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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마이너리티 리포트>등 할리우드가 사랑한 SF작가 필립 K. 딕(2)

report3 ┃SF로 간 문학도 3. 필립 K. 딕은 아서 C. 클라크나 아이작 아시모프처럼 ‘하드’한 작가는 아니었다. 클라크와 같은 작가들에게 SF세계는 과학적 상상력과 연역 과정을 통해 예측한 ‘가능성 있는’ 미래였다. 하지만 딕에게 SF는 이미 그를 둘러싸고 존재하는 현실세계를 기술하는 조금 독특한 도구였다. 그는 미래가 어떻게 돌아갈 것인지, 과학적 상상력으로 어떻게 미래의 기술을 예측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대신 그는 화성인이나 안드로이드 같은, 이미 존재하는 SF 장르의 클리셰들을 별다른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고 이용했다. 골수 SF팬에서 시작한 엔지니어/과학자 출신의 클라크나 아시모프와는 달리 그는 순문학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그가 SF로 시선을 돌린 건, 그것이 그의 미치광이 비전을 소화할 수 있는 유일한 장르였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이 점은 그의 VALIS를 보면 분명해진다. 우주의 진리와 기존 종교에 대한 장황한 헛소리를 늘어놓는 이 정신나간 소설은 어설프게나마 SF 모양을 취하고 있기는 하지만 연역 과정을 통해 가공의 세계를 창조해내는 SF의 장르와는 큰 관계가 없다. 이건 그냥 정신나간 사람이 자기 세계에 대해 쓴 보통 소설인 것이다. 그는 이 장르의 어느 누구보다도 정신병 환자들이나 약물중독자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글을 많이 썼다(A Scanner Darkly, VALIS…). 그의 비교적 멀쩡한 캐릭터들도, 밖의 현실을 분명히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의 존재에 대해 확신이 없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정상인’은 절대로 아니다. 필립 K. 딕의 성공적인 소설들은 대부분 광기와 중독의 기술이다. report4 ┃리얼리티를 비웃음, 세상에 완벽은 없다 4. 필립 K. 딕이 가장 좋아했던 주제는 ‘리얼리티의 허약함’이었다. 그는 버클리식 연역적 추론 과정이 아닌 실제 경험을 통해 주변 세계에 대한 자신의 인식이 얼마나 쉽게 기만당할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주제를 가장 명백하게 다룬 작품은 그의 비교적 초기 작품인

<마이너리티 리포트>등 할리우드가 사랑한 SF작가 필립 K. 딕(1)

<블레이드 러너>, <토탈 리콜>, <마이너리티 리포트>. 이 세편의 공통점은 원작자가 필립 K. 딕이라는 사실이다. 스크린에 옮겨진 편수는 극히 적지만 각 작품의 스케일과 중량감은 가히 위압적이다. 명망있는 할리우드 감독들이 기꺼이 스크린에 구현하고 싶어하는 유혹적인 미래세계를 빚어낸 필립 K. 딕은 세련된 문체로 인간의 정체성을 집요하게 파고든 SF작가였다. 미래의 살인을 방지하는 시스템의 패러독스를 통해 인간의 정체성, 미래사회의 딜레마를 탐구한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스필버그라는 필터를 통과해 7월26일 관객과의 조우를 기다리고 있다. <씨네21>은 ‘<마이너리티 리포트> 시스템’에 접속하기 전, ‘필립 K. 딕 리포트’를 먼저 공개한다. 편집자 report1 ┃딕의 미래세계, 환상 그 이상의 환상 1. 최초로 필립 K. 딕 소설을 각색한 영화는 무엇일까? 물론 공식적인 정답은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를 각색한 리들리 스콧의 82년작 <블레이드 러너>다. 하지만 왜 나는 아직도 80년에 나온 텔레비전영화 <천국의 녹로>라고 박박 우기는 것일까? <천국의 녹로>의 원작자는 필립 K. 딕이 아니다. 딕만큼이나 중요한 SF/판타지 작가인 어슐러 르 귄의 작품을 각색한 작품이다. 하지만 현실에 영향을 끼치는 꿈을 꾸는 남자에 대한 이 영화(또는 르 귄의 소설)를 보면 정말 필립 K. 딕의 분위기가 풀풀 풍긴다. 주인공은 현실과 가상세계를 오가고 그 경계가 무너지는 곳에서 두 세계는 기괴한 충돌을 일으킨다…. 물론 어슐러 르 귄은 자기가 무엇을 쓰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필립 K. 딕 소설’을 쓰고 있었다. 재능있는 작가들은 자기만의 세계를 창조해낼 줄 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뛰어난 작가들은 그 이상의 일을 한다. 그들은 다음 세대를 위한 세계를 창조한다. 그리고 필립 K. 딕의 업적도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는 하나의 세계를 만들었고, 그 세계는 우리를 삼켜버렸다. 필립 K. 딕은 작가의 영역을 넘어 장르가 되었다. 우린 지금까지 쏟아져나온 수많은 가상 현실물들의 원조를 윌리엄 깁슨과 그의 추종자들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깁슨이 만들어낸 사이버스페이스는 차갑고 건조한 매트릭스에 불과했다. 깁슨이 제공한 것은 메커니즘에 불과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역동적인 사이버스페이스의 이미지는 대부분 깁슨보다 필립 K. 딕의 덕을 더 보고 있다. 무엇이 필립 K. 딕의 세계를 그처럼 생명력 넘치는 괴물로 만들었을까? 모든 꿈들은 현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모든 환상은 현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필립 K. 딕의 세계를 그처럼 강렬하게 만들었던 건, 그가 단지 공허한 가상세계를 지어낸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현실세계와 환상세계의 경계를 넘나들며 살았고, 그가 소설을 위해 만들어낸 세계는 그에게 당연한 현실세계의 또 다른 묘사였다. 그가 한 유명한 말처럼 ‘리얼리티란 관점에 불과했다’. report2 ┃공포증과 약물, 뒤엉킨 사생활 2. 필립 K. 딕은 1928년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란성 쌍둥이 누이인 제인은 태어난 지 6주 뒤에 죽었다. 딕은 시카고에서 태어났지만 거의 일평생을 캘리포니아에서 보냈다. 그는 병약한 아이였다. 빈맥증상이 있었고 천식환자였으며 다양한 공포증에 시달렸다. 나이가 들어서도 그의 공포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약물중독자였고 끝도 없이 잘되지도 않는 결혼과 이혼을 반복했으며, 가끔 자살을 기도했고, 공포증 때문에 멀리 가지도 못하면서 캘리포니아 안을 빙빙 도는 짤막한 여행을 반복했다. 그는 환영을 보았고 천사를 만났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종종 그의 경험은 전형적인 캘리포니아식 신비주의와 결합되어 싸구려 사이비 종교풍으로 흐르기도 했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죽은 남자였고, 존재하지 않는 병을 앓는 남자였으며, 존재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며 평생을 보낸 약물중독자였다. 그가 리얼리티와 아이덴티티라는 대상에 대해 집착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에게 그 둘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견고한 것이 못 됐다. 필립 K. 딕의 작품들 표지. 왼쪽부터 <스캐너 다클리> 높은 성의 사나이><발리스>. <판타스틱 유니버스>는 단편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실렸던 잡지다. 그가 살았던 세계 역시 그를 단단한 현실에 잡아두지 못했다. 그가 작가로서 경력을 시작한 50년대는 미·소 냉전 속에서 다양한 편집증이 전염병처럼 유행하던 때였다. 50년대의 공포증이 넘어가자 60년대의 히피문화와 약물유행이 뒤를 이었다. 그리고 그가 이 정신나간 사건들을 체험한 곳은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맨 정신으로 있기 힘든 곳인 캘리포니아였다. 1974년 이후 그가 겪었던 종교적 경험과 그런 경험이 투영된 그의 후기작들은 그가 얼마나 혼란한 정신의 소유자였던가를 증명한다. 그가 동료인 론 허버드처럼 본격적으로 사이비 종교 교주로 나서는 대신 소설가 직업에 붙어 있었던 게 모두에게 다행이었다고나 할까. 소설 vs 영화 ┃블레이드 러너┃1992년, 감독 리들리 스콧, 출연 해리슨 포드, 숀 영, 룻거 하우어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의 꿈을 꾸는가>를 각색한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는 가장 먼저 나온 필립 K. 딕 영화이며, 지금까지도 가장 사랑받는 작품이다. 그러나 딕의 소설을 각색한 많은 영화들처럼, 원작과 소설의 유사점은 비교적 약한 편이다. 심지어 영화는 제목도 그대로 사용하지 않았다. 영화의 제목 ‘Blade Runner’는 원래 앨런 E. 너스의 인구폭발의 장수사회를 다룬 SF소설 제목에서 빌려온 것이다. 데이비드 피블스의 최종 각본은 원작의 필립 K. 딕풍의 주제와 소재들을 대폭 삭제했다. 영화는 소설이 다루는 마사교와 같은 종교적 설정, 핵전쟁 이후 살아 있는 생물체들에 필사적으로 집착하는 사람들의 군상, 감정의 인위적 조작과 같은 것들은 등장하지 않는다. 원작의 건조한 딕식 미래 묘사가 줄어든 대신 영화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기독교 상징으로 가득한 컴컴한 미래 버전 필름 누아르가 된다.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

대런 애로노프스키의 영화 두편 <레퀴엠><파이>의 함수관계

심장의 박동을 강탈해가는 영화, <레퀴엠>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들(해리)은 어머니(사라)로부터 텔레비전을 빼앗아 밖으로 나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어머니는 그런 아들에 맞서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결국 아들은 친구(타이론)와 함께 텔레비전을 들고 가 전당포에 팔아먹은 뒤 그 돈으로 마약을 사고, 어머니는 아이스크림과 함께 유유히 그곳을 찾아 텔레비전을 다시 사온다. 이미 이들은 그 짓을 반복해왔다. 그러므로 첫 번째 신에서 방문을 사이에 두고 나눠지는 분할화면은 이 영화가 어디로 향할지를 예시한다. 분할화면은 여기에서만 설정되어 있는 단발적인 테크닉이 아니다. 적어도 대런 애로노프스키는 총체적인 내러티브의 의도가 테크닉에 우선하는 영화감독이다. 그리고 우리는 때로 영화의 테크닉이 어떤 의미를 지녔을까에 심각하게 골몰하기보다 그것이 어느 때에 등장하는가에 눈길을 주면서 그 의도에 손쉽게 다가가는 경우가 있다. 이 영화에서 분할화면은 언제, 무엇과 무엇 사이에 등장하여 서로를 갈라놓는가? 그것이 사라-해리, 해리-마리온(해리의 여자친구), 해리-타이론 사이에, 그리고 심지어는 사라-햄버거/냉장고 이에 쓰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영화에서 분할화면은 인물들간의 매끄럽게 봉합될 수 없는 관계 바깥으로 터져나온 굵직한 솔깃을 드러내고, 어긋남을 계속하는 욕망의 구도에 대한 스타일로서의 밑그림을 그린다(예를 들어 영화 초반부, 다정하게 누워 서로를 쓰다듬는 해리와 마리온의 분할화면을 눈여겨보라. 이 장면은 굳이 분할화면을 쓸 필요가 없다. 그것이 마냥 아름다운 사랑을 약속하는 것이라면.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두 화면의 인물 사이에 매치되지 않는 터치는 한눈에 들어오고, 그 다정함을 불길함으로 직감하게 한다). 하지만, 지금 분할화면이 이 영화의 전부라고 말하고 있는 중은 아니다. 파멸의 내러티브를 구조화하는 대런 애로노프스키의 요구에 일단 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이 영화의 중심을 대면할 수 있다. 중독된, 혹은 중독시키는 대런 애로노프스키는 사라ㆍ해리ㆍ마리온ㆍ타이론의 각각 단절된 상황으로부터 서로의 의미항을 이항시키면서 영화적인 고리를 지어내고 있다. 해리의 마약 투여장면은 사라의 커피 마시는 장면으로 이어붙고, 해리가 돈을 꺼내는 장면과 사라가 드레스를 꺼내는 장면은 동일한 카메라 포지션으로 보여진다. 또는 마리온이 헤로인을 구하러 가기 위해 화장을 하는 장면은 약에 중독되어 고통스러워 하는 사라의 모습과 교차편집된다. 그리고 타이론은 환각상태에서 어머니의 기억을 불러들인다. 의미적으로, 해리가 헤로인에 중독되는 것과 사라가 다이어트 약에 중독되어가는 것은 같은 속도를 유지한다. 아름다움에 대한 사라의 욕망은 마리온이 대신 보유하고 있고, 마리온의 물리적인 고통은 사라를 통해 직접적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또는, 타이론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해리의 변주곡이다. 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파멸의 귀착을 위해 똑같은 경로의 내리막길을 달리고 있는 중이다. 때문에, 영화 안에서 떠도는 ‘플로리다’의 상징성은 정확히 여기쯤에 위치한다. 이 영화에는 봄이 없다. 대신 황무지로서의 플로리다가 있다. 사라가 시작하는 다이어트 요법의 제1장은 ‘삶은 계란(마치 태양을 상징하는 듯한)’과 ‘자몽’이다. 해리와 타이론이 헤로인을 배급받는 것에 실패하는 순간 ‘플로리다 오렌지’가 적힌 트럭은 그들 앞을 지나간다. 해리가 겪는 단 하나의 아름다운 환각은 해변에 서 있는 마리온이다. 급기야 해리와 타이론은 헤로인을 구하기 위해 겨울에 플로리다로 향하고,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파국을 맞는다. 죽어버린 꿈을 꾸는 사람들 사이에서 플로리다는 마치 잡히지 않는 무인도처럼 떠돌고 있다. 그래도, 그들은 한결같이 꿈을 잊어버리지는 않고 있다. 사라는 살을 빼서 아름다운 붉은 드레스를 입고 텔레비전 다이어트 쇼에 출연하는 것이 꿈이며, 해리는 돈을 모아 사라, 마리온과 함께 단란하게 사는 것이 꿈이고, 마리온은 옷가게를 여는 것이 꿈이다. 그리고 타이론에게 꿈은 ‘한몫잡아 보는 것’이다. <레퀴엠>에서 정작 이들의 꿈을 망치고 있는 것은 말할 필요없이 ‘약(마약)’이다. 사라에게도, 해리에게도, 마리온에게도, 타이론에게도, 약은 결코 그들이 이루고 싶은 꿈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이들을 연명하게 하는 것도 약이다. 해리가 약을 팔아 돈을 모으려 하고, 사라가 약을 먹고 살을 빼려 하고, 메리온이 몸을 팔아 약을 구해야만 하듯, 그들을 조정하고 조율하고 있는 것 역시 다시금 보이지 않는 실체로서의 약인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이 레퀴엠의 작곡자가 약 그 자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이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관계이다. 그런데도 이 영화는 극장을 나오는 우리에게 아마 중요한 건 그런 것이 아니었을 거라고 부인하게 한다. 마치 약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다고 말하면 이 영화를 잘못 말하고 있는 것처럼, 대신 그것을 ‘중독’이라는 용어로 대체하면서 우회시켜, 격상시키고, 안심하려 한다. 감독 대런 애로노프스키조차 그런 것 같다. 고뇌인가 고통인가 그러면, ‘중독’이라고 정의할 때 그 방점이 어디에 찍히는가를 질문할 필요가 있다. 만약 <레퀴엠>에서 그것이 삶의 피폐함과 정신적인 외로움의 가속화를 일컫는 것이라면 문제는 복잡해진다. 사라에게 물어보자. 사라는 그냥 빨간 드레스를 입고 싶은 것이 아니다. 해리의 졸업식날, 그녀와 남편과 아들이 행복한 한때를 이뤘을 그때 입었던, 바로 그 빨간 드레스를 입고 싶어한다. 과거를 돌리고 싶어한다. 그러면 해리의 졸업식까지만 해도 화목했던 이 가정이, 아버지가 없는 가족관계로 재구성되며 왜 서로에게 등을 돌리고 각자의 세계에 매몰되게 되었을까(그리고 도대체 이 영화에서 아버지들은 죄다 어디로 간 것일까? 다들 해리의 아버지를 따라 단체로 죽은 걸까? 여기에 대한 어렴풋한 실마리는 <파이>에 있다). 설명들이 꼬리를 감춘다. 일부러 생략한 것이든, 잘못 누락된 것이든 결과는 마찬가지다. 영혼이 혼미해져 가는 정신적인 황폐함으로서의 중독은 이 영화의 의미생산에 부합하지 않는다. 영혼의 중독에 대해 말하려면 약 이외의, 삶과 세계의 부작용들에 관한 관계가 드러나야만 한다. 약으로 인한 고통이 아니라, 그것이 야기하는 삶의 고뇌가 부각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숫자와 신, 질서와 무질서, 뇌와 직관, 동공과 태양이라는 대결구도를 맺으며 그 고뇌를 철학적으로 승화시킨 것이 전작 <파이>이다. 이 세계를 움직이게 하는 규칙은 있는가, 과연 세계는 무질서 한 것인가, 그것을 숫자의 규칙성으로 파악해낼 수는 없는가, 왜 우리는 태양을 직시하지 못하는가, 216자리 숫자를 해독하는 순간 과연 신은 지상 위에 내려올 것인가, 과연 신의 섭리를 상대로 유레카라고 외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인가. <파이>의 천재수학자 맥스 역시 약에 중독되어 있지만 그에게 있어 약은 이런 고뇌의 질문을 지속하기 위한 것이지, 의미없는 고통을 당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레퀴엠>은 그런 ‘고뇌’가 아니라, ‘고통’에 매달리기 위해 약을 끌어들인다. 이 점이 바로 <파이>와 <레퀴엠> 사이의 가장 다른 점이다. 그러므로 중독은 방점을 다시 찍고 순전히 ‘물리적인 중독’으로 옮겨가야 한다. 사라는 날이 갈수록 더 격한 환각의 상태로 빠져든다. 그녀의 말라가는 몸은 주사바늘의 흉터로 절단해야 하는 해리의 팔만큼 흉물스러워진다. 깊어가는 것은, 늘어나는 약에 따른 육체의 고통과 뇌 손상이다. 병원에 실려간 사라가 받는 치료가 무엇인가. 무지막지하게 달려든 의사들은 끝내 그녀의 뇌에 전기충격을 가한다. 또는 마리온의 ‘정신과(!)’ 의사 아놀드(<파이>에서 천재수학자 맥스 밀리언 역을 맡았던 션 굴레트)는 그녀에게 무슨 도움을 주었던가? 대화치료? 천만에. 대화 대신 그가 마리온에게 준 것은 몸값으로 건넨 돈이다. 마리온의 그 돈으로 해리는 또다시 약을 사려 한다. 추락의 몸짓들이 이어지고 있다. 진실과 모순, "유레카?" 대런 애르노프스키는 <파이>에서 던졌던 질문들의 단초를 <레퀴엠>에서 그대로 등장시키면서도 결론적으로는 패배와 무의미의 태도를 선택한다. 이 말은 영화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닌, 대런 애로노프스키 그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말하자면 <레퀴엠>이 물리적인 중독을 경험하게 하는 영화라는 것을 깨끗이 인정하고 난 뒤에도, 우리는 여기에서 무엇을 얻었는지 망설이게 된다. 과연 어지러운 삶과 세계의 환부를 드러내는 정신의 중독이 다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고통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혹은 물리적인 중독을 통해 걸어들어간 환각의 세계, 그 안에서 진실과 모순에 대한 질문을 마주치지 않는다면 다 무슨 필요란 말인가. 그 물리적 중독의 강화가 궁극적으로 초대하는 가장 중요한 손님인 환각. <파이>에서 환각상태에 빠져 있는 맥스에게 강박적으로 다가오는 이미지는 뇌였으며, 그것은 곧 신에 대한 수학적 도전을 제기하는 맥스 자신에 대한 고뇌의 변형이었다. 그러나 <레퀴엠>에서 뇌는 그 의미가 사라진 채 전기충격기기 사이에 끼워져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한다. 또, 동공은 <파이>에서 정면으로 신의 존재를 응시하려는 의지로서 드러났다. 그런데 <레퀴엠>에서 그것은 쾌감을 확장하는 미세한 세포의 움직임일 뿐 다른 의미가 아니다. 신의 행세를 대신하고 있는 지상의 유혹(약)으로부터 대런 애로노프스키는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파이>에서 벌벌 떠는 손으로도 마침내 맥스는 약을 집어던진다. 그리고 컴퓨터 유클리드의 뇌관을 열던 그 드릴로 자신의 뇌를 파괴하고 만다. 이것은 패배일까? 혹은 자살의 몸짓일까? 하지만 깨달음에는 ‘유레카’라고 소리칠 수 있는 진리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나뭇잎의 움직임에서조차 규칙을 찾으려던 맥스가 그 앞에 다시 서는 모습은 우리를 중얼거리게 한다. ‘엔소프’. 그러므로, 대런 애로노프스키의 다음 영화가 <배트맨: 원년>인 것은 다시 한번 우리의 판단을 유예시킨다. 왜냐하면 배트맨은 신의 대리인들 중 가장 철학적인 전도사이며, 또한 가장 빠르게 쾌속 전진하는 과학자이기 때문이다. 아직은 믿어야 할지 모른다.정사헌/ 영화평론가 taogi@freechal.com

[파리리포트] 프랑스영화는 동진(東進)중!

일본과 한국, <아멜리에> 등 흥행 성공하며 새로운 시장으로 떠올라지난 2001년 <늑대들의 후예>나 <아멜리에>와 같은 프랑스 상업영화의 부흥으로 해외시장에서 프랑스영화의 판매도 크게 증가했다고 한다. 근접 유럽국가나 미국이 지속적인 시장이었다면, 최근 이곳 언론이 주목하는 것은 한국과 일본으로 대표되는 아시아 국가들이다. 이는 올해 10회째인 요코하마프랑스영화제나 2회째인 서울프랑스영화제를 맞아 프랑스영화 해외 진출을 돕는 기구인 유니프랑스의 적극적인 주도로 베르트랑 타베르니에 감독이나 제라르 랑뱅과 같은 유명 배우들이 한국과 일본을 방문했고 이를 계기로 프랑스 영화시장에서 이 지역에 대한 관심이 커졌기 때문이다. 2001년 일본의 경우 50여개의 프랑스 제작영화가 수입돼 420만명의 관객을 모았고, 한국의 경우 15개의 프랑스 제작영화가 수입돼 230만명의 관객을 끌었다. 이곳에서 프랑스영화의 성공은 크게 뤽 베송으로 상징되는 스펙터클한 상업적 영화와 프랑스영화를 또 한편으로 상징하는 소규모 작가영화들의 꾸준한 공존에서 찾을 수 있다. 상업영화가 아닌 작가영화로 분류될 영화들을 이 지역에 판매하기 위해 유니프랑스의 다니엘 토스칸 뒤 플랑티에 위원장이 밝힌 전략은 ‘시네필들의 문으로 들어가 산업구조로 진입하는 것’. 일본의 예를 보자면 작가영화로 분류되는 프랑스영화는 예술관 단관에 개봉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할리우드영화를 제외한 미국의 인디영화나 미국을 제외한 세계 각국의 영화들과 경쟁에서 우세를 보이면 이후 일반관에서 확대개봉될 가능성을 갖게 된다. 처음 예술관 한곳에서 개봉했다 이후 115개관에서 확대개봉돼 100만명 이상의 관객을 모은 <아멜리에>가 대표적인 예다. 물론 이것은 소규모 예술관들과 이곳을 찾는 탄탄한 시네필층이 일본에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두 가지 조건이 아직 갖춰지지 않은 한국은 프랑스 영화시장으로서는 일본에 비해 어려움이 많다고 지적된다. 여기에 텔레비전에서 프랑스영화 방영 비율도 낮고 DVD의 경우 무단 복제본들이 횡행하는 것도 어려움을 가중시킨다. 그렇지만 이곳 언론은 유니프랑스 다니엘 토스칸 뒤 플랑티에 위원장의 말을 빌려 한국이 프랑스와 유사한 시스템으로 자국영화를 보호하고 있는 점이나 한국영화가 높은 시장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장기적인 차원에서 다양한 프랑스영화가 한국에 소개되고 궁극적으로는 양국 합작영화를 기획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낙관적인 전망을 보였다. 파리=성지혜 통신원

<눈물> <신라의 달밤> <공공의 적> <라이터를 켜라>의 성지루(2)

비결 2 쓸데없는 자존심은 쓸데없다 성지루는 <눈물>로 영화를 시작한 것을 행운으로 여긴다. <눈물>에는 모두가 신인배우였기 때문이다. 조은지, 봉학규 등 연기신참들이 주연인 것이 영화신참인 그에게 심적 여유를 많이 주었다. 게다가 디지털영화였기 때문에 카메라워킹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다음 작품인 <신라의 달밤> 때는 사정이 달랐다. 하던 대로 했건만, 정광석 촬영감독은 연신 그를 혼냈다. “여기 서라고 했는데 왜 여기 서냐.”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당시 성지루는, 영화배우로서는 신인이었지만 연극판에서는 극단 목화에서 총무까지 맡은 고참이었고 <새들은 횡단보도를 건너지 않는다>로 우수작품 연기상을 받아 문예진흥원이 런던에 연수까지 보내준, 알아주는 베테랑이었다. 자존심을 버리고 틀리지 않으려고 속으로 끙끙대지도 않았다. 틀려가며 배웠고, 모르면 아무나 붙잡고 물었다. 거기엔 나이도, 뭣도 없었다. “지금도요, 모르겠다 싶으면 다 물어봐요. 22살 먹은 연출부 막내한테도 이것저것 물어봐요. 그러다보니까 거꾸로 요즘에는 간혹 가다가 조명부며 연출부 중에 누가 ‘연기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죠’하고 물어봐 오기도 해요. (웃음)” 비결 3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 임상수 감독이 아예 시나리오에 인물명을 ‘성지루’라고 해놓고는 나중에 그를 캐스팅했다는 <마지막 연애의 상상> 이야기를 하며 성지루가 조금 이상해졌다. 자폐증 환자처럼 시선을 흐리고 말도 더듬고…. 그는 그저 자신의 캐릭터인 우편배달부가 주인공 부부의 입양아를 죽이는 것을 설명하고 있었다. 뭔가 이상해서 ‘혹시 그 우편배달부가 자폐적인 사람인가요?’ 하고 물었더니 (세상에!) 그렇단다. 극중의 대사를 읊는 것도 아니고 그냥 캐릭터를 소개하는데 바로 그 캐릭터로 돌변하다니. 알고보니 그의 이런 심각한 수준의 감정이입은 ‘철저한 자료조사’라는 행동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일본의 한 자폐증 부부에 관한 다큐멘터리의 끝자락을 보고 그는, 냉큼 프로그램 끝에 뜨는 ‘다시 보기 사이트 주소’를 받아적었다고 한다. 예의 우편배달부 생각이 났기 때문. <가문의 영광>을 찍기 전에는 또 조폭 캐릭터를 몸에 익히기 위해 “현역에 계신 분들”을 만나서 3일 동안 같이 생활하기도 했단다. 사흘간 ‘특별연수’를 하면서 녹음기에 그들의 말을 녹음해 외국어테이프 듣듯이 듣고 따라하며 말투를 익혔다고. ‘녹음’ 기법은 <신라의 달밤>을 준비하면서 대전 출신인 그가 경상도 사투리를 익히기 위해 이미 써먹었던 방법이기도 한데, 극중 자신의 배역인 덕섭의 직업과 같은 경상도의 포장마차 주인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말을 녹음했다니, 그 치밀함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고급공무원 아버지 밑에서 엄하게 자라면서, “집에서는 한두 마디밖에 못하지만 밖에 나가서는 시연합 응원단장이나 각종 행사의 MC를 도맡아” 하던 청소년 시절, 남 앞에 맘껏 나서는 것에서 행복을 느껴 그는 연극을 꿈꾸게 됐다고 한다. 그리고 집안의 기대를 과감히 저버리고 서울예대 연극과에 입학한 이후 그는 쭉 연극판에서 살았다. <부자유친> <비닐하우스> 등 많은 연극무대에 올랐고, 연극무대에서 그를 발견한 임상수 감독에 의해 2001년 <눈물>로 영화데뷔를 한 이후에도 그는 연극이 본업인 배우였다. 본격적으로 영화를 하겠다고 결심한 건, <눈물>을 다 찍고 런던에 연수를 가 4개월 되던 때. 한국에 있던 임신중인 아내가 아파트계단에서 구르는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고, 그는 경제적으로 힘든 연극 대신 당시 출연제안이 들어와 있던 <신라의 달밤>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고개를 든 것이다. “그때 예정돼 있던 신작 연극 대신 영화를 하라고 허락해주신 오태석 선생 때문에라도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성지루. 이게 4번째 비결이 될까. “인기비결? 잘 모르겠는데….” 이렇게 말문을 열었지만 성지루가 3시간 동안 들려준 이야기는 사실상 모두가 ‘비결’이 되는 것이었다. 글 최수임 sooeem@hani.co.kr/사진 오계옥 klara@hani.co.kr ★ ★ ★ ★ ★ 김승우가 본 성지루 성격파,그 이상의 성격파 나는 사실 성지루와 별로 친하지 않다. 믿기지 않겠지만 나는 성지루라는 배우를 영화와 현실을 통틀어서 <라이터를 켜라> 촬영장에서 첨 봤다. 바쁜 촬영스케줄 때문에 대본연습에도 참여하지 못했고, 그의 출세작인 <신라의 달밤>과 <눈물>을 이전에 보지도 못한 내 탓이 크다. 촬영장에서 처음 본 성지루는 무뚝뚝한 사내였다. 다만 담배 피우는 모습이나 누군가와 얘기하면서 웃을 때의 한없이 착해 보이는 눈웃음에서 꽤나 서민적일 것 같고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다는 약간의 힌트를 받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어느날, 전날 촬영에서 성지루가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는 장항준 감독님의 증언(?)이 귀에 들어왔다. 그래서 순전히 ‘성지루를 보기 위해’ <신라의 달밤>을 보았다. 그리고 알게 됐다. 그가 조금은 거칠게, 전혀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연기를 하는 좋은 배우라는 것을. 게다가 나는 그의, 나이에 비해서 훨씬 오래산 것 같은 느낌의 외모(^^)가 풍기는 친근감에서 언뜻 최불암 선배의 넉넉함까지 느낄 수 있었다. 어쨌거나 <라이터를 켜라>에서 성지루는 아주 적은 분량에만 나옴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뇌리 속에 각인되는 연기’란 게 무엇인지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시사회에 오셨던 나의 아버님마저도 당신의 아들 이외에 기억하셨던 유일한 배우였으니 말이다. (차승원이 아니라!).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

심의, 인도에서도 말썽

X등급 상영 합법화 주장하던 등급위원장 비헤이 아난 사퇴인도영화등급위원장 비헤이 아난이 X등급 영화상영의 합법화를 둘러싼 마찰 때문에 사퇴를 선언했다. 지난해 9월 취임한 아난은 <밴디트 퀸> <엘리자베스>를 연출한 세카르 카푸르의 삼촌이자 그 자신도 1980년대까지 영화감독으로 활동했던 인물. 그는 1952년 제정된 인도영화 법령이 변할 때가 됐다고 주장하면서 특정 상영관에서는 소프트포르노를 상영할 수 있도록 할 것을 건의해왔다. 섹스와 누드, 폭력, 정치적으로 민감한 주제를 엄격히 제한하는 인도의 영화검열 기준은 보수적이기로 악명높지만, 대부분의 극장은 법망을 피해 삭제된 필름을 상영하기 때문이다. 개봉일 아침에 잘라낸 필름을 끼워놓고 지방경찰에 뇌물을 주는 것이 일반적인 방식. 아난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다면 합법화시킨 뒤 감시하는 편이 낫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여성단체에서 아난의 사퇴를 촉구하는 등 반발이 거세지자 정부는 “포르노영화의 상영은 바람직하지도 건전하지도 않다”는 문서를 보내 아난의 제안을 거절했다. 아난의 사퇴에 대한 인도영화계의 입장은 신중한 편이다. 아난은 퇴임할 때까지도 등급위원회가 의사결정의 자유를 가져야 한다고 고집한 반면, 정부는 위원회가 도덕적인 가치를 충실히 반영하는 오락만 대중에게 제공할 의무가 있다고 믿고 있다. 영화감독 시암 베네갈은 “시나리오에 필요하다면, 영화의 성(性)적 요소는 허락되어야 한다. 하지만 단지 자극을 위해서 삽입된 섹스장면은 금지되는 것이 맞을 것”이라고 밝혔다. 여섯명으로 구성된 인도영화등급위원회는 텔레비전과 극장에서 상영되는 모든 영화를 사전심의하고 등급을 결정하는 조직. 그동안 <카마수트라>의 미라 네어와 <밴디트 퀸>의 세카르 카푸르 등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은 많은 인도 감독들이 상당 부분의 필름을 잘라내는 수모를 겪어왔다.

카를로비 바리에서 만난 로저 에버트

영화제 취재차 머문 카를로비 바리에서 로저 에버트를 인터뷰한 것은 예정됐던 일은 아니었다.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라고 할까? “혹시 로저 에버트를 인터뷰할 생각없나요?”라는 이스트필름 대표 명계남씨의 제안에 귀가 솔깃해져 대뜸 약속을 잡아달라고 부탁했다. 지난 7월13일 폐막한 카를로비 바리 국제영화제에서 두 사람은 심사위원으로 초청받아 매번 옆자리에 앉아 영화를 보던 참이었다. 한 차례 약속이 어긋나고 극장에서 우연히 마주쳐 인사를 나누는 우여곡절 끝에 7월9일 에버트가 묵고 있는 호텔에서 인터뷰가 성사됐다. 당신의 영화평은 한국의 영화저널리즘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 많은 영화담당 기자와 영화평론가들이 새로운 할리우드영화가 개봉할 때마다 당신의 영화평을 들춰본다. 당신의 영화평을 미국식 저널리즘 비평의 표준으로 여기는 셈이다. 하지만 미국의 비평과 프랑스의 비평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 자신의 비평이 프랑스의 비평에 비해 엔터테인먼트에 비중을 많이 두며 좀더 대중적이라고 생각하나. 음, 그건… 나는 일간지에 영화평을 쓰는 사람이다. 그것은 잡지나 학계 논문집에 글을 쓰는 것과 다르다. 글을 쓸 때 이 글을 읽을 독자가 알 수 있는 말로 써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때로 심각하고, 때로 웃기며, 때로 엔터테인먼트가 되려고 노력한다. 나는 신문장이이며 저널리스트다. 신문을 사서 읽는 사람들이 글을 읽어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면 소용없는 것이다. 프랑스의 일간지와는 다르다. 대부분 미국의 일간지는 독자층이 구분되지 않는, 모든 사람을 위한 매체다. 하지만 프랑스는 우익 신문, 좌익 신문, 지식인 신문, 대중 신문이 나눠진다. 영국도 비슷해서 <더 타임스> <인디펜던트> <데일리 텔레그래프> <가디언> 등이 각기 다른 성향이다. 프랑스나 영국과 달리 미국의 신문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글을 쓰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쓴 글이 어디에 실리는지, 누가 읽는지를 염두에 두고 써야 한다. 심각한 영화에 대해 진지하게 쓰는 경우도 있다. <뤼마니테> 같은 영화의 평은 그렇게 썼다. 하지만 <맨 인 블랙2> 영화평은, 그렇게 진지하지 않다. 영화평론가가 된 계기는 어떤 것인가? 어렸을 때부터 꿈꿨던 직업인가. 그렇지 않다. 난 15살 때부터 신문기자로 일했다. 아마추어 신문이 아니라 진짜 일간지였고 스포츠 지면에 기사를 썼다.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고 문학 교수를 꿈꾼 적도 있다. 시카고대학을 졸업하고 <시카고 선타임스>에 들어가 일했는데 입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화평을 담당하던 전임자가 은퇴하는 바람에 영화평을 쓰라는 제의를 받게 됐다. 나로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전에 영화평론가가 되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를 아주 좋아했기 때문에 하겠다고 했고 그 결정이 내 인생을 바꾸었다. 그뒤로 35년간 영화평을 썼다. 1975년에 퓰리처상을 받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일로 수상했나. 신문사에서 퓰리처상 후보로 내 영화평 10개를 보냈다. 나로선 놀라운 일이었는데 왜냐하면 연극이든 문학이든 비평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후보로 보낸 영화평에는 잉마르 베리만의 <외침과 속삭임>, 페데리코 펠리니의 <아마코드> 등에 대한 평이 포함돼 있었다. 러스 메이어의 <인형의 계곡 너머> 시나리오를 쓰게 된 계기는. 러스 메이어를 좋아한다. 대학 다닐 때부터 그의 영화를 좋아했다. 그는 위대한 오리지널 미국감독이다. 그의 영화는 섹스영화라기보다 코미디다. <월 스트리트 저널>에 그의 영화에 관한 호의적인 기사가 난 적이 있다. 기사를 쓴 사람에게 나도 동감이며 러스 메이어에 대해 더 많이 주목해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얼마 뒤 러스 메이어와 친구가 됐고 이십세기 폭스사에서 내게 시나리오를 쓰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인형의 계곡>의 속편 시나리오를. 흔쾌히 승낙했고 <인형의 계곡 너머>는 아주 재미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TV프로그램 <시스켈과 에버트>을 시작할 때, 이 프로그램이 영화비평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했나. 당시 TV의 영화관련 프로그램은 대부분 단순한 홍보 프로그램이었다. 시청자는 어떤 영화의 나쁜 점에 대해 들을 기회가 없었고 오직 장점만 이야기했다. 감독 인터뷰건 배우 인터뷰건 모두가 프로모션용이다. 우리 프로그램은 영화의 장단점에 대해 터놓게 얘기했다. 내 견해는 이렇다고 솔직히 말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홍보의 기회를 잡을 수 없는 영화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다큐멘터리, 인디영화, 클래식영화들에 대해서 말이다. 모두가 <스파이더 맨>에 대해 떠들 때, 좀더 작은 영화가 전국적인 주목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TV에서 흘러나오는 영화정보가 온통 하나의 영화에 집중돼 있을 때 대중에게 선택의 기회를 제공한 것은 유용한 일이라 생각한다. <시스켈과 에버트>의 영화 선택에 있어서 어떤 압력을 받은 적은 없나. 모든 영화가 이 프로그램에 나오길 희망하지만 선택은 항상 우리 스스로 했다. 일반적으로는 <스파이더 맨>이나 <스타워즈> 같은 메이저영화들이 전파를 타지만 다큐멘터리나 저예산영화를 소개하기도 한다. 진 시스켈과 어떻게 알게 된 사이인지 궁금하다. 나는 <시카고 선타임스>의 영화평론가였고 시스켈은 <시카고 트리뷴>의 영화평론가였다. 말하자면 나의 적이었다. 두 신문은 경쟁지였고 우리 역시 경쟁하는 사이였다. TV에서 우리 둘을 불렀을 때도 역시 상대에 대한 견제가 만만치 않았다. 수차례 격렬한 공방을 벌였는데 그게 쇼를 돋보이게 하는 데는 좋은 일이었다. 시스켈과 격렬히 논쟁했던 영화 중 기억에 남는 작품을 든다면. 자주 논쟁을 했고 그중 예를 들자면 <지옥의 묵시록>이다. 시스켈은 <지옥의 묵시록>을 좋아하지 않았고 나는 이 영화를 걸작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그는 내 견해에 동의했다. 남들이 걸작이라고 말하는 영화를 홀대한 경우는 없었나. 물론 있다. 데이비드 린치의 <블루 벨벳>, 테리 길리엄의 <브라질>(비디오 출시명: <여인의 음모>) 등이 그렇다. 하지만 평론가가 할 일은 대중의 견해를 따르는 게 아니라 자기 견해를 밝히는 것이다. 내 견해가 항상 옳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평은 자기가 보고 느낀 것을 써서 평을 본 사람이 영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평론가의 견해가 나와 다르더라도 좋은 평은 그 영화를 잘 볼 수 있도록 해준다. 영화평 자체에 흥미로운 요소가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다. 영화평론가에게, 또는 영화평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우선 평론가는 자기 견해대로 글을 써야 한다. 또한 독자가 글을 읽고 어떤 영화구나, 하고 느낄 수 있게 해야 한다. 그것이 독자가 이 영화를 볼지 말지를 결정하게 만드는 요소이기도 하다. 평론가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영화에 대한 어떤 뚜렷한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 아이디어가 있다면 평론가가 별로라고 썼지만 나라면 좋아할 영화 같다는 식의 판단을 할 수 있다. 어떤 영화를 나중에 다시 보고 이전 견해를 수정한 경험이 있는가. 일반적으론 없는 일이다. 아주 가끔 있는 일이다. 예를 들자면 <용서받지 못한 자>는 두 번째 봤을 때 훨씬 좋았다. 영화제에서 영화를 봤을 때는 대체로 개봉 전에 다시 보고 영화평을 쓴다. 칸이나 토론토영화제에서 하루에 5편씩 보면서 평을 쓸 시간을 갖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확실히 영화제에서 보고나서 나중에 다시 보면 훨씬 영화에 집중할 수 있다. 느긋하고 여유있는 마음으로 보게 된다. 하지만 대체로 나는 처음 봤을 때 견해에 따르는 편이다. 많은 감독들이 영화평론가에게 불만스러워하는 점은 한번 보고 어떻게 단정하느냐는 것이다. 두번, 세번 거듭 보기를 요구하는데 그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나는 신문장이다. 그건 내가 매일 기사마감을 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며 어떤 영화든 대체로 한번밖에 볼 수 없다는 뜻이다. 두번 볼 수 있는 여유가 있다면 나도 두번 보고 쓰고 싶다. 하지만 대학에서 영화에 대한 강의를 할 때는 한 영화에 대해 10시간 동안 가르친다. DVD로 장면마다, 프레임마다 정지시켜놓고 설명하고 토론하는 식이다. 그것은 미세한 부분까지 자세히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며 매우 유용한 방식이다. 일간지의 영화평을 쓰는 사람으로서는 그렇게 3∼4번씩 보는 게 불가능하다. 영화를 보고 회사에 돌아와 기사를 쓰면 끝이다. 가능한 시간은 그게 전부다. 나는 프로페셔널 신문장이이지 아카데믹한 교수가 아니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를 본 적 있나? 올해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는데. -못 봤다. 올해 4월에 어깨가 부러지는 바람에 칸영화제에 못 갔다. 올해는 25년 만에 처음 칸영화제에 못 간 해다. 김기덕 감독의 <섬>을 보고 영화평을 쓴 적이 있던데. -와우, 마음에 드는 영화였다. 아주 강력한 영화이고 폭력과 아픔이 넘치는 영화다. <섬>은 흥미로운 상황을 제시한다. 상징적인 의미로서 남자는 생존하기 위해 여자에 의지해야 한다. 그러나 남자는 섬에서 혼자 살고 있고, 여자는 해안에 산다. 매우 강한 영화다. 선댄스영화제 때 보고 호평을 쓴 적 있지만 미국에서 상업적인 배급망을 탄 적이 없어서 널리 알려지진 않았다. 미국에서 개봉한다 해도 성인영화로 취급받을 것이다. 지나치게 폭력적이라고 생각하나. 그렇게 말하고 싶진 않다. 감독은 필요한 묘사를 했고 그것은 영화에 적합한 것이었다. 오늘날 미국영화에서 뉴-뉴 아메리칸 시네마라고 부를 만한 경향이 있다고 생각하나. 인디영화는 여전히 흥미롭다. 매우 적은 예산으로 찍는 디지털영화들 가운데도 주목할 만한 영화가 나오고 있고. 오늘날 할리우드 대작영화들은 대체로 너무나 예측가능한 형태로 만들어진다. 나는 둘을 인더스트리얼시네마와 아트시네마로 나눠 부르는데 인더스트리얼시네마는 엔터테인먼트를 위한 것으로 공장에서 생산되는 제품이다. 디지털영화가 적은 예산으로 작업할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지만 오늘날의 미국영화가 30년 전보다 덜 흥미로운 것은 사실이다. 미래의 작가로 주목하고 있는 미국 감독이 있다면. <존 말코비치 되기>의 스파이크 존스, <쓰리 킹즈>의 데이비드 O. 러셀, <매그놀리아>의 폴 토머스 앤더슨, <한 가지에 대한 13개의 대화>의 질 스프레처, <너스 베티>의 닐 라뷰트, <줄리안 동키보이>의 하모니 코린 등을 들 수 있겠다. 당신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영화를 꼽는다면. <시민케인>이다. 17살 때 이 영화를 보고 여러 가지를 배웠다. 감독의 존재를 알았고 영화의 내면에 감독의 비전과 메시지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전까지 영화를 엔터테인먼트로만 대했는데 <시민케인>은 나를 눈뜨게 했다. 또 다른 영화를 든다면 구로사와 아키라의 <이키루>다. 대학 1학년 때 외국영화를 보는 동아리에서 이 영화를 처음 봤다. 베리만이나 펠리니의 영화도 이 시절 처음 접했지만 <이키루>는 내가 본 영화 중 가장 위대한 작품 가운데 하나다. <이키루>에 대한 평은 나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쓰는 ‘그레이트무비’라는 코너에 들어 있다. 당신의 영화평에는 별점이 들어 있다. 영화에 별점을 주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멍청한 짓이라고 생각한다. 별점은 지나치게 단순한 것이다. 신문사에서 시켜서 하는 일일 뿐이다. 미국의 수많은 신문이 별점을 주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최근엔 별점을 좀 보완하려고 별의 개수를 5개로 늘렸다. 3개가 정확히 중간점수가 되게끔…. 어찌됐든 멍청한 짓이다. 나는 내가 쓴 글을 읽기를 바라지, 내가 별 몇개를 줬는지만 보는 것은 원치 않는다.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던 적은 없었나. 결코 없다. 나는 신문장이다. 어렸을 때부터 신문에 글쓰는 걸 꿈꿨다. 글쓰기를 그만두고 방송출연만 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나는 신문장이다.카를로비 바리=글·사진 남동철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

머릿속까지 파고드는 음향 ‘짜릿’

장기 매매와 아동 유괴 그리고 그에 얽혀 극악해져 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 화제가 되었던 <복수는 나의 것>이, 극장에서 막을 내린 후 채 몇 개월이 되지 않은 시점에서 디브이디로 출시됐다.하드보일드한 스토리, 사실적인 영상과 함께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소름끼치는 각종 음향이 역시 디브이디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요소. 특히 많은 음향 효과들 중에서도 소녀 주검의 부검장면에서 들려오는 뼈를 가르는 소리는, 디티에스(DTS) 사운드로 생생하게 재생되어 순간적으로 귀를 막아버리고 싶을 정도로 강렬하다. 이런 음향효과들은 스페셜 피처 디스크의 메뉴화면에서도 그 진가를 발휘한다. 비교적 평이하게 영화의 주요장면을 활용한 본편영화용 메뉴화면과는 달리, 스페셜 피처 디스크의 메뉴화면은 디브이디용으로 따로 제작된 배경화면을 바탕으로 영화에 빈번히 사용되었던 음향을 뽑아서 쓰기 때문. 사람의 숨통을 죄었을 때 나는 소리와 그로테스크한 음악 위로 번지는 끼끽거리는 날카로운 소음 등은, 듣는 이로 하여금 영화의 장면을 계속해서 떠올리게 만들며 소름이 돋게 만들 정도다. 게다가 피가 말라붙은 듯한 이미지를 과감하게 차용한 메뉴화면의 배경들은, 이러한 소리를 시각적으로 극대화하는 구실까지 수행한다. 음향과 함께 이 디브이디의 또다른 훌륭한 점은 영화의 일관된 이미지가 부록에도 고스란히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다양한 각도에서 심도있는 정보를 보여주는 부록들은, 근래에 보기 드문 잘 짜여진 기획력의 승리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다. 특히 적극적으로 부록 제작에 참여해 자신의 연출 의도와 영화의 제작과정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전해주는 박찬욱 감독의 모습을 볼 수 있어 더욱 좋다. <복수는 나의 것> 디브이디에는 이 밖에도 그와 류승완 감독이 함께 진행하는 오디오 코멘터리, 배우들의 수화연습과 각종 특수분장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인 프로세스 오브 미스터 벤진스(In Process of Mr. Vengeance)' 코너, 동영상으로 표현된 스토리보드인 '무빙 콘티뉴어티(Moving Continuity)' 코너 외에도 많은 부록들이 빼곡이 들어있다. /복수는 나의 것> 이철민/디브이디 칼럼니스트 chulmin@hipop.com23년전 원본 그대로 12회에 담아 - <빨강머리 앤>1985년 9월 우리나라 텔레비전에서 첫 선을 보였던 애니메이션으로, 폭넓은 시청자 층을 형성했던 작품이다. 디브이디로는 전체 12개의 타이틀이 9월 말까지 순차적으로 발매될 예정이다. 1979년도라는 제작연도를 감안하면 상당히 안정적인 화질과 색감을 유지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방송 당시 불규칙한 편성시간으로 인해 잘려나갔던 부분이 다시 복원되었다는 점이 눈에 띈다. 감독-다카하타 이사오/ 자막+더빙-한국어, 일본어/ 화면비-4:3/ 오디오-돌비 디지털 2.0/ 지역코드-3/ 출시사-매니아엔터테인먼트참신함은 있다…‘부록’은 없다 - <로얄 테넌바움>평론가들로부터 극찬을 받고 있는 신예감독 웨스 앤더슨의 최신작으로, 너무나도 튀는 개성을 가진 천재가족의 한바탕 소동을 그린 독특한 코미디물이다. 소설처럼 전개되는 특이한 구성과 분위기의 영화 자체도 즐겁지만, 감독의 해박한 음악적 지식으로 선별된 팝의 명곡들을 깨끗한 음질로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다는 점도 디브이디의 매력이다. 그러나 너무도 아쉬운 점은 부록이 전혀 없다는 사실. 감독 - 웨스 앤더슨/ 자막 - 한국어, 영어, 중국어(베이징어), 타이어, 인도네시아어/ 화면비 - 아나몰픽 2.35:1/ 오디오 - 돌비 디지털 5.1/ 지역코드-3/ 출시사 - 브에나비스타

한국영화 석달간 극장 점거

올 상반기 한국 극장가는 여섯 달 중 거의 석 달 동안 한국영화를 튼 것으로 나타났다. 스크린쿼터문화연대의 상반기 결산자료에 따르면, 실제상영을 기준으로 전국 584개의 스크린을 조사한 결과 한국영화 평균상영일수(날짜 점유율)는 총 상영일수인 173.7일 중 79.19일로 45.59%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 64.3일(37%)에 비해 15일 가까이 늘어난 수치다. 문화연대는 관객 동원력이 높았던 한국 영화가 추석과 연말 등 하반기에 집중 개봉되어온 관례로 볼 때 올해의 한국영화 평균상영일수는 사상 최고를 기록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극장용 영화에서와는 달리, 텔레비전 영화의 경우는 아직까지 ‘미국영화 편중’이 여전한 것으로 나타났다. 문화연대에 따르면 방송에서 문화 다양성을 확보하려고 올해 처음 시행된 ‘월간 1개 국가 제작물 편성 비율을 60% 이하로 한다’는 규정은 5개 방송사(KBS, MBC, SBS, EBS, iTV)가 모두 상반기 6회 중 2회 이상 위반했다고 나타났다. 60%를 넘어선 제작국은 물론 미국이다. 그러나 외국영화 중 미국영화의 편성 비율은 평균 58%로 지난해 67%에 비해 9%p 낮아졌다고 나타나 미국영화 편중이 완화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한국영화 편성 비율’의 경우, 올해 고시인 25%를 문화방송만 위반했다고 나타났다. 이상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