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내가 찾는 영화 정보를 손쉽게!

‘바람' 검색결과

기사/뉴스(9404)

<와니와 준하>의 김용균 감독 인터뷰

소년처럼 해사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가슴속에 늪 하나를 품고 있는 주인공 와니처럼, <와니와 준하>는 빛과 어둠이 동거하고 청춘의 천진함과 운명의 음험함이 공존하는 묘한 멜로드라마다. 그래서일까. 두번쯤 보아야 비밀과 매력을 온전히 드러내는 이 숫기없는 영화는, 개봉 첫주 좋은 쪽으로도 나쁜 쪽으로도 두드러지지 않는 수의 관객을 모았다. 2년에 걸쳐 관객에게 보내는 이 수줍은 첫 번째 러브레터를 고쳐 쓰고 올해 늦봄부터 늦여름까지 필름에 옮긴 김용균(32) 감독은, 단편 <그랜드파더> <휴가> <저스트 두 잇> 등을 연출한 영화제작소 청년 출신의 신인. 그에게 <와니와 준하>는 대학 시절부터 친구들과 가꾸어온 요람인 영화제작소 청년을 청년필름이라는 튼튼한 집으로 고쳐 짓는 첫 기둥이기도 하다. 한번 바라보기로 작정하면 대상의 미동도 놓치지 않을 듯 침착한 눈빛을 가진 그와의 대화에서는 ‘진심’, ‘취향’, ‘관객’이라는 단어가 퍽이나 자주 등장했다. 고통을 잘 극복하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여자와 남자를 보여주고 싶었다는 그에게 “그럼 계몽적인 영화인가요?” 묻자 그제야 단단한 시선이 웃음으로 허물어졌다. -개봉날 무슨 생각을 했나. =<와니와 준하>는 청년필름의 공식 창립작품이다. 찍을 때는 맘대로 했지만, 개봉일에는 고용감독도 아닌 입장에서 흥행 스코어가 부담스러웠다. 관객 한 사람 한 사람이 너무 고마웠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성적이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새에 영화가 관심권에서 멀어져 있었던 것 같다는 느낌이 있었다. -어찌 보면 <와니와 준하>는 성인으로서 삶의 틀을 잡아가는 20대의 성장드라마다. <휴가> 등 단편들에도 성장하는 젊은이에 대한 관심이 비친다. 고교 때 밴드도 하고 가출도 했다고 들었다. 앞으로 살아갈 인생의 그림을 열심히 그리는 소년이었을 것 같다. =살다보니 의외로 가출 경험이 없는 사람이 많더라. (웃음) 내가 자란 소도시 진주는 지역의 교육 중심지라 중·고교 시절부터 유학 온 친구들이 많았다. 말하자면 부모로부터 일찍 독립한 아이들이었다. 그중 일부는 공부에 열중했지만, 일부는 엇나가서 술, 담배, 인생 고민에 더 열심이었다. 후자의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내가 너무 고지식하게 살지않았나 더 중요한 문제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됐다. 그러다 6인조 밴드를 구성해 리듬기타도 쳤다. 고3이 되자 대학을 가지 않고 음악을 계속하리라 생각했다. 정말 ‘와이키키 브라더스’ 되는 거였는데. 멤버 중 반수가 다른 진로를 택해 팀이 깨지고 말았다. -‘순정영화’ <와니와 준하>를 기획한 데에는 기존 멜로드라마에 대해 관객으로서 느낀 아쉬움도 작용했을 것이다. =해피엔딩을 ‘위한’ 멜로영화, 사랑을 쌓아나가 행복한 결말로 가는 여정이 정해져 있는 영화, 병이나 사고로 인한 부재를 설정하고 그에 대한 슬픔을 의도적으로 강요하는 멜로드라마가 아닌 영화를 원했다. 기획면에서도 요즘 젊은이들은 그런 영화를 더 좋아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어차피 내 영화도 큰 틀에서는 벗어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 다만 어떻게 새롭고 신선하게 접근할까를 고민한다. -<와니와 준하>는 20대를 말하는 영화로 스스로를 규정하기도 했다. 그런데 10대, 20대의 경험을 말하려 하는 감독들의 경우 그 세대에서 한참 멀리 온 나이가 되어서야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여건이 되곤 한다. =녹음실에서 기다리며 <고양이를 부탁해>를 재미있게 봤다. 그런데 해당 연령층의 관객은 <고양이를 부탁해>를 많이 보지 않았다. <와니와 준하>의 경우는 세대보다 여성성과 남성성의 문제로 나눠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나 역시 남성성이 강한 사람이었는데, 25살 전후해서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아내가 밖에서 일하는 동안 아이를 키우고 살림을 하면서 여성성에 눈뜨게 됐다. 그리고는 마초적인 것이 점점 싫어졌다. <와니와 준하>의 관객 반응을 보면 여성이나 여성성이 강한- 겉보기에 여자같다는 뜻이 아니라- 남자들이 한결 긍정적이다. -비주류로 취급되는 동성애, 결혼을 전제로 하지 않은 동거, 변형 가족의 묘사를 영화 안에 심상하게 묻어놓았다. 남다른 조건을 안고 살아가는 이 인물들이 자신의 ‘다름’에 대해, 피해의식이나 은근한 우월감이 없고 쿨하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그러나 일반시사에서는 게이 캐릭터가 나오는 대목에서 웃음이 터졌다. =웃음에는 솔직히 당황했다. 기획회의를 통해 그런 인물들을 하나씩 넣은 게 아니라 내 취향 또는 바람 같은 것이었다. 금기시된 소재와 설정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다. 사회가 이런 대상을 낯설어하고 불편해하고 매도하는 것에 대한 반발심리도 있었다. 그럴수록 이들을 확대하고 보편화해서 똑같은 사람임을 보여주고 싶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와니와 영민을 이복남매가 아닌 친남매로 설정하는 것은 고려하지 않았나. =개인적으로는 친남매인 쪽이 더 재밌다. 그러나 소재나 상황 자체가 지나치게 선정적으로 회자되면 이 영화에서 본질적인 부분인 인물이나 심리가 가려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적정선을 고민한 결과가 현재다. -와니와 준하의 동거생활 묘사에서도 베드신은 최소화했다. =개인적으로 에로틱한 영화를 좋아한다. 그저 이번 영화에서는 그쪽으로 관심이 가지 않았다. <거짓말>의 메이킹필름에 참여한 것도 섹스를 ‘제대로’ 찍는 영화였기 때문이었다. 이 영화를 보고 주로 느꼈으면 했던 감정은 천진함, 순수한 이미지였기 때문에 베드신이 들어가더라도 구조적으로 비중이 미약할 수밖에 없고 그러다보면 어설프게 건드리게 될 것 같았다. 함께 사는 관계에서 섹스는 무척 중요한 문제이지만 어떤 시기에는 전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와니와 준하가 그런 시기 아니었을까. -단편 시절에는 주로 스스로 카메라를 잡았다. <와니와 준하> 촬영에 원칙이 있었나. =화면의 깊이감에 대해서는 촬영감독과 처음부터 합의했다. <와니와 준하>의 화면은 예쁘지만 콘트라스트가 분명하다. 기존 멜로드라마의 화사하고 뽀얀 평평한 화면과 조금 다르다. 어떤 주제를 다루어도 어둠과 밝음이 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와니의 고백이 아버지의 죽음을 야기한다. 영민과 말없이 유학을 떠나도 될 일을 왜 굳이 운전중인 아버지에게 충격을 주냐고 농담처럼 말하는 관객도 있더라. =평소 ‘충동’이라는 것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 입 밖에 내지 않을 수도 있고 누가 추궁하는 것도 아니지만 와니는 영민에 대한 사랑을 어떤 형식으로든 소리내어 말해야만 했던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와니와 내가 닮은 부분이기도 하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고, 만화 기법을 영화에 옮겨오는 과정에서, 조금만 더 지그시 응시하면 감정의 파고를 높일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부분에서도 편집 리듬이 규칙적으로 갔다는 인상을 받았다. =가편집이 더 좋았다는 말도 들었다. 잘 모르겠다. 단번에 재료를 맘대로 요리하거나 객관적이 되긴 어려운 것 같다. 어쨌든 현재 113분의 러닝타임도 잔잔한 멜로영화로서는 긴 편이라고 생각했고 더 길어지는 건 스스로도 용납하기 어려웠다. 단편 시절에는 유럽영화들을 좋아했는데 직접 장편을 만들고 나서는 아시아영화의 리듬이 편안하게 느껴진다. 최근에는 <햇빛 쏟아지던 날들> <귀신이 온다> <하나 그리고 둘>을 좋게 봤다. -점프 컷 사용이나 애니메이션같이 다른 매체를 쓰는 시도 등 형식적인 유희에도 무관심한 편이 아닌 것 같다. =첫 장편이라 더 조심하고 싶었다. 이 영화에서 더 중요한 건 정서와 인물이니까 스타일이 관객의 시선을 가로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단편에서 그런 욕심이 앞서 실패한 경험도 있어서 더욱 신중했다. -<와니와 준하>의 애니메이션은 완성도가 높고 아름답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애니메이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첫사랑의 신화와 사랑의 운명성을 강조함으로써, 현실적인 사랑의 굴곡을 침착하게 그린 실사 부분이 갖고 있는 멜로드라마로서의 혁신성을 가리는 면도 있지 않았나. =영화의 흐름이 닫히는 느낌이 있긴 하다. 실제로 시나리오를 쓸 때에도 애를 먹었다. 지금은 영화가 순정만화처럼 포장돼 있고 애니메이션과 관련된 논의가 가장 두드러져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 영화에 애니메이션을 쓰려는 욕구가 워낙 강했다. 관객도 좋아한다. 내게 지금 제일 중요한 건 한 사람이라도 더 이 영화의 맥락을 잘 이해해주는 것이고 따라서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보는 것은 참 긴요한 일이다. 다른 선택을 해서 애니메이션 부분을 뺐다면 실사 부분이 지금보다 더 완성도가 높아져야지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동거, 동성애 등 이 영화의 주제와 갈등, 개성이 더 잘 짜여진 구조 안에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장편애니메이션을 연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꾸준히 공부하겠지만 가까운 미래에 계획은 없다. -첫 영화를 마쳤다. 연출 방법론에서도 나아갈 방향이 보이는지. =<와니와 준하>에서는 영화의 톤과 현장 분위기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해 말수를 아끼고 기다리는 태도를 취했다. 노력했다. 느낀 바가 있다면, 감독은 잘나고 못나고를 떠나 한 프로젝트의 핵심 라인을 쥐고 누구보다 깊은 고민을 바탕으로 제안을 하고 프로덕션이 흔들릴 때 근거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무엇이 부족하고 게을렀는지가 보인다. 얼마 전 <대부>의 DVD에서 당시 코폴라의 작업 모습을 보았다. 거대 예산영화를 풋내기 감독에게 맡기고 불안을 느낀 제작사가 여차하면 편집을 대신할 감독까지 대기시켜놓은 상태에서, 그가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준비하고 노력했나를 보며 좋은 감독이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구나 새삼 느꼈다. -앞으로도 청년필름에서 계속 작업할 계획인가. =같이 갈 거라는 전제는 확실하다. <와니와 준하>는 청년필름이 모든 프로덕션을 독자적으로 해결한 첫 작품이고 이번에 축적된 제작력은 당연히 <질투는 나의 것>에 발전적으로 반영될 것이다. <와니와 준하>는, 그저 정리하고 끝내지 않고 대안을 낼 때까지 회의를 끌고 나가는 청년필름의 방식에서 큰 힘을 얻었다. 나의 결핍을 많은 사람의 힘과 통제가 메워주었다. 이 영화의 미덕은 전적으로 거기서 나왔다. -결국 대학 시절부터 영화제작소 청년에서 함께 성장한 <해피 엔드>의 정지우 감독과 나란히, ‘감정’에 관한 영화로 장편 극영화 데뷔전을 치른 셈이 됐다. =지우와 나는 20대를 온통 같이 보냈다. 결혼식 비디오, 홍보 비디오를 찍으며 청년 사무실 살림을 꾸려가면서. 둘이 장편영화에 착수할 때쯤 되자 오래된 연인처럼 그냥 바라보고 특별한 대화가 필요치 않은 경지가 됐다. ‘청년’이 영화운동 주체였기 때문에 우리도 사회, 정치적 이슈를 다루는 영화를 해야 하지 않을까 짐작하는 시선도 있지만 그건 좁은 시각인 것 같다. 정지우 감독도 나도 오락영화를 하더라도 진심을 담아낼 거라는 점은 변함없을 것이다. -많은 관객과 만날 수 있는 영화에 관심이 깊어 보인다. 그렇다면 <와니와 준하>에서 경험한 스타, 장르영화에 대해서도 길게 연구하게 될 텐데. =관객과의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노력하면 뭔가 이룰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기고 그것이 내 장편영화 커리어의 목표가 될 거다. 보기와 달리 근성이 있다. (웃음) 스타에 대해서도 두려움과 낯섦이 있었는데, 첫 영화를 통해 그런 환상과 거리감이 사라졌다. 스타 시스템을 염두에 두지 않은 저예산영화를 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 많은 사람이 보는 웰메이드 영화를 하고 싶다. 장르를 연구하려는 욕심도 생겨 영화를 보면 예전 같지 않게 잘게 뜯어본다. 지금은 내게 남아 있던 ‘예술한다’는 허위의식을 지워가는 시기 같다. 대중과 호흡하고 싶다는 말이 돈 벌고 싶다는 뜻만은 아닐 거다. 영화감독으로서의 직업관이 내 안에서 자라나고 있음을 느낀다.

당파성의 도덕

배우 문성근이 민주당의 대선후보 경쟁을 벌이고 있는 노무현 지지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섰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화제가 되고 있다. 일찌감치 ‘안티 조선일보’와 노무현 지지운동에 열을 올리고 있던 명계남도 마찬가지이며, 이들의 친구인 이창동 감독도 뜻을 같이하고 있다. 이들의 행보가 흥미로운 것은 이런저런 후원행사의 사회를 맡거나 강연에 나서 아주 ‘대놓고’ 노무현 지지를 표방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단순한 바람잡이가 아니라 분명한 정치적 명분과 철학을 천명하고 있다는 점도 신선하고 인상적이다(그 명분과 철학을 소개하는 것은 사전 선거운동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생략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치적 견해처럼 선택적인 주장에 대한 자신의 성향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특히 연예인이나 운동선수처럼 대중적 지명도가 높은 사람들은 더욱 그렇고, 영화감독이나 배우들도 마찬가지다. 사정이야 다르지만 미국의 유명 배우들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정치 성향을 피력하는 것과는 너무 다르다. 스티븐 스필버그, 올리버 스톤, 우디 앨런, 로버트 드 니로, 마틴 신 등이 소문난 민주당 지지자들이고 공화당 지지자들도 적지 않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진 바다. 반면 우리나라의 유명인들이 이런 활동에 소극적인 것은, 서로의 차이나 다른 주장을 인정하고 존중하기보다는 배타적으로 대응하는 사회·문화적인 현실 탓이 가장 크다. 정치성향이 드러나면 입장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할 수 있고, 그런 상황이 당사자들에겐 아주 피곤한 일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지레 겁을 먹고 대개는 무색무취하거나 초연한 척하면서 자신의 정치색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고 보호막을 치게 되는 것이다. 보아온 바에 따르면, 유명인들 중에서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은 몇 가지 부류가 있다. 개인적인 성향은 뚜렷하지만 굳이 공개하고 싶지 않다거나 자신의 세계관을 제대로 대변해줄 정파가 없기 때문에 소극적이라는 등의 의견은 마땅히 존중해야 한다. 하지만 ‘공인’은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거지 발싸개 같은 궤변을 늘어놓는 사람들의 주장은 영 밥맛이 없다. 뭐가 뭔지 모르거나 귀찮아서 모른 척하겠다는 것이 이들이 말하는 중립의 속내이기 때문이다. 선거철이면 일부 연예인들이 어제는 여당 유세장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오늘은 야당 유세장에서 똑같은 소리를 하는 해프닝을 중립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차라리 돈을 받고 출연한다면 몰라도, 무슨 친목회도 아니고 선거판에서 중립을 지키기 위해 적대적 전선을 형성하고 있는 여당과 야당에 공정하게 얼굴을 내비친다는 식의 논리도 어이없기는 마찬가지다. 영화계에서도 쟁점이 되는 사안이 있을 때마다 자신의 주장을 공개하는 것을 꺼리는 사람들이 많다. 튄다거나 신중하지 못하다고 비판받기 십상이고, 영화 만드는 일이 혼자 하는 일이 아닌 다음에야 두루 눈치를 살피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영화 만드는 일이 시대성과 역사성을 아우르는 복합적인 문화상품을 생산하는 일이라면 당파성을 갖는 것이 논리적으로도 맞는 일이다. 부디, 영화인들의 공개적인 노무현 지지운동이 돌출적인 이벤트 정도로 폄하되지 않기 바라고, 부디 이회창을 지지하는 영화인들도 ‘커밍아웃’해서 저급한 비방이나 모함이 아닌 수준 높고 폼 나는 한판 공방이 벌어지길 기대한다. 그렇다고 모든 영화인들이 지지자 이름 새긴 머리띠를 동여매고 편갈라서 한판 붙으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적어도 옳고 그름에 대해, 좋고 나쁨에 대해 분명한 자신의 입장과 주장을 드러내 합의를 모색하는 것이 민주적이고, 다양성을 확장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조종국/ 조우필름 대표 kookia@jowoo.co.kr

<파라다이스 빌라>의 박종원 감독

연립주택 <파라다이스 빌라>는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속은 그렇지가 않다. 이웃집 여자와 불륜에 빠진 펀드 매니저, 어른들에게 몸을 파는 소녀, 이웃에게 정수기를 팔기 위해 옥상 물탱크에 흙을 퍼넣는 주부, 몰래카메라를 곳곳에 설치하고 테이프를 파는 학생들…. 서로 이웃에게 친절한 척하지만 그 안에는 선을 가장한 공격성이 도사리고 있다. 2002년 월드컵 축구 한일전이 생중계되는 날, 이 빌라에 이방인이 들어온다. 온라인 게임에서 무기를 도둑맞고 분노에 사로잡힌 재수생이 무기를 훔쳐간 다른 학생을 찾아왔다가 살인을 저지른다. 불륜을 은폐하려는, 물탱크에 흙을 넣으려는, 몰래카메라를 감추려는, 빌라 구성원 저마다의 음험한 계산이 도화선이 돼 한번의 살인이 연쇄살인으로 이어진다. 축구를 보며 내지르는 고함소리로 빌라가 떠나갈 듯한 가운데 가운데 7명이 죽어나간다. 7일 개봉하는 박종원(43) 감독의 5번째 영화 <파라다이스 빌라>는 전작 <송어> 처럼 소시민 사회에 대한 음울한 소묘다. 다만 소시민의 나약하고 비열한 모습을 클로스업했던 <송어>와 달리 이번에는 그 사회에 잠복해 있는 광기에 주목한다. “온라인 세상이 커지면서 사회는 더 개인화하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구분하지 못하는 이들도 나온다. 사이버머니가 실제 화폐의 기능을 하고 온라인에서 오프라인 같은 일이, 오프라인에서 온라인 같은 일이 벌어진다. 그걸 다루려 했다. 월드컵이 열리면 마치 나라가 곧 바뀔 것 같은 우리사회의 이상열기 내지 광기는 인터넷과 맞아떨어지는 면이 있다.” <파라다이스…>는 공포스릴러의 장치를 빌어 디테일들이 입체화된, 짜임새있는 연출을 보이지만 인간에게 차가운 태도는 <송어>와 궤를 같이 한다. 도무지 구제불능일 것 같은 인간 군상의 모습을 관객이 불편해할 때까지 보여주는 뚝심이 놀랍지만, 그게 너무 적나라하고 위악적이어서 그들을 구제할 방법으로 또다른 권력적 힘을 기대하는 건 아닌지 의심을 살 수도 있을 것 같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영원한 제국>을 통해 권력과 사회의 부조리함을 다루고 나서 개인적인 얘기를 하고 싶어졌다. 사람들이 세기말을 얘기하는데 본질을 말하지 않고 그림자만 지적하는 것 같았다. 나는 나 자신을 포함해 우리가 이것 밖에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 아름답지 못한 본질을 껴안고 가야 하는 게 아닌지. 권력적 힘 같은 걸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영화를 찍을 때 힘들지 않았을까, 앞으로도 같은 길을 갈 것인가. “힘들다. 카메라 앵글을 다듬고 화면을 잘 잡아도 얘기의 방향이 좋은 게 아니니까…. 앞으로는 다른 걸 계획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통일에 관심이 많아졌고, 또 6·25에 참전했던 아버님이 얼마 전에 돌아가셨다. 더 늦기 전에 6·25에 대한 영화를 만들려고 한다. 다시 역사적인 이야기로 돌아오는 거고, 스케일이 큰 영화여서 개인적인 시각이 전면에 나서지 않을 것이다. 또 나이가 드는데 차갑고 냉소적인 시선이 더 강해지긴 어렵지 않겠는가.” “나이 들면서 시각이 유순해지는 감독이 많은데, 바람직하지 않은 것 아닌가”라는 질문에 그는 “폭이 넓어진다는 뜻이지 유순해진다는 건 아니다, 자기만의 문제의식이 없다면 이미 죽은 감독과 마찬가지”라고 대답했다. 임범 기자isman@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jsk@hani.co.kr

나운규의 <아리랑>에서 영화의 힘 느껴, 배우가 되다- 윤봉춘(3)

목재소에서 인부로 일주일을 일한 적이 있는데 하루는 거기서 쓰러졌어요. 의사의 말이 자기 가슴을 짚어봐라, 왼짝 가슴을 짚어보니까 파딱파딱 하거든요. “이게 심장인데 당신은 물이 잡혀서 심장이 점점 오른쪽으로 이사갔다”는 겁니다. 수술합니다. 큰 대야를 가지고 하는데, 숨을 들여쉬면 확확 나오는데 사람 속에 무슨 물이 한 대야를 넘어요. 대야를 또 바꿨습니다. 그 바람에 갈비뼈가 이렇게 들어가면서 귀도 약해지고. 크리스마스 날 예배당 가보니까 몸이 건강했거든요. 건강하니까는 봄부터는 축구를 했어요. 늑막염 앓는 사람이 축구가 다 뭐야. 기침이 나고 또 어떡해. 진찰하니까 늑막염이 재발했대요. 사형선고를 내려요. 하루 종일 하늘의 구름 보면서 죽는구나 생각하다 저녁 때 집에 들어갔어요. 어머니 보니깐 눈에 눈물이 있더라고. “낙심 마라. 믿음으로 고쳐야 한다. 교회 열심히 하고 운동하지 마라.” 근데 운동을 안 하고는 못 배기는 성질이거든. 이른 봄부터 늦은 가을까지 운동장에 가서 테니스하고 공 굴리기 했습니다. 병이 나았느냐 들었느냐 묻지 않고 그저 이틀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약 받아 가지고 먹고 그랬습니다. 한번 갔더니 이제는 오지 않아도 좋다, 다 나았다는 거야. 지금까지 얘기는 내가 나운규 편지를 받고 영화계에 진입하게 되는 전치사. 전치사치곤 좀 길다.(웃음) 두만강을 건너며 부른 이별노래 몇달 후인가 됐는데 아버지 보고 얘길 했습니다. 영고탑(寧古塔, 중국 동북 지방 헤이룽성(省) 남동부에 있는 닝안(寧安)의 옛 이름- 필자)이라는, 그 시절에 독립군 집결지가 있었습니다, 그리로 간다고 돈 달라고 하니까 어머니가 어디 가서 돈을 가져온다는 게 50전인가. 그날 저녁에 마리아를 짝사랑하던 헌병이 찾아와서 나를 부르는 겁니다.(윤마리아는 회령 제일의 미녀로 소문난 여학생인데, 나운규가 윤봉춘을 시켜 마리아에게 연애편지를 전달하곤 했다. 그러나 마리아를 좋아하던 헌병의 압력으로 나운규는 무기정학을 당했고 곧바로 간도로 떠났다. 16살인 1918년의 일로 이때부터 영화에 입문하는 1924년까지 나운규의 젊은 시절은 유랑과 투옥으로 점철되었다. 나운규의 작품에 방랑자 이미지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필자) 윤군! 윤군! 악질스러운 목소리거든. “쫌 물어볼 게 있네.” 헌병대로 가자는 겁니다. “근데 제가 지금 저녁예배를 안 봤는데 예배 보고 곧 가겠습니다.” 그래 예배를 받나요? 핑계죠. 목사님 댁에 가서 자고 그날 영고에 들어가는데 남은 게 20전이야. 가는 도중에 용정에, 제2의 한국입니다, 주말마다 거기에서 놀았기 때문에 아는 친구들도 있고 그래서, 친구를 찾아갔죠. 근데 친구를 만나지 못했어요. 팥죽 한 그릇 10전이에요. 이제 10전 남았습니다. 그때는 가다가 동장이나 이장이나 봐서 얘길 하면 하룻밤 재워주고 또 어지간한 사람은 여비도 좀 보태주고, 인심이 궁하지 않았어요. 영고탑으로 걸어가는데 뒤에서 누가 윤봉춘! 윤봉춘! 하면서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구. 그래서 돌아다보니까 친한 사람이야. 김명봉이라는 사람인데 내가 독립군에 있을 때에 알았죠. 이 사람은 한국사람으로 로서아(러시아)에서 난 사람입니다. 2세죠. 이 사람이 거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 맡고 군인으로 들어갔다가 볼세비끼들이 밀고 들어오는 바람에 백군으로 겨서 웅진으로 나진으로 왔으니, 그러니까 멘세베끼죠. 그땐 참 고급 장교들도 나오고 미인들도 많이 나왔습니다. 이것들이 청진 원산 서울 가서 모두 창녀노릇 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우리가 용정서 연극할 때 러시아 여자 하룻밤 무대 등장시키는데 10전. 풍속회라고 만들어 가지고 풍속회 회장이 거기서 병원을 차리고 있어요. 그래서 모든 러시아 사람들은 그 병원에 가 고칩니다. 한국에서도 불치의 병이 있다 그러면 거기 가서 고칩니다. 김명봉이 그 병원의 통행관이었는데 한국말이 아주 서툴러요. 근데 내가 밥도 안 먹고 자면서 기침을 자꾸 하니까 그 이튿날 아침에 조반을 먹고 병원을 데려갔어요. 김명봉이가 의사하고 통역하는데 “내 신세나 당신의 신세나 마찬가집니다. 나도 조국을 위한 망명객이고 당신도 조국을 위한 망명객입니다. 당신이 지금 영고탑으로 간다 그러니 가는 길 막지는 않으나 당신의 몸에 병이 있는 듯하다고 하니 드러누우쇼.” 눈물나더라고. 난 무료로 병치료 하고. 그러다가 영고탑 가는 거 포기되고. 예우회라는 극단을 맨들었어요. 연극을 할 때 마루시아라고 하는 러시아 장교 딸하고 친했어요. 뜻이 맞았어요. 살자 그랬습니다. 나는 결혼하는 거 미국사람, 동구사람 이런 것도 그때부터 초월한 것 같아요. 이 여자하고 두만강을 건널까 했는데 외국사람 들어오면 지참금이 있어야 돼. 이 여자한테도 돈이 없었고 나한테도 돈이 없었으니까 할 수 없어서 두만강변에서 이별의 곡을 불렀습니다. 그것이 아마 1926년 이른 봄인 것 같습니다. “나도 서울가면 영화배우가 될 수 있느냐” 그래서 운규가 영화계에 들어간 걸 알았고. 26년 겨울에 운규가 편지 하고 해동에 찾아왔어요. 올 때 <아리랑>(1926), <풍운아>(1926)를 가지고 왔습니다. 만년좌 극장 문 앞에다가 솔나무 가지로 아치를 해서 광고를 대대적으로 했죠. <풍운아>는 새겨보지 않으면 아주 방탕한 작품같이 보입니다. 교인들이 중간에 보다가 다 나가버렸어요. 그런데 그 이튿날 <아리랑>은 첨부터 마지막까지 관객이 발을 구르고 박수를 하고 대환영. 그때 해설자가 우정식인데 <풍운아>를 해설하다가 잘못한다고 도중에 얻어맞았습니다. 운규가 그렇게 성격이 급하고 다혈질이에요. 그날 공연이 끝난 후에 운규하고 만났습니다. “니 영화를 보니까 대단히 좋다. <풍운아>는 볼 거 없는데 <아리랑>은 보니까 대단히 좋다. 나는 거에서 무엇을 느꼈는고 하니 백리 이백리 길을 찾아 댕겨야 동네 사람들을 모아놓고 선교를 한다. 그렇게 괴로운데 영화 보니까 그림자만 돌아 댕기면 할말 다한다. 그러니 얼마나 영화가 좋아. 나도 서울 가면 영화배우가 될 수 있느냐.” 문제없다는 거야. “서울 가서 영화계 관계해보니까 맨 미숙한 사람들이다. 너도 오면 된다.” 그러곤 서울 올라가서 연락이 와요. 올라갔죠. (“그 전에 나운규는 영화에 대한 제반적인 공부를 그때 했었나요?”- 대담중의 이영일) <명금> <철로의 백장미> 이런 작품들이 연속극으로 왔거든요. 운규하고 영화관 가면 나는 영화를 겉에서 보기만 하는데 운규는 노트를 가지고 와서 일일이 기록을 합니다. 전부 그림을 그려 가지고 구경하고 집에 와서는 해설을 합니다. 그게 공부라면 공부죠. 그 이듬해에 1927년 3월에 운규가 서울 오라고 전보가 왔어요. 서울 올라올 때 양복 입고 털 깃모자 쓰고 대륙잡지 한권 들고 왔어요. 서울역에 운규가 나온다 그랬는데 없어요. 대략 지리는 알지만 어림잡고 남대문을 거반 지나오는데 저 아래서 운규 특수한 뜀뛰기! 거기서 만나서 조선키네마에 찾아갔는데. 이것은 요도(淀)라고 하는 일본사람이 사장인데 거기 배우로 신일선, 이경선, 이금용이 있었고, 카메라맨으로 이명우가 있었습니다. 저녁에 운규가 시나리오를 하나 주면서 “내일 아침 촬영이다. 시나리오 보고 분장연습을 해라. 회령 있을 때 우리와 같이 연극도 하고 그랬으니까 분장도 할 줄 알 것이다. 배우 성격도 니가 설정할 것이다.” 그러구 거울과 시나리오를 주고는 나갔어요. 밤새도록 읽고 분장을 해봤습니다. 데뷔작 연기 호평받아 그거는 서울 변두리에 사는 중산계급의 부잡니다.(“그게 <들쥐>(1927)였죠?”- 대담중의 이영일) 이웃에 사는 신일선이라고 하는 예쁜 여학생한테 반해서 신일선의 망나니 오빠를 돈으로 매수해 가지고 신일선이를 샀습니다. 결혼을 하는데, 동네에 가면 ‘돈 한푼 줍쇼’ 하는 거지떼가 있는데 별명이 들쥐야. 들쥐와 같이 집도 없고 얻어서 먹는다 그래서 들쥐라고. 그 들쥐의 두목이 나운규. 근데 신일선이라는 여자는 학교에 가다가도 들쥐를 만나기만 하면 학비, 연필 살 돈이라도 주고 아주 친절했어요. 들쥐한테 환심을 얻고 있는데 결혼식 날 신일선이가 가마에서 울고 가는 걸 보고 들쥐들이 포위해 가지고 못된 영감을 쫓아버리고는 주삼손이라 하는 옹과 결혼식을 시켜준다. 이런 스토리거든요.(<들쥐>는 일제와 식민지 조선의 관계를 암시하는 작품으로 한국영화사상 최초로 전편 상영금지처분을 받았다.- 필자) 근데 수염을 붙여도 악한 같지 않고, 밤새도록 10여 차례 분장을 썼다 지웠다 했습니다. 그 이튿날 오후에 왕십리 가서 로케를 했는데요, 거기서부터 제가 난생 처음 카메라 앞에 섰죠. 맨 처음에 카메라가 바스트로 들어옵니다. 첫 카트엔 에누지(NG)를 먹었습니다. 카메라 앵글을 몰랐습니다. 근데 <들쥐> 시사회 때 신문 기자들이 신문 평에다가 ‘이 사람은 과거에 출연한 연기자와 같이 느껴진다’. 그렇게 첫 작품에 호평을 받았어요. 정리 안선주/ 중앙대학교 영화과·이영일 출판프로젝트 연구원 babtong80@hanmail.net이 기록은 고 이영일 선생이 남긴 귀중한 자료인 원로영화인 녹취테이프를 소장 영화학도들이 풀어 정리한 것입니다.

돌 부처님이 입김으로 피운 꽃

“누나, 눈이 바다보다 넓게 내린다.” 눈발 가득한 바다를 바라보고 있던 스님은 아이의 목소리에 뒤돌아봤다. 대여섯살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장님 소녀의 손목을 잡고 서 있었다. 아이는 또 말했다. “누나, 오늘 하늘이 저 스님이 입은 옷 색깔하고 같아. 저런 색을 뭐라고 하더라?” 스님은 재색이라고 말해줬다. “우리 누나는 그런 말 못 알아들어. 맞아, 생각났다. 맛없는 국 색깔이야.” 아이의 표현을 따르자면 ‘머리에 머리카락 씨만 뿌려져 있는 나물국 스님’은 그렇게 거지 남매와 처음 만났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설화 속 등장인물을 이처럼 생생하게 살려낸 것은 고 정채봉 선생이다. <오세암>에 등장하는 것은 고아 남매 길손이와 감이, 그리고 설정 스님. 숲에서 다시 만난 남매를 스님이 거둬들이고, 마침내 다섯살 길손이가 암자에서 성불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인기리에 방영된 TV시리즈 <하얀마음 백구>를 만든 애니메이션 제작사 ‘마고21’은 설악산 오세암을 둘러싼 설화를 섬세하고 생생하게 그려낸 정채봉의 동화에 주목, 2000년 7월부터 애니메이션 <오세암> 기획에 들어갔다. 현재는 메인 프로덕션이 30%가량 진척된 상태. 손오공과 신보투자, 영화진흥위원회의 지원금으로 제작되는 애니메이션 <오세암>은 2002년 하반기 개봉을 목표로 하는 70분 분량의 장편이다. 주요 타깃은 7살에서 13살 어린이다. 이정호 프로듀서와 성백엽 감독이 이끄는 제작팀은 두번의 설악산 답사를 거쳐 배경과 캐릭터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백담사에서 오세암, 미시령, 동해안을 거치면서 관음사, 오세암 내부, 주변 풍경은 물론 설악산 정경을 그대로 옮겨왔다. “<백구>가 일일 드라마라면 <오세암>은 미니 시리즈 같은 느낌이죠. 좀더 시적이고 깊이가 있다고 할까요. 보는 이들이 동양화를 감상하는 듯한 기분을 <오세암>에서 느꼈으면 합니다.” 마고21 대표를 맡고 있는 이정호 프로듀서는 이렇게 말한다. <하얀마음 백구> 스탭이 그대로 뭉친 만큼 캐릭터 변별에도 신경을 썼다. 몇 개월 만에 태어난 캐릭터들은 모두 눈이 강하게 표현됐다. 원작을 최대한 살리자는 취지지만, 길손이의 엄마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강조할 예정이라고. 길손이가 관세음보살을 거짓없이 따르게 된 동기는 바로 모성 갈구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만큼 함축적인 원작을 구체적인 에피소드로 풀어내는 것을 중요한 관건으로 삼고 있다. 설정은 다르지만 <오세암>은 동화 <빵 포도주 마르셀리노>와 매우 비슷하다. 스페인 소년 마르셀리노 역시 프란체스코수도원 골방에서 십자가의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갔다. 그러나 마르셀리노가 식은 나물국과 잿빛의 이미지를 연결해낼 수 있었을지 바람의 손자국, 발자국이란 표현을 구사할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다. 작가가 1984년에 완성한 <오세암>은 1985년 초판 이후 10만부가 발행된 스테디셀러다. 정채봉 선생의 숨결에 마고21의 손길이 더해져서 어떤 이미지로 태어날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국악기와 양악기를 동시에 사용한다는 방용석 감독의 사운드도 기대된다. 가만히 귀기울여보자. 찬바람 몰아치기 시작한 창가 어디쯤에서 길손이 목소리가 들릴지도 모른다. “누나, 꽃이 피었다. 겨울인데 말이야. 바위틈 얼음 속에 발을 묻고 피었어. 누나, 병아리의 가슴털을 만져본 적 있지? 그래. 그처럼 꽃이 아주아주 보송보송해. 저기 저 돌부처님이 입김으로 키우셨나봐.” 김일림/ 월간 <뉴타입> 기자 illim@korea.com

상영작 미리 보기

개구쟁이들 Les Mistons 1958년 23분 흑백 5명의 악동들은 베르나데트와 제라르라는 두 연인의 주위를 맴돌며 그들을 관찰하고 때론 훼방을 놓기도 한다. 연애담을 다룬 영화라기보다는 연애를 지켜보는 자의 감정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광 트뤼포의 자의식이 반영된 작품이다. 동시에 아이들의 세계에 대한 애정어린 묘사에서 를 예견케 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짧은 영화지만 이 영화에는 이후 트뤼포의 영화를 특징짓는 요소들이 이미 드러나고 있다. 그 가운데 여성에 대한 매혹, 장르영화의 창의적인 인용 등이 특히 눈에 띈다. 팬과 트래킹숏 및 고속/저속 촬영의 자유분방한 결합을 통해 놀랄 만큼의 정서적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현란한 스타일의 영화이기도 하다. 400번의 구타 Les Quatre cents coups 1959년 94분 흑백 트뤼포의 장편 데뷔작.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며 못된 짓을 일삼지만 발자크에 나름의 경의를 표할 줄도 아는 수줍은 악동 앙트완 드와넬이 주인공이다. 드와넬의 모습에는 불량소년이면서 영화광이자 문학에 심취했던 트뤼포 자신의 어린 시절이 거의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드와넬을 둘러싼 환경이 비참하고 음울한 것으로 묘사되기에 충분한 조건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트뤼포가 그 속에서 결코 작위적이지 않은 낙천성과 유머, 생기를 이끌어내고 있다는 점은 지금 보아도 여전히 놀랍다. 이 영화는 흔히 삶의 비극성을 향한 과도한 집착으로 귀결되고 마는 리얼리즘의 함정에 빠져들지 않는다. 트뤼포의 ‘제2의 아버지’인 평론가 앙드레 바쟁(그는 영화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에게 헌정되었다. 칸영화제 감독상 수상. 피아니스트를 쏴라 Tirez sur le pianiste 1960년 85분 흑백 2명의 사내에게 쫓기던 치코는 피아니스트인 동생 샬리가 일하는 술집으로 숨어든다. 범죄에 얽히길 기피하는 샬리는 치코가 못마땅하지만 그의 도주를 돕는다. 샬리는 같은 술집에서 일하는 레나에게 관심을 갖고 있지만 수줍은 성격 탓에 그녀에게 선뜻 마음을 내보이길 망설인다. 형의 소재를 찾던 두 사내는 샬리를 미행하고 결국 그와 레나를 납치하기까지 한다. 장르영화에 대한 탐구라고 하는 트뤼포의 관심이 본격적으로 드러난 첫 번째 영화. 느슨한 갱스터 장르의 내러티브 위로 삼각관계의 멜로드라마가 이중으로 겹쳐지며 영화의 분위기는 심각함과 코믹함 사이를 자유로이 넘나든다. 지극히 소심하며 고립 속으로 자신을 밀어넣는 주인공 샬리 역을 맡은 샤를르 아즈나부르의 연기로도 기억될 만한 영화. 쥴과 짐 Jules et Jim 1961년 100분 흑백 명실공히 트뤼포 초기의 대표작. 트뤼포 영화의 모든 매력이 다 담겨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앙리 피에르 로쉐의 소설이 원작으로 양차 세계대전 사이의 기간을 중심으로 세 연인의 사랑이야기가 펼쳐진다. 파리에서 만난 쥴과 짐은 금세 절친한 친구가 된다. 그들은 문학에 대해 논하며 때론 같이 여자들을 만나러 다니기도 한다. 어느날 카트린이라는 여자가 그들 앞에 나타나고 둘은 그녀를 흠모하게 된다. 초반부에선 갑자기 터져나오는 예기치 못한 사건과 행동들이 주는 격렬하고도 순간적인 아름다움이 자유분방한 카메라 워크와 몽타주를 통해 표현된다. 중반부는 롱테이크가 두드러지며 라울 쿠타르의 카메라는 고다르와의 작업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목가적인 서정성을 창출해내고 있다. 부드러운 살결 La Peau douce 1963년 113분 흑백 앙트완 드와넬 연작의 두 번째 영화 <앙트완과 콜레트>를 만든 이후, 트뤼포의 경력은 다시 장르영화에 대한 일련의 탐구로 이어진다. 도시 중산층 부르주아들의 삶을 중심으로 한 이 멜로드라마는 결국 복수의 살인극으로 결말이 난다. 트뤼포는 장르의 인용과 혼합에 의존하는 대신 고전장르의 구조에 미세한 변화를 가하는 데 중점을 기울였다. 학자인 피에르는 ‘발자크와 돈’이라는 강연을 하기 위해 리스본행 비행기에 오르는데 거기서 한 스튜어디스를 눈여겨본다. 그들은 나중에 호텔 엘리베이터 안에서 다시 만나게 되고 이후 불륜의 관계로 빠져든다. 간혹 과감히 시간을 압축하며 빠르게 전환되는 장면들, 거울이나 사진 및 포스터와 같은 소도구들을 적절히 활용한 미장센과 상황설정이 인상적인 매우 섬세한 영화다. 상복입은 신부 La mariee etait en noir 1968년 107분 컬러 <부드러운 살결>에 이어 트뤼포는 <화씨 451도>로 SF 장르에 도전했다. <화씨 451도>에서 잠시 니콜라스 뢰그와 작업한 트뤼포는 여기서 다시 라울 쿠타르에게 촬영을 맡겼다. 트뤼포가 히치콕을 숭배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화씨 451도> 바로 이후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 트뤼포가 처음으로 시도해본 히치콕식 살인 서스펜스물이다. <사이코> <현기증> 등 히치콕 영화에서 음악을 담당한 버나드 허만까지 가세했다. 윌리엄 아이리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트뤼포의 첫 번째 영화이며 잔 모로와 함께 작업한 두 번째 영화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자신에게 매혹당하는 남자 다섯을 차례로 살해하는 살인범 역을 맡았다. 미국 장르영화에 대한 감독의 관심을 엿볼 수 있다. 훔친 키스 Baisers Vole's 1968년 90분 컬러 앙트완 드와넬 연작의 세 번째 영화. 성인이 된 앙트완이 등장하는 연작 가운데 가장 매력적인 수작이라 할 만하다. 앙트완은 군대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사회로 돌아오지만 마땅한 직업을 찾지 못한다. 다행히 크리스틴의 아버지 다르봉의 소개로 호텔 야간 접수원 자리를 얻게 된다. 그러나 정사 현장을 덮치려던 사설탐정의 일을 본의 아니게 돕는 바람에 일자리를 잃게 되고 이번엔 그 사설탐정이 일하던 에이전시에서 새 일자리를 얻는다. 당시 프랑스 시네마테크의 설립자 앙리 랑글루아 해임반대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트뤼포는 이 영화를 앙리 랑글루아와 그의 시네마테크에 헌정했다. 야생의 아이 L’Enfant sauvage 1970년 83분 컬러 1798년에 발견된 ‘늑대소년’에 관한 영화. 장 이타르의 보고서를 원작으로 했다. 숲에서 나물을 캐던 여인이 짐승 같은 몰골을 한 야생의 아이를 발견한다. 그는 농아학교에 보내져 연구대상이 되는가 하면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기도 한다. 트뤼포 자신이 이타르 박사 역을 맡아 연기하고 있다. 트뤼포는 자칫 진부하게 여겨질 수 있는 소재를 결코 동화나 판타지에 의존하지 않고 사실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럼에도 여기엔 트뤼포 특유의 서정적 분위기가 감돌고 있으며 르누아르적인 심도 깊은 무대화가 종종 눈에 띈다. 영화 전반에 걸쳐 활용된 고전적인 아이리스 기법은 이른바 ‘특권적인 순간’들을 소중히 감싸안는 역할을 한다. 에릭 로메와도 주로 작업한 바 있는 네스토르 알멘드로스가 촬영을 맡았다. 아메리카의 밤 La Nuit Americaine 1973년 115분 컬러 펠리니의 과 같은 ‘영화에 관한 영화’. 무성영화시대의 스타 도로시와 릴리언 기시 자매에게 바쳐진 영화기도 하다. 이 영화 이전과 이후에 만들어진 그 어떤 ‘영화에 관한 영화’들보다 생기발랄하고 낙천적인 분위기가 넘치는 걸작. 무엇보다도 트뤼포를 사로잡았던 것이 바로 영화를 만드는 과정 자체가 선사하는 즐거움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트뤼포가 애정을 바친 과거의 거장들이 차례로 언급되며 특히 웰스의 <시민 케인>에 경의를 표하는 꿈 장면은 유명하다. 이 영화는 트뤼포 자신의 영화들에 대한 논평이기도 한데, 가령 철없는 애정행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알퐁스(장 피에르 레오)의 모습은 드와넬 연작을 환기시키며, 문 밖에 내놓은 음식쟁반에 고양이가 다가와 우유를 먹는 장면은 <부드러운 살결>의 한 장면을 재연한 것이다. 아델 H의 이야기 L’Histoire d’Ade`le H 1975년 93분 컬러 1863년 핼리팩스, 부두에 내린 사람들 사이로 한 여인의 얼굴이 보인다. 작가 빅토르 위고의 둘째딸인 아델이다. 그녀는 루일리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신분을 감추며 한 남자를 찾아나선다. 아델이 사랑에 빠진 알버트 핀슨이라는 영국인 장교는 그녀의 사랑을 받아들이길 거부하지만 아델은 계속해서 그의 주위를 맴돈다. 이 영화는 실존인물인 아델 위고의 일기를 바탕으로 제작되었으며 아델 역은 이자벨 아자니가 맡아 연기했다. 전반적으로 아델을 중심으로 그녀가 오가는 몇개의 한정된 공간의 실내에서 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다시 네스토르 알멘드로스가 촬영을 맡았다. 에 영감을 제공한 <품행제로>의 감독 장 비고가 만든 유일한 장편영화 <라탈랑트>의 음악이 사용되기도 했다. 여자를 좋아했던 남자 L’homme qui aimait les femmes 1977년 119분 컬러 현대판 카사노바 이야기라 부를 수 있을 코미디. 영화는 한 남자의 장례식이 거행되는 것을 보여주며 시작된다. 이 장례식에는 많은 여자들이 참석해 있다. 이후 이 남자 베르트랑이 자동차에 치여 죽게 되기까지의 과거 여성편력이 죽 펼쳐진다. 관찰자이자 수집가이며 자전적 소설을 쓰기도 하는 베르트랑의 모습은 트뤼포의 이전 영화들에서 익히 보아온 캐릭터임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베르트랑이라는 인물은 앙트완 드와넬 연작의 주인공에 비하면 다소 매력이 떨어지는 것도 사실. 문 밖에 내놓은 음식을 고양이가 와서 핥아먹는 장면은 <아메리카의 밤>에 이어 이 영화에서 또 등장한다. 트뤼포 영화의 몇몇 특징적인 요소들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사랑의 도피 L’Amour en fuite 1978년 컬러 앙트완 드와넬 연작의 마지막 영화. 앙트완은 여자친구 사빈의 집에서 자고 일어나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다. 그는 법원에 가서 아내 크리스틴과 이혼에 합의하고 난 뒤 음악공부를 하러 떠나는 딸 알퐁스를 배웅하기 위해 역으로 간다. 역에서 그는 과거 그가 사랑했던 여자인 콜레트를 우연히 만나게 되고 즉흥적으로 그녀가 탄 열차에 올라탄다. 기존의 드와넬 시리즈를 이루는 영화들은 등장인물들이 과거를 회상할 때 차례로 콜라주된다. 거의 20여년에 걸친 앙트완 드와넬의 모험담은 사랑에 대한 따스한 찬가와 함께 마무리되었다. 앙트완과 그의 주변을 둘러싼 여자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상당부분 트뤼포 자신과 영화의 관계에 대한 하나의 논평처럼 읽힌다.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섬세하게 배치되어 있는 형식적 장치들을 통해 관객의 정서를 자극하는 소품 명작. 이웃집 여인 La Femme d’a` Cote`) 1981년 컬러 <쥴과 짐>처럼 시골에서의 사랑을 다룬 이 영화는 테니스장을 운영하는 오딜이라는 여인이 카메라를 향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녀의 내레이션과 함께 시간은 6개월 전으로 거슬러간다. 베르나르는 아내와 8살난 아들을 데리고 시골에서 살고 있다. 어느날 이웃에 한 부부가 이사오는데 베르나르는 그 이웃집 여인이 8년 전 헤어진 옛 연인 마틸드임을 알고 놀란다. 베르나르와 마틸드는 점점 걷잡을 수 없는 관계로 휘말려든다. 형식적인 특별함은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매우 잘 다듬어진 비극적인 멜로드라마이다. 음울한 무드가 영화 전체를 지배하며 내레이터인 오딜의 과거 사랑 이야기가 두 연인의 사랑 이야기 위로 슬쩍 겹쳐진다. 브레송, 고다르, 리베트 및 클로드 란츠만 등과 작업한 바 있는 윌리엄 루브찬스키가 촬영을 맡았다. 신나는 일요일 Vivement Dimanche! 1983년 컬러 호숫가에서 사냥을 하던 한 사내가 얼굴에 총을 맞고 살해된다. 근처에서 사냥을 하고 있던 부동산업자 줄리앙은 자신의 부동산 사무실로 돌아온 뒤 미지의 여인에게서 협박전화를 받는다. 그녀는 줄리앙이 바로 살인자라며 몰아세운다. 줄리앙은 아내의 숨겨진 과거가 이 일과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깨닫고 탐색에 들어가려 하지만 그의 비서 바바라가 대신 이 일을 떠맡는다. 여기서 트뤼포는 자신이 흠모하던 장르영화의 대가들에게 다시 한번 존경을 바친다. 전체적으로는 히치콕식 살인 미스터리의 외양을 갖추고 있지만 경쾌하고 빠른 대사의 묘미, 그리고 대립하고 다투면서도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는 남녀커플의 묘사 등에서는 하워드 혹스 영화의 맛을 느끼게 한다. 트뤼포의 마지막 영화.▶ 프랑수아 트뤼포 영화제 ▶ 상영작 미리 보기 ▶ 프랑수아 트뤼포 영화제 시간표

고레에다 히로카즈vs김봉석 (4)

김 지금까지 몇몇 일본감독들을 인터뷰하면서 느낀 것인데, 비단 일본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겠지만 대부분 일본이라는 사회에 문제가 많지만 그 시스템을 고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오더군요. 그렇다면 영화라는 것이 가지는 힘이 무엇일까요? 영화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고레에다 제가 요즘 가장 절실하게 생각하는 점이 바로 영화가 변화를 위한 힘을 가질 수 있는지 하는 겁니다. 물론 여전히 만들고 싶은 영화에 대한 구상도 열정도 많지만 과연 영화를 만드는 동안 사회에 무슨 일이 생기고 있는지 간과할 수 없습니다. 제가 영화를 찍기 시작한 지 6년이 지났는데 그 사이에도 고베대지진이 있었고, 일장기와 기미가요가 법제화되었고, 도청법이 성립되었고, 역사교과서를 정당화하는 사람들이 나왔고, 심지어 테러사건을 계기로 자위대가 미군과 함께 파병이 되는 일까지 생겨났습니다. 이런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나고 사회는 점점 악화돼가는데 내가 영화를 찍는다는 핑계로 사회에 무관심해도 되는 건지, 막말로 일본에 전쟁이라도 나면 어떡하나,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되면 어떡하나, 그렇다면 내 영화가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으로서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치적 메시지를 영화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항상 생각하는 점은 관객 스스로 느끼라는 겁니다. 감정적으로 강요하는 파시즘은 제 영화에 없습니다. 감정을 유도하는 음악을 제 영화에서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내 영화가 관객 스스로 느끼고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재료가 될 수 있다면 하는 것이 유일한 바람입니다. 이런 내 스타일은 기존의 낡은 영화시스템에 대한 ‘공격적인 도전’일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 영화시스템에 대한 투쟁은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사회적인 부분과 연관시켜 풀어나갈 수 있을지는 고민중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김 영화라는 것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어떤 사람도 정확한 답을 내릴 수 없을 겁니다. 그저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 각자가 내 영화가 어떻게 세상을 이롭게 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고 그런 영화를 만드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요. <환상의 빛>에서는 카메라가 거의 움직이지 않고, 클로즈업도 없습니다. 인물들의 움직임도 아주 작고요. <원더풀 라이프>에서 <디스턴스>로 오면서 핸드헬드가 많아지고, 인물들을 정면에서 잡는 경우가 많아집니다. 고레에다 솔직히 말해 첫 번째 작품 만들고 나서, ‘아! 실수했다’고 생각했어요. (웃음) <환상의 빛>은 먼저 구도가 있었고 300컷에 대한 완벽한 콘티가 그려져 있었죠. 허우사오시엔 감독이 이 영화를 보고서 “참 좋은 데뷔작”이라는 칭찬 뒤에 “기술과 구도는 완벽하지만 영화라는 건 사람의 감정과 배우의 행위가 먼저 있은 뒤에 그것이 나중에 구도로 만들어지는 거다. 그런데 여기서는 구도가 먼저 고려돼 있다. 이건 거꾸로 된 거다. 다큐멘터리를 찍은 사람인데 왜 그랬느냐”는 말을 해주셨어요. 그때 아뿔싸, 하는 생각을 했죠. 물론 이 영화를 개인적으로 좋아하지만 뭔지 모르게 느껴졌던 이질감의 이유를 그때 발견한 거죠. 그래서 두 번째, 세 번째 영화는 되도록이면 그 작품에서 벗어나 멀리멀리 가려고 노력했어요. <디스턴스>에서는 그런 마음이 극단적으로 나타난 거고요. 콘티도 없었고, 다큐멘터리 카메라처럼 대상을 따라갔어요. 극영화답지 않은 방식으로 찍었습니다. ▷ 다음 페이지 계속 [죽음- 남아있는 삶 속의 그림자]

고레에다 히로카즈vs김봉석 (1)

더운 여름 버스운전석 옆자리에서 불어오던 상쾌한 바람, 그녀의 가방에서 들려오던 청아한 방울소리, 디즈니랜드에서 먹던 맛난 핫케이크, 비행하던 순간 눈부시게 빛나던 구름, 그리고 무릎에 뉘고 귀를 파주던 엄마의 살냄새. 죽음 이후, 일생을 통틀어 행복했던 하나의 기억만을 간직하고 갈 수 있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순간을 선택할까? 98년에 만들어져 4년 만에 한국 관객을 만나는 <원더풀 라이프>는 무심코 스쳐지나간 소소한 일상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영화다.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삶이 뒤흔들려버린 한 여자의 이야기를 명상적인 화면에 담아냈던 데뷔작 <환상의 빛>으로 1995년 베니스영화제 황금오셀리오니상을 받으며 데뷔한 고레에다 히로카즈(39)는 99년작 <원더풀 라이프>를 거쳐 2001 칸영화제 경쟁부문 후보에 오른 세 번째 작품 <디스턴스>로 명실공히 필름으로 말하는 젊은 철학자의 풍모를 갖추었다. 목 주위로 빨간색이 덧대어진 남색니트, 무라카미 하루키를 연상시키는 쿨한 용모의 이 젊지도 늙지도 않은 감독은 짧은 일정과 빡빡한 인터뷰 스케줄에도 불구하고 어떤 질문에나 오래 고민한 흔적이 역력한 길고 묵직한 답변을 보내왔다. 영화평론가 김봉석과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나눈 두 시간의 지칠 줄 몰랐던 대담. 행복한 죽음과 멋진 삶에 대한 철학강좌 101. 편집자 김봉석(이하 김) TV다큐멘터리를 찍다가 극영화 연출을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그 계기가 허우샤오시엔과의 만남이었다구요. 고레에다 히로카즈(이하 고레에다) 극영화를 찍고 싶다는 생각은 TV다큐멘터리일을 하면서도 꾸준히 해왔고 시나리오도 틈틈이 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회가 잘 닿질 않더군요. 그러던 중 허우샤오시엔의 <희몽인생>의 일본배급을 제가 당시 일하던 후지TV가 맡게 되었고 회사에서는 저에게 “대만영화에 관한 프로그램을 하나 만들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해왔습니다. 그전부터 좋아하던 허우샤오시엔과 에드워드 양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허우샤오시엔 감독과 만난 직접적인 계기였죠. 허우샤오시엔 감독은 처음부터 저를 많이 아껴주었고 일본에 들를 때마다 늘 연락을 해주셔서 만나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의 영화도 좋아하지만 그 사람 자체를 인간적으로 좋아하고 존경합니다. 저에겐 아버지 같은 사람이라고 할까요. 김 <원더풀 라이프>는 인터뷰장면이 계속 보이고 카메라가 대상을 정면에서 찍는 등 다큐적인 요소를 많이 포함하고 있습니다. TV다큐 경험이 극영화만들기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십니까. 고레에다 <원더풀 라이프>를 만든 스탭은 카메라, 연출부 조명을 비롯해 거의 대부분이 다큐 출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영화니까 이런 조명이어야 한다’는 데 구애받지 않았습니다. 재미있는 상황이 연출되면 조명상태에 상관없이 곧바로 찍기도 했고, 발생하는 모든 해프닝에 대해 각자 스탭들이 즉각적으로 반응했던 것이 살아 있는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이유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큐에 대한 경험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김 감독님은 언젠가 “다큐와 픽션이 충돌할 때 불꽃이 튄다”는 말을 하셨다고 들었는데 <원더풀 라이프>를 찍을 때는 어떤 부분에서 그런것을 느끼셨습니까. 고레에다 ‘타타라’라고 어릴 적 오빠 앞에서 <빨간구두>라는 노래에 맞추어 춤을 췄던 기억을 선택한 할머니가 등장하는데 이 할머니는 실제 인물입니다. 이 할머니는 특이하게도 자신이 죽었다는 영화 속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이면서 자연스럽게 본인의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이분이 자기 과거를 재연하는 대역소녀에게 춤동작을 설명하면서 “손수건을 어느 손에 들었더라”하고 고민을 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때 제가 어떤 지시도 하지 않았는데 할머니가 벌떡 일어나서 노래를 부르면서 한 바퀴 빙 돌며 춤을 췄어요. 또 소녀가 사람들 앞에서 <빨간구두>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출 때 두 주인공과 할머니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노래를 함께 따라 불렀습니다. 이 역시 어떤 사인도 없이 이루어진 즉흥동작이었죠. 우리는 그것을 조용히 카메라에 담았을 뿐입니다. 이 상황은 픽션도 아니고 다큐멘터리도 아닌 그야말고 어떤 ‘충돌’이 일어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영화촬영장이라는 지극히 비현실적 공간에서 할머니가 자기 진짜내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그것에 의해 움직이는 모습이란 다큐와 픽션이라는 틀로 카테고리화 할 수 없는 진짜 ‘충돌’ 아닙니까? ▷ 다음 페이지 계속 [기억- 고통과 행복의 양면]

`열정소년` 장혁이 쓴 15개월의 <화산고> 고군분투 촬영외전

<사비망록>이라는 전설 속의 책을 얻기만 하면 무림의 최고수가 된다는 이야기가 전해져내려오는 가공의 학교 화산고. 이곳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판타스틱액션영화 <화산고>에서 장혁은 핵심인물이다. 그가 학교에 등장하면서 학교에는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며 비정과 배신, 그리고 우정과 사랑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화산고를 장악하려는 장량, 교감, 수학교사 등의 음모에 분연히 맞서 진흙탕에 처박힌 정의를 구해내는 것도 모두 그의 몫이다. 영화 경력이라곤 ‘세상물정 잘 모르던 시절’ <짱>에 출연했던 것이 고작인 장혁은 이 영화를 통해 비로소 배우가 뭔지, 연기가 뭔지, 영화가 뭔지를 깨달았다. 2000년 8월31일 시작, 2001년 7월13일까지 무려 11개월 가까이 진행된 촬영과정에서 그는 자신만의 캐치프레이즈 ‘열정과 패기와 젊음’이 영화 안에서 어떻게 구현돼야 하는지를 깨닫게 됐고, 다른 사람과의 작업이 얼마나 힘겹고 감동적인지를 알게 됐다. 이 일지는 배우 장혁이 <화산고>를 찍는 동안, 깊이 간직해뒀다가 <정글쥬스> 촬영을 마친 최근에야 다시 정리해낸 피와 땀과 눈물의 기록이다(현재 <화산고> 홈페이지에서 연재중인 일기는 <화산고> 촬영을 마친 직후 정리한 내용이다). 이 일지를 통해 우리는 감독이나 제작자와는 다른 배우의 영화에 대한 시각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편집자 2000년 7월9일 서울 싸이더스 사무실 시나리오를 처음으로 접하는 날, 설렘은 황당함으로 바뀌었다. 제목부터 <화산고>라…. 아니, 차승재 이사님은 내게 <허리케인 조>를 찍자고 하지 않았나. 혹시나 하고 시나리오를 읽어봤지만, 권투 글러브조차 나오지 않고 거짓말같이 장력을 날리고 공중에서 뺑그르르 도는 만화 같은 이야기밖에 없다. 이런, 4개월 동안 양재동 복싱장에서 연습한 건 뭐란 말인가. 그래 뭐 어차피 같이 영화를 만들자고 약속한 것, 그냥 하자고 마음을 먹는데 오히려 함께 들어온 <정글쥬스>(애초 이 영화의 제목은 <딕조멕>이었다)라는 시나리오가 맘에 든다. 뭔가 개성있고 강해보이는 캐릭터가 괜찮을 것 같다. 그리고 <화산고>라는 영화는 시나리오가 재밌긴 한데, 여기에 적힌대로 화면이 만들어지지 않을 것 같다. 자신의 공력을 주체하지 못하는 김경수의 캐릭터도 잘 파악이 안 된다. 그런데 차 이사님이 <화산고>를 1월까지 끝낸 뒤 <정글쥬스>를 찍게 해주겠다고 보장하신단다. 결국 가벼운 마음으로 이 영화에 임하기로 나는 결심한다. 이 만화같은 그림이, 만들어질까? 2000년 8월3일 서울 보라매공원 액션스쿨, 기초훈련 <화산고>에는 와이어액션을 비롯해 다양한 액션연기가 많아서 액션스쿨을 다니며 몸을 만들고 있다. 사실 만만치 않게 시급한 것은 캐릭터 분석이다. 시나리오를 죽 읽어본 결과, 경수라는 캐릭터를 표현하기 위해선 상상력에 많은 부분을 의지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무공을 쓰는 모양새도 그렇지만, 사모하는 유채이에게 사랑을 고백하면서도 내면의 두려움 때문에 표정은 일그러지는 경수의 모습은 만화적인 상상력의 소산인 것 같다. 사실 이 영화를 찍으면서 평소에 틈틈이 만화책과 애니메이션을 봐왔다는 것에 자부심을 갖게 됐다. 만약 <골든보이>를 보지 않았다면, 채이만 만나면 푼수가 되는 모습을 어떻게 연기했을 것이며, <미래소년 코난>을 가슴 깊이 간직하지 않았던들 자기 자신이라는 섬에 갇힌 아이의 연기를 어찌 했겠는가, 푸하하. 여기서 만족할 장혁이 아니다. 극의 흐름이 고조되면서 경수의 캐릭터도 점점 진지해지고 멋있어진다는 점을 표현하기 위해 시나리오에 맞는 캐릭터 계획표도 짜나갈 생각이다. 2000년 8월31일 충북 청주 청주상고 교문 앞, 경수의 등장 드디어 크랭크인이다. 드디어 내 이름을 건 첫 영화를 찍는 것이다. 청주상고에서 벌어진 첫 촬영분은 비바람 천둥번개와 함께 경수가 아홉 번째 학교인 화산고로 전학오는 장면이다. 번쩍이는 번개 아래 장풍으로 교문을 열어젖히고 ‘무슨 일이 있어도 졸업하고 말겠다’는 각오로 학교로 걸어들어가는 전학생 김경수의 마음은 곧 나의 마음이다. 2000년 10월12일 전남 고흥군 도양읍 도양중학교 운동장, 경수와 수학의 대결투 그토록 두려움에 떨었던 와이어액션 연기를 찍은지도 벌써 나흘째. 경수가 교실에서 운동장으로 튀어나가는 장면을 찍기 위해서도 와이어를 쓴다. 그래야 빠르고 과장된 동작을 보여줄 수 있으니까. 그런데 영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거짓말 아니라 서른몇번쯤 땅바닥을 굴렀다. 결국엔 카메라를 머리로 받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감독님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기에, “열정, 패기, 젊음밖에 없슴다”라고 앙다문 소리를 했다. 그랬더니 감독님은 바로 서른번 정도를 더 시키더군. 공중에서 몸을 회전시키지 못해 땅바닥에 머리를 받고 쓰러진 게 몇번이던가. 아, 차라리 그냥 누워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난 와이어액션의 위험성을 안다면 아는 편이다. D통신회사의 CF를 찍기 위해 미국에서 줄을 매단 채 연기한 적이 있다. 시스템이 잘 갖춰진 곳답게 7개의 안전장치를 놓고 촬영을 했는데도, 일을 끝낸 뒤 섬뜩했다. 몸에 매어놓은 두개의 줄 중 한쪽이 풀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긴 별 안전장치도 없다. 결국 믿을 거라곤 열정과 패기와 젊음밖엔 없구나, 하는 데 생각이 미치게 된다. 쩝. 2000년 12월20일 경기도 양수리 종합촬영소 교실세트, 요마와 경수의 만남 오늘은…? 나 혁이의 생일이다. 오늘 같은 날은 그냥 본명인 정용준이라고 할까나. 이기원, 김형건, 김석환, 민성기, 임진삼에다가 정수한까지 고향인 부산 친구놈들이 몽땅 올라왔다. 반갑구나 이놈들. 나를 생각해줘서 부산에서 여기 양수리까지 올라오다니. 모두 징그럽게 친하고 좋은 놈들이다. 열여덟 나이에 서면 바닥에서 쥐포랑 오징어 팔던 한놈은 날보고 실패하면 언제든지 내려오란다. 내 자리를 비워놓았다고 말이다. 친구들은 정말 내겐 소중한 존재다. 촬영장에는 언제나 친구가 한명 이상 붙어 있었고, 이들은 내 연기의 단점을 세세하게 지적해주는 등 여러 가지 도움을 줬다. 녹동에서 촬영할 때는 한놈이 <짱가> 비디오를 빌려와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기도 했다. 그러고보니 이상하다. 학교 다니던 시절 아웃사이더였던 내가 이 친구들 덕분에 인사이더가 됐던 것처럼 <화산고>의 경수도 외톨이로 지내다가 친구들 품으로 들어간다. 흐흠, 재밌는 일이군요. 2001년 1월1일 양수리 종합촬영소, 복도 스물여섯의 새해가 밝았다. <화산고>가 예상대로 끝나준다면 <정글쥬스>도 찍을 수 있을 것 같다. 하긴, 지난해 가을 안에 다 찍기로 했던 도양에서의 전투장면이 끝나지 않았으니 예정대로 1월 안에 끝날 것 같진 않은데…. 부모가 열 손가락 깨물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는데, <화산고>나 <정글쥬스> 내겐 그런 존재 같다. 근데 이거 웬 영감님 말씀? 한살을 더 먹어서 그런가? 2001년 3월13일 전남 담양 대숲, 경수와 수학의 첫 대결 경수가 수학교사 마방진에게 무참하게 짓밟히는 장면을 찍은 대숲에선 정말 무참하게도 다쳤다. 수학이 날린 장풍에 쓰러지지 않으려고 대나무를 잡고 안간힘으로 버티는 장면을 찍는데, 어찌나 피아노줄을 세게 잡아당기는지 아파서 죽는 줄 알았다(참고로 와이어액션을 위해서는 사타구니를 중심으로 몸을 지탱해주는 하네스라는 장비를 입어야 하니 어디가 아팠는지는 짐작 가능하시겠죠?). 또 강풍기는 왜 그리 강하게 트는지 바람에 날리는 대나무 줄기에 부딪히는데, 이게 장난이 아니다. 별로 안 아플 것 같다고? 실험정신이 투철한 분이라면 대나무 막대기로 얼굴을 수십번 때려보시라. 그리고나서 그 일이 일어난 것이다. 보통 와이어액션을 할 때 반대편 줄은 사람이 당기게 된다. 하지만 빠른 속도로 부상하는 장면 등을 만들기 위해서는 디셀레나라는 기계를 사용한다. 그런데 이날 기계 조작미숙으로 너무 갑작스럽게 당겨져 내 허리가 대나무에 부딪혔다. 그때의 쿵, 하는 소리는 지금 생각해도 무섭게 느껴진다. 몇십초 뒤던가, 정신이 돌아온 것은. 대숲장면에선 코도 크게 다쳤고, 360도 회전하다가 종아리에도 상처를 입었다. 병원은, 그러나 갈 수 없었다. 나 때문에 촬영이 늦어지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면 너무 폼을 잡는 건가? 하긴 허준호 선배를 생각하면 내가 어찌 병원에 갔겠나. 준호 형은 신경을 너무 쓰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왼손이 잠시 마비까지 됐는데도 최선을 다해 촬영을 마쳤다. 그러면서 “옛날에 <하얀전쟁> 같은 영화 찍을 때는 진짜 폭탄이 옆에서 펑펑 터졌다”며 지금은 좋아진 거란다. ‘열정’ 장혁이 잠시 숙연해지는 순간이었다. 여기 촬영장이야, 극기훈련장이야? 2001년 3월15일 양수리 종합촬영소 샤워실 세트, 경수와 채이의 키스 음허허허. 하지만 오해하진 마시라. 내가 민아에게 뭔가 음흉한 감정을 품은 건 절대로 아니다. 어쨌건 민아는 촬영장의 꽃이다. 감독님은 민아가 와이어액션을 하고 나면 늘 기특하다고 말씀하신다. 아닌 게 아니라, 저 얄팍해보이는 체구의 아이가 동동 매달려서 35번의 NG를 낸 다음에 OK 사인을 받곤 가뿐하게 내려오는 모습을 보면 근성이 대단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아무튼 오늘 나 김경수는 그동안 흠모해오던 유채이와 사랑을 확인하고 첫 키스를 나누게 된다. 그것도 샤워실에서. 아, 물론 옷은 입은 채다. 흠흠…. 그런데 어째 분위기가 내 상상과는 다르게 돌아가는 것 같다. 보통 키스신 하면 분위기도 잡아주고 하는 것 아니던가. 웬걸, 나와 채이의 키스신에선 20여개의 샤워실 물줄기가 펑 터지면서 화사한 분위기를 연출하게 돼 있다. 가뜩이나 막내동생뻘 되는 민아와 어색한 자세를 연출하고 있는데, 스탭들은 거기 물 잘 터졌지, 그리고 조명은 이렇게, 카메라는 저렇게 등등만 외쳐대고 있다. 이것 참 민망하기 그지없다. 2001년 4월30일 양수리 종합촬영소 야외세트, 대폿집 앞 장면 최악의 기분이었다. <화산고> 촬영 시작한 지 8개월이 다 되어가는 동안 가장 힘빠지는 순간이다. 이젠 더이상 <정글쥬스>팀에게 기다려달라고 부탁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나 하나 때문에,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 영화 제작이 차일피일 미뤄지는 모습을 볼 수가 없다. <화산고>도 물론 좋지만, <정글쥬스>는 정말 출연하고 싶었던 작품이었다. 지금 생각은 여전히 ‘저 영화를 찍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출연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 오늘만큼은 김태균 감독님이 원망스럽기도 하다. 처음 계획대로 1월까지는 끝내지 못하더라도, 3월 말에는 끝내줬어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박중구 조감독 형과 동시녹음 담당 김경태 형 등이 위로해준다. 이 형들도 이 영화가 늦어지는 바람에 다른 작품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하긴 나머지 스탭들 모두가 마찬가지다. 물론 감독님의 책임만은 아니다. 제작부쪽의 책임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여간 내 상태가 너무 안 좋아 과연 앞으로 촬영을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2001년 5월26일 도양중학교 운동장, 경수와 수학의 대결전 내 파이팅이 강한 걸까, <정글쥬스>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것일까. 이젠 다시 <화산고>에만 전념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한 일주일 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다. 그래 뭐 어쩔 건가. 이미 지난 일을 되돌릴 순 없는 법, 이제부터 다시 열심히 영화를 찍을 거다, 뭐. 그동안 많은 스탭들에게 걱정을 하게 한 듯해 미안한 마음도 든다. 그 위험한 시기를 넘기게 해준 것도 다 스탭 형들의 도움이다. 어쨌건 이 생활도 수개월을 하다보니 몸에 익나보다. 초반엔 조금만 매달려 있어도 여기저기가 아팠는데, 이젠 와이어에 매달려 있는 게 삶이 되다보니 편하기까지 하다. 지금은 줄에 매달린 채로 빵과 우유도 먹고, 아는 사람들이 구경오면 재주도 넘고 하니까. 2001년 6월10일 도양중학교 운동장, 경수와 수학의 대결전 난 술을 잘 먹진 못하는데, 좋아하긴 한다. 삼겹살을 굽고 소주 한잔을 걸치면 그만한 분위기도 없다. 특히 도양에 다시 내려온 다음부터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술잔을 기울였던 것 같다. 어두워지면 촬영을 시작해서 해가 뜰 무렵 카메라와 조명을 접는 드라큘라 생활이었으니 일찍 일어날 필요도 없었고, 숙소인 플라자호텔(이름은 호텔이긴 한데…) 앞은 항구였기 때문에 아침에 들어가봐야 소음 때문에 맨정신으론 잠을 이룰 수도 없었다. 그렇게 술을 많이 마셨는데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긴장감 때문이었던 것 같다. 한 장면 한 장면이 사고를 기다리고 있는 영화였기 때문에 한시라도 정신을 놓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친하게 지냈던 게 촬영을 맡았던 최영택 형과 조명의 정영민 형, 그리고 경태 형과 데몰리션의 태희 형 등이었다. 이 형들은 늘 과정이 중요하다는 등 좋은 말을 많이 해줬다. 다방이란 곳도 이 형들이랑 처음 가봤다. 도양의 허름한 다방에 앉아서 미스 김이 어쩌고 미스 최가 어떻고 하는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어린(!) 나에게 굉장히 재미있었다. 하여튼 이런 나날이 고되긴 했나보다. TV 연예 프로그램에서 우리를 찍어가 방송했는데, 이를 보신 어머니는 내게 긴급히 한약을 보내주셨다. 여기가 촬영장이 아니라 극기훈련장 같아 보이셨나보다. 이제 와이어에 매달려있는 게 삶이 됐구나 2001년 6월29일 도양중학교 운동장, 경수와 수학의 대결전 촬영이 끝나서 날이 서서히 밝아오는데, 감독님이 나를 부르더니 “혁아, 난 네가 좋다”고 말을 꺼냈다. 그리곤 “그런데 나는 감독이다. 그리고 너는 배우다. 감독의 일에는 네가 잘 모르는 부분도 있는 법이다”, 뭐 이런 뜬금없는 말씀을 하셨다. 그런 말을 듣고 있자니 마음이 뜨뜻해졌다. 생각해보면 감독님을 미워한 적도 많았다. <정글쥬스>건도 그랬고, 다음 작품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다른 스탭들의 모습을 볼 때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감독님과 이런저런 형태로 부딪친 적도 있었다. 아, 뭐 그렇다고 대단한 충돌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예를 들자면, 영화 속 김수로 형이 맡은 장량의 본명은 장달춘이다. 그래서 막판에 가면, 장량의 힘도 약해지고 볼품없는 모습이 돼가니까, 차라리 “야 달춘아”, 이렇게 부르는 게 훨씬 괜찮을 것 같아서 의견을 냈더니 감독님이 아니란다. 결국 감독님이 원하는 대로 갔지만 기분은 별로였다. 사실 경수의 손에서 만들어내는 기공의 모양도 영화에선 둥그런 모양으로 표현됐는데, 내 생각엔 회오리바람 모양이 좋을 것 같았다. 영화의 최종책임을 지는 것은 결국 감독의 몫이라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좀더 나은 방향이 있을 것 같아 의견을 제시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감독님에게 이젠 정이 간다. 굉장히 오래 사귄 형 같은 느낌이다. 좀 주제넘은 얘기지만, 학교를 다니면서 얻은 친구들은 모두 싸우고 난 다음에 사귄 경우였다. 감독님과의 관계도 그런 걸까? 아무리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이라 하더라도 좋은 면만을 보다보면, 어느 순간 나쁜 면을 보게 될 때 싫은 감정이 팍 솟게 마련이다. 양면을 모두 보고 있으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하여튼 이젠 감독님이 자기만의 욕심을 차리려고 이 영화에 이렇게 공과 시간을 많이 들이진 않았을 거란 생각도 든다. 하긴, 나중에 시사회할 때 누군가 <화산고>를 비판하더라도 가볍게 받아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영화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으니까. 그동안 노력의 결과가 제대로 나와야 한다는 생각은 나를 포함한 스탭 모두의 공통적인 것일 게다. 2001년 7월8일 도양중학교 운동장, 경수와 수학의 대결전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는데, 갑자기 아찔해지더니 푹 몸이 땅에 꽂혔다. 그동안 기력이 쇠진했던 탓인가 본데, 이런 적은 난생 처음이다. 약간 쪽팔리기도 하고, 스스로에 대한 걱정도 드는 이상야릇한 감정 등등.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거운 일은 이젠 정말 촬영이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쓰러진 것 또한 힘이 달리는 탓도 있겠지만, 내일 ‘쫑’을 앞두고 긴장이 풀렸다는 이야기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도 좋은 건 숨길 수 없다. 입은 벌어지고 코는 벌름거리고 있으니 말이다. 2001년 7월13일 서울 경희대 실내수영장, 생각에 빠져드는 경수 9일 대부분의 스탭과 배우들이 도양에서 모든 일정을 마쳤지만, 내게는 진짜 마지막 촬영이 남아 있었다. 생각에 깊이 빠져드는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물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수중에서 찍는 것이 그것이었다. 15kg이나 되는 납덩이를 매달고 별다른 장비없이 5m 가까운 물 속으로 서서히 빠지는 모습을 연기해야 했는데, “적응을 잘하는군”이라는 스쿠버다이빙 강사의 이야기에 으쓱한 게 잘못이었다. 아니면 전날의 <정글쥬스> 고사에서 무리하게 음주가무를 즐긴 게 문제였던가. 지상 5m 높이에서 수면 위로 떨어졌는데, 물표면과 부딪힌 등판이 빨래판에 얻어맞은 것마냥 충격을 받았다. 게다가 바닥으로 내려가는데 공간이 좁은 수조 안이다보니 수압이 강해서 눈이 튀어나오고 고막에서 빡빡 하는 소리가 났다. 순간 들었던 생각은 “죽는구나”였다. 어릴 적 의료사고 때문에 4일 동안 혼수상태를 겪었던 경험이 되살아났다. 만일 그때 다이버가 산소호흡기를 대주지 않았다면 <화산고>는 내 유작이 됐을 것이다. 그 산소호흡기에 달린 노란 버튼이 얼마나 선명하게 보였던지, 그것을 누르자마자 겨우 숨을 쉴 수 있었고 “살았구나” 하는 안도감을 갖게 됐다. 어휴, 얼마나 놀랐던지. 쿵덕쿵덕…. 편집실에서 연기를 깨치다 2001년 7월14일 인천공항, 출국장 정말이지 가슴이 공항 로비에 달라붙는 줄 알았다. 전날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기고 가까스로 얻은 1주일간의 휴가를 미국에서 지내기 위해 공항을 들렀는데, 제작부장님과 조감독형의 모습이 보였다. 이런, 뭔가 문제가 생겨 재촬영을 해야 하는구나, 그래서 나를 붙들러 이 사람들이 친히 공항으로 나왔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순간적으로 이들을 피해 도망쳐야 하나, 당당히 나서야 하느냐를 고민하는데 그쪽에서 먼저 알아보고 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것 아닌가. 두근두근…. 그런데… 휴, 천만다행이었다. 그들은 다른 촬영 때문에 이곳을 들렀다는 것이다. 만세! 정말 <화산고> 촬영이 끝난 거구나. 2001년 8월10일 서울 강남 고임표 편집실 26일부터 들어가는 <정글쥬스>의 촬영을 앞두고 편집실을 들렀다, 고 말하면 처음으로 이곳에 간 것 같지만, 사실 난 영화를 찍는 내내 편집실을 들락날락했다. 최소한 한달에 한번은 갔을걸. 그것도 알고 보면 감독님이 권하신 일이었다. 연기를 배우려면 편집실에 자주 들러야 한다고 하셨다. 고 기사님 옆에 앉아 편집을 이렇게 하는 거구나, 캐릭터가 이렇게 표현되는구나, 같은 것을 배웠다. 특히 내 모습이 어떻게 편집되는가를 잘 살펴본 뒤 이런 식으로 연기를 해야 하는구나, 하고 깨쳤다. 하도 자주 가니까 감독님은 한때 “야, 이놈아. 넌 여자친구도 없냐(이 질문에 대해서는 노코멘트다), 지겹다”고 농을 던지기도 하셨다. 촬영을 모두 마친 뒤 편집되는 것을 보고 있으니, 아 드디어 이 영화가 제 모습을 찾아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감독님의 끈기도 존경스럽게 느껴졌다. 내가 직접 출연을 해서 그런 건진 모르겠지만 정말 괜찮은 영화가 나올 것 같다. 히히. 만약 <화산고>가 대성공을 거둬 속편을 만들게 된다면…. 그래도 최소한 난 출연하지 않으련다, 고 마음을 다진다. 오래 전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처럼 나중에 <화산고>를 보면서 ‘이 영화는 내 스물다섯과 스물여섯을 함께 보낸 친구’라는 소중한 추억을 간직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젠 <정글쥬스>닷! 2001년 10월17일 에필로그. 정릉 세트장, 제과류 CF 촬영중 김 감독님을 이곳에서 만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역시나, 하룻동안 47테이크를 찍었다. 하룻동안 <화산고>의 열두달이 축약된 듯했다. 30테이크가 넘어가니까, 헥헥 하는 가쁜숨과 함께 <화산고>에 대한 생각이 절절했다. 그리고 그 시절이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졌다. ‘미운 정’으로 얽힌 감독님과의 인연이란 게 이렇게 질기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빨리 <정글쥬스>를 마치고 <화산고>의 개봉날 무대 앞에서 자랑스런 표정으로 관객들과 기쁘게 만나야겠다는 생각 때문인지 가슴이 차올랐다. 정리=문석

전국 영상관련학과 올해 입시정보 총정리

수많은 영화들이 개봉되고, 속속 영화사들이 생겨나고, 영화제마다 사람들이 붐비고, 채널마다 영화정보프로그램이 시청률을 올리고 있는 요즘, 영화의 열기가 달아오르는 것과 비례하여 영상관련학과의 문전도 뜨겁다. 수험생들도 늘어날뿐더러, 그들이 두드릴 수 있는 문 또한 많아지고 있다. 영화스탭이 되는 길이 다양하듯 영상관련학과의 범위 또한 매우 넓다. 예컨대 모든 문예창작과는 시나리오창작의 기본을 배우므로 영상관련학과일 수 있고, 모든 미술과는 영화미술에, 모든 음악과는 영화음악에, 모든 사진과는 영화스틸에 기초를 제공한다. 따라서 영상관련학과의 범위를 정하는 것은 애초부터 임의적인 것이다. 그러나 보다 직접적으로 영화와 관련을 맺고 있는 학과들을 어렵사리 일반학과들 속에서 구분해낼 수는 있었다. 영화연출, 제작, 연기, 극작, 애니메이션과 만화, 영상음악, 컴퓨터그래픽 및 영상디자인, 음향 등이 그 테두리 안에 들어온 전공분야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이것이 ‘모든’ 영상관련학과는 아님을 밝힌다. 올해 각 학교들의 영상관련학과 입시요강을 살펴보면, 실로 상이한 명칭의, 세분된 전공의, 전문화한 전공학과가 개설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연영과’로 통칭되던 시절은 이미 옛날. 영상물의 제작, 기획, 비평, 소비까지 아우르는 새로운 인력을 키우겠다며 강원대가 신설한 ‘영상문화학과’를 비롯하여, 경기대 다중매체영상학부, 경희대 예술디자인학부, 청주대 공연영상학부 등 많은 학교의 학부가 영화관련 전공을 두고 있다. 미술, 음악, 공연, 기술 등 다양한 분야가 손을 내밀면서, 영화는 그 자체가 그렇듯 여러 분야에 걸쳐 있는 ‘종합학문’으로 제 공간을 확보하고 있으며, 그에 따른 특성있는 학생들을 찾고 있다. 학생부, 수능, 실기의 반영비율은 전체적인 경향을 가늠하는 게 무색하도록 학교마다 다른 상황. 실기의 내용 또한 연기전공자의 경우 전통적인 장면연기서부터 노래, 춤, 카메라테스트까지, 연출전공자의 경우 장면스케치, 이야기구성에서 포트폴리오까지 제각각이다. 심층면접이나 학업적성평가를 요구하는 학교도 있다. 자신에게 꼭 맞는 학교와 학과가 어떤 것인지를 선택하는 영상학과 수험생들의 막바지 고민은 그만큼 치열할 수밖에 없다. 4년제 대학의 정시모집 원서접수가 12월10일 혹은 11일부터 시작된다. 마지막으로 꼼꼼히 각 학교들의 전형방법을 확인하며 영화를 향한 먼길의 첫 발자국을 어디서 뗄 것인지 신중하게 결정하는 데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씨네21>이 정보를 제공한다. 정시모집인원은 수시모집 결과에 따라 변동이 있다는 점, 그리고 인터넷 원서접수는 www.apply114.com 등 전문사이트를 학교마다 지정해놓고 있다는 점을 유의하길. 지면이 제한돼 있어 다 싣지 못한 자세한 실기고사 내용이나 정원 외 모집의 전형방법, 우편접수기간이 본교 및 인터넷접수기간과 다른지 여부 등을 전화나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위정훈 oscarl@hani.co.kr·최수임 sooeem@hani.co.kr·심지현 simssisi@dreamx.net▶ 대학별입시요강 4년제 영상학과 ▶ 대학별입시요강 2, 3년제 영상학과 ▶ 대학별입시요강 4년제 만화.애니메이션학과 ▶ 대학별입시요강 2, 3년제 만화.애니메이션학과 ▶ 대학별입시요강 2, 4년제 기타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