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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9404)

사막에 서니 무사들의 영혼이 들리더라

<무사>의 엔딩을 장식한 ‘음악감독 사기스 시로’라는 타이틀은 ‘완벽주의자’ 김성수 감독다운 선택이었다. 4억원이 넘는 제작비와 1년 반에 걸친 음반작업은 시로가 아니면 불가능했을 초대형 프로젝트. 게다가 김성수 감독은 음악작업 내내 “<무사>에 연연하지 말라”는 혼란스러운 주문까지 해댔다. 시나리오를 받자마자 시작한 ‘역사공부’도 중단시킨 감독은 대신 여솔의 캐릭터보드를 여러 장 보여주었다. 고려시대 노비의 것이라고 하기엔 오히려 무국적에 가까운 의상과 액세서리들. 치렁치렁 늘어뜨린 머리나 피어싱을 한 귀, 모피 숄과 특이한 마소재의 옷감 등을 보고 있노라니 그제야 감독의 의도가 팍하고 꽂힌다. ‘감독이 원하는 건 딱히 동양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은 보편적인 음악이구나’ 하고. <무사>의 첫 장면은 고려 무사들의 사막 횡단신이다. 원래대로라면 영화 중반에 나올 장면. 감독이 편집과정에서 맘을 바꿔 맨 앞으로 뺀 것이다. 애초에 오프닝 음악을 생각지 않았던 사기스도 동시에 바빠졌다. 영화의 이미지를 최초로 각인시키는 첫 음악이니만큼 대충 화면만 보고 만들 생각은 없었다. 그는 사막의 모래바람을 느끼기 위해 베이징으로 향한다. 그의 지독한 완벽주의적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 뜨거운 사막의 열풍을 맛본 다음 날 그의 머리 속에는 절로 <죽음의 바람>(Death Wind-Prologue 2:00)이 춤을 춘다. 대충의 오케스트레이션을 마치자 그에게 남은 과제는 포인트가 될 악기를 고르는 것이었다. 영화의 무대가 되는 중국 명조(明朝)의 고전적이면서도 동양적인 정서를 간직한 악기를 고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처음엔 한국의 사물놀이를 기억해냈지만 소리가 너무 튀어 포기하고, 좀더 섬세한 음색이면서도 관객의 귀를 집중시킬 수 있는 소리를 찾던 중 피리와 장구를 만난다. 피리는 그 애절한 소리로 등장인물의 내면을 표현하는 장면에, 장구는 빠른 리듬의 전투신에 주로 쓰이면서 영화의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킨다. 여솔과 최정이 대립하는 장면에서 머리가 쭈삣 서도록 날카로운 고음으로 울던 피리는 다름아닌 일본의 전통가면극 ‘노’(能)에 쓰이는 대나무피리 다케부에. 그 밖에 몽고군의 습격신과 주진군의 숲속 전투신 등에 한국과 일본의 장구와 브라질의 전기드럼을 썼다. 작업을 마치고 그가 받은 돈은 2억원. 보통 한국에서 A급에 해당하는 음악감독들이 받는 액수가 5천만원을 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파격적인 액수다. 그러나 사기스 자신에게는 오히려 적자의 계산법이다. 작업료의 두배를 ‘지출’한 심정을 물으니, “처음엔 물론 계획을 세우고 돈을 썼다. 하지만 완벽을 기하려다보니 가지고 있는 돈으로는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당신이 음악감독이라면 어떤 길을 택하겠는가?” 하고 오히려 반문. 그는 현재 자신의 20년 음악활동을 결산하는 기념앨범 를 제작중이다. 글 심지현/ 객원기자 simssisi@dreamx.net·사진 오계옥 기자 klara@hani.co.kr 사기스 시로의 프로필 1957년생 79년 일본 퓨전그룹 T-Square의 멤버로 데뷔, 이후 4매의 앨범작업에 참여 80∼89년 앨범 에서 솔로 데뷔, 이후 3매의 앨범을 발매, 영국가수 John Stanley와 그룹 Blend 결성 90∼99년 영국 R&B 프로듀서 Martin Lascelles와 그룹 Mash 결성, Ro-Jam 레벨을 결성 97년 7월 오차드홀에서 5일간 ‘에반게리온 교향악’ 주관, 8월 Loren&Mash 싱글 오리콘 2위 12월 Loren&Mash+UK 오리콘 10위 98년 4월 Ro-Jam의 집대성 앨범 발표 11월 MISIA 프로듀스, 12월 CD 판매 현재 20주년 기념앨범 제작중 TV 영화 <변덕스런 오렌지 로드>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 <신세기 에반게리온> <기동전사 간담> <비밀일기> 등

<아메리칸 파이2> 3주 연속 박스오피스 1위 고수

<아메리칸 파이2>가 미국 박스오피스 3주 연속 1위를 차지해, 올 여름 미국 개봉영화 중 정상체류 최장기록을 세웠다. 지난 8월10일, 개봉 첫 주말 4500만달러 이상을 벌어들이며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른 <아메리칸 파이2>는 3주차 주말, 1280만달러 수익을 올리며 흥행수위를 고수했다. 유난히 수위 변동이 심한 올 여름 박스오피스에서 이처럼 2주 이상 1위를 유지한 것은 <진주만>을 제외하면 처음이다. 그나마 <진주만>도 2주를 넘기지 못했다. 올해 개봉작을 통틀어도 <한니발>과 <스파이키드>가 3주 연속 1위의 타이 기록를 갖고 있는 정도다. <아메리칸 파이2>는 톰과 폴 웨이츠 형제 감독의 99년작 <아메리칸 파이>의 속편. 10대들의 성에 대한 욕구와 호기심을 둘러싼 코믹한 에피소드로 성장기를 펼쳐보인 전편은, 불과 1천만달러의 예산으로 10배 이상의 수익을 벌어들인 바 있다. 기대 이상의 히트를 거둔 전편에 이어 속편이 기획된 것은 당연한 수순. 웨이츠 형제가 속편 연출을 고사하면서 감독은 전편의 조감독 출신인 J. B. 로저스로 바뀌었지만, 시나리오 작가 아담 허츠와 출연진 대부분은 속편에 참여했다. 익숙함과 새로운 볼거리를 적절히 배합하는 속편의 공식대로, <아메리칸 파이2>는 전편의 10대들이 대학생이 된 이후의 이야기. 첫 섹스의 느낌이 파이 같다는 말에 파이로 자위를 하던 어리숙한 주인공 짐, 고교 커플이던 케빈과 비키, 정액이 담긴 맥주를 들이마시던 오즈 등 전편의 주인공들이 거의 그대로 등장한다. 대학에서 1년을 보내며 각각 섹스와 사랑에 대해 좀더 많은 경험을 했지만, 아직도 이들의 중요한 화두는 섹스다. 미성년의 꼬리표를 뗀 만큼, 휴가를 위해 호숫가의 집을 빌려 모인 친구들은 좀더 다양한 섹스의 기행을 보여준다. 고교 졸업파티 때의 파트너 미셸과 인터넷 섹스 생중계의 주인공 나디아 사이를 오가는 짐의 에피소드가 주축을 이루며, 폰섹스, 동성애 등 성에 관한 갖가지 농담이 사이사이 끼어든다. 신선미는 떨어졌다는 평을 들었지만, 익숙한 캐릭터들과 전편의 변주에 충실한 구성은 관객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개봉 첫주에 이미 제작비 3천만달러를 회수한 <아메리칸 파이2>는 지금껏 1억960만달러의 수익을 거둬들였으니까. 지난주 새로 개봉된 5편의 영화들도 <아메리칸 파이2>의 흥행가도를 막진 못했다. 케빈 스미스의 신작 <제이와 사일런트 밥의 역습>이 1위를 뺏지 않을까 하는 예상도 있었으나, 개봉 주말 수익 1140만달러로 3위에 올랐을 뿐. 프레디 프린즈 주니어의 야구영화 <서머 캐치>와 존 카펜터의 <고스트 오브 마스>도 각각 6위와 9위에 그쳤다. 이 기세대로라면, <아메리칸 파이2>가 올해 박스오피스에서 가장 오래 수위를 지킨 영화로 남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로써 ‘속편을 조장하는’ 올 여름 미국 박스오피스의 교훈이 다시 한번 입증된 셈이다. 전편의 성적을 넘어 2억달러 고지를 돌파한 <미이라2>를 필두로 <쥬라기 공원3> <닥터 두리틀2> <러시아워2>를 거쳐 <아메리칸 파이2>에 이르는 속편들의 성공으로, 할리우드에는 당분간 속편 바람이 그치지 않을 듯하다. 황혜림 기자

그들의 죽음을 기억하라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1945년 8월24일 17시20분. 강제징용됐던 조선인 수천명을 태운 우키시마호는 목적지인 부산항이 아닌 마이즈루항 앞바다에서 돌연 침몰했다. 해방의 기쁨을 열흘도 채 누리지 못하고, 이국의 바다에 수장된 수천명의 조선인들. <아시안 블루>는 50년 전 미궁으로 빠져버린 우키시마호 사건을 일본인의 양심으로 끌어올려 진지하게 되묻는 영화다. 30대의 한 재일동포 2세 남자가 20대 후반의 한 일본인 여자와 함께 그녀의 아버지이자 유명한 시인이었던, 그러나 지금은 행방이 묘연한 하쿠운을 찾아나서게 되고, 그로부터 우키시마호 침몰이 일본의 폭침에 의한 것이었음을 듣게 된다는 줄거리. 당시 생존자와 유족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판결이 있던 지난 8월23일, 서울 아트선재센터에선 <아시안 블루>의 시사회가 있었다. 광주시민연대의 도움으로 광주를 거쳐 서울까지 프린트를 들고온 <아시안 블루>의 제작자 이토 마사아키(54)는 시종 어두운 표정이었다. 이날 교토 지방법원은 생존자 15명에게 4500만엔을 지급하라는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지만, 9년 전 소송제기 때부터 공식사과와 진상규명을 요구했던 유족들을 외면한 일본 정부에 대한 따가운 시선을 그는 자신이라도 어떻게든 짊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아시안 블루>는 교토 천도 1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됐지만, 이토 감독에겐 “종전 50주년을 기억하는, 아시아인들을 위한 영화”다. “후세들은 바른 역사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걸 제대로 전해야겠다는 마음이 컸다”는 그는 자신이 “모르고 저질렀던” 악행도 “언젠가 이 영화를 꼭 만들어야겠다”고 다그친 채찍 중 하나라고 털어놓는다. “초등학교 때 같은 반 친구 중에 조선인 친구가 있었는데, 일본 친구들과 어울려 괴롭혔다. 그런데 나이 먹어가면서 그때 참 못할 짓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그러다 스물 넘어 선원 생활을 하면서, 마이즈루 근처 침몰현장을 보게 됐고, 수천명이 이곳에서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건 개인의 불행이 아닌 인류의 불행이다 싶었고, 일본이 그 책임을 떠안기 전까지 역사는 항상 제자리이겠구나 싶었다.” 마지막에 그만큼 속죄했으면 됐다며 가족 품으로 돌아오라는 딸의 울먹임을 외면하는 노시인의 장면을 넣은 것도 “그 세대는 자신이 직접적인 가해자가 아니더라도 평생 죄의식을 안고 살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91년부터 제작에 들어가 4년 만에 완성한 <아시안 블루>는 ‘뜻있는 일본인’들이 만든 영화다. 마이즈루항에 누워 있는 장면에서 민단동포 100여명이 단역으로 출연해준 것을 빼면 감독, 스탭, 주연배우 포함 4천명의 엑스트라까지 모두 일본인. 대사가 어색한 것도 그 때문이다. 22년째 오키시마호 추모모임을 갖으면서, 자료집을 발행하고 있는 마이즈루시 순난수도회와 출발지였던 아오모리현 대학교수들의 자문도 큰 도움이 됐다. 하지만 당시 생존자들의 생생한 증언없이 영화를 완성할 수는 없었다. “처음에 그분들을 찾아가 협조를 구했다. 그런데 아무도 말을 안 하려고 하더라. 몇번을 설득했다. 왜 이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지. 그랬더니 결국 죽기 전에 진실을 알려야 한다며 그날의 참상과 일본에 대한 분노를 털어놓았다.” 시민단체에서 일하다 1961년부터 시네마테크를 운영하면서 영화와 인연을 맺은 그는 미국의 도쿄 공습을 배경으로 한 인형극영화 <고양이가 살아 있다>로 제작일을 맡은 뒤, 지난 89년부터는 시네마워크라는 제작사를 직접 차려 13편의 영화를 만들어왔다. “일본에서도 30만명 정도가 봤는데, 한국에서도 그만큼 성과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게 그의 바람. “지난 6년 동안 상업성이 없다는 이유로 한국 개봉이 늦춰져왔다”며, “무료 상영이라도 좋으니 많은 한국인들이 보았으면 한다”는 바람을 여러 번 내비쳤다. 고이즈미 총리의 신사참배 뒤 일본 내 그의 인기가 높아졌다는 것에 대한 우려의 질문에도 “언론이 주도한 통계일 따름이지 결과는 반대로 나올 수도 있다”며 “오히려 이번 불미스런 일을 계기로 역사에 무관심한 이들에게 진실을 알릴 수 있어 좋다”며 처음으로 웃었다. 글 이영진 기자 anti@hani.co.kr 사진 오계옥 기자 klara@hani.co.kr

[뉴욕통신] <오디션>을 모르면 뉴요커가 아니다?

올 여름 뉴욕 극장가의 승자를 묻는다면 단연 <오디션>과 <큐어>를 앞세운 일본 호러영화라 답할 만하다. 이른바 영화를 챙겨본다는 뉴요커들 사이에서 “<오디션> 봤니”가 인사말이 될 정도였다면 대충 상황이 짐작되리라. 이미 한국뿐 아니라 각종 세계영화제에서 독특한 개성을 인정받은 미이케 다카시 감독의 <오디션>은 신작 <죽거나 살거나>의 개봉에 이어 8월 초 예술영화전용관 필름 포럼에서 등급없이 개봉했다. 일단 뉴욕 평단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개봉 직후 주말 매진사례를 빚는 등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멍든 영화팬들을 사로잡는 데 성공. 한편, 전주영화제를 통해 한국에도 알려진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1997년작 <큐어> 역시 7월 말의 특별 회고전에 이어 <오디션>과 나란히 개봉함으로써, 일본 호러영화 붐을 일으키는 데 일조했다. 이들 작품이 외국영화의 마지막 관문이라 할 뉴욕에 가뿐히 안착한 여정에는 주목할 만한 특징이 있다. 일단 외국영화에 관한 한 뉴욕은 유행에 느리다. 혹은 조심스럽다. 구로사와 감독은 1999년 <인간 합격>으로 뉴욕영화제에 초청될 때만 해도 특이한 장르 변주 작업을 계속하는 감독으로 이해되었지만, 올해 칸영화제에 <거대한 환영>이 소개된 이후 LA, 보스턴, 뉴욕에서 특별 순회 회고전이 상영되는 등 80년대 뉴재팬 시네마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바람결에 실려온 이들 영화에 대한 소문에 덧붙여 결정적인 성공의 문을 열어준 것은 콧대 높은 뉴욕 언론들. 아시아영화의 흥행에 영향력 있기로 유명한 <뉴욕타임스>의 엘비스 미첼은 <오디션>이 “감정의 디테일을 쌓아올리는 것은 오즈 야스지로의 손길을 연상시키며, 예측불허의 반전은 오 헨리의 스토리를 더글러스 셔크가 영화로 만들었음직한 가장 인상적인 공포영화”라는 찬사 일색의 평을 실어 매진사례에 한몫했다. 이와 더불어 구로사와에게는 프리츠 랑, 에드거 앨런 포, 도스토예프스키까지 동원된 이례적인 호평이 쏟아졌다. 한편, <큐어>를 적극 지지한 <빌리지 보이스>의 짐 호버먼이나 <뉴욕타임스>의 A. O. 스콧의 평에서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면 바로 장르의 변주가 쟁점이 된다는 것이다. <인디와이어>와의 인터뷰에서 구로사와는 “할리우드 스타일의 영화를 모방하지 않고도 독특한 방식으로 장르영화의 관습에 기여하는 일본적인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말하며, 스스로 ‘장르영화 감독’으로 불리는 것이 영광이라고 밝힌 바 있다. 뉴욕 평단이 구로사와와 미케에게서 발견하는 미덕이 있다면, 할리우드와 소통할 수 있는 장르의 규칙을 활용하면서도, 소진해가는 장르의 관습에 수혈을 해줄 “독창적인(혹은 이국적인) 아우라”를 지녔다는 점이다. 뉴욕 평단에서 외국영화 비평의 제1원칙이 작가주의임을 고려할 때, 적당히 자극적인 장르 비틀기는 외국감독들이 제2, 제3의 히치콕으로 불리더라도 일단 관심권 내에 들게 하는 충분조건이 된다. 그러나 한편, 외국영화들이 얼마나 할리우드 장르를 학습하고, 여기에 약간의 이국적인 터치를 가하느냐로 이어지는 이러한 장르론에서 장르영화의 종주국(?)으로서의 거만함과 함께 외국영화를 수용하는 다양한 시각의(혹은 정보의) 부재를 엿보는 것은 이방인의 지나친 의심일까. <오디션>의 경우처럼, 장르로 설명할 수 없는 절묘한 심리극으로서의 복합성, 피와 비명이 튀지는 않지만 극장문을 나서며 섬뜩해지는 <큐어>의 공포의 근원은 다른 곳에 맥락이 가 닿을지 모른다. 물오른 일본호러영화의 틈새에서 9월 초 개봉을 기다리고 있는 한국산 호러영화 <텔미썸딩>이 어떤 반향을 일으킬지 귀추가 주목된다. 뉴욕=옥혜령 통신원

모두가 아는 영화, 그러나 알지 못했던 이야기

●지난 8월25일부터 8일 동안 서울시네마테크는 거장들의 대표작 12선을 상영하는 ‘영화사강의 영화제’를 열었다. <씨네21>은 영화상영에 앞서 진행된 강의 가운데 <빅 슬립> 제작과정, 미조구치 겐지의 영화세계, 비평적 사건으로서의 <시민 케인> 등 3개의 강의를 발췌, 지상중계한다. 편집자 지난 8월25일부터 8일 동안 서울시네마테크는 거장들의 대표작 12선을 상영하는 ‘영화사강의 영화제’를 열었다. <씨네21>은 영화상영에 앞서 진행된 강의 가운데 <빅 슬립> 제작과정, 미조구치 겐지의 영화세계, 비평적 사건으로서의 <시민 케인> 등 3개의 강의를 발췌, 지상중계한다. 편집자 그는 왜 5분을 잘랐을까 제1강 - 임재철이 들려주는 <빅슬립> 제작과정 지금 우리가 할리우드영화에 있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감독과 영화들은 60년대 말 프랑스에서 일어난 비평문화, 누벨바그의 감독들이라고 알려진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들에 의해 발굴되어 가장 높이 평가를 받은 감독이 하워드 혹스예요. 하워드 혹스는 존 포드처럼 아카데미상을 여러 번 받은 적도 없고, 히치콕 같은 스타감독도 아니었어요. 게다가 혹스는 철저하게 보이지 않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영화는 스타일상으로 눈에 띄는 게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혹스도 할리우드에서 엄청난 부와 명예를 얻은 사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개인적인 이야기를 말씀드리면, 하워드 혹스는 1896년생인데요. 인디애나의 유서깊은 가문 출신의, 말하자면 정통 WASP입니다. 장남이었던 하워드 혹스는 놀기 좋아하는, ‘불량학생’이었답니다. 왜 출신성분 이야기를 하느냐. 할리우드에서 작업할 때 이 사람만큼 출신성분을 잘 활용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죠. 그는 공부를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찌어찌해서 코넬대학을 졸업했어요. 처음엔 제작을 했다가 몇몇 작품이 실패하니 차라리 내가 해볼까 생각해 감독을 하게 됐다고 합니다. 1910, 20년대 미국사회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인종문제입니다. 당시 할리우드는 유대인들이 지배하던 곳이었어요. 영화업은 돈벌이는 됐지만 사회적 천대를 받는 직업이었고, 유대인들은 정통성 있는 산업에 진출할 수가 없으니 영화산업에 진출한 거죠. 미국엔 인종적 서열이 있기 때문에 아무리 돈이 많아도 기본적인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하워드 혹스는 이것을 아주 잘 활용한 사람이에요. 그는 자신이 WASP이고, 아이비리그 출신임을 거래에 활용해서 제작자들과 거래를 유리하게 끌어갔습니다. 혹스는 거의 대부분의 영화에서 프로듀서 겸 감독으로 계약을 합니다. 그렇게, 할리우드의 흥행감독일 뿐만 아니라 비즈니스에도 능한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강해요. 혹스의 영화에서 등장인물은 과거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현재 무슨 일을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죠. 때문에 하워드 혹스 영화를 움직이는 기본적인 추동력은 프로페셔널리즘이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빅 슬립>에도 나타나지만 그는 한번도 플래시백을 쓴 적이 없어요. 그가 보기에 플래시백, 어떤 캐릭터의 내면을 관객이 알게 해준다는 건 사기라는 거죠. <빅 슬립>은 44년에 촬영에 들어갑니다. 그해는 <이중배상> <머더 마이 스위트> 등 필름누아르의 원형을 갖춘 영화들이 나온 땐데, 주인공 탐정의 플래시백을 보여주고 탐정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으로 영화가 진행되는데, 혹스는 절대 그런 것을 쓰지 않았어요. <빅 슬립>은 1944년 10월에 촬영에 들어가 1945년 1월에 촬영이 끝났습니다. 그런데 1946년 9월에 가서야 개봉했어요. 개봉이 이렇게 늦춰진 이유는, 첫째 당시 메이저 영화사들이 전쟁 소재 영화를 많이 만들었는데 1945년 초에 이미 종전의 예감이 팽배해 그 영화들을 먼저 개봉해야 했기 때문이었죠.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가 <빅 슬립> 이전에 하워드 혹스가 만든 <탈출>(To Have and Have Not, 1944)이라는 영화가 있는데 험프리 보가트와 로렌 바콜 주연이었어요. <탈출>은 <카사블랑카>의 아류작입니다. <탈출>을 만들 때 주연배우로 로렌 바콜을 캐스팅했어요. 로렌 바콜은 모델 출신으로, 당시 19살의 연기경험도 없는 배우였는데 <탈출>에 출연하고 보가트와 로맨스가 생기면서 알려졌습니다. 1944년 10월에 개봉한 <탈출>이 흥행에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개봉이 밀린 또 한 가지 이유가 여기서 나옵니다. 로렌 바콜이 <탈출> 다음에 출연한 <컨피덴셜 에이전트>란 영화가 있는데, 이 영화가 작품도 비판을 받고, 흥행에도 참패했습니다. 게다가 로렌 바콜은 연기가 전혀 안 된다는 평이 났어요. 스튜디오 입장에서는 로렌 바콜이란 귀중한 자산을 어떻게든 되살릴 필요가 있었던 거죠. 이미 <빅 슬립>은 편집까지 끝난 상태였습니다. 그때 에이전트 한 사람이 워너브러더스 사장 잭 워너에게 제안을 했죠. 지금 <빅 슬립>을 개봉하면 로렌 바콜의 스타로서의 생명은 끝이다, 현재의 편집본보다 로렌 바콜의 비중을 늘리고 몇몇 장면을 재촬영해야 한다, 그것이 로렌 바콜을 되살리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잭 워너는 그 말을 받아들여 혹스에게 다시 찍어 편집해달라 부탁을 하죠. 사람들은 ‘<빅 슬립>에는 미스터리가 없다, 누가 누구를 죽였단 말이야, 사건이 어떻게 해결되는 건지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원래 편집본에는 미스터리 플롯이 모두 해결됩니다. 그런데 영화를 다시 찍다보니 시간이 길어져 불필요한 부분을 자르면서, 의도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주인공 필립 말로가 지방 검사에게 설명하는 5분을 들어냈습니다. 그 장면이 빠지는 바람에 모든 것이 불분명하게 됩니다. 왜 이렇게 만들었느냐는 질문에 혹스는 “영화라는 건 관객을 피곤하게 하지 않고 5개의 멋진 장면만 있으면 된다”라고 뻔뻔하고 자신있게 대답했습니다. 사실 혹스는 군더더기가 전혀 없고 모든 것을 명쾌하게 이해시켜주는 감독인데, <빅 슬립>만 예외입니다. 할리우드영화를 볼 때는 시스템과 작가를 아울러서 봐야 하는데, <빅 슬립>은 작가라는 측면에서는 훌륭한 영화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은 당시 사회 역사적 시스템, 로렌 바콜이라는 스타를 살려줘야 한다는 고려 등 넓은 의미의 시스템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위정훈 기자 ▶ 모두가 아는 영화, 그러나 알지 못했던 이야기 - 제1강 ▶ 회화성과 음악으로 빚어낸 영상리듬 - 제2강 ▶ 영화사를 뒤흔든 걸작, 그 작용과 반작용 - 제3강

시카고의 ‘앵무새’ 열풍

60년대 한국 영화팬들의 머리 속에는 그레고리 펙이 주연했던 흑백영화 <앵무새 죽이기>(국내 상영 제목은 <알라바마에서 생긴 일>)의 몇몇 장면들이 지금도 아련하게 박혀 있을 것이다. 주인물 애티커스 핀치 판사 역을 맡은 펙의 연기도 볼 만했지만, 인종갈등에 휩싸인 미국 남부의 한 시골 마을에서 사랑과 정의(正義)에 눈뜨며 자라는 세 아이(잼, 스카우트, 딜)의 모습이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유소년기의 이미지로 기억 세포에 입력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대 이집트사람들은 이렇게 걸어다녔대”라며 잼이 여동생 스카우트에게 이집트 벽화 속의 ‘게걸음’ 포즈를 흉내내던 장면, ‘이상한 사람들’로 알려진 레들리 집안의 비밀스런 은둔자 부우 레들리가 스카우트를 위기에서 구해주고 아이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던 일- 그런 장면과 사건들 말이다. <뉴욕타임스> 8월28일치 보도에 따르면, 그 영화의 원작이 되었던 하퍼 리(Harper Lee)의 소설 <앵무새 죽이기>(To Kill a Mockingbird)가 지금 시카고시에 독서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시카고 공공도서관 당국이 8월25일부터 7주간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시민 모두가 ‘함께 읽을 한권의 책’으로 이 소설을 선정하고, 리처드 델리 시장이 직접 나서서 시민 참여를 호소하는 바람에 시 전체가 ‘앵무새 열풍’에 휩싸인 것이다. 정확히 얼마나 많은 시민들이 여기 참여할지는 7주가 끝나는 10월14일 이후에나 알 일이다. 그러나 이미 열풍은 열풍이다. 시립도서관 당국은 시내 각 공공도서관에 소설 4천권을 사다 비치했지만 미처 책을 빌리지 못한 시민들이 서점으로 몰려드는 통에 시내 서점들에서는 책을 갖다놓기 무섭게 없어진다고 한다. 1960년 초판이 나온 이 소설에는 몇 가지 진기록이 따라다닌다. 전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한 수줍은 작가 지망자의 소설이 발행 첫해에 250만부나 팔린 것도 기록적이고, 작가가 1957년 출판사에 초고를 보낸 뒤에도 3년간 다듬고 다듬어서야 책을 냈다는 것도 기록적인 일이다. 작가는 75살 나이로 아직 생존해 있지만, 앨라배마 한 시골(작가가 태어나고 자란 몬로빌은 하도 벽촌이어서 ‘택시 한대’만 돌아다녔다고 한다) 마을에서의 성장시대를 다룬 이 작품 이후 그녀가 다시는 소설을 쓰지 않았다는 것도 흔한 일은 아니다. 초판 출간 이후 40년이 지난 시점에 한 대도시 시민들에게 ‘함께 읽을 책’으로 선정되었다는 것은 모르긴 하되 ‘신기록’이 아닐까 싶다. 물론 이 소설은 세계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국역판도 두 종류 있다) 지금까지 3천만부가 팔렸고, 출간 이후 줄곧 미국 전역의 청소년 권장도서 목록에 올라 있었기는 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런 기록이 아니다. 이번의 앵무새 열풍은 말하자면 시카고판 ‘책 읽는 사회만들기’ 운동이다. “온 시카고가 나서서 소설 한권을 읽고 있다”는 소식은 우리에게 신문 토픽감으로 끝날 단순 화제가 아니라 생각할 거리이고 화두이다. 시카고 같은 큰 도시가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을 하는가, 대도시에서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가, 그런 발상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의 능력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가? 시민들이 비디오나 게임에만 빠져 있을 것이 아니라 책 읽고 생각하고 독서문화를 유지하는 것이 그 자체로 소중한 가치이고 삶의 방식이며 경험이라는 판단이 ‘책 읽는 시카고’의 동기라는 것쯤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일년에 한번만이라도 온 시민이 똑같은 책 한권을 읽어 공통의 화제를 찾아내고 시카고의 문제(이를테면 인종분할과 차별)를 함께 생각해보는 것도 대도시의 공동체적 가능성을 키우는 데 소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아이디어를 낸 사람들은 누구인가? 온 시민이, 또는 가능한 한 다수의 시민들이, 일년에 한번 한권의 책을 놓고 함께 읽어보자는 아이디어를 맨 처음 내놓고 실천한 것은 4년 전 시애틀의 한 공공도서관 직원이다. 이 발상은 미국 여러 도시들의 호응을 얻어 뉴욕주 버팔로, 로체스타, 시러큐스 같은 도시들로 확산되고 일리노이의 스프링필드, 아이다호의 보이즈시도 이에 가세할 준비를 하고 있다 한다. 대도시 시장이 직접 나선 것은 시카고가 처음이다. 어떤 책이 선정되는가는 물론 지역에 따라 다르다. 시카고가 <앵무새 죽이기>를 선택한 것은 이 소설이 시카고의 심각한 인종갈등에 소중한 통찰과 해법을 주기 때문이다(시카고 시장 자신도 그 소설의 애독자였다 한다). ‘책 읽는 시카고’를 만드는 데 들어간 비용은 고작 4만달러이다.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가장 값진 일을 벌일 수도 있다는 것을 시카고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도정일/경희대 영어학부 교수. 문학평론가 jidoh@khu.ac.kr

이소룡, 내 어린 시절의 삽화, <정무문>

어렸을 적 집 근처에 낡은 동시상영관 하나가 있었고 그 극장 주변이 아이들의 놀이터였던 까닭에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학교가 끝나면 늘 그곳으로 가 친구들과 어울렸다. 해질 때까지 구슬치기, 딱지치기를 했고 어떤 날은 우리끼리 돈을 모아 극장 안으로 숨어들곤 했다. 극장 입구에서 표를 받던 아저씨 덕분이었다. 그는 손님들이 뜸한 날이면(아마도 장사가 잘 안 되는 영화가 걸려 있었을 듯한) 극장표 대신 코흘리개들이 모아온 돈을 받고 우리를 슬쩍 극장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던 것이었다. 아무튼 어린 나는 그렇게 친구들과 함께 우르르 극장 안으로 들어가 온종일 영화를 보곤 했다. 내 인생에서 영화보기는 이런 식으로 시작했다. 그 나이에 보아서는 안 될 야한 영화에서부터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구석도 이해 안 되는 어려운 영화까지 무분별하고 무차별하게 보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도 양으로 보면 행운스러운 시작이었고 질로 보자면 지극히 엇나간 시작이었으리라. 아무튼 그런 시작 탓이었는지 중·고등학생이 되어서도 무차별 영화보기는 계속되었고 보는 것만으론 만족을 못했던지 급기야 영화를 공부하게 되는가 싶더니 종국엔 이렇게 영화감독까지 되고야 말았다. 그저 보기만을 좋아했던 열혈관객이었던 내가 이젠 관객에게 영화를 만들어 보여줘야 하는 입장에 선 것이다. 곤혹스러운 일이다. 이제는 더이상 영화를 순수하게 즐길 수만은 없는 인생이 돼버렸으니. 솔직히 가끔은 지난 시절이 무척 그립다. 그저 영화가 좋아 잘된 영화, 안 된 영화 안 가리고 그저 보고 즐기던 그 시절이…. 아무튼 각설하고 그런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생각나는 영화 중 하나가 그 유명한(특히 386세대에겐) 이소룡의 <정무문>이다. 이 영화는 초등학교 6학년 땐가 중학교 때 우연히 어느 변두리 동시상영관에서 다른 영화와 함께 보았는데 그때의 충격과 짜릿함이란 정말이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자신을 겨누고 있는 일본군의 총구를 향해 성난 야수처럼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이소룡의 모습에 스톱모션이 걸리고 영화가 끝났을 때 객석 가득 울려퍼지던 탄성들(특히 남자 관객의)과 흡족함(영화적으로) 반 부러움(같은 남자 입장에서) 반의 얼굴로 극장을 나서던 많은 남자 관객의 모습은 아직도 내 기억에 생생하다. <정무문>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일본군 점령기의 중국, 그리고 그들의 압제에 스러져가고 있는 무술도장, 정무문. 어느날 젊은 이소룡이 정무문으로 돌아오고 평지풍파가 인다. 그는 결국 출중한 무술로 일본 고수들을 하나하나 잠재우고 그 역시 비극적인 종말을 맞지만 마침내 정무문(중국인의 정신을 상징하는)을 일으켜세운다. 권선징악의 주제들을 다루고 있는 여타 무술영화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상투적인 이야기다. 그렇다면 무엇이 나와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에 열광하도록 했던 것일까?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이소룡이었다. 미소년 같은 고운 얼굴과 천진난만한 특유의 미소, 군살 하나없는 아름다운 근육(아놀드 슈워제네거나 실베스터 스텔론 같은 배우들의 둔탁한 근육과는 질적·시각적으로 완벽히 다른), 동서양의 스타일을 섞어놓은 듯한 묘한 제스처, 그리고 비할 데 없이 빠르고 다이내믹한 무술 솜씨…. 이 모든 것들은 이미 이소룡이란 배우를 하나의 매력덩어리로 만들기에 충분했고 사람들은 어느 영화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독특한 그의 카리스마에 열광했던 것이다. <정무문>의 저 유명한 장면, 일본의 최고수와 맞서는 마지막 장면을 보라. 무술에서 밀리는 일본 고수는 마침내 체면불사, 번뜩이는 대검을 빼어들고 휘둘러대기에 이른다. 그 순간 이소룡의 뒤춤에서 도깨비 방망이처럼 뽑아져 나오는 신기한 무기 하나, 쌍절곤. 허리에서 어깨 너머로 겨드랑이로, 허리 주위로 바람을 가르며 번개같이 움직여대는 그 현란한 쌍절곤의 움직임…. 그리고 넋을 놓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상대. 순간, 사뿐히 쌍절곤 한쪽을 겨드랑이에 끼워넣곤 상대를 쏘아보는 이소룡. 잠시 감도는 적막…. 관객도 꼴깍 마른 침을 삼키는 순간이다. 이어 싸움은 다시 이어지고, 이번엔 상대를 향해 춤을 추듯 두팔로 허공에 원을 그려대는 이소룡. 그 부드럽고 살기 넘치는 두팔의 움직임은 특수기법(당시로서는)을 통해 여러 개의 팔로 스크린에 번져간다. 동시에 어두운 객석으로 번져가는 관객의 탄성…. 마침내 상대가 이소룡의 단 한번의 폭발적인 발차기에 벽을 뚫고 떨어지며 혼절한다. 다시 한번 객석에 번지는 후련한 탄성…. 이쯤 되면 관객과 배우가 혼연일체가 되는 경지 아닌가? 이소룡의 마력이 스크린 밖으로 흘러나와 관객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최면을 걸고 있는 것이다. 이소룡의 매력은 나름대로 일세를 풍미했던 또다른 무술스타들과는 분명 다른 것이었다. 왕우의 어눌한 무술(연기력은 더 나을지 모르겠으나)이나 성룡의 왠지 경망스러워보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아무튼 <정무문>을 시작으로 <당산대형> <맹룡과강> <용쟁호투>로 이어지던 이소룡의 신화는 미완의 <사망유희>에서 끝났고 그가 죽은 지 30년이 가까워오지만 무차별로 영화를 보러다니기 시작할 내 어린 시절을 생각할 때면 늘 그 선두에 <정무문>이란 영화와 겹쳐져 이소룡이 생각나곤 한다. 영화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면서 미학적으로 출중한 영화들을 접하게 되었고 어려운 영화에도 눈뜨게 되었지만 그냥 ‘영화’라는 걸 생각할 때면 철들어 보았던 타르코프스키나 잉마르 베리만 같은 감독들이 만든 영화들 보다 어린 시절에 보았던 이소룡의 무술영화나 알랭 들롱의 누아르영화가 훨씬 더 생각나고 그러워지기는 건 왜일까? 아마도 그런 영화들과 더불어 함께 떠올라오는 내 삶의 추억 같은 것들 때문이 아닐까. 아무것도 모르고 영화보기를 시작했을 때부터 무료하거나 우울할 때 무던히도 찾았던 극장들과 어두운 객석 한쪽에 앉아 스크린 위에 펼쳐지는 무수한 환상들을 보며 잠시 모든 것들을 잊던 시절의 추억들…. 이소룡에 푹 빠져 그처럼 머리를 기르고 매일 집마당, 거울 앞에서 근육을 다듬던 대학생 사촌형, 늘 지갑엔 이소룡 사진, 가방엔 쌍절곤을 넣고 다니던 고등학교 친구녀석, 청소 시간, 쉬는 시간이면 이소룡의 숭배자들에 의해 온 중학교 교실에 메아리치던 이소룡의 고양이 기합소리…. 지금도 <정무문>이란 영화를 생각하고 이소룡이란 배우를 생각할 때면 늘 내 눈앞에 펼쳐지는 아련하고도 친숙한 그 시절의 그림들이다. 나는 지금껏 얼마나 많은 영화들을 봐왔을까? 그리고 얼마나 많은 영화들과 추억의 동시대성을 나누어 지닐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럴 가능성은 희박해지고 가망성 없게만 느껴진다. 내가 그토록 좋아하던 영화를 직접 만들 수 있게 됐음에도 불구하고 내 머릿속은 잔뜩 복잡해지고 이미 영화를 영화로서 편하고 순수하게 볼 수 없을 만큼 찌들고 교활해져버린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자꾸 예전이 그리워진다. 아무 생각없이 영화만을 보던 그 시절이. 이소룡의 날렵한 발차기가 내 발차기인 양 극장 의자에 앉아 있는 내 발이 덩달아 움찔하고, 극장에서 돌아와 거울 앞에서 한번쯤 그의 표정과 기합소리를 흉내내보곤 하던 순진하던 시절이…. 그것은 내가 <택시 드라이버> 속 로버트 드 니로의 연기를 인상깊게 보고(대학교 때 본 걸로 기억한다) 집에 돌아와 거울 앞에서 재미삼아 “Are you talking to me?” 하고 흉내내보는 것하곤 이미 너무 다른 궤도에 있는 것이므로.

회화성과 음악으로 빚어낸 영상리듬

미조구치 겐지는 샘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1950년 후배 구로사와 아키라가 <라쇼몽>으로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았을 때, “위대한 예술은 나이 50은 넘어야 하는 건데 까마득하게 어린 사람이 상을 받다니” 하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고 합니다. 그때가 미조구치의 나이 52살 때입니다. 그래서 자기도 상을 받기 위해 착수한 게 <오하루의 일생>입니다. 이 영화는 결국 1952년 베니스영화제에서 은사자상을 수상하게 되지요. 그리고 미조구치는 연속해서 <우게츠> <산쇼다이유>를 베니스 출품, 3년 연속 수상이라는 ‘쾌거’를 이룹니다. 미조구치 겐지는 오즈 야스지로, 구로사와 아키라와 함께 일본영화를 대표하는 거장입니다. 그런데도 다른 두사람보다 덜 언급되고 덜 연구돼 온 편인데, 그 이유는 그가 서구학자들에겐 유용한 틀이었을 일본 ‘내셔널 시네마’의 범주로 쉽게 포착이 안됐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됩니다. 일본영화와 거의 동의어로 취급됐으며 일본 영화미학의 완성자인 오즈 야스지로, 그 반대편에 서구적 서사기법에 통달한 구로사와 아키라라는 구도에선 미조구치의 자리가 마땅치 않았던 겁니다. 실제로 미조구치 겐지에 대한 서구 영화학자들의 본격적 연구는 1980년대 이후에야 시작됩니다. 이 시기부터 일본 내셔널의 틀을 뛰어넘는 독창적인 영화세계를 이룩한 거장으로 자리매김됩니다. <오하루의 일생>은 미조구치 겐지라는 이름을 서구에 처음 알린 영화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영화가 소개되자 당시 누벨바그 평론가들 사이에선 구로사와를 폄하하고 미조구치를 숭배하는 경향이 나타났다는 겁니다. 구로사와는 내러티브 의존도가 높고 논리성이 강했기 때문에 덜 영화적이라고 생각했던 거지요. 반면 미조구치는 회화성과 독특한 음악의 사용으로 독창적인 오케스트레이션을 빚어냈습니다. 자크 리베트는 자신의 <수녀>가 <오하루의 일생>에 감화받아 만든 영화라고 자랑스럽게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미조구치 영화를 말하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게 여성 캐릭터입니다. 그의 영화에는 두가지 여성상이 공존합니다. 하나는 30년대 영화들에서 주로 나타나는 독립적이지만 반항적이고 공격적인 여인들입니다. 다른 하나는 50년대 영화들 특히 <오하루의 일생>이나 <우게츠>에서처럼 희생적이고 숭고한 여성상입니다. 얼핏보면 상반돼 보이지만, 미조구치의 편력을 살펴보면 이 두 여성상이 공존하는 이유를 짐작하게 됩니다. 미조구치의 아버지는 중소사업가였고 사업에 실패해서 아들을 초등학교밖에 보내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의 진학을 책임진 건 한때 기생이었다가 부잣집에 시집간 누나였습니다. 이후로도 그 누나는 미조구치에게 용돈도 주고 직업도 알선해줍니다. 말하자면 희생적이며 든든한 후견이었죠. 미조구치에게 또다른 여성상은 유곽에서 발견됩니다. 미조구치의 술과 여성 애호는 유명합니다. 두달 정도 같이 살던 기생을 버린 뒤 그 여자에게 칼을 찔리는 사건 때문에 신문에 보도된 적도 있습니다. 실질적인 첫 아내는 어느 댄스홀의 무희였는데, 미조구치가 너무나 바람을 피우는 통에 정신병에 걸립니다. 그런 와중에 처제의 남편이 죽자 그는 처제를 아내로 맞아들이는 상상불허의 행각을 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결혼도 안정적이지 못해 <오하루의 일생>의 여배우인 다나카 기누요한테 또 청혼을 합니다. 거절당한 미조구치는 이후 다나카 기누요의 감독 데뷔를 적극적으로 방해했다는 후일담도 있습니다. 여하간 58살에 죽기까지 여성편력이 끊이지 않았다는 것이 주변 사람들의 증언입니다. 이 특수한 체험들이 미조구치에게 모호하고 복합적인 여성상을 심어준 것으로 짐작됩니다. 많은 미조구치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는 이야기를 주도하지만, 자연주의적인 필치로 극히 냉정하게 묘사돼 즉각적인 동정이나 쉬운 동일시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의 중기 걸작 <오사카 엘레지>의 다소 충격적인 마지막 장면은 집안의 빚을 갚느라 창녀로 전락한 딸의 분노한 얼굴로 채워지는데, 그 표정이 비극의 주인공으로 보기엔 너무 도전적이고 공격적이어서 감독이 과연 그녀의 편에 서있는지조차 약간은 의심스럽습니다. <기욘의 자매들>에서 동생의 이미지도 이와 비슷합니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전락하는 여인의 일대기를 거대한 벽화의 스케일과 톤으로 그려낸 영화가 바로 <오하루의 일생>이며, 오하루라는 캐릭터엔 희생적이면도 공격적이고 속되면서도 숭고한 미조구치의 여주인공이 집약돼 있습니다. 뒤이은 <우게츠>도 그렇지만 <오하루의 일생>의 감동은 여성 캐릭터나 이야기 자체가 아니라 이 영화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요소들의 시적인 합주의 아름다움에서 옵니다. 이야기나 인물에의 몰입을 방해하면서 새로운 리듬과 화음의 웅장한 오케스트레이션를 들려주고 있는 겁니다. 이건 이야기체 영화의 독창적 경지였고, 미조구치의 작가성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점이지요. 미조구치 롱테이크와 원신 원숏(플랑 세캉스) 촬영이 영화교과서에 올라 있는 것도 그것 자체가 새로와서가 아니라 그것으로 자기만의 새로운 리듬을 만들어내고 때문이겠지요. 그러보 보면 미조구치도 스탠리 큐브릭처럼 끊임없이 재촬영을 요구하면서도 그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던 이유를 짐작할만 합니다. 그가 원하는 건 정교한 연기가 아니라 배우와 공간의 에너지가 합일하는 찰나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건 편집의 영화를 추구했던 오즈 야스지로의 자로 잰듯한 연출방식과는 대조되는 점이기도 하지요. 이 때문에 <오하루의 일생>은 빠른 호흡에 편집에 익숙한 사람들한테는 고통스러울지 모르지만, 머리와 감각을 열어놓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영화체험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정리 최수임 기자 ▶ 모두가 아는 영화, 그러나 알지 못했던 이야기 - 제1강 ▶ 회화성과 음악으로 빚어낸 영상리듬 - 제2강 ▶ 영화사를 뒤흔든 걸작, 그 작용과 반작용 - 제3강

알렉산드르 소쿠로프 감독의 <어머니와 아들>

Mother and Son 1997년, 감독 알렉산드르 소쿠로프, 출연 거드런 게이어 9월8일(토) 밤 10시10분 이따금 ‘이 영화를 어떻게 글로 설명해야 하나’라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어머니와 아들>이 바로 그렇다. 직접 눈으로 보라는 설명이 최상일 듯싶은 영화. 플롯이라고 할 만한 것이 거의 존재하지 않고, 배우도 단 두명만 출연할 따름이다. 그런데도 영화엔 시적인 서정과 중독성이 배어 있다. 영화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의 말을 빌리자면, “소쿠로프의 작품엔 한번 영화를 보면 도중에 포기할 수 없는 마약 같은 효과가 있다. 일본에서도 그의 영화가 상영될 기회가 있었는데, 소쿠로프 영화가 상영될 때면 어김없이 모습을 드러내는 기묘한 집단이 형성되었다. 그의 영화는 어느덧 무서운 ‘습관’이 되어버린 거다.” 러시아 출신의 알렉산드르 소쿠로프에게 <어머니와 아들>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각종 영화제를 통해 그의 명성을 해외로 전한 작품이자, 이른바 ‘초월적’ 스타일로 분류되는 감독의 영화세계를 확립한 작업인 것이다. 소쿠로프는 러시아문학의 철학적 지성과 신비주의를 스크린으로 불러들인 감독으로 평가받곤 한다. 죽음의 문제, 그리고 영혼의 안식을 한결같이 논하면서 수공업적 방식으로 아름다운 영상을 창조하는 데 달인이다. <어머니와 아들>에서 소쿠로프 감독은 전작인 <세컨드 서클>(1990)의 흔적을 남겨놓는다. 어느 부자가 등장하는 <세컨드 서클>이 병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는 과정, 그리고 혼자 남은 아들이 아버지의 시체를 안고 죽음을 피부로 체험하는 것을 카메라에 담아놓았다면, <어머니와 아들>에선 어머니가 세상에 작별을 고한다. 불치병을 앓고 있는 어머니, 그리고 그녀를 돌보는 아들이 있다. 어머니는 걷는 것도, 먹는 것도 힘이 들 정도로 허약한 상태다. 어머니가 산책을 하고 싶다는 말을 하자 아들은 그녀를 안고 길을 나선다. 하지만 두 사람에겐 이별의 시간이 금세 찾아온다. <어머니와 아들>은 풍성한 영화다. 이미지가 풍성하고, 들릴 듯 말 듯하면서 끊이질 않는 사운드가 풍요롭다. 명징하기 이를 데 없는 화면은 <어머니와 아들>이 세트가 아닌 실외에서 촬영한 영화인지 믿기 힘들 지경이다. 미니어처를 사용한 것 같은 착시현상이 느껴지곤 한다. 영화에서 죽음을 앞둔 어머니는 자신을 돌보는 아들과 대화를 나누고, 두 사람은 집을 벗어나 들판으로 향한다. 바람이 불어오고, 어머니를 품에 안은 아들은 걸음을 멈칫거리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소쿠로프 감독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심한 화면을 하나씩 차곡차곡 쌓아간다. 고요하게 서 있는 나무 한 그루, 바람결에 파도처럼 흔들리는 풀잎들, 그리고 사람의 작은 숨소리까지 영화에선 큰 울림을 낳는다. 세심한 디테일을 통해 영화는 차츰 묵직한 주제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사랑하는 누군가가 내 곁을 떠나간다는 것, 그것은 허전하지만 참아내야만 하고 수용할 수밖에 없는 자연의 법칙이라는 거다. 감독과 곧잘 비교대상이 되곤 하는 타르코프스키 감독이 조형미와 종교적 주제를 영화에 각인시켰다면, 소쿠로프 감독은 작은 일상의 흐름 속에 찾아드는 ‘신비의 순간’을 화면에 옮긴다. 피곤에 지친 어머니가 세상에 안녕을 고할 때, 작은 나비가 그녀의 손가에 머물러 있다. 잠깐의 침묵이 이어지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하나의 생명이 별이 스쳐가듯 사라져버린 것이다. 영원히. 지극히 자연스럽게. 김의찬/ 영화평론가 sozinho@hanmail.net

언더그라운드만화계간지 <코믹스> 창간

언더만화의 끈질긴 생명력은 놀랄 만하다. 자신감도 마찬가지다. <만화실험 봄>에서부터 <히스테리> <버전업 히스테리> <바나나>에 <웹진 코믹스>까지 한번도 전열을 흐트러트리지 않고 일관되게 진화, 진보하는 그들의 자신감은 다시 계간 만화잡지 <코믹스>로 꽃을 피웠다. 만화실험 봄부터 이들의 대오를 단일하게 유지하는 결정적인 구심점이 된 신일섭은 특유의 낙서만화로 최근의 상황과 전선에 임하는 다짐을 선언하기도 했다. “수렁 속에서 늘 그랬던 것처럼 COMiX는 늘 새로운 길을 모색”했으며, 상업잡지와의 진검승부를 위해 잡지를 창간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에 걸맞게 지금까지 만들었던 어떤 잡지보다 많은 작가진들이 참여했다. 이경석, 김대호, 이영수, 조수진, 유창운처럼 <히스테리>와 <웹진 코믹스> 등을 통해 선보인 작가들은 물론 명이나 이우일 같은 작가들도 참여했다. 450여쪽이 넘는 두터운 볼륨에 다채로운 만화들은 그야말로 ‘잡지’로 손색이 없다. <코믹스> 특유의 자유분방하고 일탈적인 분위기는 여전하지만 개별 작품이 지닌 진정성의 무게도 만만치 않다. 프랑스만화를 출판한 현실문화연구에서 지난 8월20일 나왔고, 가격은 9500원이다. <바람의 나라> 18권 출간 고구려 유리왕, 대무신왕, 호동왕자 등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바람의 나라> 18권이 출판되었다. 여러 번 연재매체를 옮기면서도 서사극화의 대표주자답게 중단없이 이야기를 계속 진행하고 있다. 호동의 아버지 콤플렉스는 여전하며, 무휼의 아들에 대한 콤플렉스 또한 여전하다. 이야기는 무휼의 아들 해우가 5대 모본왕에 오르기까지, 태자가 나이가 어린 관계로 4대 민중왕에 올랐던 해색주의 동생 재사가 국내성으로 향하면서 시작된다. 인물들의 감정을 표정에 담아내는 연출이나 탁월한 배경, 서사와 판타지 그리고 인물들의 감정이 서로 교차하는 이야기 전개는 역시 김진의 작품이다. <바람의 나라>도 서서히 대단원으로 머리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