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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검색결과

기사/뉴스(9404)

만화 웹진의 새 바람

인터넷과 만화 거품이 꺼지면서 잠시 주춤했던 인디만화 웹진이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전통의 만화 웹진 ‘화끈’(www.hottoon.net)이 최근 재오픈했고, 비주얼 웹진을 주창하는 ‘AK’(www.akzine.com)가 11월1일 오픈한다. ‘AK’는 <만화 실험 봄> <히스테리> 등에서 언더만화운동을 벌여온 만화가 강성수가 주축이 되어 만들어지고 있는데, 과거의 언더만화 색채를 벗고 좀더 열린 만화공간이 될 것으로 보인다. 기성 만화가인 원수연, 최경아, 최인선 등이 고정 만화가로 활동하고 뮤직비디오 감독 남지웅과 일러스트레이터 B.R.Kim 등이 만화 외적인 비주얼 콘텐츠를 함께 만들어갈 예정이다. 창간호에는 윤태호, 이충호, 전상영 등 젊은 만화가들의 작품이 힘을 실어주고 있고, 가수 황보령, 크라잉 넛의 리드싱어 한경록 등의 아티스트들도 글과 그림으로 함께하고 있다고 한다. 그 밖에 아마추어와 준프로 만화가들의 작품들이 함께 실리고, 만화가 한승원의 인터뷰 등 읽을거리들도 많이 있어 콘텐츠의 양에서는 상당한 준비를 해온 것으로 보인다. <돌아온 조단> <천하무적 홍대리> 등의 작품을 배출해낸 ‘화끈’ 역시 종이잡지에서의 부진을 딛고 온라인상에서 다시 적극적인 활동을 펼칠 것으로 보인다. ‘한국 만화가 고사 직전인 이 마당에 만화가로 살아남는 비법’이라는 글에서부터 그동안의 시련이 느껴지지만, 조주희의 등의 작품은 화끈이라는 뿌리가 결코 연약하지 않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미야자키의 동지, 다케시의 벗

험난한 세상의 링 위에서 멍든 채 돌아온 두 친구의 남루한 아침을 감싸던 선율을 기억하는지. 야쿠자와 권투선수로 제각각 다른 싸움에 나섰다가 패배한 채,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몸을 자전거에 싣고 “이제 겨우 시작”이라고 서로를 다독이던 소년들, 그 가파른 성장기의 한 굽이에서 맴돌던 <키즈 리턴>의 음표들 말이다. 때로는 간결하면서도 서정적인 피아노 선율로, 때로는 꿈틀대는 리듬의 생기로 영상이 담아내는 표정을 ‘들려주는’ 작곡가 히사이시 조가 오는 11월8일 세종문화회관에서 내한공연을 갖는다. 히사이시 조는 <키즈 리턴> <소나티네> <하나비> 등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이웃집 토토로> 등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음악으로 잘 알려진 일본의 작곡가. 20여년 동안 일본은 물론, 세계 영화팬들의 귀를 사로잡아온 그의 첫 발은 4살 때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뒤 일본 국립음악대학 작곡과 재학 시절, 당시의 새로운 흐름이던 미니멀리즘을 수용하며 현대음악 작곡가 겸 연주자로 활동을 시작했고, 82년 첫 솔로음반 을 선보였다. 자신의 창작음반은 물론 TV와 CF음악, 각종 음반프로듀서 등을 거쳐왔지만, 무엇보다 그의 음악을 기억하게 되는 이유 중 하나는 역시 84년 미야자키 하야오와의 만남이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음악을 맡게 된 그는 웅장한 오케스트레이션에 이국적이면서도 신비로운 음색을 들려줬고, 이후 미야자키의 든든한 파트너로 거의 전작의 음악을 맡아왔다. <천공의 성 라퓨타>의 애달프고 환상적인 서정곡도, 일본 전통음악을 활용한 <이웃집 토토로>의 생기발랄한 노래도, <붉은 돼지>의 낭만적인 유럽풍 선율도, 모두 그의 솜씨다. 미야자키 하야오와의 작업이 클래식과 일본 음악의 전통을 세련되게 소화했다면, 기타노 다케시와의 작업은 현대음악과 미니멀리즘의 간결함으로 명성을 이어갔다. 애수어린 서정을 품은 피아노와 전자악기 등을 활용한 리듬 파트를 따로 또 같이 들려주는 음악은, 극단적이면서도 돌연한 폭력과 순수, 삶과 죽음에 대한 통찰을 희비극으로 뒤섞는 기타노 다케시의 호흡에 잘 맞물려 있다. 92년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로 기타노 다케시를 만난 그의 음악은, 폭력의 굴레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야쿠자들의 인생 한 악장 <소나티네>, 죽음을 앞둔 아내와 형사 남편의 마지막 여행을 따라가는 <하나비>, 헤어진 엄마를 찾아가는 소년과 건달의 동화 같은 로드무비 <기쿠지로의 여름> 등 종종 말없이 사색하는 절제된 영상의 감성을 끌어낸다. 오는 8일, 7시30분부터 열리는 공연의 주된 레퍼토리는 기타노 영화의 선율들이다. 히사이시 조에게 일본 아카데미 최우수음악상을 안겨준 <소나티네>와 <하나비>를 비롯해, <키즈 리턴> <기쿠지로의 여름>, 그리고 최신작인 <브러더>까지 영화의 테마곡들을 들려줄 예정. 아쉽게도 미야자키 하야오와의 작업 증서에는 최신작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만 연주 목록에 올라 있다. 그 밖에 최근 그가 직접 감독한 현악 4중주단에 대한 영화 <쿼텟>, 98년 나가노 동계장애인올림픽 주제곡 등을 연주할 예정. 재일동포로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은 지휘자 김홍재와 코리안 심포니가 협연한다. 그의 음악적 서정을 다 만날 순 없음에도, 스크린 밖으로 달려나온 선율의 생기를 놓치기는 아까운 기회다(문의: 크레디아 02-751-9606∼9610). 황혜림 blauex@hani.co.kr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The Man Who Wasn’t There

오픈시네마|미국|조엘 코언|2001년|116분 1949년 여름 캘리포니아 북쪽의 소도시. 이발사 에드 크레인(빌리 밥 손튼)은 하루 종일 무표정한 얼굴로 서서 사람들 머리를 깎아준다. 어느날 이발소를 찾은 한 남자가 그에게 돈이 될 만한 사업을 소개한다. 1만달러만 있으면 지긋지긋한 이발소 생활을 청산할 수 있다고 생각한 크레인은 궁리를 한다. 어떻게 하면 1만달러를 구할 수 있을까? 그는 바람난 아내를 떠올린다. 아내의 정부를 협박해서 1만달러를 뜯어내자는 엉뚱한 생각에 깊이 빠져든 것이다.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는 <분노의 저격자>로부터 <파고>로 이어지는 코언식 범죄영화이다. 40년대 필름누아르 스타일을 빌려 흑백으로 찍은 이번 영화는 사소한 욕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큰 재앙으로 변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감독은 이것이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이중배상>의 작가 제임스 M. 케인의 세계에서 따온 것”이라고 밝혔다. 평범한 인물이 유혹에 빠져 타락의 내리막으로 치닫는 것은 케인의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코언의 이번 영화가 단순히 옛날 영화의 추억을 되살리는 시도는 아니다. 아주 부드러운 흑백색조의 대비, 나른하게 흐르는 베토벤의 피아노곡, 표정변화가 거의 없는 주인공의 연기 등 영화는 전반적으로 몽환적인 느낌에 취해 있다. 그 모호한 분위기는 도덕과 양심의 기준이 무너지는 게 예상보다 훨씬 쉬운 일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부추긴다. 올해 칸영화제 감독상 수상작.

[특집] 제 6회 부산국제영화제 - 영화 따라 부산가자

가을 바람이 제법 선선합니다. 그런데 뭔가 중요한 `월동 준비`를 못한 것 같아 자꾸 불안하고 초조하십니까. 극장에서 볼 수 있는 영화들이 다 `그 밥에 그 나물`인 것 같아서 지겨우십니까. 혹시 코끝에서 해운대 바닷 내음과 꼼장어 냄새가 묻어난다거나, 남포동 극장 거리를 배회하는 꿈을 반복해서 꾸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부산국제영화제 ‘금단 증세’에 시달리고 있는 겁니다. 한달이나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답니다. 11월9일부터 17일까지 부산을 찾아주시면 좀더 다양하고 풍성해진 메뉴로 당신의 허기를 달래드리겠습니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여섯 번째 초대장을 보내왔다. 언제나처럼 거부하기 힘든 유혹. 올해는 장 뤽 고다르, 허우샤오시엔, 장이모, 이마무라 쇼헤이 등 위대한 거장들의 신작, 그리고 차기작을 기대하게 하는 동서양 신예들의 놀라운 데뷔작들이 보기 좋게 어우러져 있다. 역대 최다인 60개국 영화를 만날 수 있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칠레, 우루과이, 크로아티아, 아이슬란드, 코트 디부아르, 몽골 등의 낯선 땅, 낯선 문화가 다듬은 영화들은 어떤 모양새와 빛깔을 하고 있을지, 기대해봄직하다. 뒤늦게 날아든 반가운 소식은 신상옥 감독 회고전 프로그램에, 북한에서 만든 작품 중에서 감독이 가장 아끼는 작품으로 알려진 <탈출기>가 추가됐다는 것. 이로써 부산영화제 프로그램은 모두 203편이 됐다. 올해로 여섯돌을 맞은 부산영화제는 이제 도쿄영화제와 홍콩영화제를 훌쩍 앞질러 명실공히 ‘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영화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는 “해외영화제를 다녀보면 부산영화제의 위상이 달라진 것을 실감한다”는 김동호 집행위원장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부산을 찾기로 한 게스트들의 면면으로 확인할 수 있다. 칸을 비롯한 세계 주요 영화제의 집행위원장과 프로그래머 40여명이 부산을 찾기로 했고, PPP에는 30여개국에서 800여명의 게스트가 참가 신청을 해놓았다고 하니, 조만간 ‘부산에 가야 영화가 보인다’는 이야기가 영화계의 잠언처럼 오갈지도 모를 일이다. 가장 열렬하게 영화에 구애하는 관객의 나라. 부산영화제를 다녀간 각국 영화인들이 전하는 후일담 때문인지, 올해도 그 이름만으로도 설레는 거장과 스타들이 ‘대거’ 부산을 찾아 관객과 조우한다. 대만의 거장 허우샤오시엔, 프랑스 누벨바그의 뮤즈 잔 모로, 회고전을 여는 신상옥 감독, 유고슬라비아의 거장 두샨 마카베예프, 일본의 이마무라 쇼헤이와 이와이 순지 등이 관객과 얼굴을 마주할 예정이다. 올 칸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피아니스트>의 브누아 마지멜과 최근 일본에서 개봉한 한·일합작영화 <고>의 구보즈카 요스케 등 해외 스타급 배우들도 부산을 찾는다. 또 개막작 <흑수선>을 비롯해 한국영화 파노라마와 새로운 물결부문에 소개되는 한국영화의 감독과 배우들도 관객과 더불어 축제를 만끽할 예정. 이 밖에 타이영화인과의 만남, 한국독립영화 세미나, 신상옥 감독과의 대화 등 진지한 관객을 위한 토론 프로그램도 준비돼 있다. 행사가 초겨울로 늦어져 야외상영장 활용이 어려워진 대신 올해는 부산전시컨벤션센터 BEXCO에서 개폐막식 행사를 치르고 오픈시네마 섹션의 작품들을 상영한다. 실내에서 연출하는 개폐막식은 “스펙터클한 연출없이 차분하고 간소하게, 그야말로 영화제답게” 치른다고. 야외상영관이 BEXCO로 대체되긴 했지만 상영관 수는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15개관이다. 지난 10월17일 개시한 개폐막작 예매는 개막작인 <흑수선>이 2분28초 만에, 폐막작인 <수리요타이>가 11여분 만에 매진됐다. 일반 상영작 예매는 26일에 시작됐는데, 부산은행 창구와 폰뱅킹, PC뱅킹, 인터넷(www.piff.org)을 통해 예매할 수 있다. 개폐막작은 1만원, 일반 상영작은 5천원, 평일 1회 상영작과 와이드앵글 상영작은 4천원이다. 개막 하루 전, 상영 하루 전까지는 전액 환불이 가능(단, 인터넷 예매는 제외)하다. 박은영 cinepark@hani.co.kr

멀홀랜드 드라이브 Mulholland Drive

오픈시네마|미국|데이비드 린치|2001년|146분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와 함께 칸영화제 감독상을 공동수상한 데이비드 린치의 신작은 미녀와 섹스파티와 살인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악몽이다. 제목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이야기가 시작되는 공간인 LA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고급 주택가의 한적한 도로. 그곳을 지나는 리무진 뒷좌석에 앉은 검은 머리 미인은 살해되기 직전이다. 맞은편에서 오던 차가 들이받는 바람에 리무진에서 빠져나온 그녀는 언덕 아래 집에 몸을 숨긴다. 자동차 사고로 기억을 잃은 그녀는 이 집에서 만난 금발의 여자에게 도움을 청하고 둘은 사라진 기억을 찾아나선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블루벨벳> <트윈픽스> <로스트 하이웨이>로 이어지는 린치의 스타일이 뚜렷한 작품이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앞뒤가 뒤틀려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플롯, 붉은 커튼 뒤의 악마, 텅 빈 객석을 향해 흘러나오는 복고풍의 노래 등은 린치의 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꿈결같은 순간을 만들어낸다. 감독은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러브스토리’라고 말했지만 미스터리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범죄와 유혹과 타락의 세계인 필름누아르에 가깝다. 물론 장르를 뭐라 규정짓든 린치의 영화라는 장르 규정보다 적절한 건 없겠지만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관객을 밝고 화사하고 섹시하고 유머러스한 악몽으로 초대한다.

차스키 차스키

■ Story 스톡홀름 교외에 사는 소년 차스키(사무엘 하우스)는 엄마(알렉산드라 라파포트)가 지중해에서 보낸 휴가의 열매로 태어난 바캉스 베이비. 문어잡이 잠수부 친아빠와 멋지게 조우하기 위해 잠수연습에 몰두하고, 괴롭힘당하는 약한 친구를 돕고, 첫사랑을 경험하며 차스키의 여덟살은 바쁘게 흘러간다. 한편 록밴드 멤버인 말괄량이 엄마는 차스키네 집 셋방살이를 시작한 성실한 경찰관 욜란과 베이스 주자 애인 사이에서 망설인다. 마침내 엄마를 졸라 그리스 여행에 나선 차스키. 그리워하던 아빠와 예상과는 다른 만남을 갖는다. ■ Review 친구들과는 영판 다른 이국적인 이름. 미혼모 엄마와 거울 한구석에 붙어 있는 낡은 사진으로만 얼굴을 익힌 아빠. <차스키 차스키>는 기본 전제만 슬쩍 보면, 한 사랑스런 꼬마의 외로운 사연으로 감성의 연한 부분을 건드릴 만한 이야기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아빠 없는 하늘 아래’나 ‘아빠 찾아 삼만리’식의 센티멘털리즘은 약에 쓰려야 없다. 소년은 울지 않는다. 일부러 눈물을 참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행복하기 때문이다. 마음 통하는 친구와 귀여운 첫사랑, 아들의 돌봄이 필요한 쾌활한 엄마에다, 오토바이 뒷좌석에 안아올려 푸근한 등을 빌려주는 경찰관 아저씨까지 있는 차스키는 99% 행복하다. 이따금 “아빠랑 사랑에 대해 논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이 고개를 들 뿐이다. 만날 기약도 없는 친아버지의 존재는 차스키의 유년에 드리운 그늘이 아니라, 어딘가에 숨어 있는 오아시스와 같은 비밀스럽고 달콤한 희망이다. <차스키와 아빠> <차스키와 엄마>라는 두편의 연작 아동소설 베스트셀러를 영화화한 엘라 렘하겐 감독은 이 가족영화의 마지막 장에 이르러 차스키와 엄마, 아빠의 재회를 허락한다. 그러나 아빠와 차스키가 함께 문어를 잡고, 엄마와 아빠가 한밤의 카페에서 소식을 나눌 뿐 렘하겐 감독은 결코 세 식구의 으스러지는 포옹을 보여주지 않는다. <차스키 차스키>에서는 부모 자식의 끈끈한 사랑도 남녀의 연애도 일종의 온화한 우정의 형태로 수렴된다. 영화 속 어른들은, “우리는 아주 특별한 인연이 있어 가족이 됐단다. 언젠가 헤어져 각자의 길을 갈 테지만, 그때까지 잘 지내보자꾸나” 하는 시선으로 아이들을 바라보고, 아이들은 어른들도 도움과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임을 안다. 이처럼 <차스키 차스키>의 세상에서는 사랑을 느끼면 대뜸 분홍색 하트무늬를 그려 표현하는 담백한 감성의 어른과 아이들이 또래처럼 충고와 격려를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말투는 얌전하지만 <차스키 차스키>가 들려주는 가족상과 삶의 방식은 은근히 대담하다. 엘라 렘하겐 감독의 세 번째 장편인 <차스키 차스키>는 제50회 베를린 어린이영화제의 오프닝작으로 선정돼 호평받았으며, 본국 스웨덴에서는 4개월이 넘게 롱런하며 스웨덴의 오스카 격인 황금벌레상의 주요 부문을 휩쓸었다. 김혜리 vermeer@hani.co.kr

“현실에서 건강한건 꿈이 있기때문” <와이키키 브라더스> 박원상

저마다 다른 ‘개인기’를 가지고 있는 <와이키키 브라더스> 멤버들 중에서도 오르간주자 ‘정석’의 개인기는 눈에 띈다. 바로 ‘여자 꼬시기’, 그리고 강한 ‘생활력’. 옮겨다니는 도시마다 드러머 강수가 찍어둔 여자는 속속 다 손을 대 결국 칼을 맞는 정석은, 한편으론 클럽주인이 여자보컬을 내세우는 새로운 ‘무대편성’을 감행하자 냉큼 ‘스카우트’돼 밴드를 이탈하는 현실파이기도 하다. 밉되 미워하기 어려운 정석 캐릭터를 실감나게 연기해낸 박원상은, 그러나 실제로는 정석과 전혀 다른 인상을 가진, 가족적이고 깔끔하고 매너 좋은 사람. 영화에 나오는 긴 머리는 붙인 것이란다. 옷을 입은 품새나 행동거지가 정석은 물론이고 배우치고도 너무 단정해 꼭 어느 회사의 영업사원 같은 그는, 스탭들 사이에서도 제일 ‘젠틀’하다는 평을 들었다. “아직 연기를 연기로 해서 그런 건지….” 박원상은 스크린, 혹은 무대 위에서와 현실의 자신 모습이 전혀 다른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연기를 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평가하고 있었다. 연극 무대에서 속칭 ‘쌈마이’ 역할을 주로 맡는다는 그는, 무대에서 내려오면 사람들이 다 자기를 못 알아봐, 언제부턴가 그런 고민이 생겨났다고. 그런 그가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는 정석과 공통점이 있으니, 바로 ‘생활력’이라는 개인기, 그리고 음악에 몸담았던 이력이다. 대학 졸업 뒤 6년간을 연극계에 머물며 꾸준히 ‘밥벌어먹고’ 살아온 사실이 그의 생활력을 증명한다면, 대학가요제 은상 트로피가 음악에 대한 그의 끼를 보여준다.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는 1993년 대학가요제에 남성트리오 ‘블루스’의 멤버로 <아무 말도 말아요>를 불러 은상을 탔다. 그러나 그때도 노래만 했지, 건반을 다룰 줄은 몰랐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오르간주자가 되는 바람에 촬영 전 2개월 동안 맹연습을 했다고. 차이무 극단의 주요멤버로, <비언소> <평화씨> <통일익스프레스> 등 연극을 주로 해온 그가 첫 출연한 영화는 <세친구>였다. <씨네21>에 난 조단 역 모집 광고를 보고 문구점에서 이력서를 사서 보냈다고. 캐스팅결과는 폭력배 고참이라는 단역으로, 딱 1신에 나왔다. 다음 영화는 <킬리만자로>. 역시 단역을 맡아 영화 초반 박신양이 쫓기는 장면, 딱 1신에 나왔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에는, <와이키키…> 조감독이 그의 연기가 담긴 단편테이프를 임 감독에게 보여줘 캐스팅됐다. “<와이키키…>에서 인물들이 걸어가는 길이 관객 보기엔 갈 데까지 갔구나 하겠지만, 그게 본인들에겐 절대 끝일 수 없다. 생계를 위해서 하지만, 꿈마저 버렸다면 활동을 못할 것이다. 현실에서 그나마라도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건 꿈이 있기 때문이다.” 박원상 본인에게, 그런 꿈은 단연 연극이다. 언젠가 작은 극장을 갖고 극단을 운영하는 게 그의 꿈. 40, 50 돼서도 현장에서 후배들과 기분좋게 술잔 기울이며 있을 수 있기를, 그는 바라고 있다.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기점으로 영화에서도 점점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그는, 요즘 강력계 형사 역을 맡아 <정글쥬스>를 촬영중이다.

“조선 촬영기 개발해서 특수촬영까지 했어”

한국영화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카메라 ‘코첼’에 대해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이제 막 형성되기 시작한 조선영화계에 고몽, 발보, 아이모가 앞다투어 수입되는 가운데, 탐구하듯 맨손으로 만들어진 국산 촬영기가 ‘코첼’이다. 이창근은 1908년 평양 신창리 출생으로 한국전쟁 이전까지 이곳에서 활동했다. 28년에는 도쿄에 유학해 전기학교를 수료했다. 이창근은 이때의 도쿄행에 대해 “나이 많은 아내와 거상(巨商)인 아버지가 있는 살림에 애착이 없었다”고 무심하게 회고하였으나, 전기학교 유학과 그곳에서 경험한 일본의 시대극은 이창근의 영화활동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평양으로 돌아온 이창근은 ‘서선키네마’(1932)와 ‘동양토키영화촬영소’(1939)를 설립하고 직접 만든 영화기계로 작품활동을 하였다. ‘동양토키영화촬영소’는 촬영, 녹음, 현상 시설을 모두 갖춘 150평 규모의 촬영소로 대부분 이창근 자신의 제작품으로 꾸며졌다. 토키영화의 수입에 자극받은 이필우가 일본 영화인들과의 동반연구로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1935)을 성공시킬 무렵, 이창근은 3년간의 연구 끝에 발성영화 제작이 가능한 독자적인 시스템을 평양에 실현시켰다. 이때 만들어진 발성영화 <처의 모습>(1939)은 평양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흥행에 크게 성공한 작품이다. 비슷한 시기에 많은 지방 제작사들이 자본을 중심으로 개폐를 거듭하던 사정과 비교할 때, 기술적 전환을 수용하며 20년 가까이 지속된 이창근의 영화활동과 그의 평양 촬영소는 주목할 만하다. 서울의 영화인들과는 독립적으로 전개된 그의 이력과, 회고를 통해 살펴볼 수 있는 평양 영화계의 사정은, 지금은 잃어버린 반쪽 북한의 영화사에 대한 상상을 자극하기도 한다. 1942년 일본의 전시(戰時)정책으로 전국의 영화사가 강제 폐쇄되면서 이창근의 영화 활동도 중단되었으나, 54년 서울에서 다시 만들어진 ‘코첼3호’는 <인생화보>(1957), <세쌍동>(1959) 등의 작품을 남겼고, 이창근은 1970년대까지도 기계 제작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내가 애 적에는 평양에 극장이라는 것도 없었고, 영화를 구경한다고 하는 것은 더더욱 없고. 꼭 한번 할아버지를 따라가서 본 일이 있다. 남의 뜨락을 얻어가지고 탈춤을 한다 해서 갔더니 영사기를 갖다놓고 돌리는데, 상자에다가 사람을 집어 여놓고 밑에다가는 폭탄에 불을 붙이니, 죽지 않고 뛰어나와서는 또 엉덩짝에 불이 붙으면서 도망가고, 뭐 그런 사진이 기억이 난다. 그렇게 활동사진 한번 구경한 일이 있고. 정식 극장, 어른들의 극장에는 못 가봤지만, 늘 하는 장난으로 연극하고 환등을 했다. 밤이면 연극한다고 장을 쳐놓고 성냥 한갑씩 받고 출입을 시켰다. 환등도 원리가 간단하다. 종이에다가 그림을 그려가지고 비추는데, 투명이 안 되면 종이에 초칠을 한다. 여기에 100볼트 전기를 넣고, 요즘 슬라이드 모양으로 로프를 들어가게 하고 렌즈를 비추면 두어간 바깥까지 거뜬히 뵌다. 공부는 언제나 낙제나 면해 올라가고 그랬고, 연극하고 환등하고, 여나믄살 때까지 그런 장난을 하면서 수업을 한 것이라고 봐도 될 테지. 열네살 나던 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내가 장남으로 장가들게 되면 신부된 사람은 살림을 봐야 될 사람이니까 나보다 네살 위에다가 약혼을 시켜놨다.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장사하느라고 집에 돌보지 못하고, 누님 또 동경 치과전문학교 가서 공부하느라고 집도 비우고, 나는 나대로 집에 애착도 나지 않고 해서 누님 있는 동경에 갔다. 그때부터 이제 내가 영화에 바람이 나게 됐다고. “찍을 땐 싱거웠는데…, 영화라는 것이 이상하구나” 한 이십살 됐을 땐데, 시부야 하숙집에서 지내게 됐다. 어디 학교라도 댕겨야 되겠는데, 공부는 원체 취미도 없고 전기학원이라는 게 있어 다니기 시작했다. 생도라고 한 스무명밖에 안 되고 사십난 노인네도 끼어 앉아서 주로 라디오 같은 것을 배웠다. 하루는 등교하느라고 가는데 트럭에 배우들이 전부 타고 떠나는 것을 봤다. 택시를 집어타고 그 길로 따라가는데, 지금 생각에 아마 후지산 산비탈쯤 되는 곳에 가서 내렸다. 촬영을 하는데, 칼싸움하는 그 동작이 빨르지 않고, ‘이찌 니’, ‘기무라 쿤(君) 나와라!’ 그러면 상대쪽에서 기무라라는 사람이 휙 돌아 칼을 떡 대고 찌른다는 것이 또 ‘이찌 니’, 아주 슬로 모션으로 장난 같거든. 얼마 있다가 시부야 앞에 조그만 극장이 있는데, 그 영화가 간판에 올라가 붙었다. <시미즈 지로의 잇가>(淸水次郞長の 一家). “야, 저거 찍던 거다” 들어가 보니, 칼싸움을 하는데, ‘짝짝짝짝’ 아주 뭐 쾌활하고 정말 살상이 농하게 뛰논단 말야. 찍긴 싱겁게 찍었어도 영화라는 것이 이상하구나, 거기서 흥미를 느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아버지는 장사하느라고 그러고 여편네는 살림하느라고 그러고, 누가 말리는 사람이 있어? 그때부터 촬영기를 맨들어가지고 영화를 만들고 싶은 생각이 있어서 착수한 것이 소화 4년, 1929년이다. 지금이야 ‘코첼 1호’라고 이름을 붙였지만 그때는 뭐 이름도 없었고, 기본 재료로는 시계 태엽을 톱니 삼아 만들었다. 톱니가 한 코마씩 얽어매서 긁어내리고 셔터만 돌아가면 됐지 다른 무슨 특수한 원리가 없기 때문에 만들기는 상당히 쉽다. 한 바퀴 돌리면 이쪽은 여덟 코마가 내려가고 내려갈 적에 셔터만 가렸다 뗐다 하면 되고 또, 렌즈는 하나고 삔(핀) 맞추고 가리고 들어오면 되는 거다. 그걸 맨들어가지고, ‘서선키네마’라는 간판을 붙이고 <돌아오는 영혼>이라는 첫 작품을 만들었다. ‘서선키네마’라는 것은 그러니까 우리 집이지. 간판은 들어가는 문에다 달고, 사무실은 이층에다 맨들고, 뜨락에 현상소를 만들어서 거기서 현상하고 햇빛에 말리고 그랬다. <돌아오는 영혼>은 시나리오도 내가 다 썼고, 특수촬영도 해넣은 영환데, 제목이 문제가 돼서 바로 흥행에 붙이지는 못했다. 그때는 전라도 사람들이 생계가 힘들어서 북간도로 전부 이민을 갈 때다. 바로 그 스토린데, 북간도로 이민간 조선인이 거기서도 중국사람의 압박을 못 이겨 죽는다, 죽었지마는 그 영혼만은 돌아와 한국을 지킨다, 그래서 <돌아오는 영혼>이다. 죽은 영혼이 압록강 철교 위로 날아오는 모습에서 특수촬영이 들어갔다. 32년에 찍고, 33년에 검열 맡으러 총독부에 올라갔는데, ‘다마시이(魂靈)가 와루이(惡い)!’ 제명이 불순하다 해서 재깍 제동이 걸렸다. “‘돌아가는 영혼’으로 하지 왜 ‘돌아오는 영혼’으로 하느냐, 북간도도 살기가 좋으니 북간도로 가는 걸로 개작을 해라“ 개작비 십오원 더 들여가지고 검열 다시 올라갔더니 통과가 됐다. 그 무렵에 평양에서 영화에 관계한다 하는 인물로서는 정기택이 있었다. 기택씨의 아버지가 장별리에서 미곡상을 하고 있었는데, 서울서 이경손씨가 내려와가지고 북경루에서 촬영도 하고, <춘희>를 찍은 일이 있다. 기택씨는 주로 서울 클럽하고 손을 잡고 하고, 나는 나대로 평양에서 했지 별다른 유대는 없었다. 또 영화를 백인다고 하는 것 자체가 서울하고 평양하고밖에는 없었고…(<춘희>는 1928년, 이경손 감독, 정기택 출연으로 평양키네마사가 제작한 작품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창근의 평가로 보아 평양키네마사의 경우 제작 조건을 확보하고 안정적으로 활동한 영화사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춘희>는 정기택이 아버지를 통해 자본을 대고 서울의 스탭을 초빙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을 것이다. 자본을 따라서 일시적으로 인력을 구성하고 영화사 이름을 걸었다가 흩어지는 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영화 제작 방식이기도 했다.- 필자). 사실감 살리려 함경도 설원으로 로케 2회 작품은 <도회비가>(1934)다. <돌아오는 영혼>이 제일관에다 붙여가지고 180원 수입을 벌어줬기 때문에 그해 가을에 곧 시작했다. 1회작에는 이름없는 기생을 주연으로 썼지만 이번에는 좀더 진보적으로, 연극계에 있는 사람도 쓰자 해서 ‘연극호’(당시 평양에 있던 직업 극단. 가설 극장을 세워 두세달씩 공연을 했다고 한다.- 필자) 사람들을 등용하고, 촬영도 내가 하지 않고 서울에서 한창섭(이경손- 정기택 진용에서 주로 활동한 촬영기사. <산채왕>(1926년), <춘희>(1928년) 등을 촬영하였다.- 필자)을 내려오게 했다. 다 모아놓고 보니 여러 사람들 제안이, “돈도 있고 한데 왜 평양시내에서만 백이느냐, 로케를 가자.” 눈을 배경으로 찍기 위해서 함경북도 웅기로 로케를 갔다. 눈이 많은 곳이라 한번 내리기 시작하면 보통 1m는 쌓인다. 적설을 배경으로 싸우는 장면을 백이는데, 저쪽에서 총을 쏘면 네 활개를 펴서 큰대자로 자빠졌다가 또 총을 쏘며는 눈 속으로 쏙 들어가 상대방 뒤로 나와서 뒤통수를 치는, 그런 장면을 표현했다. 문제는 총인데, 총구녁에서 연기가 안 나니까 재미가 없었다. 총은 총대로 꽝 하면, 변사가 ‘꽝!’ 한대는 거보다도 이 장면을 어떻게 실감하게 할 수 없겠는가, 이런 아이디어로서 생각한 것이 엽총을 얻어 쓴다는 것이었다. 엽총을 구해가지고 탄환은 빼고 쏘아도 연기만 나게 하면 되지 안 하겠냐 말이지. 허가를 받기 위해서 여관 주인을 앞세우고 일본 순사부장을 찾아갔다. 정리 이기림/ 동국대학교 대학원 연극영화과·이영일출판프로젝트 연구원 marie320@hanmail.net이 기록은 고 이영일 선생이 남긴 귀중한 자료인 원로영화인 녹취테이프를 소장 영화학도들이 풀어 정리한 것입니다.

한국영화 호황, 거품만은 아니다

한국영화의 활황이 어쨌든 반가운 일이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좀은 당황스러워하는 눈치다. 마치 시험보는 데 몇 문제 못 풀고 모조리 찍었는데 만점을 받아버린 것처럼, 박수는 받고 있지만 뭔가 찜찜한 구석이 남아 있어서인지 이런 폭발적인 흥행 기류에 대한 분석과 전망도 분분하다. 서울예대 강한섭 교수는 이런 ‘찜찜함’의 원인을 이른바 거품현상이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최근 열린 영화평론가협회 추계 세미나 발제문(‘한국영화산업의 심각한 불안’)을 통해 강 교수가 내놓은 거품성장론이란 한국영화의 비약적인 성장이 “한국영화의 수준이 향상되었거나 영화상품에 대한 수요 증가에 기인한 자생적인 성장이라기보다 김대중 정부의 포퓔리슴적인 정책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강 교수는 정부가 영화쪽에 편파적으로 많은 돈을 끌어다대며 제작편수를 늘리고 점유율을 높이겠다는 목표를 정하고 시행하는 것은 “투입량 대비 생산량 즉 생산성”을 늘리기보다 단순 산출량만 늘리는 맹목적인 ‘군대식 전략’이라고 비판하면서, ‘눈부신 쏟아붓기’에서 비롯된 “한국영화산업의 성장은 질적인 성장이라기보다 양적인 성장”이라고 규정했다. 강 교수가 발제문에서 주장하려는 전체적인 취지에 대해서는 동의하고 새겨들어야 할 말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몇 가지 다르게 보는 점이 있다. 먼저 지금의 거품현상이 전적으로 정부의 포퓔리슴적 정책에서 비롯되었다는 분석을 수긍하기 어렵다. 강 교수의 주장처럼 나랏돈이 영화산업의 흐름에 그렇게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정부가 돈을 앞세워 채찍을 휘두른다고 제작편수를 크게 늘릴 수도 없을뿐더러 현재 영화계에 유입된 자본의 상당액은 금융자본이든 벤처자본이든 어쨌든 민간자본이다. 그나마 나랏돈도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예전처럼 영화 한편에 몇억원씩 나눠주며 바보같이 쓰지는 않고 있다. 영진위가 해마다 투자조합에 100억원 가량을 출자했던 것처럼 직접 지원이 아니라 영화전문 투자조합에 출자해 자금 풀을 만들어주는 것이 큰 흠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경계해야 할 것은 강 교수의 주장대로 “금융자본의 투기”와 흙탕물을 튀기는 일부 뜨내기 뭉칫돈이 아닐까. 또 현재의 양적 성장을 너무 가벼이 보는 것 아닌가 하는 점이다. 양적 성장은 반드시 질적 성장을 가져온다는 변증법적 논리에 따르면 지금의 양적 성장을 ‘심각한 불안’의 징표로 걱정하는 것은 기우라는 생각이다. 물론 배급 메커니즘에 대한 대안은 여전한 숙제이지만 영화가 많이 만들어져야 질적 성장도 이뤄진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다. 한편 굴뚝없는 영화산업의 생산성을 강 교수의 주장처럼 “그저 더하기 빼기의 기초적인 셈본만 알아도 충분”한 정도의 ‘투입량 대비 생산량’으로 타산해서도 안 된다. 규모와 컨셉 등 복잡다기한 요인을 포괄한 영화의 생산성이란 천차만별이어서 단순 수치로 가늠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 강 교수 거품론에는 일면 실수로 보이기도 하지만 논거를 뒤엎는 결정적인 하자가 있다. 강 교수는 ‘쏟아붓기’의 근거로 ‘1편 평균 총제작비가 1995년에 비해 2001년 상반기에는 330% 늘어난데 비해 관객 수는 1995년 1200만명에서 2000년 2천만명으로 166% 늘어 투자액 증가(330%)에 비해 매출액 증가(166%)는 절반 정도에 그쳤다’고 예시했다. 하지만 이 수치는 사실과 다르고 비교 또한 적절하지 않다. 한국영화연감에 따르면 1995년 관객 수는 944만명이고 2000년에는 2189만명으로 231% 늘었고, 흥행수입은 1995년 393억원에서 2000년 1163억원으로 295% 증가했다. 게다가 강 교수는 총제작비는 2001년 상반기까지의 증가치를 기준으로 잡고 관객 수는 2000년까지 증가치를 대비하는 바람에 결과를 왜곡하고 있다. 이를 바로잡아보면 1995년에서 2000년까지 총제작비는 215% 늘어났고, 같은 기간 관객 수는 231%, 흥행수입은 295% 늘어나 강 교수의 주장과는 반대로 제작비 상승치보다 매출액 증가치가 오히려 더 높다.

바람이 속삭이는 자유의 꿈

Ostra E O Vento 1997년, 감독 월터 리마 출연 페르난두 토레스 11월8일(목) 밤 11시 “이것은 진정한 영화적 마술.” 어느 외지는 <바람의 전설>에 관해 이렇게 평했다. 그리 어긋난 평가로 들리진 않는다. 영화는 우리가 흔히 보았던 내러티브영화의 시공간 개념을 남김없이 무너뜨리고 있다. 과거와 현재는 뒤죽박죽 뒤섞이고 공간마저 초현실적인 색채를 띤다. 그런데도 <바람의 전설>은 그리 이해하기 어려운 영화가 아니다. 캐릭터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으며 극의 호흡이 완만하기 때문. 월터 리마 감독은 브라질 출신의 연출자로 1960년대부터 연출생활을 시작한 인물. 초현실적이고 마술적인 영화를 선호한다는 그의 언급처럼, 영화엔 남미문학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었던 마법의 순간이 깊이 각인되어 있다. <바람의 전설>에서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영화음악. 치코 부르아키 등 현대 브라질 대중음악을 대표하는 뮤지션들의 부드러우면서 빼어난 실력을 자랑하는 육성, 연주가 빼곡하게 들어 있는 음악은 백미라고 할 만하다. 외딴 섬에 등대지기 호세와 딸 마르셀라가 살고 있다. 섬에 식량공급선이 도착하고 다니엘은 인적이 보이질 않자 호세와 마르셀라를 찾는다. 그런데 다니엘이 발견한 것은 마르셀라의 일기장뿐이다. 일기장엔 아버지와 외롭게 섬에서 살 수밖에 없었던 마르셀라의 내면이 기록되어 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섬에서만 생활했고 육지로 나간 적이 없다. 아버지가 부정한 아내에 관한 기억으로 딸이 곁을 떠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 외로움에 지친 마르셀라는 바람결을 연인삼아 그에게 사울로라는 이름을 붙인다. <바람의 전설>은 어느 부녀의 이야기를 신화적인 기운으로 포장하고 있다. 소녀는 억압적인 아버지 밑에서 정신적인 분열을 겪고, 바람과 대화하는 환상에 빠져든다. 월터 리마 감독은 깊은 내상을 간직하는 인물들 심리를 아무런 은유없이, 자유분방하게 왜곡된 시공간을 통해 스크린에 직접 투사하고 있다.보인다. 어느날 괴한의 침입으로 인순이 살해당하자 문선은 억울하게 누명을 쓴다. 살인자의 누명을 쓴 문선은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성소민, 이빈화 등이 출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