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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한국 찾은 일본애니메이션 거장 다카하다 감독

우리에겐 70년대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알프스 소녀 하이디〉〈빨강머리 앤〉 정도밖에 정식 소개된 작품이 없지만, 다카하다 이사오(67,사진) 감독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과 함께 스튜디오 지브리를 일군 장본인이자 일본 애니메이션계를 이끄는 거장이다. 〈반딧불의 묘〉(1988), 〈추억은 방울방울〉(1991), 〈헤이세이 너구리전쟁 폼포코〉(1994), 〈이웃의 야마다군〉(1999)에 이르는 그의 극장 장편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그가 단순히 미야자키의 파트너가 아니라 미야자키와는 또다른 세계관을 지닌 작가임을 인정할 것이다. 특히 인간의 자연개발에 맞서 둔갑술을 이용해 막다가 실패해 영원히 인간으로 변해 살고 있는 너구리들의 이야기 〈헤이세이…〉는 염세적일 만큼 비관적이면서도 낙천성을 잃지 않는 자유주의자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걸작이다. 지난주 7회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의 강연을 위해 1박2일로 방한한 그는 몹시 순하고 겸손해 보였지만, 자신의 세계관을 이야기할 땐 단호하고 힘있었다. 다카하다 감독은 자신을 “현실주의자”라 불렀다. “이상주의자는 이상이 있기 때문에 세상을 보는 눈이 비관적일 수밖에 없다. 미야자키도 언제나 괴로운 얘기만 하지 않냐.”(웃음) 1945년 종전 때 9살이었던 그는 “일본이 신의 나라라는 믿음도 그리 깊지 않았고, 어제까지 다른 이야기를 하던 학교 선생이 갑자기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는 등 어른들이 우왕좌왕하는 걸 보면서 자란 내 세대에게 가치는 상대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런 그이기에 종전 직후 고아가 된 오누이의 비극적 죽음을 담담히 그린 〈반딧불의…〉 같은 작품이 나왔을 것이다. 이 작품이 일본의 피해자의식을 부추겼다는 일부의 비판에 대해 그는 “그 당시 상황을 객관적으로 사실적으로 그렸다는 사실을 분명히하고 싶다”라면서도 “하지만 한국사람들이 그런 비판을 한다면 이해한다”고 답했다. 그는 만주에서 중국인을 노예처럼 부리게 된 일본인의 ‘일상’을 다룬 작품을 기획했지만, 천안문 사태로 무산되기도 했었다. “군사적 협력말고도 일본이 평화 공헌할 방법은 많다”며 최근 일본사회의 우경화 움직임을 비판할 땐 현실주의자이면서도 평화주의자의 시각을 엿볼 수 있었다. 다카하다 감독은 미야자키와의 차이점을 묻자 “그는 천재이고 난 천재가 아니다”라면서도 “미야자키는 재능이 많고 재미있지만 그런 식으로 될까”라며 유보조건을 달았다. “만들 때마다 서로 비판한다. 서로 다른 걸 만들려고 하니까 비판은 당연하다”라는 그는 좋은 애니메이션의 조건으로 “현실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해주는, ‘이미지 트레이닝’을 할 수 있는 작품”을 꼽았다. 다카하다는 요즘의 일본 애니가 “감동적이다, 위안을 준다는 평만 들을 뿐”이라며 비판했다. 최근 프랑스의 애니 〈키리쿠와 마녀〉를 일본극장에 거는 일에 전력을 다한 것도 “일본 작품엔 없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또 한국 애니에 대한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짧은 일정에서도 〈마리 이야기〉의 이성강 감독과 3시간 가까이 만난 이 노감독은 흥행이 안 되었다는 주변의 이야기에 “애니메이션사에 남을 작품이니 그런 데 개의치 말고 작품을 만들어주길” 당부했다고 한다. 최근 신작을 만들고 있다고 전했으나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다. 글·사진 김영희 기자 dora@hani.co.kr

가장 부각되는 소재,형사물 <와일드 카드><나크>

최근 텔레비전 드라마, 연극, 영화 등 다방면에서 가장 뜨거운 소재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 바로 ‘형사’들이다. 형사물들이 이렇게 다시 뜨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과거와는 달리 그들의 활약상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사실적인 묘사가 정착되었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그런 흐름을 잘 보여주는 우리나라와 할리우드 영화 두 편의 디브이디가 최근에 출시되었다. 첫번째는, 영화 <약속>의 김유진 감독과 이만희 작가가 다시 한 팀을 이뤄 2년여에 걸친 강력반 취재를 바탕으로 완성했다는 ‘리얼형사활극’ <와일드 카드>다. ‘퍽치기’ 일당을 뒤쫓는 강력 3반 형사들의 활약상을 그린 영화로, 시종일관 발로 뛰고 맨손으로 싸우지만 위급한 상황에는 긴장을 숨기지 못하는 실제 형사들의 거친 일상을 그대로 화면 속에 보여주고 있어 인상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영화로서의 <와일드 카드>뿐만 아니라, 이 타이틀에는 다른 타이틀에서는 보기 어려웠던 몇 가지 특별한 요소가 갖춰져 있다. 우선적으로 눈에 띄는 것은 메뉴화면의 독특함이다. 가독성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글자들을 회전시켜 만들어낸 세련된 디자인은, 타이틀의 첫인상을 강렬하게 만들어주는 것. 한편 부록에서는 ‘비디오 코멘터리’라고 이름 붙여진 새로운 형태의 음성해설이 등장한다. 4명의 주요배우들이 모여 앉아 본편 영화를 감상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주 화면으로, 그리고 영화는 작은 화면으로 나오기 때문에, 평소 궁금해하던 음성해설 녹음 과정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 한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각자가 맡은 역할 부분 외에는 활발한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어색함이 자주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이 밖의 특별한 부록으로는 ‘연장’, ‘짭새’ 등 형사들의 세계에서 사용되는 은어들을 풀이해주는 ‘형사들의 전문용어’ 코너가 있다. 국내에서 개봉할 당시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은 감독과 배우들을 대신해 제작자인 탐 크루즈의 이름이 부각된 형사영화 <나크>도 새로운 형사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영화 속에서 만나보는 미국 마약반 소속 형사들의 실상이 기존 할리우드 형사 영화들에서 묘사된 이미지들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특히 상부, 피해자, 범인은 물론 자신의 가족들까지 포함된 주변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형사들에 대한 탁월한 심리묘사는 압권이다. 부록에는 영화의 순탄치 않았던 제작 과정과, 이 영화의 전범이 되었던 영화 <프렌치 커넥션>에 대한 경외심, 그리고 특별히 심혈을 기울인 장면들에 대한 설명들이 가득 들어 있다. 또한 감독이 편집자와 진행하는 음성해설을 통해, 각 장면에서의 기본 의도를 포함한 영화 촬영과정에서의 세부적인 정보들도 충실히 제공해주고 있어 영화를 좀더 재미있게 볼 수 있도록 해준다. 김소연/ DVD 칼럼니스트 <와일드 카드> SE ,(2003) 감독 김유진 화면 아나몰픽 1.85:1 오디오 돌비디지털 2.0, 5.1 & DTS 지역 코드 3 출시사 시네마서비스 <나크>, (2002) 감독 조 카나한 화면 아나몰픽 1.85:1 오디오 돌비디지털 5.1 지역 코드 3 출시사 아이비전 엔터테인먼트 ▶▶▶ [구매하기] ▶▶▶ [구매하기]

일본 영화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 인터뷰

세계적인 영화평론가이자, 재작년까지 도쿄대 총장을 지낸 하스미 시게히코(67)가 광주국제영화제의 게스트로 한국에 왔다. 이 영화제가 마련한 존 포드 특별전의 부대행사로 열린 세미나에 하스미가 발표자로 참석한 다음날인 지난 25일 광주에서 그를 만났다. 불문학을 전공해 프랑스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일찌감치 일본에 푸코와 들뢰즈를 소개한 선구적 지식인인 하스미는, 도쿄대 불문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70년대 도쿄대와 릿쿄대에서 영화 강의도 시작했다. <쉘 위 댄스>의 수오 마사유키, <링>의 나카다 히데오, <큐어>의 구로사와 기요시, <유레카>의 아오야마 신지 감독 등이 그의 강의를 들은 제자들이다. 영화뿐 아니라 문학비평도 꾸준히 쓰고, 2001년 도쿄대 총장 시절 도쿄대 졸업식장에 당시 서울대 이기준 총장을 초청해 함께 일본 역사왜곡을 비판하는 등 정치적 발언도 삼가지 않는 하스미는 일본을 대표하는 지식인 중 한명이다. 하스미는 올해 일본 감독 오즈 야스지로 탄생 100주년을 맞아, 자신의 저서 <감독 오즈 야스지로>(한나래출판사에서 번역 출간)에 80페이지 정도를 새로 써 증보판을 내고, 도쿄대가 주최하는 기념행사의 기획위원장을 맡는 등 오즈로 바쁜 해가 될 것이라는 근황을 전했다. -한국의 영화제에 처음 오면서, 존 포드 감독 세미나 참석차 왔다. 존 포드를 그렇게 중시하는 까닭은? =우선 존 포드는 무성영화의 끝자락에 걸쳐 있는 감독이다. 무성영화는 언어가 안 되니까 시각적 소스, 이미지로 전달한다. 존 포드는 시각으로 전달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나다. 일본의 구로사와 아키라만 해도 무성영화의 경험이 없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다르다. 두번째로 존 포드를 옛날사람으로 취급하려고들 한다. 모차르트는 그렇게 취급하지 않으면서 죽은 지 30년밖에 되지 않는 존 포드를 옛날 사람 취급하는 경향과 싸우고 싶다. 그는 20세기의 모차르트다. 일본 고이즈미 총리가 오페라를 좋아한다며 독일에서 5시간짜리 바그너의 오페라를 봤다. 그런데 그는 미조구치 겐지의 영화를 세편밖에 안 봤다고 했다.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 시간이면 미조구치 영화 3편, 임권택 영화 2편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이 20세기 예술을 무시하는데 그럴 게 아니다. -광주영화제의 인상은? =세계 영화계의 상황을 볼 수 있는, 영화 애호가들에게는 매우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모리스 피알라나, 조앙 세자르 몬테이로의 작품을 영화제에서 즐길 수 있다는 건 대단한 혜택이다. 대단히 좋은 프로그램의 영화제다. 초청해준 데 대해, 또 일본 감독에 대해서가 아니라 존 포드라는 세계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작가를 주제로 불러준 데 대해 매우 감사한다. 오는 8월31일은 존 포드가 작고한 지 정확히 30년 되는 날이다. 그 날 막을 내리는 이번 영화제는 정말 의미가 깊다. 영화 하면 곧바로 관객의 수로, 양으로 평가하는데 영화제만큼은 질을 중시해야 한다. 질에 충실하다면 관객이 적더라도 그 자체만으로 성공 아닌가. 이 영화제의 영화를 보고 영향을 받아 그 소수 가운데서 10년 뒤에 작가가 나올 거다. 그게 얼마나 큰 수확인가. -영화평론이 영화라는 시각매체의 풍성함을 단순화시키는 게 아니라, 그걸 열어주는 글쓰기여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런데 신문에도 영화평을 많이 써왔다. 그 지론을 살려서 신문에 짧은 글쓰기를 하는 게 쉽지 않을 것 같다. =두가지 글쓰기를 한다. 신문에 쓸 때는 영화의 좋은 면을 부각시켜서 독자들이 바로 극장으로 올 수 있도록 하는 데 주안점을 둔다. 긴 글을 쓸 때는 영화의 풍성함을 손상하지 않고, 더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도록 쓴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를 관심 있게 봐 온 것으로 안다. =임권택 영화는 순수 예술은 분명히 아니고, 넓은 의미에서 할리우드 스타일인데, 그 안에서 가치를 살리고 자기 의미를 드러낸다. 또 제재 자체는 센티멘탈하다. 그런데 거기서 그냥 흘러버리지 않고 절제하는 연출 기법이 빼어나다. 존 포드와 닮았다고 할까. 지금 그런 식으로 영화 하는 감독이 없다. -2년 전 <씨네21>과 인터뷰했을 때, “<쉬리>는 추상적이고 <거짓말>은 구체적”이라고 말한 표현이 인상깊었다. 임권택 외에 주목하는 한국 감독이나 영화를 꼽는다면? =나는 국적을 따져가면서 영화를 보지 않는다. 그런데 국가의 상황에 따라서 뛰어난 작가가 나오는 경우가 있다. 배창호 감독도 좋았지만, 70년대에 이장호 감독의 영화가 매우 좋았다. 10년 뒤에는 대단한 작가가 될 것으로 봤는데 지금 영화를 안 하고 있다. 근래에는 홍상수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과 <강원도의 힘>이 탁월한 영화였다. 그의 다음 영화들은 아직 못 봤고. 정재은 감독의 <고양이를 부탁해>도 아주 마음에 들었다. 특히 뛰어난 게 대상들을 생생하게 포착하고 있었다. 16㎜ 영화 중에서 가끔씩 대상을 빼어나게 포착하는 게 나오는데, 이 영화에 그런 느낌이 있다. <거짓말>은 남녀관계라는 소재를 아주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었다. -일본의 젊은 감독 중에서 기대주를 꼽아본다면? =압도적으로 구로사와 기요시다. 아오야마 신지도 좋은 영화가 몇 편 있지만. 가와세 나오미도 완전히 승복하긴 어렵지만 주목하고 있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학생 때 16㎜로 찍던 정신과 기법이랄까, 그게 35㎜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개성적이고 자기 세계를 꾸준히 판다. 매우 비타협적이다. 이제서 관객들이 그의 영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그는 심리상태를 이야기를 통해서가 아니라 화면으로 먼저 제시해버린다. 그렇게 묘사해가는 게 아주 뛰어나다. -대만의 허우샤오시엔 감독이, 오즈 야스지로에 대한 ‘오마주’로 만드는 신작에 출연했다고 하는데. =허우샤오시엔이 <밀레니엄 맘보> 찍을 때 온천장 손님으로 출연해달라고 해서 거절했다. 그래서 이번엔 출연했는데 헌책방 손님으로 30~35초 정도 나온다. 대사는 “이것 주십시오, 감사합니다”가 다고. 편집 때 잘릴지도 모르겠다. 영화제목은 <커피 시광(時光)>인데, ‘시광’이라는 말이 따뜻한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다. 커피를 마시면서 따뜻한 시간을 가진다는 뜻이다. 완전히 픽션이고, 오즈가 나오지도 않는다. 오즈 영화의 분위기나 정신 같은 걸 담는 거다. 촬영 때 헌책방이나 다방에 카메라를 숨겨놓고 찍어서, 일반 손님들이 영화 찍는 줄 모르고 들어와 커피마시고 나간다. 바로 옆에 주연인 아사노 타(#다#)나노부가 앉아 있고. 그렇게 자연스런 스타일로 찍고 있다. -허우샤오시엔이나 에드워드 양과 개인적으로 친한 것으로 알고 있다. 허우샤오시엔은 <밀레니엄 맘보>에서 스타일이 크게 바뀌었는데 어떻게 보나? =그 전 영화 <해상화>는 연출, 카메라 움직임, 내용, 모든 게 정말 흠잡을 데가 없는 영화였다. <밀레니엄 맘보> 보면서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는가 놀랐다. 자기가 갖고 있던 예술세계를 일거에 버리고. 큰 모험인데 나는 그 모험을 지지하고 싶다. <커피 시광>은 오즈에 대한 오마주여서 대단히 차분하기는 하지만 그 양반 행보로 봐서 어쩔지 모르겠다. -베니스, 로카르노 등 국제영화제의 심사위원을 맡았는데, 서구의 국제영화제가 아시아 영화를 대하는 태도에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이 사라지지 않는 건 왜라고 보는지? =동양 전체의 심각한 문제라고 볼 수 있다. 현대의 한국, 현대의 일본을 밀도있게 다룬 영화들은 절대 수상 못한다. 임권택 감독도 결국 옛날얘기로 상을 받았다. 문제는 심사위원들에게 있다. 그 질이 형편없다. 텔레비전을 의식해서 여배우들을 심사위원으로 앉히는 것도 말이 되는가. 유럽영화제는 심사위원의 질을 높이지 않으면 대단히 위험해질 수 있다. -도쿄대 총장 할 때 서울대발전연구회 회원으로 몇차례 한국에 오기도 했다. 그때 느낀 한국 교육의 문제점 같은 게 있는지? =지금은 서울대 총장이 바뀌어서 어떻게 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한번은 회의할 때 참석자들이 ‘한국 사람들은 독창성이 없다’고 말했을 때 반발심이 생기더라. 일본에서도 회의하면 ‘일본 사람들 독창성 없다’는 말 많이 한다. 그때 그랬다. 임권택 감독이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사실을 들어, 독창성 없는 나라의 감독이 왜 상을 받았겠냐고. 지금 상황이 나쁘니까 바꾸는 게 아니다. 지금 상황에 더 나아지도록 하는 것일 뿐이다. 대학이 마비됐다, 이렇게 말하면 좋은 대안이 안 나온다. 지금 잘 하는데 좀더 나은 쪽으로 가자, 이래야 한다. -영화비평의 임무가 뭐라고 생각하는지? =현재 만들어지고 있는 영화의 어떤 면을 옹호, 지지할 것이냐는 문제다. 미래가 있는 영화를 지지해야 한다. 이전 영화보다 좋아졌다, 이런 게 아니라 언젠가 폭발할 수 있는 여백을 가진 영화가 있다. 그게 미래가 있는 영화다. 영화는 달리 비유하자면 시한폭탄이다. 나루세 미키오 영화에 대해 30년대 이전의 평들을 보면 나루세 미키오가 언젠가 터질 거라는 예감을 전혀 못하고 있다. 그래선 안 된다. <고양이를 부탁해> <거짓말> 이런 영화는 미래가 있는 영화다. 또 영화비평이 좋다고 했다가, 나쁘다고 했다가 이런 식으로 왔다갔다 하면 안 된다. 미국의 <뉴욕타임스> 같은 신문도 존 포드 당시에 그의 영화가 형편없다고 했다. 지금 쓴 평이 30~40년 지나도 일정한 가치와 설득력이 있는, 그런 글을 지향해야 한다. 광주/임범 기자 isman@hani.co.kr,사진 광주영화제 제공

제56회 로카르노영화제 결산 [2]

인간도 세상도 영화제도… 선명한 것은 없구나 김기덕 감독과 동행한 정한석 기자의 로카르노 다이어리 현지 팬들과 함께 포즈를 취한 김기덕(사진 맨 왼쪽) 감독. 로카르노=글·사진 정한석 mapping@hani.co.kr 나쁜 남자 혹은 선승과 함께 8월12일, 로카르노의 여행길에 과거의 나쁜 남자, 혹은 지금의 선승을 만나다. 10여 시간을 날아가 도착한 스위스 취리히 공항에서 환승 비행편을 기다리던 중 김기덕 감독은 대뜸 영화제의 상 얘기를 꺼낸다. “영화상영만 딱 하고 바로 오면 좋죠. 하지만 사정상 그렇게 할 수는 없으니까 폐막식까지 있는 거예요. 사실, 나는 내가 영화제에서 상 못 탈 거라는 걸 알아요. 왜냐하면 영화제 심사위원들이 전문적으로 영화를 보는 비평가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취향이 다 다른 사람들이 주는 거기 때문에….” 이번 영화제 참석에 대한 사연에서부터, 지금의 사회분위기, 영화철학, 자신을 해석하는 한국 영화비평 담론에 대한 재평가, 그리고 현재 쓰고 있는 시나리오 중 하나인 <빈집>(가제)에 대한 단초에 이르기까지 인터뷰 아닌 인터뷰를 하며 그렇게 두 시간을 훌쩍 보내다. 드디어, 한밤중에 도착한 로카르노, 한적한 시골 마을처럼 보인다. 27년 만에 찾아온 폭염으로 기온은 41도까지 달아올랐지만, 도시의 중심부를 끼고 도는 커다란 호수가 그저 아름답기만 하다. <카사노바> 순환 혹은 정지 8월13일,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기자시사가 2시 그루잘 극장에서 열리다. 올해 로카르노에 출품된 한국영화는 총 3편. 경쟁작에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그리고 ‘오늘의 시네아스트’ 부문에 박경희 감독의 <미소>(박경희 감독의 <미소>는 이미 모든 공식일정이 끝난 뒤였다)와 김진아 감독의 <그 집 앞>이 올라 있다. 그중에서도 김기덕 감독의 신작은 이 올해의 대상 예상작으로 고바야시 마사히로의 <헤어드레서>와 함께 손꼽을 정도로 이미 기대를 모았다. 미리부터 진을 치고 있다가 극장의 문이 열리자 쏟아져 들어가는 기자들의 표정에서도 같은 기대를 엿볼 수가 있다. 영화의 타이틀을 뒤로 하고, 사계절을 돌아 다시 봄까지 인간(승려)의 한 인생을 계절에 비유하여 만들어낸 이 영화는 김기덕의 영화세계를 다시 질문하게 한다. 결론적으로, 이번 영화는 ‘고립’의 장소에서, 다시 제자리로 ‘귀환’하고야 마는 인물들을 통해 김기덕의 순환 논리를 여전히 유지하지만, 전에 없이 ‘한국 문화’의 정서를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남들은 김기덕이 위선을 부린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모자를 벗은 기분으로 만든 영화”라고 김기덕 감독은 표현했다. 시사회가 끝난 저녁 ‘한국영화의 밤’ 행사장에는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그 집 앞>의 김진아 감독과 이 영화의 공동 제작자로서 이곳을 찾은 UC어바인의 김경현 교수 등이 자리했고, 이렌느 비냘디 로카르노영화제 집행위원장 외에도 세계 각국의 영화제 집행위원장들이 모여들었다. 애초 끈질기게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초청하고자 노력하다 결국 로카르노에 넘겨주게 된 산 세바스찬 영화제 집행위원장 미켈 올라시레구이는 “캐릭터와 이야기는 변했지만 근본적으로는 전작과 동일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라며, 질적인 단절보다는 양상의 변화로서 이번 영화를 평가했다. 그렇게 한국영화에 대한 호응과 갈채를 뒤로 하고 피아자 그란데로 향한다. 로카르노영화제의 상징이자, 자랑인 피아자 그란데의 야외상영. 유럽에서 가장 크다는 스크린, 거기에서도 가장 맨 앞에 앉아 올해의 로카르노가 오마주를 바친 작품 중 하나인 페데리코 펠리니의 <카사노바>를 본다. 텔레비전 모니터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판타지의 장중함이 눈앞에서 펼쳐진다. 그 화려한 매혹의 강도로 본다면 그의 영화 <사티리콘>과도 비교가 가능할 정도이다. 젊은 날의 카사노바가 수많은 여인들을 거치며 끝내는 노쇠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니노로타의 음악과 펠리니가 자신의 영화 에 출연하여 “나의 알리바이”라고 말했던 치네치타 스튜디오가 모든 환상을 뒷받침한다. 그러다가 영화의 마지막에 난데없이 삽입되는 늙은 카사노바의 얼굴 클로즈업. 쭈글쭈글한 주름과 반쯤 뒤집혀 벌건 살을 들어내는 눈꺼풀, 한 노인의 초라한 얼굴을 갑작스럽게 마주하는 심정이란. 이렇게 갑작스럽고 강렬한 클로즈업은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장치 오렌지> 오프닝 장면이나 루이스 브뉘엘의 <안달루시아의 개>에서 눈알을 베어내는 정도가 아니라면 줄 수 없는 충격이다. 어떤 영화들은 짧은 한숏으로 그 영화의 모든 의미를 정지해 설명하고 버텨내는 때가 있다. <카사노바>가 그렇다. 대상작 <카모스 파니>는 어떤 영화? 파키스탄 여성 형실 고발 황금표범상을 받아든 <카모스파니>의 감독 사비아 수마르 제56회 로카르노국제영화제 황금표범상을 받은 <카모스 파니>는 파키스탄 여성감독 사비아 수마르의 첫 번째 극영화이다. 사비아 수마르는 <누가 처음 돌을 옮길 것인가?> <왜냐고 묻지마라> 등 두편의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시작하였으며, 파키스탄 여성에 대한 인권의식을 영화의 전면에 세워왔다. <카모스 파니>는 1970년대 말 군사정권 시기하에 한 청년이 이슬람 종교에 빠지면서 자신과 다른 종교를 가진 어머니를 박해하여 그녀를 자살로까지 몰고가는 비극적인 내용이다. “영화생산이 전무하고, 여성에 대한 차별이 심한 파키스탄에서 여성감독이 이슬람 근본주의에 의해 희생된 여성들의 운명을 유연하게 재조명한 고발정신”이 돋보였다는 것이 심사평이다. <카모스 파니>의 수상은 현재 이렌느 비냘디 체제하의 로카르노영화제가 추구하는 정치적인 지향과 어울렸기 때문에 나온 결과라는 평이 지배적이다. 사비아 수마르는 이 영화에 대해 “<카모스 파니>는 저항할 수 없는 바로 그 역사와 정치의 현재에 관한 이야기이며, 격동하는 변화와 삶의 끝없는 길을 내포한 파키스탄”에 대한 것이라고 말했다. ▶ 제56회 로카르노영화제 결산 [1] ▶ 제56회 로카르노영화제 결산 [2] ▶ 제56회 로카르노영화제 결산 [3]

제56회 로카르노영화제 결산 [1]

규모의 팽창보다 균형있는 수상을 로카르노만의 특색 잃고 사회성 짙은 작품에 편중, 대상작은 논란 여지 남겨 로카르노=글 임안자/ 해외특별기고가·사진 정한석 1920년대 유럽 예술인들은 로카르노를 유토피아의 도시로 불렀다. 그리고 1947년 이곳에 영화제가 들어서면서부터 유토피아의 꿈은 영화예술과 조우하고는 오늘의 이름난 국제적 영화제로 성장해왔다. 이런 오랜 문화의 전통을 배경으로 한 제56회 로카르노영화제가 8월6일 저녁 대형 야외상영장인 피아차 그란데에서 빈센트 미넬리 감독의 1953년작 뮤지컬코미디 <더 밴드 웨건>(The Band Wagon)으로 차분히 막을 올렸다. 이날은 38도를 오르내리는 폭염에도 불구하고 7500석의 광장이 관객으로 꽉 찼고, 이곳에서 열흘 동안 매일밤 새벽 두세시까지 영화축제가 계속됐다. 56회 행사의 특징을 말하자면 전에 비해 눈에 띄게 커진 프로그램과 혼란스럽도록 여러 갈래로 갈라진 부문이었다. 듣자니 2003년 영화제에 참가신청을 요구한 영화는 모두 1440편. 그 가운데서 뽑힌 장·단편 440편이 15개 부문을 통해 7개 상영관에서 상영됐는데, 440편은 20∼30년 전만 해도 상상키 어려운 많은 숫자이고 지난해에 비해서도 100편이 더 많다. 지난해에 비해 관객 수가 20% 늘어나기는 했지만, 무엇보다 상영관이 모자라 숱한 영화들이 한번 상영으로 그쳐 아쉬움을 낳았다. 브에나 비스타 스위스 대표 크로티는 8월13일치의 <바즐러 자이퉁>과의 인터뷰에서 “로카르노영화제는 소규모 영화제 중에서 큰 영화제로 남는 게 큰 영화제 중의 작은 영화제가 되는 것보다 낫다고” 충고를 보냈다. 급성장의 후유증 그럼 급성장의 배경은 무엇인가? 여기에선 두개의 설명이 가능하다고 본다. 하나는 로카르노영화제가 2002년부터 A급 영화제로 급상했다는 점과 또 하나는 현 집행위원장 이렌 비냘디의 야심과도 관계되는 문제인데, 한마디로 기존의 조그만 영화제의 틀에서 벗어날려는 집행위원장의 영화제 정책이 낳은 결과라고 말할 수 있겠다. 2001년, 말썽 많던 마르코 뮬러가 물러나고 같은 이탈리아 출신인 비냘디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을 때 스위스 영화계는 두손 들어 환영하면서 ‘로마의 여사자’라는 애칭을 달아주었다.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한 새 집행위원장은 조직위와의 고질적인 불협화음을 협조적 분위기로 바꿔놓는 데 성공했고 그의 특유의 열린 대화 스타일 덕분에 대중매체와도 쉽게 가까워졌다. 그 결과 짧은 시간에 비냘디의 인기는 높게 치솟았고 이 여인이 오르는 무대마다 청중은 뜨거운 박수로 환영했다. 그런데 올해에는 좀 달랐다. 먼저 박수가 뜸해졌고 그걸 반영이라도 하듯 비냘디의 얼굴이 시종 그리 밝지 않았다. 혹시 자신이 불러일으킨 급성장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건 아닌지. 로카르노영화제가 과연 A급으로 탈바꿈할 수 있느냐에 대한 논쟁은 비냘디 부임 훨씬 이전부터 진행됐었다. 그러나 약한 영화산업과 영화시장의 한계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던 것이고, 그래서 신인 감독의 초기 작품에 초점을 둔 중형 영화제를 택하여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영화제로 발전했다. 하지만 비냘디의 영화제 철학은 실용주의보다는 팽창주의쪽으로 기우는 듯하며 그 결과로 이젠 칸, 베를린, 베니스, 산 세바스찬 같은 유럽의 덩치 큰 영화제와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하고 특히 불과 2주를 사이에 두고 치러지는 같은 언어권의 베니스와는 비냘디 스스로의 말마따나 피나는 경쟁을 피할 수 없게 됐다. 2002년부터 대상영화의 수상금을 평소의 곱절인 9만프랑으로 올린 것도 베니스를 의식해서 결정된 것이다. 아무튼 A급 영화제의 위상을 지키기 위해선 좋든 싫든 할리우드를 피할 수 없는데, 문제는 로카르노영화제가 고질적으로 예산부족에 시달려왔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국제적 경쟁력에서 떨어질 게 뻔하다. 올해 책정된 예산은 900만스위스프랑을 조금 넘은 것이었는데, 그나마도 정부나 시의 지원은 반절도 못돼 대부분을 후원금으로 충당해야 할 지경이다. 그래서 그런지 올해 로카르노까지 온 할리우드 제작은 영국 감독 나이젤 콜의 영화 <칼랜더 걸즈>뿐이었고, 그렇다고 호기심을 일으킬 만한 유럽의 이름난 감독의 영화가 들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산 세바스찬 영화제와 ‘싸워서’ 이긴 영화는 올 경쟁부문에 올랐던 김기덕 감독의 새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었고, 그것도 실은 감독이 로카르노를 선택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런저런 2003년 행사는 A급 영화제로서의 가능성과 한계를 점쳐보고 특히 집행위원장의 영화선정 방향과 성향을 좀더 정확히 알아볼 수 있는 기회였다. 올해의 프로그램을 바탕으로 선정 방향을 짚어본다면, 한마디로 사회성 짙은 영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예를 들면 종교적 대립과 분열, 전쟁과 그 후유증, 소수민족과 여성에 대한 차별대우, 청소년 문제를 사회·정치적, 또는 가족관계의 차원에서 다룬 영화들이 부문에 상관없이 올해 많았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고, 모두 인간의 존엄과 인권의 존중을 설파하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공통점을 보였다. 특히 경쟁영화 부문은 동남아시아, 동유럽 그리고 중동지역의 영화가 다수였는데, 그게 영화제 사이의 경쟁이나 돈문제 때문만은 아닌 것 같고 집행위원장의 영화제 철학으로 보는 게 더 정확한 듯하다. 비냘디는 기자회견을 통해, “올해 새로운 경향은 없다. 영화제의 각 부문은 경쟁영화 성격과 공통점을 갖고 있다. 즉 유럽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의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했던 영화감독들의 영화에 관심을 두었고 사회적, 정치적으로 위기를 맞고 있는 인간문제를 주요시했다”고 영화 선정의 기본 방침을 밝힌 바 있다. 다시 말해, 저개발 지역 감독들과의 연대의식을 강조한 발언이었는데 그런 차원에서 켄 로치 감독에게 명예표범상이 주어졌고 획기적인 119편의 ‘재즈와 영화’의 회고전도 따지고보면 미국 백인사회의 인종차별에도 불구하고 재즈 문화의 황금기를 이룬 흑인 음악가들에 대한 헌정식이었다. 더불어 로카르노영화제는 지난해부터 ‘인권’부문을 새로 만들어 인권에 관한 영화상영과 심포지엄을 주선하고 있으며 다른 영화제서보다 여성감독의 영화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크다. 연대의식도 좋지만 한 기자는 로카르노영화제가 유엔총회를 닮아간다고 비아냥거렸지만 비냘디의 연대의식에 누가 반기를 들겠는가. 다만 영화에 대한 판단의 기준이 평형을 잃을까 싶고 그런 미심쩍음은 올해의 수상작 선정과정에서 현실로 드러났다. 올해 대상을 받은 파키스탄의 여성감독 사비아 스마르의 영화 <말없는 (우)물> (Silent Water)의 수상 결과에 대해 스위스 국영 텔레비전의 기자나 주요 일간지인 <취리히 차이퉁> 기자는 심사위원들이 “정치적 판단을 내렸다”고 평했다. 심사가 제대로 됐더라면 김기덕 감독에게 대상이 주어졌을 것이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다. 기자회견장에서 만난 카를로비 바리 영화제 집행위원장 자오라로바는 “김 감독 영화는 이제 클래식 수준에 올랐다”고 극찬하면서 “대상을 받고도 남는다”고 했다. 또 김 감독과 인터뷰를 한 23명의 국제 매체기자들이 모두 통역을 맡은 내 앞에서 대상을 받을 것이라고 엄지손가락을 들었다. 올해 경쟁영화 가운데 가장 완성도가 높은 독창적인 영화로 꼽혔던 김 감독의 영화가 대상을 놓친 건 무척 아쉽지만 다음 영화를 기대하면서 스위스 불어권의 일간지 <트리뷴 드 제네브>에 실린 8월15일치의 두 기사 가운데 에마뉘엘 쿠에노 기자의 한 구절을 인용하겠다. “최근 로카르노영화제에서 행해지는 우수작을 곡해하는 잘못된 심사 경향을 불신해야 한다. 지난해에 구스 반 산트의 영화에 대한 오판이 있었음에도 이번 김기덕의 새 작품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서 또 실수를 한 건 이해하기 어렵다. 이 영화야말로 경쟁부문에서 제일 우수했을 뿐만 아니라 2003년에서 본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였는데 말이다.” ▶ 제56회 로카르노영화제 결산 [1] ▶ 제56회 로카르노영화제 결산 [2] ▶ 제56회 로카르노영화제 결산 [3]

김소영-토마스 엘새서대담 [1]

" 대중영화는 어느 비평가보다 더 지적이다 ” 김소영 교수, 영화학계의 살아있는 족보 토마스 엘새서를 만나다 8월27일 폐막한 제4회 세네프영화제를 방문한 토마스 엘새서(60) 교수는, “당신이 학자로서 걸어온 길을 들려주십시오”라고 청하기 전에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할 인물 중 하나다. 우리에게 돌아올 대답은, 어쩌면 특정 학문의 발전사를 개괄하는 반 시간 넘는 강의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터뷰어로 테이블에 마주앉은 김소영 영상원 교수가 즉석에서 붙여준 “살아 있는 영화학계 족보”라는 별명처럼, 토마스 엘새서는 1960, 70년대에 걸쳐 동세대 시네필들- 영화학과 신입생들의 필독서 목록에 줄줄이 이름이 발견되는- 과 더불어 영화학이라는 신생 학문의 터를 닦고 영토를 확장했으며 이후 5세대에 이르는 제자를 길러낸 거인이다. 독일에서 태어나 영국으로 이주해 교육받았고 프랑스와 미국에서 체류한 바 있는 ‘코스모폴리탄’ 엘새서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학의 영화/텔레비전 학과장으로서 왕성한 교육, 저술 활동을 펼치고 있다. 70년대 중반 더글러스 서크의 작품을 중심으로 할리우드 멜로드라마의 효과를 탁월하게 분석한 교과서적 에세이 <음향과 분노의 이야기>로 첫 명성을 얻은 엘새서가 권위를 자랑하는 분야로는 뉴 저먼 시네마, 멜로드라마, 초기 영화, 디지털 매체의 영화사적 의의 등을 꼽을 수 있다. 영화예술, 영화매체에 대한 30년이 넘는 매혹과 탐구의 소산은 그가 생산한 250여편의 방대한 논문에 담겨 전세계의 도서관에서 부지런한 영화학도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가장 열정적인 영화의 관객/독자를 대신해 만남을 청한 김소영 교수와 토마스 엘새서교수의 대화는 긴 호흡으로 흘러갔다. 수면 부족과 피로에 대한 불만을 호소하던 엘새서교수는 언제 그랬냐 싶게 끈질기고 상세한 설명에 몰두했다. 역시 성실한 노학자의 오랜 습관은 여독보다 강했다. 토마스 엘새서(Tomas Elsaesser) |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학 영화 · 텔레비전학과장 주요 저서 및 편서 <파스빈더의 독일>(1996) · <디지털 시대의 영화>(1998) · (1999) · <바이마르 영화와 이후>(2000) · <현대 미국 영화 연구>(2001) 등이 있음 김소영__ 아무래도 당신이 거쳐온 기나긴 지적 여정을 듣는 것으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토마스 엘새서__ 나는 영국 서섹스대학에서 비교문학을 공부했고 19세기 프랑스와 영국의 역사서술을 테마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적 여정이랄 수는 없지만 대학 시절 지금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이 된 타보 음베키와 연적이 된 경력도 있다. (웃음) 1966년 교내 필름 클럽을 창설하고 개봉작 정보와 <카이에 뒤 시네마>의 영향이 엿보이는 긴 기사가 같이 실린 <브라이튼 필름 리뷰>라는 잡지도 펴냈다. 내가 속한 그룹은 작가주의적 관점에서 할리우드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60, 70년대는 장 뤽 고다르로 대표되는 정치적 영화의 시대였고 영화에 관한 지적 호기심이 폭발한 시대였다. 프랑스 역사학에 관한 논문을 위해 파리에서 보낸 1년은 바로 1967년에서 1968년 5월에 이르는 격동기였다. 격동기에 영화를 만나다 김소영__ 절묘한 타이밍, 절묘한 장소다. 토마스 엘새서__ 말하자면 나는 혁명의 기운이 넘실대는 1968년에, 역사가 칼라일과 미슐레가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저술을 남긴 또 다른 혁명기 1848년의 역사서술을 연구했던 셈이다! 아침이면 국립 비디오테크로 직행해 프랑스 혁명사 서술에 관한 자료를 뒤졌고 6시에 비디오테크가 문을 닫으면 당장 지하철을 타고 끼니도 거른 채 시네마테크로 향했고 거기서 의 배우 장 피에르 레오를 통해 앙리 랑글루아, 프랑수아 트뤼포, 장 뤽 고다르와 교분을 가졌다. 당시 그들은 미국영화에 대한 흥미를 잃고 정치화되는 국면에 있었지만, 나는 60년대 초 그들이 쓴 글을 통해 샘 풀러, 니콜라스 레이, 빈센트 미넬리, 하워드 혹스, 앨프리드 히치콕 같은 감독에 관심을 가졌고 영국으로 돌아가 연구를 계속했다. 1971년에는 <네 멋대로 해라>가 헌정된 B급영화 프로덕션의 이름을 딴 <모노그램>이라는 잡지를 더 광범위한 독자를 겨냥해 런던에서 발행했다. 이 잡지는 아무도 포스트 모더니즘을 입에 올리지 않던 시대에 이미 포스트모던한 성격을 갖추고 있었는데 <카이에 뒤 시네마>를 인용한 영국의 <무비>라는 잡지를 재차 인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웃음) 우리는 <스크린>이 알튀세르나 라캉의 이론에 경도되고 영화의 정치적 해석에 몰두하던 그 즈음에 의식적으로 존 포드와 하워드 혹스의 영화에 매진했다. 김소영__ 그러한 태도는 영화를 연구하는 공동체 내에서 긴장을 자아냈을 법하다. 토마스 엘새서__ 실제로 대립이 있었다. 영화학자 폴 윌먼은 내게 비판적이었다. 내 입장에 우호적이었던 인물로는 당시 영국영화연구소(BFI) 교육 부서에 있으면서 영화잡지에 대한 후원도 맡았던 영화학자 피터 월런이 있는데 그도 역시 분열적인 인간이었다. 월런이 얼마나 분열적이냐면 최근 출간된 책에서 자신의 필명 리 러셀을 인터뷰어로 동원해 셀프 인터뷰를 실었던 위인이다. (웃음) 나와 피터 월런, 로라 멀비(페미니즘영화 연구의 시금석이 된 <시각적 쾌락과 내러티브 영화>의 저자)는 1972년 에든버러영화제에서 더글러스 서크 회고전을 기획하기도 했다. 김소영__ 더글러스 서크를 비롯한 몇몇 감독에 대한 당신의 특별한 관심의 뿌리에는 무엇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토마스 엘새서__ 당시 나는 두 가지에 매혹되어 있었는데, 하나는 특정한 부류의 영화, 즉 ‘미장센의 영화’라고 부를 수 있는 속성을 가진 영화들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대중문화였다. 더글러스 서크에 대한 관심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나 역시 독일 출신으로서 어린 시절 그곳을 떠난 만큼 이민, 망명 감독에게 시선이 쏠렸다.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감독은 서크를 연구하던 도중 발견했고 처음 영국에 소개했다. 뉴 저먼 시네마 회고전을 영국에서 주최하면서 내가 할 일이라는 확신이 섰다. 나는 오시마 나기사의 영화처럼 <스크린>이 옹호한 해체적인 영화보다 대중과의 고리를 유지하는 영화에 끌렸다. 김소영__ 1970년대 중반은 영화학이 대학 안에서 학문으로서 제도화한 시기이기도 했다. 토마스 엘새서__ 1970년대 초 영국의 영화문화는 풍요로웠다. 지금 아시아영화 전문가인 토니 레인즈나 로테르담영화제 집행위원장이 된 사이먼 필드 등 많은 시네필들은 각자 자신의 잡지를 만들고 있었고 서로 친밀했다. 매우 정치적이고 정열적이며 논쟁적인 시대였다. 1970년대 중반 이후 나는 BFI의 에드워드 보스콘과 함께 어드바이저 자격으로, 1960년대 들어 개교한 젊은 대학- 워릭, 켄트, 에섹스, 이스트 앵글리아, 키일대학에 교수 보직을 만들고 영화학과를 여는 일을 도왔다. 이때 로빈 우드, 리처드 다이어, 피터 월런, 찰스 바, 존 엘리스 등이 각 학교 영화과에 부임했다. 하나같이 성취 동기가 강했고 저널리즘 출신이 많았으며 박사학위 소지자는 거의 없었다. 제도화된 영화학의 출발은 영화비평과 학자로서의 연구를 병행해온 사람들에 의해 이뤄졌다. 대중영화를 위한 매트릭스의 탄생 김소영__ 역사, 대중문화 등 다양한 학제간 연구가 모여 대중영화 연구의 새로운 매트릭스가 탄생한 것 같다. 당신의 논문 <음향과 분노의 이야기>만 예로 보더라도 그렇다. 문학적 지식, 프랑스 혁명이나 19세기 사회에 대한 언급 같은 다른 학문의 트레이닝이 논증을 뒷받침하고 있다. 토마스 엘새서__ <음향과 분노의 이야기>가 힘을 발휘한 것은 그 글이 골수 시네필이 아니더라도 영화를 탐구할 수 있다는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미국 대중영화가 빚진 가장 중요한 전통은 19세기 소설이라고 믿는다. 그 글에 나오는 부르주아 소설, 빅토리아 멜로드라마 연극의 논거는 문학을 연구하고 가르친 경험에 나온 것이다. 요컨대 1970년대 연구자들은 각기 특별한 방식으로 영화학에 제도적 권위를 불어넣었다. 그리고 이후 다이어의 뮤지컬 연구, 나의 멜로드라마 연구, 로빈 우드의 호러 장르 탐구에서 보듯 장르영화에 대한 천착으로 발전해나갔다. 대중문화, 장르영화를 진지하게 공부하는 특별한 매트릭스가 만들어진 것이다. 김소영__ 버밍엄 학파의 형성보다 조금 앞선 시기였던 셈인가? 토마스 엘새서__ 리처드 다이어가 버밍엄 학파의 문화연구 성과를 영화학에 끌어들인 선구자다. 영화학은 버밍엄 학파의 영향도 받았지만 여전히 작가주의가 강세였다. 나 역시 스튜어트 홀의 방법론을 알고 있었지만 문화연구(Cultural studies)는 영화적 형식에 관한 연구와는 별 관계가 없다. <음향과 분노의 이야기>에 깔려 있던 의도는 영화작가를 작가주의의 울타리 밖으로 끌어내 장르 시네마 안에서 탐구해보려는 것이었다. 그 논문은 더글러스 서크, 빈센트 미넬리 감독을 분석한 글이지만 동시에 미장센 같은 형식적 이슈도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동시에 특정 장르를 하나의 징후로서 읽고 비평적 독법이 가능한 대상으로 접근하려고 했다. 리처드 다이어는 ‘대중문화 속의 유토피아적 순간’을 언급한 바 있다. 나 역시 내가 왜 이렇게 미국 영화에 계속 집착했는지 자문하곤 한다. 그들은 거대한 공적인데 말이다. (웃음) 이유는 그것이 대중의 문화이기 때문이다. 김소영__ 그러한 입장은 린다 윌리엄스(<하드 코어>를 쓴 페미니스트 영화학자)의 저작에서도 읽을 수 있다. 토마스 엘새서__ 오, 그녀는 내가 시도 못한 장르, 포르노그라피를 영화학의 지평에 더했다. 윌리엄스의 연구에는 영국 페미니즘도 영향을 끼쳤다. 1970년대 후반 나는 베를린자유대학과 아이오와대학에서 뉴 저먼 시네마를 강의했다. 아이오와와 가까운 밀워키에서 그맘때 열린 밀워키 컨퍼런스는 영국의 영화 문화가 미국으로, 즉 <스크린>의 이론이 미국으로 흘러들어간 모멘트를 마련했다. 크리스티앙 메츠, 스티븐 히스, 로라 멀비, 더들리 앤드루가 모여들었고 데이비드 보드웰과 크리스틴 톰슨은 당시 더들리 앤드루의 제자였다. 영화학의 역사는 아이디어의 역사이지만 그 이면은 지속적으로 접촉하고 움직이고 여행하는 개인들의 네트워크다. 트라우마로서의 미국영화 김소영__ 어제 강연에서 당신은 테크놀로지가 영화를 어떻게 변화시킬까라는 이야기 중에 <매트릭스>와 <터미네이터3>의 액션과 자동차 추격전이 어떻게 디지털적으로 또는 물리적으로 안무됐는가를 비교했다. 동시대의 액션영화에 대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엘새서: 미국영화는 언제나 나의 주요 관심사였다. 그러나 미국영화는 진지한 영화학자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진지하게 취급되지 못했고 영화광들도 1980, 90년대 미국영화를 그리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이른바 미국 액션영화를 자세히 보면 사실 ‘리액션(reaction) 영화’라고 불러 마땅하다. 포스트 베트남, 포스트 워터게이트 영화를 포함한 1980, 90년대 미국영화는 내가 보기에 ‘트라우마의 영화’다. 현재 집필 중인 책의 제목도 <멜로드라마와 트라우마, 미국영화가 보여주는 문화적 기억의 방식>이다. 논지는 멜로드라마의 예에서 출발한다. 멜로드라마는 특정한 시간성을 내포하고 있고 그로 인해 여성의 관심을 끄는 장르다. 멜로드라마는 기다림, 행동하고 싶은 욕망과 행동의 불가능함의 장르이며, 그래서 히스테리와 위기의 영화다. 내 주장은 1950년대 멜로드라마가 한 역할과 1980년, 90년대 액션영화의 역할이 유사하다는 것이다. 람보, 슈워제네거 같은 우익영화 속 남성영웅의 몸은 트라우마를 가진 육체다. 김소영__ 그럴 수가! 나 역시 1950년대 멜로드라마 연구를 거쳐 지금은 1970년대 한국 액션영화를 홍콩 합작영화와 연관 속에서 연구 중이다. 좀전에도 영화연구의 매트릭스가 형성되는 방식에 관해 이야기했지만, 하나의 연구가 다른 연구와 만나고 서로 흘러드는 양상은 재미있다. 토마스 엘새서__ 나는 얼핏 보기엔 액션히어로의 영화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액션의 위기, 액션을 가로막는 장애, 하이퍼 액션, 리액션을 발견하는 영화를 주목한다. <포레스트 검프>나 <메멘토>도 예로 언급되는 영화들이다. 멜로드라마의 시대였던 전후는 미국이 세계의 지배자로 등극하고 첫 번째 메이저 헤게모니를 갖게 된 시기였다. 미국은 승자였고 유럽과 아시아에 막대한 입김을 끼치기 시작했다. 내 질문은 미국은 왜 그처럼 자신감을 가질 수 있던 시대에 미국이 스스로를 회의하는 장르, 멜로드라마와 필름누아르를 만들었는가다. 1980, 90년대에도 동일한 질문이 가능하다. 내 책의 한 챕터는 남자주인공이 이미 죽은 다음에 시작되는 <아메리칸 뷰티> <메멘토> <식스 센스> 같은 영화들에 관한 것이다. 남성영웅이 극단적으로 무력화된 경우라고 할 수 있는데 필름누아르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그들은 액션히어로라기보다 리액션 히어로, 인액션(inaction) 히어로다. 내가 붙인 이름은 포스트 모던 시네마가 아닌 포스트 모르템(postmortem) 영화다. 한국말로도 말장난이 될까? (웃음) 김소영__ (웃음) 내가 지금 썼던 논문의 제목은 한국 액션영화 <유령>(Phantom Submarine)에서 따온 ‘Phantom States’인데, 죽은 주인공이 바다 위를 부유하며 뇌까리는 독백이 서두다. 토마스 엘새서__ 그거야말로 <썬셋대로> 아닌가! 할리우드는 늘 그러했고 현재도 그렇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할리우드영화도 사회적 현상의 징후를 드러낸다. 나의 이런 관점은 나와 지크프리드 크라카우어(<칼리가리부터 히틀러까지>라는 저서에서 1920년대 바이마르 영화를 파시즘의 징후로 진단한 학자)의 끝나지 않는 대화이기도 하다. 나에게 영화는 다른 무엇보다 부정적인 감정에 관한 예술이다. ▶ 김소영-토마스 엘새서대담 [1] ▶ 김소영-토마스 엘새서대담 [2]

빛고을에서 만난 일본 영화인 3人- 야마다 요지 [4]

--- | 아쓰미 기요시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토라상’의 캐릭터는 그가 제시한 이야기에 기반하고 있다고 들었다. 당시 아쓰미 기요시는 텔레비전에서 코미디 스타였다. 영화를 시작하기 전, 그를 알기 위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행상하며 장난치고, 우스갯소리를 하면서 사는 토라상의 삶은 그가 어렸을 때 동경했던 것들을 떠올리며 들려준 캐릭터이다. 그것을 발전시킨 것이다. --- | (이주일 사진을 보여주며) 한국에도 아쓰미 기요시와 비슷하게 생긴 이주일이라는 코미디언이 있었다. > 아쓰미 기요시는 “내 얼굴은 네모다. 눈도 깨처럼 작다. 하지만, 나도 부모님에게 부탁해서 이 얼굴로 태어난 건 아니다” 하는 식의 자기 얼굴을 갖고 하는 농담을 즐겼다. 그는 오히려 자기 얼굴 못생긴 걸 자랑으로 여긴 사람이다. 그런 말은 영화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 | 이 분의 유행어도 “못생겨서 죄송합니다”이다. 하지만, 어느 날인가는 이런 말을 했다. “코미디 프로는 참 잔혹하네요, 그 사람의 보기 싫은 모습을 보고 웃으니까요”라고 말한 적도 있다. 아쓰미 기요시는 다른 영화에는 출연도 하지 않았고, 돈을 벌었어도 고급주택에 살거나 하지 않았다. 자가용도 없이, 어느 날 택시 타고 쓱 왔다가, 쓱 가고는 했다. --- | 그런데 왜 3편과 4편의 감독은 거절했었는가. 2편까지 만들고 나서 이제는 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자꾸만 만들기를 강요했다. 그렇다면, “3편은 각본만 쓰겠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또 히트를 해버렸다. 그래서 4편의 각본을 또 썼다. 그런데 배우가 같고, 시나리오 작가가 같은데도 감독이 바뀌니까 완전히 다른 영화가 되어 있었다. 영화에서 감독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이런 점만 봐도 알 수 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다시 한번만 더 감독을 맡기로 했다. 그렇게 5편을 만들었는데, 또 대히트를 했다. 그뒤로는 그만둘 수 없게 돼버렸다. --- | 오랜 기간 이어온 시리즈였고, 이런저런 이유로 교체된 배우들이 있을 것이다. 작은아버지 역을 맡은 배우가 8편 때 사망해서 교체했고, 14편 때 또 교체됐다. 그래서 작은아버지는 총 세명의 배우가 연기했다. 그리고 큰스님 역을 맡은 류 치슈는 46편 때 죽었다. 그리고나서 아쓰미 기요시가 죽은 뒤 시리즈가 완전히 끝난 것이다. 작은아버지 역을 맡은 배우가 죽었을 때는 이제 그만둘까 하는 생각도 했었지만, 전국의 극장에서 그러면 안 된다고 말려서 계속하게 됐다. --- | 그렇다면 시리즈를 이어가는 중에 가장 힘들었던 적이 바로 그때인가. 아마도 그런 것 같다. --- | 혹시 시리즈와 비슷한 면이 있다고 생각하나. 시리즈는 감독도 다르고, 배우도 모두 다르고, 스토리도 항상 바뀐다. 그런 점에서 유사한 면은 없다. --- | 내가 본 <남자는 괴로워>의 토라상은 매 영화에서 같은 복장을 하고 있다. 그의 의상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는가. 그렇다.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옷은 매번 새롭게 만들었다. 토라상이 입고 있는 그 체크 무늬 양복은 일반적으로는 없는 것이다. 그 옷을 만들기 위해 옷감을 사기도 했고, 또 여름과 겨울 촬영을 위해 똑같은 옷으로 동복과 하복도 준비했다. --- | 오랜 시간 동안 오로지 토라상만큼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일본인들의 향수를 자극하고 있는 것 같다. 영화 속에서 그가 살고 있는 삶의 속도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느리고 여유있다. 그 점이 흥미롭다. 맞다. 토라상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 --- | 그렇다면, 혹시 이런 점을 염두에 두는가? 1960년 <남자는 괴로워> 망향편에서 ‘기차’는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10년 뒤 1970년 <남자는 괴로워> 하이비스카스편에서는 ‘비행기’가 그 역할을 한다. 떠돌이로서의 토라상에게 이런 교통수단은 어느 정도의 중요성을 갖고 있는가. 그렇다. 교통수단이 중요하다. 토라상은 절대로 고속전철은 타지 않는다. 승용차도 타지 않는다. 왜냐하면, 토라상에게는 초고속전철과 승용차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려 하는 사람이 아니다. 느린 기차를 타고 천천히 이야기도 하고, 친구도 사귀고, 술도 마신다. 토라상에게 속도가 빠르다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 --- | 48편 모두 토라상의 꿈 시퀀스로 영화가 시작하는가? 꿈장면은 그 영화의 전체를 요약하거나,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는 ‘인생은 꿈같은 것이 아니던가’ 하는 메시지도 받게 된다. 맞다. 그런 식으로 만들고 있다. 말한 그대로다. --- | <남자는 괴로워> 시리즈에서 토라상이 그렇지만, 다른 영화에서도 인물들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항상 등장한다. 1970년 <가족> 같은 영화 역시 그렇다. 오페라에서 막과 막 사이에 연주음악을 들려주는 것처럼 나는 영화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어느 순간에 노래를 들려준다. 그 순간에는 관객도 이야기에서 빠져나와 잠시 쉬었으면 한다. 나는 어느 영화를 만들든지 그 안에 꼭 노래를 집어넣는다. --- | 당신 영화에는 그 이전 영화의 내용들을 스스로 참조하거나 유머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가족>에는 아쓰미 기요시가 카메오로 등장하고, 하이비스카스편에는 “그놈 뭐 뱀에게나 물려 죽었겠지”라는 대사도 나온다. 그런 건 시나리오를 적으면서 떠오르는 것이다. 하이비스카스편은 오키나와에서 찍었는데, 거기에는 뱀이 많다. 아마 그래서 그런 대사가 나왔을 것이다. --- | 1996년에 아쓰미 기요시가 죽었다. <남자는 괴로워>의 마지막 내용은 어떤 것인가. 이 시리즈에 총 네번 나온 ‘리리’가 토라상의 최후의 연인이다. 마지막에 그 둘이 가고시마로 동거를 하러 가는 걸로 처리했다. 아마미라는 섬이다. 마지막 영화의 로케이션 촬영도 거기에서 했다. 아쓰미는 이미 병이 악화되고 있었고, 매우 괴로워했었다. 대사도 하기 힘들어했고, 목소리의 힘도 떨어졌다. --- | 그렇다면 영화 속에 등장한 ‘토라상’의 마지막 모습은 어떤 것이었나. 고베에 지진이 있었고 토라상은 병문안을 간다. 고베에 있는 나가타인데, 그곳은 재일동포가 많은 곳이다. 그때 ‘마당’이라는 재일동포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그 춤을 추는 장면을 보는 토라상의 모습이 마지막이다. --- | 당신의 최근작은 의외로 사무라이영화, <황혼의 사무라이>이다. 사실, 일본의 사무라이영화는 를 제외하곤 대부분 거짓말이다. 리얼리티가 없다. 나는 진짜 사무라이영화를 그리고 싶었다. 예를 들면. 사무라이가 많은 사람과 싸우는 장면에서 대부분의 영화는 뒤에 있는 사람이 칼을 내리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런데 그건 거짓말이다. 이런 거짓말 영화에 불만이 있었기 때문에 진짜 사무라이를 그리고 싶었다. 사무라이는 아침에 일어나서 어떻게 세수하는지, 뭘 먹고, 뭘 입는지 하는 그런 것들. 사무라이의 진짜 생활을 그리고 싶었다. <황혼의 사무라이>는 싸우는 영화이지만, 여전히 ‘가족’을 그린다는 의미에서 <남자는 괴로워>와 통하고 있다. ▶ 빛고을에서 만난 일본 영화인 3人- 하스미 시게히코 [1] ▶ 빛고을에서 만난 일본 영화인 3人- 하스미 시게히코 [2] ▶ 빛고을에서 만난 일본 영화인 3人- 야마다 요지 [3] ▶ 빛고을에서 만난 일본 영화인 3人- 야마다 요지 [4] ▶ 빛고을에서 만난 일본 영화인 3人- 이노우에 히로미치 [5]

빛고을에서 만난 일본 영화인 3人- 야마다 요지 [3]

" 인생은 꿈같은 것이 아니던가 " <황혼의 사무라이> 감독 야마다 요지 인터뷰 광주=글 정한석 mapping@hani.co.kr·사진 정진환 jungjh@hani.co.kr 세계에서 가장 긴 시리즈 영화는 이 아니라 야마다 요지의 희극영화 <남자는 괴로워>이다. 1969년 시작된 이 시리즈는 아쓰미 기요시라는 걸출한 코미디 배우를 앞세워 그가 1996년 암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27년간 총 48편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남자는 괴로워>는 매년 한편 정도 개봉하여 일본 관객의 명절 행사로 자리잡았고, 어떤 해에는 3편이나 만들어지기도 했다. 도쿄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그의 말에 따르면 “공부를 못해 별다르게 할 게 없어서 들어가게 된” 쇼치쿠영화사. 그의 동기 중에는 오시마 나기사가 있었다. “쇼치쿠는 잠자는 사자가 아니라 죽은 사자이다”라고 말하며 정치적이고 선동적인 영화를 추구해간 쇼치쿠 누벨바그의 기수 오시마 나기사와는 달리 야마다 요지는 말 그대로 쇼치쿠의 순한 ‘효자’였다. 닛카쓰영화사가 핑크영화에서 로망포르노로 진지를 바꾸고, 도에이영화사가 야쿠자영화로 명맥을 이어가던 60년대와 70년대, 그리고 슈퍼8mm 세대가 들이닥치던 80년대를 지나 90년대에 이르기까지 야마다 요지는 끊임이 같은 패러다임의 희극영화 <남자는 괴로워>를 만들어갔다. 하지만 출발이 순조로웠던 것은없 아니다. <남자는 괴로워>는 이미 폭발적인 인기 속에 종영된 텔레비전 드라마를 이어받은 것이었고, 거기에서 각본을 맡았던 야마다 요지는 같은 주인공과 같은 이야기로 영화를 만들기를 원했다. 쇼치쿠는 처음에 반대했지만, 결국 이 시리즈로 적자를 마감했고, 손익계산을 넘어섰다. <남자는 괴로워>의 아쓰미 기요시는 마치 한국의 코미디언 이주일이 그랬듯, 부담 없는(?) 얼굴을 지녔다. 그는 <남자는 괴로워>가 만들어지던 그 긴긴 세월 다른 영화에는 출연하지 않고 오직 이 시리즈에만 등장했다. 이 못생기고, 허술하고, 엉뚱하고, 낭만적이고, 정감 넘치는 사나이의 극중 이름은 ‘쿠루마 토라지로’, 일명 ‘토라상’이다(그래서 이 시리즈의 또 다른 애칭은 ‘토라상’ 시리즈이다). 중학교 때 집을 나간 뒤로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행상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토라상은 영화가 시작할 즈음 언제나 가족을 방문한다. 그리고 이복 여동생과 매부, 떡집을 하는 작은아버지와 작은어머니, 인쇄소 사장, 충복 겐코, 큰스님(우리에게는 오즈 야스지로의 아버지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류 치슈가 이 역을 맡고 있다)이 토라상을 ‘즐겁지 않은 마음으로’ 맞이한다. 토라상은 언제나 집을 방문하여 한바탕 소란을 일으키고, 어떤 여인 혹은 어떤 사건과 얽혀 여행의 에피소드를 만들고, 다시 한번 집을 방문한 뒤 떠나버린다. <남자는 괴로워>는 매번 이런 구조를 반복하면서 자기 역사를 쌓아갔고, 관객은 언제나 찾아오는 기념일처럼 그 똑같은 이야기를 보기 위해 서슴없이 극장을 찾았다. 한 작품, 한 작품을 갖고 따진다면 <남자는 괴로워>를 영화적으로 훌륭하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이 시리즈는 영화사의 개근상을 탈 만하며, 일본 희극영화의 전통 속에서 어떤 작품과도 비교할 만한 따뜻한 미소를 선사한다. 도쿄 근교의 시바마타에 붙박고 살아가는 토라상의 가족과 일본 곳곳을 떠돌아다니는 토라상, 그 서로 다른 삶은 충돌하고 화합하면서 서민들의 삶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가 주는 묘한 감동은 영화 속 삶의 시간과 관객의 삶의 시간이 동일하게 흐른다는 데 있다. 영화가 한편한편 만들어질 때마다 똑같은 배우들이 등장하여 조금씩 늙어 있는 모습들을 보여준다. 이번 영화제의 상영작 망향편과 하이비스카스편은 10년의 시간을 두고 있고, 그 세월만큼 변해버린 배우들의 모습이 있다. 그건 그 영화를 보기 위해 10년을 기다린 관객도 그만큼 같이 늙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배우가 교체되어 있다면 그건 그 배우가 실제로 죽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또한, 무려 30여년을 이어간 시리즈였기에 토라상이 돌아다니는 일본의 풍경들은 나날이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그 속에서 토라상은 매번 같은 표정과 말투와 복장으로 등장하여 빠르게 변해버린 사회를 살아가는 일본인들이 잃고 싶어하지 않는 마지막 향수의 감정을 자극한다. 야마다 요지는 그의 최근작 <황혼의 사무라이>를 통해 사무라이의 ‘칼’이 아니라, 사무라이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죽지 않는 한, 그의 인물 토라상처럼 야마다 요지도 언제나 같은 모습일 것이다. --- | 도쿄대 법학부를 졸업한 뒤, 쇼치쿠에 입사한 것으로 알고 있다. 동기생 중에는 오시마 나기사도 있었다. 당신은 왜 감독의 길을 택하게 되었는가. 다른 길이 없었다. 학생 때 성적이 많이 나빴고, 취직도 잘 안 됐다. 별다르게 할 것도 없고 해서 영화회사에 들어간 것이다. 하지만 나하고 달리 오시마 나기사는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었다. (웃음) --- | 당시 일본은 문화적으로 격동적인 시기였다고 알고 있는데, 당신이 그때 동세대 감독들과 다른 방식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신념은 어디에 기인하는가. 화가의 예를 들어보자. 인간을 그리기를 좋아하는 화가가 있고, 정물을 그리기를 좋아하는 화가도 있다. 나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좋았다. ‘나는 어떤 영화를 보고 싶은가?’ 생각해봤다. 그럴 때 나에게는 ‘그리운 삶’이 생각난다.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을 그리고 싶었다. 나는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만든다. 그래서 내 영화에는 살인하는 이야기도 없고, 베드신도 없다. --- | 1969년 <남자는 괴로워>의 1탄이 탄생했다. 당신은 강하게 그 영화의 감독을 맡기를 원했고 주장했다. 이 소재의 무엇이 그렇게 매력적이었나. 일단 캐릭터가 좋았고, 마음껏 웃을 수 있는 코미디가 좋았다. 그런데 쇼치쿠에서는 처음에 반대를 했다. 하지만 영화가 굉장히 흥행하자 경제적으로 많은 이득을 얻었다. 그래서 나는 <남자는 괴로워> 이외에도 <노란 손수건> <가족> 같은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정말 바쁜 28년간이었다. 아마도 그동안은 내가 일본에서 가장 바쁜 감독이었을 거다. --- | 텔레비전 드라마가 먼저 있었다. 내용이 같은가. 그렇다. 완전히 똑같다. 내가 각본을 썼었다. --- |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는 주연배우 아쓰미 기요시가 독사에 물려 죽는 것으로 끝났다. 종영 뒤 시청자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고 들었다. 어느 정도였나.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었다. 편지로, 전화로 왜 토라상을 죽여버렸냐고 항의가 빗발쳤다. 일본에서 텔레비전 드라마 때문에 시청자들이 비난을 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 빛고을에서 만난 일본 영화인 3人- 하스미 시게히코 [1] ▶ 빛고을에서 만난 일본 영화인 3人- 하스미 시게히코 [2] ▶ 빛고을에서 만난 일본 영화인 3人- 야마다 요지 [3] ▶ 빛고을에서 만난 일본 영화인 3人- 야마다 요지 [4] ▶ 빛고을에서 만난 일본 영화인 3人- 이노우에 히로미치 [5]

웬만해선 그를 막을 수 없다

영화와 TV 양쪽서 큰 성공 거둔 제리 브룩하이머, 총수익 5억달러에 달해 <진주만> <나쁜 녀석들> <더 록> 등 할리우드 제일의 블록버스터를 지향하는 프로듀서이자 제작자 제리 브룩하이머(사진)의 강세가 멈출 줄 모른다. <버라이어티>가 뽑은 ‘성공한 프로듀서 8인’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던 제리 브룩하이머는 2003년 한해에만 4억6100만달러의 수입을 벌어들였다. 이런 수치는 같은 시기 MGM과 드림웍스의 자국 내 총수익을 합친 것에 맞먹는다. 제리 브룩하이머는 영화뿐만 아니라 텔레비전에서도 강세를 보이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 CBS에서 방영되어 인기 급상승 중인 <흔적없이>, 폭스 방영의 <스킨>을 포함하여 총 6개의 시리즈물이 각각 황금시간대를 차지하고 있다. 지난 6월까지 12개월간 벌어들인 방송쪽 수입만 3500만달러에 이른다. <버라이어티>는 제리 브룩하이머의 이같은 성공을 두고 초창기 스튜디오 시스템 제작자들인 데이비드 셀즈닉, 어빙 탈버그, 새뮤얼 골드윈을 비교대상으로 삼아 설명을 덧붙인다. 작품마다 다수의 시나리오 작가들을 선호한다는 점, 개봉 전 시사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점, 신인 발굴에 탁월한 능력을 지녔다는 점 등이 거론되고 있다. 제리 브룩하이머는 <아마겟돈> 제작 당시 크레딧에 올라 있는 다섯명의 작가 이외에도 4명의 작가를 더 동원했으며 톰 크루즈, 에디 머피, 벤 애플렉 등을 발굴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또한 제리 브룩하이머는 포스트 프로덕션과 마케팅쪽에도 특별한 주의를 기울인다. 2003년작 <캥거루 잭>과 1995년작 <위험한 마음>은 거의 1년여의 포스트 프로덕션을 거쳤으며, 이 과정에서 <위험한 마음>의 앤디 가르시아 캐릭터가 삭제되었고, <캥거루 잭>의 아기주머니는 플롯상 중요 부분으로 바뀌었다. 제리 브룩하이머는 현재 촬영 중인 <킹 아서>를 비롯하여, 니콜라스 케이지가 보물을 찾는 고고학자로 등장하는 존 터틀타웁의 영화 ,1966년 텍사스 서부대학 야구팀을 소재로 한 영화 <영광의 길> 등을 준비하고 있다. 그의 강성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귀추가 주목된다.정한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