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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검색결과

기사/뉴스(9404)

영화인생의 초행길에서,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황정민

어디쯤 그 수줍은 드러머 아저씨를 품고 있는 걸까. 서른 중반 즈음에, 후미진 나이트클럽을 전전하며 무대 구석에서 드럼을 두드려대는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강수. 삼류밴드의 고단한 일상을 술과 대마초로 위로삼다 결국 밴드를 위해 떠나가는 우직하고도 여린 드러머 말이다. 여름해가 질 무렵, 대학로 명필름 사옥에서 만난 황정민에겍서 한눈에 `강수`를 떠올리기란 쉽지 않았다. 짧던 머리가 단발로 길고, 입가에 수염이 많이 자란 얼굴. 더구나 카메라 앞에서 바지를 둥둥 걷고 선뜻 맨발이 돼버리는 품새까지, 그는 한결 거침없고 분방한 활기에 넘쳐보였으니까. `강수`는 지난 1년 사이 황정민이 맞닥뜨린 가장 큰 사건 중 하나다. 임순례 감독의 <와이키키...>가 그의 실질적인 영화 데뷔작이기 때문. 지난해 가을에 열린 `지상최대의 오디션`에 참가하기까지 그는 영화의 객석에 있었다. 하지만 오디션에서 “옆으로 서보시죠”하고 말을 건넨 임 감독이 그의 얼굴에서 강수를 찾아냈다. 재미있는 우연 하나는, 그의 아버지가 과거 미8군에서 취미로 드럼을 연주했다는 사실. 악영향을 걱정한 어머니가 그만두게 해서 공연을 본 적은 없지만, 어릴 때 드럼 스틱으로 맞은 기억만은 생생하다. 드럼을 쳐본 적도 없는 그에게, 2달 안에 영화 삽입곡들을 연주할 수 있도록 악기를 익혀야 하는 것은 가장 큰 부담이었다. “큰 쟁반, 작은 쟁반, 큰북, 작은북, 왼손, 오른손, 왼발, 오른발 하는 식으로 나만의 악보를 만들었어요.” 그렇게 연습에 몰두하는 그를 본 아버지는 딱 한번이지만 시범을 보여주기도 했다. 영화 출연은 거의 처음이지만, 연기는 그에게 아주 오랜 꿈이다. 극장 입장료가 150원하던 어린 시절부터, 그는 틈만 나면 자전거를 타고 극장으로 달려가 은막에 투사된 빛에 넋을 잃곤 했다. 그러다가 중3 때 뮤지컬 <피터팬>에서 “날아다니는 윤복희 아줌마”를 보며 연기를 하겠다고 맘먹었고, 그런 그에게 어머니가 먼저 계원예고 원서를 건넸다. 예고 연극과에서 첫걸음을 뗀 연기의 꿈은, 3학년 때 벌인 사고(?)를 거름삼아 더욱 굳어졌다. 친구들끼리 주머닛돈을 털어 극단을 만들고, <가스펠>이란 뮤지컬을 기획해서 1달 공연으로 계몽아트홀에 올렸다가 관객이 거의 없어 펑펑 울며 보름 만에 간판을 내린 것이 사고의 전말. 빚만 800만원이 남는 바람에 결국 부모님들에게 한바탕 얃단을 들은 뒤 일부를 갚고, 남은 빚은 제비뽑기로 금액을 나눠 두고두고 갚았다. 일찌감치 연기의 배고픔을 알았기 때문일까. 사고의 여파로 재수를 해서 서울예대를 다니고, 졸업 뒤 학전에서 연극을 해오는 동안에도 그는 포기를 생각해본 적은 없다. 95년 <지하철 1호선>의 익살스런 캐릭터 `문디`를 시작으로 <개똥이><의형제><캣츠><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등이 그가 거쳐온 작품들. 버젓한 회사에 다니는 친구들, 심지어는 부모님들도 연극으로 얼마나 버냐고 답답해했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강수를 이해하는 것도 그런 이유 같아요. 나 나름대로, 강수나름대로 잘살고 있는 건데, 답답해보일 수 있잖아요. 사는 방식의 차이죠.” 그래서 <와이키키...>의 강수는, 한동안 벗어나기 힘들 만큼 애착이 갔다. 그렇게 먹은 나이가 서른둘, 그는 새로운 시작에 서 있다. 스크린으로 본 자신의 연기가 무척 쑥스러웠다면서도, 처음의 열정이 세월에 바랄까 벌써부터 걱정이다. 그리고는 “숀 코너리처럼 멋지게 늙어서 좋은 연기를 보여주고 싶은데, 그냥 일이라고 도장찍으며 할 게 아닌 것 같아요. 즐기면서 잘할 수 있는 여유를 찾는 게 요즘의 고민”이라고. 막 크랭크인했다는 그의 두번째 영화에서, 앞으로 다가올 세 번째, 네 번째 영화에서, 이 중고 영화신인의 해법을 지켜보는 재미도 적잖을 듯 싶다.

투자 위축인가, 시스템 정비인가

네티즌 펀드에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일부 네티즌 펀드에 대한 검찰수사 방침이 언론을 통해 보도됨에 따라 투자자 및 영화제작, 투자사의 궁금증이 증폭되고 있다. 특히 최근 일부 일간지가 “검찰이 6개 펀드에 대해 불구속 또는 약식기소할 방침”이라는 보도를 한 뒤 이 파장은 더욱 커지고 있다. 이 사건과 관련, 검찰조사를 받은 한 업체 관계자는 “금감위의 고발에 따른 이번 검찰의 수사는 유사수신행위, 즉 원금을 보장하는 일부 영화, 음반, 서적을 대상으로 한 것이며 대부분의 영화투자 관련 펀드는 수사대상이 아닌 것으로 안다”라고 밝혔다. 또 이번에 조사를 받고 있는 영화펀드는 1편으로, 네티즌 펀드업체에서 공모한 작품이 아니라 제작사 C사가 직접 공모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이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서울지검 컴퓨터수사부 관계자는 “아직 조사단계이며 약식기소 같은 방침이 결정된 적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번 수사에 직간접으로 관련된 네티즌 펀드업체들은 검찰수사에 반발하는 눈치다. 이번 수사의 근거 법령인 ‘유사수신행위 규제에 관한 법률 및 시행령’은 원금 보장 또는 고이율 배당을 내세워 거액을 공모한 뒤 잠적하는 사기성 사설펀드를 규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투자처가 확실한 영화 등에 투자하는 네티즌 펀드와는 차별성을 갖는다는 게 이들의 입장이다. 한 네티즌 펀드 관계자는 “이 법이 투자자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하는데, 우리가 원금을 보장한 이유도 네티즌 투자자의 피해를 막기 위해 음반 제작사를 설득해 추진한 것이다. 물론 제작사는 이를 마케팅 차원에서 받아들였다”고 주장했다. 현재 네티즌 펀드업체들은 투자가 위축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특히 일반인과 여론이 네티즌 펀드 전체를 불건전한 것으로 바라볼까봐 노심초사하는 분위기다. 영화 투자사나 제작사가 쓸데없는 논란에 휘말릴 것을 우려, 네티즌에게 투자정보를 공개하지 않을지 모른다는 점도 고민거리. 그러나 이번 사건을 계기로 투자금 환수, 수익 배당률, 세금 원천징수 등의 문제로 투자자들과 마찰을 빚고 있는 네티즌 펀드사업이 좀더 매끄러운 시스템을 갖출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존재한다. 한 업체 관계자는 “최근 분위기에서는 자칫 대형 사기사건이 발생할 여지도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이를 미연에 방지한 셈”이라고 말했고, 다른 업체에서는 “이번 사건을 통해 표준약관조차 없는 등 미비한 네티즌 펀드 관련 법령이 정비됐으면 한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이번 조사에서 애초 제외된 인츠닷컴의 김정영 부장은 “갈수록 네티즌 펀드가 색깔없는 대형 영화에만 투자하고, 네티즌은 재테크적 시각으로 참여하는 경향이 강해진다. 때문에 <무사> 공모 이후에는 네티즌 펀드에 대해 전면 재검토할 계획이며, 이후에는 개성있는 소규모 영화를 후원하는 인큐베이팅 사업에 주력할 방침이다”는 입장을 밝혔다. 문석 기자

비틀스의 후예들

얼마 전 이 지면에 소개한 영국 애니메이션 작가 앨리슨 드 비어에 대한 자료를 찾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하던 중 재미있는 글을 하나 발견했다. 화가이자 방송인인 로버트 히에로니무스가 <애니메이션 월드 매거진>에 쓴 ‘비틀스 <옐로 서브마린>의 애니메이터들: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나?’(The Animators of The Beatles Yellow Submarine: Where Are They Now?)란 장문의 기고문이었다. 앨리슨 드 비어에 대한 글에서도 밝혔지만, 그녀는 <옐로 서브마린>에 배경감독으로 참여했다. 이 글에는 그녀 외에 총감독 조지 더닝에서 음악을 맡았던 조지 마틴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스탭들의 활동과 근황을 꼼꼼히 소개하고 있다. 실질적으로 애니메이션 제작을 주도했던 아트디렉터 하인츠 에델만은 <옐로 서브마린>에서 득특한 형상의 글자와 색감으로 당대의 문화와 유행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뒤 그는 특수효과 디자이너였던 찰리 젠킨스, 앨리슨 드 비어와 손을 잡고 런던에 스튜디오를 차려 CF와 장편애니메이션을 제작했고, 70년대 들어서는 책 디자인에서 일러스트레이션, 잡지 디자인, 콘서트 포스터, 애니메이션 등 그래픽 디자인의 전 분야에서 활약했다. 또한 최근 은퇴할 때까지 30년 동안 ‘슈투트가르트 아카데미 오브 파인 아트’의 교수로 재직했다. 총감독인 조지 더닝은 60년대 영국 애니메이션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잭 스톡스와 함께 67년부터 TV시리즈인 <더 비틀스>를 감독했는데, <옐로 서브마린>에 참여하게 된 것도 이러한 전력이 크게 작용했다. <옐로 서브마린>에는 그외에 잭 스톡스 등 TV시리즈 애니메이터들이 대거 참여했다. 하지만 11개월의 애니메이션 제작기간 동안 조지 더닝은 지병으로 인해 제대로 자신의 일을 할 수 없었다. 조수인 빌 시웰과 함께 ‘루시 인더 스카이’를 비롯한 몇몇 시퀀스를 제작했지만 건강으로 인해 더이상 제작에 참여하지는 못했다. 애니메이션 발표 뒤 조지 더닝은 더욱 건강이 나빠져 69년 등의 작품을 발표하고 79년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드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라인 프로듀서 존 코츠는 TV시리즈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79년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으로 에미상을 수상한 그는 83년 <스노우맨>을 제작해 전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이후 그는 레이먼드 브릭스 원작의 <바람이 불면>을 비롯해 <그랜드 파> <파더 크리스마스> 등 우리에게 친숙한 수작들을 제작했다. 최근에는 조아나 퀸의 <페이머스 프레드>로 영국필름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 프로듀서 알 브로덕스는 <옐로 서브마린>에 이어 자신이 직접 극본·제작·연출을 맡은 <소원을 빌어요> <애니멀 애니멀, 애니멀> 등으로 에미상을 수상했다. 80년대 들어서는 마블 코믹스와 컴퓨터그래픽 래보라토리스 등의 회사에서 애니메이션 제작 자문으로도 활동했다. 하인츠 에델만의 조수 밀리센 맥밀란은 ‘서브마린’ 이후 30년간 TV시리즈에서 활동했다. 그는 존 코츠가 제작한 <스노우맨> <그랜드 파> <파더 크리스마스>에서 배경이나 디자인을 담당했다. 그뒤 그는 장편영화로 외도를 해 앨런 파커가 감독한 핑크 플로이드의 <더 월> 제작에 참여했다. 키 애니메이터를 맡았던 데이비드 리버시는 이후 영국의 대표적인 애니메이션 프로덕션 중 하나인 ‘코스그로브 홀 프로덕션’에서 일했다. 그는 <스노우맨> <워터 베이비스> <헤비메탈> <크리스마스 캐롤> 등에 참여했고 최근에는 존 코츠가 제작한 레이먼드 브릭스 원작의 애니메이션 <더 베어>의 키 애니메이터로 참여했다. 애니메이션 스탭은 아니지만 그에 못지않은 역할을 했던 사람으로는 조지 마틴이 있다. ‘제5의 비틀스’로 불렸던 그는 6곡의 오리지널 오케스트라곡을 영화를 위해 작곡했다. 그의 작품을 두고 프로듀서 알 브로덕스는 바흐의 작품에 비견되는 명곡이라고 극찬을 했다. 비틀스 이후에도 마틴은 밥 딜런, 스팅, 엘튼 존, 칼리 사이먼, 시네드 오코너, 엘비스 코스텔로, 피터 가브리엘 등 쟁쟁한 음악가들의 앨범을 제작했다. 그의 마지막 앨범 <인 마이 라이프>에는 평소 절친했던 골디 혼, 로빈 윌리엄스, 바비 맥페린, 숀 코너리 등이 참여해 마틴이 아꼈던 비틀스의 곡들을 불렀다. 그리고 또 한명. <옐로 서브마린>의 대본은 당시 프로듀서 알 브로덕스가 예일대에서 찾아낸 한 젊은 교수가 맡았다. 애니메이션에 거의 경험이 전무했던 그는 런던으로 와서 40여명의 스탭들과 밤을 새우며 일을 했는데 이후 소설가로서 더 큰 명성을 떨쳤다. 바로 <러브 스토리> <올리버 스토리>의 원작자인 에릭 시걸이다. (이 글을 마지막으로 이 코너를 김세준씨에게 넘깁니다. 그동안 이 코너를 아껴준 독자께 감사드립니다. 언젠가는 저도 히에로니무스처럼 <로버트 태권 V>나 <아기공룡 둘리>에 참여했던 작가들의 눈부신 활약상을 즐거운 마음으로 소개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김재범/ 애니메이션 칼럼니스트 oldfield@chollian.net

미리 보는 상영작 17편

몽소 빵집의 소녀 La Boulangere de Monceau 1963년, 26분, 흑백 10년에 걸쳐서 만든 여섯편의 ‘도덕 이야기’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 ‘도덕 이야기’ 시리즈의 기본 패턴인, 두 여자 사이에서 고민하는 한 남자 이야기가 첫선을 보인다. 대학생인 슈뢰더는 거리에서 한 여자를 보고 그녀에게 매혹을 느낀다. 그런데 그녀는 갑작스레 거리에서 보이지 않게 된다. 그녀를 찾으러 거리를 돌아다니던 슈뢰더는 몽소 빵집을 드나들게 되고 그곳에서 일하는 점원 아가씨를 유혹하려 한다. 빵집 아가씨와 데이트를 하려는 날 그만 슈뢰더가 찾던 여자가 모습을 드러내고 슈뢰더는 고민에 빠진다. 수잔느의 경력 La Carriere de Suzanne 1963년, 52분, 흑백 ‘도덕 이야기’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인 <수잔느의 경력>은 첫 번째 작품인 <몽소 빵집의 소녀>보다 좀더 길며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다. 영화는 서로 친구 사이인 두 남자가 같은 여자에게 관심을 가질 때 일어나는 관계의 양상에 대해 탐구한다. 처음에 수잔느라는 여자에게 별 관심이 없던 베르트랑은, 친구인 귀욤이 수잔느의 매혹을 사자 비로소 수잔느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 로메르 자신은 ‘도덕 이야기’의 첫 두 작품이 보여준 낮은 기술적 수준에 당황해했다고 전해지지만, 그것들은 로메르의 초창기 재능과 관심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는 작품들이다. O 후작 부인 Die Marquise von O... 1976년, 102분, 컬러 로메르가 처음으로 착수한 시대극으로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소설을 원작에 충실하게 각색했다. 18세기 이탈리아의 어느 지방. 러시아군이 침공해 들어오면서 혼자된 O 후작 부인은 러시아 군인들에게 강간당할 위기에 처한다. 이 때 러시아군 장교가 후작 부인을 구해준다. 얼마 뒤 후작 부인은 이상하게도 자기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고전적 품격이 느껴지는 이 작품을 두고 리처드 라우드는 “고상하고 감동적이면서 따뜻한 이 영화는 사람들을 동시에 웃고 울게 만들 수 있다”고 격찬했다. 대사가 전부 독일어로 된 작품으로, 러시아군 장교 역으로는 빔 벤더스의 <베를린 천사의 시>로 우리에게 낯익은 브루노 간츠가 나온다.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 Ma Nuit chez Maud 1969년, 120분, 흑백 에릭 로메르에게 상업적·비평적 성공과 국제적 명성을 안겨준, 명실상부한 로메르의 초기 대표작.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주인공 엔지니어는 성당에서 우연히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한 여인을 만나고 그녀와 결혼할 결심을 생각을 한다. 옛 친구 비달을 만난 그는 비달을 따라 모드라는 여자가 사는 집에 가게 되고 그녀와 단둘이 하룻밤을 보낸다. 윤리적이고 실존적인 선택의 문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작품으로 주인공, 비달, 모드가 모드 집에서 파스칼에 대해 토론하고 또 모드와 주인공이 은근한 유혹과 거부의 말을 주고받는 긴 시퀀스가 영화사상 손꼽을 만한 명장면으로 이야기된다. 클레르의 무릎 Le Genou de Claire 1969년, 110분, 컬러 한 남자가 자신의 숨겨둔 욕망과 싸운다는 고전적인 이야기를 미묘한 에로티시즘으로 그려낸 작품. 외교관인 제롬은 결혼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홀로 휴가를 보내려고 스위스의 아름다운 휴양지를 찾는다. 여기서 그는 자신에게 호감을 갖는 15살 소녀 로라를 만난다. 얼마 뒤 그 앞에 로라의 언니인 클레르가 나타나고 제롬은 점점 클레르의 무릎에 강박적으로 탐닉하게 된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플롯 구조의 대단한 정교함으로 인해 평론가 데이브 커는 “로메르는 사랑의 미스터리들을 마치 수학문제 풀 듯 다룬다”고 말하기도 했다. 오후의 연정 L’Amour, l’apres-midi 1972년, 98분, 컬러 ‘도덕 이야기’의 마지막 에피소드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도덕적 책임과 정서적인 매혹의 문제를 흥미롭게 탐구한다. 회사의 간부로 일하고 있는 프레데릭은 사랑스런 아내도 두고 있는 성공한 젊은이. 언제부턴가 그는 자신이 거리를 지나는 모든 여자에 대한 이런저런 환상을 품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던 그는 보헤미안처럼 사는 여자인 옛 친구 클로에가 나타나자 진짜로 시험에 들게 된다. 프레데릭에 대한 클로에의 유혹은 점점 더 노골적인데…. 정서적 위기에 처한 남자의 심리를 거의 완벽에 가깝게 묘사했다는 평을 들은 로메르의 또다른 대표작. 수집가 La Collectionneuse 1967년, 90분, 컬러 아드리앙과 그의 친구인 다니엘은 생 트로페즈 근처 별장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다. 그곳에는 젊고 매력적인 아이데도 함께 지내고 있는데, 그녀는 주위에 항상 사내들이 끊이지 않아 ‘수집가’라는 별명을 듣고 있다. 아드리앙과 다니엘은 아이데의 ‘수집품’이 되지 않으려 그녀의 매력에 저항해보지만 쉽지가 않다. 성적인 유혹에 대한 저항이라는 주제를 위트있게 그려낸 작품으로 원래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 다음 에피소드로 계획되었으나 사정이 생겨 그것보다 먼저 제작되었다고 한다. 갈로아인 페르스발 Perceval le Gallois 1978년, 140분, 컬러 기사 퍼시발의 중세 이야기를 다룬 <갈로아인 페르스발>은 아마도 로메르의 모든 영화들 가운데 가장 독특한 작품이라고 할 만하다. 그렸다는 게 확연히 느껴지는 지극히 연극적인 세트도 처음엔 관객을 다소 당황스럽게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이질감이 느껴지는 것은 대사 처리일 것이다. 이 영화에서 로메르는 배우들에게 대사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주어진 지문까지 다 말로 하게 한다. 그래서 이를테면 배우는 “그는 창을 들었다”와 같은 말을 직접 내뱉으면서 행동도 보여준다. 언어 처리에 대한 로메르의 실험성이 돋보이는 이런 방식은 문학에서 이용되는 ‘자유간접화법’의 적용이기도 하고 또한 설명적인 모든 것을 인물들에게 일임하려는 로메르적인 연출방식의 변형이기도 하다. 비행사의 아내 La Femme de l’Aviateur 1980년, 104분, 컬러 여성주인공들의 심적인 동요에 초점을 맞춘 로메르의 또다른 연작 <코미디와 격언>의 첫 번째 작품. 프랑수아는 우체국에서 야간 근무를 하면서 안느와 친하게 지낸다. 그러던 어느날 프랑수아는 안느가 전 남편 크리스티앙과 외출하는 것을 목격하고, 그에게 묘한 질투심을 느낀다. 프랑수아는 카페에서 그가 어떤 금발의 여인과 함께 있는 것을 보고 그들의 뒤를 밟는다. 뒤에 <녹색 광선>과 <가을 이야기>에도 나오는 마리 리비에르가 이 우울하면서도 매력적인 이야기의 주연을 맡았다. 해변의 폴린느 Pauline a la plage 1983년, 94분, 컬러 여름 휴양지에서의 열정을 다룬 로메르의 또 하나의 ‘휴가영화’. 얼마 전 이혼한 마리온과 그녀의 사촌 여동생 폴린느가 해변가의 휴양지를 찾아온다. 사랑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열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마리온은 여기서 앙리라는 남자를 만나 사랑을 불태우려 한다. 그 남자의 속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수집가> 이후 로메르와 오랫동안 같이 작업해왔던 촬영감독 네스토 알멘드로스가 마지막으로 찍은 로메르 영화로 컬러로 촬영된 가장 아름다운 코미디라는 평을 들었다. 나중에 <여름 이야기>에서 가스파르의 세 여자들 가운데 하나로 나올 아만다 랑글레가 폴린느 역을 맡았다. 녹색광선 Le Rayon Vert 1986년, 90분, 컬러 파리에서 일하는 젊은 여성 델핀느는 바캉스 계절이 다가오자 안절부절못하는 상태에 빠지고 만다. 그녀는 얼마 전에 약혼자와 헤어진데다가 함께 그리스로 여행하기로 약속했던 친구로부터 갑자기 약속을 지키지 못하겠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것이다. <클레르의 무릎>이나 <여름 이야기>처럼 일기 형식을 통해 우리를 주인공의 심리에 가까이 밀착게 하는 영화. 특히 바람에 풀들이 흔들리는 숲에서 델핀느가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은 그녀의 고독과 상실감이 그대로 전해져온다. 올해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 공로상을 수상할 로메르에게 이미 황금사자상을 안겨줬던 작품이다. 파리의 랑데부 Les Rendez-vous de Paris 1995년, 100분, 컬러 남녀의 사랑을 그린 세개의 짧은 에피소드로 구성된 작품. 첫 번째 에피소드인 ‘7시의 랑데부’는 자신의 남자친구가 매일 일곱시만 되면 카페에서 다른 여자를 만난다는 한 젊은 여자의 이야기를 그린다. 두 번째 에피소드 ‘파리 벤치’에는 공원에서 우연히 만난 두 젊은 남녀의 사랑 이야기가 담겨 있고, 마지막 에피소드 ‘어머니와 아이 1907’에는 피카소 박물관에서 벌어지는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가 담겨 있다. 로메르의 경쾌한 이 영화에 대해 <타임>의 리처드 콜리스는 “영화, 파리, 그리고 사랑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작지만 완벽한 선물”이라고 말했다. 나무, 시장, 메디아테크 L’Arbre, le Maire et la Mediatheque 1993년, 105분, 컬러 로메르의 영화들 가운데 비교적 덜 알려진 영화로 제목 그대로 나무, 시장, 미디어센터가 서로 엮이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버드나무로 뒤덮인 공유지에 큰 미디어센터를 지으려고 하던 시장은 환경보호론자인 한 교사의 저항에 부딪히게 된다. 시장의 딸과 교사의 딸이 서로 친구가 되면서 일은 점점 꼬여간다. 가을 이야기 Conte d’Automne 1998년, 110분, 컬러 ‘계절 이야기’ 시리즈의 완결편에 해당하는 작품. 수확의 계절, 결실의 포도밭이 영화의 시공간이고 그 중심에 40대의 중년 여성이 자리한다. 영화의 주인공인 미망인 마갈리는 이미 장성한 아들과 딸을 둔 어머니이고, 포도 농원을 경영하는 데 수지타산을 따지기보다 자신의 경영원칙을 관철하는 데 골몰하는 심지 굳은 ‘장인’. 오랜 친구 이자벨과 아들의 여자친구인 로진이 마갈리에게 짝을 찾아주려 하면서 영화는 스토리를 갖춰간다. 가을이란 계절의 분위기에 걸맞게 배경과 캐릭터에서 성숙함이 물씬 풍기는 그런 영화다. 보름달이 뜨는 밤 Les Nuits de la pleine lune 1984년, 102분, 컬러 ‘코미디와 격언’ 시리즈에 속하는 영화들은 모두가 일종의 ‘격언’을 보여주면서 시작하는데 <보름달이 뜨는 밤>이 이야기하는 격언은 “두 여자를 가진 자는 자신의 영혼을 잃고 두채의 집을 가진 자는 미쳐버린다”이다. 영화는 정확히 그 격언을 때론 코믹하고 또 결국엔 우울하게 그려낸다. 혼자 있기를 원하는 고집센 루이즈가 주인공. 교외에서 레미와 동거하는 그녀는 자신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파리에 자신만의 숙소를 정하고 파리에 오면 남자친구 옥타브와 동행한다. 그래도 레미만은 자신을 믿어주리라 믿었던 그녀는 보름달이 뜨는 밤 젊고 건강한 또다른 남자와 밤을 같이 보내는데 그러면서 운명이 자기 편만은 아님을 알게 된다. 봄 이야기 Conte de Printemps 1989년, 112분, 컬러 ‘코미디와 격언’을 마친 로메르가 새로 착수한 ‘계절 이야기’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 철학 교사인 잔느와 음악을 배우는 학생 나타샤는 파티에서 우연히 만나 친구가 된다. 나타샤의 아버지는 그녀가 싫어하는 여자와 사귀고 있는데, 나타샤는 아버지와 잔느를 짝지어주려 한다. 그러면서 잔느는 나타샤의 아버지와 미묘한 관계에 빠져든다. 이 영화로 시작을 알린 ‘계절 이야기’는 로메르가 에서 방영하는 셰익스피어의 <겨울 이야기> 공연을 보고 착상했다고 한다. 겨울 이야기 Conte d’Hiver 1992년, 114분, 컬러 <겨울 이야기>는 뜻밖에도 여름 휴양지에서 시작한다. 피서지에서 펠리시는 샤를르와 만나 사랑을 나누지만 헤어지게 된다. 결국 샤를르의 아이를 갖게 된 펠리시. 5년 뒤 펠리시는 여러 남자들로부터 구애를 받지만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옛 사랑 샤를르를 그리워한다. 아마도 로메르의 영화들 가운데 가장 음울한 영화로 기억될 듯한 이 영화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미묘하게 구축된 펠리시의 심리적 깊이로 인해 특히 빛을 발한다. ▶ 에릭로메르를 만나다 ▶ 평론가 에릭 로메르가 말하는 시네아스트 ▶ 미리 보는 상영작 17편

영화배우 크라잉 너트의 부천 기행

코흘리개 아이들이 부천의 붉은 카펫을 밟았다. 이 사건은 50년쯤 뒤 국사책에 두줄 정도로 나올 만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라고 말하면 여기저기서 돌이 날아오겠지만, 우리 꼬맹이들에게는 너무도 흥분된 일이었다. 난 꼭 <미션 임파서블>에서 톰 크루즈가 입고 나온 듯한 턱시도를 입고 붉은 양탄자를 밟으려 했건만 감독님께서 참으라고 하셨다.(참길 잘했다. 턱시도 입은 사람은 내 눈에도 안 보였다.) 어쨌든 대망의 부천국제영화제 개막신은 화려하고도 예술의 향기가 여기저기서 흩날리는 듯했다. 개막식 중 영호인들을 호명해서 무대로 나가 인사하는 순서였는데, 드럼 치는 상혁이가 자꾸 떨린다고 했다. 난 얼어서 말도 못했다. 옆에 부천 페스티벌 레이디인 장진영씨가 서 있었다. 검은 드레스르 입은 그냐와 빨간 양탄자는 정말 잘 어울렸다. 판타스틱했다. 개막작인 <레퀴엠>은 아주 강렬했고, 암울했다. 그리고 제니퍼 코넬리의 나이는 몇살일까 궁금했다. 언제까지나 늙지 않는 소녀, 그것이 배우인가보다. 아참! 우리도 배우였지. 7월 16일 우리 크라잉 너트는 심야영화를 보러 다시 부천을 찾았다. 일본에서 같이 공연했던 기타울프가 주연한 영화 <와일도 제로>를 보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와일드 제로>와 <시리즈7>을 보고 `이것이 PiFan만이 보여줄 수 잇는 영화구나!`라고 생각했다. 꿈과 낭만의 성인전용 디즈니랜드 같은 곳, 그곳은 PiFan이었다. 아침까지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오니, 예술의 바람이 감동으로 젖은 우리의 뇌를 씻어 주었다. 가만히 생각하니 몇 시간 뒤면 크라잉 너트 주연의 <이소룡을 찾아랏!>이 상영되지 않는가? 잠이 선뜻 오질 않았다. 영화배우 크라잉 너트가 스크린에서 관객과 만나는 것은 여간 쑥스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소룡을 찾아랏!>에서는 크라잉 너트의 사뭇 진지한 모습도 나오기 때문에, 관객이 적응이 안 될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암튼 영화는 가득 메운 관객의 박수를 받으며 끝났고, 그 감동이란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촬영기간 동안 고생하던 스탭들과 모든 영화인들 생각에 갑자기 1분 정도 숙연해졌다. 그리고 크라잉 너트는 스크린을 뛰쳐나와 아름다운 부천의 밤을 노래했고, 영화처럼 사는 모두를 노래했다. 그리고 밤이 깊었다. 한여름밤 축제의 흐르는 술은 달콤했고 모두는 기분좋게 취했다. 오늘 부천의 밤은 바람에 별이 스친다. P.S. 만약 언젠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어 크라잉 너트가 남우주연상을 받게 된다면 소감을 이렇게 말하겠다. “주님 감사합니다,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시는 신사숙녀 여러분! 먼저 크라잉 너트에게 이렇게 큰 상을 줏서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오래 전 크라잉 너트가 철없던 시절 <이소룡을 찾아랏!>이란 영화로 부천의 붉은 카펫을 밟았던 기억이 나는데, <이소룡을 찾아랏!>의 강론 감독님 그리고 모든 스탭, 영화의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과 함께 오늘의 영광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아 참... 그리고... 어머니...”한경록/ 크라잉 너트 베이스 ·영화배우 ▶ 제5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결산 ▶ 영화배우 크라잉 너트의 부천 기행 ▶ 부천을 휘젓고 다닌 `유별난` 게스트들 ▶ 트로마 프로덕션과 로이드 카우프먼 감독 ▶ PiFan 대담1 - 한국의 단편영화감독 민동현 vs 트로마 프로덕션 대표 로이드 카우프먼 ▶ PiFan 대담2 - 무협영화의 신, 호금전의 ‘빅팬’ 피터 리스트 vs 스티븐 테어

PiFan 대담2 - 무협영화의 신, 호금전의 ‘빅팬’ 피터 리스트 vs 스티븐 테어

사랑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그리고 그 사랑은 어떻게 오래 지속되는가. 이는 영화에 있어서도 무수한 대답이 가능한 질문일 것이다. 올해 부천영화제가 성사시킨 숙원사업 ‘호금전 회고전’에 초대된 캐나다 콩코디아대 영화과 피터 리스트 교수와 <홍콩 영화: 또다른 차원>(Hong Kong Cinema: The Extra Dimensions)의 저자 스티븐 테오에게 그 사랑의 방식은 탐구와 전파. 80년대부터 홍콩영화제 일을 하며 호금전을 직접 인터뷰하는 기회를 가졌던 스티븐 테오는 1997년 홍콩영화제가 마련한 호금전 회고전의 자료집을 집필했다. 호금전에게 받은 친필 편지 복사본- 원본은 그의 연구실 은제 액자에 들어 있다- 을 기자에게 보여주며 “그를 학교로 초청했으나 퍼스트클래스 항공표를 구하기엔 예산이 부족해 좌절됐다”며 묵은 아쉬움을 들추는 피터 리스트 교수는, 1979년 호금전 영화에 처음 반한 이후 전세계를 뒤져 구한 호금전 영화의 비디오를 수업 교재로 틀면서 ‘간과된 영화사의 보물’을 가르쳐왔다. 공동의 열정을 지닌 두 사람은 물론 구면. ‘중국영화 다이제스트’라는 이름의 이메일 대화 그룹 멤버로 서로의 글부터 접했다는 두 사람은 2년 전 홍콩에서 만난 이후 부천에서 처음 재회했다. 호금전과 그들의 첫 근접 조우에 관한 기억부터 <와호장룡>이 불러일으킨 호금전 재조명 바람을 바라보는 기쁨과 우려에 이르기까지, ‘호금전 팬클럽’의 두 왕고참이 풀어놓은 길고도 짧은 이야기. 호금전, “와우!” 스티븐 테오(이하 테오) 나는 영화를 보며 10대를 보냈다. 처음 본 호금전 영화는 <대취협>(한국개봉 제목은 <방랑의 결투>)이었는데, 보통의 무협영화와 어딘가 달랐다. 어렸던 나는 그 특별함의 정체를 이해하지 못했으나 ‘호금전’이라는 이름은 나의 뇌리에 깊숙이 박혔다. 그 다음 본 작품은 당대의 박스오피스 히트작이던 <용문객잔>이었다. “와우!”라고 나는 속으로 외쳤고 호금전의 비범함에 대한 최초의 견해를 굳혔다. 당시 무술영화의 테마는 대개 스승이나 연인, 아버지가 살해당한 주인공의 복수, 두 당파가 주고받는 복수였다. 하지만 호금전은 달랐다. 비록 ‘정치’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나이였지만 어딘가 정치적인 정서를 취급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호금전 영화의 또다른 특징은 매우 리얼리스틱한 액션영화였다는 사실이다. 그맘때 광둥어 영화의 액션은 완전한 판타지였다. 손으로 그린 애니메이션으로 눈에서 나오는 광선을 표현한다든가 인공성이 아주 강했다. 피터 리스트(이하 리스트) 음, 호금전 영화에도 그런 표현법이 없지 않아 있다. 테오 하지만 영화 전반을 볼 때 호금전의 액션 스타일은 좀더 사실적이었다. 그것은 현실의 인간이 검을 부딪치며 벌이는 싸움이었고 관객은 검투의 스타일과 뿜어지는 피를 볼 수 있었다. 또한 어딘지 모르게 보이는 표면 뒤에 뭔가 있다는 느낌을 심어주었다. 리스트 나는 영국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할리우드영화와 영국영화만 편식했을 뿐, 중국어 영화라고는 하나도 본 게 없었다. 내가 처음 중국어 영화를 본 것은 서인도 제도에서였다. 본래 엔지니어였던 나는 자동차회사를 거쳐 항공우주산업에 종사하다가 “이러다간 군사 프로젝트에 끼어들고 말겠다”는 회의가 들어 직장을 그만두고 서인도 제도로 이주해 수학을 가르쳤다. 그리고 거기서 인생을 바꾼 멋진 경험을 했다. 서인도에서 처음 본 홍콩영화는 재미가 없었다. 내 흥미를 끈 건 관객들의 관람태도였다. 극장 앞줄에는 ‘구덩이’라고 불리는 싸구려 좌석이 있었는데- 양가집 규수는 절대 거기 앉지 않았다- 그 자리의 남자들은 영화가 시작되면 스크린 속 격투를 그대로 흉내냈고 관객은 모두 일어서서 영화와 객석의 액션을 한꺼번에 구경했다. 기막힌 노릇이었다! 조용히 하고 영화 좀 보자고 주의를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차피 관객은 영화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채 그저 액션만 감상했다. 서인도의 인상깊은 체험 이후 나는 정식으로 캐나다에서 영화 공부를 시작했고 1979년 몬트리올영화제에서 한국 로케 촬영한 <공산영우>를 통해 호금전 영화를 처음 보았다. 호금전의 작품은 멋진 액션과 진정한 예술성, 정신성, 정치성 등 영화에 있어서 내가 사랑하는 모든 요소를 결합하고 있었다. 그의 영화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동시에 생각하게 한다. <공산영우>나 <산중전기>를 일컬어 사람들은 호금전의 태작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 작품들을 통해 호금전을 처음 알았기에 앞으로도 영원히 그 영화들에 애착할 것이다. 한편 그 영화들은 한국에 대한 나의 첫 번째 이미지였다. 실제 와서 보니 비슷하냐고? 스티븐이 리얼리즘을 말하긴 했지만, 영화 속 한국도 일종의 ‘판타지’였으니 똑같진 않다. (웃음) 영화사상 완전히 새로운 스타일을 창안하다 테오 (다소 정색하며) 아, 내가 아까 언급한 리얼리즘이라는 개념에 대해 다시 설명하고 싶다. 분명 장르로서 무협영화는 리얼리스틱하지 않다. 내가 말하는 것은 액션이다. 호금전뿐 아니라 장철도 그렇지만, 일본 사무라이영화의 좀더 사실적인 결투묘사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본다. 아까 말했듯 당시 광둥어 액션영화는 진짜로 사람이 찔려 죽는 모습을 절대 보여주지 않았다. 칼이 들어오면 등 뒤로 빠져나온 칼날을 보여주는 정도로 보여줄 뿐, 상징적인 동작들로 이루어진 액션이 주조였다. 리스트 그의 영화가 상대적으로 사실적이라는 점에는 나도 동의한다. 그 점은 호금전이 실제 자연을 영화 속에 끌어들인 방식과도 일맥상통한다. 문화혁명 이후 서구에서 볼 수 있는 중국어 영화는 매우 상업적인 홍콩영화뿐이었다. 그러므로 호금전 영화는 내게 중국문화의 풍성한 풍미를 처음 맛보게 해준 중국어 영화였다. 이후 연구를 하면서 호금전 이전 세대 감독 중에는 산수화 전통의 영향을 받은 감독은 있어도 호금전처럼 풍경을 중심적으로 이용한 예는 없음을 발견했다. 호금전 이전의 중요한 감독은 많았지만, 30년대 몇몇 영화를 제외하면 풍경의 도입은 그들 영화의 우수한 퀄리티 중 하나가 아니었다. 물론 그 이후에는 첸카이거나 장이모, 티엔주앙주앙 같은 제5세대 감독들이 자연을 의도적으로 이용했지만. 내가 신상옥 감독 영화와 호금전 영화 사이의 연관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자연경관을 포착하는 방식 때문이다. 실은 신상옥 감독이 부천을 방문한다는 소문이 있어서 나도 스티븐도 질문할 생각에 기대가 컸지만 결국 오지 않았다. 테오 경극에서 유래한 액션의 안무, 연기 스타일이 호금전 영화에 녹아든 중국 전통문화라는 점도 누차 지적돼 왔다. 리스트 호금전 영화의 의상과 아트 디렉션은 모두 정확한 고증에 기초했다. 리얼리즘의 견지에서도 높이 평가된 부분이다. 영화 연구자로서 나의 최대 관심은 스타일에 있다. 나는 호금전을 영화사상 완전히 독창적인 스타일을 수립한 인물로 본다. 캐릭터의 움직임과 카메라 움직임 사이의 관계, 어떻게 보면 에이젠슈테인적 전통에 서 있는 듯한 편집의 용례 등 그가 영화의 동세를 컨트롤하고 영화와 액션을 결합하는 방식은 탁월하다. 어떤 액션이나 전투가 아닌 단 하나의 숏만 봐도 인물이 서 있는 포즈와 시선만으로도 호금전의 영화임을 알 수 있다. 호금전 자신이 격투기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누차 강조했지만, 경극과 태극권을 전혀 모르는 관객에게도 <협녀>의 숲 속 장면은 여전히 숨막히게 아름답다. 홍콩에서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구로사와 아키라를 호금전보다 높이 평가하고 있었지만, 나는 오리지널리티라는 측면에서는 호금전이 더 우수한 감독이라고 믿는다. 물론 논쟁의 여지는 있겠지만 말이다. 테오 또 한 가지 짚고 싶은 것은 호금전의 스토리텔링과 중국문학 사이의 관계다. 중국문학에는 마치 음악의 간주처럼 장과 장 사이에 작가가 내러티브 흐름에 개입해 들어와 “만약 더 알고 싶으면 다음 장을 읽으시오” 식의 말을 하는 ‘링크 챕터’(章回)라는 것이 있다. 그렇게 나오는 다음장은 앞장과 직접적 관련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호금전은 특히 그의 무협영화에서 ‘링크 챕터’ 전통을 수용했다. <충렬도>가 대표적인 예이며 <용문객잔>도 에피소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여기서 잠시 두 사람은 호금전 영화에서는 액션 자체가 독립적인 내러티브라며, 대사 한마디 없이 시선과 움직임만으로 관객의 주의를 휘어잡는 <충렬도>의 해적 습격장면을 놓고 한바탕 뜨거운 감탄을 나눴다.) 리스트 좀 다르긴 하지만 에피소드 구성을 취한 유럽과 미국의 영화들에 대한 연구가 있다. <돈 키호테>에 연원하는 이같은 피카레스크 구성은 2차대전 뒤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에서 유행했다. 그러나 당시 그들은 스토리가 고르거나 긴밀하지 않다는 비판을 받았다. <공산영우> <산중전기>는 호금전 영화 중에서도 그런 식의 지적을 많이 받는 경우다. 엊그제 부천에서 <산중전기>의 205분판을 처음 봤는데, 솔직히 좀 당황했다. 지금까지 내가 ‘판타스틱 영화로서의 <산중전기>’에 대해 논했던 관점이 잘 들어맞지 않아서였다. 비평에 있어서 ‘판타지’의 개념은 심리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으로 나뉜다. 내가 봤던 <산중전기>의 짧은 편집판에서는 축약과 생략이 자아내는 심리적 모호함과 뉘앙스가 컸는데, 긴 버전에서는 귀신의 묘사 등 초현실의 판타지가 훨씬 강한 반면 은근한 심리적 함의는 훨씬 줄어들어 있었다. 테오 <산중전기>는 호금전 영화 중에서도 이같은 초자연적 요소가 두드러진 작품이며 이 영화에 나타난 중국 판타스틱 영화의 전통은 리안, 서극의 작품으로도 이어졌다. 상하이가 중국영화의 중심이던 무성영화 시대에 대단한 인기를 구가하던 무협 장르는 1931년 이후 금지됐고 이후 홍콩으로 근거를 옮겼다. 초자연적 내용이 젊은이들의 정신을 해친다는 것이 이유였다. 실제로 당시 청년들은 너무 깊이 무협장르에 감동한 나머지 영생을 사는 불멸의 사부를 찾아 산으로 떠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웃음) 무협영화의 ‘신령스러움’은 당시 관객이 위패 같은 성스런 물건 앞에서 기도를 올리고 갔다는 기록에서도 알 수 있는데, 정부뿐 아니라 30년대 지식인들도 미신을 북돋운다는 죄명으로 무협영화를 멸시했다. 옳고 그름의 경계를 넘나드는 무협 장르는 그들에게 위험한 것이었다. 호금전은 이처럼 천대받던 장르에 품격을 불어넣고 지식인들이 수용할 만한 무엇으로 격상시켰다. 리안, 호금전에게서 한수 배우다 테오 호금전의 인물들은 양식화된 코드대로 대화하거나 행동하는 대신 진짜 중국인의 말투와 유머, 세속적인 행태를 보여주며 그것은 호금전 영화를 독창적으로 만드는 중요한 힘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점은 문제이기도 한다. 중국문화권 밖에서 살아온 관객은 매우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까지 호금전이 소홀히 평가된 이유를 ‘크로스오버’가 용이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본다. 반면 <와호장룡>은 완벽한 크로스오버다. 리안은 중국인의 특수성을 전세계 누구나 소화할 수 있도록 ‘훌륭히’ 중화시켰다. 리스트 재미나게도, 리안은 호금전 영화를 보면서 비로소 중국문화와 그 아름다움을 배웠다고 했다. 영국인인 내게도 리안의 영화는 아주 미국적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세계 관객에게 이제 리안은 중국문화의 대표가 됐다. 테오 반면 중국적 요소가 생짜로 살아 있는 호금전에 대해서는 약간의 ‘저항’이 있다. 리스트 호금전의 내러티브나 캐릭터는 할리우드의 캐릭터나 스토리처럼 완전히 계발되지 않는다. 그러나 리안은 오랜 시간을 공들여 각 인물의 심리와 인물들 사이의 관계를 다듬어냈다. 영화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호금전은 그런 식의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호금전에게 캐릭터와 스토리는 덜 중요하거나 혹은 이질적 방식으로 전개돼 있다. 그러므로 할리우드영화의 잣대로 호금전을 평가하는 것은 오류일 것이다. 테오 리안-제임스 샤무스팀이 곧 <와호장룡>의 프리퀄을 만든다니 지켜볼 일이다. 리스트 그런데… 그 팀이 아마 <두 얼굴의 사나이>부터 만들 거라고 들은 것 같다. (두 사람의 얼굴에 잠시 진지한 근심이 어린다.) 글 김혜리 기자 vermeer@hani.co.kr·사진 오계옥 기자 klara@hani.co.kr ▶ 제5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결산 ▶ 영화배우 크라잉 너트의 부천 기행 ▶ 부천을 휘젓고 다닌 `유별난` 게스트들 ▶ 트로마 프로덕션과 로이드 카우프먼 감독 ▶ PiFan 대담1 - 한국의 단편영화감독 민동현 vs 트로마 프로덕션 대표 로이드 카우프먼 ▶ PiFan 대담2 - 무협영화의 신, 호금전의 ‘빅팬’ 피터 리스트 vs 스티븐 테어

살아야 한다!

멀티플렉스 신축 붐과 구식 극장 시설의 방치로 5년 전부터 서서히 빚더미를 쌓아올린 미국의 극장체인들이 ‘보유 스크린의 1/4은 처분해야 한다”는 응급진단을 받은 것은 이미 반년 전의 일. 2965개 스크린을 보유한 멀티플렉스업계 2인자 로즈 시네플렉스를 비롯해 10여개에 달하는 미국 극장체인이 다수의 스크린을 폐쇄하고 파산을 신청하는 등 미국 극장업계가 유례없는 구조조정 바람에 휘말린 가운데, 마케팅으로 위기를 극복하려는 움직임도 하나둘 가시화하고 있다. 극장업계가 뽑아든 무기는 ‘양날의 칼’이다. 저렴한 할인티켓 제도를 도입하는 한편 차별화된 고가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전략이 나란히 등장하고 있는 것. 멀티플렉스 업계에서 3위 수준의 위치를 지켜온 AMC엔터테인먼트 극장체인은 한달간 AMC극장에서 편수 제한없이 영화를 관람할 수 있는 월간 자유관람권(monthly pass)의 시험 운영을 네브래스카주 오마하, 오클라호마시티 지역에서 시작했다. 프랑스의 UGC체인 등이 도입해 유럽 극장가에서 돌풍을 일으킨 이 아이디어를 채용한 미국 극장체인은 현재로서 AMC가 유일하다. 이러한 개념의 티켓상품이 시장에 보급될 경우, 박스오피스에 미칠 장기적 피해를 우려하는 다른 업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AMC는 내년 1월부터 월간티켓 제도를 전국으로 확대 시행할 예정이다. 그러나 파라마운트와 드림웍스는 이 제도가 적용되는 극장에 자사 영화를 배급하기 곤란하다는 입장을 AMC쪽에 이미 표명해 난항이 예상된다. 다른 한편에서는 특급 서비스와 공격적 가격 정책을 결합한 전략이 시험중이다. 대표적 케이스는, 온라인 예매사업과 아울러 영국, 미국, 남미지역에서 1390개 스크린을 운영해온 내셔널 어뮤즈먼트사가 계열사 시네브리지 벤처스를 통해 “신개념 멀티플렉스”를 표방하고 지난 7월13일 문을 연 ‘브리지’체인. 세련된 인테리어로 이름난 LA W호텔의 디자이너 데이나 리를 영입해, 파산한 에드워즈 시어터 체인이 확보했던 LA 하워드 휴즈 센터 옆 부지에 세워진 17개관 4200석 규모의 브리지는 평일 9달러75센트, 주말 10달러50센트의 높은 입장료를 책정했다. 지난 2월 <버라이어티>에 따르면 브리지는 스타디움식 객석, 안락한 좌석, 관람 중 음식 및 음료 서비스 외에도, 대리주차, 예약 지정좌석제, 상영시작 전 7분가량의 스탠드업 코미디를 비롯한 공연을 즐길 수 있는 특화된 서비스를 내세우고 있다. 17개관 중 ‘디렉터스 홀’이라고 명명된 최고급 상영관은 입장료도 13달러로 차별화했다. 시네브리지 벤처스는 브리지체인을 미국 주요 도시에 이어 유럽으로 확장할 계획. 지난 2월15일 파산을 알리고 구조조정에 돌입한 로즈 시네플렉스도 비슷한 방식의 공세적인 경영을 시도하고 있다. 로즈는 최근 보스턴에 건설한 19개관 멀티플렉스에 최고급 음향과 영사 시스템, 로비 바, 스타디움식 객석을 갖추고 입장료를 주말 10달러, 주중 9달러50센트로 매겼다. 15달러 티켓을 구매하면 대리주차, 지정석 예약서비스를 부가로 제공하는 것이 특징. 로즈 시네플렉스의 마케팅 부사장 존 매콜리는 <버라이어티>와 인터뷰에서 “만약 가치가 부가된 경험이라면 관객도 그에 맞는 대가를 지불할 것이다”라고 낙관했다. 극장업계가 고급화 전략으로 회생할 수 있을지는 두고볼 일이지만, 이러한 호화 멀티플렉스들의 시장 진출이 올해의 미국 극장 관람료 인상율을 지난해의 6%와 같거나 더 높은 수준으로 밀어올릴 것은 분명하다는 것이 업계의 전망이다. 김혜리 기자

소름

■ STORY 곧 재개발될 낡은 아파트에 한 청년이 도착한다. 미금아파트 504호에 새로 이사온 그의 이름은 용현(김명민). 택시운전을 하느라 밤에 출근하는 그는 편의점에서 밤샘 아르바이트를 하는 510호의 여인 선영(장진영)에게 호기심을 느낀다. 도박에 눈먼 남편에게 매맞고 사는 그녀는 비바람이 몰아치던 어느날 밤 용현 앞에 피투성이가 된 채 나타난다. 사고사인지 계획된 살인인지 알 수 없지만 용현은 선영을 도와 죽은 남편을 야산에 묻는다. 이 사건을 겪으면서 둘은 가까워지지만 불길한 징조도 하나둘 나타난다. 505호에 사는 이 작가(기주봉)는 504호에 얽힌 사건들을 용현에게 알려준다. 용현이 이사오기 전에 살던 광태라는 젊은 작가 지망생이 불타 죽은 일, 30년 전 바람난 남자가 아내를 죽이고 도망친 뒤 갓난아기 혼자 아파트에 남아 며칠 동안 울고 있었던 일 등 504호에는 이상한 기운이 서려 있다는 얘기. 이 작가는 이런 사건들이 30년 전 억울하게 죽은 여인의 원혼에서 비롯됐다며 소설을 쓴다. 고아인 용현은 30년 전 504호 살인사건의 생존자인 갓난아기가 자신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냥 굶어죽어도 몰랐을 일인데 불이 나는 바람에 발견됐다는 그 아이처럼 용현의 몸에는 기억할 수 없는 사건이 남긴 화상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는 것이다. ■ Review “누군가 있어. 뭔가 말하는 것 같아.” 미금아파트 504호에 살던 젊은 작가 지망생은 귀신의 소리를 듣는다. 이곳에서 30년 전 살해당한 여인의 시체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애가 돌아온다”는 원혼의 음성에 남자는 겁에 질린다. 그는 떠나려했지만 의문의 화재로 죽는다. 정녕 한맺힌 귀신이 있는 것일까? <소름>은 대답하지 않는다. 귀신이 있든 없든 <소름>에서 진짜 두려운 건 따로 있다. 504호에 얽힌 비밀이 하나둘 프레임 안으로 들어왔다 사라지곤 하지만 마지막에 이르면 모든 것이 선명해진다. 퍼즐 같은 이야기 조각들이 등골이 오싹해지는 거대한 그림으로 완성되면 자신의 과거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등장인물들처럼 관객 역시 무방비 상태로 기습당한다. 사소한 소음과 귀에 익은 피아노 소리가 단속적으로 이어지던 <소름>은 이즈음에서 저주받은 운명들이 고통스럽게 내뿜는 지옥의 레퀴엠을 들려준다. 그것은 장중한 것이어서 <소름>의 감독 윤종찬을 ‘올해의 신인’으로 손꼽게 한다. 굳이 장르구분을 하자면 공포영화에 속하겠지만 <소름>은 공포물의 문법에 종속된 영화가 아니다. 귀신에 관한 증언과 귀신이 부르는 듯한 자장가 소리가 있지만 귀신이 포착된 장면이나 격렬한 흥분을 일으키는 사운드는 없다. 난도질, 변형된 신체, 피와 내장, 괴물이나 악령 같은 눈에 보이는 공포효과를 쓰지 않는 이 영화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공간, 공간과 소리 사이에 얼른 눈에 들어오지 않는 두려움을 차곡차곡 쌓아간다. 초반에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 있다. 용현이 취객을 태우고 운전하고 있을 때 바로 앞에 오토바이를 탄 야식배달부가 택시를 지체시킨다. “밟아버려. 내가 책임질게. 저런 놈은 뒈져버려야돼.” 터널을 빠져나오는 순간 용현과 취객은 정말 사고가 나서 죽어버린 야식배달부를 목격하게 된다. 한순간 당황한 표정을 짓던 둘이 웃기 시작한다. 그 악마 같은 웃음이 그들만의 것인가? 시간이 지나면서 영화는 그런 광기와 순박함이 한낱 종이 한장 차이라는 걸 드러낸다. 마냥 착하고 어리숙하게 생긴 용현을 극단적인 상태로 몰고가는 것도 지극히 인간적인 어리석음이다. “너, 나 사랑하니?”와 “너, 날 이용한 거지?”라는 두 질문에 선영은 당황한다. 그녀의 진심이 어디에 있건 중요치않다. 용현은 자신의 판단기준대로 행동하지 않는 그녀를 보고 한순간 미쳐버린다. 용현의 살의는 야식배달부를 치어죽이고 싶었던 취객의 호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파국을 불러오는 데는 사소한 탐욕도 작용한다. 504호에 얽힌 이야기를 소설로 써서 한몫 잡겠다고 생각한 505호 이 작가는 용현이 이사오기 전 작가 지망생이 불타죽은 현장에서 노트 한권을 빼돌렸다. 죽은 작가 지망생의 애인이 “어쩌면 이 작가가 불을 지른 것인지 모른다”고 말할 때 그것은 사실일 수도 있다. 미금아파트 사람들은 무엇이 그들을 좀먹고 망가뜨리는지 모른 채 살고 있다. <소름>은 인간의 이기심과 어리석음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그정도에 머무르지 않는다. 영화의 전체 구조가 드러나는 후반부에서 <소름>의 등장인물들이 맺고 있는 관계가 드러난다. 30년 전 살인사건, 작가 지망생의 죽음, 이 작가의 소설, 이발소에 걸린 사진 속 인물, 용현이 선영에게 이끌린 이유, 선영 아버지의 광기, 용현의 살의 등이 하나의 실타래에 엮인다. 그것은 악업이 대를 이은 운명이기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빠져나오려 발버둥칠수록 나락으로 이끌리는 물귀신같은 악연이 마침내 형체를 드러낸다. <소름>의 주무대인 미금아파트가 괴물처럼 보이는 것도 이순간이다. 금방이라도 허물어질듯 흉한 몰골을 드러낸 이곳은 끔찍한 사건이 잇따른 장소지만 그 실체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무것도 몰랐던 사람들은 희생양이 되고 사건에 가장 가깝게 다가갔던 이 작가가 쓴 소설은 출판사에서 퇴짜맞는다. 겉보기에 아무런 정치적 맥락도 없어보이는 <소름>이 서늘퍼런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는 대목도 이런 지점이다. 재개발 직전의 미금아파트를 한국사회로 본다면 누구도 용현의 광기나 선영의 비극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소름>은 윤종찬 감독이 미국 유학 시절 만든 단편영화 <메멘토>에서 시작된 영화다. <메멘토> 역시 한 젊은이가 낯선 아파트에 도착해서 30년 전 그곳에서 벌어진 살인사건과 자신의 관계를 깨닫게 되는 이야기였다. 모티브나 이야기의 뼈대는 같지만 <소름>은 <메멘토>와 같은 만큼 굉장히 다른 영화다. 그것은 금방 무너질 듯 잔뜩 일그러진 한국사회에 대한 윤종찬 감독의 근심과 두려움을 반영한 것인 동시에 장르의 관성이나 시스템의 요구에 타협하지 않는, 촘촘한 내러티브와 두터운 캐릭터로 승부수를 던지는 미학적 야심의 결과다. 만약 <소름>이 무서운 영화이기보다 슬픈 영화로 기억된다면 그건 감독의 진심이 전달된 까닭이다. 아파트 복도에서 어린아이의 울음소리에 귀기울여본 적 있는가? 혼자 남은 아이가 굶어죽어도 세상은 평안히 돌아간다. 죽은 어머니가 부르는 자장가 소리만 처연히 메아리친다. 남동철 기자 namdong@hani.co.kr ▶ 소름 ▶ 윤종찬 감독 인터뷰

최고의 포스터는?

한눈에 반했어요! 이미지 한컷에 반해 영화관으로 발걸음을 움직이게 하는 영화 포스터 걸작들을 꼽는다면? <프리미어> 최근호는 최고의 할리우드영화 포스터 50편을 선정했다. 1위를 차지한 포스터는 오토 플레밍거 감독의 1959년작 스릴러 <살인의 해부>(Anatomy of a Murder). 노란색과 주황색의 추상적인 상징을 대담하게 혼합한 포스터 디자인의 걸작이다. 2위는 얇은 네글리제 차림에 긴 금발을 늘어뜨리고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는 여인의 뇌쇄적인 옆모습이 인상적인 1939년작 <노라 모란의 죄>가 차지했다. 영화 자체는 싸구려지만 포스터 이미지는 강렬하다. 그 밖에 <현기증> <길다> 등이 10위 안에 든 포스터들. <킹콩>은 11위, 오드리 헵번이 기다란 담뱃대를 물고 있는 <티파니에서 아침을>은 18위에 올랐다. 초현실적이고 음습한 느낌을 주는 <악마의 씨>가 21위를 차지했고, 바람에 올라간 치맛단을 잡고 있는 마릴린 먼로가 장식한 은 22위, 어둑한 뉴욕 뒷골목과 노란 택시를 배경으로 홀로 서 있는 로버트 드 니로의 <택시 드라이버>는 26위, 어둠 속에 둥실 떠 있는 붉고 거대한 입술 <록키 호러 픽쳐쇼>도 33위를 차지했다. 영원한 동심의 친구 <백설공주>는 41위, <스타워즈>는 45위에 올랐다.최근 영화들로는 <양들의 침묵>이 16위, <포레스트 검프>가 43위, <트루먼쇼>가 39위를 차지했다.

브리짓존스의 일기

“치마가 혹시 아픈가요?” “예, 집에서 쉬게 했어요.” 근무중에 상사 다니엘(휴 그랜트)과 메신저로 은밀한 농담을 주고받는 이 여자. 런던의 출판사에서 일하는 브리짓 존스(르네 젤위거)는 과음과 흡연을 즐기고 감정기복이 심한 실수투성이 독신녀. “혼자였어, 전화 다이얼을 돌려봐도 아무도 집에 없어.” 침대머리에 주저앉아 발악하듯 셀린 디옹의 를 부르던 32살의 노처녀는 새해 첫날, 새 삶을 살기로 결심하며 일기의 첫장을 연다. 술과 담배량, 몸무게를 매일 체크하는 것을 시작으로 ‘런던에서 독신여성으로 산다는 것’ 혹은 ‘연애와 섹스’에 대한 적나라한 보고가 이어지는 가운데 그녀의 일기장은 바람둥이 다니엘의 배신으로 인한 좌절에서, 무뚝뚝한 변호사 마크에 대한 새로운 감정으로 바통을 이어받는다. “금붕어처럼 술마시고, 굴뚝처럼 담배피우고, 자기 엄마처럼 옷입는 노처녀”쯤으로 생각했던 브리짓에게 어느 순간 사랑을 느끼는 마크 역의 콜린 퍼스는 무표정 속에 숨어 있는 묘한 매력을 발산하고, 망가질 대로 망가지는 휴 그랜트의 모습은 솔직해서 사랑스럽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모든 관객의 입에서 “Adorable!”(너무 귀여워!)이란 감탄사를 끄집어내는 주인공은 ‘브리짓 존스, 그 자체’인 르네 젤위거. 비록 <너스 베티>에서의 깡마른 모습에서 20파운드나 늘어난 통통한 몸매로 등장하긴 하지만 그 무방비의 매력은 측정수위를 넘어선다. 헬렌 필딩의 동명의 베스트셀러를 영화로 옮긴 <브리짓 존스의 일기>는 미국과 영국에서 동시에 개봉되어 흥행에서도 반가운 일기장이 되었다. Bridget Jones’s Diary 제작 팀 버반, 조너선 카벤디시, 에릭 펠너 원작·각본 헬렌 필딩 감독 샤론 맥과이어 출연 르네 젤위거, 휴 그랜트, 콜린 퍼스 수입ㆍ배급 UIP 제작연도 2001년 개봉예정 9월 1일 백은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