 제작사들은 몸이 달 수 밖에 없다. 물론 흥행에 자신 있다면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하겠지만 사정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직배사의 압력에 밀려 관객이 잘 들고 있는데도 일찍 간판을 내리는사례가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고 독립영화나 예술영화는 그나마 스크린쿼터를 채우려는 극장주의 계산 때문에 상영기회를 얻기도 했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의 통상압력이 더욱 거세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정부 당국자는여러 차례 "한국영화 점유율이 40%에 이를 때까지 스크린쿼터를 축소할 수 없다"고공언해왔고 국회 외교통상위원회도 지난해 12월 "한국영화의 점유율이 40%대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때까지 스크린쿼터를 축소하거나 폐지해서는 안된다"고 결의했다. 영화진흥위원회는 상반기의 한국영화 시장점유율이 42.7%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대로 간다면 IMF 이전까지 20%선에 머물던 한국영화 점유율이 99년과2000년의 30%대 진입에 이어 올해 `꿈의 숫자'인 40%를 돌파하는 것이다. 양기환 스크린쿼터 문화연대 사무처장은 "미국 부시 행정부의 통상압력이 날로 거세지고 있어 한국영화 점유율 40% 돌파를 빌미로 스크린쿼터 축소 요구를 또다시 들고나올 가능성이 높다"면서 "한국영화의 배급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스크린쿼터를 줄이면 점유율이 급락할 우려가 있으므로 절대 양보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친구」가 신드롬까지 불러일으켜가며 독주하다보니 다양한 장르의 균형적 발전에 짐이 된다는 지적도 없지 않다. 영화인들은 700만명짜리 영화 1편보다 100만명짜리 영화 7편이 훨씬 값지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친구」가 1년에 영화 1편 볼까말까한 사람들을 영화관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 했지만 계층별, 연령별, 취향별로 다양한 한국영화가 개봉돼야 새로운 수요를 계속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쉬리」 이후 제작비의 대규모화가 가속화됐듯이 「친구」의 성공은 `깡패영화'의 양산을 불러일으키는 부작용도 낳고 있다. 영화 한편으로 떼돈을 벌어들이는 이른바 `대박 신화'에 현혹돼 너도나도 `크게 불려서 크게 먹자'는 분위기에들떠 있는 것도 문제로 꼽힌다. 영화배우 문성근씨는 "99년 「텔미썸딩」 이후 「친구」에 이르기까지 한국영화계에서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식으로 많은 극장을 잡아 대규모 홍보비를 쏟아붓는 방식이 일반화되다보니 「박하사탕」처럼 대중적이지 않은 영화는 상업적 성공을 거두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면서 예술영화와 독립영화의 배급 및 홍보 지원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김혜준 영진위 정책연구실장은 "「친구」의 성공에는 그늘도 분명히 있으나 일부 영화인들의 우려는 상대적 빈곤감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고 한국영화의 관객 흡인력 상승이 스크린쿼터 필요성에 대한 국민적 인식에도 긍정적 효과를 낳고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깡패영화' 바람에 대해서도 "기획력과 제작능력을 제대로 갖춘 제작사라면 이제는 한 작품의 성공에 편승해 덕을 보려 하지는 않는다"고 잘라말했다. (서울/연합뉴스)

인디포럼 | <달이 지고 비가 옵니다>의 박혜민

산과 호수에 안겨 있는 작은 시골마을. 할머니와 사는 어린 남매는 외롭고 무료한 일상을 함께 나눈다. 이들의 유희라면, 정성스레 미꾸라지를 키우고, 어린애 간 빼먹는다는 문둥이네를 기웃거리는 것 정도. 문둥이네 집이라고 소문난 폐쇄적인 집에서 남매는 낯선 청년을 만나고, 그가 보여주는 동전 마술에 넋을 잃는다. 함께 소풍을 떠난 숲 속에서 누나는 청년에게 강간당하고, 그날 저녁, 누나가 좋아하던 달은 하늘에서 사라져버린다. 미꾸라지는 천둥치는 날 하늘에서 떨어진다는 누나의 말을 믿지 않았던 동생은, 비오던 어느날, 하늘에서 떨어진 미꾸라지를 발견한다. <달이 지고 비가 옵니다>는 나이들면서 잃어가는 모든 것에 대한 그리움과 서글픔을 서정적인 화폭에 담아낸 성장영화다. 재기발랄한 요즘 단편들에 비하면, 이 영화는 고전적이고 내성적이다. 일례로, 순박한 남매는 그들의 유년을 할퀴고 간 상처 앞에서도 의연하다. 박혜민(24) 감독은 아픈 남매를 침묵하게 하는 대신,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 사물에 그들의 심경과 바람을 심어둔다. 소녀가 엄마처럼 의지하던 하얀 초승달이 하늘에서 사라질 때, 빗줄기에 섞여 하늘에서 미꾸라지 한 마리가 떨어져 내려올 때, 상실의 절망감과 남은 희망이 엇갈리던 성장의 기억이, 길고 둔한 통증으로 전해오는 것이다. “살아가는 게 마냥 재밌고 신기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하고 싶었다는 박혜민 감독은 문득 어린 시절의 기억 하나를 떠올려 시나리오를 쓰면서 다소 비극적인 색채를 가미하게 됐다. “어렸을 때 친구들이랑 숲 속에 놀러갔는데, 동네 오빠랑 친구 하나가 사라졌다. 어느 누구도 그 얘기를 다시 꺼내지는 않았지만, 지금도 그때 그 친구를 따라갔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조금씩 나이가 들고 성장하면서 켜켜이 상처가 쌓여가도, 한 가닥 믿음과 희망을 놓아선 안 된다는 이야기를, 감독은 열린 결말의 판타지 속에 숨겨놓았다. <매그놀리아>의 개구리비처럼, 이 영화에도 빗줄기를 타고 미꾸라지가 내려온다. 영화를 본 관객이 가장 궁금해 하는 것도, 바로 그 미꾸라지의 의미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상처를 입고도 어떤 위안이나 해결점을 찾지 못한 그 아이들에게 어울리는 선물 하나를 주면 어떨까 생각해봤다. 믿음이랄지 희망이랄지. 다 잃은 것만은 아니라고, 그들을 다독여주고 싶었다.” 충북 보은에서 어린 배우들을 데리고 더러는 ‘몰래 카메라’로 나흘간 촬영한 이 영화는, 영상원 3학년 재학중이던 지난해 일년 내내 매달렸던 워크숍 작품. “그림은 예쁜데 무슨 얘긴지 모르겠다”거나, “이미지에 너무 집착한 것 아니냐”는 쓴소리를 듣지만, 그것은 “산문이 아니라 시 같은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연출 의도가 적중했음을 방증하는 반응들이기도 하다. 박혜민 감독은 일찍부터 ‘영화가 내 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은 당찬 영화학도다. 스스로 말주변이 없다고 믿었던 그는 자신의 머리와 가슴에 담긴 말을 영화라는 그릇에 담아 수줍게나마 세상에 건네고 소통할 수 있겠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래서 안양예고에 진학해 영화와 연극을 공부했고, 용인대 영화과에 2년 다니다가 “통학하기 너무 멀어서” 영상원으로 학교를 옮겼다. <달이 지고 비가 옵니다>는 박혜민 감독이 연출한 네 번째 단편영화. 전에 만든 <소년으로부터>는 어린 시절의 나와 현재의 나,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지점을 고민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달이 지고 비가 옵니다>와 닮아 있는 영화다. 단편 작업의 매력을 “네 컷 만화의 힘”이라고 표현하는 그는, 현재 졸업작품으로 “인물의 감정선이 내러티브가 되는 영화”를 구상하고 있다. 온전한 ‘작품’으로는 첫 경험인 이번 작업이 서울여성영화제 대상과 부산아시아단편영화제 우수상을 수상하며 주목받고는 있지만, 박혜민은 감독으로서 자신의 색깔이 정해지지 않았고, 아직 어떤 것도 정해서는 안 될 시점이라며 조심스러워 한다. 다만,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찾아, 갈 때까지 가보겠다는 의지만은 또렷이 전했다.글 박은영 기자 ▶ 인디포럼 2001의 다섯가지 젊은시선 ▶ <연애에 관하여> <바다가 육지라면> <웃음>의 김지현 감독 ▶ <오후>의 장명숙 ▶ <달이 지고 비가 옵니다>의 박혜민 ▶ <나는 날아가고… 너는 마법에 걸려 있으니까>의 김영남 ▶ <`GOD`>의 이진우

김기덕 | 상처와 고름의 미학

“…왜냐하면 물이 아름다운 충실한 죽음의 물질이기 때문이다. 물만이 아름다움을 보호하면서 잠잘 수 있으며, 또 미의 반영을 보호하면서 움직이지 않은 채로 죽을 수가 있는 것이다.”(가스통 바슐라르, <물과 꿈>) 물과 관련된 두개의 이미지. 떠나간 신부를 그리워하다 반쯤 미쳐버린 사내는 그만 물 속에 텀벙 뛰어들고 만다. 강물 속을 유영하던 그의 눈앞에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의 모습이 환영처럼 나타난다. 실성한 사내의 얼굴에 떠오르는 환한 웃음. 요절한 영화작가 장 비고의 유일한 장편영화 <라탈랑트>(1934)는 물이 가지는 음울한 죽음의 이미지가 강렬한 매혹일 수도 있음을 처음으로 보여주었다. 아주 상투적인 멜로드라마의 내러티브를 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인상적인 물의 이미지와 기이한 인물 설정으로 기억에 남을 만한 영화가 되었다는 점에서 김기덕의 <악어>(1996)는 <라탈랑트>의 연장선상에 놓인다. 하지만 그 두 영화가 직접적인 영향관계에 있다기보다는 그 사이에 레오스 카락스의 <퐁네프의 연인들>(1991)이라는 매개가 존재함을 지적해두는 것이 좋을 듯싶다. 카메라가 느릿느릿 유영하듯 물 속을 더듬는다. 화면 오른쪽에서 물풀 같은 것이 흔들리고 있다. 그러나 그 물풀의 정체가 밝혀졌을 때 우린 흠칫 놀라고 만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죽은 여인의 머리카락이었던 것이다. 차와 함께 물 속에 가라앉아 죽은 여인의 시체. 배우였던 찰스 로튼이 만든 단 하나의 장편영화 <사냥꾼의 밤>(1955)이 보여주는 이 놀라운 이미지 또한 김기덕 영화의 물의 이미지들과 가까운 친연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악어>에서 수갑이 채워진 손목을 잘라내서라도 물 위로 떠오르고자 하던 사내는 결국 강 밑바닥 소파에 여인과 나란히 앉은 채 죽음을 맞는다. 손목에 수갑이 채워진 채 가라앉는 두 인물(<악어>, <야생동물보호구역>(1997)), 파도가 오가는 모래사장에 반쯤 묻힌 채 죽어 있는 여인(<파란대문>(1998)), 오토바이에 매달려 가라앉는 여인과 배터리에 묶여 수장되는 남자(<섬>(2000)) 등 앞에서 언급한 영화들에서처럼 김기덕의 영화에서 물은 자주 음습한 죽음의 공간으로 제시되곤 한다. 하지만 동시에 물은 인물들의 삶의 터전이기도 했다. 이처럼 상반되는 물의 이미지가 아예 영화 전체를 뒤덮고 있었던 <섬> 이후 다소 의외의 영화라 할 <실제상황>(2000)을 제작한 김기덕은, <수취인불명>(2001)에서 물의 이미지를 좀더 폭넓게 확장시키고 있다. 이 영화는 우리로 하여금 그의 변모를 예감케 한다. 삶의 고동, 살갗을 헤집는 면도날의 아픔과도 같은 중력에 의한 하강과 부력에 의한 상승이 공존하는 물 속 공간은 김기덕 영화의 지배적인 정서와도 잘 들어맞는다.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에 적응해 철저하게 뿌리내려 살지도 못하고 존재의 수직적인 의연함을 보여주지도 못하는 인물들의 정서를 그보다 잘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은 달리 없을 것이다. 하지만 ‘뿌리뽑힌 것들은 흔들리지 않는다’(황동규, <김수영 무덤>). 김기덕이 응시하는 것은 바로 그 흔들림이다. 김기덕의 영화에서 흔들리는 삶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멀찍이 떨어져서 관조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파란대문> 이후의 영화에서 우리는 놀랄 만큼 아름답게 찍혀진 원경 숏들을 종종 발견할 수 있지만 그러한 이미지들 뒤에 기습적으로 찾아오는 섬뜩한 상황들로 인해 당황하게 되곤 한다.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하고 흔들리는 것들은 얼마만큼의 상처를 지니고 사는가. 한데 그들이 지닌 상처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터져나오는 고름까지를 거칠게 쥐어짜 무표정하게 우리 앞에 내던진다는 데에 김기덕 영화의 놀라움이 있다. 여기서 ‘상처’니 ‘고름’이니 하는 표현을 썼지만(그리고 앞으로도 불가피하게 사용하게 되겠지만), 사실 비유란 삶의 상처를, 그리고 거기서 터져나오는 고름을 그럴싸하게 감추는 전략일 수도 있다. <섬>과 <수취인불명>에서 김기덕은 삶과 관련된 몇몇 통속적인 비유들을 곧이곧대로 이미지화함으로써 오히려 관객에게 극도의 충격을 안겨주는 방식을 즐겨 사용하고 있다. ‘사랑(하는 대상)을 낚아 올린다’는 비유는 <섬>에서 진짜 물리적인 사건으로써 제시된다. 극중에서 현식은 희진의 강박적인 애정을 못 견뎌하고 마침내 낚시터를 빠져나가기로 결심한다. 드럼통 하나에 의지하여 물을 헤엄쳐가던 중 그는 드럼통을 놓치는 바람에 빠져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때 배를 탄 희진이 허우적대는 현식에게로 다가온다. 그녀는 현식에게 낚싯줄을 던지고 그가 이를 손으로 쥔 것을 확인한 뒤 배를 몰아 끌고 간다. 현식의 손에 박힌 낚싯바늘과 그 사이로 흘러나오는 피. 살기 위해서는 고통을 참아야 하고 여자에게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손을 놓고 죽는 수밖에는 없다. 이는 ‘사랑을 낚아 올린다’는 비유가 얼마만큼의 고통을 수반할 때에야 비로소 의미있는 진술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영화적 답변이다. 자신의 성기에 낚싯바늘을 넣고 잡아당기는 희진의 모습은 견디기 힘든 고통을 감수해가면서도 스스로가 낚이기를 바라는 그녀의 강한 욕망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녀의 입에서 터져나오는 외마디 짧은 비명, 오랜 침묵의 틈에서 갓 빠져나온 이 소리는 끝내 현식이 낚시터를 빠져나갈 수 없게 한다. <수취인불명>의 포악한 개장수인 개눈은 창국에 의해 죽음을 맞는데 그의 시체를 두고 한 동네사람은 ‘개처럼 살더니만 개처럼 죽었다’고 중얼거린다. 숱하게 많은 개들이 목이 매달린 채 야구방망이에 맞아죽어갔던 바로 그 나무에 개처럼 목이 매달려 죽어 있는 개눈의 모습. 이는 비유가 삶으로부터 약탈해갔던 고통스러운 진실을 씁쓸한 웃음과 함께 다시 삶에 되돌려주고자 하는 감독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아름답게 찍혀진 원경숏들 뒤에 섬뜩한 상황들을 배치함으로써 터져나오는 삶의 고름을 보여주는 시각적 전략은 이와 같은 비유의 이미지화와 동일한 맥락에 놓여 있는 것이다. ‘면도날처럼 꽂히는 추위’라고들 말하지만 면도날들이 살갗을 헤집고 들어올 때 얼마나 큰 고통을 가져다주는가를 보여줄 수 있는 감독은 우리에겐 아직 김기덕밖에 없다. 그는 시각과 청각의 이미지만으로 우리의 촉각이 곤두서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감독이다. 절망 끝에서 부르는 또 하나의 절망 노래 한때 한국영화에서 중요한 모티브 가운데 하나가 되었던 것은 ‘부유하는 삶’이었고 이는 로드무비라는 장르의 형식을 빌려 나타나곤 했다(이만희의 <삼포 가는 길>, 이장호의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배창호의 <고래사냥>, 그리고 임권택의 <만다라>, <서편제> 등). 그러나 물질적으로는 거의 완전히 근대화된 지금, 이 한국이라는 좁은 땅덩어리 위에서의 로드무비란 더이상 불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여균동의 <세상 밖으로>에서 운송수단들이 지니는 의미를 생각해보라). 김기덕이 출현한 것은 바로 그 시점이다. 그의 영화는 로드무비의 끝에서 다시 시작하는 영화이다. 그의 영화에서 인물들은 자신만의 영역 내지는 불완전한 주거- <악어>의 한강변 천막, <야생동물보호구역>에서 청해와 홍산이 거주하는 배, <파란대문>의 새장여인숙, <섬>의 낚시터와 좌대들, <수취인불명>에서 창국과 그의 어머니가 살고 있는 미군버스- 를 가지고 있거나, 떠돌다가도 마침내 여행의 종착역에 도달한 자들- <야생동물보호구역>의 홍산, <파란대문>의 진아, <섬>의 현식- 이다. 김기덕은 부유하는 삶 대신에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하고 흔들리는 삶을, 여행의 과정 대신에 여행의 끝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김기덕 영화에서 운송수단들은 원래의 기능을 상실한 채 멈춰져 있다. 이는 더이상 하나의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옮겨다니지 않고 멈추어 서 버린 인물들의 삶과 대응한다. <야생동물보호구역>에서 청해와 홍산이 거주하는 배를 우선 예로 들 수 있겠지만 이후의 영화들에서도 몇 가지 예를 더 찾아볼 수 있다. <파란대문>의 바닷가에 버려진 채 놓여 있는 한척의 배, <섬>의 여주인공 희진이 슬픈 눈으로 응시하는 버려진 오토바이, 그리고 <수취인불명>에서 창국과 그의 어머니가 거주하는 고장난 빨간 미군버스 등. 이들은 그 기능정지로 인해 인물들을 더이상 어디론가 실어나를 순 없지만, 인물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다른 곳을 생각게 하는 사물들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그 다른 곳이란 구체적이고 지리적인 한 공간이 아니다. 그저 막연한 희망의 대상일 뿐이다. 영화 속 인물들이 지니고 있는 희망은 그 막연함으로 인해 결코 실현될 수 없는 것이다. 아니, 차라리 그들은 자신들의 희망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악어>의 앵벌이 꼬마는 노란 종이배를 접어 강에 띄운다. 노인이 그 이유를 묻자 꼬마는 언젠가는 바다에 도착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악어는 앵벌이 꼬마의 이런 행동을 견딜 수 없다. 그 종이배들이 물에 젖어 가라앉는 것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꼭 자신의 삶을 보는 것 같기 때문이다. 젖은 희망, 곧 가라앉을 희망이란 부질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다. 이후에도 김기덕은 종종 이러한 희망과 색채(노랑)를 연관시킨다. <파란대문>에서 매춘부 진아는 새장여인숙의 주인이 푸른 담벽 위에다 고등어를 그려넣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 위에 노란색 물감으로 나비 한 마리를 그려넣는다. 물 속에 있는 여린 노란 날개. 여리기는 하지만 이 시각적 상징은 강력하다. <파란대문>이 다른 김기덕 영화들과는 달리 다소 희망적인 결말을 보여주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앵벌이 꼬마가 접어 띄워보낸 노란 종이배는 <섬>에 가서 노란 좌대로 다시 나타난다. 영화 속 두 남녀는 살인행각이 들통나자 좌대에 모터를 달고는 멀리 떠나간다. 어느 순간 카메라는 그들이 타고 있는 노란 좌대를 부감으로 잡아 보여준다. 주변은 온통 푸른 물로 둘러싸여 있다. 흡사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장면은 밑바닥에 구멍이 나 물이 차오른 배 위에 발가벗은 채 누워 있는 희진의 모습과 중첩되면서 희망없는 두 주인공의 죽음을 암시한다. 언어의 감옥을 여는 육체의 몸짓 그렇다고 김기덕의 영화가 삶에 대한 온통 비관적인 시선만을 던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그의 영화에는 짧지만 인상적인 교감의 순간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있다. 그의 영화를 관심있게 지켜본 사람이라면 짐작하겠지만, 김기덕의 영화에는 감독 자신의 반영으로서 그림 그리는 인물들이 자주 등장하곤 한다(<악어>의 현정, <야생동물보호구역>의 청해, <파란대문>의 진아, <실제상황>의 거리의 화가, <수취인불명>의 지흠). 그들이 자신과 마찰을 빚는 이의 초상을 그리는 것은 화해를 청하고 소통하고자 하는 몸짓인 것으로 해석된다. 확실히 김기덕에게는 언어에 대한 불신이 자리잡고 있다. 그의 인물들은 자신의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데 익숙하지 못하며, 그들이 내뱉는 말은 힘없이, 혹은 거칠고 우악스럽게 감정의 언저리를 맴돌 뿐이다. 몸짓이야말로 그들의 진정한 언어이다. 가령, 노란 좌대에 앉아 있는 현식을 향해 뭍에서 거울로 빛을 반사시키는 희진의 행동(<섬>)이라든가, 노인에게 선물로 사온 안경을 짐짓 무심한 척 툭 던지는 악어의 행동(<악어>)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행동의 반복, 혹은 외양의 모방 또한 김기덕의 영화에서 인물들이 가까워지기 위한 중요한 계기가 된다. 예컨대, <섬>에서 현식이 ‘말하지 않는’ 여자 희진과의 관계에 깊이 빠져드는 것은 그가 낚싯바늘에 입을 다친 사건 이후부터이다. <파란대문>에서 혜미는 진아의 뒤를 몰래 따라다니면서 그녀가 노래방에서 혼자 노래를 부르고 가게에서 머리핀을 고르는 모습 등을 훔쳐본다. 그러다 진아를 놓친 혜미는 오던 길을 되돌아가 진아가 갔던 장소들을 찾아다니며 그녀가 했던 행동들을 그대로 반복한다. 이런 혜미의 모습을 진아도 몰래 숨어 지켜보고 있었다. 이 사건 이후 그들은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하게 된다(그런데 이 진정한 이해라는 것이 꼭 혜미가 손님을 받는 결말로까지 이어져야만 했는가는 의문이다. 혜미가 몰래 건넌방 남녀의 정사를 엿들으며 자위하는 장면과 더불어 이런 식의 구성은 한국 B급 에로영화의 클리셰들을 답습하고 있는 것이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고통보다 넓은 공간은 없고/ 피 흘리는 그 고통에 견줄 만한 우주는 없다(파블로 네루다, ‘점’) 확실히 김기덕은 이미지를 다루는 데 탁월한 감각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가 짜놓은 이야기 속에서는 한국영화의 상투적인 관습들이 드물지 않게 발견되는데, 이 점이 그를 선뜻 뛰어난 작가라고 평가하는 것을 망설이게 만드는 주된 요소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가령, <악어>의 후반부는 주인공 악어와 현정, 그리고 그녀의 애인 및 현정을 강간한 깡패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는데 이 부분의 사건전개는 지극히 상투적이고 진부하기 그지없다. 거기다 갑작스레 공원 암살범과 게이 형사를 등장시킨 설정은 결말로 치닫기 위한 억지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이른바 ‘한국계 디아스포라’의 삶을 다루었다는 <야생동물보호구역>에서는 카미유 클로델의 두상만 아니라면 굳이 영화적 공간이 파리여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 <파란 대문>에서 나타난 상투적 표현들에 관해서는 앞에서 잠깐 언급한 정도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영화들은 우리 영화계의 그 누구도 보여주지 못했던 생생한 삶의 퍼덕거림을 보여준다는 미덕을 갖추고 있다. <섬>을 통해 영화 전반을 거의 온전히 자신만의 이미지로 구성함으로써 작가적 역량을 내보인 김기덕은 <수취인불명>에서는 이미지와 더불어 내러티브까지도 능숙하게 장악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영화의 인물들이 지니는 상처와 거기서 터져나오는 고름은 그들이 처해 있는 역사적, 현실적 상황들로 인해 더욱 생생하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울한 유년의 기억과 젊은 날의 거친 삶을 소재로 영화적 세계를 구축해온 김기덕은 비로소 그러한 생의 조건과 상황을 응시할 수 있는 자리로 나아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분노는 조금도 식지 않았다. 한겨울의 기지촌. 시끄러운 굉음을 내며 하늘을 가로지르는 전투기 아래로 추수가 끝나 황량하기 그지없는 논밭이 죽 펼쳐져 있다. 얼어붙은 물, 즉 논밭을 덮은 하얀 눈은 생의 마지막 안식처마저 박탈당한 인물들의 황량한 심리를 대변한다. 김기덕의 다른 어떤 영화들에서보다도 <수취인불명>에서 인물들은 심하게 충돌하고 무너져간다. 꽝꽝한 얼음장 같은 현실 속에서 그들은 흔들리는 대신 부러져버리고 만다. 그 충만했던 물의 이미지들은 온데간데없다. 개를 도살하는 나무 아래에 고여 있는 작고 더러운 웅덩이와 인민군의 시체가 발견되는 축축한 구덩이만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음습하면서도 매혹적이고 아늑하기까지 했던 물을 죽음의 공간으로 택하는 대신, 창국은 질퍽한 논두렁에 머리를 처박고 죽어간다. 그 위로 내리는 얼어붙은 물, 즉 눈을 맞아 꽁꽁 언 창국의 시신은 <야생동물보호구역>에서 사내의 배에 박힌 냉동고등어와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사람을 동물 및 사물들과 똑같이 취급한다는 감독의 태도가 얼마나 지독한 효과를 낳을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명장면이다. 그는 언제나 냉랭한 표정을 하고 우리의 안온한 삶의 하잘것없는 껍데기를 마치 날카로운 칼날로 회를 치듯 벗겨낸다. 그리고 우리가 발딛고 서 있는 얇은 얼음장을 도끼로 내리찍는다. 우리는 그를 통해 고통의, 상처의 깊고 넓은 심연을 그리고 거기에 가득 고인 고름의 정체를 비로소 응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유운성| 영화평론가 ▶ 김기덕, 한국영화의 낯선 ‘섬’ ▶ 상처와 고름의 미학 ▶ 네티즌과 김기덕 감독이 나눈 10문10답 ▶ 김기덕이 말하는 `영화만들기 1996~2001`

튜브- 동양 결합 임박?

각종 영상 관련 펀드가 창립되고 로커스 홀딩스와 싸이더스, 시네마서비스처럼 금융자본과 영화제작 및 투자사의 결합이 가속화하고 있는 가운데 최근 충무로에서는 또 하나의 ‘빅뱅’ 소문이 무성하게 나돌고 있다. 소문의 주인공은 튜브엔터테인먼트와 동양그룹의 영화사업분야 계열사 미디어플렉스. 업계에 나도는 소식에 따르면 두 기업은 주식교환 또는 현금투자방식으로 함께 영화사업에 나서게 된다는 것. 영화제작, 배급 및 투자까지 전 분야에서 공격적인 경영을 펼치고 있는 튜브엔터테인먼트와 메가박스 등을 소유하고 있는 서울 강남지역의 대표적인 극장업체 미디어플렉스의 결합설은 충무로의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같은 소문에 대해 튜브와 미디어플렉스 관계자는 각각 “동양과 뭔가 논의를 벌이는 것은 사실이나 지금은 아무것도 알려줄 것이 없다”, “한국영화계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접촉하는 상대가 튜브만은 아니며 확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며 사실 여부를 확인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CJ엔터테인먼트와 CGV의 예에서 보듯 배급사와 극장의 결합이 양자에게 시너지효과를 발휘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상황이므로, 튜브와 미디어플렉스가 어떤 방식으로든 힘을 모은다면 영화계에 큰 파장을 몰고 올 것으로 보인다. 이번 ‘빅뱅’ 소문과 관련, 특히 주목을 모으는 것은 미디어플렉스과 동양그룹쪽이다. 안정적인 극장배급망과 풍부한 자금원을 확보하게 되는 튜브도 시네마서비스, CJ와의 경쟁을 위한 유리한 고지를 점하는 셈이지만, 계열사 온미디어의 영화채널 2개와 미디어플렉스의 극장사업을 통해 영화계로 서서히 진입해온 동양그룹의 향후 행보에 관심이 쏠리는 탓이다. 현재 서울 삼성동 메가박스와 씨네하우스의 20개 스크린을 확보하고 있으며, 올해 안에 부산과 수원에, 내년 초에는 대구에 각각 메가박스를 세워 22개 스크린을 더 보유하게 되는 미디어플렉스는 지난 3월 드림영상IT벤처 3호에 참여했으며, 5월엔 80억원 규모의 제우메가 영상벤처투자조합에 26억원을 투자하는 등 한국영화 제작 참여를 예고해왔다. 그동안 등 외화 수입만 해온 미디어플렉스가 곧 배급 또는 한국영화 투자에 나선다는 소문은 최근 들어 널리 퍼져왔다. 관계자들은 동양그룹이 한국영화계에 뛰어든다면 막강한 자본력과 조직력을 통해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한편 시네마서비스의 한 관계자는 튜브와 미디어플렉스의 결합설이 사실이라는 것을 전제로, “긍정적인 일이다. 배급을 하다보면 소프트웨어인 작품과 하드웨어인 극장을 결합하는 시스템을 고민하게 되는데, 안정적인 하드웨어가 확보된다면 소프트웨어에도 좋은 영향을 끼칠 것이다. 기업 규모가 커지면 공개경영을 해야 하므로 오히려 재무가 투명해지고 투자자들에게도 좋은 환경을 마련해줄 것이다. 또 앞으로 더욱 활발해질 해외진출을 위한 공동 시장개척 등의 업무에서도 기업규모가 확대된다면 유리할 것”이라고 밝혔다. 문석 기자 단신/ 종합엔터테인먼트 업체 제미로(대표 문영주)는 6월18일부터 영화 인큐베이팅 사이트 ‘무비제미로’(www.moviezemiro.com)를 오픈한다. 이 사이트는 일반인의 시나리오를 받아, 회원사인 코리아픽처스, 시네마서비스, 싸이더스, CJ엔터테인먼트 등 회원사를 통해 영화화할 수 있도록 주선해주는 역할을 수행할 계획이다. 또 신인감독이나 프로듀서의 아이디어, 소설이나 만화 등 영화화 가능한 원작도 인큐베이팅 대상에 포함해 개발을 도와주고 박찬욱 감독의 ‘시나리오 아카데미’ 등을 서비스할 예정. 한편 무비제미로는 7월쯤 <친구>를 온라인에서 독점상영할 계획이다. 인터넷 유료영화사이트 운영업체 웹시네마(대표 김창규)와 아이링크커뮤니케이션(대표 이현철)은 4일 인터넷 포털사이트 다음커뮤니케이션(대표 이재웅)을 저작권법 위반 등의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소했다. 웹시네마 등은 다음 ‘카페’에 속한 상당수 영화 관련 커뮤니티의 운영자와 사용자들이 인터넷영화사이트에서 유료로 제공중인 영화파일에 불법적인 링크를 걸거나 불법적으로 다운받아 게시해 저작권을 침해하고 업무를 방해했다고 주장했다. 이들 업체는 이 사실을 알고 다음쪽에 카페들의 불법행위를 중단해달라고 수차례 요청했으나 즉각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아 고소라는 방법을 택했다고 밝혔다.

2010년, 영화는 어디에 있을까?

영국 리서치업체, 10년동안 전세계 스크린 수 증가없다 지금으로부터 10년 뒤의 극장가는 어떤 풍경일까. 영국 런던의 연예 및 통신산업 리서치 업체 인포머 미디어 그룹이 2010년의 세계 박스오피스를 전망하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향후 10년 동안 전세계적으로 극장 수익은 크게 늘어나되, 스크린 규모는 대동소이할 것이라는 게 이들이 내놓은 연구결과의 골자다. 인포머 미디어 그룹에 따르면, 2010년 전세계 박스오피스 수익은 현재의 180억달러에서 33%가량 늘어나 240억달러를 기록할 전망이다. 이는 멀티플렉스 바람이 불기 전인 1995년 수익의 두배에 달하는 수치. 그러나 이미 포화상태에 이른 스크린 수는 현재의 14만9천개에서 크게 늘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미국시장에서 비교적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극장 체인들이 지난 18개월 동안 파산 신청하는 일이 잇따른 데 대한 여파로, 미국 안팎에서 스크린을 늘리는 것은 당분간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 때문. 2010년 한해 동안 극장에 들를 관객은 108억명으로, 올해의 92억명보다 17%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또한 미국 내 박스오피스는 전세계 박스오피스의 41%를 차지해 올해의 45%보다 약간 떨어질 것으로, 박스오피스 10위권 국가들은 전세계 박스오피스의 81%를 차지해, 올해와 비슷할 것으로 내다봤다. 또한 극장 입장료는 지금보다 17% 정도 늘어날 것으로 예측했다. 2010년 극장가 전망에 2001년 극장가 전망도 곁들였다. 올해 스크린당 세계 평균수익은 11만7천달러. 미국 평균은 21만3천달러로, 세계 평균을 2배 가까이 웃돈다. 미국관객이 영화관람에 적극적이라는 이야기. 미국에 더해 인도와 중국관객이 전세계 관객의 75%를 차지하는 높은 관람률을 보일 것으로 전망했다. 이 보고서는 특히 아시아관객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는 데 주목하고 있다. 홍콩, 일본, 싱가포르는 현재도 극장 수익이 매우 높은 나라. 영화강국 인도는 극장 입장료가 13센트로 매우 싸기 때문에 수익 합산에 별 기여를 하지 못하고, 최고 인구를 자랑하는 중국은 극장을 찾지 않고 TV로 영화를 관람하는 행태가 일반화해 있어, 관객 동원률과 수익에 큰 변수를 제공하지 못한다고. 올해 전세계에서 동원할 관객은 92억명인데, 1999년보다 그 수치가 하락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을 중국이 제공했을 정도. 침체에 빠진 미국 극장산업이 어떤 활로를 찾아나갈지, TV로 쏠린 중국의 민심이 어디로 움직일지의 문제가 향후 10년 세계 극장 항로에 방향을 제시할 것으로 보인다. 박은영 기자

토틀 웨스턴

■ STORY 범죄조직의 조직원인 제라르(사무엘 르 비앙)는 자신의 보스로부터 보스의 조카 요세와 함께 마약거래를 성사시키고 돌아오라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그러나 말많고 참을성 없는 요세의 행동은 거래현장에서 상대 갱단 조직원들의 심사를 뒤틀어놓는다. 결국 돌발적으로 일어난 한바탕의 총격전 끝에 살아남은 것은 제라르뿐. 제라르는 현장에 남은 돈가방을 들고 서둘러 빠져나간 뒤 상대 갱조직의 복수를 피하기 위해 친구의 도움을 받아 시골마을의 감화원에 은신한다. 그러나 상대 갱조직의 우두머리인 루도(장 피에르 칼퐁)는 끈질기게 제라르의 행방을 추적하고 마침내 조직원들을 이끌고 제라르가 숨어 있는 감화원으로 찾아온다. ■ Review 눈치 빠른 이라면 감독의 전작 <패트리어트>(1993)를 보면서 에릭 로샹이 <동정없는 세상>(1989)의 영화적 세계와는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음을 직감했을 것이다. <토틀 웨스턴>은 <동정없는 세상>의 감독이 만든 최신작이라는 소문을 듣고 찾아올 관객을 실망시키기 십상이지만, 이른바 장르 뒤틀기에 재미를 느끼는 관객이라면 호기심을 가져봄직도 한 영화다. 하지만 서부극이나 갱스터무비 장르를 끌어오면서도 명상적이고 철학적인 성찰을 영화 속에 불어넣었던 짐 자무시(<데드맨> <고스트 독>)나 할 하틀리(<아마츄어>)와 같은 성취를 에릭 로샹이 이루어냈으리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토틀 웨스턴>은 타란티노식의 장르 뒤틀기 게임에 좀더 가까운 영화이기 때문이다. 영화 초반, 마약거래 도중 급작스럽게 발생한 총격전으로 갱들이 순식간에 죽어나가는 장면은 아닌게아니라 쿠엔틴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의 한 장면과 많이 닮아 있다.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거래에 임하던 갱들은 사소한 기싸움으로 총을 뽑았다가 몽땅 목숨이 달아나고 만다. 운좋게 살아남은 주인공이 은신처로 택한 외진 시골마을의 감화원은 감독이 다루기에 따라서 여러모로 흥미로울 수도 있었을 법한 영화적 공간이다. 그러나 <동정없는 세상>에서 파리의 젊은 지식층과 한량의 소소한 일상을 맛깔스럽게 그려내었던 감독의 솜씨가 아랍계 및 흑인 비행청소년들의 삶을 묘사하는 데 와서는 중심을 못 잡고 휘청거린다. 하긴 그네들의 삶을 차분하게 그려내기엔 이 갱스터-웨스턴 잡종장르는 영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감독이 마티외 카소비츠의 <증오>와 같은 영화를 만들어보고자 시도한 것도 아니었을 테고. 아이들 내부에서 일어나는 다툼, 신임교사 제라르와 아이들 혹은 동네 사람들과 아이들간의 불화, 그리고 기존교사 및 원장과 제라르 사이의 묘한 긴장관계 등은 이 영화에서 양념처럼 다루어진다. 주인공 제라르의 어린 시절 감화원 교사이자 친구이기도 한 질베르를 고문하여 은신처를 알아낸 갱들이 감화원으로 들이닥친 이후, 감화원 내에서 발생한 모든 갈등관계는 뒷전으로 밀려난다. 느닷없이 한 소녀가 자살을 기도하는 바람에 원장 부부는 소녀를 차에 태우고 일찌감치 감화원 밖으로 빠져나가고 제라르와 갈등을 빚던 감화원 교사는 총탄에 의해 가장 먼저 머리가 날아가고 만다. 그나마 아이들이 남아 있는 건 갱들에게 손발이 묶인 제라르를 풀어줄 만한 다른 마땅한 인물이 없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처럼 눈에 빤히 보이는 구성이 실소를 자아냄은 물론이지만 그나마 다음에 전개될 한바탕의 총격전을 기대하면서 참고 기다려봄직도 하다. 하지만 <토틀 웨스턴>은 진정 타란티노적인 구성의 묘미를 일찌감치 포기하고 개별 장면에서의 영화적 유희라는 표피적 모방에만 매달리고 있다. 이후의 전개에서 아이들은 제라르와 갱들 사이에 놓인 장애물 같은 존재에 불과하며 대결은 거의 제라르와 갱들 사이의 일 대 다의 양상으로 전개된다. 감독은 광활한 초원을 배경으로 짐짓 서부극의 공간을 희화화하면서, 무고한 이들을 지키려는 주인공과 외지 악당들간의 결투를 갱스터영화의 격렬한 총격전 속에서 풀어내고 있다. 일단 장르영화의 공간에 외딴 시골마을이라는 비관습적이면서도 현실적인 공간을 위치시킨 시도는 관심을 끌 만하지만 이런 거라면 주윤발이 주연을 맡았던 임영동의 <타이거맨>쪽이 훨씬 더 성공적이다. <와일드 번치> <가르시아> <게터웨이> 등에서 샘 페킨파가 보여주었던 거침없고 무자비한 총격전과 오우삼식의 쌍권총 액션도 어김없이 등장하지만 묵직한 삶의 무게와 비장함은 영화적 유희 속에 다 증발하고 온데간데없다. 그렇다고 이 영화에 볼 만한 장면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감화원 근처에서 동네 얼간이들을 모아 군사훈련(이라기보다는 전쟁놀이)을 시키던 퇴역대령이 갱들의 침입 소식을 듣고 무리를 모아 갱들을 소탕하기 위해 감화원으로 침투하는 장면은 정말 재미나게 연출되었다. 그리고 영화 마지막, 다리를 다쳐 절룩대는 제라르가 초원을 가로질러 도주하는 갱 두목 루도를 뒤쫓아가 수류탄과 총으로 간단히 해치워버린 뒤, 자신도 초원에 누워 눈을 감는 장면은 언뜻 고다르의 <네멋대로 해라>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렇다고 여기에 고다르 영화에서만큼의 실존적 무게가 실려 있다는 뜻은 아니다. 여하간 고다르 영화, 특히 <네멋대로 해라>를 조금쯤은 연상시킨다는 점에서는 <토틀 웨스턴>을 <동정없는 세상>과 연계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건달 청년과 성실하고 주관이 강한 여대생, 주인공 주변의 범죄자 동료들, 경찰에 의해 어긋나게 되는 두 연인, 동경의 대상으로서의 미국 등등, <동정없는 세상>은 많은 점에서 고다르 영화를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토틀 웨스턴>은 장르 뒤틀기라는 원래의 목적을 제대로 달성하는 데는 실패한 영화이다. 타란티노적 구성의 묘미를 포기한 것은 차치하고라도 대사의 맛과 시각적 유희의 수준은 비슷한 동기로 만들어진 여타의 영화들 (영화의 스타일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연기, 배우들간의 불협화음, 그리고 엉성한 구성 등을 감독이 극단적으로 밀고나아가 진정 유희적인 경지에 다다른 랜스 먼지아의 나 좀더 역사적이고 현실적인 공간 속에서 ‘장르 뒤섞기’를 시도해 일정 정도의 성공을 거둔 <쓰리 킹즈> 등)에 훨씬 못 미친다. 게다가 키에슬로프스키의 <레드>에서 사진작가로 출연하였고 레지스 바르니에의 <프랑스 여인>과 베르트랑 타베르니에의 <캡틴 코난>에도 잠깐 얼굴을 비친 사무엘 르 비앙은 이 영화에서 과히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지도 못하고 있다. 시종일관 진지한 표정을 하고 대결에 임하는 그의 모습은 정신없이 오가며 소리지르고 수다를 떠는 감화원 아이들의 모습과 때로 불협화음을 일으킨다. 지난해 부산영화제에서 오픈시네마로 선정, 상영된 바 있고 프랑스 개봉 당시에는 상당한 관객을 끌었던 영화라지만 국내개봉에서도 그 정도의 관심을 끌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유운성|영화평론가 데뷔작이 최고작이 된 프랑스감독들 너무 빨리 늙은 그들 <토틀 웨스턴>을 보면서 떠오르는 생각 가운데 하나는 80년대에 커다란 주목을 받으며 데뷔했던 프랑스감독들의 기이한 변모 양상에 관한 것이다. <토틀 웨스턴>의 감독 에릭 로샹은 단편영화 <여성의 존재>(1986)로 세자르 최우수 단편영화상을 수상한 뒤, 89년작 <동정없는 세상>으로 세자르 신인감독상 및 베니스영화제 비평가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데뷔했지만 이후의 영화들에선 그만한 주목을 끄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80년대 초반 <디바>(1981)를 통해 역시 세자르 신인감독상을 받으며 데뷔한 장 자크 베넥스는 제라르 드파르디외와 나스타샤 킨스키를 기용해 야심적으로 만든 83년작 <달빛 그림자>로 거의 종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비록 <베티 블루>(1986)로 전작의 실패를 어느 정도 만회하기는 했지만 <로잘린과 사자들>(1989), (1992)의 실패는 데뷔작에서 보여주었던 가능성마저도 의심하게 만들었다. <퐁네프의 연인들>(1991) 이후 오랜 기간 침묵을 지켰던 레오스 카락스 또한 <폴라 X>(1999)로 돌아와 소수의 지지를 얻어냈지만 역시 예전과 같은 관심을 끌지는 못하고 있다. 한때 이른바 ‘누벨 이마쥬’라는 이름으로 한국의 영화광들에게 상당한 인기를 끌었던 감독들이 90년대 이후 하나같이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듯이 보이는 것은 왜일까? 에릭 로샹이 <동정없는 세상>에서 보여주었던 현대 프랑스 젊은이들의 일상에 대한 묘사는 이젠 의 올리비에 아사이아 같은 감독이 훨씬 잘해내고 있다. 오히려 90년대 이후 최근의 프랑스영화는 자크 리베트, 에릭 로메르, 클로드 샤브롤 그리고 장 뤽 고다르 같은 누벨바그 노장감독들의 작업이 평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는 판이다. 진정 새로운 형식을 띠고 나타났던 것만이 그 신선함이 가신 뒤에도 깊은 여운과 흔적을 남기는 법이다.

간장선생 / 미이라2 / 토틀 웨스턴

■ 간장선생 2차대전 말엽. 간장선생이라 불리는 의사 아카기는 간염이 만병의 근원이라고 믿는 헌신적인 의사다. 창녀 노릇을 하다 그의 조수가 된 젊은 여인 소노코는 아카기를 사랑하게 된다.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 에모토 아키라, 아소 구미코, 가라 주로 출연, 새롬엔터테인먼트 수입·배급 상영시간 120분 홍성남 매혹적이게 너절하고 혼란스런 ‘일본간염기’ ★★★★ 김봉석 세상의 소금은 억센 여인들 ★★★★ 박평식 선생, 지금 일본인들의 간덩이는 건강한가요? ★★★☆ 심영섭 인간의 욕망을 껴안은 영화선생의 힘찬 초상화 ★★★☆ 유지나 제국주의 일본을 부은 간으로 풀어내는 이마무라의 메스 ★★★☆ ■ 미이라2 기원 전 3076년. 파라오에게 도전했다가 패퇴한 스콜피온 킹은 죽음의 신 아누비스와 영혼을 건 계약을 맺고 복수에 성공하는 대신 암흑에 결박된다. 5천년 뒤, 9년 전 모험 이후 결혼한 릭과 에블린은 스콜피온 킹의 팔찌를 손에 넣는다. 스티븐 소머즈 감독, 브랜든 프레이저, 레이첼 와이즈, 존 한나 출연, UIP코리아 수입·배급 상영시간 125분 김봉석 이게 애니메이션인가, 실사영화인가 ★★★ 박평식 아이를 끌어들여 아이들의 입맛에 맞춰 버무린다 ★★★ 심영섭 IQ 50이 돼도 좋다, 롤러코스터영화의 미덕 ★★★ ■ 토틀 웨스턴 범죄조직의 조직원인 제라르는 보스의 조카 요세와 함께 마약거래를 성사시키라는 임무를 부여받지만, 요세가 상대 갱들의 심사를 뒤틀어놓는 바람에 돌발적인 총격전이 벌어진다. 여기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제라르는 현장에 있던 돈가방을 들고 시골로 은신한다. 에릭 로샹 감독, 사무엘 르 비앙 출연, 넷미디어 수입, 시나브로 엔터테인먼트 배급, 상영시간 93분 유지나 할리우드와 프랑스 사이에 번지점프 ★★★☆ 홍성남 오로지 액션만으로 구축된 ‘동정 없는 세상’ ★★☆

유치의 향연

제작연도 2001 광고주 야호커뮤니케이션 제품명 700-5782 대행사 팝콘커뮤니케이션 제작사 피디하우스 (감독 백범기) 입에서 젖비린내가 난다는 뜻의 ‘구상유취’(口尙乳臭)란 말이 결코 좋은 뉘앙스를 풍기진 않는다. 그런데 ‘구상유취가 무슨 문제냐?’라고 고개를 빳빳이 드는 광고가 있다. 되도록 유치찬란하고 가능하면 엽기발랄하게 승부를 걸겠다고 작정한 광고들이다. 시쳇말로 ‘오버(over)광고’라 불리는 노골적인 코믹CF가 광고계에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해당 광고엔 섭섭한 소리겠지만 이들에게 산고의 고통을 거친 농축된 아이디어랄지, 예상의 허를 찌르는 독창성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여과장치를 통과한 정제된 알갱이보다는 있는 것을 과장해 오버액션하는 호들갑스러움이 더 두드러진다. 비록 경박하다는 눈총을 살지라도 소비자의 언어와 문화에 부담없이 안착하겠다는 목표만이 엿보인다. 휴대폰 벨소리 서비스업체인 700-5782 광고와 롯데칠성의 주스브랜드 히야 광고가 ‘오버광고’의 전형을 보여준다. 700-5782 광고의 주인공은 코믹CF의 모델로 최적의 발랄함과 연기력을 갖췄다고 평가받는 차태현이다. 그는 알록달록한 원색의 배경에서 “야∼호”라는 환호성을 지르며 스쿠터를 몰고 있다. 그의 목에 걸린 휴대폰이 바람에 날려 이리저리 움직인다. 그의 입에선 개그맨 심형래가 부른 캐롤송 <징글벨>을 개사한 듯한 ‘벨소리, 벨소리, 벨소리 울려, 울릴까? 말까?’란 가사의 노래가 흥겹게 울려퍼진다. 이때 카메라는 차태현의 겨드랑이 사이로 누군가의 손을 비추며 스쿠터의 뒷자리에 누군가 타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때 휴대폰 벨소리가 울리고 차태현은 뒤에 탄 사람에게 ‘내 벨소리는 최신곡이지’라며 자랑한다. 갑자기 앵글 안으로 고개를 내민 주인공은 개구쟁이 같은 개성으로 똘똘 뭉친 한공주란 이름의 못난이 모델. 그는 ‘오빠, 벨소리 짱이다’라고 맞장구를 친다. 차태현은 ‘오∼칠팔이’를 질펀하게 외친 뒤 ‘신곡으로 고쳐 빨리’라고 ‘5782’라는 번호의 연유를 전한다. 이것으로 끝내는가 싶더니 막판에 양념을 추가했다. 차태현이 뒤를 돌아보며 ‘너도 고쳐, 빨리’라고 말한다. 뒷좌석의 한공주는 얼굴을 고치라는 소리인가 싶어 흠칫 놀라고, 차태현은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고쳐의 목적어가 ‘벨소리’임을 부연설명한다. 이 CF의 핵심 타깃은 휴대폰 벨소리 변경에 관심이 높은 10대 초중반의 중학생. 광고의 목적은 소비자의 사용을 유도하는 데 필수 정보인 번호 알리기에 전력을 다하는 것이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차태현의 목소리를 타고 5782라는 번호만은 뚜렷이 남기고 있으니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고 있다고 말해도 틀리지 않다. 이 광고의 관심 밖 대상인 중장년층은 만화적인 발상에 뿌리를 둔 참을 수 없는 발랄함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지도 모르겠다. 특히 얼굴 생김새를 갖고 장난을 치다니 어이없다는 기분마저 들게 한다. 그러나 ‘짱이야’ 같은 10대의 언어, 무례와 재치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그들만의 대화방식 등을 액면 그대로 흡수한 이 광고는 뻔하지만 가식없는 전략으로 목표 소비자에게 친밀도를 발휘하고 있다. 제작연도 2001 광고주 롯데칠성 제품명 히야 대행사 대홍기획 제작사 동진프로덕션 (감독 조봉찬) 이 광고에 비해 히야 CF는 나름의 아이디어를 소화하고 있다. 이 광고의 특징은 예뻐지기 위해서는 물불 가리지 않는 요즘 세태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 특히 미용성형이 암묵적 비밀의 경계를 넘어 경제적 능력에 따라 얼마든지 자유로운 행위로 자리잡고 있는 달라진 풍속도를 보여준다. 배경은 성형외과다. 아름다워지고 싶어 개그우먼 정선희가 성형외과를 찾았다. 그는 거울을 요리조리 들여다보다가 ‘난 한고은처럼 고쳐야겠다’고 다짐한다. 순간 정선희의 시야에 선망의 미모를 소유한 한고은이 출현한다. 이 대목에서도 유치한 발상이 들어 있다. 나타날 때 ‘히야 히야’라는 바람소리를 내는 것이다. 은연중에 브랜드를 기억에 남기겠다는 애교섞인 장치인 셈. 정선희는 한고은을 향해 ‘어머, 고은아, 여기 웬일이야’라고 과장스럽게 외친다. 그런데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한고은이 입을 열자 난데없이 아줌마 전원주의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나 원주야, 전원주. 예뻐지고 싶니? 과일이랑 친해봐, 롯데 히야’라고 대답한다. 결국 정선희가 한고은으로 오인한 사람은 한고은의 탈을 쓴 전원주였다. 히야 주스를 마시면서 정선희는 마지막으로 야심에 찬 한마디를 던진다. ‘오빠들, 기다려’라고. 이 광고를 기억하지 않을 재간은 없다. 전원주의 목소리를 가진 미녀 한고은이라니. 얼마나 황당하고 충격적인 설정인가? 저칼로리에 상쾌한 뒷맛을 자랑하는, 그래서 여성의 미모관리에 도움을 준다는 광고의 메시지도 쉽게 다가온다.이 CF는 얼굴 예쁜 게 전부가 아니고 정작 중요한 매력은 내면의 아름다움에 있다라는 가치가 이제 쉰내 나는 얘기에 지나지 않다고 조롱하는 것 같다. 맛에서 건강으로, 이제는 아름다움으로 주스 음용의 목적이 달라지고 있다는 점도 흥미를 자극한다. 주책맞을 만큼 ‘오버’의 연속인 이들 광고의 표현방식에 이렇게 꼭 억척스럽게 소비자의 시선을 잡을 필요가 있는가라며 광고계의 크리에이티브가 뒷걸음치고 있다고 못마땅해 하는 시각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선도의 의무 이전에 반영의 역할에 더 충실하게 마련인 광고가 이런 방식으로 소비자에게 눈높이를 맞추겠다고 작정한 것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제 차원높다거나 수준있다라는 품격의 가치는 ‘멋대로 내 갈 길을 가겠다’라는 자유분방함 앞에서는 제대로 맥을 못 추는 것 같다.조재원|스포츠서울 기자

검열과 자유의 딜레마

창작의 자유는 보호받아야 한다. 한반도에 살다보면 더 절실하게 느낀다. 사람 머리를 때리는 장면이 들어간 광고는 공중파 방송에서 방송될 수 없고, 영화의 주제와 직결되는 어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일인당 세개씩 붙은 빨간 하트에 폭소만 자아냈다. 검열 같은 유치찬란한 제도는 반대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창작의 자유를 외치는 주체가 모모 부인 시리즈로 대표되는 핑크영화 제작진 일동이라면? 솔직히 내놓고 지지하긴 좀 뭐하지만 이쪽에만 안면을 바꾸는 것도 문제가 있다. 한술 더 떠서 지나친 검열 때문에 외국에 시장을 빼앗긴다고 울상인 인터넷 성인 방송국의 국내산업 보호, 육성론도 눈감아주자. 하지만 유아 대상 포르노는? 또 동물 학대는? 스너프 필름은? 책이든 만화든 영화든 게임이든, 내가 볼 걸 남이 먼저 가로채 이리저리 잘라내는 건 굉장히 불쾌한 일이다. 나도 생각할 줄 알고 판단할 줄 아는데 다른 사람들이 대신 판단해주는 게 기분이 좋을 리 없다. 게다가 많은 경우, 심의 담당자는 그 분야에 대한 지식도 열정도 부족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검열을 반대하려고 드니 앞에 얘기했던 것들이 마음에 걸린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법칙은 그 진부한 울림만큼이나 정확하게 작용한다. 젊고 예쁜 여자의 옷을 더 많이 벗기고, 다른 사람, 특히 약자를 더 심한 웃음거리로 만들고, 더 처참하고 잔인하고 규모가 큰 폭력을 보여줘야 성공할 수 있다. 특히 “처음인데 잘 먹었네” 따위 카피만 내놓는 주제에 툭하면 예술가연하는 사람들을 위해 창작과 표현의 자유에 동조해주는 게 한심한 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국내에선 게임이 아직까지 아이들 대상이라 그런지 검열문제가 진지하게 논의되지 못하고 있다. 폭력성과 선정성을 무조건 문제삼는 쪽과 자기들이 좋아하는 것에 관해 싫은 소리를 한다는 것에 대해 역시 무조건 화부터 내고보는 쪽이 산발적으로 대립하고 있을 뿐이다. 검열을 해서 얻는 것은 무엇이고 잃는 것은 무엇인지, 자의적인 검열을 막기 위해 어떤 제도적 기준을 세워야 할지, 검열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어떤 보완조치가 필요한지에 대한 고민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다. 만드는 게임 종류로 보나, 그 속에 담겨져 있는 사상으로 보나, 계몽주의적 게임 제작자라고 부를 만한, <문명> 시리즈의 시드 마이어는 “제작자가 ‘개발의 자유’를 남용하지 말 것”을 제안한다. 하지만 그 역시 다른 계몽주의자들처럼 지나친 낙관주의에 빠져 있는 것 같다. 대중이 원하는 한, 제작자는 자극적인 요소를 집어넣을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다. 시드 마이어의 순진한 생각과는 달리, 제작자는 대중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게 아니라 대중이 원하는 대로 팔리는 게임을 만들 것이다. 가장 좋은 해결책은 게이머 스스로가 나쁜 게임을 걸러내 시장으로부터 퇴출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이는 ‘논리적’ 최선, 다시 말해 형식적 가능성일 뿐이다. 인류의 긴 역사에서 그런 일은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선택할 수 있는 건 두 가지다.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하든 말든 심의제도를 채택하고, 사태를 그냥 방치한 건 아니라는 자기 위안의 방어기제를 만드는 것이 하나다. 다른 하나는 어차피 그렇게 될 거 악화가 시장을 완전히 장악할 때까지 그냥 내버려두고 지켜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의 몸과 마음을 간섭하는 부당한 권력을 거부했다는 만족감을 얻는다. 어느 쪽이든 별로 재미있지도 보람있지도 않은 일이고, 골치 아픈 머리를 감싸쥐고 게임이나 한판 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박상우|게임평론가

미야자키 하야오 회고전

지금은 조금 그 명성이 빛바랬다고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는 여전히 일본애니메이션을 대표하는 감독 중 한명이다. 워낙 일본애니의 새로운 조류에 민감한 우리나라에서는 안노 히데야키에서 오키우라 히로유키에 이르기까지 개성 강하고 실력 좋은 쟁쟁한 후배들의 등장으로 미야자키의 작품을 거론한다는 것이 시대에 뒤떨어진 진부한 감상이 되었다. 더구나 비슷한 연배의 린타로나 데자키 오사무 등이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작품활동을 하는 데 반해 그는 여전히 TV시리즈나 OVA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이처럼 뜸한 작품활동에 늘 한결같은 스타일을 고수하는 그가 감각적인 젊은 세대에게는 고리타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그가 <원령공주> 이후 새로 준비하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千と千尋の神隱し)이 여전히 큰 기대를 모으고 있다. 얼마 전 이 지면을 통해 <메트로폴리스>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대한 소식을 전한 바 있다. 이미 개봉을 해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메트로폴리스>에 비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아직까지 조용하다. 한때 ‘올 여름 개봉이 불투명하다’는 이야기도 돌았지만, 현재로서는 7월개봉 예정에 별다른 변화가 없다. 하지만 스튜디오 지브리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라온 최근 소식을 보면 6월 초순인 현재까지도 아직 마무리 작업이 한창이라고 하니, 제작이 그리 순탄하게 진행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특이하게도 이번 작품의 상당 부분은 한국의 프로덕션들이 담당하고 있어, 지브리의 제작일지에는 서울에서 오는 애니메이션 컷에 대한 소개가 상세하게 실리고 있다. 하지만 요즘 미야자키 하야오를 둘러싼 최고의 이야깃거리는 신작 애니메이션이 아닌 그의 회고전이다. 최근 일본에서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데뷔작에서 최근작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가여정을 살펴보는 뜻깊은 행사가 준비되고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 만화영화의 계보’라는 타이틀로 열리는 이 회고전은 생존하는 일본애니메이션 감독으로는 최초로 열리는 행사이다. 오는 6월16일부터 7월20일까지 장장 한달간에 걸쳐 도쿄 ‘에비스 가든플레이스’의 사진미술관 홀에서 열릴 예정. 여름에 공개하는 신작과 그가 오랫동안 공들였던 지브리 미술관의 10월 개장을 기념해 열리는 회고전에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애니메이터로 참가했던 63년 작품에서 최신작 <센과 치히로의…>에 이르기까지 그의 손을 거쳐간 모든 작품이 공개된다. 우리에게 친숙한 <이웃집 토토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같은 극장용 장편은 물론이고 대표적인 TV시리즈 <미래소년 코난>도 행사를 위해 별도로 편집돼 공개된다. 이 밖에 <루팡 3세> <플란더스의 개>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 <빨간머리 앤> <명탐정 홈즈> 등 그가 참여했던 TV시리즈들이 모두 소개된다. 흥미로운 것은 60년대 초기작으로 선보이는 작품들. <하늘을 나는 유령선> <동물보물섬> <장화신은 고양이> <왕왕 주신장> 등 그가 애니메이터 시절 참여했던 작품으로 잘 알려진 애니메이션들도 있지만, 70년대 초 국내에서 <로빈특공대>란 이름으로 소개됐던 <레인보우전대 로빈>를 비롯해 <요술공주 세리> <걸리버의 우주여행> 등 ‘여기에도 미야자키가 참여했었나’ 싶은 예상 외의 작품들도 눈에 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회고전은 단순한 한 개인의 자취를 기리는 것이 아니라 데츠카 오사무 이후 일본애니메이션이 걸어온 역사를 그대로 담고 있어 의미가 더욱 남다르다. 한동안 ‘한물 간 거장’이라는 극단적인 평가를 듣기도 했지만, 이번 회고전을 보면 아직도 일본애니메이션에 드리운 미야자키의 그림자는 짙기만 하다. 김재범|애니메이션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