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내가 찾는 영화 정보를 손쉽게!

‘바람' 검색결과

기사/뉴스(9404)

“스무살, 세상은 내 것이 아니에요, 이 영화는 내 거예요”

본격적으로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영화를 보고 어떤 생각,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 성경 나는 인천 한번도 안 가봤는데 감독이 의도적으로 인천에서 동대문까지 오는 장면을 보여줄 때 인천이라는 공간의 특색을 보여주려고 한 걸 느꼈어요.● 원 인천이라는 공간도 그렇고 내용 자체도 그렇고 <고양이를 부탁해>라는 틀도 그렇고 암울한 분위기가 많아요. 패배주의에 빠지지 않았지만 보는 내내 가슴이 아프고 부탁하고 싶고 누가 맡아줬으면 좋겠고 그런 기분에 빠져들게 했어요.● 성경 드라마에 많이 나와서 인천에 대해 갖고 있던 이미지가 있어요. 월미도에서 회를 먹고 배타고 갔더니 배가 끊겨서 하룻밤 자고 그런 드라마 많잖아요. 놀이공원도 반짝반짝하고 이런 이미지였는데 <고양이를 부탁해>에선 바람이 세게 불고 서늘해보여서 얘들이 참 험난한 길을 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건 서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예요. 혜주가 서울에 대해 환상을 갖고 있는 게 보이잖아요. 서울의 ‘삐까번쩍한’ 모습에 뭔가 할 수 있을 거 같아서 오는데 막상 찾아간 데가 동대문이에요. 바로 옆에 청계천 있고 두타, 밀리오레, 겉에서 보면 번듯하지만 들어가보면 조그만 가게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게 옛날 상가 모아놓은 것 같은 모습이에요. 서울이나 인천이나 다 그런 모순된 공간으로 그려놓고 있어요. 난 주인공들이 동대문까지 올 때 서울의 모습을 환상적으로 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서울 가서 친구들 보면 사이좋은 모습이 아니더라고요. 서로 틀어지고 말이죠.● 원 근데 저는 인천에서 태어나서 자랐고 자퇴할 때까지 쭉 인천에서만 지냈거든요. 그래서 <고양이를 부탁해>의 뒷배경을 잘 알아요. 아마 인천 애들한테는 2∼3배 보너스 감동이 올 거예요. 문 닫힌 상가에서 뛰는 장면 있잖아요. 그거 보면 개인적인 추억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해서 너무 감동적이에요. 월미도에 대해 묘사하는 방식도 재미있어요. 연인들의 거리라지만 실제로 가보면 되게 혼란스럽거든요. 애들이 가출했다 하면, 월미도 노래방 가보면 다 있어요. 놀이공원도 짜임새 있는 게 아니라 가게마다 바이킹 하나, 디스코텍 하나 가진 식이어서 열 발자국만 걸어도 바이킹이 서너개씩 있어요. 바이킹 사고도 많이 나고. 그런데 입구에 보면 이름은 ‘문화의 거리’라고 써 있어요. 바다도 똥물이고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 동동” 그런 노래가 항상 나올 것 같아. 공연을 해도 만날 교회 밴드가 “주께서 어쩌고” 하고 아니면 사물놀이 공연이나 하고. 월미도에 대해 감독이 묘사한 걸 보고 서울에 사는 사람은 ‘파격’이라 여길지 모르지만 전 ‘맞아, 저거야’ 했어요. 정말 연구 많이 했구나 싶더라고요.● 오로라 지영이 집이 세트인지 아닌지 궁금했어요. 허섭한 거 같지만 벽지며 내부장식이며 정말 공들여 만든 거 같더라고요.● 원 인천에 대한 비류와 온조 메타포도 재미있었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 인천에 관한 향토심을 심어준다고 청록색 노트를 나눠준 적 있는데 거기서 인천이라는 지역에 대한 설화를 알았거든요. 그게 비류와 온조가 고주몽한테 쫓겨난 형제라는 거잖아요. 온조는 서울에서 나라를 세우고 비류는 더 내려갔는데 나라를 세운 데가 인천이라는 거잖아요. 그런데 소금기가 많아서 농사도 안 되고 그래서 망했다는. 나참, 그게 인천이 만들어진 설화래요. 경악을 금치 못했던 초등학교 4학년! 그런데 그런 서울과 인천의 관계를 적나라하게 표현한 게 쌍둥이예요. 감독의 메시지와 여러 가지 측면을 보여주는 거 같아요. 어떻게 보면 걔들은 한국사람도 아니고. 재미있던 건 동대문 두타에 가서 처음으로 비류와 온조가 헷갈리는 대목이에요. 서울의 화려한 공간에서, 근대화의 어설픔을 보여주는 곳에서 아이들이 둘을 혼동한다는 점이 재미있었어요.● 성경 전 부산에서 자라서 나중에 서울에 왔는데 혜주가 서울로 가서 증권회사 취직한 뒤 친구들한테 자랑하는 게 재미있었어요. 뭔가 될 거라고 생각해서 갔는데 사실 아무것도 없잖아요, 혜주한테는. 처음 서울에 갈 때 내 심정이랑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셋 다 혼자 어떻게든 살아야 하는 상황인데 대학 안 가고 뭘 하려다 보면 패스트푸드점 아르바이트밖에 없고 그거 해도 허무하고, 자신을 증명할 서류도 안 나오고 그러잖아. 지영이 보면 텍스타일디자인 하려고 하는데 돈도 없고 막막하고 집에서 지원받을 수도 없고. 얼마 전에 밤늦게 밖에 있는데 옆에 고양이 한 마리가 다가온 적이 있어요. 야생으로 돌아다니는 고양이라 발톱을 안 깎아서 툭 튀어나와 있더라고요. 집에서 기르는 거면 감출 수 있는데 학교 다닐 때까지는 괜찮았는데 혼자 살게 되면 발톱을 날카롭게하지 않을 수 없는 게 지영의 모습 같았어요. 그런가 하면 우리가 안심할 만한 사람이라는 걸 발견하고는 주는 대로 받아먹는 모습은 태희 같더라고요. 그리고 고양이 눈에 눈꺼풀말고 이상한 막 같은 게 있는데 그건 또 혜주 같더라고요. 뭔가 눈앞에 막을 하나 쳐놓고 살아가려고 하는 느낌이.● 원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82년생은 다 개띠라는 사실. 어디서 감독님 인터뷰한 거 보니까 한국사회에서 고양이는 개에 비해 마이너리티라고 했던데 우연히 그렇게 된 건지 모르지만 실제로 영화는 개 다섯 마리가 고양이 한 마리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만드는 거 같아요. 감독님이 자기가 대중적인 사람이라고 말했는데 장난인가 싶기도 하고 무슨 맥락인지 알 거 같기도 해요. 그리고 또 한편으로 고양이가 개가 되지 않고도 잘살 수 있을까. 애들이 지금은 어디론가 떠나는 걸로 끝나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싶고.가족사진에서 자기 얼굴 도려내다니, 너무 통쾌했어인상적인 장면, 기억에 남는 장면은 어떤 것이 있었나.● 성경 난 얘들이 구덩이 팔 때 굴을 파서 집에 들어갈 줄 알았어.● 원 이해를 못했어, 처음엔. 재네들이 뭐하는 거야. 그런데 정말….. 걔들 대단하지 않냐? 그리고 배두나의 연기는 참 괜찮았아요. 몇몇 베스트신 있는데 최고로 경악한 건 만두 먹는 거, 그거 정말 대단한 장면이야. 머리에 헬멧 쓰고 불켜고 책보는 것도. 하나 유감이었던 것은 옥지영은 여자 정우성같이 될 수 있었는데, 되게 고독하게 그리면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의 이영진처럼 카리스마를 내뿜어서 훨씬 많은 팬을 모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거야. 그런데 필이 조금 모자라가지고. 솔직히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가 그렇게 지금까지 마니아가 많은 이유가 뭐겠어. 이영진 때문이잖아. ● 성경 난 배두나가 이따만한 가족사진 들고 나가려고 하는데 아니, ‘저런 한심한’ 하다가 사진을 걸고 비켜서는데 자기 사진 오려놓은 거 보고 너무 통쾌했어.● 원 (흥분, 고조된 목소리로) 맞다. 그게 진짜 베스트다. 만두 취소! 가족사진장면 정말 좋았어. ● 타락 난 뭐 하나 했어. 뭘 가위로 오리기에 쟤 뭐하니, 그랬는데…. 화면에 문자메시지 새겨지는 것도 좋았어요. 시인이 시 받아쓰고 문자 보내고 그러는데 활용한 것도 참신하더라.● 원 처음에 <고양이를 부탁해> 제목이 뜨는데 <벨벳 골드마인> 인트로 필이 나면서 되게 재미있을 거 같더라…. 그러더니 그래, 집, 나가고! ● 성경 마지막에 공항에 있는 장면 있잖아요. 그거 보면서 쟤들 돈을 얼마나 들고 나왔기에 저기 있지 싶더라. ● 지지큐 난 걔들이 반팔 입고 있어서 어디 가는 거지. 남쪽으로 가는 건가? 그랬어요. 분명 겨울이었는데….● 원 꼭 이런 애들 있어요. 영화보면서 긴팔이 반팔 됐네, 스카프가 오른쪽이었는데 왼쪽으로 바뀌었네 하면서. (웃음) 농담이고. 전에 <눈물> 영화사에서 자리를 마련해서 얘기한 적이 있어요. <눈물> 보고 영화를 조목조목 씹어줬어요. “그래 너넨 그런 식으로 살아라. 그런 구덩이에 빠져서” 뭐 그런 식이잖아요. <고양이를 부탁해>는 해결책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희망의 메시지를 주기도 했어요. 물론 걔들 비자는 지지리도 안 나올 거고, 어디 동남아라도 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 성경 희망적인 메시지가 느껴지는 건 지영이가 분류심사원인지 거기 나오는데 태희가 마중나와주고 그러잖아요. 그런데서 느껴져요. ● 오로라 근데 결코 희망적이지만은 않은 게 마지막에 희망을 가지려고 했어도 그 중간에 불안하고 두렵고 그런 게 있어요. 육교 위에서 난데없이 미친여자가 나타나는 거나 둘이 담배 피울 때 뒤의 단무지공장 아줌마들이 보이는 것 같은, 너무도 불안한 미래인 거죠. 어딜 간다 해도 달라지지 않을 것 같은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거죠. 혜주 역시 그렇죠. 그게 뭐지, 되게 안 좋은 말?(옆에서 가르쳐주자) 아, 저부가가치 인간. 뭐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거 같아요. 끝으로 태희, 혜주, 지영, 비류, 온조 중에 누가 제일 걱정되나?● 원 우리가 뭐 남 걱정할 땐가? (웃음) 걔들은 영화 밖에 나오면 배우라 남도 하고 살지…. 정리 남동철 namdong@hani.co.kr·김혜리 vermeer@hani.co.kr사진 오계옥 klara@hani.co.kr 등장인물 소개● 원 1982년생.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하자센터에서 이것저것 배우고 있다. <고양이를 부탁해> 등장인물들과 같은 나이라는 점에서 누구보다 할말이 많다.● 지지큐1982년생. “미래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세 가지는 아이큐, 이큐, 지지큐”라는 말을 듣는 젊은이.● 성경 1981년생.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에 올라와 하자센터에서 지내고 있다. ● 오로라 열여덟살. 이 친구가 찍은 ‘우주로 통하는 골방’에 걸린 사진들을 보면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진다. ● 타락 열일곱살. 얼마 전에 자퇴하고 하자센터에 들어왔다. ‘타락’이라는 별명에서 연상하기 불가능한 다소곳한 인상의 소녀.▶ 또래들, <고양이를 부탁해>를 말하다 (1) ▶ 또래들, <고양이를 부탁해>를 말하다 (2)

물고기새 타고 파스텔도원을 훨훨

문득, 꿈을 꿀 때가 있다. 맑은 물이 흐른다거나 유난히 깨끗한 숲에 들어간다거나, 혹은 거기서 ‘꿈에서나 만날 법한’ 아름다운 이를 만나는 꿈. 그런 기억 하나쯤 있다면 어른이 된 뒤의 빛 안 드는 지하철역도 그리 텁텁지만은 않을 것이다. <마리이야기>는 어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젠 어른이 된 한 남자(아이) ‘남우’의 그런 오래 전 꿈 이야기다. 서울 도심에서 시작해 작은 바닷가마을로, 소년의 환상세계로, 그리고 다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으로 돌아오는 <마리이야기>가 두어달 뒤면 세상에 나온다.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는 이 작품의 실체가 궁금해 작업실로 찾아가 미리 들여다보았다. 소리없는 화면에서 번져온 싸한 감동 “이렇게 열악한 곳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지다니!” 누군가 <마리이야기> 작업실에 와서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지만, <마리이야기> 팀의 작업실은 <마리이야기>의 어떤 풍경을 닮은 듯한 옥수동 한 귀퉁이에 자리해 있었다. 지상으로 난 지하철역사의 묵직한 콘크리트 구조물이 그늘을 만들어놓은 골목 입구. 그곳을 지나자마나 나타나는, 고층아파트로 둘러싸인 주택가. 어수선하고 외질 수도 있었을 텐데, 학교를 파한 뒤 색색의 책가방을 메고 집을 찾아 걷고 있는 아이들이 평화로움을 불어 넣어 주는 골목. 지친 어른들의 도시 한 여백에 오래 전부터 있어온 아이들의 마을 같은 그곳에서 <마리이야기> 스탭들은 ‘나의 아름다운 소녀, 마리’를 찾아 오랜 시간을 컴퓨터 모니터 앞에 살고 있었다. 그곳에서, 아직 소리가 입혀지지 않은 <마리이야기> 테이프를 보았다. 시나리오와 모니터 화면을 오가며 한 시간 반쯤 흘렀을까. 싸한 감동이 밀려왔다. 조용했기에 더 신기한 경험. 환상세계의 소녀 마리와 소년 남우의 러브 판타지라고 알려져 있던 내용은 그대로, 그런데 환상 못지않게 남우의 일상이 비중있게 담겨져 있는 게 새로웠다. 실제 풍경을 밑그림 삼은 배경그림들은 더할 나위 없이 정교하고, 남우의 환상은 마치 ‘무릉도원’인 양 먹먹하게 아름다운 풍경 속에 시적으로 묘사돼 있었다. 자극적이지 않은 파스텔톤의 색감이 현실에도 환상에도 잘 어울리는 빛깔을 입혀놓았다. 우선 3분가량 되는 긴 첫 장면부터 인상적이다. 새를 따라 서울의 하늘을 유영하던 그림이 한 빌딩 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은, 곧 남우가 옛 친구 준호를 만나는 장면으로 이어지고, 이내 어린 시절의 회상 속으로 잠수해 들어간다. 새처럼 유유히 환상 속으로 날아가는 구도의 <마리이야기>는, 작게는 뱃사람이었던 아버지가 사고로 죽은 뒤, 바닷가 마을에서 쓸쓸히 살아가는 소년 남우의 이야기다. 고양이 ‘요’, 친구 ‘준호’, ‘숙이’, 어머니, 할머니, 동네아저씨 경민 등이 그 삶의 풍경을 함께한다. 또다른 주인공 ‘마리’는 조금 천천히, 그러나 불현듯 남우의 마음으로부터 나온다. 물고기와 새가 합쳐진 듯한, 상상의 동물 물고기새 한 마리가 남우의 책가방에서 튀어나오면서 서서히. 꿈인지 환각인지 모르게, 남우는 그로부터 몇번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 보드라운 흰털로 뒤덮인 마리와 그녀의 구름처럼 큰 개를 만난다. 마리와의 만남은, 남우에게 그늘진 사춘기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는 힘과 희망을 안겨준다. 마치 피곤한 날의 단잠처럼. 시작은 ‘하늘을 나는 원숭이’ ‘그리움’이 주된 정조라 할 수 있는 <마리이야기>의 시작은, 1998년 10월로 거슬러들어간다. 그때, 이성강 감독은 서교동 주택가의 한 주차장을 개조해 ‘스튜디오 기시’를 꾸리고 있었고, 전승일, 조범진 감독 등을 비롯한 동료들과 2주에 한번씩 술잔을 기울이며 애니메이션의 꿈을 나누곤 했다. 그 무렵, “내가 만든 게 어디 들어 있나 사람들이 알기나 할까”, 단편애니메이션 상영회들을 다니다가 이성강 감독이 느꼈다는 작은 ‘불만’(?)이 사실상 <마리이야기>의 출발이다. “내 것만 여러 개 묶어 상영하면 어떨까” 하는 아주 사적인 바람에서 그는 일련의 ‘단편들’을, 옴니버스처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렇게 <마리이야기>의 전신이라 할 만한, ‘하늘을 나는 원숭이’, ‘날개의 꿈’, ‘꽃’의 세 에피소드가 이성강 감독의 머릿속에서 튀어나왔다. 탐험가 할아버지가 어린 시절 숲에서 몸이 털로 뒤덮인 신비의 존재를 만났던 일을 회상하는 이야기(‘하늘을 나는 원숭이’), 그 할아버지의 손녀가 공원에서 사슴을 만나는 이야기(‘날개의 꿈’), 할아버지의 죽은 할머니가 골목에 앉아 꽃을 팔며 전개되는 에피소드(‘꽃’). 이 얘기들의 시놉시스를 쓴 이성강 감독은, 평소 친하게 지내던 옆집 고물상 아저씨에게 보여줬다. ‘언젠가 본 듯한 느낌’, 즉 기시감에서 이름을 딴 스튜디오 ‘기시’의 옆집 고물상에서, 시를 쓰며 살던 그 아저씨는 ‘하늘을 나는 원숭이’ 시놉시스를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거 명작입니데이”라고. 그래? 그렇다면…? “이걸로 장편을 하면 괜찮겠다”, 그렇게 이성강 감독은 처음과는 조금 ‘다른’ 생각을 품어버렸다. 그리고 그해 12월, ‘명작’ 시놉시스를 짧은 영상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자신을 포함해서 여섯명 정도의 인력으로 <마리이야기>의 첫 데모를 완성한 것은 이듬해인 99년 3월. ‘업계’에 몸담고 있던 조성원 씨즈엔터테인먼트 대표가 <마리이야기>와 또 하나의 작품인 <소리의 방> 데모테이프를 처음 본 것도 그 무렵이다. ‘스튜디오 기시’ 이전, 그러니까 이성강 감독이 애니메이션 창작집단 ‘달’에서 활동하던 시절부터 이미 그의 작업들을 눈여겨봤다는 조성원 프로듀서는, 단편애니메이션 이벤트 등을 통해 친분을 쌓은 사이였다. 데모를 본 그는 일주일 뒤, 이 감독을 찾아와 “이거 해볼 수 있을 것 같다”며 <마리이야기>를 골라집었다. 당시 <마리이야기> 데모는 ‘하늘을 나는 원숭이’에서 주인공이 환상 속 동물과 만나는 장면을 주로 묘사한 3분짜리 짧은 테이프였다. 이에 반해 이성강 감독의 또다른 장편 기획이었던 <소리의 방>은, 마찬가지로 3분짜리였지만 내용은 누드쇼를 하는 여자 소리를 주인공으로 하는 성인용 애니메이션이었다. 조PD는 왜 <소리의 방> 대신 <마리이야기>를 택했을까. “<소리의 방>이 더 상업적일 거라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마리이야기>에 더 끌렸다. 보통 애니메이션 하면 성인용, 아동용으로 구분지어 생각하는데, 난 극장용 애니메이션이라면 보통의 일반적인 영화관객에게 다가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리이야기>는 보편적인 사람 이야기였다. 사람들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 당시의 선택에 대해 그는 이같은 심정을 들려준다. “동화적인 느낌, 일상과 환상”을 한 품에 이성강 감독의 제목미정 ‘장편’ 프로젝트가 제작사를 만나 현실화 궤도에 올라선 뒤, <마리이야기>는 본격적으로 몸만들기 작업에 들어갔다. 1999년 3월부터 2000년 7월까지, 1년4개월에 걸친 시나리오쓰기 대장정이 시작된 것이다. 처음 작업은 세 이야기 중 두 번째는 빼고, 첫 번째 에피소드 ‘하늘을 나는 원숭이’와 세 번째 에피소드 ‘꽃’을 합치는 것이었다. 그랬다가 세 번째 에피소드를 마저 빼버리고 첫 번째 이야기만을 긴 이야기로 늘리는 2번째 작업이 시작됐다. 애초 ‘하늘을 나는 원숭이’는 탐험가가 숲에서 겪은 환상체험 이후, 긴 후사를 덧붙인 것이었다. 숲에서 나와보니 현실의 시간은 한참이나 흘러 있고, 전쟁이 벌어져 있고, 그 와중에 한 여자를 만나는데 그녀가 바로 숲에서 만났던 신비의 존재였다는 등등. 지금의 <마리이야기>가 나오기까지 고단한 첨삭의 과정에서 탐험가 대신 남우라는 인물이 생겨났고, 친구 준호, 숙이, 남우 어머니와 할머니 등 등장인물들이 속속 늘어났으며 배경 역시 산과 숲 대신 삶의 터전인 바닷가마을과 바닷속을 닮은 환상세계가 들어섰다. “동화적인 느낌, 일상과 환상”을 한 품 안에 끌어안겠다는 이성강 감독의 구상은 과녁의 한가운데를 맞히는 것처럼 대단한 정신력을 요하는 일이었고, 작가 2명이 떨어져 나갔다. 3번째 작가이자 마지막 작가인 강수정씨가 비로소 호흡을 같이하게 됐다. “작가들이 시놉시스 무지하게 썼죠. 환상은 환상이되 어드벤처여서는 안 된다. 환상 속에 들어가서 뭘 하고 그런 것 없이, 자연스럽고 목적의식 없는 환상이어야 된다. 짧게 스쳐가면서 시각적인 느낌이 풍부한 그런 환상이어야 된다, 그러면서 또 현실은 구질구질하지 않게, 동화적인 느낌이 들어 있어야 한다고 요구했죠.” 2000년 7월, 드디어 그 모든 느낌들이 담긴 시나리오가 탈고됐고, 바로 한참이나 기다렸던 콘티작업과 인물들의 연기 실사촬영이 이어졌다(배경이 산에서 바다로 옮겨진 데에는, 이성강 감독이 서울 홍은동의 절 백련사를 찾았던 경험이 주효했다. 언젠가 백련사에 올라 아래를 바라보며 들었던 느낌, 바로 “저기쯤 바다가 있으면 딱 좋겠다”라던 느낌에 “그리기 더 쉬울 것 같아서(웃음)”라는 작은 이유도 작용했다고. “바닷가였으면 좋겠는데 어디로 하면 좋을까” 했더니 한 친구가 동해안 감포를 말했고, 백련사 근처와 감포 바닷가는 <마리이야기>의 주요 풍경이 됐다). <마리이야기>가 투자사인 무한투자금융기술을 만난 건 그보다 이전, 1999년 10월경이었다. 금강기획 영화사업부에 있다가 씨즈엔터테인먼트를 차린 조성원 프로듀서는 그 무렵 이야기를 하며 “투자자가 결정되기까지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고 털어놓았다. “영화투자하던 사람들이야 많이 알고 있었지만, 그 사람들은 생소한 애니메이션 <마리이야기> 같은 건 안 할 게 뻔했다. 그때 당시 한창 설립되던 벤처기업들에 눈을 돌리기로 마음먹었다. 속된 말로 잘 모르는 데를 꼬셔야지, 하는 생각이었던 거다. 바람을 많이 깔아놓았는데, 무한에서 먼저 연락을 해오더라.” 시운을 잘 타던 제작비 조달이 벽을 만난 건 제작기간이 길어지면서 순제작비가 17억원에서 21억원으로 늘어났을 때. 그때는 딱 한번 ‘큰소리’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고비를 넘겼다. 그러나 <마리이야기>는 여러모로 운이 좋았다. 투자사가 있는 와중에도 2000년 6월 영화진흥위원회 제작지원작으로 선정돼 올 5월 3억원을 받았으니 말이다. 디지털 지운 디지털 화면 순제작비 21억원, 마케팅비 9억원, 약 30억원의 결코 작지 않은 프로젝트 <마리이야기>. 무엇이 이 작품을 한국애니메이션 기대작으로 손꼽히게 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선 여러 가지 대답이 있을 수 있다. 국내 작품으로는 처음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본선에 올랐던 <덤불 속의 재> 등 자기색이 분명한 단편들로 국내외에서 인정받은 이성강 감독의 작품이라는 점, 2D와 3D를 결합해 시각적 완성도를 높이는 작품이라는 점, 이야기 자체의 매력 등. 그중에서도 누가 봐도 아름다울 <마리이야기>의 ‘그림’은 중요한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언뜻 보아서는 손으로 그린 것 같은 배경 그림들이 실은 모두 3D로 작업한 것이라는 사실은, 그림을 보고 난 내내 놀라움을 남긴다. 그것은 주도면밀한 작업에서 예정된 수순을 밟아 태어난 것. 실제 풍경을 사진으로 찍은 뒤 이를 바탕으로 3D작업을 하고, 그 위에 일일이 2D로 리터치를 한 결과다. 결국 3D의 편리함을 이용하면서도 섬세한 수작업을 통해 3D디지털애니메이션의 차가움을 거두어내고 손맛을 입히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인물동화 부분에서도, <마리이야기>는 꼼꼼한 실사촬영을 통해 기본을 탄탄히 했다. 성인 역은 아마추어 연극배우들, 아역은 목소리연기를 하는 아역배우들로 하여금 인물연기를 하게 했고, 그것을 카메라로 기록하여 인물의 표정과 동작을 그리는 데 절대적인 참고로 삼았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없는 것’에 대한 ‘판타지’ <마리이야기>의 작업은 이렇게 ‘이미 있는 것’을 모델로 이루어져 왔다. 모델 또한 멀리서 찾지 않았다. 고양이 요는 예전에 스튜디오 기시에서 키우던 고양이의 모습에서, 마리의 얼굴은 <마리이야기> 스탭 중 한 여자 애니메이터의 얼굴에서 따왔다. 사운드 역시 실제 바닷가나 길거리, 지하철역 등 ‘그 장소’의 소리들을 폴리로 녹음해, 마치 극영화의 동시녹음처럼 연출할 예정이라고. 98년 10월 이성강 감독의 첫 구상에서 시작된 <마리이야기>는 만 3년이 지난 지금, 이제 음악과 사운드작업, 크레디트 삽입과 최종편집만을 남겨두고 있다. 음악은 기타리스트 이병우씨가 맡아 작업중이고, 목소리연기는 이병헌, 안성기, 배종옥, 장항선, 그리고 아역배우인 이나리, 유덕환, 성인규 등이 캐스팅돼 녹음을 마쳤다. 오랫동안 많은 이들이 기대해온 이성강 감독의 첫 장편 애니메이션 <마리이야기>는 이제 약 2달 뒤, 내년 1월13일에 개봉할 예정이다. 애니메이션계의 ‘모범사례’라 할 만큼 착실히 단계를 밟아, 공들여 제대로 만들어진 작품. <마리이야기>가 기대했던 그대로, 많은 관객을 아름다운 꿈 속으로 초대해 주길 기대해 본다. 최수임 sooeem@hani.co.kr▶ 한국애니메이션의 신천지를 열어라 ▶ 이성강 감독의 러브환타지 <마리 이야기> ▶ <마리 이야기>등장인물과 스탭 ▶ 김문생 감독의 미래 SF <원더풀 데이즈> ▶ <원더풀 데이즈>등장인물과 스탭

“피냄새가 아니라 사람냄새 나는 액션”

배창호 감독이 돌아왔다. 80년대 최고의 흥행사에서 90년대 고독한 작가주의 감독으로 선회했던 배창호 감독이 이제 먼 길을 돌아 다시 젊은 관객들과 만난다. 배창호 감독의 표현을 빌자면, <흑수선>은 ‘대형 벽화’인 셈이다. 그 사이 초상화(<러브스토리>)도 그려보고 풍경화(<정>)도 그려 봤으니, 이제 대형벽화를 그리고 싶다는 것. <흑수선>에 대한 배창호 감독의 각별한 사랑 이야기를 들어 봤다. 부산영화제 예매 개시 직후에 매진돼 화제가 됐다. 감회가 새로울 텐데. - 기분 좋지만, 좀 우려가 된다. ‘재미’만을 추구한 영화는 아닌데, 관객이 그것만 기대하는 건 아닐까 해서. 미스테리 스릴러라는 장르적 운반수단을 통해서 조금 진지한 얘기를 전달하고자 했다. 부산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됐다는 것이 감독 개인에겐 어떤 의미인지. - 부산영화제가 해를 거듭하면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고, 그런만큼 국내외적인 관심이 쏠리는 자리라서, 영화의 위상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대중성은 물론이고, 작품성에 있어서도 인정을 받았다는 뜻이기도 하고. 개막작 선정 사실이 좋은 자극이 됐다. 그 때문에 후반작업도 더 열심히 하게 된 것 같고. 제작 발표 당시, ‘배창호 감독이 블록버스터를 만든다’는 사실에 관심이 집중됐었다. 뭔가 다를 거라는 기대에서다. -한상준 프로그래머가 90% 가편집본을 보고 그러더라. 배창호 감독 영화라고. 어떤 스케일로 또 어떤 스타일로 만들더라도, 내가 인간을 보는 시각, 형식적인 리듬감, 절제적인 요소들, 자연을 이용하는 방식 같은 것들은 크게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이번 영화에서도 달빛이나 햇살, 그림자, 바람, 안개, 비 같은 자연적인 요소들에도 이야기와 감정을 담으려고 했다. 같은 액션이라도 인간의 정서와 연결지어 보여주려 했고. 미스테리 스릴러라는 장르와 휴먼 드라마적인 메시지를 어우러지게 하는 일이 연출의 관건이었을 것 같다. - 촬영 당시에도 이야기했듯이 ‘종합문제’를 푸는 심정이었다. 이 영화에는 드라마적인 요소가 너무 많다. 사건도 많고, 시대도 왔다 갔다 하고, 캐릭터 소개도 해 줘야 하고, 복선도 갈등도 많아, 어떻게 꾸려나가야 할지 골치가 아팠다. 그런데 하면 할수록, 처음 생각보다 ‘깊이’가 생겼다. 이상하게 제작자도 그걸 바라더라. 진국을 끓여서 기름기를 걷어냈다고 할까. 큰 촬영이 많았는데, 어떤 신이 특히 힘들었나. - 탈출 포로들이 폐교 바닥의 땅을 파다가 수맥을 건드리는 장면이 있다. 2분 분량인데, 그 장면을 일주일 동안 찍었다. 배우들이 수영을 못해서 많이 힘들어 했고, 감독이 물 속에 들어가 컨트롤할 수 없는 상황이라,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배우들과의 호흡은 잘 맞았나. - 안성기씨를 제외하곤, 서로 잘 모르는 상태라, 처음엔 좀 서먹했다. 그런데 미연씨도 좋은 의견을 많이 내 줬고, 정재씨도 감독을 신뢰해주고 잘 따랐다. 안성기씨 덕에 내가 좀 편했다. 현장에서 솔선수범하니까, 내가 편했지. 우리 부감독이었다.(웃음) <최후의 증인>이라는 소설과 영화가 원작이라고 들었다. 원작의 어떤 점에 끌려서 영화화를 결정했나. 각색 포인트가 있었다면. - 이야기의 뼈대는 같지만, 범인은 다르다. 원작의 허무적인 분위기를 지우고, 역사에 상처받고 희생당한 두 남녀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원작은 이야기의 주공간이 빨치산인 반면, <흑수선>은 거제포로수용소로 접근했다는 점도 다르다. <텔미썸딩> 같은 형사영화가 대중적 인기 장르로 자리잡고, <쉬리>나 <공동경비구역 JSA>처럼 전쟁이 낳은 남과 북의 현실, 그런 지극히 한국적인 소재를 다룬 영화가 등장하는 걸 보면서, ‘이제 때가 됐다’는 생각을 했었다. 거제포로수용소를 이야기의 주공간으로 끌어들인 이유도 그런 맥락인가. - 처음엔 우연히 그렇게 됐다. 작년 8월에 거제도로 여행을 와서, 포로수용소 기념관에 들렀는데, 다시 지어 놓은 막사들을 보면서, 참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최후의 증인>이 떠오르더라. <제17포로수용소>나 <콰이강의 다리>나 <대탈주>처럼 2차대전을 다룬 고전영화들이 있잖나. 이 공간이라면 그처럼 의미도 담기고 시각적으로도 충분히 강렬한 영화를 찍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과엔 어느 정도 만족하는지. - 만족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때론 능력이 부족해서, 때론 시간이 부족해서, 때론 판단이 성급해서, 제대로 못한 부분들이 있다. 하지만 최선을 다했느냐, 열정을 갖고 임했느냐의 잣대로 답하자면, 만족한다. 대중영화 속으로 7년만에 들어왔다. 관객이 많이 까다로워졌다는 걸 느낀다. 그동안 내가 안일하게 생각했던 부분들이 있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차기작 계획을 묻기엔 좀 이르지만, 다음 행보가 정말 궁금하다. - <흑수선>의 결과에 관계없이, 또 내가 하고 싶은 영화를 할 거다. 아주 강렬한 영화가 될 거다. <흑수선>처럼 현대적인 기법이면서, 한국적인 색깔을 지닌 그런 작품. 글 박은영·사진 오계옥

원더풀 디스토피아! 아름다운 날들

누구나 한번쯤은 소망한다. 비를 뿌리거나 잔뜩 찌푸려 있던 하늘에 서서히 구름이 걷히는 틈새로 쏟아지는 햇살처럼, 청명하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나날을. 환경오염으로 황폐해진 미래의 지구에서 사라진 아름다운 날들을 꿈꾸는 사람들에 대한 SF애니메이션 <원더풀 데이즈>는, 애니메이션의 ‘원더풀 데이’를 기다리는 이들의 바람이 담긴 작품이기도 하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시장에서도 경쟁력 있는 애니메이션으로, 국산 장편애니메이션의 새로운 성공사례를 만들어보겠다는 ‘양철집’ 식구들의 한결같은 꿈 말이다. 인류의 유일한 터전으로 남은 남태평양의 시실섬, 인공 돔 안의 에코반과 그 외곽에 버려진 야성의 공간 마르의 대립 속에서 엇갈리는 젊은이들의 운명의 행방은 내년 여름이 돼야 알 수 있겠지만, 제작사 양철집을 찾아갔을 때 그들의 세계를 조금 엿볼 수는 있었다. 서울 신사동 도산공원 입구에 위치한 양철집은, 이름 그대로 은색으로 빛나는 양철로 된 집이다. 시내 한가운데보다는, 인공도시 에코반 같은 미래적인 디자인과 원시적인 마르의 자연풍경이 공존하는 <원더풀 데이즈>의 한 장면에 갖다놓는 게 더 어울릴지 모를 만큼 초현대적인 느낌의 건물. 수십대의 컴퓨터가 제각각 공간을 차지한 이곳에서, <원더풀 데이즈>의 합성작업이 한창이다. 이미 촬영이 끝난 미니어처 세트와 매트페인팅, 실사영상, 3D 컴퓨터그래픽과 2D 셀캐릭터까지 다채로운 질감의 그림들이 한 장면에 잘 녹아들도록 붙이는 과정. 올 겨울에서 내년 여름으로 완성 시기를 늦춰둔 김문생 감독의 말을 빌리자면 “1캠프와 2캠프를 지나 마지막 빙벽 앞”에 와 있는 셈이다. 하긴, 1년에도 십수편씩, 15년간 260여편의 CF와 무대 영상을 만들어온 김 감독이 <원더풀 데이즈>에만 매달려온 지도 벌써 4년째니까. `아름다운 날들`을 위한 6년간의 기다림 살아가는 동안 ‘원더풀 데이’가 결코 쉽게 오지 않듯, 애니메이션 <원더풀 데이즈>는 참으로 지난한 기다림이 필요했다. 황경선 PD가 김 감독에게 <아름다운 이야기-원더풀 데이즈>란 가제가 달린 영화 시놉시스를 보여준 것은 지금으로부터 6년 전인 95년 말. 당시 코래드에 몸담았던 황 PD와 이경학 PD는 <헤어드레서>를 끝내고 새 작품을 위한 시나리오 검토에 한창이었다. 읽어보고 자문 좀 해달라는 황 PD의 말에 환경이 파괴된 미래의 지구, 남태평양의 가상의 섬 시실로 이주해간 인류의 이야기를 재밌게 읽었을 때만 해도, 실사영화가 아니라 애니메이션으로 하면 좋겠다고 농담처럼 말했을 뿐 자신의 작품이 될 거라곤 생각지 않았다. 4∼5년 전부터 혼자 시나리오도 써보고, “도대체 내 아이디어가 영화 같지 않아서” 고민하곤 하며 늘 영화를 하고 싶어 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김 감독의 말을 듣고 정말 애니메이션으로 개발해보면 어떠냐는 두 PD의 제안을 받고 반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농담은 점점 현실이 됐다. “미대 시절의 작가로서의 느낌도 다 잃고, 제품만 보고 살면서” 과연 어떤 영화를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온 그에게, ‘원더풀 데이즈’는 매력적인 화두였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 결국 누구나 원하는 건 이런 게 아닐까. 원더풀 데이즈, 아름다운 날들….” 제목에서 받은 느낌을 영화로, 그것도 실사와 다른 애니메이션의 미감으로 살려보고픈 의욕이 <원더풀 데이즈>의 긴 항해에 닻을 올려주었다. 그리고 일상이 아닌 여행지의 풍광처럼 낯선 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새로움을 고민하던 김 감독은, 뜻밖에 가장 익숙한 것에서 해답을 발견했다. 그림과 갖가지 오브제, 미니어처 같은 복합 재질과 2D와 3D, 실사와 애니메이션의 합성 등 지금껏 광고에서 다져온 다양한 기법의 실험. 2D 셀캐릭터와 3D 컴퓨터그래픽 소품, 미니어처 세트와 매트페인팅, 실사를 합성함으로써 본 적 없는 이미지의 질감을 빚어내겠다는 <원더풀 데이즈>의 스타일은 김 감독의 배경에서 나왔다. 하지만 그게 “깊은 수렁에 빠져드는” 제 일보에 불과할 줄이야. 문제는 시나리오였다. “그림으로 미장센을 만들고 때깔을 내는” 거야 못할 것도 없지만, 영화는 일단 드라마가 탄탄해야 한다는, 시나리오에서 잡아내지 못한 건 그림으로도 못 잡는다는 생각 때문에 시나리오는 점점 손때만 묻어갔다. <원더풀 데이즈>의 기본 줄거리는 환경오염과 자원고갈에 떠밀려 시실섬으로 이주한 인류의 미래에서 출발한다. 인공지능 델로스에 의해 관리되는 에코반은 선택받은 소수의 인공낙원. 에코반의 수뇌부는 마르 지역을 희생시킬 음모를 꾸미고, 마르의 사람들은 공해가 사라진 뒤의 푸른 하늘, 곧 ‘원더풀 데이’를 꿈꾸며 델로스를 파괴하고자 한다. 마르 청년조직의 수하와 에코반 자위대의 제이와 시몬, 서로 다른 두 집단의 대립 속에서 유년의 추억을 공유한 채 엇갈리는 세 젊은이의 갈등과 사랑이 <원더풀 데이즈>를 끌어가는 주축이다. 여러 작가들과 함께 수십번 이야기를 고치고, 제작팀을 꾸리는 사전준비에 보낸 시간만 거의 2년. 다행히 진이 빠지기 전인 98년 상반기에 한국소프트웨어진흥원의 공동개발사업으로 선정되고, 뒤이어 영화진흥위원회의 하반기 영화판권담보 제작비 융자대상에 애니메이션으로는 처음 오르면서 각각 3억원씩을 지원받아 데모 제작에 나설 수 있었다. 부푸는 기대, 바닥난 제작비 3분 남짓한 첫 데모가 완성된 것은 99년 3월경. <공각기동대> 등 일본애니메이션의 질높은 하청작업으로 이름난 DR무비와 DNA, 페이스 같은 유능한 3D업체들 등 기존 애니메이션업계가 가세한 첫 데모의 완성도는 기대 이상이었다. 실사로 찍어서 디지털로 덧칠한 하늘의 미묘한 색감, 미니어처 세트에 선 셀 질감의 제이를 향해 날아온 컴퓨터그래픽 도끼가 실사 영상의 벽에 박히는 이미지는, 적어도 전체 작품을 끌고갈 테크놀로지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미완성이지만 미래적인 도시 디자인과 원시적인 자연이 공존하는 암울한 영상도, 역동적인 액션을 잡아내는 영화적인 카메라워크나 현대적이면서도 민속적인 정서를 풍기는 음악도 작품에 대한 기대치를 높여줬다. 전부터 입소문이 나 있던 <원더풀 데이즈>는 이 데모를 전후해서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고, 그해 10월 밀라노에서 열리는 영화견본시 MIFED에서 대만의 CMC그룹과 미니멈 개런티 30만달러에 판권 계약을 맺으며 시장에서도 일단 합격점을 받았다. 머릿속의 그림을 영상으로 펼쳐보이고, 세간의 인정도 받아 가장 행복했을 것 같은 이 반년 정도의 기간은, 그러나 가장 불안한 한때기도 했다. 데모를 만들고 팔린 것까진 좋았는데, 애초 20억원대에서 36억원선으로 불어난 제작비 조달의 걱정이 닥친 것이다. 미니어처 세트는 모션컨트롤카메라를 빌려 찍어야 하고, 셀은 셀대로, 컴퓨터그래픽은 컴퓨터그래픽대로 작업하는 등 갖가지 기법으로 이미지를 만드는 과정 자체는 물론이거니와 이를 하나로 조합하는 데도 예상보다 훨씬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었기 때문이다. 감독, PD 할 것 없이 양철집 내부 인력들은 전부 극장용 장편애니메이션이 처음인데다가, “신기술이라는 것 자체가 사실 완성이 안 됐다는 의미”라는 김문생 감독의 말대로 이제껏 본 적 없는, 그러니까 한 적도 없는 작업에서 시행착오가 없을 수 없었다. 게다가 1년 이상 이 작품에 전념해야 하는 제작여건 등의 이유로 데모에 참여했던 애니메이션업체들도 빠져나가 제작팀을 재정비해야 했고, 무엇보다 이때까지도 만족할 만한 시나리오가 나오지 않은 상황이 암담하기 짝이 없었다. “아무리 낯선 그림도 10∼20분 지나면 눈에 익기 시작하고, 그 다음부턴 낯선 기법이 아니라 빈 곳이 보이는데….” 1달에 CF를 1∼2편씩만 하면서 만들면 되겠다는 애초의 생각은 접은 지 오래. 초기에 투자받은 종잣돈도, CF로 모은 돈도 바닥난 상태였다. 투자가 불투명한 상태에서 MIFED 이후의 약 3개월 동안은 월급 주기도 힘든 고비였다. 가우디에서 탈출까지, 문화의 경계 지우기 이쯤 되고보니, 정말 대만에 판권을 미리 팔지만 않았어도 접어버렸을지 모른다는 황경선 PD의 말도 무리가 아니다. 들인 돈보다 들일 돈이 배 이상인 시점이었으니 말이다. 동료이자 남편인 김문생 감독을 볼 때마다, 괜히 CF로 잘 나가던 사람 고생시키는 길로 떠민 거 아닌가 후회도 막심했다고. 그러던 11월에 투자 유치를 위해 삼성벤처투자 사무실을 찾아갔을 때, 영상팀 김성용 차장의 첫마디는 “전 애니메이션에 투자 안 해요”였다. 데모와 시나리오를 건넨 지 15분 만에 이야기를 끝내고 나오던 마음이 어땠을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원더풀 데이즈>의 데모와 시나리오를 처음 본 김 차장의 생각은 “테크놀로지는 좋은데 시나리오가 개판”이라는 것이었다. 시나리오를 덮는 순간 뭔가 신선하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투자를 결정할 순 없는 일이었다. 얼마 뒤 김 감독과 술을 진탕 마시고 얘기를 나누면서 조금씩 신뢰를 가지기 시작했지만, 투자를 결정한 것은 그로부터 약 3개월 뒤인 2000년 2월이다. 11월부터 시나리오를 계속 고치기 위해 이따금 설악산에 가곤 하던 김문생 감독은 그때도 설악산에 있었고, 미국 출장을 다녀온 날로 그를 찾아간 김 차장은 투자를 확정지었다. 조건은 시나리오를 끝까지 고칠 것과 명목상이 아니라 실무 PD를 맡아 같이 가겠다는 두 가지. “보통 사람들이 생각 못하는 범상치 않은 세계를 보는 눈이 있다”고 느낀 감독에 대한 신뢰가 투자의 가장 큰 이유였다. 또한 김 차장이 40억원대의 예산을 60억원대로 올리면서 다른 투자자를 떨치고 삼성벤처투자의 전액투자를 추진한 데는, <원더풀 데이즈>를 확실한 해외시장용으로 밀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어차피 40억원대의 애니메이션도 국내시장에서 투자액을 회수한다는 건 어불성설. 차라리 투자를 좀더 하더라도 해외시장에서도 경쟁력 있는 질을 뽑아내는 게 낫다는 판단에서다. 이 점은 <원더풀 데이즈>의 제작진도 처음부터 신경쓴 부분이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시장에서도 인정받을 만한 작품을 만들겠다는 것. 스페인의 성가족교회나 구엘공원 같은 가우디의 디자인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에코반과 레비우스의 해체주의 작업이 모티브가 됐다는 마르의 배경, 이미지가 보기 좋아서 활용한 탈춤과 사자놀이 등이 공존하는 전체적인 디자인과 캐릭터, 복합적인 기법까지 꼭 해외시장을 겨냥한 때문만은 아니지만, 모든 게 퓨전에 가깝다는 점에서 문화적인 이질감은 없는 편이다. “애니메이션 기법을 쓴 영화” 만든다 올해 완성한 두 번째 데모를 보자면 해외시장의 꿈이 그리 허황되진 않다는 조심스러운 예측이 가능하다. 첫 데모가 다양한 기법이 조합된 영상의 가능성을 보여줬다면, 7분 남짓한 두 번째 데모는 암울하면서도 매력적인 스타일리스트의 면모가 엿보인다. 3D 컴퓨터그래픽으로 만든 바이크를 타고 에코반으로 가는 황량하고 기나긴 도로를 질주하는 제이의 오프닝부터 화사한 색채의 그래픽 문양을 활용한 이국적인 바 댄서의 환상, 제이와 수하가 맞닥뜨리는 박물관장면에 꼼꼼하게 채색된 스테인드글라스, 미니어처 세트에 실사와 3D를 가미한 입체적이고 웅장한 공간 등은 애니메이션의 분방함과 실사의 중량감을 모두 잡아내겠다는 제작진의 의도를 성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유지태, 우희진, 정준호의 목소리연기를 선녹음하고 그 뉘앙스를 참고해가면서, 애니메이터들이 6mm카메라로 자신들의 연기를 촬영해가면서 그려낸 인물들의 액션도 꽤 사실적이다. 제작이 지연된 덕분에(?) 최근에 개발된 파나비전의 새 렌즈나 세계에 몇 대 안 된다는 소니 HD카메라 등 최첨단 테크놀로지를 동원할 수 있었던 것도 <원더풀 데이즈>의 영상에 힘을 실어줬다. “애니메이션 기법을 쓴 영화”라는 감독의 말대로, 데모에서 보이는 영상은 실사영화 이상의 실제감과 독특한 질감을 담보하고 있다. 지난한 고비를 넘겨온 제작진은 물론, 투자를 결정하고도 수없이 불안했다는 김성용 차장도 데모를 본 뒤로는 걱정을 덜었다고. 지브리스튜디오의 스즈키 도시오나 <타인들>의 프로듀서 등 일본과 미국의 제작자들에게도 개인적으로 보여줬을 때 반응이 좋았던 것도 제작진을 고무시키고 있다. 이미 감독이 쓴 것만도 100고는 넘을 거라는 시나리오는 이제 대사를 정리하는 막바지 수정 작업 중. 2D 작업과 합성 작업이 끝나면 후시 녹음과 원일씨의 음악으로 마무리할 예정이다. 첫 데모부터 벌써 4년째 함께하고 있는 원일씨는 오케스트레이션과 샘플링, 수십종의 타악기와 민속악기 및 전자음악을 활용해 이국적이면서도 현대적인 음악을 작업중이다. “더이상 삼성도, 양철집의 작품도 아니다. 이게 잘되면 다른 작품들도 힘을 받겠지만, 잘 못되면 향후 4∼5년간 다들 힘들어질 텐데 잘돼야지.” 정말 아주 소박하게는 <원더풀 데이즈>의 데모가 보여준 것 같은 낯설고 매력적인 이미지의 세계를 보여주는 괜찮은 국산 장편애니메이션 하나가 보고 싶어진다. 그리고 지난하게 오랜 숙성의 과정을 거쳐온 <원더풀 데이즈>가, 끝까지 잘 익은 완성도와 함께 국산 애니메이션의 아름다운 시절을 열어준다면 금상첨화일 테고 말이다. 글 황혜림 blauex@hani.co.kr·사진 이혜정hyejung@hani.co.kr ▶ 한국애니메이션의 신천지를 열어라 ▶ 이성강 감독의 러브환타지 <마리 이야기> ▶ <마리 이야기>등장인물과 스탭 ▶ 김문생 감독의 미래 SF <원더풀 데이즈> ▶ <원더풀 데이즈>등장인물과 스탭

[포커스]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미국, 2001, 116분 USA, 2001, 116min 감독 조엘 코언 오후 4시 BEXCO 1949년 여름 캘리포니아 북쪽의 소도시. 이발사 에드 크레인(빌리 밥 손튼)은 하루 종일 무표정한 얼굴로 서서 사람들 머리를 깎아준다. 어느날 이발소를 찾은 한 남자가 그에게 돈이 될 만한 사업을 소개한다. 1만달러만 있으면 지긋지긋한 이발소 생활을 청산할 수 있다고 생각한 크레인은 궁리를 한다. 어떻게 하면 1만달러를 구할 수 있을까? 그는 바람난 아내를 떠올린다. 아내의 정부를 협박해서 1만달러를 뜯어내자는 엉뚱한 생각에 깊이 빠져든 것이다. 40년대 필름누아르 스타일을 빌려 흑백으로 찍은 이번 영화는 사소한 욕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큰 재앙으로 변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감독은 이것이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이중배상>의 작가 제임스 M. 케인의 세계에서 따온 것”이라고 밝혔다. 평범한 인물이 유혹에 빠져 타락으로 치닫는 것은 케인의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 하지만 코언의 이번 영화가 단순히 옛날 영화의 추억을 되살리는 시도는 아니다. 아주 부드러운 흑백색조의 대비, 나른하게 흐르는 베토벤의 피아노곡, 표정변화가 거의 없는 주인공의 연기 등 영화는 전반적으로 몽환적인 느낌에 취해 있다. 그 모호한 분위기는 도덕과 양심의 기준이 무너지는 게 예상보다 훨씬 쉬운 일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부추긴다. 올해 칸영화제 감독상 수상작. 남동철

피플 : <버라이어티> 수석기자 데릭 엘리 외

“한국영화는 허리가 튼튼해” <버라이어티> 수석기자 데릭 엘리 “한국영화의 미래는 매우 밝습니다” 10일 문을 연 프레스 센터에서 미국 <버라이어티>지의 수석기자 데릭 엘리는 시종일관, “한국영화의 힘은 탄탄한 중견감독층에 있으며, 올해의 영화제가 그러한 중견감독들의 새로운 도약의 장이 될 것”이라고 영화제를 추켜올렸다. 이미 자타가 공인하는 아시아통인 데릭은, 지난 85년부터 영화를 보기 위해 한국을 드나들기 시작했고, 부산영화제만해도 올해로 4번째 연이어 방문했다. 좋아하는 감독은 배창호와 허진호 감독이지만 새로운 발견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이번 주에도 <버라이어티>에 <신라의 달밤>데 대한 호평을 올려놓고 왔다. 1년전부터는 즐거움 반, 의무감 반으로 거의 모든 한국영화를 놓치지 않고 본다. “남은 과제는 관객층이 두터워지는 것”이라고 조바심할 만큼 애정도 두터운데, <흑수선>? 놓칠 리 없지. 축구도 영화도 공동개최? 낯선 이름, 가와우치 미치야스. 낯익은 직함, 도쿄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지난 42년 동안 방송산업계에 몸담았다 올해 4월27일 도쿄영화제 집행위원장에 취임했고, ‘친구’ 김동호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의 초대장을 받고 부산으로 달려왔다. 그는 영화제 한번 치러낸 ‘영화계 초보’라고 몸을 낮추면서도 “내년 도쿄영화제는 확 바꿀 생각”이라고 패기에 찬 출사표를 던진다. 가와우치 위원장 덕분에 어쩌면 내년엔 축구와 영화를 한꺼번에 즐기는 이벤트가 생길지도 모른다. “영화는 축구 이상으로 국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좋은 컨텐츠다. 내년에 한일 월드컵이 열리는데 부산-도쿄영화제와 연동하면 좋을텐데.” 하는 꿈이 실현된다면. 또, 내년 도쿄영화제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은 한국쪽 인사에게 맡길 생각이라는데, 도쿄에서 날아올 초대장은 누구 품에 안길까. 시원한 통역, 뜨거운 열정 98, 99, 그리고 2001. 세 번째 부산행. 시애틀에서 날아온 부산영화제 영어 통역 최자영씨는 시원한 언어전달 솜씨 못지않게 시원한 마스크, 시원한 목소리를 가졌다. 중학교 때 미국으로 옮겨가 워싱턴 주립대에서 국제학을 전공한 그가 부산영화제와 인연을 맺은 건 영화감독을 꿈꾸던 사촌의 소개 덕분. 미국에서도 ‘타향’ 언어 때문에 곤경에 처한 가족이나 주위 사람들의 답답함을 풀어주곤 하는데, “통역이란 단순한 말의 전달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대변하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일까? 최자영씨의 입에서 풀려나오는 말들은 명확하고 치밀하다.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비디오테이프로 7편의 상영작을 연달아 보는 등 열정도 뜨겁다. 영화제 통역은 “좋아하던 영화를 ‘배울’ 수 있어 좋고, 영화 속에 감춰진 감독의 생각을 ‘직접’ 들을 수 있어 더욱 좋다”고. The Visitor 오늘의 관객 “제복 깃이 날리게 뛰어왔죠” 영화제 풍경에서 유니폼 입은 사람은 스탭이거나 자봉단이다. 개막식 입장을 30분 앞둔 BEXCO 현관에서 이들 제복맨을 봤을 땐 그저 대열지도하는 가드맨인줄 알았다. 그래도 혹시나, 신분을 취조하자 뜻밖에도 “저희 한국 해양대학교 해사대 2학년 학생들인데요”한다. 자신들도 당당한 관객이라는 항변. 해사대란 해양대 안의 단과대학으로 선장과 기관장 중 기관장이 되려는 학생들이 가는 곳이다. 작문수업을 가르치는 교수님께서 난데없이 부산영화제 참관기를 숙제로 내시는 바람에 제복벗을 틈도 없이 해운대로 달려왔다고.

[스페셜] 아시아 작가영화의 발견

PPP 12일부터, 작품수 5회보다 50% 증가한 가운데 아시아 스타감독들 대거참여 ‘외화내빈’이라고 했던가. 어떤 일이 커지고 화려해질수록 실속은 보잘 것 없어지게 마련이라는 이 말은, 최소한 부산프로모션플랜(이하 PPP)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해를 거듭할수록 규모와 내실이 동시에 커지고 있는 PPP가 12일부터 코모도호텔에서 사흘동안 네번째 막을 연다. 아시아의 유망 감독들, 제작자들을 공동제작자나 투자자를 연결해주는 공간인 PPP는 세계 최대의 아시아영화 프리마켓으로 확고히 자리를 잡았다. 올해 PPP의 가장 큰 특징은 아시아의 스타 감독이 대거 참여한다는 점이다. 칸영화제에서 두번 작품상을 수상한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을 비롯, 한국의 이창동, 김기덕 감독 등이 새로운 프로젝트를 들고 부산을 찾는다. 특히 현존하는 최고의 시네아스트로 꼽히는 이마무라 감독은 신작 <신주쿠 벚꽃 판타지>의 총 제작비 중 70% 정도를 이번 PPP를 통해서 조달하기 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베텔넛 뷰티>로 올해 베를린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대만의 린청셩 감독, <블루 청>으로 주목받았던 재일교포 3세 이상일 감독, <루나 파파>를 만들었던 타지키스탄의 박티아르 쿠토이나자로프 감독 등 최근 들어 역동적인 활약을 보이는 신예들의 프로젝트도 소개될 예정. 거장, 중견, 신인급 감독이 고루 배려돼 모양새가 돋보인다. 이처럼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만큼, PPP에 대한 관심은 예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뜨겁다. 작품 수에서 지난해보다 50% 이상 증가한 150여편이 PPP에 참여하기를 희망했으며, 참가자도 작년보다 200여명이 많은 800여명의 초청게스트와 바이어 등이 코모도호텔을 누빌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미국 테러와 보복전쟁을 고려한다면, 고무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미라맥스, 워너브라더스, 콜럼비아 등 할리우드 메이저와 M6, 피라미드 등 유럽의 메이저급 투자 배급사의 발길이다. 부산영화제가 아시아를 대표하는 영화제로 성장한만큼, PPP 또한 아시아의 대표적 프리마켓으로 인정받는다는 점을 입증한다. 그동안 PPP에 출품됐던 프로젝트들이 각종 영화제 등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점 또한 이번 행사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2회 선정작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서클>이 지난해 베니스영화제 그랑프리를 받았고, 역시 2회 선정작인 왕샤오슈아이 감독의 <북경 자전거>와 린청셩 감독의 <베텔넛 뷰티>가 올해 베를린 영화제에서 각각 심사위원 대상과 은곰상을 수상했으며, 1회 PPP 선정작 지아장커의 <플랫폼>이 지난해 베니스영화제에서, 2회 선정작 프루트 첸의 <리틀 청>이 지난해 로카르노영화제에서 은표범상을 수상하는 등 PPP는 아시아 작가영화의 인큐베이터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 올해 행사의 초점 중 하나는 최근 불이 붙기 시작한 한국영화의 해외진출에 바람을 불어넣는 일이다. 한국영화 해외배급업체들과 영화제 출품작 배급업체들이 업무를 쉽게 처리할 수 있도록 홍보관, 스크리닝룸, 미팅룸 등을 갖춰놓은 인더스트리 센터를 운영하기로 한 것도 이같은 배경을 갖고 있다. 한국의 유망 신인 감독을 발굴하기 위한 프로그램 ‘뉴디렉터스 인 포커스’(이하 NDIF)도 눈길을 끈다. 장편영화 제작 경험이 없는 신인감독들이 투자, 제작사를 상대로 자신의 프로젝트를 설명하도록 하는 이 행사에는 1996년 <스케이트>로 칸영화제 단편 경쟁부문에 진출했던 조은령 감독을 비롯, <고리>로 클레르몽페랑영화제 등에 초청됐던 강만진 감독, 칸영화제 시네파운데이션 부문에 진출했던 <집행>의 이인균 감독 등이 참여한다. 산업 관계자들을 잘 모르는 감독이나 영화계 인사를 잘 모르는 신생 제작사들에게 좋은 기회라는 게 주최측의 입장이다. 정태성 PPP 수석운영위원은 “이번 행사에 할리우드 메이저에서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보면, 아시아영화를 향한 세계 영화관계자들의 관심이 몰리는 것을 체감한다”며 좋은 성과를 기대하고 있다. 네번째 PPP가 영화의 역사에 남길 족적이 무엇일지 벌써부터 조바심이 생긴다. 글 문석 ·사진 정진환

북경자전거

■ Story 시골에서 막 베이징에 올라온 구웨이(추이린)는 퀵 서비스 배달원으로 취직하게 된다. 일한 몫으로 600위안을 지불하면 회사에서 지급한 자전거를 가질 수 있다는 것에 그는 더욱더 열심히 일한다. 그런데 자전거 대금을 거의 치러갈 무렵 구웨이는 그만 자전거를 도둑맞고 만다. 허탈해진 그는 자기가 알아볼 수 있다는 표시를 해두었다는 자기 자전거를 찾아 거리를 헤맨다. 결국 그는 자기 자전거가 다른 소년 지안(리빈)이 타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로부터 구웨이와 지안, 두 소년 사이에 무지막지한 자전거 쟁탈전이 벌어지게 된다. ■ Review 소년이 이제 거의 자기 손에 들어올 찰나에 있던 자전거를 그만 잃어버리고는 막막해하던 때였다. 그때, 베이징의 거리는 자전거를 탄 사람들의 무리를 한도 끝도 없이 그야말로 마구 ‘토해내는’ 곳으로 보여진다. 확실히 베이징은 자전거의 도시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 그걸 눈으로 확인한 순간 소년이 가졌을 상실감, 박탈감은 더욱 크게 자기 마음속을 울리고 있었을 것이다. 이 도시에서 그렇게 흔한 자전거가 왜 자기에겐 없는 것일까, 라고 한탄하고 있을 바로 그때 말이다. <북경자전거>는 그런 회심(灰心)에 빠진 소년들, 자전거라는 한 사물에 대한 그들의 집착과 욕망, 그럼으로써 겪을 수밖에 없는 그들의 고투를 그린 영화다. 영화가 시작되면 우리는 한 소년부터 먼저 소개받는다. 구웨이, 더벅머리에 세련되지 못한 옷차림을 한 그는 우리의 짐작이 틀리지 않게도 시골뜨기 소년이다. 돈을 벌겠다고 베이징에 올라온 그는 퀵 서비스 배달원으로 일하게 된다. 도시의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니는 것으로 돈을 버는 그에게 자전거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그런 물건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 같은 것이다. 그런 그에게 하필이면 열심히 일을 해서 회사에서 지급한 자전거가 거의 자기 소유가 확실해질 때쯤 되어서 자전거를 도둑맞는 억울한 일을 당하고 만다. 낙심한 구웨이는 중요한 서류를 전달해야 할 일이 있는데도 그걸 그만 잊어버리고 자기 것이란 표시를 해두었다는 자전거를 찾겠다며 돌아다닌다. 그 바람에 그는 회사에서도 쫓겨나는 딱한 처지에 처하게 된다. 이쯤 되면 우리는 거의 자동적으로 비토리오 데 시카의 대표작인 <자전거 도둑>(1948)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자전거를 잃음과 동시에 일자리마저 잃은 구웨이는 분명 그 비슷한 일을 당했던 <자전거 도둑>의 안토니오와 꼭 닮은꼴이다. 그러나 <북경자전거>는 여기서 구웨이와는 환경면에서 다른, 따라서 자전거에 집착하는 동기면에서 상이한 또다른 소년을 소개함으로써 이것이 딱 절반만 데 시카의 영화에 대한 오마주임을 확실히 보여준다. 구웨이의 안타까운 일화가 어느 정도 일단락된 뒤에 다소 뒤늦게 등장하는 지안 역시 자전거를 간절히 원하는 소년이다. 하지만 구웨이와 달리 그에게 자전거란 친구들과 동질감을 느끼고 소통을 할 수 있게 하는 수단이고 또한 여자친구에게 자신의 ‘능력’을 과시할 수 있게 하는 수단이다. 멋진 자전거를 소유하게 되었을 때 지안은 가슴 가득 자신감을 불어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뿌듯한 마음은 오래 가지 못한다. 분명 벼룩시장에서 산 자기 자전거이건만(지안의 말에 따르면) 웬 어수룩하게 생긴 녀석이 나타나 그게 자기 것이라고 강변하지 않는가. 그렇게 ‘소유권 분쟁’이 생긴 뒤로 상징적이게도 지안은, 구웨이가 일자리를 잃은 것처럼, 여자친구와 점점 멀어지게 된다. 한대의 동일한 자전거를 놓고 구웨이와 지안, 두 소년을 대립하게 만들면서 영화의 드라마는 급경사를 타기 시작한다. 여기서 한번 더 데 시카의 <자전거 도둑>을 떠올려보자. 안토니오가 어느 골목에선가 자기 것처럼 보이는 자전거를 발견했을 때 그는 도둑과 그 이웃사람들에게 무력하게 쫓겨나야만 했다. 그러나 지안이 타고 있는 자전거가 자기 것임을 확신한 구웨이는 안토니오처럼 어물쩡 물러나지 않는다. 자전거를 두고 구웨이와 지안은 싸움에 싸움을 되풀이한다. 자신들의 욕망을 채워주지 않는 사회에서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그런 무지막지한 싸움뿐이었던 것일까? 결국 둘은 자전거를 ‘공유’하기로 협정을 맺지만 그것이 둘 사이에 화해를 마련해준 것이라고 보이지는 않는다(후반부의 한 장면에서 지안이 구웨이에게 악수를 청하며 손을 내밀었을 때 영화는 둘이 손을 잡는 것을 보여주지 않고 컷을 해버린다). 불완전한 소유, 혹은 어색한 공유에 타협한 두 소년이 진정으로 공유하는 것이라곤 곧 다가올 잔혹한 고통일 뿐이다. 영화는 동정없는 세상에서 상처받는 이 청춘들을 겉으로는 꽤나 무감한 듯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멀찍이 떨어진 시선하며 조금씩 늦은 반응들은 인물들에 대한 섣부른 동화(同化)를 저어하는 듯도 하지만 서서히 그러면서도 이해심을 가지면서 그들의 감정에 다가간다. 예컨대 구웨이야 그 곤란함이 먼저 소개되었으니 그를 보면 혀를 끌끌 찰 수도 있지만 나중에 등장하는 지안 같은 경우는 혹 구웨이의 자전거를 훔쳐간 도둑은 아닐까, 해서 선뜻 그 처지를 이해해주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구웨이에게 자전거를 빼앗긴 뒤 허탈해하고 있는 지안을 카메라가 오래 비추고 있을 때쯤이면 우리는 그에게 공감하게 된다. “그래, 그 자전거는 진정 네 것이기도 했구나.” 그렇게 영화는 생존의 욕구든 또는 과시의 욕구든 그것을 박탈당한 두 소년을 차별없이 똑같이 이해하고자 하는 너른 품을 가졌다. 기본적으로 <북경자전거>는 소년들의 성장통을 그린 청춘영화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대 중국사회의 비판적인 자화상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전거를 타고서 베이징의 이곳저곳을 살펴보는 <북경자전거>는, <소무>가 지아장커의 눈으로 본 펭양(곧 중국사회)의 이야기였듯, 감독 왕샤오솨이의 눈으로 본 변화하는 베이징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다. 현대 중국을 향한 감독의 당혹스런 시선은 맨 마지막 장면에서 날카롭게 빛을 발한다. 피를 흘리며 자전거를 살려낸(?) 구웨이가 도로를 걸어갈 때 그 위를 덮는 것은 자동차의 물결이다. 이건 꼭 계속해서 급속도로 변화하는 현대 중국에서 구웨이가 또다시 어떤 방법으로 생존해가야 할 것인가를 묻는 것 같아 가슴을 답답하게 죄어온다. 홍성남/ 영화평론가▶ <개봉작>북경자전거 ▶ 왕샤오솨이 감독

[피플]<신주쿠 벚꽃 판타지> 제작준비하는 이마무라 쇼헤이 외

“5년간 5편 만들겠다” <신주쿠 벚꽃 판타지> 제작준비하는 이마무라 쇼헤이 “앞으로 5년간 5편을 만들 생각이다.” 일흔넘은 감독이 했다고 믿기 어려운 말이다. <우나기>로 2번째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고도 매년 칸영화제를 긴장시키는 거장 이마무라 쇼헤이가 차기작 <신주쿠 벚꽃 판타지>의 제작준비차 부산을 방문했다. 12일 열린 기자회견에서 <신주쿠 벚꽃 판타지>를 구상한 계기나 다큐멘터리에서 판타지로 스타일이 변한 이유 등 심각한 질문에 다소 힘겹게 한두마디 답변만 하면서도 앞으로 만들 영화에 관해 자신감을 표하는 이마무라는 어쩌면 힘을 아끼고 있는 것일지도. 모든 에너지를 영화연출에 쏟기도 버거운 나이, 기자회견장이 아니라 촬영현장에 여력을 다하려는 듯하다. 2차세계대전기간 신주쿠의 유곽에 있던 여자들을 그릴 <신주쿠 벚꽃 판타지>는 벚꽃이 만개하는 내년 4월 촬영에 들어가 사계를 담은 뒤 완성될 예정. 제작비 6억엔을 예상하고 있으며 이중 4억엔을 PPP를 통해 구할 계획이다. 프로그래머에서 제작자로 PPP 찾은 영화사 대표 김영덕 PPP 라운지에서 그녀의 너털웃음을 들었을 땐 의아함과 당연한 기분이 동시에 들었다. 부천영화제의 프로그래머라는 직함 외에도, 여러 얼굴을 가진 무한육면각체의 인물이 아니던가. 게다가 부산영화제는 그녀에게 친정과도 같은 곳이니 그녀의 등장이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왜 PPP지?”하는 궁금증이 인 것도 사실. 그녀에게 새로운 이름이 생겼단다. 다음 아닌 영화 제작사 ‘flying tiger pictures’ 대표 김영덕이다. 부산 영화제 프로그램팀 시절인 99년, 통역과 가이드를 맡으면서 친해진 리빙지옌의 신작 <크라잉 우먼>에 합작투자함으로써 코모도를 찾았다. 돈받고 곡(哭)을 하는 중국 여인의 일상을 다룬 <크라잉 우먼>은 첫날부터 미라맥스 등 다양한 제작사들의 눈길을 받고 있다. 그녀는 리빙지옌의 다른 작품 <화피(化皮)>의 공동 제작도 계획 중이다. “진짜 행복은 우리 속에” <삼사라> 감독 판 나린 한 수도승의 수행과 세속적 사랑, 구도 과정을 그린 인도영화 <삼사라>의 감독 판 나린은 까만 얼굴 가득 웃음과 생기를 띠고 있는 사람이었다. 말하기도 좋아했다. 10초짜리 질문에 3분쯤 대답하는 건 기본. “사람들은 행복을 찾아 다른 어떤 곳으로 떠나고 싶어하지만 진짜 행복은 내면으로의 여행을 통해 얻어진다”는 신념을 갖고 있고, 자신의 주제는 늘 그것이라고. <삼사라>는 그의 첫 장편. 더 어린 나이에 영화를 만들었다간 “다른 사람의 생각을 내 것인양 집어넣을 것 같아” 강태공 낚시질하듯 단편이나 다큐 등을 찍으며 생각이 성숙하기를 기다렸다. 올해 34살. 해발 5천미터가 넘는 히말라야 고산지대에서 찍는 바람에 스탭들이 묵을 숙소부터 지어야 했고, 일용품은 헬기로 수송했다고. ‘삼사라’란 산스크리트어로 ‘생과 사의 순환’ 또는 단순히 ‘세상’이란 뜻이고 한다. The Visitor 오늘의 관객 15살들의 소란, 한국이나 프랑스나 말 많고 탈 많은 천방지축 15살들은 한국이나 프랑스나 마찬가지. 서울 방배동에 위치한 프랑스 학교에서 왔다는 17명의 중학생을 통솔하느라 카이티(오른쪽) 선생과 마소(왼쪽) 선생은 초긴장 상태다. 영화를 좋아하는 선생님이 작년에 이어 올해 두번째로 학생들과 함께 부산을 찾은 것. 학생들 중 유일한 한국인인 정성엽(15, 가운데)군은 선생님이 적극 추전한 “잔 모로의 영화가 정말 재밌을 지는 모르겠지만, 서울을 벗어난 것 만으로도 큰 공부가 될 것 같다”고 한마디.

[특집]아시아 여성 영화인의 힘

김지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아시아에서 여성 영화인력의 숫자는 가파른 상승세에 있다. 한국의 경우 제작자는 이미 중심세력으로 자리잡았고, 감독은 특히 올해의 활약이 눈부시다. 여타 아시아 국가들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여성 영화인들이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키며 각 분야에서 주목을 끌고 있다. 타이의 경우 여성 영화인력은 그동안 편집등과 같은 일부 분야에만 국한되어 있었지만, 듀앙카몬 림차로엔처럼 타이영화산업의 흐름을 바꾸어 놓는 여성제작자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로저 코먼 문하에서, 그리고 홍콩영화인들과의 공동작업을 통해 제작자의 역할을 배웠고, 지금은 ‘시네마시아’라는 독립영화사를 차려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그녀는 타이에서 본격적인 독립영화제작 시대를 열어나가고 있을 뿐 아니라, 제작자와 감독의 역할마저도 혼재되어 있던 영화제작 시스템을 근대화시키는데에 앞장서고 있다. 논지 니미부트르나 펜엑 라타나루앙, 옥사이드 팡 등과 같은 타이 뉴웨이브의 리더들의 등장에는 듀앙카몬의 역할이 큰 힘이 되었었다.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그녀가 제작하고 논지 니미부트르가 연출한 화제작 <잔다라>를 만날수 있다. 타이영화에 이어 필자가 조심스럽게 주목하고 있는 인도네시아영화를 보자. 인도네시아영화의 미래는 전적으로 여성영화인의 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해 인도네시아영화 흥행 1위였던 작품은 리리 리자의 <셰리나의 모험>(제 5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소개)이었다. 이 작품의 제작자는 여성인 미라 레스마나이다. 그녀는 오늘날 인도네시아영화의 기둥인 가린 누그로호의 제자이며, 동료 리리 리자, 리잘 만토바니, 난 아크나스와 함께 장편 극영화 <쿨데삭>을 공동연출한 바도 있다. <셰리나의 모험>을 성공시킨 그녀는 지금 ‘아이 시네마’라는 디지털영화 시리즈를 제작중에 있다. 인도네시아영화의 새로운 인력을 계속 발굴해내고 있는 것이다. 미라 레스마나의 동료이면서 이번에 자신의 실질적인 데뷔작인 <모래의 속삭임>을 발표한 난 아크나스는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반드시 주목해야 할 여성감독이다. 그녀의 영화경력은 다큐멘터리로 시작된다. 90년대 중반부터 스승인 가린 누그로호와 함께 ‘천개의 섬의 아이들’ 시리즈를 만들면서 그녀는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 즈음에 만든 그녀의 작품중 <어린 가수>가 제 2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소개된 바 있다. 이번에 그녀가 발표한 <모래의 속삭임>은 그녀가 오랫동안 간직해 왔던 프로젝트로, 베리안역의 크리스틴 하킴과 의기투합하면서 완성시킬수 있었다. 크리스틴 하킴 역시 주목할만한 하다. 그녀는 인도네시아 최고의 스타이면서 국제적인 지명도도 지니고 있다. 그런데, 그녀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인도네시아 영화계에서의 그녀의 역할때문이다. 90년대 중반, 경제위기로 인해 인도네시아 영화산업이 거의 몰락하였을 때 그녀는 제작자로 나서기 시작하여, 직접 뛰어 다니면서 제작비를 끌어 모아 젊은 감독들의 작업을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가린 누그로호의 걸작 <베개위의 잎새>(1998)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질수 있었다(<베개위의 잎새>는 제 4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소개되었다). 그런 크리스틴 하킴이 이번에는 난 아크나스의 데뷔작을 선택한 것이다. 그래서 <모래의 속삭임>은 여성의, 여성에 의한 영화이다. <모래의 속삭임>은 남편과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한 모녀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10대 후반의 처녀 다야는 어머니와 단둘이 살면서 늘 아버지가 자신을 데리러 오는 꿈을 꾼다. 그런 딸을 엄마인 베린다는 우려속에 감싸고 돈다. 그리고, 어느날 거짓말처럼 아버지가 나타나고 베린다는 이제 딸을 떠나보내야 할 때가 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모래의 속삭임>은 모녀간의 애증의 관계를 매우 서정적으로 풀어낸다. 그리고, 바람에 따라 쓸려다니는 모래를 그들 모녀관계의 상징처럼 담아내고 있다. 다야가 모래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는 장면은 근자에 보기 드문 아름다운 장면이다. 난 아크나스는 여성 특유의 섬세함을 살려 <모래의 속삭임>을 한편의 아름다운 시처럼 만들어 낸 것이다. 아시아에는 부드러운 여성감독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필리핀의 마리로 디아즈 아바야나 이란의 타흐미네 밀라니, 락샨 바니 에테마드처럼 사회의 편견이나 부패한 권력에 대해 과감한 발언을 하는 힘있는 여성감독도 있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된 <베이징 락>의 마블 청이나 <아이 러브 베이징>의 닝잉처럼 동시대의 사회상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여성감독도 있다. 반면에 부드러움과 강렬한 에너지를 동시에 보여주는 여성감독도 있다. 일본의 나오미 카와세가 바로 그러한 감독이다. 그녀의 이름을 널리 알린 다큐멘터리 <포옹>이나 칸영화제 황금카메라상 수상작 <수자쿠>에서 보여주었던 섬세함과 부드러움은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된 다큐멘터리 <캬카라바아>에 이르러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였다. <포옹>에서 그녀가 추적하였던 아버지의 정체(지금은 돌아가신)가 이번에는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는 야쿠자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아버지의 체취를 느끼는 방법은 아버지처럼 자신의 등에 문신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장면을 작품속에 담아내고 있다. 자신의 피학적 정서를 드러내는 장면에서, 그녀는 자신의 강렬한 에너지를 발산시킨다. 일본에는 여성감독이 드문 편이다. 때문에 나오미 카와세의 존재는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올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이러한 아시아의 여성 영화인들의 다양하고 강렬한 힘을 직접 확인할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