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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한국영화 결산 [9] - 충무로 10대 사건

1. <공동경비구역 JSA> 대박 <공동경비구역 JSA>의 화력은 대단했다. 2000년 9월9일 전국 110개관 120개 스크린에서 개봉한 <공동경비구역 JSA>는 최단기간인 개봉 보름 만에 서울관객 수 100만명, 10월26일 200만명을 돌파했다. 12월20일까지 서울에서만 240만명을 불러모아 <쉬리>가 세운 244만8천명(서울관객)을 뛰어넘는 건 시간문제다. <공동경비구역 JSA> 돌풍이 예고된 건 개봉 둘쨋주 주말 관객 수. 스크린 수를 늘린데다 입소문이 좋게 퍼지면서 무려 21만3천명이 극장을 찾았다. 이는 <미션 임파서블2>가 개봉 첫주에 세웠던 19만5천명을 넘어선 수치다. 영화진흥위원회와 (주)아이엠픽쳐스가 제공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일찌감치 장기 독주 체제를 굳힌 <공동경비구역 JSA>의 흥행으로 상반기 24.7%에 머물렀던 한국영화의 시장점유율이 30%를 넘어섰다. <공동경비구역 JSA>의 성공은 사실 외적 요소들의 덕도 톡톡히 봤다. 멀티플렉스의 등장 이후 서울에서만 40개관이 넘는 개봉관을 잡을 수 있게 됐고, 남북정상회담 이후 북쪽에 대한 관객의 정서적 친밀도가 높아졌으며, 강제규필름의 <단적비연수>를 비롯해 하반기 대작들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적을 내면서 장기 상영이 가능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소재의 적극적인 발굴, 안정적인 제작시스템 운용, 적절한 마케팅 전략을 구사한 명필름이었기에 가능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2.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극장에서 잔치 벌이다 16mm영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극장 개봉은 ‘뉴스’라기보다는 ‘드라마’에 가까웠다. 97년 겨울 <나쁜 영화> 촬영 때 쓰고 남은 필름으로 단편영화 <패싸움>을 만들었지만 류승완 감독이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3부에 해당하는 <현대인>을 찍고 나머지 2부와 4부를 채워넣을 때까지 햇수로 3년이 걸렸다. 그 사이 신생 제작사인 CNP와 충무로의 A급 스탭들이 헝그리 정신으로 모여들지 않았더라면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극장 개봉은 애초 불가능한 기획이었다. 16mm영화로는 처음으로 극장개봉을 시도한 6500만원짜리 이 싸구려(?) 영화는 서울의 코아아트홀을 비롯 전국 4개관 개봉이 고작이었지만, 첫주 8천명의 관객동원을 기록하며 손익분기점인 1만명에 육박했다. 코아아트홀의 경우 개봉 첫주 1, 2회를 제외하고 전회매진을 기록하는 등 주말 90%, 평일 60% 이상의 좌석점유율을 기록한 것. 급기야 8월5일 35mm로 블로업한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전국 20개관으로 확대개봉했고, 종영까지 8만명을 불러모았다. 극장 수익으로 2억원, 3만장이 팔려나간 비디오 수익으로 4억5천만원, 해외, 방송 판권료를 제하더라도 3억원의 순수익을 챙겼으며, “충무로 외곽에서 만들어진 비주류영화로도 관객과 소통할 수 있다”는 전례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작지만 알찬 수확이었다. 3. 한국영화, 수출 전성시대 2000년 12월11일까지 영화진흥위원회가 집계한 한국영화 수출액은 698만3745달러. 지난해 303만5360 달러에 비해 100% 이상 증가한 수치다. 수출 편수는 99년 58편에서 20편이 줄어든 38편이지만, 작품당 평균 수출단가가 높아졌고 수출국이 11개국에서 24개국으로 늘었다는 점은 일단 한국영화산업의 청신호다. 이는 기획 단계에서부터 국내 제작사들이 해외 마켓을 적극적으로 겨냥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외곽에서 한국영화를 알리는 데 지원을 아끼지 않은 영화진흥위원회의 사업도 큰몫을 했다. 99년 말 홍콩에서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던 <쉬리>는 올해 상반기에는 타깃을 일본으로 바꿔 관객 100만명 이상을 동원했다. 또한 10월29일부터 열린 밀라노 필름 마켓(MIFED)에서 <쉬리>는 유럽 8개국을 상대로 총 39만달러 규모의 계약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5월 칸 마켓에서 일본의 가가 커뮤니케이션에 10만달러에 팔린 저예산영화 <섬> 역시 밀라노 마켓에서 프랑스의 카날 플뤼와 6만달러에 판권계약을 맺었다. 한편 올해 한국영화 최대 수입국은 일본으로 전체 수출액의 79%인 550만9천달러를 차지했다. 내년에는 수출증가율이 크게 둔화할 것이라는 보고서가 나왔지만, 한국영화는 아시아를 수출 거점으로 삼아 당분간 호황을 계속 누릴 것으로 보인다. 4. 칸으로 간 <춘향뎐>, 베니스로 간 <섬> 그토록 두드렸던 문이 열린 것인가? 프랑스의 일간지 <르 몽드>는 2000년 5월13일 개막한 제53회 칸영화제에 네편의 한국영화가 각기 서로 다른 부문에 입성한 것을 두고 “세계영화계를 급습한 한국”이라는 제하의 글로 호기심어린 시선을 보냈다. 이번 영화제에서는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이 경쟁부문에 진출한 것을 비롯해 홍상수 감독의 <오! 수정>이 주목할 만한 시선, 정지우 감독의 <해피엔드>가 비평가 주간,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이 감독 주간에 초청됐다. 한국영화 사상 최초로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은 수상을 하지 못해 아쉬움을 자아냈지만, 현지에서는 “정서적인 힘을 유지하면서도 영상의 구성이 빼어난 거장의 작품”이라는 호평을 받기도 했다. 올해 8월30일 열린 제57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출품된 김기덕 감독의 <섬>은 <씨받이> <거짓말>에 이어 세 번째로 베니스를 찾은 영화가 됐다. <섬>은 기자시사회가 진행되는 동안 두명을 실신시키는 해프닝을 연출한 끝에 “한국의 잔혹극”이라는 말을 들었다. 한 이탈리아 생물보호단체에서는 동물학대의 내용이 담긴 공연이나 영화상영을 금하는 이탈리아 형법을 내세워 <섬>의 상영금지 및 경쟁부문 출품철회를 영화제쪽에 요구했을 정도다. 현지 평들은 몇몇 잔혹한 영화 속 장면들에 충격을 표했지만, 알 수 없는 매혹을 느꼈다는 멘트도 빠뜨리지 않았다. 5. CJ vs 시네마서비스, 배급사 쌍두마차 시대 1999년이 시네마서비스(대표 강우석)의 해라면 2000년은 CJ엔터테인먼트(대표 이강복)가 급부상한 한해였다. CJ는 외화 <아메리칸 뷰티> <글래디에이터>와 한국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를 흥행시키며 2000년 시네마서비스를 능가하는 실적을 올렸다. CJ의 성공은 드림웍스의 외화, 한국영화, 극장체인이라는 3각축이 정상가동한 결과다. CJ는 그간 <바리케이드> <산부인과> <억수탕> 등 몇편의 저예산영화와 <인샬라> 등을 제작해 번번이 시장에서 고배를 마셨다. 98년부터 부분투자 형식으로 한국영화 제작투자에 다시 발을 들인 CJ는 올해 비로소 시네마서비스와 5개 직배사를 능가하는 성적표를 받았다. 반면 지난해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주유소 습격사건> <텔미썸딩>의 잇단 흥행으로 독주하던 시네마서비스는 올해 <비천무>로 체면치레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그러나 시네마서비스의 힘이 급격히 줄었다고 보긴 힘들다. 올해 배급한 영화만 통틀어 20편이 넘는데다 제작사들과 협력관계가 안정궤도에 들어섰다. 현재 시네마서비스와 CJ는 영화시장의 두 마리 공룡이다. 흥행대목인 여름방학시즌에 5개 직배사만 입성하던 몇년 전과 비교하면 괄목할 변화지만 이들 힘센 배급사들 틈바구니에서 군소 배급사들은 악전고투하고 있다. 관계자들은 군소 배급사들 가운데 한두 군데가 CJ와 시네마서비스에 필적하는 배급력을 갖추게 될 것이라 예상한다. 공급되는 물량에 비해 메이저 배급사의 숫자가 부족하다는 판단. 배급사 쌍두마차 시대가 일종의 과도기일 가능성도 있다. 6. 일본영화 3차개방- 애니메이션 개방 지난 6월27일 정부가 발표한 일본대중문화 개방 조치안에는 일본 극장용 애니메이션을 제한 개방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정부는 “일본대중문화 개방이 국내 문화산업을 잠식할 만한 수준이 아니며, 오히려 일본시장 접근을 위해서라도 개방 확대가 불가피하다”고 배경을 밝혔다. 3차개방 직전 전면개방설이 흘러나왔던 것에 비해 소폭개방이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영화인회의, 스크린쿼터문화연대 등은 열악한 국내 애니메이션 산업의 수준을 고려할 때 정부의 개방 속도가 너무 빠르다고 지적했다. 업계의 반응은 또 달랐다. 재패니메이션 상륙이 오히려 국내 관객들의 식어버린 애니메이션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파장은 크지 않았다. 9월30일 처음으로 국내 극장에 걸린 가와지리 요시야키 감독의 <무사 쥬베이>는 서울 시내 3개관에서 개봉, 3만명 이하의 저조한 관객 수를 기록했다. 12월9일부터 상영한 오키우라 히로유키의 <인랑> 역시 스크린쿼터를 채우려는 극장들로 인해 월요일에 개봉하는 등 불이익을 당한데다 마니아층으로 관객이 좁혀져 흥행성적은 좋지 않다. 서울 20개관 이상을 확보한데다 일본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알려진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가 개봉해야 재패니메이션의 위력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7. 멀티플렉스, 아름다운 시절 멀티플렉스는 더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메가박스, MMC, 센트럴6, 정동 스타식스 등 올해 새로 안착한 멀티플렉스가 보유한 스크린 수만 헤아려도 40개. 하지만 아직 극장 포화상태를 걱정할 때는 아닌 것 같다. 5월13일 개관한 메가박스의 사례는 멀티스가 ‘잠재’ 관객을 극장으로 ‘호출’한다는 사실을 통계로 확인시켜줬기 때문. 16관을 거느린 이 ‘공룡’ 극장은 개관한 지 석달 만에 관객 수 100만명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상황이 위험수위를 넘자 종로3가를 중심으로 한 기존 극장들이 대형 쇼핑몰을 기반으로 한 멀티플렉스의 등장에 압박감을 느끼는 것도 당연하다. 터주대감인 서울극장이 25억원을 들여 극장 내부 공사를 했고 단성사와 피카디리 등도 8개관 이상의 복합관 시공 계획을 서두르고 있다. 98년 국내에 처음으로 멀티플렉스를 세운 CJ빌리지와 유통업계에서 탄탄한 망을 자랑하는 롯데 등을 중심으로 이러한 변화는 지방으로 빠르게 퍼지고 있다. 하지만 극장쪽 입김이 거세지고 흥행대작 위주의 프로그램들이 스크린을 독식하면서 오히려 관객은 다양한 영화를 즐길 기회를 빼앗긴다는 비판 여론이 일기도 했다. 씨네큐브 광화문이나 하이퍼텍 나다처럼 좀체 볼 수 없는 아트 계열의 영화들을 선보이는 극장들의 등장이 반가운 것도 그 때문이다. 8. 금융자본, 영화산업 속으로 2000년 초 벤처열풍은 충무로를 휩쓸었다. 투자회수시점이 빠르고 수익률이 높다는 점 때문에 영화는 쓸 만한 벤처기업을 찾는 금융자본들이 군침을 삼킬 만한 메뉴가 됐다. 우노필름이 로커스의 투자를 받아 종합엔터테인먼트회사인 싸이더스 우노필름으로 바뀐 것을 비롯, 시네마서비스가 다국적 벤처자본인 워버그핀커스로부터 2천만달러(약240억원) 투자유치를 받았고 강제규필름은 KTB에서 57억5천만원을 투자받았다. 메이저급 영화사에 대한 직접투자 외에 개별 영화에 투자하는 자본도 투자조합형태로 바뀌었다. 비교적 일찍 영화업에 진출한 일신창투 외에 미래에셋, 튜브엔터테인먼트, 무한기술투자, KTB 등이 100억원대 펀드를 조성, 운용하고 있다. 이들 금융자본의 투자방식은 과거 대기업과 차이를 보인다. 가능한 고정자산을 줄이고 소프트웨어에 집중투자하는 방식. 제작, 수입, 극장, 비디오, 케이블TV 등 모든 유통구조를 일괄공정으로 집중시켰던 대기업과 달리 위험요소를 분산시키는 투자를 선호하는 것이다. 삼부파이낸스나 MCI코리아처럼 부실한 금융자본이 진출했던 경우도 있지만 지금도 금융자본의 영화업 진출은 계속되고 있다. 증시가 불안하고 금리가 낮은 상황에서 투자자에게 영화는 매력적인 상품으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9. 디지털과 인터넷영화, 붐과 거품 올해 4월28일 개막한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 역시 ‘디지털’이라는 세기의 화두를 꺼내들었다. 디지털은 99년부터 칸, 베를린, 로테르담 등 세계 유명영화제의 각종 세미나와 워크숍에 등장하는 단골 주제. 전주영화제의 ‘디지털 삼인삼색’ 프로젝트는 좀더 적극적인 접근시도라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박광수, 김윤태, 중국의 장위엔 감독 등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작업해온 영화감독들이 참여했고, 국내에선 처음으로 디지털 영사 프로젝터를 설치, 상영했다는 점에서 화제가 됐다. 한국의 디지털 네가에서 파이낸싱을 맡아 진행하는 3국 디지털 장편영화 프로젝트도 볼 만하다. 아직 첫선을 보이진 않았지만, 홍콩의 프루트 챈, 한국의 박기형, 일본의 나카다 히데오 감독 등 3국 감독들이 참가했다. 박철수 감독의 <봉자>와 남기웅 감독의 <대학로에서 매춘하다 토막살해당한 여고생 아직 대학로에 있다>는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뒤 키네코작업을 거쳐 극장개봉했고 임상수 감독의 <눈물>은 다가올 1월20일 개봉할 예정이다. 디지털 영사기술이 상용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디지털영화를 배급할 수 있는 최상의 윈도로 인터넷이 각광을 받았지만, <여름이야기> <메이> <파사신검 01412> 등 인터넷영화를 표방한 작품들의 수준은 예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에 비해 김지운, 장진, 류승완 등 세 감독들이 제작한 재기발랄한 단편영화들을 릴레이식으로 인터넷에 올린 (주)씨네포엠의 시도는 돋보인다. 한 인터넷 관련 업체가 파악한 자료에 따르면 현재 영화관련 사이트는 350개에 이르지만, 확실한 수익모델이 없다는 점에서 공통의 고민을 떠안고 있다. 10. 북한영화 개봉, 남북 영화교류 시작 남북의 만남이 뜨거웠던지라 영화도 잠자코만 있을 순 없었다. 올해 7월22일 북한영화로는 처음으로 <불가사리>가 국내 극장에서 개봉했다. 하지만 <불가사리>를 보러 극장을 찾은 이들은 겨우 500여명(서울 기준)에 그쳤다. 북한영화 개봉을 계기로 북한영화를 한국영화의무상영일수에 포함시키냐는 문제가 제기됐지만, 정부는 남북교류협력법에 의거 수입추천심의를 통일부의 반입승인으로 대체하는 선에서 일단락지었다. 99년부터 북한영화 상영 및 북한영화인 초청을 준비해온 부산국제영화제쪽 역시 정상회담 이후 북쪽으로부터 확답을 받지 못해 결국 상영전을 갖지 못했다. 조선아태평화위원회를 통해 <아리랑>의 합작을 준비해왔던 NS21 역시 그동안 창구 역할을 해왔던 조선아태평화위원회가 실질적인 조력 상대가 아니라는 이유로 통일부로부터 사업승인이 아닌 예비승인만을 받았다. 11월에 이뤄진 남쪽 영화인들의 방북이라도 없었더라면 허전했을 터.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비롯한 10인의 영화인들은 확정안은 아니지만 상호 기술 책임자 초청, 학술토론회 개최, 영화제간의 교류, 애니메이션 영화합작 등을 협의안으로 올려놓고, 남쪽 영화진흥위원회와 북쪽 민족화해협의회를 남북 양쪽 창구로 내세웠다는 점에서 활발한 남북 영화교류를 위한 단초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0년 한국영화 결산 [4] - 올해의 영화인

낡은, 그러나 순수한 리얼리즘에 경배 감독, 시나리오...이창동 올해의 영화순위에서 근소한 차이로 1, 2위를 기록한 <박하사탕>과 <오! 수정>은 감독 선정에서도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이창동 감독을 꼽은 이들은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끈질기고 집요하며 사유의 힘을 담아내는 미장센”(유지나), “시대증언, 그 치열한 리얼리즘의 작가정신”(박평식). 이창동 감독은 80년 광주의 기억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80년 5월에 휴교령이 떨어졌을 때 난 4학년이었다. 친구집에 가서 세명이 고스톱을 쳤다. 그중 한명이 나중에 혼자서 유인물을 만들어 배포하다가 잡혀갔다. 우리가 고스톱 치고 있을 때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뒤에 알았다. 어떻게 우린 그랬으며 어떻게 광주에선 그랬을까. 몇 시간 거리를 사이에 두고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이런 상처를 짊어진 사회에 이상이 남아 있을 수 있을까. 그 잔인성을 직접 말하지 않고 이걸 거쳐가는 방법을 알 수 없었다.” <박하사탕>을 “참으로 우리를 슬프게, 또는 곤혹스럽게 만드는 ‘잔인한 형식’의 내러티브”라고 평한 홍성남씨의 말은 이창동 감독의 말과 일맥상통한다. 티없이 맑고 순수했던 한 청년이 철저히 망가지고 부서지는 과정을 거슬러올라가며 보는 일은 참으로 잔인하다. 그것이 가장 우회적이면서 가장 직접적으로 그 시대를 증언하는 일이라는 것을 <박하사탕>은 여실히 보여준다. 널리 알려진 대로 소설가에서 영화감독으로 전업한 그는 전통적 이야기체 영화를 고수하며 리얼리즘 미학의 믿음을 실천하는 감독이다. 하지만 “나는 아마도 가장 낡은 방식으로 영화 만드는 사람 중 하나일 것이다. 이야기 속에 진정성을 담는 게 내 일이라고 믿는다”는 그의 말은 시대에 뒤떨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아니라 유행에 휩쓸리지 않는 굳은 의지를 확인하게 한다. 올해의 시나리오로 <박하사탕>이 선정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이창동의 영화에는 문학의 뿌리깊은 전통에서 뽑아낸 시적 감성과 서사적 유장함이 살아 있다. 그것은 아무리 영화가 첨단영상으로 덧칠된다 해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미덕일 것이다. 프로듀서...심재명, 이은 프로듀서 부문에서 심재명, 이은을 지목한 숫자는 압도적이다. 그만큼 올해 명필름은 두각을 나타냈다. <공동경비구역 JSA>의 엄청난 흥행도 흥행이지만 <공동경비구역 JSA>와 <섬>은 각기 베를린과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됐다. 프로듀서로서 바랄 수 있는 최고의 꿈인 흥행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거머쥔 한해였던 셈이다. 둘의 성공은 흔히 마케팅과 제작능력의 조화가 낳은 결과로 평가된다. 일찍이 <결혼이야기> <그대 안의 블루> <게임의 법칙> 등을 흥행시키며 마케팅의 귀재로 소문난 심재명과 장산곶매 출신 감독 겸 프로듀서 이은의 결합은 <접속>의 성공부터 승승장구였다.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이 기대만한 결과를 낳지 못했지만 <조용한 가족> <해피엔드> 등은 명필름의 안목과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들이다. 결과만 놓고보면 철저한 기획영화라는 오해를 살 수도 있지만 사실 명필름의 영화들이 단순히 프로듀서의 아이디어로 나온 작품으로 보긴 힘들다. <조용한 가족>이나 <해피엔드>는 묻혀 있거나 무산될 뻔한 시나리오와 감독을 발굴한 경우이고 <공동경비구역 JSA>는 영화인 대부분이 위험하다고 판단한 기획이었다. 심재명, 이은 두 프로듀서의 강점은 영화를 보는 정확한 판단력과 기본기를 지키는 합리적 제작시스템에 의존하는 바 크다. 심재명, 이은의 올해 성공을 예외로 볼 수 없는 이유도 그들의 이런 재능이 여러 차례 작품으로 입증됐기 때문이다. 기획, 마케팅, 제작능력을 고루 갖춘 명필름의 행보는 이제 싸이더스 우노필름이나 강제규필름 못지않은 영향력을 발휘할 것으로 보인다. 촬영... 정일성 <춘향뎐>의 정일성, <반칙왕>의 홍경표, <오! 수정>의 최영택, 세 사람이 각축을 벌인 촬영감독 부문에선 <춘향뎐>이 최고로 뽑혔다. 오랜 세월 임권택 영화의 카메라를 잡아온 정일성 촬영감독은 <춘향뎐>에서 한국적 빛과 색의 조화를 잡아냈다. “낙조의 여유롭고 은은한 빛이 만져진다”(박평식), “은은하고 격조있는 이미지의 힘”(유지나), “유려한 한복의 곡선미같이 구비구비 흐르는 빛의 향연”(심영섭) 등 <춘향뎐>의 화면이 보여준 한국적 아름다움에는 장인만이 할 수 있는 섬세하고도 깊이있는 우아함이 있다. 90년대 후반 급격한 세대교체를 겪으면서 입지가 좁아져가는 노장 촬영감독 가운데 정일성 촬영감독의 건재는 반가운 일이다. <춘향뎐>은 급격한 카메라 움직임 없이 느리게 움직이며 처마, 기와, 대들보, 섬돌을 어루만지듯 보여주고 단오에 그네타러 나온 처녀들을 넋놓고 바라보게 만든다. 춘향을 잡으러 가는 포졸들을 비출 때는 유머러스하게, 태형장면에선 아픔과 코믹함이 병존하게, 암행어사가 출동할 때는 격정적으로 움직이면서 빛의 느낌을 그대로 살린 정일성의 촬영은 에로틱한 장면에서도 돋보인다. 병풍과 미닫이문을 살린 춘향과 이도령의 정사신은 배우들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며칠간 되풀이된 걸로 알려졌다. <르 몽드>의 기자 장 미셸 프루동은 “<춘향뎐>은 한국적 미감을 극대화한 작품이라고 느껴진다. 이전의 어떤 한국영화도 이만큼 총체적으로 한국인의 미감을 전해준 사례가 없었던 것 같다”고 말했는데 정일성 감독의 카메라가 한국적 미감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했음은 물론이다. 남자배우...송강호, 설경구 <반칙왕> <공동경비구역 JSA>의 송강호와 <박하사탕> <단적비연수>의 설경구는 공동으로 올해의 남자배우로 선정됐다. 오랫동안 가난한 연극배우로 실력을 다진 두 사람이 올해의 감독으로 꼽힌 이창동 감독의 파트너였다는 사실은 왠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쉬리>에서 다소 부진했던 송강호는 <조용한 가족>에 이어 두 번째 같이 작업한 김지운 감독의 <반칙왕>에서 코믹연기의 정수를 보여줬다. 혼자 드라마를 끌고 가는 부담이 무색하게 그는 <반칙왕>의 무대를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특유의 억양과 사투리 섞인 발성은 배우로서 치명적 단점이 될 수 있는데 역으로 송강호는 그것을 고유의 장점으로 바꿔놓았고 기꺼이 우리 시대의 광대가 됐다.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그가 연기한 노련하면서도 인간미넘치는 북한군인은 송강호의 소탈한 이미지와 자연스러움 없이 동화되기 힘든 인물이다. 철통 같은 반공이데올로기도 송강호 앞에선 맥을 못 추는 듯 보인다. <처녀들의 저녁식사> <송어> <유령> 등에서 빛나는 조연을 했던 설경구는 <박하사탕>에서 온몸의 에너지를 폭발시키는 듯한 연기를 보여줬다. 그는 인간의 이중적 면모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배우로 보인다. <박하사탕>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비교해보면 단적으로 드러나지만 그는 한 장면에서도 악마와 천사의 표정을 동시에 만들어내는 연기자인 것이다. <단적비연수>에서 그가 맡은 적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 그에겐 <박하사탕>의 그림자를 걷어내는 일이 필요하겠지만 어쨌든 설경구의 발견은 올해 영화계의 커다란 성과 중 하나다. 여자배우...이미연 올해 <주노명 베이커리>와 <물고기자리>에 나온 이미연은 두 작품 모두 흥행과 비평 양쪽에서 외면당하는 바람에 빛을 못 봤지만 여배우 기근에 시달리는 영화계에 단비가 된 연기자다. <물고기자리>에서 그녀는 한 남자를 향한 열정 때문에 영혼에 치명적 상처를 입는 여인 애련으로 등장했다. 온전히 애련의 쉽게 내색할 수 없는 감정적 떨림에 의존하는 이 영화에서 이미연은 창백하고 무료한 여인의 일상을 과장없이 그려낸다. 그리고 격정으로 치닫는 후반부에선 깨진 유리를 서슴없이 밟으면서도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를 향해 걸어가는 광기까지 보여준다. 단순히 예쁜 배우로 인식되던 선입견을 여지없이 허무는 것이다. 사실 연기경력 13년인 베테랑 배우이면서도 이미연은 과거 하이틴 스타의 이미지와 결혼 뒤 주어진 배역 사이에서 정당한 몫을 찾지 못했다. <물고기자리>가 영화적으로 높이 평가받지 못한다 해도 이미연 개인에겐 특별한 의미일 것이다. 현재 출연중인 영화 <인디언썸머>에서 그녀는 사형을 목전에 둔 여인으로 나와 변호사와 시한부 사랑을 나눈다. 이미연에 대한 기대감이 어느 때보다 높은 시점이다. 그녀는 “습관적으로 연기하게 될까봐, 멈춰 있게 될까봐 그게 겁난다”고 말했다. 이미연이 지금 성큼성큼 앞으로 내딛고 있는 건 확실하다.

작가주의의 새 지평선을 향하여

12월16일,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앞두고 쇼핑하는 사람들로 붐비는 긴자 거리에서 새로운 영화제 도쿄 필름엑스(TOKYO FILMeX)가 첫문을 열었다. ‘아시아 신작가주의 영화제’라는 부제가 붙은 이 영화제는 국제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아시아영화를 엄선해 좀더 빨리 일본 관객에게 소개하자는 취지로 올해부터 시작됐다. 사전에 ‘기타노 다케시 감독이 주최하는 영화제’라는 보도가 일부에서 흘러나왔지만 기타노 감독은 영화제의 운영에는 관여하고 있지 않다. 그가 소속돼 있는 오피스 기타노와 그 자회사인 T-MARK가 영화제를 운영하고 있다는 것과, 기타노 감독 자신이 작가주의적인 작품을 만들어내는 감독이기 때문에 오해가 생긴 것인지도 모른다. 작가의, 작가에 의한, 작가를 위한 영화제 디렉터인 이치야마 쇼조가 고른 ‘작가주의적’ 상영작품은 경쟁부문과 특별초대작품으로 나뉘어 있다. 24일까지 진행되는 이 영화제의 경쟁부문에는 6개국에서 11편의 작품이 출품되었으며, 이중 최우수작품상과 심사위원특별상 수상작이 선정된다.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 감독에게는 상금이 아니라 코닥주식회사로부터 100만엔 상당의 필름이 다음 작품 촬영용으로 주어진다는 점도 영화작가를 소중히 여기는 영화제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멕시코 영화감독인 아르투로 립스테인이 심사위원장을 맡고 있고 헝가리감독 타르 벨라, 이란감독 자파르 파나히, 부산영화제 아시아영화부문 프로그래머인 김지석, 일본 피아필름 페스티벌 디렉터인 아라키 게이코 등이 심사위원으로 선정됐다. 특별초대작품으로는 5개국 6개 작품과 합작영화 6편 등 총 12편이 상영된다. 이외에 이번 영화제에선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이나 모흐센 마흐말바프 감독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던 70년대 이란감독 소흐라브 샤히드 사레스의 작품들과 젊은 감독들이 만든 신작 비디오도 상영한다. 한국영화로는 경쟁부문에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특별초대작품으로 <반칙왕>, 비디오 프로그램으로 <너무 많이 본 사나이>가 출품되었다. <죽거나…>와 <반칙왕>은 둘 다 흥행작이지만, 동시에 작가로서 감독의 시점이 확실히 나타난 작품이기 때문에 선택됐다. “작가성이 강하다는 것은 아트 계열이고 상업성이 없는 작품이라고 오해하기 쉽지만, 이들 작품을 보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이치야마는 말한다. 현재 일본에서는 감독의 작가성이 전면에 드러나는 작품은 흥행에 성공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도쿄에서만 약 30개의 미니 시어터(일반적으로 1관만으로 작품을 상영하는 극장을 가리킴)가 있지만 순수한 아트계 작품의 흥행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도쿄 필름엑스는 이런 흐름을 거스르고, 작가라는 점을 내세워 다시 한번 관심을 모아보자는, 이치야마를 중심으로 한 스탭들의 강한 의지로 탄생한 영화제다. 영화업계도 이 영화제의 탄생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 영화 관계자는 “이치야마의 작품 선정능력은 아주 신뢰할 만하므로 이대로 몇년간 계속해 나가면 분명 훌륭한 영화제가 될 것이다. 언론도 비평가도 응원해줄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예매 당시에는 관금붕이 감독하고 일본배우 오사와 다카오와 모모이 가오리가 출연한 일본-홍콩 합작영화 <섬 이야기>(The Island Tale)의 인기가 가장 높았다. 중국어권 작품이 그뒤를 이었고, 이란영화, 한국영화 순으로 관심이 몰렸다. 상영 첫날인 17일에는 상영시간 1시간 전부터 열성 팬들이 상영장인 르 테아코르 긴자 극장에 모여들어 찬바람 속에서도 줄지어 개막작품인 사미라 마흐말바프 감독의 <칠판>의 개장을 기다렸다. 심포지엄에서 영화제로 영화제는 12월16일에 행해진 업계, 언론 관계자를 대상으로 한 심포지엄으로 시작됐다. 도쿄 다이이치호텔에서 열린 심포지엄은 2부로 구성됐다. 1부에서는 아시아영화 전문가이며 장선우 감독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중인 평론가 토니 레인즈가 1990년대부터 2000년에 걸친 동아시아영화의 흐름을 돌아보았다. 레인즈는 타이영화계의 부활과 한국영화계의 활황 등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특히 한국에 대해서는 “한국사회 자체의 역동성에 힘입어, 영화문화가 커나가고 있다. 메이저영화가 성공하는 것만이 아니라 아트계 작품, 단편, 다큐멘터리 등에서도 뛰어난 작품이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중국의 경우 정부의 검열이 해외투자자에게 리스크가 되고 있으며 재능있는 감독이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다. 홍콩은 메이저 작품이 줄고 독립작품이 늘고 있다. 또 대만은 큰 제작사가 없어지고 감독이 스스로 자금을 모으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지만, 제작되는 작품의 질은 높다”고 설명했다. 타이나 베트남도 대만과 비슷한 상황이라는 것이 그의 이야기. 2부에서는 ‘아시아에서의 공동제작에 관해’라는 주제로 세명의 패널리스트가 의견을 교환했다. 먼저 부산국제영화제 PPP 디렉터인 정태성씨가 올해와 지난해의 PPP 성과를 보고했다. 이어 <섬 이야기>와 <하나 그리고 둘>의 제작을 담당한 쓰케다 나카오는 “자국 내에서는 좀처럼 자금이 모이지 않는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이 협력해서 ‘메이드 인 아시아’ 작품을 만들어 세계에 선보이고 싶었다”며 공동제작을 하게 된 경위를 말했다. 쓰케다는 또한 아시아영화를 보고 관심을 가진다 해도 감독 이름이나 각본가의 이름만으로는 망설이게 되는 일이 많으므로 해외에서 배급권을 팔기 위해서 영화제에 출품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점, 한번 평가받으면 다음 작품은 반드시 쉽게 풀어나갈 수 있다는 점 등을 이야기했다. 이번 영화제에서는 거의 모든 작품 상영 뒤에 대화의 시간을 마련하고, 회장에 비치돼 있는 데일리뉴스를 인터넷으로도 볼 수 있게 하는 등 관객과 의견을 나누는 장을 만드는 데 특히 신경을 썼기 때문에 상영이 계속됨에 따라 관객의 반응도 점점 좋아졌다. 18일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상영 뒤 예정돼 있던 관객과의 대화가 공항에서 예정된 장소를 향하던 류승완 감독이 교통체증으로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연기되는 등 영화제에서만 볼 수 있는 해프닝도 있었다. “영화제작, 국경을 넘어서"...디렉터 이치야마 쇼조 인터뷰 일본에서 가장 젊은 영화제인 도쿄 필름엑스 회장에서는 그리 많지도 않은 스탭들이 바쁘게 뛰어다니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는데, 디렉터인 이치야마도 예외는 아니었다. 심포지엄이나 관객과의 대화에서 사회를 보는 것뿐 아니라, 매일 발행되는 데일리뉴스를 위한 인터뷰도 혼자서 해내는 ‘너무나 바쁜’ 이치야마를 회장 로비 한구석에서 만나보았다. 이치야마는 원래는 쇼치쿠주식회사 프로듀서로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데뷔작인 <그 남자 흉포하다>나 다케나카 나오토 감독의 데뷔작 <무능한 인간>, 대만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호남호녀> 등의 작업에 참여했다. 이와 함께 1992부터 99년까지 도쿄국제영화제의 ‘아시아 수작영화주간’(현재 ‘시네마 프리즘’) 작품선정을 담당했고, 아시아를 중심으로 수많은 영화작가를 일본에 소개했다. 98년 쇼치쿠를 퇴사한 뒤 오피스 기타노의 자회사인 주식회사 T-MARK에 소속해 있다. -영화제는 어떻게 열게 됐나. =일본에는 외국의 독립영화를 소개하는 영화제가 적기 때문에 이전부터 오피스 기타노나 잘 아는 배급사 사람들과 함께 도쿄국제영화제와 차별화된 작가성이 강한 작품을 모은 영화제를 해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러다 지난해에 사정이 있어서 ‘시네마 프리즘’ 일을 그만뒀기 때문에 새로운 영화제를 개최하기 위해 실제로 활동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올해 4월경에 자금면에서 전망이 보이면서 개최가 정해졌다. -작품선정 기준은 무엇인가. =작가의 시점이 확실히 드러나는 영화다. 작가주의를 명확하게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 도쿄국제영화제와는 다른 점이라고 생각한다. -영화제의 전망은 어떨 것이라 생각하나. =영화제는 관객에게 영화를 보여주는 것과 동시에 영화제작에 어떠한 형식으로든 공헌하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정된 마켓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인재들간의 교류라는 의미에서도 앞으로는 국경을 넘는 영화제작이 증가할 것이라 본다. 일본 국내에도 공동제작을 해보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만나서 의견을 교환하고,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는 장소를 영화제는 제공해 나가야만 할 것이다. -한국영화에 대해 어떤 인상을 갖고 있는가. =최근 4, 5년 사이에 크게 변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세대교체를 확실히 느낄 수 있고, 지금까지의 한국영화와는 다른 감각을 가진 작품이 나오고 있다. 어쩌면 일본, 홍콩, 대만을 비롯한 동아시아권에서 공통된 경향이 나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일본에서도 대히트한 <쉬리>를 보아도, 한국적인 요소가 있긴 하지만 드라마를 만드는 방식이나 액션에서 일본이나 홍콩 작품과 크게 다른 점이 없다. 그러므로 최근의 한국작품들은 일본 관객도 받아들이기 쉽다고 생각한다. 물론 감각이 바뀐 것뿐만 아니라 재미있는 감독이 몇명이나 나왔다는 것도 분명한 일이다. 도쿄=사토 유 통신원

동화, 구호보다 힘센

애니메이션에 대해 글을 쓰다보면 가끔 범하는 오류가 있다. 만화나 동화가 원작인 작품을 소개할 때 원작자를 감독으로 착각하는 경우이다. 쉽게 말하면 <아마겟돈>이나 <아기공룡 둘리>의 감독을 원작자인 이현세와 김수정이라고 소개하는 것이다. 원작자가 애니메이션 작업에 별다른 관여를 하지 않으면 별로 문제가 없는데, 대개 캐릭터 설정이나 각색, 제작, 또는 총감독이라는 이름으로 참여하는 경우가 많아 종종 이런 혼동을 일으킨다. 애니메이션 담당 초창기 때 <은하철도 999>의 원작자로 극장판과 TV 시리즈의 시나리오, 캐릭터 디자인, 제작, 감수 등 각종 분야에 마쓰모토 레이지를 극장판 감독이라고 잘못 소개했다가 한 독자로부터 단단히 훈수를 듣기도 했다. 사실 <은하철도 999>의 극장판 감독은 린 타로이다. 해마다 크리스마스나 연말이면 텔레비전에서 자주 소개되는 <스노우 맨>이나 <파더 크리스마스> 같은 애니메이션도 혼동을 일으키는 작품들이다. 두 작품 모두 영국의 유명한 동화작가 레이몬드 브릭스의 동명 동화가 원작인데, 종종 애니메이션 감독도 레이몬드 브릭스로 소개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레이몬드 브릭스가 애니메이션 스토리와 캐릭터 디자인에 관여했지만, 감독은 ‘지미 데루 무라카미’(Jimmy Teru Murakami)가 맡았다. 애니메이션을 꽤 안다고 자부하는 팬들에게도 조금 낯선 이름인 지미 데루 무라카미는 미국에서 태어나 영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애니메이션 작가이다. 33년 미국 캘리포니아 산 호세 태생이니까 이제 우리 나이로 67살인 노장 작가이다. 그의 작품 스타일은 그가 젊은 시절 UPA에서 일했다는 것에서 쉽게 느낄 수 있다. 디즈니의 안온한 가족주의와 틀에 박힌 그림에 반기를 든 작가들이 스튜디오를 나와 결성한 ‘UPA’의 모토는 ‘애니메이션은 어린이의 전유물이 아니다’였다. 사회적인 풍자나 어른들이 즐길 수 있는 성적 유머도 담을 수 있고, 상황에 따라서는 정치적인 메시지도 담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UPA에 오래 몸담지는 않았지만, 무라카미의 작품에는 그런 반골정신이 배어 있다. 무라카미는 미국에서 유럽으로 건너간 뒤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네덜란드 등을 돌아다니며 애니메이션과 영화를 제작했다. 이 시절 미국에서 건너간 많은 B급 영화감독과도 교류를 가졌는데, 그중 한명이 로저 코먼이다. 국내에서도 출간된 로저 코먼의 자서전을 보면 자신의 영화에서 공중촬영감독으로 활약했던 무라카미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무라카미는 유럽에서 활동하면서 67년 <속삭임>으로 앙시페스티벌 대상을 수상하는 등 활발한 작품 활동을 했다. 72년부터는 아일랜드 더블린에 자신의 스튜디오인 ‘무라카미 필름’을 세워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국내에서 그의 작품을 접할 수 있는 것은 앞서 말한 <스노우 맨>을 비롯해 몇편 되지 않는데, 최근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바람이 불 때>(When the Wind Blows)가 영국 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소개돼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스노우 맨>과 <파더 크리스마스>와 마찬가지로 레이몬드 브릭스의 동명 동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지만, 내용은 앞선 두편과 전혀 다르다. 앞의 두편이 유년 시절의 추억이나 꿈을 귀엽고 친근감 넘친 캐릭터로 표현했다면, <바람이 불 때>는 그처럼 귀엽고 친근한 캐릭터를 통해 핵전쟁의 잔인함과 공포를 비판한 사회성 짙은 작품이다. 2차대전을 겪은 짐과 힐다라는 노부부의 모습을 통해 감독은 관료주의의 허구성과 이데올로기와 정권의 이익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한순간에 죽을 수 있는 핵전쟁의 무서운 모습을 얄미울 정도로 차분하고 절제된 톤으로 그리고 있다. 시각적으로 현란한 그래픽이 등장하거나, 긴박감 넘친 움직임과 편집으로 긴장감을 높이는 것도 아니다. 마치 아이들 머리맡에서 동화를 들려주는 잔잔하고 편한 어조로 말하는 전쟁의 잔인함은 목소리 높인 구호보다 더 절실하게 와닿는다. 김재범/ 동아닷컴 기자oldfield@donga.com

오프라인 불황, 온라인 활황

새 천년의 첫해에 해당하는 2000년도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97년 이후 깊은 침체의 늪에 허덕여온 만화계는 새 천년을 맞아 불황 탈출을 기대했지만 올해 역시 기쁜 소식보다는 우울한 소식이 더 많았다. 다사다난했던 올 한해 만화시장을 결산해본다. 1. 단행본 만화시장, 극심한 불황 올해 만화시장은 단행본 만화의 판매 부진으로 극심한 불황에 시달렸다. 초판 발행부수가 1만부를 넘어선 만화의 종수가 눈에 띄게 줄어든 대신, 손익분기점에 해당하는 초판 6천부를 발행하지 못한 만화가 크게 늘어났다. 심지어 초판 3천부만 찍은 만화도 있다. 단행본 만화시장이 이처럼 ‘고사위기’로 몰리고 있는 단행본 만화의 주된 유통 경로인 대여점 수가 한창 때의 절반에 불과한 1만1천∼1만2천여개로 감소했기 때문. 여기에 눈에 띄는 신작이나 신인만화가의 부재 또한 단행본 만화시장 침체를 부채질하고 있다. 2. 만화잡지 줄줄이 폐간 지난해에는 만화잡지의 창간이 줄을 이었다면 올해에는 만화잡지의 폐간이 줄을 이었다. 올해 가장 먼저 폐간된 잡지는 ‘성인만화잡지의 마지막 보루’로 남아 있던 <빅점프>. 1천원짜리 만화잡지 <히트>나 <쎈> <코믹팬티>는 발행주간을 주간에서 격주간으로 바꾸는 몸부림까지 쳐봤지만 결국 폐간의 운명을 맞았다. 특히 삼양출판사는 <코믹엔진>과 <코믹펀치> 두 잡지를 동시에 접는 아픔을 맛봤다. 한편 올해 창간된 만화잡지로는 대원씨아이의 <해피>와 학산문화사의 <쥬티> 두종의 순정만화잡지와 영지인 시공사의 <기가스>가 있다. 3. 인터넷 만화시장 활황 출판 만화시장의 불황과는 대비되는 것이 인터넷 만화시장의 활발한 움직임이다. ‘코믹스투데이’ ‘D3C.com’ ‘이코믹스’ ‘코믹플러스’ ‘n4’ 등 ‘만화 포털 사이트’들이 잇따라 선을 보였고, ‘클럽와우’ ‘포스트넛’ ‘애니비에스’ ‘엑스뉴스’ 등 플래시 애니메이션 전문 사이트들도 많이 생겼다. 그러나 대부분의 만화 사이트들이 아직 수익모델을 찾지 못해 고전하고 있는 현실. 현재 무료로 서비스중인 업체도 유료화 전환을 계획하고 있어 내년에는 인터넷 만화시장에도 거센 구조조정 바람이 불 것으로 여져진다. 4. 순정만화가 결혼의 해 올해는 ‘순정만화가 결혼의 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순정만화가들의 결혼소식이 잇따랐다. 올해 결혼한 순정만화가는 어숙일, 최경아, 김은희, 원수연, 이빈, 석동연씨. 이중 원수연, 이빈, 석동연씨는 ‘연상연하 만화가커플’로 탄생해 특히 화제를 모았다. 남편은 각각 만화가 강성수, 전호진, 정필용씨. 특히 원수연씨는 8살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결혼에 성공해 ‘사랑에는 나이가 없다’는 말을 증명했다. 최경아씨는 스토리작가인 엄재경씨를 남편으로 맞아들여 지상월-소주완 커플에 이어 두 번째 ‘만화가-스토리작가 커플’을 기록했다. 5. 대형서점 만화매장 재등장 97년 7월 청소년보호법이 발효되면서 만화는 서점에서 자취를 감췄다. 이른바 ‘만화사냥’이 벌어지면서 서점주들이 골치아픈 만화를 아예 팔기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올해 들어서는 대형서점들이 앞다퉈 만화매장을 열고 있다. 먼저 지난 6월 영풍문고가 대형 만화매장을 신설했고, 이어 삼성동의 서울문고가 만화매장을 마련했다. 이에 자극받은 교보문고 또한 지난 11월 97년 이후 3년 만에 다시 만화 매장을 열었다. 여기에 시공사가 인수한 을지서적도 만화매장을 준비중인 것으로 알려져 이제는 대형서점에서 쉽게 만화를 살 수 있게 됐다. 6. 만화 및 애니메이션 관련서 출간 홍수 만화시장의 침체와는 대조적으로 올해는 괜찮은 만화 및 애니메이션 관련서가 쏟아져 나왔다.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만화이론서로 인정받고 있는 <그림을 잘 엮으면 만화가 된다>, 만화이론의 학문적 토대를 닦은 <만화원론>, 우리나라 순정만화 50년을 정리한 <누가 캔디를 모함했나>, 카툰의 역사를 기록한 <카툰-풍자로 압축시킨 작은 우주> 등이 올해 출간된 대표적인 만화이론서. 일본만화 및 애니메이션 관련서로는 <망가 VS 만화>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렇게 창작한다!> <애니메이션은 나에게 꿈꿀 자유를 주었다> <오타쿠> 등이 나왔다. 7. <천국의 신화> 음란 판결 “<천국의 신화>는 음란물이다.” 서울지법 김종필 판사는 지난 7월 11일 열린 이현세씨의 청소년 만화 <천국의 신화>에 대한 1심 판결에서 결국 검찰의 손을 들어줬다. 즉 이씨에게 미성년자보호법 위반죄를 적용, 벌금 300만원을 선고한 것. 만화계는 이에 대해 “만화 창작의 자유를 침해하는 시대착오적인 판결”이라며 반발하며 22개 문화예술단체들과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집단 행동에 나섰지만 아직 만족할만한 가시적인 성과는 거두지 못한 상태다. 한편 이씨는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를 신청해 현재 2심 재판이 진행중이다. 8. 홍콩 만화 인기몰이 화려한 연출, 탄탄한 구성, 깔끔한 전개 등 정통 무협만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홍콩 만화가 어려운 만화시장 속에서도 꾸준한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홍콩 만화 붐의 쌍두마차는 마영성의 <풍운>과 하지문의 <절대쌍교>. <풍운>은 지난해 6월 제1권을 선보인 이래 현재 단행본으로 50권 이상 발매됐다. 권당 1만부 이상 팔렸으니 도합 50만부 이상 팔린 셈이다. <절대쌍교> 또한 30권 이상 발간되며 홍콩 만화의 인기를 이끌어가고 있다. 이 밖에 풍지명의 <패도>, 온일량의 <무신>, 류복성의 <심진기>, 황옥랑의 <신병현기> 등도 무협만화 팬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9. 예술성 빼어난 프랑스 만화 소개 홍콩 만화 외에 탄탄한 회화적 기초와 문학작품 못지않은 스토리 구조로 ‘제9의 예술’이라 불리는 프랑스 만화 또한 활발하게 소개되고 있다. 뫼비우스의 <잉칼:존 디풀의 모험>(글 조도로프스키), 레지스 르와젤의 <피터팬>, 이슬레르의 <쌍브르>(글 발락), 엥키 빌랄의 <니코폴>, 미겔란소 프라도의 <섬>, 파스칼 라바테의 <이비쿠스> 등이 최근 출간된 대표적인 프랑스 만화. 프랑수아 부크의 <제롬 무슈로의 모험>, 샤를 베르베리앙의 <앙리에트의 못말리는 일기장>(글 필립 뒤퓌), 루이 트롱댕의 <종이괴물> 시리즈 등 어린이들이 보기에 좋은 프랑스 만화다. 10. 단행본 만화 판형 다변화 만화 단행본의 판형 변경 또한 올해 눈에 띄는 변화 중 하나다. 일본만화 번역판을 중심으로 지금까지의 사육판(4·6판:128×188mm)에서 일본의 만화단행본 크기 그대로인 신서판(113×176mm)으로 조심스럽게 판형 변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 만화출판사들이 판형을 바꾸는 ‘모험’에 나선 것은 독자들의 구매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다. 즉 좀더 콤팩트한 사이즈의 만화를 내놓음으로써 신선한 느낌을 주는 동시에, 갖고 다니기 쉽게 만들어 독자들이 좀더 만화를 가까이하게 하고자 하는 의도가 숨겨져 있다. 김이랑/ 만화평론가dreamy21@lycos.co.kr

그 소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안노 히데야키 감독의 신작 <식일>(式日)이 지난 12월7일 개봉돼 일본의 젊은 관객을 모으고 있다. 자신의 일과 일상생활에 지친 영화감독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기차 선로에 드러누워 있는 소녀와 만난다. 그녀의 별난 모습과 스스로 ‘의식’이라고 부르며 벌이는 불가사의한 행동에 흥미를 가진 그는 매일 그녀와 만나고 결국 함께 살게 된다. 매일매일 “내일은 나의 생일”이라고 말하는 그녀의 과거엔 무엇이 있었나?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냥 함께 시간을 보내는 가운데 그는 그녀의 과거를 알게 된다. 안노 감독의 두 번째 실사 영화인 <식일>은 할리우드 액션배우 스티븐 시 의 딸인 후지타니 아야코의 소설 <토피몽>을 영화화한 것이다. 영화에서 소녀 역으로 출연, 첫 주연에 도전한 21살의 그녀는 CF, 영화, TV 드라마에서 활약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잡지에 수필도 기고하고 있다. 원작은 후지타니가 17살 때부터 쓰기 시작해 19살에 마쳤고, 시나리오 작업은 그녀, 감독, 프로듀서가 함께 검토해 감독이 마무리했다. 안노 감독의 분신으로 생각되는 극중 영화감독 역에 <러브 레터>의 이와이 순지 감독이 기용된 것도 이 영화의 볼거리. 그는 소녀의 별난 행동을 옆에서 지켜보는 감독 역을 자연스럽게 연기했을 뿐 아니라, 영화 속에서 감독이 비디오카메라로 촬영하는 것으로 설정된 영상도 실제로 직접 찍었다. 감독인 안노 히데야키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와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반딧불의 묘>에 애니메이터로 참여한 뒤 작화감독을 경험했고, TV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데뷔, 히트작인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만들어냈다. 나중에 극장용 장편으로 제작되기도 한 이 작품에서 그는 기존 애니메이션의 표현을 초월한 다이내믹한 액션과 캐릭터를 묘사했고, 주인공의 내면을 깊고 날카롭게 추궁하는 영상세계를 전개하며 많은 젊은이들에게서 열광적 지지를 받았다. 이번 작품에서 ‘눈앞에 있는 것을 그저 아름답게 찍고 싶다’고 생각했던 안노 감독은 시네마스코프 사이즈의 화면을 선택하여 자신의 고향인 야마구치현 우베시의 집들과 거리, 철로, 공장 등을 깊이 생각한 구도로 촬영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소녀가 사는 빌딩은 현실과 허구가 섞이는 기묘한 공간이다. 영화는 그 공간 안에서 소녀와 감독의 일상을 따라가지만 큰 사건은 벌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후지타니 아야코가 그린 그림에 디지털적인 효과를 가미하기도 하고 주인공의 심정을 대변하는 내레이션을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내기도 하는 등 안노 감독다운 복잡한 수법을 다양하게 쓰고 있다. <식일>은 ‘의식을 하는 날’이란 의미이다. 이것은 의식을 되풀이하며 ‘새로운 날’로 뛰어들려 하지 않는 소녀와 그녀를 지켜보는 감독이 함께 내일을 찾는 이야기이다. 도쿄=사토 유 통신원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가능할까? 미야자키 하야오, 그의 대표작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비교적 간략하게 소개할 수 있을까. 내내 고민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지명도를 확인하는 작업은 그다지 실속없을 것 같다. <이웃의 토토로> <붉은 돼지> 등 그의 애니메이션들은 국내에서 재패니메이션과 동일어 수준으로 인식되고 있으니까.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감독이 원작을 쓴, 어느 견지에선 미야자키 감독의 극장용 애니메이션 ‘1호’로 부르기에 적당한 작품이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한마디로, 걸작이다. 따로 설명할 방법을 찾기 곤혹스럽다. 이후 미야자키 감독의 모든 작품을 관통하는 스타일과 세계관, 그리고 주제의식이 한데 뭉쳐서 한편의 애니메이션에 응축되어 있다고 하면 정답에 가까울 것이다. 그래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보는 시각에 따라서 해석이 분분해지고, 때로 모호한 신비감이 감도는 애니메이션이기도 하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미야자키 하야오 원작이다. 원작에서 미야자키는 일본 전래동화를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 제목이 <벌레를 사랑한 공주>로, 중세 시대의 귀족이 곤충에게 강하게 집착하는 와중에 혼례마저 까맣게 잊어버린다는 줄거리다. 여기에 미야자키 하야오는 서구식 영웅담을 가미했다. 근육이 멋진 남성? 아니다. 순수하고 순결하기 그지없으며 타인을 위해 목숨마저 내바치는 여성이다. 이 가녀린 소녀가 상영 시간 내내 스크린 속을 휘젓고 배회한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아무렇지 않은 행동에 관객은 흠짓 놀라게 된다. 타인의 모든 것, 즉 ‘약점’까지 보듬어 사랑하라. 나우시카가 주는 교훈은 하찮은 것이지만, 현실에선 찾아보기 힘든 미덕이기 때문이다. 작은 비행선에 몸을 의지한 채 나우시카는 공중을 부유하고, 괴상하게 생긴 벌레들과 소근거리며 어리석은 인간들을 이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극히 개인적이면서 몽환적인, 동시에 격한 울림을 자아내는 판타지 세계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 어느 정도 완성된 형태에 달한 것 같다. 긴장감과 웃음을 유발하는 벌레들과 마을 함대의 추격전, 그리고 나우시카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세계를 향한 꿈에 이르기까지. 이는 1980년대 이후 재패니메이션이 ‘일본적 스펙터클’에 집착하는 현상과 묘하게 맞물린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감독 개인의 사사로운 판타지를 그려낸 작품이지만, 일본 애니메이션이 나아갈 길을 앞서 제시하는 역할도 한 것이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둘러싼 논쟁도 흥미롭다. 일본과 서양의 평자들은 이 작품에 대해 독특한 해석을 첨부한 바 있는데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 극우 보수주의의 움직임을 읽는 이로부터 좌익 편향까지 다양한 의견이 제시된 바 있다. 참조할 만한 해석은 <공각기동대>의 오시이 마모루가 첨부한 것으로, 그는 “세계대전 시대, 일본 군대의 가미가제 정신을 영상으로 옮긴 애니메이션”이라는 극언을 한 바 있다. 같은 애니메이션이, 환경적 메시지로부터 반전영화, 신화학, 페미니즘 등 다양한 시선으로 독해 가능하다는 점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가 미야자키 감독이 자신의 열정과 신념으로 초지일관한 작품이라는 점을 확신하게끔 한다. 한 가지 더. 그렇다면 이렇듯 외견상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미야자키 감독의 애니메이션에 성인관객이 호감을 느끼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보호’의 모티브가 그들에게 호소력을 지니는 탓도 있을 것이다. 어린이(<천공의 성 라퓨타>)와 자연(<바람계곡의 나우시카>), 그리고 정령(<이웃의 토토로>), 이처럼 힘없고 여린 존재를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한이 있어도 어떻게든 지켜내야만 한다는 것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들려주는, 늘 같은 이야기의 익숙한 변주다. 그 목소리엔 듣는 이가 귀를 막을 수 없도록 하는 단호함이 깃들어 있다. 김의찬/ 영화평론가nuage01@hitel.net 박스/ 캐릭터 열전 제목 : 나우시카/ “푸른 옷을 입고 황금의 들판에 서서 잃어버린 대지와의 끈을 잇고 사람들을 푸른 청정의 땅으로 인도할지니” 나우시카는 이러한 전설을 현실로 만들어낼 인물. 파괴된 자연이 스스로를 복원해내는 재생의 비밀을 알아내고, 자연을 파괴하려는 인간들에 맞서는 나우시카는 미야자키 감독의 대표적 캐릭터다. 힘보다는 타인과 대화하면서 문제를 풀어나가고, 희생정신을 겸비한 나우시카는 완벽한 ‘여신’의 이미지로 읽기에 부족함이 없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나우시카 캐릭터를 만드는 과정에서 감독이 좋아하는 존 카사베츠 감독 영화 <글로리아>(1980)에서 지나 롤랜드의 배역을 유심히 연구했다고 전해진다. 유파/ 부해의 정체를 알아내고자 하며 바람계곡의 전설에 내려오는 구원자를 찾도록 운명지워진 인물. 나우시카의 아버지를 대신해 바람계곡을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지켜낸다. 검술에 능하며 나우시카에겐 아버지에 버금가는 존재. 아스벨/ 페지테의 왕자. 여동생인 라스텔이 토르메키아군에 인질로 잡혀간 뒤 복수를 다짐한다. 작은 비행정으로 토르메키아 군대에 저항하는 무모함을 발휘하기도 한다. 어린 나이에도 비행정을 다루는 솜씨가 익숙하며 나우시카와 우정을 나누는 사이. 비슷한 캐릭터가 미야자키 감독 이후 작품에 곧잘 나오곤 한다. 노파/ 바람계곡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할머니. 앞을 못 보지만 뛰어난 예지능력을 지니고 있다. 마을 사람들에게 구원자의 전설을 자주 들려주곤 하는데 이후 그 구원자를 직접 만나기에 이른다. 바로 나우시카. 거신병/ 산업문명이 창조한 거대한 병기. 지구종말의 직접적인 원인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안노 히데야키 감독이 이 거신병의 캐릭터 디자인에 참여했다.

인간과 자연, 누가 주인이고 누가 손님인가

영화읽기...<바람계곡의 나우시카>와 <원령공주> 일본의 하천 복원운동을 둘러본 일이 있다. 콘크리트 호안을 걷어내고 밋밋해진 흐름을 자연스럽게 되돌려 생물들이 돌아오게 하려는 노력이 전국 어디서나 벌어지고 있었다. 놀라움과 부러움 속에 한 가지 어색하게 느꼈던 기억이 생생하다. 바로 비단잉어다. 희고 노랗고 붉은 빛깔의 비단잉어들을 도시의 어느 하천에서도 볼 수 있었다. 마치 연못에서처럼. 동행하던 일본사람에게 물었다. “왜 자연 속에 인공을 풀어놓는가.” 간단한 대답이 돌아왔다. “비단잉어도 자연이다.” 우리나라에서 상영되고 있는, 또는 조만간 상영예정인 미야자키 하야오의 두 장편 애니메이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와 <원령공주>는 공통적으로 ‘인간과 자연’이라는 큰 주제를 내걸고 있다. 이 영화들은 우리에게 자연에 관한 근원적인 질문들을 하게 만든다. “인간이 지구를 파멸에 몰아넣어도 자연은 살아남을까”, “원시자연은 인간에게 적대적인가”, “도대체 인간에게 자연은 무언가”…. 이런 질문은 보편적인 가치에 서 있다. 어느 특정한 지역이나 민족적 시각으로 풀어낼 문제가 아니다. <원령공주>가 9세기 무렵의 일본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안고 있다고 해도 메시지는 보편적이다. 하지만 작가는 어쩔 수 없이 그가 살아온 시대와 사회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 두 애니메이션에 비친 미야자키 하야오의 자연관은 그래서 우선 일본적이고 나아가 아시아적이기도 하다. 이중적 자연관이 파괴의 주범 서구에서 70년대 환경운동이 싹텄을 때 아시아는 이념적 이상향이었다. 자연과 인간은 뗄 수 없는 하나라는 자연관이 서구의 이원론적 세계관에는 없었다. 아시아에서 자연존중의 가르침은 종교적 신앙과 터부로 뿌리박혀 있다. 덜 먹고 덜 쓰는 금욕적이고 소박한 생활태도가 자리잡혀 있기도 하다. 특히 일본인의 ‘자연 사랑’은 서구인에게 강한 인상을 줬다. 생활 속 어디에나 자연이 있다. 잘 다듬어진 정원, 거의 전 국민을 나서게 하는 벚꽃구경, 자연이 단골 소재인 대중의 시(하이쿠), 풍경화, 건축…. 이것들 모두가 자연이다. 그런데 일본인에게는 또다른 자연이 있다. ‘날것의 자연’ 또는 ‘원시자연’이 그것이다. 이 자연은 공포의 대상이다. 지진과 화산분화, 태풍, 홍수로 다가오는 자연이다. 그래서 원시자연에는 정령이 깃들고 신이 산다. <원령공주>에서 원시자연을 상징하는 숲의 신 ‘시시’는 인간의 자애로운 얼굴과 사슴의 우아한 몸집, 그리고 나뭇가지 모양의 위엄있는 뿔을 지닌다. 그가 지르밟는 발자국마다 꽃과 풀이 돋아나는 생명의 존재다. 그러나 그가 분노하게 되면 감당하기 힘든 저주와 파괴의 화신으로 바뀐다. 나무의 정령 ‘고다마’도 귀엽기 짝이 없지만 기본적으로 해골 이미지인데다 일제히 짤랑대는 소리는 마치 귀신을 부르는 무당의 방울소리처럼 음산하다. 따라서 일본인에게 원시자연은 자연이 아니다. 길들이고 요리해서 문화로 녹여낸 뒤에야만 비로소 자연이 된다. 베르사유 궁전의 엄격한 대칭성은 단지 문화이지만, 자연을 본떠 꾸민 일본의 정원은 자연이다. 나무의 자연스런 성장을 억누르고 비비 꼬이게 만든 분재도 일본식 자연이다. 생선회는 일본의 자연관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음식이다. 사시미(생선회)는 ‘요리된 날것’이고 따라서 가장 사랑받는 자연식이다. 이런 이중적 자연관을 알아야만 일본이 국내외에 저지른 수많은 자연파괴와 환경오염을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일본은 서구국가들과 마찬가지로 1천여년 전부터 자연을 정복해왔다. <원령공주>의 배경이 된 600∼850년과 1570∼1670년 사이에 일본의 원시림은 대부분 벌채해 사라졌다. ‘에보시’가 이끄는 타타라 제철집단은 산업화 세력이자, 귀신이 출몰하는 원시자연을 미학적으로 추상화한 친근한 자연으로 바꾸어주는 은인이기도 하다. 그 결과 일본은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토목공사의 왕국이 됐다. 댐이 건설되지 않은 하천은 손에 꼽을 정도이고, 해안선은 빙둘러 거의 모두 간척 매립됐다. 환경보건학 교과서에 나오는 인류 최악의 공해병은 모두 일본에서 처음 발생했다. 미나마타 수은중독, 이타이이타이 카드뮴 중독, 다이옥신에 의한 가네미유증, 요카이치시 천식…. 국내뿐만이 아니다. 일본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목재 수입국이다. 그 바람에 아시아의 열대림이 결딴나고 있다. 세계 수산물의 10분의 1을 일본인이 먹어치운다. 참다랑어 등 일부 대형 회유어류는 일본인의 입맛 때문에 멸종위기에 몰렸다. 지나간 얘기지만 한반도에서 호랑이, 표범, 곰, 늑대 등이 멸종하게 된 치명타는 일제 때 일본이 벌인 대대적인 ‘해로운 동물 구제사업’이었다. 울릉도를 비롯해 원시림 지대가 대부분 벌목된 것도 일본 통치 때였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의 다른 나라도 이런 자연관과 행동방식의 괴리는 마찬가지다. 아시아가 유럽 못지않은, 오히려 더욱 심한 자연파괴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남의 탓이 아니다. 인간중심적 자연개발, 그 오만한 타협 숲에 침입한 사람들이 들개를 만나자 제 목숨만 살려고 내던진 여자아이 ‘산’(원령공주)은 자연의 수호천사이지만, 생태주의를 상징하기도 한다. 타타라바의 수장 에보시는 “숲에 빛이 들게 하고 들개를 물리쳐 원령공주를 다시 사람이 되게 하자”고 말한다. 현대문명에게 생태주의는 숲을 지키는 들개처럼 귀찮은 존재가 분명하다. 들개를 제외한 원숭이나 멧돼지 같은 숲의 다른 동물들은 ‘산’을 의심한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근본 생태주의자나 급진적 동물해방론자의 곤란한 처지가 떠오른다. 에보시의 손에 숲의 신 ‘시시’는 목이 잘린다. 원령공주와 주인공인 아시타카는 힘을 합쳐 목을 빼앗아 다시 붙인다. 그러나 ‘산’은 “신은 죽었다”고 고집한다. 그는 타협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현실은 이미 신이 죽었음을 보여준다. 자연은 길들여지고 있다. 비무장지대 군초소에서 버리는 음식찌꺼기를 먹으러 매일 찾아오는 멧돼지부터 일본 대도시 하천의 비단잉어까지, 그것을 증명한다. 아시타카와 ‘산’의 사랑은 그런 화해를 상징하는 것 같다. 무차별적 개발이 아닌 환경친화형 개발, 세련된 자연보호, 자연하천 만들기와 같은 환경복원은 사실 그런 타협의 결실이다. 아시타카는 산업문명을 상징하는 에보시에게 이렇게 말한다. “원령공주와 마찬가지로 네 속에도 악마가 들어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런 얘기를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신이 죽은 뒤 인류문명이 지구를 망가뜨린 먼 훗날을 그리고 있다. 몰락 이유가 전 지구적 핵전쟁인지(이 영화는 공산권 붕괴 이전인 1984년에 개봉됐다) 아니면 환경오염인지 분명치 않다. 어쨌든 지구의 환경은 인간이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게 됐다. 독기를 내뿜는 거대한 곰팡이 숲과 기괴한 곤충들, 그리고 염산호수로 가득한 ‘부해’가 지구를 뒤덮는다. 인류가 지구에서 우점종의 지위를 물려준다면 아마도 바퀴 같은 곤충이 최우선 후보일 것이다. 바퀴는 사람이라면 죽을 방사선의 50배까지도 견뎌낸다. 만일 <바람계곡…>처럼 산소가 없는 곳이 많아진다면 곰팡이가 숲의 자리를 차지한다는 발상도 그럴듯하다. 일본의 옛 설화에 나오는 곤충을 사랑하는 별난 공주의 설정을 빈 나우시카는 숲과 개울과 바람이 있는 작은 공동체를 이룬다. 풍력과 농사에 의존하는 이 마을은 현대의 과학기술 문명이 결국 자급자족적인 소규모 공동체로 회귀할 것이란 예언처럼 보인다. 나우시카는 부해를 태워 없애고 인류문명의 부활시키려 하는 다른 호전적 부족들로부터 오염된 지구를 정화하는 것으로 밝혀진 곰팡이 숲과 그 수호자인 곤충괴물 ‘오무’를 지킨다. 이런 그의 노력은 <원령공주>의 주인공 아시타카의 그것과 비슷하다. 인간중심주의라는 점에서 그렇다. 태고적 지구, 될살아나다 곰팡이 숲과 곤충들이 인간이 살기 적당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인간이 저질러놓은 오염물질을 정화한다는 대목은 흥미로운 발상이지만 오해의 소지가 있다. 영화가 나온 뒤 완성된 만화는 단순한 해피엔딩이 아니라고 들었는데, 바로 이 대목이 아닐까 싶다. 부해는 인간이 바꿔놓은 환경에 적응해 나타난 생태계이다. 그것을 다시 인간에 맞는 생태계로 바꾸어놓으면 부해는 죽고 만다. 자기가 죽는 쪽으로 적응하는 생물은 없다. 설사 부해가 사라지는 쪽 진화가 이뤄진다 해도 그 기간은 까마득하게 마련이다. 자연에 진화는 있을지언정 이타심은 없다. 일개미들이 사회성 위를 따로 가지고 아무나 더듬이로 신호를 보내는 개미에게 먹이를 나눠주는 것은 착한 심성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이기심에 가깝다. 개미사회에서 자매들은 자기와 유전자가 4분의 3이나 똑같다. 개미의 유전자 입장에서 보면, 자매 개미에게 밥을 먹이는 것은 자기가 밥을 먹는 것과 거의 마찬가지이다. 사실 지구에 생명이 살아온 35억년은 인류가 존재한 약 500만년과는 비할 바 없이 긴 세월이다. 지구로 볼 때 오히려 인류가 없는 상태가 정상에 가깝다. 이를테면 산소만 해도 그렇다. 생물이 처음 출현했을 때 지구에는 산소가 없었다. 광합성을 하는 녹조류가 산소를 대기에 뿜어내고 한참 뒤까지 많은 생물에게 산소는 독가스였다. 그 후예가 아직도 많다. 술 담글 때 마개를 꼭 막는 것은 산소를 싫어하는 발효균이 잘 자라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런 점에서 <바람계곡…>은 인류의 미래보다는 지구의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 특히 거대한 곰팡이 숲을 날아다니는 수많은 기기묘묘한 곤충들의 모습은 약 5억4천만년 전 캠브리아기 생물폭발을 연상시킨다. 당시 바닷속에는 처음으로 딱딱한 몸을 가진 온갖 생물들이 돌아다녔다. 마치 조물주가 찰흙빚기 놀이를 하듯이 상상할 수 있는 온갖 형태의 생물이 태어났다. 아쉽게도 그 대부분은 나중에 멸종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조물주의 상상력은 부분적으로나마 부활한다. <원령공주>에 나오는 시시 신과 야클 그리고 <바람계곡…>의 날개 3쌍인 잠자리와 연꼬리처럼 기다란 날아다니는 벌레, 오무는 상상의 동물인 것이 아쉬울 정도로 아름답다. 영화 배경에 나오는 숲과 붓꽃 같은 식물, 물총새나 백로 같은 동물의 사실적인 모습에서는 자연에 대한 꼼꼼한 관찰력과 애정이 느껴진다. 조홍섭/ <한겨레> 과학전문 기자ecothink@hani.co.kr

치맛바람 계곡의 아줌마?

겨울시즌에 아이들이 볼 만한 영화가 여러 편 쏟아져나온 건, 아줌마로서는 다행이었다. 영화보기는, 남한테 뭘 가르치는 일에는 영 소질이 없거니와 자식교육에는 더더욱 소질없는 아줌마가 딸들한테 해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교육적 배려’였던 거다. 그래서 추위와 눈발을 헤치고 애들을 끌고 다니면서 <치킨 런>도 보고 <그린치>도 보고 <포켓몬스터>도 보고 오늘의 얘깃거리인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도 보았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취학 전 어린이들에게는 확실히 좀 어려운 영화였던 것 같다. 영화 보는 내내 딸들의 질문공세에 시달려야 했는데, 후반에 접어들면서 질문의 주종은 “끝나려면 아직도 멀었어?”로 바뀌었다. 아줌마 자신은 영화에 몰입해 있었으므로,스무 번째로 “아직 멀었어?”를 묻는 둘째 딸래미 머리를 쥐어박았는지 험상궂게 째려봤는지 어쨌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그때가 영화의 클라이맥스, 그러니까 오무들이 황금빛 촉수를 모두어 죽은 나우시카를 되살려내는 황홀한 장면이 한창 스크린에 펼쳐지는 순간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아줌마쪽에서 약간의 폭력적인 제압행위를 했을 개연성은 있다). 어쨌든 우리말 더빙이 된 <포켓몬스터>를 볼 때 아이들이 보인 열화와 같은 반응을 생각하면, 애들이 지루해 한 이유는 엄마와 영화 취향이 달라서가 아니라는 건 분명했다. 그렇다면 아줌마는 왜 아이들을 데리고 <…나우시카>를 보러 갔을까? 우리말 더빙이 돼 있지 않다는 건 사전에 알았고, 그렇다고 핵전쟁이나 환경파괴, 인류의 구원 따위 어려운 개념을 예닐곱살짜리들에게 알기 쉽게 설명해줄 자신도 없으면서(다행하게도, 착하게 굴지 않으면 혼난다는 사실을 잘 아는 아줌마의 효녀들은 기껏해야 “오무는 왜 그렇게 눈이 많아?” 정도의 간단한 질문만 했다. 그 정도의 난이도 앞에 서도 아줌마는 쩔쩔 매면서 기껏해야 “응, 만화니까 그래!”라는 무식하고 무성의한 대답밖에는 못 내놓지만). 그 유명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이니까? 심오한 메시지를 담고 있으니까? 그림이 예쁘니까? 분명한 건, 아줌마는 아이들이 극장에서 그런 수준 높은 애니메이션을 본다면 좋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는 거다. 그런데, 한번 스스로에게 그 이유를 묻기 시작하니까, 점점 더 대답하기가 어려워졌다. 뜻도 모르고 봤다 하더라도 그 아름다운 영상만으로도 아이들한테는 안 본 것보다는 나은 것일까? 그렇다면 그건 왜 그렇지? <포켓몬스터>는 아이들이 졸라서 마지못해 보여주었고, <…나우시카>는 아줌마가 골라서 보여준 영화였다. 그 두 영화의 관람체험이 아이들에겐 어떤 질적 차이가 있을 것인가? 지난 가을, 아이들을 데리고 평양교예단 공연을 보러 갔던 일이 생각난다. 관람료는 좌석당 물경 7만원이었는데, 아이들한테 좋은 문화경험이 될 거라는 확신 아래 아낌없이 돈을 지불하기로 했다. 그런데 큰딸은 공연 초반에 드르렁 쿨쿨 잠들어버렸고, 둘째딸은 중반 접어들자 몸을 비틀기 시작했던 거다. 시종일관 박수치고 눈물 콧물 흘려대면서 아이들한테서도 그에 상응하는 열광을 기대했던 아줌마는 딸들의 이런 교양없고 돈 아까운 줄 모르는 배신행위에 큰 상처를 받았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어린 딸들과 냉전을 벌이며 분을 삭여야 했다. 분단이나 통일이 뭔지 모르는 아이들에게 ‘평양교예단’이라는 이름과 그들의 묘기가 살아 있는 피카추의 그것 이외에 또 무엇이겠는가 하는 생각은, 당시에는 들지 않았다. <…나우시카> 얘기로 돌아가서, 화면이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취학 전 아이들이 뜻도 모르고 보기에는 상영시간 두 시간이 너무 길다는 걸, 당시에 아줌마는 인정하지 않았다. 줄거리를 이해하고 보는 <…나우시카>와,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보는 <…나우시카>는 완전히 다른 영화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래가지고서야 좋은 거라면 억지로라도 먹이고 보는 ‘치맛바람 계곡의 아줌마’밖에 더 되겠나. 아니, 이렇게 반성할 자유라도 있으니 지금은 사정이 나은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 3월이면 학부형이 되고, 그렇게 되면 제아무리 발버둥쳐도 치맛바람 계곡으로 등떠밀리게 될 것이다. 20년 만의 폭설이 아무리 덮고 또 덮어도, 아줌마의 눈에 비치는 세상이 조금도 아름다워지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최보은/ 아줌마choibo@hani.co.kr

180도 뒤집어본 오즈

하스미 시케히코 지음·윤용순 옮김/ 한나래 펴냄/ 1만6천원 당대의 오즈는 이를테면 국민 감독이었다. 오즈는 일본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감독이었고, 오즈의 영화는 가장 일본적인 영화로 통했다. 그의 서민극 혹은 ‘홈드라마’가 지닌 견고한 탈정치적 일상성은 혈기방장한 후배들의 표적이 되기도 했지만, 그것이야말로 일반 관객에겐 오즈적 세계의 한결같은 친숙함과 안온함의 표지기도 했다. 1970년대 이후 오즈 영화의 불가해한 형식미엔 기라성 같은 서구 학자들의 연구성과가 헌정됐지만, 이런 와중에도 오즈 미학의 뿌리는 선이나 명상 같은 일본적 또는 동양적 정신성에서 종종 찾아졌다. 국민 감독 시절보다 더욱 견고하게 일본적인 감독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하스미 시게히코의 <감독 오즈 야스지로>는 이런 통념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저서다. 도쿄대 총장이며 일본의 대표적 지식인 가운데 한 사람인 하스미는 오즈의 영화를 영화의 한계에 도전하는 영화, 일종의 아방가르드적 에너지로 충만한 영화로 보는 것이다. 그는 앞선 연구자들과는 달리 오즈의 미학적 원칙을 비서구적인 전통에서 찾는 데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이를테면 하스미는 ‘프레임을 비움으로써 채움을 넘어선다’는 투의 부정의 언술로 오즈를 설명하는 방식을 피한다. 그것은 서구학자들을 미혹케 할 만한 수사긴 하지만, 오즈의 텍스트들이 지닌 풍부한 의미를 포기하는 행위다. 문제는 개별 텍스트들인 것이다. 하스미는 오즈의 텍스트들의 안팎을 바람처럼 넘나들며 놀라운 지적 오디세이를 감행한다. 이 시도가 감독론으로선 유례없이 드라마틱한 에세이를 낳는다. 이 책은 요약이 불가능하다. 체계 세우기에 관심 없는 하스미는 “이 화면에서 저 화면으로 질주하면서 섣불리 그 하나를 특권화하지 않는 것”이다. 텍스트들 사이를 질주하는 그의 글은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의미의 명멸을 목격한다. 그 의미 가운데 크고 작은 것을 가려내는 게 아니라, 명멸하는 의미들의 추적 과정 자체가 하스미의 오즈론의 중심이다. 오즈는 의미를 가두지 않고 형식과 내용 양면에서 열어두었고, 그것이 작가로서 오즈의 위대성인 것이다. <만춘>의 한 장면을 12쪽에 걸쳐 분석하는 마지막 장은 하스미식 비평의 역동성을 거의 감동적으로 체험케 한다. 홀아비인 아버지(류 치슈)와 노처녀 딸(하라 세쓰코)이 한 이불을 덮고 대화를 나누는 숏에 이어 달빛 창가에 실루엣으로 비친 항아리가 등장한다. 하스미가 보기에 이건 근친상간적 욕망에 대한 억제이고, 억제의 상투성과 그 상투성의 승리를 그대로 드러내면서 비애를 감추는 오즈의 길이다. 이것이 한없이 감동적이지만 하스미는 “그 감동의 질을 분석할 의욕을 거의 버리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힌다. “보는 이에게 남겨진 것은, 하라 세쓰코와 더불어 처음 찍은 이 작품을, 2층 방을 공허하게 남긴 채 끝냈다고 하는 사실일 뿐이다.” 하스미는 자신의 활주하는 언어를 쫓아온 사람이라면 결국 공명하지 않을 수 없는 결론에 이른다. “무(無)란 한편의 영화 속에 그려져 있는 게 아니라 보는 도중에 겪게 되는 체험이다. 그것이 잔혹함과 경계를 접하는 쾌락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의미 탐색의 부담을 수사로 피해가는 대목들이 눈에 띠긴 하지만, 텍스트와의 대화란 이런 경지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감독 오즈 야스지로>는 분류와 고정에 익숙해진 평자들에겐 모든 면에서 신선한 충격이 될 것 같다. 허문영 기자 moon8@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