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내가 찾는 영화 정보를 손쉽게!

‘바람' 검색결과

기사/뉴스(9404)

‘하야오 유토피아’ 건설의 조력자들

지브리 애니메이션이 빚어내는 판타지 배후의 얼굴들이 지난 7월24일 한국을 찾아왔다. 지브리의 신작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막 극장에 걸어두고,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과 함께 방한한 이들은 스튜디오 지브리의 사업부 본부장이자 프로듀서인 스즈키 도시오와 색채설계 담당스탭인 야스다 미치오. <센과…>에 외주제작사로 참가한 국내애니메이션업체 DR무비의 초청으로 내한한 이들은, 스튜디오 지브리 설립 초기부터 미야자키 감독과 동고동락하며 지브리의 애니메이션 세계를 가꿔온 동료들이다. 도쿠마 서적과 애니메이션 잡지 <아니마주>의 편집장 등을 거친 뒤 지브리 스튜디오 설립에 참가한 스즈키 도시오는 <붉은 돼지><원령공주> 등 미야자키 하야오와 <추억은 방울방울> 등 다카하다 이사오의 작품에서 프로듀서로 활동해왔다. 야스다 미치요는 1958년 도에이 동화(현 도에이 애니메이션)에 입사하면서 애니메이션을 시작한 베테랑. 거기서 미야자키 하야오와 다카하다 이사오를 만났고,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 작업에 참여한 것을 필두로 <엄마 찾아 삼만리> <미래 소년 코난> 등 TV시리즈를 거쳐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등 지브리 작품 대부분의 색채설계를 담당해왔다. 오랫동안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곁을 지켜온 이들은, 7월25일 신라호텔에서 열린 미야자키 하야오의 공동기자회견에서도 양옆 자리에 동석했다. 스즈키는 “<센과…>의 제작이 지연돼서 개봉이 늦춰질까 걱정했는데, DR무비의 도움으로 덕분에 무사히 끝냈다”며 예의바른 감사를 건네기도. 게임쪽으로 인력이 빠져나가면서 일본애니메이션산업이 침체 위기 아니냐는 질문에는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이나 젊은 인력이 새롭게 투입되지 않기는 마찬가지”라며, 특별히 위기는 아니라고 말했다. 20대부터 미야자키 감독과 작업해왔다는 야스다는 그와의 작업과정이 어땠냐는 질문에 “처음에는 그의 사고방식에 공감했기 때문에 시작했지만, 그와 일하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항상 좋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함께할 수 있었다”는 게 그의 말. 감독에게 질문이 몰려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진 못했지만, 60대가 되도록 애니메이션의 현장을 꿋꿋이 지키고 있는 이들이 지브리의 보이지 않는 힘이라는 건 분명해 보였다.

미다스의 손, 스크린을 어루만지다

바쁘다, 바쁘다 해도 이만큼 바쁠까. 작곡가 김형석씨의 작업실 겸 사무실이 있는 청담동까지 찾아가서 그와 대면하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약속시간에서 한참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는 그를 기다리면서, 새삼 대중음악계의 ‘미다스의 손’, ‘스타제조기’와 같은 그의 유명세를 탓했다. 그런데 늦어서 너무 미안하다는 사과와 함께 인사를 건네는 그를 보니 항의는커녕 이해가 앞선다. 심한 감기 때문에 병원을 다녀오느라 늦었다며, 연신 기침을 참느라 애쓰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엽기적인 그녀>의 음악 작업을 마치자마자 밀려 있는 가요음반 작업에 파묻힌 그는, 아파도 쉴 틈 없이 일복이 많은 사람이다. 그도 그럴 것이, 김형석씨는 지난 10여년 동안 대중음악계의 내로라 하는 스타 작곡가였다. 김건모와 신승훈, 박진영, 엄정화, 박지윤, 유승준, 최근의 성시경까지, 그의 곡은 늘 가요계 톱스타들을 통해 인기차트 정상을 누볐고, 낯선 신인들을 단숨에 스타덤으로 끌어올리곤 했으니까. 한양대 음대를 다닌 그는 89년, 김광석의 <사랑이라는 이유로>와 인순이의 <이별연습>으로 대중음악에 발을 들여놓았다. 고교 음악교사인 아버지와 피아노 선생님인 어머니를 두고, 어려서부터 큰 방 작은 방 할 것 없이 놓인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자라온 그에게는 예상치 못한 길이었지만. 바탕이 클래식인 그의 장기는 신승훈의 노래처럼 피아노와 현악 선율이 끌어가는 애잔한 발라드다. 이런 스타일을 트레이드 마크로 하면서, 발라드든 댄스든 젊은 세대의 구미에 맞는 선율을 뽑아내는 감각으로 수많은 히트곡을 남겼다. 한창 많이 할 때는 1년에 26장의 음반이 그의 손을 거쳐갈 정도였다. 그런 그에게 영화음악은, 뜻밖에 <원스 어픈 어 타임 인 아메리카>를 들었던 재수 시절부터의 숙원이었다. 아직도 그 CD를 차에서 듣는다며, 그는 “사실 영화음악을 하고 싶어서 대중음악을 시작했다”라고까지 털어놓는다. 틈틈이 <스타가 될 꺼야> <겨울나그네> 같은 뮤지컬음악을 한 것도, 영화음악을 위한 준비과정이었다고. 대중음악을 10여년 이상 해오면서 “버릇처럼 하게 되는 부분도 생기고,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 같다”는 자각도 영화음악에 대한 꿈을 자꾸만 상기시켰다. <할렐루야>, 두편의 음악에 부분적으로 참여하긴 했지만, 전체를 책임졌고 가장 감성이 맞는다는 점에서 <엽기적인 그녀>가 그의 첫 영화였고, 행복한 만남이었다. “제목 때문에 코미디인 줄 알았는데 읽다 보니까 순수한 사랑얘기였다. 눈물흘리게 하는 게 아니라 코끝 시큰한 정도의 편안한 로맨틱코미디.” 그리고 ‘그녀’가 ‘견우’의 편지를 읽고 할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흐르는 메인 테마 이나 신승훈의 같은 피아노와 현악 선율 위주의 음악은 물론, 코믹한 장면에서는 비밥풍의 재즈, 극중극의 액션과 무협에 맞는 음악까지, 대중음악에서 못 해 본 장르를 두루 시도하며 오랜만에 자유로움을 즐겼다. 지금은 유승준, 터보 등의 밀린 작업과 뮤지컬 <구미호> 때문에 바쁘지만, 앞으로도 기회닿는 대로 영화음악을 계속할 생각이다. 젊은 기호에 맞춰 가야 하는 대중음악을 언제까지나 무리하게 고수하고 싶진 않다고. <풀 메탈 자켓> 같은 전쟁영화나 역사영화에서 깊이있고 장중한 음악도 해보면서 자연스레 나이를 먹어가는 것, 그래서 “죽을 때까지 음악을 하다 죽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글 황혜림 기자 blauex@hani.co.kr사진 오계옥 기자 klara@hani.co.kr

“지난 8년, 관객의 웃음이 가장 그리웠다”

+ 원작소설을 직접 시나리오로 각색하고 영화화하면서 어디에 초점을 맞췄나. = 소설은 가벼운 연애담이란 느낌이었다. 영화에도 좀 그런 부분이 있지만 웃음을 유발하는 게 작위적이란 생각도 들고.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더해가면서, 라스트를 행복하게 갔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또 <엽기적인 그녀>인데 사실 엽기성이 부족했다. 그래서 소나기 패러디 버전, 토사물 삼키는 장면, 하이힐장면 같은 걸 추가했다. 좀더 엽기적으로 재밌게, 후반부는 행복하게. 영화를 본 관객이 정말 즐겁고 행복했으면 했다. 대단한 메시지가 있는 영화는 아니지만, 조금이라도 남는 게 있다면 더 좋고. 치열한 예술을 하려고 한 것도 아니고, 소설 자체가 재밌으니까 영화도 재밌게 만들고 싶었다. 스무살, 젊은 시절의 감성을 복기해보는 영화. 가볍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지난 8년간 가장 그리웠던 게 관객이 내 영화를 보고 웃고, 즐거워하는 거였다. 언젠가는 <동년왕사>처럼 개인적이고 예술적인 영화도 만들고 싶지만, 지금은 좀더 관객을 즐겁게 해주고 싶다. + 남녀의 캐릭터가 전도된 설정은 새로워 보이지만, 사랑이야기를 끌어가는 감성은 구식이란 생각도 든다. 감상주의적인 신파로 흐르기도 하고. = 구식이라기보다는 나이든 사람으로서 보여주고 싶었던 부분이 있다. 원작에서도 그렇지만 두 사람이 헤어지면서 편지를 쓰는데, 요즘 젊은 세대는 그런 노력을 많이 하지 않는다. 2년씩 기다리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다. 지금 사귀고 있는 연인들도, 지나온 사람들도 내 사랑이 어땠나 돌아볼 수 있으면 했다. 신파와도 좀 다르다. 신파는 슬픈 감정에, 슬픈 대사에, 슬픈 음악과 함께 마냥 슬프게 가면서 구구절절 슬픔을 강요하지만 이 영화는 그렇지 않다. 기차역에서 둘이 헤어지는 장면도 슬픈데 코미디로 풀었다. 하나는 올라타고, 하나는 뛰어내리고. 탈영병이 자신의 사연을 얘기하고 총을 겨누는 장면이 좀 신파스러운데, 결국 코미디로 바뀐다. 슬프면서도 웃긴 감정, 그 두 가지 감정을 섞어놓는 것. 아주 진지한 데서 나오는 코미디를 좋아한다. <비오는…>에서도 이경영이 ‘까르르’ 소리를 낼 때 웃기면서도 슬픈 상황인 것처럼. +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비디오 가게를 하다가 감독에 데뷔한 이력이 특이하다. = 원래 연영과를 가고 싶었는데, 말도 못 꺼내볼 만큼 아버지가 워낙 무서웠다. 그나마 물리를 좋아해서 물리학과를 갔지만 영화를 하고 싶었다. 어렸을 때부터 이상하게 필름을 좋아했다. 초등학교 때 바늘구멍 사진기와 필름을 이용해서 카메라를 만들어 사진을 찍고, 옛날 사진의 필름 표면을 죄다 긁어서는 물감으로 그림을 그려 환등기에 비춰보곤 했다. 그래서 어린 시절 사진의 필름이 거의 없다. 그것 때문에 감독이 되기도 했겠지만, 가끔 안타깝다. 언젠가 꼭 그 유년 시절에 대한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 환등기에 모터를 걸어 영사기처럼 만들고, 안양에 있다는 신필름에 순전히 필름 주우러 가겠다고 걸어가다가 고개 하나 넘고 지쳐 돌아온 기억도 있다. 공부 열심히 하겠다며 어머니를 설득해서 아버지 몰래 영사기 한대, 카메라 한대를 구한 게 재수 시절이다. 그때 찍은 게 프랑스문화원에서 단편영화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에 소개되고, 대학 3학년 때 만든 단편영화 <선생님 그리기>로 청소년영화제에서 상금 200만원을 받고부터는 영화만 했다. 영화세상의 안동규, 영화평론가 이효인 등 동기들과 ‘그림자놀이’란 영화패도 만들었고. 비디오 가게는 졸업하고 <비오는…> 하기 전까지 잠깐 했는데, 마음껏 영화보는 재미가 있었다. 왕가위의 <열혈남아> B자 테이프, 샘 페킨파의 <관계의 종말> 등등 보물을 찾아내는 느낌이었으니까. + 감독의 영화라기보다 <결혼 이야기> <편지> 등으로 멜로드라마의 유행을 이끈 신씨네의 기획성이 강한 영화라는 평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 소설 잡을 때부터 기획적인 성격이 강한 영화인 것은 사실이다. 기획영화고 트렌디영화니까 그런 느낌 들겠지. 하지만 <데몰리션 터미네이터> 같은 패러디부터 사소한 아이디어까지, 시나리오나 촬영에서 신씨네가 터치한 것은 없다. ‘낙태하러 가는데 니가 아빠라 그랬어’란 대사에서 ‘낙태’란 단어가 거부감이 든대서 ‘수술’로 바꾸는 식의 수정은 있었지만. 신씨네가 감독의 영화를 잘 싸안는 것 같다. ‘절라유쾌뭉클코미디’처럼 카피를 잘 뽑아서 포장을 잘한다. + 쌓아둔 시나리오는 많다고 했는데, 차기작으로 어떤 작품을 계획하고 있나. = 유년 시절을 다룬 <성>(城), 죄의식에 관한 <귀의>, 이중섭에 대한 영화 등등 이야기는 많은데, 어떤 걸 해야 될지는 아직 모르겠다. 장르는 좀 다른 장르를 해보고 싶다. <엽기적인 그녀>에 들어간 장르 중 하나겠지. 멜로, 코미디, 액션, 무협, <소나기> 같은 고전적인 드라마까지 거의 모든 장르를 다 해봤으니까. 좀더 예산이 크고, 코미디가 아닌 상업영화를 하고 싶다. 글 황혜림 blauex@hani.co.k사진 오계옥 기자 klara@hani.co.kr ▶ <엽기적인 그녀>로 돌아온 감독 곽재용 (1) ▶ <엽기적인 그녀>로 돌아온 감독 곽재용 (2)

저주의 주문을 풀고 다시 햇살 아래, <소름>의 장진영

“너 원래 이런 애였니?” <소름>을 촬영하는 동안에 장진영을 처음 봤던 이들은 그녀가 말도 없고 표정도 없는 여자라고 생각했다. 사석에서도 장진영은 한동안 그런 모습이었다. 그들은 요즘 또 한번 놀란다. 반가운 배신이랄까. <소름>의 선영에서 벗어나 원기를 회복한 장진영은 더이상 차갑거나 어둡거나 건조하지 않다. 환하게 웃음이 핀 얼굴로 먼저 인사를 건네고, 조금 무안할 때는 호탕하게 ‘하하하’ 웃어젖히고, 카메라 앞에서 건들건들 터프한 포즈를 취해 보이는 장진영은 아무 그늘 없이 해맑기만 했다. 누가 언제 ‘저주’를 이야기했느냐는 듯이. 자의 반 타의 반 깔깔하게 메말라 있던 감성에도 음악과 책으로 기름칠을 하고 있는 중이다. “저기요, 다른 음악 들으면 안 돼요?” 분위기 좀 잡아보겠다고 스튜디오에서 선곡한 음악에도 장진영은 다짜고짜 퇴짜를 놓았다. 그리고 핸드백에서 쓰윽 CD 한장을 꺼내 건넸다.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이었다. <소름>을 찍는 동안 장진영은 많이 아팠다. 실은 지금도 영화를 보면 아프다. 몇달 동안 장진영과 함께 산 510호 여자 선영의 아픔이 새록새록 되살아나는 탓이다. 오죽하면 축제 분위기여야 할 시사회장에서 “이 영화를 보는 게 너무 힘들고 아프다”는 우울한 고백을 했을까. 처음 <소름>의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장진영은 손사래를 쳤다. 자신이 조금도 알지 못하는, 너무나 극단적인 삶을 사는 캐릭터라, 체현해낼 엄두가 안 났던 것이다. 별로 아름답지 않은 정사신도 맘에 걸렸다. 그런데 이해하고 연민하다보니, 어느 순간 빠져들게 됐다. “아이도 잃어버리고 남편한테 얻어맞고 살다보니 사랑에 대한 믿음도 없어지고, 황폐해진 거죠. 그렇게 기구한 여자들은 삶을 포기하게 마련이잖아요. 퍼질러 앉아서 술이나 마시겠죠. 그런데 선영은 달랐어요. 삶에 대한 의지가 아주 강하잖아요. 시퍼렇게 멍든 얼굴로 편의점 아르바이트도 나가고, 벗어나보겠다고 새로 이사온 남자도 이용하고. 정말 강한 여자예요.” 네 번째 영화 <소름>이 장진영에게 특별한 또다른 이유는 ‘함께하는 작업’으로서의 영화를 알게 해줬다는 것. 윤종찬 감독은 시나리오의 기본 틀만 남기고 현장에서 배우 스탭들과 디테일을 바꿔가는 식으로 진행했는데, 실제로 장진영이 애드리브한 대사를 많이 채택했다. “헷갈려? 뭐가 헷갈려?” 같은 장진영표 대사는 편집실에서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소풍날 장기자랑에 나설 용기는 없었지만, 늘 마음은 굴뚝같았던 소녀는, 아주 우연히 영화를 만났지만, 이제 제법 적극적으로 살고 있다. 뒤로 물러나 있다가는 경험해야 할 것들을 그냥 흘려보낼 것 같아, 한번 덤벼보기로 했다고. “다른 세상이 있더라구요. 예전에 유명해지기 전에는 남들한테 눈길 주거나 신경 쓰는 게 싫었거든요. 남들은 유명해지면 그렇다던데, 웃기죠. 전 지금 더 많은 걸 느끼면서 살아요. 길거리 걸으며 사람들 구경하는 것도 좋아하게 됐어요.” 자신을 구경거리 삼는 사람들을 구경한다? 그건 보통 경지가 아니다. 그만큼 목과 어깨에서 힘을 빼고, 삶이 묻어나고 사람냄새 나는 연기를 하겠다는 뜻이리라. 영화계에서는 <소름>으로, 방송가에서는 김건모의 뮤직비디오 <미안해요>로 인기를 모으는 중이라, 요즘 부쩍 ‘러브콜’이 잦지만, 별 동요는 없어보인다. “많이들 기대하셔서 선택에 부담이 돼요. 다음엔 밝고 행복한 영화하고 싶다고 여기저기 말해놨는데, 조만간 다시 일해야죠.” 정통 멜로도 로맨틱코미디도 슬슬 욕심이 나고, 자신의 “남성미를 과시할 수 있는” 액션물에도 출연하고 싶다고. 부천영화제에서 페스티벌 레이디라는 우아한 감투까지 썼던 장진영이 “집에 있으면, ‘뭐 먹을까’ 하는 고민으로 하루의 절반을 보낸다”며 소탈한 일상을 이야기하는 걸 보면서, “모든 사람들이 신뢰할 수 있는, 멋있는 연기자가 되고 싶다”는 바람에 토를 달아주고 싶어졌다. 고지는 멀지 않았다고.

멀더, 데이비드 듀코브니를 말하다

안녕하세요. 난 폭스 멀더예요. 그리고 이쪽은 내 파트너 스컬리… 아, 아니군요. 이번 여름 시즌엔 파트너가 바뀌었어요. 아이라, 스스로를 소개해줄 수 있나요? 예헤! 그럼요. 난 아이라 케인이고 한때는 정부 소속 과학자였지만 지금은 애리조나 지방대학에 처박혀 모든 학생들에게 A를 선물하는 한심한 생물학 교수로 일하고 있죠. 항간에는 냉소적이면서 지적인 멀더가 어쩌다가 나같이 속없는 놈이 되었냐고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지만 이건 전적으로 듀코브니, 그가 원하던 바라고요. 맞는 말이에요. 물론 듀코브니는 나, 멀더를 처음 만난 이후 오랫동안 멀더의 내면 깊숙이까지 연구해주었고 그 누구보다 나를 휼륭히 표현해주었어요. 6번째 시즌 중 <할리우드 A.D.>를 비롯해 5∼6개의 에피소드들은 그가 직접 각본이나 연출을 맡는 열의를 보이기도 했죠. 하지만 과 멀더를 헐값에 팔아 넘겼던 폭스사와의 마찰이 있기도 했고, 사실 8년은 너무 긴 시간이었어요. “사람들이 나에게 와서 ‘당신의 팬이에요’라고 말해. 그리곤 ‘스컬리는 어디에 있죠?’ 묻곤하지.” 그는 자신을 오로지 멀더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증오했고 다음 영화에선 철저히 다른 사람이 되길 원했어요. 아마 <고스트 바스터즈> 같은 코미디를 만들었던 아이반 라이트먼이라면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흔쾌히 출연을 결심하고 집에 돌아와 <에볼루션>의 시나리오를 읽는데 “이런, 또 ‘외계인’이잖아”라고 했다더군요. 물론 ‘빌어먹을 외계인’(Aliens be Damned)에서 ‘외계인을 엿먹여라’(Damn the Aliens!)로 바뀌긴 했지만…. 난 <에볼루션>을 찍으면서 얼마나 즐거웠는지 몰라요. 완벽주의 FBI요원 ‘스털링’ 아니라 실수투성이 줄리언 무어의 ‘찐한’ 눈빛을 거부할 필요가 전혀 없었거든요. 그런데 멀더, 당신은 스컬리와 키스 한번 하는 게 진화된 공룡 100마리 죽이는 것보다 힘들지 않았나요? 듀코브니가 사실 여자를 싫어하는 것 같진 않은데…. 아이라, 물론, 여자를 싫어하는 남자는 없죠. 한때 <선>지에서 그를 ‘섹스 중독자’라고 썼던 적도 있고 포르노 배우나 몇몇 여배우들과 끊임없는 스캔들을 뿌리긴 했지만 그 모든 ‘소문 혹은 진실’들은 테아 레오니와의 결혼 이후 잠잠해졌어요. 게다가 그는 의 촬영지를 극구 캐나다에서 아내에게서 가까운 LA로 옮길 만큼 가정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죠. 이제 2살된 딸 매들레인과 <쥬라기 공원3>로 나란히 여름극장가에서 만난 아내 테아를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요. 음…, 사실 그에게 모범생의 피가 흐른다는 건 세상이 다 아는 이야기잖아요? 물론 명문 프린스턴을 거쳐 예일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기도 한 그에겐 늘 ‘똑똑한’이란 수식어가 따라붙기도 했고 멀더를 연기하는 데에 그 출신은 더할나위없이 휼륭한 백그라운드가 되긴 했지만, 그는 “난 사람들이 ‘너 이렇게 재미있는 사람이었니?”라고 묻는 게 좋아”라고 말하더군요. 그런 바람이 그를 냉철한 직감이 아니라 비듬샴푸로 외계인을 물리치는 귀여운 과학자로 만들기도 했고 벤 스틸러가 감독하는 코미디 <줄랜더>(2001)의 출연을 부추기기도 한 것 같고…. 멀더, 듀코브니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그가 어떤 사람인지 도통 종잡을 수가 없군요. 글쎄요. 나도 그를 완벽히 이해한다고 볼 수는 없어요. 나 역시 8년 동안 그 안에 살았지만 듀코브니, 그에 대한 진실은 저 너머에 있어요.

도저히 고쳐볼 도리 없음

이마무라 자신의 본능에 충실한 <간장선생> ●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은 <간장선생>이 자신의 마지막 작품임을 알린 바 있다. 그렇다면 대담한 블랙유머와 수수께끼 같은 야비함의 대가인 일본의 이 73살(지금은 75살- 역자 주) 거장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주제들을 전체적이고 특징적으로 대범하게 반복함으로써 마지막 작품을 마무리짓기로 결심했던 것 같다. 미국에서는 98년 뉴욕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이고 <우나기>에 이어 성공적으로 개봉된 <간장선생>은 그 끔찍했던 태평양전쟁의 막바지를 살아내려 몸부림친 일본 어느 시골의 의사 아카기 선생과 그의 환자들의 이야기다. 하층민들의 삶을 그린 이마무라의 여느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생동감있고 불경스러우며 이상할 정도로 명랑한 이 작품은 전후 치열했던 천재 중 하나인 사카구치 안고의 여러 단편들을 기초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동시에 이 영화는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마무라는 시골 의사의 아들이었으며 (이 영화는 선친에게 바쳐졌다) 그 자신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십대 소년이었던 것이다. 숏과 숏 사이의 톤이 아주 상이한 이 영화의 오프닝은 전형적으로 이마무라적이다. B-29 미군기가 구름 같은 연기를 피워올리며 공중에서 폭격을 가하는 사이, 저 아래 땅 위에서는 한때 창녀였던 십대 소녀 소노코가 순진한 남자를 유혹하는 데 열중하고 있다. 바로 그때 이 커플은 나비넥타이를 맨 영웅적이고 거칠 것 없는 아카기 선생의 출현으로 방해를 받는다. 아카기는 칵테일 재즈음악을 배경으로 해변과 마을을 돌진한다. 이 어촌마을에서 모든 환자들의 증상을 간염으로 진단하는 바람에 “간장(肝臟)선생”이라는 별명을 얻은 아카기 선생은 스스로에게 부여한 질병과의 전쟁이라는 싸움터에서 이런저런 실험에 열중하며 “하늘에는 폭탄이, 땅에서는 간염이”라는 표어 아래 저돌적으로 싸우느라 여념이 없다. 그러나 뭔가에 사로잡힌 듯 정신없이 살아가는 인간은 비단 간장선생뿐이 아니다. 술취한 승려들, 아편중독 의사들, 그리고 섹스 페티시스트들 등 모든 마을사람들이 망라되는 것이다. “도저히 어찌 고쳐볼 도리 없음”이야말로 인간본성을 설명하는 이마무라적 표현이다. 군대는 노인들에게 민간 방위(civil defense)를 가르치느라 여념이 없으며, 미신이 과학과 함께 경쟁하다가 대개는 결국 승리해버린다. 소노코는 아카기 선생 밑에서 일하려다가 고아가 된 혈육들에게 이런 호소마저 듣는다. “사랑하는 누나, 우리 배고파, 제발 다시 창녀가 되어줘.” 이마무라는 이 황당한 세계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연민을 느끼고 있다(아마도 네덜란드인 군인을 죽도록 두들겨패는 인종차별주의자 군인 한명만 빼고). 영화 막바지, 아카기는 시체를 파헤치고 간장을 떼어내며 거대한 현미경을 들이대는 등 정말 돌아버린 듯한 과학자로 변신한다. 이 현미경은 아무래도 영화 프로젝터와 수상쩍을 정도로 닮은 모습이다. 어떤 평론가는 어째서 이 현미경을 통한 관객 입장에서의 주관적 시점이 단 한번도 나오지 않느냐며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아마도 이것은 꿈틀대는 박테리아의 클로즈업이 이 미친 엉망진창 흙탕물 도가니 같은 인간세상에 대한 이마무라의 시각과 지나칠 정도로 닮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선지 이마무라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는 엉망진창 영화를 만들기 좋아합니다.” 영화감독으로서 이마무라는 정선되고 예의바른 아름다움을 봉쇄해버리는 능력이 있다. 하지만 그는 그저 아무렇게나 헤집어놓는 것이 아니다. 그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기이한 특이체질은 그의 캐릭터들뿐 아니라 이마무라 자신의 본능에 충실한 결과인 것이다. 어쨌든 아카기 선생의 다음 행보는 절대 예측불능이다. 감독은 고래와 물의 요정과 버섯구름을 포함하는 묵시록적인 시(詩)를 아카기의 마지막 언명으로 제시하면서, 그 누구도 뛰어넘을 수 없는 기이함을 함께 엮어내었다. (<빌리지 보이스>1999.1.13)

토토로의 아버지, 서울에 오다

박재동이 말하는 `나를 움직인 미야자키 하야오` 움직이는 그림으로 살아난 그의 판타지가 얼마나 많은 꿈을 피워냈던가. 코난과 토토로의 아버지, 인간과 자연의 숨결이 교감하는 애니메이션의 소우주를 창조해온 조물주 미야자키 하야오가 한국을 방문했다. 잘 알려져있다시피 미야자키 하야오는 <미래소년 코난> 같은 TV시리즈부터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이웃집 토토로> <원령공주> 등의 장편까지, 인간과 문명, 자연의 충돌과 공존을 담은 애니메이션 상상화를 펼쳐온 일본 아니메의 거장이다. 그간 공들여온 신작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지난 7월21일 일본에서 개봉돼 흥행의 순풍을 타면서 한숨을 돌린 그가 처음으로 한국을 찾아왔다. 마침 국내에 개봉하는 <이웃집 토토로>로 미야자키의 세계를 스크린에서 만나려는 찰나, 때맞춰 온 이 반가운 손님을 만났다. 그의 영토에서 새로운 꿈을 만났다는 박재동 감독의 환영사와 함께.편집자 미야자키 하야오. 한없는 존경심과 애정과 사랑과… 그리고 질투심을 일으키는 이름. 15년 전, 1986년. 나는 ‘움직이는 그림’, 애니메이션에 흥미를 갖고 있긴 했지만 그 길을 가겠다는 마음이 일지는 않았다. 선견지명이 있던 나의 벗 강요배 화백이 우리 같이 애니메이션을 하자고 했을 때도 내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다. TV에서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하면 막연히 언젠가 저걸 내가 하게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도 선뜻 뛰어들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재미있었다. 하지만 내 모든 것을 바쳐 할 만하다는 생각은 나지 않은 것은 그 무언가가 빠져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2년 뒤, 성 시스티나 천장의 벽화만큼 큰 그림을 그리는 꿈을 꾸었던 나는 뜻하지 않게 만화를 그리게 되었다. <한겨레>에서 시사만화를 그리면서 나는 회화가 갖고 있던 소통과 유통의 한계를 벗어나 새로운 장을 얻게 되었다. 만화, 그것은 신천지였다. 그곳은 화랑과 평론가,미술잡지사와 교수들의 굴레를 벗어나 대중과 일대일로 대면해서 승부하는, 작두 위에서 춤을 추는 것처럼 어렵기도 하지만 치열하게 생동하는 현장이었다. 만화는 나의 예술에서 구원이었다. 만화의 묘미와 힘을 점차 더하여 느껴가고 있던 무렵, 하루는 도쿄 통신원이던 동료가 구해준 일본애니메이션을 보게 되었다. <이웃의 토토로> <천공의 성 라퓨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이름도 모르는 감독의 작품들이었다. 정말 나는 놀랐다. 이렇게 멋진 작품들이 만들어지고 있었구나! 내가 모르는 사이에! “아, 어떻게!” 나는 이 감독의 작품들을 다 좋아했다.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한 작품은 <이웃의 토토로>. 세상에 이렇게 예쁜 작품이 있을 수 있다니! 뜻밖에 만난 도깨비 토토로, 사츠키의 고집스러운 동생 메이의 실종, 다리가 짧아 옆으로 자전거 페달을 밟고 메이를 찾아보는 이웃 남자아이, 사츠키가 동생을 찾아가는 중 노을 진 언덕에서 때때때때 울며 날아가는 방아깨비…. 좋은 작품이란 ‘아, 저걸 내가 했어야 되는 건데…’ 하는 탄식을 주는 법이다. 그런 탄식 속에서 계속 봐나가다 만난 것이 고양이 버스! 아! 그 만남은 탄식을 넘어서 버렸다. 그러니까 신음이라고 해야 될까? 고양이의 눈에 불이 켜진다. 머리 위에 행선지가 나타난다. 옆구리에서 문이 열린다. 사츠키와 메이가 탄다. 버스는 열개나 되는 발로 어머니가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달린다. 논 위를 지나 전봇대 위를 지나 바람을 일으키며….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 다른 것들은 할 수 있다 치자, 어떻게 이런 고양이 버스를 만들 수 있었단 말인가! 어떻게! 이런 앙증맞은 버스를 말이다! 이어서 본 나우시카의 대왕충, 라퓨타에서의 벌비행기…. 그 모두가 부러움과 좌절감과 묘한 자신감과 희망과 설렘과 슬픔과 환희를 교차시켜주었다. 그런 다음 내 이마에는 지울 수 없는 이름이 새겨졌다. 미.야.자.키.하.야.오. 이제야 밭을 갈기 시작한다 그런 뒤 애니메이션에 대해 망설이던 나는 혼잣말을 했다. 그렇다! 애니메이션은 내 예술을 피워낼 수 있는 땅이 될 수 있다! 또 혼자 속삭였다. 애니메이션은 미래의 예술을 이끌어갈 것이다…. 그러고 나서 나는 남몰래 그 땅을 계약해 두었다. 이후 다시 만난 사람은 다카하타 이사오. 미야자키의 동료인 그가 감독한 영화는 <반딧불의 묘>와 <추억은 방울방울>. 둘 다 내가 몹시 좋아하는 영화다. 리얼리즘. 그래서 나와 피가 통한다. 난 다카하타와 더 많이 통하는 게 아닐까? 그러나 역시 미야자키가 부럽다. 그는 상상하고 창조하기 때문이다. 그 자신이 그림쟁이여서 그럴 것이다. 그는 세계를 주무르고 만든다. 그것이 위대한 점이다. 나 역시 창조하고 싶다. 미야자키와 다카하타, 두 길. 또다른 길은 없을까? 시사만화가를 그만두고까지 내가 예약해 놓은 그 땅을 기어이 사서는 아직 돌투성이인 그곳 맨땅을 갈아 뭔가 싹을 트워보려 한 지 벌써 6년째. 땅을 갈면서 배우고 배우는 건, 이렇게 하면 안 되는구나… 였다. 역시 하나하나 기초를 경험해야 한다는 것. 의욕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 이야기부터 제대로 짜나가야 된다는 것… 스토리, 자본, 인력, 시스템, 인간 관계… 미야자키는 동료 애니메이터가 빚을 져 고민하고 있으면 어떻게 해서라도 해결해 주고 일에 몰두하게 해준다고 하지 않은가? 난 뭔가? 동료들 고생이나 시키고 있지 않은가. 미야자키는 <원령공주>를 만들면서 손이 아파 더 못 그리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거야말로 화가의 명예가 아닌가. 난 뭔가? 아직 일에 제대로 들어가지도 못했지 않은가. <…토토로>를 만들며 일본 아이들에게 지금은 잃어버리고 있는 지난 시대의 따스함을 전해주겠다던, 그리고 무엇보다 일본 아이들을 도깨비를 두려워하지 않는 강한 아이로 키우고 싶다고 하는 철학, 개발된 부유한 일본보다는 개발 안 된 가난한 일본을 선택하겠다는 철학(나하고 조금은 다르지만), 그 모든 것이 미야자키였다. 아이들에 대한 애정, 사물에 대한 짙은 호기심! 사회에 대한 깊은 고민, 그림과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대한 강력한 사랑. 동료애와 책임감. 철저한 장인정신. 그 모든 것이 미야자키였을 것이다. 그의 상상력도 그런 데서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난 미야자키의 작품 중 <원령공주>는 다른 작품만큼 좋아하지 않는다. 모르겠다. <원령공주>를 다른 작품보다 먼저 봤다면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한데 왠지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는 느낌이다. 약간의 오만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어쨌든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충분히 한 셈인데, 그동안 쌓아올린 크레디트로 이제 그럴 때도 됐다고 봐야 할 게다. 하기야 그렇게 했기 때문에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 점에서는 다른 작품에서 볼 수 없는 것을 분명히 주고 있다. 한 생명체로서의 작품이라는 관점과 그래서 얼마나 정이 가는 작품이냐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나로서는 그렇다는 말이다. 그건 그렇고, 이제 길을 간 지 얼마 안 되는 내 시야에서 미야자키는 저 멀리 버티고 서 있는 설산만큼이나 높고 아름답다. 나는 이제야 밭을 가는데 그의 땅은 이미 거목들이 자라 새들이 날아와 우짖고 있다. 내가 가진 것은 무엇인가? 나는 얼마나 갈 수 있을까? 나는 무엇을 그토록 사랑하는가? 나의 기쁨은 얼마만하고 나의 슬픔은 얼마만하고 나의 분노는 얼마만한가? 내 사랑은 얼마나 깊은가? 나 속에 얼마나 생동하는 인물들이 살고 있는가? 나는 사람들에게나 아이들에게 무엇을 주고 싶은가? 내 상상력은 어디까지 미칠 것인가? 나는 어떤 나만의 그림체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내 작품을 내가 만날 날은 한발씩 오고 있는데 나는 과연 어떤 나의 작품과 만나게 될까? 기대도 되고 두렵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내 작품을 보고 그중에 미야자키도 끼어 있으면 좋으련만. 수없이 많은 그림들이 지나가고 자신감과 좌절감이 교차하면서 지나간다. 그래도 지금 배운 것은 한발한발 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 다듬어지지 않은 꿈이 구름처럼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나를 이끌어온, 내가 잊어야 할 나에게 애니메이션의 길을 걷게 한 사람 디즈니와 미야자키 하야오. 언제 나는 그들의 은혜를 갚을 수 있을까? 그리고 언제 그들을 진정 잊을 수 있을까. 미야자키 하야오. 한없는 존경심과 경탄과 사랑과… 그리고 질투심을 불러일으키는 이름. 나는 그 경애하는 마음을 보듬으며 또한 한구석에서 피어오르는 질투심을 어루만진다. 그것은 나의 소중한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밤이 깊었다. 나는 그의 아름다운 그림들을 생각하면서 아직 여린 나의 그림들을 마음속에서 보고 있다. 박재동/ 애니메이션 감독 ▶ 토토로의 아버지, 서울에 오다 ▶ 미야자키 하야오 인터뷰

미야자키 하야오 인터뷰

인간과 자연의 숨결이 교감하는 애니메이션의 소우주를 창조하는 조물주, 미야자키 하야오가 한국을 찾았다. 신작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지난 7월21일 일본에서 개봉돼 흥행의 순풍을 타는 틈을 빌어 국내 애니메이션업체 DR무비의 초청으로 서울을 다녀간 것. 일본애니메이션 외주제작으로 명성을 다져온 DR무비는 <원령공주>에서 일부, <센과…>에서 본격적으로 지브리의 외주를 받아 작업에 참여했다. 마침 <이웃집 토토로>의 국내 개봉도 코앞에 둔 25일, 미야자키는 신라호텔에서 1시간여의 공식 기자회견을 가졌다. 백발에 눈썹이 짙고 검은 뿔테안경을 낀 점잖은 인상에, 뜻밖에 이따금 아이 같은 미소를 띄우며, 간명하고도 빈틈없는 대답을 들려줬다. + 한국에 온 것이 처음인데, 어떻게 오게 됐나. = 신작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만들면서, 지브리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에 외주를 맡겼다. 그 일을 해준 DR무비에 감사차 오게 됐다. DR무비에 일부 제작을 맡기면서 젊은 스탭들도 4명을 파견했었는데, 모두 건강하게 돌아와서는 한국이 굉장히 재미있고, 음식도 맛있다고 해서 마음놓고 왔다. + 한국에 대한 첫인상은. = 이렇게 닮은 나라가 있었구나, 하는 게 첫 번째 느낌이고, 두 번째는 버스가 굉장히 많다는 거다. + 마침 <이웃집 토토로>가 일본에서 개봉된 지 13년 만에 한국에서 개봉된다. 소감이 어떤가. 이 작품을 통해서 관객에게 전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 먼저 <이웃집 토토로>는 일본을 굉장히 싫어했던 어릴 적 나 자신을 위해 어른이 돼서 쓴 편지와 같은 작품이다. 무엇을 싫어했냐고? 간단히 설명하긴 어렵지만, 어쨌든 어릴 때 전쟁을 통해서 가족들이 돈을 벌게 됐고, 전쟁을 통해서 일본이 잘못된 생각으로 가득하게 됐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영화라는 것은 영화를 본 사람의 것이다. 관객은 그냥 즐겨주시기 바란다. 일본에서는 이 작품이 개봉된 뒤 숲을 보전하자는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그런 면도 같이 봐주면 고맙겠고. + <이웃집 토토로>도 그렇지만 당신의 작품에는 자연,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이 많이 드러난다. 또 남성보다는 여성 주인공이 많고. 어떤 계기가 있었나. = 아마 서른살 무렵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 이 세상에서는 인간만이 살아갈 수 없다는 것, 숲과 공기와 물과 함께 어우러져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우주나 도시를 그리는 것보다는 자연을 그리는 걸, 남자보다는 여자를 그리는 걸 더 좋아한다. + 당신의 작품 속 동물들은 동물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된다. =일본에서 계속 자라온 나 자신의 마음속 깊이 어딘가에는 토속신앙, 애니미즘이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나무나 돌, 강, 그런 자연 하나하나에 다 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다. + 거의 평생을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살아온 삶을 돌아보면 어떤 소회가 드나. 그렇게 오랫동안 애니메이션을 해오면서 느낀 애니메이션의 즐거움이라면. = 애니메이션은 즐겁지 않다. 괴로운 작업이다. 어린 아이들이 <이웃집 토토로> 같은 작품을 보며 감동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 즐거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38년간 애니메이션을 해왔는데, 그 삶을 돌아보면 드는 생각은, 힘이 들었다는 거다. + 감독의 삶을 지탱하는 좌우명은. = 아무리 힘든 일도 언젠가는 끝난다. + 그 힘든 일이 끝난 뒤에 하고 싶은 일은 뭔가. 취미든, 아니면 바람이든. = 항상 이 작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특별히 그런 것은 없다. + 토토로, 고양이 버스, 검댕 먼지 등 <이웃집 토토로>를 비롯해 당신 작품의 놀라운 상상력의 원천은 무엇인가. 혹 나이가 들수록 상상력이 줄어든다는 불안은 없나. = 음…, 어릴 때 난 주위에 뭔가 여러 가지 것들이 있다고 생각하곤 했다. 어른이 돼서 다시 보면 그건 내가 상상했던 것이고, 이건 뭐, 저건 뭐였다고 밝혀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뭔가가 있다’는 생각은 아직도 변하지 않았다. 그 뭔가에 형체를 준 게 토토로, 고양이 버스, 검댕 먼지 같은 것이다. 상상력에 대해서 말하자면 40년 전에 생각한 거랑, 어저께 생각한 거랑 별 차이가 없는 걸로 봐서 줄어드는 것 같진 않다. + <센과…> 이후 은퇴를 발표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후배 양성에 힘쓰고, 요즘 공들여서 건립중인 지브리 미술관에서 상영할 단편작업만 할 거라는 게 사실인가. = 공식적으로 은퇴한 적은 없다. 일단 장편애니메이션을 지금과 같이 만드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미술관에 들어갈 작품과 단편작업은 계속할 생각이다. 3편 정도 기획했는데, 1편은 완성했고 1편은 돈이 안 될 것 같아서 중단했다. 나머지는 진행중이다. 이 단편들은 미술관 내에서만 상영할 계획이다. 글 황혜림 기자 blauex@hani.co.kr·사진 오계옥 기자 klara@hani.co.kr ▶ 토토로의 아버지, 서울에 오다 ▶ 미야자키 하야오 인터뷰

어떤 거장의 초상, 75살의 푸르름

“감독님. 이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애들 손좀 봐야겠습니다.” 오즈 야스지로가 <도쿄 이야기>(1953)를 찍을 때, 이마무라 쇼헤이는 조감독이었다. 이마무라가 손봐야겠다고 한 건 초등학생 무리로 출연한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은 오즈 영화의 출연자답게 앞만 보고 너무도 질서정연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이마무라의 생각은 이랬다. ‘애들이 뭐 저래. 내가 저 나이 땐 저러지 않았어. 저건 애들이 아니야. 군대지.’ 이마무라는 오즈의 마지못한 허락을 얻어 아이들을 흔들었다. “야, 니들 하고 싶은대로 해.”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 난리법석을 피웠다. 대열에서 이탈해 엉뚱한 데 가 있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촬영중에 오줌 싸는 아이까지 있었다. 물끄러미 이를 보던 오즈가 말했다. “이마무라군. 안 되겠네. 내 방식대로 해야겠어.” 이마무라는 이것이 사부인 오즈에 대한 “처음이자 마지막 저항”이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마무라는 오즈를 떠났다. 오즈의 평생의 영화적 거처인 쇼치쿠를 떠나 젊은 감독을 찾던 닛카쓰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오즈는 거대한 성이었고, 그 성에선 어떤 흐트러짐도 용납되지 않았다. 이마무라는 오즈의 완벽한 균형과 정제미의 세계를 생래적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도쿄 출신에다 외과의사의 아들이었지만, 이마무라는 뒷골목의 냄새, 습한 욕정과 범죄와 혼돈, 원시적 생명력에 처음부터 이끌렸다. 오즈의 세계를 같이 호흡하기도 힘들었고, 조감독 선배가 50명이나 줄서 있는 쇼치쿠의 완고한 도제제도도 숨막혔다. 이 결별은, 당시엔 불만 많던 한 조감독의 이직에 불과한 사건으로 비겠지만, 오즈 야스지로와 미조구치 겐지로 대표되던 일본 거장 시대의 종언과 새로운 물결의 도래를 예고한 신호탄이었다. 이마무라는 오즈의 정반대편에 자신의 영화세상을 건축했다. 같은 현대의 일본을 그렸지만, 오즈의 숭고하고 희생적인 여인과 고요한 정원을 야수적 욕정과 흉악한 생존게임의 난장판으로 바꿔놓은 것이다. 데뷔작부터가 오즈의 <부초>의 패러디처럼 보이는 <도둑 맞은 욕정>(1958)이었다. 실례가 아니라면, 이마무라의 영화는 오즈의 언더그라운드 변주 혹은 엽기버전이다. 세계영화계는 오즈를 찬미한 것처럼 이마무라에게도 곧 최상급의 찬사를 바쳤고, 칸영화제는 그에게 두번의 황금종려상을 헌정했다. 그리고 오즈에게 저항하던 이 새파란 젊은이는 이제 75살의 노인이 됐다. 농담이 나의 힘 “내 연기? 엄청나게 늘었지. 하하” 이마무라 쇼헤이를 이런 계기로 만나기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이마무라는 이시명 감독의 데뷔작 에 일본인 사학자로 출연하기 위해 지난 7월21일, 3박4일 일정으로 방한했다. 두해 전 부산영화제를 찾았을 때보다는 좋아보이지만 여전히 걸음걸이가 불편한데, 그것도 배우가 아닌 한 나라의 국보급 감독이, 외국영화의 단역을 맡으러 먼길을 찾아온 것이다. 이 희귀한 일을 이마무라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나가타 신이치로라는 프로듀서가 있는데, 내 20년 친구야. 그 사람이 한번 하라고 해서 했지 뭐.” 보충설명을 하자면, 의 프로듀서이자 이마무라 영화학교 출신인 양시영씨가 아이디어를 내고 그의 선배인 나가타 신이치로가 힘을 보태 이 특별출연을 성사시켰다. 감독으로만 오래 살아서 그런지 이마무라는 연기하는 걸 재미있어하는 눈치였다. 22일 강릉에서 촬영을 끝내고 다음날 하이야트호텔에서 만났을 때, 그에게 이번에 한 연기에 대해 먼저 물었다. 연기는 처음인가요. “TV드라마에 한번 나온 적 있어. 그땐 시골경찰 서장 역을 맡았는데, 내가 너무 거만했다고 그러더군. 연기가 형편없었다는 얘기지. 그래서 이번에 영화에 또 출연한다니까, 다들 말렸어. 특히 가족들이 말렸어. (건너편에 앉아 있는 부인을 쳐다보며) 말려도 너무 심각하게, 좀 너무한다 싶을 정도로 말렸어.” (웃음) 세번의 인터뷰 경험으로만 판단하자면 이마무라 감독은 심각한 인터뷰보다 농담을 즐긴다. 지지난해 부산영화제 기자회견 때 “<간장선생> 주인공의 모토가 ‘의사의 생명은 다리’인데, 그러면 감독의 생명은 뭐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이마무라는 “감독의 생명도 다리”라고 대답해 좌중을 웃겼다. “가훈은 무엇인가”라는 엉뚱한 질문에도 “가훈도 ‘감독의 생명은 다리’”라고 의뭉스럽게 답한 뒤 “가훈이 그런데도 내가 다리가 불편해서 죄송하다. 곧 나아서 뛰어다니겠다”고 멋지게 마무리했다. 대단한 순발력이다. 기자(이면서 그의 팬)의 처지로선 그의 영화인생 전체를 놓고 묻고 싶은 게 태산같지만, 좀 거창하다 싶은 질문엔 단답으로 대답하니 질문자로선 여간 멋쩍지 않다. 대신, 예컨대 이런 질문, “이번엔 연기력이 좀 향상됐다고 생각하나요” 같은 것엔 시원하게 답한다. “그럼. 물론이지. (웃음) 이번엔 익숙해져서 아주 잘했어. 거만도 안 떨고 말이야. 그런데 그 영화 내용은 뭔지 잘 모르겠어. (웃음) 시나리오를 봐도, 시간도 왔다갔다하고, 너무 복잡해서 말이야.” 이런 문답은 막힘이 없다. 기회가 되면 또 연기를 할 생각인가요. “바빠서 그럴 것 같진 않아. 그래도 이시명 감독처럼 젊은 사람들과 일하는 건 즐거워. 좋은 경험이었지.” 젊은 영화인들과 세대차를 느끼진 않나요. “우리 영화학교 다니는 젊은이들은 나이가 나하고 반세기 차야. 이 친구들은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그래도 다들 진보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어. 그래서 즐겁지. 이 친구들이 요즘 나한테 ‘감독님, 요즘 일본영화는 좀 아닌 것 같습니다’라고 그래.” 그럼 뭐라고 대답하나요. “물론이지, 라고 대답해.” (웃음) 감독님이 왕성하게 활동하시던 60, 70년대가 역시 일본영화의 전성기였다고 보는 건가요. “그렇지. 뭐, 내가 그때 영화를 만들어서, 그랬다는 건 아니고. (웃음) 눌려 지내던 사회가 점차 개방됐고, 감독들도 자유롭게 날갯짓을 시작했던 때야. 그래서 좋은 영화가 많이 나온 거지.” 진부한 관객을 엿먹이는 노장 노장의 신작은 이번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 때문에 늘 숙연한 느낌을 갖게 한다. 영화로 평생을 산 사람, 거장의 만신전에 오른 노감독의 마지막 영화…. 그러나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은 그렇게 숙연해지려는 마음을,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머쓱하게 만든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가 <우나기>(1997) 때부터 스스로 마지막 작품임을 공언하고 나서 곧 차기작을 만들기 때문이다. <검은 비> 이래 8년 만에 내놓은 <우나기>는 모든 면에서 이마무라 영화세계의 마침표처럼 보였다. 밑바닥 인간들의 삶, 그들의 벌거벗은 욕망과 부대끼며 평생을 살아온 감독 자신의 이미지가 투영된 걸작 <우나기>가 칸영화제 황금종려상까지 수상하면서, 이 거장은 참으로 감동적인 은퇴식을 치르는 것 같았다. 그때 이마무라는 멋진 그리고 비장한 코멘트까지 덧붙였다. “뱀장어(우나기)는 강바닥의 진흙탕 속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주 멀리까지 여행한다. 이 긴 여행이 끝나면 수천마일을 달려가 전투에서 승리한 위대한 장군처럼 귀환하는 게 아니라, 진흙에 자신을 묻고 어둠 속에서 살아간다. 매우고 외롭고 슬픈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마무라는 이듬해 <간장선생>이라는 아주 경쾌하면서도 기묘한 부조리극을 들고 다시 칸을 찾았다. 그때 역시 이마무라는 다시 “이게 나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올해 <붉은 다리 밑의 따뜻한 물>로 또 한번 칸의 초대를 받았다. 이번엔 별다른 말을 붙이지 않았다. 이마무라 감독은 이제 이렇게 말한다. “늘 마지막이라고 말해놓고 또 만들어서 좀 무안하다. 그래서 이젠 그런 말 안 할 거다.” 올해 칸영화제엔 이마무라와 비슷한 감독이 또 있었으니, 바로 포르투갈의 마뇰 드 올리베이라다. 올해 93살의 이 노장은 70살이 넘어서야 본격적인 필모그래피가 시작되는 영화사상 전무후무한 인물로, 매번 포르투갈 정부의 영화지원금 중 반을 가져가는 바람에 젊은 포르투갈감독들은 그가 빨리 죽기를 바란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로 왕성한 작품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두 노장의 신작은 그러나 여러 면에서 다르다. 올리베이라의 <나는 집으로 간다>는 아들을 사고로 잃은데다 강도를 당해 실의에 빠져 있는 노배우가 주인공이다. 오랜만에 영화 출연을 했지만 대사를 까먹는 실수를 몇 차례 한 뒤 집으로 돌아간다는 게 이야기의 전부다. 이런 영화를 보고 노감독의 자화상이란 느낌을 갖지 않기란 힘들 것이다. 이 영화의 쓸쓸함과 비애감은 그런 느낌 때문에 더 무거워진다. 이마무라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따뜻한 물>은 뜻밖의 장소로 간다. 실직한 중년 가장이 부랑자 노인의 말을 듣고 보물을 찾아 바닷가의 가옥에 간다. 그곳에는 보물 대신 낯선 여자가 있고 남자는 여자를 품는다. 그러자 여자의 몸에서 물이 분수처럼 솟아나 내를 이루고 그 주위로 물고기가 모여든다. 이마무라는 놀랍게도 집이 아니라 ‘따뜻한 물’의 세계, 성과 욕망의 분수대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감독의 분신일 것으로 짐작되는 부랑자 노인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걸 잊고 여자를 품게. 자기 욕망에 충실하란 말일세.” 나이에 어울리게 좌선한 채 삶을 어둠을 응시하기는커녕 오즈에게 저항하던 젊은이의 격정과 욕망, 그 원시적 생명력의 세계로 이마무라는 돌아간 것이다. 물고기들마저 이 욕망의 잔치판에 참여해 자연의 축사를 대독한다. 이 상상 불허의 회귀야말로 현자의 말을 경청하려 무릎 꿇은 제자의 자세를 갖춘 관객을, 또 노장의 처연한 자화상을 예감하던 관객을, 그 진부한 기대를 엿먹인다. 짓궂게 그리고 통렬하게 엿먹인다. ▶ “나는 돌아간다. 욕망의 분수대로” (1) ▶ “나는 돌아간다. 욕망의 분수대로” (2)

타이영화가 온다

자국영화 연일 흥행기록 경신, 150억짜리 영화 만들며 산업화 시동 도대체 타이영화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1997년 세명의 신인감독이 동시에 데뷔를 하였다. 당시 타이는 금융위기의 와중에 있었고 영화산업 역시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해에 100여편을 만들던 규모에서 20편 미만으로 뚝 떨어진, 그야말로 암담한 현실 속에서 미래를 걱정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그런데 이들 세명의 감독이 내놓은 데뷔작들은 종래의 타이영화와는 전혀 새로운 작품들이었고, 2001년의 시점에서 보면 그것은 타이영화의 부활의 신호탄이었던 셈이다. 논지 니미부트르의 <댕 버럴리와 그 일당들>과 옥사이드 팡의 <달리는 사나이>, 그리고 펜엑 라타나루앙의 <펀 바 카라오케>(이들 3편은 모두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소개된 바 있다) 등은 비록 평단의 논란은 있었지만, <댕 버럴리와 그 일당들>이 당시까지의 모든 타이영화 흥행기록을 갈아치움으로써 최소한 산업적 가능성은 입증해 보였다. 그리고 그러한 가능성은 이제 구체적인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1999년 논지의 <낭낙>은 타이에서 <타이타닉>의 흥행기록마저도 넘어서는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2000년에는 용유스 통큰턴의 <철의 여인들>이 역시 할리우드영화를 물리치고 그해 최고 흥행기록을 수립하였다. 그리고 올해 들어 타이영화의 선전은 눈부시다. 상반기에만 흥행 1, 2위를 차지한 작품이 모두 타이영화였다. 지난해 연말 개봉한 타니트 지트나콘의 <방라잔>과 <킬러 타투>가 그것으로, 이들 작품은 모두 흥행수익 1억바트(약 30억원)를 넘어섰다. 올해 개봉된 할리우드영화 중에 아직 흥행수익 5천만바트를 넘어선 작품이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타이영화가 자국시장에서 얼마나 위세를 떨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또다른 수치를 보자. 1997년 이후 12%까지 떨어졌던 타이영화의 시장점유율이 올해는 20%에 달할 것으로 전망되며, 할리우드영화의 평균 상영일수가 6주에서 4주로 떨어졌다는 기록도 나와 있다. 그러나 타이영화의 선전은 하반기에 더 거세질 것으로 전망된다. 논지 니미부트르의 <잔다라>와 MC 차트리찰레름 유콘의 대서사극 <수리요타이>, 그리고 펜엑 라타나루앙의 <몬락 트랜지스터> 등과 같은 기대작들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타이영화의 선전은 자국시장에서 그치지 않는다. 필름방콕사의 경우 지난해에 위시트 사사나티앙의 <검은 호랑이의 눈물>과 옥사이드·대니 팡의 <방콕 데인저러스> 단 두편으로 200만달러의 해외수익을 올렸다. <낭낙>이나 <철의 여인들> <방라잔> 역시 상당한 액수의 해외판매 수익을 올리고 있다. 포르티시모나 골든웨이 등과 같은 해외 세일즈사들은 이제 타이영화의 단순한 해외 세일즈에서 벗어나 제작단계에서부터 타이의 제작사들과 협업체제를 유지해가고 있다. 제작비 증폭, 상영관 확대 10여년 전 타이영화의 한편당 평균 제작비는 500만바트(약 1억5천만원)였다. 그런데 지난해 평균제작비는 1500만바트였다. 10년 사이 세배가 뛴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추세는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1999년 타이영화사상 최고의 흥행기록을 세운 <낭낙>의 제작비가 3천만바트였지만, 지난해 연말 개봉된 <방라잔>의 제작비는 그 두배가 넘는 8천만바트였다. 하지만 이 기록도 <수리요타이>에 오면 비교 자체가 무색해진다. 오는 8월 왕후의 생일에 맞춰 개봉하는 시대극 <수리요타이>의 제작비는 무려 5억바트에 달한다. 우리돈 약 150억원의 제작비가 단 한편에 투입된 것이다(국내에서 최고의 제작비를 들인 것으로 추정되는 <무사>나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도 제작비가 60, 70억원선이다). 물론 <수리요타이>는 타이 왕실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만들어지는 특수한 경우이기는 하지만, 타이영화 제작비의 상승폭은 숨이 가쁠 정도이다. 이러한 현상이 벌어지는 것은 물론 타이영화의 흥행가능성에 대한 투자자들의 신뢰와 기대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러한 투자가 가능한 타이영화산업의 구조에 기인한 바도 있다. 현재 타이의 영화산업구조는 5개 정도의 거대 회사가 제작 및 배급을 거의 독점하고 있다. 타이 엔터테인먼트사의 경우 제작은 물론 빌리지 로드쇼와 합작으로 EGV라는 극장체인을 소유하고 있으며, 가장 역사가 오래된 파이브 스타나 UMG 역시 제작사와 함께 극장체인을 소유하고 있다. 이번에 <수리요타이>를 제작한 사하몽콘필름이 바로 UMG의 자회사이다. 또한 TV방송사를 소유한 종합멀티미디어회사인 BEC-Tero그룹은 필름방콕이라는 제작사를 자회사로 거느리고 있다. 그리고 RS프로모션은 레드 로킷과 아봉이라는 제작사를 두고 있다. 이들 회사들은 대부분 방송, 음반, 영화 등 그야말로 모든 엔터테인먼트 분야를 취급하는 종합멀티미디어회사들이다. 이들 그룹들은 애초부터 자본력이 풍부한데다가 금융위기 때 축소했던 영화제작을 최근 다시 늘리는 쪽으로 전략을 수정하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웬만한 지명도가 있는 감독의 경우 제작비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상황이 바뀐 것이다. 타이영화의 제작이 늘어나는 데에는 상영공간의 확대 또한 주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타이 전역에는 약 200여개의 스크린이 있다. 인구 6천만명에 비해 너무 적은 숫자인데, 최근 ‘메이저 시네플렉스’라고 하는 멀티플렉스 체인이 급격하게 스크린 수를 늘려나가면서 다른 극장 체인에도 자극을 주고 있다. 그리고 이같은 극장환경의 변화에 따라 수익률이 높아지리라는 기대가 투자자들을 타이영화제작에 대한 투자로 유인하고 있는 것이다. ‘젊은’ 시선의 힘, 중견감독의 회춘 90년대 중반 이전까지 타이영화를 지배하던 장르는 청소년영화와 범죄영화였다. 특히 범죄영화는 비록 상업영화지만 타이영화가 적어도 아시아권에서는 경쟁력을 가질 만큼 높은 수준을 보여준 장르였다. 97년 이후 타이영화의 경향은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청소년영화가 거의 사라진 반면 범죄영화는 여전히 강력한 상업적 힘을 발휘하고 있으며, 코미디와 시대극이 새롭게 각광받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젊은 감독과 제작자의 등장이라는 요인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그들 대부분은 CF와 뮤직비디오 감독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타이의 CF 수준은 아시아권에서는 상위급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새로운 감각과 연출력으로 무장한 그들의 작품은 곧 젊은 관객으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이끌어냈다. 이를테면 논지의 <낭낙>의 경우 이야기 자체는 타이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전설이었기 때문에 자칫 외면당하기 쉬운 소재였다. 더군다나 그동안 영화나 TV드라마로 만들어진 것만 해도 20편이 넘는다. 그런데도 논지는 누구나가 다 아는 소재를 가지고 최고의 흥행기록을 일구어냈다. 그는 이 이야기에 전혀 다른 해석을 내리고, 현대적인 감각으로 풀어나갔다. 과거 TV나 영화에서 보여주었던 낭낙의 이야기는 죽은 낭낙이 재혼한 남편과 남편의 새 아내에게 가하는 복수쪽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논지는 복수보다는 낭낙의 죽음을 초월한 사랑, 그리고 죽은 아내를 위해 출가하는 남편의 지순한 사랑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해석에 대해 특히 여성관객이 열광적으로 반응한 것이다. 펜엑이나 옥사이드, 용유스 역시 새로운 감각과 신인답지 않게 탄탄한 스토리텔링의 실력을 보여주고 있으며, 젊은 관객을 끌어들이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의 영화는 세계적 보편성이 있다. 말하자면 그들의 영화가 세계 곳곳의 관객에게 익숙하게 다가간다는 것이다. 펜엑의 영화에서 타란티노를 떠올리거나 옥사이드 영화에서 홍콩영화의 분위기를 읽는가 하면, 게이와 복장도착자들의 이야기를 유쾌하게 풀어나간 용유스의 <철의 여인들>은 지난해 전세계 영화제에서 가장 인기있는 작품 중 하나였다. 이처럼 1997년 이후에 불기 시작한 타이영화의 새로운 바람은 주로 젊은 신인감독들에 의해 주도된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최근 한 가지 흥미있는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타이 엔터테인먼트가 신인감독을 기용하여 성공을 거둔 뒤 메이저 영화사들도 이에 자극을 받아 타이영화에 투자를 늘리기로 했고 재미있게도 그 혜택이 중견감독들에게도 돌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거의 뒷전에 밀려나 있던 유타나 묵다사니트, MC 차트리찰레름 유콘, 처드 송스리, 번디트 리타콘, 타니트 지트나콘 등이 바로 그들이다. 메이저사들이 국산영화에 투자를 늘리기로 하였지만,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줄 만한 젊은 감독의 수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중견감독들에게 눈을 돌리기 시작한 때문이다. 이중 번디트 리타콘의 <스탕>이나 타니트 지트나콘의 <방라잔>은 흥행에서 성공을 거둠으로써 이들의 입지는 훨씬 탄탄해졌다. 하지만 그들의 성공이 젊은 제작자나 제작사들의 새로운 제작방향에 힘입은 바 크다는 것 역시 부인할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지금 타이영화는 전통의 단절이 아닌 신구세대의 공존이라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독립영화는 살아 있다 최근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타이영화는 전반적으로 상업성에 그 무게중심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아직 타이영화만의 독창적 미학을 이야기하기에는 이른 것이다. 반면 타이의 단편영화나 다큐멘터리, 실험영화 등과 같은 비주류영화, 그리고 영화문화의 현실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가 준비하는 ‘타이영화 특별전’은 이러한 비주류영화나 영화문화의 현주소에 대해서도 관심의 끈을 놓지 않을 예정이다. 타이에는 방콕국제영화제와 같은 대규모 영화제 외에도 방콕실험영화제나 타이단편영화와 비디오페스티벌(TSFVF) 같은 조그마한 영화제들도 있다. 올해로 3회째를 맞는 방콕실험영화제는 격년제로 개최되는 영화제로, 타이에서의 실험영화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타이에서 실험영화는 70년대 반종 코사와타나라고 하는 선구자가 있었고, 80년대 독일문화원인 괴테 인스티튜트의 강좌와 워크숍을 통해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997년에 처음 방콕실험영화제가 열렸을 때에는 이에 반대하는 데모가 있었을 정도로 대중적인 인식은 미미했다. 하지만 이제는 실험영화만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영화사 ‘킥 더 머신’이 만들어졌는가 하면, 아피찻퐁 위라세타쿤과 같은 주목할 만한 실험영화 작가도 배출되었다. 올해로 5회째를 맞는 TSFVF는 돔 숙봉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그는 열악한 타이의 영화문화 풍토 속에서 그야말로 소금과 같은 존재이다. 평론가였던 그는 80년대 초부터 필름 아카이브를 만들자는 캠페인을 혼자 시작해 마침내 1984년에 이를 성사시킨 인물이다. 그가 필름 아카이브를 설립하기까지에는 너무나 많은 비화들이 있다. 그는 왕족을 움직여 필름 아카이브를 설립하는 길을 택하였고, 그 구체적 방법으로 20세기 초 유럽을 방문하였던 국왕의 모습을 담은 필름이 몇몇 유럽국가의 필름 아카이브에 남아 있으며, 이를 찾자는 캠페인을 벌였다. 그리하여 아누소른 몽콜카른 왕자의 도움을 얻어 타이 필름 아카이브를 설립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도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좀더 다양한 영화문화의 확산을 위해 새로운 기구의 설립을 생각하였고, 마침내 1994년 타이 필름 파운데이션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바로 이 타이 필름 파운데이션의 주요 사업 가운데 하나가 TSFVF이다. 그러나 타이 필름 파운데이션의 현황은 그다지 여의치 않다. 타이 필름 아카이브가 국립인데 반해 타이 필름 파운데이션은 순수 민간기구이기 때문이다. 사무실도 타이 필름 아카이브 건물의 한 귀퉁이를 얻어 쓰고 있으며, 봉급을 받는 정규 직원도 1명뿐이다. 나머지 직원들은 대부분 무보수 자원봉사자들이다. 그들 모두는 평생을 타이영화의 역사를 정리하고 영화문화의 확산을 위해 바친 돔의 열정과 정신에 감화된 사람들이다. 방콕실험영화제와 마찬가지로 TSFVF는 타이의 대안영화, 비주류영화의 확산에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 현재 타이에는 명문 탐마사트대학과 출라롱코른대학 등 모두 5개 대학에 영화 관련학과가 있으며, 대부분의 단편영화들이 이들 대학에서 나오고 있다. 하지만 킥 더 머신과 같은 독립영화사에서도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워크숍을 열고 있으며, 일반인이 만드는 단편영화도 상당한 숫자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펜엑이나 옥사이드와 같은 젊은 감독들이 이러한 워크숍에 기꺼이 강사로 참여해 주류영화와 비주류영화의 교류에 힘을 보태고 있다. ‘제2의 한국’이 될 수 있을까? 최근 타이영화의 현황은 여러모로 한국의 그것과 유사하다. 젊고 유능한 제작자와 감독들의 대거 등장, 해외로부터 상당한 주목을 받고 있다는 점, 제작자본 공급처의 새로운 창출 등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타이영화의 미래까지 안전하게 보장해주지는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타이영화만의 독창적 미학이 아직까지 확립되지 못한데다가 감독과 제작자의 기능이 완전히 분리되지 않은 전근대적인 제작시스템, 검열 등 지나치게 엄격한 정부의 영화정책 등이 앞으로도 타이영화의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타이가 ‘제2의 한국’이 될 수 있을지는 아직 단언하기 어렵다. 그러나 설사 그렇게 되지 못할지라도 논지 니미부트르, 펜엑 라타나루앙, 위시트 사사나티앙, 옥사이드 팡,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등과 같은 작가의 등장은 아시아를 비롯한 세계영화사에서 타이영화의 입지를 분명히 각인시키는 중요한 의미를 남길 것이다. 김지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 “타이영화가 온다 ▶ 돔 숙봉의 외길 인생 ▶ <낭낙> <잔다라> 감독 논지 니미부트르 ▶ 실험영화 위해 ‘킥 더 머신’ 설립한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 ▶ 2001 하반기 타이영화 기대작 ▶ 국내 개봉 앞둔 타이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