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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해는 뜨고,해는 지고

Fiddler On The Roof 1971년, 감독 노먼 주이슨 출연 하이먼 투폴 EBS 3월3일(토) 밤 9시 1960년대의 할리우드는 이른바 ‘와이드스크린’ 대작영화가 명멸하는 시기였다. 가정교사 줄리 앤드루스의 <사운드 오브 뮤직>은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도라! 도라! 도라!> 등은 흥행에서 실패해 제작자에게 좀더 규모가 작고, 알뜰한 장르영화를 만들 것을 촉구했다. 당시 주디 갤런드, 앤디 윌리엄스 등의 텔레비젼 쇼 프로그램을 연출한 경력이 있는 노먼 주이슨 감독은 두편의 뮤지컬을 제안받았다. 하나는 <지붕 위의 바이올린>, 그리고 나머지 한편은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였다.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이 두편의 영화는 노먼 주이슨 감독의 전작들, 즉 <신시네티 키드>와 <밤의 열기 속으로>, 그리고 <화려한 패배자> 등 비주얼에 방점이 찍힌 장르물과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면이 있다. 노먼 주이슨이라는 감독의 엔터테이너로서의 유연성을 요약해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상업영화 감독으로서 장르 경계를 마음껏 넘나드는, 나무랄 데 없는 재능을 지니고 있으므로. 우크라이나의 유대인 마을에서 우유 가공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테비에는 신앙심 깊은 사람이다. 그는 수다스런 아내, 그리고 다섯명의 딸과 행복한 삶을 영위한다. 장녀가 아버지와 상의도 없이 양복점 직공을 사랑한다며 결혼하겠노라고 공언한다. 딸들은 하나씩 남자를 만나 아버지 곁을 떠나는데, 차르의 유대인 박해가 엄혹해지자 테비에 가족은 정든 마을을 떠나야 하는 처지가 된다. <지붕 위의 바이올린>은 스타 시스템에 의존하지 않은, 희귀한 할리우드 뮤지컬이라 할 만하다.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종과 종교를 초월한 모든 인간의 평등”을 영화의 주제로 삼곤 했던 노먼 주이슨 감독은 이 영화에서 우크라이나 지방 유대인들의 생활상에 관심을 둔다. 그들의 고유한 태도와 종교의식, 그리고 가족사를 다소 지루할 만큼 꼼꼼하게 스케치하고 있는 것이다. 특정 민족에 대한 관용과 동정의 철학으로 무장한 이 영화에 대해 톰 밀른 같은 평론가는 “감상주의와 촌뜨기 정신이 깃든” 작품이라고 힐난한 바 있다. 노먼 주이슨 감독의 인종 문제에 관한 천착은 덴젤 워싱턴 주연의 영화 <허리케인 카터>에 이르기까지 이어졌으니 그 일관성 하나는 존경스럽다. <지붕 위의 바이올린>은 원래 브로드웨이 뮤지컬이 원작이다. 아이작 스턴 등의 음악가가 영화에 출연해 바이올린 연주를 들려주기도 한다. 원래 상영시간이 3시간여에 육박하는 <지붕 위의 바이올린>은 서사 뮤지컬의 대표작이라 할 만큼 상영시간, 그리고 규모면에서 물량공세를 펼치고 있는 영화다. 당시 관객에게 브로드웨이로 가지 않고도 스크린을 통해 뮤지컬을 감상할 기회를 제공한 셈이다. <지붕 위의 바이올린>의 백미라면 <선라이즈 선셋>이라는 영화주제곡이 깔리는 장면이 아닌가 싶다. 인간사를 해가 뜨고 해가 지는 과정에 비유한 이 노래말은 단순명료한데도 불구하고 어딘가 종교적인 엄숙주의를 담고 있는 듯해 불편함을 느낄 사람도 없지 않을 듯하다. 처량한 멜로디의 노래를 듣기 위해선 영화가 시작한 뒤 또 한참을 기다려야만 하는 부담도 없지 않다. 김의찬 / 영화평론가 nuage01@hitel.net

혼란한 세상, 영화로 살다

EBS 한국영화걸작선이란 프로그램에서 홍성기 감독의 <춘향전>을 방영하기 직전이었다. 홍 감독이 타계했다는 연락이 왔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김홍준 감독에게 전화를 했다. 지병으로 오랫동안 자리에 누워 있는 홍 감독의 빠른 쾌유를 빈다는 말로 김 감독은 해설을 마무리해놓은 상태였다. 해설은 “홍 감독이 타계했다, 명복을 빈다”로 바뀌었다. 텔레비전을 통해서나마 관객과 참 절묘하게 마지막 인사를 한 셈이지. 영화인장이라지만 쓸쓸했던 영결식을 끝내고 아직도 찬 땅에 그를 묻고 돌아와서, 공연히 섭섭한 마음이 들라치면 나는 그렇게 나를 달랜다. 6·25전쟁이 끝난 뒤, 한국영화계에 불어닥친 열풍은 다름아닌 멜로드라마였다. 전쟁으로 모든 것을 빼앗겨, 곳곳이 무너져 앉은 땅덩어리처럼 팍팍한 가슴에 멜로영화가 선사하는 한 줄기 눈물과 웃음은 삶을 지탱할 수 있도록 하는 무엇이었으니까. 그런 멜로영화의 선봉은 다름아닌 홍성기 감독과 신상옥 감독이었다. 그중에서도 홍성기 감독과는 <애인>(1955)으로 만나 동고동락하는 사이가 되었는데, 잠시 그와 만나기 전으로 거슬러올라 영화판에 발을 들여놓은 계기부터 설명하도록 하자. 전쟁이 발발하던 당시 20대 초입이던 나는 부산 견지동에서 ‘백양’이라는 이름의 사진관을 하고 있었다. 내가 처음 카메라를 만져본 것은 10살 때였다. 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현해탄을 건너 일본 야마구치현의 오노다라는 작은 도시에서 제재소를 운영하기에 이르렀고, 살림이 그런대로 윤택해서 그때로선 흔치 않던 카메라를 손에 넣었을 것이다. 해방이 되자 가족은 귀국선을 타고 돌아왔고, 아버지의 고향인 경상남도 양산 가까운 도시 부산에 자리를 잡았다. 취미가 생업이 되어서, 나는 아마추어 사진작가에서 사진관 주인이 되었다. 전쟁 때문에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대거 몰렸는데, 서울에서 영화 만들던 작자들도 거의 부산에서 모이게 되었다. 영화판을 기웃거린 적 있는 조수 소송권을 통해 만난 이들과 나는 모두 젊은 나이여서 금세 술친구가 되었다. 영화도 결국은 사진 동생쯤 되는 일이겠거니 해서 같은 일 하는 사람입네 하는 동지감도 생겼다. 그러다 53년에 전쟁이 끝나고 각자 저 살던 데로 다들 떠나버리니까 영 적적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서울의 유명한 허바허바 사진관에서 일해보자는 제의가 왔을 때 옳거니, 하고 서울로 향한 것도 그래서였다. 우여곡절 끝에 정착한 곳은 부산 시절 조수 소송권이 있던 종로4가의 자그마한 사진관이었지만. 부산에서 알고 지내던 영화인들도 하나둘씩 찾아와 주었고, 그들과 어울려 촬영현장을 구경하러 다니기도 했다. 54년 <열애> 촬영현장에 갔다가 스쳐지나듯 홍성기 감독과 인사를 했다. 그때만 해도 그와 같이 영화를 찍으리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그러다 국회 사진부를 거쳐 일숫돈을 얻어 종로2가에 사진관을 하나 냈다. 처음에는 어찌나 손님이 없던지 손님 끌어모으려고 별짓을 다 했지만, 차츰 실력이 알려지면서 살림살이도 피기 시작했다. 어느날 소문을 듣고 찾아온 이승모 <중앙일보> 종군기자가 홍성기 감독이 <애인>을 찍는데 자기가 촬영부를 맡았으니 조수로 일해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사실 카메라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던데다 ‘몽타주 이론’이나 ‘사운드 토키’에 관한 영화이론을 독학하고 있었기에 선뜻 그러마고 했다. 이승모를 따라 홍성기 감독에게 정식으로 인사를 하기 위해 명동성당 밑에 있는 신신영화사로 갔다. 아직 잔설이 녹지 않은 쌀쌀한 봄 날씨에 코끝에 저렸다. 서춘광이 운영하던 신신영화사는 보통 가정집의 모습이었다. 홍성기 감독과는 면식이 있던 터라 별로 어색한 기운은 없었다. 감독은 내가 찍은 사진을 몇장 보더니 조명이 특별하다고 했다. 그 말로 합격 인사를 대신하고 당장 촬영현장에 투입됐다. 조수로서 처음 맡은 일은 카메라 정비와 필름 교체, 촬영 전후 필름 테스트 등이었다. 당시에는 뉴스용 카메라인 미제 아미모 카메라를 주로 썼는데 기계가 금세 노화되어 장비 수리에 한계가 따랐다. 금세 망가지는 기계 앞에 노상 깨지는 건 촬영부 조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개인적인 사정으로 이승모가 영화판을 떠나게 되어 대신 퍼스트의 자리를 맡게 되었다. 그해에 찍은 <애인>은 <열애>의 실패를 만회라도 하려는 듯 흥행에서 대성공을 거뒀고, 홍성기 감독은 그때부터 흥행감독의 반열에 들어서게 되었다. 19살에 만주 국립촬영소에서 우치다 도모 감독 밑에서 연출을 배운 뒤 최인규 감독의 문하생을 거쳐 <여성일기>로 데뷔한 이후 그에게 처음 주어진 행운이었다. 심우섭| 영화감독·1927년생·<남자식모>·<운수대통> 등 연출

빔 벤더스를 맞이하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1976)의 후반부에서 로베르트는 기차역 근처에서 한 어린 소년을 만난다. 그 소년은 자기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이건 노트에 적고 있다. 철로, 하늘, 구름, 가방을 든 남자, 검은 눈, 주먹, 돌 던지기…. 영화 속에서는 아주 잠깐 등장하는 이 장면은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 꽤 중요한 측면을 보여준다. 그 소년의 사소한 행위란 바로 빔 벤더스 감독 자신이 영화를 구축하는 방식, 영화에 대한 견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즉 벤더스의 영화란 마치 어린아이가 무언가 난생 처음 보는 어떤 것을 접해서 기뻐하고 그것을 자기 기억 속에, 그리고 마음속에 간직하려고 애쓰는 행위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린아이의 그런 ‘순수한’ 시선을 가지려고 하는 것. 벤더스가 정의한 영화의 속성이란 일차적으로 바로 그런 것이었다. 영화는 움직인다, 고로 존재한다 벤더스는 기본적으로 영화란 (물질) 세계를 ‘발견’하고 또 ‘탐구’하게 할 능력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영화들 속에서 그것들이 만들어진 시대, 도시들, 풍경들, 그리고 사람들을 다루기를 원한다. 그런 사고가 벤더스 영화의 출발점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벤더스는 지금 우리에게 선보이고 있는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 그 이전에, 오즈 야스지로의 자취를 더듬으려 했던 <도쿄가>(1985) 이전에, 그리고 니콜라스 레이의 마지막을 기록한 <물 위의 번개>(1980) 이전에, 이미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왔던 시네아스트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도시의 앨리스>(1974)나 <시간의 흐름 속에서> 같은 경우는 스토리상의 시간 순서대로 촬영함으로써 발견이 드러난 바로 그 시간에 관한 다큐멘터리들이었던 것이다. 그것들은 사물을 ‘전시’하려고 하기보다는, 벤더스의 영화 제목을 빌리자면, ‘사물의 상태’를 기록한 영화들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뉴 저먼 시네마의 ‘실존주의자’ 또는 ‘새로운 감성’(Neue Sensibilitat)의 영화감독 같은 벤더스에 대한 호칭들은 모두 ‘다큐멘터리스트’로 집약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의 거의 모든 영화들이 로드 무비의 형식을 띠는 것도 분명 영화에 대한 이런 식의 사고와 관련있을 것이다. 정체해 있기보다는 유동할 때 이 세계와 접할 기회가 훨씬 많지 않겠는가 말이다. 미국, 무의식의 주인 혹은 캔버스 벤더스가 영화에 대해 이런 생각을 갖게 해준 매개는 주지하다시피 미국영화들이었다. 그가 50년대를 다룬 최고의 다큐멘터리들이라고 간주하는 영화들, 즉 하워드 혹스와 니콜라스 레이의 영화들이 그로 하여금 픽션영화는 종종 한 시대의 가장 뛰어난 다큐멘터리이기도 하다는 점을 몸소 가르쳐주었던 것이다. 확실히 벤더스는 미국영화와 미국문화로부터 영화적 자양분을 섭취한 감독이다. 파리의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영화를 ‘발견’했고 본격적으로 영화를 만들기 전에 평론가로 먼저 활동했다는 점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그를 앞선 누벨바그 세대와 동류항에 넣게 만들어주는 것은 미국영화에 깊이 매혹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런데 미국문화와 미국적 풍경을 비롯해 미국적인 것에 대한 ‘망집’에서 고다르나 트뤼포의 그것은 벤더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빠져나오기 힘들 정도의 이 집착은 80년대 이후 벤더스의 퇴행에 대한 한 가지 요인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벤더스는 구명대(life-savers)로서 미국영화와 미국의 록 음악이 없었더라면 미치지 않고 유년기를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라고까지 말한 바 있다. 물론 이런 탐닉은 단지 개인적 취향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당시 독일인들은 대개가 어느 정도는 미국문화에 동화돼 있었는데, 그건 그들이 파시즘의 수치스런 기억을 망각하려는 데서 생긴 구멍을 메우려는 노력과 관계가 있었다고 한다. 벤더스와 미국문화의 상관관계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대사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에 나오는 “양키들이 우리의 잠재의식을 식민화했어”이다. 하지만 이걸 아메리카가 깊숙이 침투한 미국화한 독일인의 심성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하는 언설로만 보면 좀 곤란하다. 지금껏 벤더스는 미국적인 것에 대해 어느 정도 비판을 가한 적은 있어도 완전히 등을 돌린 적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미국인 친구>(1977) 같은 경우는 유럽에 남아 있는 미국인이 과연 어떤 악행을 일삼고 있는가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힐 수 있는 영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니콜라스 레이와 새뮤얼 퓰러에게 경의를 표하는 미국식 스릴러영화이기도 한 것이다. 벤더스와 미국문화 사이의 관계란 애증이 교차하는 관계, 또는 미국적인 것에 대한 애정이 심지어 그것에 대한 증오를 포용하기까지 하는 관계라고 보는 게 나을 것이다. 80년대 초반 프랜시스 코폴라의 초청으로 할리우드까지 진출했던 벤더스가 결국엔 끔찍한 ‘악몽’만을 경험하고 독일로 돌아온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 벤더스가 이후에 미국문화를 처절하게 혐오했느냐고 하면 전혀 그래 보이지는 않는다. <파리 텍사스>(1984)를 예로 들자면 그것은 현대인의 고독과 상실감에 대한 영화이기도 했지만 또한 미국적인 것, 그것의 ‘황량한 아름다움’을 그린 우수 어린 블루스이기도 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 영화는 존 포드의 <수색자>에 바치는 벤더스의 오마주이기도 하지 않았던가(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와서는 잃어버린 가족을 찾아주는 ‘임무’를 수행하고 그리고는 다시 끝이 보이지 않는 황야로 떠나는 트래비스라는 이 영화의 주인공은 <수색자>의 이산과 공명한다). 비교적 근작에 속하는 <폭력의 종말>(1997)에서는 아예 LA라는 도시 자체의 초상을 만들어냈던 벤더스는 최근 이렇게 말했다. “나는 LA를 좋아한다. 그곳은 너무나 텅 빈 캔버스여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 위에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땅이 돋보이는, 음악이 돋보이는 벤더스에 대한 비평문들의 상당수는 그에게 영향을 준 미국영화들 가운데 하나로 <이지 라이더>(1969)를 꼽는다. 벤더스 자신도 그 영화에 어느 정도 매혹되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영화평론을 쓰곤 하던 젊은 시절에 그는 그 영화에 대한 리뷰에서 이렇게 적었다. “그것은 아름답기 때문에 정치적인 영화이다. 두대의 커다란 모터사이클이 지나가는 땅이 아름답고, 우리가 듣는 음악이 아름다우며, 데니스 호퍼가 연기만 할 뿐이 아니라 연출까지 맡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벤더스가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해서 어떤 평자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벤더스의 영화경력이 <이지 라이더>의 리메이크라고 본다면 너무 단순한 도식에 빠지는 것일 터이다. 단지 이 글에서 우리는 벤더스가 옹호하는 영화, 또 그가 지향하는 영화가 어떤 타입의 것임은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것은 땅(풍경)이 아름다운(돋보이는) 영화, 그리고 음악이 아름다운 영화다. 여기에서 더 확대해서 말하자면, 벤더스의 로드 무비란 무엇보다도 우리가 보고 듣는 것, 그것의 ‘묘사’(description)에 치중하는 영화가 될 것이었다. ‘묘사’라는 이 단어에서 대충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벤더스의 많은 영화들은 대체로 인물들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둘러싼 것(ambience), 즉 풍경이나 음악에 치중하는 영화들이다. <도시의 여름>(1971)에서처럼 친구를 찾으려고 하든, 또는 <도시의 앨리스>에서처럼 어느 순간 자기 손에 맡겨진 어린 소녀의 할머니를 찾아주려고 하든, 그 인물들의 추구 행위란 건 그들을 둘러싼 물리적 공간‘들’을 탐사하려는 구실에 불과할 뿐이다. 벤더스의 영화들이 공간적 자리바꿈을 해나갈수록 그 안의 인물들은 ‘빗나간 움직임’으로 발을 디뎌간다. 그래서 영화가 끝날 때쯤에도 그들은 어떤 의미 있는 곳에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요컨대, 그들은 외적으로는 움직였지만 내적으로는 여전히 정체 상태인 것이다. 벤더스의 영화들이 자아내는 정서적인 공허감은 상당 부분 여기에서 연원한다. 결국 벤더스의 로드 무비들에서 행위자(actor)와 그를 둘러싼 환경은 서로 자리를 바꾼다. 그 영화들은 인물들이 지나치는 풍경, 또는 도시에 관한 자발적인 다큐멘터리이다. 비록 오래 전이긴 하지만, 파리에서 미술 공부를 할 때 벤더스는 이렇게 생각하기까지 했었다고 한다. “나는 항상 풍경에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내 인생에서 난 앞에 서 있는 누군가를 그려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벤더스의 세계에선 음악도 배경 요소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그 자체로 스토리가 되기도, 또 캐릭터가 되기도 한다. 단편영화를 만들던 당시에 이미 벤더스는 그런 가능성을 실연해 보였다. 단편 <알라바마>(1969)에서 그는 밥 딜런이 부른 와 지미 헨드릭스가 부른 같은 곡의 차이를 영화적인 주요 요소로 이용했던 것이다. 다시, 사람들 사이에 서서 이처럼 ‘서술’의 방법보다는 주로 묘사의 방법을 통해 구축되는 벤더스의 영화들은 자연히 ‘이미지’ 중심적인 영화들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감각주의적인 ‘이미지 메이커’(image-maker) 벤더스는 오래 전부터 그 (순수) 이미지라는 것(과 영화라는 것)의 힘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왔던 영화감독이었다. 그리고 이미지에 대한 그의 사유란 <시간의 흐름 속에서>에서 ‘시네마의 죽음’을 목도했을 때처럼 다소 부정적인 색채가 짙었다. <도시의 앨리스>의 저널리스트 필립은 그 자리에서 현실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폴라로이드의 위력 앞에서 어찌할 줄을 몰라한다. 그것 때문에 그는 세상과의 접촉을 상실하고 글을 쓰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런데 알고보니 현실을 복제한다는 그 이미지는 리얼리티 자체와도 별 연결점이 없는 것만 같다. 앨리스의 할머니를 찾는 데 할머니 집의 사진은 도통 도움이 되질 못하는 것이다. 이미지를 주조하는 테크놀로지가 여기서 한참을 더 발달한대도 사정이 그리 희망적이지는 않다. <이 세상 끝까지>(1991)에 등장하는 20세기 말의 인간들은 비주얼 텔레커뮤니케이션이 상용화한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이젠 인간의 꿈과 기억마저 이미지로 재현하는 경이적인 테크놀로지를 개발해내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 하이테크 미디어는 사람들을 이미지에의 중독증에 빠뜨린다. 해결책은 스토리텔링이라는 전통적인 기술을 되돌려놓는 것이다. 비교적 최근에서야 벤더스는 이미지와 영화의 문제를 낙관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리스본 스토리>(1994)에서 영화감독인 친구의 부탁으로 리스본에 온 녹음 엔지니어 필립은 그 친구가 종적을 감춘 것을 발견한다. 친구는 비디오 테크놀로지가 범람하는 이 시대에 도대체 영화가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인지 회의가 들었던 것이다. 결말부에서 필립은 친구에게 말한다.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 영화를 찍으라고, 그러면 영화는 아직도 그것이 100년 전에 했던 일을 할 수 있다고. 필립의 그 전언은 시네마가 이리저리 착종된 이 복잡한 현실에서 사실 지나치게 나이브한 결론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보면 어쩌면 그건 벤더스 자신을 위한 예언 내지는 자기 암시는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마저 들게 하는 면이 있다. 90년대 내내 부진을 면치 못했던 벤더스가 자기 자신은 철저히 지운 영화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으로 오랜만에 감동을 만들어냈으니까 말이다. 사람들을 찾아 진실하게 찍었고 그것만으로도 소박한 감동을 전달할 수 있었다. 필립의 말이 그르지 않았다 홍성남/ 영화평론가 antihong@hitel.net

“파리로, 뉴욕으로, 나는 영원한 유랑자”

여행을 많이 다닌 친구와의 대화는 즐겁다. 그가 돌아온 길이 길고 다채로울수록 더욱. 이 땅의 영화 마니아 1세대들이 ‘색다른’ 영화에 목말랐던 시절, <도시의 앨리스> <베를린 천사의 시>처럼 세련된 그림에 존재의 망설임을 담은 영화로 화답해왔던 벤더스는 쉰여섯이 된 신세기 벽두에 카메라 뒤에 철저히 자신을 감춘 음악 다큐멘터리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으로 서울의 극장가로 돌아왔다. 정식 개봉된 영화는 몇편 없지만 왠지 언제나 곁에 있었던 것만 같은 기묘한 감독 빔 벤더스. 그에게 이 메일을 띄우면서 우리는 마치 펜팔에게 보내는 편지를 우체통에 넣는 듯한 감정을 느꼈다. 한국 관객과의 친밀한 대화를 보물로 간직하고 있다는 ‘독일인 친구’에게서 날아온 답장을 공개한다. 우리는 언제나 당신에게 이 질문을 하고 싶었습니다. 지구상의 도시 가운데 당신이 진정 살고 싶은 곳은 어디죠. 솔직히 말하면, 오랫동안 가지 못한 모든 도시죠. 나는 베를린, 파리,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뉴욕, 시드니, 도쿄, 리스본에서 살아봤는데, 그 도시들 중 한곳이라도 들른 지 오래되면, 왠지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냥 뉴욕과 센트럴파크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향수병에 걸리고, 파리 지하철의 냄새를 떠올리자마자 1년 동안 파리에 가보지 못했다는 생각에 가슴이 찢어집니다. 그러니까 이제 아시겠죠? 나는 계속 유랑해야만 합니다. 가끔은 내가 여러 장소에서 동시에 살고 있는 것처럼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건 아마 나의 소망일 따름이겠지요? 사람들은 지금이 인터넷 시대라고들 말합니다. 의사소통의 방식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하지만 당신은 영화에 대해 어떤 고전적인 믿음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전히 영화가 커뮤니케이션의 한 통로일 수 있다고 믿나요? 만약 그렇다면 그 신뢰의 근거는 무엇인가요? 그런데 인터넷도 직접 자주 돌아다니나요? 어쩐지 당신은 타자기를 고집하고 있을 것만 같거든요. 난 컴퓨터 중독자예요. 헤아려보면 타자기를 쓰지 않은 지 정확히 12년이 되었네요. 나는 인터넷을 사랑하지만, 점점 더 독서할 시간을 빼앗아가고 있는 점에 대해서는 속이 상합니다. 그리고 당신 말이 맞습니다. 나는 아직도 영화, 그리고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경험이 신세기가 열리는 이 시점에서도 강력하고 심지어는 성장중인 문화라고 깊이 믿으니까요. 20세기는 정녕 움직이는 이미지의 세기였습니다. 그리고 새 시대의 문턱에서, 시청각 문화는 전반적으로 가장 거대하고 영향력 있는 전 지구적 산업이 되었습니다. 텔레비전에서 인터넷에 이르기까지 넓게 펼쳐져 있는 이 산업 내에서 영화의 역할은 여전히 중대합니다. 영화는 우리의 취향, 우리의 습관 그리고 우리의 상상력을 다른 어떤 예술이나 엔터테인먼트보다 강력하게 형성하고 있습니다. 컴퓨터와 스크린 앞에서 우리가 홀로 보내는 수많은 시간이 말해주듯, 오늘날 문화의 일부는 인간을 더 고독하고 고립되게 만들고 있지만, 영화를 보는 체험은 여전히 매우 사교적이며 타인과의 교섭을 지향하는 활동이지요. 나는 영화의 황금기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영화가 지닌 시적인 이미지는 많은 이를 매혹했지요. 하지만 <세상 끝까지>에서는 마치 영화 스스로 이미지에 중독되는 일을 삼가는 듯한 인상을 풍겼습니다. 어쩌면 당신은 이미지로부터 좀 더 거리를 두고 싶었던 걸까요?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당신의 견해가 혹시 달라진 것은 아닐까 궁금하기도 했는데요. 아니, 전혀 아닙니다. 영화는 세계를 향해 당신의 눈을 열어주고 우리를 타인의 목마름과 꿈과 접촉할 수 있도록, 혹은 다른 많은 사람들의 필요와 소망, 공포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지요. <세상 끝까지>가 일종의 이미지에 대한 묵시록을 보여준 것은 사실이지만, 오늘날 문학이나 연극이나 다른 분야보다 영화에서 훨씬 화려하게 꽃피고 있는 스토리텔링 예술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지는 않았습니다. 영화는 근본적으로 인류가 태곳적부터 품고 있는 이야기에 대한 욕구이며 신화의 소통입니다. 스토리는 의미를 창조하고, 스토리는 무질서에 논리를 부여합니다. 많은 사람에게 오늘날 우리의 세계는 더이상 이해가 가능한 곳이 아닙니다. 그들은 세계의 충격을 더이상 소화하지 못합니다. 영화는 그런 사람들을 종교보다 철학보다- 정치보다는 물론- 한층 훌륭하게 돕습니다.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은 예정된 결론을 향해 한발한발 나아가는 종류의 다큐멘터리가 아닙니다. 물론 그것이 이 영화의 미덕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영화를 만드는 감독의 입장에서 당신도 알지 못한 종착점을 향해 나아가는 영화를 만드는 일이 조금 두려운 경험은 아니었을까요? 쿠바를 향해 카메라를 들고 떠나면서 당신의 마음속에는 어떤 생각이 있었나요? 모든 뮤지션들을 규합해 콘서트를 개최하겠다는 계획이 처음부터 서 있었나요. 애초의 아이디어는 음악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야겠다는 데에서 출발했습니다. 실제 삶보다 더 거대한 믿기 힘든 여정에 올랐다는 사실은 뒤늦게야 깨달았지요. 늙은 쿠바 사나이들이 망각으로부터 깨어나는 여행, 아바나의 거리에서 빈털터리로 영락해 구두를 닦다가 비틀스 같은 팝 스타의 지위로 올라서는 여행 말입니다. 막바지에 와서야 나는 이 영화가 보통의 다큐멘터리들보다 훨씬 더 사람들의 심성을 건드렸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기적을, 아니 그 말이 너무 극단적인 표현이라면 적어도 하나의 동화가 실현되는 장면을 보았다는 것도요. 그토록 오랜 시간에 걸쳐 쿠바 음악의 생명력을 지탱해온 사람들을 만났을 때, 개인적인 소감은 어땠나요. 그들과 나눈 특별한 추억이 있다면 듣고 싶고요. 그 자신을 제외하면 아무도 그들의 음악을 듣길 원치 않는 상황에서도, 자기와 자기 음악에 대해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그들의 정체성 의식이 가장 특별했습니다. 게다가 이들은 결코 불평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불평할 만한 오만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자기 음악에 흠뻑 빠진 나머지 그 음악이 좋은 음악이란 것을, 성공을 확인받을 필요조차 없었던 거죠. 세상에서 제일가는 성공을 거둔 지금도 그들은 같은 연주를 합니다. 조금도 덜하지 않은 열정과 에너지로 말입니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순간은, 콤파이(기타리스트)가 내게 “올해가 내 평생 최고의 해예요!”라고 말했을 때입니다. 세상에, 그는 90년을 살았다고요. 또, 그 말은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진심이 담겨 있는 말이었어요. 우리의 모든 삶과 작업과 생에 대한 개념 자체를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 해준 말이었지요.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 말미의 콘서트 시퀀스에 감동받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 장면의 감흥은 말로 설명하려들면 무기력해집니다. 당신 스스로는 콘서트를 촬영하면서 어떤 심리 상태에 있었나요.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특권이라 할 만한 사상 최고로 위대한 콘서트가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데 나는 오로지 그것을 기록하기만 해야 했으니까요. 카네기홀은 조합 규율이 엄해서, 나는 단지 3대의 카메라만 들어가도록 허락받았습니다. 2대는 객석에 설치할 고정카메라였고, 1대는 스테디캠이었지만 맨끝 구역 뒤쪽에서만 촬영할 수 있었지요. 모니터도 금지돼 있어서 나머지 카메라맨들이 뭘 찍는지도 볼 수 없었어요. 무선 교신만 됐는데 그것도 도중에 자주 끊겼지요. 요컨대 콘서트는 황홀하게 진행되고 있는데 나로서는 그걸 우리가 제대로 녹화하고 있는지도 몰랐던 거죠. 완전히 악몽이었어요. 나중에 밤이 깊어서야 우리가 몇 가지 핵심을, 그것도 아름답게 포착했다는 걸 알았죠.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은 새로운 스타일의 영화입니다. 다큐멘터리이면서도 음악이 뮤지컬영화처럼 끊임없이 흐르는가 하면, 로드무비처럼 여행이 끝날 때까지 전체적인 상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 영화는 자유롭게 흘러가면서도 엄밀하게 조율된 듯도 합니다. 영화의 구조와 스타일 면에서 가장 중요했던 요소는 무엇입니까. 영화에 착수했을 때 나는 그저 아바나로 가서 3주간 촬영을 하고 돌아와 편집을 하면 끝이라고 간단하게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이 밴드가 콘서트에서 라이브 공연을 할 줄도 몰랐고, 심지어 당시 그들은 라이 쿠더의 발명품일 뿐 단일한 밴드로서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이 모든 음악인을 모아서 상상의 밴드,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을 만들어낸 거죠. 그들 중 몇몇은 서로를 알고 함께 연주한 적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함께 작업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암스테르담 공연의 가능성이 떠올랐을 때 너무 좋아서 실감이 안 났어요. 나는 아바나 촬영을 끝낸 뒤 50시간 분량의 테이프를 들고 LA로 돌아가 편집 준비에 들어간 상태에서 암스테르담에서 2회 공연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떻게 그걸 놓칠 수 있겠어요! 그래서 다른 스탭들을 꾸려 몇주 뒤 암스테르담으로 날아갔지요. 4일간 리허설을 찍었고 그들은 평생 최초로 한 밴드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10대처럼 긴장해 있었어요. 무대공포증의 엄청난 습격이었죠. 하지만 청중들은 첫곡이 끝나자 이미 의자 위에 올라서 있었어요! 나는 촬영을 마치고 서른 시간의 추가 촬영분을 들고 LA로 돌아와서 생각했죠. 와, 이젠 정말 충분해. 그런데 다시 카네기홀 공연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결국 나는 3편의 장편영화를 만들고도 남을 만한 재료를 안고 편집실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엮어낼 구조에 대한 필요성은 그 다음에야 제기됐습니다. 아바나와 암스테르담, 뉴욕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관객이 길을 잃지 않게 하려면 어찌 해야 할까? 정말 우리 눈앞에서 벌어진 사건을 어떻게 들려줘야 할까? 시작할 무렵에는 이 영화가 스토리를 갖게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어요. 다큐멘터리란 원래 스토리가 없는 거잖아요! 구조를 정하고 암스테르담을 흑백으로 처리하고 아바나를 우편엽서 같은 원색으로 칠하고 뉴욕을 네온빛으로 꾸미겠다고 결정하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계획없이 그저 날아오는 펀치에 맞춰 움직인 셈이죠. 이 이야기의 영화화를 제안한 라이 쿠더는 실제 촬영기간중 어떤 역할을 수행했나요. 라이는 두 번째 앨범 준비에 너무 바빠서 내가 뭘하고 있는지 쳐다볼 시간도 거의 없었어요. 오랜 친구로서 라이는 내가 제대로 잘하고 있으리라 믿은 것 같습니다. 오토바이를 타는 장면과 이브라힘과의 대화 장면을 위해서 내가 간신히 그를 스튜디오에서 끌어낸 반나절만 빼면 한번도 라이는 촬영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때 찍은 장면이 뭐였는지도 1차 편집본을 보고서야 알았을 겁니다. 들리는 말로는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의 디지털카메라 사용 결과에 대해 매우 흡족해했다면서요. 디지털영화에 고유한 미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 영화를 찍고 나서 대강의 그림을 얻었다고 할 수 있나요. 디지털영화는 아직도 발명중입니다. 우리는 그저 시작을 목격한 것에 불과하죠. 그 발명의 과정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은 오늘날의 필름메이커에게 매우 신나는 일입니다. 나는 디지털영화의 도래는 유성영화의 그것에 비할 만한 이행이라고 봅니다. 이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갖고 감독들이 뭘 할 수 있는지에 관해서 우리는 아직 희미한 스케치도 갖고 있지 못합니다. 물론 스토리텔링은 새로운 도구상자를 갖고 계속될 겁니다. 당신은 미국 대중문화, 특히 팝 음악의 열정적인 팬이었습니다. 여전히 미국적인 것으로부터 영감을 얻나요. 답은 예스이기도 하고 노이기도 합니다. 미국 문학과 음악은 내게 지금도 영감을 줍니다. 미국의 풍경도 그렇습니다. 독립영화 신의 몇몇 창의적인 미국영화들도요. 어떤 판박이 영화들은 나를 죽도록 지루하게 만들긴 하지만요. 지난 몇년간 내가 본 가장 놀라운 영화들은 아시아에서 온 영화들이었습니다. 즐거운 일이지요. 오즈 야스지로에 대한 특별한 존경을 몇번이나 표현한 적이 있었지요? 오즈와 그의 영화가 당신의 영화 경력에 어떤 입김을 끼쳤나요. 나는 영화를 찍기 시작하고 나서야 오즈의 영화를 알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감독으로서의 형성기에는 별 영향이 없지요. 하지만 일단 그 영화들을 보고, 영화 예술 역사상 다른 어떤 작품들보다 사랑하게 되고 나자, 그들은 내게 영화의 가장 신성한 보물과 같은 존재가 됐습니다. 실락원이라고 할까요. 저널리스트로서 우리는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이 대관절 어떤 의미가 있을까 늘상 자문하고 회의합니다. 지난 부산영화제에서 당신은 언론의 단독 인터뷰 요청을 뿌리치고 관객과의 대화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지요. 기자와 평론가들에 대해 당신의 정직한 의견을 듣고 싶군요. 나는 지적인 질문들에 대해 답하는 일을 즐깁니다. 나는 말보다 글에 능숙합니다. 내가 즉흥적으로 말을 내뱉고 질문에 답해야 할 때마다, 신문 인터뷰 같은 제도화된 틀을 빌리지 않을 때 나나 동료들이 얻는 바가 많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물론 인터뷰도 하긴 하지요. 20년 전 처음 한국을 방문했을 때 관객과 나눈 토론의 기억이 생생했던 나로서는, 지난 부산영화제에서 또 한번 그런 특권을 누릴 기회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비평가들- 특히 서구의- 에 대한 나의 정직한 견해를 말하자면, 비평가들은 점점 더 마케팅과 PR산업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진짜’ 생각하는 바를 실제로 평에 쓸 만큼 용감한 평론가들은 극소수입니다. 평론가 대부분은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거대 스튜디오의 이익에 봉사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저는 ‘비평’이라는 단어조차 쓰고 싶지 않아요. 나는 한편의 영화를 관객에게 열어주고 영화의 실상과 본인의 감정을 묘사해, 글이 한 영화에 대한 서비스가 되는 영화평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그런 부류의 글은 희귀해졌습니다. 대부분의 평론가들은 이제 여론을 생산하는 비즈니스, 또는 가십을 제조하는 비즈니스에 속해 있습니다. 정직하게 말해 바로 이런 점이, 내가 관객에게 직접 이야기하는 편이 시간을 잘 쓰는 방법이라고 판단하게 된 이유입니다. 관객은 자력으로 판단할 만큼 성숙하며, 또한 내가 영화를 만드는 것도 그 사람들을 위해서입니다. 이 대답이 당신의 감정을 상하지나 않았는지요. 질문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정리 김혜리 기자 vermeer@hani.co.kr

아시아가 할리우드를 삼킨다

<씨네21>은 <카이에 뒤 시네마> 편집장인 프랑스의 영화평론가 샤를 테송 칼럼을 시작합니다. 이 프랑스 영화평론가는 범람하는 영상속에서 “중요한 영화를 고르고 미래의 영화를 발견하는 것”을 비평의 중요한 몫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그 시선을 아시아 영화와 그안의 한국영화까지 꾸준히 확장해왔습니다. 이제, 테송의 `선택과 옹호'를 부정기적으로 중계합니다.편집자 저무는 한해한해는 우리에게 그에 준하는 의식들을 강요한다. 우선 그해 상영된 작품들 가운데 가장 우수했던 영화 10편을 선정해야 한다. 이 목록을 작성하면서 우리는 즐거움을 만끽하게 되는데 그것은 영화애호가들이 가장 진지하게 고민하는 순간에 느끼는 유아적 환희에 가깝다. 우리는 많은 영화를 본다. 그리고 그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물론 글을 쓰고 싶거나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들의 글을 읽어보고 싶은 욕구를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든 공통되게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는데, 거기엔 우리를 영화애호가로 만든 요소가 내재해 있다. 한편의 영화를 볼 때마다 우리는 그에 관해 기록한다. 때로는 평점을 매기는(별표로) 위험을 감수하기도 한다. 그러고나선 잠시 멈춰서서 그 평점이 제대로 매겨졌는지 주의깊게 살펴본 다음 다른 작품으로 넘어간다. 이런 과정을 거쳐야 할 영화들이 도처에 산재해 있다. 감상한 모든 영화들에 대해 기록하는 작업을 마친 뒤 (열광적이면서도 감격스러운 이 작업을 좀더 분석적인 글쓰기에 선행하는 단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들만 따로 모아 리스트를 만듦으로써 비할 데 없는 만족감을 가지게 된다. 리스트를 작성하는 데 요구되는 규칙은 경이로운 숫자인 ‘10’에서 멈춰야 한다는 것이다. 매년 <카이에 뒤 시네마> 편집위원들은 그들이 추천한 영화들과 <카이에…>가 옹호했던 영화들이 때로는 충돌하는 모순적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이는 모든 연인들의 사연처럼 각 편집위원들이 <카이에…>의 편집 방향과 더불어 형성해온 그들의 상상적 타자― 그들의 천국과 지옥― 의 이미지에 충실하면서도 배반적인 일종의 존재 양식에서 비롯된다. 영화를 보면서도 마찬가지겠지만 선별 작업에서도 주위를 바라보는 시력을 잃는 위험을 감지하는 순간 저 내면의 깊은 곳으로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자기 자신을 되찾음으로써 느끼게 되는 기쁨이 더 중요하다. 이러한 위험없이 어떤 그룹의 일부가 되기란 불가능하다. 2000년 리스트에는 아시아영화가 세편이나 들어 있다. 그것은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 리안의 <와호장룡>, 왕가위의 <화양연화>다. 20년 전부터 꾸준히 그리고 심도있게 이 감독들을 주목해온 비평가들의 작업이 이제서야 그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지만 중요한 점은 다른 데 있다. 그 이전 할리우드영화가 관객 곁에서 누렸던 반응들을 세계영화 역사상 처음으로 아시아영화가 차지함으로써 유례없는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장르영화와 액션영화에 속하는 <와호장룡>은 수준높은 대중오락영화인가 하면, <화양연화>는 사랑하는 감정의 정지상태를 표현한 관능적인 로맨스다. 할리우드영화들은 부동의 스타를 길러냄으로써 전세계인을 꿈꾸게 만들었지만 오늘날 이 꿈의 대상은 아시아 스타에게로 이전되었다. 대부분의 미국영화 배우들은 대형 스크린에 데뷔하기도 전에 시트콤에 흡수돼 버린다. 다시 말해 훌륭한 배우로 성장하기도 전에 고갈돼 버리는 것이다. 그 결과 때로 그 가치가 인정된다 하더라도 대체로는 저속함만이 판치는 세계에서 어느 정도 우아한 모습으로 대중에게 어필하는 그들의 능력만이 중요하게 여겨지고 그에 따라 배우적 가치가 매겨진다. 그렇다면 대체 영화만이 관객에게 줄 수 있는 도달할 수 없는 어떤 느낌이나 숭고함은 어디로 가버렸는가? 중국이다. 왜냐하면 남자가 달에 있다면(밀로스 포먼 감독의 <맨 온더 문>(Man on the Moon)은 찰리 채플린의 <뉴욕의 왕> 이후 영화가 더이상 기대할 수 없는 어떤 경지에 도달했다), 여자는 ‘무드에 젖어 있기’(<화양연화>의 영어제목이 ‘In the Mood for Love’-역자) 때문이다. 장만옥은 얼마나 멋진가! 왕가위 신드롬에서 주지해야 할 중요한 교훈은 바로 이거다. 오랫동안 홍콩영화는 극장에서 그리고 텔레비전에서 남자들의(브루스 리, 성룡) 세계를 조명해왔다. 그렇지만 여자들 또한 아주 일찍부터 구체적으로 20년대 상하이에서 촬영한 로맨스영화와 무술영화에 등장시켰다. 우시아피안(Wu xia pian)에서 탄생한 여검객은 <무명의 영웅들>(1926)의 여주인공인 쉬안징린(Xuan Jinglin)으로부터 호금전의 <대취객>(1966)의 여군주 쳉페이페이(그녀는 <와호장룡>의 악녀로도 출연했다), 그리고 무한한 매력과 재능을 지닌 양자경에 이르기까지 그와 더불어 성장했다. 우리는 할리우드 안에서 용해될 소지가 다분한 홍콩영화가(오우삼의 말에 따르면 이게 그의 마지막 임무라고 한다) 그에 흡수·통합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현실을 바라보면 오히려 그 반대다.(<카이에 뒤 시네마> 2001.1월호) 샤를 테송 / <카이에 뒤 시네마> 편집장·파리3대학 교수

촌놈들,서울가다

1969년, 감독 유현목 출연 구봉서, 문희 ebs 3월17일(토) 오전 11시50분 1960년대 후반은 유현목 감독에게 다작의 시기였다. 흔히 감독의 연출인생에서 ‘1기’로 분류되곤 하는 <오발탄>과 <잉여인간> 등 시대에 대한 절망을 담은 리얼리즘영화를 통과해, 장르물로의 전환을 모색하던 무렵이기도 했다. 1966년작 <특급 결혼작전>을 만든 감독은 “당시 난 비흥행감독이었다. 하지만 빠른 템포로 경박한 영화를 만들었더니 흥행이 잘 되었다. 이런 게 흥행가치구나 싶은 생각에 쓴웃음을 지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후 유현목 감독은 서사극과 멜로드라마의 양식을 차용하면서 한편으로는 반공 이데올로기와 타협하는 모습을 보였다. 즉 <카인의 후예>와 <나도 인간이 되련다> 등으로 요약되는 1960년대 후반, 유현목 감독의 이른바 ‘반공영화’들이다. <수학여행>은 유현목 감독의 필모그래피에 예외적으로 속해 있는 코미디물이다. 코미디언으로 익히 알려진 구봉서 등의 스타가 출연하는 점도 흥미로운 작품이다. 선유도 초등학교에 부임한 젊은 교사는 수학여행을 계획한다. 부모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이들을 서울로 데려가려는 것. 처음에 반기를 들던 부모들도 아이들 교육을 위해 수학여행이 필요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서울에 도착한 선유도 아이들은 온갖 신기한 것을 접한다. 전깃불에서 자동차, 그리고 텔레비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하다. 아이들은 창경원, 남산을 구경하는데 그 와중에 서울로 돈벌러온 가족을 만나 웃지 못할 해프닝을 벌이기도 한다. 모든 경험을 뒤로 한 채 교사와 아이들은 다시 섬으로 향한다. 올 때와는 다른 무엇인가가 그들 마음에 깊이 아로새겨진 채. 영화 <수학여행>에 대해 언급하기 전에 1960년대 당시 시대상황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박정희 정권은 1967년에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실행했으며 서울이라는 대도시 중심의 국토개발을 서둘렀다. 영화평론가 유지나는 같은 해 개봉된 노부부의 여행담을 다룬 영화 <팔도강산>에 대해 “조국근대화와 산업화론에 대한 찬양을 담은 국책 홍보영화이자 국민영화로 성공했다”라고 썼다. <수학여행> 역시 영화의 계몽성이 강조되고 있으며 근대화에 대한 무한한 찬양을 담는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는 구석이 있다. <수학여행>은 에피소드식 구성을 취한다. 교사를 중심으로, 서울을 방문하는 외딴 섬 학생의 작은 체험을 연대기순으로 기록하고 있다. 처음에 아이들은 “서울물은 싱겁다네, 미리 먹을 물이나 챙겨가야겠다”라며 초행길을 두려워하다가 막상 서울에 도착하자 여자가 서서 볼일 본다며 장발족을 비웃는다. 영화에선 전통과 문명의 대립이 전면에 부각되진 않는다. 선유도 아이들은 세탁기와 전화기, TV라는 근대화의 상징 앞에서 그저 감탄사만 연발할 따름이다. <오발탄>과 달리 영화 <수학여행>에서 서울은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면 만사형통인 긍정적인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그런데 부분적인 균열이 감지된다. 무지하고 촌티나는 한 섬마을 소녀는 신형 세탁기를 구경한 뒤 “이런 게 있으면 내가 앞으로 서울 와서 식모살이를 할 수 없겠구나”라며 한탄한다. 계몽영화의 외피를 두르면서 은근히 현실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던지고, 또한 삶의 비애감을 섞어내는 것은 유현목 감독의 탁월한 능력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1960년대라는 ‘시대’에 잔뜩 옥죄어 있는 이 영화를 구원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김의찬/ 영화평론가 nuage01@hitel.net

마음은 언제나 꼬마 토토

심상용 아저씨는 춘천 육림극장의 영사기사다. 원래 나이는 쉰일곱, 호적 나이로는 쉰넷. 초로의 나이지만 열여섯에 시작한 영사기사 경력이 벌써 40년이 넘었다. 그를 만나러 육림극장을 찾아가는 길. 서울 동서울터미널에서 출발하여 한 시간 반 남짓, 춘천시외버스터미널에 내려 찾아간 육림극장은 닭갈비 골목이 있는 춘천시내 명동, “개고기 팝니다” 팻말이 즐비한 중앙시장 옆에 있었다. 흰 페인트칠이 돼 있는 오래된 극장 외벽에는 아직도 사진 대신 그림 간판이 걸려 ‘상영프로’와 ‘다음프로’를 알리고 있었고, 극장 안 어둑한 매점에는 오징어, 팝콘, 바나나우유가 그늘 속에 놓여 있었다. 예쁜 제복의 여자직원 대신 매표구에도 점퍼를 입은 아저씨가 떡 하니. “심상용 영사기사 아저씨를 만나러 왔는데요”, 말을 물으니 올라가보라 한다. 영사실은 어디에 있을까. 일요일 낮인데도 관객은 별로 없고, 어둠 속에 몇번인가 발길은 계단턱을 더듬는다. 영사실 창에선 예의 빛다발이 쏟아져나오는데 그곳으로 가는 문은 어디 있는 걸까. 영사실은 뜻밖에, 아니 어쩌면 원래 그런 것인지, 상영관 바깥에 따로 출입구를 가지고 있었다. 작은 나무문을 가만히 열자, 아저씨 한분이 반갑게 맞이한다. “나야, 내가 심상용이야.” 영사실 안쪽 소파에 마주앉아 그렇게 영사기사 심상용씨와 이야기를 시작한다. 다음날, 그 다음날까지 계속된 이야기. 까막눈 소년, 필름의 빛에 매료되다 1950년대, 춘천시내 1호 막국숫집 아들이었던 심상용씨는 학교를 가기 전 극장을 먼저 만났다. 말 그대로 그랬다. 집과 학교 사이, 그 길가에는 언제나 극장이 있었다. 극장 가까운 음식점이었던 그의 집에는 늘 극장 사람들이 막국수를 먹으러 왔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소년에겐 쪼그려 숙제할 변변한 자리 하나 없었다. 6·25가 갓 끝났을 때의 얘기다. 소년에게 공부는 어렵고 어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에겐 극장이 있었고 늘 그를 귀여워해주는 ‘극장 아저씨들’이 있었다. 언제든 극장 문 앞에 서기만 하면 소년은 그냥 통과였다. 심심하면 모르는 아줌마 옆에 아들인 양 서기도 했다. 극장은,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편치 않던 소년의 ‘없는’ 의자 하나를, 아니 수백개를 가지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학교를 가는 대신 소년은 극장엘 갔다. 작은 아이의 오랜 시작. 소년의 영화에 대한 처음 기억은 ‘총싸움과 뽀뽀’다. 제목은 기억하지 못해도 어느 한 장면, 총싸움을 하다 남자가 죽어버리자 여자가 남자한테 ‘뽀뽀’를 해주던 한 장면은 아직껏 눈에 선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학교에 가는 대신 극장에 있었다.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심상용씨는 거의 까막눈이다. 대강 읽기는 하지만 쓸 줄은 모른다. 자신만의 글자가 있어서 그가 ‘프린스’라고 써놓은 글자를 보고 다른 이들은 ‘슈즈’라고 읽는다. 그래서 그에게는 아직 영사기사 자격증이 없다. 35년 동안 공부하고 또 했지만 불합격, 불합격. 아침부터 밤까지, 휴일도 없이, 명절날 남들 “떡에 술에 잘 먹을 때”도 영사기를 떠나지 않았던 그는 60점에서 18점이 모자라 아직 영사기사 자격증이 없는, 그러나 100점짜리 베테랑 영사기사다. “대한민국 최고극장” 메가박스에서 그가 받는 월급 100만원의 두배를 그의 후배가 받고 있다고 그는 자랑스러워 한다. 영사기사 일이란 예나 지금이나 힘든 일이다. 중년의 영사기사에겐 더더욱. 최신장비를 갖춘 멀티플렉스들이 생겨나면서 일자리가 좀 늘긴 했지만, 30대 이하의 일손을 주로 원하고 있고, 게다가 기술발전으로 한명의 영사기사가 여러 관을 관리할 수 있게 되어 일자리가 크게 는 것도 아니다. 지방의 낡은 극장에 나이많은 영사기사들이 많은 것도 그 때문. 심상용씨에게 극장 일을 하며 산 보람이 뭔가 물으니 “덕분에 글씨 공부한 것”이라고 답한다. 그의 낡은 영사기 옆에는 오랫동안 본 책 한권이 늘 놓여 있다. 영화를 틀기 위해서는 볼 필요가 없는 영사기사 매뉴얼. “그래도 40년을 했는데 자격증 하나 없으면 그렇잖아. 어떻게든 따려고 하지. 애들한테도 난 한글만 알면 대학 가는 거라 그랬거든.” 그래서 곁에 두는 책 한권이다. 한달 봉급 300원, 밥은 늘 밀가루 풀죽 ‘가케모치.’ 자전거로 필름을 배달하는 <시네마천국>의 토토를 기억한다면 심상용씨의 극장 초년생 시절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1960년, 심상용씨는 이 극장 저 극장 영화필름을 배달하는 ‘가케모치’로 극장 일을 시작했다. 구두닦이, 신문팔이, ‘노가다’…. 사기를 당해 집에서 하던 막국수 가게가 문을 닫은 뒤 어린 나이에 별별 일을 다 하던 때였다. ‘문화극장에서 가케모치를 구한다’는 친구 말을 듣고선 바로 시장통 극장으로 달려갔다. 필름 한권이 10분짜리일 때였다. 한달 봉급은 300원. “노가다 뛰면 하루 200원 주던 때”, 봉급을 타면 견습생 소년은 이발을 하고 신발을 사는 데 그 돈을 다 써버리곤 했다. 밥은 늘 밀가루 풀죽이었다. 그렇게 허기진 배를 안고 쉴새없이 문화극장, 소양극장, 육림극장으로 페달을 밟던, 자전거가 없을 땐 필름을 들고도 뛰던 어느 날, 그는 자전거에 필름을 싣고 가다 버스 밑에 들어가는 사고를 당했다. 도랑께로 굴러가는 필름이 물 속에 빠지기 직전, 그는 젖을세라 필름을 품에 꼭 안고 극장까지 뛰었다. 몸이 다쳤는지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날, 영화는 1초도 끊기지 않았다고, 심상용씨는 아직도 자랑스레 그날 일을 이야기한다. 달리기 잘하던 ‘가케모치 소년’은 포스터도 붙이고 간판화가의 “빠레트도 닦고”, 극장이 좋아서, 또 먹고살 일이 필요해서 극장의 무슨 일이든 배우려 했다. 배우들 얼굴을 크게 그려붙이는 간판 일도 그는 하고 싶었다. 하지만 “거기도 글씨가 있”는 탓에 그는 까막눈도 할 수 있는 기계 일을 택했다. 영사기사. 글씨를 몰라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그는 열여섯 나이에 그렇게 영사기사가 됐다. <또순이>부터 <클럽 버터플라이>까지, 나의 <한국영화회고록> “도금봉 나오는 <또순이>”를 시작으로 그는 3년간 잡던 걸렛자루를 놓고 영사기를 맡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도대체 몇편의 영화를, 몇권의 필름을 영사기에 끼웠을까. “다 이어붙이면 한 지구 세 바퀴는 돌겠지, 아마”, 그는 이렇게 짐작한다. 문희, 신성일, 최무룡이,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알랭 들롱이 최고 스타이던 시절, “짱개영화로는 <스잔나>, 액션물로다가는 <돌아오지 않는 해병>, 외화로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콰이강의 다리>”가 그 시절 그의 마음을 훑고 지나간,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영화다. <미워도 다시 한번>을 틀 때인가는 관객과 함께 펑펑 울었다. 탄소막대에 불을 붙여 그 빛을 거울에 반사시켜 작동시켰던 60년대 ‘카본’ 영사기 시절, 그리고 “우리나라가 이기는 걸로 나오는” 전쟁영화 일색이던 시절, 그리고 관객도 대부분 단체관람 온 학생들이던 시절, 그가 빛을 불어넣는 필름들엔 키스신조차 거의 없었다. 그렇게 큰 파장을 불러왔던 <자유부인>도 “다 입고 있다 쓱 벗고는 끝”이었다. 그 시절 이야기를 하는 육림극장 1관의 영사실에는 새로 들인 최신식 ‘CP500 디지털’ 음향설비에서 <클럽 버터플라이>의 끊이지 않는 교성이 민망할 만큼 계속 흘러나오고 있지만 말이다. 60년대 초는 한국영화에서 흑백시대가 가고 처음으로 “총천연색 영화”가 나온 때였다. “칠십미리 시네마스코프” 외화들도 꼬리물듯 달려왔다. <원탁의 기사> <왕중왕> <대장 부리바>. 영화가 펼쳐놓은 드넓은 세상을 보러 사람들이 너도나도 극장에 ‘영화구경’을 오던 때였다. 영사기사의 손놀림 또한 언제보다 더 신이 났다. 총천연색 영화 얘기에 흥을 내던 그가 80년대 와서 잠시 말을 멈춘다. 컬러TV가 나오면서부터, TV에 관객을 빼앗긴 시절인 것이다. 젊건 늙었건 사람들이 다 “테레비”만 보던 시절. 관객이 들지 않자 한국영화도 제작비를 많이 들이지 않았고, 그래서 영화도 별로였다. “팔십오년인가 육년인가, 규제가 풀리면서 러브신이 많아졌어. 그러니까 도로 관객이 늘었지. 그러니까 그게 그렇게 된 거야.” 영화법이 바뀌어 제작자유화가 이뤄진 시기를 영사기 뒤의 산증인은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젖은 필름을 말려, 첫사랑을 영사하다 현재 춘천 육림극장에선, 80년대 들여온 한 시간짜리 필름용 일제 ‘마쓰다 제논 램프하우스’ 영사기를 한관에 두대씩 놓고 쓰고 있다. 순간전압 4500V의 이 일제 영사기는 영사기사를 한 시간에 한번씩 일어나게 만든다. 이야기에 푹 젖어들다가도 한 시간이 되면 심상용씨는 어김없이 일어나 능숙한 솜씨로 필름을 갈아끼웠다. 모터가 도와주긴 하지만 다 돌아간 필름을 되감는 일도 그의 몫. 그래도 좋아진 기계 덕에 식은 땀 날 사고는 별로 없다. 하지만 구식 영사기 시절엔 영사 사고는 피할 수 없는 불청객이었다. “한번은 정전이 된 거야. 카본으로 할 때니 영사기는 돌릴 수 있지. 근데 소리는 못 내잖아. 그게 무슨 외국영화였거든. 갑자기 소리가 안 나니까 사람들이 웅성웅성거렸지. 그때 어떤 사람이 일어나서 괜찮다고, 우리가 뭐 영어를 아냐고. 그냥 자막만 보면 되니까 계속 틀어달라고 외치더라구. 그래서, 소리없이 조용히 한 시간을 그렇게 틀었어. 사람들도 아무도 안 나가고 영화를 다 봤어.” 지금 같으면 환불 소동이 벌어지고도 남을 일이건만, 그 시절 관객은 ‘다음에 어떻게 되는지’, 그게 더 궁금해서 기꺼이 무성영화를 청했던 것이다. 10분짜리, 20분짜리 필름이 한 영화에도 여러 개 들었던 시절, 필름 순서가 뒤바뀌는 것도 부지기수였다. 그럴 때면 심상용씨는 재빨리 필름을 바꿔끼는 ‘즉석편집’을 하곤 했다. 관객은 실수가 있었던 건 추호도 모르고 ‘아, 아까 뭐 생각하는 장면이었나보다’ 하고 넘어가곤 했다. 각종 사고 대처에 능숙했던 그에게도 한번은 가슴 서늘한 순간이 있었으니, 때는 1968년, 심상용씨가 스물넷 청년이던 시절이다. 비가 거세게 쏟아지던 어느 날, 서울에서 남진이 나온다는 <저 언덕을 넘어서> 예고편이 도착했다. 필름은 모두 젖어 있었다. 할 수 없이 상 위에 필름을 쭉 펼쳐놓고 그것을 말렸다. 겨우 말린 필름을 손때 묻은 영사기에 걸었을 때, 객석 위를 지난 빛줄기가 새겨내는 그림 속 여배우는 다름 아닌 그가 어릴 적부터 짝사랑하던 여인. 코흘리개 시절부터 한동네에 살며 “골려주며” 좋아하던 또래 짝사랑이 어느새 여배우가 되어 필름 속에 들어 있었다. 청년이 되어서도 잊지 못하던 그녀의 얼굴을 자신의 손으로 스크린에 영사하며, “성공하니까 고향을 찾지 않는” 옛사랑이 희미한 빛으로 살아나는 걸 바라보며 청년 영사기사는 가슴이 무너졌다. 몇편의 영화에 출연한 뒤 1971년, 그녀가 결혼해 미국으로 갔다는 소식을 접한 뒤 얼마 안 있어, 우연인지 아닌지 그도 같은해 결혼을 한다. 신부는 친구의 사촌여동생. 4녀1남을 얻은 그는 어느새 큰딸에게서 태어날 첫 손주를 기다리고 있다. 나의 필름, 나의 극장 주세페 토르나토레의 <시네마천국>에서 마을 신부는 종을 쳐 키스신을 잘라내고, 토토는 훗날 신사가 되어 키스신만 모인 그만의 영화를 본다. 심상용씨에게도 그런 ‘필름쪼가리’들이 있다. 키스신은 아닐지라도, 영사실에서 일하면 흠집이 나거나 해서 이렇게저렇게 잘려나가는 필름들이 많이 있었다. 젊었을 적, 그 필름쪼가리들을 꼼꼼히 모으던 그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손수 환등기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일주일이 꼬박 걸려, 그는 깡통을 구해다가 전구를 넣고 필름쪼가리들을 걸어 환등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집에 광목천을 걸고 친구들을 불러 슬라이드를 틀어줬다. 묘한 기쁨이 몰려왔다. 그만의 작은 가내 극장이었다. 젊을 때 이미 맛본 이 ‘내 극장’의 달콤한 꿈은 1992년, 그에게 현실이 되었다. 시내 밖, 양구군에 있는 150석짜리 작은 극장을 주인이 내놓았을 때, 심상용씨는 마을금고에서 2천만원을 빌려 극장을 빌렸다. 다달이 100만원씩 삯을 내야 했다. 당연히 직원을 쓸 돈은 없었기에, 그는 춘천 시내에 아내와 세딸, 아들을 남겨두고 어머니와 큰딸과 함께 극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가 자리를 비울 때면 영사기는 다른 가족의 손에 맡겨졌다. 그때 익힌 실력으로, 그의 자녀들은 다 영사기를 돌릴 줄 안다. 심 기사에서 심 사장이 되었던 날들. 필름을 가져다주는 버스기사들과 술 한잔 기울이고 얼마 만인지 다시 포스터를 붙이러 다니던 그는 즐거운 극장장이었다. 내키면 동네 사람들을 불러 공짜 영화를 보여주기도 했다. 양구는 군부대가 있는 마을이었다. 손님은 주로 주말, 군인들과 그들을 면회하러 온 애인들. 그게 평일날 손님이 없는 이유였고, 2년 만에 그는 극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아쉬움 속에 그가 다시 춘천시내로 돌아온 날, 그날 이후 양구의 그 작은 극장도 영영 문을 닫고 말았다. 양구를 떠난 그가 지금까지 일하고 있는 곳이 육림극장이다. 이 오래된 극장에는 관이 두개 있어서 1관, 2관, 두개의 스크린에서 두편씩 영화를 상영한다. 동시에 지어졌지만, 지금 이곳 두관의 영사기사 나이는 36년이나 차이가 난다. 1관에는 쉰일곱의 심상용씨가 있고, 2관에선 최석순이라는 이름의 스물한살짜리 젊은 청년이 영사기를 돌린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을 시작한 최석순씨는 메가박스에도, 키노에도, 씨네큐브에도 가 있다는 아저씨의 많은 제자 중 한명이다. 이들은 꼭 부자지간 같다. 젊은 기사가 방금 영사기에 걸어놓은 필름은 높은 산을 오르는 젊은이들의 이야기, <버티칼 리미트>. 2관 영사실에 있는 비디오로 ‘늙은 기사’가 자신이 나온 3년 전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녹화테이프를 틀어주고 있는 동안, 스물한살의 ‘최 기사’는 폴더형 PCS를 열어 누군가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낸다. 나이 많은 극장, 1관과 2관의 너무나 다른 풍경. 아무도 꾸미지 않았지만, 세월과 사람살이의 얼개는 이처럼 춘천의 한 극장에 영화 같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에게도 저만할 때가 있었겠지. 이 청년도 그처럼 나이들어갈 테고. 상념에 잠기는 사이 의 리포터는 심상용씨의 집을 찾아, 그가 오랫동안 수집해 놓은 영화 포스터들을 보여준다. 늙은 기사의 작은 집,작은 꿈 좁은 영사실에서 보낸 40년 인생. 그의 남은 소망은 무엇일까. 모아놓은 자료를 쥐가 갉아먹는 걸 보면서, 심상용씨의 요즘 꿈은 바로 그 자료들을 전시해놓을 수 있는 ‘영화박물관’을 차리는 것이다. 옛날 멍석 깔고 영화 보던 시절 풍경부터 극장 풍경이 어떻게 바뀌어왔는지 볼 수 있는, 또 온갖 팸플릿, 포스터, 문화영화들을 볼 수 있는 그런 박물관. 강원대학교 옆에 있는 그의 ‘산 1번지’ 집을 찾았을 때, 그는 마치 그 박물관 모습을 미리 연출하기라도 하려는 듯, 옛날 16mm 영사기를 틀어 반공영화 <아! 잊으랴>를 보여주었다. 스크린은 방문에 압정으로 꽂은 <어둠 속의 댄서> 포스터 ‘뒷면’이었다. 흰 ‘빠닥종이’ 위에서 자그마한 탱크와 그보다 더 자그마한 군인들이 포화를 쏘아대며 오물거렸다. 영화를 보기 위해 직접 스크린을 달고, 방의 형광등을 끄고, 그리고 윙 돌아가는 영사기 소리에 가슴 설렘을 선사하는 그의 방은, 기꺼이 시네마천국이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검은 개 한 마리가 지키고 있는 대문 옆 담벼락에는 <정무문>부터 <이태원 밤하늘엔 미국 달이 뜨는가> <탑건>까지 필름통들이 쌓여 있고, 돼지우리였다는 창고에는 수천장의 포스터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늙은 영사기사의 작은 집. “다 꺼내서 보여주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어. 저게 정리하는 데만 2년이 걸린 거거든.” 보고 싶은,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함께 안타까워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작은 고집인 양 심상용씨는 한참 동안이나 영사기를 끄지 않았다. 저녁이 다가와, <아! 잊으랴>를 다 보지 못하고 기자 일행이 서울로 발길을 돌리려 하자, 그제야 그는 아쉬운 듯 가만히 영사기를 끄고는, 영사기 옆에서 찍은 스무살 적 빛바랜 사진 하나를 봉투에 담아 건네주었을 뿐이다. 그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엔 먼곳에서 날아온 노란 흙알갱이들이 마치 오래된 필름에서처럼 풍경에다 비를 긋고 있었다. 최수임 기자 sooeem@hani.co.kr

영화와 음악의 궁합을 맞춘다

1968년생·추계예술대 작곡가 졸업,러시아 차이코프스키 음악원 졸업·드라마 SBS <결혼>, KBS <거짓말> <슬픈 유혹> <바보 같은 사랑> <푸른 안개>, MBC <나> <레디 고> <여자를 말한다> <해바라기> <사랑> 쏟아지는 빗속, 회사 후배에게 강간당하는 여자는 저항하다가 손을 꼭 쥔다. “내 몸 속에 있는 전구가 불을 켠 느낌”을 갖게 된 순간이란다. 논란이 될 만한 이 장면은 좌우를 오가는 카메라와 그 속도에 맞춰 빨라지고 느려지는 음악으로 인해 홀연한 아름다움을 띤다. 비판을 받아야야 할 장면에서 드라마의 흐름에 몸을 맡기게 하는 음악, 그것은 유죄일까, 무죄일까. <클럽 버터플라이>의 영화음악을 맡은 최완희씨는 에로틱한 영화에는 색소폰 등이 들어가는 흐느적거리는 음악이 적당하다는 통념 대신 오케스트라를 선택했다. 에로틱한 장면에 장중하게 깔리는 ‘음악이 시선을 빼앗도록’ 했다. 지금 오른손이 무엇을 하고 왼손이 무엇을 한다는 장면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한 행위를 하는구나”라고 음악에 파도를 맡기다보면 아차싶게 흥분돼 있는, 그런 음악을 바랐던 것이었다. 때로는 호흡만 남겨두고, 음악은 개입을 자제하기도 했다. 혁과 경 부부가 엉킨 감정을 풀러 놀러간 곳의 장면이 그 한 예. 호흡만 있는 신을 겪고 나면 그들의 부부문제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것이 감정적으로 연결된다. 최완희씨는 <클럽 버터플라이>가 영화음악 데뷔작이다. 8년 동안 <결혼> <레디 고> <해바라기> <거짓말> <바보 같은 사랑> 등의 텔레비전 드라마 음악을 해오면서 꼼꼼하게 음악을 다듬을 수 있는 영화음악에 욕심을 내고 있었다. 그러다 처음 맡게 된 탓일까, 손해를 감수하고 예산을 초과하는 일을 벌였다. 러시아로 날아가서 오케스트라에 영화음악 연주를 맡기는 ‘무모한’ 짓을 한 것이다. 심포니 오케스트라 글로발리스(GLOBALIS)는 80명 규모로 <시티 오브 조이>나 <러브 오브 시베리아> 등 지금까지 450여편의 영화음악을 연주한 영화음악 전문 오케스트라다. 최완희씨의 러시아 시절 은사이기도 한 볼쇼이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 크리미아가 지휘를 맡았다. <클럽 버터플라이>에는 전설적인 탱고의 거장 아스트로 피아졸라의 동생이자 유명 아코디언 연주자인 헥터 피아졸라의 연주도 포함돼 있다. 이 역시 그의 ‘무모함’이 작동한 결과다. 송년음악회에 참석한 그를 알아보고 이러이러한 영화의 음악을 녹음하고 있는데 시간이 되면 녹음실로 오시라고 말했는데, 이 당돌한 초대에 응한 피아졸라가 연주까지 하겠다는 제의를 했다. 그 대가는 하룻밤을 넘기는 보드카 술시중. 궁하면 통한다. 유행을 겨냥한 외국음악 스코어는 한곡도 포함되어 있지 않은 기특한 O.S.T는 ‘궁함’의 결과다. 외국곡을 삽입하면 지불해야 할 로열티는 영화음악 예산에 버금가는 액수였다. 그래서 카페에 흘러나오는 음악까지 황보령의 신곡 <우주>로 채웠을 만큼 삽입곡들은 모두 창작곡이다. 최완희씨는 영화음악은 꼼꼼하게, 빈틈없이 해야 하기 때문에 일할 맛이 난다고 한다. 촬영이 모두 끝난 뒤 의뢰받은 작업. 러시아 체류기간 한달을 빼면 며칠 남지 않은 기간은 분명 동분서주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 짧은 동안에도, 의욕이 앞섰던 초짜 영화음악가는 또 한번의 무모함을 발휘했다. 연주 녹음을 위해 러시아로 떠나기 전, 신시사이저로 음악을 입힌 비디오 편집본을 만들어 영화감독과 함께 보며 의견을 나누었다. 음악을 건네주고 그냥 입히기만 하는 관행 대신 영화와 음악의 궁합을 한번 더 생각하자고 선택한 방법이다. 러시아에서는 필름을 보면서 연주를 했다. 지휘자는 영상을 보면서 완급을 조절하고 연주자는 지휘자와 필름을 함께 보면서 음악을 연주했으니 베테랑들이 아니라면 NG없이 소화하기 어려운 작업이었다. 그래서 영화를 위해 존재하는 음악이 되었다. 유죄든 무죄든 그게 영화음악 아닌가. 글 구둘래/ 객원기자 anyone@cartoonp.com 사진 오계옥 기자 klara@hani.co.kr

디즈니 애니메이션 주요 작품사 - 동화보다 아름다운, 캔디보다 달콤한

70년대, 아이들은 일요일 아침이면 늘 TV 앞에 모였다. 마법의 성 위로, 펑 하고 터지는 불꽃놀이. 디즈니랜드의 풍경이 펼쳐지면, 미키 마우스와 도널드 덕 등 친숙한 얼굴들이 등장한다. 일본 애니메이션 이상으로,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유년 시절의 통과 의례 같은 것이었다. 그 이미지들은 거의 무의식과도 같은 것이다. 미키 마우스라든지 도날드 덕, 거짓말을 해서 코가 길어진 피노키오의 얼굴이나 하늘로 훌쩍 날아가는 피터팬의 몸짓은 필요할 때마다 바로 연상되는 원초적인 기억이다. 1923년 월트 디즈니(1901∼66)가 형 로이와 함께 ‘디즈니 브러더스 촬영소’라는 이름의 애니메이션제작소를 차린 이래,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그림동화나 안데르센 동화 이상으로 친숙한 이름이 되었다. 20세기의 동화,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어떻게 20세기의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감동시키고, 또 돈지갑을 열게 했을까. 거기에는 어떤 비결이 숨어 있고, 디즈니는 어떤 전략으로 성공을 거듭해왔을까. 월트 디즈니 탄생 100주년인 올해,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지나온 길을 돌이켜보는 것은 모두의 과거에 간직돼 있는 ‘디즈니’라는 이름의 그림책을 다시 한번 꺼내보는 일이 될 것이다.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 <환타지아> <밤비> <신데렐라>와 <인어공주>와 <라이온 킹>,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영광을 만들어낸 주요작의 비법을 돌이켜본다.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 ::: 증기선 윌리 ::: 환타지아 ::: 덤보 ::: 밤비 ::: 잠자는 숲속의 미녀 신데렐라 ::: 101마리 강아지 ::: 인어공주 ::: 라이온 킹 ::: 미녀와 야수 ::: 포카혼타스 ::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1937 동화보다 동화적인, 혹은 20세기의 '바람직한' 동화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는 디즈니 장편 애니메이션시대를 연 작품으로 기록된다. 누구나 알고 있을 그림형제의 <백설공주>. 디즈니는 가장 대중적인 작품을 원작으로 활용하여, '디즈니' 하면 바로 연상되는 '권선징악'이라든가 '행복한 결말과 화해' 등의 공식을 일찌감치 확립했다. 그림형제가 썼던 <백설공주>도 원래는 잔혹한 살해와 배신이 담긴 이야기였지만, 당시 지배층의 요구로 순화시킨 작품이었다. 디즈니는 그것을 더욱 온순하게 길들였다. 희로애락의 드라마와 그것을 감싸는 유머, 권선징악적 해피엔드로 다듬어진 고전동화는 월트 디즈니가 발견한 최상의 애니메이션 스토리였다. 디즈니는 이미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고, 또 사랑하는 동화 속에서 애니메이션에 적합한 캐릭터를 발견하고 강화하는 전략을 세웠다. <백설공주>가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가 되는 과정이 바로 그것이다. 집단으로만 존재하던 각각의 난쟁이들을 개성있고 독특한 캐릭터로 가꾸어냈고, 이야기 진행과정에 맞추어 흥을 돋우는 음악을 병행함으로써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동화의 각색에서 고유한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신데렐라> <잠자는 숲속의 미녀> <인어공주> 등등 디즈니의 동화 전략은 색깔을 달리해 끊임없이 반복된다. 디즈니의 첫 장편인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가 돋보인 것은 기술상의 발전도 한몫했다. 동화를 그린 셀지를 앞에 놓고 그 뒤쪽에 배경을 그린 여러 장의 투명유리를 거리를 두고 겹쳐놓고는 맨 앞의 셀지에 초점을 맞춰 촬영을 하는 ‘멀티플레인’이라는 촬영기법을 도입하여 좀더 사실성 있는 영상을 선보인 것이다. 멀티플레인은 일일이 원근을 고려해 그림을 그리던 기존 방식으로는 도달하지 못했던 자연스러운 원근감을 만들어냈다. 140만달러의 제작비를 들인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는 공황기였던 30년대에 큰 성공을 거두었고, 대중이 현실을 잊고 안락한 동화의 세계에 빠져드는 데 큰 공헌을 했다. :: 증기선 윌리 1928 미키 마우스 시리즈 제1탄. 최초의 토키 애니메이션으로 버스터 키튼이 나오는 무성영화 <증기선 빌 주니어>를 바탕으로 했다. 토키영화라고는 하지만, <증기선 윌리>에서 미키 마우스는 말을 하지는 않는다. 대신 휘파람을 불고 동물들을 악기삼아 음악을 연주한다. 소의 이빨이 실로폰이 되고 암퇘지의 젖꼭지가 아코디언의 버튼이 되는 디즈니 특유의 유머러스한 설정이 이때 이미 등장한다. 모든 것은 생쥐 한 마리에서 시작했다고, 월트 디즈니는 말하곤 했다. :: 환타지아 1940 이미지로 보는 음악의 세계 애니메이터로 일하던 팀 버튼이 디즈니를 박차고 나온 것은, 늘 똑같은 캐릭터에 이야기만 그려내기 싫었기 때문이다.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은 거의 정형화되어 있다. 변주도 예술이긴 하지만, 늘 같은 방식으로만 변주하는 건 강요이고, 세뇌다. 팀 버튼처럼 유별나게 독창적이고 자유로운 애니메이터에게 디즈니는, 사상의 감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디즈니도 때로는, 휘황한 실험정신을 발한다. 작년 아이맥스판 <판타지아 2000>으로도 만들어졌던 <판타지아>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판타지아>는 소리를 이미지로 표현하겠다는 야심적인 시도로, 각각의 애니메이터들이 서로 다른 스타일로 빚어낸 걸작이었다. 그러나 너무 시대를 앞서나간 탓에 <판타지아>는 당대의 관객들에게는 외면받는다.<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가 디즈니의 '이야기'를 확립했다면, <판타지아>는 디즈니 스튜디오의 '기술'을 한단계 고양시킨 작품이다. 처음으로 그림에 목소리를 입힌 토키 애니메이션 <증기선 윌리>(1928)를 만들었던 디즈니는 <판타지아>에서 소리와 그림을 하나의 감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실험을 했다. <판타지아>는 바흐, 베토벤 등의 클래식음악 8곡을 고르고, 각각 음악에 맞는 이야기 혹은 이미지를 고안해낸 후 음악의 흐름과 느낌에 완벽하게 일치하는 애니메이션이다. <판타지아>는 음악의 청각적 요소와 애니메이션의 시각적 요소를 결합하여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표현력을 한껏 과시했다. <판타지아>처럼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때로, 시대를 뛰어넘는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것이 동맥경화증에 걸려 있는 범작의 체증을 뚫어주기도 하고. :: 덤보 1941 커다란 귀로 하늘을 나는 아기코끼리 덤보의 이야기 <덤보>는 빈약하다고도 할 수 있을 만큼 비교적 단순한 내용의 작품이다. 그러나 다소 지적이었던 <환타지아>의 후속작으로 관객의 만족에 중점을 두고 만들어진 <덤보>는 <피노키오>와 <환타지아>의 부진을 씻으며 흥행에 성공했고, 디즈니는 곧이어 한결 섬세한 작품 <밤비>를 내놓았다. :: 밤비 1942 사람과 함께 하는 동물, 인간 같은 동물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뛰어난 장점 하나는 동물 캐릭터다. 미키 마우스에서 출발한 의인화된 동물은 물론이고, <정글북>이나 에 등장하는 동물은 움직임도, 감정표현도 극히 자연스럽다. 유난히 매력적인 동물캐릭터를 잘 만들어내는 디즈니의 첫 걸음은 <밤비>라고 볼 수 있다. 오죽하면 쿠엔틴 타란티노도 걸작이라고 칭할까. <밤비>는 동물캐릭터에 대한 디즈니의 기초훈련이 마무리되었다고 볼 수 있다. 동물들만 나오는 애니메이션 <밤비>는 아기사슴 밤비가 자라 숲의 왕자가 되는 이야기를 담았다. 큰 귀로 인한 콤플렉스를 가진 덤보가 밝게 살아가는 모습을 그렸던 <덤보>(1941)와 비슷하게 아이들의 성장을 다룬 애니메이션이다. 원작인 팰릭스 셀튼의 소설 <밤비-숲 속의 삶>을 각색하는 과정에서 디즈니는 <꼭두각시 이야기>를 <피노키오>(1940)로 만들었을 때와는 달리 전반적인 내용의 각색 없이, 예쁜 원작의 이야기와 느낌을 그대로 그림으로 표현하려 했다. 동물들에 대한 의인화는 최소화하고, 자연의 생태를 충실히 반영하기 위해 제작진은 새끼사슴 두 마리를 스튜디오에 가져와 그들의 모습을 관찰하기도 하고, LA의 동물원으로 자주 ‘견학’을 다니기도 했다. 숲의 풍경과 동물들의 동작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기 위해 실제 자연의 풍경을 사진으로 찍어 그 위에 채색을 하는 기법을 쓰기도 했다. <밤비>에서 시작된 철저하게 사실적인 동물캐릭터는 이후 50년도 더 지나 아프리카의 대초원을 그린 <라이온 킹>에서 절정에 달한다. <라이온 킹>은 <밤비>를 만들었던 그 세심함과 철저한 관찰작업을 이어받았다. 게다가 동물 그 자체의 묘사에다가, 적절하게 의인화된 모습을 통해 더욱 감동을 자아낸다. :: 잠자는 숲속의 미녀 1959 디즈니 최초의 70mm 장편애니메이션. 테크니라마사의 70mm 영상을 사용했다. TV와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큰 스크린을 마련한 것. 사상 최대의 제작비인 600만달러가 소요됐으나 싸늘한 평가와 함께 박스오피스에서도 저조한 성적을 나타냈다. :: 신데렐라 1950 역시 디즈니에게는 동화가 어울려 2차대전 동안 디즈니 스튜디오는 장편을 만들지 않았다. 대신 단편을 묶은 패키지만을 극장에 내보냈다. 그러던 디즈니가 장편작업에 복귀한 작품이 <신데렐라>였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전쟁홍보영화를 통해 꾸준히 수익금을 올려온 것이 <신데렐라> 제작에 밑거름이 됐다. 8년 만에 만드는 장편 <신데렐라>에 디즈니는 사활을 걸었다. <신데렐라>는 2차 대전 이전 만들어진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모든 경험이 하나로 농축된, 이야기와 형식 그리고 기술적 측면에서 이후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원형이 되는 작품이다. 1697년에 쓰인 찰스 페로의 동화 <신데렐라>를 원작으로 디즈니 스튜디오는 이야기와 음악적 특징에서는 <백설공주>를, 회화적으로는 <밤비>의 사실적인 묘사를 활용하여 <신데렐라>를 완성했다. 모든 면에서 성공적이었던 공식들만을 모방하여 만든 이 작품은 극장에 개봉되어 흥행에 성공했다. 그러나 새로운 기술이나 스토리전개를 보이지 못한 탓에 비평가들의 평은 그리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신데렐라>는 성공했고, 디즈니 스튜디오는 중단되었던 장편작업을 계속 전개할 수 있는 입지를 마련한다. 디즈니는 독창적이고 새로운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보다는, 안전하게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공식에 충실한’ 애니메이션을 양산해낸다. :: 101 달마시안 1961 혁신적인 기술이 필요한 이유는, 비용절감 은 디즈니 스튜디오가 <잠자는 숲속의 미녀>(1959)의 상처를 딛고 야심차게 만든 애니메이션이다. 전작이 실패한 여파로 월트 디즈니는 많은 스탭을 해고했고, 자신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디즈니랜드 같은 주변의 사업에 더욱 몰입해 있었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 은 처음으로 공동작업 없이 한명의 스토리작가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상황은 안 좋았지만 을 살린 것은, ‘제록스’라는 신기술 덕이었다. 원화를 트레이싱지에 일일이 손으로 옮기던 작업을 복사로 대체하여 작업능률을 높이고 오리지널 터치의 생생함도 보존하는 ‘제록스’ 기법은 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애니메이터의 감정이 살아 있는 다양한 표정의 터치가 그대로 트레이싱지에 옮겨졌고, 101마리나 되는 점박이 강아지들의 무수하고 다양한 움직임도 거뜬하게 스크린 위에 살아났다. 제작진의 규모가 축소된 상황에서 제록스 기술이 없었으면 만들 수 없었을지도 모르는 작품이 바로 이었다. 생생한 필선으로 살아난 사랑스럽고 씩씩한 이 점박이 강아지들은 1996년 존 휴즈가 제작을 맡아 동명의 실사영화로 리메이크된다. :: 인어공주 1989 디즈니 신화의 재림 1966년 폐암으로 월트 디즈니가 죽은 뒤,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몰락의 기미를 보였다. <멋쟁이 캣>(1970), <로빈 훗>(1973) 등의 잇따른 흥행저조는 80년대 초까지 이어졌고, 더이상 새로운 시도도 없었다. 1984년, 파라마운트 픽처스에 있었던 마이클 아이스너와 제프리 카첸버그는 각각 디즈니의 회장과 제작담당으로 새로운 팀을 짜, 디즈니의 변화를 위한 기반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지리한 부진 끝에 디즈니는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았다. 자신의 강점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다시 그것을 행하기 위해서 어떤 준비가 필요한지 생각했다. 그들은 <백설공주>의 전략을 택했다. 바로 고전동화의 풍부한 감동을 애니메이션으로 각색해내는 것. 1989년 <잠자는 숲속의 미녀> 이후 30년 만에 고전을 각색한 <인어공주>가 대성공을 거두고 애니메이션의 황금시대를 연 것은, 분명한 ‘마케팅’의 결과였다. <인어공주>의 원작은 1837년에 안데르센이 쓴 <아이들을 위한 요정 이야기> 개정판에 수록되었던 동명의 동화다. 인간 세상에 매료된 아름다운 인어 에리얼의 이야기를 존 무스커와 론 클레민츠 감독은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말괄량이 인어캐릭터를 만들어냈다. 기술적으로는 15만장 이상이라는, 일반적인 애니메이션에 쓰이는 것보다 훨씬 많은 수의 셀을 사용하고 특수효과를 충분히 써서 부드러우면서도 파격적인 새로운 감각의 영상을 완성했다. 바다 한복판의 폭풍이나 요동치는 돛, 물고기떼, 수면에 반사되는 풍경, 물거품 같은 것을 나타내기 위해 <인어공주>의 약 팔할의 장면에는 특수효과가 사용됐다. 탄탄하고 감동적인 이야기, 실제보다 아름다운 영상과 감성을 울리는 음악, 재치있는 유머까지, <인어공주>는 팔릴만한 요소들로 가득한 새롭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애니메이션이었다. 풍부한 뮤지컬 장면은 어린이와 청소년만이 아니라 20대 연인들까지도 극장으로 끌어들이는 데 조력했다. 풍부한 조연캐릭터들이 자아내는 현대적인 유머는 곳곳에서 성인 관객의 웃음을 끌어냈다. :: 라이온 킹 1994 디즈니의 절정, 그러나 고답적인 애니메이션 사상 최고의 흥행기록을 세운 <라이온 킹>은 언제나 남의 이야기를 차용하던 디즈니 스튜디오가 처음으로 오리지널 스토리를 지어내 만든 작품이었다.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등의 잇따른 성공으로 자신감을 되찾은 디즈니 스튜디오가 과감하게 구미에 맞는 새로운 이야기를 직접 지어낸 것이다. <라이온 킹> 스토리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데츠카 오사무의 <밀림의 왕자 레오>의 이야기는 물론 캐릭터까지 훔쳐갔다고 비난했다. 아프리카 초원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숙부 무파사에 의해 사자의 왕이던 아버지를 잃은 어린 사자 심바의 이야기 <라이온 킹>은 <밤비> 이후 다시 동물캐릭터가 주도하는 작품이다. <밤비> 제작 과정에서 동물원을 찾았듯이 <라이온 킹> 제작진은 아프리카 현지답사를 통해 실제 풍경을 스케치했고, 스튜디오에 아예 사자를 데려다놓고 동작과 표정을 연구했다. 들소떼가 화면을 가득 메운 채 달리는 장면의 스펙터클을 위해서는 따로 컴퓨터그래픽팀이 장기간 작업을 하기도 했다. <라이온 킹>은 엘튼 존이 주제가를 부르고 한스 짐머가 음악을 맡아 음악으로 감동을 강요하는 기존의 전략을 고수한다. 동물의 세계를 다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착한 사자는 밝은 색으로 나쁜 사자는 어두운 색으로 표현한다든지 한 것으로 인해 <라이온 킹>은 <알라딘>에 이어 인종차별적인 태도가 보인다는 지적을 받았다.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함’은 이즈음 계속하여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받는 공격이었다. 1995년 디즈니는 픽사와 공동으로 인형이 나오는 3D 디지털 애니메이션 <토이스토리>를 만든다. 1996년에는 카첸버그가 드림웍스를 차리며 떠난 후 첫 작품 <노틀담의 꼽추>를 개봉한다. <노틀담의 꼽추>는 학부모들의 원망을 들을 정도로 성인용 작품의 색채를 더욱 강하게 띤 작품이었다. 이후 디즈니는 그리스신화의 이야기를 처음으로 다룬 <헤라클레스>(1997), 중국 민담에서 스토리를 따온 여성전사의 이야기 <뮬란>(1998), 열대밀림을 배경으로 한 <타잔>(1999), 그리고 <쿠스코? 쿠스코!>(2000)까지 다양한 신작들을 발표해왔다. 그것은 곧 끊임없이 좀더 신선한 소재, 감동적인 드라마를 찾아 다니는 디즈니 스튜디오의 행보였다. 그러나 ‘디즈니적인 것’이 반복될수록, 무엇을 다루든 디즈니 것은 똑같다는 인상이 생겨나고 획기적인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관객의 기대는 더욱 높아져만 가는 것 또한 사실이다. 새로우면서도 익숙한 것, 비슷하면서도 다른 즐거움을 주는 것, 기발하면서도 편안한 느낌을 주는 것.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돈을 버는 것. 어떤 영화사와 마찬가지로, 디즈니의 애니메이션도 동일한 고민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 미녀와 야수 1991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야수의 성에 들어가 역시 사랑으로 야수에게서 왕자의 모습을 되찾아내는 여인 벨의 이야기. <비 아워 게스트> 노래가 흐르는 무도회 장면에서 화면은 매우 드라마틱한 카메라워크로 담아낸 듯한 영상을 그려낸다. 판타지를 뿜어내는 역동적인 영상이 인상적인 작품 <미녀와 야수>는 미국 내에서 6개월 이상 극장에 걸렸다. :: 포카혼타스 1994 디즈니가 채택한 첫 실재 인물의 이야기. 인디언 처녀와 그녀의 마을에 들어온 영국인 개척자의 사랑을 그렸다. 제작진은 실재 이야기에서 가능한 한 아름답고 드라마틱한 요소들을 부각시키려 했으나, 그 과정에서 발생한 역사적 사실의 왜곡은 비난을 사기도 했다. 제프리 카첸버그가 제작에 관여한 마지막 디즈니 작품. 1994년 아이스너와의 불화로 카첸버그는 디즈니를 떠나 드림웍스사를 세웠다. 최수임 기자 sooeem@hani.co.kr *참고문헌 : 황선길저 <애니메이션 영화사>(범우사 펴냄), 데이비드 코에닉저/ 서민수역 <애니메이션의 천재 디즈니의 비밀>(현대미디어 펴냄), 데이브 스미스저 (Hyperion), 밥 토마스저 "Disney’s Art of Animation-From Mickey Mouse to Beauty and the Beast"(Hyper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