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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검색결과

기사/뉴스(9404)

청년폭도, 인디계의 슈퍼스타로 우뚝 서다

며칠 전 신촌에 있는 한 대형 음반매장에 들렀을 때의 일이다.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펑크록 밴드 노브레인의 보컬인 ‘불대가리’ 이성우의 전신 브로마이드가 씩 웃는 모습으로 손님들을 반기고 있는 게 아닌가. 알 만한 사람들은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지난 7월 말 일본에서 개최된 후지 록페스티벌에 참가한 노브레인이 공연 도중 일본의 대동아기를 이빨로 물어 찢었던 것이 회자되자 약삭빠른 음반사가 이를 홍보전략으로 이용한 것이리라. 사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는 게, 그 음반매장은 미국에 본사를 둔 거대기업의 국내 지점이었다. 하지만 노브레인이 누군가. 90년대 중반부터 홍익대 앞을 휘젓고 다니며 펑크 록이라는 ‘생양아치들의 음악’(?)을 국내에 본격적으로 알리는 데 이바지했던 ‘인디 1세대’ 밴드가 아니던가. 이 인디음악의 아이콘이 음반업계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매장 입구에서 손님들을 맞이하는 풍경을 보니, 돈과 산업이라는 것이 정말 무서운 놈들이구나 하는 생각에 잠시 허무한 한숨이 나오기도 했다. 어쨌거나 잊을 만하면 사람들 뇌리에 자신들의 이미지를 또다시 꽂아넣는 노브레인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한동안 잠잠하다가 난데없이 섹스 피스톨스의 음반 수록곡들을 한곡도 빠짐없이 커버한 을 발매하는가 하면, 팬들의 성원에 보답한다며 입장료 100원짜리 벼락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이번에도 ‘대동아기 사건’으로 세상의 눈길을 자신들에게로 돌려놓았고, 그로 인해 두 번째 정규음반 이 발매된 지 한달이 넘어간 지금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그렇다고 노브레인을 ‘떠버리 이슈메이커’로만 판단한다면 큰 오산. 은 올 여름 가장 주목할 만한 국내 록음반 중 하나로 꼽을 만한 완성도를 들려준다. 무엇보다 펑크 록 특유의 과격함과 경쾌함이 적절히 섞여 있어 가슴 뜨겁게 들을 수 있다. 트랙 하나하나를 세심히 감상하다보면 ‘시종일관 조져대는 줄로만 알았던 펑크의 제맛은 그 미묘한 차이를 찾아 듣는 것’이라는 사실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기타리스트 차승우의 속시원한 펑크 기타가 여전히 음반 전면에 부각되어 있으며, 이성우의 목이 찢어지는 듯한 보컬과 황현성의 거침없는 드러밍도 전혀 누그러지지 않았다. 푸석푸석한 사운드 질감은 마치 클럽에서 라이브로 연주하는 것 같은 날것 그대로다. 전작들에 비해 이성우와 황현성의 작곡 비중이 늘어난 점이 눈에 띄는데, 특히 황현성이 만든 <이제 나는> <사람은> <살고 싶소> 등은 재치있는 가사와 다양한 리듬패턴이 돋보여 밴드 내에서 상대적으로 입지가 약하던 그의 음악적 성장을 엿보게 해준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태양은 머리 위에> 등은 신나게 두들겨대는 전형적인 펑크 넘버들이며, 안티 서태지 운동 이후 인터넷을 통해 쏟아진 비난에 회의를 느껴 만들었다는 <거세>는 분노가 꿈틀거린다. <해변으로 가요> <암중모색> 등은 70∼80년대 그룹사운드풍이 도입돼 산뜻함을 더하며, 타악기 연주자 정정배가 참여한 곡 <사람은>에서는 보사노바 리듬까지 소화해내고 있다. 재기발랄하고 즐거운 음반임에는 틀림없지만, 노래말을 보면 이 땅을 살아가는 마음이 ‘편치 않은’ 젊은이들의 속내를 대변하고 있어 마냥 신나지만은 않다. 남들과 똑같이 살기를 원치 않는 펑크 로커들의 바람이 배어 있어 자못 숙연해질 여지마저 준다. 비록 마니아와 평론가 모두를 사로잡았던 <청년폭도맹진가>만큼 듣는 이를 단번에 휘어잡는 사운드는 아닐지라도, 이 음반으로 노브레인이 ‘인디계의 슈퍼스타’ 자리를 더욱 견고히 했다는 사실에 이의를 달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이진백/ 도시생활정보사이트 줌시티(zoomcity.com) 음악 담당

바다 위에 피어난 국경없는 시네마 파라디소

늦여름의 베니스에는 저마다의 그림엽서를 가슴에 품은 관광객들이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다. 관광객들이 현지주민들의 머릿수를 훌쩍 뛰어넘는 8월 말 9월 초가 되면, 물 위에 떠 있는 도시 베니스의 땅덩어리 위에는 사람들이 둥둥 떠다닌다. 그들의 몸은, 특히 마음은 그렇게 떠다니고 있다. 베니스만큼 이방인에게 세상의 주인공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곳이 또 없다고 했던가. 낭만적인 여정, 낯선 사랑을 예감하며 베니스를 찾는 이들이 과연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이맘때의 베니스가 다양한 양질의 문화 체험장으로 거듭나는 복된 공간이라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흔히 베니스 관광 성수기의 핵심 행사로 곤돌라 축제를 들지만, 알고 보면 더 큰 주역은 영화제를 비롯한 문화행사 ‘비엔날레 디 베네치아’다. 이때만큼은 베니스도 뉴욕 못지 않은 코스모폴리스가 된다. 그뿐 아니다. 올해 베니스에 도착한 예술작품들은 국경도 무너지고 장르도 무너져 있다. 영화제가 열리는 리도 섬은 온통 국적 불명의 합작영화 물결이고, 미술전이 열리는 아르세날레지역에는 영화제의 손님이어야 할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와 아톰 에고이얀의 영상물들이 ‘설치’돼 있다. 우연일까. 푸른빛 가득한 영화의 바다로 뛰어든 여인의 이미지를 회화적으로 표현한 리드필름을 시작으로 58회 베니스영화제가 ‘2001 시네마 오디세이’에 나섰다. 지난 8월29일 저녁 7시 리도 섬의 팔라초 델 시네마에서는 58회 베니스영화제의 출항을 알리는 개막식이 펼쳐졌다. 행사 시작 두어 시간 전부터 영화제 메인 행사장인 팔라초 델 시네마 앞 야외무대로 스타들의 캣워크를 보기 위해 취재진과 이탈리아 현지관객이 몰려들었지만, 이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스타는 난니 모레티를 위시한 심사위원단, 그리고 개막작 <더스트>의 밀초 만체프스키 일행 정도로 단출했다. <타인들> <생일소녀>의 니콜 키드먼, <제이드 스콜피온의 저주>의 헬렌 헌트, <트레이닝 데이>의 에단 호크, 덴젤 워싱턴, <프롬 헬>의 조니 뎁과 헤더 그레이엄 등의 할리우드 스타들과 일찌감치 평생 공로상 수상자로 선정된 에릭 로메르, 이태리필름 파운데이션의 위원장 마틴 스코시즈, 소설가로 전향(?)한 마이클 치미노 등이 영화제 기간중 베니스를 찾을 예정이지만, 개막식에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탈리아관객은 그들의 우상 난니 모레티의 존재만으로도 흐뭇한지, “몇년 전부터 내가 영화제에 참석하는 걸 반대한 유일한 사람이 알베르토 바르베라 집행위원장인데, 올해는 내가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고 이 자리를 내준 것 같다”는 썰렁한 농담에도 흐드러지게 웃어보였다. 올해로 취임 3년째를 맞는 알베르토 바르베라 집행위원장은 그간 영화제의 섹션정비와 행사장 증축 등에 힘을 쏟아왔고 결과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베니스영화제와 이탈리아영화가 하향길을 걷고 있다는 일부 평자들의 냉소어린 비난을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긴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영화제지만, 한동안 칸과 베를린의 기세에 눌려 있던 베니스는 올해 새로이 섹션을 정비하면서 재도약을 노리고 있다. 장편 극영화의 공식부문을 ‘베네치아 58’로 개칭하고, 그중 경쟁부문은 작가 발굴을 위해, 비경쟁부문은 거장 유치를 위해 따로 자리를 꾸리면서, 노거장들의 작품을 모셔오는 일과 새로운 작가를 발굴하는 일 중 어느 쪽도 포기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갓 데뷔한 젊고 유능한 감독들을 일찌감치 ‘베니스 패밀리’로 포섭하기 위해 ‘현재의 영화’를 경쟁부문으로 그 성격을 바꿨다. 시상도 늘어서, ‘베네치아 58’의 최우수 작품에 황금사자상을, ‘현재의 영화’ 출품작 중에 올해의 사자상을, 최우수 데뷔 작품에 미래의 사자상을 안기기로 했다. 이번 영화제에서 소개하는 140여편의 상영작들을 아우르는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바로 ‘국적이 사라진 영화’라는 점이다. 단적으로 ‘베네치아 58’의 경쟁부문에 오른 작품의 절반이 적게는 2개국, 많게는 4개국이 손을 잡고 완성한 영화들이다. 개막작 <더스트>도 영국, 독일, 이탈리아, 마케도니아 4개국 합작영화이고, 참여한 배우와 스탭들의 국적은 그보다 훨씬 더 많다. 출품작들의 면면을 봤을 때 합작이 상업적 성공에 기대지 않는 예술영화의 생산활로인 것만큼은 분명해 보이지만, ‘영화의 세계화’가 장기적으로 과연 바람직한가 하는 문제는 여러 가지 논쟁을 불러올 듯하다. 바르베라 집행위원장이 “베니스영화제는 안티 아메리카영화제가 아니”라는 해명을 먼저 나서서 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올해는 12편으로 비교적 미국영화들이 많고, 스필버그의 등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의 작품도 서너편 들어 있다. 국적이 사라지고 있는가 하면, 국적이 늘어난 것도 올 출품작들의 또다른 경향. 아프리카 등 낯선 대륙의 영화들도 상영된다. ‘베네치아 58’부문 작품 중에서 이미 상영돼 언론과 관객의 반응이 읽히는 작품은 래리 클락의 <불리>와 김기덕 감독의 <수취인불명>. <키즈>에 이은 또 한편의 10대 청소년 비행기 <불리>는 또래 집단 내부의 폭력성을 적나라하게 묘사해 표현 수위와 그 파급효과에 관한 논쟁을 불러왔다. 김기덕 감독은 <섬>을 기억하는 유럽언론들에게 다시 한번 주목됐는데, 그들의 관심은 주로 특히 남북한 상황이나 주한미군 문제의 현주소에 집중됐다. ‘현재의 영화’부문과 ‘미래의 사자상’ 후보에 올라 있는 송일곤 감독의 <꽃섬>은 오는 9월5일에 소개될 예정. 이 밖에 앞으로 선보일 베네치아 58 경쟁부문 작품들, 오는 7일 평생 공로상을 받는 에릭 로메르의 신작 <영국 여인과 공작> 등에도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다. 베니스=박은영 기자 cinepark@hani.co.kr ▶ 바다위에 피어난 국경없는 시네마 파라디소 ▶ “이야기를 하고 듣는 건,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

가을 개봉작 70편 올가이드

<거기 없었던 남자> 감독 에단 코언 출연 빌리 밥 손튼, 프랜시스 맥도먼드, 제임스 갠돌피니 수입 씨맥스 커뮤니케이션즈 개봉예정 11월중 평범한 사람이 우연히 색다른 상황에 처한다는, 전형적인 코언 형제풍 누아르. 1950년 캘리포니아의 한적한 마을. 이발사 애드는 부인 도리스와 권태로운 나날을 보낸다. 도리스는 회사 상사인 데이브와 정부 사이이고 애드는 이것을 알고 있다. 어느날 자동세탁기 사업에 투자하라는 제의를 받은 애드는 투자비를 확보하기 위해 데이브를 협박한다. 협박범이 애드임을 안 데이브는 그의 목을 조르다 자신이 펜촉에 찔려 죽고 만다. 그러나 엉뚱하게도 도리스가 범인으로 범인으로 체포되면서 상황은 꼬여간다. 올해 칸영화제 감독상 수상작. <분노의 질주> 감독 롭 코언 출연 빈 디젤, 폴 워커 수입 UIP 개봉예정 9월22일 올 여름 할리우드 영화 중 의외의 성공작을 꼽으라면 단연 <분노의 질주>가 앞줄에 보인다. 별다른 스타도 없고, 대단한 특수효과도 없는 이 영화가 1억달러가 넘는 수익을 기록한 것은 젊은이들의 감수성을 정확하게 반영한 기획력 덕분이라 할 수 있다. 힙합잡지 <바이브>에 게재된 글을 각색해 제작한 이 영화는, 젊은이들이 열광할 수밖에 없는 속도라는 요소를 중심축에 놓고 사랑, 우정, 배신 등의 이야기를 짜임새 있게 구성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세계의 명차들이 도로에서 살벌한 레이스를 벌이는 액션장면 역시 흥행에 톡톡한 공을 세운 요소. <러시아워2> 감독 브렛 레트너 출연 성룡, 크리스 터커, 장쯔이 수입 씨네월드 개봉예정 9월21일 할리우드에서 가장 높게 평가받는 ‘아시아적 가치’인 성룡과 장쯔이가 함께 출연하는 작품. LA를 배경으로 삼았던 1편과 달리 홍콩을 무대로 한다는 점이 다르지만, 성룡의 장쾌한 무술실력과 크리스 터커의 숨쉴 틈 없는 수다가 어우러지는 것은 마찬가지다. 휴가차 홍콩을 찾은 카터와 리 형사가 홍콩 위조지폐 밀수조직과 대격돌을 벌인다는 내용의 이 영화에서 장쯔이는 밀수조직 두목의 오른팔로 출연, 악당의 세계에 도전한다. 또 하나 흥미로운 요소는 DMX, 시스코 등이 펼쳐놓는 젊은 힙합음악이다. 역대 개봉 주말 흥행순위 4위를 기록했다. <바운스> 감독 돈 루스 주연 벤 애플렉, 기네스 팰트로 수입 태원엔터테인먼트 개봉예정 10월20일 바람둥이 독신남성이자 성공한 광고업자인 버디 아마랄(벤 애플렉). 공항에서 버디는 “가족에게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다”는 그레그라는 사람을 만나 자신의 비행기표를 양보하지만 불행히도 그레그를 태운 비행기는 사고가 난다. 일년이 흐른 뒤 LA에 자리한 그레그의 집을 찾은 버디는 젊은 미망인 에비 자넬로(기네스 팰트로)에게 한눈에 매혹당한다. 에비는 범상치 않은 버디와 남편의 인연에 대해 듣게 되고, 남편을 잃고 ‘사랑이 다시 올까?’를 의심하면서 고된 삶을 살아가던 그녀 역시 버디에게 좋은 감정을 키워나간다. <비포 나이트 폴스> 감독 줄리앙 슈나벨 출연 하비에르 바르뎀, 조니 뎁 수입감자/ 개봉예정11월24일 80년대의 그래피티 화가 바스키아의 삶을 다룬 <바스키아>로 데뷔한 화가 줄리앙 슈나벨의 두 번째 영화는, 다시 예술가의 초상이다. <비포 나잇 폴스>는 쿠바 출신 작가 레이날도 아레나스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따라간다. 아레나스는 카스트로 집권하의 쿠바에서 처녀작으로 주목받았으나, 체제비판적인 작가이자 동성애자로 낙인찍힌 인물. 정부의 탄압으로 수감생활을 거친 뒤, 1980년 동성애자, 정신병자 등 정부에서 ‘부적격자’로 판정받아 국외로 추방되는 인파에 섞여 미국으로 탈출한다. 타향에서 차별과 빈곤, 고독에 시달리며 끊임없이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아레나스의 삶과 언어를 다큐멘터리적인 시선으로 재구성한 영화. 지난해 베니스영화제 심사위원 대상과 남우주연상 수상작으로, 특히 스페인 스타 하비에르 바르뎀의 연기가 돋보인다. ▶ 2001 가을을 기다리는 영화들 (1) ▶ 2001 가을을 기다리는 영화들 (2) ▶ 2001 가을을 기다리는 영화들 (3) ▶ 2001 가을을 기다리는 영화들 (4) ▶ 2001 가을을 기다리는 영화들 (5) ▶ 2001 가을을 기다리는 영화들 (6) ▶ 2001 가을을 기다리는 영화들 (7) ▶ 2001 가을을 기다리는 영화들 (8)

오염된 세상을 정화하라,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의 임은경

세상물정 모르는 아이일 거라고, 그저 예쁜 소녀일 뿐이라고, CF로 만들어진 허구의 세상에서만 숨쉴 수 있는 인형일 거라고 생각했다면 우리는 아직 이 소녀를 모르는 거다. 1999년, 기묘한 소음과 허밍, TTL이라는 문신을 새기고 우리를 응시하던 소녀에게선 피노키오의 나무냄새가 났다. 그러나 2001년, 8개월 동안 부산의 짠내나는 바람에 단련된 임은경에겐 인간의 땀냄새가 풍겨나왔다. 현재 막바지 작업중인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의 촬영 틈새, 서울의 스튜디오로 날아온 임은경은 여전히 눈을 떼지 못하게 예쁜 소녀였지만 영화 초반에 비하면 한껏 밝아지고 웃음도 잦아졌다. 현실인 듯 가상이고 가상인 듯 현실인, 오락실에서 동전바꿔주는 날라리 소녀 ‘희미’이자 자신을 외면한 세상에 분노하는 성냥팔이 소녀 ‘성소’인, 모든 경계가 불분명한 데뷔작이 자신을 힘들게 했음이 분명한데, 이 소녀는 그저 이 영화가 고맙다고 한다. “어둡게 자라서 말도 안 하고, 표정도 없고 그랬는데, 영화 찍으면서 많이 밝아지고 명랑해져서 좋아요. 또 오랜 시간 동안 여러 사람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도 재미있고요.” 하지만 촬영 초반 성소의 캐릭터를 잡아가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장선우 감독은 마치 숙제를 던져준 선생처럼 임은경이 첫 번째 과제를 풀어내는 과정을 지켜볼 뿐이었다. “‘스스로 학습’이었어요. 감독님은요. ‘그냥 네가 편한 대로 해, 네 느낌대로 해’ 그러셨는데요. 음… 이게 맞는지, 저게 맞는지 모르니까 그게 더 어렵잖아요?” 처음에는 이해가 안 돼도 그냥 쭉 읽어나갔고 두 번째부터는 꼼꼼히 읽었다. 그리고 시나리오를 읽은 주변 사람들에게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성소는 세뇌당한 불쌍한 아이야.” 세뇌당한다는 게 어떤 느낌일까? 전혀 감이 안 잡혔다. “성소는 억압받은 아이야.” 억압? 억압은 세뇌보다는 쉬웠다. “성소는 시스템에 세뇌당한 아이고, 어떻게 보면 학교제도란 것도 커다란 시스템이잖아요. 학교 다니면 늘 ‘이런 건 하면 안 돼’, ‘이건 해’ 하는 억압을 많이 받으니까요.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정말 성소처럼 다 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낄 것도 같았어요.” 그렇게 임은경은 서서히 자신만의 성소를 빚어나갔고, 꾸준히 시나리오 오른쪽 백지에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을 써내려갔다. “다음날 찍을 시나리오 옆에 그 신에 대한 막연한 제 느낌들을 썼어요. 그전 상황은 어땠지? 지금 성소는 어떤 마음일까. 내가 바구니를 왼손에 들고 있었나, 오른손에 들고 있었나, 뭐 이런 거요.” 그냥 고민하는 것보다 눈으로 보는 게 정리가 잘 되었고 좀더 공부하는 자세로 진지하게 영화를 대할 수 있었다. “저 원래 겁이 없어요.” ‘헤헤’ 웃는다. 성소의 변화를 담은 2부를 찍기 위해 지난 겨울 임은경은 혹독한 액션훈련을 거쳐야 했다. 하지만 와이어에 매달려 거친 액션을 하는 것도, 높은 건물에서 단숨에 떨어지는 것도, 몸무게가 버티지도 못할 만큼 무거운 총을 들고 쏘아대는 것도, 눈앞에서 쉴새없이 터지는 총소리도,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정작 이 열아홉살 ‘큰애기’가 무서워하는 것은 조그마한 곤충이다. “특히 귀뚜라미가 무서워요. 가느다란 발 많이 달린 건… 으으으… 싫어요.” 한두번 들었을 말이 아닌 “예쁘다”는 칭찬에 두볼이 금새 빨갛게 달아올라 어디라도 숨을 태세이고, 처음 번 돈으로 부모님께 보약을 해드렸다는 이야기에 슬그머니 미소를 짓는 임은경. 그와 있으면 세상 누구라도 착해질 것 같았다.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부모님께 할말이 있으면 은경의 손을 통했고, 그렇게 어린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일찍 고된 세상을 알아버렸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에게서는 일찍 알아버린 세상에 대한 절망이나 냉소는 찾아볼 수 없다. “친구들에게 특별한 부탁을 했어요. 자기는 자기가 어떤 상태인지 잘 모르잖아요. 그래서 내가 조금이라도 변했는지, 잘난 척하는지, 못되지진 않는지 꼭 말해달라고요. 나쁘게 변하는 건… 안 좋잖아요. 영원히 그렇게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혼자서 끙끙대며 뽑아낸 고치실로 자신만의 무균실을 만들고, 오염된 세상을 불러들여 정화시키는 필터 같은 소녀. 2001년, 충무로 거친 들판에 작고 여린 소녀의 몸을 빌려 메시아가 재림했다. 대학 친구들은 다 고3이라 수능준비해요. 물론 저도 대학에 가고 싶은 생각이 있지만 영화작업을 좀더 하고 싶어요. 또 ‘쟤는 연예인이니까 대학갔을 거야’ 하는 오해도 받고 싶지 않고, 학교갈 시간도 없을 텐데 간판만 있는 대학생도 하기 싫어요. 정말 공부하고 싶을 때, 충실할 수 있을 때 갈래요. 일문학과에 가고 싶어요. 일본엔 일 때문에 2번 정도 갔는데, 공기도 안 좋고, 사실 별로 살고 싶은 곳은 아니지만 전 일본어가 좋아요. 소리도 예쁘고요. 사람들의 관심 부담도 많이 되고, 물론 싫을 때도 있죠. 하지만 나를 바라봐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내가 있는 거니까…. 그렇게 생각해요. 고마운 일이라고. 요즘 제일 재미있는 것 비트마니아가 재미있는데 잘 못해요. 그래서 자주해요. 또 ‘틀린 그림찾기’도 좋아해요. 음… 집중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많이 되거든요. 시나리오를 이해하는 임은경만의 비법공개 불안하면요… 으음… 시나리오를요… 그냥, 뚫∼어져라 쳐다봐요. 그럼 좀 위안이 되거든요. 헤헤.

코미디, 안온한 나의 정원, <브리짓 존스의 일기> 휴 그랜트

만약 ‘난처함’이라는 감정에 이목구비가 있다면 그건 바로 휴 그랜트(41)의 마스크일 것이다. “어쩌면”, “혹시”, “믿을 수 없는” 따위의 단어로 점철된 말투, 그렇게 완곡한 화법으로도 끝내 못 꺼낸 이야기를 모스 부호로 타전이라도 할 듯 분주히 깜박이는 눈꺼풀, 손가락 빗질로 가라앉을 틈이 없는 그의 구제불능 곱슬머리가 스크린을 어수선하게 할 때 우리는 괜스레 덩달아 난처해진다. 심지어 휴 그랜트가 영화 속에서 유난히 자주 입는 밝은 색상 와이셔츠들마저, 뭔가가 쏟아지거나 이상한 곳에서 단추가 풀려 ‘곤란한’ 그의 운명을 악화시키는 데에 일조한다. 시인 바이런을 꼭 닮은 홍안의 미청년으로 머무는 동안, 시대극의 성곽 안을 소요하는 동안 휴 그랜트의 서투름은 곧 사랑스러움 혹은 퇴폐적인 매력이었다. <모리스>(1987), <비터 문>(1992), <베니스행 야간열차>(1993),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1994)에서 그는 모욕과 시행착오를 병적으로 겁내는 귀공자, 성 정체성이 모호한 딜레탕트로서 거의 완벽한 그림을 만들어냈다. <노팅힐>(1999)에 이르면 그의 서투름은, 실패와 결핍을 삶의 정상적 조건으로 받아들이게 된 30대 남자의 쓸쓸하고도 침착한 표정으로 숙성된다. <노팅힐>에서 남성판 브리짓 존스라고 할 만한 윌리엄 역을 맡았던 휴 그랜트는 <네 번의 결혼식…>과 <노팅힐>의 작가인 리처드 커티스가 시나리오를 쓴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서 브리짓에게 근사한 와인과 섹스를 선사하는 대신 양다리 걸치기로 가슴을 찢어놓는 ‘여성의 공적’ 다니엘 클리버를 연기한다. 야비한 바람둥이가 된 휴 그랜트는 연적을 모함하고 “나 사랑해?” 하는 난감한 베갯머리 질문을 “조용히 안 하면 한번 더 한다!”라는 재치(?)로 제압한다. “할 수 있다면 성격을 뜯어고쳐 당신에게 다가가 키스하고 싶습니다”라고 남의 일처럼 중얼거리는 <노팅힐>의 윌리엄에게 반했던 관객에겐 배신이 될 만한 캐릭터다. 하지만 “이거야말로 진짜 휴 그랜트”라는 것이 본인과 주변의 반응. “내가 <네 번의 결혼식…>과 <노팅힐>의 좋은 녀석일 거라는 사람들의 짐작은 작가인 리처드 커티스를 포함해 날 아는 모든 이를 웃게 만든다”고 그랜트는 득의양양해한다. 하지만 휴 그랜트와 가장 닮았다는 다니엘 클리버 안에도 <네 번의 결혼식…>과 <노팅힐> <미키 블루 아이즈>의 온화하고 사랑스러운 현실주의자가 숨쉬고 있다. 연애에 멍들어본 여자 관객이라면 “지금 있는 그대로의 당신이 많이 좋다”는 마크 다아시의 달콤한 고백보다는 “만일 당신과 잘 안 된다면, 나는 누구하고도 잘 안 되는 남자일 거야”라는 다니엘의 초라하지만 현실적인 ‘협상안’에 마음이 동할지 모른다. “그는 대단하다. 그랜트의 재능은 그 가벼움 때문에 간과되기 쉬운 종류의 재능이다”라는 콜린 퍼스의 말처럼 휴 그랜트에게 가장 편안한 정원은 코미디고, 그중에서도 가장 안락한 벤치는 ‘휴 그랜트 3부작’이라고도 불리는 영국 영화사상 가장 성공적인 로맨틱코미디를 만들어낸 리처드 커티스의 시나리오다. 그러나 휴 그랜트는 세상에서 가장 형편없는 경력 관리 솜씨로 정평이 나 있다. 6년 전 매춘 스캔들을 필두로 할리우드 진출 초반에도 몸살을 앓았고 스릴러를 시도했다가 찬물을 뒤집어쓰기도 했다. “내 커리어의 모델은 런던의 시내버스다. 네 시간 기다려도 한대도 안 오다가 스무대가 동시에 몰려오는 식이다.” 우디 앨런의 <스몰 타임 크룩스>와 <브리짓 존스의 일기>를 성공적으로 마친 그의 신작은 닉 혼비 원작의 <한 소년에 관하여>. 뒤늦게 어른이 되는 법을 배우는 소년 같은 남자로 분한다. 적어도 그에게 친숙한 정원에 머무르는 한 휴 그랜트가 기다리는 ‘버스’의 배차 간격은 개선될 것이 분명하다. <미키 블루 아이즈> 항상 갱영화 출연제의가 없어서 마음의 상처가 컸다. 내가 스크린에서 내뿜는 자연스러운 악의를 생각해보라! 마틴 스코시즈가 왜 내게 전화를 걸지 않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마흔살 생일. 어찌어찌 하다보니 파티를 조직하기에는 너무 늦은 날짜더라. 결국 가슴속에 분노가 많은 대여섯명의 다른 마흔살 동갑내기들과 우울하게 술집에 앉아 있다가 집으로 흩어졌다. 일류 디자이너들이 자기 옷을 입어달라고 접근하는 일이 많은가. 일류 디자이너들이 접근을 많이 하긴 한다. 제발 자기네 옷을 입지 말아달라고. 진정한 사랑이란 획득 가능한 것일까. 그렇게 생각한다. 흔치 않은 새지만, 나는 그 새를 언젠가 본 적이 있다.

박수 쳤다고 치고 떠나자

“박수칠 때 떠나라.” 장진의 연극제목이다.(여기서 장진은 와호장룡의 장진이 아니다) 장진감독이 연극 “박수칠 때 떠나라”라는 연극을 한다고 할 때 참 제목 한번 잘 지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 박수칠 때 떠나기가 생각만큼 쉬운 게 아니다. 모름지기 인간이기 때문에 더 큰 박수를 받고 싶어지게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떠날 때를 놓치고 만다. 하물며 뭐 좀 한번 해보려고 하다가 박수는커녕 뭐 하나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면 한쪽 가슴이 저릿저릿 저려온다. 처음에 칼럼 연재 제의를 <씨네21>쪽에서 받고 “에이, 농담두… 놀리지 마세요” 그랬다. 정말 농담이거니 했다. 글이라곤 군대에 있을 때 위문편지에 답장 써본것과 시나리오 두세편 써본 게 전부 다인 나에게 칼럼을 부탁하니 농담이라고 받아들이는 게 당연했다. 게다가 독특한 시각과 장난 아닌 글발을 유감없이 펼쳐보이던 김봉석의 숏컷 칼럼 아닌가? (아직도 난 김봉석 기자와 인사 한마디 못 나눴지만, 하여튼 난 김봉석의 숏컷 팬이었다) 괜히 쓸데없이 글이랍시고 끼적거렸다가 비교되거나 해서 욕이라도 먹으면 득될 게 없을 것 같았다. 몇 차례 고사를 하다가 지금은 영화사 사장님이 되신 조종국 전 기자께서 하면 된다라는 심보로, 거의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바람에 줏대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정말로 써도 되는 건가? 또는 내가 칼럼을 쓸 수 있을까? 하면서 사뭇 진지하게 고민을 해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래, 이번 기회로 나도 사회 전반에 걸쳐 문제의식을 가져보자라든가, 아마 이 게으른 삶을 바로잡아줄지도 모른다는 식의 터무니없는 자기합리화 과정을 거치기 시작하여 한 3개월만 써보자라고 마음을 잡았다. 그리고 <씨네21>을 보며 김봉석의 숏컷 마지막호를 보았다. 그게 벌써 일년이 되었다. 일년 전 그가 이 칼럼을 떠나며 한 말이 기억난다. 다른 건 다 잊어버렸고 사람은 자기가 잘하는 것을 해야 한다…, 뭐 이런 요지였다. 너무 원망스러웠다. 나한테 한 말은 아니지만 내 입장에서 들으면 영화나 잘 만들지 칼럼은 무슨 칼럼이냐?라고 들렸다. 나갈 거면 곱게 나갈 것이지 뒤에 올 사람한테 못질을 해도 대못을 박고 떠나나? 자신은 멋있을 줄 모르지만 뒤에 글을 쓸 난 뭐가 되냔 말이다. 그래서 난 조종국 전 기자이며 동시에 현 사장님한테 전화를 걸어 정말 못 쓸 것 같다고 엄살 아닌 엄살을 떨었다. 나에게 그는 용기를 주기는커녕, 이것은 국민과의 약속(?)이며 이제 와서 못한다면 국민과의 약속을 저버리는 것이며 어쩌며 하면서 겁을 팍 주었다. 첫글을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당시 나는 인터넷영화 <커밍아웃>을 촬영하고 있었다- 쓰기 시작해서 어느새 일년이 넘었다. 격주로 쓰는 것이긴 하지만 한번도 빵꾸를 내지 않은 것이 내 스스로 대견스러웠다. 글쓰는 것도 그럭저럭 재미도 붙었고 내가 그만두지 못하게 <씨네21>쪽에선 반응 죽인다고 계속 공갈을 쳐왔다. 워낙 칭찬에 약한 인간이라 그런 공갈을 듣고도 매번 앞에선 부끄러워하면서 속으론 다음엔 좀더 잘 써야지 하며 다짐을 하기도 했다. 3개월만 쓰려고 했던 것이 한번이라도 잘 써서 박수라도 받고 나가야지 하는 마음으로 일년을 썼던 것이다. 그러다가… 그러다가 모두, 다 이런 생각으로 못 떠나는 거 아닐까? 충분히 박수를 받았는데 더 큰 박수를 바라는 거 아닐까? 그러다가 주저앉거나 놓치는 거 아닐까? 했다. 그렇다. 그러다 떠날 때를 놓치는 거라 생각했다. 터무니없지만 박수받았다고 치고 떠나는 것도 살면서 나쁠 것 없는 지혜였다.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버리는 것도 잘해야 된다던 어떤 분의 편지가 떠올랐다. 그동안 시덥지 않은 글 용케 참고 읽어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럼, 아무쪼록 모두 안녕히…. 김지운/ 영화감독 <조용한 가족>·<반칙왕>

할리우드에는 있다 충무로에는 없다

고통과 해방 너무 힘든 나날이었다. 연재가 지속되는 동안 늘 명치끝에 커다란 돌덩어리를 하나 얹어놓은 느낌이었다. 무슨 놈의 돌덩어리가 수은보다 더 무거워 때때로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가을 지면개편에 즈음하여 연재를 마무리할 수 있겠느냐고 <씨네21>이 넌지시 물어왔을 때 앞뒤 가리지 않고 덥석 제안을 받아들인 것도 그 때문이다. 이제 나는 오늘 날짜로 해방이다. 정말이지 대학 때 곧잘 추던 해방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미욱한 녀석에겐 미련도 많은 법. 해방의 기쁨도 잠시뿐이고 이내 회한과 송구스러움이 몰려와 몇 마디 사족을 덧붙이며 연재를 마감하려 한다. 작가선정의 기준 일견 제멋대로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제법 깐깐한 기준이 있다. ①필모그래피가 최소한 5개는 넘어야 한다. 이는 1990년대 이후에 활동을 시작한 현역작가들에게는 꽤 부담스러운 기준이다. 나 역시 이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②작가 겸 감독의 경우는 제외한다. 장선우나 이명세 등은 훌륭한 시나리오를 많이 썼지만 이 기준에 의하여 제외된다. ③작가로 출발하여 감독이 된 경우, 감독이 된 이후에도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시나리오를 계속 쓴 사람만 포함시킨다. 김성홍이나 강제규 역시 한때 시나리오작가로 명성을 날렸지만 이 기준에 의하여 제외된다. 연재순서에 대한 오해. 연재순서는 중요도에 따른 것도 아니고 연장자순도 아니다. 대중적 주간지의 특성에 맞춰, 독자들이 흥미를 잃지 않도록, 활동시대와 중요도를 마구 뒤섞어 연재했다. 연재 도중 “왜 내가 누구보다 뒤에 나오느냐”는 식의 반응이 있었는데 이 점 오해없기 바란다. 활동시대에 대한 배려 한국영화사 전체를 균형있게 다루기 위하여 시기마다 적절한 숫자의 작가들을 선정하려 노력했다. 결과적으로 총 34인의 작가가 등장했는데 그들을 출생연도별로 분류해보면 ①1900년대(1901∼10년)에 출생한 작가 1명, ②1910년대 4명, ③1920년대 6명, ④1930년대 10명, ⑤1940년대 6명, ⑥1950년대 1명, ⑦1960년대 5명 등이다. 1930년대에 출생한 작가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그들의 주요활동시기라고 할 수 있는 30∼40대가 한국영화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60∼70년대와 맞물려 있기 때문에 일어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1950년대에 출생한 작가가 1명만 선정된 것은 80∼90년대에 들어 각본과 감독을 겸하는 경우가 부쩍 늘어난 까닭이다. 1960년대에 출생한 작가가 5명 선정된 것은 그들이야말로 현재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현역작가들이기 때문이다. 고통의 근원은 데이터베이스의 절대적 부족. ‘할리우드작가열전’을 연재할 때의 고통은 데이터베이스가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공식적으로 3만명이 넘는 작가들 중에 누구를 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힘들지, 일단 선정을 끝내고 해당작가의 에이전트에 연락을 취하면 라이프스토리건 필모그래피건 무한정으로 얻을 수 있었다. ‘충무로작가열전’은 그 반대다. 데이터베이스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며 그나마 있는 정보마저 부실하기 짝이 없다. 나름대로 유급조수까지 고용하여 안간힘을 다해 정보를 찾았지만 충무로 입성과정이나 출신교 따위는 고사하고 최소한의 생몰연도마저 확인할 수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백결·임희재·이성재 등은 훌륭한 작품활동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정보마저 결핍되어 쓸 수 없었던 작가들이다. 다루지 못한 작가들 나한봉과 이상현은 그 빼어난 작품활동으로 보아 반드시 다루어야 하는 작가들임에도 본인들의 완곡한 고사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반면 문상훈·어윤청·이중환·윤석훈 등은 바쁜 시간을 내어 인터뷰에 친절히 응해주셨는데도 서둘러 연재가 마무리되는 바람에 다루지 못했다. 이 자리에 넙죽 엎드려 심심한 사죄의 말씀 올린다. 보람과 감사 본질적으로 학자나 평론가들이 짊어져야 마땅할 십자가를 무능한 일개 작가가 자청해서 떠맡았으니 고통이야 당연한 몫이다. 그 고통을 덜게 해준 것은 매주 쏟아져 들어오던 독자들의 격려메일이었다. 시나리오와 작가의 위상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는 격려를 받을 때마다 뿌듯한 보람을 느꼈다. 장장 20개월하고도 2주 동안 한주도 빼먹지 않고 <씨네21>의 독자들과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은 누가 뭐라해도 과분한 행운이다. <씨네21>의 편집진과 독자들에게 깊이 고개 숙여 감사의 말씀 올린다. 이제 명치끝이 조금은 가벼워진 느낌이다. 심산 besmart@netsgo.com ▶ 신세대, 충무로를 습격하다 ▶ 할리우드에는 있다 충무로에는 없다

코폴라, 새로운 두뇌를 만나다

<지옥의 묵시록>이 한창 제작단계에 있을 때 이야기다. 영화의 제작에 몇년을 쏟아붓고 있는 아버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를 보고 어린 딸 소피아 코폴라는 엄마에게 물었다. “아빠의 직업은 뭐야?” 나중에 그 남편의 지루하면서도 긴장감 넘치는 제작과정을 다큐멘터리 <회상, 지옥의 묵시록>으로 남긴 아내 엘레노어 코폴라의 대답은 이랬다. “아빠는 영화 <지옥의 묵시록>을 만드는 사람이야.” 물론 아빠가 평생 <지옥의 묵시록> 한 작품을 만드는 걸 직업으로 삼았을 리 없다는 것은 그때의 소피아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개봉된 지 22년이 지나 새롭게 만들어진 <지옥의 묵시록: 리덕스>가 개봉되는 것을 보고 있으면, 그때 엘레노어 코폴라의 말이 그리 틀린 것도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자신이 가진 모든 영화적 재능을 <지옥의 묵시록>에서 소진해버렸기 때문에 그뒤 이렇다 할 걸작들을 선보이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는 코폴라의 입장에서, <…리덕스>는 어떠한 전기가 될 것이 분명하다. 지난해 개봉된 SF <슈퍼노바>를 자신의 필모그래피의 새로운 정점으로 만들고 싶었지만, 제작사와의 갈등 끝에 결국 감독 자리를 중도하차했던 쓰라린 경험을 가진 상태라서 더더욱 그렇다. 문제는 아무리 좋은 평가를 받는 ‘전기’가 된다 하더라도 <…리덕스>는 ‘새로운 정점’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 그 점은 누구보다 코폴라가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리덕스>를 들고 칸에 나타났을 때도, 자신의 차기작에 대한 원대한 계획을 설명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또 한편의 진정한 코폴라의 영화를 만들 재능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리덕스>를 통해 확인해보라는 식이었던 것이다. 칸의 기자회견장에서 ‘<지옥의 묵시록>이나 <대부> 시리즈에 비견될 혹은 능가할 규모의 영화’로 코폴라가 소개한 영화의 제목은 <메가로폴리스>. 제목 자체가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를 떠올리는 이 프로젝트는 2002년 상반기 촬영 개시를 목표로 열심히 초반 작업을 진행중이다. <버라이어티>가 ‘전형적인 코폴라 스타일과 새로운 아이디어로 무장한 대작영화가 될 것’이라고 소개한 <메가로폴리스>는 현대의 뉴욕을 무대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하고 사는 미래의 유토피아’를 꿈꾸는 한 건축가의 이야기. 제목이 <메트로폴리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처럼, 이러한 설정도 <메트로폴리스>와 유사한 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캐스팅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확정된 것이 없으나 소식통들에 의하면 워런 비티, 캐빈 스페이시 등이 시나리오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코폴라는 러셀 크로, 리암 니슨, 조지 클루니도 캐스팅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메가로폴리스> 프로젝트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 한 가지는 바로 할리우드에서 한창 잘 나가고 있는 컨셉 아티스트이자 스토리보드 작가인 마우로 보렐리의 참여다. 우리에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지만, 마우로 보렐리는 테리 길리엄의 <바론의 대모험>을 통해 할리우드에서 일하게 된 이탈리아 출신의 아티스트다. 그뒤 바로 코폴라 감독과 인연을 맺어 <대부3>의 스토리보드를 그렸고, 1993년에는 자신이 직접 찍은 단편 로 칸에서 단편부문 최고작품상을 거머쥐기도 한 인물이다. 그뒤로는 드림웍스와 엑티비전 등에서 게임 제작에 참여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영화의 사전 제작과정에서 컨셉 아티스트 또는 스토리보드 작가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중이다. 무엇보다 그의 <메가로폴리스> 참여가 눈길을 끄는 이유는 그의 최근작들이 대부분 시각적으로 훌륭한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코폴라와 작업한 <드라큘라>와 <슈퍼노바>도 그렇지만, <슬리피 할로우>의 나무 묘지, <천국보다 아름다운>의 지옥, <바이센테니얼 맨>의 미래도시 등에 대한 기본적인 컨셉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던 것이다. 이 밖에 그가 참여한 영화로는 <고질라> <베트맨 포에버> <사이코> <헌팅> <리틀 부다> <러브 어페어>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을 들 수 있다. 코폴라가 “아주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영화를 성공적으로 만드는 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영화 자체에 대한 영감을 불어넣는 데도 훌륭하다”고 칭찬하며 <메가로폴리스>의 작업을 맡기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여하튼 <…리덕스>를 통해 영화적 재능이 아직 녹슬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데 성공한 코폴라의 차기작 <메가로폴리스>는 기대가 되는 작품이 아닐 수 없다. 거장의 숨결이 녹아 있는 SF영화가 한편쯤은 나올 때도 되었다는 생각을 하면 더더욱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을 떠난 큐브릭을 대신해 스필버그가 완성하면서 반쪽짜리 영화가 되어버린 와는 달리, <메가로폴리스>가 온전히 코폴라 스타일의 영화로 만들어지길 바라는 것은 비단 몇몇 팬들만의 바람은 아닐 것이다. 지난 22년 동안 끊임없이 만들어온 <지옥의 묵시록>을 <…리덕스>라는 이름으로 이제야 완성시켰다면, 이젠 정말 새로운 정점을 만들 차례가 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철민/ 인터넷 칼럼니스트 chulmin@hipop.com 마우로 보렐리 공식 홈페이지 http://www.mauroborrelli.com/ <지옥의 묵시록: 리덕스> 공식 홈페이지 http://www.miramax.com/apocalypsenow/

2차원에서 3차원으로

성탄 시즌이 되면 서구, 특히 미국쪽에서 항상 들려오는 해외토픽이 있다. 그해 인기있었던 캐릭터 상품들의 매진과 그걸 구하지 못해 안달인 부모와 아이들의 모습이다. 이런 해프닝이 아놀드 슈워제네거 주연의 <솔드 아웃>처럼 영화화할 정도로 이미 정기적인 사회현상이 돼버린 가운데, 최근에는 ‘파워 레인저’나 ‘포켓몬’ 같은 일본 캐릭터를 찾는 것도 그리 힘든 일이 아니게 되었다. 과거부터 ‘테디베어’나 ‘바비인형’과 같은 캐릭터 상품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작품 기획 당시부터 구상돼 수많은 변종 캐릭터 상품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탱크’, ‘군함’, ‘자동차’와 같은 실제 사물을 축소한 것이나 우주선이나 SF메커닉, 로봇의 플라스틱 모형이나 봉제완구가 그러한 상품의 주류였다. 하지만 80년대 들어서는 사람 형태의 캐릭터를 활용한, 고무와 같은 연성 재질의 모형들이 많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지금도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남자가 인간형 캐릭터 인형이나 모형을 사모으는 것에 대해서 상당한 거부감을 가지는 이들이 없지 않지만, 등장인물을 활용한 캐릭터 상품의 주를 이루는 이러한 축소모형은 날이 갈수록 그 규모와 영향력을 넓히고 있다. 실제로 만화나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아무리 입체적으로 보인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2차원 평면에 그려지는 존재다. 디즈니의 극장용 장편애니메이션처럼 애초부터 기본 모형을 가지고 캐릭터 디자인 및 작화를 하는 노력을 들이지 않는 이상, 입체물로 만들어질 때 그 캐릭터 본연의 모습을 표현해내는 것은 힘든 일이다. 특히 한국이나 일본에서 그려지는 만화는 흑백이고 기본적으로 간단한 선이나 스크린톤에 의해 굴곡이 표현되며, 그 안의 색깔이나 색조는 독자의 상상으로 펼쳐내야 하는 게 대부분이다. 컬러로 채색돼 있는 애니메이션조차 자연광이나 일반적인 조명을 고려한 질감이나 색감은 아니기 때문에, 캐릭터가 인물의 기본 등신대에 근접하면 할수록 입체 캐릭터 상품이 되었을 때 어딘가 본연의 이미지에서 벗어나는 느낌의 모형이 되기 쉽다. 9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도 꾸준히 진행되고 있는 경향 중 하나인 ‘복고’는 캐릭터시장에도 예외가 아니다. ‘배트맨’이나 ‘슈퍼맨’, ‘마징거 Z’나 ‘데빌맨’ 등과 같은 옛날 캐릭터가 다시 상품화하고 있는데, 과거의 조악한 이미지의 모형이 실물과 같거나 훨씬 훌륭한 모양새로 만들어져 성인이 된 당시의 팬들을 유혹하고 있다. 이처럼 추억을 자극하는 상품 중 최근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프란다스의 개> <엄마 찾아 삼만리> <빨간머리 앤> 등 ‘명작극장 시리즈’에 바탕한 ‘소형 조립채색인형 시리즈’다. 200∼300엔짜리 소형 동전상품기의 상품으로 일본에서 개발된 이 시리즈는 과거에 나온 원색 위주의 로봇 캐릭터와는 전혀 다른 질감을 보여준다. 게다가 수만원에서 수백만원을 호가하는 캐릭터 상품을 만나기가 그리 어렵지 않던 터에 개당 3천∼4천원 정도의 저렴한 값에 어릴 적에 봤던 캐릭터들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다. 또한 이 ‘명작극장 시리즈’는, 드라마를 지닌 모형인 ‘디오라마’에 가깝게 작품 속의 한 장면을 뽑아낸 듯한 동작과 자기인형에 채색한 듯 부드러운 색감을 내 성인들이 일반적인 장식물로 활용해도 될 만한 질을 갖춘 수작 캐릭터 상품이다. 9월16일까지 열릴 예정인 서울애니메이션센터의 ‘서울만화모형공모전’에는 70∼80년대 한국만화를 대표하는 만화캐릭터였던 ‘태권V’, ‘주먹대장’, ‘로버트 킹’의 창작모형이 전시되고 있다. 이러한 한국 캐릭터들의 상품화가 기획되어 자신이 좋아했던 한국만화, 애니메이션의 주인공 캐릭터 상품을 책상이나 방 주변에 놓아둘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캐릭터에 대한 애정을 쏟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그 캐릭터의 생명을 좀더 연장해줄 수 있는 힘이 되기 때문이다. 김세준/ 만화·애니메이션 칼럼니스트

“와, 점마들, 졸라 고생하네”

아이들이 술렁거린다. “악수도 했댄다. 쪼매만 더 보자. 야, 임은경이다, 임은경!” 스러지려는 여름의 빛이 가득한 8월28일, 부산시 사하구 감천1동 감천화력발전소 주변은 TTL 소녀를 만나려는 10대들의 그림자로 넘실거렸다. 영화촬영이라는 말에 가슴 설레는 것은 아이들만이 아니었다. 전날 화력발전소 입구에서 진행된 촬영에서 인도에 설치된 감독 모니터를 흘끗흘끗 보며, “와, 점마들, 엔쥐냈네. 졸라 고생하네”라고 쑥덕거리면서 발걸음을 머뭇거린 것은 나이 사십을 훌쩍 넘긴 아저씨들이었다. 촬영이 이뤄지고 있는 화력발전소 안쪽을 향해 연신 발돋움하는 10대들을 뒤로 하고, 촬영장으로 들어서니 발전소 건물 꼭대기에 어른거리는 검은 점들이 보였다. 촬영이 진행되는 곳은 발전소의 8층 꼭대기. 이날 촬영분은 거리에서 자신을 외면하는 사람들에게 마구잡이로 총격을 가한 성소(임은경)가 시스템의 추격을 피해 발전소 꼭대기로 올라간 뒤, 자신을 생포하려는 보위대와 대치하는 장면. 그 과정에서 성소를 짝사랑하는 오비련(정두홍)이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홀로 꼭대기로 오르지만, 시스템의 지령을 받은 헬리콥터 속의 이(김진표)에 의해 사살된다. 시간상으로 보자면, 타워에서 뛰어내린 성소를 헬기에서 내려온 이가 공중에서 구출하는 전날 촬영분의 직전 상황이다. 우선 오비련이 정수리에 총탄을 맞는 장면이 촬영됐다. 이 작품을 통해 배우로 데뷔하는 ‘무술인’ 정두홍은 다소 긴장한 듯했지만, 그보다는 촬영이 겨울에 시작된 탓에 아직까지 입고 있는 두터운 겉옷이 거추장스러운 것처럼 보였다. 이마에 설치된 특수폭약이 ‘탁’ 하는 소리를 내며 터지고, 그 자리엔 마치 총탄을 맞은 듯 붉은 자국이 생겼지만 장선우 감독은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한번 더!”를 외쳤다. 정두홍의 메이컵을 다시 하는 동안 임은경은 그새 친해진 홍콩쪽 젊은 스탭과 ‘중국어 따라 배우기’ 시간을 가졌다. 연기에 들어가면 신비롭기 그지없는 느낌을 주는 그녀지만 또래와 쉴새없이 재잘거리는 모양은 영락없는 10대 소녀였다. “어른들에게 무시당하고, 아무도 자기를 주의깊게 봐주지 않는 그런 상황에 분노해서…”라는 스스로의 성소 캐릭터 설명을 듣고 있는데, 홍콩 무술감독이 달려와 촬영이 시작된다며 재빠르게 임은경을 채간다. 곧 이날의 하이라이트인 헬리콥터신을 위해 바다 저편에서 헬기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오늘은 헬기가 떠”라고 되뇌던 장선우 감독의 인상에 긴장감이 퍼졌다. 애초 아침 일찍부터 시작될 예정이었던 헬기장면은 기체 외부 도색작업이 뒤늦게 이뤄지는 바람에 지연됐던 것. 게임기 드림캐스트의 로고를 연상케 하는 시스템의 로고가 새겨진 검정색 대형 헬기가 거대한 소음과 바람을 일으키며 촬영장으로 다가오자 배우와 스탭의 몸놀림이 더욱 바빠지기 시작했다. 임은경 뒤로 보이는 헬기의 모습, 헬기에서 사람이 내려오는 모습 등을 모두 찍기에는 반나절의 해가 너무 짧았던 탓이었다. 보통의 경찰 헬기와 달리 두개의 프로펠러가 도는 대형 헬기가 특이하다 했더니 해경에서 사용하는 러시아제 헬기란다. 일반 헬기로 바다 위를 낮게 날면 중력 때문에 바닷속으로 빨려들어간다나, 그래서 묵직해 보이는 해경 헬기가 등장한 것이라고 함께 온 부산영상위원회 관계자가 설명한다. “어차피 공짠데, 기왕이면 멋진 것으로 제공하고 싶기도 했다”는 그의 이야기처럼 이 모든 편의는 부산영상위원회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공공기관인 화력발전소 안에 100명이 넘는 스탭, 배우들과 또 100명쯤 되는 엑스트라(그들도 의경이었다)가 득시글거릴 수 있었던 것은 시의 적극적인 지원이 아니었다면 꿈도 꿀 수 없었다. 부산 서면 롯데호텔 앞 거리를 막은 거나 부산역 광장에서 촬영을 진행할 수 있었던 것도 마찬가지. 38m 높이의 화력발전소 꼭대기에서 두대의 크레인을 이용, 이로 분한 스턴트맨이 바닥으로 떨어져내리는 성소 스턴트맨을 공중에서 나꿔채는 추락 스턴트를 펼쳤던 전날에 비하면 박진감은 덜했지만, 이날의 액션연기는 규모면에서 압도적이었다. 허창경 프로듀서는 “하지만 앞으로의 일도 태산”이라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성소를 구출하겠다는 일념으로 불타는 청년 주(김현성)가 시스템을 돌파하는 장면의 세트촬영과 삼성자동차 공장 앞에서 진행되는 시스템의 외부 장면, 그리고 수중액션까지 폭탄이 터지고, 보위대원들이 파편과 함께 날아다니는 대형 액션신을 앞두고 있으며, 촬영이 끝난 뒤 편집, CG에 힘을 기울일 것을 생각하면 까마득하다는 얘기다. 특히 보위대원이 시스템의 벽을 통과해 나타난다거나 총을 맞으면 이상한 물질로 변화해 사라진다는 설정이 있기 때문에, 벌써부터 CG에 대한 걱정이 앞서는 인상이다. 낮촬영밖에 없었던 탓에 해가 질 무렵인 7시30분쯤 촬영장을 빠져나가는 장선우 감독의 표정에선 묘한 자신감이 느껴진다. ‘포르노 감독’, ‘10대를 착취했다’는 것에서 ‘영화를 돈으로 때우려 한다’는 내용으로 비난의 초점은 바뀌었지만, 그럴수록 세상과 당당하게 정면승부해왔던 그다운 여유가 엿보인다. 여유만만 걸어가던 그가 선글라스를 슥 내리며 한마디 던진다. “오늘 괜찮았어? 허허허.” 글 문석 기자 ssoony@hani.co.kr·사진 오계옥 기자 klara@hani.co.kr ▶ 출연진 100명, 스탭 100명이 협연하는 부산 촬영현장 스케치 ▶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에 관해 알고 싶은 5가지 궁금증 (1) ▶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에 관해 알고 싶은 5가지 궁금증 (2) ▶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에 대한 궁금증- 출연진과 스탭은? ▶ 장선우 감독을 만나다 (1) ▶ 정선우 감독을 만나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