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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9404)

`시의 부적절`한, 그러나 시간을 초월한

밥 딜런의 ‘마흔 네 번째(!)’ 앨범이 나왔다. 물론 ‘번안곡’으로 유명한 정도만 아는 사람들에게 이건 별다른 뉴스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새삼스럽게 왜? <롤링 스톤>에서 이 음반에 만점을 주었기 때문에? 요즘 이 잡지가 얼굴 쭈글쭈글한 록 베테랑과 살 탱탱한 소저들에게 홀딱 빠져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여기에 동참하기는 꺼림칙하다. 지난 5월 24일 환갑을 맞이하여 딜런이 대중음악에 미친 공적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가 르네상스에 미친 것”이라는 등의 찬사가 잇다랐지만 그것도 왠지 남의 나라 이야기같다. 사심없이 음악이나 들어보자. 음악 형식으로 장르를 나누기 좋아하는 사람은 새 음반에 수록된 음악을 ‘포크’가 아니라 ‘블루스’라고 부를 것이다. 2 비트의 쿵딱거리는 리듬 위에서 주절대는 첫 트랙 , 그리고 고통스럽지만 아름다운 발라드인 두 번째 트랙 를 지나면, 로커빌리풍의 기타로 어깨를 들썩거리게 하는 부터 ‘12마디 블루스’의 향연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마치 미국 남부의 담배연기 자욱한 허름한 바에서 흥겹게 연주하다가, 공연이 끝나면 황급히 짐을 챙겨 떠나는 길거리 밴드(road band)의 음악 같다. 라운지 재즈 풍의 에서 슬슬 분위기에 젖어들고, 델타 블루스풍의 에서는 밴조 소리에 고개를 까딱거리다가 에서 슬라이드 기타에 취하게 든다. 그리고 마침내 에 이르면 세상 고통을 다 잊은 듯 발바닥을 쿵쾅거리게 된다. 흠, “나는 장광설을 떠드는 곳(highfalutin area) 이 아니라 해학을 부리는 곳(burlesque area)에 있다고 생각한다”는 말이란 이런 의미였군. 번역이 신통하지 않지만 딜런은 이 앨범에서 ‘시인’이 아니라 ‘광대’가 되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 점에서 ‘개인적이고 내향적’이었던 전작

모래의 연금술, 디지털의 황홀경 (2)

신데렐라와 바퀴벌레의 콜라주 - 이미지의 실험실 부문 NFB의 애니메이션 중에서도 독특한 기법과 실험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작품들을 모았다. <신데렐라 펭귄 이야기>는 동화 <신데렐라>를 펭귄들이 주인공인 애니메이션으로 바꾼 작품. 내용은 알려진 대로지만, 신데렐라와 요정, 왕자까지 모두 귀여운 펭귄인데다 유리 구두가 유리 물갈퀴로 바뀌는 설정 등 코믹한 각색과 다양한 카메라워크가 돋보인다. 는 커다란 ‘E’ 모양의 상을 소재로 독재와 폭력을 비꼰 우화. 독재자와 군대까지 등장해 ‘E’에 대한 의견이 다른 사람은 머리를 열어 생각을 고쳐놓고 마는 풍자가 날카롭다. <바로크 앤 롤>은 소수 민족의 이야기를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다룬 인형애니메이션. 터번을 쓰고 색다른 옷을 입었다는 이유로 따돌림받던 아이는, 얼음이 깨진 강에 빠진 아이를 구하고 친구를 얻는다. 서울에서 상영되는 작품은 이 세편. 부산에서는 모래에서 태어난 모래 인간이 생명체를 만들고, 그들과 함께 모래성을 짓다가 바람에 스러져버리는 과정을 담은 <모래성>과 바다표범 가죽으로 만들었다는 인형이 까마귀가 왜 까만가에 관한 이누크족의 전설을 들려주는 <올빼미와 갈가마귀> 등 코 회드만의 작품 2편을 포함해 7편이 추가상영된다. <모래성>과 <올빼미와 갈가마귀>는 각각 모래와 털에 둘러싸인 인형들의 움직임과 그들의 조그만 소우주를 눈여겨볼 만하다. 1905년 캐나다 최초로 사람들의 비웃음을 무릅쓰고 비행기를 연구했던 빌 깁슨의 비행의 꿈을 그린 <발고니의 비행사> 역시 오밀조밀한 인형나라가 돋보이는 작품. <주크 바>는 싸구려 레스토랑에 들어온 주크박스 안에서 파티를 벌이는 바퀴벌레들의 이야기. 펑크 스타일 등 다양한 머리 모양에 선글라스까지 끼고 실사의 무대에서 ‘주크 바’ 파티를 벌이던 바퀴벌레 인형들은 뜻밖의 파국을 맞는다. 키가 작고 못생겨서 외면당하던 남자의 머리에 잘생긴 얼굴 모양의 혹이 생겨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 <혹>은 캐리커처와 콜라주 스타일의 영상이 독특한 작품. 잘생긴 혹에 애정을 표하는 사람들과 이 때문에 진짜 자신을 숨기는 남자의 비극은 허영과 위선에 대한 냉소를 담고 있다. <발라블록>은 이질적인 차이를 용납하지 않는 인간의 폭력성을 정육면체와 구의 싸움이라는 만화적인 이미지로 풍자했으며, <허풍선이>는 용의 불꽃을 동력원으로 사용하자며 용을 공급하는 연료회사를 만든 남자의 기상천외한 모험을 보여준다. 젊다, 그래서 빛난다 - Beyond NFB 부문 NFB산이 아니라 캐나다의 젊은 독립애니메이터 및 스튜디오에서 만든 최신작 13편을 모았다. <밥 앤 마가렛 ‘사진기 소동’>은 NFB 시절의 단편 <밥의 생일>로 안시애니메이션페스티벌과 오스카 등 수많은 상을 휩쓸었던 데이비드 파인, 앨리슨 스노덴 콤비의 따끈한 신작. 널바나와 합작으로 만든 따끈한 TV용 애니메이션으로 중산층 치과의사 밥과 외과의사 마가렛 부부가 새로 산 사진기로 사진을 찍다가 벌어지는 해프닝이 웃음을 자아낸다. <빙고>는 모두들 빙고라고 부르자 그렇다고 인정해버리는 한 어릿광대의 강박을 그린 작품. 3D로 표현한 어릿광대의 얼굴 표정이나 신체의 움직임, 서커스 쇼의 무대장치에 나타나는 빛과 그림자의 효과 등은 실사처럼 정교하다. <에드라는 이름의 세 친구>는 제목 그대로 에드라는 이름을 가진 세 친구의 일상을 보여준다. 굵고 검은 테두리에 아무런 음영이 없이 색깔을 채워넣은 고전적인 그림체는 움직이는 만화책을 보는 듯하다. <롤리 폴리 올리>는 포도처럼 동그란 눈, 쿠키처럼 동그란 얼굴을 가진 꼬마 로봇 올리의 우주여행 에피소드다. <물이 오염되면 세상도 오염돼요>는 환경에 관한 경고성 애니메이션. 하수관이 토해내는 오물로 만든 타이틀부터 주제를 명확하게 드러낸다. <도대체 왜>는 <아기 돼지 삼형제> 동화로 풀어보는 ‘호기심 천국’이다. 는 수직으로 떨어지는 빗줄기, 흑백의 화면, 가로세로로 짜인 철창이 빚어내는 도심의 뒷골목을 배회하는 흑인 청년의 풍경이다. 뉴욕 뒷골목에 그려진 그래피티 같은 강렬한 화면과 힙합풍의 노래가 어우러져 음울한 한편의 뮤직비디오를 보는 듯하다. 그 밖에 애니메이션 광고와 ’96, ’98오타와 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벌 시그널 필름 등 애니메이션과 애니메이터의 세계에 대한 상상력을 펼치는 짧은 필름들이 상영된다. 실사가 애니를 만날 때 - 애니마니아 부문 실사와 애니메이션이 절묘하게 결합된 <착각은 자유>와 <화분> 등 6편이 상영된다. <착각은 자유>는 실사의 세계에 뛰어든 애니메이션 캐릭터 벅의 시끌벅적한 면접 소동. 실제 배우가 연기한 면접 담당관이 차츰 사무적인 태도를 잊고 벅의 활기찬 애니메이션에 호흡을 맞추는 과정이 <누가 로저 래빗을 모함했나?>를 연상케 한다. <화분>은 우연히 주운 화분에 애정을 쏟는 남자와 사랑받는 만큼 쑥쑥 자라는 ‘애니메이션’ 화초의 이야기. <위대한 연주>는 실사로 촬영한 오케스트라의 첼로 구멍으로 미끄러져들어간 순간, 분주히 오선지의 마디를 옮기고 낮은음자리표와 쉼표, 빠르기 표시 등을 열심히 나르며 음악을 만들어내는 음표들을 환상적인 애니메이션으로 보여준다. 톱질을 좋아하는 남편과 툭하면 눈을 빼내 흔드는 아내가 핵폭발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싸우고 화해한다는 <대폭발>, 의인화된 강아지 밥의 실업과 구직의 고달픈 체험담을 뮤지컬 스타일로 풀어낸 <직장구함>, 물에 빠진 남자를 둘러싸고 준비운동만 하는 사람, 구하려 뛰어들지만 제힘에 겨워 도망가는 사람 등 인간군상들의 반응을 코믹하게 그려낸 <카스파> 등은 애니메이션 특유의 과장과 만화적인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들이다. 이 6편 외에, 프레데릭 벡의 <나무를 심는 사람>이 부산에서만 추가로 상영될 예정. 글 위정훈 oscarl@hani.co.kr·황혜림 blauex@hani.co.kr ▶ 캐나다 애니메이션 영화제 ▶ 상영작 48편 미리보기1 ▶ 상영작 48편 미리보기2

아듀! 한국영화 100년의 벗이여 (1)

단성사 100년이 허물어진다. 자그마치 5천만명 이상이 드나들었던 놀이터가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그들의 새카만 족적만이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여흥과 위락의 장소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난 한 세기를 버텨오는 동안, 단성사 돌벽은 시대의 어둠을 피해 군중이 찾아들어간 안온한 카다콤이었고, 그들이 차곡차곡 쌓아올린 소망의 앙코르와트였다. 좁디좁은 의자에 잠시나마 등허리를 기대고 그들이 피워올린 꿈의 환영은 언제나 푸른색이었기에, 진동하는 화장실의 지린내와 도사린 구석의 퀴퀴함은 아무래도 좋았다. 이제, 단성사는 없다. 그리고 시대의 꿈은 영원히 지하에 매장된다. 꿈의 체취를 맡고자 하는 열망이 남았다면 무너지기 전, 단성사의 기억을 거슬러볼 일이다. 제1장 셋이 모여(團) 뜻을 이루다(成) 1907.5.22 이토 히로부미의 압력에 의해 박제순 내각 사퇴하고, 이완용 내각 성립, 서울 전역에 콜레라 창궐. “서울에서 사업을 하는 지명근, 박태일, 주수영 제씨가 발기하여 우리나라 연예계를 발전시킬 목적으로 관청의 승인을 받아 일대 연극장을 지금 파조교 근처에 건축중이다.” (1907년 6월7일치 <만세보>) “음탕하고 고약한 놈들, 어디 껌껌한 데서 남녀가 뒤엉킨단 말이냐” 보지 않아도 예상한 일이었다. 호기심에 극장 문턱을 넘었지만, 꼬장꼬장한 유림(儒林)들이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바로 옆에 앉은 팔뚝심 좋아 뵈는 천한 남정네들에게까지 삿대질을 하진 못했지만, 부인네들과 여학생들은 그들의 고성 탓에 매번 2층의 부인석으로 올라가야 하는 처지였다(단성사는 애초 부인석을 만들어놓긴 했으나, 임시 목조건물인 탓에 무너져서 이후 부상자가 발생하기도 한다). 성인군자의 기세가 예전 같진 않았으나 아직 도포자락 바람이 풍기를 쥐어틀던 시절의 단성사 안 풍경은 그러했다. 물론 양반네들이라고 응큼한 맘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 역시 창이나 가야금 공연이 끝나면 맘에 드는 기생의 다홍치마에 ‘가회동 아무개’라고 갈무리하는 어줍잖은 시 한수를 적고서 애틋한 로맨스를 기대하기도 했으니, ‘연예 단성사’라는 이름이 괜한 것은 아니었다. “단성사를 세움은 일반 연예인이 생활할 수 있는 일터를 제공해주기 위함이고, 그 수익금은 교육이나 자선사업에 쓰겠다”는 그럴듯한 취지를 개관 3일 전 만천하에 고했지만, 돈많은 동대문 장사치들이 직접 기생 구제에 나섰던 건, 기방 출입을 밥먹듯이 하는 자제들 때문에 그럴 바에야 차라리 싼값에 기생 구경할 수 있는 방책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는 말도 전해져올 정도니. 단성사 최초의 스타가 노기(老妓)들이었다는 사실은 당연한 것이었다. 당시 노기라고 해봤자 나이는 갓 스물을 넘긴 이들이 태반이었다. 아홉살에 기생학교에 들어가 가야금, 창, 승무, 단가 등 전공 하나씩을 갈고 닦았지만, 스물이면 막장이었던 이들은 조합까지 결성해서 신문에 공연 광고를 할 정도였다. 심지어 인기투표까지 벌어져 단성사에 출입하던 한성권번 김봉선이 1812표로 1위를 차지했다는 소식이 보도되기도 할 정도로 세간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제2장 <아리랑> 고개에 한많은 민족의 신음을 벗어두다1926.6.10 전국적인 대규모 만세시위. 7.17 일제, 조선공산당 대검거 “여하간 이 아리랑이란 영화는 과거의 조선의 영화를 모조리 불살라버리고 이 돈 없고는 살 수 없고 한숨 많은 이 땅 위에서 슬피 대공(大空)을 울리어 그 무엇을 광호(狂呼)하는 한개의 거상이다.” (승일, <별건곤> 1926년 1월호 ‘라디오, 스포츠, 키네마’ 중에서) 달리자마자 넘어졌다는 비유가 딱 맞을 정도였다. 단성사는 1년을 채 버티지 못하고 경영 악화의 길을 걸었고, 급기야 일본인 무라다의 소유로 넘어가는 꼴이 된다. 이후 10여년 동안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긴 하지만, 1915년 화재로 인해 건물 전체가 전소되는 시련도 겪는다. 그러던 단성사가 회생의 기운을 얻은 때는 1918년. 광무대의 소리꾼이자 당대의 ‘흥행사’였던 박승필이 단성사를 인수하면서부터였다. 그는 곧장 수하에 있던 이를 일본에 보내 촬영술을 배우게 하고 영사기(그 전까지는 총독부의 영사기가 유일했다)를 들여오고 신극좌의 배우 김도산과 함께 연쇄극 <의리적 구토>(1919)를 만든다. 배경화면만을 찍어 무대에 쏘는 연쇄극이었지만, 관광객(觀光客)들은 경성 시내 장면이 나오는 첫 장면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내는 등 반응은 뜨겁기 그지없었다. 평소 40전 하던 상등석의 관람료는 1원으로 올랐고, 하등석도 80전에 팔릴 정도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대박’을 맛본 박승필은 이후 단성사 내에 촬영부를 두고 <장화홍련전>(1924)을 제작한다. 단성사의 부활은 일본인 하야가와가 소유한 진고개(지금의 충무로)의 황금관(이후 국도극장)과의 보이지 않는 경쟁 심리도 작용했다. 하야가와는 미소년을 뽑아 일본에 보내 변사로 키우는 등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상황이 이러했으니, 박승필도 이러다간 종로통 전체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던 중 나운규의 등장은 단성사를 단박에 최정상으로 끌어올린다. 일본인을 상대로 하던 황금관(이후 국도극장), 대정관 등은 물론이고 조선인들이 다니던 우미관, 조선극장들과의 종로통의 관객까지 끌어모은 것이다. 1926년 10월1일, 조선총독부 청사 낙성식 예정일에 맞춰 개봉한 <아리랑>은 “눈물의 아리랑, 웃음의 아리랑, 막걸리 아리랑, 춤추며 아리랑”이라는 광고문구처럼, 종로 바닥 군중의 혼을 쏙 빼놓으며,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라는 주제가를 입에 물도록 만든다. 제3장 단성사와 함께 온 모더니즘 1930.9 서울시내 교통사고 한달 1백건 넘어. 인력거 줄고 자동차 급증 1935.10.4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 단성사 개봉 1937.7.28 중·일 전쟁 발발 “누가 이 영화를 발명하였느냐. 인간이다. 그런데 인제는 영화가 인간을 좌우하는 세상이 되었으니 맹랑하다면 맹랑한 세상이 되었다” “세익스피어를 모르고 로망 로랑을 모르는 대신에 크라클 케이블을 알고 로버트 테일러를 알면 그만이다.” (하소, <조광> 1937년 12월호) 땅거미가 종로 바닥을 거닐고, 단성사 나팔소리(일반적으로 저녁 7시에 1회 상영을 원칙으로 했는데, 1927년부터는 상영시간을 알리기 위해 궁정악사 격인 옛 협률사 악사들이 단성사 간판 뒤에서 나팔을 불었다고 한다)가 길게 목을 늘어뜨릴 무렵, 1920년대, 종로통은 나들이 채비를 마친 이들로 가득 찼다. 그네들의 시선은 빙글빙글 파슨스군(이 당시 희극배우들에게는 이러한 형용사를 붙여 선전했다. 또한 남자배우 뒤에는 씨, 군, 선생을 여자배우의 경우에는 양, 여사라는 호칭을 붙였고, 심지어 동물영화에도 명견 빠루군이라고 적었다)이나 대감독 구리후이쓰(D. W. 그리피스)씨의 작품으로 향하기도 했지만, 가끔 맥고모자를 지긋이 눌러쓰거나 실크 스타킹으로 양장을 마무리한 멋쟁이들을 보기 위함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극장 안의 불이 꺼지면 진짜 모던 보이와 걸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가 한편 끝나면, “샬리 템플의 일주일 수입이 얼마냐”는 궁금증으로 시작해서 “존 크로포드가 몇 번째 결혼을 한다더라”라는 소식을 나누고 “게리 쿠퍼의 외투가 어떻다”는 품평으로 대화가 끝이 나야 직성이 풀리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1930년대부터 단성사는 쇠락의 기운을 보인다. 발성영화가 등장하고, 이를 위한 신식 극장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32년 단성사의 지주 박승필이 사망한 것도 결정적이었다. 죽기 전까지 박승필은 <아리랑> 이후 나운규가 만든 영화에 끊임없이 투자했지만, 극장 뒤쪽에 자리를 잡고 있던 순사들의 칼질에 영화는 만신창이가 됐으니 흥행이 될 리 만무했다. 이후 극장 재건축에 들어간 2년 동안 단성사는 지방 원정공연으로 맥을 잇고, 첫 발성영화인 이명우 감독의 <춘향전>을 상영하지만, 그동안 쌓인 빚 때문에 1936년 일본인 전용극장인 요시다 흥행에 흡수되어 3년 뒤엔 대륙극장으로 개명된다. 단성사의 몰락과 함께 “아아. 그들의 운명은 어찌될 것인가. 다음 주일에 계속 보아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멘트나 주인공이 악한의 면상을 향해 주먹을 날릴 때쯤 흥분한 관객의 맥동 소리와 보조를 맞추어 “어드러둥둥” 하는 독특한 추임새로 관객을 휘어잡던 종로통의 변사들도 어둠 속에 묻히는 신세가 됐다. 결국 노년에 마약에 빠져 객사하는 등 변사들의 비참한 최후야 사실 스크린 속 살아 움직이고 말하는 환영에 관객을 뺏긴 뒤 타올랐던 질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을지 모른다. 제4장 해방, 전쟁, 그리고 부활.1950.6.25 한국전쟁 발발 1953.7.27 휴전협정 조인 1958.10.15 뇌염으로 3개월 동안 전국적으로 1500명 사망 1961.5.16 비상계엄 선포 1965.12.18 한-일 국교정상화 “수많은 영화를 볼 때마다 우리들은 생각했었다. 언젠가는 이 누추한 현실을 벗어나, 저런 아름다운 곳으로, 생활의 때가 묻지 않아 마음에 드는 곳 어디론가 멀리 가보고 싶다고.” (안정효,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중에서) 포화가 잦아들 무렵이라 해서 영사기를 돌릴 수 있는 형편은 아니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 서민들의 가슴을 달래주는 것은 만담이었고, 대부분의 극장에선 ‘뚱뚱이와 홀쭉이’ 같은 쇼가 진행됐다. 배우들 또한 무대에 올라야 했고, 서글픈 노래 한 자락을 뽑아야 했던 시절이었다. 단성사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미8군 덕(?)에 명화들을 일주일씩 걸 수 있었던 게 다행이었다. <애수> <역마차> <쿼바디스> <셴>(조지 스티븐스의 <쉐인>)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대장 부리바> <나바론> 등이 50년대 말까지 상영됐다. 이처럼 미군부대 뒷구멍으로 흘러나온 이들 영화의 프린트 한벌은 단성사 800석을 가득 메운 뒤에도 화면에 비가 주룩주룩 내릴 때까지 조선호텔 옆 경남극장 등 재개봉관과 3봉관인 용산구의 성남극장은 물론이고 지방 극장까지 돌아야 했다. 물론 한국영화 제작의 싹이 아예 잘린 것은 아니었다. 1954년 3월31일, 정부는 입장세법을 개정하여 국산영화에 대해 면세조치를 취했고, 이듬해 국도극장에서 상영된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은 10만여명에 가까운 관객을 불러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단성사는 주로 애정물을 선호했던 중앙극장과 라이벌 관계를 유지하며 서부극과 전쟁영화 등 외화를 주로 내세웠다. 이러한 경향은 60년대에도 이어졌고, 두달 만에 32만3천명을 불러들인 <역도산>(1965) 또한 외화 수급에 문제가 생겨 궁여지책으로 끼워넣은 해프닝의 결과였다. 당시 상영하기로 했던 영화의 제목이야 알 방도가 없지만, 관계자들에 따르면 간판까지 걸어놓았는데 프린트가 오지 않자 이를 대체할 영화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KBS의 한 기자가 한국의 역도산이라는 무술인과 일본 프로레슬러 사이에서 벌어진 레슬링 시합을 찍어놓았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부랴부랴 아나운서를 하나 사서 거짓말로 해설을 넣었다. 그렇게 해서 겨우 개봉을 하긴 했는데, 결과는 대만원 사례였다. 밀려든 인산인해에 종로경찰서의 기마대까지 출동해서 줄을 세울 정도였다. 그로부터 1년 뒤, 한·일 두 나라 정상 사이에 밀약이 오가자 일어난 대규모 군중 시위는 어쩌면 예견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 아듀! 한국영화 100년의 벗이여 (1) ▶ 아듀! 한국영화 100년의 벗이여 (2) ▶ 역대 단성사 주인들 ▶ 단성사 터주대감 조상림 상무 ▶ 단성사에 얽힌 나의 추억1 - 영화감독 김수용 ▶ 단성사에 얽힌 나의 추억2 - 영화감독 이장호

“바보같은 녀석들, <바보선언> 보겠다고 장사진을 친 거야”

단성사에 얽힌 내 이야기를 하기 전에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며 식민지 시절의 유명한 협객이었고 뒤에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했던 고 김두한씨의 단성사 이야기를 먼저 해야겠다. 아주 오래 전 조감독 시절, 우연한 기회에 나는 고 김두한씨의 실물을 직접 본 적이 있었다. 하필이면 내가 있던 건너편 건물의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는 그의 정면 모습이었는데 나는 그가 바로 그 유명한 김두한씨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숨을 죽이고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세심하게 관찰했다. 그렇게 소변을 끝내기까지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과연 그는 거물다운 기품을 보이고 사라졌다. 그가 국회 본회의에서 부총리였던 장기영씨에게 똥물을 퍼부은 것은 아주 유명한 사건이다. 나는 전부터 그의 전기를 영화로 만들면 좋을 것이라고 여러 사람들에게 그의 일화를 소개하곤 했는데 그중에 단성사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또 화장실과 관계가 있다. 그는 소년 시절, 단성사 옆 설렁탕 집에서 키워졌는데 당연히 단성사 출입이 잦았다. 물론 동네 꼬마들을 이끌고 비밀 출입구를 통해 몰래 들어가곤 했는데 그 비밀 출입구라는 게 바로 재래식 화장실 외부에 뚫려 있는 청소용 구멍이어서 그 냄새 나는 뚜껑을 열고 변소 바닥으로 내려가 다시 한 사람씩 화장실 내부의 변기를 타고 올라가면 되었다. 공교롭게도 그것은 여자 화장실이었고 그중 한칸이 당시 최고의 인기 변사에게 실연을 당한 어느 기생이 그곳에서 자살을 한 연유로 문에 못을 박아 폐쇄시켰던 것인데 꼬마들이 몰래 이 칸을 전용출입구로 사용했던 것이다. 화장실 밑바닥은 꼬마들의 몸무게를 지탱해줄 만큼 적당히 굳어 있었다. 하루는 이렇게 화장실 바닥에 들어온 소년 김두한을 비롯한 꼬마들이 바닥에 모여 이제 막 변기를 타고 올라서려는데 마침 영화가 끝났던 모양이다. 소변이 급했던 여자들이 화장실로 몰려들고 누군가가 급한 나머지 문제의 폐쇄된 그 문을 열고 이크! 볼일을 시작했던 모양이다. 밑에서 대기중인 꼬마들은 고스란히 뜨거운 오줌을 그대로 뒤집어써야만 했고 한번 길이 트인 문은 다음 사람, 다음 사람, 계속해서 출입이 이어졌다. 그때를 회고하면서 고 김두한씨는 이렇게 말했다. “허허허! 여자들이 참았던 오줌이라 또 양은 얼마나 많은지 뒤집어쓰다 못해 약이 올라 그만 두눈을 부릅뜨고 올려다보질 않았겠소. 아!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여자에겐 소변 나오는 곳말고도 또 하나의 문이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소.”나는 이렇게 김두한 선생을 통해 단성사를 인상깊게 알게 되었다. 내 영화가 처음 단성사에서 개봉한 것은 <바보선언>이었다. 처음 <바보선언>은 흥행사들이 외면하는 바람에 제작사 창고에서 1년 동안이나 썩고 있었다. <바람불어 좋은날> <어둠의 자식들>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 <낮은데로 임하소서> <바보선언> <과부춤> 등 계속해서 빈곤한 소외층의 어두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었더니 안기부 영화담당의 입김이 작용해 어느새 제작자들이 나를 왕따로 돌리기 시작했던 모양이다. 줄줄이 이어졌던 연출 의뢰가 뚝 끊어졌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별 수 없이 16mm 새마을 문화영화를 촬영하고 있는데 강원도 평창으로 연락이 왔다. <바보선언>이 단성사에서 개봉한다는 소식이었다. 펑크프로로 일주일간 시한부 개봉이라는 것이었다. 어느 미국영화인가 뜻밖으로 인기가 없어 계약한 날짜도 메우지 못하고 간판을 내렸다고 한다. 그래서 그 남은 일자를 대신 메우기 위해 시한부로 개봉하는 속칭 펑크프로였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바보선언>이 개봉하는 첫날 아침이었는데 다시 강원도 평창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단성사 펑크프로 <바보선언> 간판 아래 대학생들로 보이는 바보 같은 젊은이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표를 사기 위한 줄이었다. 나는 어리둥절한 채 사실을 확인하려고 문화영화 촬영을 잠시 접어두고 부지런히 서울로 올라왔다. 그런데 정말 이게 웬일인가. 내가 도착했더니 이미 개봉 첫날 표는 매진이 되어 창구를 닫아놓고 있었다. 눈물이 핑 도는 순간이었다. 설움이 컸던 작품인 만큼 감회도 극적이었다. 그렇게 첫 인상이 좋아서였는지 단성사에서는 그 다음에 만든 내 영화를 두말없이 부쳐주었다. 물론 제목부터 아주 선정적인 <무릎과 무릎사이>였다. 그것도 빅 히트를 했다. 다시 <어우동>도 부쳤고 이번엔 더 큰 홈런을 쳤다. 단성사와 나는 이렇게 좋은 인연을 맺었다. 당시 나이 지긋하셨던 단성사 이 사장님은 극장 뒤에 있는 작은 횟집에서 꼭 캔맥주를 혼자 즐기셨는데 나를 만나면 아주 반갑게 맥주를 사주시곤 했다. 아! 그 단성사가 이젠 가면 언제 오나. 죽은 친구처럼 다시는 못 보는 건가. ▶ 아듀! 한국영화 100년의 벗이여 (1) ▶ 아듀! 한국영화 100년의 벗이여 (2) ▶ 역대 단성사 주인들 ▶ 단성사 터주대감 조상림 상무 ▶ 단성사에 얽힌 나의 추억1 - 영화감독 김수용 ▶ 단성사에 얽힌 나의 추억2 - 영화감독 이장호

다양했다, 그러나 `발견`은 미미했다

영화제가 열린 열흘 남짓한 기간 동안 베니스에는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쨍하게 눈부신 햇살과 끈적거리는 바람에 웬만큼 저항력이 생겼다 싶을 때, 예고도 없이 시린 바람이 불어닥쳤고 가끔은 천둥번개를 동반한 소낙비도 내렸다. 차라리 그런 ‘반전’이라도 있기를 바랐다. 이렇다 할 화제작도 없고 이슈도 없이 지루하고 나른하게 이어지던 영화제는 결국 한순간의 흥분과 긴장도 제공하지 못한 채 막을 내렸다. 혹시 베니스영화제는 막판 ‘깜짝쇼’라도 보여줄 요량으로 <몬순 웨딩>에 황금사자상을 안긴 건 아닐까. 황금사자상부터 남녀주연상까지, 이견분분 9월8일 저녁, 영화제 폐막식이 열린 살라 그란데에서는 환호와 침묵과 야유가 엇갈렸다. <몬순 웨딩>은 여러 버전으로 나돌던 ‘수상 유력작’ 리스트에 단 한번도 오르지 않았던 작품. 기자단은 다소 어리둥절했지만, 전통과 축제에 관한 관능적이고 이국적인 코미디를 지지하던 베니스 현지 관객 사이에선 환호가 터져나왔다. 미라 네어 역시 아무 기대가 없었던 듯, 연단에 올라서도 놀라움과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 상은 나의 사랑이자 뮤즈인 조국 인도의 것이다.”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최초의 여성감독이 된 미라 네어는 상기된 얼굴로 “<몬순 웨딩> 제작진의 90%가 여성이었다는 건 우연일지 모르지만, 이 상의 절반은 세상 절반인 여성에게서 나온 것임을 밝혀두고 싶고, 앞으로 카메라를 들 소녀들에게 신호탄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여름 더위에 인간의 잔인한 본성을 빗댄 오스트리아영화 <한여름>의 울리히 자이들 감독은 심사위원 대상 수상자로 호명됐는데, 황금사자상에 못지않은 환호와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는 수상 소감을 밝히는 자리에서, 이 영화에 투자한 지난 5년의 세월을 돌아보며 감회에 젖었고, “오스트리아영화계를 환기시키는 하나의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황금사자상 수상이 유력하다는 소문이 무성했고, 폐막식 전에 넷팩상을 받기도 해 나름대로 기대에 들떴을 <비밀투표>의 바바크 파야미는 감독상을 수상하는 데 그쳐 표정관리를 애쓰는 눈치였다. 야유가 터진 대목은 바로 남녀주연상을 발표하던 순간. 이탈리아감독 주세페 피초니가 감독한 <내 눈 속의 빛>의 남녀 주연이 나란히 수상자로 발표된 것이다. 중년 남녀의 애틋한 사랑을 그린 이 영화는 멜로드라마로서의 미덕도 있고 주연배우들의 연기도 탁월했지만, 이탈리아 평단에서마저 ‘실망’스럽다거나 ‘최악’이라는 혹평이 나돌았다. 석연찮은 눈길과 냉랭한 공기를 의식한 남우주연상 수상자 루이지 로 카스치오는 “언론의 혹평은 조급함에서 나온 것”이라고 일갈했고, 여우주연상 수상자 산드라 세차렐리는 “이 상은 내 생각이 맞았다는 것, 그리고 관객도 지지를 보낼 것이라는 확신을 준다”고 덧붙였다. <몬순 웨딩>에 황금사자상을 안겨준 데 대한 분석은 분분하다. <일 가제티노>는 “관객과 언론 모두를 만족시키기에 무리가 없기 때문에” <몬순 웨딩>이 낙점받은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현재의 영화’부문 심사위원들은 로랑 캉테의 <시간의 고용자들>이 단연 뛰어났기 때문에 논쟁을 벌일 필요가 없었지만, ‘베네치아 58’부문에서는 개인적 취향이 아니라 영화적 완성도 등의 객관적 잣대로는 한편의 손을 들어주기가 어려워, 길고 뜨거운 토론이 있었다는 후문이다. 끝까지 이들을 고심하게 만든 영화들은 울리히 자이들의 <한여름>과 주세페 피초니의 <내 눈 속의 빛>, 호안 보텔로의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전해진다. 하지만 폐막 전날까지 떠돌던 소문으로는, 바바크 파야미의 <비밀투표>와 주세페 피초니의 <내 눈 속의 빛>, 그리고 월터 살레스의 <태양의 저편>이 각축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소문과 달리 월터 살레스는 수상은커녕 호평 하나 건지지 못하고 돌아갔다. 반면, <내 눈 속의 빛>은 심사위원들의 막판 저울질을 당한 영화임에 틀림없는데, 심사과정에 주최국인 이탈리아영화에 뭔가 상을 안겨야 한다는 강박이 작용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고 있다. 폐막식의 분위기로 알 수 있었지만, 남녀주연상 수상결과에 가장 반발이 심했다. 언론과 관객의 반응을 종합해봤을 때, 여우주연상으로는 <타인들>의 니콜 키드먼이, 남우주연상으로는 <해리는 어떻게 나무가 됐나>의 콤 미니가 유력했기 때문이다. 수상결과에 대해 이렇듯 말이 많으리라는 걸 미리 짐작한 것일까. <일 가제티노>는 심사위원장인 난니 모레티가 폐막파티에도 참석하지 않고 폐막식이 끝나자마자 “도망자처럼 리도를 빠져나갔다”고 보도했다. 그 와중에도 그는 동료 심사위원들에게 ‘입단속’시키는 것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어제’에 초점을 맞춘 거장들, 관객 실망시켜 알베르토 바르베라 집행위원장이 올해 행사를 기획하면서 품은 야심은 “좀더 많은 나라에서 영화들을 불러모은다”는 것이었다. 20편의 영화가 각축을 겨룬 ‘베네치아 58’부문에는 오스트리아, 멕시코, 루마니아, 이스라엘, 세르비아 등을 포함해 모두 15개 국적의 영화가 선보였고, 다양한 문화를 엿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무슨 우연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들 작품 중 상당수가 ‘오늘’보다는 ‘어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민족과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는, 다소 ‘시대착오적’인 테마를 취하고 있다는 것도 특징적이었다. 연극의 형식을 빌리거나 연극을 섞은 작품이 많았다는 것도, 영화의 화법이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가 됐다. 내용적으로는 <태양의 저편> <해리는 어떻게 나무가 됐나> <루나 로사> 등이 일제히 대물림된 원한과 복수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채를 띠었다. 안타까운 사실은 영화의 ‘다양성’에 힘을 쏟다보니, ‘함량’이 달리는 작품들도 눈에 띄었다는 것. 특히 거장의 부진은 올 영화제에서 가장 실망스러운 대목이다. 아모스 기타이의 <에덴>, 베르너 헤어초크의 <인빈서블>, 앙드레 테시네의 <멀리>는 감독의 이름 하나 보고 몰려든 관객을 실망시켰다. 영화제가 아무리 ‘작가주의’와 ‘제3세계’를 지향한다고 해도, 관객이 좋아하는 건 역시 할리우드영화다. 경쟁 또는 비경쟁에 오른 할리우드영화의 스타들이 행사기간 베니스를 찾아오기 때문에 더욱 화제가 되는 것이다. 실제로 니콜 키드먼의 <타인들>, 헬렌 헌트와 샤를리즈 테론의 <옥전갈의 저주>, 덴젤 워싱턴과 에단 호크의 <트레이닝 데이>, 조니 뎁과 헤더 그레이엄의 <프롬 헬>, 할리 조엘 오스먼트의 는 예외없이 매진사례를 빚었다. 인디영화의 경우도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테이프>나 스파이크 리의 <휴이 P. 뉴톤 스토리>는 감독의 지명도 때문에 눈길을 끈 작품들. 이 밖에 이탈리아 현지 관객은 자국영화와 감독들에게도 많은 관심을 보여, 비토리오 데 시카와 프랑코 베르니니의 작품들, 그리고 안토니오니와 파졸리니에 관한 다큐멘터리에 열광적으로 환호하기도 했다. 영화제 행사장 중 하나인 카지노 건물에 있는 낙서판에 관객이 감상평을 남기기도 했는데, 대개는 혹평이나 ‘옥에 티’를 지적하는 글이었다. <더스트>와 <내 눈 속의 빛>에 대한 혹평이 많았는데, <더스트>에 대한 분노 섞인 감상평이 특히 눈길을 끌었다. “황금사자상 개수도 늘었는데, 밀코 만체프스키(<더스트>의 감독)에게도 하나 줘야 한다. 가능하면 살아 있는 사자로.” 지난 3년 동안 베니스 본선에 진출한 세편의 한국영화, <거짓말> <섬> <수취인불명>을 모두 본 듯한 누군가는 “한국사람들은 정상적인 성생활을 하지 않는 모양이다”라는 낙서를 남겼다. ‘아시아 3연패’, 한국영화들도 좋은 평 얻어 미라 네어가 황금사자상을 수상함으로써, 장이모의 <책상서랍 속의 동화>, 자파르 파나히의 <순환>에 이어 ‘아시아 3연패’ 기록을 세웠다. 아시아 신드롬에 한국영화가 한몫했다는 것도 반가운 일이다. 일본영화와 중국영화가 부진했던 가운데, 한국은 ‘베네치아 58’부문에 김기덕 감독의 <수취인불명>, ‘새로운 영화’부문에 송일곤 감독, 그리고 단편부문에 <숨바꼭질>의 권일순 감독, <노을소리>의 홍두현 감독, 의 장뤼 감독이 리도행 초청장을 받았고 좋은 반응을 얻었다. <수취인불명>은 경쟁작 20편 중에서 중상 이상의 평가를 얻어냈다. 김기덕 감독은 약 30개 매체와 인터뷰를 했는데, 이중 이탈리아의 기자 겸 평론가인 마시모 카우소는 “개인적으로 황금사자상감이라고 생각하는 작품”이라고 칭찬하기도 했다. 송일곤 감독의 <꽃섬>은 비록 비공식적인 상이긴 하지만, 젊은 관객이 뽑은 작품상을 받는 등 현지 관객과의 소통에 성공했고, 그로써 만족스런 신고식을 치렀다. 베니스영화제 관계자들은 올해 대내적으로 많은 애를 먹은 듯했다. 어떤 이유인지, 개막식 때 자리를 텅 비웠던 정치가들이 폐막식에는 대거 참석했다. 공식 의장대의 호위를 받으며 행사장에 나타난 카를로 아젤로 참피 대통령은 여우주연상 시상자로 잔 모로가 나오자 가장 먼저 일어나 기립박수를 이끌기도 했다. 더 재미난 사건은, 개막 전후에 “비엔날레가 죽어가고 있다”며 알베르토 바르베라 집행위원장을 집중공격한 바 있는 문화평론가이자 문화관리국 부국장 비토리오 지가르비가 대통령을 따라 폐막식장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영화제에 대한 그의 악담을 기억하는 관중은 ‘분위기 망친다’는 뜻에선지, 그를 향해 일제히 야유를 보냈다. 이는 이탈리아 정계와 베니스영화제의, 언제 깨어질지 모를 위태로운 관계를 드러낸 작은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몇달 전 베를르수코니의 보수파연합이 의회를 장악한 뒤로, 골수좌파인 알베르토 바르베라 집행위원장이 이끄는 베니스영화제를 바라보는 정계의 눈이 곱지 않다는 것이다. 바르베라의 임기가 만료되는 내년, 베니스영화제는 새로운 선장을 맞아, 다시 어떤 길을 가야 할지 고심해야 할 것이다. 베니스영화제가 막을 내렸고 수상자에게는 트로피가 남았다. 관객에게는 영화가 남는 법이지만, 오래 부여잡고픈 영화의 추억이 없다는 게 아쉽다. 베니스에서 서울로 날아온 바로 그 다음날, 세계무역센터와 펜타곤이 무너졌다. 올해는 그 어느 때보다도 베니스영화제가 빨리 잊혀질 것 같다.박은영 cinepark@hani.co.kr 수상결과 황금사자상: <몬순 웨딩> 미라 네어 심사위원 대상: <한여름> 울리히 자이들 감독상: 바바크 파야미 <비밀투표> 각본상: 알폰소 쿠아론, 카를로스 쿠아론 <너의 엄마도 역시> 남우주연상: 루이지 로 카스치오 <내 눈 속의 빛> 여우주연상: 산드라 세차렐리 <내 눈 속의 빛> 신인배우상: 가엘 가르시아, 디에고 루나 <너의 엄마도 역시> 올해의 사자상: <시간의 고용자들> 로랑 캉테 심사위원 특별상(현재의 영화): <해물> 주원 미래의 사자상: <빵과 우유> 얀 츠비츠코비츠 은사자상(단편영화): <천재소년> 얀 크루거 평생공로 황금사자상: 에릭 로메르 ▶ 수상작은 예상 밖, 거장은 부진한 나른한 축제 ▶ 평생공로상 수상한 에릭 로메르 인터뷰 ▶ 베니스의 선택 - 미라 네어의 <몬순 웨딩>과 울리히 자이들의 <한여름> ▶ <몬순 웨딩> 감독 미라 네어 인터뷰 ▶ <한여름> 감독 울리히 자이들 인터뷰 ▶ 아시아의 신예들 - <비밀투표>의 바바크 파야미와 <해물>의 주원 ▶ <비밀투표> 감독 바바크 파야미 인터뷰 ▶ 유럽 사회파의 오늘 <네비게이터>의 켄 로치와 <시간의 고용자들>의 로랑 캉테 ▶ <시간의 고용자들> 감독 로랑 캉테 인터뷰 ▶ <네비게이터> 감독 켄 로치 인터뷰 ▶ 남미의 정체성 월터 살레스의 <태양 저편에>와 알폰소 쿠아론의 <너의 엄마도 마찬가지> ▶ <태양 저편에> 감독 월터 살레스 인터뷰 ▶ <너의 엄마도 마찬가지> 감독 알폰소 쿠아론 인터뷰

독립장편영화 화제작 9편 특별상영전

한국독립영화협회는 10월 5일부터 3일간 서울 종로구 소격동 아트선재센터 아트홀에서 `발견, 독립장편영화'란 이름으로 특별상영전을 마련한다. `제29회 독립영화, 관객을 만나다' 행사의 일환으로 펼쳐지는 이번 상영전에는 헌법재판소의 등급보류 위헌결정을 이끌어낸 이지상 감독의 「둘 하나 섹스」를 비롯해 9편의 화제작이 선보인다. 97년 「내 안에 우는 바람」으로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진출했던전수일 감독의 99년작 「새는 폐곡선을 그린다」, 연극배우 겸 감독 추상록씨가 아버지 추송웅씨를 추모해 만든 다큐멘터리 「빨간 피터의 고백」, 인디 록밴드 크라잉넛이 주연으로 등장한 「이소룡을 찾아랏!」(감독 강론),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뉴커런츠 부문 초청작 「범일동 블루스」(감독 김희진), 황철민 감독의 「그녀의 핸드폰」과 원신연 감독의 「적」 등도 초청작 목록에 올랐다. 영상물등급위로부터 삭제 권고를 받아 15분이나 잘려나간 채 비디오점으로 직행해야 했던 「씨어터」(감독 박재범)의 `디렉터스 컷'과 조우성 감독의 「데쓰 오브데자뷰-씨어터2」도 관객과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다. 매일 오후 3시ㆍ5시 30분ㆍ8시에 1편씩 상영되며 감독과의 대화 순서도 마련된다. 입장료는 4천원. ☎(02)334-3166 (서울/연합뉴스)

봄날은 간다

■ Story 소리 전문가인 상우(유지태)와 프로듀서 겸 아나운서인 은수(이영애)는 자연의 소리를 들려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함께 만든다. 소리를 찾아다니며 녹음하고 방송하는 동안 신비로운 사랑이 싹트고 두 사람은 빠르게 가까워진다. 결혼을 위해 마음의 준비를 하는 상우와 달리, 이혼한 경력이 있는 연상의 은수는 결혼을 피해 조금씩 상우로부터 멀어진다. 다른 남자에게로 가버린 은수를 보며 아직 식지 않은 사랑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상우에게는 치매를 앓는 할머니의 손길과 아버지가 건네는 소주병이 조용한 위로가 된다 ■ Review 대숲 바람소리, 산사의 풍경소리, 정선의 아우라지 물소리, 바닷가 파돗소리, 정선 아라리, 보리밭 찰랑대는 소리, 그리고 그녀의 나지막한 콧노랫소리. 오늘 우리의 것이 아닌 듯한, 사라졌거나 숨죽이고 있을 법한 이 모든 작은 소리들이 한 젊은 사랑의 시작과 끝을 동행한다. 거기에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로 시작되는 옛 노래는 상우 가족의 정서를 대변할 뿐만 아니라, 영화 제목으로 사용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영화 전체의 정서를 끌어가는 한축을 담당한다. 공간 또한 강원도 산간마을과 숲, 절, 그도 아니면 오래된 주택이나 적당히 작고 허름한 아파트 등 이런 소리들이 존재하고 어울릴 법한 곳이다. 색조는 또 어떤가. 낮고 어두운 편이지만, 우울하지 않고 따뜻한 범위 안에서 조화를 이루도록 미묘하게 통제되어 있다. 데뷔작 가 고 유영길 촬영감독과 함께한 작품인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봄날은 간다>가 보여주는 여일한 스타일을 두고 감독으로서의 허진호에 대해 안도했을 것이다. 또한 영화를 보고 나면 인간 허진호의 심상이 그려지는 듯하다. 모르긴 해도 평소의 그는 시선을 아래로 향한 채 있는 듯 없는 듯 옆에 조용히 앉아서 인간의 표면과 그 너머를 동시에 읽어내는 종류의 사람이 아닐까 싶다. <봄날은 간다>의 정서는 극중 인물의 독특한 가족 구성에도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상우의 가족은 와 마찬가지로 어머니 없이 아버지와 아들만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들 부자는 서로 말수가 적어서 무뚝뚝해 보이지만 어머니의 빈자리를 어느 만큼은 대신할 정도로 속 깊게 일상을 공유해온 사람들이다. 이번에는 할머니와 고모로 이루어진 여자 쌍이 첨가되었지만 이들 역시 아버지가 없다. 그 결핍은 두 여성에게 미묘한 친밀감을 더해주는 요인이기도 하다. 주인공은 죽음에 지배받거나 죽음을 관찰하는 위치에 놓이며,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때문에 남자 주인공은 소멸해가는 것들에 대해 애틋한 집착과 함께 두려움을 갖는다. 전편에서는 두려움의 대상이 자신의 죽음이었다면, 이번에는 멀어지는 사랑이다. 그는 늘 힘겹게 두려움을 이겨낸다. <봄날은 간다>가 주는 감동의 원천은 이처럼 조용하고 다감하며 예민한 관찰력을 가진 남성 캐릭터에서 온다. 사실 우리 영화 가운데 20대 후반의 남자가 사랑을 시작하고 열병에 시달리고 질투하고 분노하고 사랑을 식히고, 거기에 더하여 마지막 남은 미련으로 망설이는 미미한 신호를 보여준 적이 었었던가? 배우 유지태는 이런 연기에 적역으로 꼽힐 만한데, 다소 체중을 늘임으로써 실제보다 약간 나이가 많은 극중 캐릭터에 무난하게 맞추었을 것으로 보인다. 배우 자신에게나 감독들이 보기에 중요한 필모그래피를 첨가하기는 이영애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는 감독의 스타일을 일관되게 유지하면서도 대중적인 친화력이 강하다. 현실을 거칠게 공격하거나 싸늘하게 냉소하지 않고, 소멸해가는 것에 대해 집착하면서도 애틋함을 잃지 않는 정서는 한국 관객의 호감을 살 만한 요소다. 이런 측면이 서구의 이른바 작가주의 예술영화의 기준으로 볼 때는 다소 감상적이고 약간의 멜로적 과잉을 내포하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주류 영화를 관람하는 일반 대중의 감성과 괴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한국 상업영화계가 배출할 수 있는 가장 균형 잡힌 작가주의 영화가 아닐까 생각된다. 일본의 쇼치쿠, 홍콩의 어플로스 픽처스와 함께 한국의 싸이더스가 합작투자 형식으로 제작했으며 3개국에서 공동 배급하기로 사전 협의된 작품이다. 김소희/ 영화평론가 cwgod@hanmail.net ▶ 촬영감독 김형구 인터뷰

우리가 정말, 사랑이란 걸 했을까, <봄날은 간다> 유지태, 이영애

“나 보고 싶었어?” 이별을 선언하고 떠나버린 여자가 어느날 불쑥 찾아와 어제 본 것처럼 태연히 남자에게 묻는다. 자존심을 세워 도리질을 칠 수도 있었으련만, 남자는 복받친 울음을 떠트리듯 고개를 끄덕인다. 몇번이고 끄덕인다. 너무 아픈 이별 뒤 다시 만난 연인이 이럴까? 정선으로 묵호로 강릉으로 태백으로 이어지는 6개월의 여정을 함께한 사람들이, 그것도 사랑한 연인을 연기했다는 게 믿기지 않게, 5분 간격으로 도착한 이영애와 유지태는 그저 서먹하게 눈인사만 건네고 있었다. ‘보고 싶었냐?’는 흔한 물음도 ‘보고 싶었다’는 흔한 대답도 오가지 않았다. 살가운 악수도 가벼운 포옹도 없었다. 스튜디오가 보리밭이라면, 눈오는 산사라면, 바람부는 소리, 풍경소리 하나까지도 크게들릴 조용한 분위기속에서 두사람은 순서대로 사진을 찍고, 인터뷰를 해나갔다. 갑자기 <봄날은 간다>의 촬영현장에 다녀온 한 기자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한 컷 찍고나면 NG인지 OK인지 싸인도 없어, 그냥 배우 둘하고 감독하고 모이거든. 그리고 오랫동안 이야기만 하더라고, 목소리가 작아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을 수도 없어.” 이미 그들 사이엔 말하지 않아도 아는 무언의 ‘봄날메신저’라도 띄워져있는 걸까? 하긴, 대나무 숲속에서 은수와 상우가 처음 사랑을 느낄 때, 무슨말이 오고가기나 했던가.

`이동 포장마차`에 꿈을 싣고

더 고생한 다른 스탭들도 많은데 어쩌다 자신이 나오게 됐는지 모르겠다며, 신우성씨는 못내 쑥스러운 눈치였다. 행여 다른 스탭들의 공을 가리진 않을까 염려가 됐던 모양이다. “무거운 짐 좀 나르고, 운전한 정도”라며 멋쩍게 웃는 그는, <베사메무쵸>의 현장과 스탭들의 뒷바라지라는 소임을 아직 잊지 않은 듯했다. 새벽 6시에 모일 제작진의 아침거리를 위해 3∼4시에 장을 보고, 남들보다 1시간 이상 먼저 현장에 나가 스탭들이 춥거나 배고프지 않도록 미리 배려하는 제작부 맏형 역할 말이다. 지난 2월 중순, 영희가 오페라를 보러 가는 인천 첫 촬영으로 문을 연 <베사메무쵸>는 그의 “첫 작품”. 이전에도 다른 영화에 잠깐씩 참여하긴 했지만,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겨울에서 여름까지 5개월 남짓 동안, 그는 제작진이 먹을 것과 잘 곳을 챙기기 위해 부지런히 뛰어다녔다. “시키기 전에 미리 요구를 읽을 수 있어야 된다”는 그가 끌고 다닌 이스타나는 추위엔 뜨거운 커피를, 더위엔 빙과류를 상비한 ‘이동 포장마차’로 인기를 끌었고, 가족적인 현장 분위기를 만드는 데 한몫했다. 현장 살림을 꾸려가는 것 외에 주된 일은 촬영장소 섭외. 50여회에 이르는 촬영의 상당분이 세트 촬영이라 큰 어려움은 없었지만 철수를 유혹하는 상류층 부부의 저택을 구하는 게 난제였다. 겨우 감독이 원하는 고급 저택을 찾았는가 하면, 주인이 촬영을 허락지 않아 다른 곳을 물색하다가 그 집이 다른 이에게 팔려 철거 직전이란 소식을 듣고 달려가 촬영 허가를 받아내기까지 1달이 걸렸으니까. 저택장면에 쓰인 고가의 소품을 지키기 위해 촬영 뒤 홀로 텅 빈 집에서 밤을 새우는 것도, 철수가 아들을 업고 가며 울먹이는 살곶이 다리장면을 찍고자 관리인을 설득하는 것도, 당시에는 고생스러웠지만 고마운 경험이다. 하루에 서너 시간도 못 자기 일쑤지만 발로 뛰는 제작부 경험이 소중한것은, “거꾸로 살아온” 그의 이력 때문이기도 하다. 한문교육과를 다니다가 명지대 연극영화과로 이적한 그는, 97년부터 매니지먼트 사업을 시작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극장에 드나들고, 이소룡과 성룡을 보며 영화의 꿈을 키웠지만 마땅한 통로를 모르던 시절이었다. 매니지먼트가 길이 아니란 생각에 직접 영화사를 만들고 영화 기획도 해봤으나, 무경험에 현실의 벽은 만만치 않았다. 그때 집안의 친분으로 안면이 있던 강제규 감독을 만난 인연은 새로운 길을 열어줬다. 영화를 하려면 제작 시스템을 먼저 알아야 한다는 그의 조언을 듣고, 강제규필름에서 제작부부터 시작해 프로듀서 훈련을 쌓겠다고 맘먹었기 때문. “허울 좋은 오너였을 때보다 몸은 힘들지 몰라도, 누가 알아주는 걸 떠나 스스로 인정하고 만족하는” 제작부 일에서 그는 배운 게 많다고. <베사메무쵸>처럼 여운이 남는 영화도 좋지만, 현장을 누비며 다진 내공으로 언젠가 <벤허>나 <콘 에어>처럼 “통쾌하고 재밌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게 그의 바람이다. 글 황혜림 blauex@hani.co.kr·사진

<무사> <봄날은 간다> 제작한 싸이더스 차승재 대표 [2]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 =해외 세일즈를 합작사인 일본 쇼치쿠 영화사가 맡았다. 쇼치쿠 국제부가 우리보다 인원과 시스템도 많고 더 잘하며 그게 허 감독에게 도움이 된다. <봄날…>은 홍콩에서 11월1일, 일본에서는 내년 2, 3월경 개봉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새로운 대중영화로 지평을 넓혀간다는 싸이더스의 노선은 분명히 성공이 보장된 도전은 아니다. 특히 올해 여름 성공작들을 보면서 차 대표가 바라는 것과 관객이 바라는 것이 어긋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생기지는 않았나. =우노필름 시절에는 우노 사람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영화를 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싸이더스에 와서는 흔히 얘기하는 재무제표 숫자를 무시할 수 없다. 앞으로는 개인적인 욕망보다는 기업 운영자로서의 책임감을 반영해서 영화를 만들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오늘은 ‘모’였는데 내일 ‘도’다, 이런 식은 아니다. 스펙트럼을 다양화해서 새로운 지평을 넓히는 시도도 계속할 것이고, 관객의 욕망에 대한 진지한 연구를 통해 그 욕망에 부응하는 영화도 만들고 싶다. -가끔 그런 욕망이 싫어지거나 회의가 든 적은 없나. =한번도 없다. 관객은 나의 영원한 구애 대상이다. 그게 영화하는 사람의 운명이다. 대신 세련되고 좀더 우아한 구애를 하고 싶다는 얘기다. -관객의 욕망을 연구한다고 했는데 트렌드 같은 것은 거부하는 듯하다.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안 맞다. 그쪽으로는 재주가 없는 거다. 대신 영화를 오래 하다보니 습관처럼 굳어지는 어떤 게 있는 것 같다. 장기적으로 보는 습관과 전체를 조망하려는 습관이 그것이다. 내가 사용하는 도구는 그런 것이다. 단기적인 시각이나 트렌드를 금방 읽어내거나, 이것은 안 맞는 것 같다. -그래서 싸이더스 영화는 대중영화로선 강하고 때로 딱딱하다는 느낌도 든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게 설탕이다. (웃음) 소금간까지는 이제 맞추는 것 같은데 설탕이 부족하다. 달콤한 영화를, 별사탕을 만들겠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단맛이 겉으로 나오진 않아도 맛의 조화를 이루자는 이야기다. -다른 영화사의 작품을 보고 콤플렉스를 느낀 적이 있나. =있다. <공동경비구역 JSA>가 그랬다. 흥행은 둘째치고라도 샘날 만큼 잘 만든 영화고 좋은 영화다. 하지만 우리가 같은 소재로 과연 저렇게 만들 수 있을까. 확신할 순 없지만, 우리 회사에서 제작했으면 미스터리 형식으로 끝까지 밀고가면서 유머나 멜로적인 요소는 줄지 않았을까. 아까 맛의 조화 얘기도 했지만, 작품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저렇게 단단하면서도 오밀조밀한 느낌의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갖게 했던 게 <…JSA>였다. -최근엔 작품 활동이 뜸했던 중견감독의 영화도 많이 제작한다. =같이 라면 끓여먹으면서 어려운 시절을 함께 보낸 사람들에게, 지금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그것밖엔 별로 없다. 그나마 지금 큰 회사의 책임을 맡고 있는 상태에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회사 내의 동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얘기다. 최근엔 제작위원회라는 게 만들어져서 작품 선정이 더욱 엄격해졌다. -언론이나 비평가들의 비평 경향 가운데 제일 싫은 게 무언가. =주제를 너무 중시하는 경향이다. 나는 주제보다 연출력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주제가 좋아도 설익거나 영화적으로 제대로 표현되지 않았다면, 그 주제는 영화적으로 값어치가 없다고 본다. 메시지가 영화를 평가하는 데 기준이 되는 시대는 이제 지나지 않았나. 그런데도 아직 그런 침대를 잣대 삼아 영화를 눕혀 자르는 케이스가 있는 것 같다. -최근 2∼3년 동안 관객의 취향에서 중요한 변화가 있다고 보나. =가요시장에서 먼저 있었던 변화인데, 자국음악 콘텐츠에 대한 소비 욕구가 강해졌다는 것. 문화 콘텐츠 소비욕구에 주체성이 생겼다고 봐야 하나, 아무튼 그런 게 영화로 전이된 것 같다. 이것은 한국영화로선 둘도 없는 기회다. 이 기회를 웬 떡이냐며 돈 뽑아먹는 기회로 생각해선 안 된다. 지금은 한국영화라는 땅의 지력을 키우는 계기로 삼아야 하는 시기다. -한국영화는 좋게 보면 역동적이긴 하지만 어떻게 보면 굉장히 불안해 보인다. =산업화 초기단계라서 역동적이고, 그만큼 안정성이 떨어진다. 곧 균형을 잡아갈 것으로 본다. 그런데 어떤 방향으로 균형이 잡히느냐가 진짜 문제다. 퇴행적인 재생산 시스템으로 균형이 잡히냐, 계속 돌파를 해나가는 쪽으로 잡히냐 말이다. -어느 쪽일 것 같나. =지금은 감이 안 잡힌다. 굉장히 중요한 시점이다. 영화를 어떻게 할 것이냐에 대한 충무로 전체의 암묵적 동의가 있어야 한다. 이미 아시아시장에서 한국영화를 유통시킬 기회를 잡았다. 이 기회를 어떻게 쓸 것인가, 여기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홍콩영화계를 많이 연구해야 한다. <황비홍>이 성공하면 황비홍 손자의 영화까지 나왔던 홍콩의 경우, 순발력은 있었지만 영화 자체의 퇴행성 때문에 오래 못갔다.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어야 관객의 입맛에 대응할 수 있다. -블록버스터도 좋지만 저예산 영화쪽도 신경을 써야 하지 않을까. =이 세상에서 제일 싫은 게 흑백논리다. 블록버스터만 해야 한다, 또는 저예산만 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저예산 영화도 연구중이다. -그렇게 중요한 시기라고 강조했는데 이제 음반, 매니지먼트 등을 총괄하는 사장이 됐으니 영화에 신경을 덜 쓰게 되는 것은 아닌가. =어차피 부사장 때도 비슷한 업무를 수행해왔다. 대표이사로서 대외적인 업무 정도가 추가될 뿐이다. 각 부문에 관해서는 그쪽 책임자가 가장 잘 알고 있으니 알아서 처리한다. 중요한 사안은 여러 명이 함께 결정하고, 정리나 조정이 필요할 때 내가 나서는 정도다. -이 와중에 영상사업부문장이었던 조민환 프로듀서와 김성수 감독을 분가시킨다. 섭섭한 마음이 있을 것 같다. =헤어진다는 생각은 전혀 안 든다. 그냥 또다른 형태로 일한다는 생각이다. 인연이 끊어진다고 생각지 않는다. 감회가 새로운 게 있다면, 내가 늙는구나 하는 생각은 든다. -지난 1년 반 동안의 대차대조표를 그린다면. =지난해도 흑자, 올해도 흑자다. 지난해는 음반이 컸고 올해는 영화도 클 것이다. 지난해는 영화에서 흑자를 못했지만, 올해는 네편 정도가 돈을 벌어줄 것이니 영화부문에서도 흑자를 낼 것이다. -<밤을 걸고> <헬로 피구> 등 일본과의 합작 프로젝트도 여럿 진행중이다. 어떤 성과가 있나. =합작을 통해서 일본시장을 공부하는 중이다. 합작을 하다보면 정산을 해야 하는데, 얘들이 이런 규모에서 이런 마케팅 비용이 들고, 이런 영화는 시장에서 이런 관객이 반응하는구나, 이런 것을 배운다. 양쪽 시장에서 통용되는 영화를 만들기 위한 기초 자료 수집 차원이다. 성과라면 아직 말할 수는 없지만, <봄날은 간다>를 통해 결과가 나올 것이다. -투자사인 아이픽처스의 대표이기도 하다. 마술피리와 청년필름에 투자를 하는데. =마술피리의 오기민 대표와 청년의 김광수 대표는 좋아하는 동료와 후배다. 그 친구들 영화하는 방식도 좋다. 그들이 자리를 잘 잡았으면 하는 게 바람이다. 그런데 내 입장이 참 이상하다. 투자자이면서도 투자 받는 입장이고, 매니지먼트를 하면서도 캐스팅을 기다려야 하니…. (웃음) 그 안에서 공정성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싸이더스가 준비하고 있는 작품 중 굵직한 것이 있다면. =3년 전부터 일본 다녀오면서 SF를 준비했는데, 만들고 싶다. 시나리오는 지금 하나 있다. <봄날은 간다>가 성공하면 다시 한국, 일본, 홍콩 3국 프로젝트로 해보고 싶다. 이외에도 노스탤지어 영화가 하나 있고,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이야기도 있다. 아직 공개할 단계는 아니다. -장기적인 비전이 있다면. =일단 아시아시장에서 제일 센 영화사가 되고 싶다. 예전의 골든 하베스트나 쇼 브라더스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 이를 위해 내년 상장된 뒤에는 해외지사도 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