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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폭 마누라> 뜻밖 흥행몰이 가벼움이 아쉽다

추석 연휴 동안 <조폭 마누라>가 예상 밖으로 관객을 끌면서 이 기간 흥행1위를 기록했다. <조폭 마누라>는 지난달 28일 개봉한 뒤 지난 3일까지 6일동안 서울관객 39만2천명, 전국관객 143만8천명을 동원했다. 4일간 연휴가 계속됐다는 특별한 변수가 있지만 개봉 6일만에 전국관객 140만명을 동원한 건 한국 영화 사상 기록이다. 이 영화와 함께 개봉한 <봄날은 간다>는 완성도에서 <조폭 마누라>보다 훨씬 높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같은 기간동안 서울관객 20만명, 전국관객 42만명으로 <조폭 마누라>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영화계는 <조폭 마누라>의 흥행 성공을 두고 뜻밖의 한국영화가 선전한 데 대해 반기면서도, 관객들이 너무 가벼운 영화만 선호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보이고 있다. 영화평론가 심영섭씨는 “<조폭 마누라>는 `웃기면 다'라는 막가파 코미디고 장르적으로도 조폭영화의 아류작”이라며 “관객의 구미에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영화들이 깊은 정서의 결을 따라가는 섬세한 영화보다 크게 인기를 끄는 가벼움이 아쉽다”고 말했다. 명필름 심보경 이사는 “텔레비전 쇼프로그램의 가볍고 썰렁한 개그에 익숙해진 10대 후반~20대 초반 세대들은 가벼움이나 유치함에 대한 거부감이 없이 그걸 오락으로 잘 즐기는 것 같다”면서 “개인적으로 어떻게 영화를 해야 할지 착잡한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심 이사는 이어 “이전 같으면 이런 세대는 한국영화를 보지 않았는데 한국영화를 보러 오니까 긍정적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우리 영화가 댄스음악 일변도의 가요계처럼 보여주는 엔터테인먼트 위주로 변해 다양성이 깨지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영화평론가 김영진씨는 “영화가 텔레비전을 포함한 대중문화의 위세를 역이용하려는, 다른 대중문화의 코드를 받아서 상업적으로 업그레이시키는 움직임이 최근에 두드러지는 것 같다”면서 “이런 영화가 대세가 될 때 우리 사회에서 영화라는 매체의 위상이 바뀌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조폭 마누라>의 박미정 프러듀서는 “작품이 좋아서 터졌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작품 내부적으로는 정말 재밌게, 코미디이지만 진지하게 만들었다고 자부한다”면서 “그냥 웃고 떠드는 영화라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여성이 새롭게 사회에 뛰어드는 의미를 담고자 했고 실제로 여성관객이 아주 많다”고 말했다. 박 프러듀서는 “이런 복합장르를 만드는 건 거의 막바지가 아닌가 싶다, <친구>나 <신라의 달밤>과 달리 여성 캐릭터를 내세워 마지막 차를 탄 것 같다”면서 “당분간 조폭 영화를 자제하는 바람이 일지 않을까, 우리 제작사에도 지금 그런 기획안이 들어 오고 있지만 별로 고려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임범 기자 isman@hani.co.kr

저예산 작가주의 SF가 사는 법

<나비>의 로케이션 <나비>는 SF적인 세트와 특수효과에 돈을 쏟아부을 경제적 능력이 없는 저예산 작가주의 SF의 곤경과 지혜를 함께 보여준다. 파리 시내를 찍어놓고 정체불명의 미래도시 알파빌이라고 능청떠는 장 뤽 고다르의 <알파빌>이나 도쿄의 거미줄 같은 고가도로를 미래도시의 디자인으로 고스란히 갖다쓴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처럼 서울과 부산의 거리와 건물에 어떤 조작도 가하지 않고 미래도시의 이미지를 빚어내는 것이다. 제작비가 적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문승욱 감독은 “한국의 대도시는 더이상 국적성 시대성이 느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금방 잊혀지고 파괴하기 위해 건설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 자체에 디스토피아적인 이미지가 스며 있고, 난 그걸 그대로 담고 싶었다”고 말했다. <나비>에서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무대는 부산. 로케이션 촬영에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 부산영상위원회의 덕이 크다. 송도의 바닷가장면은 물론이고, 나비를 찾아 떠나는 여정에 등장하는 허름한 터널, 공사장은 모두 부산에서 촬영됐다. 로케이션이 쉽지 않은 서울은 유키의 회상비디오 등 일부 장면에서만 등장한다. 문제는 처음과 끝부분에 등장하는 공항이었다. 김해공항이나 김포공항은 너무 복잡한데다 미래적인 느낌이 약했다. 이때 일본의 고베영상위원회가 구세주로 떠올랐다. 대지진 이후로 파괴가 심했던 고베시는 도시를 새로 단장하면서 간사이공항을 새로 지었는데 고베영상위원회의 지원으로 거의 비용을 들이지 않고 촬영을 마쳤다. 여기다 덤으로 세계에서 가장 길다는 고베 펄브리지와 유명한 미니멀리즘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지은 바람의 교회도 활용했다. ▶ <개봉작> 나비 ▶ 저예산 작가주의 SF가 사는 법

고양이를 부탁해

■ Story 착하고 엉뚱한 몽상가 태희(배두나), 커리어우먼의 폼나는 삶을 탐내는 혜주(이요원), 무기력한 조부모와 가난을 짊어진 지영(옥지영), 둘만의 아기자기한 우주에서 생활하는 쾌활한 중국계 쌍둥이 자매 비류(이은실)와 온조(이은주)는 인천의 상고를 졸업한 다섯 친구다. 서울로 이사한 혜주는 고부가가치 인생을 살겠다고 다짐하지만 고졸 여사원에게 부과된 소모적 일과에 지쳐가고, 무너져가는 집에서 텍스타일 디자이너의 꿈을 삭이는 지영은 길 잃은 고양이 티티에게서 위안을 얻는다. 가족으로부터 점점 멀리 겉도는 태희는 소원해진 친구들을 그러모으려 애쓴다. 다섯 소녀가 오랜만의 밤샘 모임을 가진 밤 지영의 집은 무너지고 할아버지, 할머니의 죽음에 대한 경찰의 조사에 입을 열지 않던 지영은 분류감시원에 수용된다. 지영을 면회하고 돌아온 태희는 지영이 감시원에서 나오는 새벽 작은 트렁크에 짐을 꾸려 길을 떠나고, 쌍둥이에게 고양이를 맡긴다. ■ Review <고양이를 부탁해>의 삽화 한 페이지는, 월미도의 바람 속을 걷는 다섯 여자아이들의 이미지로 채워졌다. 비린내 묻은 바다 바람은 어설픈 외투깃을 파고들고 나풀대는 앞머리는 눈을 찌르고, 예쁜 모자는 어디론가 자꾸 날아가려고 한다. 걸음을 떼기 위해 그녀들은 우선 스스로의 조그만 몸부터 부여잡아야 한다. 어느 순간에는 친구의 얄팍한 등이 바람막이가 되기도 한다. 스무살, 그해의 겨울. <고양이를 부탁해>는 인천내기 소녀들의 그 바람 많은 계절을 쓰다듬듯 바라본다. 세상에는 인물에 대해 별반 설명하지 않고 쉽사리 요약할 수 있는 영화도 많지만, <고양이를 부탁해>는 다섯 주인공을 묘사하지 않고서는 한줄도 소개하기 힘든 영화다. 태희, 혜주, 지영, 비류, 온조는 영화가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면 아마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을 평범한 여상 졸업생들.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을 관객에게 소개하는 도입부터 <고양이를 부탁해>의 인물과 그들 각각이 속한 생활 공간은 꼼꼼히 구체화되어 있다. <고양이를 부탁해>의 소녀들, 그리고 그들이 사는 방과 골목은 영화 출연을 위해 갓 칠해진 페인트 냄새를 풍기지 않는다. 마치 영화가 찾아오기 20년 전부터 숨쉬어왔다는 듯 <고양이를 부탁해>의 인물과 공간은 이미 모서리가 닳아 있고 때가 묻어 있다. 세계 전도가 유리창에 붙어 있는 증권회사의 말단사원 혜주. 세계는 넓지만 그녀는 아주 작다. 퇴근길 전철의 돼지갈비 냄새가 역겨워 서울 입성을 꿈꾸는 혜주는 근면함과 싹싹한 미소가 언젠가 멋진 삶을 데려다주리라 믿으며 친구들에게 얌체노릇도 하지만, 눈물이 차오르는 오후면 복사기에 걸터앉아 친구들의 휴대폰 번호를 더듬는다. 학창 시절 혜주와 단짝이던 지영은 정재은 감독의 단편 <도형일기>에서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도형으로 일기를 쓰던 꼬마 소녀를 많이 닮은 아이다. 다니던 공장이 문닫아 생계가 위태로운 지영은 저녁이면 좁고 눅눅한 방으로 돌아와 스탠드를 켜고 백지 위에 끝도 없는 문양을 그린다. 손수 만든 액세서리를 팔며 둘만의 완전한 가족을 꾸려가는 쌍둥이 비류와 온조는 제일 안정된 스무살을 보낸다. 알록달록한 주렴이 드리워진 둘의 집은 아이들에게 아늑한 동굴이 된다. 중산층 가정의 양념딸 태희는 친구들의 수호천사. 뇌성마비 소년 시인의 시를 타이프 치고 뱃사람을 꿈꾸며 친구들 가운데 가장 오랜 시간을 들여 어디로 갈까를 생각한 그녀는 결국 ‘장화신은 고양이’가 되어 가장 멀리 떠난다. 앙상블 드라마 <고양이를 부탁해>는 고양이 한 마리가 소녀들의 손을 옮겨가며 단락이 바뀌는 릴레이식 구성이 되리라는 우리의 범용한 예상을 뛰어넘는다. 정재은 감독은 신인이라 믿기 힘든 자신감과 고양이처럼 유연한 손길로 다섯명의 인물을 모으고 다시 흩어놓으며 유려한 사방 무늬를 그려나간다. 다섯 소녀의 동선이 때없이 엇갈리고 만나는 동대문 의류상가와 월미도장면의 매끄러움은 이러한 미덕의 축소판. 이 과정에서 아이들의 휴대폰은 커다랗게 CG 처리된 문자 메시지, 화면 나누기 기법의 도움을 얻어 전화, 편지는 물론 BGM의 역할까지 도맡는다. 뿐만 아니라 <고양이를 부탁해>는 다섯 아이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장면에서 유난히 활짝 핀다. 소음 속에 속마음이 오가는 록카페 생일파티, 내려지는 셔터를 향한 지하도의 질주, 마녀처럼 둘러앉은 옥상의 회합은, 심리적 적막함이 이면을 흐르는 이 영화에서 에너지의 정점을 이룬다. <고양이를 부탁해>는 처음부터 미세한 흔들림을 주목해야 할 숙명을 타고난 영화다. 대개 스무살 무렵의 여자아이들에게 거창한 사건은 잘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재은 감독의 소녀들은 ‘하드보일드’라는 수식어가 떠오를 만큼, 소리내어 울거나 불평하기를 즐기지 않는다. 삽입된 노래들처럼 <고양이를 부탁해>는 테크노의 냉정한 스타카토 리듬에 애수를 싣는 영화다. 예컨대 영화는 지영이 휴대폰을 바꾸고 그날 밤 고양이와 함께 새 휴대폰의 음악에 귀기울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는 낯선 건물의 창가에서 멍하니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지영의 모습과 신원보증을 요구하는 면접 광경을 연달아 비춘다. 다음 장면에서 지영은 거울 앞에서 무표정하게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고 있다. 이처럼 <고양이를 부탁해>는 비탈진 드라마가 없지만,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아이들의 예민한 마음에 왈칵이는 분노와 애착, 기대와 실망이 조금씩 켜를 쌓아 무늬를 짓는 영화다. 그 무늬를 새기는 <고양이를 부탁해>의 화면은 움직임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도 사려깊은 화가의 구도처럼 치밀한 짜임새를 자랑한다. 깊숙한 화면의 원경에서는 피로한 얼굴의 군중이 어디론가 바삐 밀려가고 프레임 구석에는 쪽배의 파란 깃발, 컴퓨터 모니터의 스티커 사진, 책상 밑에 감춰진 혜주의 고단한 맨발 같은 세부들이 사금파리처럼 반짝거린다. 그런가 하면 방랑하는 거지 여인, 흰 위생모로 얼굴이 보이지 않는 식당 아주머니들, 전자레인지 속에 돌아가는 한약 그릇을 보며 망연자실한 태희의 엄마, 삭은 이로 김치를 베어먹느라 끙끙대는 지영의 할머니 등등 소녀들의 주변에 어른대는 쓸쓸히 늙은 여인들의 초상은 영화의 호흡을 깊게 만든다. 저마다 비밀과 스토리를 품은 듯한 <고양이를 부탁해>의 화면들은 문학적이기까지 하다. 반면 편집과정에 일어난 스토리의 함축은 조금 과한 감이 있어 혜주의 언니가 떠나가는 사연이나 지영의 집이 무너지고 경찰의 의심을 받는 과정은 궁금증을 남긴다. <고양이를 부탁해>는 <소름>에 이어 한국영화가 오랜만에 수확한 빛나는 처녀작이자, 대중매체에 의해 젊고 아름다운 이상적 육체, 소비사회의 특권적 수혜자로 그려져온 스물 무렵 여성의 기호들이 스무살의 실체와 얼마나 멀찌감치 있었나를 실감하게 만드는 뛰어난 여성 성장영화다. 태희, 혜주, 지영은 여전히 예쁜 여자애들이지만 그 아름다움은 꽃보다 나무에 가깝다. 그들은 유포된 스무살의 이미지와 스무살의 현실 사이에서 누구보다 어지럼증을 탔을 스무살 여자아이들에게 위안이 될 친구들이다. 이중적이고 호기심 많고 훌쩍 떠나기를 꿈꾸는 그녀들은 과연 온순한 강아지보다 도도한 고양이를 닮았다. 그러나 스크린이 외면해온 사람들을 불러냈다는 사실만으로 마이너리티의 영화라고 부르기엔 <고양이를 부탁해>는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은 젊은이들, 가난하고 고독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청년들의 이야기다. 그처럼 <고양이를 부탁해>는 청춘영화의 괄호 안에 묶여 있던 소녀들을 자유롭게 풀어 전위에 세울 뿐 아니라, 지금까지 잘 만들어진 남성 중심 청년영화가 그래왔듯이 성의 경계를 뛰어넘어 청춘의 현실을 끌어안는다. 정재은 감독의 연출은 시종 과묵한 큰언니처럼 덤덤하지만 그 뒤에는 벼랑 끝에 서서 아이들을 지켜주고 싶어하는 ‘호밀밭 파수꾼’의 마음이 비쳐난다. 이 섬세하고 고집스런 손을 가진 젊은 감독은 너희는 망가진 게 아니라고, 남보다 조금 힘들고 더딜 뿐이라고 떠나는 아이들과 남는 아이들을 공평히 다독인다. 태희와 지영이 공항으로 향하는 <고양이를 부탁해>의 결말은 언뜻 스토리의 출구를 찾지 못한 주말연속극의 무책임한 비상구와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는 누구도 태희와 지영이 떠났다는 이유로 그 애들에 대한 근심을 쉽사리 거둘 수 없다. 언젠가 돌아올 그녀들 앞에는 권태와 두려움을 누르고 건너야 할 어둡고 긴 복도들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을, 스무살을 지나서도 인생은 나쁜 날씨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영화 속 아이들도 감독도, 그리고 우리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김혜리 vermeer@hani.co.kr ▶ <개봉작> 고양이를 부탁해 ▶ "다섯 소녀가 속한 공간의 느낌을 살렸다"

제3회 국제판타애니페스티벌 개최

올해로 3회째를 맞는 국제판타스틱애니메이션페스티벌(이하 FANTA-ANI2001)이 오는 10월13일부터 17일까지 서울 정동A&C에서 열린다. FANTA-ANI조직위원회가 주최하고, 트루엔터테인먼트와 애니마떼끄가 주관하는 이 행사는, 지난 99년 처음 개최된 이래 매년 부산에서 열리는 애니메이션영화제. 지난해 2회까지는 부산 시민회관에서 열렸으나, 올해는 행사장의 개보수 관계로 서울 나들이를 감행해 3회를 맞게 됐다. 주최쪽에 따르면 이번 영화제는 내년 2월2일에 열릴 예정인 4회 행사를 준비하는 자리이자, 국내 공개작과 미공개작을 포함해 선정한 베스트 애니메이션 컬렉션이다. 특히 소문난 일본 장편애니메이션 화제작들과 해외걸작 단편애니메이션들을 만날 수 있다. 정식 개막은 13일이지만, 상영은 전야제인 12일 심야부터 시작된다. 개막작은 제 45회 아시아태평양영화제 최우수애니메이션상을 수상한 일본 장편애니메이션 <바람을 본 소년>. 아버지가 새로 개발한 에너지를 세계 정복에 이용하려는 악당에게 부모를 잃고, 신비한 힘으로 맞서 싸우는 소년 아몬의 모험을 담은 작품이다. 장편 중 감독 특유의 비장미와 유혈낭자한 액션으로 뱀파이어 사냥꾼의 이야기를 그려낸 가와지리 요시아키의 <뱀파이어 헌터 D>, 아이돌 그룹을 탈퇴한 뒤 여배우의 꿈을 키워가는 미마와 그녀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죽음들을 실사에 가까운 정교함으로 쫓는 곤 사토시의 <퍼펙트 블루> 등은 이미 알려진 수작들. 특히 지난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인기리에 상영됐던 린 타로의 SF대작 <메트로 폴리스>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소녀의 모험을 그린 동화 <아리테 공주>, 그리고 스페셜 프로그램으로 <공각기동대>와 <인랑> 등을 만든 프로덕션 IG의 신작 등 최신 화제작 7편이 상영된다. 그 밖에 <아빠와 딸> <다운 투 더 본> <빅 나이트> 등 올해 안시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수상 단편 및 TV물을 모은 ‘월드베스트 파노라마’와 역시 해외 페스티벌에서 주목받은 작품들을 소개하는 ‘세계걸작코믹단편선’ 등 십수편의 단편들이 상영된다(문의: 02-6357-2000·www.fanta-ani.com, 상영시간표는 142쪽 게시판 참조). 황혜림

금발이 너무해

■ Story 로스앤젤리스 캘리포니아대학에 재학중인 엘르 우즈(리즈 위더스푼)는 멋진 금발의 소유자로 학내 여학생 클럽 ‘델타 누’의 회장직을 맡고 있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뿐, 자신의 남자친구인 워너(매튜 데이비스)와 결혼하는 것이다. 어느날 밤, 그녀는 남자친구의 프로포즈를 기대하며 약속장소로 나가지만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예기치 못한 절교선언이다.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해서 법률가로 성공한 뒤 30대에 상원의원이 되겠다는 포부를 지닌 워너는 의원의 아내는 “마릴린 몬로가 아니라 재클린”이어야 한다는 이유로 그녀를 거부한 것. 이후 전전긍긍하던 엘르는 워너의 마음을 다시 돌려놓는 방법은 하버드에 입학해서 그에게 자신의 진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 Review 빵빵한 가슴에 빛나는 금발을 가진 여성들은 으레 머리는 텅 비어 있기 십상이라고? 혹은 애인으로 삼을 만한 여자가 따로 있고 결혼해서 함께 살 만한 여자가 따로 있는 법이라고? <금발이 너무해>의 주인공 엘르 우즈의 분통이 터지게 만든 것은 바로 이런 편견들이다. 엘르는 이런 편견이 사실무근임을 입증하기 위해 체질에 안 맞는 하버드 로스쿨에 진학하는 수고도 마다 않는다. 결코 그녀가 ‘무식’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금방 깨닫게 되는데 참으로 엘르는 아는 것이 많은 여성이기 때문이다. 골빈 금발이니 바가지 씌워도 되겠거니 하고 생각했던 옷가게 주인은 패션잡지 정보를 줄줄이 꿰는 그녀의 실력에 그만 나가떨어지고, 미용실 안에 있던 모든 손님들은 어떤 남자라도 넘어간다는 제스처에 대한 그녀의 시범을 열심히 따라 하느라 여념이 없다. 게다가 계모에게 살인죄를 덮어씌우려던 딸의 위증이 실패로 돌아가는 것도, 파마하고 24시간 이내에는 물을 가까이 해선 안 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엘르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라? 이건 에이미 해커링의 <클루리스> 여주인공 얘기 아냐? 셰익스피어는 누군지 알 바 아니라도 프랑코 제피렐리의 <햄릿>에서 멜 깁슨이 주인공으로 나왔다는 건 바로 알아맞히던 그 현대판 ‘엠마’. 걔도 참 이것저것 아는 건 많았었지. 또한 속물들로 가득하지만 겉보기엔 근엄한 사회 혹은 집단을 혼란에 빠지게 만드는 괴짜들에 대한 찬가는 할리우드가 즐겨 다루는 얘깃거리 가운데 하나다. <금발이 너무해>의 주인공 엘르의 캐릭터는 분명 에이미 해커링의 <클루리스>에서의 알리샤 실버스톤과 프랭크 카프라 영화의 게리 쿠퍼 내지는 제임스 스튜어트를 조합한 것으로 이해된다. 아니나 다를까 한 미국 평론가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금발이 너무해>는 “클루리스 하버드에 가다”라는 제목이 딱 어울렸을 그런 영화다. 단, 에이미 해커링 영화에서와 같은 위트를 기대하지는 말 것. 오히려 여주인공 엘르의 캐릭터와 좀더 근친관계에 있는 것은 <해피 길모어> <워터보이>의 애덤 샌들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애덤 샌들러가 연기한 해피 길모어나 워터보이에 못지않게 리즈 위더스푼의 엘르는 황당하고 무모하기 그지없는 인물이다. 덕분에 알렉산더 페인의 재기발랄한 풍자극 <일렉션>에서 뛰어난 연기를 보여주었던 그녀가 여기에서는 그저 평범한 수준에 머물고 만다. 어쨌거나 그들은 현실적으로 도저히 가능할 법하지 않은 방식으로 성공을 쟁취하고야 만다. 결국 <금발이 너무해>는 교훈 한 가지는 전해주는 셈이다. 뭐든 잘하는 것 하나만 있으면 성공할 수 있다-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는 것. 거기에 교양과 지성이 덧붙여지면 더 폼난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금발이 너무해>의 문제는 무엇보다 편견을 공박함과 동시에 조장한다는 데 있다. <금발이 너무해>에서 백인 상류계급에 편입되지 못한 인간들은 기껏해야 주인에게 버림받아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개 취급- 엘르와 같은 여신의 은총이 내리기 전엔 도저히 구원받을 가망이 없는- 을 당하기 십상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악인들은 대개 패션감각이라곤 전혀 없는, 몸치장에는 손방인 인물들이다. 아내를 학대하는 남편은 터질 듯한 뱃살에 머리는 듬성듬성한 데다가 러닝셔츠 바람이고, 아버지를 죽인 딸은 끔찍한 파마머리- 그것도 검은색 머리!- 에 시시한 캐주얼 차림이다. 위증을 하는 수영장 청소부는 거무튀튀한 피부의 게이다. 엘르 왈, 자신의 아름다움을 가꾸기 위해 애쓰는 사람은 절대 나쁜 짓을 하지 않는 법이다. 엘르로 하여금 용의자로 몰렸던 미용강사가 절대 범인이 아니라고 주장하게 만드는 것도 단지 그 때문이다. 외모에 대한 편견에 반론을 제기하는 것으로 시작한 영화가 결국은 희한한 방식으로 그 편견을 좀더 공고히 한다. 이런 사정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미국에서 개봉되어 한때 <툼레이더> 등을 누르고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참고로 <빌리지 보이스>의 제시카 윈터는 결국 “수다쟁이 백치”에 지나지 않는 여주인공의 성공담에서 대통령 부시의 정치적 여정에 대한 반영을 보았다. 그는 최근 핑크빛 드레스를 벗어던지고 라라 크로프트가 되기 위해 준비중이다. 유운성/ 영화평론가 akeldama@netian.com▶ <개봉작> 금발이 너무해 ▶ 뒤로 가는 할리우드?

<봄날은간다> 매혹적인 일상 그러나 함정이…

하얗게 녹슨 기와지붕 위로 비가 내리고, 낙숫물 듣는 아래 낡은 창틀에 까만 가슴이 걸려 있다. 이 문장은 잘해 봤자 모순어법이거나 비문이다. <봄날은 간다>는 이런 식의 모순어법 혹은 비문으로 가득 찬 영화다. 물론 이미지를 먹고사는 영화에서 모순어법과 비문은 매혹인 동시에 함정이기도 하다. 이 모순어법은 연출력의 다른 말이기도 한데, 허진호 감독의 연출력은 가히 젊은 장인에 가까울 정도다. 게다가 사랑에 지치거나 목마른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참 위로가 될 것이고, 보고 나면 눈이 퉁퉁 부을 수도 있다. 또 가슴이 쓰리고 온화해진다. 녹음 엔지니어인 상우(유지태)는 강릉 방송국 아나운서 은수(이영애)와 만나 사랑하게 된다. 대밭을 휘감는 바람 소리와 깊은 밤 절간의 풍경 소리를 녹음하고, 시냇물 흐르는 소리와 구전 민요도 녹음한다. 그들은 주로 라면만 먹고 (술에 취하기는 해도) 술 먹는 모습은 보여 주지 않는다. 사랑하지만 잠자리 모습까지는 보여 주지 않고, 한쪽이 바람이 나도 극악한 상황까지 가지는 않는다. 술에 취해 친구 택시를 타고 강릉까지 간 상우의 집은 이름만으로도 풋풋한 수색역 근처에 있고, 이혼한 은수는 푸른 바다가 보이는 강릉의 작은 아파트에 산다. 둘다 퍽 정감나는 곳에서 무척 진짜처럼 잠깐 살았다. 둘은 조용히 사랑하게 되고 아주 조금 다투다가 싱겁게 헤어졌다가는 영원히 헤어진다. 그 사이에는 상우의 치매 걸린 할머니, 오랫동안 홀아비로 살아온 아버지, 역시 혼자처럼 보이는 고모 등의 일상이 있다. 그들의 생활은 너무 리얼한 나머지 따라 살고 싶을 정도다. 둘의 사랑 또한 무척 진짜 같은, 누구라도 언젠가는 해봤음직한 행위와 대사로 가득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들은 행동과 말을 무척 아꼈고, 우리들은 수다스러웠다는 점이다. 영화 <봄날은 간다>는 그 작고 적은 움직임을 통하여 정서가 담긴 공간과 시간의 슬픈 흐름에 대한 자각을 일깨운다. 깊은 느낌! 하지만 그 느낌은 앞서 예로 든, 사건의 선택과 이야기 이음새의 작위성에 의해 전달되는 것들이었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일상성을 드러내는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은밀하고 치밀한 모순어법으로 일상을 조제한 것이다. 나는 이 영화에서 사용된 모순어법에 미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표현법을 위하여 눈앞의 것들을 지나치게 모조하여 누구에게나 소중한 노스텔지어와 투박한 일상까지 팬시화 시켰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매혹을 쫓다가 함정에 걸린 셈이다. 예술사를 돌아보면, 화려함의 막바지에는 단순함이 오고 그것이 지나치면 화려함 혹은 정밀함이 다시 찾아온다. 또 사회적 상처가 너무 크면 자잘한 작은 상처가 훌륭한 구경거리가 될 수도 있다. 물론 그 순환 속에서도 진실 혹은 절절한 감정은 오랫동안 동의받을 것이다. 하지만 <봄날은 간다>는 절절한 감정을 드러내기 위해 너무 많은 것을 희생한 것은 아닐까? 이효인/ 영화평론가, 계간 <독립영화> 편집위원

못다한 27번의 키스

■ Story 두번의 일식이 있던 어느 여름, 매력적인 소녀 시빌(니노 쿠카니제)이 방학을 맞아 시골 마을로 찾아든다. 동갑내기 소년 미키(샬바 야쉬빌)는 시빌에게 첫눈에 반해 그녀의 주위를 맴돌지만, 시빌은 미키의 아버지 알렉산드르(예브게니 시디킨)에게 빠져 있다.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해 여자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는 소문과 달리, 마을 여자들과 마음껏 즐기는 알렉산드르를 보면서 시빌은 육탄 공세를 시작하고, 미키는 질투심에 사로잡힌다. ■ Review “그 여름 시빌한테 73번의 키스를 했다. 100번의 키스를 허락받았지만…. 27번의 키스는 못다한 채 남겨두고 말았다.” 이제 막 변성기를 맞은 듯한 소년 미키의 새된 목소리가 영화의 문을 연다. 못다한 키스에 대한 아쉬움이, 놓쳐버린 첫사랑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걸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 사랑 이후, 그가 부쩍 키자람을 했으리라는 것도. <못다한 27번의 키스>는 아직 첫사랑의 신열을 간직하고 있는 소년이 털어놓은 어느 여름의 기억, 그 성장의 기록이다. 아버지의 여자와 아들의 여자가 동일인물이라는 설정은, 거대한 비극을 잉태하게 마련이다. 아버지의 여자를 사랑한 <페드라>의 아들은 낭떠러지 아래로 굴러떨어졌고, 아들의 여자를 사랑한 <데미지>의 아버지는 스스로를 유폐시켰다. <못다한 27번의 키스>의 비극은 질투심에 사로잡힌 소년이 이런 삼각구도를 ‘상상’한 데서 비롯된다. 소녀는 소년에게 난데없는 ‘배앓이’의 충격을 선사하며 그의 인생에 뛰어들지만, 이미 소년의 아버지에게 마음을 빼앗긴 뒤다. 소년의 아버지는 천하의 바람둥이지만 아들이 사랑하는 소녀를 여자로 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질투에 눈이 먼 아들은 자신의 연적인 아버지에게 총부리를 겨눈다. 아버지를 부정하자, 사랑도 그를 부정한다. 항상 출항을 준비하는 낡고 녹슨 배의 선장 네모의 말처럼, “사람도 떠나고 바다도 떠나고, 그게 바로 삶”인 모양이다. 소녀로 인해 인생이 뒤바뀌는 건 소년뿐이 아니다. 소녀는 자신을 반기지 않는 마을 사람들에게 사랑을 전파하고 다니는 <초콜렛>의 줄리엣 비노시를 닮아 있다. 욕망이 이끄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소녀 시빌은 금욕적이고 보수적인 마을 사람들의 잠든 열정을 흔들어 깨운다. “나쁜 피”가 흐른다고 소녀를 손가락질하던 그들은 스탈린이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기록영화 대신 <엠마누엘>을 보러 은밀히 몰려든다. <엠마누엘>이 상영되던 밤, 연로한 교장은 불어 선생의 침대에서 복상사를 당하고, 난봉꾼 피에트르는 볼베어링을 낀 채 섹스하다 봉변을 당한다. 동화책에나 나올 법한 숲 속 작은 마을은 돌연 ‘사랑과 성’에 조급증을 내며 흥분하기 시작한다. 시대와 공간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지만, 억눌린 시대 억눌린 공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자유에 대한 갈망은 소녀 실비뿐 아니라, 네모 선장의 캐릭터에도 투사된다. 배 띄울 바다를 찾지 못한 선장은 트랙터에 배를 싣고 다니는데, 그가 찾는 바다는 ‘자유’를 상징하고 있다. 그러니 실비가 네모의 배를 타고 바다 멀리 사라진다는 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못다한 27번의 키스>는 구소련에 속해 있던 작은 나라 그루지야 공화국에서 날아온 ‘사랑에 관한 동화’다. 그루지야 공화국 출신인 감독 나나 조르자제는 건축가, 배우, 교수 등 다양한 직업을 거쳐 79년 감독으로 데뷔했고, 87년 칸영화제에서 <나의 영국인 아버지>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영화는 2000년 칸영화제 감독주간 초청작이며, 같은 해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이기도 하다. 박은영 cinepark@hani.co.kr

11년 만의 변신, 눈에서 힘을 빼고, <킬러들의 수다> 신현준

‘4인조 남성 킬러’ 중 맏형답게 신현준의 카리스마는 막강했다. 사진을 찍기 위해 ‘세 동생’들을 모이라고 할 때도 “얘들아!” 한마디면 충분했다. 처음엔 카리스마 넘치는 킬러였다가 나중엔 나사 하나 풀린 듯 어리숙한 면을 드러내며 차츰 ‘망가지는’ 킬러들의 맏형 상연은 ‘신현준’ 이름 석자가 주는 무거운 고정관념을 단숨에 날려버린 통쾌한 한방이었다. 장난을 쳐보라는 사진기자의 주문에 오히려 가지런히 서서 손을 모아잡는 표정에도 개구쟁이 소년 같은 장난기가 폴폴 날린다. 껑충한 키, 매처럼 굽은 콧날, 부리부리한 눈, 아주 짧게 자른 머리, 진회색 바짓단 아래 드러난 하얀 맨발. “원래 신발을 못 신어요. 양말도. 답답해서요.” <장군의 아들>의 하야시, <은행나무 침대>의 황 장군, <비천무>의 진하 등 유독 눈에 힘주고 무게잡는 역할을 많이 해온 신현준에게 킬러 상연으로의 변신은 설렘 반, 두려움 반이었다. 연기생활 11년에 코믹 연기도 처음이었고. 그래서 “처음엔 관객에게 괴리감을 주지 않을까 걱정”했다. 결과적으로 괜한 걱정이 되었지만. 카리스마와 어눌함을 동시에 갖춘 상연을 표현하기 위해 수염을 기르고 펑크 스타일 파마를 6번이나 하는 등 분장과 헤어스타일까지 하나하나 공을 들였다. <킬러들의 수다>를 찍으며 가장 힘들었던 건 웃음과의 전쟁. 코미디 연기가 왜 힘든지를 배웠다. 평소에 장난 잘 치고 잘 웃는 그에게 웃음을 참는 건 고문이었다.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서로 얼굴을 보면서 웃음을 참노라면, 등줄기에 식은땀 한 줄기가 주륵 흘렀다고. “사실 맘만 먹었다면 더 어렸을 때도 코미디에 출연할 순 있었죠. 만들 순 있었죠. 들어오는 시나리오 10개 중 8개가 코미디였으니까. 하지만 때가 아니다 싶어 기다렸어요.” 코미디는 가리지 않고 좋아한다고. “쌈마이 코미디라도 현실에 솔직하고 척하지 않는 점에서 좋아요.” 상연의 멜로가 없네요, 라고 멜로가 빠진 배역은 처음 아니냐고 묻자 “그래도 상연은 여자를 위해 목숨을 거는 쿨한 친구”라고 응수한다. 배우생활 11년. 이제 깨달았다. “한편은 스스로가 하고 싶은 영화를, 다른 한편은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은 영화를 하면 된다”는 것을. 아직도 “하고 싶은 영화가 너무 많아서 미치겠다”는 맨발의 배우 신현준은 이제 촬영현장이 제일 좋다. 남은 바람은 안성기, 박중훈 같은 좋은 배우, 좋은 생활인이 되는 것. 장군에서 소방수까지 온갖 캐릭터를 다 겪었지만, 킬러 상연은 그중에서도 꽤나 혁명적인 변신이고 그래서인지 관객의 반응이 이렇게 궁금했던 적이 없다고. 차기작 <블루>에서는 눈에 힘주는 해군으로 되돌아가더라도 혁명의 짜릿함을 아는 자, 다시 혁명을 꿈꾸리니. 의뢰인 없는 세상을 꿈꾸는 킬러 상연처럼.

대륙의 바람을 가른 매의 눈매, <무사>의 위룽광

진정한 무사는, 무사들 속에서 더욱 빛난다. 너른 대륙을 향해 말달리는 자의 광막함과 홀연 깃발을 내린 자의 적요. 원 기병의 적장 람불화는 고려의 어떤 무사보다 내유외강했으며 그로부터 진정 무사의 풍모를 드러냈다. <무사>를 본 이들 중 많은 수가 최고무사의 영광을 진립도 여솔도 아닌 람불화에게 돌릴 만도 한, 람불화만의 품위. 그 주인공 위룽광을 초가을 어느 일요일, 그의 숙소인 강남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 위룽광은 놀랍게도, 펄이 들어간 쫄티에 역시 광택성의 진이라는 매우 ‘현대적’인 차림을 하고 나타나 단숨에 람불화의 잔상을 지워버렸다. 수염 없는 짧은 머리의 그는, 영락없이 <무사> 이전 홍콩액션물에서의 그의 모습이었고, 그런 위룽광과 람불화를 논하기란 다소 생경했지만 흥미로운 일이었다.람불화의 모습을 찾기 힘들다. 그런가. 원래 시대물이란 것 자체가 배우로 하여금 보통 때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드러내게 하지 않는가. 람불화를 어떤 인물로 보는가. 입체적이어서 연기하고픈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이다. 역사적 상황 안에서 그가 보이는 심리와 정서는 배우의 잠재된 가능성을 일깨울 만하다. 처음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그가 마음에 들어 <무사> 출연을 결정했다. 홍콩영화의 무협액션과 <무사>의 액션은 어떻게 다르던가. 홍콩영화의 액션은 화려한 동작에 중점을 둔다. 반면 <무사>는 사실적 액션을 추구한다. 원시적인 본능에 치중하는 것이다. 촬영을 할 때, 우리는 모든 것을 사실적으로 실제로 했다. 무거운 무기를 들고 말을 달리고, 사막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다 맞으며…. 머리 베는 장면을 빼고는 스턴트도 거의 없이 그대로 재현해 찍었다. 액션이야기가 나오자 위룽광의 목소리가 대륙의 바람이 스친 듯 강해졌다. 1958년 베이징 태생인 위룽광은 소림권으로 유명한 남권과는 구분되는 북권 무협의 대표적인 배우. 경극배우였던 아버지를 둔 덕에 어린 시절부터 엄격한 무술 훈련을 받았고 11살부터 경극을 했다. 첫 영화를 찍은 건 스물일곱 때. 홍콩 프로덕션 관계자가 당시 경극배우로서 꽤 두각을 보이던 그를 <목면가사>(1985)에 캐스팅하면서 그의 영화배우 생활은 시작됐다. 때로는 범죄조직의 우두머리(<이연걸의 영웅>)로, 때로는 킬러(<저격자>)로, 때로는 의사 겸 의적(<철마류>)으로, 때로는 청나라 관리이자 동방불패의 신봉자(<동방불패2>)로. 그는 이후 60여편에 달하는 많은 영화에 출연하면서 한결같이 단련된 육체의 안정감을 놓치지 않았다. <무사>에서 람불화의 눈매를 매섭게 빛나게 한, 그의 대륙을 닮은 액션은 이처럼 튼튼한 ‘내공’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먼 나라에서 고향을 향해 가는 고려 무사들의 이야기 <무사>를 찍으며, 한국배우들은 그들 스스로 향수에 시달렸다. 중국은 워낙 넒은 땅. 베이징이 고향인 위룽광 역시 가족들과 멀리 떨어져 촬영을 하며 그같은 심경을 겪었다. “그들과 마찬가지였어요. 나 역시 집을 떠나 있었습니다. 언어가 통하는 것만 달랐지요.” 부모와 아내, 아들, 다섯명의 형제누이들이 모두 베이징에 살고 있는 그의 철칙은 액션장면 찍을 때는 절대 가족이 현장에 못 오게 하는 것. 드라마장면 찍을 때만 ‘관람’을 허용하여 가족들이 걱정하지 않게 한단다. 그만큼 그가 하는 연기들은 위험하기 때문이다. “밥을 못 먹기도 하고, 잠을 못 자기도 하고…. 처음엔 너무 힘들어서 사람이 하는 일 같지 않”았던 영화를 어느새 천직으로 삼고서, 위룽광은 수년 전부터 중국 TV드라마 제작에도 관여해 왔다고 밝혔다. 팬사인회와 극장에서의 <무사> 관람, 그리고 여러 인터뷰를 마치고 난 뒤 그는 어느새 생긴 국내 팬클럽의 환송을 받으며 자신이 제작하는 중국 드라마 제작발표회에 참석하기 위해 상하이로 떠났다.

열다섯 피를 흔든 결단의 밤은 어디로, <아라비아의 로렌스>

사춘기 시절 집이 충무로에 있었다. 축복이었나? 여하튼 인생은 훨씬 더 흥미로웠다. 15분만 걸으면 대한, 명보, 국도, 스카라, 그리고 그 고마운 젊은이의 메카, 재개봉관 아테네 극장이 있었으니 시네마 천국이었다. 머리 길게 기르는 중·고교를 다닌 덕에, 어른스런 외모 덕에, 물론 눈 잘 감아주는 극장 덕분에 나의 사춘기는 영화로 채워졌다. ‘범생’으로 믿어주던 학교와 부모 몰래 나의 홀로 반란은 영화관에서 일어났던 셈이다. 어떤 해에는 읽은 소설 숫자보다 본 영화 숫자가 더 많았다. 매주 한편의 영화를 본 셈이다. 과하긴 과했다. 그러나 좋았다. 그때 봤던 수백편의 영화 중에서도 강한 기억에 남는 영화는 <아라비아의 로렌스>다. 세 번 봤다. 두 번째, 세 번째는 혼자 가서 보았다. 도대체 그 영화 무엇에 그리 끌렸을까? 세 시간 길이의 영화, 사막처럼 따갑고 건조한 영화, 여자는 한명도 안 나오는 영화. 오직 한 장면을 보는 것만도 좋았다. 사막의 밤, 바람이 불면서 모래 위에 일렁이는 파도를 만드는 밤을 꼬박 새고 로렌스가 홀로 결단을 하는 장면이다. “아카바, 아카바, 사막을 건너서!” 나는 지금도 다시 느낄 듯하다. 영화 보고 집으로 가는 길, 초가을의 바람은 서늘하고 뙤약볕은 따가운 거리를 걸으며 내 팔뚝에 돋던 그 소름을. “나는 어떤 결단을 할 수 있을까? 멋있다. 결단이란….” 얼마나 어렸던가. 15살 소녀는 ‘혁명적 낭만’에 눈을 떴던 셈이다. 영화는 ‘아라비아의 무관 왕’이라 불렸던 영국의 전설적 영웅 T. E. 로렌스를 그린다. 수에즈운하를 둘러싸고 영국과 독일이 한판 붙는 1차 세계대전 무렵, 터키와 동맹관계인 독일에 대항하느라 영국은 아랍 독립운동의 선봉인 파이잘 왕자와 연합하려 한다. 카이로에서 군사지도 교관으로 근무하던 로렌스는 사막으로 들어가 파이잘 왕자를 찾고 게릴라전에 온몸을 투입한다. 아랍인들과 함께 낙타를 타고 아랍 옷을 입고서. 로렌스로 분한 피터 오툴은 핏줄 드러날 듯 투명한 하얀 피부, 타오를 듯한 금발, 빨려들어갈 듯한 새파란 하늘색 눈이었다. 사막의 어두컴컴한 색조에 대비되는, 불길한 이미지다. 지적 모험심과 순수한 이상과 격정과 분노와 자기혐오와 자살적 용기로 뒤엉킨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다. 영화를 분석할 역량이라고는 전무했던 그 시절, 그래도 나는 몇 가지 건졌다. ‘사막에는 오직 신과 나만이 있다’, 나의 대사를 만들며 사막의 절대성에 반했었다. ‘이상이란 현실에 지는구나’, 아랍의 자주성을 주장하여 고립무원 내쳐지는 로렌스를 보고 아팠었다. ‘정치는 총칼보다 강하구나’, 결국 정치적 타협으로 국가를 세우는 파이잘 왕자를 보면서 느꼈었다. 이 영화의 전모를 이해한 것은 훨씬 나중이다. 유학 길에서 이슬람 세계 친구들을 만나고, 그들의 삶을 듣고, <오리엔탈리즘>이나 로렌스의 <지혜의 일곱 기둥>을 읽으면서 열강의 치열한 이해관계와 힘없이 분열된 민족들의 고통 사이에서 나의 현실감각을 키운 듯싶다. 2년 전 70mm 대한극장이 막을 내리는 기념으로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상영했을 때 나는 딸들과 함께 30여년 만에 이 영화를 다시 보았다. 장면은 여전히 매혹적이었다. 수에즈운하의 모래둑 위로 거대한 선박이 운항하는 장면, 사막의 아지랑이 속에서 점 하나로부터 드디어 낙타를 탄 늠름한 모습으로 커지는 검은 옷의 베두윈 족장으로 분한 배우 오마 샤리프, 우아하게 하얀 아랍 옷을 입은 로렌스. 딸들도 매혹되었다. 그러나 갈등은 더 깊게 다가왔다. 자기를 학대하는 로렌스와 혐오에 빠진 독일 장교의 동성애적 교감, 외세를 교묘하게 활용하는 파이잘 왕자의 고집스런 자존심과 현실적 타협 사이를 오가는 비굴하고도 지혜로운 얼굴. 로렌스라는 ‘혁명 인간’, ‘이상 인간’, ‘독립 인간’이 설 데는 어디인가? 그의 역할은 무엇이었던가? 15살 소녀가 반했던 사막 위의 그 결단의 밤은 아라비아를 어디로 이끌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