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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9404)

백인우월주의에 똥침을!

“유럽 개발도상국들, 아프리카 담배산업의 표적되다.” “캘리포니아 폭도들, 148일 만에 아프리카 인질 석방.” 때는 2001년 상반기. 이라는 아프리카의 어느 일간지에 이런 기사들이 연이어서 1면 톱을 장식한다. 세상이 개벽하는 순간인가? 이 무슨 아프리카 붐이란 말인가? 베트남에서 장동건 같은 스타가 한국 붐을 일으키고, 홍콩에서 안재욱이 그들의 가슴에 별로 떴다는 얘기는 있었다. 중국·대만·베트남 등 동아시아에서 한국 대중문화의 인기가 치솟는 현상에 힘입어 불어닥친 이른바 한류(韓流) 말이다. 이처럼 ‘아시아에 부는 한류 열풍’이라는 얘기는 심심찮게 들어봤어도 아직 ‘서방을 강타한 아프리카 열풍’은 입에 오르내린 적이 없는데…. 우리가 모르는 새 서양에 바야흐로 아프리카류의 바람이 불어오기라도 했단 말인가? 누군가가 날조한 기사인가? 아니면 아프리카의 민족주의자들이 흑인들 기살리기를 위해 연출한 자작극인가? 더이상 헷갈리기 전에 이쯤에서 기사의 정체를 밝혀야겠다. 올해 칸광고제에서 인쇄부문 그랑프리를 받은 디젤(Diesel)의 ‘for successful living’ 캠페인에 등장한 카피들이다. 백인에 대한 무차별 공격과 통쾌한 조롱을 하면서 디젤 진을 입은 한 무리의 흑인들이 후련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는 대목이다. 제3세계의 서방에 대한 ‘처절한 똥침’이 왁자지껄한 사진장면들에 넘쳐흐르고 있다. 광고가 만들어낸 가상현실. 아니, 미디어가 만들어낸 가짜현실이다. 마셜 맥루언의 견해처럼 그야말로 미디어는 메시지다. 상업적 목적을 위해 하나의 그럴듯한 미디어가 만들어지고 밀가루 반죽처럼 주물러진 현실이 그 안에 담기는 것이다. 기상천외한 표현을 일삼던 디젤 청바지가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올해에는 <데일리 아프리카>라는 가상의 신문을 하나 창간하기에 이른 것이다. 흑인들의 인종 콤플렉스를 마사지하고 있는 광고. 마치 흑인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것 같지만 아니다. 광고주나 제작자, 모두가 백인들인 만큼 백인들의 아량과 여유가 한껏 과시된 패러디풍의 하이코미디라고 할 수 있다. 신문기사가 현실을 비꼬고 조롱하는 것이 유례없는 일은 아니다. 우리나라에도 저 유명한 <딴지일보>가 있지 않은가? ‘한국농담을 능가하며 B급 오락영화 수준을 지향하는 초절정 하이코메디 씨니컬 패러디 황색 싸이비 싸이버 루머 저널’을 자임하는 풍자전문지 말이다. 이 엉뚱한 신문처럼 ‘인류의 원초적 본능인 먹고 싸는 문제에 대한 철학적 고찰과 우끼고 자빠진 각종 사회 비리에 처절한 똥침을 날리는 것을 임무로 삼는’ 현실 패러디에 이란 가짜매체가 동원된 것이다. 디젤은 1985년 이태리의 Renzo Rosso가 발족시킨 작업복/청바지 브랜드이다. 이 제품이 지금처럼 독특한 개성의 컬트브랜드로 거듭나게 된 것은 1990년 스웨덴의 스톡홀름에 있는 DDB Paradiset이라는 광고대행사를 만나고부터다. 특히 ***우리말로 옮겨주세요Joakim Jonason이라는 걸출한 아티스트에 의해 진행된 ‘Successful Living’ 캠페인은 1992년부터 오늘까지 10년 동안 100개도 넘는 광고물을 선보이면서 광고사에 디젤 스타일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구축해가고 있다. ‘육체적인 건강과 정신적인 건강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성공적인 삶으로 이끄느냐’라는 해법을 표방하면서 저질스럽고 본능적인 표현을 벗어나 포스트모더니즘적인 표현으로 새로운 브랜드의 장르를 만들어가겠다고 기염을 토한다. 디젤광고의 표현특징 중 하나는 이미지의 모호성이다. 이 광고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해석이 어렵다. 요즘 국내에서 난해하다고 입을 모으는 TTL, NA, Biggi, 카이홀맨 같은 정보통신 서비스의 CF가 무색할 지경이다. 하지만 광고를 판매의 도구로 생각하지 않고 문화를 실어나르는 대중문화의 그릇으로 보면 마냥 선문답만은 아니다. 특히나 기성세대가 아닌 10대들의 감수성에는 광고는 이미 논리나 의미가 아니라 느낌과 기호로 자리매김되고 있지 않은가? 하나의 메시지로 반응을 획일화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이로 하여금 제각각의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심리적 여백이 철저히 계산된 탓이리라. 디젤광고는 이제 제품의 기능을 파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문화를 팔고 세상의 시사문제를 팔고 문명비평을 시도하고 있다. 새로운 세기에 접어들어 디젤이 인종주의를 들고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기존의 판에 박힌 백인우월주의의 시각으로는 더이상 디젤이 추구하는 새로운 타깃의 이미지를 표현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 디젤이 추구하는 새로움의 영역을 더이상 키치와 엽기, 문명조롱 등의 지극히 가벼운 주제만으로 표현해가기에는 스스로 진부함을 느낀 것일지 모른다. 제작연도 2001 광고주 Diesel 제작 Paradiset DDB, Stockholm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Joakim Jonason 카피라이터 Jacob Nelson 포토그래퍼 Peter Gehrke

내 이름, 샌드위치맨

올 가을 한국의 영화글쟁이들은 행복해야 마땅하다. 가공의 흔적조차 찾기 힘든, 그래서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람처럼 생명으로 태어난 듯한 허진호의 가작 <봄날이 간다>가 곁에 있다. 이 영화는 아름답기만 한 게 아니라 선하고 지혜롭다. 저 먼 유행가의 봄날처럼 느닷없이 왔던 사랑이 다시 가는 과정을 보여주되, 집착에서 풀려나 소생하는 젊음의 생명력도 선사해준다. 바람소리, 정선아리리, 풍경소리, 아우라지의 물소리에 정결하게 귀를 기울이는 주인공들처럼 보는 이들은 사랑과 상실이 이들의 시간을 통과하는 소리, 마침내 성장의 매듭을 짓는 소리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의 속에서도 그 소리가 흐르는 것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영화 속 그 사람이 아름다우면, 우리 사람도 아름답다. 정재은 감독의 첫 장편 <고양이를 부탁해>도 그 옆에 있다. 서울의 변두리 인천(전국토가 서울공화국의 변두리지만)에서 스무살에 대학 대신 사회에 첫발을 디딘 여자애들이 거기 있다. 소재만으로 의미를 부여하던 시절이라면 아마 이 젊은이들이 주인공이 되었다는 것 하나만 해도 칭찬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입시교육이 청소년교육의 대명사가 되고, 입시철이면 모든 일간지가 대학시험 문제에 지면을 내주는 아주 특이한 나라의 영화답게 한국영화는 이들에게 시선을 준 적이 별로 없다. 아무리 고개를 곧추세워도 학력의 사다리 없이 오를 곳이 없는 사무실, ‘비진학’이 곧 ‘낙오’인 양 내려다보는 시선들, 또는 가난. 그 모든 무게가 극단적으로 쏠린 지점에 사는 한 주인공은 거리에서 마주친 미친 여자가 미래의 내 모습이 아닌가 두려워 떨기까지 한다. 그런데 다행히 이 고양이들은 소재주의의 혐의에 가둬둘 도리가 없다. 영화는 다섯 친구들의 우정 사이로, 그들을 에워싸는 현실 속으로, 그들이 달리는 길 위로 고양이처럼 부드럽게 파고들거나 자유롭게 낙하한다. 하나하나 소중한 빛을 지닌 주인공들처럼 <고양이를 부탁해>는 영롱하게 빛난다. 누군가는 검약한, 그러나 ‘철학적’인 <나비>의 오디세이를 주목할 것이고, 누군가는 뒤렌마트식 아이러니가 좀더 대중적인 리듬과 웃음으로 변화해 스며든 장진 감독의 행보에 관심을 쏟을 것이다. 한 주일 성찬으로 이만한 것이 있을 수 있을까. 그 영화들이 다양한 촉수로 사람들을 잡아끈다. 그런데 이 ‘10월의 봄날’이 짧은 꿈이 될까 두려워 아직 마음놓고 웃지 못한다. 이 두려움에 동참하시라고, 그래서 행복도 함께 누리자고, 권하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귀기울여보시길.

둘이 헤어졌다... 다행이다

女子에게 少年은 부담스럽다 아직도 십센티는 더 클 것 같은 소년 유지태와 이제는 사랑을 조롱할 수도 있을 만큼 농익을 대로 농익은 여자 이영애가 커플이 돼서 러브스토리를 들려준다는 게, 처음부터 나는 억지스럽다고 생각했다.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내 예상은 적중했다. 둘은 헤어졌다. 다행… 이다. 한때는 상우처럼, 지금은 은수처럼. 이제는 기억도 아련한 첫사랑의 열병을 앓았던 때, 나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꼭 영화 속의 상우 같았었다. 그처럼 유머를 모르고, 눈치 없고, 맹목적이고, 답답했었다. 지금도 또렷이 기억나는 장면 하나, 눈오는 날 추리닝에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그의 집 창문 앞에서 오기를 부리며 떨고 있던 내 모습. 그때 내가 사랑했던 사람도 은수처럼 표독(?)했었다. 꽁꽁 언 발을 번연히 보면서도 그는 끝끝내 제 방으로 나를 이끌지 않았다. 이별에 대한 선전포고를 이미 했으니 그뒤의 감정수습은 모두 내 몫이라는 투였다. 당시엔 그 상황이 너무도 서러워 코끝이 빨개지게 울었었는데, 이제 그 추억은 그냥… 멋적을 뿐이다. 인생을 살면서 절대 잊혀질 것 같지 않은 장면들이 잊혀지고, 절대 용서될 것 같지 않은 일들이 용서되면서 우리는 여자로 혹은 남자로 성장한다. 누구는 그러한 성장을 성숙이라고도 하고, 타락이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나는 다만 과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하루에도 열두번씩 무조건 어른이 되고 싶던 비린 미성년 시절, 나는 찐한 사랑 한번에 여자가 될 줄 알았었고, 실연은 절대로 안 당할 줄 알았었다. 이제는 그런 내 바람들이 당치 않은 기대였던 것을 안다. 사람들은 언제나 당면한 입장에 서서 상황을 이해하는 생리가 있다. 상우의 나이를 지나 은수의 나이에 서니, 상우보단 은수가 이해되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 순리다. ‘라면이나 먹자’, ‘자고 갈래’라고 노골적으로 유혹하는 은수의 말을 이해 못하고 정말 라면이나 먹고, 잠이나 자는 상우는 어쩌면 처음부터 은수에겐 버겁게 순수한 남자였는지도 모른다. 조금은 날긋하게 닳은 여자에게 순수는 반갑지 않다. 순수가 사랑을 얼마나 방해하는지 모르는 사람만이 순수를 동경한다. 사랑이 운명이나 숙명이 아닌 일상의 연장선에 있다고 믿는 대개의 경험있는(상대를 바꿔가며 사랑의 열정을 몇번씩 반복해서 느껴본) 사람에게, 순수는 정돈된 일상을 방해하고, 그로 인해 사랑을 좀 슬게 한다. 상우의 순수가 은수의 일상을 방해하고 사랑을 버겁게 느끼게 하는 요소는 곳곳에 있다. 늦잠을 자고 싶은데 상우는 제가 한 밥을 먹으라고 재촉하고, 다음날 출근을 해야 하는데 새벽녘 서울에서 강릉길을 한달음에 달려와 포옹을 요구하며, 맨정신으로 약속을 하고 찾아와도 안 만나줄 판에 술 취해 급작스레 찾아와 철문을 두드리고 소리를 지른다, 게다가 엉엉대며 울기까지. 그 대목에 이르면 은수가 아닌 제삼자의 입장에서도 은근슬쩍 짜증이 인다. 저만 아프고 저만 힘들지. 어린 남자는 그렇게 이기적이다. 사랑만 하기에 인생은 너무도 버겁다 다수의 사람들은 은수가 상우를 선택하지 않은 것이 현실적인 가치기준의 잣대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박봉에 초라한 개량 한옥에서 사는, 홀시아버지와 매서운 시고모를 옆에 두고 치매를 앓는 할머니를 모셔야만 하는, 정말 누가 봐도 최악의 결혼조건을 가진 그 남자와 연애는 몰라도 결혼은 절대 할 수 없다는 계산이 은수에게 있었다고 말한다. 나는 그 이유에 반박한다. 은수는 그 남자의 처지보다 순수가 버거웠을 것이다. 사랑이 변하고, 권태가 일상이 되고, 키스도 무료해지고, 생계가 치명적인 걸 이미 아는 여자에게 사랑만이 전부인 남자는 부담스러울 뿐이다. 이제 이 나이에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고 상우처럼 묻는 남자가 내게 온다면, 나 역시 은수처럼 당연히 그 남자를 피해갈 것이다. 아직도 사랑이 안 변한다고, 사랑이 전부라고(직장마저 그만둘 만큼) 생각하는 남자와 격한 인생의 긴 여정을 어찌 헤쳐나가겠는가. 은수와 상우의 결별은 그런 의미에서 너무도 다행한 일이다. 드라마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이즈음 한국영화의 눈부신 발전은 그닥 반갑지 않은 일이다. 안 그래도 적은 배우진이 너도나도 영화를 한다고 다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소원해서 될 일이라면 한국영화의 추락을 두손 모아 기원이라도 할 판이다. 그런 내 기원을 영화 <봄날은 간다>는 무참히 만든다. 드라마가 살길은 영화의 추락이 아니라 드라마의 발전밖엔 없다는 결론이 씁쓸하게 나를 채찍질한다.노희경/드라마작가·<바보같은 사랑> <거짓말>▶ 노희경, 신경숙, 심영섭, 진가신이 <봄날…>에 띄우는 네통의 연서 ▶ <거짓말>의 작가 노희경, 두 주인공에게서 그의 과거와 현재를 보다 ▶ 소설가 신경숙, 시간을 사색하다 ▶ 영화평론가 심영섭, 우리 시대의 오즈 야스지로를 보다 ▶ 홍콩 감독 진가신이 <봄날…>을 좋아하는 영화 외적인 이유

봄날은 지금도 흘러간다

사람들이 왜 안 일어나지? 엔딩 자막이 올라간 뒤 내가 나와 함께 영화를 본 옆사람에게 귀엣말로 속삭인 첫말이다. 우리는 그러고도 잠시 한동안 더 앉아 있어야 했다. 영화가 끝났는데도 가만히 앉아 있는 관객 사이를 나는 볼일 다 봤어요, 하며 턱턱 걸어나오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사람들이 너무나 조용히, 가만히, 앉아 있었다. 눈이 올 것 같은 겨울날 창문을 열고 하늘을 올려다볼 때의 그 정적이 영화가 끝난 스크린을 바라보고 앉아 있는 사람들 사이에 흘러다니고 있었다. 그뒤 며칠, 혼자 있을 때, 계단을 오를 때, 현관문을 딸 때, 거실에서 내 작업실로 걸어올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고 혹은 꽃이 피면 함께 웃고 꽃이 지면 함께 울던- 이라고 습관처럼 허밍을 넣었다.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정적과 입 안에서 맴도는 쓸쓸하기도 하고 감미롭기도 한 허밍. 허진호의 영화 속엔 제목에서부터 시간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가 그렇고 <봄날은 간다>, 가 그렇다. 앞의 작품에서는 겨울까지 기다릴 수 없는 안타까움으로 인해 분침의 째깍거리는 소리까지 귓전에 들리는 것 같은 운명의 시간이 존재하고, 뒤의 작품에서는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여일하게 흘러가고 있는 일상의 시간이 존재한다. 앞의 작품에서 시간은 사진관에 붙어 있는 사진처럼 붙박혀 고여 있고, 뒤의 작품에서 시간은 갈대밭을 쏴아 소리내며 지나가는 바람처럼 지금도 흘러가고 있는 중이다. 허진호처럼 주제와 주인공의 직업을 딱 맞아떨어지게 포착해내는 감독도 드물다. 그러므로 주인공이 운명에 맞서며 혹은 일상에 마모되며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장면이 곧 영화의 주제를 드러내고 있는 장면이 되는 것이다. <봄날은 간다>에서 상우의 일은 소리를 채집하는 것이고 은수의 일은 소리를 흘려보내는 일이다. 이것이 사랑에 적용되었을 때 이들이 각자 어떤 입장에 서게 될지가 감지된다. 그렇다해도 산사에서의 깊은 밤 혹은 신새벽 눈이 오시는 소리와 풍경소리를 채집하는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워 그 순간 모든 것이 정지되었으면 싶은 충동을 일으켰다. 그렇게 아름다운 날이 우리 인생에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감독에게 정색을 하고 이 장면에서는 무엇을 말하려고 했습니까? 라고 질문을 하는 것은 완전히 불필요하다. 하긴 은수는 왜 그러합니까? 혹은 상우는요? 라는 질문도 마찬가지로 불필요하다. 보고 느끼는 것. 감정이 철저하게 절제되어 있는데도 저 이야기를 타인의 이야기라고 돌리지 못하는 것은 영화 속의 여러 에피소드들이 내 속에 살아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상우의 아버지도 고모도 할머니도 각기 우리 보편적인 인생들의 한 단면을 무게있게 재현하고 있다. 누구도 오버하지 않는다. 다 그러함직하기 때문에 누구도 미워할 수 없다. 거기 그렇게 무연하게 서 있는 상우와 은수를 누가 미워하겠는가. 자신의 이야기, 게다가 나도 언젠가 그렇게 느꼈는데 딱 한마디로는 설명이 안 되었던 그런 내밀한 이야기인 것이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라고 말하는 상우를 보며 나도 언젠가 나를 저버리려는 누군가를 향해 저 말을 내뱉었거나 뱉고 싶었고, 뚜렷한 이유도 없이 상우를 저버리려는 은수를 보며 저런 마음으로 누군가를 저버렸거나 지금 저버리고 싶은 나를 보기도 하는 것이다. 화면에 보이지 않지만 그 사이엔 잔인한 시간이 가로놓여 있다. 모든 첫 마음을 변색시키는 속성의 시간이 가로놓여 있다.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는 모든 것이 무력하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간다. 잊을 수 있기 때문에. 하물며 사랑 따위가 어찌 버틸 것인가. 가장 찬란할 때 죽지 않은 이상 그 순간을 영원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가장 찬란하고 아름다운 순간을 주고 난 다음엔 사랑은 무엇을 주는가. 상우의 마음이었으면 좋겠으나 대개는 은수의 마음을 준다. 균열을 일으키며 휘청거리다 헤어져, 라고 말하는 은수를 보며 관객은 그래, 나도 그랬어, 서울에서 강릉까지 택시를 타고 달려온 너를 이슬을 맞아가며 기다리기도 했으나, 네 앞에서 종아리 털을 뽑아도 될 만큼 네가 익숙해진 뒤엔 지겹기도 했지, 네가 나를 다른 삶으로 데려가 줄 사람 같지가 않아서 너를 저버리려 했지, 그런 내가 이기적이고 싫기도 했지, 라고 관용과 이해의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이기가 앞서는 순간 은수처럼 힘들게 다시 자신을 찾아온 상우를 두고 나, 지금 어디 가야 돼, 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어디로 가버린 그녀 뒤에 남아 있는 상우의 시간이 <봄날은 간다>, 이다. 지나가 버린 시간 속에서 승자와 패자가 있겠는가만 결국 승자는 떠난 사람이 아니라 남아서 시간을 견딘 사람이다. 은수는 떠났기에 한번쯤 돌아올 수밖에 없다. 자신이 저버린 사랑이었더라도 그토록 아름다웠으니 돌아와서 우리 함께 있을까? 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처지인 것이다. 그러나 둘 사이에 봄날은 가버렸다. 가버린 봄날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이다. 그것을 우리는 매번 봄날이 다 가버린 뒤에나 알게 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신경숙/ 소설가·<풍금이 있던 자리> <깊은 슬픔> <바이올렛>▶ 노희경, 신경숙, 심영섭, 진가신이 <봄날…>에 띄우는 네통의 연서 ▶ <거짓말>의 작가 노희경, 두 주인공에게서 그의 과거와 현재를 보다 ▶ 소설가 신경숙, 시간을 사색하다 ▶ 영화평론가 심영섭, 우리 시대의 오즈 야스지로를 보다 ▶ 홍콩 감독 진가신이 <봄날…>을 좋아하는 영화 외적인 이유

마룻장의 미장센, 허전하고 윤기 도는

그가 내게 말했다. “우리 한달만 떨어져 있어 보자.” 헤어짐에 유효기간을 두고 소멸되어가는 사랑을 지켜볼 수 있는 쪽은 언제나 덜 사랑하는 사람쪽이다. “난 너랑 못 헤어져. 난 헤어지는 거 생각해본 적 없어.” 허진호는 사랑이 올 때는 대숲소리, 잔물소리, 인경소리를 택하더니 사랑이 몰려나갈 때는 파도소리를 택한다. 우르르 몰려오는 소리의 부서짐. <봄날은 간다>는 그렇게 공간으로 만남을 이야기하고 시간의 공기로 빈자리를 채우며, 계절로 인생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건 자연의 섭리처럼 막을 수도 채울 수도 없다는 것. 그는 이번에는 사진 대신 소리를 잡으려 부질없는 손짓을 허공에 휘젓는다. 그때마다 허진호라는 지휘자의 손짓에 갈피갈피 묻어둔 빛바랜 기억의 음표들이 공기중을 떠돌다 사그라진다. 어쩌면 소리를 채집하는 남자와 소리를 흘려버리는 여자는 애초에 각기 다른 궤도에서 돌다 스치는 별의 운명 외에는, 허락된 사랑이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도 상우는 은수와 사랑을 시작하자 자꾸자꾸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그리고 그때 강릉이란 공간은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확신하듯 영원한 어떤 것, 겨울의 눈 속에서도 되살아나는 대숲과 봄날의 햇살에서도 파릇한 무덤의 이미지이다. 사랑의 확신 속에 봄은 찾아들고 은수와 상우는 “우리도 묻히면 저렇게 같이 묻힐까?”라고 반문한다. 그러나 이미 여자는 남자에게 말하지 않았던가. ‘근데 좀 늦게 오신 것 같네요’라고. 사실 할머니와 은수는 한번도 같은 공간 속에 만난 적이 없다. 때도 그랬다. 다림이와 정원의 아버지는 만난 적이 없는 타인들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한 남자 안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허진호는 그 보이지 않는 고리에 기다림과 그리움의 온기를 불어넣는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냐’며 안타까워하던 상우에게, 할머니는 사랑하는 이와의 불운했던 기억을 비워냄으로써 기다림과 그리움에 몸을 의탁할 수 있는 법을 가르쳐 준다. 상우는 심장보다 손을 높게 두어 상처를 아물게 하는 법도 할머니에게서 배웠노라고 말했다. 그것은 라면과 일회용 커피라는 인스턴트화되고 뿌리내리지 못하는 은수의 사랑에 대비되는 아주 오래 묵혀 미움조차도 삭혀낸 사랑. 정선 아라리를 부르는 노부부의 뒤에도 보리밭에서 소리를 채집하는 상우의 등뒤에도 서 있는 건 바로 그런 큰 나무였다. 묵묵한 세월의 나무들은 자신들이 살아온 나이테를 속 깊이 감춘다. 그때 소리는 마음을 비우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는 바람이 되고, 화분을 내밀던 은수도 실은 그런 큰 나무를 가꾸고 싶었을지 모르겠다. 그렇게 깊은 슬픔의 꽃을 피우기 위해 허진호의 영화는 얼마나 많은 양지들을 펼쳐 놓았던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 강릉에서 오는 상우의 우는 모습은, 집에 와서도 커튼을 치고 흐느끼며 누워 있는 상우는 그렇게 음지였다. 깊은 슬픔의 웅덩이였다. 김영랑의 시구처럼 찬란한 슬픔의 봄 같은 허진호의 영화들에서 다시 한번 우리 시대의 오즈 야스지로를 느낀다. 다다미 미장센에 버금가게 허전하면서도 맑은 윤기가 나는 마룻장 미장센이 있는 영화세상을. 아마도 오즈의 다다미가 밖에서 안을 보는 자리라면 허진호의 마루는 안에서 밖을 보는 자리일 것이다. 그 자리는 올 것 같아서 기다려지는 자리, 내가 떠나서 남겨지는 삶의 무게가 조금은 많아졌으면 하고 바라는 그런 자리. 그리하여 그 마루는 허진호가 아무리 내밀한 개인적인 관계에 천착해도 여전히 가족이 있는 그 허전한 여백으로 되돌아오리라는 약속과 같은 것이기도 했다. 쉼없이 세월을 흘려버려도 허진호의 그 닫힌 우주에서는 아무도 타인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상실의 바다에서 묵묵히 깊은 슬픔을 길어 올리며, 정작 감독이 가장 많이 마음을 준 사람은 혹시 할머니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왜냐하면 허진호의 영화에서 카메라를 움직인다는 것은 일종의 자그마한 사건이고 소중한 고백 같은 것인데, 카메라는 은수보다 오히려 할머니의 주름진 손을, 할머니의 육신이 빠져나간 흰 고무신을 쓰다듬듯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문득 삼년 전 겨울 생각이 난다. 우리 아이를 헤어진 남편에게 보내고 구정날, 를 보러 동네의 변두리 극장을 찾았었다. 그날 따라 극장은 보기 드물게 붐볐고, 사람들은 가족끼리 손을 잡고 와서는 ‘심은하가 이뻤고, 한석규가 잘했다’고 소곤대며 극장문을 나섰다. 천호동에서 암사동까지 걸어서 집에 돌아갔는데, 도중에 아이스크림도 사먹고 천원짜리 비디오도 샀던 기억이 있다. 그때 난 영화평론가가 아니었다. 그뒤론 잠이 잘 안 오는 밤엔 를 켜놓곤 했는데 이상하게도 정원이가 아버지에게 비디오 트는 법을 가르쳐 주는 장면이 지나면 언제나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추석이 되고 다시 가을이 돌아왔다. 이제는 ‘내 생애 단 하루뿐인 특별한 날’ 대신 ‘예쁠 것도 없고 아무렇지도 않은’ 사랑을 하고 싶다. 그렇게 천천히 나의 심장박동과 그의 호흡을 일치시킬 수 있다면. 먼 훗날 <봄날은 간다>는 내게 사랑보다는 사랑의 자세에 관한 영화로 남게 될 것만 같다. 심영섭/ 영화평론가▶ 노희경, 신경숙, 심영섭, 진가신이 <봄날…>에 띄우는 네통의 연서 ▶ <거짓말>의 작가 노희경, 두 주인공에게서 그의 과거와 현재를 보다 ▶ 소설가 신경숙, 시간을 사색하다 ▶ 영화평론가 심영섭, 우리 시대의 오즈 야스지로를 보다 ▶ 홍콩 감독 진가신이 <봄날…>을 좋아하는 영화 외적인 이유

디스토피아의 다리 건너 행복의 나라로

장 피에르 주네는 두 발을 땅에 딛고 사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이야기를,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이미지로 천연덕스럽게 풀어낸다. 인육을 파는 푸줏간 사람도, 남의 꿈을 훔치는 과학자도, 외계인의 DNA를 가진 여전사도, 그의 미장센에서 생명을 얻었다. 게다가 그는 ‘지금 여기’와 한참 동떨어져 있다는 쓴소리에도 눈 하나 꿈쩍 않을 만큼 고집불통이다. “나는 상상의 세계를 그리는 게 좋다. 그것도 과도하고 독창적인 스타일의 영상으로. 영화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다뤄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내 영화를 좋아해달라고 부탁하고 싶진 않다. 그건 교황에게 콘돔을 쓰라고 권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니까, 알아서들 하라는 얘기다. 열광하거나, 혐오하거나. 이미지의 힘이 세다 주네의 이름을 알린 출세작 <델리카트슨 사람들>은 영상은 꽤나 충격이었다. 어둡고 습한 화면은 푸줏간과 지하터널을 맴돌았고, 가뜩이나 기괴한 캐릭터들은 회전목마를 타는 악몽처럼 어지럼증 나는 화면 속에서 생김새 이상의 기행을 일삼았다. 마르크 카로와 <델리카트슨 사람들>을 만들기로 했을 때, 장 피에르 주네의 바람은 소박했다. 그저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만드는 것. 많은 이들의 관심과 사랑까지 기대할 수는 없었다. 뜻밖에 칸영화제에 초청되고 수상하는 경사를 맞고, 해외시장으로 뻗어나가게 되자, 주네는 거의 모든 대륙의 관객과 조우했다. “놀라운 경험이었다. 어디를 가든 관객의 반응이 같았다. 같은 대목에서 즐거워하고, 같은 대목에서 지루해했다. 영화로 모든 사람들과 의사소통할 수 있겠다는 확신을 얻었다.” 그가 실감한 것은 이미지의 힘이었다. 내러티브는 종종 언어와 문화의 골에 빠지곤 하지만, 이미지는 그것들을 뛰어넘는 친화력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델리카트슨 사람들> 이후 주네는 좀더 옹골찬 확신을 갖고, 이미지로 말 거는 영화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는 <델리카트슨 사람들>의 기괴함을 컬러풀하게 버전업했고, <에이리언4>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로는 드물게 유럽풍의 동화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영화로 기록됐다. <아멜리에>는 그런 주네가 외도를 한 것인가, 싶은 착각을 주는 영화다. 몽마르트르의 한 아가씨가 남들의 행복을 찾아주기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결국 자기의 반쪽과 만난다는, 그래서 ‘해피 투게더’해지는 로맨틱코미디라. 주네가 드디어 현실을 직시하고 일상을 돌보기로 했다는 뜻일까. <아멜리에>는 그러나, 주네의 행보가 언제나 그랬듯, 그 모든 예상을 요령껏 비껴나갔다. 단조에서 장조로 음계가 바뀌었을 뿐, 여전히 주네의 인장들로 가득한 우화 <아멜리에>에 대한 관객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아멜리에>는 지난 5월 프랑스에서 개봉한 이래 800만의 기록적인 관객몰이를 했다. 올 상반기 프랑스영화들이 자국시장에서 50% 넘는 점유율을 올리는 데 기여한 것은 물론이다.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엘리제궁에서 시사회를 열고 “평범한 사람들의 작은 행복”을 그린 영화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아멜리에를 연기한 신예 오드리 토투는 하루아침에 국민적인 스타로 급부상했다. 아멜리에의 남자친구 니노로 출연한 <증오>의 감독 마티외 카소비츠는 괴팍하고 반골적인 인상을 느슨하고 부드럽게 풀어 로맨틱한 캐릭터를 소화해, 남성향수 모델로 발탁되는 ‘사고’까지 치고 말았다. 아멜리에가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풍차카페와 길모퉁이 야채가게도 파리의 관광명소로 떠올랐다. <아멜리에>는 장 피에르 주네의 필모그래피에서 그 ‘명도’와 ‘채도’로서도 단연 튀는 작품이다. <델리카트슨 사람들>이나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에도 로맨스가 있으니, 얘깃거리야 그닥 다를 것이 없지만, 그토록 기괴하고 암울한 이미지에 천착하던 감독이 갑자기 밝고 경쾌하고 사랑스러운 로맨틱코미디로 선회한 이유는 뭘까. 감독 자신은 그것을 “개인적인 진화”라고 부른다.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를 마친 뒤에 내가 자랑스러워하고 좋아하는 것들만으로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사람들은 내게 전과 다른 것을 원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원하는 건 밝고 가벼운 영화라고 판단한 주네는, “나는 이게 좋고 이게 싫다”는 내레이션만으로 진행되는 단편 <쓸모없는 것들>(1989)에서 출발해 숙성시킨 프로젝트 하나를 끄집어냈다. 곡식 자루에 손을 넣거나 야트막한 냇가에서 물수제비 뜨는 것처럼 추억 속에서 건진 작은 기쁨들을 이야기하기로 하고, 그 무수한 낱낱의 에피소드의 연결점으로 ‘아멜리에’라는 소박하면서도 특별한 아가씨를 만들어냈다. ▶ 장 피에르 주네의 작품세계 (1) ▶ 장 피에르 주네의 작품세계 (2) ▶ 주네의 조력자들 ▶ 장 피에르 주네 인터뷰 (1) ▶ 장 피에르 주네 인터뷰 (2)

“비정상이라고? 우리 안에 괴물이 살고 있는 걸”

<델리카트슨 사람들>에서 <에이리언4>까지, 판타지의 미궁을 지어내던 장 피에르 주네가 이번에는 좀더 따뜻하고 행복해진 영화를 들고 찾아왔다. 지난 부천영화제에 폐막작으로 선보인 <아멜리에>에선 그동안 주네의 영화들이 보여주던 어둡고 그로테스크한 도시와 기괴한 인물들이 모두 지워져 있었다. 대신 현실을 기적으로 바꿔내는 아름다운 여인 아멜리에와 낭만적이고 동화적으로 가공된 도시 파리가 등장했다. 영화와 함께 부천을 방문했던 장 피에르 주네는 할리우드에서 작업한 <에이리언4> 이후 파리로 돌아가 처음 만든 이 신작에 각별한 애정을 감추지 않았다. 기억과 사랑을 토로하는 영화이며, 현실 속에 숨어 있는 판타지를 발견하는 영화, 그리고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영화”라며. <아멜리에>는 당신의 전작들에 비해 상당히 밝아졌다. 어떻게 구상했나. <에이리언4>를 찍느라 몇달간 LA에 머물러야 했다. 할리우드의 작업은 흥미롭기는 했지만 하루하루가 전투같았다. 제작자나 관계자들과 거의 매일 싸워야 했다. 게다가 영화도 총과 살육이 난무하지 않는가? (웃음) 그러다보니 파리에 돌아가고 싶어졌고 총이나 싸움이 등장하지 않는 밝고 행복한 이야기가 하고 싶어졌다. 물론 <아멜리에>는 <에이리언4> 이전부터 이미 대략의 캐릭터와 상황을 구상해놓은 것이었다. 문제는 이야기를 어떻게 구체화하는가 였다. 그런데 어느날 파리의 거리를 거닐다가 낡은 박스 안에서 살고 있는 다리가 하나밖에 없는 거지를보았다. 파리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다. 그를 보는 순간 그들이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그 거지는 마치 그보다 나쁜 삶이란 없을 것만큼 비참해 보였는데, 오히려 그가 남을 돕고 살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나는 ‘남을 돕는 착한 소녀’의 아이디어를 떠올렸고, 그 다음부터는 술술 풀렸다. 시나리오는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를 함께했던 기욤 롤랑과 썼다. <아멜리에>는 아주 사적인 기억과 취향을 늘어놓는 당신의 단편 <쓸모없는 것들>( Foutaises, 1989)과 유사하다. 그 영화를 봤는가? (웃음) 난 내가 파리에서 살며 느낀 것들을 묘사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떤 기억과 취향을 이야기해야할 지 막연했다. 내 경험을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기란 쉽지 않을 텐데,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기억과 취향이란 무엇일까? 이것은 일종의 게임이다. 문제는 그것이 구체적인 사건이나 일화가 되면 공유의 폭이 작아진다는 점이다. 그래서 난 모든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오감으로 표현하였다. 가령 콩자루에 손을 넣을 때 느낌, 바람의 촉감, 향기로운 냄새 같은 것 말이다. <쓸모없는 것들>이나 <아멜리에>는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내가 가진 기억과 경험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영화이다. 이런 방식은 유머러스하면서도 나에겐 아주 행복한 방식이었다. 예전 작품들은 가상적 도시 공간을 배경으로 ‘판타지’를 형성하였다. 그런데 <아멜리에>가 현실세계가 배경인데도 판타스틱한 것은 그 배경인 파리가 실제와는 상관없이 아멜리에의 상상적 세계로 가공되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당신은 항상 도시라는 공간을 영화적 공간으로 새롭게 구성하는 것 같다. 맞다. 이 영화는 실재하는 파리가 아니라, 그녀가 생각하고 구축한 파리이다. 가령 난 ‘자연’(nature)이라는 공간은 영화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단지 부드럽고 넓고 평평한 의미 이상이 아니다. 하지만 영화라는 것은 상상력이 어우러져 창조되는 것 아닌가? 내가 항상 도시를 영화적 공간으로 선택하는 것은 내가 인공적인 방식으로 대상을 변형하길 좋아하는데 도시가 그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나의 특별한 촬영 스타일을 통해 새롭게 창조되는 도시와 건축물들이 흥미로운 것이다. 마치 오슨 웰스가 자신만의 촬영 스타일에 자신의 관점(perspective)을 투영하는 것처럼 나는 나의 숏렌즈, 클로즈업, 크레인숏 등을 써서 내가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영화적으로 전달한다. 실재하는 도시, 파리를 이야기할 때도 마찬가지다. 내가 파리로 이주한 것은 21살 때였는데, 사실 파리의 이미지는 매우 부정적이었다. 서울처럼 교통이 혼잡하고, 뒷골목은 지저분하며 개똥이 넘쳐난다. 이런 이미지들은 여태까지 내 영화 속 도시라는 공간을 어둡게 만들었다. 하지만 난 이번 작품을 통해서 밝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 그래서 좀더 미학적으로 가공된 영화적 도시를 다시 만들어야 했다. 거리의 지저분한 포스터를 아름다운 포스터로 교체하고, 복잡하게 주차된 차들을 치우고, 특히 후반 디지털 작업을 통해서는 하늘빛이라든가 공간을 다르게 채색했다. 야외촬영의 어려움이 많았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아주 판타스틱했다. 이번 영화는 다리우스 콘쥐가 아니라 브루노 델보넬이 촬영을 맡았는데, 일상적인 사물들을 클로즈업이나 광각렌즈 등을 통해 왜곡하거나 낯설게 만들면서 동화적인 상상력을 자극한다. 게다가 카메라는 끊임없이 움직이면서도 저속과 고속을 감성적으로 사용한다. 어떤 원칙을 가지고 있었는가. 거기에 특별히 영향을 끼친 다른 예술이나 영화가 있는가. 단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일 뿐이다. 영화를 찍으면서 사물과 풍경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담는 것은 나에게 매우 지루한 일이다. 그런 것은 뉴스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나는 내가 포착하는 대상을 상상력을 가지고 다르게 보여주고 변형하는 것을 좋아한다. 가령 팀 버튼이나 테리 길리엄의 영화들처럼, 영화적 세계는 프레임 하나하나까지 상상력으로 변형하고 가공하는 판타지로 충만해야 한다. 그 속 어느 프레임을 떼내 벽에 걸어놓아도 좋을 만큼, 하나의 숏이나 신, 심지어 하나하나의 프레임까지 의미가 풍만하고 아름답게 표현되어야 한다. 물론 내가 애니메이션 작업을 했었기 때문에 만화적인 프레임이 계속 내 영화 속에 남아 있는 것이겠지만. 또, 내게 특별한 영향을 끼친 ‘무엇’은 따로 없어도 나는 회화나 음악, 사진, 영화 등을 보고 모으기를 좋아한다. 딱히 언급하자면 세르지오 레오네의 <옛날 옛적 서부에서>는 특별하다. <아멜리에>에도 그 영화를 연상시키는 장면을 만들었다. 한번 찾아봐라. (웃음) 브루노 델보넬은 아주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친구였다. 언젠간 그와 함께 작업하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번 작품에 다리우스 콘쥐가 참여하지 못하면서 그와 일하게 되었다. 그와의 작업은 아주 만족스럽고 훌륭했다.▶ 장 피에르 주네의 작품세계 (1) ▶ 장 피에르 주네의 작품세계 (2) ▶ 주네의 조력자들 ▶ 장 피에르 주네 인터뷰 (1) ▶ 장 피에르 주네 인터뷰 (2)

스무살, 길 떠나는 나이, 난 삶이 두렵지 않아!

우리도 그들처럼, 배역대로 살아보기 이은주, 은실이 관찰한 ‘구슬장사의 하루’ 출근: 오후 4∼5시 사이 영업: 오후 5시∼새벽까지 저녁식사시간: 따로 정해져 있지 않으며, 장사를 대신 맡아줄 사람이 없으므로 물건이 보이는 가까운 음식점에서 먹는다. 식사 도중 손님이 오는 게 보이면 달려갔다 다시 들어와 식사함. 자리차지: rule(법칙)이 있기 때문에 아무나 장사할 수 없다. but 자릿세는 내지 않음. 먼저 차지하면 임자. 가격조사: (모두 수공예품) 빗 → 큰 거 5천원, 작은 거 4천원, 실핀 1천원… 밍크왁구(밍크털 달린 삔) 4천원. 총장사비용: 100만원(100만원이면 장사도구 마련해서 장사할 수 있다) 잠자는 시간: 아침 내내 → 낮잠을 잔다 영업하지 않는 경우: 비가 올 때 →but 심하게 오지 않고 부슬부슬 내릴 경우 파라솔 치고 파는 경우가 많다. 영업기간: 1주일 내내 → 하루라도 빠지면 손해이므로 (쉬는 날이 거의 없다) 수입: 한달평균 150만원, 하루평균 장사 잘될 때 → 10만원, 안 될 때 → 3만원 정재은 선생님(?)의 다음 숙제는 배역의 생활을 몸소 체험하는 것. 덕분에 배두나는 피로가 쏵 풀리는 맥반석찜질방 방문에 이어 구식타자기 연습에 얼얼한 손목을 부여잡아야 했고, 이요원은 증권회사 방문과 함께 증권사 사람들의 인터뷰 자료를 보고 영어회화를 연습해야 했다. 독립심 강한 중국계 혼혈쌍둥이 비류와 온조를 연기해야 했던 이은주와 은실은 신천역에서 하루종일. 좌판에 액세서리를 파는 ‘구슬장사’를 관찰해 제법 구체적인 보고서를 제출했다. 옥지영은 분류심사원에서 만난 아이들의 희망없는 얼굴에서 얼핏, 지영의 막막함을 느꼈다고 했던가. 분류심사원에 다녀온 옥지영 분류심사원 그러니까 소년원. 대부분이 10∼20대 초반의 아이들이다. 범죄를 저지른 뒤 이곳에 오고 다시 가정이나 사회로 돌아가지만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 그들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사람들. 처음에 ‘옥지영’으로서 분류심사원의 비디오를 봤을 때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나와 다른 환경이기 때문에 느껴지는 막연한 동정심에 불과한 게 아닐까? 더 냉정하게 이야기하면 자업자득, 자신을 자제하지 못한 대가일 수도 있다. 더 못한 환경 속에서도 자신을 자제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텐데…. 하지만 아직 불안정한 아이들을 잡아주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 사회나 가정의 잘못이 이렇게 만든 걸 수도 있겠지. 비디오상으로 보았을 때는 편안하고 좋은 곳처럼 보였지만 내가 직접 분류심사원을 가보니 비디오로 본 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뭔지 모를… 아이들을 억누르는 듯한 답답함…. 두 편의 영화 숙제 - <천사들이 꿈꾸는 세상> <아이스 스톰> “<고양이…>는 배우의 부담이 큰 영화였어요.” 저마다 개성과 느낌은 넘쳐나지만 아직 정식으로 트레이닝되지 않은 배우들에게 감독은 조심스럽게 두편의 영화를 권했다. “에릭 종카의 <천사들이 꿈꾸는 세상>에서는 자연스럽고 생생한 연기의 느낌을 찾았으면 했고, 리안의 <아이스 스톰>에서는 무표정 속에 숨어 있는 느낌있는 연기의 맛을 알아차리길 바랐어요.” 숙제를 머리에 안은 다섯 마리 고양이들은 옹기종기 모여앉아 두편의 영화를 함께 보았고 영화를 본 뒤엔, 소주병이 돌아가고 미래의 배우자를 보기 위해 보름달에 칼을 물었던 그날의 파티처럼 끊이지 않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배두나가 본 <천사들이 꿈꾸는 세상> 감독님이 이 영화를 왜 꼭 보라고 했을까? 의식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보니까 그 두 캐릭터를 열심히 관찰하면서 봤던 것 같다. 그 커트머리와 단발머리…. 이… 이름이 뭐였지?… 이자랑… 암튼…, 특히 난 그 커트머리 캐릭터를 보면서 뭔지 몰라도 태희도 저런 매력이 있었음 좋겠단 생각을 했다. 딱 보기에 순수해보이거나 착해보이는 인상은 아니었지만(솔직히 얘기하자면 굉장히 퇴폐적으로 보이는 날라리 같았는데) 되게 사랑스러웠다. 지금 태희의 캐릭터에 감이 제대로 안 잡히고 있긴 하지만, 암튼 내 생각에도 태희가 ‘전형적인 착한 아이’가 아닌 그 커트머리처럼 약간 나사 하나 풀린 것 같은 매력의 사랑스런 캐릭터였음 좋겠다는 생각은 했다. 이요원이 본 <아이스 스톰> 가족영화라는 얘기만 듣고 아무런 정보도 없이 이 영화를 봤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런 문제없이 평범한 생활에 평범한 행복을 가진 가족, 그러나 한 공동체 속에서 네명의 구성원들을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서로 다른 것을 갈구한다. 아버지의 바람, 딸의 성적 욕망, 사춘기적인 성적 호기심과 권태적인 성적 호기심. 결국 아이나 부모나 같은 걸 갈망한다. 이 영화,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걸까? 이기적인 현대인들? 서로를 배려하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사는 그래서 가족의 소중함도 모른 채 서로 벽을 쌓고 지내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걸까? 결국엔 아들의 죽음으로 끝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우리가 느낄 수 있었던 연관성은 뭘까? 다섯 아이들이 한 공동체 안에서도 서로 다른 걸 생각하고 다른 삶을 갈구하는 것? 그래 어쩜 그들의 미래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배두나, 이요원, 옥지영, 이은주, 이은실의 영화 뒤 비밀 이야기 (1) ▶ 배두나, 이요원, 옥지영, 이은주, 이은실의 영화 뒤 비밀 이야기 (2) ▶ 배두나, 이요원, 옥지영, 이은주, 이은실의 영화 뒤 비밀 이야기 (3) ▶ 여섯번째 주인공 ‘티티’ 찾아 삼만리

그냥, 내 얘기를 했어,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박해일

때늦은 에어컨 바람이 반소매 아래로 좁쌀만한 소름을 피워올리는 스튜디오 안, 촬영을 위해 켜놓은 램프가 어둠을 밀어내는 동안 박해일(25)은 내내 앉거나 혹은 선 자세로 채 가시지 않은 어둠 속을 배회했다. 낯선 공간과 친해지려는 듯 이곳저곳을 꼼꼼히 뜯는 그는 예민한 고양이 같았다. 불빛이 조금이라도 닿은 곳이라면 다가가 들여다보고, 만지고, 냄새를 맡았다. 다른 사람에게 묻거나 매달리는 법 없이 그렇게 혼자서 묵묵히 낯선 것을 제 것으로 만드는 것은 오래 전부터 그의 방식이었다. 드디어 그를 기다리게 하던 카메라가 돌아가고 어깨 위로 조명기가 익숙한 빛을 토해내자 비로소 그의 얼굴에 편안함이 깃든다. 77년생 박해일의 신분은 학생이 아닌 연극배우다. 영화와 조우하기까지의 여정을 묻는 질문에 그는 “술먹어야 나오는 대답”이라며 한참이나 말을 아낀다. 96년 시작된 대학생활은 매일 다섯 시간이 넘는 통학시간과 무료한 학교생활 끝에 1년 만에 중단됐다. 그나마 취미를 붙인 음악 동아리에서 마지막 스쿨버스가 끊기기 전까지 악보에 고개를 파묻어 보았지만 매번 악기 대신 손에 들리던 청소도구로 인해 남은 의지마저 상실한 그였다. 학교를 나와 서초동에 자리한 재즈아카데미에 입학했지만, 그것은 ‘열정’이 아닌 ‘객기’였다. 계획없이 시작한 학원생활을 한달 만에 끝내면서 MBC <테마게임> 촬영부 보조로 직장생활을 시작한다. 방송사를 드나든 지 4개월쯤인가, 난데없이 댄스가수를 제안받고, 안무와 노래 연습을 시작했다가 불과 몇달 만에 음반 제작이 좌절되는 해프닝도 겪었다. 방송사와의 고달픈 인연을 끝낸 그는 체계적인 연기수업을 받기로 마음먹고 ‘동아예술단’이라 불리는 어린이극단을 찾는다. 1년간 예닐곱번의 지방 순회공연으로 탄탄한 기본기를 갖추게 된 그는, 99년 어린이날 기념 행사를 돕기 위해 성인극단 ‘동숭무대’에서 나온 배우의 눈에 띄어 성인극 무대로 자리를 옮긴다. ‘동숭무대’의 활동은 그의 연기폭을 무한대로 넓혀놓았고, 결국 임순례 감독의 눈에 띄는 계기도 되었다. 당시 <와이키키…>의 배우를 물색하던 임 감독이 우연히 관람한 작품이 동숭무대의 작품 <청춘예찬>이었는데, 나이 먹기를 거부하는 고등학교 2학년 ‘청춘’ 역이 바로 박해일이었던 것이다. 멋진 해변의 로커를 꿈꾸는 철부지 고등학생 ‘성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그를 임 감독이 가만 둘 리 없었다. 2개월의 촬영 동안 그는 참으로 편했다. 고요히 정지해 있는 카메라는 거울이고, 그 앞에서 목이 터져라 악을 쓰던 ‘성우’는 지난날 거울 앞에 서 있던 자신이었으니까. 술 대신 담배로 목을 축이며 긴 얘기를 마친 그에게 묻고 싶어진다. 극중 ‘성우’가 받았던 질문,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니 행복하냐?” 하지만 그의 눈빛을 보니 다시 확인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박해일은 현재 박찬옥 감옥의 데뷔작인 <질투는 나의 힘>에서 주인공 이원상역을 맡아 새로이 연기에 대한 의욕을 불태우고 있는 중이다. 내년 5월 쯤에는 한 단계 더 성장한 그의 모습을 만나볼 수 있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