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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그 미국 할머니, 한국말도 잘하네”, <집으로…>

돌이켜보면 나의 외할머니는 무식했으나 나름대로 당당했고 사랑스러운 분이셨다. 맞은편 동네의 따뜻한 백열전구 불빛들이 하나둘씩 켜져 어슬어슬 건너다 보이고 집집마다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하면 ‘저 집도 오늘 저녁 끼니는 거르지 않는구나’라고 서로를 안심하던 달동네. 그 달동네 외가댁에서의 기억은 곧 외할머니와의 추억이다. 나의 수호천사 외할머니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무조건의 사랑을 주셨다. 그러나 유일하게 화를 내며 주장하시던 일이 있었는데 ‘밤에 똥을 누지 말라’는 것이었다. 손자에게 이끌려 푸세식 뒷간 문 앞을 지키고 앉아서 “똥 누냐? 밤똥 누지 마! 먹은 것도 없는데 배를 비우면 아침에 배고파지잖아∼”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시면 나오던 응아도 당황하고 멈칫거리기 일쑤였다. 배설을 참으면 배가 덜 고프리라 여기시는 할머니의 사랑(?)어린 충고에도 불구하고 그게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유난히도 튀어나온 텔레비전의 뒤통수가 손도 못 대게 뜨거워지도록 TV 보는 일이 낙이었던 할머니께서 어느 날 <제시카의 추리극장>이라는 외화를 보시고는 기분 좋게 껄껄 웃으시며 “아이고 그 미국 할머니. 참 한국말도 잘하네” 하시는 것이었다. 나 <소머즈> 같은 젊은이들보다 훨씬 나이든 제시카 할머니의 한국어가 대견해 보이셨나보다. 외할머니가 뒤늦게 한글을 배우시느라 겨우겨우 한 글자씩 연습하시는 걸 본 것은 아홉살 때였다. 난 ‘그럼 할머니는 바보같이 여태 글자도 못 썼어?’라며 싸가지 없는 질문도 서슴없이 해댔다. 하루하루 먹고사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할머니의 인생을, 손자들까지 줄줄이 등장해서 야금야금 갉아먹었던 할머니의 세월을 철부지는 헤아리지 못했던 것이다. 외할머니께서 68살로 비교적 일찍 세상을 뜨셨을 때 난 무척이나 울었다. 큰딸인 내 어머니가 우는 모습을 보고 ‘우리 엄마한테는 이제 엄마가 없구나’ 싶어 마냥 안쓰러웠기도 했지만 장례를 마치고 몇달 동안은 길을 걷다가도 할머니 생각만 하면 나도 모르게 주르르 눈물이 흘렀다. 육남매를 낳아서 그중 한명을 저승길에 먼저 앞세우고 가슴 깊이 묻었다는 외할머니는 맞벌이하는 큰딸 내외를 위해 외손자까지 기르시느라 평생 허리 펼 날도 없었던 분이셨다. ‘이 땅의 모든 외할머니께 이 영화를 바칩니다’라는 엔딩 타이틀에 관한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 있어도 <집으로…>라는 영화를 봐야 할 것 같았다. 눈이 어두운 외할머니 옆에서 바늘귀를 꿰어주는 영화 속 상우의 모습이 그 또래 그 옛날 내 모습 그대로였고 안채에서 멀리 떨어진 냄새나는 뒷간 앞에서 상전 기다리듯 꾸부리고 앉아 손자를 기다리던 상우할머니의 모습은 바로 나의 외할머니 모습이었다. 나를 두근거리게 했던 수많은 멋진 영화들을 접어두고 <집으로…>를 이 글의 소재로 선택한 이유도 외할머니 살아생전에 고맙다는 말 한마디 못한 죄송스러운 마음과 외할머니와의 추억을 되새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왜 할머니를 엄마라고 불러요? 할머니라고 안 부르고요.” 다섯살인 내 아이가 물었을 때. “내가 너냐? 임마”라고 본데없이 대답하고 후회했던 만큼 아이를 키우는 일은 내가 하는 일 중에서 가장 서툰 일이기에 하나뿐인 아이를 데리고도 쩔쩔매며 친정어머니의 신세를 지는 일이 다반사다. 외할머니가 된 내 어머니는 ”외손자 길러봤자 다 소용없다고들 하더라” 하시면서도 일한답시고 잘난 척하는 딸의 아이를 정성껏 돌봐주시고 유난히 땀을 많이 흘리는 아이에게 보약을 지어 먹이시는 일도 자진해서 하신다. 아직도 짐을 덜어주지 못한 딸 주제에 말하기는 뭐 하지만 그래도 내 아이의 외할머니는 나의 외할머니가 사신 세월보다 더 오래 건강하고 유쾌하게 사셨으면 좋겠다.

배우출신 감독, <컨페션>의 조지 클루니

영화 <컨페션>은 미국 리얼리티 쇼의 창시자인 척 배리스의 <위험한 마음의 고백: 공인되지 않은 자서전>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척 배리스는 자신이 텔레비전 쇼의 프로듀서였을 뿐만 아니라 전 CIA 암살요원이기도 했다고 술회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 믿기 어려운 이야기는 찰리 카우프만이라는 걸출한 시나리오 작가의 손을 거쳐 다시 태어났고, 조지 클루니는 한눈에 그 시나리오에 매혹되었다. 영화 제작자로서 스티븐 소더버그와 한팀을 이뤄 ‘섹션8’이라는 회사를 운영하기도 하는 조지 클루니는 이 영화의 제작(미라맥스)을 돕는 차원에서 출연을 결정했고, 주인공 척 배리스를 CIA로 끌어들이는 또 다른 CIA 요원 ‘짐 버드’ 역을 맡았다. 하지만 처음부터 <컨페션>의 감독이 조지 클루니였던 것은 아니다. 사실, 브라이언 싱어, 데이비드 핀처, P. J. 호건, 커티스 핸슨 등 수많은 유명감독이 물망에 올랐었다. 그러나 영화화는 제작준비과정 중 여러모로 암초에 걸렸다. 끝내 조지 클루니는 이 영화의 연출을 직접하기로 결심했고, 감독으로서의 데뷔전을 치러냈다. 무엇보다 그는 텔레비전 쇼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유명한 토크 쇼의 사회자(조지 클루니에 의하면 제리 스프링어에게 처음으로 기회를 준 것 역시 그의 아버지였다고 한다)였고, 그 점이 “이 영화의 감독을 맡는 데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70년대 내내 텔레비전 세트 뒤에서 살았고, 그들이 어떻게 보이고, 어떻게 느끼는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요 스탭들과는 척 배리스가 연출한 <신혼부부게임> <데이팅게임> <땡쇼> 등의 비디오를 보고 또 보며 연구했다. 실제로 일부는 영화 속에 직접 삽입되기도 한다. 반면 조지 클루니는 ‘클루니 커넥션’을 이용하여 하나둘씩 친구들을 불러모으기 시작했다. 그의 영화적 스승 스티븐 소더버그에게는 여러모로 조언을 구했다. <웰컴 투 콜린우드>를 찍으며 단 3일을 같이 한 것뿐이지만, 주인공 척 배리스 역으로는 샘 록웰을 밀어붙였다. 그리고 2500만달러의 몸값을 자랑하는 줄리아 로버츠와 드루 배리모어를 단돈 25만달러를 주고 모셔왔다. 할리우드의 미남배우들인 브래드 피트와 맷 데이먼에게는 버트 레이놀즈와 톰 셀렉이 <데이팅 게임>에 나와 낙방한 과거를 들먹이며 재미삼아 출연해보라며 끌어들였다. 근거없는 자서전에, 기이한 시나리오 작가, 그리고 유명배우들의 조연과 카메오 출연. 이 엉뚱한, 또는 기막힌 조합으로 자신의 감독 데뷔작 <컨페션>을 완성한 조지 클루니에게 궁금증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돌아온, ‘감독’ 조지 클루니의 답변. 우선 꼭 필요한 질문. 당신은 <컨페션>의 어떤 점에 매혹되었나? 어떤 면이 이 영화를 연출해야겠다는 결정을 내리게 했나. 척 배리스의 인생 그 자체. 그가 쓴 <위험한 마음의 고백: 공인되지 않은 자서전>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성공한 남자가 그런 책을 썼고,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만약 사실이라면 굉장한 일이고, 거짓이라면 더 흥미로운 일이다. 어느 경우이든지 내게는 매력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연출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지금껏 감독이 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오랫동안 나는 영화제작이라는 것에 흥미를 갖고 있었고, 스티븐 소더버그와 함께 제작에 참여해왔다. 그런데 <컨페션>은 척 배리스의 이야기와 찰리 카우프만의 시나리오가 너무 마음에 들었고, 그 영화의 제작에 도움을 주고 싶어 CIA 요원 역을 자청한 것이다. 하지만 그간 몇번 제작상의 실패가 있었고, 그러던 중 스티븐 소더버그에게 물어보았다. “까짓거 내가 한번 해볼까?” 그도 좋은 생각이라며 격려했고, 그간 오랜 준비과정을 함께해온 만큼 자신감도 있었다. 처음 당신은 이 내용을 접했을 때 <컨페션>이 무엇에 관한 이야기라고 이해했는가. 무엇보다 척 배리스의 원작 <위험한 마음의 고백: 공인되지 않은 자서전>부터 언급하고 싶다. 나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 책은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말하고 있다. 어느 날 아침 깨어나서는 자신이 과거에 바랐던 인생은 이게 아니었는데 하고 생각하는 바로 그런 것. 그러니까 하지 않은 일에 대한 생각 같은 것 말이다. 그 순간에 분노의 상대는 바로 자신이다. 제작 전에 척을 만나 이 이야기의 세부사항과 배경 등을 물어보았다. 하지만 그는 내 눈을 빤히 쳐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바로 그 ‘순간’이 척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게 바로 그가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인 셈이다. 그래서 나는 영화를 그의 관점에서 보여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컨페션>은 주인공 척 배리스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으로 전개된다). 줄리아 로버츠를 조연으로, 브래드 피트, 맷 데이먼을 카메오로 출연시켰다. 당신은 동료들과의 친밀도를 어느 정도 신뢰하는가? 그들의 출연이 <컨페션>에 어떤 장점을 부여했다고 생각하는가. 멋진 친구들이다! 나는 정말 그들 모두에게 고맙게 생각한다. 드루 배리모어와 샘 록웰 역시 마찬가지이다. 서로 신뢰하지 않았다면 그 같은 조건에 출연을 결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모두가 열정적으로 작품에 임해줬다. 특히, 줄리아 로버츠는 환상적이었다. 아마도 그녀가 이런 연기를 하는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을 것이다. 나는 그녀가 다소 사악한 면을 드러내주기를 바랐는데, 정말 그녀는 완벽하게 해냈다. 사실 그녀 덕분에 샘을 끌어들이기도 훨씬 좋아졌다. 조연에 스타를 캐스팅하면, 주연배우를 선정하는 것은 훨씬 수월해진다. 또… 그녀가 출연하지 않았다면 돈도 얼마 못 벌었을 테고…. 척 배리스 역의 샘 록웰을 소개해준다면? 그는 당신만큼 한국에서 유명하지 않다. 나는 샘을 할리우드의 한 바에서 만난 적이 있다. 그리고 <웰컴 투 콜린우드>를 촬영하면서 친해졌다. 그때 샘과 작업하면서 그가 척 배리스 역에 적임자라는 것을 알았다. 물론 왜 샘이 그 역에 적격인지를 두고 제작사인 미라맥스를 설득해야만 했지만(<컨페션>의 제작사 미라맥스가 당시 척 배리스 역으로 염두에 두고 있던 배우는 벤 스틸러라고 한다). 또한, 줄리아와 드루의 캐스팅이 확정되자 제작사도 마음을 놓았다. 물론 샘이 <그린마일>이나 <미녀 삼총사>에서 다소 엉뚱한 역을 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를 싫어할 수 있을까? <애정과 욕망>의 잭 니콜슨을 보라. 때때로 배우들은 엉뚱한 배역을 맡기도 한다. 그것은 배우로서의 필수적인 재능은 아니지만, 적어도 중요한 자질이긴 하다. 샘 록웰을 척 배리스로 만들어내기 위해 감독의 입장에서 가장 고심한 점은 어떤 것인가? 누구보다 당신 스스로가 대배우이기 때문에 배우를 어떻게 ‘인물’로 만들어야 할지를 잘 알고 있었을 텐데. 사실 척 배리스 역은 잘 알려진 사람에게 맡기고 싶지 않았다. 유명한 배우는 유명한 인물을 연기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샘은 완벽한 적임자였다. 촬영 전에 샘은 몇달을 척과 함께 지냈는데, 나중에 척이 현장에 찾아 왔을 때는 둘의 너무 닮은 모습에 모든 스탭들이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 편으로는 그 인물을 그대로 옮겨놓지는 않을까 걱정도 했다. 척이라는 인물을 구체적으로 표현해내야 하긴 하지만, 주력해야 하는 부분은 인물을 모방하는 것보다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정확하게 모방하려 드는 것은 곧 실패를 의미한다. 오직 그 외피만을 흉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샘은 이 점을 이해하는 배우였다. 척처럼 박수치고, 머리를 긁적이고, 어눌하게 발음할 줄 알면서도, 동시에 인물묘사에만 그치지 않고 장면에 융화시킬 줄도 알았다. 그는 정말 멋지게 척을 소화해낸 것이다. 또한 수많은 스타 조연들의 틈바구니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영화 내내 스스로를 잃지 않는 능력을 선보였다. 찰리 카우프만의 시나리오는 ‘변신, 개조, 각색’과 같이 인물들의 이중적인 위치 또는 변신의 과정을 갈등의 중심으로 삼아왔다. 찰리 카우프만의 각본은 거의 언제나 ‘카프카’적이다. 혹시 이런 생각에 충고를 해준다면. 나는 찰리 카우프만이 현재의 할리우드에서 가장 뛰어난 시나리오 작가라고 생각한다. <컨페션>의 시나리오는 정말 끝내준다! 찰리 카우프만은 <컨페션>에서 스탠리 큐브릭이 <닥터스트레인지 러브>를 통해 보여준 것 같은 심리상태를 보여준다. 신랄한 냉소주의와 블랙유머로서 말이다. 척에게 프로듀서로서의 삶과 비밀요원으로서의 삶은 어느 순간 어느 것이 진짜인지 헛갈리게 된다. 그 점이 카프카적인가? 솔직히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충고로 받아들이겠다. 찰리 카우프만의 시나리오 중 <컨페션>은 가장 ‘찰리 카우프만답지 않은’ 스타일이 되었다. 그건 당신의 역량이 그만큼 많이 작용했다는 뜻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휴먼 네이쳐> <존 말코비치 되기> <어댑테이션>에서의 그로테스크함이 사라졌다. 그렇다면 ‘조지 클루니식의 영화란 이런 것이다!’라고 당신의 스타일을 설명해줄 수 있나. 왜 <컨페션>이 찰리 카우프만답지 않은(UNCHALISH) 시나리오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이 시나리오가 매우 찰리 카우프만다운(CHARLISH) 것이라 생각한다.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이야기여서 누군가에게 들려주거나, 보여주기에 정말 재미있는 영화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스타일에 대해서 말하자면, 멋진 시나리오를 가지고 좋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 나의 스타일이다. 그렇다면, 시나리오에는 어느 정도 충실했는가? 당신의 소신에 따라 시나리오와 달리 바꿔 끼워넣은 장면, 또는 에피소드가 있는가. 6년여에 걸쳐 서로 다른 배우와 감독이 물망에 올랐기 때문에 시나리오가 조금씩 바뀌긴 했지만 기본적인 맥락은 유지되었다. 오랜 기간 같은 맥락에서 작업할 수 있는 데는 프로듀서 앤드루 라자와 작업 내내 고문 역을 톡톡히 해준 척의 도움이 컸다. 척에게서는 영화제작상 필수적인 쪽지를 거짓말 안 보태고 수 백개나 받았을 정도였다. 즉, 훌륭한 시나리오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좋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 내 소신이다. 이 영화를 만들면서 마이크 니콜스, 존 프랑켄하이머의 영화를 참조했다고 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점을 참조했는가. 마이크 니콜스 감독의 <애정과 욕망>(Carnal Knowledge), 존 프랑켄하이머의 <만주인 포로>(The Manchurian Candidate)에서의 인물묘사에 모두 관심이 갔다. <애정과 욕망>에서 여주인공 캔디스 버겐은 책 니콜슨 때문에 아픔을 겪는다. 하지만 잭 니콜슨은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였고, 난 샘에게서 니콜슨의 연기를 원했다. 물론 척 배리스는 페니에게 변명을 하거나 매몰차게 굴지는 않았다. 또한, <만주인 포로>에서의 캐릭터와도 유사한 면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재미있는 건 존 프랑켄하이머 역시 1950년대 텔레비전 프로듀서였고, 그뒤 영화감독이 되었다는 사실이다(덧붙이자면, 조지 클루니는 어느 인터뷰에서 <컨페션>에는 존 프랑켄하이머의 <킬로만자로의 눈>(The Snow of Kilimanjaro)에서 훔쳐온 장면이 있다고까지 말한 적이 있다). <컨페션>의 마지막은 굉장한 냉소를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척 배리스라는 인물을 통해 당신은 지금 ‘미국의 정신병’을 은유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요즘은 연예정보프로를 뉴스처럼 가장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하지만 척은 솔직한 프로그램을 만든 최초의 프로듀서다. 괴짜 노인들의 자살 게임 쇼라니 대단하지 않나. 당신은 <컨페션>이 감독 데뷔작이라는 말에 “나는 단지 영화 한편을 만들어본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두 번째 영화를 만들 계획은 없는가? 좋은 각본과 제작자를 구해 스튜디오 체계 안에서 적합하게 모든 일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 제작이 내가 더 소질이 있는 일이다. 하지만 흥미로운 시나리오가 있다면, ‘No’라고 답하진 않을 것이다.

[장 외스타슈, 필립 가렐 특별전] 누벨바그는 어디로 향했는가

시네마테크 문화학교 서울과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가 공동 주최하는 ‘누벨바그 이후, 뜨거운 영화의 심장- 장 외스타슈, 필립 가렐 특별전’이 오는 8월8일(금)부터 15일(금)까지 8일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다. 장 뤽 고다르, 프랑수아 트뤼포, 알랭 레네, 아녜스 바르다 등 프랑스 누벨바그 기수들의 영화가 그동안 꾸준히 관객을 만나온 것에 비해, 장 외스타슈와 필립 가렐의 영화들은 각종 영화제를 통해 다소 산발적으로 소개되어왔을 뿐 국내 관객에게는 낯선 편이다. 장·단편을 포함한 장 외스타슈의 영화 7편과 필립 가렐의 영화 6편이 상영되는 이번 특별전은 두 감독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1938년 태어나 시네필 시절을 보냈고, 60년대 초반 고다르의 조감독으로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은 장 외스타슈는 주로 파리 젊은이들의 삶을 영화화하는 것에 관심을 두었으며, 1963년 첫 중편 <로빈슨의 집> 이후, <나쁜 친구들> <산타클로스는 파란 눈을 가졌다> 등에서도 같은 기조를 유지했다. 장 외스타슈는 지극히 개인적인 작업을 주로 해왔으며 1973년작 <엄마와 창녀>로 칸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하며 명성을 얻었다. 장 외스타슈는 지속적으로 자신만의 작업을 이어나가던 중 1981년 권총자살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나쁜 친구들>(1963)은 여자를 유혹하려는 두 20대 남자의 이야기를 다루며 누벨바그 세대들에게 미학적 지지를 얻어냈고, <산타클로스는 파란 눈을 지녔다>(1966)는 누벨바그의 얼굴 장 피에르 레오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장 비고에게 오마주를 바쳤다. 10년이라는 시간차를 두고 만들어진 두편의 연작 <페삭의 처녀>(1968/1979)는 가장 고결한 처녀 선발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이다. 장 외스타슈의 대외적인 대표작 <엄마와 창녀>(1973)는 애인 마리에게 얹혀 사는 지식인 알렉상드르와 그가 새롭게 사랑에 빠지는 베로니카와의 관계를 통해 68혁명 이후 프랑스 젊은이들의 공허함과 절망감을 개인의 관계로 전치하여 질문하는 영화이다. 그리고 <알릭스의 사진>(1980)은 그의 유작이다. 장 외스타슈와 함께 포스트 누벨바그 세대에 속해 있으며, 프랑스영화의 랭보라고 불리기도 하는 필립 가렐은 프랑스의 유명배우 모리스 가렐의 아들로 1948년 출생, 열여섯살에 학교를 그만둔 뒤 텔레비전 방송사에서 연출 작업을 시작했다. 16살에 장 뤽 고다르의 <알파빌>을 본 뒤 영화의 길을 걸었고 자전적, 실험적, 시적인 영화를 지향했다. 그의 나이 19살에 연출한 <추억의 마리>는 작가적 통찰력을 예감하게 했으며, 70년대 초반 <내부의 상처> <고독의 높이> 등으로 그 예감을 증명했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사건들을 실험적인 형식에 담아내는 필립 가렐의 영화는 오프닝, 엔딩 크레딧을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첫 장편 <추억의 마리>(1967)는 사랑하는 두 연인간의 소통문제를 주요한 고리로 삼았고, 무성영화의 형식을 빌려 ‘영화를 본다는 것’에 대해 실험한 <폭로자>(1968)는 부부와 아이를 주인공으로 어떠한 사운드도 없이 영화를 완성했다.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싱어 니코가 여러 명을 동시에 연기하는 <내부의 상처>(1970)는 신화적인 전통을 가져와 만들었으며, 필립 가렐 스스로가 “새로운 출발점의 영화”라고 일컬은 바 있다. 그 밖에도 <사랑의 탄생>(1993)은 고다르의 촬영감독으로 유명한 라울 쿠타르가 촬영을 맡았고, <밤의 바람>(1999)에는 카트린 드뇌브가 출연한다(문의: 02-743-6003, 02-720-9782, www.cinephile.co.kr, www.cinematheque.seoul.kr).

독립 ‘씨네21’대표이사 맡은 한동헌 씨

"고급정보지로서의 가치 굳건하게 지키고 싶다" 영상 주간지 <씨네21>이 한겨레신문사로부터 8월1일 분사함에따라, ‘씨네21 주식회사’의 대표이사를 한동헌(45)씨가 맡게 됐다. LG 텔레콤, 웅진 코웨이 이사 등을 역임한 한씨는 한겨레신문사의 CEO 공모절차를 거쳐 대표이사로 뽑혔다. 한 대표이사는 서울대 경제학과 시절, 노래동아리 ‘메아리’에서 대학가의 애창곡인 <그루터기>, 나중에 김광석이 다시 취입한 <나의 노래> 등 20여곡을 작곡한 이채로운 경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대기업에서 일하다가 영화주간지의 CEO에 응모한 계기는? =95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부터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 일하자고 생각했다. LG미디어에서 게임 수입과 음반일을 잠깐 하다가 통신사업쪽 구조조정일을 했다. LG텔레콤에 영국 브리티쉬텔레콤의 외자유치를 하는 일이었다. 2000년부터는 나눔기술, 웅진코웨이개발에서 음반, 패션, 음식, 라이프스타일 등등 문화와 관련된 일을 했다. 그러나 끝까지 결실을 맺을 만큼 안정적인 환경을 만나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씨네21>의 CEO 모집 공고를 봤다. 오랜 구독자였고, 생각해보니까 음악뿐 아니라 영화쪽도 내 주된 관심사였고. 큰 비즈니스는 아니지만, 매체는 매출액의 크기에 국한되지 많는 영향력이 있다. 거기에 매력을 느꼈다. 전문경영인이 사장으로 오면서, 경영논리로 <씨네21>이 바뀔지 모른다는 우려도 있는데? =사업적으로 만드는 것과 상업적으로 만드는 건 다르다. <씨네21>은 영화를 보는 것뿐 아니라, 글로 읽는 것도 재미가 있다는 걸 알려준 잡지이다. 그걸 통해 한국영화의 부흥에도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또 영화가 중심이 되지만, 다른 매체를 포함해 대중문화 전반에 대한 깊이 있는 고급정보지로서의 가치도 크다. 그걸 굳건하게 지키고 싶다. 그점에서 비즈니스를 강화하려 한다. 지적이면서도 대중잡지임을 잊지 않고. 또 항상 20대와 호흡하고,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를 개발하고. 그러면 영향력이나 여론을 선도하는 매체가 될 거다. 별도의 회사가 됐으니 다른 사업들도 구상할 텐데? =매체 사업의 강점이 인적 네트워크와 정보라고 생각한다. 정보와 지식에 초점을 맞추고 그 수요를 개발해나가려 한다. 뉴스·정보의 서비스 기능을 강화해서 <버라이어티> 같은 업계 사람들을 위한 정보를 주고, 이건 잡지보다 인터넷으로 유료화하고. 또 영화와 영화인에 대한 백과사전식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이걸 기초로 단행본들도 낼 수 있을 거다. ‘탤런트 에이전시’도 생각해볼 수 있다. 연기자보다 감독, 프로듀서, 시나리오작가를 비즈니스와 연결시켜주는 일 같은 것. 이런 인재를 키워내는 아카데미도 마찬가지고. 결국, 영화·영상에 대한 지식과 정보의 집적체가 되는 걸 염두에 두고 있다. 좋아하는 국내외 감독을 꼽는다면? 또 작곡을 계속할 생각은? =외국 감독은 고다르, 알모도바르, 루이 브뉘엘,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한국 감독은 이창동, 송능한, 박찬욱, 송해성(<파이란>), 김지운(<반칙왕>)…. 그 이전의 한국영화들은 유학중이어서 잘 보질 못했다. 작곡은, 막 만들 때 좀더 왕성하게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다 때가 있는 건 같다. 그 때가 지나서는 힘들고.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담는 노래를 만들고 싶은 생각은 있다. 임범 기자 isman@hani.co.kr, 사진 임종진 기자

오! 이거 마릴린 먼로 필름이잖아

1954년 한국 위문공연 2분짜리, 미군기지서 낡은 무성필름 발견 한국전쟁 휴전 50주년을 맞아 미국 신문들이 한국전에 참전했던 퇴역 군인들의 근황을 특집으로 소개하는 등 관심을 환기시키고 있는 가운데 1954년 한국에 위문공연을 왔던 마릴린 먼로가 몰래카메라에 포착된 2분짜리 무성필름이 발견돼 화제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8월3일치에 실린 “한국 비를 맞으며 노래하는 마릴린 먼로”라는 기사에서 최근 중부 캘리포니아의 파소 로블스에 위치한 미군기지인 캠프 로버츠에 수십년간 버려져 있던 낡은 트렁크 속에서 한국의 마릴린 먼로를 찍은 16㎜ 흑백 무성필름이 나왔다고 보도했다. 마릴린 먼로의 한국공연 모습을 담은 사진들은 지난해 스미소니언 박물관에서 전시되는 등 공개된 적이 있지만 이번에 발견된 필름은 마릴린 먼로가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는 가운데 찍힌 유일한 동영상이란 점에서 높은 연구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이 필름을 발견한 사람은 캠프 로버츠의 사진사인 프랑코 페데리치. 올해 51살인 페데리치는 최근 지역 텔레비전 방송이 캠프 로버츠의 역사를 특집으로 다루려 하자 영사기를 빌려 트렁크에 들어있던 10여개의 필름들을 처음 틀었다고 한다. 첫번 째 돌린 필름에서 곧바로 마릴린 먼로가 헬리콥터에서 내리는 장면이 나와 깜짝 놀랬다는 것. 처음엔 로버츠 캠프에서 찍힌 것으로 추정했지만 뒷배경에 눈이 쌓여있어 캘리포니아는 아닌 것이 확실해 군인들의 군복을 조사한 결과 1954년 한국공연인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마릴린 먼로는 한창 인기가 절정을 향해 치닫던 시기였으며 한국공연 때 군인들이 거의 난동에 가까울 만큼 열광적인 반응을 보이는 모습을 보고 처음으로 자신의 인기를 실감했다고 털어놓곤 했다. 먼로는 “한국은 내게 일어난 최고의 사건”이라며 “그때처럼 내가 스타임을 가슴으로 느낀 적은 없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탱크를 탄 먼로, 그리고 비를 맞으며 노래하고 춤추는 먼로가 담긴 이 2분짜리 필름에 대해 전문가들은 중요한 역사적 유물이라고 입을 모은다. 특히 먼로는 자신의 이미지에 대한 자의식이 강해 집밖으로 나갈 때는 몇시간씩 화장에 공을 들이고 사진을 찍거나 할 때는 조심스럽게 자신을 연출했기 때문에, 자연스런 모습을 담은 사진이나 영상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래서 먼로가 의식하지 않는 가운데 찍힌 이번 필름이 큰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이 필름을 누가 찍었으며, 어떻게 버려진 트렁크 속에 담겨있게 되었는지는 아직 수수께끼. 페데리치는 캠프 로버츠가 한국전 참전 군인들의 훈련장소였고, 또 할리우드와 깊은 연관을 가졌다는 점을 토대로 추적해갈 계획이다. 현재까지는 캠프 로버츠 출신 사병이 캠프의 카메라를 빌려 먼로의 모습을 찍은 후 현상을 위해 일본으로 필름을 보냈고, 그 필름이 도착하기 전 전사해 캠프 로버츠로 운구됐거나 아니면 필름을 받아 사물함에 던져넣은 후 잊어버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이남·영화 칼럼니스트

색안경 끼고 영화보기

<스파이키드 3-D> <심해의 유령들> 등으로 다시 주목받는 3-D영화 <스파이키드 3-D>의 개봉에 즈음해, 3-D영화의 부활 여부가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3-D영화란, 인접한 두대의 카메라로 좌우 시야에 해당되는 앵글을 촬영한 뒤 두개의 이미지를 약간 어긋나도록 겹쳐 영사하여, 셀로판지로 만든 특수안경을 쓴 관객이 입체적인 하나의 상으로 인지하게 만드는 영화. 3-D영화는, 1950년대 텔레비전의 약진에 맞서 영화만의 오락거리를 고심하던 할리우드가 향기나는 영화, 시네마스코프 같은 발명품과 더불어 내놓은 관객 유인책이었다. 은 1950년대 신기한 구경거리로 잠깐 시선을 끌었다가 영화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던 3-D영화가 1980년대의 짧은 리바이벌을 거쳐 최근 10년간 새로운 생존 가능성을 찾았다고 보도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테크놀로지의 발전. 신기술은 3-D영화의 고질적 딜레마인 관객의 두통과 눈의 피로를 완화시켰고 IMAX극장의 대형 스크린은 향상된 화질을 가능하게 했다. 한편 3-D 영상은 유니버설의 ‘슈렉 어드벤처’ 등 각종 테마파크의 가장 인기있는 놀이시설로 자리잡아 매력을 입증했다. 현재 3-D영화의 최전선에 서 있는 인물은 영화 테크놀로지의 개척자 제임스 카메론 감독. 미니 잠수함에 실은 소형 디지털비디오로 촬영한 폐선의 3-D 영상에 인물의 영상을 이중인화해 <타이타닉>의 다큐멘터리 <심해의 유령들>을 완성한 카메론은 차기작을 디지털비디오 3-D 시스템으로 찍을 계획이다. 카메론의 디지털비디오 시스템을 대여하고 모니터링 시스템을 확충해 찍은 <스파이키드 3-D>는 20년 만에 전미 개봉한(극장 수 3500개관) 3-D영화로서, 7월 넷째 주말 흥행 1위를 차지했다. <스파이키드> 시리즈의 제작자 하비 웨인스타인의 3-D영화에 관한 전망은 낙관적. “요즘 청소년 관객은 입체안경을 공짜 장난감인 양 좋아라 받는다”고 웨인스타인은 자랑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3-D영화의 상업적 근거지는 아이맥스 시장이 될 전망. “3-D를 하나의 트릭이 아니라 스토리에 효과적으로 통합시킨다면 그것이야말로 아이맥스영화의 관객이 진정 원하는 오락이다.” 브래드 왝슬러 아이맥스사 공동대표의 장담이다. 김혜리

텔레비전

나는 텔레비전이 싫다. 보는 거말고 나가는 게 말이다. 우선 PD라는 신종 왕자들을 만나는 게 싫다. 90년대 들어 군사 파시즘이 물러난 자리를 차지한 신자유주의는 한국인들의 머리통에 돈이면 뭐든 살 수 있다는 믿음과 끊임없이 자기를 선전하고 팔아야 한다는 강박을 심어놓았다. 한국은 온 국민이 텔레비전 출연을 열망하는 텔레비전 왕국이 되었고 PD들은 그 왕국을 거들먹거리는 왕자가 되었다. 지식인 나부랭이들의 텔레비전 병도 눈뜨고 보기 어렵다. 시사 프로그램 같은 데서 막간 인터뷰라도 걸릴라치면 공부고 연구고 만사를 제쳐두고 카메라 앞에 제 얼굴을 대령한다. 반 시간 넘어 이런저런 지당한 말씀을 늘어놓아봤자 정작 텔레비전에 나오는 건 몇초고 그 몇초도 PD가 멋대로 난도질(방송용어로는 ‘편집’)한다는 걸 잘 알지만 아랑곳없다. 텔레비전에 나간다면. 이런 소리를 하는 나도 텔레비전에 나간 적이 있다. 몇해 전에 에 한번 나간 적이 있고, 나와 어떤 이가 공저로 되어 있는 책을 홍보하는 프로그램에 나간 적도 있다. 그 책은 어느 주간지에 일년쯤 연재한 대담을 묶은 것이다. 나는 그걸 단행본으로 내는 데 반대했지만 인세를 몽땅 베트남 양민학살 기금으로 보내겠다는 말에 승낙했다. 홍보 프로그램에 나간 것도 그래서였다. 에 나간 일은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온다. 텔레비전을 피하던 내가 그땐 무슨 생각으로 거길 나갔는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날 나는 토론보다는 불편한 자리에선 말을 하지 않는 내 습성에 충실했다. 그 일로 나는 한동안 핀잔깨나 들어야 했다. 내가 제법 말을 근사하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잔뜩 기대하고 100분을 기다렸으나 나는 두 마디만 하고 앉아 있었으니 오죽 답답했을까. 나는 싱거운 농으로 그들을 달래곤 했다. “두 마디나 백 마디나 출연료는 같아.” 속으로는 그랬다. ‘말하기 싫으면 안 하는 놈도 있어야지.’ 존중할 수도 없고, 하고 싶은 말을 할 수도 없으며, 불편하기까지 한 일에 부러 시간을 낼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그뒤 텔레비전 출연 요청에 “텔레비전은 안 합니다” 한마디로 끊곤 했다. 이 판도 연예계의 관성이 지배하는지라 내가 언론개혁이니 정치개혁이니 하는 인기 종목을 떠나 신자유주의 세계화니 노동자 계급이니 사회주의니 하는 구린 종목에 매달리는 오늘은 그나마 그런 출연 요청도 잦아들었다. 몇달 전 나는 내가 마음의 스승으로 모시는 분이 텔레비전에 한방 먹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강아지똥> <몽실언니> <한티재 하늘>의 권정생 선생이다. 몇달 전 <느낌표>라는 프로그램에서 선생의 책 <우리들의 하느님>을 선정하고 녹색평론사에 연락했다. “최소 20만부를 준비하고, 표지엔 ‘느낌표 선정도서’라고 박아주고, 어쩌고….” 그러나 녹색평론사에선 “책이 그렇게 팔리길 바라지 않는다며” 그 일을 거부했다. 텔레비전은 다시 권정생 선생에게 연락했다. 결과는 끔찍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가장 행복한 경험 가운데 하나가 책방에서 자기 손으로 책을 고르는 일인데, 왜 그런 행복한 경험을 텔레비전이 없애려는 거냐.” <우리들의 하느님>은 누구에게나 삶의 길잡이가 될 책이니 그 책이 거기 소개되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힌다면 좋은 일이다. 그 책을 팔아 벌 막대한 돈도 녹색평론사와 권정생이라면 더 좋은 책을 내고 더 좋은 글을 쓰는 일에나 쓸 테니 역시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유익들을 거리낌없이 거부했다. 그런 유익들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런 유익들을 얻기 위해 포기할 수밖에 없는 다른 가치 때문이다. 그 가치는 오늘 인간의 위엄을 스스로 접고 사고 팔리는 물건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대수롭지 않아 보인다.김규항/ 출판인

‘다모’ 열풍의 핵 이서진

마치 차인표의 출현을 보는 듯하다. 1994년 문화방송 텔레비전의 〈사랑을 그대 품 안에〉에서 그랬던 것처럼 탤런트 이서진(30·사진)이 바야흐로 〈조선 여형사 다모〉 열풍의 핵으로 떠오르고 있다. 팬들의 반응만 보면 차인표도 맛보지 못한 스타 탄생의 과정을 이서진은 거치고 있다. 지난 6일 〈다모〉 인터넷 게시판에 올린 이서진의 글이 하루 만에 8만회가 넘는 조회건수를 기록하는가 하면 ‘이서진’이란 이름이 인터넷 포털사이트인 ‘다음’의 종합 인기 검색어 1위로 뛰어올랐다. ‘다모 폐인’(식음을 전폐하고 폐인이 될 정도로 다모를 좋아한다는 뜻)이라는 신조어가 나올 정도로 다모와 이서진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정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김래원이 〈옥탑방 고양이〉에서 보여줬던 도저히 미워할 수 없이 귀여운 남자도 아니고, 차인표 같은 백마 탄 왕자의 이미지와도 거리가 멀다. 서자 신분을 뛰어넘기 위해 무술을 연마한 끝에 한수 이북 제일의 무사가 된 집념과 강인함을 보여줌과 동시에, 자기 집안에 관노로 들어온 채옥(하지원)을 향해 마음으로부터 한없이 따뜻함을 보여주는 황보윤 종사관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그는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는 그동안 보지 못했던 전혀 다른 남성상을 펼치는 데 성공한 듯싶다. 특히 채옥을 향해 감정을 감추듯 드러내는 그의 절제된 연기는 오히려 시청자들로부터 애절한 반응을 얻었다. “어제 윤이 채옥에게 했던 말, ‘이렇게 마주보고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는 사랑한다는 고백보다 훨씬 다정하고 애절한 대사였소. 드라마를 보며 이렇게 가슴 설레어 보긴 정말 오랜만이오.”(정선영씨의 〈다모〉가 돋보이는 이유) 드라마 첫회에서 꽃잎이 흩날리는 매화나무 숲을 걸으면서 황보윤이 팔에 상처를 입은 채옥에게 “아프냐. 나도 아프다”라고 던진 대사라든지, 4회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끝에 자신을 떠나려는 채옥을 끌어안으며 “가거라. 그러나 반드시 살아 돌아오너라”라는 대사들이 ‘다모 폐인’ 사이에서는 회자되고 있다. 그는 게시판 글에서 팬들의 열광적 관심에 이렇게 답했다. “서자라는 신분으로 멸시받는 아픔을 가지고 살았지만 자신의 신분을 뛰어넘으면서부터 사랑하는 여자의 신분 때문에 괴로워하고, 자신을 멸시하던 양반들에게 충성해야 하는 윤을 보면 제 가슴 한 구석이 아파왔습니다. 윤이 아무리 채옥을 사랑해도 여러분이 다모를 사랑해주시는 마음에는 못 미칠 것 같습니다.” 김도형 기자 aip209@hani.co.kr

광주영화제 회고전에 부친 배창호감독의 ‘존 포드론’

오는 22일부터 31일까지 열리는 제3회 광주국제영화제는 특별행사로 ‘존 포드 회고전’을 마련했다. 존 포드(1895~1973) 감독은 모뉴멘트 밸리, 존 웨인 등 서부극의 아이콘을 만들어내면서, 이전까지 다분히 미국적인 이야기로 여겨져온 서부극을 세계적인 장르로 확장시킨 거장이었다. 서부극뿐 아니라 전쟁물, 전기영화, 사회 드라마까지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며 아카데미상을 6번이나 수상하기도 했다. <역마차> <황야의 결투> <분노의 포도> 등 그의 대표작 몇 편이 70~80년대 텔레비전을 통해 국내에 여러차례 방영됐지만, 이번처럼 그의 영화 15편을 온전히 스크린을 통해 볼 수 있는 기회는 영화팬이라면 놓치기 아깝다.(상영작은 위 세 편을 포함해 <청년 링컨>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그들은 소모품이다> <아파치 요새> <리오 그란데> <웨건 마스터> <조용한 사나이> <태양은 밝게 빛난다> <모감보> <수색자> <리버티 발란스를 쏜 사나이> <일곱 여인들>) 청년시절부터 존 포드의 팬이었던 배창호 감독에게 존 포드에 대해, 또 존 포드의 영화가 자신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 글을 청탁했다. 영화촬영으로 바쁜 와중에도 배 감독은 흔쾌히 수락했다. 편집자 "존, 천상에서도 '인간'을 찍으시나요" 내가 태어나던 1953년 존 포드의 <역마차>가 우리나라에서 상영되었다고 한다. 영화광이셨던 어머니 손에 이끌려 유년시절부터 많은 영화를 보게 되었고 유난히 서부극을 좋아했던 나의 기억 속에는 <아파치 요새>나 <기병대> 등의 존 포드 영화가 희미하게 자리잡고 있다. 은행원이셨던 아버지는 어린 나를 재우면서 ‘넓고 넓은 바닷가에…’로 시작하는 노래를 자주 불러주셨고 그럴 때마다 나는 너무나 구슬픈 가사와 아름다운 곡조에 엉엉 소리내어 울곤 했었다. 그 후 성년이 되었을 때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이라는 이 미국민요의 제목이 존 포드의 <황야의 결투>의 원제목임을 알게 되었고, 주인공 헨리 폰다가 사랑하는 여인과 이별하고 먼 하늘 아래 말을 타고 떠나는 마지막 장면에서 나의 이 애창곡이 흘러나올 때 그만 펑펑 눈물을 쏟고 말았던 기억이 새롭다. 존 포드라는 감독을 정말 좋아하기 시작한 것은 대학시절, 텔레비전의 ‘주말의 명화’ 시간에 방영되었던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라는 영화를 보게 되면서부터였다. <시민 케인>과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이 작품은 영국 웨일스 지방의 탄광촌을 배경으로 어느 광부 가족에 대한 추억을 그린 영화인데, 흑백화면으로 펼쳐지는 꿈결같은 영상과 서정성이 당시 영화감독 지망생이던 젊은 나의 가슴을 사로잡았다. 후일 감독이 되어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라는 영화를 만들 때 원작에도 없는 광부의 삶을 덧붙인 것은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의 영향 때문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나는 데뷔 때부터 한동안 소설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를 만들어왔는데 소설의 원작을 각색할 때 자주 참조하게 된 영화가 존 포드가 만든 존 스타인벡 원작의 <분노의 포도>였다. 현실을 고발하는 원작의 인위적인 결말부분을 과감히 삭제해 버리고 방랑자로서의 인생의 모습으로 영화를 끝내는 존 포드의 보편성에 이끌렸기 때문이었다. 또한 <분노의 포도>는 신인감독 시절의 연출 교과서 역할도 하였는데 언제나 절제를 잊지 않는 카메라의 구사와 빛과 어둠의 대비, 그리고 조형적이면서 서정적인 영상미의 표현법 등을 이 영화로부터 배울수 있었다. 그 후 <아일랜드의 연풍>(The Quiet Man), <허리케인>, <모감보> 등의 존 포드 작품들을 보게 되면서 센티멘탈리스트로서의 나의 정서적 기질과 인간의 선성(善性)을 지향하는 따스한 관점이 존 포드와 닮았음을 깨닫게 되었다. 지난 1987년 하와이 국제영화제에서 <황진이>가 소개되었을 때 미국의 어느 평론가가 <황진이>에서 어딘지 존 포드 영화의 체취가 느껴진다고 말했다. 조선시대 사극 <황진이>에서 존 포드 영화의 느낌을 발견하는 이 평론가의 성찰력이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존 포드의 영화를 볼 때마다 그의 선이 굵고 폭이 넓은 인간성에 놀라곤 했다. 그의 대표작 <수색자>에서 북군을 지휘하는 주인공에게 남군의 어린 병사가 사로잡힌다. 주인공은 적군 어린병사의 엉덩짝을 몇 대 갈려주며 가서 엄마 젖이나 더 먹으라면서 돌려보낸다. <아일랜드의 연풍>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서로 마찰을 일삼던 구교와 신교 신도들이 힘을 합쳐 곤란에 빠진 구교 신부를 도와준다. 이렇듯 전쟁터에서 적군 병사를 살려보내주거나 아일랜드 같은 나라에서 신구교도가 상대방을 돕기 위해 힘을 합하거나 하는 설정은 리얼리티를 초월한 존 포드의 삶에 대한 가치관에서 비롯된다. △1956 <수색자>, 1953 <모감보> <역마차>에서 지명수배범을 보안관이 스스로 도망시켜주거나 <허리케인>에서 주인공의 탈출을 총독이 방관하는 장면 등은 인간에 대한 애정 없이는 결코 그려낼 수 없는 장면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의 영화들은 섬세함은 부족하더라도 대신 감독의 품성에서 배어나오는 서정성의 향기가 작품 곳곳에 스며 있다. 무성영화시절부터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많은 영화를 만들어온 존 포드는 감독생활의 마지막 무렵 <샤이언>이라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입장에 선 영화를 만들었는데 이 영화는 그의 서부극에서 악역으로만 묘사되었던 원주민들에 대한 속죄의 의미로 만들어졌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나는 지난 겨울부터 <길>이라는 제목의, 떠돌이 대장장이의 삶을 그린 영화를 만들고 있다. 이 영화를 연출하면서 우연히 다음과 같은 존 포드의 일화를 읽게 되었다. 존 포드가 즐겨찾던 로케이션 장소인 모뉴멘트 밸리에 날씨가 잔뜩 찌푸려 촬영이 어려운 조건임에도 감독은 아랑곳하지 않고 배우들과 리허설을 계속 하고 있었다. 참다 못한 카메라맨이 이 궂은 날씨에 무엇을 찍을 수 있겠냐며 존 포드에게 불평을 터뜨렸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신비로운 것을 찍으려고 하지. 그건 바로 사람의 얼굴이야” 그렇다. 나는 존 포드로부터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아닌 인간이라는, 당연하지만 잊기 쉬운 사실을 다시금 일깨우게 된 것이다.

공감하지 못하는 혼란스러운 공포,<거울속으로>

■ Story 곧 재개장을 앞둔 한 백화점, 깊은 밤 홀로 늦게까지 남아 있다 퇴근하던 한 여사원은 잠시 화장실에 들렀다가 거울에 비친 스스로의 분신에 의해 끔찍한 죽임을 당한다. 이튿날엔 백화점에 근무하는 또 다른 직원 하나가 역시 자신의 분신에 의해 살해당한다. 경찰에서 은퇴한 뒤 백화점 보안실장으로 근무하던 영민(유지태)은 이 사건에 뭔가 석연치 않은 것이 있다고 느끼는데, 과거 그의 동료였던 현수(김명민)는 이 사건을 연쇄살인으로 단정하고 수사에 뛰어든다. 이때 백화점 화재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던 자신의 언니가 여전히 백화점 안에 있다고 주장하는 지현(김혜나)이 나타나고 끔찍한 살인사건은 계속된다. ■ Review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반영이 더이상 단순한 반영이기를 멈추고 자율적인 의지를 지닌 분신처럼 행동한다면? 호러장르에서라면 그리 낯설지만은 않은 이러한 설정은, 좀 멀게는 독일 호러영화 <프라하의 대학생>- 제정 시기(1913), 바이마르공화국 시기(1926), 그리고 나치 집권기(1936)에 걸쳐 총 세 차례 영화화되었던 작품이다- 을 떠올리게 만든다. 거기서 다소간 파우스트적인 계약에 말려든 주인공 발트빈은 분신이 저지르는 끔찍한 악행을 막을 방편으로 결국 자살을 택하고 만다. 일찍이 영화학자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는 그의 유명한 저서 <칼리가리에서 히틀러까지>에서 이러한 발트빈의 모습은 매시기 독일인들의 이중적 의식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2003년 여름은 바야흐로 한국 공포영화의 전성시대라 할 만하다. 그 가운데 그간 많은 기대를 불러일으켰던 신인감독 김성호의 데뷔작- 각본 또한 감독 자신이 직접 썼다- <거울 속으로>도 함께 자리잡고 있다. 나의 반영과 동시에 나를 배반하는 분신을 생산하는 거울이라는 소재가 얼른 불러일으키는 것이 매혹과 공포라는 이중적 감정이라는 데는 별다른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거울 속으로>의 주된 소재 자체는 많은 공포영화가 목표로 삼는 심리적 기제의 이중적 작동을 위해 지나칠 정도로 잘 어울리는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간단히 결론부터 말하자면, <거울 속으로>는 오싹한 공포를 유발하는 영화가 아니며 동시에 그다지 매혹적이지도 않은 영화다. 차라리 정신분석학적 영화연구 수업이나 이미지 분석 연습을 위한 보조교재로 쓰기 위해 만든 프레젠테이션에 어울리는 영화라고 부르는 편이 나을 것이다. 영화의 주인공 영민은 경찰로 근무할 당시 거울에 비친 상을 실재로 착각했다가 결국 인질로 잡혀 있던 동료를 죽음으로 몰고 간 뒤 폐인이 되다시피 한 인물이며,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 백화점 안을 떠도는 원귀의 쌍둥이 동생 지현은 거울이 없으면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인물이라는 설정 등은, 영화의 소재와 캐릭터간의 유기적 관련을 만들겠다는 의도를 너무 과도하게 드러내며, 관객에게 공감을 주는 데 실패한다. 게다가 오랜만에 스크린에 얼굴을 내민 유지태, 각각 <소름>과 <꽃섬>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던 김명민과 김혜나는 <거울 속으로>에선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연기를 보여준다. <거울 속으로>가 거울에 얽힌 ‘전설’을 구성하기 위해 끌어들인 벨라스케스, 얀 반 아이크, 조르주 드 라투르, 히에로니무스 보슈의 회화들, 그리고 좌우가 뒤바뀐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서명에 관한 야사 등은 흥미롭기는 하지만 흡사 프리프로덕션 단계의 조사물들을 그저 고스란히 펼쳐놓은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무엇보다 <거울 속으로>의 흥미를 반감시키는 요소는 영화의 플롯 자체에 내재해 있다. <거울 속으로>는 <장화, 홍련>식의 ‘허무호러’(?)를 요령껏 피해나가기는 하지만 결국 기업 내부의 음모와 배신이라는 텔레비전 드라마의 닳고 닳은 이야기를 해결책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거울 속으로>는 텔레비전 드라마가 타깃으로 삼는 시청자들과 최근 상승세를 타고 있는 공포영화의 관객들을 동시에 끌어들일 수도 있었겠지만, 오히려 양자에게 공감을 사지 못하는 혼란스러운 영화가 되고 말았다. <거울 속으로>가 어느 정도는 그간 한국에서 일어난 ‘원인은 있으되 누구에게도 책임은 없는’ 인재(人災)에 대한 함의를 담으려 노력한 것은 사실이다. 한데 그것을 기업 드라마의 상투적 플롯 안으로 축소시키고 진부한 거울놀이를 통해 결함을 애써 감추려 드는 동안, 거울 너머의 대상은 어떤 식으로든 우리에게 자꾸 원한을 토로할 것이다. 벽 너머에 있던 에드거 앨런 포의 검은 고양이처럼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안병기의 <폰>과 마찬가지로 포의 소설을 빌려 마무리한 <거울 속으로>가 정작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크라카우어 식의 사회심리학적 분석에 관심있는 이라면 이 영화가 아주 흥미없는 것으로 보이진 않을지도 모른다. :: <거울 속으로> 김성호 감독 이번 영화는 ‘실물과 반영’, 다음 영화는 ‘현실과 기억’ 첫 장편으로 호러 장르를 택했다. 특별히 공포영화를 의도하지는 않았다. 거울 소재의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시초였다. 거울 이미지를 줄곧 생각하다보니, 거울 속 내가 다르게 움직인다면 혹은 다른 인간이라면 어떨까 하는 상상이 들었고 그로부터 스토리를 짜 나가다보니 무서운 느낌이 많아 공포영화가 됐다. 그래도 호러로서 장르적 완결성을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지 않았나. <거울 속으로>에는 현실과 다른 또 하나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판타지 요소와 죽은 이가 거울에 보인다는 호러적 요소가 있었다. 한쪽으로만 기울기엔 아쉬워 접점을 찾아 동시에 풀어가기로 했다. 드라마, 호러, 판타지, 코미디를 모두 포함하는 형태가 된 것 같다. 기존 한국 공포영화에 대한 견해는. 하나의 요소나 소재만 갖고 끝까지 가는 단선적인 면이 제일 아쉬웠다. 이야기 자체가 풍부하길 원해 <거울 속으로>는 캐릭터의 색깔, 다양한 이야기를 깔아놓고 후반에 한꺼번에 거둬들이는 ‘멀티레이어드 영화’로 만들고 싶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인간이며, 그중에서도 나 자신”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인가. 출발점은 그렇다. 많은 공포영화에서 ‘괴물’은 프레임 밖에서 들어오거나 홀연히 나타난다. 하지만 <거울 속으로>에서는 가장 무서운 대상이 바로 프레임 안에 존재한다는 점이, 외부의 누군가가 아니라 나 자신이거나 내부의 무엇이라는 점이 재밌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주온> 같은 영화를 보면서 역시 분칠하고 산발한 귀신이 제일 무섭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거울 속으로>에서 무서운 존재들은 우리의 온전한 모습 그대로다. 무섭다기보다 장면 자체가 흥미로웠으면 했다. 배우들의 연기 톤이 다소 불균질한 것 같다. 배우와의 소통 문제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 마지막 편집 과정에서 다듬다보니 누락된 부분도 생겨 설득력이 반감된 부분도 있다. 거울 장면과 관련된 촬영기법을 설명한다면. 거울상과 실물의 상이 분리되는 장면은 컷으로 나누면 재미가 덜할 것 같아 되도록 롱테이크를 취했다. 우영민이 잠에서 깬 장면은 좌우가 뒤바뀐 동일한 세트를 2개 만들어 찍었고, 김 부장이 나오는 탈의실 신은 거울을 정면에 붙인 채 찍은 뒤 거울에 비친 스탭들을 CG로 지웠다. 후반의 장면은 그대로 찍은 뒤 후반작업에서 좌우를 통째로 뒤집었다. CG 분량은 140컷, 15분가량이다. <예스터데이>를 작업한 팀이 맡았는데 SF인 <예스터데이> 못지않게 많다고 하더라. (웃음) 단편 시절부터 보여준 ‘거울을 사이에 둔 이원적 세계상’에 대한 집착은 이제 일단락됐나. 다음에는 기억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거울이나 기억처럼 경계에 서 있는 이야기, 경계에서 어디로 갈지 확정짓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이끌린다. 김혜리 vermeer@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