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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돌아온 김형곤의 ‘40대 기수론’

“요즘 어렵긴 어려운 모양입니다. 예전에는 없는 사람만 헐벗고 굶주렸는데 요즘은 없는 사람이나 있는 사람이나 헐벗고 굶주립니다. 있는 여자 연예인들은 누드 찍는다고 헐벗고, 야당 총재라는 분은 단식한다고 굶주리고 있죠.” 개그맨 김형곤(43)이 돌아왔다. 3주 전부터 한국방송 2텔레비전 〈폭소클럽〉 ‘스페셜 클럽 2’의 코너를 맡은 김형곤은 경인방송의 〈김형곤 쇼〉 이후 2년반 만에 텔레비전 무대로 돌아와 40대 개그맨의 재담과 익살을 선사하고 있다. 〈개그콘서트〉류의 말장난 개그에 익숙한 20대 관객들은 이 40대 개그맨한테 세대차이를 느끼는지 약간 썰렁한 반응을 보이지만, 1980년대 말 ‘회장님 회장님’을 기억하는 나이든 시청자들은 그의 개그에서 어떤 동질감을 느낀다. 그의 개그 키워드는 정치와 섹스다. 이 분야에서만큼은 독보적인 입담을 과시한다. 국민의 불신을 받고 있는 정치인들을 신랄하게 풍자함으로써 웃음을 유발한다. 때로는 진한 성적 농담까지 섞어 정치인의 행태를 야유하기도 한다. “정치인을 가둔 태운 대형버스가 사고가 나 여러 사람이 다쳤는데 농부가 그들을 마구 파묻고 있어 주위사람들이 ‘왜 살아 있는 사람들까지 파묻느냐’고 묻자 농부는 ‘나는 살아 있다고 말하는 정치인들을 믿을 수 없어 죽은 줄 알고 파묻었다’고 대답했습니다.” “몇백억씩 돈 먹은 정치인들이 있지만 하나같이 ‘저는 모릅니다. 보좌관들이 했습니다’고 발뺌을 합니다. 그래서 ‘사모님이 임신을 했습니까’ 묻자 ‘저는 모릅니다. 저희 보좌관이 했습니다’라고 하더라.” 김형곤은 〈한겨레〉 인터뷰에서 “40대는 은퇴하는 나이가 아니라 부활하는 나이임을 보여주고 싶다”는 말로 자신의 복귀에 의미를 부여했다. “87년 회장님 회장님을 할 때 27살이었는데 그때는 남녀노소가 다함께 웃고 그랬는데, 〈개그콘서트〉의 경우 35살을 기점으로 40살이 넘어가면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질 못합니다. 사우나에서 40대 남자들이 개콘을 보고 슬픈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다시 방송 복귀를 결심했죠. ” 2000년 총선에서 서울시 성동구에서 출마해 1만2800표를 얻고 정치의 쓴맛을 보기도 한 그는 이때 얻은 경험을 개그 소재로 활용하고 있다. 지난 1일에는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의 단식을 빗대 풍자를 했다가 한나라당 관계자한테서 싫은 소리를 듣기도 했다. 2년 전 120㎏의 체중을 운동과 식이요법으로 단기간에 33㎏의 다이어트에 성공해 화제가 된 그는 지금도 88㎏ 체중을 유지한 결과 “고혈압과 당뇨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와 20살 때도 갖지 못한 건강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9월부터 여의도에서 유기농 식당을 운영하며 수익금의 50%를 백혈병소아암협회에 내고 있다는 그는 각종 사업을 하면서 생긴 구설수에 대해 “유명인이다 보니 과장되게 알려졌다”고 해명했다.

‘임수정·봉태규’ 떴느냐? 더 뜨거라! [3] - 봉태규

“학예회 하듯 쑥스럼 내가 이래도 되나, 푸하하” “내가 이래도 되나” 배우 봉태규(22)의 머릿 속에서 요사이 가장 많이 떠오르는 질문이다. 시트콤 <논스톱> 촬영현장에서 주변에 모이는 아이들의 시선을 받을 때도, 스튜디오에서 환한 조명 아래 짓궂은 소년 같은 미소를 지을 때도 이 말이 계속 떠오른다. 순전히 ‘사고’로 - 2001년 초 봉태규는 버스에서 넘어져 팔이 부러지는 사고로 미대 실기시험을 포기하고 있다가 압구정동 길거리에서 캐스팅됐다- 충무로에 발을 들여놓은 지 3년 남짓. 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 시에프에까지 전방위적 성과를 올리고 있지만 스스로에게는 아직도 지금 하고 있는 인터뷰를 포함해 많은 게 낯설고 쑥스럽단다. 막을 통해 걸러져 나온 ‘실없고, 철없고, 대책없는’ 이미지와는 많이 다른 인상이다. “나는 배우다라고 생각해본 적 없어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배우를 꿈꾸는 많은 분들이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요, 배우가 일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스트레스 받잖아요. 그냥 취미다 생각하면 부담없이 더 재미있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숙명’이니, ‘영혼’이니 하는 단어를 써서 배우로서의 사명감과 태도를 보여주려는 코멘트는 영 닭살이라는 그는 이렇게 자신의 ‘연기관’을 피력한다. 신세대적인 경쾌함과 함께 결코 아이답지만은 않은 균형감각이 느껴진다. 그가 연기를 정색하지 않고 받아들이게 된 것은 우연한 시작이라는 출발지점의 특별함에도 기인하는 듯하다. “<눈물> 찍을 때도 아 내가 연기를 한다, 이런 게 아니라 초등학교 때 친구들 앞에서 학예회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선생님(감독님)이 시키는 대로 그냥 한 거죠. 그래서 칭찬받을 때 좋기도 하면서 빵반죽처럼 부풀려져 사람들에게 보여진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어요.” 그래서 ‘차라리 본색을 보여주자, 그냥 망신당하고 영화랑 결판짓자’고 덤벼든 게 <품행제로>였다. “초반 한 30% 정도까지는 여전히 학예회 수준이었죠. 그게 좀 지나가니까 아 이렇게 해야 되는구나, 어 이래도 되네 이런 식으로 조금씩 연기를 배우게 되더라구요.” 그랬던 그가 6개월 동안 사무실에 음료수 사가지고 출근하면서 스태프들을 설득해 따낸 게 <바람난 가족>의 신지운 역이었다. <눈물> 때 학생과 선생님의 관계였던 그와 임 감독은 이 영화에서 파트너로 토론하고 함께 대사를 수정하는 사이로 발전했다. 그는 ‘취미’라고 말했지만 어느새 ‘배우’가 된 것이다. 봉태규가 주변에서 자주 듣는 이야기는 “너무 민간인 같다”는 말이다. 배우로서 한계가 될 수도 있는 이 말을 그는 수긍한다. 아니 작정한다. “누가 봐도 제가 꽃미남과는 아니잖아요. 내가 가진 한계를 인정하고 그것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그래서 맡는 역할이 다 비슷하다고 비판하더라도 부정하고 싶지는 않아요.” 데뷔작 <눈물>에서 지금 방영되는 <논스톱>까지의 모든 과정을 배움이라고 생각한다는 그는 조금씩 변하는 배우가 되고 싶단다. “관객이나 시청자들이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조금씩 다르게 가다가 문득 “아, 쟤가 옛날에는 이랬는데 지금은 저런 걸 하네”라고 말할 수 있도록 변하고 싶어요. <논스톱> 시작할 때 주변에서 많이들 걱정했지만 순발력이나 상황연구 같은 면에서 많은 걸 배웠거든요. 아직은 변신을 생각할 때가 아니라 배울 때인 것 같아요.” 최근 촬영을 마친 <안녕! 유에프오>에서 이범수의 동생역을 연기한 그는 앞으로 임순례 감독의 <세친구>같은 영화를 해보고 싶다고 한다. 큰 입을 활짝 열며 푸하하 웃는 밝은 모습 사이로 ‘내가 이래도 되나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하는 불안함과 세상에 대한 어색함, 그리고 자신의 한계를 냉정하게 인정하는 어른스러움이 툭툭 묻어나는 스물두 살의 배우, 봉태규의 다음 선택이 궁금해진다. ◆심보경 이사가 본 봉태규 긴장감 풀줄 아는 타고난 배우 <눈물> 때 봉태규의 인상을 좋게 보기는 했지만 화면 속의 이미지와 실제의 인상이 매우 달랐다. 다른 사람처럼 나도 그에 대해 코믹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만나 보면 나이보다 어른스럽다. 전에도 젊은 배우들과 함께 작품을 해봤는데 젊은 친구들은 보통 열의있고 진지하면 그만큼 경직된다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감독이나 제작자의 일 중 하나가 긴장을 풀어주는 건데 태규씨는 오히려 자신이 촬영장의 긴장감을 풀어줄 정도로 유연하고 여유가 있다. 특히 <바람난 가족>에서는 배우들이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노출신 촬영도 있었는데 때로는 후배인 봉태규가 선배 문소리를 이해하고 배려한다는 느낌까지 주었다. 그래서 농담처럼 한국에서 문소리를 다루는 유일한 남자배우가 봉태규라는 말까지 나오곤 했다. 외모로 뜨거나 연기공부를 해서 정규코스를 밟듯 배우에 입문하지 않은 것이 봉태규에게는 장점으로 작용하는 듯하다. 경험이 많지 않은데도 적응력이 매우 뛰어나고 연기가 자연스럽다. 스타로 출발하지 않아서인지 헝그리 정신 같은 것도 보인다. 이런 면에서 배우는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라는 송강호씨의 지론처럼 배우 봉태규도 시작한 계기는 우연이었지만 타고 난 배우라고 생각이 든다. 다만 아직 출발선상에 있는 만큼 사람들을 많이 만나면서 타인을 통한 경험도 많이 쌓고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하려는 노력을 꾸준히 하길 바란다.

일본드라마 ‘우르르’ 몰려오네

금단의 영역으로 남아있던 일본드라마가 새해 벽두부터 한꺼번에 몰려온다. 내년 1월1일 4차 일본 대중문화 개방과 함께 오시엔, 엠비시 드라마넷, 에스비에스 드라마플러스, 홈시지브이 등 유료채널을 통해 12살 이상 시청가 등급의 일본 드라마가 한국어 자막방송으로 일제히 방영된다. 이번에 방영되는 일본 드라마는 대부분 일본 내에서 상당한 인기를 올렸던 트렌디물이다. 오시엔은 내년 1월 5일부터 <퍼스트 러브>를 월~목요일 오전 11시(재방송 당일 저녁 8시) 방송하는 데 이어 22일부터 <한 여름의 메리크리스마스>를 내보낸다. 45분짜리 11부작인 이들 드라마는 일본티비에스(도쿄티브이)가 제작한 미니시리즈로 일본에서 여성, 특히 주부에서 인기를 얻었다. 2002년 방영된 <퍼스트 러브>는 교사와 학생이란 신분으로 만나 첫사랑을 느낀 두 남녀가 자신의 감정을 숨긴채 헤어졌다 5년만에 다시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일본내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작품이다. 특히 일본의 전지현으로 비견되는 아이돌 스타 후카다 교코(23)와 천의 얼굴을 가진 중견배우 와타베 아츠로(37)가 각각 남녀 주연을 맡아 더욱 화제가 됐다. 후카다 교쿄는 국내에서도 방영된 한일합작드라마 <프렌즈>에서 원빈과 함께 주연을 맡아 우리에게도 친숙한 인물이다. 2000년작 <한 여름의 메리 크리스마스>는 외딴 섬 타케토미를 배경으로 고아원에서 함께 자란 4명의 젊은이들이 18년만에 해후하면서 펼쳐지는 사랑과 미움, 질투와 우정을 다룬 드라마다. 반항적이고 고독한 이미지로 일본 여성팬을 사로잡고 있는 타케노우치 유타카는 베스트셀러를 영화화한 <냉정과 열정사이>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배우로 국내에 인터넷 팬카페가 있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나카타니 미키는 공포영화 <링> <라센> 등에서 주연을 맡아 일본에서 21세기를 빛낸 여배우 1위에 오르기도 했다. 문화방송 드라마넷도 <야마토 나데시코>(내년 1월5일 첫방 월~화) <도쿄 러브스토리>(7일 첫방 수~목) <춤추는 대수사선>(8일 첫방 금) 등 일본 후지텔레비전에서 제작한 화제작 3편을 내년 1월5일부터 밤 11시에 집중편성했다. 2000년작 <야마토 나데시코>는 올해 에스비에스가 김희선과 고수 주연으로 방영했던 <요조숙녀>의 원작으로 일본에서는 30% 가까운 시청률을 올릴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91년 1월 만화를 원작으로 방영된 <도쿄 러브스토리>는 수많은 화제를 낳았던 일본 트렌디 드라마의 효시로 꼽히는 작품으로 국내에서 최수종 최진실 주연으로 방영된 <질투>가 이 드라마를 베꼈다는 의혹을 낳기도 했다. 오브커즈의 보컬리스트 오다 카즈마사가 부른 <러브스토리는 갑자기>는 250만장이나 팔렸다. <춤추는 대수사선>은 이제 막 형사가 된 청년 아오시마를 주인공으로 형사를 영웅으로 만들지 않고 형사란 직업을 가진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인 이야기로서 눈물과 웃음, 사랑이 함께 어울린 휴먼 직장 드라마다. 영화로도 1·2편이 제작돼 많은 관객을 모았다. 문화방송 드라마넷은 이후 등을 방송할 예정이다. 에스비에스 드라마플러스는 내년 1월6일부터 일본 엔티브이(니혼티브이)제작 11부작 미니시리즈 <골든볼>을 주 2회 방영할 예정이다. 영화 <중경삼림> <친니친니> 등으로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금성무가 주연을 맡았다. 에스비에스 드라마플러스는 이외 <고쿠센> <별의 금화> <푸드 파이트> <이상적 결혼> 등 엔티브이 제작 드라마 6개에 대해서도 방영 판권을 구입해 놓고 시청자의 반응에 따라 순차적으로 방영할 계획이다. 홈 시지브이에서도 내년 초부터 일본에서 커다란 인기를 얻었던 <칩 러브>, <런치의 여왕> 등과 같은 트렌디 드라마를 방영할 예정이다. <칩 러브>는 신분차가 나는 남녀의 사랑을 다룬 멜로물이며, <런치의 여왕>은 남자들이 경영하는 한 레스토랑에 미모의 여인이 찾아오면서 시작되는 러브 스토리로 2002 후지 텔레비전의 히트작이다. 국내 시청자들이 일본 드라마를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해서는 예상이 엇갈린다. 박선진 오시엔 편성팀장은 “시청자들이 받아들이기 편한 작품과 여성에게 인기 있는 작품을 고른 데다 같은 동양권 작품이어서 다른 외화보다는 시청률이 높을 것”이라고 말했다. 손인철 문화방송 드라마넷 편성팀장은 “전략적인 편성보다 시험 편성 의미가 강하며 반응에 대해선 반신반의 상태다. 국내 드라마보다 강점이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본드라마의 경우 전부 사전제작된 데다 전체 길이가 11부작이 넘지 않는 등 한국보다는 선진적인 제작시스템 속에서 만들어져 시청률만 높으면 마구잡이로 늘리고 원고가 촬영 1주일 사이에 겨우 나오는 국내의 날림 제작환경에 큰 자극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새 DVD] 터미네이터3 외

터미네이터3 감독 조너선 모스토/출연 아놀드 슈워제네거, 닉 스탈, 크리스티나 로켄/화면비율 2.40:1 아나모픽/오디오 DD5.1, DTS 5.1 올 여름 기대 속에 개봉했으나 흥행이나 비평에서 모두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한 결과를 낸 <터미네이터>3편. 내용 뿐 아니라 특수효과에서도 1,2편에 처진다는 편을 받아서 그닥 매력적인 작품은 아니지만 디브이디에 실린 DTS 5.1사운드는 중량감과 힘이 넘치는 사운드를 들려준다. 감독과 아놀드 슈워제네거, 닉 스탈 등 주요 인물들의 코멘터리와 미공개 장면 특수효과 기법 등이 담겨 있다. 우성엔터테인먼트. 에일리언 SE 4부작 박스세트 감독 리들리 스콧(1부), 제임스 카메론(2부), 데이빗 핀처(3부), 장 피에르 쥬네(4부)/출연 시고니 위버, 톰 스케릿/화면비율 2.35:1,1.85:1,아나모픽 와이드스크린/오디오 DD 5.1 에스에프 명작 에일리언 시리즈를 하나의 박스로 묶었다. 각각의 편이 두장의 디스크에 스페셜 피처가 1장에 담겼다. ‘에이리언 혁명’, ‘공포의 경험-프로모션 특작단편 ‘79’ ‘리들리 스콧 Q&A’등 3편의 다큐멘터리를 실었고 디지털로 새롭게 리마스터링한 화질과 음질이 돋보인다. 프리 프로덕션, 프로덕션, 포스트 프로덕션 등 제작과정을 3단계로 나누어 그 과정을 낱낱이 공개한 방대한 서플이 무려 35시간이 이른다. 20세기폭스. 프렌즈 시즌5 감독 샘 사이먼, 제니퍼 애니스톤 등/출연 제니퍼 애니스톤, 커트니 콕스, 리사 쿠드로, 매튜 페리/화면비율 4:3 풀스크린/오디오 DD 5,1 케이블 채널에서 방영해 국내에서도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미국 시트콤 <프렌즈>의 5번째 시즌. 94년에 제작된 작품으로 4개의 디스크에 담겼다. 출연진 중 가장 많은 사랑을 얻은 제니퍼 애니스톤이 직접 연출한 에피소드도 있다. 출연진들의 코멘터리와 텔레비전 방영에서 잘려진 장면 등을 감상할 수 있다. 워너브라더스.

[새 영화] <루니 툰:백 인 액션>

영화에는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넘버 투’의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캐릭터들이 종종 등장한다. 미국의 워너사가 40년대에 창조한 애니메이션 루니툰 시리즈의 대피 덕도 그 중 하나다. 언제나 쿨한 벅스 바니와 달리 요란스럽게 설치고 다니지만 사냥꾼 엘모어의 총탄을 비롯해 온갖 수난을 당하면서 스타일 다 구기는 검은 오리, 대피 덕. 사람처럼 늙어 죽지도 못하는 탓에 정말이지 ‘영원한’ 넘버 투로 살아가야 하는 이 대피의 슬프면서도 우스운 운명을 모티브로 루니 툰 시리즈의 실사 애니메이션 <루니 툰:백 인 액션>이 <스페이스 잼> 이후 7년 만에 극장에 돌아왔다. 워너사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절대강자인 벅스 바니에 가려져 지내온 대피는 어느날 부사장 케이트(지나 엘프만)로부터 해고당한다. 모든 계층에서 고른 사랑을 받는 벅스 바니와 달리 “오로지 루저(실패자)들에게만 사랑받는다”는 것이 그 이유. 조그만 두뇌에 자존심을 관할하는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 듯 보이는 대피는 낙심할 새도 없이 넘버 투 근성을 발휘해 자신과 함께 해고된 스턴트 배우 지망생 디제이(브랜든 프레이저)에게 들러붙는다. 그리고 아버지의 납치사건으로 인해 디제이가 엄청난 음모에 휘말리면서 대피도 얼떨결에 모험에 휩쓸린다. 모든 실사 애니메이션의 운명이 그렇듯 <루니 툰:백 인 액션>에서도 무대의 주인은 실제 인물들이 아니라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이다. 근육질의 힘이 넘치는 브랜든 프레이저라 하더라도 커다란 상자에 깔렸다가 쥐포처럼 납작해진 몸에 공기를 불어넣거나 떨어져 나간 신체의 일부를 태연하게 갖다 붙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촬영 스튜디오에서 라스베가스, 파리와 아프리카 정글까지의 갈짓자로 종횡무진하는 이 모험에서 항상 시끌벅적한 에피소드를 만들어내는 건 대피 덕과 벅스 바니를 비롯한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이고 실제 인물들은 허덕거리며 쫓아가기 바쁘다. 그러니 실제인물인 악당 에크미 주식회사 회장(스티브 마틴)의 실패는 불보듯 뻔한 결과일 수밖에. <루니 툰:백 인 액션>의 재미는 악당과의 한판 승부라는 큰 줄기보다 텔레비전 시리즈 때부터도 유명한 ‘어른 취향’의 지적인 유머가 버무려진 잔가지들에 있다. 벅스 바니가 샤워를 하다가 케이트를 보고 놀라는 장면이 베낀 <싸이코>의 유명한 샤워 장면을 비롯해 <스타워즈>의 광선검으로 변하는 벅스의 당근 등 고전영화의 패러디가 줄줄이 등장한다. 특히 루브르 박물관에서 벅스와 대피가 엘모어에게 쫓기며 달리의 <기억의 영속>, 뭉크의 <절규> 등 유명한 회화의 일부로 그림의 패턴과 스타일에 따라서 위장하는 장면은 영화의 하이라이트. <그렘린> 시리즈를 비롯해 <이너 스페이스> <마티니> <스몰 솔져> 등 할리우드 안에서 조금씩 옆으로 새는 영화를 만들어 온 조 단테의 개성이 제법 잘 버무려진 작품이다. 24일 개봉.

오즈 야스지로 탄생 100주년, 그 신화의 현장 도쿄를 가다 [2]

1. 오즈를 추억하는 일본의 풍경 이제 오즈 야스지로가 태어난 지 100년이 지났고, 그가 죽은 뒤로 40년이 흘렀다. 그는 태어날 때 이미 약속이나 한 듯이 12월12일 육십 번째 생일날 다시 돌아갔다. 자신의 영화처럼 ‘완전한 구도’로 살다간 그 우연성을 작은 신화로서 보고 싶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일까? 오즈 100주년에 맞춰 현지의 공기를 직접 느낀다는 취지하에 도쿄로 향하기 전날, 엘비스 프레슬리를 찾아 멤피스로 향하는 <미스터리 트레인>의 첫 번째 에피소드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때때로 제어할 수 있는 신화가 동기를 부여한다고 생각한다. 지금처럼. 오즈 100주년에 맞춰 일본의 NHK는 거의 매일 저녁 그의 영화를 텔레비전에서 상영하고 있었다. 행선지 곳곳에서 그들의 취재카메라를 마주하기도 했다. 아카이브이면서 상영관이기도 한 도쿄필름센터는 11월18일에서 2004년 1월25일까지 예정되어 있는 오즈의 회고전을 상영 중이었다. 우선 회고전의 상영목록에는 현존하는 오즈의 가장 오래된 영화 <젊은 날>(1929)이 들어 있다. 오즈 영화의 영원한 아버지상으로 잘 알려져 있는 배우 류치슈가 두 주인공의 친구로 잠깐 등장한다. <젊은 날>은 류치슈가 오즈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첫 작품이다. 그리고, 1989년 평론가 야마네 사다오가 극적으로 발견해낸 <못 말리는 꼬마>와 1997년 필름센터가 발견해낸 <일본식 싸움친구> 역시 포함되어 있다. 오즈 회고전의 기획자이기도 한 오카다 히데노리는 도쿄필름센터가 “개인 소장자에게 9.5mm 축소판 필름으로 기증받은 <일본식 싸움친구>가 이토 다이스케의 <창인창마> 이후 두 번째로 디지털 작업을 통해 35mm로 복원된 작품”이라는 점과 그 보관 형태인 “9.5mm 필름은 전쟁 전 지금의 비디오처럼 일반인들에게 팔 수도 있고, 개인 소장할 수 있는 축소판”이라는 사실을 들려준다. “주로 개인 소장용으로서의 축소판이었기 때문에 일부분만 갖고 있다”는 아쉬움까지 토로하면서. 도쿄필름센터의 7층 전시장에서는 ‘젊은 날: 쇼치쿠 가마타 스튜디오 시기의 오즈와 시미즈’라는 제목의 포스터 및 스틸 사진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이 전시는 시미즈와 오즈가 활동하던 가마타 스튜디오 시절 쇼치쿠 작품 중 현존하지 않는 작품들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시미즈 히로시는 오즈와 같은 해에 쇼치쿠에 입사했으며 오랜 기간 오즈의 친구이기도 했다. 시미즈 히로시의 경우에는 포스터까지 남아 있지만, 오즈는 17편의 작품에 해당하는 스틸 사진들만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눈에 띄는 것이 있었는데, 오즈의 최초 서민극으로 알려져 있는 <회사원 생활>에 대해 그가 직접 스토리와 작품을 소개한 글이 실려 있는 <제국간 뉴스>라는 팸플릿이다. 오즈는 “시나리오 작가 노다 고고, 그리고 애써준 출연자들과 함께 열심히 한편을 만들었다. 비판과 조언을 주시면 달게 받겠다”라는 말로 맺음하고 있다. 만약 올 초 기타 가마쿠라 박물관에 갈 수 있었더라면 오즈의 유족들이 내놓은 오즈 유품 전시회를 볼 수 있는 기회도 있었을 것이다. 2. 묘비명의 단 한 글자, 無 그러나 그 지나가버린 경험을 대신하여 <지금, 오즈>라는 책에서 얻은 간접적인 몇 가지 정보를 제공한다. 이 책에 의하면, 오즈는 촬영 중에 항상 면으로 된 모자를 썼고 개인적인 자리에서는 중절모를 썼다고 한다. 촬영장에서도 정장 바지를 입었고 작업복을 입는 일은 결코 없었다. 양말조차 “이게 아니면 안 되지”라는 신념으로 미국제와 영국제를 신었고, 그가 사용한 물품 중에는 수입품과 주문제 작품이 많았다. 또한, 그는 좋아하는 식당의 이름과 약도를 적어둔 ‘식도락 수첩’을 따로 들고 다녔다고 한다. 그는 영화에서만이 아니라 생활에서도 예의 패턴을 유지했으며, 또한 불균질한 ‘모던 보이’였다. 그리고, 그의 영화에 음식에 대한 이야기가 멈추지 않는 데에도 이유가 있는 셈이다. 되돌아가, 취재 첫날 방문한 곳은 도쿄 근방 기타-가마쿠라 지역에 있는 엔가쿠지 사원이다. 사실, 공인된 ‘길치’가 도쿄의 전철을 탄다는 것은 난수표 같은 전광판에 하루를 맡기는 일이나 진배없다. 그러면서도 찾아간다. 그곳에 오즈가 묻혀 있기 때문이다. 막부시대에 지어진 사원이라는 관광책자의 설명은 아무 의미가 없다. 오즈를 찾아간 사람에게 그곳은 아버지와 며느리가 같이 산책을 하고, 노부부가 나란히 앉아 풍경을 바라보고, 헤어지기 직전의 가족이 슬픈 나들이를 하는 ‘오즈의 사원’일 뿐이고, 그가 묻힌 곳일 뿐이다. 그의 묘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기념품 가게 아주머니조차 그가 여기 묻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느낄 수 있다. 그의 무덤 앞에 서자, 오즈가 엔가쿠지의 스님에게 받아 평소에도 마음에 두고 즐겼다는 단 한 글자가 새겨져 있다. ‘無.’ “깊고, 모순된 감정을 수용하는 것이 가능하고, 또한 그 감정을 일체화된 영원의 초월적인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 가능할 것 같은 형식”으로 오즈의 영화를 설명한 폴 슈레이더였다면 묘비에 새겨져 있는 ‘무’라는 한 글자가 자신의 불교철학적인 해석을 증명하는 개념으로 보였을 것이다. 한편, 일본영화 연구가 도널드 리치는 ‘무’에 대해 “비어 있음 그리고 침묵은 작품의 일부분으로서 긍정적인 요소가 된다”고 말하면서 오즈 영화의 의미없어 보이는 사물들의 포착이 사실은 감정을 담는 그릇의 역할을 하고, 그것은 새로운 틈을 만들어내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니라 세계 속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비어 있음 그 자체를 오즈가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3. 전통주의와 규범 파괴 서구 사람들은 쉽게 자신의 영화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지만 언젠가는 관심을 갖게 될 것이라고 한 오즈 자신의 예언은 그의 영화를 ‘일본적인 전통’ 혹은 동양적인 ‘선’(zen)의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의식으로 먼저 나타난 것이다(하지만 오즈의 영화가 ‘일본적’이라는 데에는 외국뿐만 아니라 실상 일본에서의 인식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오즈의 영화를 지배하는 로 포지션의 카메라는 일본 가옥에 맞춰진 일명 ‘다다미 숏’으로 설명되었고, 그의 영화에서 앙상하게 남아 있는 스토리는 어떤 정신적인 것의 반영이자 효과로서 인식되었다. 도널드 리치는 오즈가 <그 여인은 무엇을 잊어버렸나>를 만들기까지 “한계에 다다름, 스토리 없음”이라고 자주 불평했다는 것을 주시한다. 그리고 <도다가의 형제 자매들> 이후로 그런 말이 오즈의 노트에서 사라진 것은 바로 무언가 해결점을 찾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신형식주의자 데이비드 보드웰은 오즈의 영화를 전통문화에 근거해서 설명하는 이런 해석틀을 반박한다. 오히려 고전적인 할리우드 규범(norm)에 대한 혁신적인 저항자로 오즈의 위치를 바꾸려 한다. 그는 180도 가상선의 파괴와 360도 화면구성(하지만 이런 형식을 지닌 감독은 오즈의 동세대에도 역시 있었다), 그리고 짜여진 프레임 안에서 도상적으로 맞춰져 있는 피사체들의 구도 등을 들어 오즈를 모더니즘 예술가로 탈바꿈시킨다. 이런 형식이 할리우드의 관습적인 연속성을 뛰어넘는 대안으로서 오즈에게서 채택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데이비드 보드웰의 논점은 오즈를 모더니즘 논쟁의 예시로 몰아갔고, 그뒤로 이어지는 반론과 재반론은 애초 제기되었던 ‘오즈의 영화를 둘러싼 전통과 모더니즘의 논쟁’이기보다 ‘모더니즘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가’ 하는 원론적인 문제로 선회하게 된다. 논쟁은 일단 오즈의 영화가 쉽게 설명될 수 없는 자의적인 논리로 완성되었기 때문에 생겨난다. 오즈는 스스로 납득할 수 있다면 그것이 옳다고 믿었다. 하나의 예가 있다. 오즈의 편집기사였던 하마무라 요시야수는 오즈에게 시선의 매치가 틀렸으니 다시 찍자고 건의했다. 그러자고 동의한 오즈는 숏과 리버스 숏의 시선이 불일치하는 항상 그대로의 ‘틀린 방식’과 하마무라가 제기한 원래 ‘맞는 방식’ 둘 모두로 촬영했다. 그리고 이 둘을 비교해보고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음, 별 차이가 없군.” 그는 자의적으로 이해하고 있었지만, 누군가를 구체적으로 납득시키려고 하지는 않았다.

오즈 야스지로 탄생 100주년, 그 신화의 현장 도쿄를 가다 [4]

세계의 감독 6인이 말하는 오즈 야스지로 감독들이 오즈 야스지로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오로지 오즈에 대한 ‘헌사’로서 축소되지만은 않는다. 그들은 오즈를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 자신의 영화적 언어를 사용한다. 때문에 한명의 감독을 말하는 그 속에서 여섯 감독의 영화관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정도의 안내가 있다. 첫 번째, 요시다 요시시게는 심포지엄 발표 중 <만춘>의 부녀가 여관에서 머무르는 장면에는 근친상간의 코드가 있다고 지적한다(하스미 시게히코와 동일한 의견). 그 장면은 서로가 “성적 욕구를 느끼는 것”이며, “그들의 대사는 남녀 사이의 애정표현으로서의 그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이 뒤이어 마뇰 드 올리베이라와 허우샤오시엔의 적극적인 해석을 끌어들이는 계기가 된다. 두 번째, 일본의 중견 영화감독들에게서는 그들이 겪어온 ‘오즈 강박증’과 ‘탈출 욕망’의 경험사례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단순한 사물을 지그시 응시하는 예술 영화를 만들기 전까지 나는 오즈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내 영화는 할리우드영화처럼 큰 사건도 없고, 또 드라마적이지도 않다.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이후 내 영화에 대한 옹호자와 비판자가 나오기 시작했는데, 그때 그들 모두가 오즈를 거명했다. 지지자들은 내 영화를 옹호하기 위해 오즈를 말했고, 비판자는 오히려 그 부분을 비판했다. 그때마다 나는 내 영화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곤 했다. “초등학생의 인생은 드라마틱하지 않다. 스토리가 프레임 안에서 흘러넘치면 관객은 피곤해한다”라고. 그 점에서 오즈는 나의 변호사였다. 오즈의 영화에서도 역시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알아들을 수 없는 대사와 장면만으로 오즈의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도 첫눈에 무언가 새롭다고 느꼈다. 영화가 마치 음악을 듣는 것처럼 프레임에서 프레임으로 흐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부터 오즈를 존경하게 됐다. 나뿐만 아니라 그의 영화에 많은 감독들이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영화를 만드는 우리 각자는 상상적으로 오즈와 관계를 맺고 있다. 언젠가 빔 벤더스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오즈의 영화가 나에게 준 가장 큰 가르침은 사물을 예술적으로 보는 것”이라고. 그걸 듣고 왜 이 감독이 오즈 영화를 동경하는지 알게 되었다. 벤더스가 영화에 대해 얘기하는 것과 오즈가 최고라고 하는 것은 관계가 있다. 오즈는 예술을 가르쳐준 것이다. 평상시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 단순한 사물, 그것을 지그시 응시하는 예술을…. 이것이 오즈의 제일 중요한 점이다. 그래서 그의 영화에서는 ‘사물 그 자체’가 느껴진다. 그의 예술세계는 간단하고 평범하다. 장식없는 수수한 세계이다. 그러나 깊은 표현을 담고 있다. 이해시키려 하는 것도, 결과를 강제하려 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인위적으로 결과를 만들어내려 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저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영화 <달과 연못>을 오즈 감독과 ‘본다는 것’에 충실한 관객에게 바치고 싶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달과 연못>은 12월14일 심포지엄에 참석한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프리미어 상영했다.) 마뇰 드 올리베이라 산문적이어서 시적인... 먼저 오즈에게 오마주를 바치게 되어 영광스럽다. 그러나 솔직히 나는 오즈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에 대한 짧은 에세이 <소박과 순수의 철학자>라는 글을 쓰고, 파리에서 오즈의 훌륭한 영화 두편을 본 정도이다. 바로 <동경이야기>와 <꽁치의 맛>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두 작품만을 보고도 그가 인간을 깊이 이해하고 있고, 또 순화된 작품을 만들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즈의 영화에는 미조구치 겐지가 보여주는 리얼리스틱한 면을 넘어설 수 있을 만한 리듬감은 없다. 그러나 그보다 산문적이다. 그 점이 또 다른 종류의 시적인 힘을 갖게 한다. 이건 영화 <만춘>에 잘 나타나 있다.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오즈와 나의 공통점을 먼저 얘기하면 그것은 영화에 대한 애정, 그리고 감정의 표현법이다. 오즈의 작품에서 감정의 표현은 억제되어 있다. 나 역시 감정표현을 너무 드러내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보고 관객 자신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판단을 강요받기 때문이다. 그때의 감동은 결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동이 아니다. 그 점에서 <만춘>의 딸의 감정 역시 매우 억제되어 있다. 여기에는 감싸주고 보살펴주기를 필요로 하는 딸에게 더이상 그런 존재가 되어주지 못하는 아버지가 딸의 행복을 비는 깊은 애정이 승화되어 있다. 육체적인 느낌보다는 아버지로서 딸의 행복을 비는 사랑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섹스는 자연의 일부이고 육체적 상상이지 감정은 아니다. 일순간의 동요로 나오는 부분도 있다. 생물적인 욕망으로서의…. 그래서 <만춘>에서 아버지와 딸의 관계는 육체적인 관계 이상의 깊은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딸이 아버지를 떠나서 결혼을 하면 둘이 살아왔던 그 관계는 깨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애정에 대한 것이지 육체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요시다 감독의 말처럼 이 장면에 성적욕구가 표현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 생각에는 딸과 아버지의 애정관계를 보여주는 장면인 것 같다. (*마뇰 드 올리베이라의 생일 역시 오즈와 같은 12월12일이다. 그는 이 자리에서 오즈의 여배우 마리코 오카다에게 꽃다발을 선사받았다.) 허우샤오시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그만의 방법 <가배시광>을 어제 겨우 끝마쳤다. 이 영화를 만들기 전에 <만춘>과 <태어나 봤지만> <동경이야기>를 다시 보았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들이고, 특히 <태어나 봤지만>은 1985년에 내가 처음 본 오즈의 영화이다. 신기한 것은 오즈의 영화는 볼 때마다 인상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나는 그의 영화를 보면서 영화를 만드는 방식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오즈의 영화는 내게 있어 한마디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한다. 소설가 이탈로 칼비노의 글로 시작해보려 한다. 그는 어느 문학자의 글을 인용하고 있다. “사물의 사실은 표면에 숨겨져 있고 표상으로서 상징되어 있다. 그래서 문자라는 것은 보여지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를 연결시켜주는 것이다”라는.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사이를 어떻게 연결하느냐, 어떻게 설명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사물과 사실을 보여주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 점이 오즈 영화를 보면서 떠오르는 것이다. 오즈 감독은 삶의 직접적인 표면을 있는 그대로 담는다. 그러나 되풀이하여 보면 그것이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생활의 디테일, 즉 감추어져 있는 듯한 작은 것들이 각자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깥에서 <만춘>의 딸과 아버지의 관계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듣고 있었는데 나도 거기에 대해 한마디 하고 싶다(허우샤오시엔은 영화 상영 직전 필름을 최종 점검하고 있었다). 나는 이 둘의 관계를 통해 가정과 집에 대한 지배권, 쉽게 말하면 누가 이 집을 지키고 있는가 그리고 담당하고 있는가에 대한 것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요즘 나이가 많아져서 집에 있는 경우가 많다. 아내는 내가 집에 있는 것을 싫어하고 외출하기를 원한다. 아내는 자신의 영역인 집에 내가 오랫동안 있는 것을 싫어하는 것 같다. 28살짜리 딸도 마찬가지다. 그녀들에게 집은 일상을 공유해나가는 그녀들만의 영역인 것이다. <만춘>으로 다시 돌아가서 보면 하라 세스코가 밝은 표정으로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손님과 장기인지 트럼펫을 하고 있는데, 그녀는 웃는 미소를 지으면서 인사를 하지만 그뒤의 표정은 뭔가 못마땅해하고 있다. 자기의 집에 허락도 없이 누군가 침범해 있다고 느끼는 것 같다. 이 컷에서 <만춘>의 아버지와 딸의 관계를 확실히 느꼈다. 하라 세츠코가 연기한 딸은 성적 욕구를 느끼는 남성으로서의 아버지를 떠나기 싫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엄마 대신에 지켜왔던 아버지를 포함하여, 즉 집(가정)을 떠나기 싫은 것인지 모른다. 이것은 일상 그 자체이다. 이러한 사소한 감정의 변화는 계속된다. 일상에서 느끼는 여성의 복잡 미묘한 감정을 디테일하게 그려내는 것은 어려운 일인데 오즈는 이 부분을 놓치지 않고 담아내고 있다고 본다. 아마도 그의 독특한 스타일이 그걸 가능하게 하지 않았나 하고 생각한다. 고레다 히로카즈 부자연스럽고 위반적이지만 역동적인 힘 대학에 입학했던 20살, 오즈의 영화 <태어나 봤지만>과 <낙제는 했지만>을 보았다. 분명 이때까지 본 쇼치쿠의 영화와는 다른 인상을 받았다. 뒤이어 <만춘>과 <동경이야기>를 봤는데, 한마디로 그 느낌은 부자연스럽고, ‘위반’적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원래 시나리오 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오즈의 영화를 보고 처음 강하게 받은 인상은 ‘대사가 반복된다’는 점이었다. 이 점이 매우 의문스러웠다. 특히 류 치슈의 의미없는 듯한 대사가 반복될수록 어딘지 모르게 리듬이 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정말 부자연스럽다고 느끼면서도 나의 시나리오 안에 그것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오즈를 모방하는 형태로 대사의 반복을 집어넣어본 것이다. 내가 영상이라는 매체를 접한 것은 20대 후반인데 그 이전까지는 이런 식으로 그를 모방하면서 시나리오에 대한 공부를 해왔다. 그리고 30대가 되어 <환상의 빛>으로 감독 데뷔를 했다. 나는 영화 속 어떤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낡은 일본 가옥 한채를 찾았다. 그리고는 ‘이렇게 넓은 집이면 오즈의 영화처럼 찍을 수 있겠는데’ 하고 생각했다. 큰 툇마루와 10조의 다다미를 찍을 때 표준 렌즈를 사용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삐딱한 여러 각도를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역시 제일 안정감 있는 각도는 이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오즈 영화 같은 숏이 나와버린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모방은 결과적으로 실패로 끝났다. 표면적으로 나의 영화는 오즈 영화를 많이 모방했지만 내가 찍은 것이 정지되어 있고 정적인 듯한 느낌이라면 오즈의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정적이지만 그 안에는 역동적인 감정이 흐른다. 이것이 차이이다. 그는 가장 동적인 순간에도 정적인 느낌을 사용하여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 실패로부터 ‘이제 오즈로부터 벗어나자’라고 각오했다. 그래서 ‘나만의 시선으로 영화를 만들자’고 다짐했다. 특히,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를 만들던 시기의 나의 자유로웠던 감각으로 돌아가자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지금 내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이다. 이것이 내가 윤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영화관이다. 아오야마 신지 ’나란히’신으로 중독시키다 나는 선배들과 달리 오즈와 아무 관계없는 영화를 만들려고 했고, 또 그것이 가능할 거라 믿었다. 하지만 영화를 만들면서 난관에 부딪혔을 때는 이런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오즈라면 이때 어떻게 했을까 하고. 어제 나는 텔레비전에서 <태어나 봤지만>을 보았다. 굉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거기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옆으로 나란히 있는 형제장면이었다. 이 ‘나란히’ 기법이 새로운 한편의 영화, 아니 몇십편의 영화가 된다는 것이 나에게는 놀라운 현상이었다. 이런 장면을 일본영화 안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영화들의 나란히 신을 보면서 오즈를 떠올리는 것은 오직 나뿐일까? 예를 들어 마키노 마사히로 감독의 <죽어주세요>에서 다카쿠라 겐과 동료가 나란히 있는 신, 그리고 후카사쿠 긴지 감독의 <의리없는 전쟁>에서 고바야시 아키라와 다른 인물이 나란히 있는 신은 결국 오즈를 연상시킨다. 후카사쿠 긴지는 오즈와 정말 관계가 없는 사람인데도 말이다. 그리고 내 영화 <유레카>의 경우에도 인물들이 나란히 서 있는 신이 있는데, 오즈의 영향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오히려 이 장면을 <와일드 번치>에 가깝다고 생각하고 있다- 결국 오즈에서 벗어나지 못한 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오즈에게서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나지 못하는 ‘오즈 중독’에 대한 내 모습이기도 하다. 오즈 중독에 대한 더 명확한 예는 최근에 만든 <달의 사막>이라는 영화이다. 이 영화는 일부러 일본 가옥을 넣었고 카메라의 위치도 오즈처럼 하려 했다. 그리고 이야기도 가족의 일상을 다루었다. 그러나 이렇게 전부 오즈식으로 하면서도 그와 비슷하지 않은, 좀더 새로운 영화가 되는 것에 도전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좌절’했다. 왠지 모르게 지루해진 것이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그렇다면 오즈는 좌절을 한 적이 없을까’라고 말이다. 최근에 오즈의 초기작 <즐겁게 걸어라>를 봤는데 그것을 보면서 직관적으로 느낀 것이 있다. 오즈도 뭔가를 모방하려 하다가 좌절한 경우라는 것이다. 즉 미국영화를 모방하려고 하다가 좌절을 경험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오즈의 경우는 그 좌절로 인해 오히려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좀더 말하자면, 야마나카 사다오의 <인정지풍선>의 어떤 숏은 <즐겁게 걸어라>의 이동 숏과 정말 닮아 있다. <인정지 풍선>의 경우는 오즈의 숏을 모방하고 있지만 그것을 극복해서 새로운 느낌을 주는 데 성공하고 있다(오즈의 영화가 야마나카 사다오 영화보다 훨씬 전의 영화이다). 다시 말하면 오즈가 미국영화를 극복하지 못하고 좌절한 경우, 그리고 야마나카 사다오가 오즈를 염두에 두었지만 극복한 경우가 나에게 큰힘을 준다. 오즈도 좌절했다는 점, 그를 모방한 또 다른 감독이 오즈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은 나에게 편안한 마음을 주고 있다. 구로사와 기요시 그는 우리의 무의식이다 오즈 영화를 처음 본 것은 20년 전인 1980년 초 필름센터에서 하는 오즈 회고전에서였다. 그때 거의 전 작품을 보았다. 보기 전에 나는 오즈의 영화가 일본의 일상에 대해 담담하고 평화롭게 그려내는 홈드라마라고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본 것은 정반대였다. 이것은 아마 오즈 영화의 스테레오 타입을 부수고 재평가하자는 그때의 분위기와도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오즈의 영화를 보고 나서는 뭔가 부자연스럽고 위반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또한, 8mm영화를 찍을 때는 오즈를 응용하자는 분위기의 한편에 속해 있었던 사람 중 하나였다. 카메라의 포지션과 시선, 즉 연출을 모방해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고레다 감독이 지적한 것처럼, 오즈를 흉내내고, 류치슈의 연기를 그대로 흉내내는 연기를 시킬 수는 있었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어느 때부터 오즈에 대한 모방을 그만두었다. ‘오즈가 의도했던 것은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도 그만두었다. ‘오즈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이때 내가 극단적으로 싫어하게 된 것이 일본 전통 가옥 안을 찍는 것이었다. ‘가능한 한 집안으로 들어가지 말자’라고 다짐했을 정도이다. 하지만, <강령>이라는 호러영화를 찍었을 때, 어쩔 수 없이 일본 가옥 안을 찍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오즈는 피하자’라는 강박관념을 되새기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집안에 들어간 촬영기사는 갑자기 카메라의 높이를 낮추고 있었다. 주인공인 야쿠쇼 고지 역시 자신도 모르게 움직임을 고정된 카메라에 맞추고 있었다. 그때까지 나는 그들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정말 마술 같은 일이었다. 촬영기사와 배우들 역시 오즈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 영화의 일본 가옥신만큼은 오즈의 영화처럼 나와버렸다. 사실 지금은 오즈를 의식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이렇게 강하게 거부하는 것 역시 이전에 그에게 강하게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오즈에 대해서 알지 못한 채로, 그가 뭘 하려고 했는지에 대해서도 수수께끼로 남겨둔 채로, 나만의 다른 연출을 생각하려 하고 있다. 어떤 식으로도 결코 그를 스쳐지나갈 수 없다 '오즈 스타일'을 외면해온 아오야마 신지 감독 -방금 오즈에게 헌정하는 허우샤오시엔의 영화를 보았다. 우선 느낌이 어떤가. =예전에 허우샤오시엔의 <연연풍진>을 본 적이 있는데 갑자기 그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받았던 느낌이 되살아는 것 같다. -그렇다면 오즈의 영화와 허우샤오시엔의 지금 이 영화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오즈가 살았던 시대의 윤리관과 현대 허우샤오시엔이 살고 있는 현대의 윤리관을 비교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차이이다. 예를 들어 딸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 부모들은 어떻게 딸의 인생을 받아들일 것인가에 차이가 있다. 허우샤오시엔의 <가베시광>에서는 오즈가 살았던 시대에서처럼 아버지가 딸의 인생에 관여하지 않는다. -우리가 다른 일본 감독보다도 당신을 꼭 인터뷰하고 싶었던 이유는 오즈의 영화적 스타일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한 감독이 오즈에 대한 생각을 들려준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런 당신에게서 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학창 시절 오즈의 영화를 많이 봐서 그 기억이 크다. 하지만 감독이 되어 영화를 만들면서는 오즈의 역량을 벗어나는 것에 대해 생각했기 때문에 멀리 떨어질 수 있었던 것 같다. 예전에는 나 역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의 입장에서 그의 영화 스타일에서 되도록 멀리 떨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꼭 그렇게만은 생각하지 않는다. 이 심포지엄의 의의 역시 오즈에 대한 생각을 어떤 모습으로든지 변화하도록 하는 데 있는 것 같다. 오즈는 어떤 식으로도 우리에게 결코 스쳐지나갈 수 없는 감독이다. 지금으로서는 그의 영화를 지그시 바라보고 살려내는 것이 나의 역할 중 하나라고까지 생각한다. -이방인의 시선으로서 보자면, 왜 나루세, 미조구치, 구로사와보다도 오즈가 유독 일본 영화감독들의 아버지상으로 말해지는지 궁금하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다소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이다. 일본의 감독들은 각자 자신만의 아버지상을 갖고 있다. 그들마다 다양한 오마주를 느끼는 감독이 따로 있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나는 일본인으로서가 아니라 국적과 상관없이 영화인으로서 오즈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심포지엄의 참석자들 중 가장 흥미롭게 들은 발표는 무엇이었나. =사실은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내용 중 어떤 면이 남았고, 계속 나를 붙잡고 있었다. 바로 페드로 코스타 감독이 말한 내용이다. 영화에 대한 진실과 거짓의 경계선에 대한 문제이다. 영화의 진실은 어디까지인가 하는…. 영화는 거짓말이다. 하지만 또 진실이기도 하다. 그 경계선이 가장 큰 문제이다. 예술이 아무리 발달한다고 해도 그 문제는 남는다. 영화의 거짓말은 만들 수 있는 부분이 있고, 또 그렇지 못한 부분이 있다. 거기에서 진실을 어떻게 느낄 수 있는가 하는 그런 부분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오즈의 영화 중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품이 있다면 들려달라. 그 이유와 함께. =가장 좋아하는 오즈의 영화는 <조춘> <동경의 황혼> <피안화>이다. 이유는 그 영화 모두에 다카하시 데이지라는 배우가 나오기 때문이다. 나는 그 영화들 속에서 다카하시 데이지가 나오는 신을 무척 좋아한다. 왠지 그 배우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쉽게 동일화하게 된다.

<반지의 제왕>으로 전환점 맞은 뉴질랜드 영화산업 [2]

개방적이고 유연하고 합리적인 키위들 피터 잭슨이 아무리 걸출한 인재라 해도, 불과 5년 사이 영화제작의 인프라를 홀로 만들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여전히 의문이 남는 이 대목에서 뉴질랜드인들은 그들의 고유한 성향과 재능을 언급한다. 나머지 세상과 동떨어져 있는 남쪽의 작은 섬나라 뉴질랜드는 외부의 도움을 쉽게 받을 수 없는 곳. “창의적이고 사고가 유연하며 상황 대처능력이 뛰어나다”는 강점이 그런 고립과 결핍에서 비롯됐다는 설명이다. 해외 진출을 지향하는 적극적이고 개방적인 성향도 한몫했다. “미국인은 인구의 10% 정도만이 여권을 갖고 있다. 나라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뉴질랜드인들은 해외 교류의 필요성을 절감해왔고, 기질적으로도 여행을 즐긴다. 이런 진취적 기상이 창조성의 근간을 이룬다. 펀딩부터 세일즈까지 자국영화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하는 뉴질랜드필름커미션의 대표 루스 할리의 분석이다. 할리우드에서 뉴질랜드로 역이주한 케이스로, 시각효과 등의 후반작업 전문회사 옥토버에서 일하는 딘 라이언은 뉴질랜드 사람들의 “가족 중심주의”를 중요한 미덕으로 꼽는다. 영화 인력 사이에 네트워크가 잘 형성돼 있어 마치 “하나의 대가족”처럼 공조하는 풍토가 그로부터 기인한다는 것이다. 피터 잭슨이 소유주인 필름 유니트에는 첨단시설 확충은 물론 작업 중인 영화인들을 위한 극장과 식당, 그리고 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이다. 2500만NZ달러 프로젝트로 알려진 이 증축 계획은 뉴질랜드 안팎의 재능있는 젊은 영화인들을 불러모으게 될 것이다. 이런 성향은 합리적인 인력 시스템으로 이어진다. 필름 뉴질랜드와 필름 유니트에 몸담고 있는 마이클 스티븐스는 ‘한국통’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실미도>의 뉴질랜드 로케이션 현장을 지켜보며 그 엄청난 스탭 수에 놀랐다고 전한다. 도제 시스템의 전통도 없고, 적은 인원의 스탭이 여러 분야를 겸임하는 뉴질랜드의 촬영현장과는 사뭇 달랐기 때문. “비용의 효율성은 노동력에도 해당되는 얘기다. 단순히 뉴질랜드 영화인들의 인건비가 저렴하다는 뜻이 아니라 더 적은 인원으로 현장 운용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다들 그렇게 훈련을 받아왔다.” 대부대와 고비용을 영화의 완성도와 직결시키는 풍토가 만연한 충무로에서 한번쯤 되새겨볼 만한 충고다. 정부의 적극지원과 피터 잭슨의 재투자 이런 물적 인적 인프라 형성이 가능했던 것은 물론 제도적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부 차원에서 자국영화에 매년 1억NZ달러를 지원해주는 것은 이제 전통이 됐고, 해외 프로덕션 유치를 위한 경쟁력 있는 제도를 제정하고 또 시행하는 중이다. 호주나 캐나다보다 환율이 낮다는 것도 매력적이고, 공산품 수입에 관세를 붙이지 않아 소품이나 장비 출입이 자유롭다는 이점도 크게 작용하지만, 이보다 파격적인 것이 뉴질랜드 정부의 국내외 영화지원 정책이다. 뉴질랜드 정부는 자국영화에 한해서는 세금 면제를(<반지의 제왕>은 자국영화로 간주, 세금 감면 혜택을 받은 경우다), 외국영화에 대해서는 할인을 해준 바 있으며, 올 여름부터는 뉴질랜드에서 5천만NZ달러 이상을 소비하거나, 1500만NZ달러 이상의 제작 규모에서 70% 이상의 제작비를 소비하는 경우 해당 지출액의 12.5%를 되돌려주는 ‘현금 양도 계획’(cash grant scheme)을 시행하고 있다. 영화인 스스로 보험과 세금을 책임지는 자영 계약 시스템이 정착돼 있고, 필름 커미션과 필름 뉴질랜드 등의 영화기관에서 데이터베이스를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현지 인력의 운용을 수월하게 만드는 요인. 문제는 <반지의 제왕> 그 이후다. 로케이션의 유행은 가고 또 오는 것이며, 환율도 고정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반지의 제왕>의 ‘특수’는 오래가지 않을 수도 있다. 피터 잭슨 등이 벌여놓은 영화제작의 인프라는 자국 시장 규모에 비해선 턱없이 크기 때문에 일거리가 충분치 않으면 고급 인력들이 호주나 할리우드로 빠져나갈 공산도 크다. 그러나 뉴질랜드는 좀체 조바심을 내지 않는다. “뉴질랜드 영화산업은 업그레이드됐고, 이런 성과는 변하지 않는다”는 믿음과 자긍심 때문. 현재 뉴질랜드 영화계와 정계의 공통된 자각과 노력은 “자국영화를 키워 밸런스를 맞추자”는 것이다. 정부가 내년부터 자국영화 지원 규모를 2배 정도로 늘릴 것이라 발표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투자액을 늘리고 일자리를 늘리고 더 나아가 자국영화를 키워보리라는 계획인 것이다. 피터 잭슨에게도 자국 영화산업 육성과 관련한 장기적인 플랜이 있다. 믹싱 스튜디오, 데이터시네, 텔레시네 등을 구비한 피터 잭슨 소유의 후반작업 회사 필름 유니트에는 첨단 설비는 물론 극장, 식당, 아파트까지 들어서게 된다. “뉴질랜드 영화인, 저예산 독립영화 작가들이 이용해주길 바라는 마음”을 담은 계획. 이처럼 정부의 다각적이고 적극적인 지원과 피터 잭슨이라는 거물의 재투자 및 환원 노력은 외부자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다. 매우 특별한 케이스 스터디. ‘호기’를 맞은 뉴질랜드 영화산업이 국제 무대에서 진정한 도약을 이룰 것인지, 주시할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하겠다. <반지의 제왕>의 경제효과 절대반지는 뉴질랜드 사상 "최대 고용주" <반지의 제왕>의 1부와 2부, 두편의 영화가 전세계적으로 벌어들인 수익은 29억 달러. 이제 막 개봉한 3부의 수익까지 보태면 40억달러는 너끈히 넘을 것이다. 극장 매표수익과 DVD 판매수익 등 영화 자체가 벌어들이는 수익도 막대하지만, 뉴질랜드에서 이 영화를 계기로 벌어들이는 간접수익도 만만치 않다. 뉴질랜드의 지역신문 <도미니온 포스트>에 따르면, 이 영화의 제작 근거지였던 도시 웰링턴은 <반지의 제왕>을 통해 향후 10년간 2억5천만NZ달러를 벌어들일 전망이라고 한다. 사소한(?) 예로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의 월드 프리미어 행사만으로도 이미 700만NZ달러의 수익을 올린 것으로 나타났다. 이 영화를 통해 웰링턴이 얻은 홍보 효과는 2500만NZ달러의 가치를 지닌 것이다. <반지의 제왕>의 제작진은 1998년부터 2002년까지 제작비의 3/4 정도를 뉴질랜드에서 소비했고, 뉴질랜드 전역에서 2만3천명의 인력을 고용해 뉴질랜드 사상 “최대 고용주”로 기록된 바 있다. 이후 뉴질랜드 영화산업에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어, 2001년 뉴질랜드에서 제작 또는 촬영된 영화의 가치가 3억5200만달러였던 데 반해, 2002년엔 6억5천만달러로 2배 가까이 늘어나 있다. <반지의 제왕>은 관광산업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뉴질랜드 내 주요 로케이션을 둘러보는 그룹 투어가 크게 유행하고 있는데, 호비튼 세트가 지어진 마타마타의 농장 주인은 뉴라인을 설득, (최소한의) 세트의 흔적을 남긴 덕으로 이제까지 60만NZ달러를 벌어들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난 2002년 출간된 <반지의 제왕 로케이션 가이드북>은 뉴질랜드 내에서만 9만부 이상 팔려나갔고, 최근 그 개정판이 전세계적으로 시판됐다. 뉴질랜드를 찾는 관광객 사이에 이 책은 ‘바이블’로 통한다. 또한 웰링턴에 위치한 국립박물관에서 열린 <반지의 제왕> 소품 및 미니어처 전시회에는 모두 24만명이 다녀갔고, 현재 해외로 투어 중이다. 뉴질랜드는 향후 연간 1만명의 해외 관광객이 방문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외신기자클럽] 영화의 교류지가 된다는 것 (+불어원문)

타베르나스 사막은 지구상에서 가장 많이 촬영된 곳 중 하나다. 그럼에도 여기서 찍은 영화들 속 얘기가 스페인에서 전개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아프리카를 마주보고 유럽의 최남단에 있는 이 지역은 스크린에서는 이집트, 데스 밸리, 고비 사막, 나아가 머나먼 은하계의 행성으로 등장한다. 세르지오 레오네는 여기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출연한 ‘이름없는 사나이 3부작’(<황야의 무법자> <속 황야의 무법자> <석양의 무법자>-편집자 주), <석양의 갱들>과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를 찍었다. 20년이 넘도록 알메리아 스튜디오는 일종의 지중해상의 할리우드가 되어 <샬라코>(숀 코너리와 브리지트 바르도 출연), <코난>, <매드 맥스3>, <바론의 대모험> 같은 영화들의 촬영장소가 되었다. 알메리아에 잠시만 머물어도 유럽영화 스튜디오들이 잉그리드 버그만에서 커크 더글러스, 헨리 폰다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대스타들을 고용할 수 있었던 시절로 돌아가게 된다. 알메리아 주민들, 특히 바에서 마주치게 되는 주민들은 60년대와 70년대의 황금기를 잘 기억하고 있다. 몇몇은 기념이 되는 것들을 간직했고, 그중 율 브린너의 트레일러를 얻은 한 부인은 이를 식당으로 개조했다. 다른 이들은 눈을 반짝거리며 리 반 클리프와 함께 거나하게 취했던 것을, 또 더 멋지게는 라퀠 웰치와 블루스를 췄던 때를 추억한다. 이 시절의 촬영장에서는 영어 못지않게 이탈리아어, 프랑스어나 스페인어가 들리곤 했었다. 미국도 알메리아에서 찍은 유럽영화들 덕을 봤다. 레오네는 활력을 잃어가던 서부극 장르을 재고안했을 뿐만 아니라, 루카스나 스필버그(스필버그는 <인디아나 존스-최후의 성전>을 알메리아에서 찍었다)에게 영감을 줌으로써 70년대에 길을 터주었다. 오우삼, 쿠엔틴 타란티노 등 캘리포니아에 자리잡은 수십명의 다른 영화인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는 또 작곡가 엔니오 모리코네 등 수많은 재능있는 전문 기술진이 피어날 수 있게 하였고 그들은 또 스튜디오에 들어가게 되었다. 할리우드는 해외 스튜디오 출신 인재들을 받아들이면서 형성된 곳이다. 이 시스템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해외 스튜디오가 존속될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 알메리아에서는 주로 광고, 비디오 클립 그리고 텔레비전용 영화를 찍는다. 미국은 고갈되어가는 도식에서 벗어나려고 애쓰고 있지만, 불행히도 그들에게는 이런 알메리아에서 보이는 변화의 거울이 없다. 세계시장 정복을 위해 각국 토착 영화계를 질식시키는 과정에서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은 장기적인 안목에서 스스로 쇄신하는 데 없어선 안 되는 영향 요소들을 포기해버렸다. 한국의 쿼터제에 대한 논쟁에서 이 문제의식은 너무나도 부재한다. 문제는 자국영화를 이기적으로 보호하자는 것이 아니라 아이디어의 흐름과 영향 요소의 필수불가결한 순환을 보존함으로써 또 다른 알메리아 같은 곳을 만들어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전세계에, 그리고 두드러지게 미국영화에 이로운 교류지를 말이다. Retour à Almeria Le désert de Tabernas est l’un des paysages les plus filmés du monde. Pourtant, il est très rare que l’action des films qui y sont tournés se déroule en Espagne. Ultime frontière de l’Europe avant l’Afrique, cette région passe à l’écran pour l’Egypte, la Vallée de la mort, le désert de Gobi voire même des planètes de lointaines galaxies. Sergio Leone y tourna sa trilogie de « L’homme sans nom » avec Clint Eastwood ainsi qu’« Il était une fois la révolution » et « Il était une fois dans l’Ouest ». Pendant plus de vingt ans Almeria fut une sorte d’Hollywood sur Méditerranée qui accueillit les tournages de films comme « Shalako » (avec Sean Connery et Brigitte Bardot), « Conan le barbare », « Mad Max. Under the Thunder Dome », « Les aventures du baron de Münchhausen » … Un bref séjour à Almeria nous renvoie à un temps où les studios européens étaient capables d’employer les plus grandes stars américaines, d’Ingrid Bergman à Kirk Douglas ou Henry Fonda. Les habitants d’Almeria, surtout ceux que l’on croise dans les bars, se souviennent bien des grandes années 60 et 70. Certains ont gardé des souvenirs : une dame qui a hérité de la roulotte de Yul Bruyner l’a transformée en restaurant. D’autres se souviennent les yeux brillants d’une cuite avec Lee Van Cleef ou même mieux : d’un slow avec Raquel Welch… Sur les tournages de l’époque, on parlait aussi bien l’italien, le français ou l’espagnol que l’anglais. L’Amérique profita aussi des films européens tournés à Almeria : non seulement Leone réinventa un genre en perte de vitesse : le western, mais il ouvrit un couloir aux années 70 en inspirant Lucas ou Spielberg (qui tourna à Almeria « Indiana Jones et la dernière croisade »). Il entraîna dans son sillage John Woo, Quentin Tarantino et des dizaines d’autres cinéastes installés en Californie. Il permit aussi l’éclosion du compositeur Ennio Moriconne et de nombreux techniciens talentueux qui intégrèrent ensuite les studios. Hollywood s’est construit en incorporant des talents venus de studios étrangers. Pour que ce système perdure, encore faut-il qu’il subsiste des studios étrangers. Aujourd’hui à Almeria, on tourne surtout des publicités, des clips et des téléfilms. Un tel miroir manque cruellement à l’Amérique qui peine à sortir de schémas qui s’épuisent. En étouffant les cinémas locaux pour conquérir le marché mondial, les studios se sont privés sur le long terme d’influences indispensables à leur propre renouvellement. Cet aspect du problème est trop souvent absent du débat sur les quotas en Corée. Il ne s’agit pas de défendre égoïstement un cinéma national, mais de préserver un flux d’idées, une indispensable circulation d’influences qui permet de créer d’autres Almeria : carrefours bénéfiques à tout le monde et notamment au cinéma américain. Adrien Gombeaud Journaliste et critique de cinéma à la revue Positif.

일본 방송 교양프로그램 전면 개방

극장용 애니메이션은 2006년 전면 개방 생활정보 등을 담은 일본 방송의 교양프로그램이 내년 1월 1일부터 전면 개방된다. 이창동(李滄東) 문화관광부 장관은 30일 오후 기자회견을 갖고 방송과 애니메이션 분야에 대한 일본대중문화 4차 추가개방계획을 발표했다. 이 장관은 "케이블TV 및 위성방송 등 뉴미디어 매체를 우선적으로 가능한 범위 내에서 전면 개방하고, 라디오를 포함한 지상파방송은 국민정서와 청소년에 미칠 영향 등을 감안해 일부 장르만 확대 개방한다"고 발표했다. 이 계획에 따라 지상파 방송은 생활정보 등 교양프로그램, 국내 영화상영관에서 개봉된 영화를 전면 개방한다. 드라마는 한.일공동제작드라마에 한하여 개방하고, 일본어 가창은 국내에서 개최되는 일본대중가수 공연의 중계방영 및 일본가수의 국내방송출연 가창만 허용하기로 했다. 지상파방송의 경우 전면 개방된 교양프로와 영화 등은 한국어 더빙을 권고하기로 하고, 일본어 가창 뮤직비디오의 방영은 불허했다. 극장용 애니메이션과 버라이어티쇼, 토크쇼, 코미디 등 오락형 프로그램의 지상파방송 개방은 다음으로 미뤘다. 극장용 애니메이션은 2006년 1월 1일 전면 개방키로 했다. 케이블TV와 위성방송은 생활정보 등 교양프로그램, 국내 영화상영관에서 개봉된 영화 및 극장용 애니메이션, 일본어 가창 등 대부분의 방송프로그램을 전면 개방하기로 했다. 드라마는 '모든 연령 시청가' '7세이상 시청가' '12세이상 시청가' 등급 및 한.일 공동제작 드라마에 국한하여 부분 개방하기로 했다. 버라이어티쇼, 토크쇼, 코미디 등 오락형 프로그램은 다음에 개방할 계획이다. 정부는 지난 9월 16일 일본대중문화 4차 개방계획을 통해 영화, 음반, 게임 부문을 내년 1월 1일부터 전면개방한다고 발표했다. 다만 방송과 극장용 애니메이션은 각계 의견을 수렴한 뒤 연말에 발표하기로 했다가 이날 발표했다. 이 장관은 향후 5차 개방조치를 통해 방송부문을 전면 개방하되, 4차 개방에 따른 국민정서 및 청소년에 대한 영향 등을 충분히 고려해 전면 개방시기를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서울=연합뉴스) 다음은 이창동 장관과의 일문일답 한국의 텔레비전 드라마가 외국에서 호평받고 한국영화가 발전한 것이 일본대중문화 확대 개방에 영향을 끼쳤나.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일본대중문화는 우리문화가 일본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느냐에 따라 개방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전향적인 개방자세를 갖는다면 일본 국민들이 우리문화를 쉽게 받아들이는 긍정적 측면은 있다고 본다. 이번에 방송부문을 전면 개방하지 못한 이유는. 방송은 안방에 바로 전달되는 매체다. 국민정서에 직접적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신중하게 문제를 대했다. 저희 판단으로 볼 때 이번에 개방을 발표한 분야는 문제가 없겠지만, 지상파방송과 일부 케이블TV의 오락프로 등에서는 국민정서상 일본대중문화를 받아들일 완충장치가 필요하다는 것이 방송계와 방송위원회의 의견이었다. 다음번 방송개방은 전면 개방한다는 원칙하에 이 문제를 협의했다. 5차 개방시기는 언제쯤으로 잡고 있나. 4차 개방에 따른 영향평가를 면밀히 검토한 뒤 결과에 따라 결정하겠다.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전면 개방 시기를 2006년 1월 1일 이후로 잡았는데, 5차 개방은 그 후에 이뤄지나. 극장용 애니메이션은 개방을 2년간 유예했다. 한국 애니메이션이 태동단계인데다 창작기획력의 제고가 시급하기 때문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이 우리 업계에 미칠 파급효과 등을 감안해 업계의 의견을 신중히 수렴해 이같이 결정했다. 극장용 애니메이션 개방시기가 방송 전면 개방 시기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방송의 전면 개방 시기는 2006년 이전일 수도 있다. 케이블TV와 위성방송은 대부분 전면 개방하고 지상파방송은 부분 개방했는데 매체를 굳이 나눈 이유는. 지상파방송과 케이블TV 등의 영향력 차이 때문이다. 지상파방송의 개방범위에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지상파방송의 심의 기능을 신뢰할만 하기 때문에 (전면 개방을 할지라도) 그렇게 걱정을 안해도 된다고 봤지만 방송계와 방송위원회의 의견을 존중해 이같이 결정했다.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개방시기는 2006년 1월 1일로 확정했나. 그렇게 합의했다. 일정은 지킬 것이다. 고이즈미 총리가 내년에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할 것으로 보인다. 한일간 정치적 상황이 개방조치에 영향을 끼치나. 관계가 악화되면 개방을 취소할 수도 있나. 정치적인 것이 양국간 교류에 영향을 끼쳐서는 안된다고 본다. 대중문화는 국민정서와 밀접하게 관계돼 있다. 국민정서가 나빠지면 대중문화에 대한 태도도 달라진다. 그런 불행한 일이 없기 바란다. 2002년 월드컵 공동개최와 교류행사 등으로 양국간 이해와 교류가 증진됐다고 본다. 역사교과서 왜곡문제는 공동연구를 통해 양국 교과서에 반영하기로 했고, 신사참배 문제도 제3의 추모장소를 만든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