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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감사 - 세상 모든 영화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영화를 봤을 때 나는 너무 어린애였다. 어머니가 나를 데리고 극장에 처음 갔을 때 난생처음 들어가보는 거대하고 깜깜한 공간과 난생처음 들어보는 커다란 굉음들과 고개가 뒤로 젖혀져 나자빠질 것만 같은 거대한 화면에 얼이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때 상영 중인 영화는 한국전을 다룬 국산 전쟁영화였는데 그 엄청난 스케일의 폭음과 비명과 다급한 외침들과 팔다리가 지뢰에 날아가는 까무러칠 장면들을 보다가 결국, 논두렁에서 개구리나 잡고 놀던 게 전부였던 나는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울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던 기억이 있다. 난처해지신 어머니는 결국 영화를 다 못 보시고 경기를 일으키듯 울어젖히는 나를 데리고 극장을 나와야 했다. 그뒤로도 오랫동안, 나는 남모르게 그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종종 전쟁꿈에 시달리곤 했다. 세상에서 처음 만나는 영화란 정말 너무 생생한 경험이다. 그저 때리고 치고 박고 던지고 뛰다가 놀다 지쳐 해지면 잠드는 어린애에서 보고 듣고 읽기에 집중할 줄 알게 되던 무렵 주말의 명화를 보기 시작한 것은 영화와의 두 번째 만남이다. 세상에 이렇게 재미있고 감동적이고 놀라운 일이 주말마다, 우리집에 있는 텔레비전에서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러던 어느 날, 젤소미나와 잠파노가 우연한 방문객처럼 주말의 명화로 찾아왔다. 어? 뭐지? 이 기분은? 재미있다고 호들갑을 떨 수도 없고, 슬프다고 엉엉 울 수도 없고, 가슴속에서는 뭔가 울컥하고 콧날은 시큰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입술은 미소를 띠고 있는 듯도 했다. 바야흐로 생각보다 말이 더 많은 나이에서 말보다 생각이 더 많아지는, 사춘기로 접어드는 작은 고갯마루에서 바로 젤소미나와 잠파노의 그 엉터리 차력쇼를 만난 것이다. 그뒤로도 오랫동안 며칠인지, 몇년인지 모를 시간 동안 젤소미나의 콧노래와 잠파노의 트럼펫 소리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나는 말수가 줄고 대신 그림밖에 모르는 신경질적인 소년으로 자라고 있었다. 그 소년이 매일 코피로 그림을 그렸다고 해도 될 정도로 어렵게 미술대학에 들어갔을 때, 거기에는 예술은 몽땅 유보되고 ‘민족미대’라는 깃발만이 큰소리로 펄럭이고 있었다. ‘오∼ 어머니 당신의 아들, 자랑스런 민주의 투사’를 양심껏(!) 부르던 시절. 한편으로는 레이저디스크라는 것이 지구를 침공하는 UFO처럼 학교 앞 카페마다 쳐들어와서는 대형 빔프로젝트로 그 찬란한 광채를 아낌없이 쏘아댔다. 그 UFO는 ‘핑크플로이드의 <더 월>’을 내게 쏘아주었다. 나는 턱이 빠졌고, 정신을 차렸고, 눈이 떠졌다. <더 월>의 빛은 내가 처음 올려다본 푸르고 동그란 하늘이었다. 우물 속에서 바라본 동그란 하늘. 내가 정의하기로는, ‘예술이란 생각하는 동기를 제공하는 것’이다. 물론 그 밖에도 많은 존재가치와 효용가치와 정의와 판단기준과 다양한 기능이 있겠지만, ‘생각하는 동기’를 제공한다는 점이 예술의 절대적 가치라고 믿고 있다. 영화는 예술이다. 오락일 수도 있고 비즈니스일 수도 있고 상품이기도 하지만 한편 짧은 역사치고는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하는 독창적인 장르의 예술이다. 그러므로 많은 영화들이 나로 하여금 생각에 잠기게 하였고 그때마다 나는 조금씩 자라났다. 한편의 영화가 던져준 씨앗 같은 화두를 하나 붙잡고서 나는 생각을 한다. 이제는 하루만 지나도 영화의 내용이 다 잊혀지는 지경이지만, 가지치고 뿌리내리는 생각의 나무는 계속 자란다. 그렇게 영화는 화두를 던져주고 나는 숙제를 했다. 그렇게 지난 20개월 동안 2주일에 한번씩 숙제를 제출한 것이 이 ‘오 컬트’ 지면이었다. 주기적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글로 쓰고, 제출하는 동안 덕분에 나는 또 많이 자랐다. 이제 숙제를 제출하는 글쓰기는 오늘로 졸업을 하지만, 영화와의 즐거운 교감은 영원하리라. 인사드리오니, 졸필에 귀한 지면을 할애해준 <씨네21> 편집부에 감사드리고, 읽어주신 모든 독자들에게 감사드리고, 이 세상 모든 영화에 감사한다. 모두 감사합니다. 그리고 안녕히.김형태/ 무규칙이종예술가 kongtem@hitel.net

굿바이 키치!<굿바이 레닌>

아가씨,<굿바이 레닌>에서 키치의 뒷모습을 보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생각하면 잘생긴 의사 토마스나 사비나, 테레사보다 먼저 떠오르는 것이 똥과 스탈린의 아들 이야기다. 1980년에야 언론에 공개된 바에 의하면 스탈린의 아들은 똥 때문에 죽었다고 한다. 그는 2차대전이 터진 직후 포로로 체포돼 영국군 장교들과 함께 감금됐는데 스탈린 아들의 배변습관이 문제였다. 똥을 눌 때마다 화장실을 심하게 더럽혀서 이 때문에 동료 포로들에게 갖은 모욕과 주먹질까지 당했다고 한다. 동료들은 수용소장에게 해결을 요구했지만 독일군 소장은 ‘똥’이라는 발음조차 내기를 거부했다(제국을 향한 신성한 열정 앞에서 웬 똥타령!). 그는 이 굴욕감을 견디지 못해서 전기가 흐르는 수용소 철조망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꽥. 신의 아들이라 불러 마땅했을, 두 어깨에 광채를 매달고 평생 살았을 스탈린의 아들이 똥 때문에 죽은 것이다. 쿤데라는 스탈린 아들의 이 우스꽝스러운 죽음(스탈린 아들에게는 미안하지만)을 어떤 구호를 위해 내던진 죽음보다 형이상학적인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쿤데라는 똥을 부정하는 세계, 모두가 거기에 똥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세계의 미학을 ‘키치’(저속)라는 말로 비판한다. 어떤 하나의 이상,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붓삼아 똥과 쓰레기, 범죄와 증오 등 온갖 더러운 것들을 쓱쓱 지우고 거기에 사랑과 우정, 희생과 박애 등 숭고한 것들만 그려넣다보면 그것이 바로 키치의 장대한 스펙터클이 된다는 것이다. 사랑과 믿음, 미래에 대한 밝은 희망의 구호만이 넘쳐흐르던 현실 사회주의 세계의 노동절 축제, 새벽종이 울리고 새 아침이 밝으면 ‘잘살아보세’ 외치며 모두가 집을 뛰쳐나가는 우리나라의 새마을운동 따위가 모두 쿤데라가 말하는 키치에 속하는 풍경들일 것이다. <굿바이 레닌>은 쿤데라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이야기한 ‘키치’에 대하여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한다. 동독의 붕괴 직전 쓰러졌다가 통독이 된 뒤 깨어난 열혈 사회주의자 어머니를 놀라게 하지 않기 위해 눈물겹게 효도하는 알렉스를 보면서 중반부까지 나는 이 영화가 효심 지극한 청년의 아름다운 가족사랑이라는 ‘키치’적인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다. 물론 알렉스가 어머니를 위해 옛날 모습 그대로 재현해놓는 방이나 어머니를 위해 준비하는 밥상이야말로 진정한 ‘키치’의 표상일 것이다. 알렉스는 이제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그리고 실은 한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아름다운 비전을 담은 옛 동독 물건들의 상표를 그러모은다. 어머니의 생일날에는 사람들을 불러모아 (그 역시 한번도 실존하지 않았던) 옛 영화의 드라마를 복원한다. 코카콜라의 거대 입간판을 보고 충격받은 엄마를 위해 코카콜라가 실은 50년대 동독에서 개발한 제품이었다는 엉터리 뉴스를 만들어 텔레비전에 틀어놓는 장면은 그가 만들어내는 ‘키치’의 정점이다. 그러나 영화는 후반부로 가면서 흥미로운 유턴을 한다. 거대한 키치 그림 안에 들어가 있던 인물- 알렉스와 엄마- 이 그림 밖으로 나와 그 그림을 들여다보는 형국이다. 알렉스는 누나의 지탄을 받아가며 벌였던 쇼가 실은 엄마가 아니라 자신을 위한 퍼포먼스였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오스탤지어’라는 옛 동독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그럴 리가 있겠나, 젊은 놈이) 어떤 꿈, 모두가 열망했으나 결코 이뤄지지 않았던 꿈에 대한 착잡한 되새김이다. 그의 엄마 크리스티아네는 한술 더 뜬다. 열혈 사회주의자인 줄만 알았던 크리스티아네가 다시 쓰러지기 직전 털어놓는 폭탄 고백은 알렉스와 누이의 머릿속에 각인된 지난 시대의 표상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놓는다. 남편이 떠난 뒤, 어쩌면 그 전부터 그는 자신의 삶의 조건을 회의했고, 그만큼 더 치열하게 그 삶의 조건에 자신을 겹쳐놓았던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 크리스티아네의 오스탤지어는 처절한 비통과 슬픔으로 그 정체를 드러낸다. 그러나 누구도 그녀에게 왜 거짓되게 살았는가, 왜 시스템에서 뛰쳐나오지 않았는가를 비난할 수는 없는 일이다. 구분한다면 세상은 주어진 대로의 존재에 회의하는 사람들과 유보없이 그 존재를 수락하는 사람들로 나뉘어지겠지만 평범한 대다수 사람들은 그 대치점의 중간 어딘가에서 조금씩 치우쳐 서성거리며 사는 것이 아닐까. <굿바이 레닌>은 이것이 키치인 줄 알지만 그림 밖으로 나오지 못했던 사람들, 반항의 액션을 보여줄 용기도 없지만, 그렇다고 행복한 표정연기도 어색했던 사람들에게 바치는 쓸쓸한 송가처럼 보인다. 김은형/ <한겨레> 기자 dmsgud@hani.co.kr

영화사신문 제24호(1958∼1959)

영화사신문 제24호 The Cine History 격주간·발행 씨네21·편집인 이유란 1958 ~ 1959 프랑스 누벨바그에 ‘풍덩’ 트뤼포의 등 칸영화제 누벨바그 작품 일색 프랑수아 트뤼포는 에서 자서전적인 작풍과 신선한 카메라워크로 주목을 받았다. ‘누벨바그가 몰려온다!’ 1959년 5월15일 폐막한 칸영화제를 다루는 언론들은 일제히 이같은 표제하에 새로운 영화의 등장을 알렸다. 누벨바그의 물결이 이번 칸영화제를 휩쓸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수상결과에서도 드러난다. 올해 황금종려상은 마르셀 카뮈의 <흑인 오르페>에 돌아갔다. 더욱 의미심장한 결과는 프랑수아 트뤼포의 가 예상을 뛰어넘고 감독상을 수상한 것이다. 이 영화는, ‘프랑스영화의 어떤 경향’이라는 논문으로 프랑스 영화계를 발칵 뒤집은 데 이어 1959년 <아르>에 프랑스 영화계를 비난한 글을 실은 감독의 ‘전력’ 탓에 영화계의 반발을 사 가까스로 칸에 입성할 수 있었다. 한편 영화제 집행위원회가 미국의 반발을 우려해 비경쟁으로 돌린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 또한 수상에서는 제외됐지만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올해 칸영화제는 그야말로 누벨바그의 잔치였다. 크로아제트에서 누벨바그영화들이 상영되는 동안 크로아제트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라 나풀에서는 누벨바그에 관한 심포지엄이 열렸다. 트뤼포, 로제 바댕, 클로드 샤브롤, 장 뤽 고다르, 로베르 오셍 등 20명의 젊은 감독들이 참석한 이 심포지엄에서는 누벨바그를 둘러싸고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젊은 영화의 제헌의회를 만들자는 로베르 오셍의 제안에 대해서 격렬한 논쟁이 오가기도 했다. 이같은 분위기는 진작에 감지된 것인데, 이번 토론회 개최의 아이디어를 낸 감독들은 이미 얼마 전 ‘영화 디테일에 대해 전적으로 합의된 영역’과 ‘전적인 불일치의 영역’을 규정한 문서를 발표한 바 있다. 사실 ‘누벨바그’란 단어는 이번 칸영화제에서 새롭게 등장한 일군의 영화를 지칭하기 위해 고안된 용어가 아니다. 1957년 <렉스프레스>의 기자였던 프랑수아 지루가 여론조사 결과 나타난 새로운 세대의 부상을 설명하기 위해 만든 수사어가 바로 누벨바그였다. 이어 지루는 <누벨바그: 젊음의 초상들>이란 단행본을 출판했는데, 이때 그는 새로운 세대의 가치를 표현한 대표적인 영화로 로제 바댕의 <그리고 신은 여자를 창조했다>를 들기도 했다. 이처럼 저널의 용어로 탄생한 ‘누벨바그’는 이번 칸영화제에서, 역시 언론의 대대적인 보도를 계기로 새로운 영화사조를 지칭하는 용어로 거듭났다. 불경기 땐 관객을 자극하라? 저예산 공포·범죄 영화 등 틈새공략으로 큰 수익 ‘선정영화’(exploitation movie)가 미국 극장가에서 선전하고 있다. 경영 침체에 빠진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들이 제작편수를 계속 줄여온 반면 독립영화 제작편수는 1958년 할리우드영화 가운데 65%를 차지할 만큼 증가해왔는데, 그중에서도 저예산 공포영화, 공상과학영화 등을 두루 포괄하는 선정영화가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다. 특히 독립영화사인 AIP(American International Pictures)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AIP는 특정 관객층을 겨냥한 영화를 만들어왔다. ‘금요일 또는 토요일 밤이면 집에서 나가고 싶어 안달하는, 껌을 씹고 햄버거를 우적거리고 먹는 청년들’이 바로 AIP의 주관객층. AIP는 공포영화, 청소년 범죄영화 등 10대들이 좋아할 만한 선정적인 소재의 영화들을 수만달러의 예산, 1∼2주의 제작기간에 완성해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수익을 올렸던 장르는 몬스터영화. <해저괴물>(1954)로 데뷔한 이래 다양한 장르를 섭렵해오며 AIP의 대표주자가 된 로저 코먼이 두각을 나타낸 것도 몬스터·호러 장르였다. 배급시장에서 열세에 놓일 수밖에 없었던 AIP는 다양한 마케팅 방식을 개발했다. 곧 AIP는 영화제목, 포스터디자인과 광고를 관객과 상영업자들에게 시험해본 뒤에 각본을 쓰곤 했으며, 텔레비전에 광고를 내보내고 드라이브인을 첫 개봉관으로 고르는 등의 혁신적인 전략을 구사했다. 1부 <길의 노래> 내놓은 지 4년 만에 - ‘아푸 3부작’ 완성 1959년 인도 감독 샤티야지트 레이가 드디어 ‘아푸 3부작’의 마지막편인 <아푸의 세계>를 완성했다. 1955년 <길의 노래>를 내놓은 지 4년 만이다. 그 길지 않은 기간 동안 레이는 세계적인 감독이 됐고, ‘아푸 3부작’은 세계 영화사의 만신전에 올랐다. 2부인 <아파라지토>가 1957년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것은 그 영예의 절정이었다. 이렇듯 결과는 창대하지만 그 시작은 한없이 보잘것없었다. 장 르누아르의 촬영현장을 곁눈질하며 영화를 배운 그는 영화에 대한 애정만 가지고 3부작의 1부인 <길의 노래> 제작에 착수했다. 그가 끌어모은 스탭은 거의가 아마추어들이었다. 촬영기사는 전직 사진사였다. 그도, 촬영감독도 카메라에 대해 모르긴 마찬가지여서 촬영 첫날 결국 아무것도 찍지 못했다는 사실은 이제 유명한 일화가 됐다. 생명보험에 가입한 대가로 융자받은 7천루피로 촬영을 시작한 그는 제작비가 바닥나자 평일에는 광고회사에서 일하고 주말에만 영화를 찍었다. 제작비를 마련하기 위해 나중엔 자신의 책과 가족들의 패물까지 팔아치웠다. 이렇게 4년간의 고투 끝에 완성된 <길의 노래>는 벵골에서 개봉해 흥행에 성공했고 1956년 칸영화제에 출품돼 최고 휴먼 다큐멘트상을 수상했다. “이제 몽타주는 필요없다” 다큐 <인디아>로 돌아온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 잉그리드 버그만과 헤어진 충격 탓이었을까? <불안>을 마지막으로 버그만과 헤어진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이 돌연 인도로 떠나 다큐멘터리를 찍었다. 1957년에서 1958년 사이 인도에서 일어난 일을 네개의 에피소드로 구성한 다큐멘터리 <인디아>에서 로셀리니는 어떤 결말도 내리지 않은 채 인간과 동물, 나아가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를 묵묵히 카메라에 담는다. <이탈리아 여행>(1953)이 혹평을 받았을 때 적극적으로 나서 이 영화를 옹호했던 <카이에 뒤 시네마>의 필자 자크 리베트와 페뢰둔 오뵈다가 1959년 3월, 인도에서 돌아온 로셀리니를 만났다. <인디아> 전체를 통해 스토리와 중심 메시지를 최소화하려 했다는 것이 느껴진다. 의도적인 것이었나. = 맞다. 그런 식으로 영화를 만들 때의 이점을 알게 됐다. 나로서는 새로운 시도였는데, 무척 재미있었다. 장 르누아르, 앙드레 바쟁과 나눈 인터뷰에서 당신은 몽타주를 공격했다. = 그랬다. 이제 몽타주는 필요없다. 사물은 거기에 있다. 그런데 왜 그걸 조작해야 하나. 몽타주는 마술사의 모자 같다. 모든 테크닉을 그 안에 집어넣은 다음, 비둘기, 꽃다발 따위를 꺼낸다. 난 그런 몽타주에 반대한다. 몽타주는 영화학교에서 기술로나 배우는 것이다. 물론 무성영화 시대에 몽타주는 필연적이었다. 몽타주 없는 스트로하임의 영화는 생각할 수도 없다. 그가 찾아난 진정한 영화언어가 몽타주였다. 하지만 더이상 몽타주는 필요없다. 물론 내 영화에도 몽타주의 요소가 있다. 하지만 그건 구성요소들을 한 화면에 배치하는 문제로서의 몽타주이다. 그러니까 당신의 몽타주는 기존의 관념과 상관없다는 말인가. = 그렇다. 내겐 미리 정해진 계획이 없다. 난 내가 본 것에 따라 작업한다. 어떤 사물이 눈길을 끈다면, 그건 그 사물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중요한 걸 보여줄 만큼 보여준 다음 커트한다. 그걸로 충분하다. 중요한 건 숏과 숏의 연결이 아니라 여러 요소들을 하나의 이미지 안에 담아내는 것이다. 앙드레 바쟁은 당신이 인간과 호랑이를 한 화면 안에 담아야 했다고 말하고는 했다. 당신은 이 둘을 분리해서 보여줬는데. = 바쟁의 관점에서라면 그의 말이 맞다. 흥분을 자아내기 위해서는 한 화면 안에 이 둘을 함께 담는 게 더 효과적이다. 하지만 내 영화는 그런 흥분이 필요없다. 나는 계산을 하지 않는다. 말하고 싶은 걸 알면 그걸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방법도 찾아낼 수 있다. 그게 전부다. 나는 미리 대상을 선택하지 않는다. 하지만 확고한 컨셉은 가지고 있다. 중요한 건 아이디어이지 이미지가 아니다. 영화감독에겐 신념이 중요하다는 말 같다. 질문을 좀 돌려보자. 플래허티의 작품 같은, 그런 통상의 다큐멘터리는 어떤가. = 내게 중요한 건 인간이다. 나는 영혼을,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빛을, 한 개인과 그를 둘러싼 사물의 모든 의미를 표현하려고 했다. 어떤 사물이 의미를 갖게 된다면, 그건 그것을 보아주는 인간이 있기 때문이다. 엄격한 의미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면 내 안의 생각을, 인간의 마음을 포기해야 했을 거다. 게다가, 다큐멘터리를 그 극한까지 밀어붙이기 위해서는 인간의 마음을 바라보는 일이 절박했다. 간단히 말해, 초기 네오 리얼리즘 정신으로의 회귀인가. = 그렇다. 그 말이 맞다. 주목! 이 사람- MGM 프로듀서 아서 프리드 “스탭을 알아야 작품이 산다” MGM 뮤지컬 <지지>가 1959년 4월7일 열린 아카데미영화제에서 감독상, 최고작품상 등 9개 부문을 석권했다. 할리우드 메이저들이 부침을 거듭하고 있는 가운데에도 MGM 뮤지컬만은 변함없이 그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세인트루이스에서 만나요>에서 <브로드웨이의 버클리가> <파리의 미국인> <사랑은 비를 타고> <밴드 웨건>을 거쳐 <지지>까지, MGM은 쉬지 않고 뛰어난 뮤지컬영화를 만들어왔다. 그런데, 한 사람의 프로듀서가 여기에 언급된 뮤지컬 전부를 제작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가 바로 아서 프리드(Arthur Freed)이다. “프로듀서로서 아서 프리드의 가장 뛰어난 능력은 재능을 알고 재능을 인식하고 그런 재능을 자기 주위에 두는 것이다.” 아서 프리드에 대한 어느 영화인의 촌평이다. 이 말은 사실이다. 아서 프리드는 MGM에 소속되어 있던 유능한 감독, 배우, 작가, 작곡가, 안무가들과 지속적인 유대를 맺었다. 이 ‘아서 프리드 사단’에 속하는 대표적인 감독이 진 켈리와 스탠리 도넌, 그리고 빈센트 미넬리다. 특히 미넬리와의 유대는 돈독해서 미넬리는 그의 모든 뮤지컬을 프리드와 함께 만들었다. 진 켈리와 스탠리 도넌은 안무가 출신으로 감독을 겸하게 됐는데, 이처럼 안무가가 감독이 되는 것은 할리우드에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뮤지컬에서 안무가의 중요성을 알아본 프리드는 과감하게 이들을 감독으로 승격시켰다. 끈끈한 유대관계를 맺기는 배우, 작가와도 마찬가지. 프레드 아스테어는 프리드의 뮤지컬 6편에 출연했고, 앨런 제이 러너 등 몇명의 작가가 프리드가 제작하는 영화의 시나리오 대부분을 썼다. 이렇듯 아서 프리드는 휘하 스탭들의 능력을 제대로 보고 또 존중할 줄 알았다. 이는 그가 여느 프로듀서와는 달리 비즈니지맨이 아니라 작사가로 영화계에 입문한 전력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보드빌쇼에서 공연하고, 1차대전 뒤에는 작사를 시작한 그는 1929년 MGM과 계약을 맺은 이래 <브로드웨이 멜로디> 등의 가사를 썼고 어소시에이트 프로듀서로 <오즈의 마법사> 제작에 참여한 뒤 그만의 제작부를 꾸렸다. 이러한 제작라인을 거치면서 그는 뮤지컬 장르에 대한 감각을 익힐 수 있었다. 단 신 들 <전함 포템킨> 베스트 오브 베스트 1958년 벨기에 시네마테크가 영화사가들의 투표를 통해 선정한 영화사상 최고의 영화 12편을 발표했다. 최고의 영화로 뽑힌 작품은 에이젠슈테인의 <전함 포템킨>(100표). <황금광 시대> <자전거 도둑>이 85표를 얻어 공동 2위에 올랐으며 <잔다르크의 수난> <위대한 환상> <탐욕> <편협> <어머니> <시민 케인> <대지> <마지막 웃음>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이 그뒤를 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자전거도둑> 등 유성영화가 겨우 3편에 불과하다는 사실. 이번 투표에는 존 그리어슨, 앙리 랑글루아, 아이리스 배리, 앙드레 바쟁 등 26개국 영화사가 117명이 참여했다. <스팔타커스> 스탠리 큐브릭 손에 <스팔타커스>의 감독이 교체됐다. 1958년 2월 <스팔타커스>의 제작자이자 주연배우인 커크 더글러스는 캘리포니아의 데스 밸리에서 촬영에 들어간 지 2주 만에 앤서니 만 감독을 해고하고 30살의 젊은 감독 스탠리 큐브릭에게 새로 메가폰을 맡겼다. 이에 대해 할리우드 일각에서는 과연 저예산영화 몇편을 만든 것이 고작이 이 신출내기 감독이 1200만달러짜리 프로젝트를 제대로 끝낼 수 있을까 하는 우려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카이에 뒤 시네마> 대부 앙드레 바쟁 타계 1958년 11월11일, 프랑스의 평론가이자 영화이론가인 앙드레 바쟁이 40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백혈병. 그는 투병으로 고생하던 말년에도 일주일에 한번은 <카이에 뒤 시네마>에 출근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만큼 영화와 글쓰기에 대한 애정이 깊었던 것이다. 1918년 앙제에서 태어난 바쟁은 10대 후반 <에스프리>에 실린 로제 레엔하르트의 영화평을 읽으면서 영화가 중요한 문화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음을 깨닫고 영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어 영화에 깊이 빠져든 그는 시네필이자 평론가로서 프랑스의 시네클럽 운동을 주도했고, 영화전문지인 <카이에 뒤 시네마>를 창간했다.

스크린쿼터 묘수풀이 대담

‘경제위에 문화’ 유네스코 협약 힘 실어야 지난 10월19일 노무현 대통령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아펙) 정상회의에서 “스크린쿼터 문제를 조속히 해결하겠다”고 말한 뒤, 스크린쿼터 논란이 다시 불거지고 있다. 1998년 이후로 수차례 스크린쿼터 유지론자와 축소·폐지론자의 주장이 대립해오면서 스크린쿼터와 국내 경제·산업의 상관관계에 대한 논의는 많이 다뤄져왔다. 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이야기돼온 스크린쿼터의 대외적 측면, 즉 국제 통상 협정에서 스크린쿼터가 어떤 위상에 있으며 미국은 왜 스크린쿼터를 줄기차게 문제삼는지 등과 관련해 좌담을 마련했다. 새로운 논제를 제시한다는 차원에서 스크린쿼터 지지론에 서 있는 세 사람을 불렀다. 스크린쿼터 문화연대 양기환 사무처장, 노무현 대선 후보 문화특보를 지낸 이기택 문화포럼 대표, 국제문제 전문인 김형진 변호사를 지난 27일 만났다. 편집자 사회=스크린쿼터 문제는 한국과 미국 사이에서 불거지고 있지만, 나라마다의 문화적 정체성을 보존한다는 문화적 종다양성의 개념으로 보면 전세계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스크린쿼터를 얘기할 때 이 점이 상대적으로 등한시되고 있는 것 같다. 이기택=문화적 종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미국과 영국 등 영미권과, 이걸 지키려는 유럽·남미 국가들 사이에 큰 전선이 있다. 지금 추세는 후자가 앞서가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결과물이 유네스코 문화협약이다. 2005년 유네스코 총회에서 통과시키기 위해 지금 문안을 만들고 있는 이 협약은 각국의 고유한 문화를 자본의 논리로 획일화시키려는 미국의 문화 패권주의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그걸 국제법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양기환=문화 상품, 문화 서비스라는 범주가 유엔이 정한 상품 코드에 따르면 1200개가 넘는다. 이걸 상품의 관점에 다루면 안 된다. 문화 상품을 일반 상품과 똑같이 시장 논리에 맡기고, 어떤 보호나 규제도 하지 않는다면 <매트릭스 3>을 개봉할 때 전 세계가 똑같이 이 영화만 보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문화협약은 주권국가가 스크린쿼터를 하든, 방송쿼터를 시행하든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나라들이 통상협정을 가지고서 여기에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의 국제역학 관계상 개별 국가간의 교섭에 맡기면 문화상품도 일반 상품처럼 취급하려는 미국의 힘 앞에 버티기가 힘들다. 문화협약이 발효되면 이걸 가지고 버틸 수 있게 된다. 스크린쿼터도 마찬가지다. 미국에 문화협약을 들이대면 되는 거다. 지리한 스크린쿼터 논쟁도 끝낼 수가 있다. 사회=문화협약이 어떻게 진행돼 왔고, 향후 전망은 어떤가. 이=2001년 유네스코 총회는 186개 회원국 동의로 ‘세계 문화 다양성 선언서’를 채택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올해 4월 58개국이 참여하는 유네스코 이사회에서 올해 총회의 안건으로 문화협약 추진을 상정시켰다. 그리고 9월 말~10월 중순에 열린 총회에서 60대5 라는 압도적인 표 차이로 문화협약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반대한 나라는 미국, 영국, 호주 등 영미권 5개국뿐이다. 유네스코는 앞으로 2년 동안 문화협약 문안을 작성해 2005년 총회에 올리게 된다. 김형진=문화협약이 발효되면 그동안 원론으로만 문화상품의 예외성을 주장해온 법적 무기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약간의 문제가 있다. 유네스코가 문안 작성에 참고하는 것이 세계문화부장관회의(INCP)이 마련한 문화협약 초안이다. 이 초안은 문화 협약 내용이 국가간의 다른 협약과 상충될 때 어떤 것이 우선하는지를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10월 12~15일에 열린 ‘세계문화 NGO 총회(INCP)’에서 이 문제를 분명히 할 것을, 다시 말해 다른 협약과 상충될 때 문화협약이 우선함을 명시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양=INCP와 INCD는 오랫동안 동맹관계에 있어왔기 때문에 INCD가 강력히 요구하면 관철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문화협약이 다른 조약이나 협약에 우선한다는 조항이 명시될 가능성이 크다. 미국, 영국은 이런 기류를 알고서 문화상품도 세계무역기구(WTO)의 서비스에 대한 일반 협정(GATS)에서 논의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지난 2월, INCD보다 전문가들이 모인 국제문화전문가단체(CCD)는 GATS가 완성되기 전에 문화협약을 발효시키자는 결의를 했다. 사회=이런 국제사회의 움직임에 대해 한국 정부의 입장이 명확히 발표된 적이 없는 것 같다. 반대로 한국의 민간 문화단체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고 위상도 높아 보인다. 양=올해 유네스코 총회에서 유네스코 한국이사회 이사장인 윤덕홍 부총리가 기조연설을 했다. 언론에는 한국이 문화협약을 찬성한 것으로 보도됐지만, 연설문 내용을 받아본 결과 찬성도 반대도 아닌 애매한 입장에 가까웠다. 재경부나 외교부는 문화협약에 반대할 거다. 지난 6년간의 스크린쿼터 지키기 운동 과정에서 뼛속 깊이 느낀 게 미국과 한국의 내부 커넥션이 매우 강하다는 것이었다. 이=INCP가 만들어진 98년부터 최근까지 한국 문화부는 이런 단체가 있는지, 뭘 하는지 전혀 관심이 없었다. INCP에 한국 문화부 장관이 참가한다는 게 노무현 대통령의 선거공약이었다. 실제로 INCP에 한국이 가입했다. 물론 이 과정도 몹시 힘들었다. 올해 행사에 문화부가 나갔는데 장관 아닌 국장급이 대신했다. 그러나 민간 차원에서 한국 문화단체의 활동은 각국으로부터 인정받고 있다. 한국의 스크린쿼터 투쟁은 외국의 문화단체에게 모범사례이다. 그리스에선 와서 강연해달라고 했다. 이번 INCD 총회에서 한국의 ‘세계문화기구를 위한 연대회의’ 대표자격으로 스크린쿼터에 대해 연설했을 때도 반응이 뜨거웠다. 한국어가 영어, 불어, 스페인어와 함께 공식언어였다. 또 현재 8개국 대표로 구성된 INCD 운영위원을 한국이 맡아달라는 제의까지 받았다. 김=바로 그 점 때문에 미국이 자꾸만 스크린쿼터를 문제삼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한국 영화시장이 얼마나 되겠는가. 이 작은 나라 하나 마음대로 못 하니까 국제 사회에서 체면이 안 선다고 생각할 거다. 실제로 스크린쿼터에 시비거는 미국의 논리는 자기모순이다. 왜 미국은 통신을 개방하지 않는가. 그렇게 표준화가 좋다면, 미국 안에서부터 표준화해야 할 텐데 왜 주마다 상법이 다르고 교통법규가 다른가. 사회=아·태 경제협력체 정상회의에서 ‘스크린쿼터를 조속히 해결하겠다’는 노 대통령의 발언을 계기로 다시 스크린쿼터 문제가 불거지고 있다. 어떻게 전망하는가. 양=나는 이런 상황을 음모라고 생각한다. 지난 9월 노 대통령 방미 때도 한·미 재계 회의에서 스크린쿼터 관련 발언을 해서 한차례 논란이 됐다. 그때 대통령에게 질문을 던진 이는 미국영화제작자협회(MPAA) 부회장 보니 리처드슨이었다. 한·미 재계회의는 양쪽 파트너가 함께 하는 자리였다. 한국쪽 영화업자가 아무도 가지 않은 그 자리에 와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나중에 전경련쪽에 따져물으니, 미국쪽에서 갑작스럽게 끼워넣었다고 말하더라. 그게 납득이 안 가는 거다. 한국 재계 관료들이 어쨌든 양해했다는 말 아닌가. 이번 아태경제협력체 회의 때도 휴 스티븐 타임워너 아태부회장이 노 대통령에게 질문을 던져서 문제의 발언이 나온 거다. 그 사람이 거기 참석하게 된 것을 두고서도 한국 재계 관료들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거다. 이=지금 청와대에 문화쪽을 담당하는 비서진이 없다. 연락관 한명 있을 뿐이다. 이게 큰 문제다. 김=한국쪽의 스크린쿼터가 국제법적으로 부당하다면 미국은 벌써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했을 거다. 다른 상품의 경우 이미 여러차례 하지 않았는가. 못 하는 건 법적 자신감이 없기 때문이다. 2차대전 후에 미국이 중심이 돼 만든 ‘관세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에서도 문화영역은 예외로 했다. 영화 산업이 자신있으니까 지금 그걸 스스로 뒤엎으려고 하고 있는 거다. 한국도 경제 차원에서도 문화를 소중히 할 때라고 본다. 70년대 중공업을 육성시켰듯, 지금은 문화산업을 육성시키는 게 중요한 것 아닌가. 실제로 영화에서 그런 발전이 일어나고 있고. 지금 우리가 이렇다할 산업이 있나. 사회·정리 임범 기자 isman@hani.co.kr,사진 강창광 기자 용어풀이 세계문화NGO총회(INCD/ International Network for Cultural Diversity)=방송, 출판, 음반, 순수예술, 영화 등을 망라한 70여개국 500여 문화단체와 예술가들로 구성된 비정부기구(NGO)로 2000년에 결성됐다. 문화분야 비정부기구들의 가장 큰 국제 네트워크이다. 세계문화부장관회의(INCP/ International Network on Cultural Policy)=98년 스톡홀름에서 개최된 유네스코의 ‘발전을 위한 정부간 문화정책회의’ 직후 설립됐다. 문화와 관련된 국제적인 안건에 대해 각국 장관들의 관점을 나누고 논의하는 정부간 비공식기구이다. 현재 53개국이 회원국으로 가입해 있다. 국제문화전문가단체(CCD/ Coalition for Cultural Diversity)=98년 봄, 캐나다 퀘백주의 문화단체들에 의해 설립돼 99년부터 범위가 커졌다. 현재는 출판, 영화, 텔레비전, 음악, 공연 등 각 문화 분야 42개국 300여개 이상의 문화전문가단체들로 구성돼 있다.

인디아나 존스 & 카우보이 비밥

<인디아나 존스> : 꼼꼼히 단장 화질과 사운드 ‘만족’ 매력적인 고고학자의 좌충우돌 모험담으로 1980년대를 휘어잡았던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가 드디어 디브이디 타이틀로 모습을 나타냈다. 그것도 1장의 부록 디스크를 포함해 시리즈 세 편이 함께 들어 있는 트릴로지 박스 세트의 형태로 말이다. 이 타이틀을 접하는 순간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박스 케이스부터 메뉴 화면에 이르기까지 일관성과 안정성을 보여주는 디자인이다. 그러나 81년도라는 1편의 개봉연도를 고려했을 때 제대로 리마스터링되었다는 느낌을 주는 화질과, ‘티에이치엑스’ 인증 시스템을 적용한 사운드가 주는 만족감과는 비교가 어렵다. 특히 최신 액션영화의 박진감 넘치는 사운드와는 다소 거리가 있으나 각종 벌레 소리에서부터 비행기의 굉음에 이르기까지 꼼꼼하게 정리된 사운드는 기대 이상이다. 부록 디스크에 담긴 방대한 양의 인터뷰들의 경우는 조금 다른 차원에서의 포만감을 안겨주는 것이 특징이다.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와 제작자 조지 루커스가 풀어내는 엄청난 뒷이야기들은, 인터뷰조차 훌륭한 엔터테인먼트가 될 수 있음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조지 루커스가 기르던 털북숭이 애완견의 이름을 따 주인공의 이름을 ‘인디아나’로 짓고, ‘스미스’라는 성으로는 영화를 찍지 않겠다고 스필버그가 버티는 바람에 ‘존스’로 바꿨다는 등의 이야기는 웃음을 참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카우보이 비밥> : 인기 TV시리즈의 성공한 극장판 한편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만큼이나 매력적인 모험담을 미래를 배경으로 엮어내 많은 팬들을 거느리고 있는 〈카우보이 비밥〉 시리즈 극장판도 디브이디 타이틀로 모습을 드러냈다. 〈카우보이 비밥〉 극장판은, 극영화를 보는 듯한 사실적인 묘사와 쿨하면서도 끈끈한 정을 나누는 캐릭터들 간의 관계 그리고 적재적소에 사용되는 배경음악 등으로 이른바 ‘비밥’ 마니아들을 만들어낸 텔레비전 시리즈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내용상으로는 텔레비전 시리즈 중 한 에피소드가 선정되어 극장판으로 확대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작관련 부록의 첫머리에서 감독이 밝혔듯이 ‘텔레비전 시리즈물에 익숙한 기존 팬과 처음 비밥을 접하는 극장용 관객을 모두 만족시키는 것’이 이 애니메이션의 성패 여부를 가름하는 중요한 요소였는데, 다행히 아주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 본편과 함께 각 캐릭터의 성격과 취향을 창조해내는 과정에서 제작진들이 만들어낸 다양한 기초자료들을 만날 수 있는 ‘작은 화면에서 큰 스크린으로’ 꼭지와 감독의 유명한 음악 선곡 능력이 뛰어난 애니메이션과 어우러져 빛을 발하는 ‘뮤직 비디오’ 꼭지 등이 담긴 부록도 상당한 즐거움을 주는 것이 이 타이틀의 매력이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디브이디의 한글자막이 원작 텔레비전 시리즈물이 가지고 있던 캐릭터들의 매력을 잘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건방지기까지 한 현상금 사냥꾼인 주인공이 존칭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상당한 어색함이 느껴진다. 김소연/디브이디 칼럼니스트 The Adventure Of Indiana Jones-The Complete DVD Movie Collection | 1981, 1984, 1989 | 감독-스티븐 스필버그 | 화면-아나모픽 2.35:1 | 오디오-돌비디지털 2.0, 5.1(THX) | 지역코드-3 | 출시사-파라마운트 Cowboy Bebop : The Movie-Knockin’ On Heaven’s Door| 2001 | 감독-와타나베 신이치로 | 화면-아나모픽 1.85:1 | 오디오-돌비디지털 5.1 | 지역코드-3 | 출시사-콜럼비아 ▶▶▶ [구매하기] ▶▶▶ [구매하기]

독일식 사랑과 한국식 우국충정,<굿바이 레닌>

건달, 분단국가 국민으로서 <굿바이 레닌>을 생각하다 엄격한 유교 관습에 따라 장례를 치르는 상가에 갔을 때 내가 가장 적응하지 못하는 대목은 ‘곡’이다. ‘곡’은 상을 당한 후손들의 슬픔의 정도를 대외만방에 알려서 가문의 예의범절을 과시하기 위한 형식이다. 그런데, 나는 일정한 박자와 곡조에 실려 전달되는 규격화된 슬픔을 접하면 자꾸 웃음이 나온다. 지금 울고 있는 저이는 지속적으로 눈물을 끌어올리기 위해 어떤 슬픈 기억들을 동원하고 있을까? 슬픔은 개인적인 것이고, 그 표현양식도 개인적인 게 제격이다. 내가 가장 쉽게 감염되는 슬픔의 표현양식은 두 가지다. 죽은 자식을 끌어안은 어미의 오열과 누군가의 죽음과 맞닥뜨린 무심한 표정. 이 둘은 사뭇 달라 보이지만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슬픔에 몰입해 있다는 점에서 닮았다. 그런데도 무심한 표정으로 슬픔을 삼키는 사람들은 종종 오해받는다. “지 아비가 죽었는데 저놈은 슬프지도 않는가 봐,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네.” 하지만 누가 알랴! 이 사람이 길을 가다가도 혼자서 눈물지으며 더 오래 더 나중까지 망자를 추억할지! 나는 규격화된 수다로 슬픔을 과장하는 사람을 신뢰하지 못한다. 깊은 슬픔은 너무나 단순해서 말로 옮기기 난감하다. 누군가에 몰입했던 사람은 헤어질 때 단 하나의 마음의 풍경과 맞닥뜨린다. 보내고 싶지 않지만 보내야 하는 상황. 이때 그가 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이 있을까? <굿바이 레닌>을 보면서, 나는 그게 ‘굿바이’란 걸 깨달았다. 기약도 없고 회한도 없이 흘려보내는 말 ‘굿바이’ 말이다. 이 영화에서 효심이 지극한 아들이 어머니에게 고하는 마지막 작별인사도 ‘굿바이’다. 하지만 아들의 ‘굿바이’는 아주 특이하다. 심장마비를 일으켜 혼수상태에 빠졌다 깨어난 골수 공산당원인 어머니에게 8개월간 진행된 동독의 몰락을 감추기 위해 새빨간 거짓말을 하는 것. 그것이 아들이 어머니를 위해 준비한 작별인사다. 품절된 동독산 피클을 구하러 다니고, 동독이 번영을 구가하는 것처럼 가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만들어 비디오로 틀어주고, 동네 사람들을 고용해 어머니를 다시 한번 확신시키고…. 아들의 기발한 거짓말은 세헤라자데의 천일야화처럼 점입가경이다. 감독은 아들의 사랑이 깊을수록 거짓말의 정도가 심해지도록 기발한 이야기 틀을 짜놓았다. 그래서 관객은 아들의 천일야화를 듣고 즐겁게 웃은 만큼 나중에 눈물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마지막에 어머니가 죽고 아들이 어릴 때 갖고 놀던 로켓에 어머니의 유골을 담아 하늘로 쏘아올릴 때쯤이면 객석은 웃음이 말끔히 가시고 숙연한 분위기가 된다. 한마디로 이 영화는 깊은 슬픔을 간직한 자가 조금씩 그 슬픔을 보여주면서 더 오래까지 슬퍼하도록 만드는 화술을 구사하고 있다. 나도 그 화술에 깊이 감동받아서 극장을 나왔다. 내가 분단국가의 국민이 아니라면 이 영화에서 정서적 유용성만을 봤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의 제목부터가 모종의 정치적 색채를 띠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야기 구조도 매우 정교하게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위계를 가정한다. 모든 동독적인 것은 왜 웃음의 대상으로 전시되는가. 그것이 아무리 연민을 깔고 있다고 하더라도, 웃음은 우월한 체제에 기댄 자의 연민이 아닌가. 그리고, 왜, 아들의 사랑의 대상이 애인이 아니고 하필이면 어머니인가? 애인과의 결별은 새로운 만남을 예고하는 사회적 현실이지만 어머니와의 결별은 언젠가는 겪게 될 성장의 자연스런 한 과정이 아닌가. 말하자면,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 레닌이 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그런 존재란 말 아닌가. 또, 왜 하필이면 어머니는 독일 통일에 때맞춰 죽고, 유골의 형태로 통일 독일을 기념하는 불꽃과 함께 한줌 재로 흩뿌려지는가. 통일 독일이란 새 역사를 위해 당신의 육신은 안타깝지만 사라져야 한다는 얘기가 아닌가. 나는 이 영화의 정치적 전언이 아무래도 이런 거 같다. “잘 가요 레닌 아저씨, 그동안 애썼는데 이제 편히 쉬세요. 미래에 대한 약속은 새빨간 거짓말이었지만 그것이 사랑 때문이었다는 거 저희는 알아요.” 사회주의의 이상은 받아들이겠지만 사회주의가 만들어놓은 현실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아들의 독일 사랑. 그래도 독일인의 사랑이 ‘처음부터 악의에 찬 새빨간 거짓말’로 역사의 패자가 된 사회주의에 냉전 비용을 전가하며 자본주의의 결점을 묻어버리려는 한국인의 우국충정보다는 훨씬 낫지 않은가. 송두율 교수를 아버지로 캐스팅해서 한국에서 이 영화를 리메이크하면 아마 이런 제목이 될 것이다. ‘깟뎀 레닌.’ 남재인/ 고려대 강사

일본 드라마 내년부터 유료채널서 본다

2004년 1월1일부터는 일본에서 제작한 대부분의 드라마를 케이블이나 위성방송을 통해 볼 수 있게 될 전망이다. 방송위원회는 11일 이와 같은 내용을 담은 ‘일본방송 2차 개방 계획안’을 발표하고 13일 관련 전문가 토론회를 열기로 했다. 방송위 안은 12살 이상이면 시청할 수 있는 일본 드라마는 유료채널을 통해 방영할 수 있도록 하고 있어 거의 대부분의 드라마가 이에 해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대중가요 분야는 뮤직 비디오를 포함해 한국 가수가 부른 일본어 노래나 한국과 일본이 공동공연을 하는 경우 등에 한해 제한적으로 개방적으로 개방하기로 했다. 또 생활정보 등 교양 프로그램은 전면 개방하는 한편 영화는 공인된 국제영화제 수상작과 15살 이하 관람가에 한해, 극장용 애니메이션도 국제영화제 수상작에 한해서만 개방을 허용할 방침이다. 그러나 유료 채널에서의 오락 프로그램 개방은 보류됐으며, 지상파 텔레비전에서의 일본 방송 추가 개방은 여전히 보류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오광혁 방송위 정책3팀장은 “유료 채널에서 일본 전문 프로그램 공급자가 나오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며 “이미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방송위는 문광부와 공식 합의절차를 거친 뒤 전체회의 의결을 거쳐 안을 확정한다.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8년 전에도 대장금? 아~헷갈려

소주방 나인 이영애…맞수관계 동무…맛깔스런 궁중음식… 이영애는 궁궐 음식을 만드는 소주방에서 일하고 있는 나인이다. 어릴 적 궁에 들어와 각종 나물 이름 외기, 물동이 이고 걷기, 놋쇠그릇 닦기, 상놓는 법 익히기 등 고된 수련을 거쳤다. 생각시 시절부터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동무도 있다. 이영애는 음식에 관한 한 뛰어난 기질을 타고 났다. 반면 그의 동무는 기교는 뛰어나지만 음식에 대한 깊은 이해는 갖고 있지 않다. 어느날 최고상궁이 두 사람을 불러놓고 말한다. “내가 이제 물러날 때가 됐으니 두 사람이 경합을 벌여 음식 솜씨가 더 뛰어난 사람을 내 후계자로 삼겠노라!” 결국 전수자 결정은 보류되지만 그 뒤 두 사람은 서로 각기 다른 인생의 길을 걷게 된다. 드라마가 진행되는 동안 각종 맛깔스런 궁중 상차림은 양념으로 여러 차례 제시된다. 이상은 대한민국에서 텔레비전을 보유한 가구 가운데 40% 이상이 본다는 인기드라마 〈대장금〉의 줄거리가 아니다. 문화방송이 1995년 12월1일 창사특집극으로 방영한 〈찬품단자〉(사진) 1·2부의 초반부 설정이다. 드라마 앞부분 줄기와 가지가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비슷하다. 같은 방송사에서 8년 전 방송한 드라마와의 비슷한 설정을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대장금〉 연출자인 이병훈 피디는 당시 문화방송 드라마국 부국장이었다. 물론 두 드라마의 시대배경과 향후 전개되는 양상은 판이하게 다르다. 〈대장금〉에서는 주인공 장금이 이후 최고상궁을 거쳐 중종의 어의 자리까지 오른다. 반면 조선 말기를 시대 배경으로 시작한 〈찬품단자〉는 일제 강점기와 미군정기, 한국전쟁과 휴전을 거쳐 현대에 접어들기까지를 다루고 있다. 이영애는 궁중 전통 음식을 끝까지 지키다 세상으로부터 크게 인정받지는 못하지만, 그의 동무였던 이일화는 일식과 양식 등으로 재빠르게 변신을 거듭한 뒤 끝내 전통 궁중요리가로 이름을 날린다. 이 사이에 배신과 용서가 버무려져 있다. 요컨대 〈찬품단자〉는 친일파를 비롯한 기회주의자가 득세하고 독립운동가 등 소신파들은 이들에게 짓눌린 한국 현대사의 뼈아픈 구석을 비유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그렇다면 ‘설정 빌려오기 논란’의 실체적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대장금〉의 김영현 작가는 결백함을 강조했다. 김 작가는 “〈찬품단자〉라는 드라마 얘기는 들어봤지만 전혀 본 적이 없다”며 “초반 설정은 모두 내가 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어 이 피디로부터 관련한 얘기를 들은 적도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 〈찬품단자〉를 연출한 이승렬 피디는 긍정적인 해석을 하려 애쓰면서도 설정을 빌려왔을 개연성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이 피디는 “대장금을 보며 비슷하다고는 생각했다. 그러나 드라마가 지향하는 바가 달라 부정적으로 보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드라마 전개의) 징검다리로 쓰는 것이라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문제”라며 “거부감이 전혀 없다”고 덧붙였다. 원작자에 해당하는 〈찬품단자〉의 작가 김진숙씨와는 거듭 통화를 시도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 김씨는 지난주 끝난 문화방송 일일연속극 〈백조의 호수〉의 작가이기도 하다.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매트릭스> 3부작 메가토크 [5] - 진중권이 말한다

철학하는 블록버스터의 철학하기 “어떤 인간이 사악한 과학자에게 수술을 받았다. 그 사람의 두뇌가 육체에서 분리되어 두뇌를 계속 살아 움직이게 해줄 영양분이 가득 담긴 통 속에 옮겨졌다. 신경조직은 그대로 초과학적 컴퓨터에 연결되어 (…) 모든 것이 완벽히 정상적인 듯이 보이는 환각을 일으키도록 한다고 하자. 사람들, 사물들, 하늘 등등이 모두 있어 보이지만 그 사람이 경험하는 모든 것은 컴퓨터로부터 신경세포에 이어지는 전자자극의 결과다. (…) 그 사악한 과학자는 여러 가지로 프로그램을 변형시킴으로써 그 사람으로 하여금 과학자가 원하는 어떠한 상황이나 상태일지라도 ‘경험’하도록 할 수 있다.”(힐러리 파트남, <이성, 진리, 역사>) 실재론과 관념론 <매트릭스> 1편에서 거대한 수조 속에서 배양되는 인간 클론들의 충격적인 영상을 보고, 곧바로 미국 철학자 파트남의 사유실험이 머리에 떠올랐다. 이 “과학적 공상”은 “외부세계의 존재에 관한 회의론이라는 고전적인 문제”를 새로이 제기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하나의 두뇌로는 성에 차지 않았던지 그는 곧 이 운명을 전 인류에 지워 “모든 인간이 통 속에 들어 있는 두뇌라고 상상”하더니, 이어서 자기가 묻고자 했던 그 질문을 던진다. “정말로 우리가 통 속에 들어 있는 두뇌라고 한다면 그와 같은 사실을 우리가 말하거나 생각할 수 있는가?” 대답은 ‘아니오’이다. 이 물음 자체가 모순, 즉 “스스로 논파하는 가정”에 입각해 있다는 것이다. 내 견해를 묻는다면, 나 역시 파트남처럼 ‘아니오’라고 대답할 게다. 세계 속에서 특정 사물의 존재를 의심할 수는 있으나 세계 전체를 의심할 수는 없다. ‘의심’의 문법은 ‘믿음’이라는 낱말의 문법 위에 서 있다. 모든 것을 의심한다면 생각 또한 못하게 될 것이고, 그 결과 의심이라는 것도 할 수 없게 된다. 푸른 하늘과 빛나는 햇살, 새들의 지저귐과 들꽃의 아름다움을 맘껏 즐기라. 데카르트처럼 “방법적”으로만 회의를 하든, 아니면 그보다 더 진지하게 회의를 하든, 세계 전체를 회의하는 것은 철학적 난센스다. 팬텀과 매트릭스 ‘매트릭스’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한 이는 미디어 철학자 귄터 안더스로 안다. 하이데거의 제자였던 이 유대인 비평가는 잠깐 한나 아렌트의 남편 노릇도 했는데, 훗날 그의 아내는 “그의 대책없는 페시미즘(염세주의)이 견딜 수 없어서” 그와 헤어졌노라고 술회했다. 아내를 질리게 한 안더스의 비관주의는 대중매체가 만들어내는 미래에 대해서도 매우 우울한 전망을 내놓는다. 이 현대판 묵시론에는 인간이 만든 도구와 그것에 대한 인간의 통제능력 사이에 점점 벌어지는 ‘격차’(Diskrepanz)를 걱정하는 하이데거의 우려가 깔려 있다. 이 철학적 우려는 오래전부터 SF영화를 위한 풍부한 상상력의 원천이었다. 안더스에 따르면 대중매체는 새로운 존재층을 만들어낸다. 가령 안방의 텔레비전 속에서 쌍둥이빌딩이 실시간으로 불탈 때, 그 영상은 ‘가짜’ 하기도 뭐하고, ‘진짜’라 부를 수도 없다. 이렇게 가상도, 현실도 아닌 이 제3의 존재층을 안더스는 ‘팬텀’(환영)이라 부른다. 실제로 대중매체가 등장한 이래로 우리의 세계는 점점 더 관념적인 팬텀으로 변해가고 있다. 가령 미국에 가보지 못한 나의 머리 속에서 미국이라는 나라는 100% 사진이나 영화, 혹은 텔레비전 영상, 즉 내가 아닌 남이 본 영상들로 짜여져 있다. ‘팬텀’을 재료로 세계를 짜는 원리가 바로 ‘매트릭스’다. 철학자 칸트에게 시간과 공간이 주관의 선험적 형식인 것처럼, 대중매체는 세계를 세계로 제시할 때 ‘매트릭스’라는 선험적인 틀을 사용한다. 가령 <조선일보>를 생각해보라. 노무현 대통령이 말을 아끼면, “대통령, 꿀 먹은 벙어리인가”, 대통령이 말을 흐리면, “대통령 입장을 확실히 하라”, 대통령이 입장을 확실히 밝히면, “대통령, 입이 헤프다”. 이렇게 세계는 미리 짜여진 선험적인 틀에 따라 우리에게 제시된다. 사건은 원본의 형태로는 더이상 ‘사건’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보도라는 형태로 복제가 될 때 비로소 사건은 ‘사건’으로 인정받는다. 이렇게 모든 것이 원본이 아니라 외려 복제의 형태로서 사회적으로 더 중요해질 때, 현실은 팬텀과 매트릭스의 가상현실에 자리를 내주고 점차 사라져간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누가 짠 것인가? 이 세계는 과연 누구의 표상인가? 오래전에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나의 꿈이 너희의 표상이다.” 누굴까? 이 말을 한 매트릭스의 창조주는 히틀러다.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 어디선가 주인공 네오는 해킹 프로그램을 감추려고 서가에서 책을 하나 꺼내든다. 영화의 원작자들이 성경처럼 여긴다고 하는 보드리야르의 저서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이다. ‘시뮬라크르’란 ‘원본보다 더 실재적인 복제’를, ‘시뮬라시옹’이란 그런 복제들로 이루어진 세계를 가리킨다. 그렇게 놓고 보면 이 개념들이 실은 안더스의 ‘팬텀과 매트릭스’를 인터넷 버전으로 번안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원래 자기 사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이에 대해 함구하는 게 철학자들의 못된 버릇인 모양이다. ‘가상’에는 늘 인식론적 문제가 따른다. 현실의 모습과 일치하면 그것은 ‘참’이요, 일치하지 않으면 ‘거짓’이다. ‘현실’이 아직 펄펄하게 살아 있을 때만 해도 조작은 개별적인 사실의 날조를 통해 이루어졌다. 하지만 ‘현실’의 개념 자체가 위험에 빠진 시대에는 사정이 달라진다. 조작은 개별 사실이 아니라 아예 세계 전체를 날조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오늘날의 조작은 ‘시뮬라시옹’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가상현실을 만들어 유지하는 거시적 규모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돌발사태와 저지전략 가령 워터게이트 사건을 보자. 이는 예기치 못한 우연이 하마터면 깨끗한 이미지로 포장된 미국 정치의 추악함을 폭로할 뻔했다. 그러나 시뮬라시옹의 관리자들은 이 돌발사태를 성공적으로 저지했다. 이 놀라운 조작의 비밀은 권력의 본질을 보여주는 필연적 사건을 한갓 우연적인 ‘스캔들’로 만들어 제시한 데에 있다. 더러운 것은 권력 자체가 아니라, 닉슨이라는 한 개인의 도덕성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에게 이 사건은 외려 ‘대통령도 잘못 하면 처벌하는’ 민주주의의 위대한 승리로 기억된다. 얼마나 완벽한가? ‘시뮬라시옹’을 관리하는 자들의 골칫거리는, 미리 입력하지 않은 돌발사태가 가상의 세계로 치고 들어와 현실의 실재성을 주장하는 것. 현실이 자기 주장을 하면 가상의 가상성은 폭로된다. 관리자들은 이를 저지해야 한다. 1편의 시나리오는 이 ‘저지전략’의 포맷을 따른다. 저지되어야 할 ‘돌발사태’는 네오처럼 미리 입력된 프로그램을 거스르는 자들. 이들은 제거되어야 할 ‘버그’다. ‘버그’는 프로그램의 작동을 멈춤으로써 그 속에 몰입해 있던 이를 돌연 바깥의 현실로 끄집어낸다. 버그를 잡아내는 프로그래머처럼 스미스 일당은 네오와 그의 친구들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기계들의 도시로 향하는 네오의 모습은 예수의 모습과 다름없다. 네오는 시온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전쟁이 끝난 뒤 모피어스는 전쟁의 끝을 선포한다. 이는 결국 <매트릭스>가 가진 기독교적 세계관을 보여준다. 결정론과 자유의지 이때만 해도 아직 가상과 현실의 구별이 존재했다. 선택은 기껏해야 빨간 약과 파란 약 중 하나를 고르는 문제였다. 인간을 구하려고 네오는 행복한 가상을 포기하고 현실의 비참함을 받아들인다. 2편에서는 이 선택마저 미리 입력된 프로그램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로써 1편의 소박한 ‘해방’의 서사는 흔들린다. 만약 네오의 선택마저 미리 입력된 것이라면? 그리하여 매트릭스 밖의 현실도 또 하나의 매트릭스라면? 이제 그것은 ‘무엇을 선택하느냐’의 윤리학적 문제가 아니라, ‘도대체 선택이란 걸 할 수 있느냐’의 존재론적 문제가 된다. 여기서 제기되는 것은 ‘결정론과 자유의지의 대립’이라는 고전적인 물음이다. ’라플라스의 악마.’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입자들의 위치와 운동량을 입력할 수 있는 무한한 용량의 두뇌. 이런 슈퍼컴퓨터가 있다면 우주의 진행을 남김없이 예측할 수 있으리라는 것. 그것이 근대 자연과학의 인식이상이었다. 이런 관념에 따르면 우연은 아직 인식되지 않은 필연일 뿐이며, 나의 자유의지는 내가 아직 의식하지 못하는 타인의 결정에 불과하다. 매트릭스의 창조주는 ‘라플라스의 악마’다. 2편에서는 이 악마를 대변하는 목소리들이 강박적으로 “자유의지란 피지배자의 환상에 불과하다”는 대사를 반복한다. 정해진 프로그램에 따라 시온은 이미 다섯번 멸망했고, 네오 역시 여섯번 태어났다. 우주는 유전하고, 만물은 윤회한다. 안더스의 논문 제목은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패러디한 것. 그가 말하는 ‘표상의 세계’를 불교에서는 ‘사바세계’라 부른다. 니체의 ‘영겁회귀’에서도 불교적 기원을 추측할 수 있을 게다. 현각 스님의 해석에 따르면 불교에서는 “새로운 우주가 나타날 때마다 새로운 부처”가 나타나는 바, 석가모니는 “고해의 매트릭스인 이 우주에 나타난 여섯 번째 부처”라고 한다.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부처의 길이 어떤 의미에서는 ‘매트릭스 탈출하기’가 되는 셈이다. 매트릭스 벗기 슈퍼맨이 되어 하늘을 나는 네오를 보는 괴로움 속에서도 2편을 참아줄 수 있었던 것은, 그 안에 철학적 충격을 강화하는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그 충격은 매트릭스를 교란시키는 네오라는 ‘버그’마저도 매트릭스의 특정한 필요에 따라 미리 입력된 존재로 상정된 데에서 비롯된다. 1편의 철학적 패러다임은 가상과 현실의 구별 위에 서 있는 플라톤적 매트릭스다. 하지만 리로디드된 2편의 패러다임은 가상이 아닌 현실 자체도 하나의 매트릭스, 그것도 새로이 생성되어 소멸하기를 영원히 반복하는 니체적 매트릭스다. 합리적으로 관리되는 매트릭스의 필연에서 빠져나오게 해주는 것은 계산되지 않은 우연, 즉 믿음, 소망, 사랑 같은 비합리적 동인에서 비롯된 행위들이다. 2편에서 네오는 예정된 대로 시온을 구하러 가는 대신에 돌연 위험에 빠진 트리니티에게로 간다. 3편에서 네오는 스미스의 냉철한 합리성 앞에서 인류에 대한 “사랑”을 설교하고, 또 그가 구원해줄 인류들은 네오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을 토로한다. 이 믿음은 그야말로 비합리적인 믿음, 즉 ‘근거가 없는 믿음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이라는 중세적 믿음이다. 이 우발성의 개입에, 합리적 결정론의 화신 스미스는 히스테리 반응을 보인다. “내가 올 것을 미리 알았지? 그런데 왜 피하지 않은 거지?” 쿠키를 집어던지며, “내가 집어던질 것을 미리 알았지? 그런데 뭐 하러 구운 거야?” 하지만 스미스를 당혹하게 만든 이 돌발사태도 혹시 미리 예정된 게 아닐까? 결말 부분에 비슷한 질문이 반복된다. 매트릭스의 과학자가 오라클에게 “이렇게 될 줄 미리 알았지?”라고 묻자, 오라클은 가볍게 부정을 하며 입가에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띄운다. 이로써 대답은 슬쩍 유예된다. 종교와 철학 3편의 분위기는 철저하게 기독교적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전형적인 십자가 책형의 모티브를 따르고 있다. 네오는 예수 그리스도가 된다. 스미스는 신에 의해 창조되었으나 그에게 반기를 든 사탄의 역할을 한다. 네오와 스미스가 3편에 걸쳐 벌이는 결투는 마치 광야에서 벌어진 사탄과 예수의 세 차례의 대결을 연상시킨다. 몸에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죽음을 극복한 예수처럼, 네오는 몸 속에 스미스를 받아들임으로써 스미스를 사라지게 한다. 순간 묵시록에서 예언한 아마겟돈의 결전은 멈추고, 네오의 사도 요한이 군중 앞에서 인류가 구원받았음을 외친다. 기쁜 소리, 복음이다. 할렐루야, 성령 충만한 은혜로운 시간이다. 성가족의 성스런 대화(웅덩이에 쓰러진 네오의 얼굴에서 언뜻 오라클을 본 것 같다. 제대로 본 것이라면 이는 수육(受肉)의 드라마, 즉 인류를 구원하러 인간의 몸이 되어 내려온 신의 얘기가 된다). 매트릭스의 창조주에게 오라클이 묻는다. “이제 저들을 어떻게 할 거죠?” “이제 저들에게도 자유를 줘야지.” 유일신교의 승리다. 이집트 당국은 다시 이 영화를 허용하라. 하지만 이렇게 끝낼 수는 없는 일. 창조주는 “이 평화가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 것 같냐”고 묻고, 거기에 오라클은 “가능한 한 오래”라고 대답한다. 이로써 이 평화가 궁극적인 것은 아님이 슬쩍 암시된다. 기독교사관의 직선은 다시 불교사관의 원환과 합류한다. 포스트모던 이 절충주의가 이른바 ‘포스트모던’의 일반적 특징이다. 영화 <매트릭스>는 온갖 철학과 온갖 종교에서 따온 인용들로 가득 차 있다. 이를 ‘혼성모방’이라고 하는데, ‘포스트모던’ 계열의 작품에 종종 사용되는 기법이다. 나아가 현대의 최첨단 기술이 신화나 신학 같은 고대적 모티브과 모순적 결합을 이룬다든지, 가장 대중적인 오락에 매우 난해한 지적 유희를 도입하여 대중과 엘리트를 가르는 구별을 내파(implosion)하는 것도 포스트모던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매트릭스 속의 ‘키치’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키치’는 포스트모던에 본질적으로 속한다. 끝없이 자기 복제를 하는 스미스는 자본주의의 이미지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유일물의 제작이 아니라 동일한 ‘코드’에 따라 수천, 수만개의 동일자를 복제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보드리야르는 현대사회를 동일자를 무한복제하는 암세포에 비유한 바 있다. 상품만이 아니라 자본주의는 그것을 생산하는 인간들마저도 획일화한다. 현대사회는 인간들을 다양하게 획일적으로 만들고, 이 매트릭스 안의 인간 시뮬라크르들은 남이 정해준 인생의 목표에 따라 남의 삶을 살아가며 자본의 확대재생산을 위한 역사적 사명을 다하다가 죽는다. <매트릭스>는 이런 현대사회의 영화적 반영이다. 아이러니와 몽타주 벗어날 길은 없을까? 포스트모던은 계몽의 서사와 해방의 수사를 비웃는다. 영화 속에서도 매트릭스를 벗어나려는 네오와 그의 동료들의 노력은 스미스나 메로빈지언에게 비웃음만 사게 된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게다가 대중들은, 적어도 영화를 보러 온 순간만큼은, 아직도 구원의 복음과 그것의 세속적인 형태인 해방의 서사를 보고 싶어한다. 3편의 시나리오가 진부한 기독교적 대속의 서사로 귀결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리라. 이런 점에서 포스트모던은 모던의 엘리트주의와 구별된다. 해방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해방의 수사는 벌써 낡은 것이 되었다. 이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가끔 ‘매트릭스’ 안에 갇혀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른바 ‘전투적 글쓰기’를 한다고 하나, 어쩌면 그 전투도 미리 체제의 프로그머에 의해 입력이 되어, 대중에게 값싼 카타르시스를 제공해줌으로써 이 현실을 견딜 수 있게 하는 역할만 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이제 헛된 저항을 포기해야 하는 걸까? 해방의 뜨거운 열정과 순응의 차가운 지혜를 종합할 수는 없다. 영화의 결말처럼 다만 절충이 있을 뿐이다. 절충을 피하는 방법도 있다. 가령 네오가 스미스가 되고, 스미스가 네오가 되는 것처럼 ‘아이러니’를 실천하는 것이다. 이는 현대판 낭만주의자들의 방법이다. 아니면, 두개의 생각을 부싯돌처럼 충돌시켜 거기서 얻어지는 불꽃을 보는 것이다. 이것은 삶의 몽타주 예술이리라. 구원은 구세주에 대한 믿음에 있는 게 아니다. 스스로 구세주가 되는 데에 있는 것도 아니다. 영화 속의 대사처럼 구원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너 자신뿐이다. 하긴, 촌스런 구원의 수사학을 포기하고도 여전히 구원을 얘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뿐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