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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검색결과

기사/뉴스(9404)

스크린 속 그 선율

미야자키 하야오와 기타노 다케시 영화의 음악 조율사 히사이시 조가 지난 11월8일 한국 공연을 다녀갔다. 히사이시 조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부터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까지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과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부터 <브라더>까지 기타노 다케시 영화의 음악 대부분을 맡아온 일본의 영화음악가. 간결하면서도 서정적인 피아노 선율과 오케스트레이션, 전자악기와 민속악기를 자유롭게 활용한 리듬 파트 등 클래식과 팝, 현대음악과 전통음악을 넘나드는 그의 음악은 동화 같은 판타지와 비정한 현실의 풍경을 감성적으로 끌어안으며 많은 관객의 귀를 사로잡아왔다. 예전부터 한국 공연 제의를 받았다는 그는, 지난 10월 말부터 ‘히사이시 조 슈퍼 오케스트라 나이트’란 제목으로 일본 순회공연을 시작하면서 서울 순서를 따로 마련해 한국을 찾았다. 국내에는 미야자키 하야오와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음악가로 잘 알려져 있지만, 히사이시 조는 일본 국립음악대학 작곡과 재학 시절부터 현대음악 작곡가로 활동해왔으며, CF, 드라마, 대중음악 등 다양한 작업을 해왔다. 개인 작업은 “좋아하는 대로 할 수 있어서” 좋지만 또 그 때문에 뭘 해야 할지 어려울 때가 있고, 공동작업인 영화음악은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렵지만 감독과 함께 얘기하면서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것들이 있다고. “2천∼3천명이 모여서 들어도 음악은 듣는 한 사람 한 사람과의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그의 작곡론은 “클래식이든 팝이든 관계없이 관객을 위한 음악”. 최근에는 현악 4중주단을 소재로 한 <쿼텟>이란 영화를 연출하기도 했다. 세종문화회관에서 7시30분부터 2시간가량 펼쳐진 이번 공연에서는 <쿼텟>의 음악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브라더> 등 최근작들 20여곡이 연주됐다. “최근 2∼3년 동안 만든 곡들이라 오케스트라와 처음 같이하는 곡들도 많다”며 기대도 되고 불안하기도 하다던 그였지만, 공연장의 피아노 앞에서는 편안해 보였다. “한국에도 팬이 있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정말 그런지 모르겠다”며 연주 중간중간 간단한 멘트와 곡 설명을 곁들이기도. 그의 공연 단골 지휘자인 재일동포 김홍재씨와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을 마치고 돌아간 그는, 12월 초까지 일본의 도시들을 돌며 스크린 밖에서 음악을 들려줄 예정이다.

오냐 밟아라, 나는 살아있다!

왜, 왜 오지 않아. <최종병기 그녀> 3권 중 치세 여기는 61병동,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착한 어린이가 되었다. 지리한 병실에서 세끼 식사는 가장 큰 이벤트이기 때문에, 밥 때가 되면 열심히 기어나와 밥을 껌 취급하며 오랫동안 열렬하게 밍밍한 병원 식사를 열애한다. 역시, 할 일이 없기 때문에, 아주 오랫동안 정성을 들여 꼼꼼히 이를 닦는다. (조금 더 있으면 치아에 닿는 순간의 칫솔모의 휘어지는 각도를 감각으로 계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할 일이 없기 때문에, <다락방에 핀 꽃들>에서 캐시가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아이들인 것이다!”라고 탄식했듯이 시간을 때우려고 열심히 씻어댄다. 그리고 책을 읽는다. 온갖 종류의 <샘터> <가이드포스트> 등 병동에 놓여 있을 법한 ‘착한’ 책들 옆에 애거사 크리스티 전집이 새빨갛게 놓여 있다. <서재의 시체> <예고 살인>…. 여하튼 ××살인이 그득그득 위풍도 당당하다. 세상에, 연쇄살인범을 배출하려는 병동인 건가! 하필이면 밥 시간 전에 <양들의 침묵>을 읽는 바람에 다소 입맛이 저하해 하루의 가장 큰 이벤트가 밍밍하게 끝났다. 그리고 뇌파검사실로 간다. 머리가 벗겨진 늙수그레한 간호부 할아버지가 앞서서 나를 데려간다. 영화에서 본 뇌파검사는 뭔가 근사하던데, 그냥 하는 거라고는 눕혀 놓고 딱풀(!)로 전극을 머리에 통째로 붙이는 것이다! 검사의 선생님께 “이, 이거 딱풀이에요?” 하고 묻자 “아녜요, 크림이에요” 하고 대답했지만, 깡통에 든 것은 색깔, 냄새, 찐득거리는 것까지 정녕 초강력 딱풀 잇셀프가 아닌가. 순식간에 나는 처덕처덕 딱풀투성이가 된다. 그리고 론머맨이 된다. 꼼짝 못하고 누워서 내 뇌(그런 게 있기는 하던가…)가 무슨 궤적을 그릴지 조용히 기다린다(혹은 <레드문>의 아길라스 같은 꼴이 되어 뛰쳐나와서 “병원 사람들이여! 나를 경배하라!” 하고 외치지는 않을까 내심 기대하였으나 뇌는 내 지루함 따위는 상관하지 않는지 열심히 궤적만 그렸다. 그리고 나는 이런 따위의 기대를 한 자신에 대해 혹시 모르는 사이 전두엽을 절제당한 경험이 있는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검사가 끝나자 아저씨가 내 머리와 전선을 각각 잡더니 확! 하고 뜯어낸다…. 내 꼴은 딱풀 위에 전극을 고정시켰던 거즈가 잔뜩 붙어 타르통에 빠졌다가 밀짚을 뒤집어쓴 디즈니 래빗 같은 괴상한 꼴이 된다. 게다가 잘 씻어지지도 않는다. 으악. 여전히 꾸덕꾸덕 살갗에서 굳어지는 딱풀! 론머맨. 전극 뜯긴 론머맨. 간호부 할아버지는 내가 머리를 씻어내기를 기다려 MRI/CT실로 데려간다. 병원은 왜 이다지도 넓은지. 대합실의 기침하는 꼬마, 응급실에서 소리 높여 비명을 지르는 남자, 중환자 대기실의 고개를 푹 숙인 소리없는 통곡을 모두 목도하며 할아버지를 잃을세라 처음 꽃놀이 온 꼬마처럼 열심히 따라간다. 간호부 할아버지는 기침하는 꼬마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고는 나를 MRI/CT실로 넘긴다. 신김치 보시기처럼 권태로운 얼굴에 넘겨진 나는 몸을 꽉 죄는 상자에 담겨 귀가 막히고 머리가 고정되어 겁을 먹는데, MRI 기계는 그 외양이 세탁소 세탁기의 거대한 확장판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빨래가 이리저리 밀리고 밀리는 게 보이는 동그란 구멍 안으로 스르르 밀어넣어지는 것이다. 이거야말로 에서 관에 넣어져 소각로로 스르르 밀려들어가는 제임스 본드인 게다. 폐소공포증 때문에 덜덜 떨린다. 20분이 지나 나오고 나자 간호부 할아버지는 “MRI 기계가 방아소리처럼 시끄럽지?” 하고 말하고는 길을 앞장선다. 돌아가는 길에는 버거킹과 날으는풍선세트팡팡???과 팝콘 튀겨주는 기계가 나란하다. 언제부터 병원에 이런 게 생겼지? 세상은 너무 빨리 변하고 있다. 아까 닦아낸 딱풀이 덜 떨어져 거즈 실밥이 대롱거린다. Thanksgiving을 위해 준비되었지만 채 털이 덜 뜯긴 칠면조가 된 기분이 든다…. 이봐요! 이제 우리 모두 대신 토끼를 먹는 게 어때요! (분명 전두엽은 절제된 게다.) 오는 길에 또 피를 하나 가득 뽑히고, 할아버지는 이 벌판 같은 병원에서 복잡한 복도를 징하게 돌면서도 군데군데 《금지》라고 쓰여 있는 화재문(!)을 열어 이 골목 저 골목에 숨은 엘리베이터를 찾아내어 이 병동에 이르는 최단좌표를 서슴없이 그려내는 것이다. 저 능력! 아, 세월은 무서운 거다. 병실에 누웠다. 왜 이리 아플까, 왜 이리 아팠을까 근심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으니. 오냐, 나는 론머맨이 될 터이다. 급격하고도 영구한 제2 세대의 형질변이가 일어나 기쁨으로 바뀌어버리는 사태는 없다손 치더라도 포메이토처럼 빨간 열매가 열릴지도. Who cares? 〈대항해시대〉에서 키를 서쪽에 고정시킨 뒤 대서양을 잡아타고 하염없이 기다리듯, 미증유의 젊음이란 언제 어느 곳에 닿을지 모르는 일 아닌가, 경험하지 못한 대륙을 만날지, 축복의 땅 가나안에 들어설지도. 물론 매리 셀레스트호가 되어 언제까지나 우울한 해안가를 방황하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바로 앞에 두고 끝내 황야를 떠도는 영혼으로 끝날지 모르지만 그런들 어떠리. 적어도 나는 살아 있다. 딱풀을 온 머리통에 처덕처덕 바른 꼴이라도, 적어도 살아 있다. 적어도! 그러므로 황야에서 숨을 거두어도 마지막까지 가나안을 향해 디딘 한 발자국에 만족하리라. 젖과 꿀에 발을 적시지 않으면 어떠랴. 얼마든지 흙을 던지려무나, 밟고 더 밟고 나를 네 웃기 위한 제물로 삼거라. 나는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여태까지 그랬듯 맞고 있을 터이니, 하고 싶은 대로 짓밟고 썩혀 보아라. 나는 가진 자본이 슬픔밖에 가진 것이 없으니, 그것으로 씨를 뿌릴 테다. 밟아라. 그 슬픔의 침윤으로 굳어진 내 수맥에는 언젠가 다시 콸콸 수맥이 흐를 것이다. 그때가 되면 수맥탐지기를 들고 왔다갔다하지 않아도 내가 약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리. 그러면 푸석푸석한 나무껍질도 반질반질 윤이 날 것이다. 누가 뭐래도 아직은 젊으니까. 그리고 성공하면 언젠가 그대의 전화벨을 울리리. 온 세상까지는 필요없어. 오로지 그대의 전화벨을 울리리. 나는 론머맨이니까-. 김현진/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서식중. 정확한 거처 불명. 키워드는 와일드터키, 에반윌리엄스. <누가 뭐래도 버번은 007이라는 메리트가 있는 것이다!> NEO_HEART_BREAKER@HOTMAIL.COM(하트브레이커는 <하트브레이커스>가 아니라 하트브레이커 ‘더 키드’ 숀마이클님이심.)

딴따라의 애수, 따라지의 지리멸렬

● 가을 충무로, 풍년은 풍년이로되 곳곳에서 쪽박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기대했던 영화들이 조폭과 킬러의 협공에 힘 한번 쓰지 못한 채 나둥그러지고 있다. 페인트가 마르기도 전에 간판을 내릴 지경이면 참패보다 압살이라는 험악한 표현을 하는 편이 낫겠다. 줄초상난 작품들은 관객의 뒷골을 쑤시게 할 정도로 심각하거나 진지하지도 않았다. 재미와 의미가 균형을 이뤘는데도 철저하게 외면을 당했으니 어디서 어떻게 해법을 찾아야 할지 난감할 따름이다. 정치판처럼 ‘민심이반’이나 ‘언론환경’ 탓으로 돌려야 할 것인가. 흥행 실패의 원인으로 홍보와 마케팅문제를 지적하지만, 전국을 돌며 무료 시사회를 열었어도 아무런 약발을 받지 못했다. 사상 최대의 입소문 전략을 내세웠다 낭패를 당한 쪽은 ‘공짜와 모르쇠’라는 제목의 영화를 만들어볼 만하다. ‘권장운동’에 ‘제발 부탁하오니’ 투의 하소연을 보태고 ‘진실한 영화가 죽을 수는 없다’는 비장함까지 내비치며 이삭줍기에 나서지만 그마저도 힘겨워 보인다. 관 속에 누운 작가주의와 저예산영화는 이제 뚜껑에 못박힐 일만 남았다. 계속 헛다리를 짚은 제작자와 저널과 평단은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노래한 <세상만사> 가사대로 ‘이러구러’ 살아갈 뿐이겠다. 흔들리고 떠밀리고 닮아지고 그놈의 ‘대박 귀신’이 얼을 빼놓는 바람에 한국영화의 전통인 리얼리즘이 몸둘 바를 모르고 있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와 <라이방>을 올해 한국영화의 재산목록으로 올리고 싶은 이유는, 세상을 말 그대로 가장 현실적인 삶의 공간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밤무대와 땡볕과 택시기사 등 전혀 서로 관계가 없을 것 같은 소재들이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다. 시대 주변부의 중년 사내들이 흔들리며 떠밀려가고 닳아지는데, 그들이 겪는 녹작지근한 무력감과 쓸쓸한 비애감은 우리 삶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스타는커녕 낯익은 얼굴도 내세우지 않거니와 컴퓨터그래픽이며 카메라의 요란한 기교에 빚지지도 않은 작품들이지만, 신인들의 빼어난 연기가 영화의 완성도를 든든하게 받쳐준다. 떠돌면서 시들고, 시들면서 떠도는 게 인생이 아닐까요.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그렇게 질문을 던지며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열고 닫는다. 무대에서 마지막 연주를 하는 남자와 무대에 불현듯 나타나 노래하는 여자의 모습에서 유랑의 삶, 그 존재론적 우수가 읽힌다. ‘고추아가씨 선발대회’나 회갑잔치에 불려다니던 와이키키 브라더스 밴드가 수안보의 와이키키 호텔에서 일자리를 얻는다. 나훈아에게 화와이와 사이판 아가씨들의 갈채가 있다면, 너훈아에게는 부곡 화와이와 일동 사이판 아줌마들의 박수가 있다. ‘모조 인생’에 합류한 성우가 이러구러 살아간다고 자조하는 순간, 그의 10대 시절이 스냅 사진사의 플래시처럼 터진다. 인생이 한권의 책이라면, 청춘은 그 첫 페이지라고 했다. 짝사랑에 가슴앓이를 해도 기타만 잡으면 세상만사 걱정없던 시절이었다. 성우가 이끄는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유래를 더듬어가는 과정이 완만한 리듬을 타는데, 조금은 길게 느껴지는 회상 시퀀스엔 중년 관객이 배시시 웃을 만한 에피소드로 채워진다. 그런데 이전에 별 의미도 없는 목욕탕장면을 수상쩍게 잡은 카메라는, 성우 패거리들이 긴 해변을 벌거벗고 달리는 장면을 부감으로 담아내면서 현재로 진입한다. 여성감독의 장난스럽고 상투적인 감수성에 눈을 흘길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 크레인숏은 후반에서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다. 3류 보컬 성우와 과부가 된 야채장수 인희가 등을 보인 채 강가에 앉아 있다. 망각의 뿌리를 흔들며 흘러가는 강물이다. 그들은 무엇을 씻어 바다로 가져가주길 원했을까. 시간이 정지된 듯한 고요와 애잔함이 묻어나오는 대목이다. 시간의 물살은 성우를 더 깊고 매섭게 휘감아버린다. 드러머 강수는 마약에 빠져 팀을 떠났고, 바람둥이 오르간주자 정석은 성우를 무대에서 밀어낸다. 또다시 출장밴드로 추락한 상우와 우 선생이 거리에서 황량한 인간 풍경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알코올 중독으로 폐인이 된 우 선생은 미래의 성우가 투영된 캐릭터인데, 그가 피난 시절이며 여성편력 따위를 들먹여도 진부한 감상주의로 떨어지지 않은 것은 김영수의 자연스런 연기 때문이다.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채택하고 있는 대비법은 다른 영화에서도 흔히 발견할 수 있는 것이지만, 임순례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의 고통스런 부대낌을 유연하고 깊이있는 성찰로 관객의 마음속에 인각시켜준다. 고정된 상태의 카메라가 긴 호흡으로 구성한 프레임은 지금, 이곳에서 눈을 떼지 않겠다는 냉철한 응시의 자세다. 가슴 밑바닥을 치던 애잔함이 룸살롱장면에 이르면 한없이 막막한 슬픔으로 바뀐다. 고문보다 더 끔찍한 폭력을 참아내는 상우에게 아직도 꿈이 남아 있을까. 그의 풀려버린 눈동자는, ‘이것은 인간의 삶이 아닙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세친구>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는데, 궁지에 몰린 남성들에 대한 임순례의 엄격한 사실주의 화술은 남자감독들을 뺨친다. 한마디로 괴력이다. 음악과 그림이 이토록 즐겁게 동업한 적은 드물다. 음악은 줄거리를 이끌어가거나 인물들의 심리를 대변하고 더러는 그들을 에워싼 배경을 상징하기도 한다. 절제력이 아쉬운 부분은, 상우 친구인 시청 직원을 자살로 몰아가는 대목이다. 한국사회를 읽기에는 드라마의 톤이 너무 튀는데다 대사가 직설적이어서 울림의 여백을 남기지 못한다. 불구자로 처리했던 정석을 막판에 다시 무대에 올리는 것도 당혹스럽다. 하지만 그런 단점들은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모조리 잊혀진다. ‘당신 때문에 행복할 것’이고 ‘사랑밖에 모른다’고 노래하는 인희의 모습이 어둡게 멀리 사라진다. 몽롱하고 처연한 엔딩이다. 루카치가 그랬던가. 길은 끝났고 여행은 시작되었다고. 웃음에 묻어나는 현실의 무게 레이벤과 라이방의 차이는 와이키키와 수안보의 간극에 버금간다. 그 명칭들은 진짜와 가짜, 고급과 싸구려를 의미한다. 지금은 소설가로 유명해진 저널리스트 김훈이 소개하는, 라이방에 얽힌 천상병 시인의 일화가 흥미롭다. 어느날 천상병이 시 지망생에게서 싸구려 선글라스를 선물로 받았다. “여름에 선글라스를 끼어보니까, 머리를 뚫어버릴 것처럼 맹렬하던 그 잔혹한 햇빛이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순해지고, 이 세상이 살기에 알맞은 온도와 습도 속에서 부드러워진다. 선글라스 참 좋다. 좋아.” 라이방 선전에 열을 올리는 천상병의 얼굴은 행복, 그 자체였다는 것이다. 한국사에서 가장 섬뜩한 라이방은 화사한 봄날 군화발로 민주주의를 접수한 박정희의 라이방일 것이다. 중앙청 앞에서 잔뜩 위압적인 폼을 잡은 박정희에게 라이방은 부끄러움을 감추려는 도구였는지도 모른다. <라이방>에서 분신처럼 라이방을 걸치고 다니는 학락도 라이방을 쓰면 숨어 있는 느낌이 든다고 말한다. 땡볕 세상에서 움직이지 않는 그늘을 찾아나선 세 사람의 이야기는, “인간은 행복이나 불행을 선택할 수는 없다. 하지만 행복이나 불행은 인간을 선택할 수 있다”는 자못 철학적인 명제를 던지면서 시작된다. 불행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은 40대를 눈앞에 둔 3명의 택시기사다. 자랑거리라곤 베트남전에 참전한 삼촌 이야기밖에 없는 홀아비 학락은 다 자란 외동딸을 입양시켜야 할 정도로 무능력하고, 연변 처녀를 사랑하는 해곤에겐 연적으로 등장한 칠순 노인을 이겨낼 재간이 없다. 유일하게 대학물을 먹은 준형은 남의 식탁에 공깃밥 하나 시켜 빌붙어 먹는 짠돌이지만, 망나니 형 때문에 집안이 콩가루가 될 형편에 놓인다. 카메라가 선풍기의 움직임을 따라 느리게 이동하면서 사내들의 수다와 푸념을 담아내고 있다. 삶은 나날이 지리멸렬해지는데, 실패 전문가답게 세 사람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 약은 척하다가 더 약은 사람에게 나가떨어지고, 정직하고 건실하게 살려다 오히려 배반당한다. 감독은 개탄스런 시대풍조를 때로는 냉소적으로 때로는 희화적으로 그려진다. 현실을 다루면서 재미를 주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부지런한 똥개가 따뜻한 똥을 먹는다”, “최규하가 우리나라 대통령 맞긴 맞아?”, “여자의 얼굴은 현찰이고 마음은 어음이야” 같은 대사들이 폭소를 끌어낸다. 꼬일 대로 꼬여 부스러지는 사내들의 이야기가 쉴새없이 웃기는 데도 억지스럽거나 공허하지 않은 것은 짙은 페이소스와 함께 현실의 무게까지 달아내기 때문이다. 불행은 질긴 것이어서 열패감으로 밤을 맞고 허풍으로 아침을 여는 사내들을 끝까지 따라붙는다. 더이상 굴러떨어질 데도 없는 그들이 극단적인 탈출구를 찾는다. 클라이맥스는 철저하게 <죄와 벌>을 염두에 두고 있다. 자칫하면 어설픈 복사판이 될 위험도 있었으나, 패러디로 변형함으로써 영화는 긴장과 탄력을 얻는다. 심리전을 전개하는 듯한 이 대목은 배우들의 연기가 단연 돋보인다. 연극 무대서 오래도록 훈련을 쌓은 덕분인지 캐릭터들이 싱싱하고 살아나고 있다. 하지만 이따금 덜컹거리는 드라마 운행이며 정비공과 경리사원의 로맨스는 지적받아 마땅하다. 지나친 희화화는 경박함으로 떨어지게 마련이다. 낮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는 형을 피해 준형이 어린 아들과 골목에 나란히 앉아 이를 닦는 모습은 장현수의 이전 작품에선 상상조차 못할 장면이다. 액션 연출이 체질화된 감독이 따라지 인생들의 애환을 그리는 일은, 역기 선수가 마루운동 선수로 전환하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을 터이다. 그러나 낙관주의자로 돌아온 장현수는 권태롭고 무료한 삶 속에서 웃음을 터뜨리고 연민을 자아내는 에피소드와 디테일을 자연스럽게 녹여낸다. 영화에서 감독의 나이를 읽는 것은 흐뭇한 일이다. “그늘은 바로 당신 곁에 있다”는 마지막 내레이션이 마음을 찌른다. 박평식/ 영화평론가 jeruel@empal.com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스포츠 신문은 오랫동안 한국 성인만화의 용광로로 존재해왔다. 고우영, 방학기, 배금택 등의 만화가들은 일반 만화시장의 부침에 흔들리지 않고, 언제나 그 요새 속에서 “왔어요, 왔어요” 성인남자들을 불러모아 그들의 욕망을 불끈불끈 솟구치게 해주었다. 물론 그들 작품의 질이 얼마나 견고한 수준을 유지해왔는가는 진지하게 들여다볼 문제이지만, 적어도 그 오랜 생명력에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최근 몇년 사이 그들의 성좌를 넘보는 신선한 얼굴들이 대거 등장하기 시작했다. 늦깎이 강주배는 <용하다 용해>로 무대리를 샐러리맨의 아이콘으로 만들었고, 정연식의 <또디>는 인기를 발판으로 경쟁지로 스카우트되는 위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리고 잡지만화계에서 스포츠 신문으로 발을 넓혀가는 모습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누들누드>로 큰 명성을 얻고 있던 양영순은 <아색기가>로 제 물을 만났고, 개그만화계의 총아 김진태는 <시민 쾌걸>로 스포츠 신문에 가장 잘 어울리는 만화의 한 형식을 보여준다. 그리고 세기말 참극 <야후>의 윤태호가 이 용광로에 뛰어들었다. <이나중 탁구부>보다 뛰어난 3등신 캐릭터 새 스포츠 신문 <굿데이>에 연재중인 윤태호의 <로망스>는 본격적인 노인 개그만화다. <야후>의 윤태호는 한 젊은이의 삶을 뒤바꿔버린 대재난과 맞서는 정말로 진지한 만화가이다. 하지만 전작인 <연씨 별곡>에서부터 그의 풍자와 개그 감각은 소문난 것이었고, <수상한 녀석들>에서 다소 허무하게 바람이 빠졌지만, 다시 <로망스>로 옹골찬 개그의 알맹이를 채워나갈 자신감을 내보이고 있다. 그러니까 감히 노인 어르신들을 이 자리에 모셔온 게 아니겠는가? 이 가공할 한국사회는 ‘노인’이라는 문제를 건드리기 위해 만화가에게 대단한 용기를 요구하고 있는 게 사실이고, 그 위험을 덮어씌우기 위해 만화가는 재치와 유머를 동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적당한 효도 홍보만화로 박카스 선물을 받거나, 탑골공원에서 멀지않은 신문사를 불지르게 할 작정이 아니라면 말이다. <로망스>는 먼저 캐릭터의 파격으로 돌진한다. 삼등신의 캐릭터는 만화에서 그렇게 낯선 것은 아니다. <파티리로>나 <아기와 나>에서 드러나듯이 그것은 어린아이와 연관되는 귀여움의 표상으로 흔히 사용된다. 하지만 <로망스>에서 만나는 기이할 정도로 커다란 얼굴, 그리고 간략한 선을 사용하지만 강하게 새겨넣은 노년의 징후들은 그 귀여움의 느낌을 약간은 징그럽고 낯선 체험으로 이끈다. <이나중 탁구부>의 열혈 쓰에마쯔 선생이나 거대한 얼굴을 가진 하마 선생에서 비슷한 인상을 받기는 하지만, <로망스>쪽이 훨씬 완성적이고 일관성이 있다. 한편으로는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을 지니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무시무시한 세월의 냄새를 숨기고 사는 노인들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외형적 파격이 어떻게 개개의 성격으로 자리잡아가고 있을까? 월남전에 갔던 지루한 무용담으로 아기를 재우는 95% 대머리 노인, 공무원 정년 퇴임 뒤 정말로 무미건조하게 사는 평범한 노인, 이것저것 좋아하고 밝히는 것 많지만 먼저 간 집사람이 그리운 술꾼 노인, 있는 듯 없는 듯하다가 어린 손주의 우유를 뺏어먹는 존재감 제로의 치매 노인…. 이들이 중심적인 인물군을 형성하고 있지만, 이야기의 전체를 휘어잡는 캐릭터라기보다는 이런저런 에피소드 속에 가끔씩 역할을 수행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는 듯하다. 물론 에피소드 연작에서 굳이 몇 인물에 치우치지 않고, 자유롭게 이야기를 구성해나가는 것도 하나의 스타일로 존재 가능하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이 주인공들의 개인사에 대한 조명이 비교적 자세하고, 무언가 그들이 전체적인 만화의 중심을 잡아주어야 할 것처럼 보인다. 40회 정도의 분량이라면 장기 연재를 해온 만화가로서는 아직 초반에 불과할지 몰라도, 스포츠 신문의 독자들은 매일 이 신문을 살까 저 신문을 살까 고민하는 일회적인 존재에 가깝다. 보통의 일간지에 비해 스포츠 신문 독자의 충실도가 확실히 낮은 것도 사실이고, 그래서 가급적 빠른 타이밍에 독자들에게 만화의 성격과 주인공들을 파악하게 하는 다소 친절한 배려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똥침 마니아’와 같은 설정이 제법 감칠맛나는 웃음을 만들어내는데, 똥침을 무력화시키는 노인의 치질이 그의 개인사에 얽혀 들어가도록 하면 좀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노인이 흘린 침은 고무줄 놀이가 되고 그럼에도 <로망스>는 다른 신문만화와 구별되는 확실한 개성과 성숙도를 지니고 있다. 특히 이야기의 사족을 제거하고 공간적인 구성으로 유쾌한 웃음을 만들어내는 장면들은 매우 훌륭하다. 노인이 졸면서 흘린 침이 이리저리 엮어지더니 손녀딸과 함께하는 고무줄 놀이가 된다든지, 세월에 따라 변화는 섹스장면을 병렬식으로 엮어놓은 구성들은 시각적으로 강렬하고 아이디어의 전달도 명확하다. 그런 캐릭터와 공간 연출의 미덕이 어떻게 노인세계에 대한 경쾌하지만 치밀한 분석과 만나게 될까? 그 물음이 <로망스>를 열심히 보게 만드는 자양강장제다.이명석/프로젝트 사탕발림 운영중 www.sugarspray.com

`만화의 날` 행사들

한국만화가협회가 제정한 ‘만화의 날’ 첫회 행사가 11월 전반에 걸쳐 진행되고 있다. 11월3일로 제정된 ‘만화의 날’은 1996년 청소년 보호법을 중심으로 만화계에 불어닥쳤던 심의와 제재 바람에 맞서 열렸던 ‘만화심의 철폐를 위한 범만화인 결의대회’의 개최일자를 기념일로 삼은 것이다. 올해 처음 기념식을 갖게 된 11월3일 행사에는 원로 작가들에 대한 공로상 시상과 만화가 밴드의 축하 공연이 있었다. 또 11월14일부터 18일까지 벽산빌딩에서는 ‘만화의 날 기념 전시회’가 벌어질 예정이다. 한국만화 역사상 처음으로 문화훈장과 대한민국 문화예술상을 수상한 고 김종래 화백과 고우영 화백의 특별전이 벌어지고, 만화계 추억의 사진들이 전시된다. 그리고 이 행사의 첫날인 14일에는 극도의 불황을 맞고 있는 한국만화시장의 활로를 모색하는 ‘만화산업 대토론회’가 개최된다. 고경일(상명대 교수), 조병권(서울문화사), 윤태호(만화가) 등의 발제에 이어 각계 인사들의 토론이 벌어질 예정이다(문의: 02-757-8485∼7). 월하의 기사 완결 장기 명인을 꿈꾸는 젊은 천재의 도전기를 그린 노조 준이치의 <월하의 기사>(대원씨아이)가 32권으로 완결되었다. 일본식 장기를 소재로 해 생소한 면이 있지만, 장기 한판에서 벌어지는 인생사의 변화무쌍함을 역동적으로 그리고 있어 전문 만화의 귀감으로 평가받고 있는 작품이다. 노조 준이치는 만화가와 편집부 등 만화출판 메커니즘을 소재로 한 <편집왕>으로 널리 알려진 만화가다.

카오스의 꽃이 피어나다

배창호 감독이 시네마서비스와 손잡고 대작영화 <흑수선>을 만든다는 소식은 듣는 이들에게 일종의 설렘을 불러일으켰었다. 90년대부터 급격한 세대 단절을 겪고 있는 현실에서 80년대 한국영화 중흥의 기수였던 감독과 오늘날 영화산업의 견인차 역할을 하는 조직이 의기투합했다는 사실이 의미있게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주류 영화계와 적조한 관계에 있었음에도 최근작 <정>을 통해 무뎌지기는커녕 한결 농익은 연출력의 묘미와 함께 독립영화 정신에 가까운 근성마저 보여주었던 감독이, 풍부한 물적 조건과 시스템까지 얻게 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작품성과 오락성을 겸비한 제대로 된 블록버스터”라는 홍보 문구나 부산영화제가 개막작으로 초청했다는 사실은 이 영화에 대한 기대감이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를 반영한다. <흑수선>이 첫 뚜껑을 연 부산 현장의 반응은 상당히 미묘하다. 그것은 ‘배창호의 모든 것이 여기에 있다’는 말로 요약됨직하다. 배창호적인 것의 실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80년대 초반부터 시작되는 그의 영화적 궤적을 거슬러올라가야 할 것이다. 배창호 감독이 이장호 감독의 <바람불어 좋은 날>의 조감독으로 영화계에 입문한 1980년은 한국영화가 오랜 빈사상태에 놓여 있을 때였다. 1961년 5·16으로 조짐이 비롯되어 1979년 유신시대가 막을 내릴 때까지 질기게도 계속되었던 정치적 검열과 산업적 강제조치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장호가 재기하고 배창호가 등장한 것은 “그야말로 예언적인 그 무엇”(이효인, <한국의 영화감독 13인>)이었다. 데뷔작 <꼬방동네 사람들>(1982)은 ‘꼬방동네’라고 불리던 산비탈 달동네 살이의 고달픔과 인간적인 숨결을 신인답지 않은 솜씨로 구축함으로써, 배창호를 단숨에 예술과 흥행의 두 마리 토끼를 쫓는 야심찬 젊은 감독으로 위치시켰다. “한국영화에 대한 관객의 철저한 불신을 허물어뜨리려 했다”는 감독의 의도는 멋지게 적중했다. 이어서 발표한 <적도의 꽃>(1983)에서는 아파트에서 망원경으로 여자를 훔쳐보는 남자를 통해 현대 도시인의 구겨진 내면과 일상을 표현했다. 배창호의 흥행 신화를 결정적으로 만들어준 <고래사냥>(1984)은 기이한 걸인과 소심한 대학생, 창녀촌에 추락한 천사 같은 여성이 고통과 위선으로 가득 찬 도시를 떠나 낭만과 힘의 상징인 고래를 찾아가는 호쾌한 로드무비였다. 같은 해에 나온 <깊고 푸른 밤>은 미국 대사관 앞에 아침부터 줄지어 서 있는 한국인들이 미국에 대해 갖고 있는 꿈의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해 할리우드풍의 드라마 기교와 스타일로써 질문했다. 한꺼번에 세 작품을 발표하면서 동시에 연속적인 흥행 경신을 이룩한 1984년은 배창호 스스로 “성취욕과 오만으로 들떠 있었다”고 회고할 만큼 눈부신 해였다. 이 시기 동안 배창호는 내러티브의 개연성, 현대적인 스타일, 소재의 동시대성과 도시 감각 등을 통해 정체되어 있던 한국영화를 일신시켰다. “흥행에 성공해서 시장을 활성화하는 데 일조를 했고, 나의 개인적인 이력이 영화를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용기를 주었을 것”이라는 자평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특히 이같은 성과가 오늘날과 같은 산업 시스템의 정비를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한 작가의 위력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기념비적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1986년 작 <황진이>는 배창호의 제2기를 선언하는 작품이었다. 자신의 영화 이력을 자성하면서 영화와 삶의 본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통스럽게 질문한 배창호는 자신의 맥박과 호흡이 이끄는 대로의 영화, 형식과 내용이 서로 조응하는 것으로서의 영화, 우리의 참모습을 비추는 거울로서의 영화가 되어야 한다는 답을 내렸다. <황진이>는 형식에 대한 감독의 자의식이 눈길을 끌었다. 그뒤 배창호는 여성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 남자의 지순한 고백과 사랑의 환희를 낭만적인 스타일로 그린 <기쁜 우리 젊은 날>(1987), 뇌성마비 장애인의 꿈같은 외출을 다정다감하게 그린 <안녕하세요 하나님>(1987) 등 사랑스럽고 착한 영화를 연달아 발표했다. 깊은 인간애 지닌 테크니션 그뒤로 배창호의 필모그래피는 조금씩 간격이 넓어진다. 아름다움의 이데아와 삶의 허무적인 본질을 신화적으로 엮은 <꿈>(1990), 지상의 천국을 질문하는 <천국의 계단>(1992), 90년대의 젊은 감성에 접근하려는 <젊은 남자>(1994), 자전적이고 현실적이면서도 배창호의 순정한 여성관이 그대로 드러나는 <러브 스토리>(1996), 점점 희미해져가는 한국적인 감성과 정조를 예민하게 포착한 <정>(2000)이 배창호 연출 경력의 두 번째 10년을 이룬다. 이러한 여정을 통해 배창호는 자신만의 몇 가지 지표를 드러냈다. 우선 그는 우직할 정도로 인간을 사랑하고 또 그 사랑을 신뢰한다. 80년대에 12편의 작품을 함께했고 이번 <흑수선>에서 다시 감동적으로 재회한 배우 안성기는 배창호의 가장 큰 특징을 “사람에 대한 사랑, 설혹 악인일지라도 따뜻한 시선을 보내는 것”이라고 꼽으면서, “영화를 사랑하고 함께 만들고 함께 죽어갈 친구로서 그런 시각이 변치 않고 유지되기를 바란다”며 지극한 애정을 피력했다. 배창호는 또한 그와 같이 낙관적인 인생관을 스타일화할 수 있는 테크닉을 가지고 있다. 양자가 행복하게 조우하는 경우도 있고, 작위적인 조형성이 튀어나오거나 곰삭지 못한 여린 인생관이 두드러져 보이는 경우도 있었지만, 카메라만을 가지고 인간과 공간과 사물의 감성을 그려낼 수 있는 장인적 솜씨는 오늘날의 한국영화계에서 흔치 않은 연출력이다. 배창호의 세 번째 10년을 여는 작품 <흑수선>이 여러 가지 의미에서 앞 시대의 배창호가 보여준 것들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기도 하고 깊은 생각을 요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결론을 미리 당겨 말한다면 배창호는 온 길보다 갈 길이 많은 ‘젊은’ 감독인 것 같다. 이 영화의 역사적인 배경을 설명하는 두 단락의 감상적인 자막이 다소 의아한 느낌을 불러일으키지만 이내 두 종류의 서로 다른 이미지가 주는 임팩트가 이어진다. 화려하지만 부서질 듯한 느낌을 주는 이미지와 어둡고 감정이 풍부한 이미지들이 교대하는 가운데, 아찔하도록 현란한 순간들이 간헐적으로 등장한다. 예컨대 의문의 킬러로부터 형사가 살해당하는 밤바다의 해안선은 에드바르트 뭉크의 그림 <절규>를 연상시킬 만큼 밀도 높은 긴장감을 전달한다. 4배속의 슬로모션을 사용하고 필름의 은입자로 채도를 조절한 포로들의 탈출장면의 경우에는 한 공간, 한 순간 안에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 공존하던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의미를 화려하게 전달한다. 오 형사가 눈에 보이지 않는 킬러와 대립하는 대숲의 결투 역시 360도 스테디 캠이 인간을 에워싼 정체불명의 불안을 표현한다는 것을 예증한 회심의 장면이다. 이 영화에서 시공간의 기본 축을 이루는 것은 이념이 사라져버린 메트로폴리스 서울과 이념의 폭발장이었던 1952년의 거제도 포로수용소다. 낡은 사진, 손전등, 목각인형, 일기장과 같은 소도구들이 50년 전의 역사적 시공간과 현재를 교차시키는 존재 전이의 구멍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도구가 너무나 많은 것을 떠맡을 때에는 도구가 무너지고 영화도 무너지는 느낌을 받게 된다. 예컨대 명백히 사후기록적인 톤의 일기장이 드라마 장치로서 적절했는지에 대해서 확신하기 어렵다. 공간적으로는 이색적인 각도에서 바라본 서울역, 담양의 대나무숲, 해남의 두륜산, 화엄사, 서대문 형무소, 구 벨기에 대사관, 일본 미야자키현 등을 종횡무진한다. 그러나 거제도 포로수용소라는 장소가 갖는 역사적 의미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유도된 상태에서, 엄밀한 고증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인 장소들이 그 역사성을 풍요롭게 드러내지 못하고 탐미적인 연출과 사랑의 감정에 소요될 때 그 공간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회의에 빠지게 될지도 모른다. 미야자키에서의 장면 역시 관광명소처럼 보이는 로케이션 때문에 감정몰입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 같다. 감독과 배우가 공히 50년의 시차를 빈번하게 교차하는 시간적 특성을 이 영화의 가장 큰 난점으로 꼽았는데, 주요 배역진의 연기가 그 난점을 돌파하는 힘을 전해주지 않는 것도 단순히 분장상의 난점으로 돌리기에는 석연치 않다. 두마리 토끼를 쫓은 <흑수선> 이 영화가 빈번하게 채용하는 전형적인 요소들 때문에 심심해하고 있을 무렵이 되면 “혼자 두는 바둑은 재미없어. 앞 수를 내가 다 아니까”라는 대사가 나온다. 재미있는 대사였다. 이를테면 유능하지만 범죄자보다 더 거친 젊은 형사와 경험 많은 상사가 사사건건 대립하는 가운데 결국 상사가 관용을 베풀고 젊은 형사는 승리인지 패배인지 분간할 수 없는 성취를 거둔다는 구성이 할리우드 경찰영화의 도식이라면, 맹목적인 투쟁성, 강간과 즉결 처형도 서슴지 않는 폭력성, 패배감과 분열, 혼란과 배신 등으로 점철된 좌파 이미지는 <피아골>(1955) 이래 반복되는 반공영화의 도식이다. 젊은 관객에게 보여줄 수 있는 스펙터클과 나이든 세대가 공감할 만한 주제의식을 둘 다 잡겠다는 의지가 강박관념으로 작용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흑수선>은 무엇을 남겼을까. 기자회견의 분위기를 종합해보면 이 영화는 시나리오나 연기 톤, 프로덕션 과정에 이르기까지 배창호 감독 자신이 진두지휘하고 최종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50여년이나 지난 뒤에 의문의 연쇄살인사건을 일으키고, 죽은 연인의 손가락에 금반지를 되돌려주며 울부짖는 우직한 사랑의 힘이야말로 역사의 생지옥조차도 넘어서는 원동력이었다고 말하는 주제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배창호 감독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누룽지를 나눠먹는 장면이나 포도즙을 짜서 연인에게 주는 장면 등은 지극히 배창호적인 에피소드로 보인다. 또한 카메라를 가지고 어떤 정서적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달인의 경지도 배창호의 것이다. 그러나 배창호의 애정관과 인간관이 이토록 길고도 복잡한 역사로까지 고스란히 확장된 상태에서 ‘배창호적인 모든 것’들은 이질적인 채로 한데 엉겨 웅성거린다. 드라마 구성의 난항이 그대로 방치된 이유는 프로듀서에게 질문해야 할지도 모른다. 배창호 감독이 유능한 흥행사, 재능있는 테크니션, 따뜻한 인간이라는 개별 요소들을 진정한 거장의 숨결과 솜씨로 통합해가는 모습은 미래의 기대와 즐거움으로 남겨둬야 할 것 같다. 그런 기대를 아무한테나 걸 수 있진 않을 것이다. 배창호 감독에게는 그러고 싶다. 김소희/ 영화평론가 cwgod@hanmail.net▶ 장인의 세기와 영화청년의 패기가 뒤엉킨 <흑수선>을 말한다 ▶ 영화제 인사들의 <흑수선> 관람평 ▶ 배창호 감독 인터뷰

“종합문제를 푸는 심정이었다”

<흑수선>은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을 몇시간 앞둔 11월9일 1시, 부산 시네마테크에서 열린 시사회에서 기자, 평론가들과 첫 만남을 가졌다. 프린트는 이미 완성돼 있었지만 영화제 쪽의 요청으로 개막일까지 시사를 미룬 것. 이날 시사회는 개막작 상영을 코앞에 두고 있었는데도 객석은 가득 찼고 외국 기자들과 피에르 리시앙 등 해외영화제 관계자들도 눈에 띠었다. 아마도 자신의 영화 인생에서 가장 흥분된 날을 보내고 있을 배창호 감독을 현장에서 만났다. 부산영화제 예매 개시 직후에 매진돼 화제가 됐다. 감회가 새로울 텐데. 기분 좋지만, 좀 우려가 된다. ‘재미’만을 추구한 영화는 아닌데, 관객이 그것만 기대하는 건 아닐까 해서. 미스터리스릴러라는 장르적 운반수단을 통해서 조금 진지한 얘기를 전달하고자 했다. 영화의 어떤 요인이 관객의 기대를 부추기고 있다고 생각하나. 마케팅적인 요소겠지. 스타가 나왔다는 것, 그리고 볼거리가 화려하다는 것이 부각됐으니까. 부산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됐다는 점 때문에도 기대가 많은 것 같다. 하지만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같은 영화는 아니다. <흑수선>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부산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됐다는 것이 감독 개인에겐 어떤 의미인지. 영화제가 해를 거듭하면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고, 그만큼 국내외적인 관심이 쏠리는 자리라서, 영화의 위상에도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 대중성은 물론이고, 작품성에 있어서도 인정을 받았다는 뜻이기도 하고. 개막작 선정 사실이 좋은 자극이 됐다. 그 때문에 후반작업도 더 열심히 하게 된 것 같고. 촬영과 후반작업이 좀 빠듯했던 걸로 안다. 아쉬움은 없는지. 영화 전체의 퀄리티에 영향을 끼칠 만큼 빠듯하진 않았다. 감독으로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더 힘들어지긴 했지만. 편집이나 음악 작업을 촬영 중반부터 틈틈이 해 뒀기 때문에 특별히 어려운 점은 없었다. 모니터 시사가 2회 있었던 걸로 안다. 당시 반응은 어땠나. 좀 찡할 거라고 짐작한 대목에서 관객이 생각보다 크게 반응했다. 황석이 손지혜를 위해 총알받이로 나서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그리고 사건이 해결되면서 스토리의 비극성이 부각되는 시점에서, 관객이 울더라. 또 하나 느낀 건 요즘 관객이 사소한 걸 잘 꼬집어낸다는 점. 눈들이 참 섬세해졌다. 그들의 지적과 반응이 많은 도움이 됐다. 가벼운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는 요즘 경향에 위축되진 않는지. 시대적인 흐름이긴 하지만 영화를 소모품으로, 킬링타임용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은 좀 우려가 된다. 영화가 갖는 ‘의미’라는 걸 너무 버거워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요즘 관객이 영화를 다각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자세를 갖추고 있다는 믿음은 있다. 제작 발표 당시 ‘배창호 감독이 블록버스터를 만든다’는 사실에 관심이 집중됐었다. 뭔가 다를 거라는 기대에서다. 한상준 프로그래머가 90% 가편집본을 보고 그러더라. 배창호 감독 영화라고. 어떤 스케일로 또 어떤 스타일로 만들더라도, 내가 인간을 보는 시각, 형식적인 리듬감, 절제적인 요소들, 자연을 이용하는 방식 같은 것들은 크게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번 영화에서도 달빛이나 햇살, 그림자, 바람, 안개, 비 같은 자연적인 요소들에도 이야기와 감정을 담으려고 했다. 같은 액션이라도 인간의 정서와 연결해 보여주려 했고. 그런 아우라가 있다고 할까. <최후의 증인>이라는 소설과 영화가 원작이라고 들었다. 원작의 어떤 점에 끌려서 영화화를 결정했나. 각색 포인트가 있었다면. 이야기의 뼈대는 같지만 범인은 다르다. 원작의 허무적인 분위기를 지우고, 역사에 상처받고 희생당한 두 남녀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원작은 이야기의 주공간이 빨치산인 반면, <흑수선>은 거제포로수용소로 접근했다는 점도 다르고. <텔미썸딩> 같은 형사영화가 대중적 인기 장르로 자리잡고, <쉬리>나 <공동경비구역 JSA>처럼 전쟁이 낳은 남과 북의 현실, 그런 지극히 한국적인 소재를 다룬 영화가 등장하는 걸 보면서 ‘이제 때가 됐다’는 생각을 했었다. 한국전이라는 소재야말로 시각적으로 테마적으로 국제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영화적 스펙터클로 관객을 잡아끌 수 있는 좋은 이야깃거리였다. 이제 한국영화계가 그런 소재를 형상화할, 기술적인 능력을 갖춘 것이다. 거제포로수용소를 이야기의 주공간으로 끌어들인 이유는 무엇인가. 우연하게 시작했다. 지난해 8월에 거제도로 여행와서 포로수용소 기념관에 들렀는데, 다시 지어 놓은 막사들을 보면서, 참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최후의 증인>이 떠오르더라. <제17포로수용소>나 <콰이강의 다리>나 <대탈주>처럼 2차대전을 다룬 고전영화들이 있잖나. 이 공간이라면 그처럼 의미도 담기고 시각적으로도 충분히 강렬한 영화를 찍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흑수선(이미연)’의 내레이션 위주로 이야기를 전개했다. 내레이션은 확실히 시나리오보다 늘어났다. 스토리 전개상 필요한 사건들을 압축하다보니 그렇게 됐다. 방대한 이야기를 펼치기엔 시간이 부족하니까. 과거로 들어가는 매개체가 ‘흑수선’의 일기장이기 때문에 그걸 읽어내려가는 듯한 형식을 취하는 게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한국전은 지금 젊은 관객에게 낯선 역사다. 거제포로수용소가 어떤 곳인지도 잘들 몰라서 그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고도 생각했다. 오프닝에 거제포로수용소에 대한 설명 자막을 넣은 것도 그런 이유였다. 역사적인 배경을 알려주고, 또 사실감을 던져주기 위해서는 사전 설명이 필요했다. 특히 젊은 관객과 외국 관객을 위해서. 아이러니인 것은, 그 시대 그 공간에 놓인 캐릭터들의 정체성과 이념이 탈색돼 있다는 사실이다.묘사할 것만 묘사했다. 민족 분단의 역사적 사실에 접근한 것이 아니라 전쟁의 비극성, 그 보편적인 비극성을 다룬 것이다. 이건 리얼리즘영화가 아니다. 그렇게 가기엔 시간도 없었고, 톤도 맞지 않았다. 미스터리스릴러라는 장르와 휴먼 드라마적인 메시지를 어우러지게 하는 일이 연출의 관건이었을 것 같다. 촬영 당시에도 이야기했듯이 ‘종합문제’를 푸는 심정이었다. 이 영화에는 드라마적인 요소가 너무 많다. 사건도 많고, 시대도 왔다갔다 하고, 캐릭터 소개도 해줘야 하고, 복선도 갈등도 많아, 어떻게 꾸려나가야 할지 골치가 아팠다. 그런데 진행하면 할수록 처음 생각보다 ‘깊이’가 생겼다. 이상하게 제작자도 그걸 바라더라. 진국을 끓여서 기름기를 걷어냈다고 할까. 이번엔 편집도 새로 배운 셈이다. 필름 10만자를 써서 2시간 넘는 영화로 찍어 놨지만, 군더더기를 걷어내고 나니 1시간40분도 쓰기 나름으로 긴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50년의 시간을 넘나드는 스토리라서, 배우들에게 특별한 연기 주문이 필요했을 것 같다. 같은 소재의 영화를 30년 전에 만들었다면, 연기와 분장에서 별로 걱정할 것이 없었을 것이다. 처음에 라텍스 특수분장을 시도했는데, 배우들 얼굴에 심한 트러블이 일어나는 등 부작용이 많았다. 어차피 극사실주의적인 표현은 어려웠기 때문에, 배우들에게 그 세월의 간극을 감정 연기로 표현해보자고 주문했다. 회화의 경우에도 사실주의가 있는가 하면 인상주의도 있지 않나. 배우들과의 호흡은 잘 맞았나. 안성기씨를 제외하곤 서로 잘 모르는 상태라 처음엔 좀 서먹했다. 그런데 미연씨도 좋은 의견을 많이 내줬고, 정재씨도 감독을 신뢰해주고 잘 따랐다. 안성기씨 덕에 내가 좀 편했다. 현장에서 솔선수범하니까, 내가 편했지. 우리 부감독이었다. (웃음) 비주얼에 특히 많은 공을 들였다. 시대와 공간에 따른 시각적 컨셉이 있었는지. 전반적으로 구도의 입체감을 살리려 했다. 스크린이라는 평면이 3차원적으로 느껴지도록. 슈퍼35mm 촬영으로 와이드하게 펼치면서, 선의 대칭을 살리려 했다. 과거 신은 범행의 동기가 드러나는 대목에선 세피아톤으로 좀 강렬하게 갔고, 나머지 과거 신은 갈색으로 은은하게 잡았다. 현재는 블루와 그레이로 모던한 느낌을 살리려 했다. 오 형사와 한동주가 마주 하는 일본에서의 촬영분은 원색을 중심으로 써서 극적인 강렬한 느낌을 주려고 했다. 이런 색감이 잘 사는 공간을 찾아 장소를 선정하고 촬영을 했다. 큰 촬영이 많았는데, 어떤 신이 특히 힘들었나. 탈출 포로들이 폐교 바닥의 땅을 파다가 수맥을 건드리는 장면이 있다. 2분 분량인데, 그 장면을 일주일 동안 찍었다. 배우들이 수영을 못해서 많이 힘들어 했고, 감독이 물 속에 들어가 컨트롤할 수 없는 상황이라,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결과엔 어느 정도 만족하는지. 만족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때론 능력이 부족해서, 때론 시간이 부족해서, 때론 판단이 성급해서, 제대로 못한 부분들이 있다. 하지만 최선을 다했느냐 열정을 갖고 임했느냐의 잣대로 답하자면, 만족한다. 대중영화 속으로 7년 만에 들어왔다. 관객이 많이 까다로워졌다는 걸 느낀다. 스탭부터 굉장히 세밀하더라. 예전엔 그냥 넘어갔던 디테일들을 일일이 따지고 들어오더라. 그동안 내가 안일하게 생각했던 부분들이 있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차기작 계획을 묻기엔 좀 이르지만, 다음 행보가 정말 궁금하다. <흑수선>의 결과에 관계없이, 또 내가 하고 싶은 영화를 할 거다. 아주 강렬한 영화가 될 거다. <흑수선>처럼 현대적인 기법이면서, 한국적인 색깔을 지닌 그런 작품. 박은영 cinepark@hani.co.kr▶ 장인의 세기와 영화청년의 패기가 뒤엉킨 <흑수선>을 말한다 ▶ 영화제 인사들의 <흑수선> 관람평 ▶ 배창호 감독 인터뷰

영국 르네상스 필름, 이름처럼 `르네상스`

테리 길리엄, 첸카이거 등과 차기작 추진하는 등 제 2의 도약 중 쟁쟁한 감독들이 영국의 영화사 르네상스필름으로 몰려들고 있다. 테리 길리엄, 첸카이거가 이곳에서 다음 영화를 연출할 계획이며 <노팅힐>의 로저 미첼, <너스 베티>의 닐 라뷰트 등도 연출계약을 맺었다. <버라이어티>의 런던발 기사에 따르면 르네상스필름은 올 초 세일즈 부서를 혁신한 데 이어 이같은 프로젝트로 도약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들 프로젝트 가운데 내년 여름 촬영할 계획인 테리 길리엄의 연출작 <굿 오멘>은 컬트 작가인 테리 프라쳇과 닐 가이먼의 시나리오로 거대예산이 들어가는 판타지영화이다. 로저 미첼은 영국감독에게 맡겨질 4편의 저예산영화 프로젝트 가운데 2편을 연출하기로 계약했는데 시나리오를 쓰는 인물 중에는 <인티머시>의 작가 하니프 쿠레이시도 들어 있다. 첸카이거의 차기작은 액션과 로맨스가 들어 있는 시대물로 맨주먹으로 권투하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이다. 각본을 쓴 티모시 해리스가 프로듀서도 맡고 있는 영화. 닐 라뷰트의 신작은 그가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하는 작품이지만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르네상스필름은 이외에도 영화사 굿머쉰이 만드는 <로스 알라모스> 공동제작을 추진중이다. <로스 알라모스>는 원래 <크루서블>의 니콜라스 하이트너가 연출할 예정이었으나 하이트너가 로열 내셔널 극장의 연출자로 지명되는 바람에 새로운 감독을 물색중이다. 르네상스필름은 최근 런던에서 폴 맥기건의 신작 <모랄리티 플레이> 시사회를 갖고 배급계약을 맺기 위해 미국 메이저 배급사들과 접촉중이며 조지 클루니가 감독하는 영화 <컨페션 오브 데인저러스 마인드> 제작에도 참여하고 있다. 이 영화는 12월 촬영에 들어갈 예정. 르네상스필름은 배우조합 파업 여파로 제작비 조달에 실패했던 프로젝트들의 개발비용을 조만간 확보할 계획이다. 르네상스필름은 이처럼 다양한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것과 동시에 유나이티드 아티스츠에서 세일즈 부서 책임자를 스카우트했다. <버라이어티>는 “이런 변화가 배급시장의 동향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위한 것이며 영화의 개발과 제작과정을 좀더 탄력적으로 만들 것”이라는 르네상스필름 관계자의 말을 인용했다. 르네상스필름의 르네상스가 이뤄질지 두고볼 일이다. 남동철

꽃섬/와니와 준하/키스 오브 드래곤/GO

■ 꽃섬 화장실에서 애를 낳아 변기에 흘려보낸 17살 소녀 혜나, 딸에게 피아노를 사주려고 매춘을 하다 성관계하던 할아버지가 복상사하는 바람에 남편에게 들통난 옥남, 설암에 걸린 뮤지컬 배우 유진은 상처와 슬픔을 잊으러 꽃섬으로 떠난다. 송일곤 감독, 서주희, 임유진, 김혜나 출연, 씨앤필름 제작, 상영시간 110분 김봉석 날개없는 천사들의, 성지순례기 ★★★☆ 심영섭 꼬마 거장, 관념의 섬으로 가다 ★★☆ 유지나 영혼의 슬픔을 잡아내고 치유하는 송일곤 이미지의 매혹!★★★★ ■ 와니와 준하 동화부 작화감독으로 애니메이터 와니(김희선)는 시나리오 작가 준하(주진모)와 같이 산다. 이들의 안온한 동거생활에, 와니의 동생 영민의 귀국 소식이 파문을 던진다. 김용균 감독, 김희선, 주진모, 조승우, 최강희 출연, 청년필름 제작,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배급, 상영시간 113분 김봉석 너무나 세련된 포장의 순정만화 ★★★☆ 박평식 애니메이션, 그 순정의 씨알만 다시 보고 싶다 ★★★ 심영섭 아깝다, <러브 레터>가 될 수 있었는데 ★★★ ■ 키스 오브 드래곤 경찰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중국 최고의 경찰 류는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중국의 마약왕을 체포하기 위해 파리로 온다. 류는 프랑스 경찰 리차드와 함께 호텔 방에 도청장치를 설치하고 용의자를 기다린다. 그러나 느닷없이 방에 있던 콜걸이 용의자를 공격한 데 이어 리차드가 들어가 용의자 일행을 모두 죽인다. 크리스 나온 감독, 이연걸, 브리지트 폰다 출연, 코리아 픽쳐스 수입·배급, 상영시간 98분 김봉석 이연걸, 영웅재림 ★★★☆ 유지나 홍콩무협영화의 맥도널드화는 이런 식으로… ★★☆ ■ GO 자신의 정체성은 재일한국인이 아니라, 코리안 재퍼니즈라고 믿는 고등학생 스기하라는 아버지를 따라 조선 국적을 한국으로 바꾸고, 일본 고등학교로 진학한다. 그 무렵 스기하라는 친구의 생일파티에서 만난 사쿠라이에게 급속히 빠져든다. 유키사다 이사오 감독, 구보즈카 요스케 출연, (주)튜브엔터테인먼트 배급, 상영시간 122분 김봉석 더 경쾌한 스텝을 밟았어야 할 영화 ★★☆

가슴앓이, 사람앓이

한동안 심한 가슴앓이를 했다. 스산한 가을 바람에 멜랑콜리해졌거나 아름답고 슬픈 개인사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꽤 오랫동안 붙들고 있던 프로젝트를 슬그머니 포기한 까닭이다. 우유부단하고 소심한 성격 탓이기도 하지만 제작자의 판단과 결정이 감독이나 작가에게는 비정한 현실이 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자괴감이 컸다. 영화 만드는 일을 시작할 때 나름대로 거창한 청사진을 그리면서도 절대 하지 않겠다고 내심 다짐한 일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시쳇말로 ‘쪽팔리는 영화’ 만들지 않겠다는 것이고(돈버는 오락영화를 만들지 않겠다는 말이 절대 아님), 또 하나는 다른 사람에게 일로 상처주는 짓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제작자가 감독이나 작가와 주고받는 큰 상처라는 건, 기껏 공들여 개발한 프로젝트를 감독이나 작가가 다른 회사에서 제작하겠다고 등을 돌리거나 제작사가 질질 끌다가 결국은 포기해서 감독이나 작가를 상심하게 하는 경우일 것이다. 아직 영화는 한편도 안 만들었으니 한 가지 다짐은 유효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겠다는 다짐은 지키지 못한 셈이 되고 말았다. 지난 봄, 나이가 사십줄에 접어든 한 감독 지망생이 시나리오를 들고 찾아왔다. 수년 전 스치듯 인사를 나눈 것이 인연의 끈이었다. 이름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지만, 누구나 아는 유명 감독의 연출부 출신으로 시나리오를 쓰는 사람이라는 게 내가 아는 전부였다. 다니던 빵빵한 직장 그만두고 삽십대 후반에 연출부를 했고, 몇년 동안 시나리오에 매달려 있었다는 사실은 뒤늦게 알았다. 처음 그의 시나리오를 보고 선명하지 않은 감은 있지만 묘한 매력을 느꼈다. 30대 남자들 이야기인데다가 간단치 않은 존재에 관한 성찰을 담은 ‘무모함’에 호감이 갔고, 올곧은 신념이 듬직해보이기도 했다. 덜컥 ‘추진해보자’는 약속을 했지만 한동안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얼마 뒤 감독이 매만진 시나리오를 다시 받았을 땐 녹록지 않은 이야기를 대중상업영화로 풀어낼 요량을 하지 못했다. ‘시장’ 상황까지 감안하면 초보 제작자가 감당하기 버거운 프로젝트임이 분명했지만, “최선을 다해보고 안 되면 하는 수 없고, 결과에 대해서는 원망하지 않겠다”는 그의 ‘응원’에 기대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몇번을 미루다가 11월 첫주, 결국 제작하기 어렵겠다는 ‘통지’를 했다. 본의 아니게 몇달을 질질 끌다가 내치는 관행을 답습한 꼴이 영 마뜩찮을 따름이었다. 회사 만든 지 채 1년도 안 됐지만 벌써 갈라서서 다른 제작사에서 제작 준비하는 감독도 있고, 갈 길을 달리한 프로듀서도 있다. 몇 차례 그런 소동을 겪으면서도 담담했던 것은 뭐라고 뒷말이 나돌아도 양보할 수 없는 원칙을 지켰고, 이성적인 판단과 상식과 순리에 따른 당당한 결정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가슴앓이의 원인을 돌이켜보면 사람의 덫에 빠졌던 시행착오라는 생각이다. 영화 만드는 일도 결국은 사람이 하는 일이지만, 영화처럼 창의적이면서도 고도로 산업화된 일은 사람보다 프로젝트를 중심에 놓고 타산해야 한다는 점을 새삼 확인했다. 그로부터 ‘그동안 애써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짧은 이메일 답장을 받은 날, 바쁜 일로 경황없는 직원들을 들쑤셔 노량진 수산시장에 술을 마시러 갔다. 하지만 술은 한잔도 안 마시고 콜라만 들이켰다…. 원래 술을 못 마시니까. 그래도 난 그날 취했다. 그가 언제가 보란 듯이 듬직한 영화를 만들어 나를 시사회에 초대하는 ‘반전’을 기대한다, 진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