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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칸의 두 감독, 폰 트리에와 반 산트

미국 겨눈 <도그빌>·<엘리펀트>, 심드렁했던 '칸'의 선택은‥ 21일(현지시각) 까지 경쟁작 20편 가운데 15편의 봉인이 뜯기면서 다소 심드렁했던 56회 칸 국제영화제의 분위기도 고조되고 있다. 칸 경쟁부문에만 5번째 초청된 60대의 거장 라울 루이즈는 미래의 스위스에서 벌어지는 엽기적인 코믹 살인극을 마술적 리얼리즘의 터치로 그린 <그 날>을 들고와 ‘영원히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임을 유쾌하게 증명했고, <욜> 이후 12년 만에 칸에 초청된 터키 영화 <우작>(누리 빌게 세일런)은 관조하듯이 그려낸 깊은 삶의 성찰로 현지 언론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로드무비에 포르노그래픽을 방불케 하는 절망적인 사랑을 그린 빈센트 갈로의 <브라운 버니>는 찬반이 분명하게 갈렸고 따뜻한 성장영화를 들고 온 구로사와 기요시(<밝은 미래>)는 아시아 기자들에 비해 서구 기자들의 반응이 썰렁했다. 앙드레 테시네, 푸비 아바티, 헥토르 바벤코 등 유명작가들의 신작은 평이한 대중영화에 그쳤다. 하지만 뭐라해도 중반이후 칸을 흥분시킨 건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엘리펀트>(사진)와 폰 트리에 감독의 <도그빌>이다. 아직 클린트 이스트우드, 피터 그리너웨이 감독 등의 작품이 남아있긴 하지만 몹시도 논쟁적인 주제를 완전히 새로운 영화형식으로 다룬 이 두 작품은 현재까지 현지 평론가들의 가장 높은 평균점수를 받으며 적어도 하나씩 상을 가져갈 것이라는 예측들이 나오고 있다. 공교롭게 두 작품은 모두 '미국'에 관한 이야기다. 칸/김영희 기자 dora@hani,co.kr 사진 정진환 <씨네21> 기자 jungjh@hani.co.kr ★'엘리펀트' 구스 반 산트 감독 "시처럼 푼 콜럼바인" 고백하자면,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엘리펀트>에 대한 사전정보 없이 영화를 보던 기자는 마지막 1/4부터 몸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지난해 칸에 온 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콜럼바인>이 콜럼바인 고교 총격사건을 빚은 미국사회를 '확대경'으로 펼쳐놓았다면, 한 편의 시 같은 반 산트의 영화는 같은 소재로 그 대척점에 섰다. 고교생 아마추어 배우들을 기용해 16mm 영화 포맷인 1.33대 1로 찍은 이 영화는 러닝타임의 3/4을 어느 가을날, 한 고교 학생들의 잔잔한 생활을 보여주는 데 바친다. 존은 차 열쇠를 학교사무실에 맡겨놓고, 엘리아스는 연인들의 사진을 찍고, 축구를 마친 네이트는 여자친구 캐시를 만나러 간다. 그것은 삶의 한 단면인 일상적인 하루다. 다른 인물로 넘어갈 때마다 카메라는 그 주인공의 등을 조용히, 길게 따라간다. 때로는 같은 순간을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여러번 보여주기도 한다. 그렇다고 사건의 원인이나 해결책이 드러나는 건 아니다. 베토벤의 음악이 흐르며 눈부시게 파란 하늘 아래로 흘러가는 시간을 잘라 보여주고 사건을 반복할 뿐이다. 하지만 앞에 나왔던 아이들이 총을 맞고 쓰러져갈 때, 이제까지 쌓여온 이미지는 말로 표현할 수 없게 보는 이의 감정을 폭발시켜버린다. 비극을 전달한다는 면에선 무어의 작품이 갖지 못한 미덕이다. 내용을 모르면 충격적이고 알고 보면 너무 슬픈 영화. 몇 년동안 김빠진 맥주같은 할리우드 영화를 만들던 반 산트는, 혼란스런 10대들을 쓸쓸하며 애정있게 바라보던 80년대 자신의 영화의 정신으로 돌아간 듯 보였다. 학생들 잔잔한 일상 따라다니며 혼란스런 10대 향해 애정어린 눈길 제목의 의미는? 북아일랜드의 폭력문제를 다룬 영국 앨런 클락 감독의 89년작 <엘리펀트>에서 따왔다. 클락 감독은 ‘거실 안의 코끼리’라는 서양 속담처럼 무시되기 쉽다는 뜻으로 썼다고 들었다. 내게 ‘엘리펀트’는 여러 장님들이 각자 코끼리의 귀, 다리 등 다른 부분을 만지면서 서로 이게 나무니 뱀이니 다퉜다는 인도의 옛말처럼 ‘아무도 전체를 알 수 없다’는 의미다. 영화는 어떻게 시작했나? 99년 사건 직후엔 범인인 두 소년에 초점맞춘 드라마를 만들려 했다. 왜 그랬고 의도는 뭐였나 하는. 물론 그때도 무어처럼 전체를 보여주기 보다는 두 소년에 집중하려는 생각이었다. 제작자를 구하러 다니며 시간이 흐르는 사이 다른 사람이 같은 소재로 쓴 <타미 건>도 나오며 생각이 더 발전했다. 보는 이마다 각자 다른 느낌의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영화에 사건의 원인과 해결책에 대한 설명이 없다. 구체적 설명을 안 주는 게 목표였다. 관객이 의문을 갖고 생각할 수 있도록. 물론 내 나름의 콜럼바인 사건에 대한 생각이 있다. 난 그걸 설명하기 보다 시와 같은 표현으로 보여주려 했을 뿐이다. (그는 프랑스 영화전문지 <카이에 뒤 시네마>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나를 형사 콜롬보라 생각한다. 모든 걸 알고 있으면서도 말하지 않는”이라고도 말했다.) 범인이 되는 학생이 치던 ‘엘리제를 위하여’가 총격장면에도 나오는데? 범인역을 맡은 에릭이 우연히 피아노를 치는 걸 듣고 다음날 촬영장소에 피아노를 갖다놓아 영화에 집어넣은 거다. 이런 식이 많았다. 아주 거친 스크립트만 있고 아이들은 자신의 생활을 대사로 했다. 지난해 작품 <게리>를 찍으며 난 다시 이런 방식으로 돌아왔다. ★'도그빌' 라스 폰 트리에 감독 "나는 미국이 무섭다" 이번에는 사전정보를 가지고 들어가야지, 결심한 기자는 라스 폰 트리에의 <도그빌> 자료를 읽고 절망했다. 무려 2시간58분짜리(한국 등 일반개봉땐 2시간 편집본이 걸린다)인데, 이렇다할 세트도 없이 바닥에 분필로 누구집, 누구집 써놓은 스튜디오 안에서 6주동안 찍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사람의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잔인한 우화였다. 프롤로그와 9장으로 나뉜 영화는 존 허트의 내레이션으로 대공황시기였던 1930년대 미국의 록키 산맥 막다른 기슭에 있었다는 작은 마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도그빌’, 말 그대로 ‘개 마을’이다. 평화로운 이 마을에 아름다운 도망자 그레이스(니콜 키드먼)가 나타난다. 작가이자 자칭 마을의 철학자 톰(폴 베터니)은 사람들에게 그를 숨겨주자고 한다. 그레이스의 추격자들이 수배 전단을 붙이기 전까지 마을 사람들은 진심으로 착해 보였다. 하지만 위험인물을 숨겨준다는 의식이 번져나가며 남자건, 여자건, 아이건 변한다. 너무나 잔인하게. 목에 개목걸이가 묶인 채 밤마다 남자들의 성욕을 푸는 대상까지 된 그레이스는 죄수이자 노예다. 지옥같은 세상으로부터 이 마을로 도망쳤던 그레이스가 발견한 건 ‘개처럼 본능에 따르는’ 사람들의 똑같은 지옥이었다. ‘소돔과 고모라’를 연상시키는 마지막 장면은 폰 트리에가 ‘미국 3부작’ 가운데 1부로 명명한 이 영화를 신랄한 미국역사에 대한 야유로 보이게 했다. 영화가 끝나면 데이빗 보위의 ‘영 아메리칸’이 흐르며 미국정부가 30년대 대공황시기에 가난한 이들을 찍어두었던 흑백사진이 겹친다. 대공황시대 '개마을'에서 벌어지는 3시간에서 2분 모자란 잔혹한 우화 어떻게 시작했나? <어둠속의 댄서>때 칸에서 미국기자들로부터 ‘미국도 한번 안 오고 어떻게 이런 영화를 만드냐’는 질문을 듣고, 그래, 더해보자 생각했다. <카사블랑카>를 만들 때 미국인들이 카사블랑카에 왔었다는 이야기를 난 들어보지 못했다. 영향을 받은 작품들이 있나? 브레히트의 음악극 <서푼짜리 오페라>에 복수의 내용을 담은 ‘해적 제니’라는 노래에서 처음 출발했다. 형식은 70년대 세익스피어 왕립 극단의 텔레비전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다. 난 <킹덤>이후 기술적이며 기교적인 영화를 배제하려 했다. 세트와 소도구를 최소화한 이 영화는 관객들이 캐릭터에만 집중하도록 할 것이다. 꼭 미국의 모습이라고만 볼 순 없지 않나? 물론 어느 곳에서도 있을 수 있는 얘기다. 인간에겐 선과 악이 모두 있고, 상황에 따라 그것들이 나온다. 그러니까 이것이 진짜 미국의 모습이라 말하는 건 아니다. 다만 난 내 머리 속에 있는 미국이란 말이다. 그 이미지는 덴마크의 텔레비전의 80% 이상을 채우는 미국의 작품이나 미국의 뉴스에서 나온 거다. 타자의 눈에 그렇게 보인다면 자신들이 모르는 뭔가가 있는 것 아닌가. 그러면 안티 미국 영화인가? 누군 날 공산주의라 할지 모르지만 난 공산주의자는 아니다. 심지어 미국정보에 휩싸여 사는 난 나를 미국인이라고 조금 느끼기까지 한다. 아니, 되고싶다.(웃음) 하지만 미국이 무섭다. 잘못된 정보건, 어긋난 커뮤니케이션의 결과든. 난 ‘미국 해방’ 캠페인부터 벌이고 싶다. 그건 ‘이라크 해방’ 캠페인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3부작은 어떻게 진행되나? 그레이스한테 이후 무슨 일이 일어났나 따라갈 것이다. <맨덜레이>와 <워싱턴>이라는 제목이다. 바로 어젯밤 키드먼에게 2, 3부의 내용을 얘기해줬는데 계속 출연하겠다고 말했다. 기자들 앞에서 확인해줘요, 니콜!

개막작 혹평 속,최고 최대 영화제 칸이 56번째 문을 열다 [2]

지난 5월 14일 페넬로페 크루즈, 뱅상 페레, 키아누 리브스, 모니카 벨루치 등을 레드 카펫에 불러모으며 시작된 칸영화제는 올해도 언제나처럼 `스펙터클에 대한 매혹`을 숨기지 않았다. 지난 5월14일 페넬로페 크루즈, 뱅상 페레, 키아누 리브스, 모니카 벨루치 등을 레드 카펫에 불러모으며 시작된 칸영화제는 올해도 언제나처럼 ‘스펙터클에 대한 매혹’을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개막작 <팡팡 라 튤립>을 상영한 다음날 아침 <매트릭스2 리로디드>를 이어 소개하는 방식으로, 스펙터클의 영화에 대한 지지와 성원의 뜻을 좀더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각각 유럽과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액션의 비전을 함께 보여준다는 의미. 그러나 이런 시도는 환영받지 못했다. 18세기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이자 활극이자 러브스토리인 <팡팡 라 튤립>은 52년 칸영화제 감독상 수상작이기도 한 크리스티앙 자크 영화의 리메이크로, 프랑스 대형 액션영화 붐을 선도한 뤽 베송이 제작하고, 그의 자랑스런 후계자 제라르 크라브지크(<택시2> <택시3> <와사비>)가 연출했다. 한동안 영어권 영화에 개막작 자리를 뺏겼던 프랑스의 자존심 회복? 결과는 그 반대다. 새로운 해석도, 새로운 형식도, 시대 정신도, 캐릭터도 없는 이 영화가 세계 최고임을 자부하는 영화제의 개막작이라는 사실에 많은 이들이 뜨악해할 뿐이었다. <리베라시옹>은 “전세계의 명망있는 매체 기자들이 고군분투 끝에 칸에 왔는데 이런 영화를 개막작으로 보여주다니, 머리 숙여 용서를 빌어야 할 일이다”라고 빈정대기까지 했다. 애초 많은 기대와 화제를 모았던 <매트릭스2 리로디드>에 대한 반응도 별 하나 정도로 중지가 모아지는 등 좋지 않은 편이다. 구스 반 산트의 화려한 귀환 매체의 성격과 노선에 따라 판이하게 다른 감독과 작품들을 밀어주던 지난해와 달리 올해 현지 언론의 눈길은 라스 폰 트리에의 <도그빌>과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 두편에 집중되고 있다. <어둠 속의 댄서>가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던 3년 전, 라스 폰 트리에를 혹독하게 비판했던 <카이에 뒤 시네마>는 그의 미국영화 3부작 중 1부에 해당하는 <도그빌>의 연극적 문학적 실험에 감복, “라스 폰 트리에의 두 번째 황금종려상 수상이 기대된다”고 할 만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르몽드>도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의 한계에 도전하는 탐구자적 정신, 영화제작의 독립성을 유지하는 힘” 등을 높이 사고 있다. 칸과 통 인연이 없어 보였던 구스 반 산트는 마이클 무어가 다뤘던 총기난사 사건을 모델로 한 극영화 <엘리펀트>를 들고 온다. <리베라시옹>은 “시네필들에게 작가로 인정받지 못했던 구스 반 산트의 화려한 귀환”을 크게 반기고 있다. 이 밖에 칸에 모인 기자들의 의견을 취합해보자면, 알렉산더 소쿠로프의 <아버지와 아들>, 피터 그리너웨이의 3부작 중 첫 번째에 해당하는 <모압 스토리>의 영상미학에도 기대가 모이고 있다. 터키의 누리 빌게 세일란, <수쥬>로 알려진 로우예 등이 다크호스일 것이라는 전망도 있으며, <버팔로 66>의 빈센트 갈로의 신작 <브라운 버니>가 지난해 <돌이킬 수 없는>의 악명에 버금가는 스캔들로 떠오를 것이라고도 한다. 남은 열흘. 테러와 파업과 사스의 현실을 위무하는 ‘서프라이즈’를 만나게 될 것인가. 모두가 그것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 칸의 한국영화 칸에 한국영화가 없다고? 천만에 올해 칸에 한국영화가 없다는 것은 오해다. 우선 <굿나잇> <사연> <원더풀 데이> 등의 단편 셋이 비평가 주간과 감독 주간에서 상영되며, 신상옥 감독의 <상록수>가 회고전에서, 이창동 감독(장관)의 <오아시스>가 비평가 주간에서 상영된다. <상록수> 상영 직전엔 이창동 장관이 무대에 올라 신상옥 감독을 직접 소개하는, 뜻깊은 자리가 마련된다. 한국 장편영화가 공식부문에서 상영되지 않는 대신 올해 칸영화제에서는 한국영화 시장에 대한 관심이 한층 높아져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프랑스의 연예주간지 <텔레라마>는 한국영화에 대한 특집기사에서 “당신이 시네필이고, 서양인이고, 코미디를 좋아한다면, 한국으로 가라”고 운을 뗀 뒤, 한국영화 시장의 근황과 쿼터제에 대한 이모저모를 이야기하고 있다. <친구>에서 발화된 조폭영화 붐, 그리고 <쉬리>에서 출발한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선전, ‘사도마조히즘’을 다룬 작가영화(<거짓말> <섬>)의 면면 등 지난 몇년의 한국 영화계의 경향을 되짚고, 자국 시장에서 크게 흥행한 코미디 작품들이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된다는 등의 소식도 소개하고 있다. 또한 이창동 문화부 장관을 ‘미스터 쿼터’로 소개하며, 영화감독 출신인 그의 활동상에 대한 기대를 표했다. 또 같은 기사에서 올 칸영화제에서 <상록수>의 복원판을 상영하게 될 신상옥 감독에 대한 소개와 지난해 <취화선>의 영화제 수상으로 현지에서 비교적 친숙하게 느끼고 있는 임권택 감독의 신작 준비 상황 등을 싣고 있다. <무빙픽처스>도 칸영화제 프리뷰 특별판에서 한국 영화산업에 대한 기사를 7페이지 특집으로 다루고 있다. 이 기사는 자국영화에 대한 선호도가 매우 높은 한국영화 시장을 눈여겨보라고 제언하고 있다. 또한 한국 감독들의 지명도가 높아지면서 프리 세일의 가능성도 동시에 높아지고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영화제와 별도로 진행되는 칸 마켓의 정보지에서도 한국영화에 대한 기사를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다. 미로비전은 <스크린 인터내셔널>에서 펴낸 영화제 데일리의 커버를 <원더풀 데이즈>로 장식한 뒤, 마켓 프리미어를 실시했다. 이 밖에 시네클릭 아시아는 <장화, 홍련> <똥개> <올드 보이> 등 현재 제작진행 중인 작품들의 프리 세일을 준비하고 있으며, 튜브의 <튜브>, CJ의 <살인의 추억>, 강제규필름의 <블루> <몽정기> 등이 세일즈 목록에 포함돼 있다. 한편 쇼박스에선 <태극기 휘날리며>가 일본에 프리 세일됐다고 밝혔다.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

이 사나이 순정에 반해도 되나?,<죽도록 사랑해>

좌우명 이유없이 맞지 말자. 직업 나이트클럽 영업부장. 취미 권투. 애창곡 <그집 앞>. 학력 고졸. 해병대 제대. 장래희망 나이트클럽 사장. 나이 20대 중반. MBC 주말드라마 <죽도록 사랑해>의 남자주인공 김재섭(이훈)의 프로필이다. 때는 아직 서울에도 ‘동네’가 있던 1970년대. 초등학교 친구들이 평생 지기가 되고, 이웃집과 사돈을 맺는 시절이다. 홀어머니의 기대와 달리 대학 진학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재섭은 고3 때 경찰서 피의자 대기실에서 만난 또래의 설희(장신영)를 평생 ‘죽도록 사랑한다’. 그러나 이수일의 순정보다 김중배의 다이아몬드 반지를 믿는 설희는 그를 이용하고 끝끝내 내친다. 속칭 피엑스(PX) 양키 물건 장사를 하는 어머니와 양공주 출신 언니를 보면서 자란 설희에게 사랑은 거추장스러운 사치일 뿐이다. 재섭은 오래간만에 브라운관에서 만나는 일편단심 민들레, 고전적인 남성상이다. 한국사회는 더이상 이 촌스런 남성상에 열광하지 않지만, 여전히 일군의 마니아 집단은 남아 있다. 대한민국 10%의 시청자들은 주말마다 텔레비전 앞에 앉아 정의의 주먹을 휘두르고, 친구에게 의리있고, 가족에게 기댈 언덕이 되는 이 청년에게 빠져든다. 근육질의 착한 남성(우겨서 선한 마초)은 여전히 참을 수 없는 유혹이다. 더구나 비열한 마초와 수다스런 꽃미남이 점령한 브라운관에서 선한 마초는 희귀동물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재섭은 직장에서 부패척결에 앞장서는 용기있는 시민이기도 하다. 나이트클럽 부장이 돼 ‘사나이답게’ 부하 직원들의 상납금 받지 말자고 상사들을 설득하고, 클럽 무대에서 말썽의 소지가 큰 저항가요인 <타는 목마름으로>를 부른 가수를 감싸준다. 그에게 나이트클럽은 일종의 지역사회운동이다. 재섭이 한없이 진지한 얼굴로 “장시간 노동에 지친 동생 같은 여공들이 마음놓고 즐기고, 매형 같이 주눅 든 만년 과장들이 가벼운 호주머니로 스트레스를 푸는 나이트클럽을 하고 싶다”고 말할 때면 적금이라도 털어주고 싶은 심정이 된다. 건강한 육체에 깃든 건전한 정신, 한국 근대 교과서가 권장해온 남성상이다. 주인공 커플이 곰 같은 사내와 여우 같은 여성의 대립이라면, 나머지 커플은 무능한 남성과 억척스러운 여성들의 조합이다. 우선 <죽도록 사랑해>의 여성들은 모두 커리어우먼이다. 이들은 일하는 여성이라기보다는 일할 수밖에 없는 여성들이다. 제 몸 하나 움직이지 않으면 먹고살 길이 막막하기 때문이다. 남편과 헤어진 재섭의 어머니는 갈빗집을 해 세 남매를 키웠고, 착하지만 무능한 아버지를 둔 재섭의 형수 광숙은 여공 출신 의류업체 사장으로 인생 역전에 성공한다. 이 드라마의 여성들은 먹고살기 위해서라면 양공주, 술집 마담도 마다지 않는다. <죽도록 사랑해>는 한국 근대를 밀어온 힘은 여성 노동이라고 말하고 있다. 반면 남편들은 부재하거나 무능하다. 억척스러운 여성들은 돈 벌고 아침상 차리는 것도 모자라 상처받은 남성들을 보살피고 껴안는 역할까지 도맡아야 한다. 시국 사건으로 폐인이 된 재섭의 형은 아내의 세심한 보살핌으로 사회에 복귀한다. 만년 과장인 재섭의 매형도 아내의 힘으로 세상을 근근이 버텨간다. 이처럼 <죽도록 사랑해>에서 남자들은 비틀거리고 여자들은 초지일관한다. 그러나 주인공 커플의 캐릭터만이 역전돼 있다. 재섭은 보살피고 설희는 배신한다. 사랑받는 남성들 속에서 사랑받지 못하는 재섭의 불행은 더욱 도드라진다. 비틀거리는 남성들 속에서 재섭의 묵묵한 어깨는 더욱 빛난다. 어떤 이의 말처럼 매력없는 근육덩어리였던 이훈은 재섭을 통해 비로소 남자로 다시 태어났다. 작가 김운경은 <죽도록 사랑해>에서도 조연 캐릭터를 살리는 솜씨가 녹슬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독립운동가의 아들인 엿장수 이씨(임현식)는 서민들의 해학을 능청스럽게 드러내고, 현실순응 체질인 남 과장(이문식)은 소시민의 비굴함을 가감없이 연출한다. 한편 김운경은 이전 작품들에 비해 조봉암 사건, 여공들의 노동운동, 시국사건 피해자 등 역사를 좀더 직접적으로 드라마에 끌어들인다. 역사에 대한 언급만큼 조연들의 감칠맛이 떨어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웃음을 자제하는 모습은 김운경 드라마의 ‘정공법’인지도 모른다. <죽도록 사랑해>의 작가 김운경의 드라마에는 마초이즘이 흐르고 있다. 다행히 그 마초이즘은 폭력적이기보다는 귀여운 쪽에 가깝다. 정의의 주먹, 의협심에 대한 찬가는 <파랑새는 있다> <서울의 달> 등 김운경 드라마에서 빠지지 않는 줄기였다. 그래서 가끔씩 반성도 하게 된다. 과연 선한 마초에게 마음을 빼앗겨도 되는 것인가. 사나이 순정 드라마에 열광해도 괜찮은가. 그래도 사람에 대한 애정이 녹아 있는 드라마라고 나의 취향을 변명할 것인가. 어쨌든 죽도록 사랑하지 못하는 현실이 <죽도록 사랑해>를 사랑하게 한다.신윤동욱/ <한겨레> 기자 syuk@hani.co.kr

주연보다 더 빛나는 할리우드 조연 12인방 [3]

그러니까 그는 무섭게 생겼다. 하지만 하나도 안 무섭다 ■ 루이스 구즈만 Luis Guzman 1957년생 주요작 1993 <칼리토> 1997 <부기 나이트> 1998 <스네이크 아이> 1999 <매그놀리아> 2000 <트래픽> 2001 <몬테크리스토 백작> 2002 <웰컴 투 콜린우드>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배우 루이스 구즈만이 갖고 있는 별명은 ‘늑대인간’이다. 사진을 보면 왜 그런 별명이 붙었는지 알 것이다. 이런 생김새를 잊기란 쉽지 않다. 밤에 한적한 골목길에서 마주친다면 발이라도 얼어붙을 것이다. 감독들도 처음엔 모두들 그렇게 생각했다. 인상을 갖다 쓰자. 그래서 루이스 구즈만은 1980년대 <마이애미 바이스> <헌터> <호미사이드> 등의 텔레비전 시리즈에서 냉혹한 갱스터 또는 살인청부업자로 자주 등장했다. 그런데 이 배우에게서 얼굴과는 딴판인 따뜻한 심성의 연기가 배어나왔다. 그 모습은 그에게 충복의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1993년 브라이언 드 팔마의 <칼리토>에서 루이스 구즈만은 노쇠한 갱단의 칼리토를 충실하게 모시는 심복 ‘파창가’를 연기했다(끝내 배신하기는 하지만). <칼리토>는 그에게 일종의 전환이었다. 그뒤 루이스 구즈만은 <몬테크리스토 백작>에서 백작을 모시는 하인의 역할을 했으며, <플루토 내쉬>에서는 에디 머피와 <칼리토>를 패러디한 관계가 되었다. <펀치 드렁크 러브>에서는 아이 같은 사장을 따라 한마디 불평도 없이 푸딩을 사러 나선다. 이제 험상궂은 얼굴의 위협은 사라지고, 배신은 익살의 행위를 덧붙여갔다. 여러 명의 돈키호테를 모시는 할리우드의 ‘산초’가 탄생한 것이다. 여전히 죄수, 마약상 등의 범죄자를 연기하지만 이제 그의 연기에는 친근함이 있다. 감독들은 그런 그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시드니 루멧 감독의 <사랑과 슬픔의 맨하탄>에 등장한 루이스 구즈만을 일찍부터 찍어둔 폴 토머스 앤더슨은 7년 뒤에 그를 <부기 나이트>로 불러들였고, 루이스 구즈만을 향해 “마법사이자 야바위꾼이며 또 진짜 노동자”이기도 하다며 그의 다면성을 치켜세웠다. 루이스 구즈만은 연이어 <매그놀리아>에까지 출연했다. 스티븐 소더버그 역시 <영국인> <트래픽> <웰컴 투 콜린우드>로 이어가며 루이스 구즈만의 자리를 남겨두고 있다. 루이스 구즈만은 자신의 역할을 야구선수에 비유한다. “나는 전천후 플레이어를 좋아합니다. 나를 당신 팀에 넣어주기만 해봐요. 나는 2루수도 볼 거고 중견수도 볼 겁니다. 잡을 거고 또 던질 겁니다. 포지션이 뭐가 됐든 말이죠.” 이렇게 스스로를 평하는 루이스 구즈만은 대기만성형의 배우이다. 그 말은 지금도 유효하다. 정한석 mapping@hani.co.kr 그러니까 그는 톰 사이즈모어 TOM SIZEMORE ■ 전쟁과 범죄를 전담한 인간적인 마초맨 1964년생 주요작 1993 <사랑의 동반자> 1994 <킬러> 1995 <스트레인지 데이즈> 1995 <히트> 1998 <라이언 일병 구하기> 2000 <레드 플래닛> 2002 <블랙호크다운> 이탈리아계답게 꺼칠꺼칠하고 강렬한 인상을 주는 덩치 좋은 배우 톰 사이즈모어를 세상에 널리 알린 작품은, <씬 레드 라인>과의 양자택일 기로에서 선택한 <라이언 일병 구하기>다. 이후 그는 <진주만>과 <블랙 호크 다운> 등 두편의 전쟁영화를 더했다. <진주만>에서는 아주 단순한 역으로 찰나 스치고 말지만, <블랙 호크 다운>에서 아군 호송 임무를 맡아 험비를 타고 무식하게 내달리는 대니 맥나이트 중령은 그에게 더이상 적격일 수 없는 역할이었다. 그 덕에 한동안은 ‘전쟁영화 전문 조연’ 같은 닉네임이, 남은 미래가 아직 밝은 배우에게 암울하기 그지없게 따라다니기도 했다. 사이즈모어는 고집스런 성격과 제멋대로 날뛰는 난폭하고 거친 아이로 10대를 보내며 “몽고메리 클리프와 제임스 딘, 말론 브란도를 보면서 배우가 되겠다고 꿈꿨었다”. 89년 <탈옥>으로 데뷔한 이래 얇게 다문 입술이 주는 무서운 인상과 함께 얼티밋 터프가이 혹은 아주 남성적인 조연 캐릭터로 90년대에 주목받기 시작했고, 범죄와 관련된 액션스릴러과의 영화들, 말하자면 <패신저 57> <스트라이킹 디스턴스> <올리버 스톤의 킬러> <스트레인지 데이즈> <히트> 등은 그의 이미지를 전형적인 악당이나 형사로 제대로 풀어낸 필모그래피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밀러 대위와 함께 얼굴도 모르는 일병 라이언을 구하러 떠나는 휴머니스트 정예요원으로 선택받기 전까지 그에 대해 말할 수 있었던 작품들이기도 하다. 그에게서 좀더 의외의 모습을 발견하고 싶다면 <빅 트러블>이 있다. 이 영화에서 교도소 탈출 강도로 출연하는 그는 여전히 힘자랑깨나 하면서도 맞기도 하면서 수시로 자빠지고 바닥을 뒹군다. 심지어 검정 스타킹을 뒤집어쓰고 구멍만한 술집을 털러 쳐들어간다. 말 그대로 얼뜨기 ‘일자무식’ 캐릭터이지만 코미디 연기를 시도해보인 사이즈모어의 신선한 매력을 즐길 거라면 절대 실망스럽지 않다. 여기에 <스트레인지 데이즈>를 봤던 사람은 그가 가죽 재킷에 록밴드 보컬처럼 어깨 너머로 머리를 길러 늘어뜨린 적도 있다는 걸 말하고 싶어질 거다.박혜명 na_mee@hani.co.kr 그러니까 그녀는 언제나 유쾌해! 그녀가 있는 세상도 언제나 유쾌해! ■ 조앤 쿠색 JOAN CUSACK 1962년 생 주요작 1988 <워킹걸> 1992 <토이즈> 1993 <아담스 패밀리 2> 1997 <인 앤 아웃> 1999 <런어웨이 브라이드> 2000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인 앤 아웃>에서 애인 하워드(케빈 클라인)와 바로 조금 전까지도 행복했던 에밀리는, 곧 결혼할 자신의 남자친구가 게이라는 말을 듣고 갑자기 표정이 굳는다. 그러나 그녀는 심각해도 우리는 웃음을 터뜨린다. 드디어 결혼한다는 행복감에 젖어 있던 착하고 순진한 에밀리의 모든 미래가 한순간에 무너질 판국이지만, 그래서 미안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쿠색의 표정을 보고 있으면 그럴 수밖에. <토이즈>에서 장난감 회사 사장의 다 큰 딸이지만 여전히 철없이 노는 걸 즐거워 하는 알리시아, <런어웨이 브라이드>에서 매기(줄리아 로버츠)의 솔직하고 푼수 같은 친구 페기,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에서 친구 커플이 깨질 위기를 조율하느라 애쓰는 리즈가 모두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오는 사랑스런 여인들. 그리고 에밀리와 함께 이 모든 캐릭터는 조앤 쿠색이란 배우에게서 창조된 캐릭터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부분 유쾌하다 못해 호들갑스러운, 괴짜스럽고 터무니없는 말로 주변을 썰렁하게 만들어도 사랑스러운 그의 캐릭터들은 쿠색의 외모가 주는 인상에서부터 이미 절반 이상 결정된다. 심지어 <아담스 패밀리2>의 연쇄살인마 데비 젤린스키까지도 결국 그녀의 다른 캐릭터들과 한줄에 묶이는 굴비다. 데비는 돈많은 남자들만 골라 계획적으로 결혼한 뒤 살해하고 장례식 날 돈 갖고 튀는 끔찍한 인물. 그러나 이 요녀가 남자를 꼬시기 위해 온갖 순진과 애교를 동원하는 모습은 쿠색만의 것이다. 그의 엉뚱하고 별난 모습은 위스콘신 대학에서 영문과를 전공하던 시절에 Ark Theater에서 즉흥 코미디 클럽 활동을 하면서 다듬어졌다. 그는 아무리 세련된 차림에 도도한 척을 해도 분명 어디선가 한번씩은 발목을 삐끗할 것으로 여겨지고, 혀짧은 발음과 동그랗고 맑은 눈에 도톰한 입술 덕분에 소녀처럼 앳된 인상은 덤으로 얻은 셈이다. 치명적인 단점이 될 수 있었던 주걱턱의 외고집스러움까지도 가뿐히 소멸될 만큼.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얼굴근육에서 풍부한 감정을 표현하는 조앤 쿠색. 그의 귀엽고 발랄한 모습을 멕 라이언이나 줄리아 로버츠의 작위적인 귀여움과 발랄함보다 더 믿어주고 싶어진다면 그건 거만한 스타들에 대한 괜한 질투심의 반작용이 아니라 쿠색의 매력을 충분히 깨달은 사람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박혜명 na_mee@hani.co.kr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

주연보다 더 빛나는 할리우드 조연 12인방 [1]

톱스타 쓰니가 좋아? 쯧쯧‥ 우리도 없으면서 “아 정말 답답하네. 왜 그 사람 있잖아. <**>에서 !!로 나왔던 배우… 정말 생각 안 나? 얼굴이 어떻게 생겼냐 하면….” 이런 식으로 기억의 물꼬를 트게 되는 배우들이 있다. 우리는 대부분 그런 배우들을 조연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말라버린 기억력을 다시 길어올려야 할 만큼 그들이 가치있다는 사실을 그 누가 모를까? 기억을 더듬으며 할리우드의 명조연들 12명을 여기 초대한다. - 편집자편집 심은하 eunhasoo@hani.co.kr 그러니까 그는 출렁거리는 두부살 속에 예민한 촉수를 숨긴 남자 ■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 Philip Seymour Hoffman 1967년 생 주요작 1992 <여인의 향기> 1997 <부기 나이트> 1998 <위대한 레보스키> 1998 <해피니스> 1999 <매그놀리아> 2000 <올모스트 페이머스> 2002 <펀치 드렁크 러브> 멍하니 벌린 입, 창백한 흰 얼굴, 근육질 제로의 두부살, 힘없는 금발머리.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의 모든 것은 ‘무력’이란 말을 표현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부기 나이트>에서 포르노 스타 덕에게 “제발 키스 한번만…”을 애원하다 거절당한 뒤 “이 좆같은 천치야!”라고 자학하던 포르노 중독자로 나왔을 때도, <플로리스>의 게이 가수 러스티였을 때도, <매그놀리아>에서 죽어가는 톰 크루즈 아버지의 남자간호사로 등장해 전화기를 잡고 울먹거릴 때도, 그는 이보다 더 무력할 수 없었다. “나는 마치 놀이터에서 괴롭힘당하고 동정받는 뚱뚱한 소년 같았다. 게다가 스코티, 더스티, 러스티, 죄다 뚱보 소년의 이름 아닌가!” 또한 그는 <리플리>에서 맷 데이먼을 계속 의심하다 죽음을 자초하는 얄미운 역을 맡아도, <올모스트 훼이모스>의 음악잡지 편집장 같은 시니컬한 역할이 주어진다 해도, 심지어 <펀치 드렁크 러브>에서 애덤 샌들러를 괴롭히는 폰섹스 회사 ‘매트리스 맨’ 같은 악역을 맡아도, 악하기보다는 안쓰럽고, 남성적이기보다는 여성적이고, 즐겁기보다는 슬펐다. 때론 세상사에 전 듯한 얼굴로, 때론 세상의 흐름과는 상관없다는 루저의 표정으로, 어떤 것도 할 수 없고,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는 태도로, 그는 스크린을 휘적거리고 다닌다. 뉴욕대에서 드라마와 연기를 전공했지만 배우뿐 아니라 배우 외의 일자리도 얻기 힘들었던 그는 레스토랑 웨이터도 헬스클럽 경호원도 번번이 잘렸고, 실업수당으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여인의 향기>는 그의 삶을 바꿔놓았다. <해피니스>를 함께한 토드 솔론즈나 폴 토머스 앤더슨 같은 독립영화감독들이 앞다투어 그를 원했고, 앤서니 밍겔라, 조엘 슈마허 같은 감독들도 이 독특한 배우를 자신들의 작품에 모셔가는 데 힘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첫 주연작 <러브 리자> 덕에 유명 남성잡지 표지에 실리면서도 “역시 내 머리 크기는 참 비정상적으로 크다”는 자학성 멘트로 날리는 그. “나도 내가 볼품없는 남자란 건 안다. 그래도, 언젠가, 누군가, 최소한, ‘귀엽다’ 정도는 말해주길 기다렸는데 한명도 그런 사람이 없었다”고 한숨 쉬는 그. 혹시 길모퉁이나 버스 한 귀퉁이에서 멍하니 입을 벌리고 힘없는 슬픈 눈으로 앉아 있는 사내와 마주친다면, 꼭 이 말 한마디를 건네길. “아, 당신! 뚱뚱하고 땅딸막하지만, 참 귀엽네요”라고. 그러니까 그녀는 꼬리 아홉 달린 영국신사 ■ 짐 브로드벤트 Jim Broadbent 1949년생 주요작 1985 <브라질> 1990 <인생은 달콤하다> 1994 <브로드웨이를 쏴라> 2001 <브리짓 존스의 일기> 2001 <물랑루즈> 2001 <아이리스> 2002 <갱스 오브 뉴욕> <아이리스>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탄 짐 브로트벤트가 미국 한 TV쇼 인터뷰장에 당도했다. “여기, 호주에서 날아온 짐 브로드벤트를 만나봅시다. 반가워요. 당신은 호주 사람이죠?” 준비성 없는 무심한 쇼 진행자의 질문에 짐은 당황하지 않고 온화한 미소로 대답한다. “죄송합니다. 영국사람인데요.” 그를 만나본 기자들이 “한결같고 조용하고 침착한”이라는 수식어를 이구동성으로 붙이는 사람. 그러나 짐 브로드벤트는 그리 일관성 있는 캐릭터를 선보이는 배우는 아니다. 아무리 그가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서 파티장 뒤켠에서 토끼꼬리를 달고 온 딸 르네 젤위거와 앉아 바람난 아내를 쳐다보며 담배만 뻑뻑 피워무는 신부복입은 불쌍한 가장으로 나왔다고 해도. 아무리 그가 알츠하이머병으로 고생하는 동반자 주디 덴치의 곁을 40년 동안 사랑으로 지키는 순애보의 주인공이었다 해도, 그는 어디까지나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비정하게 외치는 <물랑루즈>의 포주 해럴드 지들러였고, 아일랜드 이민자들을 교묘하게 이용하던 <갱스 오브 뉴욕>의 트위드당의 간사한 보스 윌리엄 트위드였다. 런던 음악연극아카데미(LAMDA)를 졸업해 로열국립시에터,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 등 ‘영국 연기의 엘리트 코스’를 고스란히 밟은 짐 브로드벤트는 주로 연극계에서만 활동해왔다. “사실 잘생긴 친구들은 TV로 바로 직행했던 시절” 그런 그가 공식적으로 영화계로 발을 옮긴 것은 <시간도둑들> <브라질>을 비롯한 테리 길리엄 영화에 단골로 출연하면서다. 이후 마이크 리의 <인생은 달콤하다>에서 희망없는 속에서도 희망을 품은 소박한 요리사 가장으로 등장해 국제적으로 이름을 알렸던 그는 결국 우아한 영국의 티 테이블에서 우디 앨런의 수다스런 뉴욕 식탁까지 당도하게 되었다. 수다라면 떨어질 것 없는 마틴 스코시즈가 <갱스 오브 뉴욕>에 자신을 부른 이유를 “싸기 때문에”라고 대답하는 겸손한 사람. 그러나 이런 그를 뻔한 영국 노인네일 뿐이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아직까지 올해 쉰네살의 이 배우의 꼬리가 몇개인지 본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백은하 lucie@hani.co.kr 그러니까 그녀는 똑똑하다. 멍청하다. 자애롭다. 거칠다 ■ 다이앤 위스트 Dianne Wiest 1948년생 주요작 1985 <카이로의 붉은 장미> 1986 <한나와 그 자매들> 1990 <가위손> 1991 <꼬마 천재 테이트> 1994 <브로드웨이를 쏴라> 1998 <프랙티컬 매직> 2001 <아이 엠 샘> 다이앤 위스트는 <뉴욕 소나타>(1980)라는 소품 수준 로맨틱코미디의 조연으로 영화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까다롭기 그지없는 우디 앨런이 미아 패로, 다이앤 키튼만큼 사랑한 여배우이다. 우디 앨런의 영화 <카이로의 붉은 장미> <라디오 데이즈>에 조연으로 출연했으며 <한나와 그 자매들> <브로드웨이를 쏴라>를 통해서 두번의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거머쥐었다. 미아 패로, 바버라 허시와 함께한 <한나와 그 자매들>에서 다이앤 위스트는 병적으로 강박증을 앓고 있는 텔레비전 프로듀서 미키(우디 앨런!)와 사귀는 여배우로 등장한다. 신경쇠약 직전의 지식인 세계에서 그녀는 충분히 미쳐버릴 만큼 ‘지적이다’. 그런데 웬걸. 8년이 흘러 <브로드웨이를 쏴라>의 다이앤 위스트는 백치와 자아도취로 무장한 한물간 늙은 여배우 헬렌 싱클레어를 연기하여 보는 사람이 미칠 만한 ‘무식함’으로 다시 한번 오스카를 가져갔다. 하여간 다이앤 위스트는 그 지성과 무지의 극단적인 간극을 지금까지도 힘들이지 않고 오간다. 이상하게도 그녀에게는 그런 둘 중 하나의 성격이 자주 맡겨진다. 그리고 대부분 성공한다. <가위손>의 착하지만 어딘가 비어 있는 화장품 외판원 펙 보그 부인, <첩보원 가족 로버슨>의 얼렁뚱땅 로버슨 부인. 또는 <아이 엠 샘>의 착한 아줌마 애니. 또는 영재 출신으로 특수학교를 운영하는 <천재소년 테이트>에서의 제인 그리어슨과 <미스터 커티>의 능력있는 여성 샐리. 그런데 이상한 건, 그녀가 한쪽으로 나아가려고 작정만 하면 우리는 속절없이 바보라고 놀리며 손가락질을 하거나 혹은 반대로 무슨 눈빛을 짓든지 믿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올해로 55살이 된 이 ‘할리우드 아주머니’는 여전히 우리를 헷갈리게 한다. 한순간 세상에는 없는 듯한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어주다가도, 또 언제 말 안 되는 대사를 내뱉을지 모를 일이다. “돈 스피크! 돈 스피크!” 정한석 mapping@hani.co.kr 명조연들을 한꺼번에 감상하는 방법우리는 패밀리, 감독-배우군단 합종연횡 <오션스 일레븐> <위대한 레보스키> 폴 토머스 앤더슨이나 코언 형제, 스티븐 소더버그 등은 알려졌다시피 특정 배우들을 ‘군단’으로 묶어서 편애하는 감독들이다. 일명 ‘패밀리’로 불리는 이 배우집단은 감독의 필요와 상황에 따라 이합집산하면서 그 감독의 영화가 가진 연기력의 퀄리티를 보장한다. 물론 ‘패키지’로 이동하기 때문에 양적 보장은 기본이다. 이미 언급된 앤더슨의 <부기 나이트> <매그놀리아>와 코언 형제의 <아리조나 유괴사건> <바톤 핑크> <파고> <위대한 레보스키> <오 형제여, 어디 있는가?> <거기에 없는 남자> 등의 작품들, 그리고 소더버그의 <조지 클루니의 표적> <트래픽> <오션스 일레븐>은 그들 가문에서 개성으로 승부하는 배우들을 한번에 여럿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황금맥, 말하자면 매력배우 노다지땅이다. 열두명의 리스트에서 아깝게 탈락한 필립 베이커 홀과 윌리엄 H. 메이시, 토머스 제인은 앤더슨 가의 또 다른 대표 멤버들이며, 코언 가에서는 존 굿맨, 존 터투로, 스티브 부세미, 프랜시스 맥도먼드와 같은 일원들이 이 리스트에 합류하는 데 실패했다. 소더버그가 아끼는 흑진주 돈 치들 역시 근소한 차이로 제외된 경우. 어쨌든 이들은 어느 한 캐릭터를 대표적으로 집어내 말하기 어려울 만큼 다채로운 역할과 연기력의 폭을 자랑하는 특급 연기자들이다. 항간에 ‘이것이야말로 감독 자신의 성격이 여러 개로 분열돼 있어 불가피하게 다수의 페르소나를 필요로 하는 데서 오는 현상’이라는 비전문적인 분석 견해가 나돌고 있지만 아직 증명된 바 없다. 또 패밀리 멤버십 서비스는 받고 있지 않지만 회원들과의 충분한 팀워크를 과시한 베니치오 델 토로, 엘리엇 굴드 등도 외면할 수 없는 매력적인 배우들. 가이 리치 감독 역시 <록 스탁 투 스모킹 배럴즈>와 <스내치>를 통해 이전까지 조연 역에 한정해 있던 배우들을 주연급으로 끌어올린 케이스다. 제이슨 플레밍과 비니 존스, 제이슨 스태덤 등이 그의 손에서 컸다. 특정 배우들을 꾸려 가족화하지는 않았지만 쿠엔틴 타란티노의 <펄프 픽션>과 <저수지의 개들>도 조연열전무대. 아만다 플러머, 빙 레임즈, 로잔나 아퀘트가 <펄프 픽션>에 출연했고 이 영화에 등장한 팀 로스는 하비 카이틀, 스티브 부세미, 랜디 브룩스 등과 함께 <저수지의 개들>에도 출연한다. 노장감독 로버트 알트먼의 작품들 역시 여러 인물들이 한 영화 속에 모여 균형있게 조율된 점에서 탁월하다. <숏컷>은 앤디 맥도웰을 위시해 매튜 모딘, 제니퍼 제이슨 리, 구스 반 산트의 <싸이코>의 앤 헤이시, <저수지의 개들>의 크리스 펜 등이 주요 출연진. <고스포드 파크>는 매기 스미스와 마이클 갬본 등과 같은 명노장배우들을 중심으로 이미 여기저기서 소개된 바 있는 연기파 배우진들이 문자 그대로 ‘한떼’ 등장하는 영화다. 바즈 루어만의 <로미오와 줄리엣>, 테렌스 맬릭의 <씬 레드 라인>, 존 매든의 <셰익스피어 인 러브>, 샘 멘데스의 <아메리칸 뷰티>와 <로드 투 퍼디션> 등도 인상적인 조연배우들을 만날 수 있는 통로다. 박혜명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

2003 칸 영화제 결산 - 정성일[8]

이마무라 쇼헤이가 뱀장어에서 인간성의 ‘보편적’ 회복을 본다면(<우나기>), 구로사와 기요시는 해파리에게서 무리를 지어다니는 ‘동시대 도쿄’ 젊은이들의 연대를 본다. 전공투세대가 뱀장어에서 왕성한 생식과 집요한 고향 회귀의 본능을 본다면, 버블경제 세대는 해파리에게서 즉물적인 생존본능과 무조건적인 행진만을 희망한다. 그들에게는 두 가지 사인만이 있을 뿐이다. 가거나, 기다리거나! 계속 기다리라고 말했던 마모루는 죽어가면서 유지에게 둘만이 약속한 사인을 보낸다. “가라!” 이제 유지의 행진이 시작된다. 아무도 그를 막을 수는 없다. 한 마리의 해파리는 유지의 모이를 먹고 수백 마리가 되어서 도쿄 시내를 가로지른다. 그걸 환희에 차서 바라보는 유지의 얼굴 다음 숏은 체 게바라의 얼굴을 담은 티셔츠를 입은 젊은이들, 직장도 없고 목표도 없는 젊은이들, 그들이 좀비처럼 도쿄 시내를 활보하는 롱테이크이다. 그러면 (그렇게 기다려도 알 수 없던, 그래서 거의 지쳐버린 다음에) 이제야 비로소 영화 제목이 뜬다. (가다카나로 쓴) <아카루이 미라이>(‘밝은 미래’). 그것이 정말 ‘밝은 미래’일까? 아, 심금을 울리는구나! <천년에 한번 오는 달>(Mille Mois), 감독 파우지 벤사이디, 주목할 만한 시선 <메마른 눈동자들>(Al Ouyoune al Jaffa) 감독 나르지스 네자르, 감독주간 이 두편의 영화의 공통점 세 가지. 두편 모두 데뷔작이며, 모로코영화이며(좀더 정확하게 <메마른 눈동자들>은 탕헤르 지역영화이다), 두편 모두 심금을 울린다. 그리고나면 두편 사이에는 별다른 공통점이 없다. 파우지 벤사이디의 영화는 동화에 가까우며, 매우 소란스럽고, 인물에 집중하고 있으며, 이미지와 사운드가 불러일으키는 감흥이 있다. 반면 <메마른 눈동자들>은 조용하고, 아주 슬픈 리듬으로 일관하고 있으며, 인물들은 무리지어 다니며, 미장센은 때로 군무를 보는 것 같다. 여기에 두편을 한자리에 부른 이유는 좀 다른 데 있다. 중동지역 영화들이 칸에 오기 위해서 필요한 덕목은 두 가지이다. 그 하나는 (자기 스스로를 낯설게 만드는) 이국성(異國性)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의 영화를 서구영화의 전통 안으로 끌어들이는 고리를 찾아내야 한다는 점이다. 이 말을 (칸에 가고 싶은 한국영화 신인감독들께서는) 주의깊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디아스포라의 정서에 기대면서, 그들 자신의 원시성을 본다. 영화 안의 삶은 누추하고, 비루하며, 봉건적이고, 미신에 차 있으면서도, 정작 그들 자신의 영화는 (서구적인 의미에서) 매우 세련된 포스트 모던의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이 신기한 낯섦과 친숙함 사이의 이중장부의 (서구의 비평담론과의) 거래는 신중하게 토의되어야 한다. <천년에 한번 오는 달>은 모로코의 한 마을 이야기이다. 무대는 1981년. 이 마을에는 천년에 한번 오는 달을 맞이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다. 그리고 그날 마을 사람들은 달을 맞이하러 산에 오른다. 할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소년 마흐디는 아버지가 프랑스에 돈을 벌러 갔다고 굳게 믿는다(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 가 있다). 소년 마흐디는 개구쟁이라서 사고도 많이 생기지만, 그래도 아버지를 기다리면서 나날을 보낸다. 그러나 사건은 계속 벌어지고, 결국 할아버지가 몰래 마흐디 학교 선생님의 의자를 내다 팔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그 동네를 떠나야 한다(회교권 국가에서는 도둑질을 하면 손목을 자른다!). 마흐디에게는 아버지를 만나러 간다고 말하지만, 이제 ‘철든’ 마흐디는 그냥 엄마 말을 믿는 척한다. 결국 동네를 떠나는 그 소원은 이루어진 셈이다. 파우지 벤사이디는 시종일관 쿵쾅거리는 음악과 요란벅적한 소동을 불러일으키면서 소년 마흐디의 시선으로 끌고 나간다. 물론 이것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상황(<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과 에미르 쿠스투리차의 정서(<하얀 고양이, 검은 고양이>)이다. 서로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그 두개의 세계를 벤사이디는 아주 느슨하게 연결시키면서도 끝내 그 어느 쪽의 고리도 놓치지 않는다. 그는 모로코 마을의 삶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그들의 생활을 낯설게 지켜본다. 거기에는 자기 영토의 삶을 ‘발견’하는 것 같은 인류학자의 시선이 있다. 그는 자기의 영토에서 살아가는 대신 그 안에서의 삶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다. <천년에 한번 오는 달>에서의 주인공들인 하위계층(subaltern)은 자기의 삶을 받아들이는 준비론적 패배주의의 비극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그들의 생활을 담아내는 방식을 통해서 서구영화의 미학을 이용하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나르지스 네자르의 <메마른 눈동자>는 그것을 좀더 밀고 나아가서 변방국가의 하위계층의 문제틀과 페미니즘을 서로 뒤섞는다. 산골 깊숙이 자리잡은 베르베르는 창녀들이 모여 사는 지역이다. 이 마을에는 “돈 없는 남자는 들어올 수 없다”. 이 마을의 큰언니이자 포주인 하라의 어머니가 감옥에서 풀려나서 25년 만에 돌아온다. 잊고 살았던 어머니가 고향에 (자기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한 남자와 돌아온다. 마을에는 소동이 일어나고, 그들 사이에서 대립과 갈등이 벌어진다. 나르지스 네자르는 그 소동을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게 그려낸다. 녹색 들판에 붉은 깃발을 세운 화면 위로 온갖 형형색색의 옷을 입은 여인들이 군무를 추듯이 달려가는 스펙터클(마치 구로사와의 영화처럼!). 그리스 무대극을 보는 것 같은 증오와 분노의 제스처들과 비명에 가까운 외침들(마치 앙겔로풀로스의 <방랑극단>을 연상케 하는 상황). 이상할 정도로 로마네스크 스타일의 화면 구도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어머니와 딸을 위하여 지붕 위에서 남자가 벌이는 찰리 채플린의 무성영화를 방불케 하는 슬랩스틱을 통해서 비로소 그녀들의 화해는 이루어진다. 그런데 모로코와 채플린은 어떤 연관성이 있었던 것인가? <메마른 눈동자>는 영화와 현실 사이에서의 상호의존성이 삶을 ‘신비롭고’ (하지만) ‘불완전하게’ 화해시킨다.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의 제3세계 ‘변방’영화들의 경향은 1970년대의 ‘적극적인’ 정치적 실천을 버린 대신 ‘소극적’ 미학의 실천을 자기의 전술로 삼는다. 이들은 저항하는 대신 세계화의 질서 안에서 이미 주어진 삶을 동화, 혹은 신화, 또는 상징이거나 알레고리 안으로 끌어들인 다음 그 안에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파우지 벤사이디의 <천년에 한번 오는 달>과 나르지스 네자르의 <메마른 눈동자>는 정말 마음을 움직인다. 하지만 거기에는 모더니티의 기계장치인 영화의 서구적 수사학으로 담아낸 ‘영원한 미완성의 근대’에 대한 변방의 탄식이 있다. 그들은 원치 않는 일이지만, 자기 영토에서의 패배자들이다. (내 생각에) 그것이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로 시작된 이란영화의 르네상스가 (그들에게, 혹은 우리에게) 넘겨준 유산이다. 서구의 배급구조와 만나야 하는 변방의 영화들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 이것이 칸에 온 남한 영화평론가의 어쩔 수 없는 근심이다(이 글은 아래 글과 함께 읽혀야 한다). 사유의 힘 <새끼 사자들>(Les Lionceaux), 감독 클레르 도이옹, 감독주간 <투쟁> (Struggle), 감독 루드 마데르, 주목할 만한 시선 <삶의 입맞춤> (Kiss of Life) 감독 에밀리 영, 주목할 만한 시선 <수위표>(水位標, Watermark) 감독 조지아나 윌리스, 감독주간 (이 글은 위의 글과 함께 읽혀야 한다) 이 네편의 영화는 세 가지 공통점이 있다. 모두 데뷔작이며, 여성 영화감독의 영화이며, 네명 모두 칸영화제 단편영화 부문 출신들이다(그중에서 에밀리 영은 ‘시네 퐁다시옹’에서 추천받고, 파리에서 그의 경쟁자들과 일정한 과정을 이수했으며, 그중에서 선택되어 장편영화를 찍었다. 텔레라마의 말에 의하면 그 경쟁자 중에는 한국인도 있었다고 한다). 한국 언론들은 칸에 관심이 많으며, 96년 이후 ‘어찌되었건’ 단편영화 부문에 한국영화들이 지속적으로 초대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나는 올해 칸에서 신인감독상의 후보작들을 집중적으로 보았으며(비평가주간을 제외한 전 부문의 신인감독들의 영화를 ‘새벽까지’ 모두 보았다), 그중에서 이 네편의 영화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다. 우선 매우 침통하게 말하자면 ‘현실적으로’ 지금 한국영화의 (상업적인) 구조(와 이를 둘러싼 영화비평의 담론) 안에서는 칸영화제에 와서 신인감독상을 받을 수 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이 결론이다(나는 이 말이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잠시만 참고 읽어주기 바란다). 왜냐하면 여기서와 저기서의 ‘좋은 영화’에 대한 기준 자체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지만, 저기서는 너무 통속적이고, 드라마에 질질 끌려가고 있으며, 상투적이고, 이미 그런 장르의 이야기는 너무 많이 보았기 때문에 따분하다고 생각한다. 그 반대로 이 네편의 영화의 공통점은 보고나면 줄거리를 무슨 수를 써도 요약할 수 없다는데 있다. (억지로라도 요약하자면) <새끼 사자들>은 섬에서 짐승처럼(말 그대로 새끼 암사자들처럼!) 살던 두 자매 앞에 한 소년이 실려오자 벌어지는 질투와 비극의 삼각관계이다. 마치 그리스 비극처럼 보이기도 하고, 부분적으로는 장-마리 쉬트라우프와 다니엘 유이레 영화의 ‘소녀용’ 순정만화 버전처럼 보이기도 한다. <투쟁>은 동구권에서 오스트리아로 불법이민 온 엄마와 딸이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벌이는 생계의 투쟁이다. 이 이야기가 비엔나의 한 남자의 삶과 평행하게 펼쳐진다. 그 둘의 교차점은 매우 끔찍하다. <삶의 입맞춤>은 교통사고로 죽은 아내가 아직 자신의 죽음을 깨닫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려고 안간힘을 쓰는 동안, 동구에 있는 그의 남편은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온갖 교통편을 이용하여 안간힘을 쓴다. 그 둘은 집에 올 수 있을까? <수위표>는 부부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부인은 남편의 과거가 매우 복잡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남편은 과거의 기억이 일으키는 충격 때문에 고통받는다. 그들의 기억은 서로 겹치지만, 때로 비어 있다. 그걸 메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그들의 딸이다. 기억의 사다리, 혹은 퍼즐 맞추기.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사대주의자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대의 영화에 대한 생각이 갖고 있는 미적 좌표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여기와 저기 사이의 간격은 어디서 생겨나는 것일까? 그것은 같은 영화에서 보려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건을 보려고 한다. 그래서 그것이 만들어내는 드라마, 그 드라마 안의 인물, 인물들의 갈등, 인과관계, 세상에 대한 모방, 긴장과 이완, 그리고 대답을 얻으려고 한다. 물론 그것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에 대해서 ‘그런데’ 그것이 영화로 성립될 수 있느냐고 질문할 때 갑자기 사건은 (이야기) 관계의 결과로부터 결과의 (이미지) 관계가 된다. 그래서 영화가 보여주는 도덕적 규칙성이 이야기로부터 이미지에 대한 판단에로 옮겨올 때 입장은 뒤집히게 된다. 결국 영화는 세상을 다시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영화인 세상을 영화가 재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을 성립시키는 숏(들)의 개념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결국 영화 안에 사건이 아니라 사유가 있어야 한다. 칸에 (한국)영화가 오(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동시대의 세상의 영화가 한자리에 모이는 곳에서 영화를 생각해보는 것은 지구 위의 동시대성에 대한 사유의 한 가지 태도일 것이다. 그리고 나의 생각은 그 한 가지 견해이다. 사건으로부터 풀려나와서, 영화에 대해서 사유하는 영화. 결국 칸에 오기 위해서는 시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도깨비처럼 등장한 영화가 나타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우리의 시장이 틀렸다고 호소할 생각은 없다. 또한 우리의 비평담론을 문제삼을 생각도 없다. 그것은 남한이라는 변경에서 영화를 사고하는 우리의 한계이자, 미덕이며, 전통이자, 역사의 귀결일 것이다. 그건 그대로 내버려두자. 그 대신 우리는 ‘지구를 자기의 국적으로 생각하는’ 도깨비를 기다려야 한다. 부정(父情)이라는 이름의 십자가 <아버지와 아들>(Otets I syn) 감독 알렉산더 소쿠로프, 경쟁부문 지난해 소쿠로프는 <러시아의 방주>로 에르미타쥬 성안의 끝도 없이 이어지는 방을 따라가면서 타임머신과도 같은 한 숏의 영화를 만들었다. 어쩌면 그 영화는 디지털영화의 그 어떤 극단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영화가 정말 지루했다. 소쿠로프는 정신적인 영화를 만드는 시네아스트이지 결코 형식적인 불장난에 심취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에게서 영화의 영혼을 보고 싶은 것이지 실험의 형식이라는 시험에 들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미장-타블로(mise-en-tableau)의 우주 안에서 이 모든 것 안을 순환하는 중이다. 하지만 <몰로흐>와 <타우르스>에서 내가 본 것은 이미지들뿐이다. 그러나 소쿠로프는 다시 내 곁으로 돌아왔다. <아버지와 아들>은 5년 전에 만든 <어머니와 아들>의 속편이며, 앞으로 이어질 <두 형제와 누이>와 함께 완성될 삼부작의 가운데 이야기이다. 그러나 방심하면 안 된다. 그는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사람이 아니다. 우선 <어머니와 아들>과 <아버지와 아들>의 ‘눈에 보이는’ 차이점. <어머니와 아들>은 롱테이크의 명상에 잠겨드는 영화이다. 1시간22분 동안 고작 54숏으로 진행되는 이 영화는 아주 간단한 이야기이다. 어머니가 죽음을 맞이한다. 아들은 눈물이 흐르듯이 무너져내리는 세상의 형상을 본다. <아버지와 아들>은 1시간23분 동안 (내 복기가 틀리지 않는다면) 600숏이 넘는다. 두 번째 차이점, <어머니와 아들>이 카스퍼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은 장면들의 연속이라면 <아버지와 아들>은 카라바지오의 그림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카라바지오는 <아버지와 아들>의 더 중요한 차이점인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적인 스크린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소쿠로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와는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둘 사이에는 반복보다는 차이에 방점을 두고 있다. 가장 의미심장한 첫 장면. 마치 피에타 상과도 같은 자세의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 여기서 아버지와 아들의 근친상간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이것은 아버지의 환상이다. 혹은 아들의 향락이다. 그걸 소쿠로프는 일그러진 이미지를 통해서 찌그러진 거울에 비추듯이 외상을 일으켜 보여준다. 소리없는 비명을 지르는 듯한 아들의 벌린 입의 시커먼 구멍. 그건 뭉크의 말없는 비명, 혹은 프란시스 베이컨의 뭉개진 얼굴의 블랙 홀이다. 아버지는 아내를 잃은 다음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아들은 군사학교에 다니고 있다. 그는 아버지와 지나치게 친해서, 그를 사랑하는 연인조차 “아버지가 아니라 형제처럼 보인다”고 질투심을 느낀다. 그리고 그 연인은 결국 아들을 떠나간다. 그 사실이 아들은 괴롭다. 그래서 아들은 아버지를 벗어나려고 애를 쓴다. 아버지는 아들을 떠나보낼 때가 왔음을 안다. 아버지는 말한다. “나는 너의 얼굴을 잊기 시작했다.”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

2003 칸 영화제 결산 [4]

“비극의 원인을 관객 스스로 생각하게 하고 싶었다” 황금종려상과 감독상 휩쓴 <엘리펀트> 감독 구스 반 산트를 만나다 꼭 1년 전 칸영화제는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볼링 포 콜럼바인>을 초청했었다. 미국사회에 전방위적 공격을 가하는 <볼링 포 콜럼바인>은 감독의 선언과 주장과 쇼맨십으로 가득한, 그렇게 떠들썩한 센세이션을 기도한 작품이었다. 그리고 똑같은 소재를 정반대 스타일로 다룬 극영화 <엘리펀트>가 ‘애프터서비스’ 내지 ‘비교체험’을 권장하기라도 하듯이 올해 칸을 찾아왔다. 주관과 분석이 이상하리만치 배제돼 있는 ‘영상시’ <엘리펀트>는 욕구불만의 영화제 내방객은 물론, 잊혀져가는 어린 망자들의 넋을, 조용히 그리고 따뜻하게 어루만져주고 있었다. 심사위원단은 영화제 규정(특정 작품에 상을 몰아주면 안 된다는)을 어기면서까지 <엘리펀트>와 구스 반 산트에게 황금종려상과 감독상을 동시에 안기는 파격적인 결단을 내렸고, <드럭스토어 카우보이> <아이다호> 이후 줄곧 남의 시나리오를 받아 컨벤셔널한 영화를 만드는 데 안주했던 구스 반 산트는 이로써 진정한 ‘시네아스트’로서의 비상을 시작하게 됐다. <엘리펀트>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가을 오후의 교정을 찬찬히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된다. 알코올 중독인 아버지를 데리고 등교한 존, 오다가다 마주치는 친구들의 사진을 찍어주는 엘리아스, 연습을 마치고 여자친구를 만나는 축구 선수 네이단, 수업 시간에 학급 친구에게 이유없이 괴롭힘을 당하는 알렉스, 비디오 게임을 좋아하는 알렉스의 단짝 에릭, 짧은 체육복 바지 입기를 거부하는 미셸, 그녀를 왕따시키는 미녀 삼총사 등등. 이들이 함께한 시간과 공간, 사건은 각자의 시점에 따라 서너번씩 반복돼 보여진다. 별스럽지 않은, 여느 때와 똑같은 일상 위로 <월광소나타>와 <엘리제를 위하여>가 흐르면서, 이들의 마지막 순간은 차곡차곡 쌓여간다. 알렉스와 에릭이 왜 총을 들게 됐는지는, 끝내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우린 구스 반 산트의 말처럼 “장님 코끼리 만지듯” 사건의 언저리에서 맴돌 뿐이다. “모두 죽여버리고 싶었어!”라고 내지르는 대신 “재미 좀 보자”(Have fun)며 총을 드는 아이들. 구스 반 산트는 그처럼 폭력은 어떠한 인과관계나 맥락없이, 우리의 일상을 기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한다. 아름다운 영화 <엘리펀트>는 그렇게 우릴 슬프고 망연하게 만든다. 타이틀이 앨런 클라크의 동명영화를 연상시킨다. 앨런 클라크 감독의 <엘리펀트>는 북아일랜드의 폭력문제를 다룬 영화로, 타이틀은 거대하고 심각한 나머지 누구도 해결하려 들지 않는 골치 아픈 문제를 가리키는 서양 속담 ‘거실 안의 코끼리’의 뜻을 차용했다고 들었다. 나는 장님 여럿이 코끼리의 귀와 다리 등 서로 다른 부분을 만지면서 이게 나무니 뱀이니 하고 다퉜다는 인도의 옛이야기를 생각했다. 아무도 전체를 알 수 없다는 뜻으로. 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콜럼바인>이 나온 뒤인데, 같은 소재를 픽션으로 재조명한 이유는 무엇인가. 1991년 <아이다호> 이후 한동안은 시나리오를 쓰지 않았다. 뭔가 다른 걸 하고 싶었달까. 컬럼바인 사태가 터지고 나서, 이걸 텔레비전영화로 만들어보고 싶었다. 그 사건에 연루됐음직한 캐릭터들의 이야기를 다루기엔 텔레비전이 적합할 것 같았는데, 어느 방송사도 이 프로젝트를 감당하지 못했다. 에서 “<컬럼바인>은 못해도 <엘리펀트>는 할 수 있겠다”는 결단을 내리기 전까지는. 인물의 행동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반복을 통해 특정한 시간대를 강조한 의도는 무엇인가. 나는 이 끔찍한 사건을 묘사하고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됐는지, 관객 스스로 생각하게 만들고 싶었다. 나 자신은 컬럼바인 사태에 대한 견해가 있지만, 영화 속에 드러내진 않았다. 시적인 표현과 인상들을 통해 관객 스스로 대답과 이유를 찾아가길 바랐다. 초반부엔 다큐멘터리의 인상이 강하다. 실제 사건을 영화에 얼마나 반영했나. 사건의 원인이 궁금해서, 이 프로젝트를 기획하게 됐다. 4년간 영화를 준비하면서 많은 변화를 겪었다. 다른 작가가 <토미 건>이라는 초기 시나리오를 내놓기도 했고, 나는 그 사이 <제리>라는 작품을 찍기도 했다. 이후 선정성과 오락성을 완전히 탈색시키는 방향으로 <엘리펀트>의 가닥을 잡아갔다. 스토리는 실제 사건과 상상을 뒤섞어 구성했다. 사건의 배경과 맥락을 설명하고 싶은 욕심이나 충동은 없었는지. 영화를 만들기 전에 <볼링 포 콜럼바인>을 봤고, 정말 영리하고 흥미로운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마이클 무어는 대단한 작품을 만들었다. 하지만 관심의 초점은 나와 다른 것 같다. 나는 총격을 벌인 두 젊은이가 인상적이었다. 지적이지만 미래에 대한 비전이 없는 그들은 자폐적으로 변해가고, 결국 자기 파괴로 나아가면서 다른 이들의 동참을 강요하기에 이른 것이다. 세 배우들은 컬럼바인 사건을 어떻게 기억하고 또 연기했나. (존 로빈슨) 컬럼바인은 엄청난 비극이고, 미국 아이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그 사건을 다룬 영화에 출연하면서, 당시 그리고 지금의 미국 아이들을 대변해야 한다는 사실에 큰 부담을 느꼈다. (알렉스 프로스트) 그 사건은 우리의 친구들에 대한, 학교에 대한 생각과 태도를 180도 바꾸어놓았다. (엘리아스 매코넬) 나는 홈스쿨을 하기 때문에 그 사건을 크게 실감하지 못했다. 그러나 학교에 가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 끔찍한 일인지, 그러지 않아도 되는 나는 얼마나 행복한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어떻게 사람이 사람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앵글을 바꿔 같은 사건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등의 촬영에 모티브가 있었나. 미리 계획한 것은 없었다. 초반에는 8mm 광각렌즈를 썼는데,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느낌이 나서 더이상 쓰지 않게 됐다. 내가 바란 것은 인물들이 학교에서 어떻게 생활하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주욱 쫓아가는 것이었다. 개인적으로 알렉스가 피아노 칠 때 카메라가 뒤에서 바라보는 장면을 가장 아낀다. 학살장면을 보여주느냐 마느냐에 대한 갈등은 없었나. 그 대목을 배제하는 것은 생각해본 적 없다. 이 결말을 향해 이야기 전체가 구축돼 있기 때문이다. 폭력이란 주제를 다루는 방식이 매우 비관습적이다. 한 아이가 다른 아이를 괴롭히는 등의 작은 사건들이 있다. 그리고 이것들은 보는 이의 뇌리에 남아 영화 전체에 대한 이런저런 해석들을 이끌어내게 된다. 폭력이 발생하는 장면에 아름다운 음악이 흐르곤 한다. 어떤 연관을 의도했나. 피아노 연주를 삽입한 것은 아주 우연한 계기를 통해서다. 범인 역을 맡은 알렉스가 피아노 치는 것을 듣고, 다음날 당장 촬영장에 피아노를 갖다놓았다. <엘리제를 위하여>나 <월광소나타>는 피아노를 좀 치는 사람이라면 즐겨 연주하는 곡들이다. 특별한 의도를 갖고 음악을 삽입한 것은 아니다. 총을 난사하는 두 소년이 동성애적 관계임을 암시하는 대목이 있다. 두 사람이 샤워하며 키스하는 장면은 다양하게 해석할 소지가 있다. 그것은 순간적으로 이뤄진 성적 만남이다. 죽음을, 학살을 함께 계획하고 단합하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

그녀들의 집으로 오세요,<장화, 홍련> 세트 [1]

그녀들의 집으로 오세요 핏빛 이야기를 머금은 공간, ‘하우스호러’ <장화, 홍련>의 세트를 방문하다 네 식구가 살 만한 한적하고 전망 좋은 집을 구하신다구요? 정말 잘 오셨습니다. 마침 딱 알맞은 기막힌 물건이 나와 있거든요. 1층만 80평쯤 되는 이층집인데 발코니도 있고 마당도 널찍한데다 온실까지 있답니다. 숲과 저수지가 지척이니까 쾌적하기 이를 데 없지요. 무엇보다 가격도 말씀하신 정도에 맞출 수 있을 것 같고요. 누가 압니까? 제가 주인하고 말만 잘하면 더 싸게도 가능할지. 전에 살던 사람들이요? 젊은 분이 별게 다 궁금하세요. 글쎄요… 뭐 아주아주 조용한 가족이라고 할까요? 행복이 가득한 집이었지요. 주인은 품위 넘치는 양반이었고 부인도 대단한 미인에다가 완벽한 주부였어요. 그뿐인가요. 두딸은 얼마나 해맑았는지. 지금은 뭐하시냐고요? 뭐, 식구들 모두 잘되어서 먼 나라로 가신 걸로 아는데 저도 확실히는… 그래도 계약이 성사되면 연락할 번호는 있으니 걱정마세요. 아 참, 고급스런 가구들까지 고스란히 딸려 있으니 몸만 들어오시면 됩니다. 특별한 추억이 구석구석 묻어 있으니 쓰는 기분이 남다르실 거예요. 이럴 게 아니라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지금 당장 보러 가실까요? 초록빛 저수지를 가로지르는 다리라. 가는 길부터 예사롭지 않지요? 이 다리 끝에서 오른쪽으로 돌면 예전 집주인네 자매가 자주 나와 놀던 자그마한 선착장이 있어서 발을 담그거나 낚시를 할 수도 있습니다. 뭐가 걸리냐고요? 글쎄 엄청 무거운 월척이라도 있는지, 낚싯바늘에 피만 잔뜩 묻혀 돌아간 사람들이 많대요. 자, 다 왔습니다. 마당에 꽈리랑 치자가 참 곱지요? 게다가 신기한 건 몇년 전부터는 심은 사람도 없는데 울타리에는 장미가 기어오르고 물가에는 연꽃이 피더라고요. 이 집의 현관은 특이하게도 깊숙이 숨어 있답니다. 설계자가 부끄러움이 많았는지 현관까지 들어가는 길이 참 좁고 길고 으슥하죠? 이건 복도가 아니라 아예 골목이네요. 워낙 좋은 집이니까 들어가는 데 이 정도 수고는 감수하세요. 초입의 여닫이문에는 옛날 이발소 같은 판유리를 붙였고 집안으로 들어가는 미닫이문에는 간유리를 썼지요. 손님이 드르륵 문을 열기 전에는 누가 왔는지 알 도리가 없답니다. 그럼 1층부터 천천히 둘러볼까요. 맞은편이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입니다. 1930년대인가 처음 지어진 일본식 집이라 구석구석 붙박이 가구가 들어 있는데 계단 아래도 잘 보시면 수납공간이에요. 오래 된 물건이나 흉측한 아니아니, 눈에 거슬리는 물건들을 꼭꼭 처박아두는 데 안성맞춤인 집 아닙니까? 거실이 어둡다니요. 모르시는 말씀, 평소엔 이래도 서재 옆쪽 온실 문만 열면 빛이 와락 쏟아져 들어옵니다. 비밀스런 일이라도 하던 중이라면 갑자기 온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당하는 기분이겠죠? 그리고 위를 한번 보세요. 2층을 빙 둘러싼 아기 침대 같은 난간을 테두리로 거실 천장은 2층까지 뻥 뚫려 있지요? 말하자면 2층에서 왔다갔다하는 사람을 1층에서 볼 수 있고 1층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2층에서 훤히 내려다볼 수 있다는 소리죠. 그림과 벽걸이가 특이하죠? 저기 걸려 있는 죽어가는 듯한 광야의 고목 둥치 그림은 어느 미술도 청년이 그린 자화상이라더군요. 묵직한 샹들리에와 벽난로는 말할 것도 없고 TV까지 운치가 있어요. 1980년대 가전제품이 그런 맛이 있잖아요. 기계 같기도 하고 가구 같기도 한 것이 텔레비전도 문살이 있는 미닫이를 양쪽으로 밀어야 볼 수 있고. 이 거실은 넓어서 잔치치러도 충분해요. 한데 전에 살던 분들은 조용한 생활을 즐겨서인지 통 인적이 드물었어요. 하긴 밤이면 거실 불이 늘 꺼져 있는 게 식구들끼리도 거실에는 잘 모이지 않는 눈치였지만. 그나마 부엌과 주방이 식구들이 다 같이 얼굴을 보는 곳이었다는데. 마침 4인용 식탁인가요? 아니, 구석에 의자 몇개가 더 있군요. 식기장이며 장식장이며 모두 서울 보광동 전문점에서 공수해온 값나가는 앤틱이죠. 그런데 저는 가구보다 벽지에 눈길이 가요. 윌리엄 모리스라는 유명한 영국 장인이 만든 문양을 쓴 벽지라는데, 매직아이 보듯이 가만 응시하고 있자면 꽃잎이 늪에 둥둥 떠가는 것도 같고 나뭇잎 사이로 두눈이 노려보는 것도 같고 정신이 몽롱해진답니다. 어어, 지금도 어지럽네요. 미닫이문 너머가 주방입니다. 식당과 주방 바닥은 통째로 빨강 데코타일을 깔았어요. 왜 이렇게 짙은 빨간색을 넓은 면적에 썼냐구요? 그야… 빨강이 원래 식욕을 돋우는 색이라잖아요. 뭘 흘려도 표가 안 나고. 양념이나 케첩이나 또… 자, 그만 부엌을 보시죠. 부엌 가구는 어차피 바꾸실 테죠? 3층짜리 녹색 냉장고며, 전기밥솥이며 지금은 저래도 70, 80년대 부잣집에서나 구경할 수 있던 물건이에요. 부엌이 남향이라 무척 환하죠? 부엌 바로 위쪽이 막내딸이 쓰던 방인데… 앗, 잠깐! 싱크대 밑은 절대 들여다보지 마세요! 다음 방이나 빨리 볼까요? 해지기 전에 다 둘러봐야죠. 온실 옆방은 이 집에서 제일 오래된 방입니다. 주인 서재였지요. 한데 어째 종이 냄새보다 약 냄새가 지독하죠? 직업이 약사인데다 부인께서 오래 병을 앓다 돌아갔으니까요. 예? 그러니까 아이들 생모 이야기죠. 아, 주인이 재혼을 했거든요. 부인을 돌보던 간호사와 서로 마음이 통했다나. 어쨌든 남자분이 워낙 장식 취미가 없어서 아무래도 방이 칙칙하고 케케하죠? 하지만 염려마세요. 이제부터 보실 방들은 모두 화려하고 화사하니까요. 특히 안방은 한껏 기대를 하셔도 좋아요. 보세요. 들어가는 복도부터 훨씬 천장이 높고 폭이 넓지요? 안방이 자리잡은 공간은, 새 신부 맞을 때였던가 이 집에 새로 덧붙인 동쪽 날개(wing)에 해당하거든요. 방이 멀기도 하네요. 서재나 거실이나 아이들 방으로 가려면 걸어서 한참이겠는데요. 이래서야 안방에 있으면 다른 식구들이 귀찮아서라도 안 찾아오겠네요. 어디 문을 열어보세요. 어때요? 남보랏빛 넝쿨 무늬 벽지에다 흑단처럼 검고 곡선이 날렵한 침대와 테이블이 고급 가구 브랜드의 전시장에라도 온 것 같지요? 하긴 쇼윈도라면 쇼윈도라고 할 수 있지요. 젊은 새 안주인이 전 부인의 체취를 싹 몰아내고 “이제 이 성의 여왕은 나”라고 과시하고 싶지 않았겠어요? 조각이 섬세한 저 삼면경 화장대를 보세요. 말이 부부의 방이지 이건 천상 여자의 방이에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나는 여자야”라는 의식으로 100% 빚어진 ‘이브의 방’이랄까요. 다 보셨으면 이제 2층으로 올라가시죠. 네? 서재까지 이어지는 붉은 자국이요? 이런이런! 아까만 해도 괜찮았는데. 무슨 별난 성분의 염료를 흘렸는지 닦아도 닦아도 며칠만 지나면 다시 마룻장 밑에서 스멀스멀 올라와서 골치네요. 에이, 욕심도 많으시지. 아무리 이런 집이 사소한 흠도 없이 이런 가격에 나왔다고 생각한 건 아니시겠죠? 다시 말씀드리지만, 자녀가 있는 가족이라면 이보다 더 좋은 집은 좀처럼 구하기 힘들 겁니다. 요즘 아이들이란 이제 좀 자랐나보다 싶기가 무섭게 제 방, 제 공간 타령을 하잖아요? 외국영화만 봐도 부모들하고 같은 지붕을 이고 사는 게 지겹다고 뜰에다 텐트를 치고 정원의 나무 위에 판잣집을 지어놓고 나름대로 또래 친구들하고 살림을 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집은 그럴 필요도 없어요. 2층에 아이들 방은 물론 거실도 있고 둘이서 물장난치며 종일 놀아도 넉넉한 큰 욕실에 독립된 발코니까지 딸려 있으니까 독채나 다름없죠. 물론 굶어죽지 않으려면 밥 때문에 1층에 내려오긴 해야겠지만. 하하, 농담입니다. 이리로 와보세요. 여기 2층으로 오르는 계단 끝이 은근히 명당이랍니다. 여기 몸을 접고 앉아 있으면 1층에서는 안 보이고 1층 소리는 다 들을 수 있거든요.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