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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VD | 진짜 DVD세상으로 바뀌긴 한 거야?

1996년 최초의 DVD 타이틀이 세상에 나온 이후 지금까지, DVD 에 대한 관심은 주로 기술적인 면에 집중되어왔다. 뛰어난 화질과 음질을 자랑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한 LD 와 가장 보편적인 영상저장 매체로 시장을 장악한 상태인 VCR 과의 차별화가 성공의 관건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LD 의 실패를 경험했으며, VCR 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던 소비자들도 초기엔 DVD 가 가진 기술적 우위에 관심을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전세계적으로 DVD 의 보급률이 높아지고 엄청난 양의 타이틀이 지속적으로 출시되기 시작하면서, DVD 를 둘러싼 관심은 점차 기술적인 면을 벗어나 DVD 가 만들어내는 문화적, 산업적인 변화에 집중되고 있다. 그 맥락에서 DVD 가 과연 사람들의 영화관람 패턴에 어떠한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는지 알아보는 것은, 영상 소비자의 입장에서 DVD 의 수용여부를 결정하는 데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DVD 의 모태는 LD 그런데 아이로니컬한 것은 그 시작을 DVD 가 아닌 LD 에서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비록 완전히 실패해 사라진 매체이기는 하지만 LD 가 만들었던 영화관람 패턴이 그대로 DVD 에 이전되었기 때문. ‘극장의 감동을 그대로’라는 LD 의 광고 문구가 말해주는 것처럼 LD 는 영화관람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인 극장시스템을 재현하려는 노력에 의해 만들어진 매체였다. LD 의 역사를 ‘가정에서 작은 극장시스템의 구현을 목표로 했던 끊임없는 여정’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 결과 LD 는 우선 화면의 구성비율에서부터 기존 매체들과 차별화를 만들었다. 극장에서 보는 일반적인 와이드스크린 규격(1.85:1 또는 2.35:1)이 TV (1.37:1)로 옮겨오면서 잘리는 것을 최대한 막기 위해 화면 위아래에 검은색 테두리가 나타나는 레터박스(Letterbox) 형식을 선보였던 것이다. 이는 TV 크기에 맞추어 화면을 잘라낼 경우, 잘린 화면에 들어 있는 정보들을 보지 못하게 되는 현상에 대한 LD 소비자들의 요구를 수용한 결과였다. 또한 LD 는 ‘영화의 반은 소리’라는 명제에 따라 돌비 서라운드, 돌비 프로로직, THX, AC-3 등 입체음향의 구현을 위한 다양한 사운드시스템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TV 와 바로 연결해서 보는 VCR 과 달리, LD 를 보기 위해서는 앰프와 스피커 등에 대한 다소 전문적인 AV 지식이 어느 정도 필요했던 것도 바로 거기에 있다. 중요한 것은 그 결과 여러 개의 오디오 채널을 이용하는 입체음향의 일부 채널을 희생할 경우(예를 들어 스테레오 기능을 포기하고 모노로만 들을 경우), 남게 되는 채널들을 다른 목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영화를 만든 감독 혹은 배우의 인터뷰나 장면해설을 넣는가 하면, 그 장면에 사용된 배경음악의 원곡을 실을 수 있게 된 것. 이에 따라 영화를 감상하는 이들은 이전에는 절대로 불가능했던, 영화관람과 동시에 영화에 대한 추가적인 정보들을 얻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더불어 플레이어가 대중화되지 않아 대여보다 구매가 중심이 되어 시장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소비자들에게 타이틀의 구매욕구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새로운 시도들도 계속되었다. 영화의 제작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삭제된 장면, 뮤직비디오, 주요 제작진과 출연진 인터뷰 등이 담기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초기의 LD 들에는 그런 추가정보들이 없었지만 90년대 초 미국의 보이저사가 크라이터리온이라는 수집가용 특별판을 발매하면서 그 효과를 증명하자, 그 이후로는 대부분의 출시사가 같은 전략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추가정보들로 인해 LD 의 소비자들은 영화가 만들어지는 제작과정과 그 결과물인 영화를 하나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단순히 보이는 스토리를 수동적으로 감상하던 기존의 영화관람 패턴이, 영화의 제작과정과 제작진들의 의도를 이해하고 이에 기반해 해석하는 능동적인 관람 패턴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훗날 인터넷이 일반화되면서 영화의 제작과정이 생중계되는 일까지 벌어지게 된 것은, 바로 이런 LD 를 통한 경험이 확장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산업에 변화의 바람이 그러나 문제는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물리적인 한계점 때문에 LD 가 대중화에 실패했다는 사실이다. 크고 무겁고, 심지어 한 영화를 위해 여러 장의 디스크가 필요했던, 그리고 그 결과 비쌀 수밖에 없었던 LD 는 평범한 소비자들에게 너무 비경제적인 것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만약 DVD 라는 새로운 매체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아마도 LD 가 만들어냈던 새로운 관람 패턴은 초고속 인터넷이 영화를 고화질로 실어나르기 전까지 완전히 사장되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DVD 는 LD 에게 큰 신세를 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그렇게 LD 가 만들어내 일부 마니아들에게만 의미가 있었던 새로운 영화관람 패턴은 DVD 의 성공과 함께 지금 보편화되고 있다. 특히 LD 와 달리 디지털이라는 특성을 한껏 살려 인터넷과 유사한 인터랙티브 메뉴를 통해 담겨 있는 영화와 추가정보들을 선택할 수 있는 기능까지 덧붙여지면서, 철저한 아날로그식인 기존 VCR 의 영화관람 패턴은 설자리가 없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거기에 PC에 달린 DVD -ROM에서 이용할 수 있는 게임기능이나 인터넷과 연동되어 추가적인 정보들을 더 찾을 수 있는 기능을 담은 DVD 타이틀까지 등장하는 중이기 때문에, DVD 가 만들어내고 있는 새로운 영화관람 패턴은 분명 영화산업에 거대한 변화를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DVD 타이틀의 구성을 미리 해놓고, 이에 따라 영화의 제작과정을 바꾸는 일이 할리우드에서는 더이상 화젯거리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은 이를 잘 드러내준다고 할 수 있다. 이철민/ 인터넷 칼럼니스트 chulmin@hipop.com ▶ 왕초보를 위한 DVD 101 ▶ DVD 탄생에서 현재 추세에 이르기까지 ▶ DVD가 영화관람 패턴에 끼친 영향 ▶ DVD 플레이어 구입을 위한 가이드 ▶ DVD 관련 국내 사이트 ▶ 소장하고 있어도 후회하지 않을 DVD 타이틀

무협영화의 신, 호금전이 온다

<첩혈쌍웅>의 발레 같은 총격전 어딘가에 아름다움이 감춰져 있다면, <와호장룡>의 눈부신 검투장면에서 허무의 심연이 전해진다면, 그리고 <천녀유혼>의 바람결 같은 비상에 시적 떨림이 감지된다면, 그건 그들이 모두 호금전의 후예들인 까닭이다. 가장 세속적인 무협영화를 통해 숨막히는 동선과 운무의 미학을 창안하고 찰나의 삶을 명상한 위대한 감독. 전설이라 불러 과하지 않은 무협영화의 신호금전이 온다. 7월12일부터 열릴 부천판타스틱국제영화제가 <협녀>를 비롯, 그의 다섯 작품을 상영하는 것이다. 조악한 화질의 사지절단된 비디오가 아닌 창조주의 마음이 그대로 담긴 필름으로 호금전을 만나는 것이다. 이건 올 여름의 가장 기쁜 소식 가운데 하나다.편집자 胡 金 銓 King Hu (1931∼97) 1932년 베이징 출생. 1949년 홍콩으로 이주. 1950년 무대 디자인 조수로 영화계 입문. 이후 시나리오 작가, 배우 겸업. 1958년 쇼브라더스 입사. 배우 겸 조감독으로 활동. 1964년 <대지아녀>(大地兒女)로 감독 데뷔. 1965년 <대취협>(大醉俠) 개봉. 비평과 흥행 성공. 1968년 <용문객잔>(龍門客棧) 개봉. 흥행 기록 수립. 1971년 <협녀>(俠女)를 3년 만에 완성. 1973년 <영춘각의 풍파>(迎春閣之風波) 개봉. 1975년 <충렬도>(忠烈圖) 개봉. 칸영화제에서 <협녀>가 기술공헌상 수상. 1979년 <공산영우>(空山靈雨), <산중전기>(山中傳奇) 개봉. 1980년 홍콩, 대만, 중국, 미국을 오가며 두편의 영화, 카라얀과의 오페라 기획하다 무산. 1981년 대만에서 첫 코미디 <종신대사>(終身大事) 연출. 1982년 <천하제일>(天下弟一). 1983년 옴니버스 <대윤회>(大輪廻) 중 <제1세>. 1984년 미국 각 도시에서 회고전 순회 개최. 몇 가지 프로젝트 무산. 1986년 타이베이에서 연극 <나비의 꿈> 연출. 1988년 일본에서 회고전 개최. 1989년 <소호강호>(笑傲江湖) 연출하다 중도 하차. 1992년 <화피지음양법왕>(畵皮之陰陽法王). 1996년 준비중이던 <화공혈루사>(華工血淚史)에 주윤발 캐스팅. 1997년 1월14일 타이베이에서 심장수술 직후 사망. 유해는 LA에 묻힘. ▶ 무협영화의 신, 호금전이 온다 ▶ 호금전 감독의 작품세계 ▶ 미리보는 부천영화제 초청작 다섯 편 ▶ 호금전 마지막 인터뷰 ▶ 호금전을 추억하다 ▶ 회고전을 열기까지 준비과정

호금전 | 황홀했던 추억과의 재회

김영덕/ 부천 국제판타스틱영화제 프로그래머 호금전에 대해 말하자면 꼭 얘기해야 할 사람이 있다. 그는 70년대에 중고교 시절을 보냈고 대구 시민극장, 오스카극장 등을 돌아다니며 홍콩영화에 매료되어 있었다. 압도하는 스펙터클, 누추하고 갑갑한 현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이상의 세계, 영웅의 세계. 그는 실현할 수 없는 이상을 사진과 포스터를 모으는 것으로 대신하려 했다. 어느날, 그가 모아온 수백점의 사진과 영화포스터(그 얇은 지질이란!)가 모조리 불살라지는 비극이 발생했다. 아들의 이상한 취미 때문에 쌓여가는 종이더미를 보다 못한 어머니가 저지른 만행이었다. 그가 어른이 되고 직업을 갖게 되는 20여년 동안의 과정에서 비디오가 보급되었고, 그는 이제 비디오 수집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홍콩, 싱가포르를 여행하며 사모은 자료들로 그는 불법 사설 쇼브라더스 라이브러리를 완성하였다. 나 의 영 웅, 호 금 전 호금전은 무협영화의 아버지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신파(新派)무협영화라는 새로운 스타일을 완성시킨 무협영화의 고수다. 67년작 <용문객잔>(龍門客棧)은 68년 <용문의 결투>란 제목으로 한국에 수입, 배급되었고 그해 흥행 1위를 기록했다. 물론 홍콩 내에서도 흥행 1위자리를 고수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오늘날 이 영화를 보면 서극이나 리안의 스타일이 누구에게 빚을 지고 있는지 확연히 두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보다 한해 전에 그는 쇼브라더스에서 <대취협>(大醉俠)을 만든다. 이는 67년 <방랑의 결투>란 제목으로 국내 개봉하였는데, 이것이 한국에 최초로 수입된 홍콩 무협영화였다. 당시 <방랑의 결투>나 <용문의 결투> 신문광고 문구는 이러하다. “日本사무라이映畵를 斷然 능가하는 劍術映畵의 金字塔!”, “續 ‘放浪의 決鬪’ 사무라이 映畵를 完全制壓!” 이처럼 당시 사무라이영화가 유행하던 때에 그의 영화가 보여준 새로움과 충격은 홍콩을 넘어서서 한국 땅에까지 전파되었다. 이후 한국에는 <충렬도>(忠烈圖), <천하제일>(天下第一), <산중전기>(山中傳奇), <공산영우>(空山靈雨) 등의 영화들이 소개되었다. <산중전기>와 <공산영우>는 한국의 불국사, 가야산, 속리산 등지에서 촬영했을 뿐 아니라 우성칼라라보에서 현상되었다. <산중전기>는 한국어 더빙판으로 상영되었다. 사실 합작영화인 셈이다. 다시 서두에서 꺼낸 그의 얘기로 돌아가자면, 70년대 나는 초등학생이었고 늘 그와 함께 행복한 홍콩영화 보기의 경험을 공유했었다. 과거의 사소한 경험이 오늘날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것들과 보이지 않게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하는 일은,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걸작이고 거장이라 하는 것도 결국 세월이 흘러 새롭게 발견하면서 붙여지는 이름인 것 같다. 언젠가 그가 그렇게 갈망해오던 호금전의 영화를 커다란 스크린에서 영사되는 온전한 영화로 볼 수 있는 날이 있을까 했는데, 전세계적으로 화제를 불러모았던 <와호장룡>의 성공은 호금전을 새롭게 조명하게 해준 계기가 되었다. 어 린 날 의 매 혹 을 현 실 로 불 러 내 다 지난 2월, 호금전 회고전을 해보자는 얘기가 집행위원장과 프로그래머들과의 회의에서 대두되었을 때, 내심 기뻐하면서도 몇 개월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판권이나 프린트 소재들을 찾아내 제대로 된 회고전을 만들 수 있을 것인지 걱정도 되었다. 우선 그간 관계를 맺어왔던 여러 아시아영화 관련자들에게 회고전 계획을 알리고 도움을 청했다. 지난해 홍콩에서 만났던 스티븐 크레민(아시아필름라이브러리 운영자)은 매우 성실한 답변을 보내왔다. 98년 홍콩에서 있었던 제22회 홍콩영화제 회고전 카탈로그를 보내왔고, 호금전에 대해 글을 써줄 만한 연구자들 몇명을 추천해주었다. 홍콩 필름아카이브와 차이니스타이베이 필름아카이브에서도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는 호금전 작품들의 목록과 판권소유자들의 연락처를 보내주었다. 이 두 아카이브는 호금전에 대해 가장 많은 프린트를 보유하고 있다. 새롭게 복원된 <충렬도>의 프린트는 홍콩에서 빌릴 수 있게 되었고 <용문객잔> <영춘각의 풍파> <천하제일> <희로애락> <산중전기, <공산영우> <협녀>의 프린트가 타이베이에 있다는 반가운 연락도 왔다. <충렬도>와 함께 우리는 호금전이 한국에서 찍었던 <산중전기>와 <공산영우>를 반드시 상영하기로 하고, 그의 객잔 4부작의 대표격인 <용문객잔>과 칸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던 <협녀>를 회고전의 프로그램으로 결정했다. 그러나 아카이브는 판권까지 소유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판권소유자의 상영허가를 받는 일이 가장 힘든 작업이었다. 회고전의 의의를 확신시킨다고 하더라도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무관한 일이라서인지 상영허가를 거절하는 판권자들이 몇명 있었다. 결국 홍콩까지 찾아가 협조를 구했지만 <공산영우>는 허가를 얻지 못했고 그뒤 추진한 <영춘각의 풍파>도 포기해야 했다. 4월에 참가한 홍콩영화제에서의 성과는 회고전의 필자인 스티븐 테오와 피터 리스트를 만난 일이다. 처음 대상으로 떠올렸던 데이비드 보드웰과의 만남을 고대했으나, 매년 홍콩을 찾던 그가 올해는 사정이 생겨 불참한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스티븐 테오(그는 98년 홍콩영화제의 호금전 회고전 자료집의 상당부분을 채운 사람이다)는 흔쾌히 원고를 써주기로 했고 피터 리스트도 원고 작성을 자청하였다. 영화제가 끝날 무렵, 계속 연락이 닿지 않았던 쉬펑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쉬펑은 <용문객잔> 이후 <협녀>와 <충렬도> 등 호금전의 주요 작품에 주연으로 출연했으며 <산중전기> <공산영우>를 찍을 때는 한국에서 오랜 시간을 지내기도 했던, 첸카이거의 <패왕별희>의 프로듀서로서도 잘 알려진 배우이자 제작자이다. 홍콩섬의 상해대반점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는 날아갈 듯이 기뻤다. 그녀는 친절하게 자신이 한국에서 영화를 찍었던 때의 일화를 얘기하기도 하고, 동석했던 피에르 르시앙에게 앞으로 함께 작업할 중국권 감독들에 대해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피에르는 쉬펑에게 부천 국제판타스틱영화제와 호금전 회고전의 중요성을 확신시켜주었고, 20여년 만에 다시 한국을 찾기로 결정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이런 여러 사람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아마도 회고전은 이처럼 풍성하게 준비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들은 모두 호금전과 그의 영화를 너무도 사랑했던 사람들이다. 특히 십여년간 모아온 자료와 테이프를 기증해준 호금전의 영원한 팬, 오빠 김영교씨에게 감사를 전한다. 아무쪼록 호금전을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회고전이 큰 선물이 되고, 그를 처음 만나게 된 사람들에게는 발견의 작은 기쁨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무협영화의 신, 호금전이 온다 ▶ 호금전 감독의 작품세계 ▶ 미리보는 부천영화제 초청작 다섯 편 ▶ 호금전 마지막 인터뷰 ▶ 호금전을 추억하다 ▶ 회고전을 열기까지 준비과정

슈렉

■ STORY 옛날 옛적에. 스크린 가득 펼쳐진 동화책이 한장씩 넘어간다. 부욱! 갑자기 커다란 초록색 손이 책을 찢어내더니 화장실 뒤처리에 써버린다. 성 밖 늪지대에 사는 거인 슈렉의 짓이다. 독재자 파콰드에게 쫓긴 동화 속 주인공들이 떼지어 몰려오는 바람에 고요한 안식처를 잃게 된 슈렉은 잠자는 숲 속의 공주 피오나를 데려다 파콰드와 짝지어주고 숲을 되찾기로 계약을 맺는다. 엽기발랄한 괴물 슈렉과 수다스러운 당나귀 덩키가 모험담을 펼친 끝에 찾아낸 피오나는 슈렉을 보자마자 빨리 키스하라고 입술을 쑥 내미는 골때리는 공주다. 개구리와 뱀으로 풍선을 불어가며 성으로 돌아오는 동안 슈렉과 피오나 사이에 사랑이 싹튼다. ■ Review 아이들의 환호성과 함께 시작된 시사회는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박장대소하며 막을 내렸다. 올해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했던 이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들이 화면 밖으로 걸어나와 붉은 카펫을 밟을 수만 있었더라면 심사위원단이 남녀 주연상 가운데 하나쯤은 주었을지도 모른다. <이집트의 왕자> <개미> <엘도라도> 등으로 디즈니와 경쟁을 벌였던 드림웍스는 <슈렉>을 가지고 회심의 한판승을 거두었다. 프로듀서인 제프리 카젠버그는 디즈니에 몸담고 있던 시절 <인어공주> <알라딘> <라이온 킹> 등 디즈니 중흥의 기폭제가 된 흥행 대박 애니메이션을 잇따라 내놓았던 주역이다. 그는 <슈렉>을 보러온 관객의 머리 속에 어떤 영화 텍스트들이 입력되어 있으며 어떤 기대를 갖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을 것이다. <슈렉>의 전략은 바로 그 텍스트와 기대를 패러디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디즈니영화를 문화이론적으로 연구한다면 전세계의 온갖 전래동화들을 디즈니식 이데올로기와 스타일로 전유하여- ‘Disneyfication’- 현대 관객의 추억을 재구성한다는 데서 첫 번째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순수함과 깨끗함, 아름다움 등을 기치로 내세우는 디즈니의 성채 속에 끌려들어가 미국 백인 중산층의 환상에 봉사했던 온갖 동화 속 주인공들, 이를테면 신데렐라, 빨간 머리, 백설공주, 피노키오, 잠자는 숲 속의 공주, 로빈 후드, 아더왕과 원탁의 기사, 미녀와 야수, 행복의 파랑새, 심지어 천막 안으로 엉덩이를 들여놓으려 하는 뻔뻔스런 당나귀가 <슈렉> 속에 재등장하여 자신의 이미지를 바꾼다. 이들 주인공들은 디즈니영화 속에서보다 일제히 계층을 하강했으며 좀더 자유분방하고 반항적이다. 따라서 음악 역시 디즈니가 전통적으로 선호해온 세미 클래식이나 아름다운 멜로디의 발라드 대신 스매시 마우스, 일스(‘뱀장어들’이라니!), 프로클레이머스 등 다양한 젊은 밴드들의 록음악을 주로 사용했다. 지역성이나 시대감각 역시 다양한 문화적 취향에 맞출 수 있도록 혼종적인 시공간을 택했다. 이를테면 독재자 파콰드가 사는 성은 현대식 고층건물의 높이와 윤곽, 유럽 중세 성채의 외관, 이집트 피라미드처럼 단순하고 육중한 대리석 질감 등을 뒤섞어놓았다. 피오나가 갇혀 있던 성은 <인디아나 존스>와 <쥬라기 공원>의 프로덕션 디자인을 염두에 둔 것 같고, 파콰드의 놀이동산인 둘락은 순진하고 즐거운 것만이 있는 세상이라고 가정하는 디즈니식의 놀이동산문화에 대한 조롱을 내포한다. 피오나 역시 우아하고 내숭떠는 공주가 아니라 <매트릭스>의 발차기를 구사할 만큼 생기발랄하면서도 내면은 겁많고 순진한 현대의 십대 소녀를 염두에 두고 구성된 캐릭터이며, 괴물과 당나귀는 집단성을 거부하고 고립된 삶을 사는 반항아와 낙관적인 떠벌이라는 버디무비의 주인공을 연상시킨다. 이처럼 광범위한 텍스트를 인용하고 패러디한 <슈렉>은 할리우드가 생산해낸 대중오락영화의 하이퍼텍스트라 할 만하다. “표정이 예술”이라는 관객의 찬사처럼 <슈렉>은 빛 반사까지 감안된 피부와 근육의 움직임, 눈동자의 표현력, 찰랑이는 머리카락, 흩날리는 천의 느낌 등 최첨단의 컴퓨터그래픽으로 만들어낸 3D이미지의 사실감을 과시하면서도, 실제 인간과 꼭 닮았다고 강조하는 <파이널 판타지>와 달리 테크놀로지의 가능성과 한계 안에서 적절하게 타협했다. 피오나의 비밀이 밝혀지고 슈렉이 그녀에게 진정한 사랑을 담아 키스했을 때 벌어지는 상황은 디즈니의 여성관에 대한 유쾌한 뒤집기로서, 아름다움에 대한 페미니스트의 정의를 수용했다는 평을 들을 만도 하다. 새로운 스타일과 문화적 취향뿐만 아니라 이처럼 진보적인 이데올로기마저 주류 안에 흡수하는 능력이야말로 할리우드가 끝없이 번성하는 중요한 비결일 것이다. <슈렉>의 20자평에 별점을 주렁주렁 매달아놓아도 심오한 예술영화 지상주의자나 상업적 오락영화 애호가 양쪽으로부터 달걀 날아오는 일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사랑스러운 요정과 용감한 왕자이야기를 최고로 치는 디즈니 중독자들을 제외하고. 김소희/ 영화평론가 cwgod@hanmail.net <슈렉> 제작 과정 3D, 아직은 극영화의 보호막 아래 <슈렉>은 제작과정에서도 이런저런 이야깃거리를 제공한다. 지난해와 올해 <아메리칸 뷰티>와 <글래디에이터>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연속 수상하여 권위있는 메이저의 자리를 굳힌 드림웍스는 ‘애니메이션 블록버스터’를 표방한 <슈렉>의 기발한 아이디어들을 발굴하기 위해 1년이 넘도록 스토리 작업에 매달렸다. 애니메이션의 칸 진출이라는 화제까지 겹쳐 개봉 첫 주말의 흥행성적이 4200만달러에 달해 디즈니의 최고 흥행작인 <라이온 킹>의 초반 기록을 깼다. 최근 할리우드애니메이션은 주요 캐릭터에 A급 스타의 목소리를 쓰는 것이 관행처럼 되어가고 있는데, <슈렉> 역시 마이크 마이어스, 카메론 디아즈, 에디 머피 등을 기용했다. 끝없는 수다를 쏟아내는 에디 머피의 입모양과 피부색에 바탕을 둔 당나귀 덩키의 캐릭터를 보면 목소리 캐스팅을 먼저 하고 나서 캐릭터를 구상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애니메이션 캐릭터와 실제 배우의 관계는 오늘날 3D애니메이션과 실사영화가 어떤 관계에 놓여있는지를 시사해준다. 100% 컴퓨터그래픽스로 제작된 <토이 스토리>가 나온 이래 지난 5년 동안 의미있는 기술적 진보와 노하우가 계속 축적되었고, 덕분에 최근에 나온 3D애니메이션들은 인간의 모습을 똑같이 표현할 수 있는 기술력을 과시한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조만간 컴퓨터 기술이 전통적인 영화를, 가상의 캐릭터가 살아 있는 배우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냐는 호기심어린 진단도 나온다. 그러나 3D애니메이션이 전통적인 실사영화의 플롯구축 방법과 재현양식, 제작과 배급체계는 물론이고 극영화의 스타 시스템에까지 기대고 있다는 것은 상당한 기간 동안 영화의 보호막 아래 컴퓨터그래픽스 기술이 성장하는 국면이 계속될 것이라는 예상을 가능케 한다.

서울영상벤처센터 어디로 갈거나?

건물 매각 계획에 이전해야, "이참에 지원모델 재고 필요" 서울영상벤처센터 입주업체들이 술렁이고 있다. 최근 건물주인 (주)영보두일(대표 한두현)이 재계약 의사가 없다며, 계약 당사자인 영화진흥위원회(위원장 유길촌)를 통해 이른 시일 내에 해당 업체들에 건물을 비워달라고 통보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서울영상벤처빌딩에 입주해 있는 34개 업체 일동은 지난 6월25일 “지금 현 건물에 남는 것이 사업의 지속성과 대외인지도 훼손을 막기 위한 최선의 방책이며, 건물주와의 이견을 좁힐 수 있는 현실적인 지원책을 마련해달라”는 내용의 건의서를 문화부와 영진위에 전달했다. 서울영상벤처빌딩은 지난 98년 정부가 영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 영상관련 벤처기업을 육성한다는 취지하에 서울 서초동에 위치한 남강빌딩 2900여평을 임대, 운영하고 있으며, 현재는 영진위가 전반적인 업무를 대신 맡고 있다. 입주업체 및 영진위 관계자에 따르면, 건물주 영보두일은 현재 건물을 매각하기로 입장을 굳힌 것으로 보인다. 건물주는 지난 6월9일 “은행금리가 낮아 영진위의 건물 임대보증금을 예치하는 것만으로는 수익을 기대할 수 없어 월세 전환을 검토하던 중에 모 기업이 건물 매수에 나섰다”며 임대차계약 연장불가 사유를 밝혔다. 지금까지 영진위가 내놓은 임대보증금은 약 102억원. 지난해까지 80억원 규모였으나, 1년 연장계약을 하면서 30%를 인상해달라는 건물주의 입장을 받아들였다. 9월30일까지 건물을 이전해야 하는 상황인데, 영진위는 다른 건물 물색을 서두를 수밖에 없게 됐다. 서울영상벤처센터를 관리하고 있는 영진위의 오경석씨는 “올해 2월까지만 해도 재계약 의사가 있다고 문건을 보내온 건물주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는 바람에 급히 다른 곳을 알아보고 있지만 쉽지 않다”고 털어놨다. 입주업체들은 현재 정부와 영진위의 결정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다. 미라신코리아의 안병주 사장은 “다른 곳으로 옮길 수밖에 없다면 임대보다 건물 매입과 같은 좀더 안정적인 공간확보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영화쪽보다는 건물사용 면적이 더 크고 연계업체가 강남쪽에 몰려 있는 애니메이션쪽은 현상유지를 원한다. 애니메이션쪽 입주자 대표인 신우프로덕션의 신우철 대표는 “건물주와 지속적인 협의를 해서 현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최선이며, 정부와 영진위의 전폭적인 지원이 더욱 요구된다”고 주장했다. 일단 정부는 지난 2월 입주업체에 2년 연장계약 사실을 통보한 상태라 그 기간만큼은 어떻게든 책임을 져야겠지만, 이번 기회에 지금까지의 사업성과를 놓고 다시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다. 문화관광부 영상진흥과의 윤성천 사무관은 “애니메이션쪽은 문화지원센터로, 게임쪽은 게임지원센터 등으로 이전이 가능한 만큼, 앞으로 2년 동안 지금의 센터 모델을 계속 유지할지는 계속 숙고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영진위의 한 관계자 역시 2001년 문예진흥기금 폐지 등으로 영진위 자체예산 확보가 어려운 상황에서, 현재 방식의 공간지원보다 프로젝트별 인큐베이팅 등으로 정책을 전환해 효율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이영진 기자

누가 이데올로기를 두려워하랴

● 영화에 관해 쓰기에 앞서 영화 <진주만>의 포스터를 본다. 포스터 하단에는 제목 위에 커다란 전투기 한대가 박혀 있다. 그 위로 지그시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영화 속 세 남녀 주인공들의 얼굴이 보인다. 인물들과 전투기 사이에는 빨간 글씨로 다음과 같은 카피가 씌어 있다. “전세계가 숨죽여 기다렸던 사상 최대 전투액션 블록버스터!” 특색없고 진부한 데다가 부조화의 기미마저 내비치고 있는 이 포스터는 그런 대로 영화 <진주만>의 성격- 멜로드라마와 전쟁영화의 어정쩡한 결합- 을 잘 요약해놓고 있다. 컴퓨터 게임을 닮아가는 드라마 새벽하늘을 가로지르며 저공비행으로 몰려오는 300여대의 전투기들, 전함으로 돌진하는 어뢰, 그리고 붉은 불길과 함께 침몰하는 전함들과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는 숱한 사람들. 이러한 이미지들이 스펙터클한 소재를 찾는 제작자들의 관심을 끄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다. 이런 제작자들의 관심으로 만들어지는 할리우드영화들이 대개의 경우 수긍하기 힘든 이데올로기적 함의를 가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서 그에 관해 상세히 논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게다가 <진주만>은 그러한 논의에 적합한 영화라고도 볼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가서 다시 말하고자 한다). 문제는 위와 같은 스펙터클 속에서 내러티브의 논리가 깡그리 무시당하고 있는 최근 할리우드영화의 경향 속에 있다. 고전적 할리우드영화의 탄탄한 내러티브가 의심스러운 이데올로기(들)의 작동을 강화하고 있다는 옛 영화이론가들의 주장이 일견 타당함을 인정한다 해도 할리우드영화의 그러한 구성방식이 많은 사람들에게 매력임과 동시에 미덕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 또한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최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영화의 경향- 무엇보다 디지털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에 힘입은 바 크다- 을 따라가보건대 고전적 영화들의 드라마적인 강점은 점점 실종돼가고 있는 듯하다. 내러티브를 포기하는 대신 블록버스터영화들이 취하는 새로운 전략은 컴퓨터 게임의 단순하지만 흡인력 강한 구조를 따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최근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영화들은 다소 긴 인트로와 피날레를 가진 컴퓨터 게임을 관전하는 관객을 전제로 만들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부쩍 자주 진행되고 있는 컴퓨터 게임의 영화화도 비슷한 맥락에서 읽혀진다. <진주만>은 할리우드영화의 이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로서 받아들여진다(유사한 시기에 개봉되는 <미이라2>나 <툼레이더> 등도 더불어 언급하기에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진주만>에서 인트로와 피날레를 구성하는 것은 30년대 말에서 40년대에 걸쳐 만들어진 낡아빠진 전쟁멜로드라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 <애수>(1940), <카사블랑카>(1942) 등등- 의 관습이며 중심적인 볼거리는 대략 <지상 최대의 작전>(1962)이나 <도라 도라 도라>(1970)와 같은 전쟁영화의 몇몇 이미지들을 좀더 다이내믹하게 업그레이드한 것들로 채워져 있다. 진부함과 유치함, 탈출구가 없다 <진주만>은 스펙터클과 드라마라는 상이한 조합을 절묘하게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런 대로 볼 만하게 엮어내는 데도 실패한 영화이다. 게다가 <진주만>이 모델로 삼고 있는 30, 40년대 전쟁멜로드라마의 플롯은 현재의 관객에게는 너무 진부한 것이다. 영화를 보는 도중 객석에서 터져나오는 한숨과 비아냥거림은 주로 그러한 사실에 원인이 있다. 친구의 연인과 사랑에 빠져 있을 즈음, 죽은 줄로만 알았던 친구가 살아 돌아오고 이로 인해 갈등이 발생한다는 설정- 이와 유사한 이야기들에서 ‘부정한’ 여인으로 인해 생긴 갈등은 결국 남성들간의 화해의 제스처로 마무리되거나(<카사블랑카>) 여인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애수>). 싸구려 감상주의로 이데올로기를 돌파(라기보다는 은닉)해가는 방식. 이러한 방식에 정면으로 문제제기를 한 멜로드라마의 거장은 단연 파스빈더(<마리아 브라운의 결혼>(1978), <릴리 마를렌>(1980))이다- 이 너무 낯간지럽고 단순하다고 생각했던지 시나리오 작가인 랜달 월레스는 몇 가지 플롯을 더 추가해놓았다. 두 남자 주인공의 유년 시절, 아버지가 없는 레이프(벤 애플렉)는 전쟁후유증에 시달리는 폭력적인 아버지를 둔 대니(조시 하트넷)에게 일종의 보호자 같은 존재이다. 이러한 관계는 그들이 성인이 되어서까지 유지되지만 영화 후반부의 도쿄 공습 이후 이 관계는 역전되어 대니는 자신의 몸으로 총탄을 막아내며 레이프를 대신해 죽는다. 이후 연인 에블린(케이트 베킨세일)과 재회한 레이프는 대니의 아들인 또다른 대니- 아버지를 잃은 아들- 의 자상한 보호자가 되어준다. 하지만 이러한 설정은 유치함을 더할 뿐이다. 미군 참모부과 워싱턴, 그리고 일본군 함대를 오가는 영화적 구성은 앞에서 언급한 <지상 최대의 작전>이나 <도라 도라 도라>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전신을 이용한 일본군의 정보교란작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방송을 들으며 하와이에 가까이 왔음을 짐작하는 일본군들의 모습, 갓 설치된 레이더에 잡힌 물체에 대한 보고를 듣고서도 본토에서 날아오는 B-17 폭격기일 것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는 장교의 모습 등은 <도라 도라 도라>에서 묘사되었던 바 거의 그대로이다. 재미있는 것은 <도라 도라 도라>가 보여주는 전쟁영화의 구성과 스펙터클에 억지로 멜로드라마를 교접시키기 위해 취하는 인물선택의 방식이다. <진주만>은 <도라 도라 도라>에서 그저 엑스트라에 불과했던 몇몇 인물들을 과감히 주인공 및 비중있는 조역의 자리로 올려놓고 있다. <도라 도라 도라>에서 진주만 공습 도중 간신히 전투기를 이끌고 출격해 나가던 두 조종사는 <진주만>의 두 주인공 레이프와 대니의 모델이 되었음이 분명하며, 함상에서 일본 전투기들을 향해 기관총을 쏘아대던 한 흑인병사는 쿠바 구딩 주니어가 연기한 자존심 강한 취사병- 사실 <진주만>에서 이 캐릭터만큼이나 줄거리와의 별 연관없이 따로 노는 이도 없다. 굳이 이러한 인물을 집어넣은 것이 진주만에서 희생당한 흑인병사들이나 <진주만>을 보러올 흑인 관객을 위한 배려였다고 해도 솔직히 말해 그저 ‘같잖을’ 따름이다- 에 의해 좀더 구체화되었다. 이 인물들은 두개의 상이한 장르 속을 부지런히 옮겨다니며 어떻게든 이야기를 한줄에 꿰어보려고 시도하지만 역부족이다. 참혹함이나 진중한 성찰 대신 전쟁의 스펙터클뿐 이처럼 <진주만>은 그야말로 게으른 드라마투르기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제리 브룩하이머-마이클 베이 콤비에게 어차피 이야기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을 게다. 그들의 관심은 영화 중·후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공습 시퀀스에 쏠려 있다. 그야말로 흥미진진한 ‘워 게임’으로서만 역사를 다루기 위해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의 참혹함이나 <씬 레드 라인>(1998)의 진중한 성찰은 모두 물러나야만 한다. 그 결과, 진주만 공습 시퀀스 뒤에 이어지는 병원의 아비규환장면은 매우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이 장면을 보는 관객이 전쟁의 참상에 대한 깨달음을 얻거나 비인도적인 진주만 공습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저 이건 지루한 인터미션일 뿐이다. 흡사 게임의 한 단계가 끝날 때마다 화면에 떠오르는 전적 데이터를 보는 기분이랄까. 게임의 주관자로서 제리 브룩하이머-마이클 베이가 보여준 솜씨의 과시는 바로 이 병원장면쯤에 이르러 역겨움을 유발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별 중요치 않은 인터미션은 곧 지나가고 게임의 제2단계- 두리틀 대령과 그 대원들에 의한 도쿄 공습- 가 시작된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이건 단계가 진행될수록 난이도가 하향조정되는 게임이었던가. 두 번째이자 마지막 전적 데이터- 도쿄 공습의 의의에 대해 설명해주는 에블린의 내레이션이 바로 이에 해당한다- 를 접할 때쯤이면 뭔가 속았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여하간 게임의 구성이야 어찌 되었든 게임이 다 끝나고 나서 화면 위에 떠오르는 전적 데이터 따위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별로 없는 법이다( 아니나 다를까. 도쿄 공습이 끝나고 두리틀 대원들의 귀환장면이 나오기가 무섭게 자리를 뜨는 관객도 몇몇 있었다. 영화관람의 경험이 점점 게임관전의 경험을 정말 닮아가는 것일까? 혹은 그 반대인가? ). 컴퓨터 게임의 구성자들에게 메시지란 액세서리에 불과하다. 이런 게임을 닮아가는 영화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노르베르트 볼츠의 <구텐베르크-은하계의 끝에서: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상황들>에서 읽은 바 있는 한 구절을 인용해본다. “정보보다도 삶에 더 중요한 것은 커뮤니케이션 자체를 위한 커뮤니케이션이다. 이를 역으로 뒤집으면, 매스미디어는 정보들을 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감각결핍을 예방하기 위해 정보를 발신하고 있다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크로넨버그의 <비디오드롬>(1982)이나 <크래쉬>(1996) 같은 영화의 해석에나 적합한 구절인지도 모르지만 오로지 감각기관을 자극하는 신호발생기라고밖에는 생각되지 않는 <진주만>을 보면서 (졸지 않는 동안은) 내내 이 구절을 떠올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신호발생기가 그리 썩 잘 작동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앞에서 나는 <진주만>과 같은 영화에서 그 이데올로기적 함의 따위를 논하는 것은 그리 적절한 일이 아닐 거라고 지적했다. 그건 부분적으로 <진주만>이 설파하는 이데올로기가 워낙 구시대적이고 한심한 것이라 현대의 관객에게는 도무지 먹혀들지 않을 거라는 짐작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엉성하게 만들어진 게임과도 같은 영화 <진주만>의 구성 자체에 이유가 있다. 전쟁멜로드라마의 감상주의와 전쟁영화의 스펙터클 사이를 임의적으로 넘나들고 있는 영화 <진주만>은 장면들의 편의적 배열과 고색창연한 행위 및 대사들로 인해 예상치 않은 ‘소격 효과’를 낳는다. 이는 스스로가 설파하고자 하는 이데올로기 자체를 조롱거리로 만든다. 덕분에 관객은 안심하고 스펙터클이 주는 자극에 온전히 몸을 내맡길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안심이 결국 우울한 근심으로 바뀌는 것은 영화를 제대로 즐길 줄 모르는 나만의 병일까? 유운성/ 영화평론가 akeldama@netian.com

울고 싶을까요, 웃고 싶을까요

●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다닐 때면, 가장 골치 앓는 질문 중의 하나가 지명이다. 한글을 깨치고 나서는 표지판에 적힌 온갖 도시며 동네이름을 가리켜서 저게 뭐냐고 묻는데, 응 동네이름이야 저것도 동네이름이야, 하고 대충 넘어가면서 아이들에게 어떻게 읍면동 특별시 광역시 보통시의 차이를 알려주냐 말이야, 하고 자기 변명을 늘어지게 하는 것이다. 아이들에겐 미군정보당국 손에 들어간 진주만 암호문처럼 뜻모를 기호지만, 지명은 때로 기억의 저수지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아줌마 고향은 논개로 유명한 진주 남강 바로 앞동네인데, 그 지명에는 물살이 급해 동네 친구를 여럿 잡아간 의암바위, 아이들이 한두번씩은 다 빠져보았던 쏘풀밭의 똥통 등의 추억을 비롯해, 빤쓰 바람으로 뛰놀던 유년 시절의 한때가 고스란히 갇혀 있다. 갓 어른이 되었을 무렵엔 부산, 하면 여름방학마다 놀러갔던 해운대 해수욕장이 생각났고 경주, 하면 너무 재미없고 지루하고 배운 거 없었던 고등학교 수학여행이 떠올랐다. 조금 시간이 지나 부산에 얽힌 추억도 부산영화제다 뭐다 해서 다양해졌고, 경주라는 지명에도 벚꽃놀이며 고속철도 논란이며 잡다한 곁가지 정보들이 끼어들었다. 그 정도였다. 90년대 들어, 지명을 둘러싼 풍경은 조금씩, 그러다간 아주 많이 달라지는데, 처음 그렇다는 것을 느낀 건 서해안에서 남해안을 거쳐 동해안으로 거슬러 올라오는 여행을 했을 때였다. 한밤중에 영덕게로 유명한 어느 지방에 떨어졌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 도시 이름을 알리는 표지판보다도 ‘<그대 그리고 나> 촬영현장’이라는, 개선문만한 선전기둥이었다. 다음날, 영덕게를 삶아 파는 횟집에 들어갔더니, 벽이 온통 최불암씨며 최진실씨며, 그 드라마 출연진의 대형사진으로 도배돼 있었다. 거슬렸지만, 상술이 다 그러니까 트집잡지 않기로 했다. 가는 데마다, 어디어디 등장, 어디어디 출연 하는 플래카드며 네온간판이 지겹도록 눈을 놀라게 했는데, 미디어의 시대라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냐는 현실논리보다는, 생각하기가 귀찮아서 생각하기를 관둬버렸었다. 부산시가 <친구>의 대박을 기려 ‘친구의 거리’를 조성하기로 했다는 소식이나 <신라의 달밤> 촬영 때 온 경주시가 나서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얘기를 듣고도, 역시 그랬다. 그러다가 <신라의 달밤>을 상영하는 극장 맨 뒷좌석에 앉고 나서부터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이 영화를 보고 경주시민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토착 양아치, 원정 양아치, 고교 양아치들이 개떼같이 얽혀 패싸움을 벌이는 불국사 앞마당을 ‘신라의 달밤’ 거리로 조성할 것인가? 범생이 깡패와 깡패 선생이 조우하는 룸살롱을 관광명소로 육성할 것인가? 왜들 카메라 앞에만 서면 그토록 큰 변 작은 변을 못 가리지? 맞는지는 모르지만, 제2의 부산이 되나 해서 흥분했던 경주시는 막상 이 영화를 보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기분이 아닐까. 그런 생각 끝에, 이제 어떤 도시, 어떤 장소마다 개인적인 경험보다는 장동건이 칼 맞고 죽은 곳이래, 최불암이 영덕게 먹고 간 곳이래, 여기가 경주 유지들이 김혜수랑 뽀뽀하고 사진찍은 곳이래, 이렇게 추억하게 되겠다 싶어서 삭막해졌다. 개인의 소중한 기억이 담긴 장소는, 자신만 알기에 초라하고, 그리하여 스스로도 돌아보지 않는다. 모모가 모모한 자리, 모모가 모모한 곳, 이 드라마, 저 영화가 만들어낸 신흥명소들이 매체와 매체 소비자의 메모리를 잡아먹어서 큰아이 탯줄을 묻은 시댁 텃밭 언저리나 젖니를 싸서 던진 지붕, 둘째가 떨어져서 어른들 간 떨어지게 만든 어느 개울을 돌아볼 여유는 없는 것이다. 몇해 전,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가 대박이 터지면서, 주인공 셋이 창을 하며 넘던 황톳길을 명소로 보존하자는 운동이 있었다. 나중에 어떻게 됐는지는 담당기자한테 물어봐야 알겠지만, 농사짓는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서 포장하기로 계획되었다가 명소보존한다고 계획을 취소하고, 그에 대해서 농민들이 반발하는, 작은 우여곡절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걸작문화의 유산을 보존하거나, 문화생산활동에 관민이 일체되어 적극 지원하는 것이야 트집전문 아줌마도 박수갈채할 일이지만, 모든 것을 너무 쉽고 너무 단순하게 판단하고 결정하는 과정이 맘에 안 든다. 황톳길을 보존하기에 앞서, 주민들에게 통행편의를 위한 다른 보상책이 선결돼야 한다는 걸 주장한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김혜수씨 얼굴을 보려고 벌떼같이 모여든 경주시의 고위공무원이나 지역유지 중에서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읽어본 사람이 과연 몇명이나 되겠는가. 도대체 이 영화가 어떤 영화인지 궁금해한 사람은 또 몇이나 되겠는가, 싶다. 도대체 시대가 달라지기나 했나. 파괴하는 것만큼이나 보존, 육성, 지원도, ‘무턱대고’다. 영화? 음, 다섯번쯤 지루해하고, 두 주인공이 왜 라면집 처녀한테 그렇게 홀딱 반했는가를 열번쯤 궁금해하고, 열두어번쯤 킬킬 대고, ‘우리 편이 질까봐’ 서너번쯤 가슴 졸이니까 엔딩 자막이 올랐다. 그런데 도대체 ‘우리 편’이 누구야? 말을 하고보니까 이상하네. 지방자치시대에 조폭도 토착조폭이, 중앙집중적인 전국조폭조직에 대항해서 탄탄하게 살아남는 것이 바람직한 일 아닌가? 전국이 한 조폭계보의 손에 들어간다고 생각해봐. 평소 아줌마 철학하고는 완전히 다른 얘기가 되잖아. 그럼 아줌마는 전국조직의 새끼보스인 주인공 이성재에 대한 전의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마천수 편을 들어야 되는구나. 이긍, 세상 제대로 살기 넘 힘들다. 최보은 / 아줌마 choi0909@hanmail.com

내 영화의 시작, <레즈>

내가 워런 비티 감독·주연의 영화 <레즈>(Reds)를 본 것은 94년이었다. 2년 만에 처음 본 영화였다. 아니 정확히 말해, 중간쯤에 남몰래 숨어서 보았던 그 영화, <사랑과 영혼>을 제외한다면 5년 만에 처음 영화를 접해본 셈이었다. 영화는 천상 부르주아 매체라는 당시의 앳된 신념은, 몰래 수업 빼먹고 운동장을 포복으로 빠져나와 개봉관으로 달려갔던 고등학교 시절의 내 영화감독 꿈도 쉽게 단념케 했고, 누구 한명 나무라지 않을 게 분명한데도 몇년 만에 선후배들 몰래 찾아 들어간 극장에서 <사랑과 영혼>을 보며 전혀 동감할 수 없는 한 여성관객의 흐느낌을 들으며 자괴감에 빠져들기도 했다. 그럼, 내가 투사였냐 하면, 그건 그 소리를 들으면 날 아는 사람들이 분명 웃어 나자빠질 만큼 난센스 같은 질문이다. 난 그저 맹숭맹숭한 관념론자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 역시 그러하고. 하지만 94년 가을쯤이던가, 학술 세미나를 빙자해서 우연찮게 보게 된 <레즈>는 영화 속의 탁 트인 설원의 경치처럼 그간 내 속에 켜켜이 쌓여 있던 막막함들을 일거에 물리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크렘린에 입성한 존 리드를 환영하느라 노동자들이 불렀던 인터내셔널가보다는 러시아 혁명 이후의 고요한 불만들을 목도하는 존 리드의 흔들리는 시선이 바로 그 예기치 못했던 힘의 근원이었다. 그리고 94년 겨울, 난 책 한권과 팬티 두장을 들고 영화를 공부하기 위해 서울행 기차를 타고 있었다. 영화 <레즈>는 미국의 급진적 사회주의 사상가 존 리드의 생애를 다루고 있다. 그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을 묘파한 <세계를 뒤흔든 10일간>의 저자이면서, 나중에 크렘린에 안장된 유일한 미국인이기도 하다. 영화는 존 리드가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이는 시점부터 시작해서, 1917 혁명 이후에 러시아로 건너가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면서 느꼈던 복잡한 심경과 그의 죽음에까지 이른다. 내 눈에 비친 존 리드는 모호한 인간이었다. 그칠 줄 모르는 혁명에의 열정, 그리고 혁명 이후에 점차 부상하는 또다른 권력에 대한 씁쓸한 물러섬을 동시에 느꼈던 그는 ‘뭔가’를 여전히 기다리고 있는 자의 모습이었다. 물론 그것은 흔해빠진 내러티브일지 모른다. <레즈>로 감독으로서의 역량을 인정받은 워런 비티 역시 그 양가적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상투적인 수법을 사용하긴 했다. 그렇지만 존 리드는 기차로 러시아 평원을 질주하며 대중에게 혁명 대의를 설파하면서도 정작 대중의 직접적 삶과 욕망에 대해서는 일치된 호흡을 보이지 않았던 볼셰비키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혁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 인간처럼 보인다. 그는 환멸을 느꼈던 걸까? 오히려 그거보다는 ‘더 나은, 더 기쁜 혁명’을 원했는지도 모르겠다. 맨발로 춤출 수 없는 혁명은 또다른 억압에 불과하며, 결국 종착역 없이 산개한 정거장들마다 멈추고 달리고 하는 것이 혁명의 운동성이기에 애초에 혁명 같은 건 없다는 내 좁은 소견이 사후 접목된 건지도 모르겠고. 또, 그 영화의 매혹을 말할 때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 존 리드와 브리안과의 사랑이다. 우디 앨런의 연인이었다가 <레즈>에서 실제로 워런 비티와 연정을 나누었던 다이앤 키튼이 분했던 브리안은 공산주의자이면서 여성해방론자였다. 부끄럼없이 처음 만난 존 리드 앞에서 훌러덩 옷을 벗어던진 브리안은 나중에 미국의 저명한 희곡가 유진 오닐과 바람을 피우기도 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잭 니콜슨이 분했던 유진 오닐과 브리안이 바람을 피우는 장면을 존 리드가 목격하는 대목이다. 오랜 여행을 마치고 온 존 리드는 질투에 눈이 먼 남편의 역할 대신 현관 앞에 들고 왔던 꽃다발을 조용히 놓고 눈밭 속을 걸어가는 것으로 ‘소유욕 없는 사랑’을 이야기한다. 영화를 보고 난 이후 지금까지 그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과연 나도 저렇게 사랑할 수 있을까?’라고 반문하곤 했다. 그 소유욕 없는 사랑은 말많은 호사가들이 공산주의와 공창제도, 일부일처제 부정 등을 억지 연계시켜 떠들어대는 것과는 하등 상관이 없어 보인다. 연인을 자신의 소유욕을 초월하는 타자로 존중하며 사랑하는 일, 그것은 생각만큼 녹록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94년 서울행 기차를 타고 있던 내가 영화 <레즈>에 대해 생각했다, 라고 말하면 드라마적인 거짓말이 될 게다. 하지만 지금 독립영화를 자처하며 한편 두편 계속 영화를 찍어나가는 와중에 이따금 존 리드의 생애에 대해 생각한다, 라는 것쯤은 솔직히 말해도 될 것 같다. 그렇다고 영화공부를 위해 보는 걸작들처럼 <레즈>를 두번 세번 보지는 않는다. 전혀 보고 싶지 않다. 그것은 영화적 완성도와 별개로, 이따금 자기 생애의 흐름을 헤집는 영화를 만났을 때, 두번 다시 그 저릿한 느낌, 그 두려운 느낌과 조우하고 싶지 않은 그런 비겁한 태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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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버려, 날 지루하게 하지 말고! 티어스 오브 더 블랙 타이거 Tears of the Black Tiger 타이| 감독 위시트 사사나티엥| 100분| 2001년 상류층인 룸포이의 가정은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방콕을 피해 수판부리라는 시골로 들어간다. 둠의 아버지는 그들에게 임시거처를 마련해 준다. 도시처녀 룸포이와 수줍은 시골 소년 둠은 서로에게 애틋한 감정을 느끼게 되고, 9년 뒤 그들은 방콕의 대학생으로 다시 만난다. 둠은 룸포이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싸움을 벌이다 대학에서 쫓겨나지만 열심히 돈을 벌어 다시 그녀와 만나 결혼할 것을 약속한다. 고향으로 돌아온 둠은 아버지가 도적떼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음을 알게 된다. 둠은 복수에 불타는 갱스터가 된다. ‘블랙 타이거’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는 둠. 조직 속에서의 배신과 암투 속에서 사랑을 지키려는 둠의 운명은 점점 비극 속으로 휘말려 들어간다. <티어스 오브 더 블랙 타이거>의 복고풍 색채는 의도적으로 화려하게 채색한 세트 사용과 필름을 베타테이프로 옮긴 뒤 후반작업을 통해 색을 덧입힘으로써 얻어낸 것이다. 위시트 사사나티엥은 여기에다 60년대식 타이영화의 전통과 연극무대의 차용으로 타이식 스파게티 웨스턴이라고 불릴 만한 독특한 작품을 탄생시켰다. 히어로즈 인 러브 戀愛起義 홍콩·중국| 감독 윙쉬야, 사정봉, 풍덕륜외| 출연 샬린 초이, 로렌스 초우| 85분| 2001년 <히어로즈 인 러브>는 네편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옴니버스영화다. 각 에피소드들은 다소 실험적인 연출스타일을 지닌다. <히어로즈 인 러브>는 오늘날 홍콩영화의 영역을 확장해 보려는 새로운 시도라 할 만하다. 1부 ‘유괴’는 윙쉬야가 감독한 20분짜리 레즈비언영화. 관습적이지 않은 스타일이 돋보인다. 2부 ‘내 사랑’은 대중의 우상인 니콜라스 체(사정봉)와 스티븐 펑(풍덕륜)이 감독을 맡아 관객의 관심을 끈다. 총을 사랑하는 한 청년에 관한 이야기. 약간은 아마추어적인 24분간의 에피소드. 3부 ‘Oh G!’는 디스크자키인 GC 구바이가 연출한 에피소드로 가장 관습적인 내러티브를 지니는 모던하고 도시적인 첫사랑 이야기다. 주연 샬린 초이와 로렌스 초우 모두 신인으로, 자연스럽고 뛰어난 연기를 선보인다. 마지막 4부는 ‘TBC’란 제목의 5분짜리 에피소드로, 제작자인 잔 람브(Jan Lamb)가 감독. 세 에피소드를 연결시키려고 시도했지만 <히어로즈 인 러브>의 각 에피소드들이 결핍하고 있는 깊이를 보강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나비 The Butterfly 한국| 문승욱| 김호정, 강혜정| 106분| 2001 모든 기억을 지우고 싶다. 가능만 하다면 이건 자기 살해의 가장 완벽한 방법이다. <나비>의 한국계 독일인 안나에겐 기억이 죽음 같아서 자살과 완전한 망각 외엔 출구가 없다. 다행히 <나비>의 무대인 가까운 미래의 서울엔 망각의 바이러스가 살고 있고, 영리한 장사꾼들은 망각 바이러스를 찾아 떠나는 패키지 여행상품까지 마련해두었다. 독일에서 온 안나를 가이드 유키와 운전사 K가 맞는다. 납중독자인 유키는 의사의 심각한 경고에도 7개월된 아기를 지우지 않았다. 과거를 잃어버린 K는 기억을 찾아줄 친지를 찾고 있다. 망각의 바이러스를 나비가 인도하며, 나비가 있는 곳엔 어김없이 지독한 산성비가 내린다. 세 사람의 젖은 겨울옷 같은 여정이 시작된다. <이방인>으로 장편 데뷔한 문승욱 감독은 6mm 디지털카메라에 2000년 서울의 모습 그대로를 온기없는 미래공간으로 담는다. 때론 씻어내야 할 독과 한기로, 때론 양수처럼 따뜻한 보금자리로, 때론 고통스런 영적 세척제로 탈바꿈하는 물의 유동하는 이미지에 실려, 이 낯설고 낯익은 공간은 어느새 보는 사람의 어두운 기억에 더운 손을 내민다. 뛰어난 연극배우였던 김호정(안나 역)의 깊은 눈매는 여배우가 미모와 관능을 치장하지 않고도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음을 새삼스레 수긍케 한다. 동기화는 빈곤하지만 <나비>는 섬세하게 포착되고 편집된 화면 곳곳에 묻어 있는, 만든 이의 진심을 외면하기 힘든 영화다. 커먼 웰쓰 Common Wealth 스페인| 감독 알렉스 드 라 이글레시아| 출연 카르멘 마우라| 104분| 2000년 퇴직한 남편을 내심 답답해 하며 욕구불만에 빠져 있는 부동산 중개인 훌리아. 거래 매물인 고급 아파트에서 몰래 만찬을 즐기며 우울한 생활에 낙을 만들어보려던 그녀는, 주인이 죽은 이웃 아파트에서 우연히 300만달러를 발견한다. 그러나 문제의 아파트 주민들은 <악령의 씨>의 이웃과 <오리엔탈 특급 살인사건>의 승객 못지않은 가공할 결속력을 자랑하는 집단. ‘공공의 복지’, 아니 ‘공공의 재산’을 뜨내기에게 빼앗기지 않으려는 주민들은 돈가방을 든 훌리아와 필사의 추격전을 벌인다. 임자없는 돈뭉텅이를 둘러싼 설정은 <쉘로우 그레이브>와 비슷하지만, <야수의 날> <액션 무탕트>의 알렉스 드 라 이글레시아 감독은 <커먼 웰쓰>를 암울하면서도 통쾌한 스페인풍 블랙코미디로 완성했다. “그냥 죽여라, 날 지루하게 만들지 말고!” 같은 대사가 자연스러운. 쇼크와 스릴을 살리면서도 집단 신경증과 괴짜 인물들의 개성, 부부간의 미묘한 심리를 모두 소홀함 없이 묘사한 <커먼 웰쓰>는 입가에선 웃음이 삐져나오고 팔뚝에서는 소름이 돋는 영화다. 호텔 스플렌디드 Hotel Splendide 영국-프랑스| 감독 테렌스 그로스| 출연 토니 콜레트, 다니엘 크레이그| 95분| 2000년 정상성의 세계로부터 동떨어져 안으로 밀폐된 자족적 소우주는 판타지영화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세팅이다. <호텔 스플렌디드>는 <사이코>의 노먼 베이츠 못지않게 죽은 어머니의 그림자에 사로잡힌 남자가 관리하는 외딴 섬의 불건강한 호텔에서 벌어지는 드라마. 엄격한 규칙과 맛없는 메뉴, 진흙 목욕요법을 고집하는 블랑쉐 가족이 경영하는 호텔 스플렌디드에서는 투숙객도 범상치 않다. 물을 겁내는 스탠리, 온몸을 배트맨 같은 옷으로 가리고 사는 과민 피부의 소유자 세르게이는 탈출을 꿈꾸나 매번 실패한다. 그러나 죽은 창업자 블랑쉐 부인에게 해고됐던 요리사 캐스가 돌아와 생기있는 요리를 식탁에 올리기 시작하면서 호텔은 보이지 않는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이낏빛 고딕 건축물과 생물처럼 신음하는 파이프들도 등장인물 못지않은 연기를 보여주는 이 영화는 각각의 장면은 주네와 카로의 <델리카트슨 사람들>을, 테마면에서는 <초콜렛>의 맛을 떠올리게 한다. 결말부에는 떠들썩한 체크아웃이 기다리고 있다. 뉴질랜드 이불 도난 사건 Price of Milk 뉴질랜드| 감독 해리 싱클레어| 출연 다니엘 코맥, 칼 어반| 87분| 2000년 우유가 버터가 되도록 사랑을 나누는 젖소농장의 두 연인 루신다와 롭의 달콤한 약혼 밀월은 소심한 루신다가 연인의 애정을 무리한 방법으로 시험하던 날부터 균열을 일으키고 루신다가 애지중지하던 퀼트 이불을 도둑맞은 날부터 붕괴하기 시작한다. 그녀의 차에 치일 뻔한 마오리족 할머니의 집에서 사라진 퀼트를 발견한 루신다는 이불을 돌려달라고 요구하지만 그 대가로 롭의 사랑을 어려운 시험에 들게 하고, 루신다의 단짝친구까지 연적으로 돌변한다. 여기서 ‘철없는 약혼녀’ 루신다의 이야기는 인어공주와 신데렐라의 슬픔을 빌려온 현대의 동화로 탈바꿈한다. 남미가 아닌 뉴질랜드를 무대로 한 마술적 리얼리즘의 연애담 <뉴질랜드 이불 도난 사건>은 지난 부천영화제에서 인기를 끌었던 <시암 선셋>처럼 바보스럽지만 자꾸 정이 가는 로맨틱코미디. 모스크바 오케스트라의 언밸런스한 음악도 영화의 엉뚱한 분위기를 부추긴다. 광장공포증 때문에 종이 상자를 한사코 쓰고 다니는 수줍은 강아지는 보기 드물게 기발하고 사랑스러운 조연. 시체유기 자장가 3 Chinesen Mit dem Kontrabass 독일| 감독 클라우스 크래머| 출연 보리스 알지노빅, 클라우디아 미켈센| 88분| 1999년 필름이 끊긴 사이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혼성 트리오의 시체유기 소동극인 이 영화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동거하는 여자친구의 시체를 발견한 소심한 마마보이 건축사 폴과 그의 충실한 두 단짝친구가 겪는 수난의 희극이다. 폴이 창업한 회사의 첫 수주를 자축하는 동안, 애인 가비는 다른 남자를 아파트에 끌어들였다가 남자의 스텝이 엉키는 바람에 가구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즉사한다. 숙취에서 깨어난 폴은 자기가 죽였을지도 모르는 가비의 시신에 기겁해 의사인 친구 막스의 도움을 청하고 둘은 톱, 믹서, 냉장고, 수세식 변기 등 가재도구를 용도변경해 시체 없애기(?)에 나선다. 여러모로 부천영화제 초청작 <형사에겐 디저트가 없다>와 비슷한 설계도를 가진 이 영화에서도, 눈치없는 가족과 이웃이 무시로 들이닥쳐 주인공들의 애를 태운다. 독일의 유명 코미디배우들이 분한 주인공 삼인조는 “(광우병 때문에) 요즘 고기는 믿을 수 있어야죠”라는 대사를 읊거나 노래 <마이 걸>이 흐르는 가운데 연인의 뼛가루를 도시 곳곳에 뿌리고 다니며 폭소를 자아낸다. 공포의 집 House on Terror Tract 미국| 감독 랜스 W.드레슨, 클린트 허치슨| 출연 존 리터, 데이비드 들루이즈| 97분| 2000년 <어메이징 스토리>류의 옴니버스 구성과 텔레비전 드라마의 양식을 취한 교외 괴담. 겉보기엔 평화로운 중산층 주거지로 신혼부부를 안내하는 부동산 중개인 봅 카터는 얼핏 쾌활해 보이지만 실은 성과급제를 택한 회사로부터 시달리는 절박한 처지다. 그러나 그가 보여주는 근사한 세채의 집은 저마다 도저히 팔리기 힘든 기괴한 내력을 갖고 있다. 첫 번째 집은 아내의 정사를 덮치기 위해 함정을 놓았다가 죽음을 맞은 남편과 그 혼령의 믿기 힘든 복수담의 현장이고, 두 번째 집은 외동딸의 사랑을 앗아간 사악한 원숭이와 혈투를 벌이다 모든 것을 잃은 남자가 살았던 곳이다. 세 번째 집에는 노파 가면을 쓴 살인자의 범죄를 예지하는 한 청년과 그를 상담한 여의사의 핏자국이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순진한 ‘아메리칸 드림’을 조롱하는 내용이지만 그보다 “뭔가 좋은 것을 가지려면 그것의 역사를 함께 받아들여야 한다”거나 “많은 행복한 이야기도 있었지만 사람들이 신경쓰는 건 한번의 불행뿐”이라는 주인공의 투덜거림이 더 기억에 남는다. 턴 The Turn 일본| 감독 히라야마 히데유키| 출연 미추코 바이쇼, 리호 마키세| 111분| 일본 모래시계 모양 로고와 ‘시간’이라 명명된 동판화로 시작되는 <턴>은 <사랑의 블랙홀>의 아이디어와 <동감> <프리퀀시>의 정서, 사랑하는 대상으로부터 영영 분리된 <러브레터>의 아득한 단절감이 어우러진 영화다. 어머니와 단 둘이 살면서 판화를 제작하는 아가씨 마키는 대형 교통사고를 겪은 순간, 사고 직전인 오후 2시15분을 기점으로 영원히 반복되는 하루에 갇힌다. 다른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고 날씨도 그대로인 텅 빈 세계에서 절대고독과 싸우던 마키는 어느날 ‘저쪽 세상’에서 걸려온 청년의 전화를 통해 현실로 이어지는 가느다란 끈을 갖게 되고 현실의 자신이 혼수상태임을 알게 된다. 다른 우주에 속한 두 남녀가 전망좋은 레스토랑에서 ‘여행자’를 지켜준다는 식물원의 나무 앞에서, 보이지 않는 상대와 만나는 삽화들이 무척 예쁜 <턴>은 순정만화의 향기를 낸다. 그러나 진공의 세계에 홀로 남겨진 채 시간을 지워나가며 문득문득 영원한 미아가 되는 공포에 가위눌리는 마키의 상황 자체는 꽤 넓은 폭을 지닌 은유이기도 하다. 허문영 기자 김혜리 기자 김영덕/부천영화제 프로그래머 ▶ 제5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 부천초이스 (Puchon Choice) ▶ 월드 판타스틱 시네마 (World fantastic cinema) ▶ 제한구역 (Forbidden Zone) ▶ 패밀리 섹션 (Family Section) ▶ 판타스틱 단편걸작선 ▶ 몇 개의 회고전들 ▶ 부천초이스 단편부문 ▶ ‘할리우드 고전 공포영화 특별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