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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촬영현장 스케치 [2]

동서고금 막론한 욕망의 모습 “다시 현대물을 한다면 펄펄 날 것 같아요.” 이재용 감독은 사극 연출이 이렇게 힘든 줄 몰랐다고 한다. 움직임의 제약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는 꼼꼼함과 섬세함을 포기하지 않는다. 주연배우들에게는 대사의 톤까지, 단역에게는 화면에 들고나는 위치와 타이밍을 정확히 짚어준다. “사람 사는 거나 인간의 욕망이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요. 어떻게 내 식으로 펼쳐볼까 하는 게 관건이지. 양반집 깊숙한 곳에서 춘화를 돌려보고 또 조씨부인을 주인공으로 한 춘화가 문제를 일으키는 건 ㅇ양 비디오 사건과 다를 게 없고, 당시에 집 한채 값이라는 가채에 사대부 아녀자들이 관심을 보이는 건 이탈리아 가구를 갖고 싶어하는 지금의 욕망과 다를 게 있겠어요?” 감독뿐만이 아니다. 전도연과 배용준은 이구동성으로 <발몽>이나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감독 로저 컴블, 1998)보다 <위험한 관계>가 확실히 인상적이라며 영화 <스캔들…>의 위치를 확인시켜준다. 세실(우마 서먼)의 엄마가 투르벨 부인(미셸 파이퍼)에게 자꾸 경고 편지를 보내며 자신의 ‘작업’을 방해하자 발몽 자작(존 말코비치)은 그 대가로 세실의 처녀성을 가져간다. 메르티유 백작부인(글렌 클로즈)은 처음에 어쩔 줄 몰라하는 세실에게 남편과 맘을 준 연인과 몸을 준 남자를 동시에 갖는 게 여인이 누릴 수 있는 최대치의 자유라고 조언하며 발몽을 거드는데 그건 일말의 진심이기도 하다. 죄책감이 사라진 세실에게 발몽이 ‘난 한때 네 엄마의 정부이기도 했어’라고 말해주어도 세실은 깔깔거리며 재밌어한다. <위험한 관계>의 이야기 줄기를 거의 따온 <스캔들…>이니만큼 세실의 조선시대 버전 소옥과 소옥어미도 모두 조원에게 ‘정복’당한다. 물론 조씨부인의 지원사격이 컸다. 조씨부인을 이해하고 싶다면 메르티유 백작부인이 정리해주는 ‘인생관’을 참고하면 좋겠다. “처음 사교계에 들어와서 그저 조용히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듣고 관찰하면서 사람들이 숨기려는 걸 듣기 시작했어. 그러면서 전문가가 됐지. 도덕가에게서는 외모를, 철학가에게서는 생각하는 법을, 소설가에게서는 불필요한 게 뭔가를 배웠어. 그걸 합해서 한 가지 원칙을 세웠어. 이기지 못하면 죽는다. 남자들을 지배하고 여자들에게 복수하는 거지.” 발몽과 메르티유처럼 조원과 조씨부인도 같은 부류의 인간이다. 사랑 그 자체보다는 권력처럼 위계짓는 사랑 게임을 즐기며 운명적인 사랑에 심취한 인간들을 조롱한다. 이재용 감독도 사랑에 얼마간 냉소적이다. <정사>에서 “결혼에 희망을 갖지 마라. 열정만 갖고 사는 건 아니다”라고 말하던 남편의 말에 동감하던 이 감독은 ‘솔 메이트’(영혼의 짝) 따위의 대사를 편집에서 지워버렸다. <순애보>에 다시 등장한 우인은 아야와 알래스카에서 커플이 되지만 그는 사실상 거세된 남자다. <스캔들…>에선 발정난 조원이 뒤늦게 ‘회개’를 하겠지만 운명적 멜로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SF영화 만드는 상상력으로 낯선 곳에서 이야기를 끌어온 영화답게 <스캔들…>은 공간과 디테일에 대한 상상력이 ‘SF적’이다. 이것은 <스캔들…>이 텔레비전이나 영화에서 보아온 기존 사극과 달라지리라고 예상되는 또 하나의 지점이다. 조선 시대에는 양치질을 어떻게 했을까까지 고증하려 했으나 남아 있는 게 워낙 없어서 애를 먹었지만 먼저 상상을 해보면 대체로 맞아들어갔다고 한다. 민속촌에 가면 중부 지방과 남부 지방의 집 모양을 개괄해놓았지만 설마 사람들이 그렇게 표준적으로 살았을까 싶었다. 마침 문을 열면 트인 마당이 아니라 벽부터 다가서는 이언적의 ‘은밀한’ 집을 보고 무릎을 쳤다. 내당에 연못을 만들어놓기도 했겠지 싶어 세트를 만드려 하니 ‘그런 집’은 없었다는 반발에 부딪쳤다가 뒤에 ‘그런 집’이 있었다는 걸 찾아냈고, 예절법을 연구하다 식사 때 서양의 냅킨 같은 걸 썼다는 것도 알았다. 지금 서구식으로 방을 꾸미듯 그때는 방을 중국식으로 치장하지 않았을까 하는 개연성으로 밀어붙인 것도 있다. 상상력이 이런 식으로 자꾸 작동하니 ‘이건 SF영화다’라는 레토릭도 틀린 것만은 아닌 셈이다. “당시에 군자는 스페셜리스트가 되기보다 제너럴리스트를 추구했어요. 스스로 약을 지어 먹을 줄 알고, 운수도 볼 줄 알고, 자기 집은 자기 식대로 짓고 살았다는 거죠. 이걸 알고 나니까 사대부의 일상에 집중하는 데 많이 자유로워지더군요.” 공간에 대한 야심을 가진 사극이라면 미술비의 비중이 높을 것은 불문가지. 순제작비 45억원 중 미술, 의상 등에 들이는 돈이 20억원에 가깝다. 화려한 실내 미장센을 연출하기에 고충이 크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좌식 문화에 카메라를 다양하게 들이대기가 생각보다 갑갑하더라는 것이다. 조금만 움직이면 틀어지는 한복이나 머리, 수염 등도 엄청난 시간을 잡아먹는다. 조원의 잘 다듬어진 수염은 ‘리얼리티’를 위해 한올씩 일일이 붙였다. 그래도 68회차 촬영 중에 43회차를 넘기면서 중요 대목은 거의 다 찍었기 때문인지 야외촬영에선 느긋하게 즐기는 분위기마저 느껴졌다. 요즘 영화계의 한 경향이라 할 여성 스탭들의 파워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 분장, 의상은 물론이고 프로듀서, 제작부장, 조명 퍼스트, 붐 마이크 등이 모두 여성이다. “<순애보>처럼 이것저것 살짝살짝 숨겨놓는 재미는커녕 이야기 전달에만도 힘이 많이 들어 한눈 팔 새 없을 지경”이라는 엄살은 이 영화가 매우 촘촘한 스토리 라인을 갖고 있음을 짐작게 한다. 에로틱함과 멜로, 유머까지 그 어느 때보다 ‘톤’이 다양한 이재용 감독의 신작이 얼마나 ‘비싼’ 결과를 낳을지 아직 알 수 없다. 우아하고 세련된 사극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스탭들이 묵는 안동 시내의 모텔은 여느 도시처럼 술집들로 포위돼 있었다. 밤늦게까지 붙잡아놓았던 감독이 돌아간 뒤 텔레비전을 켜자 한 채널에서 비디오용 에로영화가 줄창 쏟아진다. 이래저래 현실은 ‘싸구려’라는 생각이 새삼스레 치밀어오른다. “성(性)스러우면서도 성(聖)스러움이 깃든” 영화는 그래서 자꾸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편집 이다혜 배용준, 전도연 인터뷰 “용준씨, 러브신 직전까지 운동하더라” 배용준이 맡은 조원은 시, 서, 화에 능하지만 고위관직을 마다하고 뭇 여인들과 풍류를 즐기는 조선 최고의 바람둥이다. 재치있는 유머와 강한 카리스마가 있어야 할 텐데 브라운관에서 굳어진 이미지는 호탕한 남성미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런데 안경을 벗고 8kg을 감량한 얼굴은 날이 서 있다. 공식 인터뷰가 아닌 사담을 나눌수록 ‘터프’하다는 느낌이 더해진다. 배용준은 온갖 스포츠를 즐기고 또 잘한다. 그 덕에 말에서 떨어진다든지 부채를 들고 칼싸움을 하는 장면에선 스턴트맨보다 훨씬 잘했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조선 최고의 정절녀 숙부인 역의 전도연은 잠시드라마쪽으로 나섰다가 쪽진 머리로 돌아왔다. 한담을 나누던 이유진 프로듀서는 “슛 들어갑니다”란 소리가 나자 “도연이는 굳이 지켜볼 필요가 없어”라며 연기에 대한 믿음을 표시했다. 러브신 장면은 어떻게 찍었는지. 배용준 >> 한복이 입고 다니기에 좀 불편하잖아요. 그래서 가끔 다 벗고 그랬어요. (웃음) 시키는 대로 다 했어요. 전 처음이잖아요. 찍고 났더니 전도연씨가 매니저랑 뭘 막 상의해요. 왜 그러냐고 했더니, 이건 너무 야하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렇다고 뭐가 많이 나오진 않아요. 전도연 >> 저도 잘 모르고 찍었어요. (웃음) 그런데 용준씨는 그거 찍기 전까지도 분장실에 아령을 갖고 와서 운동을 하더라고요. 유머도 꽤 담겨 있다고 하던데. 전도연 >> 전혀 코믹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대본 리딩에서 웃기는 대목이 많은 거예요. 뭐랄까 너무 진지하니까 오히려 웃기는. 배용준 >> 그런 점에서 기대되는 장면이 몇개 있는데, 아직 찍지 않아서 어떻게 나올지 잘 모르겠어요. 배용준씨는 첫 영화인데다 사극이어서 힘든 점이 많을 것 같은데. 배용준 >> 드라마는 길게 나누어 가고 반응도 바로 돌아오니까 큰 긴장감이 없었는데 영화는 액기스만 가니까, 연기의 호흡이 빠르니까 좀더 죽기살기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솔직히 맘 같아서는 다시 다 찍자고 하고 싶어요. 현대극 같지 않고 대사도 좀 힘들고, 상투 때문에 머리에 피멍이 들기도 했어요. 한복 입고 살다보니 옛날 양반들은 불편해서라도 소식을 했을 것 같아요. 촬영이 힘들어서 빠진 것도 있지만 체중 감량은 잘한 것 같아요. 전도연씨도 사극은 처음 아닌가요? 촬영이 60% 정도 진행됐는데 연기하기가 어떤지. 전도연 >> 벌써 그렇게 됐나. 장르의 변신일지는 몰라도 연기의 변신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요. 지고지순한 캐릭터라는 표현 방식만 달랐지 연기는 결국 다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평상시 이미지가 워낙 발랄하긴 하지만 막상 해보니까 숙부인의 조용한 성격이 저랑 많이 닮았어요. (웃음) 조씨부인(이미숙) 캐릭터가 워낙 힘있게 보이는데 저는 숙부인에게 또 다른 힘을 주고 싶어요. 자신의 순정이 사랑 게임의 대상이 된다는 게 현실이라면. 전도연 >> 글쎄. 바람둥이라도 그때그때 진심이 아닌 건 아니니까…, 넘어갔을 것 같아요. 여기선 결국 조원의 진심이 있으니까 큰 문제는 안 될 것 같아요.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

감독 · 평론가 8명이 추천하는 단편감독 8인 [4]

추천자 : 탐미적이고 어두운 미학적 성취 <사춘기>의 제찬규 감독 김지운 감독 날카롭고 현대음악 느낌의 현과 피아노가 도발적으로 귀를 자극하면서 흑백화면이 열린다. 화면 가득 선풍기가 털털거리며 느릿하게 돌아가고 있고 한 소녀가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다.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만화영화 <캔디>의 낭랑한 대사들이 음침한 공간 안에서 역설적으로 그로테스크하게 들린다. 방 안은 온통 이상한 조짐들로 가득하고 텔레비전을 주시하던 소녀의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시선은 집 어디선가 들리는 녹슨 파이프관을 따라 흐른다. 모기향 접시에 퍼덕거리며 원을 그리는 나방, 가슴을 철렁하게 만드는 구식전화 벨소리, 방 안 한구석에서 이마에 손을 올려놓은 채 잠을 자는 엄마, 이 모든 것들이 사춘기 소녀의 오감에 불길하게 와닿는다. 아니 소녀를 억누르고 있다. 소녀의 엄마는 한쪽에 축 늘어진 채 소녀를 이 불길함에서 구해줄 능력을 상실한 듯 보인다. <사춘기>의 공간들은 온통 낯설고 그로테스크하다. 친숙하다면 더할 나위 없이 친숙한 공간인 집과 병원, 병원의 긴 복도와 육중한 엘리베이터, 그리고 택시 안은 최대한 단순하게 공간을 닫아버리고 스멀스멀 불길한 전조를 드리운다. 이렇게 사춘기의 소녀 앞에 놓인 모든 대상들은 낯설고 불안하고 어두운 이미지로 존재한다. 지난해 이맘때쯤, 미쟝센단편영화제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나는 두편의 놀랄 만한 작품을 만났다. 그 한편은 대상 작품이었던 신재인의 <재능있는 소년 이준섭>이었고 다른 한편은 공포판타지 부문 대상작인 제창규의 <사춘기>였다. 우선 신재인의 <재능있는 소년 이준섭>은 기발한 이야기 소재에 엉뚱하고 성숙한 유머를 천연덕스럽고 솜씨있게 비벼놓아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모든 감독들을 한방에 보내버렸다(뒤에 알았지만 그에게 매료당한 영화인들이 꽤 있었던 걸로 안다). 이 작품과 마지막까지 대상을 놓고 각축을 벌인 작품이 바로 제창규의 <사춘기 >였는데 나는 극히 현실적인 공간을 어둡고 낯설고 기이한 공간으로 연출해낸 제창규의 탐미적이고 어두운 이미지에 매료당했다. 서양화 전공의 미대 출신답게 그는 엄격한 구도와 텍스처의 질감을 세심하고 유려하게 그려나갔다(물론, 미대 출신이라고 다 화면구성력이 뛰어나고 표면재질감을 훌륭하게 그려내는 건 아니다). 나를 매료시킨 것은 바로 텍스처의 표현능력이다. 한국영화 중 단편, 장편 통틀어 최근에 그만큼 텍스처를 뚫어져라 바라본 사람을 못 봤다. 뭐 그다지 별거 아닌 것에 호들갑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일반화 경향이 강한 우리나라 영화풍경 안에서 신선하고 소중하게 느껴지기만 한다. 물론 그에게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표면에 세심한 나머지 이야기 전개의 허술함을 낳았고 알레고리의 중첩과 과잉은 모호한 결말을 도출한다. 마치, 그는 관객에게 잔뜩 분위기를 잡아놓고 허둥지둥 알레고리 안에서 이야기를 찾으라고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뤄어낸 공간의 은밀하고 어두운 세계의 미학적 성취는 더없이 소중하기만 하다. 최근 소식에 의하면 지금 그는 촬영감독으로 데뷔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와 잘 맞는 소재와 감독이라면 금상첨화, 기대만빵이다. 그가 대형 스크린 위에 그려놓을 그림들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그와 함께했던 촬영, 음악, 편집, 미술을 맡았던 스탭들의 앞으로의 행보도 기대되며 특히 음악을 맡은 임지윤은 왠지 천재적인 감각이 느껴진다.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

와일드 와일드 투캅스,정진영+양동근

봄비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와일드’하게 비가 내렸다. 그리고 <와일드카드>의 두 형사들을 기다린다. 먼저 형님이 스튜디오로 들어섰다. 담배를 물어 피우고는 천천히 걸어다니며 공간을 익힌다. 깡패들에게는 무섭게, 가족에게는 부드럽게, 그렇게 이중의 생활을 오차없이 끌어나가는 형사 오영달의 노련함은 그 느긋한 걸음에도 배어나온다. 그건 배우 정진영만이 보여줄 수 있는 특별함이다. 방제수 역의 양동근이 들어섰다. 거침없이 자리에 앉는다. 물어보기 전까지는 한마디 말도 없다. 범인을 잡으러온 형사 방제수처럼 거친 숨을 가라앉히며 시선을 내려꽂는다. 우회하지 않고 숨기지 않는, 그래서 친구와 적이 분명한 양동근, 발로 뛰고 주먹으로 생각하는 돌출적인 형사 방제수 역에 그보다 더 어울리는 적임자를 찾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영화를 보러가도 같은 영화는 안 볼 것 같고, 음악을 들어도 다른 종류만 들을 것 같은 두 사람. 빼어난 말솜씨로 ‘그것을 알려주는’ 형님과 말보다는 ‘구리뱅뱅’ 랩으로 의견을 뱉어내는 것에 능숙한 동생. 달라도 많이 다를 것 같았던 이 15살 차이 형님 동생은 마치 영화 속 파트너처럼 다정하고, 격의없다.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욕심없음’, ‘가식없음’ 등의 판단을 내리게 만든다. 양동근, “둘 다 나쁘죠”. 정진영, “둘 다 죄악이죠”. 퍽치기가 더 나쁜가, 강간범이 더 나쁜가, 라고 물어보자 낱말의 선택이 다를 뿐 같은 대답이 돌아온다. 나이차를 무색하게 하는 친밀감은 그렇게 비슷한 사고에서 나오는 것이다. 낯가리기로 유명한 양동근이 인터뷰 도중 웃음을 띠는 것은 정진영이 말을 건넸을 때이거나, 정진영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을 때뿐이다. “형님은 주먹내세요. 저는 가위낼게요.” 포즈를 취하며 던지는 썰렁한 농담 한마디에도 정진영은 허허 웃으며 시키는 대로 한다. “내가 형 좋아하는 거 알죠?” “죽으라면 죽을 수도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형사 방제수의 모습, 허허실실 눙치며 동생을 이끄는 형사 오영달의 모습 그대로이다. 두 사람은 자신에 대해 설명하는 것보다 서로를 설명하는 것에 더 능숙하다. 그래서 양동근을 알기 위해서는 정진영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정진영을 알기 위해서는 양동근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그 말들은 결코 의례적인 겉치레가 아니다. 정진영이 말한다. “연기 무지하게 잘하고, 에너지를 갖고 있는, 한마디로 뜨거운 청년이죠.” 그만의 진솔한 표현이다. 양동근이 말한다. “정의로우세요. 여러 방면으로, 전체적으로.” 시키지도 않았는데 말을 꺼낸 건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진짜라는 얘기다. 비맞으며 들어온 두 형사들, 잠복근무 중에 대화하는 낮은 톤으로 서로를 감싸안았다. 투명한 남자 집요한 연기 정진영은 시나리오를 읽어보기도 전에 영화의 출연을 결정했다. 김유진 감독에 대한 철저한 믿음 때문이었다. 그는 김유진 감독에 대해 “<약속>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배우의 길을 걷게 해준” 분이고, “평소에도 지속적으로 뵈며 여러 가지를 많이 배우는, 배울 게 많은 어른”이라고 표현한다. 한마디로 “우리 오야지”라고 부른다. “오야지라는 말이 있잖아요. 일본말이긴 하지만, 그 말 안에는 신뢰와 존경이 있는 거죠”라고 단호하게 밝힌다. 그래서 “형사 얘기다” 한마디만 듣고 “예” 했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믿고 따라가면 돼요. 그리고 따라가는 게 옳아요. 또 따라가면 옳게 돼요”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다. “영화를 잘 만드는 사람이 아니면 갖기 힘든 생각”이라고 정확하게 덧붙인다. 그의 표현을 따르자면 <와일드카드>는 “비범한 일을 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우리 영화의 매력은 그거죠. 어렵다는 내색 안 하는 거, 각을 잡거나 포즈를 취하지 않는 거.” 비범한 일을 하는 평범한 사람 오영달을 연기하기 위해 정진영은 절에 들어가 시나리오를 공부했다. 그저 “집중할 장소를 선택”한 것뿐이라고 공치사를 마다하지만, 거기에는 이런 이유도 있다. “나는 현장에서 갑자기 드는 생각을 신뢰하지 않아요. 영화라는 게 앞뒤가 다 맞아야 하는 건데 즉흥적으로 하는 건 잘 못 믿겠어요. 그러니까 그 전에 공부하는 수밖에 없죠.” 자신을 가리켜 “현장에서 갑자기 하자면 잘 못하는, 순발력이 떨어지는 배우”라고 낮추어서 표현했지만, 그건 그에게 흠이 되지 않는다. <약속>에서 시작된 배우 정진영에 관한 신뢰도는 점점 더 폭을 넓혀간다. “진정성 있는 영화, 소재와 무관하게 코미디건 뭐건 꼴이 투명한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는 그는 문제에 부딪히면 해결을 해야 하는 성격이다. 또는 그 전에 지뢰들을 미리 제거한다. 영화의 한 부분에 문제를 제기하자, 사진을 찍고 한참 뒤 다시 다가와서 먼저 말을 꺼낸다. “근데 아까 말한 거 있잖아요….” 그런 집요함이 배우 정진영의 힘이다. 한없이 스트레이트한 양동근은 결코 신발에 발을 맞추지 않는다. 연기에서도 그렇고, 실제로도 그렇다. 한 자리에 있는 낯선 자는 불편하기 그지없다. 아니, 양동근처럼 돌리지 말고 표현하자. ‘기분 정말 더럽다.’ 하지만, 그런 그의 태도는 상대방에 대한 악의적인 공격에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다(아니라고 한다).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이 있을 때 사람들은 위장을 하고, 웃음을 흘린다. 그런데 양동근은 웃음 대신 불편한 속내를 드러내는 솔직함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인터뷰 너무 많이 잡으니까 싫죠.” “할말이 없어서요.” “그런 거 없었는데요.” “그게 무슨 의미냐, 무슨 뜻이냐 돌려서 생각하지 말고 그냥 그대로 받아들였으면 좋겠어요.” 처음 만난 사람에게는 난처한 대답이지만, 친구가 되어 마주한다면 들을수록 솔직한 말들일 것이다. 그 솔직함은 형사 방제수의 행동처럼 간결하다. 그에게 긴 말은 거짓이다. 그래서 양동근에게 20자 넘는 대답을 얻는 것은 하늘에서 별따는 것처럼 어렵다. “양동근에 대한 편견이 있어요. 아무 생각이 없는 애. 그냥 하는 애. 근데 얘는 묻는 대로만 대답해요. 그러니까 정확하게 물어봐야 돼요.” 정진영이 일러준 힌트. 말하자면 그가 요구하고 지키는 원칙은 솔직함 더하기 정확함 더하기 열정이다. 짧게 표현하지만 정확함을 전제하고, 정확하지만 뜨겁다. 연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양동근은 형사 방제수를 “멋있어요”, 한마디로 표현한다. 형사 방제수의 캐릭터를 어떻게 연구했냐고? 이건 코웃음칠 질문이다. “시나리오를 참조했죠.” 그는 분석하지 않는다. 시나리오대로 하면 정확하기 때문이다. 남들이 ‘동물적 본능’ 운운하는 거창한 말을 그는 “그냥, 그저”로 바꿔 말한다. “어떻게 같은 신을 두 가지 기분으로 찍어요. 몰입이요? 배우가 다 몰입하죠. 어떻게 몰입하냐, 그런 거 웃긴 거 아니에요?” 그렇게 양동근은 잔머리를 굴리지 않는다. 웃을 때는 천진난만해 보이고, 말할 때는 돌덩이 같지만, 연기할 때는 그 누구와도 견줄 만한 에너지로 넘치는 ‘프로’이다. 텔레비전 시트콤에서 <수취인불명> <해적, 디스코왕 되다> <와일드카드>에 이르기까지 그는 재미없어하며 일한 적이 없다. 그래서 음악과 연기는 “병행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동등한 위치에 있고 성격이 다른” 것일 뿐이다. 때문에 그 즐거움은 에너지가 되고, 캐릭터가 되어 그의 배우로서의 긴 생명력을 예감하게 한다. 자유의 촉수를 뻗어 연기하는 날것 그대로의 몸짓, 그것이 배우 양동근의 힘이다.

혼란스럽지만,영리하고 보편적인 <어댑테이션>

찰리 카우프만이 각본을 쓰고 스파이크 존즈가 연출한 <존 말코비치 되기>는 코믹하면서도 머리를 쥐어짜게 만드는 이야기를 가지고, 추리를 즐기는 관객의 두뇌회전을 자극한 바 있다. 같은 팀이 만들어낸 대단히 영리한 후속작 <어댑테이션>은 자신이 사람들로부터 어떤 기대를 받고 있는지 지나칠 정도로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웬만한 관객의 두뇌게임 도전은 간단히 물리쳐버릴 수 있을 정도로 치밀하게 잘 짜여 있다. 관객으로 하여금 <어댑테이션>의 각본작업에 빠져들게 하는 능력은 정말이지 탁월하다. “내 머릿속에 독창적인 생각이라는 게 하나라도 있을까?” 작가 찰리 카우프만(니콜라스 케이지)은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대뜸 묻는다. 이렇듯 <어댑테이션>의 많은 부분은 관객을 카우프만의 신경증적 의식의 흐름으로 끌어들인다. 그는 불안 때문에 어찌나 호들갑을 떨며 안절부절 늘 떠들어대는지 심지어는 우디 앨런조차도 그와 비교하면 경건한 보살처럼 보일 지경이다. 하지만 어떤 작은 대목도 가볍게 받아들여선 안 된다. 찰리의 정체성 혼란은 무려 40억년 전 지구 첫 생물 출현 시기로 플래시백했다가 이 작가의 탄생과 함께 다시 현재로 돌아와 스튜디오 이사(틸다 스윈턴)와의 오찬으로 이어진다. 그녀는 희귀화초와 희귀화초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관해 수잔 올린이 쓴 기나긴 보고서 <난초도둑> 각색작업을 그에게 맡아달라고 한다. 찰리는 이 일을 맡지 않기 위해 갖은 수를 다 동원하지만 결국 작업은 그에게 떨어진다. 타자기 앞에 앉은 찰리의 고통은, 수잔 올린(메릴 스트립이 멋진 연기를 보여준다)은 얼마나 쉽게 보고서를 썼을까 하는 상상 때문에 더욱 커진다. 이쯤에서 카우프만은 자신의 모든 이야기 재주를 한데 끌어모은다. 찰리가 미친 듯이 일감을 매만져감에 따라 <어댑테이션>은 점점 조프 다이어의 97년작 와 닮아간다. D. H. 로렌스에 관한 연구라고 추정되지만, 정작 내용은 그런 연구보고서를 쓸 능력이 안 된다는 다이어의 이런저런 고백과 푸념으로 가득한 그 작품 말이다. 또한 이 영화에는 페데리코 펠리니의 의 울림도 담겨있다. 비록 찰리는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라는 고뇌에 찬 거장과는 그 명성에서 거리가 멀지만 말이다. 수잔 올린의 작가 사진과 텔레파시적 대화를 나누기에 앞서 그는 이렇게 외친다. “내가 겪고 있는 패닉과 자기혐오 외에 나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 황당할 정도의 상호텍스트성(mad intertextuality), 시간을 마구 뛰어 넘나드는 진행, 온통 평행적으로 병치된 액션 등에도 불구하고 <어댑테이션>은 전적으로 문학적이지는 않다. 그렇다고 테크닉이 지나치게 번지르르한 것도 아니다. <존 말코비치 되기>가 영화연기에 관한 영화였음을 상기해본다면, 존즈가 배우들을 장악하고 연기를 이끌어내는 데 재능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크리스 쿠퍼가 연기하는 존 라로시는 카리스마 넘치게도 앞니 하나가 빠진 모습으로 떠버리 천재를 열연하며, 스트립은 맨해튼의 디너파티 접대를 맡은 단 한 장면만으로도 오스카 조연상 부문에 후보로 지명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케이지는 찰리 역할뿐 아니라 그의 쌍둥이 동생 도널드까지 맡아 연기하면서 오스카에 한 걸음 더 성큼 다가선다. 형의 경멸을 받는 도널드는 찰리가 보기에, 온갖 잡스럽고 어리석은 아이디어의 쓰레기통임에도 불구하고 첫 작품인 라는 다중인격 연쇄살인범이 나오는 스릴러를 어마어마한 값에 간단히 팔아치울 뿐 아니라 여자를 낚는 데도 재능을 발휘한다. 이쯤에서, <어댑테이션>은 몇 가지 생각해볼 거리를 던져준다. 영화는 비록 긍정적인 도널드 카우프만의 손을 들어주고 크레딧에 그의 이름을 버젓이 소개하기까지 하지만, 도널드 카우프만이라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캐릭터들은 변화해야 하며 그 변화는 반드시 그들 자신으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말을 카우프만은 거만스럽게 받아들여 양면적으로 활용한다. 과 마찬가지로, <어댑테이션>은 자신의 꼬리마저 즐거이 삼켜버리는 영화다. 액션이 일단 도널드의 각본을 따라 움직이지 시작하면, 우리는 갑자기 사이버포르노와 이국적 마약과 자동차추격전과 간통과 살인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버린다. 어쩌면, 브로마이드를 들어 보이며 해피엔딩을 주장하는 끝대목이야말로 내러티브의 습지에서 피어난 한 떨기 난초일지 모른다. 창의성이란 면에서 전혀 지칠 줄 모르긴 하지만, <어댑테이션>은 조금 사람을 피로하게 만들기도 한다. 결국 <어댑테이션>이라는 이 영화 제목은 이 작품이 올린의 책을 가지고 각본을 쓰는 데 얽힌 이런저런 이야기를 그린 극임을 가리킨다기보다, 노골적으로 비우호적인 환경에서 어떻게 생명체에 도움이 되는 행동이 진화할 수 있는지에 관한 반복악절이라고 보는 것이 궁극적으로 더 옳을 것 같다(즉, 여기서 ‘어댑테이션’이란 ‘각색’이 아니라 ‘적응’을 뜻한다는 말 - 역자). 다시 말해, 할리우드에서 이루어지는 창조과정에 대한 풍자를 담은 이 이야기가 보편적인, 최소한 20세기적인, 다시 말해 당신의, 나의, 그리고 영화들의 최고의 요구들을 다 담고 있다는 뜻이다.

<솔라리스>, 원작과는 색다른 소더버그와 카메론의 색깔

스타니스와프 렘의 <솔라리스>는 장점이 많고 매력도 많으며 하는 말도 많은 소설이었지만, 이 소설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고딕 로맨스적 요소였다. 한마디로 렘의 <솔라리스>는 유령 이야기였다. 유령 이야기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순수한 공포물로 이런 이야기에서 유령은 두려움과 혐오의 대상이다. 다른 하나는 로맨스로 이 이야기에서 유령은 허망한 두 번째 기회이거나 맺어질 수 없는 운명의 상대이다. 이야기에 따라 둘은 종종 중복되지만 그렇다고 이 두 요소의 성격이 흐려지는 것은 아니다. <솔라리스>로 돌아가보자. 이 소설의 기본 스토리는 무엇인가? 아내를 잃은 심리학자가 아내의 유령과 재회해 다시 사랑에 빠진다는 것이다. 기본 유령 이야기와 다른 점은, 이 이야기의 무대가 솔라리스라는 행성의 스테이션 안이고, 아내는 솔라리스의 생각하는 바다가 남편의 기억에 남은 아내의 상을 이용해 창조한 뉴트리노 유기체라는 것이다. 설정 자체만 해도 로맨틱한 분위기가 철철 흐른다. 주인공 크리스 켈빈에게는 19세기 유럽 고딕소설 주인공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는 음울한 자괴감과 상실의 고통이 가득 하다. 그의 뉴트리노 유령 아내인 하리는 그녀를 구성하고 있는 입자처럼 허망하면서도 꿈결처럼 아름답다. 실제로 그녀는 말 그대로 켈빈의 꿈이기도 하다. 솔라리스의 생각하는 바다가 자료로 삼은 건 바로 켈빈의 기억과 욕망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렘은 연애 이야기만 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는 진지한 SF작가였다. 하리의 유령과 솔라리스의 생각하는 바다는 그에게 사유의 질료였다. 의식있는 외계의 존재와 우리는 어떻게 의사소통할 수 있을까? 만약 그들과 의사소통이 불가하다면 그들의 의식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크리스 켈빈과 하리의 로맨스는 그 자체로도 인상적이었지만 좀더 거대한 비전을 제공하기 위한 창문이었다. 로맨스 요소를 최대한 살리다 그러나 여기엔 하나의 소박한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로맨스 자체가 훌륭하다면 왜 그것만 집중적으로 다루어서는 안 되는가? 그렇게 다룬다고 해도 원작의 아이디어에 깃든 철학적 사유는 여전히 남을 것이다. 단지 집중하는 방향이 다를 뿐이다. 이미 걸작이라는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도 렘의 원작에 그렇게까지 충실한 영화는 아니지 않나? 스티븐 소더버그와 제임스 카메론이 만든 <솔라리스>는 바로 그 시도를 했다. 보기보다 까다로운 작업이었을 거라는 점을 먼저 지적해야겠다. 이건 제작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순전히 마케팅의 문제이다. 마케팅 담당자에게 러브스토리와 SF는 섞이지 않는다. 물론 여기에 연애담과 섹스를 첨가할 수 있지만 순수한 러브스토리만으로 SF를 채울 수는 없다. 액션과 특수효과와 같은 ‘남성적’인 것이 추가되어야 한다. <솔라리스>의 마케팅 담당팀은 좀 바보 같은 짓을 했는데, 그건 장르를 속이는 것이었다. 아니, 장르를 속이는 것 정도는 괜찮다. 하지만 그들은 그걸 아주 서툴게 해치웠다. <솔라리스>의 멜로드라마 예고편은 바로 그들의 기만의 희생자였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SF적인 비주얼을 제거하고 영화를 로맨스로 분류해 광고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 트릭에 너무 힘을 주는 바람에 예고편은 아주 억지스러운 로맨스영화의 예고편이 돼버렸다. 마치 <총알 탄 사나이 3과 1/3>을 위해 만든 가짜 로맨스 예고편처럼 말이다. 왜 그들이 그런 실수를 저질렀는지 모르겠다. 최근 조사 결과에 의하면 여성 SF/판타지팬들의 수는 점점 늘어나고 있고 몇몇 작품들에서는 남성 팬들의 수를 능가한다. 아마 <버피>에서 여성팬들을 제거한다면 그 시리즈는 처음부터 허물어질 것이다. 처음부터 솔직하게 다루어도 문제가 될 건 별로 없었던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소더버그와 카메론은 <솔라리스>를 어떻게 각색했을까? 그들은 두 가지 접근법을 택했다. 원작에서 로맨스의 요소를 최대한으로 뽑아내고 어떻게든 유명한 타르코프스키 영화와 스타일과 내용면에서 차별화를 주기로 한 것이다. 덤으로 뉴트리노를 힉스장과 힉스입자로 고치는 식의 업그레이드를 하기도 했고. 타르코프스키 영화와의 차별화는 눈에 쉽게 들어온다. 그건 거의 공인된 걸작에 대한 치기 가득한 도전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길고 장황하며 묵직하다. 하지만 소더버그의 영화는 짧고 간결하고 빠르며 상대적으로 가볍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60, 70년대 유럽 멜로드라마의 분위기를 강하게 풍긴다. 그건 쓸쓸하고 정갈한 가을 분위기 때문이기도 하고(이 영화의 지구에서는 늘 비가 내리고 있다) 연애의 주인공들이, 생각할 거리가 많은 교육받은 어른들이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솔라리스>의 러브스토리는 감정보다는 그런 감정을 끌어내는 상황의 독특함에 의지하고 있다. 아무리 순수한 러브스토리를 만들려고 애를 써도 이야기의 성격 자체를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바뀐 것은 어느 쪽에 더 중점을 두느냐이다. 원작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소더버그/카메론의 <솔라리스> 전체를 지탱하는 것은 로맨스의 불합리한 논리이다.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한다. 둘이 살아 있는 동안 이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는 둘 중 하나가 죽으면서 시작된다. 구식 로맨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과 상대방이 서로에게 절대적으로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믿음이다. 죽음은 이 믿음에 심각한 상처를 낸다. 만약 로맨스의 논리가 강요하는 근거를 받아들인다면 논리적인 해결책은 자살이다. 자살로 끝나는 <로미오와 줄리엣>류의 수많은 로맨스 소설들이 인기를 끄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대부분은 그런 논리를 적극적으로 실천에 옮길 만큼 용감하지 않으며 우리가 무시하기엔 삶의 욕망이 너무 강하다. 여기엔 이타성을 위장한 로맨스의 이기성이라는 또 하나의 심각한 아이러니가 끼어든다. 한번 생각해보자. 논리적으로 로맨스의 대상과 일체화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SF세계인데 텔레파시가 있지 않느냐고? 있어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아무리 기를 써봐야 어쩔 수 없는 타자인 상대방과 접촉하고 이해하고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의 감각과 이성을 동원하는 것뿐이고, 그 결과 우리가 얻는 것은 우리 머릿속에 저장되는 감각적 정보들과 행동 패턴에 대한 기억뿐이다. 복제의 아이디어를 확대 과장 크리스 켈빈은 어정쩡한 생존자다. 그는 아내가 죽었다고 따라죽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그의 상실감과 죄의식이 쉽게 사라지지도 않는다. 아마 그는 그걸 그대로 잊으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런 식의 고통은 죽은 자를 계속 기억하며 소유하는 하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런 그가 솔라리스에서 아내의 유령을 만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함정이 두개 숨어 있다. 함정 하나. 그가 솔라리스에서 마주친 아내 레아는 진짜 아내가 아니라 아내의 복제물이다(렘의 소설이나 두 영화는 모두 기겁한 켈빈이 첫 번째 아내의 복제물을 우주선으로 쏘아버리는 에피소드를 첨가해 이 복제의 의미를 분명히 한다). 만약 레아가 살아 있고 그가 레아의 복제물과 사랑에 빠진다면 그건 불륜일 것이다. 그렇다면 레아가 죽었다고 해서 레아의 복제물과 사랑에 빠진다는 것이 죽은 아내에 대한 배반이 아니라고 할 근거가 있을까? 함정 둘. 이건 진짜 흥미롭다. 레아는 진짜 레아의 복제물이 아니라 켈빈의 머릿속에 남아 있던 레아에 대한 기억을 재구성한 것이다. 이론상 가짜 레아는 진짜 레아보다 더 진짜같다. 크리스 켈빈은 끝끝내 아내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다(어느 누구도 타자를 그렇게까지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의 기억 속에 남은 레아의 이미지는 그의 갈망과 기억이 뒤섞여 만들어낸 그 자신의 창조물로, 실제 레아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솔라리스의 가짜 레아는 그가 잃고 괴로워하던 대상과 더 가깝다. 솔라리스의 가짜 레아에 대한 켈빈의 사랑은 순수하고 격렬하고 로맨틱할 수 있지만 그것은 결국 자위행위에 불과하다. 하지만 위의 두 함정을 번갈아 검토해본다면 로맨틱한 사랑 자체가 자위행위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자신에 대한 상대방의 절대적인 가치를 주장! 하는 로맨틱한 감정이 극도에 도달할수록 로맨스 자체는 오히려 자기 속에 함몰하고 만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흠…. 거의 하드 SF적인 상상으로 이어가는 원작과 러시아풍의 우울함으로 가득한 타르코프스키 영화와 달리 소더버그와 카메론의 <솔라리스>는 별다른 장식없이 이 딜레마를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편이다. 원작과 첫 번째 영화와 달리 이들의 <솔라리스>는 복제의 아이디어를 확대 과장하는데, 결과적으로 영화는 사랑의 주체와 대상의 관계라는 로맨스의 기본 구조에 더 집중하게 된다. 이런 접근법은 결말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영화 후반부에서 크리스 켈빈은 지구로 돌아오고 아파트에서 자신이 진짜 자신이 아니라 솔라리스의 방문객일지도 모른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앞에 살아 있는 레아가 나타난다. 이 결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지구로 돌아간 건 켈빈의 복제물일 수도 있다. 아니면 이 모든 건 솔라리스에 남은 켈빈의 복제물이 겪는 환상일 수도 있다. 아니면 이들 모두가 솔라리스의 바다에서 구축된 환상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어느 게 진실이냐가 아니라 그 결말의 내용이다. 어느 게 진실이건 영화는 진정 효과를 가지고 있다. 결국 크리스 켈빈은 그의 아내 레아를 만나고 두 번째 기회를 얻으며 그들의 사랑은 영원하다. 영화가 거의 강요하다시피 인용해대는 딜런 토머스의 의 다음 구절을 한번 들여다볼까? “Though Lovers be lost love shall not.” 어디에선가에서 사랑이 영원하다는데, 언젠가 흙으로 돌아갈 필멸의 연인들이 어디 있는지 뭐가 그렇게 중요할까.

프로그래머 서동진,오키 히로유키 감독을 만나다

나는 나의 관객이 새로운 감각을 느끼길 바란다. 일본 퀴어영화 감독 오키 히로유키가 특별전을 계기로 한국을 찾았다. 오키 히로유키를 초청한 이번 특별전의 프로그래머 서동진씨가 대담자로 나섰다. 아직까지 한국에는 정식으로 소개된 바가 없지만, 오키 히로유키는 일본 퀴어영화 진영의 중심에 서 있는 감독이다. 1990년 이미지 포럼 영화제에서 <수영금지>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으며 이름을 알린 오키 히로유키는 야마가타국제영화제, 로테르담국제영화제, 베를린국제영화제 등 일본을 대표하는 실험영화 감독으로서 많은 영화제에 초청된 바 있다. 대표작으로는 <천국의 여섯개의 상자> <네가 좋아, 네가 너무 좋아> 등이 있다. 오키 히로유키와 서동진씨는 공간, 몸, 기억을 통과하며 그의 영화세계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일본 퀴어영화의 자유로운 실험가 오키 히로유키를 소개한다. # 공간 서동진(이하 서) |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싶은데, 삶은 이야기인가? 감각인가? 말하자면 당신은 건축학을 전공했다. 나는 당신의 영화를 보면서 이미지를 건축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당신의 영화에서 늘 느끼는 것은 공간의 문제이다. 그런데 당신의 영화에서 상정하는 공간은 물리적이고 서구적인 공간이 아닌 전혀 다른 공간인 것 같다. 당신에게 공간이란 무엇인지 굉장히 궁금하다. 오키 히로유키(이하 오키) | 일단 공간은 사람이 사는 장소다. 우주도 공간이다. 그것이 전제가 된다. 공간 없이는 사람이 살 수 없다. 공간 없이는 호흡도 할 수 없다. 반드시 공간은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서 | 그럼 당신이 건축학에서 배운 공간과 인간의 체험이 깃들어 있는 공간은 어떤 차이인가. 오키 | 예를 들면 건축을 디자인하는 등의 문제는 나의 관심이 아니다. 건축의 공간이란 바로 라이프이다. 지금 우리가 차를 마시고 있는 이곳도 디자이너와 목수가 만든 공간이지만, 그 사람이 만든 공간에 우리가 있다는 건 의미가 다른 것이다. 여기에 카메라를 들이댄다면 건축가가 만든 공간과 다른 공간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라는 수단을 통해 그 체험적인 새로운 공간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서 | 내가 알고 있기에 공간은 행위와 사건의 배경이다. 그런데 당신의 영화에서는 그 공간이 모두와 결합되어 있는 장소라는 생각이 든다. 이 공간에 대한 체험이 오키 감독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오키 | 한자로 공간은 사이 간자를 쓴다. 바로 그 사이에 사람이 있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사이는 언제나 존재한다. 카메라가 있고 대상이 있으면 그 사이에는 거리가 있는데, 그 사이에는 거리뿐만 아니라 사이의 공간이 있는 것이다. 그 공간을 보여주기 위해 영화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이건 회화로는 보여주기 힘든 점이다. 서 | 내가 보아왔던 점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카메라와 피사체 사이에는 단순하게 거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이 있다고 생각한다. 풍부한 감각으로 이루어진 장소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장소에 대한 감각성이 당신 영화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오키 | 반복되는 부분인데, 공간이란 카메라 대 사람이 아니다. 카메라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그 사이는 관계도 아니고 거리도 아니다. 컷과 컷 사이에 있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는 그 사이를 은폐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 점을 은폐하지 않고, 보여주는 것이 바로 나의 목적이다. 현대사회는 그 자체가 영화적이다. 새로운 세계관을 보여주는 것이 나의 작업이다. 서 | 카메라와 대상 사이의 거리도 있고, 컷과 컷 사이의 거리도 있다. 우리는 카메라와 대상 사이를 공간이라 부르고, 컷과 컷 사이를 시간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이 둘을 같은 의미로 생각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겠는가. 오키 | 공간이 있으면 언제나 시간도 존재하는 법이다. 그걸 나누어서 생각할 수는 없다. 공간이 이야기를 전달하는 도구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몸이기도 하고, 목소리이기도 하다. 단순히 물리적인 의미가 아니라 인간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살아 있음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 몸 서 | 우리가 알고 있는 카메라는 눈, 즉 원근법으로서의 눈이다. 하지만 당신의 카메라는 항상 몸이다. 멀고 가까움을 재는 도구가 아닌 공간을 체험하게 하는 독특한 기계이다. 당신에게 있어서 카메라가 항상 몸이라고 생각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오키 | 카메라는 손이기도 하고, 물리적인 장치이기도 하다. 이번에 출품한 에 그런 경향이 있다. 카메라를 통해 본다는 건 종교이기도 하고, 페티시즘이기도 한 것이다. 설명하기는 좀 곤란한데.. 그러니까 카메라 자체는 제국주의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걸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떻게 다루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바로 이 공간에 카메라를 대면 공간은 변해버리는 것이다. 카메라는 그 변형을 담아내는 것이다. 서 | 당신의 영화에서 많은 소년들이 고정된 채 비쳐진다. 그런데 그것은 초상이 아니라 마치 카메라로 만지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미 당신의 카메라와 관계를 맺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섹슈얼리티를 표현하는 많은 영화들은 우리가 성행위라고 표현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런데 당신은 성행위를 통해서 드러날 수 없는 몸의 성질을 보여주려 하는 것 같다. 나는 이 점이 오키의 영화가 갖고 있는 섹슈얼리티에 관한 아주 중요한 영화적 표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오키 | 여기 그림이 있다고 치자. 그 그림에 성행위 장면이 그려져 있다고 하자. 성행위 자체가 그려져 있다고 해도 본질적인 섹슈얼리티의 의미와는 다르다. 이야기 전달상의 섹슈얼리티도 있겠지만, 나는 카메라와 대상이 성행위를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페티시즘이라는 말을 아까 했는데, 이건 바로 현대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카메라를 보며 흥분을 느끼는 걸 변태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극단적인 표현이 영화가 갖고 있는 복잡성, 또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현대사회에는 텔레비전이 있다. 시청자들이 보고 있는 거지만 사실 그건 텔레비전에 의해서 우리가 강간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개인적인 새로운 모럴을 창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부분에 대해서 우리는 위기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성희롱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개념을 창조해야 하는 것이다. 서 | 많은 서구의 게이영화들은 동성애를 정상화시키려 하고 있다. 정상적인 욕망으로 인정받으려 하는 것이 서구영화의 경향이다. 그런데 당신은 영화에서 새로운 윤리를 찾으려 하고 있다. 서구의 급진적인 지식인, 푸코 같은 사람들은 마이너리티 사회에서 윤리성을 찾으려고 했다. 당신은 관습적인 퀴어영화와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퀴어영화란 무엇인가. 오키 | 퀴어가 반드시 섹슈얼리티의 문제만을 다룬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서양사회에 비교하면 일본도 마이너리티이다. 퀴어영화는 유니크한 점을 찾아야 한다. 그걸 어떻게 사회적으로 위치지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더불어 개인적인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 퀴어영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서 | 게이라는 용어는 일반적인 정체성을 가정하고 쓰는 것이다. 퀴어라는 용어는 그 일반성과의 차이를 가정하는 것이다. 차이를 강조하는 퀴어라는 의미를 당신은 지지하고 있다. 그런데 당신은 일본적인 것을 찾고 있다고도 말한다. 일본적인 것이란 언제나 국민적인 같음을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건 상당히 엉뚱하게 들린다. 그렇다면 내셔널리티의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오키 | 그건 굉장히 중요한 문제인데. 나의 영화는 서구의 퀴어영화와 분명 다른 점이 있다. 내 영화는 게이적인 요소가 있다. 나 스스로 게이이다. 또 일본인이기도 하다. 게이인가 일본인인가 묻는 것은 같은 질문일 수도 있다. 나는 지금 애리조나, 티베트, 오카야마에서 영화를 제작하고 있다. 그 영화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내셔널리티의 의미 자체가 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에 와서도 그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 같은 경우, 고치현에 살고 있는데, 국가가 아닌 하나의 지역적 ‘풍토’가 있다고 생각한다. 국가가 아닌 현, 그 안에는 분명한 코뮤니티가 있다고 생각한다. 서 | 풍토로서의 사회라는 표현이 상당히 흥미롭다. 이건 정서적으로 결합된 사회를 가리킨다. 게이 코뮤니티는 특정한 장소에 있는 공동체가 아니라 정서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공동체이다. 당신이 생각하는 풍토로서의 사회와 게이 아이덴티티로서의 사회는 어떤 점에서 통하고 있는가. 오키 | 섹스라는 표현이 한국에도 있는가? 성교라는 표현이 있는데 일본에서는 잘 안 쓰는 표현이다. 왜 물어봤냐하면 성교라는 한자어는 아시아적인 말이다. 하지만 섹스는 일반화된 외래어이다. 게이라는 말도 외래어이다. 이 말이 일본에 들어온 지는 10년밖에 안 된다. 서구에서는 운동을 하기도 하는데 이건 정상적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인 정보만을 담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만나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생기는 본질성이 바로 풍토로서의 사회다. # 기억 서 | 나는 오키 감독의 영화를 볼 때마다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가 생각난다. 그 사람은 이야기를 소설로 쓰는 것이 아니라 감각을 소설로 썼다. 당신의 영화를 볼 때마다 정보와 이야기로서의 이미지가 아니라 감각으로서의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으로써 당신의 영화는 관객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힘을 행사하고 있다. 감각을 다루는 당신의 영화가 얼마나 많은 관객을 촉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오키 | 감각은 모든 것에 통하게 마련이다. 굉장히 감동적인 영화를 보고 나서 극장을 나서면 세상이 빛나 보이고, 활기가 느껴진다. 그러나 나는 내 영화에서 그런 것을 다루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세상이 빛나게 보인다는 건 극장의 어둠 속에서 본 영화가 이미 완결됐다는 의미이다. 내가 영화를 통해 관객에게 바라는 것은 자극을 주어서 지금까지 활동하지 않았던 세포들을 활동하게 하거나, 새로운 감각을 감지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나서도 그 감각을 유지하는 것이 관객에게 바라는 것이다. 내 영화를 보고 이해가 안 간다는 말을 하는데, 그건 오히려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그 의문을 계속 유지해서 어느 날 갑자기 깨닫게 되는 것. 그게 내가 관객에게 바라는 바다. 서 | 내가 개인적으로 영화에서 가장 사랑하는 표현은 플래시백이다. 시간을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영화는 시간의 되돌림을 물질적으로 직접 보여주고 있다. 오키 감독 역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건 개인적인 기억이 아니라 마르셀 푸르스트의 소설에 나오는 기억에 가깝다. 오키: 기억이라는 건 하나의 전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유전자의 기억은 평생 생각 안 날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얘기한다. 볼 때는 몰랐는데 갑자기 알게 됐다고. 그건 하나의 유전자의 기억이다. 영화는 하나의 기억이고, 기록이다. 서 | 나는 당신 영화의 기억이 당신 개인의 기억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오히려 내가 촉발되는 방식은 나의 기억이다. 내가 잊고 있었던 구체적인 감각들이 되살아나는 방식이다. 당신이 말하고 있는 기억을 당신의 영화가 갖고 있는 힘이라고 고쳐 읽어도 무방하겠는가? 오키 |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나 스스로는 기억을 찍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현실을 찍는 거다. 그래서 사람들은 스스로의 기억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정리 정한석 기자 mapping@hani.co.kr·사진 이혜정 socapi@hani.co.kr

칸에서 환대받는 이창동 장관

한국의 장편 영화가 경쟁부문에 단 1편도 초청받지 못한 올해 칸영화제에서, 빡빡한 인터뷰와 면담 일정을 보내고 자신의 작품까지 특별상영한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은 단연 주목을 끌었다. 16일과 17일 비평가주간이 열린 미라마 극장에서 2차례 특별상영된 <오아시스>는 현지에서 “마음을 움직이는 영화”라는 평가를 받으며 환호가 끊이지 않았다. 특히 이런 환대는 이미 베니스 영화제와 파리의 시네마테크 특별상영 등을 거친 탓에 객석의 많은 사람들이 평론가나 기자보다는 일반인이었기에 특별했다. <오아시스>는 국제비평가협회가 주최하는 이 섹션에 ‘올해의 영화’로 초청됐다. 작품에 대한 해외의 관심도 뜨겁다. 이 영화를 수입해 일본과 프랑스에서 가을쯤 개봉할 예정인 ‘시네콰논’과 ‘레 그랑 필름 클라식’은 칸 현지에서 이 장관과 작품에 관한 인터뷰를 했다. 또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그리스 등에도 영화판매가 확정됐다. 이 장관은 17일에도 ‘복원 필름섹션’에 초청된 신상옥 감독의 <상록수> 상영에 참석해 신 감독을 직접 소개하고, 질 자콥 칸 영화제 집행위원장 및 프랑스 CNC위원장과 면담한 뒤 ‘한국영화의 밤’ 행사에 참석하는 등 강행군을 벌였다. 이 자리에서 질 자콥 위원장에게 “내년에는 한국 장편 2편 정도는 와야 하는 것 아니냐”고 ‘영화외교’를 벌이기도 했다고. 행사장에서 만난 이 장관은 세계무역기구(WTO)의 서비스부문 양허안 제출을 반대하는, ‘문화다양성을 위한 세계문화부장관 회의’에 곧 한국도 참가하겠다고 말했다. 할리우드 영화 시장 독점 문제에 민감한 언론들도, 스크린쿼터에 관한 이 장관의 인터뷰를 잇달아 내보내고 있다. 주간지 <텔레라마>의 기사에선 이 장관을 ‘무슈 쿼터’라 이름붙였으며, <할리우드 리포터>의 데일리 뉴스도 이 장관의 인터뷰를 실으며 “앞으로도 스크린쿼터엔 변함없을 것”이라는 그의 말을 전했다. “지난 5년간 한국에서 한국영화 관객이 두배로 늘면서 미국영화의 관객도 두배로 는 셈이다. 모두가 행복한 거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이 정책을 바꿀 필요가 있겠는가” 칸/김영희 기자, 사진 정진환 <씨네21> 기자

바르도

성경에는 재미있는 얘기가 나온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어느 날 야훼로부터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는다. 100살이 넘은 노파의 몸에서 아이가 태어나게 할 때는 언제이고, 이제 와서 다시 거두어가는 것은 또 무슨 변덕이란 말인가? 하지만 아브라함은 신의 명령에 순종한다. 제 손을 잡고 산길을 걸어 올라가는 아비에게 아들이 묻는다. “아버지, 근데 제물로 바칠 양은 어디 있지요?” 아들의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묵묵히 산에 오른 아브라함은 아들을 제단에 올려놓고 칼을 높이 치켜든다. 순간 하늘에서 신의 음성이 들려와 그를 만류한다. 정말로 산 사람을 제물로 받으려 한 게 아니라, 그저 그의 믿음을 시험하려 했다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이 일화는 사람을 바치는 인신공희가 짐승을 바치는 희생양 제의로 바뀌는 시대의 상징인지도 모른다. 아브라함을 제지한 야훼는 그에게 주위를 둘러보라고 말한다. 그때 아브라함의 눈에 저쪽에 있는 가시덤불에 양이 한 마리 걸려 버둥거리는 것이 들어왔다. 아브라함은 신의 명령에 따라 아들 대신 그 양을 제단에 바치게 된다. 물론 이 일화에서는 이삭이 아비에게 양이 어디 있냐고 묻지만, 그것은 인간 대신 짐승을 바치는 것이 널리 관행이 된 이후에 그 이야기에 첨가된 요소일 게다. 인류 문화의 특정단계에서 인간은 신에게 사람을 바치는 대신 짐승을 바치게 되었고, 그 희생양 제의 자체는 나름대로는 ‘문명화’의 결과인 셈이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신의 제단에 산 짐승을 바치는 관습은 사라졌다. 세계의 대부분은 이미 서구적 문명화의 세례를 받아, 어떤 종교집단에서 산 짐승을 죽이는 의식을 한다면,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될 것이다. 하지만 문명화되었다는 서구의 일각에도 부분적으로나마 희생양 제의는 여전히 남아 있다. 몇년 전에 독일의 텔레비전에서 게르만 민속종교의 맥을 이으려는 사람들에 관한 프로그램을 보았다. 칼로 산 닭의 모가지를 치니, 놀랍게도 목이 달아난 닭이 여전히 두발로 퍼득거리며 걸어다닌다. 대부분 우익단체의 회원인 이들은 독일 정신의 근원을 찾아 게르만족의 민족전통을 되살리려 그런 종교의식을 행한다고 했다. 얼마 전 텔레비전 뉴스에서 일군의 이라크인들이 칼로 산양(羊)의 멱을 따는 장면을 보았다. 하얀 털을 적시며 흘러나오는 검붉은 피는 솔직히 끔찍하게 여겨졌다. 이른바 ‘문명화’되었다고 자부하는 사회의 눈에는 이런 잔혹한 관행이 야만적으로 비칠 수 있다. ‘문명화’의 본질 중 하나는 공공장소에서 잔혹함의 현시를 금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마나 알량한 일인가? 그 문명화된 사회라고 양들로 하여금 수명대로 다 살게 내버려두지는 않는다. 내가 유학 시절 학생식당에서 받아먹던 사료(?)에는 분명히 양고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걸로 보아 그들 역시 양을 도축함에 틀림없다. 다만 그 도살장면을 공개하지 않는 것뿐이리라. 그들은 이것을 ‘문명화’라 부른다. 우리 개고기 문화에 각별한 관심을 가진 불여우(佛女優) 바르도 여사가 우연히 이것을 본 모양이다. 이 사실을 들어 그는 이슬람교도들이 무슨 야만인이나 되는 양 몰아붙였다고 한다. 물론 개를 도축하거나, 양을 공개적으로 살해하는 것의 정당성을 논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특히 동물애호가들의 경우에는 이런 관습에 윤리적 문제제기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여, 그 사랑을 생명이 가진 모든 것에 확장하려다 보니 그런 문제제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브리지트 바르도 여사는? 과연 그가 이런 사람들 축에 속하는가? 그럴 리 없다. 이제 자랑할 거라고는 피부색밖에 안 남은 이 정신나간 여인의 각별한 동물사랑은 지독한 인간혐오를 위한 변명일 뿐이다. 언젠가 터키와 이라크에서 핍박을 받던 어느 쿠르드족이 서방 기자들에게 울부짖던 말이 생각난다. “당신들이 개에게 보여주는 관심의 10분의 1만이라도 우리에게 보여달라.” 바르도 여사를 보면, 산정의 별장에서 사랑하는 개와 다정하게 노닐던 히틀러가 생각난다. 그 지극한 개 사랑의 10분의 1만이라도 유대인에게 나눠줬다면 아우슈비츠의 비극은 없었을 게다. 어쨌든 툭하면 인종주의 발언을 하여 사회를 시끄럽게 하는 극우파 바르도 여사께서는, 내가 정보를 드렸으니, 당신 사상의 원조인 게르만 용사들이 독일에서 행하는 그 끔찍한 닭 살해의 관행에 대해서도 독설을 퍼부어주시기 바란다. 피부색 같다고 봐주지 말고….진중권/ 문화평론가

뉴스의 폐허 위에서 피는 웃음꽃,<개그콘서트>의 <9시 언저리 뉴스>

KBS2 <개그콘서트> 매주 일요일 밤 8시50분 KBS 뉴스9 2003년 한국에서 가장 인기 좋은 뉴스는? MBC의 도, KBS의 <아침뉴스>도, SBS의 <나이트라인>도 아니다. 줄곧 시청률 30%의 언저리를 맴도는 <개그콘서트>의 다. <…언저리 뉴스>의 웃음 코드 속에는 이 나라 뉴스 프로그램의 엄숙주의에 대한 조롱이 들어 있다. <…언저리 뉴스>의 인기는 뉴스 위기 시대의 반영이다. 정보 홍수시대의 텔레비전 뉴스는 속보성은 떨어지고, 심층분석에도 실패하고 있다. 아무리 새로운 척 떠들어도 상당수 시청자들은 이미 인터넷을 통해 뉴스의 실체에 대해 알고 있다. 게다가 대한민국 뉴스들은 수박 겉핥기식 현상전달, 찬반양론의 기계적인 나열, 교훈 섞인 마무리로 구성되는 전통적인 구조를 고수해 시청자들을 질리게 만든다. 게다가 시청자들은 첫마디만 들어도 무슨 내용인가에 어떤 흐름으로 전개될지를 대충 짐작하는 ‘빠꼼이’들이다. 뉴스 생산자들에게는 불행하게도 마지막 한마디까지 긴장하고 들어야 하는 ‘충격적인’ 뉴스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언저리 뉴스>의 인기비결은 도통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뉴스 프로그램의 무미건조함이다. 근엄한 ‘아버지의 얼굴’을 한 대한민국의 뉴스 프로그램들은 한없이 심각한 척하고 끊임없이 나무라고 싶어한다. 사소한 문제도 부풀리는 침소봉대, 닳고 닳은 소재도 새롭게 우려먹는 뻔뻔스러움, 잔뜩 힘을 준 지루한 어투는 뉴스 시청자들의 인내를 실험한다. 뉴스가 끝나면 우리는 시대를 개탄하고, “내 탓이오”를 되뇌이며 은근히 주눅든다. 이에 비하면 개그 아나운서 김지선과 장웅이 실없는 말장난 끝에 겸연쩍어하며 고개를 조아리는 언저리 뉴스는 최소한 폭력적이지는 않다. 게다가 실없는 미소까지 머금게 한다. 어차피 ‘알맹이 없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뉴스가 근엄할수록 <…언저리 뉴스>의 반전은 유쾌해진다. 뜯어볼수록 <…언저리 뉴스>의 구조는 실제 뉴스와 닮아 있다. 심각한 첫머리와 허탈한 마무리. 수미상관의 구조는 ‘대한 늬우스’ 이래로 이 나라 뉴스가 초지일관 견지해온 유구한 전통다. <…언저리 뉴스>는 단지 이 전통적인 코드를 살짝 뒤어 허탈한 설교 대신 애교 섞인 반전으로 마무리한다. 이미 뉴스의 ‘허무 코드’를 입력하고 있는 시청자들은 김지선, 장웅의 맥빠진 한마디에 알아서 웃음보가 터져나온다. 실없이 스며나오는 웃음 사이로 자못 심각한 뉴스 진행자의 얼굴이 겹쳐진다. “여러분 이럴 수 있습니까. 이젠 정말 철저히 알고 드셔야겠습니다. 서울 시내 곳곳에 설치돼 있는 자판기 커피가… 맛있습니다.” 자판기 커피에 대장균이 우글거린다는 뻔한 고발은 자판기가 생긴 이래로 반복돼 왔다. 숱한 카메라 고발도, 밀착 취재도 세상을 살균하지 못했다. 우리는 여전히 대장균이 우글거리는 자판기 커피를 즐기고 있다. 차라리 ‘맛있다’는 경험이 훨씬 진실에 가깝다. “다음은 가슴 훈훈한 소식을 들려드리겠습니다. 떡볶이 장사를 해서 30억을 모은 할머니가 못 배운 한을 풀기 위해 서울대 총장실을 찾아가… 자랑했답니다. 30억인데∼ 30억인데∼.” 뻔한 고발에 이어지는 지겨운 미담. 아름답지 않은 세상에서 할머니의 “30억인데”는 솔직하다, 통쾌하다. 가슴이 후련하다 못해 훈훈해지기까지 한다. 어차피 뉴스의 ‘진심’이 의심 받는 시대이므로. <…언저리 뉴스>는 각종 패러디를 양산하며 진실은커녕 사실마저 왜곡하는 뉴스에 대한 비판 코드로 발전하기도 한다. 이라크 침공에 반대하는 반전평화운동이 활발하던 무렵에 유행했던 가 그 사례다. “드디어 이라크 군부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미국과 영국 동맹군의 용맹과 화력에 무력화된 이라크 남부 지역의 사단장과 부하 8천여명이 집단으로… 무너진 채 흩어져 싸우고 있습니다. 용감하게. 아… 무서버라.” 게시판을 돌아다니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는 덧붙여졌다. 의도를 가진 뉴스들이 많아질수록 더 많은 <…언저리 뉴스>들이 양산될 것이다. <…언저리 뉴스>는 뉴스의 신뢰가 무너진 자리에서 피는 웃음꽃이다. 뉴스여, 제발 목에 힘빼고, 어깨에 뽕빼라. 고리타분한 설교를 집어치우지 않는 한 그대들의 시청률은 <…언저리 뉴스>의 언저리에도 미치지 못할 테니. 참, 제목만 훑어봐도 8할은 짐작 가는 신문의 위기는? 이미 <딴지일보>가 ‘똥꼬 깊수키’ 가르쳐주지 않았는가.신윤동욱/ <한겨레> 왜냐면 담당 기자 syu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