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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신작 프로젝트 [4] - 유하 감독의 <결혼은 미친 짓이다>

싸이더스가 제작하는 <결혼은 미친 짓이다>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마누라 죽이기> 이후 오랜만에 스크린으로 돌아오는 엄정화도, 영화 데뷔를 하는 감우성도, 지난해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이만교의 원작소설도 아닌 감독 유하다. 1993년 초 개봉한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이후 10년에 가까이 절치부심해온 감독이 만들 신작의 모양새가 궁금하기 때문이다. 그 궁금증은 당시에 비해 급격히 나아진 제작환경 속에서 비로소 드러날 감독의 영화적 역량에 머물지 않고 <무림일기> 등의 시작(詩作)에서 보여줬던 날카롭게 후려치는 검객의 풍모를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까지 이어진다. 지난해 발표한 <천일馬화>라는 시집 제목처럼 “그동안 경마장이나 다니며 살았다”는 그는 한동안 영화에 대한 생각을 버린 채 지냈지만, “첫 영화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기 때문에 한편 더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음도 숨기지 않는다. 지난해 8월쯤 시나리오를 마무리지었으나 여자주연 캐스팅문제로 제작이 1년 가까이 연기되다보니, 오히려 차분하고 꼼꼼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며 자신감도 슬쩍 내비친다. 제목에서 연상할 수 있듯 이 영화는 결혼이라는 것이 담고 있는 관습, 제도, 규범에 시비를 걸기 위한 것이다. 유하 감독은 “일부일처제가 지배한다지만 우리 사회에서 남성은 외도라든가 별 짓을 다 하는데 여성은 ‘일부종사’라는 이데올로기에 묶여 있다. 그런데 원작소설은 여자가 ‘두집 살림’을 하는 등 내용에서 ‘불온함’이 느껴져 마음에 들었다. 즉 현실의 결혼이라는 시스템이 갖고 있는 허위의식을 폭로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이 작품을 맡게 된 배경을 설명한다. 그래서, 장르적으로 분류하자면 멜로드라마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일반 멜로드라마의 반대편에 놓이게 될 거라고 얘기한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이 영화는 “사실주의적 초상화를 지향하는”, “홍상수 영화와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중간쯤에 자리하는 작품”이다. 영화에 섹스신이 등장하긴 하지만, 두 남녀의 교감이라는 측면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섹스장면 자체보다는 “섹스가 끝난 직후의 스산하고 허탈한 느낌”에 중점을 둘 계획이다. 남녀주인공은 섹스가 끝난 뒤 진담은 거의 하지 않고 끝없이 농담을 주고받는데, 그 농담도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냉소적인 블랙 유머에 가까운 것이다. 따라서 눈물을 유도하기보다는 쓸쓸한 느낌을 전달하는 데 힘을 기울일 생각. 또 “일반인의 통념인 ‘애정 먼저, 육체적 관계 나중’이 아니라 <포르노그래픽 어페어>에서처럼 그 반대의 이야기가 담겨질 것”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이 작품을 통해 7년 만에 영화에 출연하게 되는 엄정화는 <바람부는 날이면…>을 통해 충무로 데뷔한 탓에 유하 감독과는 각별한 사이. 그녀가 맡을 연희라는 캐릭터는 능력있는 커리어우먼이면서 결혼이라는 제도에 순응하고, 이를 이용할 줄 아는 현실적인 여성. 사실 엄정화는 가수, 섹시스타라는 이미지가 너무 강하기 때문에 캐스팅하는 데 부담은 있었지만, 웬만한 배우들보다 연기를 잘한다고 판단됐기 때문에 전격 기용했다. 준영역의 감우성 역시 유하 감독이 처음 원작을 시나리오로 옮길 때부터 염두에 뒀던 인물이라서 제작진은 만족스러운 상태다. 이 영화의 화자이기도 한 준영은 ‘먹물근성’이 강한, 다소 우유부단한 성격의 소유자. 회색지대에서 부유하는 남성의 이미지가 그에게 잘 어울릴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내 스타일을 강하게 가져가기보다는 배우들의 다큐멘터리적인 연기를 자연스럽고 효과적으로 담는 것이 관건”이라는 유하 감독의 <결혼은 미친 짓이다>는 9월 크랭크인할 예정이다. 연출의 변 거의 10년 만에 두 번째 영화를 만드는 만큼 부담은 간다. 그동안 충무로의 환경도 많이 바뀌어 왜 진작 영화를 안 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즐겁게 일하고 있다. ‘입봉’한다는 자세로 임하고 있다. 결혼이라는 획일적인 제도에 대한 다양한 담론이 필요한 만큼, 결혼을 고민하는 20대 미혼남녀도 많이 보러 와줬으면 좋겠다. 이런 영화 집안에서 결혼을 재촉하는 30대 초반의 준영은 친구 규진의 소개로 연희를 만난다. 어두운 거리를 헤매던 둘은 결혼제도에 관해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그날 밤을 격렬한 섹스로 마무리짓는다. 준영과 연희는 만남은 계속하지만 서로를 구속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는 동안 준영은 제자인 세은과 데이트를 하기도 하고, 규진이 신혼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유부녀 지영과 바람을 피운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다른 남자와의 결혼을 생각하는 연희를 바라보게 된다. 결혼 생각을 굳히고 나서도 연희는 준영과 백화점을 돌며 쇼핑도 하고 ‘신혼여행’도 함께 떠난다. 결혼한 뒤에는 준영의 집을 들락거리며 준영과 ‘주말부부’로 지낸다. 이들의 관계는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한국영화 신작 프로젝트 [7] - 백운학 감독의 <튜브>

심오한 예술혼도 아니요, 기가 막힌 상상력도 아니다. 백운학(37) 감독의 ‘욕심’은 다른 데 있다. 그는 첫 작품 <튜브>(가제)가 그저 “신나는 오락영화였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이야기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버스에서 지하철로 바뀌었을 뿐, 한국판 <스피드>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전반부는 지하철을 탈취한 뒤 인질극을 벌이는 테러리스트와 그를 잡기 위해 나서는 형사의 대결이, 후반부는 적을 제압했으나 이번엔 멈추지 않는 지하철을 세우기 위해 고투하는 형사의 활약이 주를 이룬다. 감독은 뒤에 영화를 보고 나온 관객이 “저거 완전히 베낀 거잖아”라고 욕을 해도 상관없다고 말한다. 관람하는 동안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을 만끽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튜브>는 이처럼 “할리우드의 도식과 컨벤션을 충실하게 따르기로 작심한 영화”이다. 시나리오가 나온 때가 1년 전이지만, 캐스팅 때문에 <튜브>는 프로덕션 일정이 많이 늦추어졌다. 그때만 하더라도 주인공은 여자 형사였다.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캐스팅을 진행하던 차에 그는 한석규가 시나리오를 재미있게 읽었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설정을 바꾸는 게 어떨까 하는 프로듀서의 제안에 처음에는 “드라마를 너무 많이 흔들어야 하는 부담” 때문에 거절했다. 하지만 결국 고쳤다. 모험을 떠나기에 앞서 흥행 보증수표를 쥘 수도 있다는 유혹을 떨치기란 쉽지 않았으니까. 이후 4개월 동안 시나리오를 고쳤으나 캐스팅은 불발됐고, 그에겐 얻기 힘든 교훈 하나만이 주어졌다. “그땐 한참을 헤맸다. 처음부터 중심을 잡고 있었다면, 프로젝트 추진이 늦추어지지 않았을 텐데. 너무 쉽게 가려했던 것 같다.” 선명한 이야기 선이 오히려 ‘밋밋하다’는 지적도 있어, 그는 디테일한 장면묘사에 신경쓸 생각이다. 단순히 볼거리 하나를 더 늘리겠다는 말은 아니다. 그는 조감독으로 참여했던 <쉬리>의 총격장면을 들며, “공들여 만들었지만 인물들에 대한 배려가 없어 관객이 감정을 푹 찔러넣지 못한 것 같다”고 말한다. 이번 영화의 관건은 특수효과가 아니라 정신없는 도심 총격전 와중에도 “인물이 살아나는” 장면연출이라는 뜻이다. 지하철 내 액션만 하더라도 그렇다. 그에 따르면, 5분만 지나도 좁은 공간에서 카메라가 구사할 수 있는 숏은 다 떨어진다는 것. 카메라의 앵글과 사이즈의 미세한 변화도 중요하지만, “인물들의 움직임 자체가 눈길을 잡아끌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어쨌든 품새를 잡으려면, 두둑한 노잣돈이 필요한 법. 순제작비만 45억5천만원이다. 현재 제작중인 지하철 2량에 들어가는 돈만 해도 5억원. 붐비는 지하철 2호선을 모델로 시나리오를 썼던 터라 제목을 <튜브2030>이라고 붙였지만, 7호선으로 설정을 바꾸는 바람에 일단 ‘2030’이라는 호수를 뗀 뒤 맘에 드는 제목을 고르는 중이다. 세트는 양수리에 있는 종합촬영소가 너무 비좁아 경기도 의정부나 충북 음성쪽에 적당한 곳을 물색하고 있다. 김석훈이 장형사 역으로, 오랜만에 스크린으로 돌아오는 장군의 아들 박상민이 테러리스트 강기태 역으로 나온다. 장형사를 연모하는 인경 역은 아직 미정캐스팅만 마무리되면 9월 중순부터 스물여섯에 영화과 문을 두드렸던 늦깎이 감독의 소박한 꿈이 영글어갈 것이다. 연출의 변 “흥부와 놀부 이야기처럼 다 아는 스토리도, 유별나게 재밌게 꾸며내는 사람이 있다. 이번 영화가 그랬으면 좋겠다. 물론 그걸 못한다면 그건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 다 내 몫이다.” 이런 영화 특수요원 장도준은 강기택이라는 테러리스트로부터 권력실세 송일권 의원을 구해낸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연인 진희를 잃게 되고, 심한 자학에 빠진다. 죄책감으로 일을 손에 잡지 못하는 그는 결국 지하철 수사대로 좌천된다. 한때 도준의 지갑을 훔치다 붙잡힌 소매치기 인경은 그런 그에게 연정을 품지만, 도준은 그녀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한편 강기택은 차기 대권후보인 서울시장의 지하철 국정홍보 행사에 나타나 자신을 사주한 인물 중 하나인 시장을 살해하고 지하철을 탈취한다. 검은 세력의 충복이었지만, 오히려 제거당할 처지에 몰리자 이에 대한 앙갚음으로 일을 벌인 것. 강기택은 또 한명의 타깃인 송일곤 의원의 치부를 온 세상에 드러내고, 지하철을 죽음의 벼랑으로 몰아넣어 복수하려 한다. 장도준은 붕괴 위험이 있는 대교 위에서 강기택과 피할 수 없는 일전을 벌이게 되고, 결국 진희의 목숨을 앗아갔던 강기택을 제압한다. 하지만 자신이 검은 세력의 주구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송 의원은 지하철을 또다른 죽음의 터널로 밀어넣는다.

한국영화 신작 프로젝트 [9] - 변영주 감독의 <피크닉>

<피크닉>이 시작된 것은 지난해 봄의 일이었다. <숨결>을 매듭지은 변영주 감독은 영상원 강의가 같은 요일에 있던 오기민 프로듀서- 두 사람은 1990년 노동자 문화예술 운동연합(노문연) 시절부터 호형호제하는 사이다- 와 마주쳐 쉬는 시간을 같이 보내고 있었다. 그날 오 PD가 주머니에서 구슬 쏟아내듯 좌르르 풀어놓은 숱한 아이디어들 가운데, “멀쩡한 남자와 여자가 유괴를 저지른다. 남자는 죽고 여자와 어린애만 남는다”는 싱거운 두 문장이 변영주 감독의 귀에 유독 감겨들었다. 듣자마자 두 그림이 떠올랐다. 하나는 범죄에 실패한 한 남자가 두려움에 울며 땀투성이로 도망치는 장면, 하나는 어느 꼬마와 여자가 멀리 지평선이 걸린 길을 걷는 모습이었다. 며칠 뒤 그는 오 PD에게 전화를 걸어 “형, 그거 내가 하고 싶으니까 이제 그런 영화 만들겠다는 말, 하고 다니지 마!”라고 다짐하고 있었다. <유괴>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닻을 올린 프로젝트는 박찬욱 감독의 또다른 유괴영화 소식이 들리면서 가제를 <피크닉>으로 바꿔 달았다. 현재 시나리오 초고까지 진도가 나간 <피크닉>은 ‘이 땅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을 노래할 수밖에 없는 영화처럼 들린다. 변영주 감독은 그리 길지 않은 인터뷰 중 <피크닉>을 가리켜 “한마디로, ‘그녀의 인생을 살다’예요”라고 세번쯤 말했다. 한 여자의 인생에 한 남자와 한 어린아이가 잠시 들렀다간 사건을 기록하긴 하지만, 영화가 줄곧 뜨겁게 주시할 진짜 주인공은 결국 ‘그녀’라는 소리다. 여자 역 캐스팅에 힘이 실릴 것도 당연한 노릇. 다큐멘터리도 내내 필름으로 작업해온 변영주 감독은 첫 장편 극영화 <피크닉>의 밑그림을 자연광 조명과 핸드헬드 촬영으로 어렴풋이 그려보고 있다. “실내 신이 많지만 모든 것이 다 보여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대신 보이는 것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어야 한다. 핸드헬드 촬영의 정수는 흔들리지 않으려는 안간힘에 있다고 생각한다.” 모르는 이들의 ‘친절한’ 걱정과 달리 변영주 감독은 충무로 적응에 자신있어 한다. 기록영화 제작소 보임 시절에도 “우리도 설득 못하면 어떻게 관객을 설득하겠냐”는 엄한 기획팀을 납득시켜야 촬영에 들어갈 수 있었던 그다. 자기를 ‘스폰지’라고 부르고 또 감독은 그래야만 한다고 여기는 변영주에게, 충무로 데뷔는 흡수할 에너지 원이 더 많아졌다는 희소식이다. 그가 지금까지 실감한 다큐멘터리와 극영화 사이의 가장 깊은 골은, ‘존재하는 인간을 응시하는 작업과 존재하지 않는 인간을 창조하는 작업의 간극’. 캐릭터를 꼼꼼히 매만지기보다 자꾸 살아 있는 사람인 양 속넓게 받아들이려 해서 골치라고. 변영주 감독은 지난 1월 왼쪽눈 백내장 수술을 받았다. 그건 영영 직접 카메라를 잡기 힘들다는 뜻이고, 다시 다큐멘터리를 찍는다 해도 7년간 터득한 방법론에 안녕을 고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촬영감독과 협력할 <피크닉>은 미래의 모든 변영주 영화들을 위한 ‘발명’의 작업이 될지도 모른다. “이제 ‘저, 감독님 존경해요!’말고 ‘저, 감독님 영화 봤어요’라는 소리를 듣고 싶다.” 그것이 11월의 스산한 바람이 불면, 용감하게 첫 충무로 피크닉에 나설 변영주 감독이 슬쩍 내비치는 희망사항이다. 연출의 변 “ 누가 누구와 마침내 소통했다는 이야기는 내게 그다지 재미있지 않다. 그보다 그 소통을 이뤄내기 위한 망설임과 꿈틀거리는 모멘트들이 재미있다. “너 아프지?” “아니.” “너 아프지?” “아니.” “너 아프지?” 그런 문답을 질기게 거듭해 끝내 “그래, 나 실은 아파”라는 대답을 듣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카메라 움직임만으로 인물의 관계를 설명하는 다큐멘터리에서 축적한 경험도 잘 활용해볼 심산이다. ” 이런 영화 주인공은 <나쁜 영화> 속 소녀의 10년 뒤가 이렇지 않을까 싶은 20대 여자. 20대 후반의 어느 평범한 은행원과 그녀는 ‘나름의 방식’으로 연결된 커플이다. 여자는 은행원의 자취방에 정한 때 없이 찾아들고 남자는 그런 여자를 사랑한다. 무거운 과거와 큰 빚을 짊어지고 있는 그녀의 고통을 덜기 위해, 남자는 무슨 일이라도 저질러서 돈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부잣집 딸을 유괴한다. 그러나 유괴한 꼬마는 마음의 흉터로 말미암아 입을 열지 않아 몸값 협상을 위한 목소리 녹음마저 여의치 않다. 여자는 밀폐된 장소에서 아이를 보살피다가 정이 들고 돈을 받아내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남자는 사고로 어이없이 숨진다. 은신처를 잠깐 나선 여자는 TV로 남자의 죽음을 알게 되고, 가족에게 돌아가길 거부하는 아이와 함께 길을 떠난다.

하이퍼텍 나다 1주년 기념 영화제 개최

25일 개관 1주년을 맞는 서울 대학로의 동숭아트센터 '하이퍼텍 나다' 극장이 20∼24일 '하이퍼텍 나다 베스트 컬렉션'을 개최한다. 지난 1년 동안 상영한 영화 가운데 관객의 앙코르 요청에 따라 「키즈 리턴」「하나 그리고 둘」 「구멍」 「동경의 주먹」「대학로에서 매춘하다가 토막살해당한 여고생 아직 대학로에 있다」 「히로시마 내사랑」 「제7의 봉인」 「가을 소나타」 「차례로 익사시키기」 「토미에 리플레이」 「소용돌이」 등 11편을 골랐다. 25일에는 홍콩 프루트 챈 감독의 「리틀 청」을 개봉한다. 동숭아트센터는 서울에 이어 부산, 대구, 광주, 대전, 전주, 제주 등 전국 6개도시에서 `하이퍼텍 나다 베스트 컬렉션'을 순회 상영할 계획이다. 29일부터 9월 2일까지는 시네마테크 부산에서, 9월 2일부터 6일까지는 제주 피카디리 극장에서 마련되며 나머지 지역의 상영 일정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동숭아트센터 1층에 자리잡은 하이퍼텍 나다는 관객이 직접 만들고 꾸미는 '토털맞춤 영화관'을 지향하고 있으며 △국제필름마켓 관객 참가를 통한 상영작 선정 △관객 리퀘스트 기획영화제 △문화예술계 인사의 이름이 새겨진 좌석 선택제 등으로 극장가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02)766-3390 (서울/연합뉴스)

일본은 있다

제작연도 2001년, 광고주 비알코리아 제품명 배스킨라빈스 `슈팅스타` 대행사 LG애드 제작사 매스메스에이지(감독 박명천) 개인적으로 일본 남성이 잘생겼다고 생각한다. 반일정서가 팽팽한 현재와 같은 시국에 새빨간 원을 후광처럼 달고 있는 이들을 놓고 한가한 외모평을 늘어놓는다는 것이 부적절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한일 축구전을 볼 때 염불보다 잿밥에 관심이 있는 축구 문외한으로서 우리네 선수도 일본선수처럼 세련되게 멋을 좀 부렸으면 좋겠다고 바람하곤 한다. 정말이지 우리 선수들이 선호하는 맥가이버 헤어스타일, 피부색과 이미지를 고려하지 않은 염색머리 등은 불만족스럽다. 이것이 외모지상주의이건, 어리석은 사대주의이건 간에 TV수상기를 관통하는 인물은 모방의 욕구를 자아내는 스타일을 갖춰야 한다는 게 사견이다. 때로는 그것이 왜곡되고 획일화된 미의 기준을 제시하는 부작용도 낳지만. 어쨌든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일본 남성 하면 앞서가는 유행코드를 갖고 있는 진보족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됐다.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었는지 동시대의 이미지를 선도하는 광고도 일본모델에 잔뜩 눈을 돌리고 있다. 일본 태생의 브랜드에 일본모델이 출연하는 경우도 있고, 일본모델이 출연한 다국적 브랜드의 광고가 글로벌전략에 따라 안방극장을 찾는 예도 있다. 시세이도의 마쉐리 샴푸 광고가 전자에 해당한다. 이 CF는 전철에서 한 남자가 옆자리에 앉아 졸고 있는 생머리 여인의 머릿결에 반하고, 마침내 상상의 세계에서 그의 머릿결을 손의 촉감으로 확인해본다는 스토리를 담고 있다. 생머리 여인은 ‘바비인형’을 닮은 국내스타 한채영이고, 광고의 시선이 주로 주목하는 남자주인공은 일본인이다. 다키자와 히데야키라는 일본스타인데 인기그룹 ‘자니스 주니어’의 리더이자 배우인 만능엔터테이너형 연예인이다. 남녀모델의 국적을 따지면 한일 합작의 형태를 띤다. 그러나 국내스타가 등장함에도 일본 자체제작의 광고라서 그런지 전체적인 분위기가 국내 정서에 밀착하지 못한 채 기름처럼 둥둥 뜬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청바지브랜드의 대명사인 리바이스 CF는 수입광고지만 국내에도 잘 통하고 있다. 주인공은 국내에도 잘 알려진 아이돌밴드의 대명사, 스마프의 최고인기멤버 기무라 다쿠야. 굳이 그가 그 유명한 기무라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더라도 청바지를 입은 채 자유자재의 몸놀림을 선보이는 청년의 모습은 시선을 매혹한다. 리바이스 청바지가 얼마나 착용감이 편하고 자유롭게 개성을 뽐낼 수 있는지, 기무라의 몸짓만으로 충분히 알겠다. 굳이 카피를 통한 부연설명이 필요없다. 180도로 양다리 벌리기, 덤블링하기, 자신감에 찬 미소짓기 등 모델의 매력을 극대화하면서도 그 한가운데에 제품을 배치해 메시지의 파워를 높인 매력있는 광고다. 글로벌 브랜드에 외산이라는 거부감을 갖는 게 시대착오적일 만큼 세계화의 길을 걷고 있는 시대에 일본모델이 광고에 등장한다는 것은 그리 따근따근한 뉴스는 아니다. 그러나 가끔은 당혹스럽다. 리바이스 광고에 매료당한 나머지 유사 부류의 국내스타와 비교하며 일본스타의 비교우위론을 성급하게 판단한 뒤 왠지 뒷맛이 찜찜해지는 것은 일단 제쳐둔다. 매력적인 낯선 모델을 발견했는데 알고보니 그의 국적인 일본인이었다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오히려 더 아슬아슬한 기분이 든다. ‘골라먹는 재미가 있다’라는 명쾌한 슬로건으로 승승장구해온 배스킨라빈스 광고는 최근 캠페인의 전략에 변화를 꾀했다. 배스킨라빈스의 다양한 아이스크림 브랜드를 개별적으로 알리는 방식을 택했다. 그 첫 탄에선 머리를 온통 분홍빛으로 물들인 한 청년이 연신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쏘는 듯한 시늉을 내며 ‘슈팅스타’라는 아이스크림 이름을 알린다. 아이스크림의 색상과 똑같은 머릿빛, 브랜드에 따른 장난스러운 손가락 동작 등을 보면 그 청년은 ‘슈팅스타’의 화신이나 다름없다. 제작진이 당초 신비모델 전략을 구사한다며 이름을 공개하지 않은 이 모델은 이미 한 의류브랜드의 국내광고에 등장한 바 있는 오모테 모토미치라는 일본인. 그는 한국말 대사도 들려주는데 일본인의 어설픈 한국말이 젊은 시청자에게 오히려 더 호소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한다. 이 광고에 일본인 모델이 등장한 배경은 다음과 같은 일련의 절차를 거쳤을 터이다. 무명모델 전략을 세웠고, 10대와 20대를 겨냥하고 슈팅스타의 이미지에 맞는 ‘신선한 피’를 물색했을 것이다. 그런데 국내에 마땅한 인물이 없어 일본모델을 기용했을 것이다. 트집잡을 것 없는 제작과정이다. 파란 눈의 서양인 모델이 빈번하게 국내광고를 방문하고 있는 것과 견주면 일본인 모델의 한국TV 방문을 왈가왈부할 순 없다. 그러나 당당하게 드러내지 않은 채 은밀하게 국경을 넘나드는 방식은 마뜩찮다. 취사선택과 비교판단이 가능하지 않은 상태에서 가랑비에 옷이 젖듯 서서히 그들의 미적 기준에 수동적으로 동화돼 피와 아의 구분이 혼란스러워진다는 것은 위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적이 무슨 대수냐고? 그러고보니 이미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란 가치를 버린 지 오래된 자가 속내에는 바지런히 남의 아름다움을 탐하면서 일말의 정체성을 지키겠다고 아둥바둥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조재원/ <스포츠서울> 기자

떠나볼까?

개 키워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개들은 참 별거 아닌 거 가지고 가슴이 뛴다. 빵봉지라도 뜯을라치면 바람같이 나타나서 휘둥그레진 눈으로 뚫어질 듯 쳐다본다. 조그만 가슴 역시 두근두근한다. 요새처럼 변화무쌍한 날씨에 천둥이 치면 후다닥 뛰어온다. 끌어당겨 안으면 내 몸까지 떨릴 정도로 두근거린다. 어린아이들도 그런다. 아주 사소한 것 가지고도 흥분한다. 기쁘거나 놀랍거나 무서워서 두근두근해진다. 어른들은 그렇지 않다. 나이 들면 여간 대단한 일이 아니면 두근거리지 않는다. 일정 두께 이상의 철갑을 두르지 않고서는 사회라는 곳에서 그럭저럭 살아가기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때로는 철갑 밑에서 외로워진다. 단조로운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꼭 뗏목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야 모험이 아니다. 매일 가는 출근길, 매일 보는 가족에서 벗어나기만 해도 모험이다. <그란디아>는 롤플레잉 게임이다. 모든 롤플레잉 게임과 마찬가지로 주인공은 모험을 떠난다. 천성적으로 움직이는 걸 귀찮아 하는 게으른 성격에도 불구하고, <그란디아>를 하다보면 나도 어디론가 떠나볼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항구를 떠나 힘차게 전진하는 배의 돛은 마침 불어오는 순풍에 있는 대로 부풀어오른다.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세계의 끝’을 올라가다보면 한순간 독수리가 되어 하늘 꼭대기까지 볼 수 있다. 텐트를 치고 모닥불 앞에 둘러앉아 먹는 소박한 식사는 그 어떤 대단한 요리보다 맛나고, 먹느라고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떠들어대는 수다는 하루의 피로를 깨끗이 씻어준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보다 인상적인 건, 여행을 통해 만나는 사람들, 또 긴 여행이 끝난 뒤 비로소 어른이 되는 아이들이다. 이 게임을 하면서 느끼는 두근거림은 어른이 아니라 아이들의 마음에 가깝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하다. <그란디아>에는 모험이 있다. 무시무시한 괴물들과의 전투를 거듭한 끝에 결국 세계를 구한다. 하지만 진짜 모험, 게임을 하는 내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건 따로 있다. 머리랑 꼬리가 그대로 달린 바닷가 마을의 물고기모양 집은 신기하기 이를 데 없다. 끝없는 늪지대의 거대한 식인 식물은 무서우면서도 자꾸 만져보고 싶어진다. 사막, 삼림, 해변, 설원에서 각각 다른 옷을 입은 사람들이 다른 모양의 집에서 다른 음식을 먹으며 산다. 고대 문자가 새겨진 사원의 구석구석을 뒤지면 숨겨진 보물을 찾을 수 있다. 이 모든 게 너무 신기하고,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두근거린다. 더 중요한 건, 아무도 다치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모험은 위험하다. 많은 사람을 아프게 한다. 어른의 모험에서는 당사자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까지 다치는 경우도 많다. 가까운 사람들일수록 더 그렇다. ‘가정을 깰’ 생각은 추호도 없이 저지르는 가벼운 연애는 ‘배신당한’ 당사자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상처입힌다. 잘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소설가나 영화감독, 밴드맨이 되고 싶다면, 아이들의 조그만 배를 곯릴 각오부터 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지레 겁을 먹고 포기한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걸 얻기 위해 스스로 포기한 꿈을 괜스레 들먹이며 얄팍한 형용사 몇개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도 저도 못하면서 신경질만 내고 불만만 터뜨린다. <그란디아>는 원래 비디오 게임이지만 2편은 PC용으로 나왔다. 게다가 한글판이다. 많은 돈과 강인한 육체와 대단한 각오 없이도 모험을 떠날 수 있으니 이거야말로 기술 혁명의 축복이다. 박상우/ 게임평론가 sugulman@chollian.net

내시경으로 관찰한 할리우드

피터 바트 지음·김경식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 1만2천원 1994년 9월 디즈니의 제작담당 이사 조 로스는 두곳으로부터 급한 연락을 받았다. 하나는 제작부문 사장 카첸버그로부터 온 것이었다. “헬기 사고로 사망한 서열 2위 프랭크 웰즈의 자리를 내가 맡게 됐으니, 제작부문 사장 자리를 당신이 맡아달라”라는 의사타진이었다. 두 번째 연락은 회장 마이클 아이즈너로부터 왔다. 카첸버그의 자리를 맡아달라는 건 같았지만, 카첸버그는 승진이 아니라 해고된다는 소식을 함께 전했다. 잘 알려져있듯이 카첸버그는 디즈니에서 밀려난 직후 스티븐 스필버그, 데이비드 게펜과 함께 드림웍스를 창립했고 7년 와신상담 끝에 올해 <슈렉>으로 아이스너에게 멋지게 복수했다. 두해 전 밀린 보너스 2억5천만달러를 지급하라며 카첸버그가 디즈니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는 기묘한 풍경이 벌어졌다. 디즈니의 변호인은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앞날이 매우 불확실하며 디즈니가 큰 수익을 내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고, 카첸버그의 변호인은 디즈니의 번성을 강변했다. <할리우드의 영화 전략>은 98년 여름 시즌을 주무대로 할리우드 메이저들이 벌이는 흥행 전투를 몰래 카메라로 엿보듯 생생하게 기록한 책이다. 현재 <버라이어티> 편집장이며 메이저 스튜디오 간부를 역임한 피터 바트가 신랄한 필치로 그려내는 그들의 전투는, 예상과는 달리 흥행의 신들이 벌이는 고도의 지능 게임이 아니다. 오히려 신경과민자들이 벌이는 집단 난투극 혹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음모와 모험의 퍼레이드”다. 이 전쟁은 생존자들에게도 심각한 내상을 입혀 “이젠 할리우드를 떠나고 싶다”고 실토하게 만든다. <타이타닉>으로 영화사상 최고의 수익을 올린 뒤 폭스의 임원은 이렇게 말했다. “카메론과 같이 영화를 만드는 일은 질병과 약혼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이 책은 탁월한 논픽션이다. 뉴저널리즘의 전통에 충실한 피터 바트의 서술은 믿기 힘들 만큼 구체적이다. “다음날인 금요일 늦은 오후, 셰리 랜싱은 차 안에서 리처드 로벳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버네딕트 캐니언의 자기 집으로 가는 중이었다. 시간은 7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고, 그녀는 피곤했다. 게다가 로벳의 전화가 전파 장애로 인해 끊겼다가 들렸다가 하는 바람에 짜증이 났다. 로벳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스티븐 스필버그와 톰 행크스가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하고 싶다는데요.’” 피터 바트는 영화의 기획, 제작, 배급에 이르는 전 시스템을 아우르는 광각렌즈와 엇갈리는 목적과 계산으로 밀담하고 화내고 배신하는 환호하는 할리우드 사람들의 미세한 움직임을 포착하는 현미경을 함께 사용해 마치 그 전투판을 함께 치러낸 듯한 느낌을 독자에게 전해준다. 그리고 이 진기한 관찰자는 할리우드가 이제 짙은 피로와 통제불능의 경제학에 빠져들었으며, 그걸 알면서도 누구도 제어할 수 없는 상태임을 또박또박한 어투로 일러준다. 그래서 서문에 적은 “영화사업은 매력적이고 자극적인데도 그들은 어떻게 하면 거기에서 벗어날까 하는 궁리를 하고 있다”는 수수께끼를 마침내 풀어준다. 할리우드영화 제작은 더도 덜도 아닌 거대한 도박이다. 도박은 감당할 만한 판돈일 때 재미있다. 이미 할리우드의 판돈은 제멋대로 움직이며 미친 듯이 커져가고 있는 것이다. “98년 여름, 경고등이 반짝였고 할리우드는 그 경고등을 보면서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허문영 기자

2001 한국영화의 발견, <소름>

오욕의 한국현대사 담긴 새로운 어법의 공포영화, 윤종찬 감독의 <소름> 탐구 1998년 7월 윤종찬은 미국 시러큐스대학에서 영화전공 석사학위를 마치고 귀국했다. 만 3년 만에 돌아온 한국은 유학을 떠나기 전 봤던 표정보다 어두웠다. 당시 한국사회는 IMF 터널에 갇혀 신음하고 있었다. 그는 그때 분위기를 또렷이 기억한다. “무너진 도덕에 대해 분노하는 사람도 없었고 뭔가 발언해야 할 사람들도 공격할 대상을 찾지 못하는 것 같았다. 현실이 너무 어수선하게 느껴지고 사회 자체가 미스터리 같았다.” 불과 3∼4년 전 실재했던 이런 위기감에서 우리는 얼마나 멀리 벗어나 있는 것일까? 윤종찬의 장편데뷔작 <소름>은 이런 질문을 던지는 데서 시작한다. 병든 사회에 살면서 둔감해진 주민들과 달리 그는 정말로 한국사회에 대한 두려움에 치를 떤다. 그건 유학을 떠나기 전 본 한국의 마지막 풍경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비극의 한가운데 선 자신을 발견하다 1995년 6월29일에 일어난 사건을 사람들은 지금 기억이나 할까? 희생자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면 언급마저 회피하는 일을. 그날 삼풍백화점은 무너졌다. 사망자 501명, 부상자 937명을 낳은 믿기 힘든 재난의 현장에서 그는 아내를 잃었다. 유학준비를 마치고 한달 뒤 미국행 비행기에 타는 일만 남은 시점이었다. <소름>의 등장인물들처럼 윤종찬은 불현듯 비극의 한가운데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나와 관계없는 일이라고? 그는 더이상 그런 말을 믿지 않는다. “창문으로 성수대교가 보이는 곳에 살았다. 어느날 다리 중간이 없어진 걸 봤지만 그때는 큰 느낌이 없었다. 하지만 1년 뒤 삼풍사고가 나자 정말 많은 걸 생각하게 됐다. 그건 천민자본주의의 잔해였고 누구도 자기 의지로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상처와 폐허를 뒤로 하고 떠난 미국 생활은 영화로 대화하는 법을 배운 시기였다. 영화과를 졸업하고 1992년 <비상구가 없다> 조감독을 한 경력도 있지만 그는 유학생활을 하면서 영화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을 시작했다고 말한다. 시러큐스대학을 다니며 만든 단편 삼부작에서 윤종찬이 천착한 주제는 ‘기억과 운명’이었다. 그건 ‘영화가 잘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맞닿아 있다. 첫 단편 <플레이백>은 이미지, 사운드, 자막을 낱낱이 뜯어내며 영화 속 시공간을 파괴한다. 두 번째 단편 <메멘토>는 <플레이백>에서 철저히 분해했던 요소들을 하나의 이야기, 복잡한 플롯에 짜맞췄다. 세 번째 단편 <풍경>에 이르면 단순하면서 지층이 두터운 영화를 볼 수 있다. 세 영화는 각기 시력을 잃어가는 여인과 그녀를 죽인 남자, 부모를 모르는 남자와 아들을 잃어버린 여자, 죽은 애인과의 추억을 그리워하는 남자와 사라진 여자를 찾으려는 남자가 주인공이다. 그들의 바람은 모두 지금 이곳에 없는 것을 불러내는 것이며 이미지는 종종 현실의 시간이 흘러가는 방향을 거슬러 그들의 소망을 실현시킨다. 물론 이런 기능을 수행하는 데는 플래시백처럼 단순한 기법이 있다. 영화 전체가 플래시백으로 이뤄진 <플레이백>은 그런 면에서 소박하다. 그러나 <메멘토>에 이르면 확연히 달라진다. <메멘토>는 사람과 사람 혹은 사람과 공간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의 흔적을 추적하며 <풍경>은 두 남자의 교감을 통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든다. 이곳에 사는 한, 공포는 끝나지 않는다 단편 삼부작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건 윤종찬이 영화로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그는 영화를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고, 만질 수 없는 것을 만지려 한다. ‘운명’이나 ‘기억’이나 ‘시간’처럼 불가해한 것들에 가까이 다가서려는 이런 시도는 <소름>에서 완결된 스타일로 드러난다. 굳이 감독의 개인사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소름>의 주무대인 미금아파트는 한눈에 일그러진 한국사회를 상징하는 구조물로 들어온다. 30년 전 살인사건이 있었던 아파트로 이사온 한 청년이 기이한 운명에 휩쓸리는 이야기를 그린 <소름>은 화면 구석구석 광기와 탐욕으로 얼룩진 한국사회의 단면을 겹쳐놓았다. <소름>이 전하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은 그 공포가 이곳에 살고 있는 한 지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곳 어딘가에 시체가 숨겨져 있다”는 <소름>의 대사가 의식하고 있는 것이 오욕의 한국현대사라는 걸 눈치채기란 어렵지 않다. <소름>을 만든 계기에 대해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미국에 있을 때 주부대상 TV 토크쇼에서 양성애자인 아들이 낮에는 어머니와 밤에는 아버지와 섹스했다고 얘기하는 걸 봤다. 한번 출연하면 1만달러쯤 거금을 주니까 그런 자리에 나오는데 방청석에서도 그냥 재미있어한다. 우리 사회도 점점 그렇게 가는 게 아닐까. 보험금 타려고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사건이 일어나도 그냥 무심히 지나간다. ‘또 그랬나보지, 뭐’ 하는 태도다. 이젠 그런 일에 무감각하다는 얘기다. 귀신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공포를 느꼈다. 그 느낌은 정확히 소름이었고 그래서 제목을 <소름>으로 정했다.” 실제로 <소름>의 등장인물들이 맺고 있는 관계는 몸서리처질 만큼 끔찍하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였고 딸은 자기 남편과 아이를 죽였으며 아들은 여동생을 죽인다. 그리고 그들 중 누구도 이 엄청난 살인의 악업을 깨닫지 못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두려움을 담겠다”는 감독의 야심은 그리스 비극의 정신에서 출구를 찾는다.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통음하고 나서야 자기 눈을 찔렀던 오이디푸스왕처럼 <소름>의 주인공은 세상에 남은 유일한 혈육을 땅에 묻으면서 비로소 어디부터 잘못됐는지를 깨닫는다. 영화는 마지막 순간 30년이라는 저주의 시간을 단 몇분의 시간에 담아 보여준다. 그것은 참으로 구원할 길 없는 절망이지만 유토피아에 대한 100번의 약속보다 소중한, 순수한 절망이다. ‘소름’ 돋는 운명의 표정 <소름>이 그리고 있는 벗어날 수 없는 절망의 폐쇄회로는 같은 모티브에서 출발한 단편 <메멘토>와 갈라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메멘토>는 70년대 LA 빈민가에서 아파트 수위가 빈집에서 사흘간 혼자 울고 있던 한국 아이를 발견해 키웠다는 이야기에서 시작했다. 프랑스에 입양됐던 미국인 고아가 우연히 자신이 버려졌던 아파트로 찾아온다는 내용의 <메멘토>에서 운명은 ‘절망’도 ‘희망’도 아닌 보이지 않는 신의 손길 같은 것이었다. <메멘토>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은 ‘Don’t Walk’(건너지 마시오)라는 신호가 깜박이는 교차로에 서 있다. 과연 그는 교차로를 건넜을까? 증오나 분노나 두려움이 명백한 대상을 갖지 못한 <메멘토>가 그런 궁금증으로 끝맺는 반면 <소름>은 운명의 신호등이 위험을 알리는데 그걸 의식하지 못한 채 교차로를 건넌 사람들의 이야기다. 두 영화의 차이에 대해 그는 “미국에서 영화를 찍으면서 느꼈던 한계는 언어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지만 내가 잘 모르는 공간에서 오는 문제이기도 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 아닌 곳에서 정치, 사회, 문화적 바탕이 있는 영화를 만드는 건 불가능했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메멘토>에서 아무 표정도 짓지 않던 운명은 <소름>에서 극악하고 흉측한 야수의 얼굴을 내비친다. 공포영화의 문법에 얽매이지 않은 <소름>을 공포영화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운명의 그 무서운 표정 때문일 것이다. 공간을 살려낸 필름누아르의 스타일 그러나 <소름>을 특별한 영화로 만드는 건 한국사회에 대한 그의 분노와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다. 정말 새로운 건 그가 <소름>에서 시도한 묘한 화법이다. 영화는 몇몇 장면에서 대단히 직설적인 대사를 내뱉지만 결코 단숨에 전체를 꿰뚫을 수 있는 속시원한 답변을 주지 않는다. 선영이 어떻게 남편을 죽였을까? 용현이 마지막에 바라보는 것은 무엇일까? 용현 어머니의 시체는 어디에 숨겨져 있을까? 이런 질문들을 하다보면 영화가 끝나도 안전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뭔가 엄청난 괴물을 본 듯하지만 그게 뭔지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그건 마치 로만 폴란스키의 <차이나타운>을 보는 것과 비슷한 경험이다. 뭔가 불가해하고 거대한 악에 맞닥뜨린 뒤 경험하는 공포와 열패감은 해일처럼 삽시간에 관객을 덮친다. 미국 하드보일드 소설과 40년대 필름누아르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런 특징을 <소름>은 자연스럽게 한국사회의 현실과 접목해 보여준다. 한눈에 필름누아르의 표식을 뚜렷이 드러내는 건 <소름>이 시도한 실사조명이다. 빛과 어둠의 선명한 대비를 보여주는 40년대 미국 필름누아르처럼 <소름>은 화면에서 빛이 들어오는 곳이 어딘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찍혔다. 전체 화면을 환하게 보여주는 일반적 조명과 확연히 갈라지는 조명설계인 탓에 촬영팀에겐 모험이었던 작업. 때로 등장인물이 어둠에 잠겨 누군지 식별하기 곤란할 정도지만 영화는 얼굴을 자세히 보여주는 대신 공간을 면밀히 관찰하게 만든다. 공간 자체가 하나의 인물처럼 표정을 지어보이는 것이다. 필름누아르의 전형적인 인물인 탐정이나 요부가 나오지 않지만 <소름>의 두 주인공, 용현과 선영 역시 하드보일드 소설의 등장인물들처럼 보인다. 감독은 그들의 심리적, 정서적 느낌을 탐구하지 않는다. 용현과 선영의 로맨스도 관객의 몰입이 시작될 무렵 돌연 광기와 살의로 전환되고 용현이나 선영의 심리상태는 그들의 행동을 통해서만 어렴풋이 짐작된다. 이처럼 건조하고 간결한 표현방식에 대해 윤종찬은 “필름누아르를 의식했다기보다 보여줄 필요가 있는 것만 보여주려 했다”고 말한다. 그는 “인물의 뒤통수를 찍고 정면에 있는 얼굴은 안 찍는 식이었다. 당연히 촬영하는 쪽에서 나중에 어떻게 편집하려고 그러느냐고 반발했지만 뒤통수를 보여주는 걸로 충분하다면 다시 얼굴을 찍을 이유가 어디 있는가?”라고 반문한다. 이런 스타일로 인해 <소름>은 보여지는 것보다 훨씬 풍부한 이야기를 담은 영화가 된다. 설명적인 부분을 생략함으로써 관객이 스스로 상상해서 이야기를 지어낼 여지가 생기고 그 여백에서 보이지 않는 공포가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것이다. 낯선 영화, 새로운 작가의 탄생 <소름>의 이런 스타일은 한국영화에서 대단히 낯선 것이다. 영화 속에서 504호의 비밀에 관한 소설을 쓰는 작가가 “이 얼마나 쿨한 엔딩이냔 말이다”라고 울부짖을 때 그 말은 꼭 영화 <소름>을 두고 하는 소리 같다. 윤종찬은 감정의 군더더기가 없는 스타일을 끝까지 밀어붙여서 제대로 된 하드보일드 영화를 만들어냈다. 아직 이른 감이 있지만 <소름>은 김기덕의 <수취인불명>과 함께 올해의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 전혀 연관이 없는 두 영화가 괴물 같은 한국사회를 향해 절규하는 것은 단지 우연일까? 70년대 논바닥에 거꾸로 처박혀죽은 혼혈아와 30년 전 남편 손에 죽은 뒤 미금아파트에 감춰진 여인의 시체는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수취인불명>에서 겹쳐지는 인물로 표현한 광기의 역사가 <소름>에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오가며 어렴풋한 형체를 드러낸다. 세기 초 한국사회를 배회하는 절망과 공포가 지금 윤종찬이라는 새로운 작가를 소개하고 있다. 남동철 기자 namdong@hani.co.kr ▶ 2001 한국영화의 발견, <소름> ▶ 윤종찬 감독이 말하는 <소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