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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벗는 <봄날은 간다>

■ 허진호 감독의 신작 <봄날은 간다> 제작 이야기 7일 밤 9시 서울 상봉터미널 버스승강장 앞. 채 식지 않은 버스 엔진과 한껏 밝힌 조명기가 뿜어내는 열기가 만들어낸 후텁지근한 밤공기 속에서 50여명의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허진호 감독의 두 번째 영화 <봄날은 간다> 후반부 촬영이 이뤄지는 이곳 풍경은 여느 촬영장의 그것과는 자못 다르다. 아무리 촬영 준비가 끝났다고는 하지만 이곳에서는 감독의 고성이나 스탭들의 웅성거림, 우왕좌왕하는 모습도 볼 수 없다. 대신 나지막한 목소리들이 들릴 듯 말 듯 귀를 스쳐갔고 조심스런 발자국 소리만 엷은 정적 속을 맴돌았다. ‘촬영장 분위기는 감독을 닮는다’는 속설에 비춰보면 감독의 성격을 어림 짐작할 수 있었다. 감독과 배우가 함께 ‘소곤소곤’ 이날 찍을 장면은 강릉 집으로 내려가려는 은수(이영애)가 배웅나온 상우(유지태)에게 짧다면 짧았던 사랑의 감정을 접고, ‘그저 친구로 지내는 게 어떠냐’고 이야기하는 부분. 자신이 원하는 장면을 찍는 데 있어선 집요하기로 소문난 허 감독이 어떤 장면인들 쉽게 찍으랴만은, 둘 사이의 감정이 벌어지기 시작하는 순간을 포착해야 하는 신이라 미묘한 감정 표현이 관건이었다. 때문에 촬영장 분위기는 알 듯 모를 듯한 긴장감이 가득 차 있었다. 허진호 감독은 신이 벌어질 승강장 앞 벤치에 두 배우를 앉혀놓고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두 배우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이어 허 감독은 연기 리허설 모습을 모니터로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가 다시 배우들에게 다가가 무어라 얘기를 했다. 때론 배우들을 모니터 앞에 앉혀놓고 함께 토론하기도 했다. 이들 셋은 가까이 서 있어도 들릴 듯 말 듯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눴는데, 이영애는 대사를 이렇게 하는 게 좋겠냐, 저렇게 하는 게 좋겠냐며 감독의 의견을 물었고 유지태는 은수의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라는 대사가 이미 헤어질 것을 전제로 한 느낌을 준다며 편하게 자신의 대사를 하기가 어렵다는 뜻을 전하는 듯했다. 이런 식으로 수차례의 리허설과 테스트를 거친 끝에 밤 11시5분쯤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됐다. 예상했던 대로 촬영보다 배우와 감독 사이의 토론에 훨씬 많은 시간을 투자한 끝에 결국 다음날 새벽 1시쯤에야 감독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하지만 이 오케이 사인이 이날 일정의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계속 이어질 촬영을 위해 촬영부와 조명부는 부지런히 장비를 옮기기 시작했고 연출부와 제작부 등 기타 스탭들도 분주한 움직임을 시작했다. 한데 이상한 것은 최종 촬영분에 들어간 장면이 애초 리허설 때와는 미묘하게 달라진, 새로운 버전이었다는 점이었다. 그러고보니 매 테이크를 갈 때마다 조금씩 배우의 대사와 연기가 달라졌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이영애가 “우리 친구로 지내면 안 될까?”라는 대사를 할 때도 한번은 승강장을 서성거리며, 한번은 유지태의 옆자리에 앉아서, 또 한번은 유지태 옆의 옆자리에 앉아서 처리했다. 이런 작은 움직임 하나를 연출하기 위해 감독과 배우들은 테이크가 끝날 때마다 나란히 앉아 속닥속닥 서로의 느낌을 나눴고, 그동안에도 시간은 무심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김선아 프로듀서는 촬영이 시작된 2월25일부터 매일같이 겪는 일이므로 대단치도 않다며 “이 영화에서 허 감독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두 주인공의 미묘하고 복잡한 감정의 흐름을 잡아내는 것이므로, 느낌이 그에게 와닿지 않으면 대사와 연기를 계속해서 바꿔간다. 때문에 우리 스스로도 ‘우리 영화엔 왜 쉬운 게 하나도 없냐’며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한다”고 설명한다. 시나리오 따로, 촬영 따로 사실 이 영화에 ‘지속적인 변화’는 운명인 듯 보인다. 애초 허진호 감독이 영화를 떠올린 것은 1999년. 당시의 구상은 주인공이 녹음기사였다는 점 빼놓고는 지금과는 다소 다른 것이었다. 비록 5장짜리 시놉시스에 불과했지만 영화가 현재와 비슷한 꼴을 갖추게 된 것은 지난해 2월쯤이었다. 이때부터 허 감독은 전라도, 강원도 등지를 돌며 주인공 상우처럼 소리채집 현장을 돌아다녔고 연출부원들과 함께 시나리오를 만들어나갔다. 지난해 9월 첫 원고가 나왔고 이후 수정을 거듭한 끝에 촬영 직전인 2월20일쯤 시나리오가 완성됐다. ‘완성’이라고는 하지만 현장에서의 촬영은 꼭 시나리오를 따라가진 않았다. 허 감독은 콘티없이 촬영장으로 와 그곳의 특성과 배우들의 호흡에 맞게 장면을 끊임없이 바꿔나갔다. 그것도 매우 느린 속도로 아주 조금씩. 게다가 허 감독의 경우 ‘이런 식으로 가자’며 미리 정해놓은 자신의 입장을 내세우는 게 아니라, ‘이건 아닌 것 같은데…, 어딘가 이상한데…’라며 그 이상한 부분을 찾아낼 때까지 고민을 거듭하는 스타일인지라 하염없이 촬영시간이 늦어지는 것은 불가피했다. 또 대부분의 장면이 1∼2분에 달하는 롱테이크이다보니, 한 장면 안에서도 감정선이 잠시 흔들리는 경우가 종종 생기기도 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만 3개월하고 열흘 남짓한 기간 동안 전체 분량의 70%가량을 찍었다는 것이 오히려 고무적이기도 하다. 물론 ‘7부능선’을 돌파한 지금까지의 과정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영화 속 은수의 근무처인 강원도 한 방송사에서 촬영할 때는 시나리오에 없는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새롭게 설정하고 만들어나가다 보니 배우, 스탭은 물론이고 감독 스스로도 녹초가 됐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벚꽃, 개나리 등 봄 풍경을 배경으로 삼았기 때문에 미리 촬영을 해야 했다는 점도 부담이었다. 빡빡한 일정 속에서 강행군을 했을 뿐 아니라, 당시가 촬영 초반인지라 배우들의 감정이 충분히 무르익지 않았기 때문. 또 감독의 취향이 때깔이 번지르르하고 현대적 냄새가 물씬한 것보다는 고질고질하고 정겨운 것을 선호하는 쪽이라 촬영 장소를 찾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감독이 생각한 상우의 집은 고즈넉한 분위기를 갖춘 한옥인지라 연출부와 제작부는 이를 물색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가까스로 느낌이 좋은 집 한채를 발견했지만 그나마 맞은편 주택이 재건축을 하는 바람에 포기해야 했고, 다시 힘들여 수소문한 끝에 마침내 부암동의 한 주택을 빌릴 수 있었다. <봄날…>을 밀고가는 ‘3인의 무사’ <봄날은 간다>는 ‘허진호표’ 영화임에 틀림없지만, ‘허진호만의’ 영화는 아니다. 특히 촬영감독 김형구, 조명감독 이강산, 동시녹음기사 이병하 등 ‘3인의 무사’는 이 영화의 중추 역할을 담당한다 할 수 있다. <무사> 때 한팀을 이뤄 활동했던 이들은 영화 스타일면에서나, 감독의 성격면에서나 대조적인 <봄날은 간다>에 참여하고 있다. 역동적인 액션장면으로 가득한 <무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이 영화가 쉽게 느껴질 법도 한데, 이들은 꼭 그렇게 느끼지는 않는 것 같다. 특히 김형구 감독은 허 감독의 전작 에서 유영길 촬영감독이 차지했던 드넓은 자리를 생각하면 어깨가 무거워지는 것을 느낀다. 그는 “감독이 콘티도 안 그리고 특별히 주문하는 것도 없어 초반에는 당황스러웠지만, 여러 번 찍다보니 이젠 대충 감을 잡았다. 아주 색다른 맛을 주는 즐거운 작업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현란한 카메라 움직임을 선보였던 <무사>의 세계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리 혼란스럽지는 않다고 한다. <무사> 이전에는 <박하사탕>을, 그 전에는 <아름다운 시절>과 <이재수의 난> 등 동적인 스타일의 작품과 정적인 느낌의 영화를 차례로 했기 때문. 그는 “사실 허 감독이 촬영을 시작하기 전에는 ‘이번 영화에선 컷도 많이 나누고, 카메라도 많이 움직일 것’이라고 밝혀 내심 의외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촬영을 시작하니 역시 카메라를 고정시켜 롱테이크만 가더라. 결국 그동안 49회 촬영 동안 스테디캠을 사용한 장면은 하나, 크레인을 사용한 것은 두 장면뿐이었다”며 배신감(?)을 표현한다. 주인공 상우가 소리를 담는 녹음기사라는 점 때문에 이병하 기사가 느끼는 부담감 또한 만만치 않다. “요즘 영화를 보면 왜 그리 소리가 큰지 모르겠다. 작은 소리만으로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허진호 감독의 생각도 그렇거니와 상우와 은수가 사랑의 감정을 싹틔우게 되는 소리채집장면이 영화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므로 촬영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별개의 팀을 구성해 지방에 파견해놓은 상황. 이들은 보리밭이 물결치는 소리, 대나무숲에 바람이 이는 소리, 풍경이 은은한 파문을 일으키는 소리,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 파도가 잔잔하게 들고나는 소리, 물레방아 도는 소리 등을 찾기 위해 안면도, 삼척, 보길도 등지를 누비고 있다. 이병하 기사는 “어찌 보면 간단한 소리인데도, 녹음해놓은 것을 들어보면 마음에 좀처럼 들지 않는다. 자연스러우면서 미적으로도 가치있는 소리를 찾는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있다”고 말한다. 때문에 녹음팀은 영화 장면에 맞는 바람이 불 때까지 보리밭에 며칠씩 죽치고 있기도 하고, 알맞은 파도가 밀려올 때까지 해변에서 버티고 있는 중이다. 촬영현장에서도 유지태와 이영애가 연기할 때 조용조용 말하는 타입이기 때문에 이들의 음성에 비해 외부 음향이 너무 크게 녹음될까봐 노심초사중이란다. “멜로라는 장르영화를 만들면서 그 장르의 규칙을 미묘하게 뒤튼다”는 허진호 감독에 대한 평가처럼, <봄날은 간다>는 제목에서 연상되는 유행가의 통속성을 살포시 변주해 사랑에 대한 통찰력 있는 이야기를 들려줄 것 같다. 극중에서 상우가 찾고 기록하는 소리가 결국 청명한 마음의 울림이듯 말이다. <봄날은 간다>는 7월 초 촬영을 마치고 후반작업을 거쳐 9월 하순쯤 관객을 찾을 예정이다. 글 문석 기자 사진 손홍주 기자 ▶ 베일벗는 <봄날은 간다> ▶ <봄날은 간다>는 어떤 영화 ▶ <봄날은 간다> 한국·홍콩·일본 합작 투자금 회수, 걱정 안 한다 ▶ <봄날은 간다> 허진호 감독 인터뷰

<봄날은 간다> 허진호 감독 인터뷰

허진호 감독은 말을 아끼는 사람이다. 스스로 내뱉은 말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영화를 가두는 함정이 될까봐 아주 조금씩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낸다. 하긴 어떤 감독이든 미완의 작품에 대해 자세히 말로 설명하고 싶어하진 않지만 허진호 감독이 다른 점은 그것이 영화를 만드는 태도와 직결된다는 점이다. 를 본 사람이면 느끼겠지만 그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를 잡으려는 사람 같다. 죽음을 앞둔 남자에게 찾아온 예쁜 사랑이 어린 시절 뛰놀던 초등학교 운동장의 풍경과 겹쳐진 에는 ‘안타까움’이나 ‘그리움’이라는 짧은 단어로 압축할 수 없는 어떤 느낌이 들어 있다. 인터뷰 내내 뭔가 더 많은 말을 할 듯하면서 멈추는 그의 모습을 보면 어떤 감정이나 정서를 특정한 어휘나 문장으로 표현했을 때 주는 불편함과 모자람을 카메라로 메우겠다는, 무언의 암시가 있는 듯 느껴진다. 지난 6월5일 <봄날은 간다> 3개국 투자조인식 직후에 그를 만나 이번 영화의 단면을 슬쩍 들춰봤다. 두 번째 영화 촬영에 들어가기까지 꽤 오래 걸렸다. 지난해 이맘때도 금방 촬영할 것처럼 말했는데. 이렇게 오래 걸릴 영화는 아니었는데… 왜 이렇게 시간이 많이 걸렸는지 잘 모르겠다. 시나리오 쓰는 시간이 많이 걸린 건가? <봄날은 간다>라는 제목은 비교적 일찍 정해졌는데. 본격적으로 시나리오를 쓴 기간만 5∼6개월쯤 걸렸지만 무슨 얘기를 할까, 찾아헤매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이번 영화의 아이디어는 언제 어떤 계기로 얻게 됐나? 믹싱을 하면서 작은 소리들이 들어가서 일으키는 효과에 주목하게 됐다. 이런저런 소리가 들어갔을 때 생기는 차이 같은 게 느껴졌고 그런 소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영화를 하면 어떨까, 소리 채집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런데 그게 좀 복잡하더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직업도 아니고, 그런 사람을 만나기도 쉽지 않고. 그러면서 극중 인물의 직업을 잘못 선택하지 않았나, 중간에 그런 과정들이 좀 있었던 것 같다. 소리를 채집하는 사람, 사운드 엔지니어의 이야기를 한다는 데서 출발했다고 하지만 전체적인 틀은 러브스토리라고 볼 수 있는데 처음부터 사랑에 관한 영화를 한다고 전제하고 시작한 것인가? 본격적으로 연애하는 이야기를 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있었다. 좀 빨리 만나고, 좀 빨리 사랑하고, 좀 빨리 같이 자고, 좀 빨리 헤어지고, 그러고 나서 잊어버리기 힘들어 하고 하는 그런 이야기, 그런 생각들은 처음부터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사운드 엔지니어라는 직업과 그런 러브스토리의 연관성을 생각해봤을 것 같은데. 어떻게 연관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있었던 것 아니고. 그냥 주인공 직업이 결정되고 하고 싶었던 본격적인 연애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것이다. 스스로에게도 이게 어떤 연관이 있지, 라고 되물어보곤 했는데 답이 잘 안 잡히더라. 를 생각해보면 분명 연관이 있는 것 같다. 의 남자가 사진사였고 이번엔 사운드 엔지니어인데, 말하자면 흘러가는 시간을 잡으려는 사람들이다. 사진을 통해 어떤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나 소리를 통해 지나가버리는 느낌과 정서를 담으려는 것이나 비슷한 태도를 지닌 것 아닌가 싶다. 그런 말을 음악감독인 조성우씨도 하더라(웃음). <봄날은 간다>라는 제목은 어떤가? ‘봄날은 간다’라는 말이 주는 이미지가 있다. 이걸 제목으로 택할 때는 만들고자 하는 영화와 맞아떨어지는 말이라는 느낌이 있어서일 텐데. 그랬던 것 같다. <봄날은 간다>라는 제목은 사이더스의 조민환 이사와 이야기하다 나온 것이다. 그때는 사운드 엔지니어인 남자가 결혼을 하려는 이야기였는데 노래 제목이어서 좀 부담스럽긴 했지만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힘들었던 건, 지금도 마찬가지이긴 한데 <봄날은 간다>에 봄이 나와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 점이었다. 봄을 담으려면 촬영시기도 잘 맞춰야 하니까. 그래서 늦춰진 면도 있다. 겨울에 시작해서 봄에 끝나는 이야기인데. 겨울에 만나서 봄, 여름, 그리고 헤어진 뒤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지만 다시 봄을 맞는 그런 설정이다. 단순히 이야기 배경이 그럴 뿐 아니라 그런 계절적 변화를 찍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은데. 계절 변할 때 좋지 않나. 봄이 올 때 좋고 여름 올 때도 좋고. 가을 올 때도 좋고, 영화에선 가을로 접어드는 건 안 보여주지만…. 주변에서 나오는 계절적 변화들이 사람들 감정이 변하는 걸 잘 표현해주는 것 같다. 계절 변화가 재미있는 것 같다. 계절 변화를 담으려는 것 자체에서 시간이 흐르는 것에 대한 상념을 표현하려는 느낌이 든다. 남녀가 만나 헤어지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 속에 담긴 건 그런 흐르는 시간에 대한 생각과 정서가 아닌가 싶다. 계절 변화가 주가 된 것 같지는 않고 남녀의 이야기, 감정들을 잘 표현하기 위해 계절변화를 함께 담아보자고 생각한 것 같다. 그렇게 할 때 시간에 대한 어떤 느낌도 있을 것 같았고. 시나리오를 쓰면서 헌팅을 다닌 것인가? 장소 선택이 아주 중요한 영화인데. 시나리오를 쓰면서 여기저기 다녔다. 어떻게 강원도를 택했는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사운드 엔지니어와 여자가 만나야 하는데 어쨌든 말이 되게 만들어야 하니까 지방방송사 아나운서가 나오게 됐고,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처럼 지역의 소리를 찾는 프로그램을 하면서 사운드 엔지니어와 만나는 설정이 이뤄졌다. 서울에선 그런 일이 벌어지기 힘들 테고. 도움을 얻기 위해서 방송사 프로듀서들의 도움을 구했다.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도 있고 <한국소리 100선> 같은 프로그램도 있고. 담당 프로듀서랑 같이 며칠씩 소리 채집하러 다니기도 했다. 전문적인 일들이라 감을 잡기 힘들었기에 그런 작업이 필요했다. 사운드 엔지니어인 남자가 만나는 대상이 이혼한 적 있는 연상의 여자라는 설정은 어떻게 나온 것인가? 처음부터 연상, 연하 구조를 염두에 둔 것 아니었다. 이혼한 적 있는, 사랑했는데 헤어진 경험이 있는 여자라면 뭔가 삶에 대한 태도도 ‘뭐 그럴 수 있지’ 하는 모습일 거라 생각했다. 반면 남자는 아직 그런 경험이 없고 ‘어떻게 그럴 수 있나’ 하는 식이다. 그러다보니 여자 나이가 남자보다 조금 많은 걸로 설정됐다. 영화에선 구체적으로 연상, 연하라는 구조가 크게 부각되지 않는데 기본적으로 배우들 나이도 있으니까 자연스레 드러나는 것 같다. 도 그렇고 주인공의 집이 한옥이다. 어린 시절 기억과 관련된 것인가? 이번엔 집을 찾는 게 힘들었다. 왠지 세트로 들어가는 건 싫었고. 연립주택이나 아파트는 닫힌 공간이라 실제로 촬영하는 게 너무 힘들 거 같더라. 좀 열린 공간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아주 옛날 집을 찾아다닌 건 아니다. 개조한 한옥 정도면 좋겠다 싶었다. 마루가 있어 마루에 앉아서 얘기하고 창문을 열면 밖이 보이는, 나무가 보이고 하늘이 보이는 그런 집이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찍고보니까 주인공 남자의 집을 보면 같은 앵글로 찍어도 지루하거나 답답하지 않은 느낌이더라. 반면 여자의 집은 아파트라서 남자의 집과 상반된 느낌이다. 그런 한옥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나? 한옥에 대한 특별한 어떤 기억이 있는지? 다들 그렇지만 어렸을 때 그런 집에서 자라긴 했다. 김형구 촬영감독도 너무 옛날 식으로만 가는 거 아니냐고 하고 소품 담당도 옛날 물건들만 구해오는데…. 내가 그렇게 복고취향은 아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조금 오래된 것들을 좋아하긴 하는 것 같다. 나는 왜 그럴까 생각해본 적 없나(웃음)? 나도 압구정동 같은 데서 영화 찍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왜 안 그러겠나? 매일 나는 왜 그럴까, 심각한 고민을 한다(웃음). 요즘 압구정동도 자주 가는데…. 멜로드라마의 틀이긴 하지만 격렬하거나 폭발적이진 않다. 도 그랬지만 감정변화가 아주 잔잔하게 진행된다. 흔히 보는 멜로드라마가 운명적 사랑이나 격정을 강조하는 것과 대조되는 면이기도 한데, 실제 연애의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잔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이번 영화가 그렇게 잔잔하지만은 않다. 헤어지면서 겪는 감정의 동요나 집착이 표현된다. 사랑도 그렇지만 사람의 감정이란 게 늘 하나가 아닌 것 같다. 여러 가지 감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거니까. 운명적 사랑 같은 것도 있겠지만 그런 게 전부는 아니고 연기자들에게 캐릭터의 감정을 설명해주면서 곤란함을 겪는 부분도 그런 거다. 이래서 이런 감정이다라고 직접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보통 대부분의 사람이 만나서 연애할 때도 그런 거 아닐까 싶다. 잘 설명이 안 되지 않나. 너랑 헤어지는데 그 이유가 못생겨서 그렇다, 게을러서 그렇다, 뭐 그런 식으로 정리되는 게 아니지 않나. 그리고 그런 게 연기하거나 영화를 만들 때 더 재미있을 수도 있다. 남자의 가족을 보면 아버지는 상처했고 할머니도 혼자 산다. 다들 배우자가 없는 상태인데 어떻게 그런 설정이 나오게 됐나? 결국은 세 사람이 비슷한 어떤 상태라는 느낌이 든다. 할머니 부분이 특히 그랬는데 현재랑 너무 겹치는 게 아닌가 걱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연애하고 헤어지고 하는 과정이 다 다른 거 같아도 또 다 비슷하다. 유행가 가사를 들어보면 다 자기 얘기 같이 느껴질 때가 있고. 그런 데서 오는 공통점이 아닐까 싶다. 이번에도 남자 주인공이 노래부르는 장면이 있는데 아버지가 불렀던 노래를 부른다. 노래가사랑 영화내용이랑 비슷한 거 같다는 느낌도 들었고. 는 주인공의 죽음으로 끝난다. 이번 영화에선 할머니의 죽음이 나오는데 계속 죽음을 등장시키는 이유는 뭔가? 마치 우리 옆에서 죽음이 지켜보고 있지만 하나도 무섭거나 두렵지 않고 당연히 옆에 있어야 할 사람 같은 느낌이 든다. 주변의 누가 죽었을 때 생각이 많이 드는 것 같다. 평소 생활할 때도 누군가 없어지면 여러 가지 생각이 많이 드는 것 같고. 그랬을 때 감정이, 영화 만드는 데 에피소드로 많이 등장하기도 한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자꾸 집을 나와 기차역을 찾는 부분은 허우샤오시엔의 <동년왕사>를 연상시킨다. 단순히 설정이 비슷하다는 게 아니라 <동년왕사>나 <봄날은 간다>가 공유하고 있는, 시간에 대한 어떤 태도가 느껴진다는 점에서 그렇다. <동년왕사>에서 할머니가 본토로 가려는 부분은 비슷하다.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만드는 게 어려웠는데 옛날에 대한 기억, 남편에 대한 기억을 찾아나선다는 점에서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나오게 됐다. 영화에 등장하는 가족의 행동이나 모습을 보면 서로를 진심으로 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살면서 가족에 대해 애정을 느끼는 만큼 실망도 하고 증오하기도 하고, 그렇게 따뜻하게만 느껴지지는 않지 않나. 가족끼리 대화가 잘 안 되는 건 다 마찬가지일 거다. 영화를 찍으면서도 그런 생각 들 때가 많은데 그러다가도 지쳐서 오랜만에 집에 돌아가면 조금씩 위안을 해줄 수 있는 것 같다. 친구가 해주는 위안이 아닌, 내용이 뭔지는 잘 모르고 하는 위안이 있지 않나. 그건 개인 경험에서 오는 걸 수도 있는데…. 실제로 부모님하고 같이 산다. 시나리오 쓰다 오랜만에 집에 들어오면 느끼는 편안함이 있다. 그런 건 쉽게 변하지 않는다. 오즈 야스지로의 조감독을 하던 이마무라 쇼헤이가 “일본에 더이상 오즈 영화의 여자 같은 여성은 없다”며 반발했다던데 아마 당신의 영화를 본 누군가는 “세상에 그런 가족이 어디 있느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서로 아끼고 위하는 평화로운 가족 말이다. 어떤 답변을 할 수 있을까? 사회적 현상을 갖고 이야기하면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거다. 어떤 통계를 들이대면 가족의 붕괴나 변화가 심각하겠지만 개인적인 차원에서 내가 느끼는 건 다른 거 같다. 내가 사회적 현상에 관심이 있어서 영화를 만드는 게 아니라서 그런 차이가 나오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선 오즈 야스지로 영화의 가족과 비슷한 점이 많다. 서로 위하는 것도 그렇지만 배우자가 없는 사람들이 가족 구성원이라는 점도 그렇고. 어떻게 그렇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랑 똑같은 얘기, 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했다. 와 같은지 다른지는 완성해놓고 봐야 알 거 같다. 영화형식에서 달라진 점은 없나. 카메라 움직임이 많아졌다거나 하는. 영화형식 면에서 달라진 점도 별로 없는 거 같다. 형식을 정해놓고 찍는 건 아니고 찍으면서 만들어가는 건데 여전히 움직임이 별로 없다. 소리에 굉장히 신경을 쓰는 영화일 텐데 소리를 통해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어떤 효과를 낼지 궁금하다. 에서 사진이 주는 느낌이 이번엔 소리로 재현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렇게까지 신경쓰진 못한 것 같고 그냥 자연스럽게 나오는 소리가 될 거다. 오승욱 감독이랑 영화보러 갔다가 “우린 구석기시대 감독이야”라는 말을 한 적 있다. 요즘 워낙 대단한 테크닉을 보여주는 영화가 많아서 소리에 관해서도 굉장한 테크닉이 발휘된다. 물론 그런 점 때문에 이번 영화를 만든 건 아니다. 작은 소리도 재미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꼭 특별한 소리나 큰소리가 필요한 건 아니다. 그냥 둘이 소리 채집하러 갔다가 아무 말도 안 하고 소리만 듣고 있는 장면이 있는데 그런 것도 좋았다. 남녀가 그냥 그러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연애감정이 생길 거 같다. 실제로 대나무 숲에서 나는 바람소리를 녹음하는 장면을 찍을 때, 그곳에 사는 한 아주머니가 “힘들 때 대나무 숲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편해진다”는 말을 했다. ‘그럴 수 있겠구나’ 싶었고 영화에서도 그런 걸 담으면 되지 않겠나 싶다. 배우 캐스팅에 대해 묻고 싶다. 유지태, 이영애씨를 캐스팅했는데. 남자 주인공의 경우 부드러움과 맑은 느낌이 있었으면 했는데 유지태씨한테 그런 걸 발견했다. 여자는 어떤 사람일까, 상상했는데 잘 안 떠올랐다. 그러다 이영애씨를 만났는데 시나리오에 잘 표현되지 않은 어떤 느낌까지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몇 시간 동안 얘기했는데 잘 맞는 느낌이 들었다. 아버지로는 박인환씨를 캐스팅했는데. 박인환씨가 TV 인터뷰하는 걸 봤는데 좋은 느낌을 받았다. 패러디는 아닌가? 김지운 감독은 <반칙왕>에서 신구씨를 캐스팅해서 패러디를 시도했는데(웃음). 농담인 줄 알았는데 김지운 감독 인터뷰 보니까 정말이더라. 나도 패러디라고 해버릴까(웃음). 캐스팅하기 전에 김지운 감독한테 박인환씨 캐스팅하려는데 어떠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음악은 이번에도 조성우씨가 하는데 어떤 음악을 주문했나. 영화에 대해 가장 많이 얘기하고 날 아주 잘 아는 친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냥 같이하기로 했다. 음악은 나중에 나와봐야 알 거 같다. 때는 ‘사진사가 자신의 영정사진을 찍는다’는 모티브로 출발한 영화라고 말했다. <봄날은 간다>의 모티브를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어떤 인터뷰에 보니까 ‘할머니가 <봄날은 간다> 노래를 부른다’는 데서 시작한 영화라고 했던데. 모티브는 여러 가지다. 도 내가 어린 여자를 좋아해서 시작한 영화일 수도 있고(웃음). 물론 농담이지만. 할머니가 노래를 부르는 데서 시작한 것일 수도 있지만 어떤 여자를 만나서 헤어지기까지를 그리는 데서 시작한 것일 수도 있다. 둘이 만나서 뭔가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 느끼는 걸 담아야 하는데 그게 어려운 부분이었다. 뭔가 사랑하는 것이 사라진 다음에, 기억만 남아있을 때 느낌, 기억조차 사라진 다음의 느낌, 이런 걸 담아보려 했다. 뭐랄까. 젊었을 때 고운 피부가 사라진 다음에, 뭔가 없어진 다음에 그것을 생각하며 느끼는 감정들, 그게 재미있지 않을까 싶더라. 아주 열정적으로 사랑하다가 헤어지면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달라지는데 젊었을 땐 실연하면 그런 느낌 겪지 않나. 그게 어떻게 바뀌는지, 나중에 돌이켜보면 어떤 감정이 남는지 그런 게 담겼으면 싶더라.글 남동철 기자 문석 기자 사진 손홍주 기자 ▶ 베일벗는 <봄날은 간다> ▶ <봄날은 간다>는 어떤 영화 ▶ <봄날은 간다> 한국·홍콩·일본 합작 투자금 회수, 걱정 안 한다 ▶ <봄날은 간다> 허진호 감독 인터뷰

서문을 읽는 즐거움

서문의 즐거움을 아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책을 몇권 훔쳐본 자다. 책을 자주 읽지 않는 사람, 그럴 의지와 필요성이 결여된 사람은 책을 훔치지 않는다. 이따금 책이 필요할 때 그들은 훔친 사람의 것을 빌리거나 아니면 제 돈 들여서 살 뿐이다. 책을 훔치는 자는 읽으려는 마음이 앞서는 바람에 다소간의 절차를 무시하거나 잊어버린 사람이다, 라고들 변명한다. 그러나 솔직히 책을 훔치며 살아간다는 것은 약간의 악취미와 더불어 빈곤한 호주머니, 그리고 독서욕보다는 소유욕이 앞서는, 그렇게 하기 위해 도서관보다는 서점을 자주 찾고, 실질의 숭상을 위하여 일단 그것을 들고 튀는 확신범일 뿐이다. 책을 훔치는 사람들은 봄가을의 짧은 시간을 아쉬워한다. 반팔 셔츠의 여름은 책을 은닉하기가 어렵고 겨울은 그 반대로 몸놀림이 둔하다. 물론 대단한 공력의 전문가들은 전지구적인 냉온방 시스템의 발전을 핑계로 어떤 계절이든 가벼운 점퍼 차림으로 슬슬 운동 삼아 큰 서점을 한 바퀴 돌지만 그래도 춘추의 호시절은 책을 훔치려는 자, 아니 책을 진정으로 음미하는 자에게 더없이 즐거운 계절이 된다. 당신 얘기 아니냐고 윽박지를 사람을 위하여 미리 권한다면 미문의 칼럼니스트 고종석이 쓴 소설 <기자들>을 읽기 바란다. 아, 물론 내 얘기가 아니라는 건 아니다. 책을 많이 훔쳐본 사람들은 출판사와 저자, 그리고 서문과 발문을 기막히게 기억한다. 아무리 변명해도 몰염치한 도둑질임에 틀림없으니 담대한 마음과 용의주도함을 두루 갖추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 노력을 들여 한권 달랑 들고 나올 수는 없어서 이책 저책을 두루 살핀다. 남아도는 게 시간이지만 내용까지 다 읽지는 않는다. 그렇게 될 경우 훔칠 이유가 영영 사라질 뿐만 아니라 읽고 싶은 책이 많아서 단 한권에 집중하기가 어렵다. 서문과 발문에 대한 탐사를 통해 최종의 목표량을 정한다. 그러다보면 결국 두세권의 획득물에 지나지 않음에도 수십권의 서문, 발문, 편집자주, 해설 따위를 두루 섭렵하게 되는데 이 바람에 내공이 약한 치들은 읽은 책과 읽지 않은 책, 그러니까 훔친 책과 뒷일로 미룬 책에 대한 기억이 뒤죽박죽 되는 수가 많다. 이제는 먼 일의 기억이 되고 말았지만…. 서문이 기막힌 책을 단 한권 추천한다면 당신은 어떤 책을 꼽겠는가. 니체의 <즐거운 지식> ‘제2판 서문’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방대하고 난삽한 그의 사상에 있어 이 책은 상대적으로 짧고 매혹적인 아포리즘으로 이뤄졌으니 형이상의 파괴자에게 다가가기 썩 수월한 뿐만 아니라 그 서문이 참으로 기막히다. ‘이 책은 한개 이상의 서문이 필요할 수도 있다’, ‘이 책은 얼음과 눈을 놀리는 바람의 언어로 씌여졌다’는 식의 에스프리가 맛있다. 어쩌면 장 그르니에의 <섬>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마도 당신은 70년대 이전에 태어났을 것이다. 그 책은 저 80년대의 정본은 아니었다. 위력적인 고딕체의 책들 한편에 물러서 있던 것으로 아마도 최루탄에 뒤범벅이 된 채 도망을 치다 무리와 흩어지는 바람에 잠시, 정처잃은 마음을 정돈하기 위해 들렀던 헌책방에서 당신은 정병규 디자인의 <섬>을 보았는지 모른다. 틀림없이 당신은 그르니에의 기이한 성찰보다는 표지 한구석에 적혀 있는, ‘알제리에서 처음으로 이 책을 읽었을 때 나는 스무살이었다’는 카뮈의 말에 매혹당했을 것이며 곧 표지를 펼쳐 카뮈의 서문에 한참이나 눈을 줬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 독자들 중의 한 사람이고 싶다. 길거리에서 이 조그만 책을 펼쳐본 후 겨우 그 처음 몇줄을 읽다 말고는 다시 접어 가슴에 꼭 껴안은 채,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정신없이 읽기 위하여 나의 방에까지 한걸음에 달려가던, 나는 그날의 저녁으로 되돌아가고 싶다.’ 카뮈가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정신없이’ 읽느라 책값을 제대로 치렀는지는 의문이지만 아마도 우리의 집단적 기억에 박혀 있는 매혹적인 서문임에 틀림없다. 그의 서문은 그르니에를 위한 것이자 먼 곳을 위한 동경, 아픈 현실에 대한 애증, 작고 나약한 것에 대한 성찰로서 값지다. 기필코 비80년대적이면서 동시에 그 시절의 속살에 대한 환영이기도 한 셈이다. 그렇다면 문학평론가 김윤식의 서문들은 어떤가. 관습적인 정년 퇴임 논총을 사절하자 후학들이 100권을 헤아리는 그의 책 가운데 서문만을 따로 모아 <김윤식 서문집>을 만들었다고 하니 최근의 뼈아픈 일에도 불구하고 서문만으로 또 한권의 초소를 지을 수 있는 그의 놀라운 지적 성채에 대하여 우선 기가 질린다. 그뿐일는가. 서문의 즐거움은 모든 저자들의 세상을 향한 용기백배한 심경을 음미하는 것에 다름 아닐진대 이제는 고전이 된 1973년 <한국문학사>의 초판 서문에서 김윤식은 김현과 더불어 이렇게 적지 않았던가. ‘문학에 대한 경멸과 白手에 대한 조소가 그 어느 때보다도 깊어져가고 있어 보이는 지금, 인간 정신의 가장 치열한 작업장인 문학을 지킨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더할 수 없이 귀중한 자기 각성의 몸부림이다. 문학이 없는 시대는 정신이 죽은 시대이다.’ 아멘. 정윤수/ 문화평론가

우연이 만든 공동체

Grand Canyon 1991년, 감독 로렌스 캐스단 출연 케빈 클라인 6월24일(일) 낮 2시 로렌스 캐스단 감독에겐 불명예스런 딱지가 늘 붙어다닌다. 장르영화의 제조기라는 거다. 하지만 그에겐 천부적인 이야기꾼의 재능이 있다. 로렌스 캐스단이 한때 <스타 워즈> 시리즈의 <제국의 역습>과 <인디아나 존스> 각본가였다는 건 유명한 일화다. 이야기꾼의 재능을 입증하듯 감독은 다양한 장르영화를 시도했고 흥행에서 매번 괜찮은 성적을 거두곤 했다. 필름누아르 스타일을 차용한 <보디 히트>(1981), 현대판 서부극 <실버라도>(1985), 코미디물인 <바람둥이 길들이기>(1990), 그리고 로맨틱코미디인 <프렌치 키스>(1995)에 이르기까지 로렌스 캐스단은 여러 장르영화에 손댔다. 로렌스 캐스단에게 독창적인 스타일이 발견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장인적인 기질보다는 그때그때 관객 취향이나 유행의 흐름을 뒤따르는 예리한 눈썰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로렌스 캐스단 감독에게 불행한 일이라면 연출 데뷔작 <보디 히트>가 그에겐 ‘최고작’이기도 하다는 점. 비평적 관점으로 보건대 필름누아르의 현대적 변형을 시도한 <보디 히트>만한 수작을 이후의 필모그래피에서 발견할 수 없는 점은 아쉽다. 감독의 1991년작인 <그랜드 캐년>은 베를린영화제 수상작이다. <그랜드 캐년>은 마치 로버트 알트만의 <숏컷>(1993) 예고편 같다. LA에서 살고 있는 다양한 인물모습을 하나씩 펼쳐보이므로. 변호사 맥은 흑인들이 사는 슬럼가에서 차가 고장나는 사고를 겪는다. 견인차를 끌고 나타난 흑인 사이먼이 우연히 맥을 돕는다. 둘은 금세 친해진다. 맥의 아내는 겉보기엔 평온한 가정의 주부지만 불안감을 가슴 한편에 지니고 산다. 영화 제작자인 데이비스는 폭력적인 B급영화를 만들곤 하는데 중요하게 여긴 장면이 필름에서 삭제되자 분개한다. 그런데 그는 불운하게도 총기사고를 당한다. <그랜드 캐년>엔 우연의 모티브가 연이어 중첩된다. 우연에 우연이 겹치면서 대도시에서 살고 있는 인물들이 관계를 형성하고 하나의 공동체를 만드는 과정이 전개되고 있다. 양상이 그리 간단치는 않다. 영화에 나오는 인물은 하나같이 결핍감을 지닌 채 살아간다. 맥은 아내와의 성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의 아내는 가족들이 언젠가 떠나갈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불안하다. 사이먼은 딸이 있는데 귀머거리다. 영화제작자 데이비스는 총기사고 이후 자극적인 영화를 만들었던 자신의 인생을 골똘히 되돌아본다. <그랜드 캐년>은 그리 심각한 드라마를 구성하지는 않는다. 조금 ‘확대된’ 가족드라마로서 무리없는 결말로 직행한다. 맥과 사이먼 등은 지진 같은 자연재해나 개인적 곤란을 경험하게 되지만 서로 의지하면서 헤쳐나간다. <그랜드 캐년>은 사회 환부에 관한 통찰보다는 미국 중산층의 위기감과 그들의 연대의식을 경쾌한 에피소드로 꾸며내고 있다. 게다가 각각의 플롯이 매끈하게 해결되는 과정은 이 영화가 현대 미국사회의 ‘치료’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낳기도 한다. <그랜드 캐년>에선 케빈 클라인 외에 스티브 마틴, 대니 글로버, 메리 맥도넬 등의 스타가 출연한다. 자신들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한 연기자들의 앙상블 연기는 <그랜드 캐년>이 지극히 할리우드적인 영화임을 증명하고 있는 듯하다. 베를린영화제가 이 영화에 금곰상까지 주면서 융숭하게 대접했던 이유가 궁금해진다. 김의찬/ 영화평론가

안시에서 만난 사람들

‘맑은 공기, 시원한 바람, 그리고 풍성한 애니메이션.’ 지난 6월5일부터 9일까지 프랑스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 갔다왔다. 오래 전부터 가장 보고 싶었던 행사였지만 그동안 늘 마음만 앞서다가 드디어 25회째를 맞는 올해 페스티벌을 보러 갔다. 안시는 파리에서 테제베(TGV)로 4시간 가까이 가야 하는 스위스 접경에 위치한 작은 휴양도시이다. 부지런히 걷는다면 하루면 다 돌아볼 수 있는 아담한 규모, 평소에는 휴양 온 사람들 외에 외지 사람들을 쉽게 만나기 어려운 한가로운 알프스 자락의 마을이다. 그런 한적한 곳에 지난 4일부터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각국의 젊은이들과 작가들로 북적거리는 애니메이션 잔치가 열린 것이다. 올해 개인적으로 안시페스티벌에 가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는 가장 좋아하는 작가인 미하엘 두독 드 비트의 <아빠와 딸>을 비롯해 필 몰로이 등 그동안 이 지면을 통해 소개했던 많은 작가들의 작품이 경쟁부문에 올랐기 때문이다. 다른 애니메이션페스티벌이 그렇듯, 안시 역시 외양만 봐서는 국제적인 행사가 벌어진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차분하다. 사람이 많이 모이기는 하지만 아카데미나 칸영화제처럼 화려한 조명과 이벤트가 이어지는 그런 요란스러운 잔치와는 거리가 멀다. 히로시마페스티벌도 조촐하고 조용하지만 안시 역시 견본시가 열리는 MIFA 행사장을 제외하고는 덤덤한 분위기이다. 대신 문자 그대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애니메이션만 실컷 볼 수 있는 그런 자리이다(첫 상영이 오전 10시30분, 마지막 상영이 밤 11시로 정말 원없이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작가들이 작품만 출품하는 히로시마에 비해 안시페스티벌에서는 유럽에 위치했다는 지리적 이점 때문인지 몰라도 말로만 듣던 작가들을 대거 만날 수 있다. 특히 그동안 이 지면을 통해 소개했던 작가들을 직접 만난다는 것은 애니메이션 팬으로서 더할 수 없는 즐거움이었다. 작품 시사를 마치고 행사장 앞에 서 있거나 노천 카페에 앉아 있으면 그동안 사진이나 작품으로만 접했던 거장들의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핀 스크린’의 대가 자크 드뤼엥, 아드만 스튜디오의 피터 로드, <무법자>의 아비 페이조, <줄타기 댄서>의 라이문트 크루메 등이 편한 복장으로 내 옆에 있는 것이다. 엽기적인 개그로 유명한 웨일즈의 작가 필 몰로이는 작품의 시니컬한 분위기와는 달리 마음씨 좋은 아저씨 같았고, <가발제작자>의 스테판 쉐플러는 수줍고 차분한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특히 몇몇 작가들과 직접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자리는 내가 왜 안시에 왔는지 그 의미를 새겨볼 수 있는 뜻깊은 순간이었다. 모두 청바지에 셔츠를 걸친 편한 복장이었지만 저마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아빠와 딸>의 미하엘 두독 드 비트는 소탈하면서도 가식없는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평소 피아노 연주를 즐긴다는 말을 들으며 왜 그의 영상이 음악과 그처럼 절묘하게 어우러졌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만난 기념으로 그가 페스티벌 도록에 사인과 함께 그려준 <수도승과 물고기>의 그림은 전혀 기대치 않았던 선물이었다. 그런가 하면 <돌연변이 외계인>의 빌 플림턴은 작품의 떠들썩한 분위기에 어울리게 시종일관 밝고 유쾌한 분위기를 지닌 정력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얼핏 코믹스러워 보이는 그의 이면에는 독립 작가로서의 자부심과 고집이 숨어 있었다. <러그렛츠>와 같은 TV시리즈를 감독하면서도 <날으는 난센>과 같은 인상적인 단편을 발표했던 이고르 코발료프는 냉소적이면서도 섬세한 감수성이 이야기에서 묻어났다.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애니메이션페스티벌이 열린다. 올해는 우리의 애니페스티벌에서도 그런 작가들과의 즐거움 만남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재범/ 애니메이션 칼럼니스트 oldfield@chollian.net

우리는 ‘안티조선’을 외친다!

최근에 발매된 가장 충격적인 대중음악 앨범을 두개만 꼽으라면, 얼마 전부터 타이틀곡 <새>를 통해 이른바 엽기 열풍을 불러일으킨 싸이(PSY)의 첫 번째 앨범과 지난해 5월에 발매되었던 DJ DOC의 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싸이의 경우야 뭐 충분히 받아들이고 넘길 수 있는 정도의 충격이었지만, DJ DOC의 경우는 강도가 좀더 컸었다. 특히 큰 반향을 불러왔던 <포졸이>보다는 언론과 검열 그리고 인기에만 영합하는 다른 연예인들에 대한 욕설로 점철된 가, 그 가사의 직설적인 면에 있어서는 훨씬 충격적이었다. 를 듣고나서 DJ DOC를 ‘수준 낮은 날나리 래퍼들’이라고 치부해왔던 것이 개인적인 편견이었음을 깨달았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여하튼 인기를 위해서는 스포츠지를 포함한 이른바 대중언론과의 관계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한국의 댄스그룹이, 욕설을 통해 극렬하게 그들을 비난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 놀라운 일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그래 써라 씹어라 날려대라 그 똑똑한 그 잘난 머리 펜 잘 굴려라’라며 그들과의 절연을 선언하는 DJ DOC의 모습에서는, 음악을 듣는 이들로 하여금 묘한 전율과 쾌감을 동시에 느끼게 만드는 마력이 발견되기까지 했을 정도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음반을 계기로 DJ DOC의 행보 자체가 이전과는 많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인디 록그룹과 합동콘서트를 여는가 하면, TV 출연에 연연하지 않고 게릴라콘서트를 여는 그들의 모습에서, 서태지와는 또다른 차원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지켜가려는 젊은 대중음악인들의 건강한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DJ DOC만큼의 인기있는 그룹은 아니지만, 한때 주목을 끌었던 댄스그룹이 갑작스럽게 민중가수로 활동하고 나서서 주목을 끌고 있다. 그들의 이름은 Z.E.N. 지난해 8월 라는 타이틀곡으로 가요계에 데뷔해, 순위프로의 중위권까지 올라가기도 했던 Z.E.N은 세명의 여성과 두명의 남성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혼성댄스그룹이었다. 그들이 민중가수의 길로 접어든 것은 지난 4월10일 대우자동차노조에 대한 정부의 폭력진압이 문제가 된 즈음. Z.E.N의 최근 음악을 인터넷을 통해 공개하고 있는 민중가요 작곡가 김호철씨는, “민중가요를 부르겠습니다. 그동안 여의도를 중심으로 한 소위 상업가요판에 신물이 났습니다”라며 찾아온 Z.E.N을 보고 스스로도 놀랐다고 한다. 그렇게 민중가요계에 발을 내디딘 Z.E.N이 처음 선보인 민중가요는 대우자동차사건을 노래한 <그날 그 자리에서>. ‘그날 그 자리에서 너희들은 개자식…’이라는 가사가 대변하듯, 당시 경찰의 폭력진압에 대해 Z.E.N은 거친 랩으로 욕설을 퍼부어 네티즌들에게 충격을 선사했다. 당연히 Z.E.N의 이런 변신은 화제로 떠올랐고, 몇몇 신문들이 ‘댄스그룹 젠, 운동권 가수로 변신하나’ 혹은 ‘인기댄스그룹 젠, 민중가수 변신’ 등의 제목으로 이를 기사화하기에 이르렀을 정도다. 그 기사들에 따르면 첫 앨범을 내기 전부터 광주 5·18묘역을 참배할 정도로 의식이 있었던 Z.E.N의 맴버들은, 첫 번째 앨범이 상업적으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것을 바탕으로 랩과 힙합의 기본인 사회비판으로 돌아가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Z.E.N의 그런 시도를 그대로 믿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저 상업적인 전략에서 나온 일회성 해프닝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5월1일 노동절을 기해 <아빠와 전태일>이라는 노래를 발표한데 이어, 5월 말에는 광주민주화운동을 노래한 <종이 비행기>를 연달아 발표하면서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Z.E.N의 이런 변신이 일시적이 아니라는 확신이 네티즌들 사이에서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한편에서는 당연히 Z.E.N의 그런 노래들에 분개하는 세력들도 생겨났다. 인터넷을 통해 배포되는 노래의 특성상 짧은 시간 내에 확산된 반면, 이에 대한 반대세력들의 무차별적인 비난도 막을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이었던 것. 그렇게 ‘민중가수’로서 서서히 다시 알려지게 된 Z.E.N이 얼마 전에는 ‘우리가 안티조선을 외쳐야 하는 이유’라는 글과 함께 조선일보 및 몇몇 수구언론을 비판하는 두곡의 노래를 공개해 다시 화제가 되고 있다. 노래와 함께 공개한 글에서 그들은 ‘식민지시대에서 군사독재정권에 이르기까지 반민중적, 반역사적 행위와 극우행각을 일삼아온 조선일보를 비롯한 수구언론은 이제 언론권력화하여 우리가 반드시 무너뜨리고 가야 할 또다른 폭력이 되어버렸습니다’라고 자신들이 입장을 분명히 했다. 물론 가사가 다소 유아적이고 단선적이긴 하지만, <1등 신문>과 <날지 못하는 새>(부제: 좃선 닭타령)가 담고 있는 수구신문에 대한 비판은 과거 015B의 <제4부>와는 분명 차원이 다른 것이 사실이다. 문제는 담기는 가사의 내용과 상관없이, 곡 자체는 그다지 잘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사실. 또한 이 노래들을 만들어 공개하는 이들이 과연 지난해 TV에 출연하던 Z.E.N의 모든 맴버들인지 아니면 그중 몇몇만 참여한 것인지도 공식적으로 파악할 길이 없다는 점도 여전히 의구심으로 남는다. 하지만 Z.E.N의 변신과정이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음악의 배급통로가 생겨남으로 해서 이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들이 벌어질 수 있음을 환기시켜주는 좋은 예가 되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모쪼록 Z.E.N이 어떤 형식으로든 인터넷을 통해 데뷔한 민중가수로서의 활동을 성공적으로 계속하는 동시에, 비판의식이 강하게 담긴 성공적인 두 번째 앨범도 발매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철민/ 인터넷 칼럼니스트 ▶ <노동의 소리> Z.E.N 코너 http://www.nodong.com/ch_culture/song/group/zen.htm ▶ Z.E.N의 1집 앨범 http://user.chollian.net/∼psj121/album/zen.htm ▶ 안티조선 사이트 <우리모두> http://www.urimodu.com/

폭력, 신성남성제국의 종교

만화도 그렇다. 어떤 만화들은 군살 없는 몸매와 소박한 옷차림으로 다가와 상쾌한 향기를 전해주고 사라진다. 허영만의 <사랑해> 같은 작품이다. 보기에도 부담없고 본 뒤에도 뒤끝이 없다. 그렇지만 왠지 민숭민숭할 때도 없지 않다. 어떤 만화는 너무 수다스럽다. 주인공들의 대사는 빈칸을 찾지 못해 안달이다. 많은 열혈개그만화들이 그러하다. 그런데 오늘 만나게 될 만화들은 더욱 버겁다. 이 육체파의 만화들은 자신의 욕망을 주체하지 못해 무서운 에너지로 달려온다. 그 집요한 욕망은 때론 공포를 자아내기도 한다. 최근 국내에 발간돼 나온 <마징가 Z> <게타 로보> 등의 고전만화를 보면 나가이 고라는 만화가가 얼마나 인간의 욕망에 집요하게 매달려왔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는 원래 <파렴치 학원>이라는 학원개그만화에서 몰상식한 학생과 선생들이 벌이는 변태 대결로 악명이 높았던 만화가. 그림체는 어리숙했지만, 동시대의 ‘소년’ 독자들이 ‘한번 해봤으면’ 싶은 나쁜 짓거리를 매우 영리하게 그려나갔다. 막연하게 정의의 로봇이라는 향수로 <마징가 Z>의 만화책을 다시 쥐어본 성인 독자들도, 왠지 가슴이 뜨끔한 것을 느끼리라. 지금 봐서도 제법 과격한 살인장면과 느닷없는 벗기기 장면들이 줄을 잇는다. 나가이는 ‘자동차처럼 타고 달릴 수 있는’ 로봇으로 <마징가 Z>를 만들어냈고, 운전 면허도 없는 소년소녀 주인공들이 그 로봇을 타고 합법적으로 건물을 부수고 악당을 살해한다. 나아가 <데빌맨>에서는 악마와 합체한 인간소년이 그 악의 힘으로 인간을 지켜낸다는, 완벽한 신성모독의 세계를 열어보이기도 했다. 극단적 남성판타지, 법도 도덕도 없는 섹스와 폭력을 신성시하는 남성만화는 그 독자층을 점점 높이면서 더욱 그 강도를 더해갔다. <공작왕>이나 <북두신권> 같은 만화들은 완벽한 욕망의 배설 쇼를 벌이기 위해, 치외법권의 지역으로 서버를 옮겼다. <공작왕>은 동서고금의 귀신과 괴물들을 총출동시키며 그들에 의해 벌어지는 잔혹상을 즐기고, 또한 그에 맞서는 주인공들에게 정의로운 파괴 행동을 허락했다. 3류 포르노 배우의 교태로 유혹하는 여자와 ‘안아줘 아버지’라는 근친상간의 묘사까지 ‘귀신 들렸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용인한다. ‘퇴마(退魔)의 링’이 그들의 데스매치를 합법화하고 있는 것이다. <북두신권>은 파국의 폐허세계로 무대를 옮겨, 그곳에서 분명히 있을 법한 약육강식의 폭력과 동물적인 섹스를 열정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가공할 덩치와 무자비한 폭력성의 괴물들이 등장해 그 전투의 강도를 더욱 높여준다. 이와 같은 남성 세기말 판타지는 정말 표현과 상상력의 한계가 어디에 있을까 싶을 정도로 과격한 묘사들이 빈번히 등장한다. 비교적 최근작인 <전략 인간 병기, 카쿠고>는 이미 너무 많은 자극으로 인해 마비상태에 있는 남성독자들의 중추를 뒤흔들기 위해 강렬한 ‘역겨움’을 더하고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거대한 여괴물은 아름다운 여자들을 통째로 삼키고, 마음에 드는 남자의 얼굴을 입으로 찢어 젖가슴에 붙여둔다. 자신의 추함을 자랑스럽게 여기는지, 전투에 앞서 자신이 뼈째로 삼킨 인간들을 아랫도리에서 쏟아내기까지 한다. <북두신권>이나 <…카쿠고>에 등장하는 파국의 세계는 기존의 도덕을 무위로 돌리고, 생존을 위한 폭력을 합법화한다. 그러나 비슷한 설정에서 출발하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바사라> 등은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뒤의 작품들에도 생존을 위한 격렬한 전쟁의 장면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 표현은 훨씬 부드럽고, 따뜻한 동료애나 로맨스의 분위기도 찾을 수 있다. 말하자면 여성적인, 또는 남성적인 욕망에 덜 충실한 세기말 만화인 것이다. 폭력=삶에 대한 욕망? 한편 국내의 작품인 <남자 이야기>를 들여다본다면, 역시 파국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강렬한 폭력의 장면들이 등장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조직에 의해 통제된 힘이다. 여러 문파들이 대결을 벌이고 내부에서도 치열한 힘의 대결이 벌어지지만, 잘 짜여진 군사조직의 일원으로서 도덕적 한계를 쉽게 넘어서지 않는다. 도덕률 자체가 보수성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국내의 작품들이 일본과 비교해서 남성적 욕망의 분출이 덜하다는 것은 아니다. <아일랜드> 등의 작품에서도 퇴마를 동기로 한 충분한 폭력성을 느낄 수 있고, 대량생산되는 공장제 남성만화들에서도 자극을 위한 노력은 빠뜨릴 수 없다. 문제는 그 욕망의 형상화가 얼마나 독창적이고 의미있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최근 들어 남성적 욕망의 대변자로서 가장 굳건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베르세르크>의 미우라 겐타로일 것이다. <베르세르크>는 서구적 야만의 터전이라 할 수 있는 중세 고딕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십자군 전쟁을 연상케 하는 끝없는 전쟁의 지옥도에서 태어난 가츠의 삶은 ‘오직 살고자 하는 욕망’에 충실한 것이었다. 썩은 양수 속에서 발견된 그는 여섯살 나이에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칼을 든다. 그리고 양아버지로부터 학대받고 잔돈 몇푼에 남창 역할을 해야 하는 가혹한 시련은 그를 살인밖에 모르는 검은 전사로 만들어간다. 이후 그가 만나게 되는 악마와 인간의 성희(性戱), 천사의 탈을 쓴 초월자의 폭력적인 섹스는 어찌보면 그 세계에서는 당연한 것으로까지 느껴진다. 탁월한 상상력으로 건설된 이 견고한 남성의 세계에서 여성캐릭터들이 너무나 전형적인 역할을 하는 것도 당연해 보인다. 그렇다면 가장 여성적인 욕망의 만화는 무엇일까? 이명석/ 프로젝트 사탕발림 운영중 www.sugarspray.com

아련한 추억이여, 옛사랑이여!

<카사블랑카> O.S.T/ EMI 발매 1942년, 그러니까 2차대전이 한참 진행중이던 때에 개봉된 할리우드의 고전 <카사블랑카>는 잊을 수 없는 음악을 담고 있다. 작곡자 막스 스타이너는 그야말로 할리우드 영화음악의 기본 정석을 만든 거장으로서, 영화 <킹콩>에서 천재적인 영화음악가로 주목받은 이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같은 대작을 통해 최고의 영화음악가 반열에 오른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오스트리아 출신인 그는 드라마틱한 음악의 정밀한 구성을 통해 관객의 심리를 암시하고 유도하는 기능을 가진 전형적인 영화음악의 기초를 닦았다. 바그너의 음악적 전통을 물려받은 사람답게, 그는 ‘주제’ 선율의 상황에 따른 적절한 변주와 주인공들의 테마 선율이라 할 ‘라이트모티브’(leitmotive), 즉 유도동기의 도입을 본격화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후자를, 그리고 <카사블랑카>는 전자를 시도한 그의 가장 전형적인 스코어이다. 그러나 <카사블랑카>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노래는 스타이너의 것이 아니다. “키스는 키스일 뿐이고 한숨은 한숨일 뿐”이라는 유명한 가사가 들어 있는 <세월이 흘러도>(As Time Goes By)는 1931년 허먼 헵펠드가 만든 노래이다. 영화 속에서 루이 암스트롱의 흉내를 내는 흑인배우이자 가수인 둘리 윌슨이 샘으로 분장하고서 부른 이 노래는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측면을 돋보이게 만드는 키포인트이자 내러티브의 핵심이다. 이 노래는 지나간 날의 불같은 사랑이 불러일으키는 매력을 추억하도록 만든다. 또한 영화 속에 숨겨져 있던 로맨스가 표면화되도록 만드는 불씨이기도 하다. 이 노래를 타고서 릭(험프리 보가트)이 운영하는 ‘카페 아메리캥’에서 파리의 ‘오로르’ 카페로 시간이 거슬러올라가는 유명한 장면이 등장한다. 릭과 일자(잉그리드 버그만)가 사랑하던 옛 시절로 말이다. 서술상 과거를 밝혀주는 중요한 수법인 시간이동을 통해 관객은 이 영화의 가장 낭만적인 대목을 만난다. 이처럼 매력적인 주제 선율을 서술의 동인으로 삼음으로써 <카사블랑카>는 오랫동안 관객의 추억을 묶어두고 있다. 그것말고도, 이 영화에서 음악이 활용되는 방식은 여러 곳에서 주목을 끈다. 타이틀 롤과 더불어 맨 처음에 등장하는 스타이너의 테마도 매우 인상적이다. 아랍풍의 음계를 통해 카사블랑카의 이국적인 특성을 잘 살리는 테마가 흐르다가, 갑자기 프랑스 국가인 <라 마르세예즈>가 연이어 흐른다. 관객은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다. 어인 연결인가. 그러나 영화가 끝날 때면 맨 처음의 그 연결이 이 영화에서 쓰인 첫 복선이라는 걸 알게 된다. 또한 이 영화는 ‘서술의 현장’에서 흐르는 음악을 매우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 음악은 카페에 전속된 밴드가 연주하는 일종의 ‘현장음’들이지만 특별한 효과를 야기시킨다. 첫째는 일종의 대조법이다. 예를 들어 라즐로가 혁명투쟁에 대해 비밀결사 대원과 밀담을 나누는 동안에도 카페에서는 알 게 뭐냐는 듯 흥겨운 음악이 흐른다. 이러한 대조를 통해 관객은 더욱 긴장하게 된다. 또 유명한 가 연주되는 장면도 잊기 힘들다. “우울할 때면 탁탁 두드리며 노래해 봐요” 하는 이 노래가 연주될 때 배우들은 모두 관객이 되어 실제로 세번씩 테이블을 두드리며 노래를 듣는다. 그 장면에서는 ‘두겹의 관객’이 생긴다. 때는 전쟁중. 영화 속 카페에 모인 그 관객은 극장에 영화를 보러 온 관객의 감정이 이입되는 대상이다. 이러한 두겹의 관객을 통해 할리우드의 ‘관음증’이 내러티브상에서 정당화된다. 또 카페에 온 독일군 장교와 라즐로가 음악적으로 한판 붙는 장면. 라즐로는 독일군 장교의 노래에 저항하여 프랑스 국가를 부르도록 한다. 그 대목에서는 이 영화가 멜로물이면서도 2차대전을 현재형으로 담고 있는 영화라는 걸 생생하게 보여준다. 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

<흑수선> 거제도 촬영현장 공개

■ 배창호 감독의 액션미스터리스릴러 <흑수선>, 탄생에서 제작과정까지 “포로들은 줄을 서세요.” 철조망 사이로 돌멩이를 던지던 포로 100여명이 경비병들의 위협 사격에 우르르 흙바람을 일으키며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방금 전 가열차게 돌을 던지던 기세는 온데간데없고, 빨간 메가폰에서 흘러나오는 지시에 따라 차례대로 줄을 서는 모습이 양순하기 그지없다. 경남 거제시 신현읍 고현리에 위치한 거제포로수용소 유적관. 한국전 당시 친공포로들과 반공포로들 사이의 대립과 소요로 젊은 피가 흩뿌려졌던 그곳에서, 배창호 감독의 신작 <흑수선>의 촬영이 한창이었다. 50년이 지난 지금, 그 비극의 현장을 재현하고 있는 이들은 당시 포로들의 나이와 비슷한, 거제공고 1학년생들이다.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제법 비장한 얼굴들을 하고 있지만, 컷사인이 떨어지면 그들은 그냥 귀여운 철부지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거제시의 전폭적인 지원계획에 따라 동원된 이 어린 학생들은 촬영 짬짬이 땡볕을 피해 막사 안팎에 널브러져 있다가도, 안성기, 이정재, 이미연, 정준호 등 주연배우들이 눈에 띄면 너나 할 것 없이 한걸음에 달려가 사인을 요청했다. 기자의 취재수첩도 그 등쌀에 10여장이 뜯겨나갔고, 종이를 구하지 못한 학생들이 교복 자락에 사인받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2 0 일 걸 려 지 은 세 트, 2 분 만 에 불 타 6월11일, <흑수선>의 촬영은 거제포로수용소 유적관에 마련된 세트에서 종일 진행됐다. 이날 촬영은 포로들의 일상생활과 남로당 스파이 흑수선의 위장잠입 모습, 그리고 포로들의 수용소 탈출 기도신이었다. 모두 한 호흡으로 가기 어려운 군중신이지만, 어린 엑스트라들과 스탭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두세 테이크 안에 감독의 오케이를 받아냈다. 그래서인지 촬영장의 배창호 감독은 얼굴이 벌겋게 타고 목이 쉰 채로도 즐거워 보였다. “카아아앗! 오케이! 더이상 안 나와.” 호쾌한 오케이사인은 이튿날인 12일 밤 폐교 화재신을 찍을 때도 어김없이 터져나왔다. 폐교 세트는 기존의 건물에 함석을 입힌 뒤 합판 외벽과 양철 지붕을 올려 50년대 분위기로 ‘리노베이션’한 것으로, 영화상에서는 수용소에서 탈출한 포로들이 숨어들어가 생활하다가 화재와 총격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곳이다. 포로들과 무장 경찰들이 대치중인 극중 상황 때문인지, 곳곳에 대기중인 가스통과 소방차와 앰뷸런스가 주는 위압감 때문인지, 현장에는 전날 포로수용소 낮신보다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바람이 잠잠해진 뒤 점화가 시작됐고 재건축에 20일이 걸렸다는 이 세트는 단 2분 만에 검게 탔다. 무장한 채 포로들을 위협하는 전투경찰들, 불타는 학교건물, 청년단장의 선글라스에 비치는 불길. 밤새도록 촬영이 진행될 예정이었지만, 밤 9시에 시작된 촬영은 자정 무렵 “새참 오고 있다”는 배창호 감독의 따뜻한 인사로 마무리됐다. “저렇게 빨리 찍으면서도 버리는 신이 하나도 없다”는 게 제작자 정태원씨의 감탄. 한 시대를 풍미한 감독다운 노련함이 돋보이는 현장이었다. 배창호 감독의 <흑수선> 연출 계획이 처음 알려졌을 때, 그 작품이 40억짜리 블록버스터라는 점에서 화제가 됐다. 근래 자전적인 영화 <러브 스토리>를 찍고 흥행에 실패한 뒤로도 한국인의 정서를 영상화한 <정>을 3년에 걸쳐 게릴라식으로 완성 공개한 터라, 이제 그의 영화적인 열정과 자존심이 충무로의 ‘메인 스트림’과 화해하지 않고 또 못할 모양이라고 믿어버린 탓이다. 그런 배창호 감독이 90년대 흥행사 강우석 감독의 투자에,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비천무>를 만든 영화사 제작지원으로, 온전한 ‘대중영화’를 만든다는 소식은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배창호 감독의 답은 의외로 단순 명쾌하다. “바로 지금 하고 싶은 영화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특히 언론은 나에 대해 드라마틱하게 쓰는 걸 너무 좋아하는 것 같다.” <꼬방 동네 사람들> <고래사냥> <깊고 푸른 밤> 등을 내놓은 80년대 최고의 흥행 감독에서, 90년대 가난한 작가주의 감독으로, 그리고 다시 주류로 돌아와 블록버스터를 찍고 있는 자신의 행보에서 변화의 동기를 찾으려 하지 않고 그 진폭만을 과장해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이다. 배창호 감독은 “그때그때 하고 싶은 작품을, 어울리는 방식으로 찍었을 뿐”이라고 일갈한다. <흑수선>도 ‘당연히’ 지금 하고 싶고 할 필요를 느낀 작품이라서 하게 됐다고. 장르영화로 돌아왔지만, 작품 색깔은 전과 다르지만 “관객을 울리는 감동적인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전작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배 창 호’ 란 이 름 만 으 로, 제 작 자 와 투 자 자 의 기 투 합 <흑수선>은 연쇄살인사건의 내막에 한국전의 상흔을 숨겨놓은 복합장르영화다. 오 형사(이정재)는 의문의 살인사건을 추적하다 50년 묵은 일기장을 발견한다. 그것은 흑수선이라는 암호명을 썼던 남로당 스파이 손지혜(이미연)의 기록이다. 오 형사는 손지혜의 기록을 통해 피살자가 당시 탈출 포로 검거에 나섰던 청년단장과 지서 주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비전향 장기수로 최근 출감한 손지혜의 옛 연인 황석(안성기)이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는 사이, 손지혜와 함께 탈출하다 총살당했다던 인민대장 한동주(정준호)가 일본에서 사업가로 성공해 사건 발생 무렵 방한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이들 모두 연쇄살인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지만 범인은 라스트에 이르러서야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한국전이라는 배경으로 젊은 관객에게 무겁고 고루하다는 느낌을 주지 않도록, 영화는 ‘누가 범인이냐’를 함께 추적해가는 미스터리 스릴러의 골격을 갖추고 있다. 현재와 과거가 지속적으로 엇갈리면서 강도높은 액션과 애틋한 멜로의 에피소드들이 보조를 맞춰나갈 예정. 회를 거듭하면서 액션의 규모가 커지고, 멜로 요소가 추가되는 등 처음 시나리오와는 그 분위기와 디테일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이제까지 촬영한 오토바이와 자동차 추격신, 비오는 숲 속의 결투, 불타는 폐교 내부에서 벌어지는 총격신 등을 중심으로 제작발표회에서 공개한 약 5분 길이의 예고편은 감독과 배우들이 흡족해 할 정도로 화려하고 역동적이라, 1000컷에 달한다는 ‘완성품’에 대한 기대와 궁금증을 더욱 증폭시킨다. <흑수선>에는 약간의 탄생 비화가 있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로 이명세 감독의 화려한 컴백을 도왔던 태원엔터테인먼트의 정태원 사장은 오래 전부터 다음 타자로 내심 배창호 감독을 점찍어두고 있었다고 한다. “영화 한편 같이하자고, 내가 배 감독님을 쫓아다녔다. 전체적인 드라마를 보는 눈이 정확하시니, 물질적인 지원을 하면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정태원 사장이 내민 첫 번째 카드는 만화 <신의 주먹>을 액션영화로 만들어보자는 것. 배창호 감독은 “너무 커머셜하다”며 난색을 보이다가, 한두달 뒤 <하이웨이>라는 영어 시나리오를 들고와 미국에서 영화를 해보고 싶다고 밝혔고, 이에 정태원 사장이 한 미국 영화사로부터 제작투자를 받기로 했다. 진행에 가속이 붙는가 싶었던 지난 12월, 정태원 사장은 미국 LA에서 만난 배창호 감독으로부터 그 사이 한국에서 꼭 한번 해보고 싶은 영화가 생겼다며 건네받은 시나리오 <흑수선>에 반했다. “액션미스터리스릴러이면서도, 그 안에 우리의 정서가 담겨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반드시 된다”는 확신을 가졌고 여기에 시네마서비스 강우석 감독이 투자자로 의기투합하게 됐다는 것. 강우석 감독처럼 배우들도 ‘배창호’라는 이름만으로도 출연을 약속했고, 이후 캐스팅과 헌팅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면서 3월 중순 크랭크인하기에 이르렀다. 제작 규모 40억원으로 출발했지만 거제시와 일본 야마가타현의 지원을 받는 행운도 따라, 결과적으로 통산 50억가량으로 덩치가 불어난 상태. 거제시는 관광상품으로 개발할 목적으로 포로수용소 유적관의 일부와 폐교를 영화 세트에 맞게 재건축해줬고, 일본 야마가타현도 시 홍보 차원에서 로케이션에 드는 비용 전액을 대기로 했다. “한국영화의 위상이 많이 높아졌다”며 배창호 감독이 싱글거릴 만하다. 치 밀 한 미 장 센, 비 주 얼 에 승 부 한 다 “<황진이>부터 의도적으로 스타일을 없앴지만 이번엔 임팩트가 강한 비주얼을 만들려고 한다”는 각오대로, 배창호 감독은 젊고 새로운 영상을 위해 무던히 공을 들이고 있다. 촬영감독도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의 김윤수 기사로 젊어졌고, 프로덕션 디자이너는 불의 미장센을 짜본 <리베라 메>의 강승용씨가 맡고 있다. 이 밖에 ‘비주얼 디렉터’라는 낯선 크레디트가 있는데, AFI 출신의 신예 김현성씨가 그 역할을 하고 있다. 배창호 감독을 도와 색깔과 조명과 앵글 등 미장센의 컨셉을 짜는 것이 그의 일인데 과거는 그린톤으로, 현대는 블루톤으로 가되 시각적으로 강렬한 느낌을 주기 위해 조명과 색감의 대비에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다고 한다. “감정과 심리가 실린 영상”이 그가 밝힌 <흑수선> 비주얼의 메인 컨셉이다. 이를테면 액션 스펙터클을 4배 고속으로 찍어 슬픈 느낌을 주고, 화재신이 위협적이거나 공격적으로 보이지 않도록 불길을 미리 계산하고 조절하는 식이다. 미장센에 각별히 신경을 쓰는 또다른 이유는 수퍼 35mm 촬영으로 시네마스코프 화면 비율을 구현하려 하기 때문.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국내 최초로 시도됐던 이 촬영 기술은 “와이드로 펼쳐 보이기 때문에” 로케이션 촬영이나 군중신 등에서 스펙터클한 맛을 살릴 수 있게 된다. 6월20일경 거제 촬영을 마칠 예정이지만, 남은 분량이 75%로 아직 갈 길이 멀다. 지리산 대신 해남 두륜산에서 빨치산 토벌작전을 찍고, 서울역 돔 위에 올라가 라스트신을 찍고, 8월쯤 야마가타현에서 한동주와 오 형사의 대결신을 찍어야 한다. 11월 개봉을 맞추려면 빠듯한 일정이다. 쉽지 않은 촬영이지만 배창호 감독은 지금 잔뜩 신이 나 있다. 제작 발표회가 있던 날, 배창호 감독은 참석자들에게 일일이 술을 권하고 자진해서 노래도 한 가락 뽑아냈다. 모두 ‘앵콜’을 외쳤다. 그건 배창호 감독이 그려낼 ‘대형벽화’가 어떤 모습일지, 그 신명나는 붓놀림에 ‘기대’를 실어보겠다는 뜻이었으리라. 거제도=글 박은영 기자·사진 정진환 기자 ▶ <흑수선> 거제도 촬영현장 공개 ▶ <흑수선> 배창호 감독 인터뷰

속편영화의 전략과 전술

■ 걸작 프랜차이즈 <에어리언> 시리즈부터 <쥬라기 공원3>까지, 할리우드 후속작들의 모든 것 <그리스2> <죠스2> <마이걸2> <마이키 이야기2> <배트맨 포에버>…. 이 썰렁한 제목들의 공통점은, 전편의 빛나는 업적을 송두리째 무너뜨린 속편이라는 점이다. 전편의 소재와 주제, 때로는 감독과 주연배우까지 고스란히 물려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참담한 실패를 맛본 이유는 무엇일까. 그대로 따라하기만 해도 관객이 반길 것 같지만 생각과 달리 속편 만들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웨스 크레이븐의 <스크림2>에 영화과 학생들의 토론장면이 나온다. 전편보다 나은 속편은 무엇이 있는가. <대부2>를 던져놓고는 뒷말을 잇지 못한다. 누군가 <제국의 역습>을 떠올리지만 바로 ‘삼부작의 두 번째’라고 일축된다. 주관에 따라 약간씩 다르기는 하겠지만 전편의 명성에 부합할 만한 속편을 만들기는 꽤 힘든 일이다. 성공보다는 실패가 더 많다. 제임스 카메론은 ‘속편의 제왕’이란 닉네임을 갖고 있지만, 관객의 열렬한 지지를 받은 <에이리언2>나 <터미네이터2> 역시 ‘작품성’으로는 전편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리우드는 끊임없이 속편에 집착한다. 올해 여름 시즌만 해도 <미이라2>에 이어 <쥬라기 공원3> <닥터 두리틀2> <러시 아워2> <아메리칸 파이2> <무서운 영화2>가 줄지어 서 있다. 리메이크도 일종의 속편이라고 한다면 <혹성탈출>과 <롤러볼>도 있다. 속편 제작에는 메이저영화사가 더 열을 올린다. 최근 소니 컬럼비아는 거의 속편 전문 제작으로 방향을 굳힌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소니는 내년부터 <맨 인 블랙> <스튜어트 리틀> <마스크 오브 조로> <경찰서를 털어라> <미녀 삼총사> <아나콘다> <쥬만지> 등의 속편을 연이어 만든다. 조마조마한 졸작의 위험 성공한 영화의 속편을 만드는 일은 누구에게나 부담이다. 올해의 첫 속편 <미이라2>의 감독 스티븐 소머즈는 <미이라>가 성공하고 속편 제작이 결정되면서부터, 기존의 속편을 만든 감독의 실패를 거듭하지는 않겠다고 결심했다. “쉬운 일은 아니다. 일단 만들어보면 대부분의 속편은 실패하고 졸작이 된다. 나는 수없이 많은 성공한 속편과 실패한 속편을 봤다. 특히 <대부2>와 <나홀로 집에2>는 아주 유심히 봤다. 그리고 나에게 물었다. 뭐가 있는 거지? 결국 우리들은 속편 성공의 ‘열쇠’가 오리지널보다 좋은 스토리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관객에게 캐릭터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알려주어야 하고. 캐릭터가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새로운 모습을 보면서, 전편에서 그 인물에서 어떤 점을 좋아했는지 떠올리게 해야 한다. 단지 전작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관객을 혼란시키지 않으면서도 뭔가 신선한 전망이 있어야 한다.” <미이라2>에 ‘신선한 전망’이 있었는지는 의문이지만, 어쨌거나 스티븐 소머즈는 실패한 속편 감독이라는 악명은 피해가게 되었다. 개봉을 앞둔 <러시 아워2>의 브랫 레트너와 <아메리칸 파이2>의 제임스 B 로저스 감독 역시 조마조마하다. 브랫 레트너는 “사실 대단한 도전이다. 관객에게 벌써 봤던 거잖아, 라는 말을 듣고 싶지는 않다. 전작을 답습하면서 볼륨만 키울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전작을 넘어서고 싶다. 나 자신을 능가하고 싶다. 그렇지 않다면 왜 이런 고생을 하겠는가. 속편을 만들기 전에 나 자신에게 물었다. 전작에서 관객이 좋아한 것은 무엇일까. 관객에게 무엇이 먹혀든 것일까. <러시 아워>는 액션과 코미디의 균형이 절묘하게 맞았다. 하지만 속편까지 전작과 같다면 관객은 흥미가 없을 거다”라고 말한다. <러시 아워2>도 성룡의 액션과 크리스 터커의 코미디가 끌어가는 것은 분명하지만, 스릴러 분위기가 강할 것이라고 한다. 청소년의 성을 희극적으로 그린 <아메리칸 파이2>는 액션으로 메울 구석이 있는 <러시 아워2>보다 위험도가 높다. 과거의 청춘코미디 <포키스>와 <그로잉 업>은 속편으로 가면서 점점 한심해졌다. 제임스 B. 로저스는 “속편을 만들기로 하고 시나리오를 받아봤는데 모두 같은 캐릭터에 여전히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그런 방식으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점을 미래로 나아갔다. 제이슨 빅스는 대학에 들어갔고 방학을 맞아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전작의 모든 캐릭터를 다시 만난다. 여전히 전작과 비슷한 농담을 하지만 그들은 조금씩 나이가 들었고 경험도 조금씩 있다. 전작과 똑같은 영화라면 누가 보겠는가”라고 말한다. 같은듯 다른, 다른듯 같은 할리우드 사람이라면 속편의 위험은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든 함정을 피해가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곧 개봉될 <닥터 두리틀2> <무서운 영화2> <쥬라기 공원3>도 나름의 전략을 세우고 있다. <닥터 두리틀2>는 전작보다 스케일이 커졌다. 곰이 살고 있는 숲을 지키기 위한 두리틀의 모험이 벌어지니까 말하는 동물이 더 많이 등장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리사 커드로, 필 프록터 등 새로운 성우진도 투입했다. <무서운 영화2>는 전작이 난도질영화의 문법을 주로 패러디한 것에 비해, <엑소시스트> 같은 심령공포영화를 풍자할 계획이다. 감독은 여전히 키넌 아이보리 웨이언스다. 쥬라기 공원3>의 취약점은 감독이다. 이름만으로 흥행이 보장되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물러나고 <애들이 줄었어요> <쥬만지>의 조 존스턴이 이어받았다. 약하긴 하지만 조 존스턴도 가족용 액션영화에는 탁월한 실력을 발휘한다. 샘 닐은 여전히 등장하고, 윌리엄 H. 메이시와 테아 레오니 등이 출연한다. 2편부터 나온다는 말이 있었던 익룡의 출현이 <쥬라기 공원3>의 필살기인 듯. 팀 버튼의 <혹성탈출>은 속편은 아니지만 68년작의 리메이크다. 유명한 작품의 리메이크도 속편과 마찬가지로 관객에게 쉽게 어필할 수가 있다. 하지만 <혹성탈출>은 완전히 새로운 플롯과 인물, 그리고 전제를 가지고 있다. 폭스의 공동 회장인 톰 로스만은 “<혹성탈출>은 리메이크라고 할 수 없다. 이야기와 캐릭터가 완전히 새로운 것이다. 같은 것은 제목과 주제뿐이다. 원숭이가 지배하는 혹성은 물론 인간의 사회를 반영한 것이고, 그것을 풍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지구가 아니다. 원작의 결말에서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던 자유의 여신상도 없다. 완전히 새로운 영상과 분위기다. <혹성탈출>이 속편으로 보이지 않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케빈 스미스 감독의 <제이와 사일런트 밥의 역습>은 약간 비틀어진 속편이다. 제이와 사일런트 밥은 케빈 스미스의 데뷔작인 <클럭스>부터 최근작인 <도그마>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화에 잠깐씩이라도 출연했던 배역이었다. 신작에서는 그들을 주인공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펼친다. 속편의 매력과 고민 할리우드가 속편에 혹하는 첫 번째 이유는 돈이다. 올 여름 시즌의 첫 속편인 <미이라2>는 2억달러를 넘어서는 성공을 거두었다. <미이라2>는 3일 동안 6800만달러의 수익을 올려 휴일을 끼지 않은 주말 성적에서 <스타 워즈 에피소드1>의 기록을 넘어섰다. 요즘 할리우드에서는 점점 더 마케팅 비용이 늘고 있어서 고민이다. 워낙 많은 영화가 개봉하고 여름과 겨울 시즌에 몰리기 때문에 관객에게 효과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느라 고심이다. 그런데 성공한 영화의 속편이라면 간단하게 인지도를 높일 수가 있다. 별다른 홍보가 필요없다. <무서운 영화2>는 여름 시즌이 시작되기 전에 어떤 홍보나 광고를 한 적도 없었다. 그러나 사전 조사에서 관객은 ‘올 여름에 꼭 보고 싶은 영화’의 하나로 <무서운 영화2>를 꼽았다. <쥬라기 공원3>의 입간판에는 제목과 거대한 익룡의 그림자밖에 없다. 그래도 관객은 그게 무슨 영화인지 단번에 알 수 있다. 부수입도 있다. 우선 속편이 개봉되면 전편의 비디오와 DVD의 판매와 대여가 늘어난다. 테마파크인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는 최근 문을 연 미이라 라이드가 쥬라기 공원 라이드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일반적으로 속편의 제작 비용은 전편보다 높아진다. 감독이나 배우에게 전편보다 높은 개런티를 줘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주연배우만이 아니다. <미이라2>의 조역인 존 하나조차도 이번에는 100만달러를 받았다. 스케일이 커지기 때문에 특수효과나 로케이션 비용도 많이 들어간다. 하지만 속편의 수익은 전편보다 줄어드는 게 상례다. 전편의 스탭과 배우들을 다시 모이게 하기 위해서 오랜 시간이 걸리면 관객의 흥미가 떨어질 위험도 있다. 그러나 속편을 만드는 사람들은 한결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쇠는 뜨거울 때 치라’는 것. 그래서 요즘에는 아예 처음부터 이나 <스타 트랙>처럼 프랜차이즈로 만들 생각으로 영화를 기획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엑스맨> <툼 레이더> <반지 전쟁>과 <해리 포터>처럼 원작이 있는 경우는 더욱 그렇다. 이 영화의 제작자들은 출연 배우와 계약할 때, 만약 속편을 만든다면 반드시 출연해야 한다는 규정을 만들었을 정도다. 배우로서는 하나의 시리즈에 고정적으로 출연하는 게 반드시 좋은 일은 아니다. 제임스 본드 역을 맡았던 배우들은 몇편 출연하고는 발을 빼고 싶어한다. TV드라마의 인기 배역을 그만두고 싶어하는 것과 비슷하다. <`X파일`>로 스타가 된 데이비드 듀코브니는 어떻게든 멀더 역에서 벗어나려 하다가 겨우 성공했다. 조지 클루니도 <`E.R.`>의 이미지를 벗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프렌즈>의 주연배우 여섯명은 모두 영화계를 두드리고 있지만 <스크림> 시리즈의 커트니 콕스와 <로미와 미셸의 동창회>에 나왔던 리사 커드로를 제외하고는 뚜렷한 성과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인기작의 이미지가 고정되어 있기에 다른 역할을 연기하면 관객이 오히려 낯설어 하는 것이다. 자신의 스타성을 충분히 인정받는 배우들은 개인적으로 캐릭터에 애정이 없는 한 굳이 속편에 매달릴 이유가 없다. 앤서니 홉킨스가 간절하게 <한니발>을 기다린 반면 조디 포스터가 뿌리친 이유도 그것이다. <한니발>은 전작에 비해 스탈링의 역할이 줄었기 때문에 조디 포스터가 기꺼이 동의할 리가 없었다. ‘스타’라면 하나의 시리즈물에만 매달려 자신의 이미지를 무한정으로 소비할 이유는 별반 없다. 하지만 이제 막 발돋움하는 배우라면 <엑스맨> 같은 시리즈물에 출연하며 지명도를 높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제작자로서도 프랜차이즈와 배우를 함께 띄우는 것이 효과적이다. 뛰어난 감독, 충성심 강한 관객 하지만 프랜차이즈는 무엇보다도 뛰어난 감독의 위대한 결과물로 탄생한다는 것이 톰 로스만의 생각이다. “<터미네이터>는 제임스 카메론 때문에, <배트맨>은 팀 버튼 때문에 프랜차이즈가 만들어졌다. 워쇼스키 형제의 <매트릭스>도 그렇게 될 것이다. 뛰어난 발상과 흡인력 있는 이야기, 그리고 탁월한 감독이 있다면 언제든 프랜차이즈의 탄생을 보게 될 것이다.” 속편이 만들어지는 이유는 어떻게 보면 간단하다. <리쎌 웨폰>의 리처드 도너는 “처음에는 그냥 한편을 만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관객이 그 캐릭터들을 좋아하고 그들을 다시 만나고 싶어한다는 것이 분명했을 때, 게다가 배우 역시 다시 한번 그 역을 맡고 싶다고 한다면 하지 않을 이유가 뭔가. 이런 속편을 만드는 건 단지 더 크고, 더 멀리 나아가고, 더 넓어지고, 더 거칠어지는 것만이 아니다. 속편은 캐릭터가 끌고나가는 거다. 매력적인 인물들간의 관계로 끌고나가는 것이 더욱 충성심 강한 관객을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리처드 도너는 <리쎌 웨폰>을 4편까지 만들었다. 4편은 할리우드의 누가 보기에도 무리였다. 멜 깁슨과 대니 글로버가 온몸을 던지는 액션을 하기에는 너무 늙었다. 게다가 <리쎌 웨폰>은 <나쁜 녀석들> 같은 신세대 버디영화와 비교했을 때 너무 낡았다. 하지만 4편은 당당하게 성공했다. 누가 보기에도 낡은 인물과 플롯, 액션으로 성공한 것이다. 그 이유는 리처드 도너의 말대로 충성심 강한 관객이 매력적인 캐릭터와 그들의 티격태격하는 관계를 보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 <배트맨>의 앞선 두편이 걸작인 이유 하나는 조커와 펭귄맨, 캣우먼의 캐릭터가 찬란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배트맨을 압도할 정도로, 매혹적인 악당이었다. 그러나 <배트맨 포에버>와 <배트맨과 로빈>은 악당이 누구였는지 제대로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로빈이 나왔고 다음 편에는 배트걸이 나왔다는 것만 떠오른다. 뛰어난 감독이 종종 속편 만들기를 거부하는 이유는 한편의 영화에서 캐릭터의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다이 하드>에서 존 맥티어넌은 맥클레인의 가정과 일, 그리고 취향까지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레니 할린의 <다이 하드2>도 재미있기는 하지만 맥클레인에 대해서 더 보여준 것은 없었다. <다이 하드2>의 맥클레인은 전편의 복사판이었다. <리쎌 웨폰>의 릭스 형사는 속편이 거듭될 때마다 조금씩 변한다. 1편에서 총구를 입에 물고 자학을 일삼던 릭스는 조금씩 밝아지고 애인도 생긴다. 레니 할린은 이미 완성된 맥클레인을 변화시킬 필요는 전혀 느끼지 않았다. 공포영화의 살인마 캐릭터처럼, 고정된 이미지를 강화하는 것에만 몰두했다. 불쌍하게도 존 맥티어넌은 <에덴의 마지막 날>과 <라스트 액션 히어로>가 실패하는 바람에 <다이 하드3>에 돌아왔고, 맥클레인을 ‘백인 쓰레기’로 바꾸었지만 부활에는 역부족이었다. 속편의 성공 전략 하나는 스탭과 배우를 그대로 끌고가는 것이지만 때로는 감독의 교체가 순풍을 불어오기도 한다. <에이리언>이 대표적이다. 리들리 스콧의 1편을 걸작으로 치는 것은 누구나 동의할 테지만 제임스 카메론의 <에이리언2>는 관객에게 더 큰 호응을 얻었다. SF액션영화라는 장르의 측면에서 본다면, <에이리언2> 역시 전작에 뒤질 것은 없다. <쎄븐>과 <파이트 클럽>으로 거장의 반열에 올라선 데이비드 핀처의 3편은 엉망진창의 플롯이지만 음울한 세계관과 개성적인 에이리언의 묘사로 눈길을 끌었다. 4편의 장 피에르 주네도 나름대로 개성적인 영상을 선보였다. <에이리언>도 시리즈가 거듭되며 리플리를 죽였다 살렸다 하며 난맥상을 보이지만, 또 누가 감독을 맡을지 여전히 궁금한 ‘프랜차이즈’로 남아 있다. 영웅은 죽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프랜차이즈의 속편을 만드는 것은 제작자들이 가장 쉽게 택할 수 있는 안전한 길이다. 그래서 틈만 나면 과거의 성공작을 기웃거린다. 하나의 속편이 성공하면 그런 생각이 더욱 간절해진다. <한니발>의 성공은 유니버설이 <사탄의 인형> 속편 제작에 들어가게 만들었다. 속편에 몸이 달은 제작자들은 심지어 <록키>나 <람보>처럼 이미 무덤에 들어간 프랜차이즈까지 되살려낼 생각을 하고 있다. 내년에는 속편들이 즐비하다. 워쇼스키 형제는 <매트릭스> 2, 3편을 함께 제작에 들어가 2002년 크리스마스에 2편을 공개할 예정이다. <반지 전쟁>과 <해리 포터>는 향후 일정이 튼튼하게 잡혀 있다. 앞으로도 <아메리칸 사이코> <크로커다일 던디> <배트맨> <다이 하드> <터미네이터> <리쎌 웨폰> <스타 워즈> <엑스맨> 등의 후속편이 속속 공개될 것이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속편은 영원하다. 팬들은 루크, 네오, 울브린의 액션을 언제나 손꼽아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현대의 ‘영웅’은 언제나 제작자의 마음속에 살아 있는 것이다. 김봉석 기자 속편·속편을 만들게 한 1편의 박스오피스 흥행순위 순위 제목 박스오피스 합계 2 스타워즈 에피소드1 (1999) $922,300,000 3 쥬라기 공원 (1993) $919,700,000 5 스타워즈 (1977) $797,900,000 10 쥬라기 공원 (1997) $614,300,000 11 맨 인 블랙 (1997) $587,200,000 12 스타워즈: 제다이의 귀환 (1983) $572,700,000 14 미션 임파서블2(2000) $545,300,000 16 나홀로 집에 (1990) $533,800,000 18 터미네이터2:심판의 날 (1991) $516,800,000 20 인디아나 존스:최후의 성배 (1989) $494,700,000 22 토이 스토리2 (1999) $485,700,000 24 죠스 (1975) $470,600,000 25 매트릭스 (1999) $456,300,000 27 미션 임파서블 (1996) $452,500,000 33 미이라 (1999) $413,300,000 34 배트맨 (1989) $413,100,000 39 레이더스 (1981) $383,800,000 40 그리스 (1978) $379,800,000 43 도망자 (1993) $368,700,000 ▶ 속편영화의 전략과 전술 ▶ 성공적인 후속편 만들기 5계명 ▶ 작가주의 속편들 ▶ 조심해야 할 사이비 속편들 ▶ BEST & WOR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