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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검색결과

기사/뉴스(9404)

너와 나의 20세기,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서른한살이었다. 당시 나는 영국의 한 다큐멘터리 프로덕션에 소속된 촬영감독 어시스턴트로 일하고 있었다. 그해 여름 나와 나의 팀은 1737년 금괴를 싣고 아라비아해에 침몰한 영국상선 인양작업을 촬영하기 위해 인도의 뭄바이에 수개월간 머물고 있었다. 우린 뭄바이 시내의 작은 외국인 클럽에서 처음 만났다. 그는 바의 한 구석에 홀로 앉아 만취한 프랑스 관광객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당구치는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짙은 담배연기와 술 향기 사이로 간간이 그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관광객 중 한명과 인도인 청년 사이에 시비가 붙는 바람에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고 난 와중에 그가 있는 곳까지 떠밀려갔다. 그는 한국국적 참치잡이 어선의 부주방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다음날이면 뭄바이를 떠난다고 말했다. 우린 많은 인도산 위스키를 마셨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날따라 유난히 서늘한 바람이 밤하늘을 메우고 있었다. 나는 작은 스케치북과 연필을 꺼내어 그를 그리기 시작했다. 우린 많이 취해 큰 소리로 웃으며 부둣가를 거닐었다. 그는 예술가 지망생이었다고 한다. 밴드활동을 하기도 했으며 꽤 많은 시를 썼다고도 했다. 한때 미술관에서 디자이너로 일하기도 했다는 그는 짝사랑하는 여자에게 자신이 그토록 ‘boring’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어느날 갑자기 배를 탔다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5년이 흘렀다고 한다. 우린 짧은 입맞춤을 나누었다. 난 홀로 노래를 흥얼거리며 춤을 추었고 그는 여전히 조용한 눈으로 나와 나의 하늘색 원피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부두 위로는 작은 아담스키형 유에프오가 날고 있었고 다음날 그가 뭄바이를 떠났다. 3년 뒤 케미컬 브러더스의 한국 공연 다큐멘터리를 촬영하기 위해 서울을 찾았을 때 우린 우연히 다시 만났다. 그는 여전히 하얀 손과 조용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우린 그의 자그마한 작업실에서 술을 마시며 서로를 안았다. 그는 어색한 듯 잠시 미소를 지었고 나는 불을 끄기를 원했다. 그는 스탠드를 끈 뒤 비디오를 작동시켰다. 모니터가 밀어내는 하얀 입김들이 그와 나의 맨몸 위로 반사되고 있었다. 일정한 리듬으로 흔들거리던 그의 어깨너머로 내가 보고 있던 영상은 2001: a space odyssey의 한 장면이었다. 성냥을 건네며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물체는 멀어질수록 작게 보이는 것이 아니에요. 정말 작아지는 것이죠. 우린 모두 속아왔어요.” 거대한 도시의 미세한 영혼들 위로 작은 유에프오가 날고 있었다. 우린 모두 속아왔어요. 착한금붕어가죽으면가는곳에서

[베를린] 동성애자 주제 <헌법 175조> 지난 10월 말 개봉

10만 비극적 사랑에 바친다 “히틀러는 동성연애자?” 판매부수 1위를 자랑하는 독일 황색신문 <빌트>가 브레멘의 사학자 로타 마흐탄의 신간 <제3제국(나치)과 동성연애>를 소개하며 달아놓은 제목이다. 센세이셔널한 기사 덕분에 마흐탄의 신간이 주목되는 가운데, 나치시대 동성연애자를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 <헌법 175조>가 10월 말 베를린에서 개봉됐다. 사회 변방에 선 계층들을 따스한 시선으로 다독거리는 다큐멘터리로 유명한 감독 로버트 엡스타인과 제프리 프리드먼의 <헌법 175조>은 나치헌법 175조를 내세운 히틀러의 동성연애 말소정책에 희생된 10만명의 비극을 다루고 있다. 동성, 특히 남성간의 애정행각을 비윤리적, 비사회적 범죄행위로 간주한 헌법 175조는 지금까지도 동성연애에 대한 법적, 사회적 차별을 상징하는 메타포. 이 조항이 처음으로 성문화된 것은 18세기 말로 당시 프로이센 제국은 남성간의 성교를 법적으로 처벌할 수 있다고 규정해놓았다. 그러나 이 조항이 실제 적용되기 시작한 것은 히틀러 집권 뒤로, 히틀러는 35년 이 법문에 살벌한 처벌방식을 첨부해 동성연애자들을 탄압하는 175조를 헌법에 추가했다. 1933년에서 45년까지 체포된 동성연애자 10만명 중 1만5천명이 강제노동수용소에 수감되어 이른바 사회화교육을 거친 뒤 거세수술을 받거나 인체실험 대상이 되어 죽어갔다. 일종의 인터뷰 필름이라 할 수 있는 <헌법 175조>는 강제노동수용소에서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남성 5명과 여성 1명을 주인공으로 한다. 이들이 카메라 앞에서 담담히 들려주는 개인사가 영화의 뼈대로 알자스 출신 생존자는 애인이 수용소 군견 셰퍼드에게 물려 죽어가는 현장을 목격하도록 강요받았다고 말한다. 오로지 수많은 남자들과 지내고 싶다는 바람으로 입대했다가 신검에서 수용소로 직행한 귀족의 아들도 있다. 엡스타인과 프리드먼은 사학자 클라우스 뮐러의 자문을 받아 신빙성 있는 시대다큐를 제작하는 데 성공했다. 생존자 6명의 증언 사이에 삽입된 사료들 역시 뮐러의 꼼꼼한 고증을 거쳤다. 지난해 선댄스영화제에서 다큐감독상, 베를린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협회상 등을 받았던 <헌법 175조>는 이들의 전작 <셀룰로이드 클로짓>과 마찬가지로 일반 관객에게도 어필할 수 있는 대중적 다큐영화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다. 즉 맘에 와 꽂히는 뭉클한 주제, 정치적으로는 절대 중도노선을 걸을 것, 미학적으로는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되, 지성적 측면에서는 새로울 것이 없는 김빠진 맥주 스타일의 다큐 말이다. 국제관객을 의식한 결과인 듯, 히틀러 집권 초기에 발생한 베를린 제국의사당 방화와 분서사건에 대한 친절한 설명이 지나침에 반해, 전후 독일에 대한 설명은 주석 수준에서 맴돌고 있다는 비판적 목소리도 들린다. 하지만, <헌법 175조>는 600만 유대인 희생자에 가려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했던 나치 동성연애자 희생자 10만명을 기리는 영화적 추모사라는 점만으로도 중요한 의미와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고 하겠다. 베를린=진화영 통신원

“왜 이렇게 사는 게 뜻대로 안 되니…”, <복수는 나의 것> 촬영현장

스산한 강바람에 갈대가 너울대는, 제법 초겨울 정취가 물씬 풍기는 한적한 시골의 강변. 두 사내가 매서운 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물 속에 뛰어든다. 한참 뒤 ‘컷’ 소리에, 강가에 몰려 있던 많은 사람들의 박수를 받고 나온 두 사내는 추위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다. 이때, 다가온 한 사내가 한마디 내뱉는다. “업고 나오니까 하균이 얼굴이 잘 안 보이는데…. 강호가 한손으로 목을 잡고 끌고 나오면 어떨까?” 사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두 사내는 다시 차가운 강물 속에 뛰어든다. 지난 11월 중순 전북 순창군의 섬진강 상류,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흥행 성공 이후 메가폰을 잡은 박찬욱 감독의 새 영화 <복수는 나의 것>의 라스트신 촬영현장이다. 복수심에 가득찬 동진(송강호)이 딸의 유괴범 류(신하균)를 강물로 끌고 들어 가는 장면. 원래 오전에 찍기로 했지만 눈과 비가 오락가락하는 변덕스러운 날씨 덕분에 오후 4시가 넘어서 촬영이 진행됐다. 두 번째 들어간 물 속에서 연기를 하던 송강호와 신하균은 다시 NG가 나자 물에서 나오지도 않고 재촬영을 요청해 주위의 스탭들로부터 격려의 박수를 받았다. 이날 촬영이 없었던 배두나는 촬영장에 나와 신하균을 응원, 항간의 열애설 사실을 확인하려는 기자들의 인터뷰 공세에 곤욕을 치러야 했다. 박찬욱 감독은 “이번 영화는 코믹, 에로, 액션, 호러가 어우러진 매우 톡특한 영화가 될 것 같다”며 특히 “배우들의 연기에 기댄 영화로 나는 별로 할 일이 없었다”고 겸손해하기도. 현재 90% 이상 촬영을 마쳤고, 내년 2, 3월경 개봉 예정이다.

반항의 시대, 문화적 혁명

1969년 제작된 <이지 라이더>의 출현으로 할리우드는 한 차례 홍역을 치른다. 이전까지 영화의 소재로 여겨지지 않았던 마약, 섹스, 록음악의 등장은 가히 혁명적이었으며, 영화 속 오토바이는 곧 저항과 일탈의 아이콘이 되었다. 이 영화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빛나는 성과도 있다. <이지 라이더>는 할리우드의 촬영시스템에 근본적인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세트촬영에만 국한돼 있던 당시의 풍토에 곧 야외로케이션 촬영을 위한 새로운 장비와 시도들이 이루어졌다. 고감도 필름과 가벼운 조명기구들을 찾게 되었으며 오토바이와 조명장비를 실은 트럭이 준비되었고 충격에 강한 컨버터블카에는 카메라와 베니어판이 설치되었다. 열악한 장비였지만 이제까지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방식이 아닐 수 없었다. 촬영감독 라슬로 코박스의 거친 핸드헬드 카메라와 360도 회전하는 카메라는 시대를 풍미할 자유로운 영웅상을 담느라 바삐 돌아가고 있었다. “단지 직업을 구하는 차원이 아니라 촬영은 곧 내 인생이었다.” 1933년 헝가리의 작은 농촌마을에서 태어난 라슬로 코박스에게 영화는 취밋거리가 아닌 운명이자 그를 지배해온 신념이었다. 어린 시절 나치치하의 조국에서 그는 정치선전물로 상영되던 영화의 포스터를 배포하였고, 그 보수로 마을 극장의 맨 앞줄에 앉아 접한 영화와의 첫 만남은, 16살의 일탈로 이어졌다. 농부인 부모의 바람을 저버린 채 수업을 빼먹고 극장에서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이후 부다페스트의 영화학교에 진학하여 닥치는 대로 영화를 섭렵하던 그는 <시민 케인>을 보았던 때의 감동을 평생 잊지 못했다. 자본주의의 영화를 설명해줄 어떤 자료도 없던 상황에서 독특한 영화의 조명과 구도는 그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미국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56년 당시 소련에 반기를 든 헝가리 혁명의 틈새였다. 코박스는 친구 빌모스 지그몬드와 함께 35mm 흑백카메라로 자유에의 절규를 3만 피트에 담았다. 그리고 그들은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한다. 우여곡절 끝에 필름은 팔렸지만, 기회의 땅 아메리카는 망명자의 신분으로 살아내기에는 여전히 낯설고 냉혹했다. 시련 앞에서도 그를 지탱해준 것은 촬영을 하겠다는 굳은 결심이었고, 그칠 줄 모르는 노력은 그를 부여잡는 힘이 돼주었다. 이렇게 지그몬드와 그는 제작비 지원이 없는 영화의 촬영을 도맡았고 그럴 때마다 경험을 쌓아나간다는 일념 하나로 버텨나갔다. 이런 노력들이 모여 평판을 얻게 되고, B급영화를 제작하던 로저 코먼 사단과 간접적으로나마 연계를 갖게 되면서 저예산영화 작업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던 중, <이지 라이더>의 뜻하지 않은 성공은 그에게 단순한 기술자가 아닌 촬영감독으로 위상을 높여줄 탈출구를 마련해준다. 70년대 <갈등> <이상한 나라의 알렉스>와 같이 할리우드에서 시도된 적 없는 영상을 선보이던 그는 페이스를 늦추지 않고 <고스트 버스터즈> <마스크> <금지된 사랑> 같은 영화에서부터 최근의 <멀티플리시티>나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등을 통해 주류영화의 촬영감독으로 우뚝 선다. 18살의 헝가리 소년을 오늘날 세계적인 촬영감독으로 성장하게 해준 할리우드라는 발판은 실로 크나큰 것이었다. 그러나 코박스는 자신의 핏속을 흐르는 유럽인의 감성에 그 공을 돌린다. 어릴 적 영화학교에서 섭렵한 미술, 음악, 문학, 건축 등의 공부가 단순한 촬영술이 아닌 예술적 접근을 가능하게 해준 밑거름이 되었음을 잊지 않는 것이다. 이제 그는 부다페스트의 영화학교 강의를 통해 그 가르침을 고스란히 다음의 영상세대에게 물려주려 한다. “촬영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창의적인 면이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촬영감독이 제어할 수 있는 기술력이다. 그러나 이 둘을 연결해내는 ‘빛’이야말로 촬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빛은 촬영에서 핵과 같은 것이며, 빛의 제어를 통해 이미지를 기술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는다. 바로 우리가 창조하고자 하는 이미지에 진실을 더하는 것이다.” 코박스는 빛에 대한 고려없이 디지털의 장점만 보려 하는 젊은이들을 우려하며, 그것이 곧 영화라는 공동의 작업에서 촬영의 자리를 내주는 것임을 주지시켜주곤 한다. 이화정/ 자유기고가 zzaal@hanmail.net 필모그래피 <다시 사랑할까요>(Return to Me, 2000) 보니 헌트 감독 <미스 에이전트>(Miss Congeniality, 2000) 도널드 페트리 감독 <잭 프로스트>(Jack Frost, 1998) 트로이 밀러 감독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My Best Friend’s Wedding, 1997) P. J. 호건 감독 <멀티플리시티>(Multiplicity, 1996) 해럴드 래미스 감독 <카피캣>(Copycat, 1995) 존 아미엘 감독 <가라데 키드>(The Next Karate Kid, 1994) 크리스토퍼 케인 감독 <프리윌리2>(Free Willy 2: The Adventure Home, 1995) 드와이트 리틀 감독 <스카우트>(The Scout, 1994) 마이클 리치 감독 <베일 속의 카이로>(Ruby Cairo, 1993) 그레이엄 클리포드 감독 <하늘에서 온 엽서>(Radio Flyer, 1992) 리처드 도너 감독 <가면의 정사>(Shattered, 1991) 볼프강 페터슨 감독 <금지된 사랑>(Say Anything, 1989) 카메론 크로 감독 (Little Nikita, 1988) 리처드 벤자민 감독 <리갈 이글>(Legal Eagles, 1986) 아이반 라이트먼 감독 <마스크>(Mask, 1985) 피터 보그다노비치 감독 <크렉커>(Crackers, 1984) 루이 말 감독 <고스트 버스터즈>(Ghostbusters, 1984) 아이반 라이트먼 감독 <여배우 프란시스>(Frances, 1982) 그레이엄 클리퍼드 감독 <장난감>(The Toy, 1982) 리처드 도너 감독 <방황의 도시>(Heart Beat, 1980) 존 바이럼 감독 <인사이드 무비>(Inside Moves, 1980) 리처드 도너 감독 <내일을 향해 쏴라2>(Butch And Sundance: The Early Days, 1979) 리처드 레스터 감독 <챔피언>(Paradise Alley, 1978) 실베스터 스탤론 감독 <투쟁의 날들>(F.I.S.T, 1978) 노먼 주이슨 감독 <뉴욕 뉴욕>(New York, New York, 1977) 마틴 스코시즈 감독 <베이비 블루 마린>(Baby Blue Marine, 1976) 존 D. 핸컥 감독 <해리와 월터 뉴욕에 가다>(Harry and Walter Go to New York, 1976) 마크 라이델 감독 <니켈로데온>(Nickelodeon, 1976) 피터 보그다노비치 감독 <샴푸>(Shampoo, 1975) 할 애슈비 감독 <허클베리 핀>(Huckleberry Finn, 1974) 제이 리 톰슨 감독 <형사 콤비 후리비와 빈>(Freebie and the Bean, 1974) 리처드 러시 감독 <바브라의 내사랑>(For Pete’s Sake, 1974) 피터 예이츠 감독 <공포의 그림자>(A Reflection of Fear, 1973) 윌리엄 A. 프레커 감독 <페이퍼 문>(Paper Moon, 1973) 피터 보그다노비치 감독 <스틸야드 블루스>(Steelyard Blues, 1973) 앨런 마이어슨 감독 <마빈 가든의 왕>(The King of Marvin Gardens, 1972) 밥 라펠슨 감독 <슬리셔>(Slither, 1972) 하워드 제프 감독 <왓츠 업 덕>(What’s Up, Doc?, 1972) 피터 보그다노비치 감독 <포켓머니>(Pocket Money, 1972) 스튜어트 로젠버그 감독 <마지막 영화>(The Last Movie, 1971) 데니스 호퍼 감독 <파이브 이지 피이스>(Five Easy Pieces, 1970) 밥 라펠슨 감독 <갈등>(Getting Straight, 1970) 리처드 러시 감독 <이상한 나라의 알렉스>(Alex In Wonderland, 1970) 폴 마주르스키 감독 <공원에서의 차가운 나날들>(That Cold Day In The Park, 1969) 로버트 알트먼 감독 <이지 라이더>(Easy Rider, 1969) 데니스 호퍼 감독 <사이크 아웃>(Psych-Out, 1968) 리처드 러시 감독 <사베지 세븐>(The Savage Seven, 1968) 리처드 러시 감독 <타깃>(Targets, 1968) 피터 보그다노비치 감독 <블러드 오브 드라큘라 캐슬>(Blood of Dracula’s Castle, 1967) 앨 애덤슨·진 헤이트 감독 <생이 중단되고 좀비가 된 믿을 수 없는 이상한 사람>(The Incredibly Strange Creatures Who Stopped Living and Became Mixed-Up Zombies, 1963) 레이 데니스 스태클러 감독

“일본 경찰에게 고문 당해 병신이 됐어”

최경재 목사가 우리를 부르더니 “서울에서 만세 불렀다, 우리한테는 이 태극기가 독립선언서다, 그러니까 이걸 만들어서 밤중에 경찰 몰래 두루마기 속에 넣어가지고 와라. 누구한테든 보이지 않게 주의해라.” 고런 부탁을 했어요. 집집이 돌아다니면서 임무를 다했는데, 고것이 회령에서는 서울보다 한달이 늦은, 양력으로 사월 초하룻날 일입니다. 그 날이 보통학교 졸업식 날입니다. 예배당에서 열두시에 종을 치면 보통학교 졸업식장에 모인 학생들이 태극기를 들고 그냥 몰려서 나올 작정입니다. 나와서 우편국 앞에 모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거기서 최 목사님이 강행을 하고. 그 다음에 보통학교 선생 강창희라고, 이분이 애국자입니다. 이 강 선생이 학생들에게 나눠줄 만한 숫자의 태극기를 미리 학교에다 운반했습니다. 자기 앉는 책상에다 보자기를 펴고 밑에다 감춰놨습니다. 그럼 여기서 우리는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학년 아이가 뛰어왔습니다. “큰일났습니다. 강창희 선생님이 붙들렸습니다. 태극기가 발각이 됐습니다.” 이렇게 됐단 말이야. 이 최 목사님이 얼굴이 하얘지더니 우편국 앞에서 집합하는 일은 포기한다, 그러고는 학교에서 종을 울리고, 학생들이 앞장섰습니다. 그러니까 목적지는 헌병대까지 가는 거죠. 그래야 큰 시가지는 다 돌아댕기니까. “조선독립만세!” 하고 앞장선 놈이 만세 부르면 따라서 만세 부르고. 키 큰 학생들이 태극기를 막 그냥 휘저으면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이 군중심리라는 게 참 갑자기 생기는데 한번 생기면 막을 길이 없거든요. 그냥 쫓아 나와요. 처음에는 일본 놈들이 말을 타고 칼등으로 치면서 다니다가, 조끔 있다가는 뻘건 물감을 만들어가지고 “뻘건 물감 묻으면 모조리 다 잡아라” 한 겁니다. 우리는 뻘건 물이 묻으면 아무 데고 뛰어들어가서 옷을 뒤집어 입거나 바꿔 입고 또 뛰어나가는 거죠. 그냥 선생, 목사, 학생들 할 것 없이 잡아들여 가는데 헌병대 차, 자기네 사무실, 창고 막 실어넣었습니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다가 난 안 잡혔습니다. 그러나 집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죠. 그래 사흘 있다가 돌아왔어요. 이때쯤 되면 다 정리됐겠거니 하고선 오니까 다들 재판에 들어갔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목사님 점심 밥그릇 해가지고 헌병대에 들어가다가 문간에서 잡혔어요. 이때 6개월 형을 받았죠. 독립군 색출 빌미 두만강변 3km 불질러 그 후에 또 ‘간도 도판부 사건’이란 것이 있습니다. 도판부 사건이라는 게 아까 얘기한 박명우 선생(전회 참조- 필자)의 얘깁니다. 우리는 회령에 있으면서 박 선생의 지령을 받습니다. 이게 뭔고 하니, 두만강 건너가서 싸리밭, 이제 도판부에 집을 지어가지고 연락을 나눈다,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이 쳐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회령에 있다가, 그러니까 우린 정의대, 결사대죠. 회령과 청진 사이에 미살릉이라고 우리나라에서 제일 험한 큰 능이 있습니다, 그 미살릉 터널을 포위하는 겁니다. 인제 그 사건이 어떻게 발각되었는고 하니, 북간도에서 독립군들이 두만강을 건너와 가지고 큰 부자나 왜정에 아부하는 이런 사람을 골라서 데려갑니다. 저녁때 되면요, “까마귀 있나?” 해요. 친구가 부르듯이. “누군가?” “날세. 좀 나와보게.” 나와보면 모르는 사람이거든요. 그냥 들어가려고 하면 칼을 쓱 들이밉니다. “아무 소리말고 같이 가자.” 어깨동무한 채로 그냥 갑니다. 가서 두만강을 건넙니다. 가서는 사람 보내서 편질 합니다. ‘아무 날, 아무 시까지 군자금 아무를 어디다가 놓고 가라.’ 그렇게 해서 독립군도 군자금을 모집합니다. 그래서 이제 총독부 군사정부에서 여기 사단장에게 명하기를 “함경북도 회령 연안 그 저쪽을 은밀히 경계해라. 독립군들이 자주 건너오는 경우가 많다” 그랬거든. 이 사단장이 군대를 풀어 가지고 두만강을 건너갔습니다. 두만강에서 토벌을 시작했어요. 그때 두만강 건너편에 3키로 내에는 불바다였습니다. 뒤에 안 일이지만 그때 두만강 연안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삼천칠백몇십명인가 죽었습니다. 아주 대량학살을 했습니다. 어느 게 독립군인지 모르니까 그냥 집집이 들어가서 무차별로 학살을 했습니다. 사람이 도망가면 쫓아가서 차고 팍 찔러버리고, 애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그렇게. 해서, 도판부가 발각됐습니다. 고 이후로 아홉 사람인가 열 사람이 체포되어 가지고 싸리밭 본부 앞에다가 웅덩이를 팠습니다. 그 웅덩이에다 줄줄이 앉혀놓고, 앉혀놓고, 목을 푹푹 땄습니다.(나운규가 연출한 <두만강을 건너서>는 이러한 역사적 경험이 바탕에 깔려 있는 작품이다. 일제 검열당국도 이런 정황을 알고 있기 때문에 <사랑을 찾아서>로 개명하라고 신경전을 벌였을 것이다.- 필자) 일본인 살해 혐의로 십자가 형틀에 묶여 어쨌거나 내가 운규(나운규 지칭- 필자)보다 먼저 잽혔어요. 하루는 집에 들어갔더니, 마침 형사가 날 찾아왔다 말이야. 내 방에 구두 한 켤레가 딱 놓여 있는데, 그때 형사들이 신는 신발이 딱 눈에 짚이더라구요. 그래 그 자리에 딱 섰는데, 안방에서는 형사가 “자네, 그 방에 주인이지?” “네”. 지금 서대문경찰서 유치장에 들어갔습니다. 유치장에다 팍 집어넣자 머리에 뭐가 떠오르는고 하니, 두만강변에서 총살당하는 게 머리에 팍! 도판부 사건이 떠오르고. 눈감고 잘라고 하면 꿈에서 내가 총 맞고 막 쓰러지다 깨는 거예요. 식은땀이 바싹바싹 나죠. 아무튼 만세사건으로 감옥에 있다가 나와 가지고는 회령에 있다가 북간도로 해서 러시아를 향했습니다. 김용국이라고 하는 사람하고, 나하고, 운규하고 해가지고 세 짝패가 만주로 방황했습니다. 갔더니 그때 광복군에 가담한 사람들이 간혹 나타나 가지고 소개했습니다. 젊은애들이 와서 감옥도 들어갔다 나왔다고 하니까 “학생들은 보니까, 공부할 나이고 하니까, 공부하시오” 그러는 겁니다. 지식인들이었죠. 하여튼 무식하며는 안 된다, 그거를 얘기하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그 독립지사의 말을 듣고 그 길에 돌아왔단 말이에요. 공부나 한다, 뭐 이렇게 단순한 생각으로 돌아왔거든요? 그런데 이때 도판부가 발각이 됐다, 도망가라 하는데 한신돈이라고 하는, 회령서 소학교 때부터 고등학교까지 같이 댕긴 친구가 잡혔습니다. 강동면에 금융조합하는 일본사람의 서기가 하루는 “독립군이 들어와서 다 죽이고 금고를 가지고 도망갔다. 범인 잡아라.” 이래서 강동군 일대에서 범인 수색하는데, 내가 있는 마을까지 소문이 뻗쳐서 들어왔단 말예요. 내가 그래서 이상스럽다 하고 도망갔거든요. 그런데 한신돈이 이 친구가 체력이 아주 약한 사람이에요. 이 친구가 잡혀서 윤봉춘 아무개하고 여기 와서 헤어졌다는 걸 말하고, 자긴 범인 아니라고 그러다가 이제 얼음 넣은 물구더기에다가 까꿀루 매달고 실컷 패주고 이러니까 까무러치면서 예, 죽였습니다 그런 거죠. 그러니까 날 살인범으로 몬 겁니다. 서울에서 도판부 사건 겸 살인범으로 잡혀가지고 취조를 시작하는데, 이놈아! 너 친구 한신돈이라고 아냐구, 지금 감옥에 있다구, 너허구 공모하지 않았냐구, 니가 조합서기 총으로 땅 쏘고 도망가지 않았냐구, 거짓말 마라고 매가 들어옵니다. 이 매는 정확합니다. 때리면 뻥뻥 소리가 나요. 기운 센 사람도 한 서너대 맞으면 못 견딥니다. 이건 취조가 아니라 아주 복수예요. 퍽퍽 쓰러집니다. 마까 바야시라는 사람이 취조의 명물인데. 처음에는 바닥에 기왓장을 뿌립니다. 빤쓰고 뭐고 다 벗겨요. 그래가지고는 냉큼 들어서 기왓장 위에 꿇어앉힙니다. 기와가 여기 무릎에 닿지 않습니까? 웬만하면 아슬아슬 이지러집니다. 가만히 두면 좋은데, 이마를 밉니다. 그러면 중력 때문에 뼈가 아주 오스러들어요. 내가 이제 “만약에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친구를 나한테 면대해다오. 그 사람 기운이 약해서 없는 사실을 있다고 말했을런지도 모른다” 그랬죠. 그랬더니 건방지다 말야, 그냥 구둣발로다가 내칩니다. 그래도 아니라고 일주일을 계속했더니, 그 다음에는 십자가 형틀에 발을 묶고 손을 묶어서, 한놈은 머리카락을 이렇게 쥐고 있고, 한놈은 배를 가로탑니다. 배를 타고 앉아서 바가지에 물을 푸고 그 물에 고춧가루와 소금을 섞습니다. 그걸 코 위에다가 쭈욱 붓습니다. 숨을 쉬면, 코에 고춧가루하고 짠 게 들어가면서 칵칵 재채기나고, 눈에도 들어가고, 귀에도 들어가고 구멍이란 구멍은 다 들어가. 그래도 그냥 견디는 거야. 일단은 딱 참았다가 홱 뿌리치는 거죠. 그동안에 숨을 쉬죠. 그러니까 구둣발로다가 막 뭉개요. 그러면 기절하거든요. 기절하면 저희끼리 담배 태다가 정신이 들면 “자 또 시작하지” 이럽니다. 그래서 완전히 기절이 되면 문초에다가 집어넣습니다. 발길로 때리고. 그렇게 되는 바람에 내가 지금 걸어가는 거 보면 삐뚤었죠? 갈빗대가 상했거든요. 늑막이 상하는 바람에 폐가 작아진 거야. 숨을 많이 쉴 수도 없고. 높은 데 올라가거나 쪼끔만 힘든 일 해도 숨이 차고. 그 전에는 참 건강했습니다. 고춧물, 짜고 매운 물 들어가게 되면서 한짝 귀가 밝지 못한 병신이 되었어요.(윤봉춘의 작품 경향이 해방 이후까지 반일 민족주의로 시종일관하는 점, 군국주의 선전영화 이외에는 만들기 어려웠던 일제 말기에 일체의 영화활동을 중단하고 잠적한 것도 이 같은 삶의 역정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필자) 정리 김경민/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이영일 출판프로젝트 연구원 netrin@orgio.net 이 기록은 고 이영일 선생이 남긴 귀중한 자료인 원로영화인 녹취테이프를 소장 영화학도들이 풀어 정리한 것입니다.

겨울영화 74편 올가이드 [1]

영화야, 찬 바람을 부탁해! 혼곤히 잠든 거인의 꿈처럼 길고 황량한 계절 겨울. 그 거대한 꿈 안에서 다시 꿈꾸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극장이라는 동굴이 있고 영화가 있다. 12월7일부터 2002년 2월 말까지 극장으로 나설 채비를 차리고 있는 영화는 한국영화 16편을 포함해 줄잡아 70편을 웃돈다. 외화 가운데 크리스마스와 새해의 축제 분위기를 북돋우며 흥행을 주도할 ‘빅3’는 판타지 블록버스터 세편. 20세기 판타지문학의 양대 베스트셀러를 최신 특수효과 기술에 힘입어 스크린에 옮겨놓은 <반지의 제왕>와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이 3주 간격으로 주술의 효험을 겨루고, 픽사의 신작 애니메이션 <몬스터 주식회사>가 행복해지고픈 크리스마스 주간 관객을 유혹한다. 자기 영역을 굳힌 중견감독의 현재를 알려줄 신작도 즐비하다. 마이클 만의 <알리>, 스티븐 소더버그의 <오션스 일레븐>, 리들리 스콧의 <블랙 호크 다운>, 패럴리 형제의 <쉘로우 할> 등이 겨울이 가기 전에 봉인을 뗀다.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가 연출한 <오픈 유어 아이즈>의 미국판 리메이크인 톰 크루즈-페넬로페 크루즈의 <바닐라 스카이>와 아메나바르의 신작 심리공포물 <디 아더스>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개봉해 흥미를 돋우며 <칸다하르> <마르티나> <마야> <피아니스트> <휴먼 네이처>는 올해 부산영화제를 놓친 관객을 위로할 개봉작들이다. <친구> 이후 숨죽일 줄 모르는 한국영화의 흥행 강세를 이어갈 작품은 특수효과와 액션을 내세운 대작들. 청춘물과 무협, 코미디와 판타지를 교배해 관객취향의 첨단을 시험하는 12월 개봉작 <화산고>(순제작비 48억원), 불모의 SF장르에 출사표를 던진 2월 개봉작 (63억원)와 <예스터데이>(50억원 이상)가 그들이다. 따뜻한 눈물로 관객을 공략했던 지난해 겨울의 멜로드라마 강세와 대조되는 변화다. 이 밖에도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 이후 3년 만에 카메라 뒤에 선 강우석 감독의 <공공의 적>,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원더키드 류승완 감독의 첫 번째 충무로 영화 <피도 눈물도 없이>, <반칙왕>의 프로듀서 이미연 감독의 입봉작 <버스, 정류장>, <미술관 옆 동물원>의 팬들이 반갑게 맞을 이정향 감독의 <집으로>, 김기덕 영화의 원형질을 드러내는 신작 <나쁜 남자> 등이 그간 일으켰던 크고 작은 화제의 실체를 확인시킬 예정이다.

겨울영화 74편 올가이드 [7]

바닐라 스카이 오픈 유어 아이즈!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길을 잃고서 추락을 택했던 세자르가 뉴욕에 떨어졌다. <바닐라 스카이>는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의 <오픈 유어 아이즈>(1997)를 리메이크한 작품. 매끈한 외모에 재력을 지닌데다 천하의 바람둥이인 데이비드 에임스(톰 크루즈)는 원작에서 세자르가 당했던 고통 역시 그대로 물려받는다. 자신의 단짝친구의 애인인 소피아(페넬로페 크루즈)에게 한눈에 반하지만, 이튿날 하룻밤 상대였던 줄리(카메론 디아즈)의 복수극에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지는 교통사고를 당하는 것이나, 어렵사리 소피아로부터 사랑 고백을 끌어내지만 이후 자신도 알 수 없는 극한적인 분열증세에 시달리는 것까지 닮았다. 직접 판권을 사들인 것으로 알려진 톰 크루즈는 <클럽 싱글즈><제리 맥과이어>의 카메론 크로에게 메가폰을 맡겼다. 아직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관객을 악몽의 크레바스 속으로 내몰았던 아메나바르보다는 강도가 덜 할듯. 촬영 내내 제작진이 페넬로페 크루즈가 맡게 될 역할에 대해선 함구, 그녀가 전작의 매혹적인 소피아인지 아니면 되살아나는(?) 줄리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지만, <바닐라 스카이>가 톰 크루즈와 페넬로페 크루즈를 실제 연인으로 맺어줄 것이라는 점은 누구나 예측한 결과. 리빙 하바나 HBO 채널이 제작한 수작 <리빙 하바나>는 피델 카스트로 정권의 압박 아래서 자유로운 공기를 희구하던 탁월한 트럼펫 주자 아르투로 샌도발의 망명기를, 때로는 서글프게 때로는 흥겹게 재현한다. 디지 길레스피와 찰리 파커의 세계를 동경하며 마음속에 예술혼을 키우는 쿠바의 청년 아르투로는 버스 정류장에서 만난 아름다운 처녀 마리아넬라에게 구애해 결혼에 이른다. 그러나 투철한 신념을 가진 공무원인 마리아넬라와 아르투로는 정권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로 갈등을 겪기도 한다. 주인공으로 호연한 앤디 가르시아와 <탱고>의 미아 마에스트로 외에 <리빙 하바나>의 주역은 쿠바 재즈음악. 콘서트장면은 스토리를 멈추기보다 액션을 완성하는 역할을 수행하며 영화 간간이 화려한 악센트를 넣는다.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 일흔 넘은 노인이지만 이마무라 쇼헤이의 상상력은 영화악동들의 장난기를 훌쩍 넘어선다. 외설적이게도 그는 이번 영화에서 섹스를 할 때 분수처럼 물을 뿜는 여인을 등장시킨다. 여인의 몸에서 흘러나온 물은 하수구를 따라 개천으로 흘러들고 냇물에 물고기가 모여든다. 몸에 물이 차올라 주체 못하는 여인을 영화는 ‘숨겨둔 보물’이라 칭한다. 실직하고 가정에서도 내몰리던 남자는 우연히 알게 된 부랑자 노인의 말을 따라 그녀를 만나고 삶의 에너지를 회복한다. 생명이 싹트고 회복되는 과정을 유머와 에로티시즘에 담은 이 영화를 보면 누구나 이마무라의 충고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피아니스트 올해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 여우주연상, 남우주연상 등 3개 부문을 휩쓴 <피아노 티처>는 한마디로 ‘충격적인’ 영화다. 이 영화의 엔딩장면을 보고도 웃는 낯으로 극장을 나서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무 생각없이 지내다가도 가끔씩 그 장면이 기습하는 순간을 맛볼 것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제목 그대로 피아노 선생님이다. 학생들에게 엄하고 몸가짐과 태도가 정갈한 그녀는, 그러나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기괴한 성적 취향을 드러낸다. 어린 남학생이 그녀를 좋아하게 되면서 비극은 시작된다. 남자는 그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 괴로워하다 폭력을 행사한다. 광기에 휩싸인 사랑은 출구를 찾지 못하고 가슴을 찌르는 아픔을 남긴다.

<화산고>의 김태균, 선배 이명세에게 `개기며` 영화를 논하다

한때 충무로에 ‘이명세교’라는 종파가 있었다. 이명세 감독의 데뷔작 <개그맨>을 보고 매료된 젊은 영화인들이 그를 받들며 뿌리내린 이명세교는 궁핍한 살림살이를 면치 못했지만 새로운 영화에 대한 열정과 신념이 넘치던 사람들에게 영혼의 피로를 풀 수 있는 샘물과도 같았다. 이명세 감독의 영화세계를 사랑하고 영화에 대한 이명세 감독의 태도를 존경하던 그들 가운데 김태균 감독과 싸이더스 대표 차승재씨는 널리 알려진 인물들이다. 90년대 초반 영화아카데미를 나온 젊은 감독지망생들과 영화공장이라는 영화사를 차렸던 김태균 감독은 <나의 사랑 나의 신부> <첫사랑> <남자는 괴로워> 등 이명세 감독의 영화 3편의 프로듀서였고 당시 차승재씨는 단순히 옷장사를 하는 김태균 감독의 친구로서 이명세교에 가입했다. 지금은 감독과 제작자로 엇갈린 행보를 걷고 있지만 이명세 감독과 그들의 인연은 어릴 적 친구에 대한 추억처럼 애틋한 것이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이후 미국에서 작품을 준비중인 이명세 감독이 <화산고>를 준비중인 김태균 감독을 만난 것도 그래서이다. 11월 초 귀국해 오랜만에 김태균 감독을 만난 이명세 감독은 후반작업 마무리 단계에 있는 <화산고>를 미리 보고 오랜 동료이자 후배인 김태균 감독와 영화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로에 대한 비판까지 애정어린 농담으로 들리는 그들의 대화는 영화로 맺어진 오랜 벗들이 나누는 우정이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편집자 김태균(이하 김) >>> 잘 봤어? 이명세(이하 이) >>> 봤다고 말하기 좀 그런데. 러시잖아. 사운드나 음악이 안 들어가서 리듬을 모르겠다. 김 >>> 그래도 한마디한다면. 이 >>> 음…, 이야기는 새로워. 근데 (관객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김 >>> 말 돌리지 말고…. 아까 보니까 감동은 못 먹은 것 같은 눈치던데. 형이 늙어서 그래. 노인네가 요즘 유머나 개그에 약하니 곤혹스러울 법도 하지. 이 >>> 흐흐흐, 곤혹스러운 건 아니고. 개봉하기 직전이라 뭐라고 말하기가…. (웃음) 김 >>> 이번 영화에선 평소 안 해본 짓을 많이 해서 나도 잘 모르겠어. 장르적인 컨벤션만으로 가는 영화라고 보기도 어렵고. 일본 배급관계자들이 러시 보면서 장혁이 나오는 장면마다 웃긴 하던데, 극장 반응은 또 다른 거니까. 이 >>> 찍을 때 이게 맞다고 찍었으면, (감독이 할 일은) 그걸로 끝이야. 김 >>> 사실 이번 영화 자유롭게 찍고 싶었어. 그런데 하다보니 무지막지하게 자기 검열 같은 게 있는 거야. 이건 너무 튄다 싶은 장면은 스스로 누르거나 망설인 부분도 있고. 이 >>> 정답이 어디 있냐. 누가 오케이해주는 것도 아니고, 그건 네 판단이 정답이야. 다만 얼마나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느냐가 중요하지. 주춤거리면 안 돼. 에잇 모르겠다, 하고 미친놈처럼 깽판치고 저질러야지. 그래야 나중에 후회 안 해. 안 그러면 애초 잡아놓은 설정까지도 흔들려. 흥행은 몰라, 귀신도 몰라 김 >>> 다른 영화 같으면 시나리오만 끝나면 음악이나 사운드까지 머릿속에 들어오는데. <화산고>는 끝까지 정답이 안 찾아져. 내겐 2주 정도의 시간밖에 안 남았는데. 감독이 지금도 고민하고 있으니 사운드 만지는 애들도 골치 아플 거야. 이 >>> 마지막 승부장면은 정극에 가까우니 사운드를 넣을 때 신경을 써야 할 거야. 전반부가 만화에 가깝다면 후반부 대결장면에선 극대화를 시켜야지. 예를 들면 준호가 죽는 장면에서 빗소리 대신 뼈 부러지는 소리를 넣겠다고 했는데 좀더 세게 가야 해. 총탄소리 같은. ‘두두두두’ 쏟아지는. <인정사정…> 때 마지막 장면에서 나도 빗소리 대신 바람소리를 쓰면서 고민 많이 했어. 김 >>> 15억원짜리 영화였으면 좀더 씩씩한 영화가 됐을지도 몰라. 내 하고 싶은 것 다 해가면서. 근데 이게 제작비로 50억원이나 들어가니까 감독으로서도 흥행에 대한 책임감을 느낄 수밖에. 이 >>> 흥행은 귀신도 몰라. 어차피 모르는 것이라면 감독은 내 걸 찍겠다고 밀고 나가야지. 김 >>> 자기 영화에서는 절대 안 그러면서 왜 나보고 하라고 그래. 이 >>> 그게 들어맞으면 내 영화에서 써먹으려고 그런다. (웃음) 꼭 그게 아니라도 네 영화 잘되면 나야 돈 빌릴 수 있는 곳이 늘어나서 좋잖아. 하긴, <화산고>는 너무 실험적인 영화라 좀 기다려봐야겠지만. 김 >>> 이게 무슨 실험영화야. 대중영화지. 이 >>> 대중적인 코드가 없다는 말이 아니고. <화산고>는 전체가 상상력으로 채워진 영화잖아. 언젠가 만화 같은 영화 찍는다고 했을 때 난 네가 장르영화 공식으로 아주 쉽게 찍을 거라 생각했는데, 보니까 아닌 것 같아서. 김 >>>처음부터 만화를 그대로 옮겨내겠다는 의도는 없었어. 원작만화가 있는 것도 아니고. 대신 좀더 재밌는 표현방법을 만화에서 차용하겠다는 것 정도였지. 만화엔 상상력을 극대화해서 표현할 수 있는 자유로움 같은 게 있잖아. 그래서 장면구성에서 화면을 분할하거나, 논리보다는 코믹한 과장을 내세운 거지. 거기에 무협의 요소도 덧붙이고. 이 >>> 단순히 과장된 상황이나 비약만을 보여주려고 해서는 안 되고 그 이상을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백자 구울 때도 쉽게 떠올릴 수 있는 흰눈의 이미지 같은 건 모두 지운다잖아. 영화도 마찬가지일 거야. 김 >>> 그래서 <화산고>가 좋다는 거야, 안 좋다는 거야? 이 >>> <화산고>가 쉬운 영화는 분명 아니지. 장르영화의 컨벤션을 따르지 않으니까. 컨벤션이란 게 대중의 반응을 정확하게 예측한 뒤 집어넣은 다음 비트는 것인데…, <화산고>는 그 수준을 넘어 물구나무선다고나 할까. 김 >>> 하긴 영화적인 논리를 무시한 부분도 많은데다 내러티브만 해도 전반부에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 그 많은 인물들을 소개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해. 어쨌든 언제나 끝날지…. 3편 몰아서 찍는 것 같다니까. 이 >>> 1년 넘게 찍었으니까 당연하지. (웃음) 김 >>> 술 먹고 싶어 촬영장 와서 형이 ‘겐세이’ 놓아서 그렇지. 테이크 몇번 더 간다고 감독도 아니면서 현장에서 ‘컷’ 불렀잖아. (웃음) 자기도 <첫사랑> 때 유영길 감독님 치떨리게 했으면서. 난 그래도 형처럼 영화를 지루하게는 안 찍잖아. 이 >>> 얘가 말을 막가파로 하네. 김 >>> 하긴 오래 찍는다고 좋은 작품이 나오는 건 아니야. 사실 캐스팅이 안 돼서 지연되고 그러면 감독이 갖고 있는 에너지가 그동안 다른 데로 새어나가. 리듬이 없어지지. 이번에는 작업기간이 너무 길어 금방 리듬이 깨지더라고. 사나흘마다 조울증이 오고. 시나리오만 되면 프로덕션까지 딱 한 호흡으로 가는 게 가장 좋은데. 이 >>> 시나리오 쓰는 것도 똑같아. 어떤 작품은 쉽게 될 것 같은데. 정작 해보면 그렇게 안 돼. 어떤 건 금방 끝나고…. 쉽게 풀릴 것 같은데 막혀서 고생할 때면, 아이고 다시는 쓰지 말아야지 그런다. 김 >>> 그래도 쓰잖아. 이 >>> 돈 몇푼 벌겠다고 다시 쓰는 거지. 연출료에 시나리오 값 더 쳐서 받으려고. (웃음) 김 >>> 근데 난 대중영화는 감독이 시나리오를 안 쓰는 게 낫다고 봐. 작품마다 동어반복의 함정에 빠지는 경우가 많잖아. 조금이라도 새로운 시각을 얻으려면 남들하고 같이 쓰는 게 낫지. 이 >>> 그게 어떻게 동어반복이냐? 그렇다면 매일 인물사진 찍거나 그림 그리는 사람들은 함정에서 허우적대는 건가. 아니잖아. 빛이 다르고 각도가 다르고 인물이 다르고 연출방법이 다른데. 오히려 우물을 깊게 파야 고기가 몰려드는 법인데. 김 >>> 그런가. 스타일의 차이겠지만, 옆에서 태클을 걸어줘야 자기 생각도 깊어진다고 생각해. 제작자와도 마찬가지야. 긴장관계에서 세게 걸고 들어오면, 스스로 복기를 해볼 수 있거든. 그러면서 아니다 싶으면 자기 억제를 하는 거고, 그래도 가야겠다면 확신대로 자기 발산하는 거고. 스스로에게 냉정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으니까. 이 >>> 승재(싸이더스 대표 차승재)가 자주 촬영장에 왔냐. 김 >>> 나도 제작자 얼굴 보는 것 별로 안 좋아하고, 승재도 감독들 괴롭히는 스타일도 아니고. 두번 정도 봤나. 이 >>> 그러고보면 옛날과는 많이 변했어. 예전에는 제작자하고 일대일로 싸움을 벌일 때도 많았는데. 김 >>> 제작자하고 붙다가 혼자 분에 못 이겨서 억 하고 뒤로 넘어지더니 혼자 분해서 너희들이 영화를 알아, 하고 울부짖으며 옷까지 찢던 감독도 있었잖아. 영화제목이 <남자는 괴로워>였나. 이 >>> 자기도 <박봉곤 가출사건> 때 혈압 올라서 119에 실려가서 제작자 겁먹게 해놓고선. 김 >>> 승재하고 기용(박기용 감독)이도 <모텔선인장> 때 비오는 날 여름에 웃통 벗고 한판 붙고선,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술집으로 들어와 건배하는 걸 보고서 도일(촬영감독이었던 크리스토퍼 도일)이 쫄았다잖아. 요즘 그런 이벤트는 없는 것 같아.(웃음) 이 >>> 하긴 예전에 극장에서 종영하려고 하면 극장 앞에서 필름으로 목을 감고 분신자살하겠다는 이들도 있었다니까…. 제작자와 대립하면서 중심잡는 영화가 있고, 힘을 합쳐 시너지를 내는 영화도 있고, 감독따라 영화따라 다 다르지. 현장은 영화학교가 아냐 김 >>> 현장이 많이 달라지긴 했어. 난 지금까지 촬영하면서 그림콘티 없이 했거든. 반은 러프한 줄콘티로 갔는데. 이번에 스탭들이 불만을 털어놓는 거야. 처음엔 당황했지. <키스할까요> 때도 안 그랬으니까. 그런데 난 한번 그림콘티를 만들어놓으면 정해진 것을 부수기 힘들어서 잘 안 해. 이 >>> 나도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은 아니지만, 그림이 잘 그려지면 현장에서 찍기 수월하다는 증거 아닐까. 김 >>> 사실 형 하는 거 보면 애니메이션 작업하는 것 같다니까. 너무 철저히 준비를 하니까. 배우가 웃을 때도 입이 이 정도까지 찢어져야 한다고 요구하잖아. 현장에서 형이 그러는 걸 보면 갑갑할 때가 있었어. 이 >>> 79년엔가. <달려라 만석이> 연출부 할 때였는데, 튀지는 않는데 연기자의 양말이 바뀐 거야. 그래서 최불암씨한테 가서 바꿔신으라고 했지. 근데 현장이 발칵 뒤집어졌어. 연출부 막내가 연기 지도한다고 험악한 제작부장에다 사장까지 달려왔으니까. 최불암씨는 너무 어이가 없으니까,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이 사람이 참’ 하면서 별일 없었지만서도. 그때 같진 않지만, 현장이라는 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잖아. 내 작품 하면서는 10년 연출부 생활하면서 생긴 반동 같은 것도 있고, 아무래도 불안하니까 좀더 철저히 하는 거야. 배우에게 리허설을 요구해왔던 것도 그런 이유고. 배우가 어떤 상태인 줄 알아야 촬영할 때 커뮤니케이션이 쉬우니까. 그래야 시간도 더 줄일 수 있고. 김 >>> 형은 연습은 연습대로 하고, 촬영 들어가서도 정작 머릿속이 원하는 이미지와 안 맞아떨어지면 30번씩 테이크 가잖아. (웃음) 난 오히려 현장 갈 땐 그냥 가. 고민은 하되 확정은 안 해. 현장 가면 무엇이 나올까 하는 기대감 같은 게 있어. 나도 처음엔 배우한테 네 걸음 떼고 시선 놓고 대사 하고 시선 꺾고 하는 그런 리듬을 원했는데, 우리 애들이 신인이잖아. 그게 안 되더라고. 박자를 놓치는 것도 일쑤고. 근데 나중에 보니까 이게 오히려 더 신선한 거야. 사실 잔 하나 내려놓으면서도 계산하는 그런 징그러운 리듬 같은 거 있잖아, 그런 게 애들한테는 없으니까. 이 >>> 창작하는 사람에게 훈련이나 연습이 전부가 아니란 건 알면서도 난 요즘 일정한 통과절차 정도는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어. 그게 시험 같은 건 아니더라도 일종의 축적된 시스템에 의해 선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우린 그런 게 없잖아. 현장이 영화학교여선 안 돼. 김 >>> 하긴 한국영화가 불안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거야. 축적된 것 위에서 끊임없이 웰 메이드 영화를 내놓는 장인들이 있어야지, 그걸 뛰어넘는 후배들이 나올 수 있는 건데. 한쪽에서는 집을 막 짓고 있고, 또 한쪽에서는 새 집 짓는다고 부수고 있는 상황이니. 이 >>> 역사라는 게 도전과 응전, 뭐 일종의 바통 터치가 돼야 굴러가는 건데. 일본영화만 하더라도 오즈 야스지로니 이마이 다다시니 다들 있잖아. 지금이야 산업적인 외형은 크지 않지만, 그들은 아버지의 후광 이상의 것을 받았어. 한국영화, 세계시장에선 아직 멀었다 이 >>> 한국영화 위상이 높아진 건 세계가 그만큼 열려서지 자력의 결과라고 보기는 힘들어. 아직 대중적인 확산은 멀었잖아. 그렇다면 아직도 뒤처져 있다는 걸 자각하고 있어야 하는데, 지금 우린 풍요로운 상황이라고 생각하니까 문제야. 그걸 부풀리는 언론도 문제고. 지금까지 한국이 어디에 가입했다, 그러니 선진국 대열에 끼었다는 말에 얼마나 속아왔어. 한국영화 거품, 퇴행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잘될 수 있을 때 위기의식을 가져야 돼. 호사다마라고. 김 >>> 이제는 일본쪽 시장을 200만달러 정도로 잡을 만큼 한국영화가 갑작스레 커진 건 사실이야. 상상력만 있으면 한번 해볼 만한 해. 사실 <화산고> 같은 경우도 몇년 전만 하더라도 엄두도 못 낼 영화인데, 지금 이렇게 만든 건 그만큼 상황이 좋아졌다는 거니까. 내년이 중요한 시점이 될 것 같아. 안정화의 길에 들어서느냐, 보따리장수를 면치 못하느냐는. 아시아영화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에 부응할 수 있는 상품을 내놓을 수 있어야지. 그리고 끊임없이 연구투자개발비를 쏟아야 할때고. 이 >>> 살아남으려면 새로운 걸 해야 해. 영화는 발명품이야. 비슷하게 나가면 살아남지 못한다고. 평생 그런 자세로 가야 돼. 승재도 그런 생각으로 지금까지 왔을 테고. 김 >>> 처음에 시나리오 갔다줬는데 보는 데서 바로 책상 서랍에 넣더라고. 우정은 우정이고, 일은 일이라고. 영화감독 하겠다는 친구들 내가 감독 시켜준다고 나섰던 때와은 다르지. 이 >>> 무서운 놈이야. (웃음) 나한테도 한번도 같이 영화하자고 안 하잖아. 그런 걸 보면 천상 장사꾼으로서의 소질 같은 게 있어. 김 >>> 그러고보면 인생이 재밌어. 영화공장 시절 내가 하던 걸 이제는 승재가 하니까. 영화 하겠다는 생각도 없던 놈이. 이 >>> 그 시절이 좋긴 했어. 돈은 없지만 뭔가 뜨거운 게 있었잖아. 김 >>> <네 멋대로 해라>는 16mm영화를 블로업해서 극장에 내건 영화였을 거야. 첫날 관객 300명이 거의 대부분이었지만. 그때 이장호 감독이 우리 영화 보고 무뇌아들이 만든 영화라고 했잖아…. (웃음) 처음에는 문외한이 만든 영화라고 했겠지 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알고 나서 이를 악물었지. 물론 그때 필동 시절에 격려해준 사람들도 있었어. 연말이면 와서 술 사주던 기자들도 있었고. 승재도 옷장사 해서 번 돈으로 매번 쌀 한 가마니씩 부쳐주고. 이 >>> 내 요즘 뉴욕 생활이 그래. (웃음) 소주 대병 사다놓고 집에서 술 먹으니까…. 힘들 때 격려가 큰 힘이지. <개그맨> 개봉했는데 그때 아무도 잘 봤다, 아니다 별 반응이 없는 거야. 그런데 최인호 선생이 어디에다 글을 쓴 걸 보고선 큰 힘이 되더라고. 네가 제작실장 하면서 네 친구들이랑 날 도와준 것도 그렇고. 승재도 여러 번 엑스트라로 도와줬지. 김 >>> 충무로에서 처음 만난 감독인데다 내 사부나 다름없었으니까. 프로듀서 일을 하긴 했는데, 뭐 내가 연출부나 제작부를 한 적도 없고. 헌팅, 소품 준비, 엑스트라 관리, 콘티 짜는 것까지 다 어깨 너머로 배웠지. 이 >>> 그래놓고 <첫사랑> 할 때는 개겼잖아. 김 >>> 안 그래도 훌륭한데, 갑자기 쌈마이 같은 시를 집어넣겠다고 하니까 그렇지. 그것도 꽃색깔로. 결국 몰래 자기 맘대로 해놓고선. 녹음할 때 그거 보는데 뒤로 넘어가는 줄 알았어. 그러니 흥행성적이 형편없지. 이 >>> 무슨 소리야. 2만명은 들었어. 김 >>> 내가 극장 갔을 때 얼마나 썰렁했는데. 연감 뒤져보면, 아마 5천명이 안 될걸. 이 >>> 마니아 5천명 있다는 건 대단한 거 아니야? (웃음) 그래도 <인정사정 볼 것 없다> 개봉 때도 그런 마니아들 도움 많이 받았어. 김 >>> 미국에선, 잘됐어? 이 >>> 아트극장에서 전국적으로 풀었고, 대도시 아닌 곳은 대학극장에서 상영했지. 시네마 빌리지에서 추진을 했는데, 연말이라 시기도 안 좋고 해서 뭐 별로 재미는 못 봤고. 그래도 광고도 안 했는데 300석 규모의 상영관이 반은 항상 찼어. 끝까지 갈 생각을 했으면 다른 복안이나 그런 걸 생각했을 텐데. 김 >>> 상대적으로 작은 영화가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거야. <패왕별희> 같은 영화가 유럽에서 그랬던 것처럼 순회상영을 하거나 소규모 관을 장기 대관하는 식의 배급방식이 필요할 것 같아. 국내도 마찬가지야. 무조건 스크린 넓히고 프린트 많이 뜬다고 되는 게 아니거든. 다른 방법을 찾아야 블록버스터나 아트영화나 장르영화나 다 살아남지. 이 >>> <화산고>도 아트영화니까 그래야겠네. (웃음) 김 >>> 그런 말 하지마. 승재 괜히 겁먹어. 흥행이 돼야 형한테 장학금도 보내줄 것 아니야. 지금 하는 건 없어? 이 >>> 초고는 끝냈긴 했는데…, 아직 뭐라고 말할 단계는 아니고. 들어가서 마무리한 뒤 넘겨줘봐야 알 것 같아. <미리엄>이라는 공포영화인데 트루만 코프틴의 단편소설에서 제목을 따온 거야. 들어왔던 시나리오 중 맘에 든 게 없어, 내가 직접 쓰기로 한 거지. 김 >>> 형이 잘 나가야 나도 뉴욕 한번 가보지. 이 >>> 너 오면 다른 데로 갈 거야. <화산고> 잘되면 와서 자랑하려고 그러지. 내가 한국에서 이명세보다 잘 나갔다 하고. 김 >>> 살아 있으면 다 경쟁자지, 뭐. 원래 선배란 게 밟으라고 있는 거야. 이 >>> 원래 오만방자한 게 네 스타일이니까. 10년 뒤에 후배들한테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보자. (웃음) 김 >>> 그때까지 살아남을지 몰라. 겁나는 세상인데. 영화청년들이 그때까지 살아남아 있으면 보기좋을 거야. 이 >>> 당연하지. 정리 남동철 namdong@hani.co.kr·이영진 anti@hani.co.kr

원더풀 라이프

■ Story 매주 월요일, 연옥엔 새로운 사람들이 도착한다. 이들을 반기는 면접관들은 죽은 이들에게 각자 살아오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 하나를 고르라고 말한다. 그러면 연옥에서 일하는 자들이 그것을 영화로 만들고, 죽은 이들은 영화를 보며 영원의 시간 속으로 떠나는 거다. 면접관 모치즈키(아라타)는 와타나베라는 노인을 담당하게 되는데 와타나베(나이토 다카시)는 행복한 순간을 고르는 데 특히 많은 시간을 소비한다. 그는 자신의 일생을 천천히 되돌아보면서 아내와의 추억을 상기한다. 모치즈키는 우연히 와타나베의 아내가 자신의 한때 애인이었음을 알고 더이상 그를 담당하기 힘들다고 상급자에게 말한다. 모치즈키는 연옥의 후배에게 자신이 오랜 시간 동안 이곳에서 일하고 있는 건 ‘행복의 순간’을 택하지 못했기 때문임을 밝힌다. ■ Review 이 마을엔 TV가 없다. 자동차도 없고, 네온사인도 없다. 작은 건물 몇채, 시사실, 그리고 필름 창고만 있을 따름이다. 눈이 내리면 사람들은 우산도 받지 않은 채 걸어다니고 이따금씩 작은 북과 트럼펫으로 연주를 한다. 죽은 이들의 행렬을 이끌면서. 마을 지도가 머릿속에서 그려지는지? 더 자세히 말하면,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인터뷰를 한다. 죽은 이들이 오면 늘 같은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일일이 적어놓는다. “당신이 살아 있을 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면접관들은 그들 기억을 바탕으로 짧은 영화를 단시간에 만들어낸다. 사자(死者)들은 이 영상의 기억만 간직한 채, 영원으로 사라질 것이다. 영화를 특정 소설에 빗대는 건 위험한 일이 될지 모른다. 지나치게 주관에 의존한 비평이 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감히 말하자면, <원더풀 라이프>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확장 버전처럼 보인다. 마을 면접관들은 일종의 ‘꿈읽기’다. 찾아온 사자와의 면담을 통해, 그들 일생을 담은 필름을 통해 면접관들은 상대방의 꿈을 하나씩 읽어내기 시작한다. 사자들 이야기는 구구절절하고 빛깔도 가지각색이다. 섹스할 때, 전쟁의 와중에 주먹밥을 먹었을 때, 처음 하늘을 날았을 때, 디즈니랜드에 갔을 때 좋았고 행복했노라고 이미 숨이 끊긴 이들은 회한에 잠겨 고백한다. 몇십년 시간을 거슬러올라 지고로 행복한 느낌을 받았음을 되살려낸다. 우리는 약간 선문답 분위기를 풍기는 <원더풀 라이프>의 전반부를 보면서 영화가 많은 여백을 지녔음을 알게 된다. 관객은, 관객의 뇌세포는 인물들 이야기에 심정적으로 동참함으로써가 아니라 자신의 사고 속에서 나 홀로 질문을 주거니 받거니 한다. 그렇다면 난 언제 가장 행복했더라? 이런, 기억이 통 나질 않는군. 언제였지?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결합, 그리고 관객에게 의도적인 말걸기. <원더풀 라이프>의 숨겨진 영화적 매력이라고 할 만하다. <원더풀 라이프>는 인물들의 ‘기억’에 관한 영화다. 연옥에 도착한 이들은 생후 몇 개월이었을 당시 기억까지 끄집어낸다. 당시 들었던 노래가사에서 정황, 그리고 주변 풍경까지 훤하게 꿰고 있다. 그때 노래를 누군가 부르고 있었어, 당시 바람결은치 이런 느낌을 자아내더군. 모두 진실을 말하는 걸까? 그렇진 않다. 영화 어느 지점에서부턴가 영화 속 인물들 이야기는 구체성의 벽이 점차 엷어진다. 명확하지 않거나, 허황한 구석이 조금씩 있다. 사자들은 가공된 진실을 지닌 채 살았고 맥없이 죽어간 셈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별로 중요한 사항은 아니다. <원더풀 라이프>는 사람들의 꿈과 기억, 그리고 마음의 가장 빛나는 부분을 다른 기억으로 치환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다름아닌 ‘영화’다. <원더풀 라이프>에서 영화는 죽은 사람의 기억이자 필름의 내용이다. 때로 찾아온 이의 손길이 가리켜주면 먼지묵은 기억들은 그 조각을 스크린 위에 투사한다. 아름다웠던 순간들, ‘이건 죽을 때까지 꼭 기억해야지’라며 결심을 굳힌 순간들, 아프고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우리가 의존했던 기억들. <원더풀 라이프>에선 그것이 곧 영화다. <원더풀 라이프>는 사후 세계라는 익숙지 않은 판타지와 일본적인 생사관(生死觀)을 거치면서 영화의 ‘정체성’이라는 묵직한 질문을 집어든다. <원더풀 라이프>는 극히 사사로운 판타지를 샘솟게 한다. 혹시 이런 몽상을 접한 적은 없는지? 개인은 자신이 속한 세계의 주인공이라는, 여기에선 세상 모두가 주연배우이자 감독일 수 있다는 몽상 말이다. <원더풀 라이프>에선 실제로 가능하다. 연옥 근무자들이 만든 영화를 통해서 가능하다. <원더풀 라이프>는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인공성을 적절하게 조합하면서 영화 매체에 관한 동화적인 언급으로 마무리한다. 궁극적으로, 이 다정한 영화는 개인이라는 ‘우주’가 필연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 쓸쓸함을 한장씩 펼쳐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것이다. 또한 아무것도 아니다. 누구나 길을 인도하는 등대불빛을 밤하늘로 열심히 쏘아올리지만 응답신호를 보내오는 이는 그리 흔치 않다. 행복의 시간은 연인과 부부간에도 기억 속에서 서로 엇갈릴 수 있다. 정말로 놀라운 인생 아닌가. 김의찬/ 영화평론가 sozinho@hanmail.net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다큐멘터리 카메라로 그들의 삶에 개입하기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신비로운 구석이 있는 연출자다. 그는 몇년 주기로 세편의 장편영화를 만들었다. <환상의 빛>과 <원더풀 라이프>(이 영화는 <사후>라는 제목으로 부산국제영화제에도 소개됐다), 그리고 최근작 <디스턴스>다. 그런데 이 영화들은 베니스와 칸영화제를 비롯한 행사들에서 빠짐없이 소개되었고 고레에다 감독은 주목받는 일본감독 반열에 올랐다. 그런데 감독이 너무나 손쉽게 세계적인 연출자가 되었다는 오해는 곤란하다. 그는 극영화와 관계없이, 다큐멘터리 작업을 10여년 넘게 해오면서 영상물을 다듬어왔다. TV다큐멘터리에서 고레에다 감독은 자신의 고유한 주제의식을 발전시켰고, 선배 영화인들의 삶에 카메라를 들이댔으며 그들 영화세계를 모방하고 재창조했다. 평소 고레에다 감독이 흠모한다고 밝힌 바 있는 허우샤오시엔과 에드워드 양 같은 대만출신 연출자들이 그들. 감독은 장편 데뷔작 <환상의 빛>이 일본영화의 거장 오즈 야스지로뿐 아니라 허우샤오시엔 등 대만감독들에게 빚지고 있음을 밝힌 바 있다. 1962년생인 고레에다 감독은 명문으로 꼽히는 와세다대학 문학부 출신. 졸업 직후 TV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연출자가 되었다. 교육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등을 만들던 감독은 허우샤오시엔에 관한 다큐를 만들면서 대만감독들과 친분관계를 갖기 시작했고 실제로 대만의 스탭들이 <환상의 빛> 스탭으로 부분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TV다큐인 <그가 없는 8월>(1994)은 AIDS 환자인 어느 게이의 삶을 일기체로 엮어낸 것. 그리고 <기억을 잃어버린 때>(1996)는 고레에다 감독 특유의 화법을 도입한 문제작으로 주목받았다. 이 TV다큐에서 고레에다 감독은 기억장애를 겪는 어느 환자를 화면에 담는다. 그는 ‘전향성 건망증’이라는 희귀한 병을 앓는데 아마도 이 증상은 최근 국내 개봉했던 <메멘토>라는 영화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쉬울 법하다. 환자가 특정 행동을 하지만, 그는 30분 정도 시간이 흐른 뒤 자신의 행동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고레에다 감독은 ‘기억과 실존’이라는 주제의식을 이 다큐를 통해 다시 한번 유려하게 풀어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다큐와 극영화 사이를 오가며 작업하는 것에 대해 “영화감독은 어떤 사람들의 일상을 영화로 찍음으로써 그들의 일상에 어떻게든 참가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난 그 사실이 퍽 재미있고 의미있는 일이라고 본다”라며 독특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