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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FF #4호 [인터뷰] 세계가 나를 부정할 때, <디어 스트레인저> 니시지마 히데토시 배우

뉴욕에 사는 아시안 부부 겐지(니시지마 히데토시)와 제인(계륜미)은 <디어 스트레인저>의 두 기둥이다. 부부가 겪는 일상의 균열과 정념의 대치가 영화가 직조한 ‘폐허’의 세계를 완성한다. 니시지마 히데토시가 보여주는 서늘한 분노의 얼굴은 그 어떤 외적 폭력보다도 강한 긴장을 부른다. 더 넓은 세계로 뻗어나가고자 하는 그의 과정을 부산에서 목격했다. - ‘세계에는 갑자기 불합리할 정도로 일상을 무너뜨리는 사태’가 일어나며, 이에 대해 겐지가 보이는 반응을 집중해서 탐구했다는 말을 남겼다. 이러한 측면에서 겐지는 <드라이브 마이 카> 속의 인물 가후쿠와 겹쳐 보이기도 한다. 비슷한 상황에 놓인 인물들이긴 하지만, 유사한 캐릭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가후쿠는 질문에서 언급한 그런 사태들에 대해 눈을 감고 전부 묻어둔 채 조용히 살아가려는 인물이었다. 반면에 겐지는 더 충동적이고 이런 사태들을 어떻게든 해결하려 애쓰는 인물이다. 그런 노력이 결국 상황을 악화하게 만들며 점차 파멸에 들어서는 사람이다. 두 캐릭터 사이의 차이는 아마 두 감독이 지닌 본질적인 재질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 그렇다. 마리코 데쓰야 감독이 그간 보여준 충동의 정념, 폭발적인 감정이 <디어 스트레인저>에도 녹아 있다. 그래서 처음 <디어 스트레인저>의 각본을 봤을 때 <디스트럭션 베이비>처럼 ‘피를 철철 흘리면서 싸우는 장면들이 많겠군···’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육체적인 폭력을 행사할 일이 많진 않더라. (웃음) 마리코 감독님께서 기본적인 태도는 유지하되 이제 새로운 세계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육체적인 폭력뿐 아니라 정신적인 폭력에 대해, 구체적으로는 이 세계가 나의 존재를 부정하고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에 대해 토로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는 생각이었다. - 대사의 90% 이상이 영어다. 낯선 타지에서 영어 연기에 도전하는 일은 어땠나. 어느 정도 우려했으나 결과적으론 어렵다고 느끼지 않았다. 영어 발음이 조금 신경 쓰이긴 했지만. (웃음) 우선 제작진의 도움이 컸다. 이번 현장은 작은 규모의 제작진으로 꾸려졌다. 젊었을 때 출연했던 독립 영화 수준이었다. 적은 인원인 만큼 모두가 하나로 똘똘 뭉쳐서 나아갈 수 있었다. 배우에게 무척 편한 환경이었다. 특히 상대역인 계륜미 배우의 완벽하게 자연스러운 연기 덕에 겐지의 내면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다시금 계륜미 배우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다. 언어의 힘은 무척이나 강하고 다양하다. 가능하다면 영어뿐 아니라 한국, 대만, 유럽 등 다른 언어권의 작품에도 도전하고 싶다. 지금까지의 연기 경력 동안 난 무모하다는 세간의 평가를 받을 정도로 새로운 도전에 임해왔다. 스스로 내 커리어를 붕괴시킬 만한 도전에도 몸을 사리지 않았다. 지금의 삶을 유지하는 것도 멋진 일이지만, 지금의 시스템에 안주하지 않는 쪽에 더 마음이 간다. - 계륜미 배우와의 협업에 대해 더 듣고 싶다. 겐지와 제인은 카이의 실종 전에도 불편한 관계에 놓여 있는 듯 보인다. 일상 속 표정에도 항시 긴장감을 유지하자고 협의했을지. 중요하게 논의했던 지점이다. 대본을 함께 봤을 때부터 무척 긴장감이 높은 사이로 그려져 있었으나 우리 둘은 ‘그래도 둘은 사랑하는 사이’라고 해석하고자 했다. 일상을 지내며 여러 문제를 겪고 여러 압박에 시달린다 해도 둘은 서로를 분명 사랑하고, 가족을 아끼며, 관계를 유지하려는 바람을 지니고 있단 것이다. 그래서 감독님께도 둘의 애틋함을 살릴 장면을 꼭 찍고 싶다고 제안했고 촬영하게 됐다. 그런데 결과물을 보니 그 장면은 편집됐더라. (웃음)

[기획] 미련 없이 펼친, 나의 드라마 - 배우 조여정이 아끼는 드라마 출연작은

1998년 SBS 시트콤 <나 어때>를 시작으로 올해 말 공개될 우민호 감독의 신작 시리즈 <메이드 인 코리아>까지, 배우 조여정은 단막극을 포함해 20편이 훌쩍 넘는 드라마에 드나들었다. 스크린에 아이코닉한 발자국을 새기는 사이사이 TV에서는 부지런히 일상의 풍경과 어우러졌다. 그는 한국형 시즌제 드라마의 시초 격인 <로맨스가 필요해>의 첫 주인공이었고, 지난해에는 <타로: 일곱 장의 이야기>로 칸 국제 시리즈 페스티벌 단편 경쟁부문 레드카펫을 밟고 오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특별히 아끼는 드라마 출연작을 물었다. 아들의 범행을 감추려는 주부를 연기한 <아름다운 세상>, 어느 부잣집의 보모로 분했던 <베이비시터>를 차례로 꼽은 조여정이 그 뒤틀린 여자들이 남긴 훈장을 꺼내 보였다. JTBC <아름다운 세상>(2019) “<기생충> 촬영 직후 찍은 드라마다. 내가 늘 열심히 하는데, <아름다운 세상>은 과하게 열심히 했다. (웃음) 일상조차 버리고 몰입했기에 후회가 없을 정도다. 그렇게 하고 나니까 작품이 내게 다르게 남더라. 그 작품에서 내 연기가 특별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스스로 한점의 미련도 남기지 않은 드문 경험이라 기억에 남는다는 뜻이다. 시청률이 폭발적이었던 드라마는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분명 내가 그 안에 뼈를 갈아넣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우연히 한 시청자가 남긴 블로그 게시물을 읽고서 알았다. <아름다운 세상>을 보고 ‘그동안 조여정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런 배우가 될 수 있었을까?’라고 적으셨더라.” KBS <베이비시터>(2016) “단막극만의 단편소설 같은 매력을 좋아한다. 지금껏 참여한 여러 단막극 중 가장 아끼는 건 4부작 <베이비시터>. 성취감이라는 걸 잘 느끼지 못하는 내게 큰 성취감을 안겨준 작품이다. 여기저기서 칭찬도 많이 들었다. 사실 연기라는 게 한번에 확 나아지기 힘들다. 노력한다고 바로 실력이 좋아질 수가 없다. 그런데 배우로서 ‘내가 좀 늘었구나’ 하고 느끼는 순간은 오기 마련이다. 내게는 <베이비시터>가 그 무대였던 것 같다.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을 많이 했던 드라마였기 때문에 해냈을 때 그 성장의 폭을 더 크게 느낀 게 아닐까. 그래서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는 출연작 중 하나다.” 주요 드라마 필모그래피 2025 <메이드 인 코리아> 2024 <타로: 일곱 장의 이야기> 2021 <하이클래스> 2020 <바람피면 죽는다> 2019 <아름다운 세상> 2019 <99억의 여자> 2017 <완벽한 아내> 2016 <베이비시터> 2015 <이혼변호사는 연애중> 2012 <해운대 연인들> 2011 <로맨스가 필요해> 2009 <집으로 가는 길> 2008 <쩐의 전쟁 the Original> 2006 <얼마나 좋길래> 2004 <애정의 조건> 2004 <조선에서 왔소이다> 2003 <흥부네 박 터졌네> 2002 <야인시대> 2002 <장희빈> 1998 <나 어때>

[정준희의 클로징] 시사라는 강물위에서

긴 호흡으로 산다는 게 참으로 어려운 세상이 되었구나 싶다. 물론 이런 투덜거림은 적어도 지난 수십년간 수없이 나왔을 테고, 길게는 수백년 이상, 때마다 반복되었을 것 같긴 하다. 적어도 인류 역사가 근대로 진입하던 시점 이후로 우리가 체감하는 시간은 늘 가속화의 경향 속에 있었으니 말이다. 따라서 첫 문장은 조금 수정되는 게 맞다. 기존의 내 호흡보다 훨씬 더 짧은 호흡으로 살아야만 하는 조건에 처한 것 같다. 개인적인 사유로든, 사회 변화적인 이유로든 말이다. 일단은 개인적인 사유가 크다. 나는 일상적 보도 및 시사 문제를 다루는 ‘저널리즘’과 미디어를 관찰하면서 그것을 분석하거나 이론화하는 직업을 갖고 있었다. 현재도 그런 직업으로 분류되는 게 맞기는 한데, 과거형으로 표현하는 이유는 매일 내가 하는 일의 중심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매일’ 책을 읽었고, 관찰은 그 매일보다는 조금 더 긴 호흡을 주기로 이뤄졌다. 관찰의 결과로 읽어야 할 책이 정해지기는 하였으나, 실은 책이 관찰을 주도했던 면이 크다. 하지만 지금은 매일 그것을 관찰할 뿐 아니라 스스로 매일 무언가를 이야기한다. 저널리즘 미디어 ‘바깥’에서가 아닌 ‘안’에서 함께 움직이면서 주변도 살펴야 하는 셈이다. 시사(時事, current affairs)에 몸을 담그면, 그걸 제대로 굽어볼 수가 없다. 시사는 말 그대로 물결(current)이다. 떠밀려갈 뿐 통제할 수도 없고 가늠하는 것조차 여의치 않다. 도리어 빠져 죽기 십상이다. 그래도 전에는 가끔 뭍에 올라 흘러가는 물을 바라보기도 하고 그 물결의 길을 잡는 강의 윤곽도 살펴보고 했는데, 지금은 그러기가 도무지 어렵다. 물 안에 몸을 담그지는 않고 뗏목이라도 띄워 그 물을 타고 가려 애쓰는 정도이다. 가끔은 억지로 닻을 내리거나 중간에 있는 모래톱 혹은 바위 같은 것에 의지하기도 하지만, 상류에 큰 비라도 내릴라치면 그 자세를 지탱하다가 부서질 것처럼 위태위태하다. 이런 결정을 한 것에는 사회적인 이유가 작동했다. 관찰의 대상이 보여주는 변화가 너무 빨라서 관찰을 책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렵게 됐다. 그렇다고 책까지 덩달아 빨라지는 건 그다지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솔직히 ‘돈’의 관점에서 보면 강물에 잠시 담갔다 빼낸 만년필로 얼기설기 적어서 시시때때로 책을 찍어내는 게 그나마 합리적이긴 하다. 하지만 그건 강을 책에 담아내는 행동이 아니라, 책을 강에 던져버리는 행동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잠시라도 내 몸을 강에 던져 넣는 게 낫다. 빠져 죽으면 그게 내 한계인 거고, 다행히 죽지 않고 버틸 수 있다면 소중한 경험을 얻게 될 테다. 버티다가 다시 뭍에 오를 수 있을 때, 그 경험으로 책을 써보마 다짐한다. 그래도 빠져 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선 다행에 기대기보다 의지를 돋워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뭍에서의 기억을 잊지 않아야겠다고.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BIFF #1호 [화보] 개막식 리허설, 남포동 전야제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가 개막하기 하루 전, 9월16일의 영화제 풍경은 어땠을까. 영화의전당 인근에선 분주히 개막식을 준비하는 이들의 열성을 느낄 수 있었고, 남포동 비프광장 야외무대에선 전야제 행사가 한창이었다. 개막의 두근거림을 안고 펼쳐진 영화제 곳곳 현장의 모습을 전한다. 영화의전당 인근엔 예년과 같이 올해 상영작의 포스터 설치물이 자리 잡았고, 레드카펫 행사를 위한 구조물들도 설치됐다. 개막 전이지만 영화의전당 인근을 기웃거리는 관객들도 발견할 수 있었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의 전야제가 19시부터 남포동 비프광장에서 열렸다. 배우 이종혁과 박규리가 사회를 맡았고, 최진봉 부산 중구청장, 부산국제영화제 정한석 집행위원장, 김영덕 ACFM 위원장, 조원희 커뮤니티비프 운영위원장/예술감독 등 영화제 주요 인사와 시민들이 참여하여 자리를 채웠다. 점등식과 함께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가 본격적인 서막을 알렸다. 올해 ‘부산이 사랑하는 영화인’에는 <해운대> <국제시장>의 윤제균 감독, 배우 정우가 공동 선정됐다. 배우 정우는 첫 연출작 <짱구>로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됐으며, "<바람> 이후로 이번 <짱구>는 나의 이야기, 특히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많이 되살린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윤제균 감독은 "곧 <국제시장 2>를 촬영할 예정"이라며 부산에 대한 애정이 변함없음을 강조했다.

BIFF #1호 [스페셜] 놓쳐선 안 돼!, 프로그래머가 말하는 올해 영화제 경향과 추천작

한 해의 명작, 숨어있는 원석같은 영화들을 두루 발굴해온 6인의 프로그래머들이 짚어 주는 2025 부산국제영화제의 주요 작품과 경향, 주목할 만한 프로그램을 전한다. Q. 1. 올해 담당 권역 영화의 경향이나 프로그래밍의 주목할 점은 2. 프로그래머가 말하는 추천작 3~4편 3.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관객들에게 전하는 메시지 박가언 수석프로그래머 1. 4월 초 수석 프로그래머로 선임된 뒤, 미국과 일본까지 담당 권역으로 맡게 되면서 숨가쁘게 달렸다. 미국은 선댄스 라인업이 예년만 못하다는 평가가 있었지만, 그 안에서도 <공존이라니, 웃기시네> 와 <오마하>처럼 보석 같은 작품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마이클 만, 기예르모 델 토로, 션 베이커, 코고나다 등 수년간 선임자들이 공들여 관계를 맺어온 영화인들을 영화제 30회를 맞아 비로소 초청할 수 있었던 것도 큰 기쁨이었다. 일본은 신인 감독과 중견 감독들의 신작이 풍성하게 쏟아지면서, 어떤 작품을 선택할지, 특히 신설된 경쟁 부문에는 어느 작품을 포함할지 오래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올해 영화제 개최 시기가 9월로 앞당겨지면서 산세바스티안영화제와의 일정 조율이 어려워졌고 그로 인해 중남미 영화 선정에는 다소 아쉬움이 남지만, <마지막 푸른빛>과 <시크릿 에이전트>가 라인업을 든든히 채워주고 있다. 2.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는 개인적으로나 일적으로나 가장 힘든 시기를 지나던 때에 만난 작품이다. 짐 자무쉬 감독에게는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내게는 깊은 위로를 안겨준 영화다. <고양이를 놓아줘>는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 단편 초청 외에는 이렇다 할 경력이 없는 신인 시가야 다이스케의 장편 데뷔작이 경쟁 부문에 초청한 이유를 영화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부디, 새로운 재능의 탄생을 목격하는 두근거림을 느껴보시기 바란다. <물의 연대기>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낸, 대담한 연출이 인상적인 작품으로 배우로서의 명성을 ‘빌려’ 감독으로 데뷔하는 경우가 아님을 보여준다. <올 그린스>는 푸르른 청춘의 패기와 도발이 가득한 에너지를 선사한다. 촌스러운 녹색 추리닝을 입은 십대 소녀 세 명이 뿜어내는 싱그러움 속에서, 어쩌면 새로운 희망의 기운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3. 즐길거리가 넘치는 요즘 세상에, 치열한 티켓팅을 뚫고 다시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아주신 관객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또 영화제가 어떤 건지 잘 몰라도 ‘좋아하는 배우가 온다니 한번 가볼까’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찾아주신 분들까지, 모두 환영이다. 앞으로도 계속 찾고 싶은 영화제가 될 수 있도록 성대한 프로그램을 준비했으니, 잘 차린 밥상 마음껏 즐겨주시길 바란다. 이번 영화제에서 새롭게 발견한 감독과 배우들, 앞으로 극장에서 다시 만났을 때에도 처음 그 마음처럼 아낌없는 응원을 보내주시면 좋겠다. 여러분의 그 응원이 또다른 좋은 영화를 탄생시키고, 더 많은 관객들을 극장으로 이끄는 힘이될 것이다. 강소원 프로그래머 1. 올해 경쟁과 쇼케이스에 소개되는 작품들에는 사건보다는 인물 중심의 작품이 대거 포진되어 있다. 인문학자 김우창, 태백의 마지막 광부, 야생곰을 돌보는 90년대 생 여성들, 오사카 ‘이카이노’의 재일조선인 4세대, 필패의 지역에 출마한 민주당 후보들, 세월호 의인 김동수씨, 예술계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 코첼라로 진출한 한국 록밴드 등을 만날 수 있다. 올해는 아시아 다큐멘터리에서 국제공동제작은 이제는 일반화된 제작 경향이라는 점을 다시금 확인하는 한 해이면서, 대중친화적인 서사 중심의 작품과 픽션의 요소가 가미된 하이브리드 형식의 작품들이 두드러진 해이기도 하다. 숱한 출품작 중에서, 언제나 그렇지만, 설명적이고 교훈적인 저널리즘 다큐멘터리와는 결이 좀 다른, 스크린으로 구현 가능한 미학적 경험과 사유의 여백을 지닌 작품들을 선정하고자 했다. 2. <이슬이 온다>는 오랫동안 세계의 인민들을 포착해온 주로미, 김태일 감독이 한국으로 돌아와 강원 태백의 마지막 광부들을 찍었다. 사흘 일하고 그만 두려 했던 일이 30년을 넘겼고, “너무 가난했 다”는 그들의 심상한 토로가 관객의 뇌리에 아프게 각인된다. <오즈 야스지로의 일기>에선 거장의 일기와 메모, 편지, 그림, 사진, 홈 무비를 바탕으로 오즈의 걸작들이 스크린에 황홀하게 펼쳐진다. 거기에 오즈의 광팬으로 알려진 구로사와 기요시, 뤽 다르덴, 빔 벤더스의 목소리가 더해진다. <더 로즈: 컴 백 투 미>로 트라이베카영화제에서 화제가 되었던 영화관 내 미니 콘서트가 영화의전당 중극장에서 펼쳐질 수 있을지 기대된다. <프리 철수 리>의 이성민 감독이 홍대 버스킹에서 코첼라까지 그들의 성장 과정을 따라간다. 3. 3년 만에 비프 포럼이 재개된다. 지아장커의 기조발제와 함께 시작될 아시아의 국제공동제작과 OTT를 다룰 세션은 논쟁적이고 흥미진진한 담론들이 오고 갈 전망이다. 무료다. 놓치지 마시길. 박선영 프로그래머 1. 기존 뉴 커런츠와 지석 섹션이 각각 아시아의 신인감독들과 중견 감독들의 독립영화에 주목했다면, 경쟁부문은 보다 다양한 아시아영화들로 대상을 확대했다. 신인뿐 아니라 주요 중견 감독들의 영화를 선정했고 독립영화뿐만 아니라 다양한 규모와 장르의 영화들을 포괄했다. 반면, 기존 부산국제영화제가 중요한 가치로 생각해온 아시아 독립영화에 대한 발굴과 지원의 의미는 비전 섹션에 담겨있다고 보면 좋을 것 같다. 기존의 비전 - 한국 섹션이 그간 한국의 독립영화를 세계에 알리는 데 큰 공헌을 해온 것처럼, 비전 - 아시아를 통해 아시 아의 독립영화들에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올해는 특히 중앙아시아 여성감독들의 활약이 돋보이는 한 해라고 할수 있을 것 같다. 경쟁 부문에 선정된 <또 다른 탄생>(타지키스탄), 비전에 선정된 <쿠락>(키르기스스탄), <말리카>(카자흐스탄), 그리고 아시아 영화의 창에 선정된 <비커밍>(카자흐스탄), 와이드앵글 다큐 경쟁에 선정된 <패닉 버튼>(키르기스스탄) 등 중앙아시아에서 선정된 다섯 편의 영화가 모두 신진 여성감독들의 영화라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2. <모모의 모양>은 올해 가장 사랑스러운 영화 중 한 편이다. 히말라야 산맥 밑의 고향 마을에 돌아온 주인공의 이야기를 다룬, 일종의 성장 드라마이다. 사랑스러운 캐릭터들, 그리고 영화의 독특한 리듬이 마음을 끄는 영화이다. 키르기스스탄에서 여성 인권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영화들이 최근 꾸준히 제작되고 있다. <쿠락>은 2020년에 있었던 여성들의 시위를 찍은 아카이브 필름과 현실의 문제들을 교차해서 보여주며 묵직한 주제 의식을 용감하게 풀어낸다. 아시아의 퀴어영화는 동남아시아에서 주로 그 흐름을 선도해 왔다고 할 수 있는데, 올해는 중화권과 남아시아에서도 주목할 만한 여성퀴어 영화들이 선정되었다. <걸프렌드>는 마카오, 대만, 홍콩을 오가며 10대와 20대, 30대 여성 퀴어 주인공의 현실적인 고민과 갈등을 다룬다. 섬세하고 풋풋한 로맨스 영화이다. 3.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아시아 영화들은 영화제 상영 이후, 한국에서 개봉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영화제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동시대 아시아영화들의 문제의식과 미학적 성취를 극장에서 함께 경험해 보시기를 권한다. 색다른 재미, 그리고 ‘나만의 보물’을 발견하는 기쁨을 느끼실 수 있을 것이다. 박성호 프로그래머 1. 올해 동남아시아와 서아시아 영화들은 ‘현재와 기억의 공존’이라는 큰 흐름 속에서, 사회적 담론과 집단적 트라우마를 개인의 사적 시선으로 포착하고 있다. 출산율, 도시화, 재개발, 불평등, 전쟁 같은 동시대적 아픔을 때로는 낯익게, 때로는 새롭게 변주하며 재현하는 것이 특징적이다. 동남아시아 작품들에서는 사회 구조와 개인의 삶이 충돌하는 장면들이 도드라진다. 태국의 <휴먼 리소스>는 임신한 인사부 직원을 주인공으로, 현대 도시 노동 환경이 인간성을 어떻게 압박하는지를 날카롭게 드러낸다. 캄보디아의 <환생: 상실의 끝에서>는 철거를 앞둔 극장에서 귀신과 청년이 마주하는 설정을 통해 전쟁과 개발이 남긴 상흔을 초자연적 서사로 형상화한다. 반면 서아시아의 작품들은 기억과 망각, 그리고 정치적 현실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이라크의 <대통령의 케이크>는 권력과 일상의 긴장을 비전문배우들의 진실성 있는 연기로 표현하고, 아르메니아의 <아르토의 땅에서>는 남편과 사별한 여성이 역사적 비극을 기억하며 공동체의 상처를 끌어안는 과정을 그렸다. 2. <환생: 상실의 끝에서>은 철거를 앞둔 극장을 지키는 유령과 삶의 터전에서 쫓겨난 청년의 만남을 통해 전쟁의 기억과 개발의 폭력을 교차시킨다.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나드는 상상력이 근현대사에 대한 성찰과 맞물리며, 인도차이나반도의 영화가 지닌 독창적 미학을 증명한다. <대통령의 케이크>는 전쟁과 국제 제재의 억압 속에서도 평범한 소녀가 꿋꿋이 성장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불신과 폭력이 만연한 공동체 속에서 생존과 꿈을 향해 나아가는 주인공의 모습은 관객으로 하여금 강한 응원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여우왕>은 쌍둥이 형제의 성장 서사를 통해 보편적 감성과 지역적 정체성을 동시에 포착한 작품이다. 아름다운 해안 마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서정적인 풍광, 그리고 배우 디안 사스트로와르도요를 비롯한 출연진의 섬세한 연기가 영화의 감수성을 한층 고양시킨다. 3. 9월 18일을 ‘자파르 파나히의 날’로 기억해 주시면 어떨지! 황금종려상 감독이 같은 해 부산을 찾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오후 1 시 10분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 오후 3시 30분 <그저 사고였을 뿐>을 감상하시고, 이어 오후 6시 30분에 열리는 마스터클래스까지 함께하신다면, 올해 영화제에서 가장 빛나는 하루가 될 것이라 자부해본다. 서승희 프로그래머 1. 두 편의 특별전을 준비했다. 몸은 힘들었지만, 프로그래머 로서 자부심과 보람을 깊이 느낀 한 해였다. 올여름 치네치타 시사에 참석했을 때, 감독님을 로마에서 직접 뵙는 영광을 누렸다. 그리고 감독님께서 손가락을 걸며 부산에 꼭 오시겠다고 약속해 주셨다. 그때 찍은 사진은 평생 소중히 간직할 생각이다. 벨로키오 감독에 대해서는 시네필들에게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이번 특별기획 프로그램 ‘마르코 벨로키오, 주먹의 영화’를 준비하며 그의 작품들을 한 편씩 다시 보았는데, 관객의 입장에서 극장에서 다시 보고 싶을 만큼 훌륭한 영화들이라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또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줄리엣 비노쉬가 특별기획 프로그램 <움직이는 감정들>과 자신의 첫 연출작 <인-아이 인 모션>을 들고 부산을 찾는다. 이 영화를 보면, 세계 3대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그녀의 탁월한 연기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현대의 고전이 되어버린 <세 가지 색: 블루>와 <퐁네프의 연인들>의 GV에도 줄리엣 비노쉬가 직접 참여할 예정이다. 2. <아르코>는 디즈니의 <앤트맨> 시리즈 작업에 참여한 프랑스 그래픽노블 작가 우고 비엔베누가 선보이는 감각적이고 아름다운 SF 애니메이션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자연관과 주인공들을 떠올리게 하며 우리 모두를 위한 희망의 메시지가 가득 담겨 있다. 레오스 카락스의 세 번째 장편영화인 <퐁네프의 연인들>도 올해 상영된다. 레오스 카락스가 <나쁜 피>(1986)의 전설적인 커플을 다시 모아 화려한 현대 멜로드라마를 선보인 작품인데, 특히 점차 어둠 속으로 침잠하며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한 남자와 열정적인 사랑에 빠지는 역을 맡은 줄리엣 비노쉬의 열연은 단번에 관객을 사로잡는다. 그녀는 다정함, 폭력성, 절망, 순수함을 온몸으로 표현하며 다시 한번 전설적인 연기를 펼친다. 3. 마르코 벨로키오 감독이 ‘BIFF 시네마마스터 명예상’을 수상할 때 많은 관객분들이 기립박수로 함께 해주셨으면 좋겠다. 줄리엣 비노쉬의 <인-아이 인 모션>도 놓치지 마시길! 정미 프로그래머 1. 30회를 맞은 올해 내가 맡은 영화들은 123편이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30회에 어울리는 숫자다. 커뮤니티비프(이하 커비) 87편 (장편 42편, 단편 45편), 동네방네비프(이하 동방비) 36편(장편 15편, 단편 및 시리즈 편집본 21편). 장편은 예년과 비슷하고, 단편이 급증했 다. 커비는 한예종 영상원 30주년 특별전의 영향이고, 동방비는 단편 애니메이션이 많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올해 커비는 퀴어 영화가 유난히 많고, 동방비는 애니가 20편(장편 3편, 단편 17편)이나 된다. 선정의 기조라고 한다면, 커비는 ‘추억’, 동방비는 ‘바람길’을 키워드로 하여 살아온 과거와 살아갈 미래를 조명하려 했다. 좋아한다는 감각은 그 자체가 자극이고 동력이다. 이 에너지가 사는 재미, 창작 의욕의 연료가 되길 바란다. 관객의 ‘일상과 상상’에 흔적을 남기는 유쾌한 ‘태도와 시도’, 진지한 ‘대화와 진화’로 나아가는, 개성과 방향을 지닌 존재감 있는 영화제로 가까이 있겠다. 2. 커뮤니티비프 시그니처 프로그램이 3개 있다. 2018년 커뮤니티비프 원년에 시작한 ‘마스터톡’, ‘취생몽사’, 2019년에 시작한 ‘블라인드시네마’다. 술과 안주가 제공되는 취생몽사는 밤 11시 김민하 감독, 새벽 3시 이명세 감독의 영화가 심야 GV와 함께 상영되고, 새벽 1 시엔 올해 1월에 세상을 떠난 데이빗 린치 감독의 <광란의 사랑> 25주년 상영 전 모그 음악감독이 고인에게 헌정하는 추모 공연이 있다. 그의 꿈은 계속될 것이다. 3. 커뮤니티 비프에 방문해 영화를 색다르게 관람하고, 책도 읽고, 공연도 보고, 커피도 마시며 즐거운 기억을 많이 만들어주시기를. 30회 BIFF의 특별기획 프로그램과 특별상영도 놓치지 마시라.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여유 없이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올해 게스트의 문장을 인용해서 말해주고 싶다. 영화의 바다에서 ‘물방울로 만나는 기쁨’을 모두 함께 나누자고, 누군가 있고, 내가 있고, ‘영화가 여기에 있다’고.

씨네21 추천도서 - <가라앉는 프랜시스>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비채 펴냄 홋카이도의 소도시는 지명부터가 일본의 다른 지역과 다르다. 겨울이 유난히 긴 최북단의 홋카이도의 지명에는 일본 열도의 원주민인 아이누어의 울림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래서 한자로 쓴 지명조차 한자의 원래 뜻과는 관계없이 음이나 훈을 빌린 것이라 낯설게 읽는다. 호로카나이, 오토이넷푸, 도마코마이, 시무캇푸 같은 지명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홋카이도에서 생활한 적 있는 게이코는 그런 지명마저도 그리워한다. 급여가 몇분의 일 수준으로 깎이는데도 게이코가 홋카이도의 안치나이 마을에 계약직 우편배달부 일을 구하고 이사한 이유다. <가라앉는 프랜시스>는 고독하지만 외롭지는 않은 게이코의 나날을 묘사한다. 속도가 느린 이야기인데도 어쩐지 눈을 뗄 수가 없어 계속 읽게 된다. 홋카이도의 자연에 대한 묘사, 그 풍경을 통해 드러나는 게이코의 내면에 대한 호기심 때문일 것이다. <가라앉는 프랜시스>를 쓴 마쓰이에 마사시는 1958년생으로, 장편소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로 2012년 데뷔했다. <가라앉는 프랜시스>는 그 이듬해에 발표한 소설로 두 작품 공히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다루는 작품들이다. <가라앉는 프랜시스>는 사랑 이야기치고는 이상한(?) 제목인데 게이코가 마음을 주게 되는 가즈히코 역시 기묘한 매력의 소유자다. 배달을 갔다가 만난 가즈히코는 두 번째로 만난 날 “댁은 음악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을 던진다. 음악이 아닌 ‘음’을 제대로 들을 수 있는 자기 집 재생 장치 이야기를 하며 시간이 맞으면 놀러 오라는 초대. “이야기가 재미있는 남자, 좋은 웃음을 띠는 남자는 특히 조심하는 편이 좋잖아”라는 마음의 소리에도 불구하고 어떤 옷을 입고 갈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예상 가능한 마음의 깊어짐 그리고 자연재해처럼 예측할 수 없는 날씨와 인간사의 행방이다. 홋카이도를 배경으로 하는 (사랑)이야기들은 하나같이 예사롭지 않다. 사쿠라바 가즈키의 <내 남자>, 사쿠라기 시노의 <호텔 로열> 같은 이야기들 말이다. 특유의 정서는 홋카이도의 자연이 주는 압도하는 감각과 엮여, 사계절이 뚜렷한 다른 곳에서라면 말이 되지 않을 것 같은 무언가가 당연하다는 듯 자리 잡고 벌어진다. 그리고 그 모든 것 사이에는 인간의 힘으로 어찌해볼 수 없는 자연이 있다. 이 생이 무사하기를. 그렇다면 우리는 또 내일을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얼마나 충만할 수 있는지. 가즈히코는 안치나이 마을로 옮겨오고 나서, 에다루보다 더 넓고 더 깊은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는 일이 있었을까? 불빛 하나 없는 목장에서 벌레 음을 녹음하면서, 무서울 정도로 아름다운 별하늘을 바라볼 가즈히코의,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간 듯한 옆얼굴이 떠오른다./ 181쪽

오슨 웰스 회고전 마련한 게리 그레이버 인터뷰

1970년 여름. 베트남에서 살아 돌아와 영화인의 서툰 첫발을 내딛던 한 청년이 그의 영웅 오슨 웰스에게 무작정 전화를 걸었다. 영화인 게리 그레이버의 인생에서 가장 큰 빛과 생기로 충만했던 15년은 그렇게 동화처럼 시작됐다. 200편의 영화를 찍고 20여편을 연출한 지금도 게리 그레이버는 세계 최고의 오슨 웰스 마니아. 개인 아카이브에 수집한 웰스의 필름을 들고 러시아부터 아르헨티나까지 가지 않은 곳이 없고, “지금도 영화를 찍을 때면 매번 오슨은 내게 조언을 준다”고 말하는 그의 눈가 잔주름에는 첫사랑에게나 바칠 법한 맑은 그리움이 금세 차올랐다. 현재 그레이버는 웰스와 그가 함께 만든 미완성된 첫 영화 <바람의 저편>(1975)의 완성을 미국 케이블 채널의 도움을 받아 추진하고 있다. -오슨 웰스에 대한 상식 중 당신이 아는 진실과 가장 거리가 먼 것은. =사람들은 그가 스케줄과 예산을 마구 초과하는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슨은 100만달러 이상의 영화는 만든 적도 없고 돈에 대해 매우 신중했다. <시민 케인>의 예산 초과는 영화의 위대성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멋대로 예산과 일정을 넘겨도 별말을 듣지 않는 요즘 감독들을 생각해보라. 그를 통제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긴 제작자들의 견해는 옳았다. 촬영, 연기, 각본, 연출, 조명, 음악까지 오슨은 누구보다 많이 알았으니까. 할리우드는 배우로서의 그는 좋아했지만 감독으로서는 신뢰하지 않았다. -웰스는 농담과 마술을 좋아한 장난꾸러기였다는데. =언젠가 못된 제작자가 한명 있었는데, 웰스는 배우 하나를 고용해 의사로 변장시킨 다음 호텔로 가 그 프로듀서에게 전염병이 돌아 호텔이 봉쇄됐다고 으름장을 놓게 했다. 겁먹은 제작자는 6일간 방 안에서 꼼짝도 못했고 그동안 오슨은 자기 맘대로 했다. 나와 오슨은 그런 장난을 ‘저질 코미디’라고 부르며 즐겼다. 오슨은 광대, 스트리퍼 등 소극(burlesque 笑劇)의 연기자들을 <스트레인저> <악의 손길>에 기용해 좋은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 -크게 절망한 웰스의 모습은. =누군가 그의 삶과 영화에 대한 악담을 쓰면 오슨은 며칠이나 우울해 했다. <시민 케인>에서 그의 기여도를 의심한 폴린 케일의 책이 나왔을 때나 <뉴욕 타임스>가 <시민 케인> 이후 그가 좀더 거창하고 훌륭한 작업을 하지 못하고 재능을 낭비했다고 썼을 때, 오슨은 크게 실망했다. 그러나 낭비라니! 그는 언제나 뭔가를 쓰고 찍고 발명했다. 오슨의 영화는 모두 다른 식으로 걸작이었다. 그는 <시민 케인>을 반복하는 대신 작품마다 새로운 도전을 감행했고 지나간 영화에 대해 말하기 싫어했다. -<거짓과 진실>에서는 잠깐 단역으로 등장도 했던데. =<거짓과 진실>은 나와 오슨 둘이서 만들다시피했다. 나는 촬영, 음향, 운전, 연기, 커피타기까지 해야 했다. 오슨은 손닿는 모든 것을 활용했다. 한번은 독일 방송사가 그를 인터뷰했는데, 회견이 끝나고 조명을 철수하기 전 짧은 틈에 오슨은 나를 불러 카메라를 돌리게 했다. 결국 우리는 독일식 조명(German lighting)을 공짜로 써먹었다. (웃음) 대학에서 강연 부탁이 오면 오슨은 촬영 허가를 조건으로 수락하곤 했다. -웰스는 일중독자였나. 촬영장에서는 어떤 스타일의 리더였나. =일주일에 이레 일하는 워커홀릭이었고 덕분에 우리도 휴일없이 일했다. 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병드는 것이었다. 모든 병은 전염된다고 믿었던 오슨은 아픈 사람 곁에는 가려 하지 않았으니까. (웃음) 촬영도 철저히 자기 식으로 했다. 내 어깨에 손을 얹고 딱 붙어 지시를 하는 바람에 시가 불에 내 셔츠가 구멍이 나곤 했다. 앉아서 지시하길 즐겨서, 그가 화장실 간 사이 의자를 슬쩍 옮겨놓는 속임수를 쓰기도 했다. (웃음) 요구가 많았지만 자신에게도 깐깐했기에 불평할 수 없었고 모두 그를 사랑했다. 특히 배우들과 관계가 좋았다. -오늘날 미국 영화인에게 웰스는 어떤 존재인가. =모든 감독은 그의 영향권에 있다. <시민 케인>은 할리우드 시스템 내에서 창의적인 영화를 만드는 혁명의 시초였다. 그가 시작한 혁명은 계속됐고 지금은 디지털 혁명이 운위되고 있다. 오슨이 살아 있었다면 디지털영화에 손댔을 것 같냐고? 물론이다. 오슨은 이미 1984년에 <리어왕>을 시퀀스에 따라 각각 35mm와 비디오로 나눠 찍어 합성하는 시도를 했다. -당신도 영화 만들기에 평생을 바쳤다. 오슨 웰스 같은 ‘거인’ 곁에서 한때를 보냈다는 사실이 어떤 여운을 남겼나. =오슨은 내게 아버지와 같다. 스필버그, 론 하워드를 비롯해 많은 감독과 일했지만 오슨 같은 사람은 없었다. 오슨은 화내고 고함을 쳐도 좋았다. 재능이 있고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정확히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대부분 감독들은 그런 존경심을 일으키지 않는다. 요즘은 아내와 함께 전세계를 돌며 디지털카메라로 <물에 빠진 여자>(Drowning Woman)라는 영화를 찍고 있다. 실직한 뉴스캐스터가 점점 영락해 정신병원에 앉아 전세계를 누비던 자기 모습을 다시 보는 이야기다. 서울 풍경도 영화 속에 등장한다. 이곳 서울에서도 나는 여전히 오슨과 함께 일하고 있다. 하지만 정말 어려운 것은 삶이다. 그에 비하면 영화는 쉽다.

아드만 스튜디오와 그들의 애니메이션 [1]

<쥬라기공원>의 컴퓨터 테크놀로지가 부활시킨 완벽한 티라노사우루스가 관객을 향해 육중한 입을 쩍 벌렸을 때, 성급한 이들은 모델을 한 프레임씩 움직여 찍어내는 ‘미련한’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의 멸종을 말했다. 하지만 컴퓨터로 아예 중생대를 통째로 불러낸 <다이너소어>가 지축을 울리고 픽사의 <토이 스토리>가 컴퓨터 애니메이션의 지성까지 증명한 2000년에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전장에서 여봐란 듯이 날아오른 점토 애니메이션 <치킨 런>은 그런 호사가들의 속단을 민망하게 했다. 미국 개봉 열흘 만에 제작비 4천만달러를 깔끔히 회수하고 1억1천만달러의 박스오피스 수입을 올린 <치킨 런>은 한국 크리스마스 극장가에서도 만만치 않은 기세. 지난 12월16일 개봉해 나흘 만에 10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한 <치킨 런>의 배급사 CJ엔터테인먼트는, 아드만의 전작 <월레스와 그로밋> 흥행 스코어의 3배인 서울 관객 40만명 이상을 기대하고 있다. <치킨 런>의 힘센 촌닭들을 배출한 본가는 영국 항구 도시 브리스틀에 둥지를 튼 아드만 스튜디오. 예쁜 부둣가에 터를 잡은 스튜디오의 지붕 아래 300여명이 넘는 스탭과 3개의 오스카 트로피, 아드만이 창조한 모델들이 기거하고 있는 이곳은 이제 도쿄의 지브리나 마린 카운티의 픽사와 더불어 애니메이션의 한 문법을 일컫는 색인이 됐다. 디지털 기술이 영화사를 다시 쓸 것이라는 풍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로-테크’ 기법을 고집하는 그들의 행복한 노역을 지탱하는 믿음과 저력은 무엇일까. 슈퍼맨 아드만, 세상 밖으로 혹시 <월레스와 그로밋>과 <치킨 런>에서 부뚜막의 온기, 쿠키 굽는 향기를 느꼈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1960년대 말 영화에 반한 두 소년 데이비드 스프록스턴과 피터 로드가 방과후 홈비디오 카메라로 습작을 시작한 부엌 식탁에서 아드만 스튜디오의 역사는 시작됐다. 또래들이 철도에 앉아 트레인스포팅을 하거나 프라모델을 조립하는 동안, 로드와 스프록스턴은 칠판에 분필로 한 프레임씩 그림을 그리거나 오려낸 잡지 사진, 장난감 자동차 등을 사용해 고물고물한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접시 위의 소시지, 콩, 감자가 동물로 변해 걸어나가는 장면의 클레이메이션을 처음 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이아손과 아르고 호 선원들>을 비롯한 전설적인 애니메이터 레이 해리하우센의 작품들과 테리 길리엄이 연출한 <몬티 파이튼> 코미디, 영국 TV의 인형영화 시리즈가 두 소년을 가르쳤다. 많은 영국 영화인처럼 로드와 스프록스턴도 TV를 통해 세상을 노크했다. 방송국 프로듀서였던 스프록스턴의 아버지의 도움으로 의 청각장애아동용 프로그램 <비전 온> 시리즈의 패트릭 다울링 프로듀서에게 소개된 로드와 스프록스턴은 100피트의 필름을 선물을 받았다. 분필과 셀, 플래스티신(세공용 점토)을 소재로 한 다양한 실험 가운데 는 한심한 슈퍼맨 캐릭터 ‘아드만’이 등장한 셀 애니메이션 시퀀스를 15파운드에 사주었고, 이때 두 친구가 개설한 ‘아드만 애니메이션’이라는 이름의 은행 계좌가 오늘날 스튜디오의 씨앗이 됐다.1960년대 말과 70년대 초 브리스틀은 ‘프라하의 봄’ 이후 체코에서 망명해온 세계적인 애니메이터들이 모여든 곳이었다. 마치 멸망한 동로마제국의 학자들을 거둬들인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도시처럼 브리스틀은 애니메이터, 모델 메이커들의 공동체를 이루기 시작했고 로드와 스프록스턴은 1972년에 거기 합류했다. 부엌 작업실에서 TV광고의 명가까지 애니메이션을 사랑하는 두 청년의 작업장으로 출발한 초기부터 아드만 스튜디오는 작품의 타깃과 소재, 매체에 대해 금을 긋지 않았다. 아드만의 첫 스타 모프가 1976년 탄생해 에서 5분짜리 26부작 시리즈로 어린이들의 애정을 한몸에 모으고 아드만 브랜드를 널리 알렸지만, 로드와 스프록스턴은 애니메이션이 성인 관객을 매료할 수 있는 예술이라 믿었다. 실생활에서 녹음한 일상적인 대화에 클레이 애니메이션을 입힌 1978년작 <애니메이티드 컨버세이션>(Animated Conversations)은 의 OK 사인을 받지 못했으나 <채널4>로 넘어가 유사한 포맷의 <컨버세이션 피시스>(1982∼83)로 발전했으며 뒷날 <립 싱크> 시리즈(1989∼90)로 이어지며 세련된 위트와 리얼리즘을 과시했다. 또한 답답하고 지루하게 사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우리에 갇힌 동물의 입을 빌려 들려준 <립 싱크> 시리즈의 5번째 단편 닉 파크의 <동물원 인터뷰>(Creature Comforts)는 아드만에 첫 번째 오스카를 선사했다. 한편 아드만 스튜디오는 1984년 이래 모델 애니메이션 형식 TV광고의 명가로 자리를 굳혔다. 버터 사나이가 식탁 위를 활주하는 ‘루어팩’ 버터 광고나, <월레스와 그로밋> <치킨 런>에 드러난 복잡한 기계 취미가 엿보이는 ‘폴로’드롭스 광고, ‘레고’ 조각이 저절로 헤쳐모여 하는 장난감 광고는, 아드만 스튜디오에 돈은 물론 진행중인 단편 작업과 발맞춰 마음껏 형식을 실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1980년대 초 <컨버세이션 피시즈>의 성공 이후 젊지만 개성있는 작풍을 지닌 애니메이터들을 식구로 영입하면서 아드만 스튜디오는 감독, 프로듀서, 모델 메이커, 기술 스탭, 프리랜서의 공동체로 변모했다. 아드만에서 인형 애니메이션 <넥스트>를 발표하고 뒷날 <오페라복스>의 ‘리골레토’ 편, 아킬레스 신화를 동성애적 시각으로 해석한 조각 애니메이션으로 주목받은 배리 퍼브스, <렉스 더 런트>의 리처드 골레조프스키, <핍 앤 포그>의 피터 피케, <무대공포증>의 스티브 복스의 참여로 아드만은 풍성한 외연을 갖게 됐다. 그중에서도 1985년 아드만에 합류한 ‘스타’ 닉 파크는 <동물원 인터뷰> <전자바지 소동> <양털도둑>으로 윌리엄 와일러, 프랭크 카프라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오스카 3관왕의 자리에 오르면서 ‘아드만=닉 파크의 클레이메이션’이라는 어쩔 수 없는 오해를 퍼뜨리기도 했다. 디지털보다 섬세한 진흙 한줌 원숭이의 털 한올 한올에 일련번호를 매겨 컴퓨터로 바람에 날리는 각도를 입력한 애니메이션을 보고도 “뭐 그럭저럭 볼 만하네”라는 평이 심상하게 나오는 ‘인색한’ 시대에 가장 원초적이고 고풍스런 방식으로 빚어지는 아드만 모델 애니메이션이 발휘하는 위력은 무엇일까. 첫째로 아드만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은 진흙이라는 소재가 가진 비교할 수 없는 유연성과 기억력, 섬세한 표현력을 깊이 이해하고 발현시킴으로써 클레이 애니메이션의 잠재력을 극치로 끌어올린다. 특히 표정의 뉘앙스를 살리는 데에 발군인 점토의 장점을 살린 아드만 작품의 연출은 의인화와 미묘한 심리표현에서 돋보인다. <전자바지 소동>의 그로밋이 수상쩍은 하숙인 펭귄을 처음 만나는 장면을 보자. 아드만은 캐릭터의 눈을 튀어나오게 하고 혀를 잡아늘리는 대신 그저 이맛살을 살짝 눌러줌으로써 감정을 설명하고 복선을 깐다. 또한 점토뿐 아니라 나무, 폼 라텍스, 실리콘, 금속으로 수공된 아드만 애니메이션의 세트와 소품은 표면의 질감까지 촉지하게 한다. 그러나 그 실감은 최고의 3D 컴퓨터 애니메이션의 싱겁도록 매끈하고 감쪽같은 실감과는 좀 다르다. 아드만 클레이메이션의 수작들은, 다른 장르 애니메이션이 결코 따를 수 없는 물리적 실존감을 내면서도 판타지의 마술을 잃지 않는 것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아드만 스튜디오의 또다른 힘은 실사영화에 꿀리지 않는, 예민한 현실 관찰과 성숙한 접근이다. 영국인들의 일상 상황에서 녹음한 실제 대화 사운드트랙에 점토 인형의 입을 맞추는 식으로 연출된 시리즈 <애니메이티드 컨버세이션>과 <컨버세이션 피시즈>는 대표적인 예. 보호관찰관을 설득해 가족을 방문하려는 집행유예 죄수의 안간힘, 물건을 살 생각이 없는 노부부를 상대로 끝까지 웃는 낯으로 소득없는 대화를 나누다 돌아서는 어느 세일즈맨의 피로 등을 절묘하게 포착한 이 단편들은, 우리가 소통에 실패하는 다양한 광경을 신랄하게 스케치했다. 흥미로운 것은 서로 중첩되고 미처 맺어지지 못한 채 일상에서 스쳐가는 흔하디 흔한 말들이 인형의 입을 통해 나옴으로써 묘한 집중력과 진한 페이소스를 획득한다는 점이다. 디즈니나 워너의 브랜드화한 애니메이션과 달리 다양한 재능의 공존을 보장하는 작업 환경을 유지함으로써 오스카 수상작부터 광고, 비주류 감성의 개인적 소품에 이르는 다채로운 작품을 생산한다는 점도 스튜디오로서 아드만이 보유한 가능성이다. 스튜디오의 성장과 함께 연출보다 조정과 관리 역할을 맡게 된 창립자 스프록스턴은 이를 가리켜 “아주 자기중심적이었던 애니메이션 만들기의 즐거움이 여러 자식을 통해 삶을 사는 부모의 즐거움으로 바뀌었다”고 표현한다. 한편 할리우드 셀 애니메이션과 달리, 실사영화급 조명과 세트가 구비된 스튜디오가 필요하고 모델이 훼손되기 쉬워 인건비가 싼 지역에 하청을 줄 수 없다는 모델 애니메이션의 장르적 특성은 아드만 애니메이션의 고급한 품질과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유지하고 있다. 심슨 가족 즐겨, 파우스 파크 못 즐겨 그러나 총명한 미인이라고 꼭 사랑받는다는 법이 없듯이, 대중의 마음을 건드릴 수 없었다면 아드만 스튜디오는 애니메이션에 중독된 두 젊은이의 공방으로 머물렀을지도 모를 일이다. <채널4>로 방영돼 인기를 끈 아드만의 시리즈물과 최고의 히트작인 <월레스와 그로밋> 연작은 온화한 정서, 총기 넘치는 패러디와 은근한 농담을 결합한 유머로 관객의 사랑을 얻었다. “시나리오와 풍성한 아이디어가 빛나는 <심슨 가족>을 좋아한다. 저열함을 보여주는 애니메이션은 싫다. <사우스 파크>는 즐기고 싶었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비비스와 벗헤드는 민감한 캐릭터들이라 마음에 든다.… 팝 음악은 관심없지만 힙합의 포즈와 리듬에는 왠지 절대적인 매력을 느낀다”고 한 인터뷰에서 밝힌 피터 로드의 취향은 아드만의 체질을 잘 설명해 준다. 디즈니 재직 시절인 1990년경부터 아드만에 줄기차게 프로포즈를 했다는 드림웍스 공동대표 제프리 카첸버그가 냄새맡았던 상품성도 아마 미국 만화와 다른 아드만의 부드러운 정서와 세련된 위트였을 것이다. 남은 것은 기사작위 수여뿐? 아드만 최초의 장편 <치킨 런>은, 디즈니와 워너의 구애를 물리치고 5천만달러와 완벽한 창작의 자유를 약속한 드림웍스와 지난해 10월 체결한 다섯편 제작 계약의 첫 이행이다. 이 밖에 현재 대기중인 작품으로는 이솝 우화의 <토끼와 거북이>와 장편 <월레스와 그로밋>이 있다. <치킨 런>의 캐릭터와 줄거리가 디즈니 클래식과 유사하다는 점을 지적하며 우려하는 목소리에 대한 닉 파크와 피터 로드의 반응은 지극히 무덤덤하다. 처음 만드는 장편이라 전작보다 평이해졌을 뿐이라는 것. 아드만이 아쉬울 것 없이 굴러가는 상황에서, 드림웍스가 있는 그대로의 ‘아드만 애니메이션’말고 다른 걸 원했다면 애초에 왜 계약을 했겠냐고 그들은 반문한다. 또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영국 수탉이 미국인을 비난하는 대사나 영국 속어를 쓴 것에 대한 반대 입장의 걱정에 관해서도 “영국인들은 미국 영화에 나오는 문화적 레퍼런스를 100% 이해 못하는 데에 익숙하다. 그 반대 경우가 있으면 어떤가”라고 속편한 소리를 한다. 할리우드와의 파트너십을 해석하는 아드만 스튜디오의 느긋한 시선은 컴퓨터 테크놀로지에 대한 그것과 비슷하다. “변화라면, 작업을 하며 결과를 동시에 기록할 수 있어 덜 갑갑하다는 정도? 옛날에는 모델에 붙인 낚싯줄 그림자가 보일까 조마조마했는데 이번에는 컴퓨터로 지웠다. 컴퓨터가 없었으면 아마 훨씬 오래 걸렸을 테고 위궤양 환자가 더 많이 나왔겠지.” 요컨대 할리우드나 컴퓨터나 빠르고 편리하긴 하지만 본질은 달라질 게 없다는 말이다. 미국시장에서 자국 문화상품이 거두는 성공에 짐짓 무심한 척하면서도 내심 매우 기뻐하는 영국인들의 습성을 생각하면, 아드만의 애니메이션 장인들이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를 수여받았다는 뉴스도 머잖은 미래일지 모른다. 오래 전부터 그들만의 왕국을 유유자적 다스려온 이 과묵하고 진흙 나라의 조물주들에게 작위쯤이야 그리 대수로운 감투가 아닐 테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