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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한국영화 석달간 극장 점거

올 상반기 한국 극장가는 여섯 달 중 거의 석 달 동안 한국영화를 튼 것으로 나타났다. 스크린쿼터문화연대의 상반기 결산자료에 따르면, 실제상영을 기준으로 전국 584개의 스크린을 조사한 결과 한국영화 평균상영일수(날짜 점유율)는 총 상영일수인 173.7일 중 79.19일로 45.59%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 64.3일(37%)에 비해 15일 가까이 늘어난 수치다. 문화연대는 관객 동원력이 높았던 한국 영화가 추석과 연말 등 하반기에 집중 개봉되어온 관례로 볼 때 올해의 한국영화 평균상영일수는 사상 최고를 기록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극장용 영화에서와는 달리, 텔레비전 영화의 경우는 아직까지 ‘미국영화 편중’이 여전한 것으로 나타났다. 문화연대에 따르면 방송에서 문화 다양성을 확보하려고 올해 처음 시행된 ‘월간 1개 국가 제작물 편성 비율을 60% 이하로 한다’는 규정은 5개 방송사(KBS, MBC, SBS, EBS, iTV)가 모두 상반기 6회 중 2회 이상 위반했다고 나타났다. 60%를 넘어선 제작국은 물론 미국이다. 그러나 외국영화 중 미국영화의 편성 비율은 평균 58%로 지난해 67%에 비해 9%p 낮아졌다고 나타나 미국영화 편중이 완화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한국영화 편성 비율’의 경우, 올해 고시인 25%를 문화방송만 위반했다고 나타났다. 이상수 기자

공포의 근원을 오해하고 있는 공포영화,<폰>의 오류와 실수(2)

공포의 공간, 인색한 활용이 공포를 반감시킨다 호정과 창훈 부부가 새로 구입한 저택, 죽은 여고생의 시체가 감추어져 있는 그 저택이 영화 속에서 전혀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영화 <폰>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이다. 원혼은 분명 자신의 억울한 죽음을 밝혀줄 중개자로 더없이 적격인 직업을 가진 지원을 곁에 불러들였다. 귀신들린 집은 생명력을 지니고 집안 어디에나 편재하는 귀신의 존재를 환기시킬 때만이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이 집은 어서 뛰쳐나가고 싶은 곳이거나 숨겨진 비밀을 찾아 인물들이 집요한 탐색을 벌이는 그러한 공간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휴대폰의 ‘광역성’과 귀신에 의한 희생자 선택의 무작위성은 자꾸 지원의 발길을 엉뚱한 곳으로 향하게 만든다. 지원은 좌표없는 장소를 찾아헤매는 존재이다. 고양이의 울음소리를 휴대폰 벨소리와 노트북 화면에 뜨는 괴이한 메시지로 대치해놓은 것이 장르의 성공적이고 현대적인 변용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그토록 널찍한 집을 무대로 삼았으면서도 감독은 공간의 특성을 효율적으로 부각시키는 데 실패하고 있다. 이 영화의 대부분의 공포효과는 심도 얕은 화면과 진부한 포커스 이동이 창출해내는 눈속임에 기반하고 있다. 한갓 만성 딸꾹질 환자들을 위한 치료제에 불과한 ‘깜짝 효과’들이 스크린과 스피커로부터 지겹도록 터져나온다. 감독은 전작 <가위>에서 휴대폰 화면으로부터 손 하나가 솟아나와 희생자의 눈을 뽑아내는 모습을 다소 어색한 특수효과로 보여준 바 있다. 스크린은 환영들이 펼쳐지는 공간이라는 암묵적인 약속을 깨고 갑자기 스크린을 넘어 관객을 향해 달려드는 무언가가 있을 때 공포의 감정은 극대화된다. 이것은 공포영화 제작자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지녀보았을 한없는 이상이다. <링>의 귀신이 텔레비전 모니터를 넘어 희생자에게 다가오던 장면이 아니더라도, 이러한 이상을 반영한 영화들의 예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크로넨버그의 <비디오드롬>, 웨스 크레이븐의 <영혼의 목걸이>와 <스크림> 연작, 존 카펜터의 <매드니스>, 토비 후퍼의 <폴터가이스트>, 그리고 레니 할린의 <나이트메어4> 등등. 영화 <폰>에서 휴대폰 너머의 목소리와 비현실적인 환영으로서만 그 존재를 드러내던 원혼의 시체가 마침내 지원을 통해 발견되어 바닥에 쓰러진 호정 앞으로 천천히 걸어나오는 순간의 묘사만큼은 탁월하다. 이는 파열하는, 혹은 현실로 확장되는 스크린의 이미지를 적절히 변용한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은 아무것도 아님, 비어 있음, 무가치성, 환영, 완벽한 죽음 그 자체가 존재를 뒤덮으며 엄습해오는 순간이 아니다. 스크린에 재현된 귀신이 공포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조건 가운데 하나는, 그 귀신에 의한 죽음이 존재의 완전한 박탈, 사후 구원의 가능성까지도 완전히 소거시켜버리는 진정 저주스러운 죽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그렇지 않다면 귀신의 존재 자체가 거꾸로 죽음의 공포를 경감시키는 역할을 떠맡게 되는 우스운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이를테면 <엑소시스트>에서 악령을 퇴치하기 위해 스스로의 영혼을 악령에게 내맡겨야 하는 딜레마에 처한 신부의 죽음이 바로 그러한 죽음이다. 그런데 바로 이 부분에서 <폰>은 다소 미심쩍다. 유령의 집 관람은 끝나가고 빛이 들어오는 입구가 저만치 보인다. "공포란 무엇인가?" "관심없음!" 안병기 감독은 윌리엄 프리드킨의 <엑소시스트>가 유발하는 공포의 원천이 악령들린 소녀 리간의 기괴한 몸뚱이에 있는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과연 그럴까? 악령을 퇴치하기 위해 결국 자신의 영혼- 기독교적 사유에서라면, 존재의 마지막 보루로 여겨질- 을 악령에게 내맡길 수밖에 없는 신부의 딜레마가 없었다면 <엑소시스트>의 공포는 그저 피상적인 것에 그쳤을 것이다. 여기서 존재의 뿌리를 파고드는 공포는 구원의 불가능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폰>에서 귀신들린 아이의 몸짓은 참으로 ‘엽기적인’ 볼거리 이상의 것이 되지 못한다. <폰>은 공포영화 장르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기보다는 친숙한 공포의 소재들을 가지고 ‘유령의 집’을 구성하는 데 훨씬 공을 들인 영화다. <폰>은 공포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는 별 관심이 없다. 이건 웃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정말이지 감독의 관심은 ‘공포’가 아니라 ‘공포영화’에 놓여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관객에게 ‘잘 먹힌’ 공포영화들을 어지러이 끌어들여, 우리로 하여금 이미 익숙한 체험을 다시 한번 반복하게 만든다. 이 체험은 다른 게 아니라 분명 두려움을 느끼게 될 것을 알면서도 기어이 번지점프 줄에 매달리고 자이로드롭에 올라타는 이들이 기대하는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단지 필름으로 찍혀졌고 필름조각들의 조합이 일련의 서사적 이미지들을 구성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폰>을 영화라 불러야 할 것인가? 따라서 이 글은 한 영화에 대한 비평이 아니라 올해 새로 선보인 놀이기구에 대한 시승기(試乘記)이다. 개인적으로는, 거의 졸음이 쏟아질 만큼 지루했다.유운성/ 영화평론가 akeldama@netian.com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

노출

몸을 드러낸 여자들은 도시의 여름을 긴장시킨다. 탱크톱에 핫팬츠로, 강렬하게 몸매를 드러낸 여자가 저쪽에서 걸어올 때, 더위에 늘어진 거리는 문득 성적 활기를 회복한다. 노출이 대담한 여름 여자를 볼 때마다 나는 내가 그 여자의 옷을 보고 있는지 몸을 보고 있는지 혼란에 빠진다. 그리고 이 혼란은 온갖 정의로운 담론들이 아우성치는 이 황폐한 도시에서 밥벌이를 해야 하는 나의, 그나마의 즐거움이다. 진보적 자유나 보수적 진실을 절규하는 신문 칼럼을 읽을 때가 아니라, 노출이 대담한 젊은 여자가 그의 젊은 애인의 허리를 부둥켜안고 활보하는 모습을 볼 때 나는 이 나라의 미래에 안도감을 느낀다. 여름 여자들의 그 손바닥만한 탱크톱과 핫팬티, 그리고 그 밖으로 드러난 팔다리 사이에서 나는 흔히 아득함을 느낀다. 여자들의 여름패션이 아무리 바뀐다 하더라도 탱크톱의 긴장감과 해방감을 능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탱크톱은 하나의 완연한 세계를 이룩한 패션이다. 드러내기와 감추기 사이에서 탱크톱은 가장 긴장된 타협을 이루어낸다. 그래서 헐렁한 탱크톱과 꽉 끼는 탱크톱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유혹적인가라는 질문은 성립되지 않는다. 탱크톱은 감추려는 가슴 부분을 오히려 더 드러냄으로써, 드러난 어깨와 팔을 거꾸로 감추는 듯하다. 탱크톱이 이룩한 그 긴장된 타협이 드러내기와 감추기의 경계를 허물어내는 것이다. 탱크톱의 끈은 브래지어의 끈과 함께 여름 여자의 어깨 위로 나란히 나타난다. 아, 그 두개의 끈 사이의 밀고 당김은 얼마나 놀라운가. 그 두개의 끈은 전혀 계층이 다른 끈이다. 탱크톱의 어깨끈은 겉옷으로서의 공식성을 위태롭게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브래지어의 어깨끈은 그 최소한 공식성을 벗어나고 있다. 흔히 브래지어의 어깨끈은 속옷의 질감을 그대로 드러내 보인다. 그 질감은 순결한 무방비의 질감이다. 그 두개의 끈 사이의 문명적 거리는 멀다. 그리고 그 두개의 끈은 서로 모순되면서 닮아간다. 탱크톱의 어깨끈은 형태를 버리고 증발하려 하지만, 브래지어의 어깨끈은 형태를 갖추어 세상 밖으로 나오려 한다. 여름 여자들의 어깨 위에서 그 두개의 끈은 충격적 대조를 이루며 평화롭게 공존한다. 그 어깨 위에서 브래지어 끈이 한쪽으로 흘러내렸을 때 평화는 문득 깨어질 듯한데, 나는 이런 어깨는 오래 바라보지 못한다. 올 여름에는 탱크톱의 어깨 위로 브래지어 끈이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투명한 브래지어 끈이 나왔다고 여성잡지 패션광고에서 읽었다. 속옷 끈이 몰고 오는 연상작용을 꺼려하는 새침한 속성이 여자들에게 남아 있는 모양인데, 뭐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탱크톱은 겨드랑살을 드러낸다. 살이 접혀서, 작은 고랑을 이루는 부위다. 마릴린 먼로는 이 부위의 살이 아름답게 접혀 있었다. 먼로는 죽어서 다 썩었겠지만, 후세의 여자들은 이 부위의 살을 먼로 살이라고 부른다. 너무 두껍지만 않다면 먼로 살은 아름답고 에로틱하다. 먼로살 주변에서 평화와 도발은 다르지 않다. 나는 그 모순 속에서의 긴장이 즐겁다. 더구나 지금은 찌는 여름인 것이다. 화장품 광고를 보았더니, 올 여름에는 틴트(TINT)라는 입술화장품이 나왔다. 이것은 장미에서 추출한 천연물감이다. 젊은 여자후배를 불러서 이 틴트를 실험해보게 했다. 틴트는 놀라운 화장품이었다. 립스틱이나 립글로스의 중량감, 작위성, 번들거림을 모조리 제거하고, 틴트는 여자의 입술을 편안하고 가벼운 여름입술로 바꾸어 주었다. 여자의 입술은 수많은 잔주름으로 덮여 있다. 립글로스는 그 잔주름들을 기름기로 덮어서 끈끈하게 번들거리는 공격성을 드러내지만 틴트는 그 주름들을 그대로 살려내면서 입술의 자연성을 되살려내고 있었다. 틴트의 아름다움은 그 헐거움과 그 빈약함에 있다. 잘 익은 수박을 식칼로 쪼개면 그 속에서 펼쳐지는 바다와 같은 선홍색은 천연의 색깔이다. 틴트는 그 수박의 식물성을 닮아 있었다. 립스틱과 립글로스는 바깥쪽을 지향하지만, 틴트는 입술과 미세하게 교섭하면서 입술의 안쪽을 지향하고 있었다. 립스틱과 틴트의 관계는 탱크톱 끈과 브래지어 끈의 관계와 유사하다. 틴트의 유혹은 그 평화와 무작위에 있었다. 밀고 당기면서, 여름 여자들의 노출과 화장은 스스로 긴장된 자리를 찾아간다. 나는 우리나라 여자들이 다들 예쁘고 다들 주눅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젊은 여자들의 성적 매력은 나라의 힘이고 겨레의 기쁨이다. 올 여름 여자들의 노출이 너무 심하다고 텔레비전은 개탄하고 있지만, 너무 그러지들 말아라. 곧 가을이 오면 여자들은 다시 옷을 입을 것이다. 좋은 것을 좀 내버려두라는 말이다.김훈/ 소설가· <한겨레> 기자

˝카메라 덕분에 목숨을 건진 적도 있어˝

1984년, 김기영 감독과 <바보사냥>(엄심정·김병학)을 찍는 도중 태백의 탄광촌에 머무른 적이 있어. ‘갈 데까지 갔다’는 뜻의 막장을 그때 처음 경험했는데, 한 사람이 겨우 무릎걸음으로 기어다닐 수 있도록 만든 작은 굴 안에서 질식과 압사의 공포를 느껴야 했지. 당시, 촬영팀을 따라 굴 안으로 들어가려던 나를, 주위에선 “거기까지 뭣하러 동행하냐? 그냥 밖에 있어라”고 만류했지만, 장소를 가리면서 찍는 스틸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며 극구 함께 갔지. 그런데 공간이 그렇게 작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지. 좁은 굴 속을 떠나니는 매캐한 석탄매연과 쉴새없이 흐르는 땀으로 얼굴과 손이 온통 까만 연탄반죽으로 뒤덮였지. 얼마 안 가 카메라도 작동을 멈추고 말았어. 탄가루가 렌즈와 셔터 등 미세한 기계의 부품에 날아들면서 생긴 일이었어. 결국 카메라 한대를 버리고, 지독한 폐쇄공포를 경험한 것이 그날을 오래도록 기억에 남게 한 거지. 카메라가 고장났지만, 촬영을 마치기 전까진 나오고 싶어도 나올 수 없던 터라 지옥 같은 더위에 시달리면서도 갱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어.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기다리던 탄차가 도착하고, 밖으로 나와 맑은 공기와 햇살을 느끼는 순간 ‘살았구나’ 그런 생각밖에 안 들더라고. 온통 탄가루를 뒤집어쓴 통에 배우나 스탭이나 누가 누군지 모르겠더라고. 지금 생각하면,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저 스틸을 찍겠다고 막장으로 뛰어든 행동이 충분히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었지. 영화를 위해 어디라도 달려가는 사람들이 바로 감독이고, 배우고, 스탭들이야. 영화 이외엔 자신의 안전도 부차적인 문제인 거지. 같은 해 찍었던 <아가다>(김현명 감독, 유인촌·이보희 주연)에서 이보희의 몸을 사리지 않은 연기는 두고두고 잊지 못할 거야. 아버지의 간호를 위해 환속한 아가다 수녀가 사모하던 이의 배신으로 기억상실증에 걸려 눈밭을 헤매는 장면을 찍을 때였어. 눈밭을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맨몸으로 뛰어가라는 지시를 받자마자 이보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바로 옷을 벗고 몇번이고 같은 장면을 연기했어. 영하 20도의 추위에 모두들 오그라 붙었지만, 이보희는 마치 추위를 모르는 것처럼 행동했지. 컷 사인이 날 때마다 코디네이터와 스탭들이 입혀준 점퍼로 눈사람 모양이 되어선 방금 촬영한 장면을 재차 확인했어. 그런 그녀를 보며 ‘아, 배우는 정말이지 아무나 되는 게 아니구나. 저렇게 자신을 생각지 않은 채 감독의 지시에 무조건 따른다는 게 쉽지 않을 텐데…. 책임감이 무서운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했지. 우스갯소리긴 하지만, 배우의 배(俳)자를 가만히 살펴보면, ‘사람(人)이 아니다(非)’란 뜻으로 풀이할 수 있거든. 그게 딱 내 생각이야. “배우란 보통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는 사람이 바로 배우다.” 보통 현장을 나설 땐 두대에서 세대의 카메라를 기본으로 갖추고 다녀. 흑백, 컬러, 스냅사진을 따로 찍을 수 있도록 말야. 카메라의 모델도 많이 바뀌었지. 니콘 F2까지는 취급해봤는데, 요즘엔 니콘 F5가 최신형이라고 하더군. F3까지는 수동카메라로 출시됐는데, 그중 F2는 완전 기계식 카메라의 명기라고 할 수 있지. 프로용으로 만들어져 가장 많이 썼던 모델은 니코마트(Nikomat)였어. 줄잡아 네댄가 다섯대가 내 손을 거쳐갔을 거야. 니코마트는 70년대 등장한 모델로, 무겁긴 해도 내 입맛에 딱 맞는 기종이었어. 무거운 반면 흔들림이 없고, 어디 부딪혀도 큰 고장이 안 났지. 그만큼 내구성이 좋았고, 마운트 호환도 자유로웠어. 또한 니콘에서 나온 다양한 렌즈를 쓸 수 있었지. 그 밖에도 내 손을 거쳐간 카메라는 독일 카메라 롤라이 플렉스와 롤라이 코드, 일본 교세라 그룹의 야시카 카메라 등이 있었어. 차 좋아하는 사람들이 내부 장식과 개조, 옵션 장착에 온통 돈을 들이붓듯이, 카메라 만지는 사람은 그저 돈만 생기면 좋은 렌즈, 신형 카메라와 기자재에 눈독들이기 바쁘지. 그나마 아이들이 크면서 크지 않은 벌이에 사치를 부리긴 힘들었지만 나도 그런 욕심이 없었던 건 아냐. 좋지 않은 형편이지만, 아이들이 학교에서 재산 현황을 체크해오라는 숙제를 받으면 카메라만큼은 꼬박꼬박 적어낼 수 있었어. 카메라가 텔레비전만큼이나 귀하던 시절의 얘기야. 그렇게 목숨같이 아끼던 카메라 덕분에 목숨을 건진 적도 있어. 국내 영화제작 사상 최대의 참사로 꼽히는, 93년 <남자 위에 여자>의 헬기 추락사고 현장에 바로 내가 있었어. 그때도 스틸을 찍고 있었어. 아침에 현장을 가려고 길을 나서는데, 카메라에 달린 줌 렌즈(Zoom lens)가 툭 하고 떨어져 깨진 거야. 현장에 도착해서 촬영감독과 조명기사에게 그 이야길 했더니, “아, 백 기사님, 오늘 일은 다 하셨네요. 어쩌죠” 하고 놀림 반, 걱정 반을 하는 거야. 하긴, 남자주인공이 헬기를 타고 신부가 기다리는 결혼식장에 도착하는 장면을 찍는데, 줌 렌즈가 없으면 말짱 헛일이었지. 구술 백영호/ 스틸작가 54년간 영화현장 사진에 몸담음 <유관순> <생명> <임꺽정> <만다라> <바보사냥> <바보선언> <아다다> 등 100여 작품 5만여컷의 스틸작업 정리 심지현 simssisi@dreamx.net·사진 정진환 jungjh@hani.co.kr

문화관광부, 일본문화 4차개방 의견수렴 나서

지난해 역사교과서 파동 때문에 물밑으로 잠겼던 일본대중문화 개방과 관련해 문화관광부가 의견 수렴에 나섰다. 최근 영화·애니 관련단체에 3차개방까지의 평가와 남은 분야 개방에 대한 의견수렴을 요청한 것이다. 거의 전면개방에 가까운 수준이 될 것으로 보이는 4차 개방에 대해 업계에서는 이미 대세로 인정하고 있는 상황이다. 다만 분야별로 내용이나 시기 면에선 조금씩 다른 의견을 보이고 있다. 영화 분야는 지난 몇년간에 걸친 한국영화의 성장세에 힘입어 “자신있다”는 분위기다. 유일하게 묶여있는 ‘18살 이상 관람가’ 부분까지 풀어도 큰 지장이 없다는 것이다. 영화인회의의 경우 자율등급 체제인 일본에서 등급을 받지 못한 ‘로망 포르노’ 같은 영화도 한국의 에로 비디오 보다는 덜 선정적이라 판단하며 개봉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오히려 이 기회에 위헌여지가 있는 수입추천제까지 없애자는 의견까지 내놓고 있다. 사상적으로 문제가 있는 작품을 ‘걸르는’ 역할을 했던 이 제도는 일본의 ‘저질 영화’의 수입을 막을 수 있는 장치라는 것 외에는 존속해야 할 명분이 사실상 없다. 하지만 일본 대중문화의 선정성에 대한 우려가 여전한 터라 이 부분은 좀더 세부적인 논의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반면 애니메이션 분야는 조심스런 분위기다. 영화인회의는 한국 애니의 수준을 고려해 “산업의 위협정도가 높은 전체 관람가의 극장용 애니메이션은 현재 수준에서 유지하며 15살 이상 관람가 등급 정도부터 개방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일반영화와 정반대의 전략을 취하자는 얘기다. 이에 반해 한국애니메이션제작자협회는 “텔레비전의 경우엔 사실 개방과 관련없이 이미 들어올대로 들어온 상태”라며 극장개봉작에 대해서도 원칙적으로 반대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다만 “선정적·폭력적 작품 등은 선별적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것과 국산창작물에 대한 지원책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최근 <센과 치히로의 대모험>의 엄청난 성공과 관련해 한국 애니메이션의 고사를 우려한 쪽도 있지만 일부에선 “<라이온 킹>의 대성공으로 한국에서 애니 제작바람이 불었다”며 오히려 긍정적인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었다. 김영희 기자

킹카녀와 푼수녀 사이,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 줘>의 김서형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 줘>는 여성 캐릭터의 종합선물세트 같다. 착하면서 실수투성이인 여자, 둔하면서 감상적인 여자, 터프하면서 마음약한 여자, 푼수에 과격한 여자…. 대부분 ‘착한 나라’에 발을 걸치고 있는데 비해 ‘나쁜 나라’의 기운을 풍기는 이 여자, 단연 튄다. 또랑또랑한 하이톤의 목소리. 극중 정준호의 옛 애인으로 등장한 커리어우먼, 일명 ‘네! 실장님’을 연기한 김서형은 첫눈에 보기에도 ‘딱이다’ 싶을 만큼 서늘한 눈매에 길고 가는 팔다리를 가진 서구적인 미인이다. “세련되고, 섹시하고, 화려했으면 좋겠어요.” 캐스팅 때의 주문이었다. 등장부터 신은경을 긴장시켜야 하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주인공과 대조되는 설정을 요구하는 인물이었다. 대사 중에 자주 등장하는 이름 ‘이강연’ 대신에 처음 시나리오에는 그저 ‘킹카녀’로 표기되어 있었던 역할. 즉 ‘도도하고 잘 나가는 현대 여성’의 이미지만 담아내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김서형이 연기하는 이강연은 조금 다르다. 외모상으로는 100% 시나리오 그대로지만 이면에 왠지 모를 어긋남과 빈틈을 가진, 그래서 정이 가는 사람으로 느껴진다. 단순한 ‘설정’에서 생명을 가진 캐릭터로 만들어간 것이다. “솔직히 신이 많은 건 아니거든요. 총 6신 정도? 그런데 보는 분들마다 내 신이 그보다는 많은 줄 알았다고 하세요.” 그만큼 인상적이었다는 얘기다. “사실 많이 신경을 쓰지 않은 역할인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좀더 욕심을 부렸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후회도 들어요.” 미스 강원 출신의 김서형은 KBS공채 탤런트로 연기자의 길에 접어들었다. 드라마 <딸부잣집>부터 시작해 몇년 동안 조역, 단역까지 텔레비전 활동을 했지만 “마음 상하는 일을 몇번 겪고” 잠시 연기생활을 접었다. 가끔 커리어우먼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CF로 소일하던 그는, 어느 순간 “이건 어릴 때의 막연한 동경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일이고, 해야 하는 일이다. 부모님을 생각해서라도 다시 시작하자”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기회는 오히려 영화쪽에서 찾아왔다. <찍히면 죽는다>의 양호선생님, <베사메무쵸>에서는 발레선생님, <오버 더 레인보우>에서 ‘무지개’가 아닐까 의심되던 무용과 경희로 조금씩 비중을 높여가던 무렵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다. “저 알고보면 푼수예요.” 생긴 것 같지 않게 털털하고 소박한 편이라면서도 김서형은 “적어도 내 공간에 있는 것,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양보하지 않는 성격”이라는 말을 잊지 않는다. “물론 어릴 적부터 시작한 배우들보다 늦은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나이는 숫자에 불구하다고 봐요. 초조하거나 불안하지 않아요. 저는 여전히 백지인 걸요. 그려나갈 일만 남았죠.” 적어도 그에겐 채워진 공간보다는 채워나갈 공간이 많은 듯 보인다. 게다가 그 백지의 크기 역시, 아직 아무도 모른다.

˝아니, 당신 살아 있었어?˝

(저번호에 이어) 이날은 <남자위에 여자>의 첫 장면으로 쓰일, 신부가 기다리는 선상결혼식장으로 신랑을 태운 헬기가 도착하는 장면을 찍을 예정이었어. 촬영준비가 갖춰진 건 오후 4시가 다 돼서였고, 잠실선착장 하류 200m 지점인 한강 위로 헬기가 날아오르면서 촬영이 시작됐어. 당시 헬기에는 모두 8명이 올랐는데, 정원보다 조금 많이 탄 거지. 예정대로라면 당연히 나도 동승해서 스틸을 찍어야 했겠지만, 줌렌즈가 없어 먼 거리 촬영이 불가능했으므로 탑승을 포기했어. 사고가 난 건 이륙을 마친 헬기가 약 10여분가량 한강 상공을 두어 차례 배회하던 찰나였어. 촬영기사 손현채씨가 “앵글이 잘 잡히지 않는다”며 기장에게 고도를 낮춰달라고 부탁을 했던가봐. 근접촬영을 위해 수면 위 10m까지 고도를 낮추는가 싶더니 갑자기 헬기가 기우뚱거리며 수직추락한 거야.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아래서 대기하고 있던 배우들과 스탭들은 할말을 잊었고, 구경하던 사람들 사이로 비명소리가 터져나왔어. 헬기는 처음부터 완전히 가라앉지는 않았고, 기체가 어느 정도 수면 위로 보이는 상태였어. 잠시 뒤 헬기의 깨어진 창문에서 누군가 기어나오더니 구조를 요청했어. 나중에 보니 취재차 함께 탔던 KBS 프로듀서 김일환씨였어. 자기 발로 걸어나온 사람은 그 사람뿐이었어. 다행히 세모유람선 보트구조요원들이 인근 선착장에 있다가 사고 현장의 김씨를 발견하고, 구조를 도왔지. 이어 사고신고를 받고 출동한 한강 순찰대 구조대원들이 몰려와 보트 2정에 나누어 사고자들을 건져올렸지만, 이미 5명은 목숨을 잃은 뒤였어. 조금이나마 의식이 있던 남자 주연 변영훈과 미도영화사 대표 이상언씨는 병원으로 급히 후송됐으나 차례로 숨을 거두었어. 결국 살아난 사람은 제 힘으로 헬기를 탈출해 물 밖으로 나온, 해병대 출신의 김 PD밖에 없었어. 영화사상 현장에서 7명의 사망자를 낸 최악의 사고였지. 그때 선착장에서는 여자 주연 황신혜가 신부복 차림으로 신랑 역인 변영훈을 기다리다 사고 현장을 고스란히 지켜보고 말았어. 목숨을 건졌다는 다행함보단 그녀에게 큰 공포와 마음의 상처를 남긴 일이었을거야. 나 역시 처음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 그저 멍하게 서 있다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자 부랴부랴 카메라로 현장을 담아나갔어. 헬기가 강물 위로 머리를 삐죽이 내밀고 서서히 가라앉던 장면은, 줌렌즈가 없어 작게나마 촬영해 놓은 게 있어. 손은 떨리고, 머릿속은 하얘져버렸지만, 지금 이 순간을 남길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생각뿐이었어. 비명횡사한 이들의 명복을 맘속으로 빌고 또 빌며, 울음을 삼켰지. 줌렌즈가 그날따라 왜 금이 갔는지 모르지만, 그걸로 인해 목숨을 건졌다는 생각만큼은 변하지 않아. 헬기에 탑승했다 목숨을 잃은 사람 중엔 김 PD와 일행인 백아무개 사진기사가 있었는데, 우리 집사람은 텔레비전에 촬영기사 백씨 사망이라고 나오자 내가 죽을 줄 알고 거의 실신하다시피 했어. 친척들과 이웃으로부터 걸려오는 전화 때문에, 안부를 전하러 전화를 건 나는 세 시간 만에 가까스로 집사람과 통화할 수 있었지. 그때 그 사람이 건넨 첫마디가 “아니, 당신 살아 있었어?”였어. 하긴 촬영헬기에 탄 촬영기사 백씨라면 누구라도 나를 떠올렸을 거야. 나조차도 그런 우연에 가슴이 떨렸지. 숨진 사람은 헬기 기장 최씨를 비롯해 영화제작자 이상언, 배우 변영훈, 촬영기사 손현채, 촬영조수 김종만, 기획실 직원 김성준, KBS 카메라맨 백순모씨였어. 그런 큰 사고를 당하고 나서 한동안 카메라를 드는 것조차 두려웠어. 사고의 후유증은 생각보다 오래 그리고 크게 남았지. 현장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질 즈음, 최수종과 오연수가 주연을 맡은 <아래층 여자와 위층 남자>(신승수 감독, 1992)에 투입됐지. 같이 일하던 스탭들과 배우들이 어리긴 했지만, 금세 친해져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일을 할 수 있었어. 그 작품이 공식적인 내 필모의 마지막인 듯했어. 그걸 끝으로 한동안 현장에 나가지 않다가 얼마 전 <아름다운 동행>이라는 국방부 영화를 찍고, 다시 ‘부활한 현역맨’으로 돌아온 거지. (웃음) 나에게 끝이란 아마 현장에서 쓰러지는 날이 아닐까? 난 그렇게 생각해. 그게 끝이라면 아마 행복할 거야. 웃으면서 눈감을 수 있을 거야. 고희기념 전시회를 마치고 영상원에 자료를 기증하기로 했을 때 제일 먼저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어. 40여년간 간직한 스틸이 방 하나에 가득히 들어차는 동안 “이것 좀 어떻게 버릴 수 없냐”고 구박을 하기도 한 그녀지만, 막상 스틸을 실으러 트럭이 도착하자 울먹이더라구. 솔직히 내가 없는 사이 스틸 박스들을 치워버렸대도 할말이 없었지만, 어느새 아내도 그 박스에 담긴 나의 정성을 알아서인지, 정이 들어서인지 서운함을 감추지 못했어. 꼭 잘 키운 딸 시집보내는 기분이라더군. 구술 백영호/ 스틸작가 54년간 영화현장 사진에 몸담음 <유관순> <생명> <임꺽정> <만다라> <바보사냥> <바보선언> <아다다> 등 100여 작품 5만여컷의 스틸작업 정리 심지현 simssisi@dreamx.net·사진 정진환 jungjh@hani.co.kr

엄청난 거미떼가 마을을 덮쳤다

거대한 곤충의 습격’은 여름영화의 단골 소재 가운데 하나다. <프릭스>(원제 The eight legged freaks)에선 산업폐기물에 오염된 강가의 먹이를 먹고 수천, 수만배로 몸을 불린 거미들이 주인공이다. 이들이 나타난 곳은 미국의 작고 외진 폐광촌. 거미농장의 주인은 괴물거미에게 습격당한다. 그러나 이들의 정체를 아는 건 보안관 샘(캐리 뷰러)의 어린 아들 마이크 뿐이다. 마이크의 말을 믿지 않으려던 사람들 앞에 차례차례 거대한 거미들의 습격이 이어진다. 10년만에 마을에 돌아온 광산 엔지니어 크리스(데이빗 아퀘트)는 그의 옛사랑인 샘, ‘외계인의 지구습격’을 믿는 괴짜 1인방송국 DJ 할란(더그 E 더그)과 함께 거미와 대결한다. 사실 <프릭스>의 스토리는 뻔하다. 게다가 <인디펜던스 데이><스타게이트>의 제작진들의 영화라니, 진부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를 상상하기 쉽다. 하지만 <프릭스>는 ‘의외로’ 흥미로운 구석이 많다. 곳곳에서 나타나는 1950년대 할리우드 B급 공포영화의 정서와 썰렁한 유머감각은 이 영화를 <인디펜던스 데이> 등과 같은 주류영화에서 슬쩍 비껴서게 한다. 영화속에 나오는 흑백 텔레비전 시리즈가 아니더라도, 몰려드는 거미떼를 피해 마을주민들이 상가로 피할 때까지 장면의 긴박감은 옛 공포영화를 보는 듯 하다. 과부거미·깡충거미·타란튤라 등의 공격은 무시무시해 보이다가도 웃음이 나온다. 수컷 거미들은 암컷 거미를 위해 사람들을 거미줄로 사람을 산 채 둘둘 미이라처럼 말아 매달아 놓는다. 거미와 싸우던 고양이는 천장에 석고상처럼 그 얼굴만 다. 특수효과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괴물영화와 달리 짜임새도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30살 감독 엘 브린의 장편 데뷔작. 30일 개봉. 김영희 기자

<쓰리>의 김혜수, 새 연기인생의 출발

옆에서 언제라도 ‘까르르’ 웃음을 터뜨릴 것 같고 도무지 감춰진 모습이 없어 보이는 배우. 좀 고약하게 말하자면 너무 친근해 별로 궁금할 게 없는 배우. 적어도 지금까지 김혜수는 그랬다. 1986년 17살에 데뷔해 지금까지 방송드라마 출연은 셀 수도 없고 영화 출연작만도 종이 한 장 가득 채울 정도인 데도 그는 한결같이 밝은, 당당한, 섹시한 이미지다. “연예인으로선 그래요. 정말 많이 노출되어 살아왔죠. 하지만 ‘연기자’로선 그 누구보다 보여지지 못한 면이 많지 않나요” 지난 24일 시내의 한 극장 앞 카페에서 만난 김혜수는 마치 새로운 연기인생을 출발하는 사람처럼 말했다. 그만큼 1~2년 동안 많이 배우고, 깊어진 느낌이었다. “사실 연기경력에 비해 영화라는 매체에 적응하는 시간은 내게 없었던 것 같아요. 텔레비전 보다 영화의 연기가 더 규격화된 것 같다는 비판도 그래서 맞는 말이고요.” 그는 지난주말 개봉한 한국·타이·홍콩의 옴니버스 영화 <쓰리>의 한편인 <메모리즈>(감독 김지운)에 출연했다. 기억을 잃고 낯선 신도시를 헤매는 호러영화의 주인공이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커다란 눈에 물기를 머금은 채 돌아다니다 마지막 장면에선 충격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 작품에서 김혜수는 사진 속 장면을 제외하곤 단 한번도 웃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영화보다 연기를 어떻게 할까를 생각하는 건 더 적었던 것 같아요. 다만 영화에서 요구하는 내 분위기를 끌어내 그걸 촬영 내내 유지하려고 했어요. 그런 방법이 더 적합했던 영화 같고요.” 화려한 그의 이미지와 김지운 감독의 만남, 그것도 단편영화라는 점에서 주변에선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지난해 촬영기간은 정말 “재미있고 진지한” 시간이었다고 한다. “처음엔 <쓰리>가 어떤 프로젝트인지도 몰랐어요. 다만 <조용한 가족>의 시나리오를 처음 보고 이런 생각을 하는 김 감독은 어떤 사람일까, 늘 호기심이 있었죠. 개봉 안 하면 어때, 그런 생각이었어요.” 학교 다닐때 단편영화의 스탭을 하면서 느꼈던 열정을 기억해내는 시간이었다고 한다. 그때 코엔 형제의 영화가 보여주는 편집의 매력에 푹 빠지기도 했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앞으론 이제까지 전형적 이미지를 다시 반복하는 선택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현재 촬영중인 은 “작품은 새로운 시도인데, 내 역은 한정되어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나”, 많이 고민했고 그 안에서 다른 모습을 찾으려 노력했다고 말한다. 인터뷰 도중 문득 10년전 그가 출연했던 단막극 <누군가를 사랑하려는 이유>가 떠올랐다. 스스로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꼽는 드라마다. 끊임없이 누군가를 사랑하려 하지만 사랑하는 이들을 모두 떠나보내는 지독히도 쓸쓸한 얼굴이었다. 이미 그때부터 그는 항상 다른 얼굴을 가슴에 품고 있었던 것 아닐까. 이제 새 작품마다 차례로 그의 다른 모습을 꺼내놓을 김혜수를 기대하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메모리즈>와 <고잉 홈>에 나타난 기억과 망각의 환영들

스포일러 워닝(Spoiler warning) : 이 글을 읽는 분 가운데 혹 <쓰리>를 아직 안 보신 분이 있다면, 이 글을 읽음으로써 영화의 내용을 미리 알게 될 수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옴니버스영화 <쓰리>의 세 단편 가운데, 논지 니미부트르의 <휠>에 대한 이야기는 좀 접어둬야겠다. (아마도 영화를 보고나서 이 글을 읽게 될) 독자들이라면 그 이유를 충분히 가늠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다른 두편의 영화, 김지운의 <메모리즈>와 진가신의 <고잉 홈>은 어느 정도는 흥미롭고 매력적인 영화들이다. 크리스토퍼 도일의 촬영과 진가신의 ‘초강력’- 그러나 좀 억지스러운 부분이 없지는 않다- 멜로 감각이 잘 어우러진 <고잉 홈>이 단연 뛰어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영화를 보고 난 지금, 내 머릿속에서 맴도는 것은 주로 <메모리즈>에 관한 기억들이다. 아내는 어디론가 사라졌고, 남편은 그녀가 왜, 어디로 사라졌는지를 알지 못한다. 아니 기억하지 못한다. 길가에 쓰러져 있다 눈을 뜬 아내는 자신이 왜 그곳에 와 있는 것인지 의아해한다. 그녀 또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이 다시 만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아내는 그녀의 부정(不貞)을 폭력적으로 단죄한 남편에 의해 이미 죽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내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해 그 죽음의 이유를 찾아가는 영화인 <메모리즈>는, 언뜻 브레송의 <유순한 여인>을 미이케 다카시풍으로 리메이크한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남편에 의해 살해된 ‘부정한 여인’, 아내에게 던져진 공간은 스코시즈의 <일과 후> 같은 영화에서 보이던 카프카적 미궁처럼 여겨지지만, 그녀에게 주어진 파편화된 시간은 죽은 자의 영혼이 이승과 저승 사이에서 잠시 머무는 시간, 즉 바르도(bardo)의 그것이다. 김지운은 이 옴니버스 단편 프로젝트에 합류하면서 갑자기 최근 한국 단편영화들의 한 익숙한 경향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를테면, <메모리즈>는 윤영호의 <바르도>나 이모개의 <선샤인> 같은 단편들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사라진 아내, 기억하지 못하는 남편 죽은 자는 자신의 죽음을 모르고, 산 자는 자신의 죄의식을 감추려 든다. 보르헤스의 단편에 나오는 ‘죽어서의 한 신학자’와 카프카의 K의 만남? 하지만 <메모리즈>를 이렇게까지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김지운은 이 익숙한 컨벤션을 받아들이지만, 그건 단지 관객을 그들 자신의 악몽으로 온전히 인도하기 위한 초대장일 뿐이다. ‘New Town’이라는 이름이 붙은 한 신도시의 아파트를 주요 무대 가운데 하나로 삼은 <메모리즈>는 어쩌면 올해의 <소름>이 됐을 수도 있는 영화다. 김지운은 일견 평화로워 보이는 친숙한 도시공간을, 구멍이 숭숭 뚫린 썩은 치즈덩어리처럼 보이게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존 카펜터의 <투명인간의 사랑>, 혹은 차이밍량의 <구멍>에서와 같은 노골적인 방식으로는 결코 아니다. <메모리즈>에서 풍경은 먼저 인물들의 얼굴을 통해 드러나며, 그들의 얼굴에 새겨진 불안감과 공허가 깊으면 깊을수록, 그만큼 더 풍경은 많은 상처를 숨김없이 드러내게 된다. 이는 이른바 ‘상업영화’ 작가 김지운이, <메모리즈>에서 60년대 서구 모더니즘의 흔적을, 특히 그 시기 영화들에 나타난 여성들의 얼굴과 풍경과의 변증법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막 건물들을 세워 올리고 있는 타워크레인들을 바라보며 망연히 서 있는 김혜수의 얼굴과, 유사한 풍경 속에서 허하게 서 있던 <나비>의 김호정의 얼굴을 중첩시켜 보는 것도 가능하다(그리고 두 영화 모두 ‘기억의 상실’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아파트 외곽에 걸린 플래카드가 처음 보여질 때 ‘New Town’이라는 글자들 가운데 ‘o’부분에만 구멍이 뚫려 있던 것이, 나중에 다시 한번 보여질 때는 플래카드 곳곳에 구멍이 뚫려 있음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데, 이는 아마도 <메모리즈>가 이상의 모티브와 관련하여 제공하는 작은 서비스일 것이다. <메모리즈>는 우리가 망각하고 있던, 억압하고 있던 것들이 마침내 나타나, 어쩔 수 없이 그들을 응시해야 하는 순간이 바로 두려움이 솟아오르는 순간이라고 말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그것들은 다름 아닌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우리를 지탱해주고 있던 것들이다. <메모리즈>는 환영을 통해 공포를 조장하는 장르의 관습을 벗어나지는 않지만, 대신 우리 자신의 망각을 일깨움으로써 우리의 환영이 부서지기를 바라는 영화이다. 특히 도시라고 하는 환영. <메모리즈>에서 그것은 기억의 시체들 위에 솟아오른 공중누각이다. <메모리즈>의 부부에게는 어린 딸이 하나 있는데, 이 아이는 영화에서 그다지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인물은 아니며 금세 화면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진가신의 <고잉 홈>에서 부부의 (태어나지 못한) 딸아이는 꽤 중요한 기능을 담당한다. 여기서 아내는 죽었고 살아 있는 남편은 자신이 지닌 의술을 총동원해 그녀를 살리려 든다. 그런데 이번에 바르도의 시간 속에 놓여 있는 것은 바로 그 아이이다. 사실 영화 속의 부부를 끝내 죽음으로 불러들이는 것도 이 아이이다. 이 아이가 이웃의 소년을 유인해내지 않았더라면, 소년의 아버지인 경찰은 그의 이웃을 찾지 않았을 것이고, 어쩌면 아내를 살려내려던 남편의 노력이 결실을 맺었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여자아이는 마침내 자신들의 부모와 만나 가족사진을 찍고, 소년은 다시 외톨이가 된다. 그는 여자아이처럼 자신의 아버지를 그의 곁에 서둘러 불러들이려 할지도 모른다. 즉 진가신의 <고잉 홈>은 의미심장하게도 영화 속의 아이들(미래)을 모두 죽여놓고서 시작한다. <메모리즈>에서 아이는 단지 방기되었을 뿐이다. <메모리즈>, 기억은 두려움이 시작되는 지점 <고잉 홈>의 아파트는 기억의 시체들을 짓밟고 선 괴물 같은 존재가 아니라, 지독할 만큼의 인력으로 기억을 붙드는 공간이다. 두 영화의 남편들은 모두 아내의 시체를 곁에 두고 있지만, 한쪽은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다른 한쪽은 망각을 두려워한다. 또 <메모리즈>의 아파트가 사람들이 꿈을 안고 몰려드는 신도시의 공간이었다면, <고잉 홈>의 아파트는 사람들이 모조리 빠져나가버린, 버려진, 황량한 공간이다. 두 영화의 가장 큰 차이는, 한편이 익숙한 공간 속에 뚫린 구멍들- 우리의 빠른 근대화가 미처 채워넣지 못했던 바로 그 구멍들- 을 발견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인물들을 다루고 있는 반면(<메모리즈>), 다른 하나는 그 구멍 사이로 기어이 전근대의 노스탤지어를 끼워넣으려는 인물들에 관한 것(<고잉 홈>)이라는 점에 있다. 아내는 남편의 시체를 3년간 정성스레 돌보아 마침내 그를 깨어나게 하지만, 이제 자신이 죽어버린다. 깨어난 남편은 다시 3년간 아내의 시체를 돌보고 그녀가 깨어날 날은 이제 3일밖에 남지 않았다. 여기서 망자의 곁에 초막을 짓고 머물던 우리네 오래 전의 관습을 떠올려보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고잉 홈>의 빈 구멍 속으로 들여다보이는 것은 우리를 놀랍게 만드는 삼년초토(三年草土)인 것이다. 반환 전 홍콩에서 관금붕은 <인지구>를 통해, 지나간 것들은 결코 지금의 빈자리를 채울 수 없다는 사실을 쓸쓸하고 아름다운 도시괴담 속에 펼쳐보였지만,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진가신은 ‘위대한 사랑의 힘(!)’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 불가능이 거의 가능할 것처럼 믿고 싶게 만든다. 흡사 케베도의 <죽음 저 너머의 사랑>에 등장하는 유명한 시구처럼, 이 연인들은 ‘먼지로 남을 것이나 사랑에 빠진 먼지가 될’ 그러한 존재들인 것처럼 보인다. 이때 두 연인을 지켜보는 것은 이웃의 경찰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구멍을 발견하는 것은 바로 그이며, 그야말로 새벽의 폐허 위에서 전날 밤의 일을 떠올리며 어리둥절해하던 괴담의 주인공이다. 과거(이웃의 부부)와 죽은 미래(아이들)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경찰이다. 그의 현실은 갑자기 꿈같은 것이 되어버렸고, 꿈같은 일이라고 생각한 것은 현실이 되어 눈앞에 나타났다. 하지만 꿈은 다시 꿈으로 되돌려 보내져야만 한다. 경찰관은 이 아파트 밖으로 빠져나와야 할 것이고, 무엇보다 그의 유머를 되찾아야 한다. “그 여자애가 자꾸 절 노려봐요”라고 말하는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답변, “그럼 너도 노려봐”. 그러나 진가신은 두 연인의 죽음의 공간에 온전히 묻히기를 원하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따라나설 필요는 없다. 공포영화에서의 침묵은 대개 말-사건을 배태한 침묵이게 마련이다. 우리는 그 무언가가 터져나오기를 가슴 졸이며 기다린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그 말-사건 다음에 다시 찾아오는 침묵이다. <메모리즈>가 아쉬운 것은 그 말-사건 다음에 다시 찾아온 침묵이 말-사건 이전의 침묵의 동어반복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부부 사이에 있었던 끔찍한 살인사건의 전모가 밝혀지고 난 다음 보여지는 풍경은, 이젠 다소 상투적인 냉소적 시선에 사로잡힌 풍경, 더이상 아무런 불안의 징후도 보이지 않는 풍경이 되어버린다. 김지운은 신도시의 풍경을 세밀히 탐색해 들어가지만 결코 풍경의 재발견에는 이르지 못한다. 다시 말하지만, 올해의 <소름>이 되었을 수도 있었을 이 영화는, 결국 <파라다이스 빌라>처럼 끝나버렸다. <고잉 홈>, 죽음은 삶의 비밀 진가신의 영화에서 재미있는 설정 가운데 하나는, 경찰관이 수다를 떠는 동안 텔레비전 화면에 보여지는 여자의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 반면, 마침내 경찰관이 그녀의 소리를 듣게 될 때 정작 그는 침묵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잉 홈>의 결론은, 말-사건 다음에 찾아오는 매우 평화롭고 거대한 침묵을 받아들일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그건 다름 아닌 죽음이다. 필립 아리에스의 <죽음 앞에 선 인간>에는 “눈을 속이기 위해 만들어진 세계에서, 죽음은 삶의 비밀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허무 이외의 어느 것도 숨기지 않는 하나의 비밀이다”라는 말이 있다. 애타게 자신의 짝을 생으로 귀환시켜 다시 만나고자 하는 연인들- 그들은 자살이란 방법은 아예 꿈조차 꾸지 않는다- 이 등장하는 <고잉 홈>은, 어쩌면 바로 이런 전제에서 출발한 영화였을 것이지만, 훌쩍 판타지로 이월하면서 전제를 위반하는 결론으로 끝이 난다. 하지만 영화에서 논리를 따지는 건 무망(無望)한 일일 것이고, 진가신의 주저함 없는 연출은 분명 관객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한 것이다. (끝까지 논지 니미부트르의 영화가 언급되지 않은 점에 불만을 느낀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간단히 덧붙이자면, <휠>은 김지운과 진가신의 영화에 부록으로 덧붙여진 아동용 교훈극 정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물론 아주 잠깐 ‘야한’ 장면이 나오기는 하지만 말이다.)유운성/ 영화평론가 akeldama@net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