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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9404)

다다다, 탐!

힌두 경전 <우파니샤드>에는 ‘벼락신의 언어’를 인간이 어떻게 해석하고 알아들어야 하는가에 관한 한 대목이 나온다. 벼락신 프라자파티는 인간의 언어로 말하지 않고 벼락의 언어로 말한다. 벼락의 언어는 벼락치는 소리-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딱딱딱’이고 힌두 경전 표현으로는 ‘다’ 소리가 세번 연속되는 ‘다다다’이다. 다다다? 이 소리로 벼락신은 무엇을 말하는가? 경전에 따르면, 첫 번째 ‘다’ 소리는 ‘다미아타’(Damyata)의 ‘다’이다. ‘다미아타’는 힌두어로 “너를 다스리라”는 의미이다. 두 번째 ‘다’는 ‘다타’(Data)의 ‘다’이고 “주어라”를 의미한다. 세 번째 ‘다’는 ‘다야디암’(Dayadhyam)의 첫 소리이며 의미는 “자비로워야 한다”이다. 이 해석학은 퍽 근사하다. 당신의 책상머리에, 바람벽에, 거실에, ‘다다다!’라고 써붙일 만하지 않은가? 그러나, 그러지 말기 바란다. 21세기를 살기로 작정한 사람에게 벼락신의 가르침은 “죽어라”(Drop dead!)라는 소리나 진배없다. 우리가 우리 욕망을 다스릴 수 없고 다스려서는 안 되는 시대에 “너를 다스리라”니? 세상의 돈이란 돈은 모조리 갈퀴로 긁어모아도 시원찮을 마당에 “주어라”고? 주긴 뭘 줘? 남 줄 것이 어디 있간디? “자비로워라”도 바람에 말똥 굴러가는 소리다. ‘자비’로웠다가는 기업 망하고 나라 망하고 나도 망한다. 살기 위해 우리는 벼락신의 세 가지 가르침을 완벽하게 거꾸로 뒤집어야 한다. 1) 너를 다스리지 말라. 탐욕은 좋은 것이다. 탐욕의 주체라는 점에서만 너는 인간이다. 2) 헌 치솔, 구멍난 냄비, 강아지똥말고는 아무것도 남에게 주지 말라. 돈은 보이는 대로 움켜쥐고 훔칠 수 있을 때는 훔치라. 노예이고 싶은가? 돈만이 너를 부유케 하고 자유롭게 한다. 3) 자비의 염에 끌리는 자는 무자비하게 망한다. 자비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그것은 네가 잘라내야 하는 무겁고 추악한 혹부리이다. 그 혹부리를 달고 경쟁시대의 바늘구멍을 통과할 자는 없다. 모든 경우에 ‘나 먼저’와 ‘나부터’를 내세우라. 이 뒤집어진 벼락신의 가르침, 거기서 우리는 정확히 이 기술·금융 자본주의 시대의 ‘시대정신’을 만난다. 벼락신의 언어를 풀어내는 현대적 번역어는 ‘다다다’가 아니라 ‘탐탐탐’이다. 첫 번째 ‘탐’ 소리는 “탐욕은 다스리지 말라”이고 두 번째 ‘탐’은 “탐(貪)하라”이며 세 번째 ‘탐’은 “탐욕은 좋은 것이다”이다. 아니, ‘다다다’를 그대로 두고 새로운 해석학을 시도할 수도 있다. 첫 번째 ‘다’는 “다스리지 말라”, 두 번째 ‘다’는 “다부지게 탐하라”, 세 번째 ‘다’는 “다 탐하라, 사정없이”이다. 어느 쪽을 선택하는가는 당신의 자유다. ‘다다다’와 ‘탐탐탐’ 사이에 빛나는 선택의 자유가 있다. 선택? 그럴 필요도 없다. 두 가지 명령을 다 움켜잡는 것이 다다다(多多多)의 시대정신에 더 잘 맞아떨어진다. “다다다, 탐! 탐탐, 다다다, 탐!” 이 지혜의 언어는 속도감, 비의성(秘義性), 간결성의 조건들을 두루 갖추고 있어 영어로 옮기고 ‘에로이카’의 가락을 붙이면 그대로 우리 시대의 ‘만트라’(mantra)가 된다. “Da Da Da, Tam! Tam Tam, Da Da Da, Tam!” ‘다다다 탐’의 시대에 살아남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리지 않는 것이다. ‘느림’은 이 시대에 당신을 죽음으로 이끌 병 가운데서도 가장 확실한 죽음의 병이다. 당신 주변의 사람들을 빠른 자와 느린 자로 선명히 나누고 어떤 경우에도 느린 자의 편에 줄서지 말라. 모든 느린 것들에 대해 전면전을 선포하라. 3초 이상 당신을 기다리게 하는 것은 틀림없이 당신의 적이다. 기다리지 말라! 기다리는 자는 죽는다. 3초 안에 문이 닫히지 않는 엘리베이터, 3초 이상 기다리게 하는 PC프로그램, 당신을 3초 이상 기다리게 하는 애인, 3초 이상 당신의 앞길을 가로막는 초보운전자, 당신을 지루하게 하는 책, 이들은 당신을 죽음으로 이끄는 악마들이다. 당신은 이들을 저주하고 구둣발로 걷어차고 내던지고 갈아치워야 한다. 당신 자신이 느림의 징후를 보일 때는 지체없이 ‘업그레이드’(upgrade)하라!그런데 우리를 참으로 속터지게 하는 것들이 있다. 아이들이 자라는 데는 왜 시간이 걸리고 과일은 왜 천천히 익고 씨앗들은 왜 겨울 눈더미와 지층 사이에서 서서히 싹틔울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일까? 성장(growth)은 어째서 업그레이딩과 다른가? 머리(생각)의 속도는 어째서 눈의 속도보다 느린가? 그러므로 기도하고 기다릴 일이다. 21세기에 이 모든 느린 것들은 제발 좀 없어져라. 기다리라고? 기다리면 죽는데? 도정일/ 경희대 영어학부 교수jidoh@khu.ac.kr

2001 우수 비디오숍 콘테스트 [3]

<시드와 낸시>? 당연히 있죠! 우수 비디오숍 -춘천시 후평동 영스타 비디오, 이정란씨 영스타의 ‘하루’. 오전 9:00 문 열기 30분 전이다. 지난밤에 본 테이프 제자리에 꽂아놓고 매장청소 시작. 어젯밤부터 쌓인 눈 때문에 문이 잘 열리지 않던데, 내친 김에 매장 앞도 비질 한번. 오전 11:00 밤새워 쓴 거라며 서진원님께서 <존 말코비치 되기>에 대한 감상평을 제출해주셨다. 현재 한림대 사학과 영화동아리 ‘무비 매니아’를 운영하고 있어서 그런지 시각이 꽤 날카롭다. 평이랑 시놉이랑 카메오 이야기까지 형식도 good! 오후 1:00 사우동 사시는 김정욱님 요즘 청소년영화제 때문에 많이 말랐다. 근데 빌려갔던 <충열도>를 내놓으며 하는 말이 “테이프가 이상해요. 중간부 화질이….” 아니, 이게 웬 청천벽력인가. <충열도> 서치하며 꺼이꺼이 운다. 오후 3:00 신규 고객님 등장. “여기 <시드와 낸시> 있나요?” 무슨 그런 당연한 말씀을. 재빨리 원하는 테이프를 찾아드린 뒤, 은근슬쩍 마니아 코너로 유도. 테이프 자랑과 함께 몇 마디 대화로 취향을 가늠해 본다. 오후 7:00 ‘주성치 다시 보기’ 무료 이벤트를 보고 신규 고객이 의아해 한다. “아, 요즘 힘든데 웃고 살자고요. 주성치가 꽤 웃기는 친구거든요. 보고 재미있으시면 취미 붙여보세요.” 오후 9:00 <글래디에이터>를 3일이나 지난 뒤 가져온 손님, 배보다 배꼽이 큰 연체료 때문에 다짜고짜 깎아달라고 조른다. 하지만 내 사전에 ‘깎아주기’란 없지. 왜냐하면 우리집 비디오는 콩나물이 아니거덩. 웃는 얼굴로 연체료 받아내기가 내 특기 중 특기. 문 닫기 5분 전 같은 동네 소설가 이외수님댁 아가씨들, “선생님, SF 하나 골라주시고요, 저희 볼 <로망스> 주세요”. 벌써 하루가 지났다. 내일은 <마지막 전투>가 출시되는 날인데, 제때 나와줄는지…. 영스타의 하루는 막을 내렸지만, 이정란(31)씨의 하루는 아직 끝이 안 났다. 10평이 조금 넘는 자그마한 매장에 거의 매주 출시되는 신작 비디오들을 받으려면 매달 라면상자로 한 상자 이상씩 추려내야 한다. 이번달에도 들여놓을 비디오 목록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어 틈날 때마다 붙어서서 골라내고 있는 중이다. 들여놓은 지 한달 이상 되면 대체로 수명이 판가름나기에 지난달 대여율을 참고로 블랙리스트를 작성한다. 따지고보면 아깝지 않은 비디오가 어디 있을까마는 좁은 매장을 가진 주인의 설움으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비디오 몇장 들어내다보면 어느새 시간은 새벽을 넘어 아침으로 가고 있다. 아무리 비디오 가게가 문을 늦게 연다지만 아침 손님들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는 법. 대충 정리하고 신작 비디오 가운데 찍어둔 놈을 골라 집으로 향한다. 집에 가면 박사 학위 심사중인 남편이 인터넷으로 <카우보이 비밥>을 보느라 정신이 없겠지. 한림대 정문에서 한 블록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한 ‘영스타 비디오’(033-251-5735)에는 영화를 무지 좋아하는 한림대 캠퍼스 커플 출신의 부부가 살고 있다. 86년부터 비디오 가게가 자리한 터라고 하니 땅에도 체질이 있나보다. 몇 차례 터의 주인이 바뀐 끝에 96년 3월 지금의 이정란씨가 매장을 인수했다. “인수하고 나서 보니까 매장에 액션이랑 에로비디오만 4천편 정도 있더라구요. 다 처분하고 직접 비디오를 구해다 매장을 새로 꾸미기 시작했어요. 아직 ‘진행중’이에요. 다 갖춰지고 나면 아마 춘천에 작은 시네마테크를 차릴 분량이 될 거예요.” 현재 그녀의 매장에는 6천편 정도의 비디오가 소장되어 있고, 그중 희귀 비디오는 3천여편에 이른다. 이렇게 갖추기까지 그녀가 들인 노력은 가히 눈물겹다. 청계천은 물론이고 폐업 소식이 들리는 곳은 어디라도 달려가서 탐나는 물건을 챙겼다. 그런 그녀의 노력을 알아주는 사람은 다름 아닌 고객들. 특히 가까이 한림대 학생들은 입·제대 소식을 일일이 알리러 올 만큼 그녀를 누님처럼 믿고 따른다. 그중에서도 영화동아리 ‘영상틀’과는 영화제 운영을 함께 상의할 만큼 돈독한 연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녀는 지난해 대여섯개의 숍과 함께 ‘비디오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결성하고 예닐곱개의 회원숍들과 영업사원의 횡포에 대응하고 나아가 그들과 조화를 이루며 공생할 수 있도록 하는 활동을 펼쳐왔다. 앞으로도 불합리한 시장구조에 대해 끊임없이 안티를 거는 역할을 해나갈 작정이란다. 영스타만의 독특한 이벤트 세 가지. 하나는 ‘오늘’이라는 이름을 가진 무료대여 이벤트로 주성치, 히치콕, 공포영화 시리즈 등을 하루 동안 공짜로 빌려줘 고객들의 편식을 막고, 잊혀져가는 고전들을 새로이 발견하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다. 두 번째는 ‘아트 코너 운영’으로 가게 한편에 오목하게 들어간 부분을 활용해 3천여편의 희귀 비디오를 전시하고 월별로 감독을 선정해 고객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세 번째는 상품권을 발행해 영상동아리 등에서 주최하는 영화제를 관람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사실 맘같아서는 같은 구역 숍들이 모여 ‘중고 비디오 바자회’ 같은 대규모 이벤트를 개최하는 게 그녀의 바람이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고객들에게 “영화를 하나의 틀로 규정짓는 객관적 잣대 따위는 잊어버리고, 자신만의 ‘좋은 영화’를 찾는 주체적 영화보기를 시작”하기를 당부한다.

스튜디오 지브리 사업본부장 스즈키 도시오

‘지브리’는 단순한 브랜드가 아니다. 일종의 ‘신화’다. ‘아니메 왕국’의 신화를 일궈낸 스튜디오 지브리의 스즈키 도시오(52) 본부장이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한국 개봉을 앞두고 지난 12월23일 센트럴시네마에서 열린 미야자키 하야오 영화제를 찾았다. 1985년 미야자키 하야오, 다카하다 이사오 감독 등과 함께 스튜디오 지브리를 세웠고 첫 작품 <천공의 섬 라퓨타> 이후 <반딧불의 묘> <붉은 돼지> 등 대부분의 ‘지브리표’ 애니메이션의 프로듀서를 맡은 그는 <귀를 기울이면> <원령공주> 등의 상영이 끝나자 ‘열혈’ 관객 150명과 마주했다. <원령공주>를 디즈니에서 배급한 것을 놓고 한 관객이 “디즈니와의 합작계획 같은 것은 없냐”고 질문하자 그는 “한 캐릭터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 사람이 전담하는 디즈니 시스템과 장면별로 여러 캐릭터를 여러 애니메이터가 분담하는 지브리 시스템은 엄연히 다르고, 무엇보다 생활양식이 달라 공동 작업은 불가능하다”고 쐐기를 박았다. 관객의 쏟아지는 질문을 일일이 되새김질하는 차분함과 꼼꼼함을 보인 그였지만 이내 달아오른 극장안 열기에 적잖은 흥분을 맛본 듯한 눈치였다. 미야자키와 다카하다, 지브리의 ‘투톱’을 만나기 전까지 사실 스즈키 본부장은 “꿈도, 욕심도 없었다.” 게이오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글쓰기 빼곤 잘하는 게 없어” 도쿠마 서점에 입사한 그는 78년 “순전히 등 떠밀려” 애니메이션 월간잡지 <아니메쥬>의 편집장이 됐고, 창간호 특집기사로 미야자키와 다카하다를 다뤘다. “그때 미야자키는 <루팡3세 카리오스트로의 성>을 감독하고 있었고, 명작극장 시리즈를 끝낸 다카하다는 <꼬마 치에>라는 작품을 만들고 있었다. 처음 봤는데 둘 다 별종이더라.” 스즈키 본부장은 사진촬영을 거부하는 미야자키 때문에 애먹었다며, 결국 그의 뒷모습 촬영으로 만족해야 했던 그때의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취재를 계기로 두 감독의 전작들을 훑어보면서 그들의 독특한 세계에 빠져든” 그는 이후 이들의 ‘든든한 응원자’를 자임했다. 그가 도쿠마 서점에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제작하자고 제안한 건 82년. “남이 만든 작품 갖고서 이래저래 글쓴다는 것이 차츰 지겨워지던” 그때, 애니메이션 제작에 새로운 인생 궤도를 얹었다. 당시 “원작없는 작품을 만드는 건 모험”이라며 반대했던 도쿠마 사장도 82년부터 <아니메쥬>에 연재하기 시작한 만화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자 1년 뒤 투자를 결정했다. 일본에서 90만명이라는 관객 동원을 기록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가 아니었다면 재패니메이션의 ‘진지’ 구축은 불가능했다. “좋은 작품을 ‘제대로’ 팔지 못하면 헛일.” 15년 전 저가의 TV 시리즈가 판을 치던 때. 극장판 애니메이션을 만들겠다는 배포는 무모한 것처럼 보였다. “다들 그렇게 생각했지만 홍보나 마케팅 부분만 해결하면 흥행이 가능하다고 판단했지요.” 두 감독의 실력을 전적으로 신뢰한 그는 당시 광고회사를 동원하고, 민간 방송을 끌어들이는 등 적극적인 마케팅 전략을 내세운 끝에 연달아 디즈니 애니메이션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다. 지금도 직접 돌아다니며 1차 관객인 극장주들의 반응을 일일이 확인하는 것을 빼놓지 않는다는 그는 현재 2001년 7월 개봉 예정인 <센토치히로의 행방불명>을 제작중이다. 10살 먹은 소녀가 돼지가 돼버린 부모들을 온전하게 되돌리기 위해 모험을 벌인다는 이야기. 또 내년 10월이면 도쿄의 미타카시라는 곳에 미야자키가 직접 설계한 미술관이 들어서는 것도 그를 기대에 부풀게 만드는 일 중 하나다. “지브리의 모든 것이 들어 있는” 그곳에는 그의 귀띔대로라면 곳곳에서 토토로가 얼굴을 내민단다. 그러면서도 그는, 새로운 경향을 만들어가기보다 현실에 안주한 측면이 없지 않았다고 지브리의 신화에 대한 냉철한 평가를 잊지않았다.

택시 드라이버, 충무로로 가다

쿠엔틴 타란티노를 좋아하고, 20대 전반을 택시 드라이버, 족발 배달원, 막노동꾼, 여관 시다, 핫도그장수를 포함한 각종 직업에 몸담고 있다가 목사가 되려고 삼수 끝에 들어간 대학을 9년 만에 졸업해선 영화의 ‘영’자도 모른 채 영화판에 뛰어든 남자가 있다. <나도 아내가…>의 늦깎이 조감독 박성범(33)이 그 주인공. 취재 요청에 얼굴이 벌게지도록 쑥스럼을 타던 그가 조심스레 들려주는 인생 얘기 앞에서 그만 입이 떡 벌어지고 만다. 주로 남들이 안 하는 일을 하고 싶어서 택했다는 그의 이력이란 도대체가 편한 일, 고상한 일만 찾는 우리에겐 그저 ‘딴나라’ 일처럼 느껴지기에 충분한 것들이었다. 그중 택시 드라이버는 얼핏 듣기에 낭만적이기까지 했다. 영화판에 들어온 사연 역시 드라마틱하긴 매한가지. 어렵사리 들어간 대학에서 착실히 목사 수업을 받고 있겠거니 생각하던 가족들의 바람과는 달리 그는 금세 대학생활에 흥미를 잃어버렸다. 그나마 정을 붙인 연극동아리에서 연출을 맡아 의욕적인 활동을 펴기도 하나 그것도 잠시뿐, 얼마 못 가 학교 밖을 떠돌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생활전선에 몸을 담았고, 스무개가 넘는 일자리를 전전하며 나름의 인생 공부에 심취한다. 군대를 다녀오고 학교공부에 전혀 진전이 없는 그를 식구들은 타박하기도 했으나 이미 그의 마음은 애초의 목표와는 멀어진 상태. 9년간의 지리한 대학생활을 끝내고 사회에 나오자 막막함이 앞섰다.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 그를 반길 데라고는 아무 데도 없었다. “왜 그때 영화가 떠올랐는진 아직까지 미스터리예요. 그냥 영화를 해야겠다는 생각만 들었어요.” 주위의 권유로 시나리오 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씨네21>에서 주최하는 시나리오 공모전 소식을 듣는다. 남은 기간은 한달 남짓, 입문서만 달랑 들고 써내려간 시나리오는 <와일드>라는 제목만큼이나 거친 모습으로 잡지사의 문을 두드리고, 다른 응모 작품들과 함께 제작사에 넘겨져 마침 우노필름 이사로 있던 차승재의 손에 이르게 된다. 우연이었을까 아님 의도였을까. 그 당시 차승재는 박성범의 시나리오를 긍정적으로 검토했고 본선작으로 올릴 것을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만 서랍 속에 넣어둔 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만다. 한편 잡지사로부터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한 박성범은 실망감을 곱씹으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갑자기 걸려온 전화 한통. 차승재였다. 실수로 그의 시나리오가 누락된 점에 대해 사과하면서 같이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의를 해 온 것이다.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사무실로 찾아간 날, 차승재는 장문일을 그에게 소개했고, 곧 둘은 <행복한 장의사>에서 감독과 연출부로 만나게 된다. 연출부일만 한 건 아니다. 영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관방 남자’로 등장하는 그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나도 아내가…>로 조감독이 된다. 생각해보면 조감독이라는 자리만큼 사람 시중 많이 드는 자리가 없다. 늘 배우들 스케줄 관리에 바쁘고 스탭들과 감독의 중간에 서서 모진 소리도 들어야 하지만 분명한 건 감독을 보위하고 다잡아주는 건 자신이 아니면 안 된다는 사실. 감독이 요구하는 게 때로 비합리적일지라도 일단 들어주고 보는 건 당시엔 이해가 안 되는 방식이라 하더라도 결국은 그가 옳은 판단을 하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현상된 필름을 보며 “결국은 그가 주장했던 방식이 맞는 거였구나”라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는 그, 그런 작은 믿음들이 촬영장에서 자신과 주위를 지탱하게 하는 힘이 되었다. 이제는 자신의 영화를 찍고 싶단다. 시나리오는 말할 것도 없이 자신의 첫 작품이었던 <와일드>가 될 것이다. 이제 막 자신이 원하는 분야에서 무사히 첫발을 뗀 소감을 묻는 말에 그는 일부러 엉뚱한 대답을 한다. “이제 나도 애인이 있었으면 좋겠다.” 글 심지현/ 객원기자simssisi@dreamx.net·사진 손홍주기자lightson@hani.co.kr 박성범 프로필 1968년생 서울신학대 신학과 90학번 99년 <행복한 장의사> 연출부 및 배우 2000년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조감독 2001년 단편영화 제작 예정, 제목 미정

천국보다 아름다운 세계, 그 미지와의 조우

특집/ 설 비디오 가이드 해마다 최소한 3∼4일씩 놀 수 있는 설 연휴는 작심하고 비디오 가게를 섭렵하기 좋은 시기이다. 올해는 한번 애니메이션으로 설 연휴를 즐기면 어떨까? 애니메이션 비디오라고 하면 흔히 디즈니와 일본 애니메이션을 떠올리는데 살펴보면 그외에도 볼 만한 작품들이 많다. 그래서 이번에는 평소 극장에서 접하기 힘든 단편이나 유럽 애니메이션 비디오들을 골랐다. 모두 국내에 출시된 작품들. 그동안 지면으로만 소개된 단편들이 궁금했던 팬들이나,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세계를 접하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이번 기회에 한번 아래 작품에 도전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장인의 손길, 작가의 숨결 <위대한 강> (Le Fleuve aux Grandes Euex) (2000년 출시, 24분, 라바필름(02-765-8312)) 현존하는 애니메이션계의 거장 중 한명인 캐나다 프레데릭 벡의 93년 작품. 캐나다 퀘벡 지방을 흐르는 센트로렌스 강을 중심으로 그곳의 역사와 자연을 치열한 작가정신으로 그려냈다. 이미 <크랙>(1981)과 <나무를 심는 사람>(1987)으로 명성을 얻은 이 노 작가는 이전 작품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서도 혼자 5년여 동안 수만장의 그림을 한장 한장 손으로 제작하는 정성을 보였다. 반투명 셀에 파스텔이나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는 그의 작품 스타일은 부드러우면서도 섬세한 필치가 매력이다. 하지만 비슷한 화풍의 레이먼드 브릭스가 비교적 온화한 이야기를 하는 데 반해(물론 <바람이 불 때>는 예외), 프레데릭 벡은 담담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환경보호와 반핵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24분의 짧은 시간 속에 수백년 세월을 담아낸 이야기 솜씨도 탁월하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강의 모습과 동물, 역사적 사건들은 현장을 수십 차례의 항공촬영과 자료조사를 통해 꼼꼼하게 재현한 것들이다. 깊은 밤 느긋한 마음으로 따스한 차 한잔과 함께 본다면 그동안 각종 대중매체의 현란한 시각적 자극에 찌들었던 심성을 해독할 수 있는 훈풍 같은 작품이다. - 한마디 더: 프레데릭 벡의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은 음악을 맡은 노르만 로제. 퀘벡 지방의 민속음악을 적절히 사용하는 그의 음악은 깊이와 활기를 동시에 갖추고 있다. <위대한 강>의 영어판 성우는 배우 도널드 서덜런드가 맡았다. <우리 할아버지>(Grandpa) (99년 출시, 25분, 인피니스(02-2263-3233)) 존 버닝햄의 동명 그림책을 소재로 제작된 작품. 레이먼드 브릭스 원작의 <스노우맨> <파더 크리스마스>와 마찬가지로 어린이를 위한 동의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사실 메마른 도시에 살고 있는 성인을 위한 작품이다. 89년 감독 다이앤 잭슨, 음악 하워드 블레이크 등 <스노우맨>의 제작진이 손을 잡고 유니세프의 지원하에 제작됐다. 종이와 색연필의 질감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영상이나 자유자재로 펼쳐지는 환상적인 이야기 세계는 <스노우맨>과 닮았다. 인생의 황혼기를 맞은 할아버지가 손녀의 방문을 맞아 잔잔하게 옛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두 ‘조손’은 환상적인 동화 속 세계를 여행한다. 시공을 넘나들며 자유롭게 펼쳐지는 이야기는 특별한 줄거리를 지니고 있지 않지만, 하나하나 시적 정감이 넘친다. 급하지 않은 어조로 잔잔하게 이야기를 펼쳐나가다 마지막 인생의 의미를 곱씹게 하는 결말이 찡하다. 이 작품을 보고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다면 정말 심각하다. - 한마디 더: <스노우맨> <산타 할아버지의 휴가> 등을 감독한 다이앤 잭슨의 매력은 애니메이션의 장점을 한껏 살린 현란한 카메라 워킹에 있다. 하지만 더 좋은 점은 그러한 테크닉이 단순히 시각적 잔재미를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야기에 훈훈한 습기와 여유를 준다는 점이다. <스노우맨>(Snowman) (99년 출시, 25분, 인피니스(02-2263-3233)) 해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어느 채널이건 꼭 방송 전파를 타는 이 작품도 비디오숍에 가면 만날 수 있다. 굳이 성탄절이 아니더라도 겨울철에 보기 좋은 작품이다.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영국의 동화작가 레이먼드 브릭스의 동명 원작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했는데 단편으로는 드물게 200만달러의 제작비가 든 ‘대작’이다. <스노우맨>의 탁월함은 음악과 영상의 절묘한 조화에서 찾을 수 있다. 화려한 원색을 배제하고 은은한 파스텔톤을 살린 그림은 만들어진 지 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신선하고 매력적이다. 시적 운율마저 느끼게 하는 눈사람의 움직임은 디즈니 작품에서도 볼 수 없는 <스노우맨>만의 매력이다. 그런 리듬감 넘친 움직임은 후반부 북극의 눈사람들이 단체로 춤을 추는 장면에서 돋보인다. 소년과 눈사람이 북극으로 날아가는 장면 역시 애니메이션 사상 손꼽는 명장면 중 하나. 미야자키 하야오가 공중 비행신의 대가라고 하지만, 이 작품의 감독 다이앤 잭슨 역시 하늘을 나는 자유로움을 그리는 데는 일가견이 있다(<산타 할아버지의 휴가>에서도 느낄 수 있다). - 한마디 더: <스노우맨>의 인기 요인 중 하나는 하워드 블레이크가 만든 음악. 최근 국내에 오리지널사운드트랙이 출시됐다. 주제곡 <워킹 인 디 에어>는 원작에서는 피터 오리라는 보이 소프라노의 청아한 음색으로 들을 수 있는데 조지 윈스턴의 앨범 <포레스트>에서도 이 곡을 피아노 연주로 들을 수 있다. <산타 할아버지의 휴가>(Father Christmas) (99년 출시, 26분, 인피니스(02-2263-3233)) <스노우맨> <바람이 불 때>와 함께 레이먼드 브릭스의 애니메이션 3부작으로 꼽히는 작품. 동화와 영화 속에서 스트레오타입화된 산타클로스를 새로운 시각에서 그린 유쾌한 소품. ‘산타 할아버지는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뭐 할까’라는 자연스럽고 천진스런 의문에서 출발한 이 작품은 그림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산타 할아버지의 묘사가 돋보인다. 크리스마스가 끝난 뒤 유럽의 나라를 돌아다니며 여행을 하고, 때로는 풀장에서 느긋하게 선탠을 하는 산타의 모습은 “귀엽다”는 표현이 알맞을 정도로 돋보인다. 특히 산타 할아버지가 라스베이거스에서 도박도 즐기고, 여자 무용수들의 화려한 레뷔쇼를 보면서 좋아하는 장면은 화장실도 가지 않는 것처럼 묘사되는 동화 속 모습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인간적인 산타’에 대한 묘사는 크리스마스 때 선물을 배달하면서 방풍용 고글을 쓰는 모습이라든가 굴뚝을 들어갈 때 쩔쩔매는 묘사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중에서도 선물을 나눠주다가 사슴들과 함께 지붕에서 샌드위치와 차를 마시면서 잠시 휴식을 갖는 장면은 원작자와 감독의 삶에 대한 따스한 묘사 때문에 볼 때마다 가슴이 따스해진다. <피리부는 목동> (2000년 출시, 19분, 라바필름(02-765-8312)) 대학의 애니메이션 영화제나 시네마테크에서 단골 상영작으로 인기가 높았던 작품. 중국 수묵 애니메이션의 걸작으로 불리는 작품으로 상하이 스튜디오의 테웨이 감독이 63년 제작한 19분21초짜리 작품. <피리부는 목동>이 가진 큰 의미는 서구적인 회화 기준에서 벗어나 동양화의 섬세한 ‘농담’과 여백의 미를 애니메이션에 재현했다는 데 있다. 발표 당시 서구 애니메이션이나 일본 애니메이션에서는 볼 수 없는 시적인 영상과 우아한 캐릭터의 움직임이 많은 평론가로부터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는 극찬을 받았다. 애니메이션 하면 일본이나 미국, 또는 유럽의 작품만을 생각하는 이들에게 “아니 그곳에도 애니메이션이 있었나?”라고 신선한 충격을 줄 수 있는 작품이다. 만들어진 지 40년이 다 됐지만 지금 봐도 늘 잔잔한 감동을 느낄 수 있다. 내용은 무척 단순하다. 아니 특별히 줄거리랄 것도 없다. 소치는 목동의 한나절을 그리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 작품을 추천하는 것은 재미있는 사건과 줄거리를 능가하는 탁월한 ‘볼거리’ 때문이다. 초반부에 소가 강물을 건너는 장면은 테웨이 감독의 연출감각을 엿볼 수 있는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다. 기존 서구식 애니메이션 표현과는 확실하게 다른 영상은 서구 애니메이션 작가들에게도 큰 충격을 주어 70년대 중국 애니메이션 붐을 불게 했다. 아이들용? 철없는 어른용! <만화의 세계1, 2> <희망으로 그리는 세계> <우리가 다시 그려요> <배고픈 애벌레> <피브 앤 퍼그> <만화의 세계1, 2> (99년 출시, 1편: 48분 2편: 90분, KJ엔터테인먼트(02-548-6191)) 애니메이션의 넓은 세계를 접하고 싶다고 해도 국내에서 미국이나 일본이 아닌 나라의 단편을 구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찾아다니다 보면 이런 비디오도 만나게 된다. <만화의 세계>는 캐나다국립영화제작소(NFBC: National Film Board of Canada)에서 활동하는 애니메이션 작가들의 대표작 모음집이다. 이슈 파텔, 캐롤라인 리프, 코 회드만, 자크 드로앵, 조지 웅가, 게일 토마스 등 NFBC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들의 작품을 접할 수 있다. NFBC의 작품들은 상대적으로 꽤 많은 작품이 국내에 소개됐는데, 작가들의 지명도만 따진다면 단연 이 비디오가 최고이다. 현란한 색채의 향연인 이슈 파텔의 <파라다이스>, 페인트 온 그래스로 제작한 캐롤라인 리프의 <거리의 소년>, 컷아웃 기법으로 만든 코 회드만의 <찰스와 프랑수아>, 핀 스크린 기법을 이용한 자크 드로앵의 <밤의 요정> 등 셀애니메이션이 아닌 애니메이션의 다양한 기법을 접할 수 있다. 1편은 각 작가들의 제작과정을 담은 메이킹 필름, 2편은 작품을 담고 있다. ‘애니에는 뭔가 색다른 것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꼭 보는 것이 좋다. - 한마디 더: 어쩌다가 이 단편 걸작집이 제목이 ‘만화의 세계’가 됐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희망으로 그리는 세계> (99년 출시, 80분, KJ엔터테인먼트(02-548-6191)) 유니세프가 어린이의 권리 선포를 기념해 NFBC와 공동으로 제작한 작품집. 피에르 M. 트뤼도, 미셸 쿠르노이에, 클로드 크롤디에, 유진 페도렌코 등이 참여했다. 전체적으로 10분 내외의 소품들로 구성됐다. 어린이들의 눈높이에 맞췄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만화의 세계>보다 부담없이 볼 수 있다. ‘코코의 산수’, ‘사랑의 띠’, ‘TV와 춤을’, ‘후나스와 리사’, ‘어린 예술가’ 등 모두 13편의 단편이 2개의 비디오에 수록돼 있다. 이중 부엌의 각종 기구를 통해 음악적 영감을 얻는 한 소녀를 그린 ‘어린 예술가’가 교육방송 등을 통해 비교적 많이 알려졌다. 이 단편집에서 작가들이 말하는 것은 어린이들은 결코 미성숙된 인격이 아닌 어른과 동등하게 대우받아야 하는 대상이라는 것. 어린이들에게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식의 훈계나 교훈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교육, 가족 등 그들이 당연히 누려야할 가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이 단편집은 ‘철없는’ 어른들을 일깨우는 성인들의 교훈서이다. - 한마디 더: 여기에 수록된 ‘어린이를 위하여’를 제작한 유진 페도렌코는 2000년 <백치들의 마을>을 발표해 안시와 히로시마에서 수상한 스타급 작가이다. <우리가 다시 그려요> (2000년 출시, 108분, 라바필름(02-765-8312)) 단편 애니메이션을 찾을 때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쪽도 한번 눈여겨봐야 한다. 제목만 보면 아이들의 그림 그리기 교재 같은 <우리가 다시 그려요>도 그런 점에서 ‘숨은 보석’과 같은 비디오이다. 원래 이 비디오는 어린이를 위한 교육용으로 제작한 것이다. 2개로 구성된 비디오에 각각 6편씩, 12편의 단편 애니메이션이 수록돼 있다. 이름만 본다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중견 작가 폴 드리센을 비롯해 재닛 펄만, 브제니슬라브 포아르 등의 작품 중에서 어린이들과 삶과 사회의 다양한 의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들로 골랐다. ‘하늘의 제왕’, ‘너만 먹니?’, ‘행복했던 가족’, ‘존 베일리의 불장난’, ‘도둑맞은 꿈’, ‘5분 남으셨습니다’, ‘제발 그만’, ‘맛있게 드세요’, ‘파블로프의 쥐’ 등 단편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토론용으로 선정돼 주제가 선명하다. 삶의 의미를 묻는 작품에서 사회에서 언론이 가진 기능, 인간의 사회성, 생존의 의미, 흡연 등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다. - 한마디 더: 이 단편집은 다른 비디오와 달리 특이하게도 작품을 보고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교재가 첨부돼 있다. 굳이 아이들이 없더라도 비디오와 책을 함께 보면 어른들도 공부가 된다. <배고픈 애벌레>(The Very Hungry Caterpillar) (99년 출시, 31분, 인피니스(02-2263-3233)) 아이들과 함께 보기엔 딱 좋을 깜찍한 작품. 93년 더 일루미네이트 필름(The Illuminated Film)에서 제작한 ‘배고픈 애벌레’와 다른 단편들을 모은 작품이다. <배고픈 애벌레>는 원래 70년 에릭 카일이 발표한 동화책으로 전세계적으로 1천만부 이상이 팔린 베스트셀러. 자연 친화적인 내용과 풍부한 감수성을 지녀 영국에서는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앞서 소개한 단편집과 달리 아이들이 친근감을 느낄 수 있도록 캐릭터나 이야기에 멋을 부리지 않은 것이 특징. 화려한 작가적 완성도보다는 아이들의 시각에서 사물을 바라보았다. 그만큼 이야기 구조가 단순하고 천진스럽다. 기법면에서도 장인적인 현란한 테크닉의 구사를 자제했고, 색채나 배경도 단순화했다. ‘배고픈 애벌레’를 비롯해 ‘아빠 저 달 좀 따주세요’, ‘벙어리 귀뚜라미’, ‘샘많은 카멜레온’, ‘음악으로 세상을 그려요’ 등이 수록돼 있다. <피브 앤 퍼그> (97년 출시, 70분, 새롬엔터테인먼트(02-518-3373)) 아드만 애니메이션은 미국과 일본을 제외하고 국내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애니메이션 ‘브랜드’이다. <피브 앤 퍼그>는 아드만의 팬이라면 꼭 챙겨볼 것을 권할 만한 작품이다. 이 비디오는 피터 로드와 닉 파크가 아드만 애니메이션을 세운 뒤 발표한 초기 작품들을 모은 작품집이다. 아드만에 첫 아카데미 단편 애니메이션상을 안겨준 ‘동물 인터뷰’(Creature Comforts)를 비롯해 ‘왕자와 거지’, ‘아담’, ‘사랑이란’ 등 9편의 단편이 수록돼 있다. 동물원 우리 속에 사는 고릴라, 사자, 북극곰 들을 통해 인터뷰 형식을 도입한 ‘동물 인터뷰’는 아드만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걸작. 애니메이션의 완성도가 꼭 많은 움직임과 액션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인터뷰를 할 때 동물들의 표정이나 동작들은 감독들의 재치를 엿볼 수 있는 부분. 안경을 닦거나 옆사람을 흘낏 보는 등 작은 동작이지만 그 타이밍과 추임새가 점토로 만든 인형인지 아니면 TV에서 보는 거리의 시민인지 혼동할 정도로 자연스럽다. 과격하지 않고 적당한 풍자와 재치, 평범한 삶에 대한 예찬을 담은 아드만의 작품 세계는 이 작품 외에 ‘사랑이란’과 ‘왕자와 거지’에서도 만날 수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아담’. 아주 작은 소품이지만, 아기자기한 익살이 그만이다. - 한마디 더: 출시된 지 3년밖에 안 됐지만 비디오숍에서 찾기는 그리 쉽지 않을 듯. 애들은 가라. 뭔가 다른 애니메이션의 세계 <톰 섬의 비밀모험> <샌드맨> <이온 플럭스> <톰 섬의 비밀모험>(The Secrect Adventure of Tom Thumb) (2000년 출시, 70분, 새롬엔터테인먼트(02-518-3373)) <톰 섬의 비밀모험>은 클레이 애니메이션과 오브제, 픽실레이션 등 다양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기법들이 사용된 작품이다. 이야기는 누구나 잘 알고 있듯 엄지손가락만한 크기로 태어나 ‘톰 섬’이라 이름이 붙은 아이가 세상에 나와 자신의 신체적 특징을 활용해 펼치는 무용담을 그린 영국 동화이다. 그러나 극본, 디자인, 연출, 편집 등 1인4역을 한 데이브 보스윅은 작품의 배경을 시대가 불분명한 어둡고 음침한 마을로 바꾸었다. 주인공 ‘톰 섬’은 민머리에 툭 튀어나온 눈을 가진 그로테스크한 모습이다. 픽실레이션(사진과 같은 정지된 영상을 이용한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처리한 ‘톰 섬’의 부모를 비롯해 작품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땀이 번들번들한 얼굴에 피곤하고 옹색한 몰골을 하고 있다. 어느 한 구석, 동화적인 안온하고 푸근한 분위기가 없는 이 작품의 매력은 이런 기본 틀 속에서 역설적으로 가족의 사랑과 생명의 존귀함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외모만 봐서는 자식에 대한 애정과는 담을 쌓은 것 같은 ‘톰 섬’의 부모들이 자식에게 보여주는 무조건적인 애정과 헌신은 ‘위악적인’ 영상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동화의 틀을 빌려 현실과 잘 구별이 안 되는 ‘악몽’을 그리고 있는 보스윅의 작품 세계는 같은 영국의 선배 작가인 퀘이 브러더즈의 세계관과 일맥상통함을 느낄 수 있다. - 한마디 더: 작품에서 픽실레이션으로 등장하는 배우들 중 상당수는 이 애니메이션의 제작 스탭이다. <샌드맨>(Sand Man) (2000년 출시, 새롬엔터테인먼트(02-518-3373)) <톰 섬의 비밀모험>이 동화 속 세계를 현대적인 분위기로 비틀었다면, <샌드맨>은 중세 유럽의 괴담에서 느낄 수 있는 으스스한 분위기를 환상적으로 펼친 작품이다. 서구 전설에 등장하는 샌드맨은 잠을 재우는 귀신. 우리의 ‘삼신할미’처럼 친근한 대상이다. 그런데 사뭇 낭만적인 존재인 ‘샌드맨’을 감독 폴 베리는 그로테스크하고 공포스런 존재로 바꾸었다. 팀 버튼 영화를 연상시키는 독특한 세트로 작품의 음산하고 몽환적인 세계를 강조하고 있다. 기형적으로 일그러진 문, 딥 포커스로 촬영해 원근감이 왜곡된 집안, 그리고 앙각으로 촬영해 등장인물이 주는 중압감을 강조한 카메라 앵글 등은 <노스페라투> <칼리가리 박사의 정원> 같은 무성영화 시대 작품을 연상케 한다. 섬세한 칼 맛을 느끼게 하는 인형의 모습과 간결하지만 어색함이 거의 없는 동작은 전통을 가진 유럽 인형 애니메이션의 힘을 느끼게 한다. <톰 섬의 비밀모험>과 함께 한 비디오로 출시됐다. - 한마디 더: 많은 애니메이션들이 대개 캐릭터에 관객의 시선을 모으는데, 이 작품은 세트의 양식미를 보는 것도 감상법의 하나이다. <이온 플럭스>(Aeon Flux)(1996년, 미국, 120분) (99년 출시, 120분, CIC) 이온 플럭스라는 미래사회의 여자 테러리스트가 등장하는 독특한 양식의 SF애니메이션. 감독과 캐릭터 디자인을 맡은 피터 정은 한국 출신의 세계적인 애니메이터이다. 월트 디즈니가 세운 ‘캘리포니아 아트스쿨’에서 애니메이션을 공부한 그는, 디즈니, 한나 바버라 등의 프로덕션을 거쳤는데 우리에게는 마이클 조던이 등장하는 나이키의 애니메이션 CF로 알려졌다. 이후 <팬텀>(국내에서도 방영)의 원화 디자인을 맡은 뒤 미국 음악전문 케이블 채널 MTV의 애니메이션 프로그램인 <리퀴드 텔레비전>에 <이온 플럭스> 시리즈를 발표했다. 여기 소개하는 것은 7편의 단편을 모은 작품집. SF양식을 빌렸지만 <이온 플럭스>는 쉽게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작품이다. 독특한 메커닉 디자인과 마치 오슨 웰스를 연상케 하는 딥포커스의 카메라, 인체를 극단적으로 묘사한 그의 캐릭터는 잘 정제된 디즈니 애니메이션이나 미소녀류의 일본 애니메이션과는 또다른 느낌을 준다. 이야기의 전후도 모호하고 인과관계도 뚜렷하게 설명하지는 않지만 그의 작품에서는 늘 강박관념과 과도한 섹스어필, 미래의 희망과 꿈도 없고, 그렇다고 절망도 없는 마치 무기질 같은 세계가 백일몽처럼 펼쳐진다. 보면서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려고 하다가는 오히려 다 놓칠 수 있다. 현란하게 움직이는 구도와 역동적인 주인공의 움직임, 기발한 아이디어의 메커닉 디자인을 감상하는 것이 오히려 편하다. - 한마디 더: 우리말 자막이 있지만 워낙 줄거리의 인과관계가 모호해 이해하는 데 무척 힘들다. 자막내용 고민하느니 차라리 그림만 보는 게 오히려 작품의 진가를 파악하는 데 더 쉽다. 비디오 하나 더! <요괴인간> ‘난데없이 웬 <요괴인간>’ 하겠지만 정확히 국내에 94년에 출시됐다. 요즘 엽기나 공포물이 유행이지만 애니메이션에서 엽기로 따진다면 이 작품이 선조이다. 67년 지금은 없어진 동양방송(TBC)이 일본에 합작으로 세운 애니메이션 제작사 ‘제일동화’에서 만든 TV시리즈이다. 70년대 TBC를 통해 국내에 소개되면서 정말 ‘한 인기’를 모았던 작품. ‘구하지도 못할 케케묵은 작품을 왜 소개하느냐’고 말할 수 있지만, 의외로 중고 비디오숍에 꽤 있다. 물론 유려하고 화려한 애니메이션을 기대하는 사람들은 찾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30대 이상 애니메이션 마니아 중 “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후렴구가 인상적인 음산한 분위기의 주제가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색다른 추억에 잠길 수 있다. 새로운 생명체를 탄생시키기 위해 연구하던 한 과학자의 손에 의해 태어난 세 요괴. 벰, 베라, 베로. 비록 모습은 흉측하지만 심성만은 바르고 올바른 그들이 권선징악의 길에 나선다. 언젠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고. 그림이나 전개는 엉성하지만 지금 봐도 기가 막힌 것은 60년대에 어떻게 애니메이션에서 이런 ‘엽기적인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에피소드마다 독특하다. 특히 유럽의 괴담을 일본적인 상황에 맞게 적당히 각색한 것과 좀비, 해골, 귀신, 유령, 늑대인간 등 괴기물의 각종 주인공들을 아이들 대상의 애니메이션에 등장시킨 점이 놀랍다. 물론 지금 이런 내용으로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면 영락없이 언론에서 집중 성토를 당하기 쉽다. 김재범/ 동아닷컴 기자oldfield@donga.com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왓 위민 원트/쥬브나일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평범한 30대 은행원인 봉수는 어느 날 문득 전화 한통 걸 이성이 없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가 일하는 은행 맞은편에서 일하는 원주는 봉수에 대한 연정을 키우며 자신의 마음을 전하려 하고 있다. 박흥식 감독, 전도연, 설경구 출연, 싸이더스 제작, 시네마서비스 배급, 상영시간 104분 김봉석 비오는 날의 “맑은” 수채화 ★★★☆ 심영섭 이 영화다 이 영화다 이 영화다 이 영화다(보시면 알아요) ★★★☆ 유지나 썰렁한 유머도 살려내는 재치, 그런데 본론이 각주에 밀린다 ★★★ 왓 위민 원트 울트라 마초 남성 우월주의자에다 속물 바람둥이인 닉 마샬은 어느 날 헤어 드라이어에 감전된 뒤 여성의 생각을 귀로 들을 수 있는 초능력을 갖게 되면서 내면에 많은 변화가 일어난다. 낸시 마이어스 감독, 멜 깁슨, 헬렌 헌트 출연, 튜브엔터테인먼트 배급, 상영시간 126분 김봉석 때로는 무지가 힘이다 ★★☆ 심영섭 어떤 대사는 꼭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아 ★★★☆ 유지나 여자 생각을 들려주는 게 멜 깁슨 쇼의 반주가 된 게 아쉽다 ★★★☆ 쥬브나일 여름방학을 맞이한 유스케 일행은 시골 캠프에 묵는데, 어느 날 밤, 유스케는 숲으로 떨어지는 강렬한 빛줄기를 보고 따라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작은 공 크기의 로봇 테트라를 발견하면서 유스케의 한바탕 모험이 시작된다. 야마자키 다카시 감독, AFDF 코리아 배급, 상영시간 100분 김봉석 젊은 날의 꿈이 미래를 만들어간다 ★★★ 심영섭 어린이용 SF, 그래도 용가리보다 낫지 ★★★

[일본 판타지영화]애니미즘은 죽지 않는다

다시 <링> 시리즈에 대해 이야기하자. 옛날 이야기 한편을 먼저 거론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일본의 아시카가 쇼군(將軍) 시대에 마쓰무라라는 관직자가 있었다. 한 흉가를 얻어 쓰게 된 마쓰무라의 집엔 작은 우물이 있는데 어느 날 밤부터 이 우물에서 귀신이 나타난다. 우물에서 튀어나온 귀신 탓에 마쓰무라 주변인 몇몇이 목숨을 잃고 마쓰무라는 귀신과 조우하게 된다. 여자 귀신은 억울한 사정을 고해바치고 도움을 청한다. 여기서부터는 뻔하다. 귀신의 말대로 우물을 파헤쳐 시신을 찾던 마쓰무라는 시체 대신 작은 거울을 발견한다. 귀신은 거울의 정령이었던 거다. 엉뚱하게 생각할 독자도 있을지 모르지만 일본 전래 ‘거울의 정령’에 관한 이 민담은 나카다 히데오 감독의 <링> 시리즈와 많이 흡사하다. <링> 시리즈에서 영화 내내 거울과 우물의 모티브가 흥미롭게 반복되었던 점을 상기하면 둘 사이의 유사성은 우연이라기보다 민담과 괴담에서 영화 주제를 끌어오는, 일본영화의 전통적 특징이 어딘가 은닉해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최근 국내엔 일본 판타지영화(구체적으로 분류하자면 더 세밀한 소장르로 나눌 수 있겠지만 편의상 판타지영화로 칭한다)가 여럿 공개된 바 있다. <고지라2000>에서 <쥬브나일>, 그리고 애니메이션 중에선 <포켓몬스터>, 그리고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등을 언급할 수 있다. 이들 작품들, 넓게 말하면 일본 판타지영화의 흐름을 단일하게 묶어줄 수 있는 것이 없을까? 일본 판타지영화는 거칠게 요약하면 캐릭터와 소장르의 발달사라고 칭할 수 있다. 주로 10대를 주요한 관객층으로 하면서 산업적 기반을 마련했으며 늘 새로운 캐릭터 개발을 통해 장르적 일관성을 유지하고 발전시킨 것이다. 이 글에선 일본 판타지영화의 흐름을 소개하면서 그들 판타지영화의 근저에 있는, 문화적 기원에 대해 짧막하게 논해보고자 한다. 괴수, 파충류, 킹콩의 전성시대 일본에서 판타지영화가 제작된 것은 1940년대로 거슬러올라간다. 투명인간이 등장하는 SF물과 괴담을 영화로 각색한 작품이 당시부터 만들어졌다. 이유가 특이하다. 세계대전 이후 일본에 상륙한 연합군, 특히 미군의 주도하에 일본 영화정책은 좌지우지되었다. 참바라영화, 즉 시대극영화는 1940년대 중반 일본에서 제작이 금지되는데 이러한 영화들이 “봉건적인 충성과 복수에 입각하고 있는 영화들이며 법률 대신 사적 복수가 용인되는”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시대극영화에 몰두하던 스탭들과 스타들이 판타지영화로 대거 발길을 돌리고 이후 일본영화는 판타지영화라는 대중영화의 시대가 도래한다. 1950년대 이후 일본 판타지영화는 몇 가지 소장르로 확실하게 구분된다. 먼저 <고지라>로 유명한 괴수영화가 있다. 흔히 특촬물(特撮物)로 불리는 괴수영화 장르는 혼다 이시로 감독의 1954년작 <고지라>를 시작으로 60년대엔 마찬가지로 혼다 이시로 감독의 거대한 나방 괴수가 출현하는 <모스라> 시리즈, 거북이와 파충류를 합성한 듯한 <가메라> 시리즈 등으로 부단하게 변형과 발전을 거듭하면서 최근에까지 이른다. 1990년대 가네코 스케 감독이라는 엔터테이너 연출자에 의해 부활한 <가메라> 시리즈는 혁신적인 몇 가지 요소로 주목받기도 했다. <고지라> 시리즈는 특촬물의 전형이라 할 만한 전통적 양식, 그러니까 자위대의 등장과 철탑, 송전선 등이 일종의 클리셰처럼 영화 배경 및 소품이 되는 공통점을 공유한다. 이에 비해 새로운 <가메라> 시리즈는 영화에서 ‘관객’의 시점과 지극히 일본적인 일상의 정밀함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차별화되었다. <가메라> 시리즈에선 도쿄 번화가를 누비는 괴수의 움직임, 여기에 덧없이 하나둘 희생되는 도시인들의 무력함이 시리즈마다 재차 반복되곤 한다. 평론가 이노우에 리사는 이를 두고 “가네코 스케 감독은 이 시리즈에서 극도로 리얼리즘에 입각해 강조된 일상에서 괴수라는 ‘기호’를 일종의 대재난으로 묘사했다”라고 평한 바 있다. 이 밖에 일본 판타지영화는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제작된 호러영화, 주로 만화와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SF영화, 그리고 전래된 이야기를 영화로 각색한 괴담영화 등이 전체적인 윤곽을 형성한다. 앞서 언급했듯 일본 판타지영화의 역사는 곧 캐릭터의 변화무쌍한 변천사이기도 하다. 붉은색과 은색이 섞인 우주복과 헬멧으로 무장한 울트라맨(울트라맨이 지구 대기중에서 3분밖에 활동할 수밖에 없다는 설정은 제작비 부담이 적지 않은 원인이다), 문어와 공룡, 그리고 설인과 킹콩까지 동원한 괴수영화들, 그리고 최근의 <쥬브나일>의 ‘테트라’라는 로봇과 <포켓몬스터>의 ‘피카츄’에 이르기까지. 이같은 일본 판타지영화의 흐름과 그 주인공들을 일본이라는 특유의 공간이 낳은 문화적 현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모든 사물에는 영혼이 깃든다 “인간이 이룬 최초의 세계관, 곧 애니미즘의 세계관은 심리학적 세계관이었다. 고대 인간들은 세계의 사물이 무엇과 유사한지 스스로 느낀 것으로 알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자신들 마음의 구조적 조건을 외부세계로 전치시켰음을 예측할 수 있으며 역으로 우리는 애니미즘이 사물의 본성에 대해 가르쳐주는 것을 거꾸로 인간 영혼에 적용시킬 수 있다.” 프로이트는 <토템과 타부>라는 저서에서 이렇게 썼다. 애니미즘은 좁은 의미로는 영혼 관념에 관한 이론이고 넓은 의미로는 영적 존재에 관한 이론이다. 이는 애니머티즘과 동물숭배, 그리고 정령숭배로 분류되기도 한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애니미즘이 하나의 신앙 형태로 남아 있는 사례다. 바로 ‘신도’(神道)라는 토착신앙이 그것이다. 일본 판타지물의 기원은 신도라는 일본 토착신앙이나 혹은 민담에 기원을 두는 경우가 잦다. 신도의 경우는 일본에 불교가 전해지기 전까지 유일한 신앙이었으며 샤머니즘 성격이 짙은 종교다. 신도는 다른 종교와 달리 특정한 종교적 체계가 없으며 만물에 영혼에 깃들어 있다는, 즉 ‘가미’(神)를 숭배하는 종교라 정의할 수 있다. 원래 샤머니즘에 근접해 있던 신도는 이후 선조를 숭배하거나 천황에 대한 신격화 작업으로 이어지면서 본래 성격이 변질되긴 했으나 일본 고유의 토착신앙으로 현재까지 남아 있다. 일본사와 일본문화를 접목하는 시도는 서구권에서도 꾸준했는데 권위있는 학자로는 안토니아 레비를 들 수 있다. 안토니아 레비는 “일본인들이 만들어낸 창조물이 해외관객에게 생소하게 생각되는 이유는 그들이 완전히 색다른 문화적 전통에서 끌어낸 그들만의 소재를 작품에 응용하기 때문이다”라고 분석한 바 있다. 안토니아 레비가 신도와 일본문화 사이 접점이라고 파악한 것은 이미지다. 검과 보석, 그리고 거울 같은 이미지가 좋은 예로, 그는 이같은 이미지가 신도 신화를 방증하는 주요한 예이며 일본 선사시대를 상징하는 물품이라고 봤다. <천지무용!> 같은 작품이 안토니아 레비가 자신의 견해를 입증하기 위해 거론한 예다. 이는 판타지영화 영역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고지라> 시리즈 역시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있는데 고지라 캐릭터는 시리즈 내내 정체가 불분명하며 때로 인간들에게 해로운 파괴행위를 행하지만 가끔은 인간들 편에서 선을 옹호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극히 모호하다. 선과 악 사이의 모호성으로 일관하는 고지라는 실상 ‘신마’(神魔)라는 신도의 개념, 즉 신과 악마의 중간자로 일본인이 영혼을 사고했던 맥락으로 이해한다면 그리 어렵지 않다. <포켓몬스터> 역시 비슷한 해석이 가능하다. <포켓몬스터>의 캐릭터들은 일본 괴수영화의 맥을 그대로 잇고 있는 것으로 봐도 무방한데, 단지 상품성과 귀여운 외양이 강조된 것이 차이점이랄까. 선악 사이 경계선에 서 있다는 점도 유사하다. 극장판 <포켓몬스터>에서 뮤츠의 흉계로 만들어진 포켓몬스터의 복제물들은 마치 악의 세력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 입장에선 자신들 존재를 입증하기 위한 정당한 싸움을 하는 것일 따름이다. 신도에서 초월적 존재, 혹은 영혼적 존재를 사고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대목이다. 민담의 주인공이 영화 속 캐릭터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선 ‘청정과 오염’이라는 개념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먼 미래사회에 인류는 곰팡이숲과 괴상하게 생긴 곤충들로부터 벗어나 자신들만의 영역을 개척한다. 여기서 나타나는 청정과 오염이라는 대립항 역시 신도에서 빌려온 것으로 일본 전통신앙 신도에서 청정은 곧 ‘신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서구 신화와 일본의 신도를 얼마나 절묘하게 엮어나갔는지 깨닫기 충분하다. 일본 민담엔 ‘덴구’(天狗)라는 흥미로운 존재가 나온다. 신통력이 있으며 공중을 자유롭게 뛰어다닐 수 있으며 장난기 많은 괴물이다. 많은 전통 민담 속에서 덴구는 때로 사람을 골탕먹이기도 하며 둔갑하는 능력도 과시한다. ‘덴구’라는 민담 속 존재는 아마도 일본 SF영화에 나오는 기계로봇 캐릭터의 원형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둔갑술도 부리며 인간의 친구이자 이따금 장난기가 동하는 <쥬브나일>의 테트라를 민담에 등장하는 덴구의 이웃사촌 정도로 본다면 일본 판타지영화를 보는 시선도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한국의 판타지영화는? 무릇 판타지영화는 욕망에 관한 장르다. 영화를 보는 이의, 혹은 만드는 이의 무의식 속 욕망을 마음껏 스크린에 풀어놓는다. 일본 판타지영화가 다양한 갈래로 소장르들을 뿌리내리고 각 시대에 맞는 캐릭터를 끊임없이 개발했다는 점은 명백하다. 그리고 이러한 판타지영화가 기실 그들만의 독자적인 문화적이고 민속적인 기원을 두고 있음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어차피 욕망이란, 무의식 속 욕망이란 지역적 특색과 더불어 명백한 원형적 모티브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국내 판타지영화는 어떨까. <용가리>와 <가위>, 그리고 몇몇 판타지멜로영화들은 어떤 관점에서 읽는 것이 가능할까? 이에 대한 답변에 앞서, 한국영화의 판타지 전통이 얼마나 든든한 역사와 창의성을 지니고 있는지 고려해본다면, 답신을 보내기엔 좀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김의찬/ 영화평론가nuage01@hitel.net

유능한 여성, 야무진 여인, <왓 위민 원트>의 헬렌 헌트

당신에게 미쳐 있어. 최근까지 헬렌 헌트의 보폭을 돌아보면, 새삼 그녀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시트콤의 원제가 떠오른다. 국내에는 <결혼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소개됐던 의 TV시리즈 . 92년 시리즈의 방영이 시작된 이래 헬렌 헌트의 이름에 수식어처럼 따라붙었던 제목이라 귀익은 탓이기도 하지만, 지난 몇년간 그녀에 대한 할리우드의 애정공세가 워낙 유난했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뒤 “오랫동안 개봉작의 대부분은 시나리오로 봤던 영화였다”고 할 만큼 집중포화를 받았다는 헬렌 헌트. 차기작을 고르는 데 2년을 보낸 헌트는, 2000년 가을과 겨울 사이 무려 4편의 영화로 스크린에 복귀했다. 10월 중순 미국 극장가에 걸린 <닥터 T와 여인들>을 필두로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 <왓 위민 원트> <캐스트 어웨이>가 모두 그녀의 출연작들. 영화의 완성도나 흥행성적과는 별개로, 섬세하면서도 편안하게 인물에 녹아든 헌트의 연기는 거의 합격점을 받았고, 그중에서도 <왓 위민 원트>는 호평과 함께 제작비의 2배가 넘는 1억5천만달러 이상의 수익을 벌어들이는 성공을 거두며 <이보다…>의 상승세를 뒤이었다. <왓 위민 원트>는 남성우월주의자에 바람둥이인 닉이 감전사고로 여성들의 생각을 들을 수 있게 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그린 로맨틱 코미디. 광고기획사 중견인 닉은 아이디어를 도용하기 위해 유능한 상사 달시에게 접근하지만, 그녀 내면의 진솔한 소리에 귀기울이면서 점점 그녀에게 이끌린다. “헬렌은 현명하고 현대적이면서도 편안한 커리어우먼의 이상적인 모델”이라는 감독 낸시 마이어스는 일찌감치 헌트를 달시로 점찍었지만, 그녀는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가난과 알코올에 찌든 웨이트리스 미혼모로 분할 <아름다운…>, 십수년간 무인도에 난파됐다가 되살아온 연인과 비극적으로 재회하는 <캐스트 어웨이>를 앞두고, <결혼 이야기>와 <이보다…>처럼 익숙한 로맨틱 코미디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었던 헌트는 결국 합류했고, 마지막에 진실을 밝히는 닉을 때리는 것이 달시의 캐릭터에 맞지 않는다며 수정을 제안해 마이어스의 동의를 얻었다. 그리고 헌트가 연기한 달시는 성공한 여성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과 달리, 유능하고 야무지면서도 인간적인 온기와 풍부한 감성을 지닌 인물로 살아났다. 성공가도를 달리는 전문직 여성이건 일상의 무게에 지친 웨이트리스건, 헌트는 공격적인 여전사가 되지 않아도 당당하고, 성적 대상으로서의 섹시함이나 백치미를 과시하지 않아도 매력적이란 점에서 드문 배우란 평을 얻고 있다. 이기적이고 편협하기 짝이 없는 <이보다…>의 로맨스 소설가 멜빈을 다독여주는 식당종업원 캐롤은 자상하되 나약하지 않고, 밑바닥 삶을 살아가는 <아름다운…>의 바 웨이트리스 알린은 거칠되 가학적이지 않다. 의사로, 아버지로 남을 돌보는 데 지친 연인이 위로를 바랄 때도 프로골퍼로서 자아성취를 더 중시하는 <닥터 T와 여인들>의 브리는 일견 냉정하지만 독립적인 여성이다. 혹자는 이러한 헌트의 캐릭터야말로 할리우드에서 대안적인 여성성의 정의를 고민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고 평하기도 한다. <왓 위민 원트>의 성공 전후로 헌트는 <아름다운…>의 연기로 평단의 찬사를 받고, 최근작 <캐스트 어웨이>로 연말 연초 흥행 수위를 기록했다. 9살에 시작해 별볼일 없는 TV시리즈를 전전하던 20대의 내리막길도 지나고, 92년부터 7년간 인기리에 순항했던 <결혼 이야기>의 오르막길, 아카데미 수상이라는 하나의 절정도 지나온 연기생활 28년째,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좋아하던 우디 앨런의 영화에 출연중인 헌트, 예정대로라면 로버트 B. 파커의 추리소설로 원하던 감독 데뷔를 하게 될 그녀를 위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는’ 한해란 수식어는 아껴둬도 될 것 같다.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재패니메이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이하 <…나우시카>)의 국내 개봉은 몇몇 마니아들에겐 정말 눈물나는 사건이었음이 분명했다. 화질이 나빠질 대로 나빠진 복사본 비디오테이프를 은밀히 돌려보던 10여년 전의 마니아나, 일본 혹은 미국에서 공수한 LD로 고화질과 입체음향을 즐기던 요즘의 마니아나, 모두 극장에서 <…나우시카>를 만날 기회는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원래 극장용으로 제작된 애니메이션이 극장에서 개봉되는 것이 이렇게 일종의 사건이 될 수밖에 없었던, 그 오래된 뒷이야기를 들추어내자는 말은 아니다. 다만, 일본에서 만들어졌다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에 좋은 작품을 제대로 볼 수 없었던 시대를 마니아로 살았다는 사실이 안타깝다고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다. 어쨌든 <…나우시카>의 개봉으로 국내의 일본 애니메이션 관련 사이트, 미야자키 하야오 관련 사이트들을 통해 마니아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나우시카>의 국내 개봉은 비단 한국 마니아들만의 사건이 아니었다. 영문으로 된 주요 관련 사이트들이 이 소식을 특별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미야자키 하야오 관련 홈페이지 중 하나인 나우시카닷넷의 경우, ‘Special Headline’이라는 제목하에 한국 개봉소식을 전하고 한글 공식홈페이지로의 링크도 제공하고 있을 정도다. 물론 대부분 미국인 혹은 아시아계 미국인으로 구성된 그 홈페이지의 제작진들이 우리가 느끼는 특별한 감회를 이해했을 리는 없겠지만, 자신들이 숭배하는 걸작이 뒤늦게나마 한국에서 개봉된다는 사실에 뿌듯함을 느끼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이와 더불어 미야자키 하야오가 올 여름 개봉을 목표로 작업하고 있는 "Sen to Chihiro no Kamikakushi"에 대한 정보도 마니아들을 들뜨게 하고 있는 중이다. 가장 큰 이유는 돼지로 변해버린 부모님을 원래 모습대로 돌려놓기 위해, 소녀 치히로가 귀신나라에 가서 벌이는 모험을 그릴 것으로 알려진 이 작품으로 한동안 일선에서 물러났던 미야자키 하야오가 복귀하기 때문이다. 다만 지브리 스튜디오와 제휴를 맺은 디즈니가 제작비의 일부를 지원하고 있다는 점이, 혹 작품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표명하는 목소리가 있는 것도 사실.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와 지브리 스튜디오가 팬들의 믿음을 저버리지는 않을 것이 분명해 보인다. 한편 최근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또 하나의 일본 애니메이션 관련 소식은 <은하철도 999> 시리즈의 최신판인 <메텔 전설>이 일본에서 OVA(Original Video Animation)로 출시되었다는 것이다. 총두편으로 제작된 <메텔 전설>은 1편이 지난해 12월 초부터 판매가 진행되고 있고, 2편은 현재 비디오숍을 통해 대여를 시작한 상태로 올 3월에 판매용이 출시될 예정이다. 이 OVA가 마니아들의 주목을 끌고 있는 이유는, 그간 많은 혼란이 있었던 천년여왕, 메텔, 에메랄다스(메텔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하록선장처럼 옷을 입고 얼굴에도 상처가 있는 캐릭터) 등 마쓰모토 레이지의 주요 여성 캐릭터들의 관계를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메텔 전설>에 따르면 <은하철도 999>의 메텔과 <퀸 에메랄다스>의 에메랄다스가 쌍둥이이며, 그녀들의 어머니가 바로 <천년여왕>의 천년여왕 프로메슘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라 메탈이라는 행성의 여왕 프로메슘이 굶주림과 추위로부터 고통받는 사람들을 살려내기 위해, 천재 박사인 하드 기어의 인류 기계화 계획을 받아들이고 자신도 기계화되면서부터다. 그러나 그 기계화 계획이 하드 기어의 지배 음모라는 것을 알게된 프로메슘은 자신의 쌍둥이 딸인 메텔과 에메랄다스를 탈출시키려 하고, 하드 기어는 이를 막으려 한다. 프로메슘은 딸들에게 은하철도 999의 존재를 알려주고, 지구로 가서 지원을 받아오라는 부탁을 한다. 다행히 하드 기어를 물리친 메텔과 에메랄다스는 은하철도 999에 오르지만, 완전히 기계화되어 인간성을 잃어버린 프로메슘이 그녀들을 공격하게 된다. 그 공격에서 살아남아 은하철도 999에 몸을 실은 두 소녀 메텔과 에메랄다스의 이후 이야기가 70년대 말부터 20년이 넘게 계속 제작되고 있는 <은하철도 999> <천년여왕> <퀸 에메랄다스> 등 주요 마쓰모토 레이지의 TV판, 극장판 애니메이션들을 통해 전개돼왔던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렇게 방대한 이야기의 구조를 미리 짜놓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메텔 전설>조차도 다른 작품들 속에서 등장하는 이야기들과 통시적으로 잘 들어맞지 않는 것이 사실. 이에 대해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애써 통합하려고 노력하지 말고 완전히 별개의 작품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기도 하다. 여하튼 이렇게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일본 애니메이션 관련 소식들을 정리하다보면, 전세계 수많은 젊은이들이 인터넷을 통해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한 오마주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발견하게 된다. 애니메이션 작품들을 텍스트로 삼아 그것을 바탕으로 하나의 세계관까지 형성해내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참으로 대단해 보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러한 세계를 이끌어가는 미야자키 하야오나 마쓰모토 레이지 같은 애니메이션계의 거장 혹은 장인을, 이제 우리도 가졌으면 하고 기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이철민/ 인터넷 칼럼니스트 bandee@channeli.net ▣레인보우의 <메텔 전설> 홈페이지 http://www.geocities.com/rainbowow/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한글 홈페이지 http://www.nausicaa.studiog.co.kr/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영문 홈페이지 http://www.nausicaa.net/miyazaki/nausicaa/ ▣라비린스의 미야자키 하야오 홈페이지 http://user.chollian.net/~typhoon9/

영화음악 - <모 베터 블루스>

때로 어떤 영화에 쓰인 음악의 역사적, 음악적 맥락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영화를 감상할 수 없을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는 실제로 의외로 많다는 걸 염두에 두자. 그렇게 되면 음악은 단순히 ‘쓰이는’ 요소라기보다는 한 영화를 구성하는 역사적, 상황적 맥락의 짜임을 구성하는 여러 층위의 감각적 구조물 중 하나이다. 스파이크 리의 1990년작 <모 베터 블루스> 역시 그런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 영화는 재즈 신의 뒷이야기를 중심소재로 삼고 있다. 영화의 시작부분에 하드 밥적인 음악을 연주하는 퀸텟이 등장한다. 비밥 스타일 재즈의 인트로는 보통 트럼펫과 색소폰의 유니즌(제창)으로 제시된다. 그러다가 그것이 갈라지면서 각 파트의 즉흥연주로 이어진다. 화합과 갈라짐, 그리고 다시 화합으로 이루어지는 이 퀸텟 연주 장면은 영화 전체의 흐름을 압축하고 있다. 덴젤 워싱턴이 블릭 길리엄이라는 트럼펫 주자로 나오고 웨슬리 스나입스가 셰도우 헨더슨이라는 색소폰 주자로 나온다.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980년대 후반을 살아가는 흑인들에게 재즈란 어떤 의미를 지닌 음악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흑인들에게는 재즈에 대한 이율배반의 감정이 있다. 흑인 거리의 생생한 현장성을 뿌리로 하고 있는 힙합의 강렬함이 이미 흑인 음악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마당에 재즈는 그들에게조차 일종의 ‘지나간’ 과거일 뿐이다. 루이 암스트롱의 흰 손수건은 하나의 추억거리이기도 하지만 백인에게 굽신거리는 엉클 톰의 상징이기도 하다. 또한 재즈의 주요 청중은 흑인이 아니다. 그 청중은 조금은 고급스런 취향을 지닌 부르주아들이다. 왜 흑인들이 그들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심을 품는 흑인 음악가들이 꽤 많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여전히, 재즈는 흑인 음악의 위대한 자산 중 하나이다. 뉴올리언스의 브라스 밴드에서 시작해 1960년대 뉴욕의 가장 쿨한 클럽에서 펼쳐지는 프리 재즈에로 이르는 그 도도한 물줄기는 미국에 사는 흑인들의 설움과 애환, 그리고 음악적인 감수성이 잘 녹아 있다. 그 무엇에 이렇게 그들의 숨결이 깃들어 있으랴. 그래서 재즈는 여전히 흑인의 자부심이고 흑인 역사의 위대한 일부이다. 이와 같은 이율배반적인 문화적 조건 자체가 이 영화를 움직이는 갈등의 원인이다. 덴젤 워싱턴(블릭)은 재즈 안에 푹 빠져 있고 재즈의 본질을 추구하나 오히려 재즈에 갇혀 있는 근본주의자이다. 반면에 웨슬리 스나입스(셰도우)는 대중이 원하는 것을 위해 자기 자신을 털어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현실주의자이다. 둘이 한 밴드의 멤버로 설정됨으로써 그 밴드는 흑인들이 현재형으로 살아가고 있는 재즈가 무엇이냐를 되묻는 밴드가 된다. 결국 블릭은 싸움에 휘말려 입술을 찢기는 바람에 더이상 연주를 하지 못하게 된다. 이 착잡한 설정은 재즈라는 위대한 자산이 지금 자신들에게 무엇인지를 넌지시 알려준다. 결론적으로 스파이크 리는 존 콜트레인에게로 돌아가 해답을 구한다. 사운드트랙 앨범에는 실려 있지 않지만 영화 후반부의 여러 장면에서 존 콜트레인의 불후의 작품 <지고의 사랑>(Love Supreme)이 인용되고 있다. 존 콜트레인의 후기 음악은 이집트의 나일강과 미국의 미시시피강을 이어놓고 있는 듯한 원대함과 도도함을 지니고 있는 위대한 음악이다. 사운드트랙에는 그 유명한 <모 베터 블루스> 테마가 들어 있다. 영화에서 이 곡이 연주되는 대목은 매력적이다. 블릭은 청중에게 ‘블루스를 아는가’하고 묻는다. 브랜포드 마살리스, 테렌스 블란차드, 제프 테인 와츠 같은 당대 최고의 재즈 플레이어들이 연주한 사운드트랙이라 하드 밥의 현주소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음반이다. 성기완/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