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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잠자는 걸작 10편, 깨워라! [4] - 팜므파탈

<팜므파탈>(Femme Fatale) 히치콕, 누아르에 입맞추다 유럽영화에서 할리우드영화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 너의 징후를 즐기라며 핏대를 세우고 의자를 옮겨다니던 슬라보예 지젝은, 여전히 현대 영화이론을 매혹시키고 있는 두 가지 소재를 선언하며 마지막 장의 첫 문단을 시작한다. ‘히치콕의 영화와 필름누아르.’ 이 둘은 한 등에 붙어 있지만, 한 몸통으로 취급받지 않는다. 히치콕은 히치콕이며, 누아르는 누아르이다. 그러므로 세상 어느 영화이론가보다도 히치콕을 잘 알고 있는 히치콕 문하생 브라이언 드 팔마가 필름누아르에 관심을 쏟지 않는다면 ‘히치콕적 누아르’는 그 어디에서도 손쉽게 탄생할 수 없다. 이 희박한 창조적 결합의 순간만으로도 <팜므파탈>의 존재는 희귀하다. 그러므로 이 영화를 묻어둔다면 언제 다시 히치콕과 누아르의 대면을 목도하게 될지는 정말 자신할 수 없다. 아름답고 치명적인 매혹적 요부, ‘팜므파탈’. 때로는 순수함으로, 때로는 요염함으로 비정의 탐정을 파멸의 순간까지 끌고 가는 거미 여인들. 또는 필름누아르의 뻥 뚫린 이데올로기적 허점, 그러나 장르의 대중적 불로장생을 약속하는 아이콘적 여신들. 파리의 호텔 방. 바깥에는 이제 막 칸영화제의 개막식이 준비 중이다. 팔등신의 미인이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영화 속에서 여자는 남자를 향해 총을 쏜다. 빌리 와일더의 필름누아르 <이중 배상>의 클라이맥스. 텔레비전을 보던 여자는 흉내를 내기 시작한다. 이 여자가 영화의 팜므파탈? 그렇지 않다. 브라이언 드 팔마는 첫 장면의 인물을 곧잘 맥거핀으로 사용한다. 이 영화의 진정한 팜므파탈 로리에 의해 그녀는 가슴에 달린 10만달러짜리 황금 장신구와 함께 곧 죽어 사라진다. 황금을 가로챈 로리는 동료들에게 쫓기기 시작한다. 그녀를 자신의 딸 릴리로 착각한 한 노부부는 로리를 집으로 데려간다. 그녀는 욕조에 피곤한 몸을 뉘인다. 7년 뒤. 미국으로 건너간 로리는 미국 대사관의 부인으로 파리를 찾는다. 파파라치가 그녀의 행적을 따라다닌다. 동시에 옛 동료들도 황금을 되찾기 위해 로리를 뒤쫓는다. 그녀는 파파라치를 이용하기로 한다. 그렇게 팜므파탈의 본색을 드러낸다. 브라이언 드 팔마는 바로 이 팜므파탈에게 히치콕적 세례를 내린다. 팜므파탈과 히치콕적 주인공의 결합은 상상을 뛰어넘을 만큼 기발하다. 영화 속에는 1인2역의 여주인공이 등장한다. 두 여자의 이중적 정체성! 브라이언 드 팔마는 <현기증>에서 히치콕이 보여준 마들렌과 주디의 이중성을 자신의 영화 <팜므파탈>에서의 로리와 릴리의 관계로 치환해놓았다. <현기증>의 서사는 그녀 둘의 정체성 사이에서 혼란스러워 하는 스코티(제임스 스튜어트)에게 있었다. 스코티에게 마들렌과 주디는 언제나 누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운, 그래서 줄곧 의문으로만 쫓아다녀야만 하는 유령 같은 존재들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브라이언 드 팔마는 만약 마들렌과 주디의 서사를 축으로 영화를 다시 만든다면 어떻게 될까를 상상해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을 이어주는 이미지에는 데자뷔가 적당하지 않겠냐고 물어보는 중인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이야기는 느린 지각으로는 따라잡기 힘든 만큼 비약적으로 펼쳐진다. <팜므파탈>을 보는 누군가가 스토리가 단순해서 미칠 것 같다고 좀더 오래 불평하면 할수록 그가 속고 있는 시간은 그만큼 더 길어지는 것이다. 브라이언 드 팔마는 명백히 데이비드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의식하며 이 영화를 만들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시간의 뫼비우스적 구조를 공간의 모자이크와 대위적으로 관계지어놓고 있다는 사실쯤이 될 것이다. 로리를 둘러싼 시간의 데자뷔와 그녀의 동행자인 사진기자 니콜라스가 붙여나가는 파리의 공간들은 중요한 순간에 서로를 보완한다. 하지만 이미 사건은 성립되어 있다. 그리고 불가해하게 반복되는 데자뷔의 이미지들은 찾아온다. 여기에는 분명 힌트가 있다. 이상한 사물의 멈춤이 있다. 수사가 아니다. 세심하게 릴리의 주변을 따라 훑다보면 아마도 그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이 영화의 트릭이 <창 안의 여자>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한 브라이언 드 팔마의 말을 떠올리며 다시 정신을 가다듬게 될 것이다. 이미 프리츠 랑의 미국 시절 누아르 <창 안의 여자>를 본 사람들이라면 할 수 없지만, 무엇보다도 이 글의 목적이 <팜므파탈>을 보기로 굳게(!) 선약한 관객을 위한 글인 만큼 모호함의 미덕을 갖추기로 한다. 그 약속이 지켜질 수만 있다면, <팜므파탈>은 히치콕, 필름누아르, 프리츠 랑, 데이비드 린치, 그 모두를 같이 생각해볼 수 있는 사유의 장이 될 것이다.

잠자는 걸작 10편, 깨워라! [1] - 임소요

개봉촉구! <임소요>에서 <아들>까지, 반드시 ‘극장에서’ 만나고 싶은 걸작 10편 지지선언 수입은 해놓고 개봉을 못하는 영화들이 있다. 때로는 걸 만한 극장을 찾을 수 없어서, 때로는 수입사 스스로 흥행 가능성에 자신이 없어서, 때로는 심의문제가 걸려서. 영화사 창고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관객과의 만남을 기다리는 이런 영화 가운데 상당수가 외국의 각종 매체에서 그해 베스트 10에 꼽힌 작품들이다. 여러 국제영화제에서 경탄을 자아내고 열렬한 지지를 받은 영화들을 하루빨리 극장에서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씨네21>의 이번 특집은 그 방법 가운데 하나로 기획된 것이다. <임소요> <큐어> <해피니스> <팜므파탈>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 <릴리 슈슈의 모든 것> <아들> <막달렌 시스터즈> <볼링 포 콜럼바인> <노 맨스 랜드> 등 10편에 대한 추천사를 모은 이번 특집이 관객의 조바심을 재촉해 정식 개봉의 그날로 이어지길 기대해본다. <임소요> 마음을 얻고 나는 쓰네 2000년 중국. 그러니까 이제 막 21세기에 들어선 중국의 변경 도시 따퉁에는 시골집에서 가출해서 지금 막 상경한 두 소년이 있었다. 그들은 도시에 가면 금방 취직이 되고, 돈을 벌어서 금의환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처럼 모든 것이 잘되지는 않았다. 그들은 춥고 배고프게 지내야만 했다. 도시는 그들을 돌보지 않았으며, 이제 그들의 호주머니에는 남은 돈이 없었다. 두 소년은 국수를 먹으면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뉴스에서는 베이징 근처의 석가장에서 폭파사건이 일어난 것을 알려주었다. 범인인 실직한 노동자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자기 집을 폭발시켜 버린 것이다. 그때 한 소년이 다른 소년에게 말했다. 우리 폭탄을 들고 은행에 들어가서 그 은행을 털든지 아니면 폭발시켜 버리자. 그 소년들은 은행 강도가 사회주의 중국에서 사형에 처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들은 사제폭탄을 만들었다. 그리고 비장해진 두 소년은 그들이 빌려다 본 불법 복사 홍콩영화의 주인공들처럼 고향에 계신 부모에게 편지를 썼다. 그런데 한 소년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라디오에서 (대만 가수가 부른) 유행가 <임소요>(任逍遙)가 흘러나왔다. …어떤 후회나 슬픔이 와도 사랑만 있다면 상관이 없다네. 어떤 고통이나 괴로움이 있다 해도 나는 바람처럼 자유롭지. 내가 만일 영웅이라면 당신은 내 출생의 미천함을 물어보지 마시오. 높은 야망으로 내 가슴은, 자긍심으로 가득 차 있지. 그러나 사랑만은 잊을 수 없네. 평생 동안 간직했으나 이룰 수 없었지. 영웅은 초라한 태생을 두려워하지 않지. 내 마음은 야망과 자존심으로 가득 차 있네. 그러나 내가 잊지 못하는 것은 바로 사랑. 평생 동안 헛되이 간직해왔건만 사랑에 빠져 나는 눈멀었네, 애증이 가슴에 가득 하구려. 운명은 진정한 사랑을 갈라놓으니, 내 어찌 당신을 잊으리오…. 열아홉살 소년은 그 가사를 베껴 써서 그의 고향에 계신 어머니에게 보냈다. 그것이 그가 보낸 마지막 고향 편지가 되었다. 두 소년은 은행을 털러 들어갔다가 미숙하게 폭탄을 만지는 바람에 그만 폭발하였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 신문은 이 사건을 사회면의 작은 난에 실었다. 그리고 그걸 지아장커는 읽었다. 그 자신의 말에 의하면 이걸 읽으면서 망연자실한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곡을 찾아서 다시 한번 들어보았다. 그리고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따퉁을 찾아갔다. 그는 매일 출근하듯이 아침 6시에 따퉁에 도착해서 저녁 9시까지 따퉁의 여기저기를 찍었다. 거기서 두 소년과 같은 수많은 19살을 만났다. 그렇게 지아장커의 세 번째 영화 <임소요>의 시나리오는 거리에서 쓰여진 것이다. 그는 유릭와이가 촬영하는 디지털카메라의 도움으로 따퉁의 거리에서 19일 만에 촬영을 끝냈고, 편집을 비밀리에 끝냈다. 칸에서 이 영화의 공식상영은 2002년 5월23일 오후 4시에 있었다. 영화가 끝나고, 그 자리에 있던 관객은 기꺼이 기립박수를 보냈다. 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 지아장커는 그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로부터 여섯달 뒤에 나는 부산에서 물어보았다. 칸에 온 것이 그렇게 당신의 마음을 움직였습니까? 지아장커는 대답했다.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운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닙니다. 그 아이들이 버림받고, 죽어가고, 묻혀질 때, 아무도 그 아이들을 기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일깨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를 만든 것입니다. 이 영화가 지구 반대편에 와서, 그 아이들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그들로 하여금 박수를 치게 만들 때, 나는 그 아이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에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너희들은 잊혀진 것이 아니야. 너희들의 분노, 너희들의 슬픔, 너희들의 고통을 영원히 기억할 거야. 나는 그렇게 자꾸만, 자꾸만 다짐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 지아장커의 <임소요>는 마음으로 만든 영화이다. 그는 더이상 죽어서는 안 된다고 하소연하듯이 만든 것이다. 나는 그 마음이 사무친다. 나에게 영화에서 점점 더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은 진심이다. 그리고 그 마음을 안고, 절실하게, 정말 소망할 때, 그 영화는 내 마음을 움직인다. 나는 영화관에 가서 시시하게 팝콘이나 처먹고 콜라나 마시면서, 거기서 얼마 남지 않은 내 삶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지아장커의 <임소요>를 보기 위해서라면 열두 시간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지구 반대편에서라도 그 영화를 보고, 그 마음에 응원을 하고 싶다. 나는 그렇게 영화를 사랑한다. 그것이 내 방식의 사랑이다.

장준환과 <지구를 지켜라!> 탄생기 [4]

04. 당신은 외계인을 믿으십니까? 강사장/ 지구를 처음 발견한 건 칠십오 대조 선왕님이셨어 강사장/ 선왕께서는 이 아름다운 행성을 푸른 행성이라고 불렀지.당시 푸른 행성은 멍청한 파충류들이 지배하고 있었어.(중략)실험대 위에서 아기 공룡을 해부하는 외계인들. (시나리오 중) 2000년 가을, 수서 작업실 다시 찾아온 슬럼프. 시나리오의 진도도 잘 나가지도 않고 컨디션도 좋지 않은 감독은 멍하게 누워 시체놀이를 즐기고 있다. 곧이어 굼벵이놀이로 전환, 뒹굴뒹굴 몸을 굴리던 감독의 눈에 며칠 전 길거리에서 받아서 바닥에 던져놓았던 전단 하나가 눈에 띈다. ‘외계로부터의 xx… 라엘리언 어쩌고저쩌고….’‘음… 저기에 가면 뭔가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몇 시간 뒤, 종로 탑골공원 근처 전단지를 든 감독, 종로의 뒷골목을 헤매고 있다. 한참을 헤매다 허름한 콘크리트 건물 안으로 들어선다. 감독은 얼마 전 자료조사차 마네킹 공장을 방문해 눈치없이 이것저것 물어보다가 경쟁회사의 스파이로 오인받았던 기억을 떠올린다 (영화 속에서 병구는 부업으로 마네킹을 만든다).경계의 눈길을 풀지 않으면서 조심스럽게 행사장으로 들어서는 감독. 강의실 입구에 몇몇 사람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을 뿐 행사장은 썰렁하다. 감독은 입구 탁자에 놓인 1천원짜리 팸플릿과 엽서 몇장을 산다. 불순한 의도로 이곳에 온 것을 들키지 않으려는 감독의 전략이다. 엽서에는 고대 불상 벽화에 그려져 있는 비행접시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런 걸 보면 정말 외계인이 있는 것 같기도 한데….’ 외계인으로 오인된 강 사장을 감금하는 지하실, 외계인과 UFO 그림 스케치, 병구 지하실에 수집해놓은 각종 기괴한 표본들. 모든 아이디어를 꼼꼼히 스케치했다. 사실 감독은 외계인의 존재엔 별 관심이 없다.잠시 뒤 사회자가 나와서 이러저러한 인사를 하고 비디오테이프 하나를 틀어준다. 카메라에 잡힌 각종 비행접시의 사진들, 영국 밀밭에 그려진 미스터리 서클들, 로즈웰 사건에 대한 설명과 외계인 해부장면 등 외계인이 존재한다는 각종 자료들이 보여진다. ‘음… 그럴듯한걸….’ 감독은 아무래도 외계인이 정말 존재할 것 같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다음 테이프를 트는 사회자. 외계인을 만나서 영적 능력을 얻었다는 한 프랑스 남자가 소개되고 그는 아직도 외계인과 텔레파시로 교류하고 있으며 외계인들은 우리에게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잘 나가다가 저런 황당한 이야기를….’ 감독의 뺨에 흐르는 한 줄기 땀방울.다시 사회자가 나오더니 세례의식을 진행한다. 영적 능력을 가진 사회자가 물을 찍어 이마에 바르면 자신의 유전자 정보가 외계인들의 컴퓨터에 등록되고 나중에 말세가 와도 복제인간으로 다시 태어나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쭈뼛거리던 사람들 중 몇몇이 교단 위로 올라가 세례를 받는다. 이마에 물을 찍어 자신의 유전자 정보를 외계인의 컴퓨터에 등록하는 모습을 보면서 감독은 생각한다. ‘아 세상엔 병구처럼 외로운 사람들이 많구나….’ 칼바람 맞으며 열연한 신하균의 유인원 연기, 지구를 지키려는 병구와 졸지에 외계인으로 지목된 강 사장이 마지막 대결을 펼치는 연구실 장면 등 <지구를 지켜라!>는 영화 제목만큼이나 촬영현장도 기발하고 신났다. 05. 초저예산영화의 꿈, 무참히 밟히다 “강원도 태백산 위에 만든 병구네 집 세트에만 한 2억 정도요. 전체적으로 미술에 가장 많은 신경을 썼죠. 그런 디테일이 굉장히 중요하고, 감독님이 집요하게 원하시기도 하고, 장근영 미술감독도 그렇고….” (김선아 프로듀서와의 인터뷰 중) 2000년 가을, 감독의 방 시체놀이와 굼벵이놀이 속에서 데뷔작의 밑그림을 꽤 꼼꼼히 그린 감독은 이런 결론을 내린다. ‘그래 지하실 세트하고 몇몇 로케이션만 오가며 찍는 저예산영화야! 데뷔작품으로 완벽해!’바로 그 순간, 감독은 희미한 불안감을 느낀다. 어린 시절부터 취향과 감성면에서 다른 사람들과 그리 공유할 것이 없었다는 뼈아픈 과거사를 떠올린 그는 제3자의 눈을 통해 이 프로젝트를 검증하고 싶어진다. 2000년 가을 어느 카페 감독은 봉모 감독을 비롯한 몇몇의 영화아카데미 동기생 친구들에게 트리트먼트를 보여준다. 꿀꺽. 친구들이 돌려 읽는 동안, 감독은 손바닥엔 땀방울이 맺히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훌륭해!”, “엄청난걸!”, “대박이구먼!”, “그런 의미에서 한잔 사!” 등등의 찬사가 쏟아진다. 이들의 추임새를 사실로 받아들이곤, 벌어지는 코와 꼬리가 자꾸 올라가는 입을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해 애쓰는 감독. 그의 가슴이 벅차오르며, 머릿속엔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혹시 난 천재가 아닐까? 나도 내 재능이 무서워….’ 2001년의 어느 날 싸이더스 사무실 감독은 친구이자 이 프로젝트의 프로듀서를 맡기로 한 김선아씨와 마주하고 있다. 감독: 어때? (재밌고, 의미심장하고, 위대하지?)소심한 감독은 짧게 물어본다.김 PD: 음….어색한 침묵에 자신감이 떨어진 감독은 영화의 미덕을 애써 강조하려 한다.감독: 그래도 예산이 아주 적게 드니까 괜찮겠지?김 PD: 글쎄, 아무리 줄여봐도 한 30억 정도 들 것 같은데….‘헉! 사사삼십….’ 감독의 눈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하지만 태연한 척해야 한다. 감독이란 모름지기 그런 것이다.감독: 응… 그래…. 생각한 거보다 ‘좀’ 드네…. 하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첨엔 저예산영화로 생각한 거였는데….김 PD: 콘티를 봐라, 콘티를. 이렇게 특수효과가 많고, CG도 장난 아니고, 촬영도 이렇게 많은데 이 정도도 선방한 거야.감독은 방을 나가며 생각한다. ‘그래 크게 한번 놀아보는 거야. 까짓 거 30억이 별건가? 잘 만들어서 한 1천만명만 들게 만들면 되지 뭐!’ 불끈 움켜쥔 감독의 손. 몇 시간 뒤 잠잘 시간, 불 꺼진 감독의 방 말똥말똥. 감독은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음… 그래도 30억이면 좀 부담이 되기는 해…. 관객이 적어도 120만 정도는 들어야 되는 거 아닌가? 거기다 홍보비까지 포함하면…. 아~ 첨엔 이런 게 아니었는데….’ 방금 전 자신감은 어디로 갔는지, 감독은 불면의 밤 속을 헤맨다.

타잔의 목소리로 엄마 찾아 삼만리

“나쁜 애들도 다 엄마가 있는데…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돌아가신 엄마를 찾아 여행하는 ‘길손이와 감이의 로드무비’ 애니메이션, <오세암>의 주제가를 부를 맑고 우렁찬 목소리가 결정됐다. 한국 가요계의 타잔 윤도현이 애니메이션 <오세암>의 메인 주제가를 부르기로 확정된 것. 윤도현은 이미 가수로 성공하기 전부터 그들 밴드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정글스토리>로 영화와의 연을 맺었었다. 윤도현은 이 밖에도 록오페라 <개똥이>, 록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하드락 카페> 등의 주연을 맡으면서 밴드 외적인 솔로 활동으로 동분서주해왔다. 또한 여균동 감독의 영화 <맨?>의 주제가를 부르기도 했었다. 이번 작품의 메인 주제가를 부르게 된 데에는 여균동 감독의 <맨?>에서 음악감독 및 작·편곡을 맡았던 강호정씨와의 친분도 상당한 계기가 되었다. 윤도현, 한영애, 이정열 등의 프로듀싱을 해온 강호정씨는 이번 작품 <오세암>의 음악을 책임지고 있다. <오세암>에는 윤도현 외에도 <서방님>의 가수 이소은이 참여할 예정이다. 윤도현의 우렁찬 목소리와 이소은의 맑은 목소리를 함께 들을 수 있는 듀엣곡이 있다면 금상첨화!동화작가 정채봉씨의 원작을 바탕으로, 극장용 국산애니메이션의 한계를 넘어서겠다는 <오세암>은 텔레비전애니메이션 <하얀 마음 백구>의 감독 성백엽씨가 연출한다. 4월25일 개봉예정이다.

여전히 존재하는 역사의 상처,<레전드 오브 리타>

■ Story 독일이 두개의 이름으로 불리던 시절. 1970년대. 서독의 적군파(RAF), 리타와 앤디는 테러운동을 벌인다. 본의 아니게 살인이 일어나고 그들은 도망자가 된다. 리타는 동독 정부의 비밀요원 에빈의 도움으로 가명을 써가며 생활을 이어간다. 점점 더 멀어지는 리타와 앤디의 관계. 수잔나로 이름을 바꿔 공장에 취직한 리타는 타탸나와 우정을 쌓아간다. 그 즈음 국경을 넘으려다 사살된 앤디의 얘기가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온다. 리타 역시 주변 사람들에게 신분이 탄로나 다시 이름을 바꾸고 거처를 옮긴다. 캠프관리 교사 사비나로 신분을 바꾼 리타는 물리학도 요헨과 연인이 된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쫓기기 시작한다. ■ Review 그녀의 본명은 ‘리타’다. 하지만 그녀를 살아남도록 해주는 가명은 수잔나와 사비나다. 무엇이 그녀에게 숨겨야 할 이름과 숨기 위한 이름을 가져야만 하도록 만들었는가. <레전드 오브 리타>는 그 거둘 수 없는 운명에 관한 영화이다(‘레전드’는 동독의 비밀경찰들이 신분조작을 가리켜 사용했던 은어라고 한다). 서독의 남자(앤디)와 동독의 남자(요헨) 둘 모두 그녀를 버렸고, 두개의 국가 서독과 동독도 그녀를 버렸다.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그렇게 들뜬 통일의 기쁨이 서로를 얼싸안게 할 때, 정작 리타의 자리는 남겨진 그 잔해 아래 묻혀버린다. 신분조작까지도 도맡아 해주던 동독 정부가 그녀를 더이상 보호하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서독의 적군파로 활동하던 리타는 두 정부 사이의 불온했던 과거를 청산하는 폐기서류 정도가 되고 만다. 이것은 그녀의 끝을 의미한다. 이제 그 어디에도 거처를 호소할 곳이 없는 것이다. 염색공장에서 만난 친구 타탸나를 통해, 그리고 비록 떠나가버렸지만 한때 그녀에게 애정을 쏟아주었던 요헨을 통해, 리타는 이데올로기의 감옥을 벗어나 보통 사람들의 가정으로 들어서기를 희망한다. 염색공장 노동자 수잔나, 캠프교사 사비나로 살아가던 도피의 길에서 그녀의 안식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그들에게서 느끼던 사랑이었다. 그러나, 허망하면서도, 갑작스러운, 또는 되돌아갈 수도 없는 그녀의 마지막 선택. 이데올로기가 화해하고, 역사가 화합하는 순간에, 리타는 존재할 곳을 잃어버린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렇게 통일의 뒤안길에 남겨진 사람이 있음을 슬프게 기억한다. 모두가 술잔에 기쁨을 담아 마실 때, 어딘가 에는 그 역사의 상처가 뒹굴고 있을 것임을 폴커 슐뢴도르프는 주인공 리타의 삶을 통해 역설하고 있다. 실존했던 1970년대 독일의 적군파 테러리스트 잉게 비트를 모델로 한 <레전드 오브 리타>는 소재에서 슐뢴도르프의 초기작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와 비슷하다. 하지만 그 시기에 폴커 슐뢴도르프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던 <양철북>의 분위기와는 거리가 있다. 성장을 멈추기로 결심한 늙은 아이의 우스꽝스러우면서도 기괴한 역사, <양철북>으로 1979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폴커 슐뢴도르프는 새 영화 <레전드 오브 리타>를 침묵처럼 조용한 양식으로 담아냈다. 그러나 한없이 낮아진 그 양식 안에는 돌아보기 두려운 역사의 숨결이 담겨 있다. 정한석 기자 mapping@hani.co.kr

감독이 느껴지는 타이틀,<트윈 픽스 극장판>

팬들이 호감을 표시하는 영화들을 곰곰히 살펴보면, 출연배우들의 인기보다는 감독의 인지도가 그 이유인 경우가 많다. 디브이디 시장에서도 이 법칙이 똑같이 적용되어, ‘감독의 맛이 느껴지는 디브이디 타이틀’의 인기가 높은 것이 사실이다. 최근에 출시된 작품들 중에 그런 예가 많은데, <집으로…>의 스페셜 에디션이 그 대표적인 경우다. 이 타이틀은 이정향 감독 특유의 섬세하면서도 정겨운 스타일을 녹여넣기 위해, 무려 두달이나 출시 일자를 연기한 것으로 유명세를 탔다. 그런 노력의 결실로 감독의 편안한 음성 해설은 물론, 7살의 꼬마 배우와 77살의 할머니 배우가 카메라 뒤편에서는 어떠한 모습이었나를 살펴볼 수 있는 다양한 부록들까지 가득 들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 한편의 화제작은 <아메리칸 뷰티>로 완성도 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던 샘 멘디스 감독의 갱스터 무비 <로드 투 퍼디션>의 디브이디 타이틀이다. 진한 부성애와 쫓고 쫓기는 자들간의 긴장감을 잘 살려낸 화질이 디브이디 구매자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는 것. 하지만 전세계적으로 열렬한 컬트팬들을 거느리고 있는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트윈 픽스 극장판> 디브이디만큼, 감독이 디브이디 타이틀의 매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경우는 흔치 않다. 무엇보다 린치 감독에 관한 보기 힘든 다큐멘터리가 수록되어 구매욕구를 자극하고 있기 때문. 린치 감독은 원래 웬만한 언론은 물론 자신의 영화가 수록된 디브이디 타이틀에도 얼굴을 내비치기 싫어하는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런 그가 다큐멘터리를 통해 어린 시절에 어떠한 생활을 했으며, 청·장년기에는 어떤 식으로 영화작업을 진행했었고, 현재는 어떠한 협력자들과 어떤 식으로 작업을 전개해나가고 있는지에 대해 상세한 이야기를 해주는 것을 보고 있으면 팬으로서 행복할 정도다. 그러한 내용의 다큐멘터리 중간중간에 그의 초기 습작들은 물론 <이레이저 헤드>, <블루 벨벳>, <로스트 하이웨이> 등 대표작들의 영상자료가 함께 제공되고 있는 점도 이 매력적이다. 한가지 주의할 점은 이미 출시되어 있는 <트윈 픽스> 텔레비전 시리즈보다 일주일 전에 일어난 이야기를 다룬 본편 영화가 다소 난해하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시간상으로는 반대이지만, 텔레비전 시리즈의 타이틀을 먼저 보고 난 후 이 타이틀을 감상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철민/디브이디 칼럼니스트 1992년작, 감독 데이비드 린치 자막 한국어, 영어화면포맷 아나몰픽 1.85:1 오디오 돌비디지털 2.0, 5.1지역 코드 3 출시사 알토미디어 ▶▶▶ 트윈픽스 극장판 [구매하기] ▶▶▶ 트윈픽스 시즌1 [구매하기]

4월 4∼11일까지 열리는 히치콕 회고전 [2]

히치콕, 드 팔마는 그를 모방하지 않았다? 히치콕에 대한 트뤼포의 말을 조금 변형하자면,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누구의 영화를 따라하고 있는지 알 수 있게 하는 몇 안 되는 감독’이 바로 브라이언 드 팔마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는 자신을 히치콕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가 <싸이코>에 영감을 얻어 <자매들>을 만든 것이라고 말한 그 순간부터 평단은 브라이언 드 팔마를 히치콕의 인형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브라이언 드 팔마는 <강박관념>을 만든 뒤에 꼭 그런 건 아니라고 볼멘소리를 했다. 나아가 히치콕의 <현기증>과 <사이코>를 조합한 것으로 유명한 <드레스드 투 킬>을 만든 다음에는 자신의 영화가 히치콕과 다른 점이 많다며 오히려 성질을 냈다. 특이한 반응이긴 하지만, 다행스럽게 드 팔마만의 창조력은 점점 더 빛을 발한다. 하지만 <강박관념>은 <현기증>을, <드레스드 투 킬>은 <싸이코>를, <침실의 표적>은 <이창>과 <현기증>을, <칼리토>는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를 참조한다. 그러므로 브라이언 드 팔머는 일종의 히치콕적 환자이며, 히치콕적 주인공이다. 정말 자기가 히치콕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모르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드 팔마는 <팜므파탈>에 이르기까지 히치콕주의자이다. 입으로는 히치콕을 버렸지만 영화로는 버리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오히려 그 점이 점점 더 브라이언 드 팔마의 영화가 흥미있어지는 진짜 이유인지도 모른다. 영화 <필사의 추적>(Blow Out)은 드 팔마가 히치콕 영화에 얼마나 익숙한지를 보여주는 숨은 무의식(아니면 얼마나 거짓말에 능숙한지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녹음기사 잭은 자동차 사고를 목격하고, 여자를 구해낸다. 샐리는 차 안에서 죽은 정치인과 동행이었다. 죽은 정치인의 입장을 고려해 부탁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침묵을 약속한다. 그러나 우연한 기회로 다시 듣게 되는 소리. 소리가 이상하다! 타이어 펑크로 인한 사고사로 판정되었지만, 다시 듣는 녹음기에서는 총소리가 들린다. 한마디로 <필사의 추적>은 귀로 듣는 <이창>이다. <이창>의 사진기자와 <필사의 추적>의 녹음기사는 동일한 역할을 한다. <이창>의 보는 것과 <필사의 추적>의 듣는 것은 동일한 모티브이다. <이창>의 담뱃불과 <필사의 추적>의 총소리는 같은 범죄이다. 히치콕이 시선에 잡히는 오점으로 서스펜스의 효과를 창조했다면, 드 팔마는 교묘하게 청각으로 뒤바꿔 그 서스펜스를 쫓아간 것이다. 몇개의 예가 끝났다. 히치콕의 영향 아래 있는 다수의 영화들이 오히려 히치콕적인 요소들을 다치게 하는 것은 그것을 단순히 패러디의 재미로 뒤바꾸려하거나, 소재의 차원에서만 이해하거나, 외연적인 틀만을 가져올 때 생겨난다. 아마도 그 점에서 시간은 흘렀지만 여전히 히치콕 영화의 정수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은 누벨바그 세대들일지 모른다. 앙리 뵈르네유에서부터 제임스 본드류의 영화까지, 히치콕 영화에 영향을 받은 수많은 감독의 이름과 영화들을 열거하던 트뤼포는 그 안에 스스로의 이름도 주저없이 끼워넣었다. 샤브롤과 로메르는 히치콕에 관한 저서를 낼 정도였다. 그러나 누벨바그 감독들의 영화 안에서 히치콕의 인장을 낱낱의 작품에 한정해 말하는 것은 굉장히 모호하다. 그들이 히치콕의 영화를 두고 정의한 ‘죄의 전이’, ‘이중의 관계’, ‘범죄의 역전성’, ‘비극적 도덕’ 등등의 개념들이 샤브롤의 <도살자>, 트뤼포의 <이웃집 여인> 같은 영화에서 묻어나긴 하지만, 히치콕의 영화적 지침들은 그 전체를 관통하면서 조금씩 굴곡되어 있다. 그들 역시 또 다른 창조를 요하는 영화감독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히치콕주의자들의 성공이란 히치콕을 벗어나는 것이다. 히치콕의 형식을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이로 하여금 히치콕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정작 히치콕의 흔적은 찾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변형하기보다 전화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히치콕의 영향 아래에서 벗어나는 것이 그만큼 힘들다는 말의 역전이기도 하다. 그래서 히치콕은 여전히 불멸하는 것이다. 정한석 mapping@hani.co.kr 히치콕 영화의 리메이크와 속편노먼은 그뒤에 어떻게 되었냐면… 앨프리드 히치콕의 영화들은 그 대중적인 호응을 증명이라도 하듯 리메이크와 속편 제작이 줄을 이었다. 히치콕 스스로가 자신의 영화를 리메이크한 것은 1934년 영국 시절 제작한 <너무 많이 안 사나이>를 1956년 캐리 그랜트 주연으로 다시 만들었을 때다. <너무 많이 안 사나이>의 리메이크는 다시 한번 만들어보고 싶었던 히치콕의 의도에 기인한 것이었지만, 그 밖에 같은 내용, 또는 질적으로 떨어지는 영화들의 리메이크, 속편격의 영화들이 종종 다른 감독들에게서 만들어졌다. 부인의 외도에 대한 질투와 그녀의 돈 때문에 부인을 살해하기로 결심한 남자, 그리고 그 부인 사이에 벌어지는 스릴러물, <다이얼 M을 돌려라>(출연 그레이스 켈리, 1954)는 98년 <퍼펙트 머더>(감독 앤드루 데이비스, 출연 마이클 더글러스, 기네스 팰트로)라는 제목으로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되었다. 노먼 베이츠를 연기한 앤서니 퍼킨스를 일약 공포영화의 스타로 올려놓은 <싸이코>는 수많은 영화에서 욕실 살해장면이 인용되었고, 유사한 제목으로 수없이 비슷한 영화들을 양산했다. 한번도 히치콕이 만든 1편의 역량에 미친 작품들은 없었지만, 83년 <싸이코2>(리처드 프랭클린)에서 다시 한번 앤서니 퍼킨스는 노먼 베이츠로 등장하였고, 86년 <싸이코3>에서는 주연뿐 아니라 직접 감독을 맡기도 했다. <싸이코>의 시리즈화는 90년 제작된 <싸이코4>(믹 개리스)까지 속편을 낳았다. 그리고 리처드 로스테인에 의해 <베이츠 모텔>이라는 제목으로 텔레비전용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그리고 2000년에는 구스 반 산트에 의해 거의 모든 장면(심지어 숏들까지)이 고스란히 재현되어 화제를 낳기도 했다. 다프네 뒤 모리에의 원작으로, 히치콕 자신에 의해 스스로의 필모그래피 중 매우 중요한 작품으로 손꼽히는 63년 작품 <새>는, 외딴섬에서의 새들의 공격이라는 공포스런 소재가 계기가 되어 앨런 스미시와 릭 로젠탈이 1994년 <새2>라는 텔레비전 영화로 속편 제작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히치콕 영화들은 많은 감독들에 의해 수차례 속편화, 또는 리메이크되었다.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

4월 4∼11일까지 열리는 히치콕 회고전 [1]

회고전 계기로 본 히치콕 베끼기의 역사 4월4일부터 4월11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히치콕 회고전’이 열린다. 수없이 많은 숭배자들을 거느리고, 여전히 서스펜스의 아버지로 우뚝 서 있는 히치콕. 히치콕과 그를 따르는 히치콕주의자들의 관계를 따라가며 그 간격의 폭을 재본다. (서울시네마테크는 5월 중순 히치콕 회고전 2탄을 준비 중이다.) 프랑수아 트뤼포는 이렇게 썼다. “히치콕이 서스펜스만을 다루었다고 비난하는 것은 그가 가장 덜 지루한 영화감독이라고 비난하는 것과 같다.” 1925년 <쾌락의 정원>으로 데뷔하여 76년 <패밀리 플롯>을 끝으로 은퇴하기까지 총 54편의 영화를 만들면서 히치콕이 흥행에 실패한 사례는 손에 꼽힐 정도이다. 그는 언제나 대중을 사로잡는 감독이었다. 누벨바그 세대는 그런 히치콕을 전면에 세워 영화의 본질을 설파하기 시작했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누구의 작품인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몇 안 되는 감독 중 하나”라고 트뤼포는 히치콕의 독창적인 위치를 못 박았다. 트뤼포의 말은 눈먼 찬사라기보다 이를 데 없이 정확한 포착에 가깝다. 히치콕의 영화는 이미지와 사운드의 치밀한 조합만으로 어떻게 영화가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교본과도 같다. “우리가 영화에서 스토리를 전할 때, 대사는 다른 식으로는 불가능할 때에만 사용해야 합니다. 나는 항상 스토리를 먼저 영화적 방법으로, 숏과 숏의 연결을 통해 풀어가려고 노력해왔습니다”라고 히치콕은 화답한다. 히치콕, 모방불가능? 그의 영화적 독창성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용어인 서스펜스는 가장 평범한 장소에서, 가장 안이한 순간에 벌어지는 범죄에 의해 조장되었다. 그의 서스펜스는 앙리 조르주 클루조가 만들어냈던 것처럼 내러티브에 기인한 서스펜스가 아니었다. <무대공포증>의 드레스에 묻은 피, <의혹>의 전구를 넣어 발광하는 우유, <이창>의 창문 너머 보이는 붉은 담뱃불,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의 상공 위의 비행기, <마니>의 장갑에 묻은 피, <해외특파원>의 거꾸로 돌아가는 풍차, 영화 이론가 파스칼 보니체르가 ‘오점’이라고 명명하는 그것들이 평이한 상황 안에 들어와 박힐 때 그의 영화는 순식간에 ‘낯선 친숙함’의 두려움으로 돌변한다. 히치콕은 그것을 연장시킨다. 그러므로 그의 서스펜스는 내러티브의 전개와는 상관없는 곳에서 발생하는 것이었다. ‘히치콕적 서스펜스’는 그 자체로 개념이 되어갔다. 그러면서 히치콕을 숭배하는 ‘히치콕주의자’들이 생겨났다. 그는 영화역사상 어느 누구보다도 많이 인용되고, 반복되었다. 히치콕주의자들은 그의 영화를 한편씩 골라 패러디하고, 그의 영화적 소재를 본떠 다른 한편의 영화를 만들어보고, 그의 영화적 형식을 변형하여 창조를 모색하고, 그의 영화적 테마를 질적 변화시켜보려 노력했다. 여기 몇 가지의 사례가 있다. 잊을 때쯤 되면 영화 한편씩 만들어내는 감독 겸 배우 대니 드 비토는 히치콕의 <열차 속의 이방인>(Strangers on a Train)의 스토리를 가져와 <환상살인>(Throw Momma from the Train)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신경질적인 엄마(마치 <싸이코>에 등장하는 어머니를 연상시키는) 등쌀에 데이트 한번 못하고 있는, 물론 장가도 못 가고 있는 늙고 뚱뚱한 아들(대니 드 비토)은 괴롭기만 하다. 그는 시나리오 작법을 배우는 중이다. 그런데 그를 가르치는 시나리오 선생(빌리 크리스털) 역시 문제가 있다. 그의 아내는 다른 남자와 살고 있다. 텔레비전에서 히치콕의 영화 <열차 속의 이방인>을 보던 이 늙은 아들은 아내를 죽여버리고 싶다던 시나리오 선생의 말을 떠올린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본 교환살인을 시나리오 선생에게 똑같이 제안한다. 엎치락뒤치락 코미디가 벌어진다. <환상살인>은 농담 그 이상이 아니다. 하지만 앤서니 윌러의 스릴러 <무언의 목격자>가 히치콕적 서스펜스라고 불렸던 오해보다는 솔직한 편이다. 히치콕의 <현기증>을 <고소공포증>이란 제목으로 패러디한 멜 브룩스의 코미디보다는 못하지만. <커먼 웰스>의 알렉스 드 이글레시아가 <매트릭스>의 효과와 <스타워즈>의 인물에 <싸이코>의 수직과 수평의 오프닝 크레딧을 덧입히는 정도의 농담보다 훨씬 더 귀엽다. 생각해보면, <열차 속의 이방인>의 소재는 충분히 코미디화해볼 소지가 있다. 하지만 히치콕은 교환살인을 소재로 한 이 영화를 ‘죄의 전이’(<밧줄> <나는 고백한다>와 함께)에 관한 영화로 만들었다. 히치콕은 흥미를 위해 영화의 주제를 버린 적이 없다. 이게 바로 히치콕과 히치콕주의자들의 우선하는 차이점이다. “‘히치콕의 터치’는 기껏해야 패러디나 패스티시화할 수 있을 뿐이며 필연적으로 모방불가능”할 뿐이라는 파스칼 보니체르의 단정을 입증하는 수준일 뿐이다. 히치콕, 변형하는 순간 멀어진다? 로버트 저메키스는 <이창>과 <싸이코>의 내러티브를 좀더 정교하게 조합하여 <왓 라이즈 비니스>를 만들었다. 클레어는 옆집에 이사온 남자가 부인을 죽였다고 생각한다. 이웃에서의 살인 의혹. 이건 <이창>이다. 그러나 사건의 진원지는 자상하게만 보이는 미치광이 남편에게 있었다. 이건 <싸이코>다. 남편의 이름은 바로 노먼(<싸이코>의 노먼 베이츠의 이름을 딴)이다. 로버트 저메키스는 영화의 전반부를 <이창>의 구조에 기대고, 후반부를 <싸이코>의 소재로 채워넣는다. 버나드 허먼식의 음악이 울려퍼지고, 여주인공은 <싸이코>의 자넷 리와 똑같은 자세로 욕조에서 넘어진다. 마침내 물속으로 가라앉는 자동차. 히치콕적 소재에 기반하고 있음에도 히치콕의 정수는 불려나오지 않는다. <이창>과 <싸이코>에는 있지만, 여기에는 없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제약과 무지. 만약 <이창>에서 제프리가 다리를 다쳐 휠체어에 의존하는 상태가 아니었다면, 그의 한정된 시선은 쓸모없는 것이 됐을 것이고, 창문은 스크린의 역할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럼으로써 망원경으로 보는 제프리의 시선에 관음증적으로 동일화되는 관객의 시선도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그는 도망갈 처지도 아니다. <싸이코>에서 노먼이 무서운 건 그의 의식이 무의식을 누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왓 라이즈 비니스>에서 클레어의 남편은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너무나 정확히 알고 있다. 반면, 테리 길리엄의 가 한순간 전율을 일으키는 것은 히치콕의 영화를 패러디도, 모방도 하지 않은 채 단순하게 그냥 보여줬기 때문이다(구스 반 산트는 이런 태도를 확장해서 <싸이코>를 리메이크 한 것이다. 그는 몇개를 제외한 모든 숏을 똑같이 찍었다. 히치콕을 변형하는 순간 히치콕과 멀어진다는 사실을 의식했던 것이다). 짧은 순간이지만 에 나오는 <현기증>의 장면은 다른 할리우드영화들의 허름한 모방욕망과 동떨어져 히치콕의 진심을 되살린다. 에서 자꾸만 멸망한 과거로 되돌아가는 남자는 추적의 도피처로 극장에 들어간다. 거기서 <현기증>을 본다. <현기증>의 두 주인공 스코티와 마들렌(또는 쥬디)이 미국의 ‘시간’을 새겨놓은 나이테 앞에 서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 는 정지 이미지만으로 ‘과거지속’을 재현해낸 크리스 마르케의 실험적인 영화 <방파제>를 극화한 것이다. 테리 길리엄은 <현기증>이 시간에 대한 단상을 담고 있는 영화라는 점에서 로메르와 의견을 같이하는 것이다. 누구 못지않은 히치콕 숭배자 에릭 로메르는 <현기증>을 <이창> <너무 많이 안 사나이>와 삼부작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 영화가 <염소좌 아래> <나는 고백한다> <누명쓴 사나이>에서 히치콕이 주력했던 ‘비극적 도덕’이라는 주제와 갈라서는 지점이라고 말한다. 에릭 로메르는 <현기증>을 “시간 속에서의 상실의 감정을 창조”하는 영화로 보았다. <현기증>에서의 환경은 시간에 의해 구축되고, 더욱이 과거에 의해 방향지어진다고 말해주었다. 바로 ‘회상’. 그러니 가공되지 않은 <현기증>의 한 장면은 <12 몽키즈>의 전체를 압축하고도 남는다.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

제5회 서울여성영화제 가이드 [3]

<안느 트리스테>(Anne Trister) 감독 레아 풀/ 캐나다/ 1986년/ 103분/ 감독 특별전 프로그래머 추천사 _ 이미지로 말한다. 어머니와의 유대를 통한 새로운 여성의 역사 쓰기 침대에 모로 누워 훌쩍이는 여자의 등. 모래 바람이 이는 황량한 사막. 침묵하는 이 두 가지 이미지가 <안느 트리스테>를 열고 닫는다. 다시 침대에서 눈물을 삼키기까지, 다시 사막을 보기까지, 안느에겐 많은 일이 있었다. 아버지의 급작스런 죽음에 충격을 받고 스위스에서 캐나다로 떠나온 안느는 우연히 아동심리학자인 알릭스를 만나 함께 지내게 된다. 지혜롭고 여유로운 알릭스에게 의지하게 된 안느는 그녀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사랑이라고 느낀다. 알릭스는 ‘그런 식의 사랑’은 줄 수 없다면서도 안느를 변함없이 아끼고 보살핀다. 안느 또한 “날 사랑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며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 충직한 남자친구를 떠나 보내고, 알릭스의 남자친구에게 모욕을 당하고, 오래 공들인 설치미술 작품이 철거당하지만, 그렇게 많은 소중한 것들과 이별을 하지만, 안느의 곁엔 알릭스가 남았고, 안느는 비로소 홀로 서게 된다. 심리적, 물리적 망명의 길에서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중년 여인의 성장기 <안느 트리스테>는 단순히 늦깎이 레즈비언의 ‘커밍아웃’ 스토리가 아니다. 안느의 혼란과 고민 속에 성 정체성이 크게 자리잡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탐문은 ‘완료’가 아닌 ‘진행형’ 시제를 취하고 있다. 안느는 영화가 끝난 뒤에도 여전히 어딘가를 배회하며,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찾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게 한다. 알릭스에 대한 안느의 사랑도, 연인을 향한 것이라고 치부하기엔 복잡하고 심오하다. 알릭스는 안느에게도, 알릭스의 고객 사라에게도, 모성에 대한 갈망을 자극하고 또 채워준 존재다. “나는 가족이 없어요. 그래서 모든 일을 망쳐요. 내 엄마가 돼줄래요?” 사라는 이렇게 말했고, 안느는 이렇게 행동했다. 그들 모두에게 이상적인 어머니였던 알릭스가 기꺼이 꾸려간 ‘유사 가족’은, ‘여성 연대’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사디 베닝 특별전 <단조로운 삶>/ Flat is Beautiful/ 1998년/ 50분 <쥬디 이야기>/ The Judy Spots/ 1995년/ 15분 <걸 파워>/ Girlpower/ 1992년/ 15분 <소녀 마케팅>/ Aerobidide/ 1999년/ 4분 프로그래머 추천사 _ 이상한 인형의 집으로 오세요 언젠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는 “13살 시골 소녀가 영화를 만드는 날이 올 것이다”라는 말로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도래를 환영한 바 있다. 그 예언을 실현해 보이겠다는 듯 사디 베닝이 나타났다. 사디 베닝은 열다섯살에 선물받은 어린이용 홈비디오 카메라로 일기 쓰듯 자신의 삶과 생각들을 기록했다. 비디오아트계에 센세이션을 일으키리라는 야심이나 기대를 품고 시작한 일은, 물론 아니었다. 북미 인디영화계에 ‘픽셀 비전’ 붐을 일으켰던 사디 베닝의 최근작 <단조로운 삶>은 미학적 실험과 초저예산 여성주의 영화제작의 모범이 될 만한 작품. 밀워키 노동계급 가정의 소녀 타일러는 예술에 빠져 사는 아빠와 헤어져 어렵게 생계를 꾸려가는 엄마와 강퍅하게 살고 있다. 타일러는 커서 멋진 남자가 되는 게 소원인 양성 소녀로, 무료하게 텔레비젼을 보거나 게이인 위층 아저씨와 어울리는 게 낙이다. 종이에 이목구비를 쓱쓱 그려넣은 커다란 가면을 쓴 배우들은 어색하게 과장된 연기로 일관하고, 거친 화소의 흑백화면은 작은 박스처럼 포맷팅돼 답답한 느낌을 주지만, 이 형식적 실험은 영화스토리는 물론 주제와도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정상적이라는 것, 아름답다는 것에 ‘절대 기준’이 존재하는 한, 이들- 양성 소녀, 싱글 맘, 게이- 의 일상은 소외와 고독과 좌절과 밀실 공포의 ‘단조로운’ 반복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디 베닝 특별전은 이 밖에도 ‘나는 누구인가’에 관한 성찰을 글과 그림과 독백에 실어낸 단편 실험영화 <걸파워>와 5개 주제로 사회와 여성의 관계를 유머러스하게 풍자하는 단편애니메이션 <쥬디 이야기>,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홍보 전략에 대한 비판을 담은 뮤직비디오 <소녀 마케팅> 등으로 사디 베닝의 활동 궤적을 훑고 있다.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태동과 함께 카메라를 잡았던 소녀는 이제 서른살의 여인이 됐고, “하루가 다르게 업데이트되는 테크놀로지에 종속되고 싶지 않다”며 잠시 영화를 떠나 있다. 기이한 아이러니다. <분노를 터뜨려라!: 트라이브 8밴드에 관한 다큐멘터리>(Rise Above: The Tribe 8 Documentary) 감독 트레이스 플레니건/ 미국/ 2002년/ 80분/ 여성영상공동체 프로그래머 추천사 _ 여성 록가수로 살아남기 위해, 신념을 실천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여성 밴드 이야기 “무서워요. 적응이 안 되네요. 그들에게도 도덕 관념이란 게 있는지, 의문이네요.” 남자들이, 겁에 질린 얼굴로 입을 모아 말한다. 여자 관객도 크게 즐긴 기색은 아니다. “음악은 정말 형편없어요. 그런데 공연이 흥미롭긴 하네요.” 여성 동성애자들로 구성된 펑크록 밴드 ‘트라이브 8’의 공연 관람 소감이다. 이들의 공연엔 일정한 레퍼토리가 있다. 우선 멤버 대부분이 토플리스로 무대에 등장한다. 남성용 트렁크 차림의 리드 싱어는 그 속에서 거대한 인조 남성 성기를 꺼내 보인다. 그리고 스트레이트한 남성 관객을 무대로 끌어올려 머리채를 잡고 무릎을 꿇려 그 물건에 대고 오럴섹스를 하게 한다. 사도마조히즘적 성행위를 연상케하는 퍼포먼스가 줄줄이 곁들여진다. 노래 가사와 무대 매너도 이와 다르지 않아, 노골적이고 무례하며 폭력적이다. 보통 상식과 취향을 가진 이들이 불편해하고 불쾌해할 만하다. 여성운동 진영에서도 이들의 퍼포먼스에 대한 저항이 우세하다. 엄연히 “여성에 대한 폭력”이며, “과도한 성폭력의 재현”이라는 이유에서다. <분노를 터뜨려라>는 트라이브 8 밴드의 공연에 크게 ‘충격’을 받은 한 여성 영상작가가 “에스트로겐의 노예가 되길 거부한” 그들의 신념을 캐내기 위해 무려 4년 동안 카메라를 돌린 결과물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트라이브 8 밴드의 공연 실황과 이에 대한 반응들, 그리고 멤버 개개인을 따라붙은 밀착 인터뷰로 구성돼 있다. 이들의 신념이 어떤 맥락에서 싹트게 됐는지를 차분히 따져 묻는 것. 그리고 이들의 극단적인 행동들은 여성 뮤지션이 정형화된 성적 이미지로 어필해야 한다는, 그리고 활동 장르의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현실에 대한 저항이자, 단지 노동계급의 레즈비언이라는 이유로 비정하게 배척하는 세상에 대한 분노임을 역설한다. “행실이 바른 여자는 역사를 만들 수 없다”는 선언과 극단적 실천에 대한 논쟁을 부추길 만한 작품. 판단은 관객 각자의 몫이다.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