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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외신기자클럽] 중장년층 관객이 있다면? (+영어원문)

전세계적으로 영화관객 수를 살펴볼 때 가장 높은 객석점유율을 자랑하는 나라들은 아이슬란드, 아일랜드, 미국처럼 국민들이 1년에 평균 대여섯편의 영화를 보는 나라들이다. 최근 영화바람이 불고 나서도 평균적으로 한국인은 1년에 영화를 2.5편 정도 본다. 이 수치를 보고 아이슬란드인이나 미국인들이 한국 사람들보다 영화에 관심이 더 높다고 결론지을 수도 있다. 물론 사정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평균적인 20대 한국인은 아마 평균적인 20대 미국인만큼이나 (혹은 더 많이) 영화를 챙겨볼 것이다. 차이점은, 많은 나라에서 영화관람은 평생 가는 취미생활인데 반해 한국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결혼하고 나면 극장을 찾지 않는다는 데 있다. 미국에 가면 부모님과 친구분들이 최신 영화들을 논하는 것을 자주 듣지만, 60대 한국 사람들에게서 그런 얘기를 들어보긴 힘들다. 이런 점은 한국에서 만들어지는 영화의 종류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다. 할리우드에서는 중장년층을 겨냥한 영화를 상당수 제작한다. 결국 오스카상을 놓고 경쟁하게 되는 <씨비스킷>(사진)이나 <콜드 마운틴> 같은 영화들이 이런 부류에 속한다. 많은 젊은이들이 이 영화들을 보기는 하지만, 젊은이들과 더불어 중년층 관객들도 표를 사기 때문에 이들 영화가 이익을 내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영화가 20대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면 극장흥행에서 잊혀질 운명에 처한다. 이는 영화배우들에게도 밀접한 영향을 끼친다. 할리우드는 나이든 배우, 특히 여배우들에게 꽤 가혹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50대에 주연을 맡는 다이앤 키튼, 수잔 서랜던이나 골디 혼 같은 배우들이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중장년층 관객이 이들이 주연하는 영화를 보러 감으로써 이 배우들을 지원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1970년대나 80년대에 데뷔를 했던 한국 여배우 중에 여전히 주연을 차지하는 이들은 몇이나 되는가? 놀라운 배우 이미숙을 제외하곤 거의 없다. 항상 이래 왔던 것은 아니다. 1960년대에는 젊은 사람 늙은 사람 할 것 없이 한국인들이 극장을 가득 메웠고, 평균적으로 1년에 대여섯편의 영화를 관람했었다. 당시 흥행을 쥐는 열쇠는 김승호와 황정순 같은 아버지상, 어머니상이 주연인 가족 중심의 코미디와 멜로드라마였다. 하나 그뒤로는 이런 장르가 모두 드라마와 시트콤 형태로 텔레비전으로 옮겨져버렸다. 한국에서 영화관람은 계속 젊은이들만의 영역이 될 것인가? 메가박스, CGV와 롯데시네마 같은 데서는 이를 바꾸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중년 주부들이 영화관을 찾도록 마케팅 전략을 개발했고 가족 단위가 많이 사는 주거 중심지에 새로 극장들을 세웠다. 장기적으로 주5일근무도 이들에게 득이 될 수 있다. 10년이나 20년 내 한국에서 더 균형잡힌 관객층이 형성될지 모른다.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수익성만 아니라 특성 면에서 한국영화가 상당한 변화를 일으키게 될 것을 기대할 수 있다. In Search of the Older Moviegoer On a recent visit home to the U.S., I took my parents to see “Love Actually.” There were a lot of young people in the crowd, but I noticed quite a few middle-aged viewers as well. Having become used to the overwhelmingly young audiences that pack Korean theaters, it seemed a novelty to watch a film sitting among people in their 50s and 60s. If you look at film attendance across the world, the countries that boast the highest rates of attendance are places like Iceland, Ireland, and the U.S., where the average citizen watches 5-6 movies per year. The average Korean, even after the boom of recent years, only watches about 2 1/2 movies a year. One might look at these statistics and conclude that people in Iceland or the U.S. are much more interested in movies than people in Korea. Of course, it's not so simple. The average 20-year old Korean probably watches as many movies as the average 20-year old American (if not more). The difference is that in many other countries, moviegoing is a lifelong hobby, while in Korea most people stop going to the movies after they get married. When I visit the U.S., I often hear my parents and their friends discussing the latest movies, but I rarely hear such talk from Koreans in their 60s. This directly affects the kind of movies that are made in Korea. Hollywood makes a significant number of films that are targeted at older viewers. Films like “Seabiscuit” or “Cold Mountain” that end up competing for the Oscars often fall into this category - even though a lot of young people may watch them, the films turn a profit because both young people and middle-aged viewers line up to buy tickets. In Korea, however, if a film doesn't capture the interest of twenty-year olds, then it is more or less doomed to box-office oblivion. This has implications for actors and actresses as well. Hollywood is not kind to older actors - particularly women - but nonetheless there are still actresses like Diane Keaton, Susan Sarandon, or Goldie Hawn who are cast in starring roles in their 50s. The major reason for this is that older viewers support such stars by going to see their movies. How many Korean actresses who debuted in the 1970s or 1980s still take leading roles? Apart from the amazing Lee Mi-sook, there are hardly any. It hasn't always been this way. In the 1960s, old and young Koreans alike packed the theaters and the average Korean watched 5-6 movies a year. Family-centered comedies and melodramas starring father and mother figures such as Kim Seung-ho and Hwang Jeong-soon were a force at the box-office. Since then, however, these genres have all moved onto television in the form of TV dramas and sitcoms. Will moviegoing in Korea always remain the domain of the young? Companies such as Megabox, CGV, and Lotte Cinema are trying hard to change this. They have developed marketing strategies to encourage middle-aged housewives to go to the movies. They have built new theaters in residential areas where many families live. In the long term, a 5-day workweek may work to their advantage as well. Perhaps in 10 or 20 years, Korea will see a more evenly-balanced distribution of viewers. If this comes to pass, we can expect significant changes in the personality as well as the profitability of Korean cinema.

[인터뷰] 영화 <빙우> 김하늘

대학 신입생 경민(김하늘)은 산악반에 들어갔다가 환영회에서 졸업한 선배 중현(이성재)을 보고 첫눈에 반한다. 중현은 유부남임에도, 경민은 주저하지 않고 그에게 마음을 드러낸다. 둘 사이가 깊어지면서 중현이 결혼했다는 사실이 둘 모두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 시작한다. 경민의 자취방에 찾아온 중현 옆에 누워 경민이 말한다. “산이 좋아, 내가 좋아 나 나야 산이 좋지. 질투 안 해도 되고. 항상 찾아갈 수 있고.” 과묵한 중현은 말을 아끼지만 돌발적으로 그 감정이 드러난다. 뽑아낸 경민의 사랑니가 화로에 빠졌을 때, 데는 걸 주저하지 않고 손을 집어넣는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헤어져야 한다. 알래스카의 산 ‘아시아크’를 오르는 중현을 따라 경민은 이별여행 같은 산행을 떠난다. “이제 성숙했구나 얘기듣고 싶어요” 한국 최초로 시도되는 산악영화 〈빙우〉는 짙은 멜로다. 유부남과 사랑에 빠진 경민 곁에서 경민을 좋아하며 마음 졸이던 우성(송승헌)까지 가세해 닿지 못하는 슬픈 사랑의 곁가지를 친다. 회상장면이 절반을 넘는 이 영화에서 김하늘(26)은 회상 부분에서만 나온다. 그래서인지 생기있고 발랄한 모습이 더 아련하고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회상과 현재 장면의 기계적인 반복과 잦고 긴 클로스업으로 영화의 리듬이 처지는 걸, 김하늘의 모습이 메워준다. 데뷔 7년차에 5편의 필모그래피를 갖고 있는 김하늘은 중견배우에 가까운 데도 항상 신인처럼 느껴진다. 직접 보면 영화 화면에서보다 얼굴이 훨씬 가늘다. 차분할 것 같은데 말을 빨리 한다. “전에는 말도 행동도 되게 느렸거든요. 데뷔하고 3~4년 지날 때부터 급해지더라고요. 급하면 안 좋은데. 제가 욕심이 많은 것 같아요. 누구에게 지기 싫어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욕심이랄까. 예전에는 그게 티가 잘 안 났는데 요즘은 드러나나 봐요.” ‘청승 가련’형에서 ‘적극 당돌’형으로 제 이미지가 청순하고 눈물을 많이 빼서 청승에 가까웠는데, 〈빙우〉의 경민이는 당당하고 당돌하잖아요. 솔직하고 거리낌 없고. 영화는 멜로의 감성이지만, 경민이는 보여줄 게 많은 역이었어요. 이미지를 바꾸려고 시나리오를 고르는 건 힘들잖아요. 마침 이미지를 바꾸고 싶은 시점에서 거기 맞는 시나리오를 받게 된 건 행운이죠. 그래도 멜로인데 너무 당돌하고 적극적으로 나오면 관객들이 ‘쟤 왜 저래’ 할 수 있잖아요. 그 수위를 조절하는 데에 제일 신경을 썼어요. 김하늘이 말하는 김하늘의 필모그래피 〈바이 준〉은 지금의 제가 있게 된 시발점이고, 영화가 뭔가, 멋모르고 이런 거였구나. 아! 매력있네. 영화배우를 하고 싶게 만든 영화예요. 〈닥터 K〉는 김혜수 선배 보면서 놀란 게 많았어요. 그 순발력과 감정선을 잡아내는 걸 보면서 많이 배웠어요. 〈동감〉은 텔레비전 드라마 나온 뒤에 찍었거든요.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졌고, 잘 해야겠구나. 에너지가 솟기 시작했달까. 〈동갑내기 과외하기〉는 처음 해본 코미디이고, 연기 폭을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됐고. 전에는 멜로 영화 시나리오만 들어오더니 이 영화 뒤로는 코미디가 쏟아지는 거 있죠. 〈빙우〉는 멜로, 코미디 다 해본 뒤에 한 거니까 관객들로부터 ‘이제 성숙했구나’ 하는 얘기 듣고 싶어요. 2월에 개봉하는 〈그녀를 믿지 마세요〉는 코미디인데, 많이 망가져요. 〈동갑내기…〉에서 못했던 것 다 해봤어요. 김하늘의 연기관 전에는 연기 연습을 많이 했는데, 지금은 안 해요. 대사 톤이 굳어져 있으면 안 좋은 것 같아요. 상대배우와 안 맞을 수도 있고. 지금은 현장 분위기, 상대 배우와의 호흡을 맞추는 데에 더 신경을 써요. 감독들 보면 애드리브(즉흥 대사)를 좋아하는 쪽이 있고, 토씨 하나 못 바꾸게 하는 쪽이 있는데 전 후자가 좋아요. 애드리브를 하면 어떤 역을 해도 평소의 나와 비슷한 모습이 나오기 쉽잖아요. 또 시나리오를 쓸 때 캐릭터를 살리려고 고민하면서 대사를 썼을 텐데, 그게 살아나는 게 훨씬 좋은 것 같아요.

사운드 따로 화면 따로, <영어완전정복>

무게 잡는 선남선녀를 전면에 내세워왔던 김성수 감독이 어깨의 힘을 빼고 빈틈 많은 남녀 커플에 도전했다. <영어완전정복>은 애니메이션과 말풍선을 사용하는 등 만화적 기법을 주로 사용하면서도 <태양은 없다>의 홍기와 <비트>의 민을 합친 듯한 캐릭터 문수를 등장시켜 김성수표 코미디를 선보인다. 한국인이라면 한번쯤 겪었음직한 영어에 대한 스트레스를 소재로 가냘픈 이미지의 이나영을 푼수로 만든 <영어완전정복>은 세대차에 따른 선호도가 다를 수 있지만 관객 또한 어깨에 힘을 빼고 감상하다보면 ‘완전정복’까진 아니더라도 상당 부분 공감하며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리뷰용으로 배포된 샘플디스크에 담긴 DTS 트랙이 영상과의 싱크가 맞지 않았다. 양산품 출시시 제대로 정정되길 바라본다. 영주의 꿈장면은 채널 분리도를 맘껏 즐길 수 있을 정도로 사운드 자체는 녹음이 잘됐으나 영화의 특성상 사운드를 즐길 만한 영화장면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 약점이다. 장면전환이 많은 편집을 감독이 즐기는 만큼 네거필름의 텔레시네에 따른 필름의 상하 흔들림도 다른 영화에 비하여 잦은 편인데 민감한 분들이나 대화면으로 감상하는 분들에겐 마이너스로 작용될 수 있다. 일부 장면전환이 없는 부분서도 가끔 흔들림이 목격되기도 한다. 고속촬영에 따른 플리커링 현상으로 챕터5에선 잠시 번쩍거림이 목격되기도 하며 해상도 또한 뛰어난 편은 아니지만 DVD의 전반적인 색감은 좋다. 서플먼트에서 캐시 역의 안젤라 켈리가 감독판 이야기를 몇번 언급하고 있지만 현재로서는 감독판 DVD의 제작계획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삭제신 메뉴가 없는 것에 의아해 할 텐데 삭제신들은 ‘퀴즈완전정복’ 메뉴에 숨어 있다. 퀴즈 및 게임의 난이도가 제법 높은데 정답과 상관없이 모두 풀고 마지막 암호에 ENGLISH를 기입하면 23분가량의 ‘영주의 이혼일기’로 명명된 재미난 삭제신들을 만날 수 있다. 그래도 레벨별 정답을 꼭 알아야 되겠다는 분들을 위한 답안지 또한 이스트 에그로 숨겨져 있으니 찾아볼 것. 그외에도 영화 홈페이지에서도 볼 수 있었던 영화만큼 재미있는 청설모제작 5편의 플래시애니메이션과 여러 가지 메이킹 다큐, 인터뷰 영상들이 흥미롭고 푸짐하게 담겨져 있다. 메뉴화면 또한 앙증맞게 제작되었다. 조성효 2003년 I 김성수 I 1.85:1 아나모픽 I DD 5.1, DTS 5.1 한국어 I 한국어, 영어 자막 I 스타맥스 ▶▶▶ [구매하기]

[새 영화] 기타노 다케시의 <자토이치>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신작 〈자토이치〉가 30일 개봉한다. 지난해 베니스국제영화제 감독상 수상이라는 묵직한 명패에 걸맞지 않게, 이 영화는 기타노 다케시 영화 중에 가장 가볍다. 만화와 텔레비전 시리즈로 일본에서 유명한 맹인검객 자토이치 이야기를 각색하면서 기타노 다케시는 만화처럼 익살스럽고 경쾌하게 내달린다. 급기야 끝부분에선, 19세기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임에도 출연진들이 다수의 엑스트라와 함께 나와 서구식 탭댄스를 춘다. 흥겹고 안무가 잘 된, 그러나 내용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뚱딴지 같은 춤장면을 덤으로 얹어주는 그 배려가 미울 이유는 전혀 없지만 조금 실없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안마와 도박으로 먹고사는 떠돌이 맹인 검객 자토이치(기타노 다케시)가 한 마을에 도착한다. 이 마을은 악당 패거리 긴조 일당이 장악하고서 상인과 농민들을 등쳐먹고 산다. 같은 마을에 관직을 지녔던 무사 핫토리(아사노 다다노부)가 들어온다. 사랑하는, 그러나 병들어 누워 있는 한 여인을 위해 핫토리는 긴조 일당의 살인청부 무사로 ‘취직’한다. 영화 줄거리는 매우 단순하다. 긴조, 핫토리 패거리와 자토이치의 대결이다. 어릴 때 긴조 일당에게 부모을 잃고 게이샤로 떠도는 남매, 도박에 빠져 세월아 네월아 사는 노총각 신키치 등이 자토이치와 함께 다니면서 유머와 곁가지 이야기를 보태지만 깊이 들어가지 않는다. 핫토리의 경우도 병든 여인과의 전사를 살짝 내비치기만 할 뿐이다. 아무래도 볼거리는 칼싸움이다. 총에서 칼로 옮겨와서도 기타노 다케시답게 액션이 간결하다. 칼이 맞부딪치는 합이 세번 이상 가는 일이 없다. 대부분이 단칼에 승부가 나는 이 액션은 베는 동작 못지않게, 칼을 뽑기 전과 베고 난 뒤의 모습이 멋스럽다. 사지가 뎅겅 잘려 나가고, 피도 많이 솟구친다. 그러나 모든 것을 무화시켜버리는 듯한 폼을 잡는 〈하나비〉나 〈소나티네〉의 폭력 장면과 비교하면 깊이감이나 여운이 많이 떨어진다. 기타노 다케시는 스스로 연기한 자토이치의 캐릭터를, 마을의 착한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지 않고 단지 악당을 죽이기만 하는 쪽으로 바꿨다. 여기서 자토이치는 서부극의 혼자 다니는 주인공을 닮은 듯도 하지만, 가벼운 이 이야기에서 캐릭터가 뿜어내는 멋은 표피적인 쿨함에 그친다. 그래도 볼 근육 떠는 것만으로 복잡다기한 감정을 표현하는 기타노 다케시가 눈마저 감고 연기하는 맹인 무사의 모습은 충분히 그럴듯하다. 부담 없이 즐길 영화다.

그 영화(들)의 관객 연놈들은 멋있었다! [1]

지난 한해 한국영화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풍성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예리한 눈을 가진 당대의 논객들은 이런 상황을 어떻게 사유하며 곳곳에서 들려오는 풍년가의 틈새에서 무엇을 듣고 있을까. <씨네21>의 김소영, 정성일, 허문영 세 편집위원에게 자유로운 글을 청했고 영화평론가 정성일이 첫 번째 발언을 보내왔다. 우리가 아는 그 ‘정성일’이 <동갑내기 과외하기> <옥탑방 고양이> <그놈은 멋있었다>를 통해 새로운 관객의 도래를 확인하며 자신과의 거리 혹은 소통 불가능성을 진지하게 사유하는 모습은 신선한 충격을 준다. 세번에 걸쳐 이루어질 이 기획을 통해 우리 눈앞에 어떤 지형도가 펼쳐질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게 된다. 영화를 보면서도 잊을 수 없었던 내 사랑의 문제점을 되씹으면서 영화관을 나서는 나는 “이젠 좀 끝났으면!”이 아닌 “난 이해하고 싶어!”란 괴이한 소리를 지른다. _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괄호로 시작하기. (… 어느 날 갑자기 자기가 잘 알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아가야 할 때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불연속의 블록 안에 들어가서 만리장성 바깥으로 나오는 길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무한의 길 잃기 살아생전에는 나올 수 없을 것만 같은 복도들과 난간들. 그러니 차라리 창을 열고 뛰어내리자. 그것이 윈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귀여니 홈페이지의 자문자답: (귀여니의 질문) 지금 행복한가? (귀여니의 답) 불행하다. (나의 덧글) 나도 불행하다. 그러니까 이 글은 그 불행의 공감을 얻기 위한 나의 애원과도 같은 것이다. 생각해보라. 19살 소녀가 불행한 나라에서 함께 살면서 어떻게 46살 남자가 행복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 이 글은 대책없는 덧 글일 수밖에 없다. 수수께끼에로 뛰어들기, 그래서 귀여니의, 이햇님의, 김유리의, 혹은 (상투적으로 말하자면) 우리 시대의 표현기계가, 영화와 맺는 놀이의 관계, 용법, 감각, 그물코, 질서, 계열, 배열과 배제, 그냥 한마디로 출현과 힘 사이의 영토에로 무작정 뛰어내리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뛰어내리기에 앞서 우선 당부의 말씀. 이 글의 상당 부분의 표현이 일부 독자들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므로(*^^*), 심호흡을 하신 다음 그냥 단 한번에 쉬지 말고 스크롤로 채팅을 긁어 내려가듯이 소리내어 구어체로 읽으실 것. @#$% 이 글도 그렇게 쓰여졌음. 혹여 매우 신중하고 고상하신 독자들께서는 그냥 이 페이지를 건너뛰시기 바람. 그럼에도 읽고 나서 괴로워하는 것은(@@) 내 책임이 아님. (ㅠ_ㅠ) 이 글은 더 이어질 세편의 글 중의 하나임. 소년소녀들의 불행에 공감하기 위하여 첫 번째 테제. (그냥 웃자고 하는 말) 지금 하나의 유령이 한국영화를 떠돌고 있다. 그건 귀여니라는 사이버 유령이다. 처음에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한겨레>에서 함께 영화에 관해서 (매주 화요일) 글을 쓰고 있는 세 사람이 모여서 지난 한해 한국영화에 대해 돌아보면서 이야기해보자고 하였다. (복종하지 말고 논하라!) 나는 이걸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허걱. 깡이 이빠이데쓰네!!”) 그냥 무심코 재미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앗싸!) 언제나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걸 정색을 하고 이야기하건(과잉 진술의 사례들), 아니면 차를 마시면서 하건(과소 진술의 일상사), 혹은 가위 바위 보를 하며 술잔을 돌리면서 하건(과장 진술의 파티) 거기 무슨 차이가 있을까,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야기를 시작하자마자 그건 내 착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국영화를 끌어안는 방식이 다른 것만큼이나 그것을 쳐다보는 자리도 다르다는 사실을 그날 알게 되었다(<한겨레> 2003년 12월19일치, “소통 넓어진 호러-사극, 금기와의 대면 기념적, 그런데 ‘현재’는 어딨지?” 인터넷 사이트에는 신문보다 좀더 긴 좌담이 실려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말하여졌으나 실리지 않은 더 많은 이야기가 있다). 나는 김소영의 견해에 대해서 많은 부분 동의하고 있으며(특히 한국영화들의 트라우마의 협상을 놓고 벌이는 유희와 거짓 타협들을 주목하는 견해), 그만큼의 폭만큼 허문영의 생각이 나에게 새로운 문제의식을 준 것은 사실이다(양식미를 끌어안으면서 장르적으로 선회하고 있는 웰 메이드에로의 ‘낭만적’ 도착증). 하지만 거의 마지막 순간 김소영과 허문영이 (그리고 여기에 더해서 진행하던 임범과 열심히 타이핑을 하던 김은형이) 불현듯 나를 지금 미친 거 아냐, 라는 표정으로 본 순간을 나는 잘 기억한다(이햇님이라면 ‘당근’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 미친 넘이 겁 대가리를 상실했나!?”). 어쩌면 그럴 각오를 하고 그 말을 꺼낸 것인지도 모른다. 그건 내가 <동갑내기 과외하기>를 ‘긍정적으로, 창조적으로’ 다시 생각해보자고 말할 때였다. 그 순간의 침묵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조용함 속에서 그 무거움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들은 나를 ‘귀엽게’ 여기지 않았다. 사실 죽을 각오를 하고 꺼낸 말에 대해서 반격하는 대신 무시할 때 그건 나를 두번 죽이는 순간이었다. 아아, 그건 재수 털리는 순간이었다. (좌담을 정리하면서 사라진 말인데) 솔직히 말하면 <동갑내기 과외하기>는 나도(!) 환상적으로 지루했다(더 솔직히 말하면 정말 미안한 말인데 <동갑내기 과외하기>의 감독 이름을 아직도 외우지 못한다). 그건 그 전 해에 본 <엽기적인 그녀>를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하지만 그 영화를 연출한 곽재용은 그 전부터 잘 알고 있다). 나는 이런 영화를 보면서 김소영과 허문영이 나를 볼 때의 시선과 똑같은 말을 스스로 중얼거렸(었)다. 이 사람들 미친 거 아냐? 여전히 나의 관심은 허우샤오시엔과 마뇰 드 올리베이라, 임권택의 신작이다. 혹은 왕가위와 구로사와 기요시, 지아장커와 가와세 나오미, 그리고 아핏차풍 위라세타쿤, 또는 홍상수와 김기덕의 새로운 영화가 (귀여니의 말투를 빌려서) ‘빨리 보고 싶어서 돼져버리겠다!!’ 그러나 그건 나의 관심이며, 이 영화들을 보면서 열광했던 이들에게 나의 명단은 알 바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나와 함께 우리 시대에 살고 있으며, 그들과 우리 사이에 서 있을 서로의 서로에 대한 빗금을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는 단지 세대간의 차이로만 환원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거기 버티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좀더 나의 진술을 허락한다면 그런 거절할 수 없는 인상은 <동갑내기 과외하기>와 거의 동시에 도착한 <옥탑방 고양이> 때문이었다. 그걸 텔레비전 앞에서 멍청히 바라보면서 정말 거의 모든 신들이 저게 말이 되나, 라는 심정으로 보았다. 그런데도 끝까지 보았다. 그런 다음에 귀여니의 소설을 그해 여름에 읽게 되었다(<그놈은 멋있었다>). 나는 귀여니의 소설을 문학적으로 평가할 만한 자리에 있지 못하다. 하지만 적어도 김윤식 선생께서 귀여니의 소설을 찾아 읽으셨을 것 같지는 않다(그런 다음 이런저런 인터넷 하이틴 소설을 읽었고, 일부는 다운받았다). 일부에서는 국내판 하이틴 로맨스 소설의 인터넷 버전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다른 일부에서는 ‘그 아이들만의 리그’라고도 한다. 그러나 그 소설은 애매하지만 나와 함께 살고 있는 소년 소녀들을 심사숙고하게 만드는 매혹이 있었으며, 그와 동시에 무시해버리고 싶은 기괴한 불쾌감을 동반하는 그 어떤 잉여의 처리에 대한 난처함을 안겨주었다. 나는 이걸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내 앞에 던져진 것, 하여튼 피할 수 없는 것. 나에게는 거추장스럽지만, 그것에 대해서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것에 대해서 외면하면 안 된다. 나는 항상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가 현실 속에서 대면하고 있는 그 어떤 상징적 사건에 대해서, 그 사건이 떠안고 있는 메시지에 대해서 무시하면 그것은 즉각적으로 실재의 모습을 얻게 된다. 왜냐하면 이미 벌어진 사건은 그것을 못 본 척하려는 사회에게 그것을 욕망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할리우드는 <그린치> <더 캣>를 어떻게 해코지했나

닥터 수스의 여우는 양말을 신고 있고 고양이는 모자를 쓰고 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이야기일까? 그건 닥터 수스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그림책 작가 시어도어 가이젤이 쓴 동화들의 영어 원제를 검토해보면 분명해진다. 〈Fox in Sock〉 〈The Cat in the Hat>. 둘 다 모두 엄격한 각운을 고려한 제목들이다. 닥터 수스라는 작가가 유명한 가장 큰 이유도 제한된 숫자의 영어단어들을 절묘하게 이용해 운을 맞추는 실력 때문이었다. 아마 그의 작품들이 명성에 비해 국내에 덜 소개된 것도 언어장벽 때문일 것이다. <양말 신은 여우>와 같은 그림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운을 이용한 말장난이기 때문에 번역되면 그 매력을 100% 잃는다. 그나마 제대로 소개된 <바솔러뮤 커빈즈의 모자 500개>는 그래도 말장난보다는 스토리의 힘이 더 강한 작품이다. 닥터 수스라는 작가의 힘이 기본적으로 언어에, 그것도 운을 이용한 말장난에 놓여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 다시 한번 <모자 쓴 고양이>의 원제를 읽어보자. 〈The Cat in the Hat>. 완벽한 리듬으로 반복되는 각운 때문에 입에 착 달라붙는 제목이지만 정작 대단한 의미는 없다. 사실 운이라는 것 자체가 글에 어떤 부조리함을 강요하는 경향이 있다. Cat과 Hat이 각운이 맞는다고 해서 둘이 한자리에 모여야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닥터 수스의 경우 각운이 먼저다. ‘The Cat in the Hat’이 듣기 좋은 제목이라면 쓰자. 그리고 왜 그 고양이가 모자를 쓰고 있는지, 그 모자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나중에 생각해보자. 그 결과 닥터 수스의 작품들엔 독특한 부조리함이 형성된다. 그의 그림들은 종종 아주 어처구니없는 상황들을 묘사하는데, 그게 모두 언어학적인 유희(곧장 말해 말장난)가 그림이라는 시각적 매체에 투영된 결과이다. 만약 닥터 수스가 모자 쓴 고양이가 모자에 케이크를 올려놓고 한손에 써레를 든 채 곡예를 하는 그림을 그린다면 그건 순전히 cake과 rake의 각운이 맞기 때문이지 다른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극장용 장편영화로 뜯어고치기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문제가 제기된다. 만약 어떤 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말장난이라면 어떻게 해야 서사가 중요시되는 극장용 장편영화로 이야기를 뜯어고칠 수 있을까? 닥터 수스는 영화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아니다. 반대로 그는 한동안 영화판에서도 일한 적도 있다. 2차대전 당시엔 전쟁 홍보영화에 참여했었고 썼었고 우리나라에서도 방영된 적 있는 훌륭한 판타지영화인 〈T박사의 피아노 레슨〉(The 5,000 Fingers of Dr. T.)에서 각본을 맡기도 했다. 그의 수많은 작품들은 양질의 텔레비전 단편영화들로 만들어졌다. 그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척 존스가 감독한 애니메이션인 <그린치는 어떻게 크리스마스를 훔쳤는가>이다. 존스는 〈The Cat in the Hat〉의 훌륭한 애니메이션 버전을 만든 적도 있다. 그리고 닥터 수스는 영화 장르에 근사한 직계후손을 낳기도 했다. 바로 팀 버튼이다. 닥터 수스처럼 운을 맞춘 시구로 이루어진 팀 버튼의 수많은 작품들은 모두 닥터 수스의 창의적인 변형이다. 물론 그 절정은 <크리스마스의 악몽>이다. <크리스마스의 악몽>이 <그린치는 어떻게 크리스마스를 훔쳤는가>의 팀 버튼 버전이라는 건 척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위에 언급한 작품들은 닥터 수스의 비전에서 특별히 벗어난 영화들은 아니었다. 〈T박사의 피아노 레슨〉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극장용 장편영화를 위해 쓰여졌다. 그뒤에 나오는 애니메이션 작품들은 모두 원작에 충실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영화인 <그린치는 어떻게 크리스마스를 훔쳤는가>는 감독 척 존스의 개성이 듬뿍 살아 있는 작품이긴 했지만 그 개성은 대부분 시각적 스타일에 집중되었고, 유명한 노래 〈You’re a Mean One〉을 추가하고 문장 몇개를 살짝 바꾼 걸 제외하면 닥터 수스의 원작은 그대로 살아남았다. 팀 버튼은? 아무리 닥터 수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그는 팀 버튼 영화들을 만들었다. 이 모든 것들은 할리우드가 대규모의 예산을 투자해 만드는 장편 극영화엔 해당되지 않는다. 한 시간 반 이상의 러닝타임을 채우기 위해서는 더 많은 스토리와 동기, 더 풍성한 캐릭터가 필요하다. <그린치> 론 하워드의 <그린치>는 이런 문제점을 그럭저럭 해결한 작품이었다. <그린치>는 그래도 각색해볼 만한 책이었다. 이 그림책에서 핵심은 말장난이 아니라 그린치라는 독특한 심술쟁이 캐릭터이다. 어쩔 수 없는 크리스마스 이야기의 한계 때문인지 끝에 가서 이 캐릭터도 개심하게 되지만 그 직전까지 그린치가 후 마을 사람들의 크리스마스를 망치려고 짜는 음모는 어린 독자들에게 거의 사디스틱한 쾌감을 제공해주었다. 론 하워드의 영화는 이미 기본적으로 존재하는 스토리에 좀더 깊은 동기를 추구하고 캐릭터들을 조금 더 입체적으로 만드는 쪽을 택했다. <그린치> 그림책의 평면 삽화를 3차원 컴퓨터그래픽으로 옮겼다고 할까. 하워드는 그린치가 왜 그렇게 심술궂게 후 마을 사람들을 대하고 왜 그렇게 크리스마스를 싫어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거의 <프랑켄슈타인>식 탄생담을 덧붙였다. 이 영화에서 그린치는 단순한 심술쟁이가 아니고 후 마을 사람들도 생각없이 착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그린치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외모 때문에 따돌림받고 멸시당한 타자이며 후 마을 사람들은 그린치의 난동 속에서 역시 크리스마스의 교훈을 깨달아야 할 속되고 경박한 사람들이다. 영화화되면서 원작의 간결한 아름다움은 사라졌고 전체적으로 지나치게 번지르르한 영화가 되었지만 하워드의 영화는 거의 완벽하게 논리가 선 이야기와 그럴싸하게 확장된 교훈을 갖추고 있었다. 스토리·동기·캐릭터 ‘부어라 부어라’ 그렇다면 2003년 겨울 시즌에 개봉된 <더 캣>(The Cat in the Hat)은 어떨까? 일단 <모자 쓴 고양이>는 <그린치>보다 훨씬 인기있는 작품이고 모자 쓴 고양이도 그린치보다 더 사랑받는 캐릭터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엔 쓸 만한 스토리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비오는 날 엄마가 나가 있는 동안 집을 지키고 있는 두 남매에게 갑자기 모자 쓴 고양이가 찾아와 온갖 소동을 일으키다가 엄마가 오기 직전에 모든 소동을 마무리짓고 등장할 때처럼 갑자기 사라진다는 게 전부니까. 그리고 고양이가 그 중간에 일으키는 소동은 전형적인 닥터 수스식 말장난의 연속이다. 한마디로 정상적인 극장용 영화에서 할 이야기가 없는 것이다. <그린치>가 기존의 이야기를 확장했다면 <더 캣>은 부수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영화는 원작의 순수한 진공 속에 캐릭터와 교훈을 채우고 한 시간이 넘는 이야기를 정당화시킨다. 우선 고양이는 그냥 심심한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그에게는 목적이 있다. 주인공인 콘래드(원작의 이름없는 화자)와 샐리는 문제가 있는 아이들이다. 콘래드는 엄마 말을 듣지 않는 말썽꾸러기이고 샐리는 사교성없고 규칙에 집착하는 강박증 환자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고양이는 이 아이들의 성격을 개조하려고 한다. 영화가 끝나고 모든 소란이 진정될 무렵엔 콘래드와 샐리는 마치 칵테일 셰이커에 섞여 서로의 성격을 물려받은 것처럼 ‘정상적인’ 아이가 된다. 영화의 첫 번째 실수이다. 닥터 수스가 교훈과 상관없는 이야기만 썼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그린치는 어떻게 크리스마스를 훔쳤는가>는 고전적인 교훈담이다. 심지어 그는 인종차별과 냉전시대의 군비 경쟁을 꼬집는 그림책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강압적으로 사회부적응인 아이들의 성격을 뜯어고치는 이야기를 당연하게 쓸 만큼 무심한 사람은 아니었다. 영화에 묘사되는 아이들의 성격개조 과정은 동기만 따진다면 불쾌하고, 결과만 본다면 강압적이며, 스토리 전개면에서 본다면 논리가 부족하고 전개가 갑작스럽고 설득력이 떨어진다. 결정적으로 이 어정쩡한 교훈은 순수한 즐거움으로 가득 찬 원작의 매력을 무지막지할 정도로 감소시킨다. 영화는 엄마를 극단적으로 결벽증이 심한 사장 밑에서 일하는 부동산 중개업자인 싱글맘으로 고치고, 사장을 위한 파티를 연다는 데드라인과 겉과 속이 다른 음흉한 이웃집 남자가 엄마랑 결혼하고 아들을 군사학교에 보내려고 한다는 설정을 추가해 서스펜스를 만들어내려고도 한다. 미안하지만 이것도 성공하지는 못했다. 이건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도 뭣한데, 이건 그냥 형편없이 쓰여진 나쁜 각본 이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지적해야 할 건, 닥터 수스의 그림책 원작이 21세기의 어린이영화로 어떻게 전환되었느냐는 것이다. 아까 <모자 쓴 고양이>의 비주얼은 철저하게 언어학적 유희에 바탕을 둔 난센스라고 이야기했다. 보 웰치의 영화는 이 모든 것들을 그냥 포기해버린다. 심지어 마이크 마이어스의 고양이는 도입부에 “나는 운 맞추는 덴 전혀 실력이 없어!”라고 외치며 닥터 수스식 말장난을 거부하기까지 한다. 영화는 대신 이 빈자리를 디지털 특수효과를 가득 동원한 스펙터클로 채운다. 하지만 스토리가 기둥이 되어주지 못하고 원작의 핵심이었던 언어학적 유희가 사라지자 영화의 스펙터클은 말 그대로 껍질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영화는 우리가 <배트맨2>와 <가위손>의 프로덕션디자이너가 만든 첫 감독작에서 기대할 수 있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지만 러닝타임 5분을 넘기면 그 화사한 아름다움은 약발이 닳아버린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했던 걸까? 정답은 없다. 아마 <모자 쓴 고양이>를 원작으로 삼아 기가 막힌 한 시간 반짜리 영화를 만드는 방법이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 방법은 <더 캣>의 작가들이 써먹은 것과 같은 안이한 할리우드식 각색으로는 절대로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아동 판타지의 핵심에 다가간 <피터팬> [5]

동화 판타지의 비극까지 직시하다 감독 P.J. 호건 빈사의 팅커벨을 관객의 박수로 살려내는 연극의 명장면은 영화 <피터팬>에도 남아 있다. 다만 영화는 객석의 박수를 “나는 요정을 믿어!”(I do believe in fairies)라고 곳곳에서 독백하는 사람들의 몽타주로 대체한다. 온 세상 아이와 어른이 환희의 미열에 들떠 “아이 두!”의 후렴을 거듭 외친다. 마치 주례 앞에 선 <뮤리엘의 웨딩>의 토니 콜레트처럼,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의 카메론 디아즈인 양 복숭앗빛 홍조를 만면에 떠올리고. 지금 와서는 P. J. 호건 감독의 ‘I do 3부작’이라고 묶어도 그럴싸하지만, 결혼식이 등장하는 코미디 두편으로 주목받은 감독을 대규모 예산의 실사영화 <피터팬>의 감독으로 낙점한 것은 약간의 상상력을 요하는 결정으로 보인다. 소니 스튜디오를 떠나면서 <피터팬> 기획을 지참금 삼아 들고 나온 제작자 루시 피셔는 자신의 <피터팬>이 디즈니의 애니메이션판을 갱신한 실사판도 아니고 〈101마리의 달마시안〉을 실사로 가공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과제임을 숙지하고 있었다. 새로운 <피터팬>은 ‘완역판’이어야 했다. 이는 원작의 대사를 한줄씩 옮긴다는 뜻이 아니라 희곡과 소설, 원작자 J. M. 배리의 삶을 이해하고 원작을 ‘독해’하는 영화가 돼야 한다는 의미였다. 팀 버튼이나 알폰소 쿠아론에 비하면 엉뚱한 인선으로 보이지만, P. J. 호건은 제작자에게 여러모로 현실적인 답이었다. 장르와 캐릭터의 원형을 이해하되 복제하지 않고, 체질적으로 희비극에 능하며, 감동을 끌어안으면서도 도피주의 판타지로 쏠릴 위험을 근심하지 않아도 좋은 감독, 그것이 제작자 피셔가 이해한 P.J. 호건이었다. <크로커다일 던디>의 폴 호건과 아무런 혈연, 친연이 없다는 점을 한사코 강조하는 폴 존 호건(44)은, 호주 휴양도시 골드 코스트에서 자랐다. <뮤리엘의 웨딩>에 나오는 퍼포이즈 스핏을 닮은 그곳은 소년 호건에게 스쳐가거나 떠나가라고 만들어놓은 듯한 지겨운 도시였다. 일광욕이나 드라이브가 정상적 인간 활동으로 여겨지는 곳에서, 머리 쓰는 놀이를 선호한 말라깽이 호건은 괴짜로 통했다. 장성한 호건은 언론사에 취직했으나 취재원의 말을 윤색했다는 비난을 받고 (순리에 따라) 픽션에 눈을 돌렸다. 카메라 근처에 얼쩡거려 본 적도 없는 그는 순전히 스크립트 쓰는 실력으로 호주 영화 텔레비전 학교의 입학허가를 받아냈다. 영화학교에서 만난 아내 조슬린 무어하우스(<프루프> <아메리칸 퀼트>의 감독)와 그는 지독한 가난 속에서 뮤리엘이 결혼을 꿈꾸듯 간절히 영화를 꿈꾸었다. 잘 풀리지 않는 시절을 거쳐 1994년 발표한 300만달러 예산의 영화 <뮤리엘의 웨딩>은 <피아노> <댄싱 히어로>와 더불어 90년대 초 호주영화의 간판스타가 됐다. 이어 할리우드에 초빙돼 연출한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은 1997년 여름 시즌의 슬리퍼 히트였다. 물론 P. J. 호건은 <콘택트>의 마이클 골든버그가 쓴 <피터팬>의 시나리오 초고에 코미디를 가미했고, 영원한 소년의 신화 뒤에 가려진 소녀의 러브스토리를 끌어냈다. 그러나 국내에 알려진 전작 <뮤리엘의 웨딩>과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을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피터팬>에 새긴 감독 호건의 서명을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피터팬>이 “모든 아이의 비극은 성장해야 한다는 것. 성장하지 않는 단 한 사람의 어린이 피터팬의 비극은 바로 성장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감수’하는 판타지라는 점을 호건은 직시한다. 그의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역시 사랑을 통해 어떤 목표에 이르기를 포기하는, 장르의 관습에 비추면 ‘패배주의적’인 로맨틱코미디였다. 터놓고 말해 섹슈얼리티와 사회적 책임을 뜻하는 ‘성장’의 개념은 아동판타지에서 불편한 소재다. 하지만 호건은 수줍음도 호들갑도 없이 <피터팬>의 관능과 폭력에 접근한다. 요란한 코미디 <뮤리엘의 웨딩>이 실상 배신, 난치병, 자살의 비극으로 고비마다 내러티브를 끌어간 드라마였다는 점을 새삼 지적할 필요가 있을까? P. J. 호건의 <피터팬>은 후크의 잘린 팔뚝을 보여주고 아이와 어른의 가차없는 칼싸움을 보여준다. 웬디의 관심을 두고 경쟁하는 피터와 후크는 성적인 질투심을 감추지 않고 성년의 언저리에 선 웬디는 그들이 대표하는 남성성의 두 얼굴에 대한 매혹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호건은 원작에서 한발 더 나아가기도 한다. 원작의 웬디는 해적을 무시하는 캐릭터였지만, 영화의 웬디는 모성과 모험에 동시에 이끌리며 검을 치켜드는 21세기 소녀다. 스타일도 여전하다. 달링가 남매들이 색색의 태양계를 지나 날아가는 장면이나 집채만한 악어의 디자인에는, 난데없이 초현실적인 뮤지컬 무대를 벌이던 <뮤리엘의 웨딩>과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의 키치적 감수성이 펄떡인다. 그의 <피터팬>은 결코 조용히 당도하지 않았다. 일부 관객은 “최고의 동화를 포르노그래피로 망쳐놓았다!”고 분개했지만, BBC는 “감정과 어드벤처의 균형을 찾는 마술에 있어 <해리 포터> 시리즈가 풀어야 할 과제를 업그레이드했다”고 호평했다. ‘크로커다일 던디’와 헛갈리는 것이 싫어 이름 표기법까지 바꾼 노력에도 불구하고 <피터팬>에 이르러 악어와 씨름하는 비운을 맞긴 했지만, 폴 호건과 P. J. 호건을 혼동하는 관객은 장차 대폭 줄어들 것 같다.

설특집. 설연휴 볼거리, 읽을거리 [3] - 만화

2003년 추석, 나는 약간의 각오를 하고 고향집으로 갔다. 내게는 집과 작업실에 몇 마리의 고양이 동거자들이 있는데, 부모님이 잔소리를 하실까 지레 겁을 먹고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실제로 전화를 하다가 내 방의 고양이 소리가 들리자, ‘고양이는 안 좋네’ 하면서 거부감을 표시하기도 하셨다. 그때는 텔레비전에서 나는 소리라고 둘러대기도 했지만, 그 이후 내가 고양이에 관한 책을 냈고 이제는 도망갈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었다. 그렇게 잔소리를 들을 각오를 단단히 하고 집에 들어간 순간, 나를 먼저 반긴 것은 어머니도 조카들도 아닌, 조그만 강아지 한 마리였다. 그 사이 형의 가족이 시추 한 마리를 키우기 시작했고, 녀석의 애교에 부모님이 이미 넘어가버리셨던 것이다. 덕분에 나의 고양이 동거 생활도 은근슬쩍 묻혀버리게 되었다. 두세집 건너 한 마리씩 동물 가족이 늘어나고 있다. 강아지와 고양이는 물론, 새와 물고기, 파충류와 곤충류도 차례상 근처를 어슬렁거린다. 사실 만화만큼 동물들과 친한 매체도 없다. 공룡 둘리, 강아지 강가딘, 펭귄 만마루, 해달 보노보노…. 이들은 사람처럼 두발로 걸어다니고, 나불나불 사람 말로 떠들어대고, 시건방진 장난으로 인간들을 우롱하기도 한다. 하지만 만화를 통해 ‘진짜 동물’의 세계를 들여다보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동물의사 닥터 스쿠르> <왓츠 마이클> 등을 시작으로 펼쳐진 ‘동물만화’의 세계는 점점 그 폭과 깊이를 더해가고 있다. 이들이 ‘가장 가족적인 만화’라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파란만장 견공일기 <시바오> 누노오라 쓰바사 지음 I 삼양출판사 펴냄 눈이 녹은 도로에서 미끄러져 꾀죄죄한 행색으로 돌아다니는 시바오. 공사장 하수관에 들어갔다가 몸이 끼어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된 시바오. 칼 든 강도한테 붙잡혀 인질 신세가 된 시바오. 작은 몸집에 동그랗고 복스러운 꼬리를 가진 강아지 시바오의 삶은 파란만장하다. 비록 귀여운 눈빛과 앙증맞은 행동으로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지만, 발가락 사이의 넓적한 물갈퀴가 증명하듯 녀석에게는 떠돌이 개의 피가 만만찮게 흐르고 있다. 이 만화는 떠돌이 강아지 시바오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에피소드 연작인데, 요즘에 보기 어려울 정도의 따뜻한 서정이 깃들어 있다. 시바오는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행복의 방법을 가르쳐주는 요정과도 같다. 언덕길을 미끄러져 내려오는 유모차를 몸을 던져 멈추는 영웅적인 행동 때문만은 아니다. 사람들은 배고픈 그에게 먹을 것을 주고, 곤경에 처한 그를 도와주면서, 나도 누군가를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즐거움을 깨닫게 된다. 길거리 가수가 잃어버린 휴대폰, 부동산 할아버지가 떨어뜨린 지갑, 엄마와 헤어진 아기…. 시바오는 그것들을 마땅히 있어야 할 곳으로 안내하면서, 그 스스로는 여전히 방랑 중이다. 언젠가 이 꼬마 강아지가 머물며 함께 평생을 보낼 수 있는 집을 발견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 주인공은 당신일지도 모른다. 주변을 둘러보시라. 우리는 고양이로소이다 <묘한 고양이 쿠로> 개인적으로 2003년에 나온 동물만화 가운데 최고라고 생각하는 작품이다. 개와 고양이를 1인칭으로 두고 이야기를 펼쳐가는 만화는 적지 않지만, 그들의 삶을 이렇게 사실적이면서도 귀엽게 그리는 작품은 보기 어렵다. 쿠로는 자신의 여동생 칭코와 함께 ‘수염’이라고 이름 지은 너절한 싱글 남자의 연립주택에서 살아가고 있다. 비오는 날 놀이터에 버려졌다가 이 남자에게 거두어졌지만, 그를 주인이라고 생각지도 않고 집의 안과 밖을 오가며 자유로운 생활을 즐기고 있다. 만화는 쿠로의 1인칭 일기처럼 그려지는데, 길거리 고양이 세계의 권력 다툼, 발정난 고양이들의 사랑 싸움, 교통사고로 죽은 새끼 고양이의 무덤 만들기와 같은 실제 고양이 세계의 이야기들이 지나치게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게 펼쳐진다. 어쩌면 나스메 소세키의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 유머와 귀여움를 좀더 담은 시점이라고도 여겨지는데, 쿠로의 친구 고양이들뿐만 아니라 그들과 연관을 맺고 있는 사람들의 세계도 딱 고양이 발치에서 바라다본다. 못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지만 왕따에 가까운 소년, 커다란 몸집과 못생긴 얼굴로 실연의 상처를 입은 듯한 괴인 여자, 마른 몸에 신경질적으로 보이지만 고양이들을 챙겨주는 여우 여인. 정말 고양이가 인격을 가지고 있다면 이렇게 생각하겠구나 싶은 이야기들이 계속된다. 뾰로롱, 짹째꿀∼ 문조 몇 마리 키워보세요 <문조님과 나> <백귀야행> <어른의 문제> <키다리 아저씨들의 행방> 등으로 국내에도 상당한 팬을 확보하고 있는 이마 이치코의 작품이다. 이미 그는 <백귀야행>에서 까마귀 요괴 오지로와 오구로를 등장시켜 새들을 인간과 교류하게 만들었고, 화실일기식의 단편을 통해 자신의 문조 사랑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문조 이야기가 만만찮은 인기를 얻어 이렇게 독립된 작품으로 내놓게 되었다. 동남아시아 원산으로 작은 몸집, 아름다운 외모, 놀라운 음악성, (잘만 키우면) 다정다감한 인간과의 사교성. 일본에서 문조는 반려동물로도 큰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소개가 모두 틀리지는 않았지만, 실제 여러 마리의 새들을 키우면 그들의 성격 차이와 기묘한 행동 때문에 놀라운 사건들이 연이어 터진다. 그리고 그 공간은 마감에 찌들려 야생과도 같이 어질러진 만화가의 화실이다. 거울을 보고 구애를 하는 나르시스트 후쿠, 그의 아내로 데려왔지만 곧 버림받는 하나, 그들의 아이로 인공 사육된 나이조, 나이조의 처로 데리고 왔지만 곧 남자로 밝혀지고 후쿠와 동성애 징후까지 보이는 스모모 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데려온 새로운 식구가 문제를 더욱 꼬이게 만드는 것은 이마 이치코의 만화 세계와도 꼭 닮아 있다. 사사키 노리코의 <동물의사 닥터 스쿠르> 덕분에 일본의 시베리안 허스키 값이 10배로 뛰었다던데, 이 만화 덕분에 문조 값도 폭등하지는 않을까? 뻔뻔해도 좋다 같이만 살아다오 <메이(May)> 메이(May). 오월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은 <이웃의 토토로>의 여자아이만은 아니다. 이 통통한 뺨에 앙증맞은 꼬리를 가진 골든 레트리버 강아지의 이름도 메이다. 골든 레트리버라고? 견종을 잘못 안 거 아냐? 2등신도 안 될 것 같은 커다란 머리에 왕방울만한 눈. 도대체 뉘 집 강아지야? 그렇다. 뉘 집 강아지인지 알면, 메이의 체형이 왜 그런지 깨닫게 될 것이다. 바로 <빨간머리 앤> <사각사각>의 개그 만화가 김나경이다. 그녀의 주인공은 모두 그 체형이 아닌가? 자신이 직접 키우는 동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것은 만화가만이 가진 특권. 김나경 역시 그런 특권을 내버리지 않고, 강아지 메이를 주인공으로 네칸 만화를 펼치고 있다. 전통적으로 만화가의 분신 역할을 해왔던 ‘보바’도 등장하고, 그 가족들까지 메이와 이런저런 관계를 맺으며 나름의 활약을 펼친다. 뻔뻔하고 고집 대장인 강아지의 이야기가 만화의 주를 이루지만, 직접 개를 키우면서 겪게 되는 생활상의 지식도 담겨 있어, 육견(育犬)만화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물론 작가 특유의 앙증맞으면서도 시니컬한 개그 감각은 빠지지 않는다. 동물과 함께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느끼는 ‘기쁜 절망감’이 유머로 승화되어 있다. 기억하세요? 똥닦는 고양이? <캣>(CAT) 강현준의 <캣>은 이미 한국 동물만화의 대표작으로 높은 명성을 떨쳐왔기 때문에, 그 지명도로 보아서는 새삼 소개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러나 최근 애장본으로 발간되어 새롭게 소장하는 즐거움을 갖게 되었기에 한번 더 강조의 방점을 더한다. 한쪽으로는 고양이의 습성 깊숙이, 다른 쪽으로는 만화적 상상력의 극단으로. 이것이 이 만화의 숨어 있는 전략이 아닐까? 어벙벙한 만화가 K, 그리고 그와 함께 살아가는 검은 얼룩 고양이가 만화의 주인공으로 여러 주변의 미스터리한 인물들과 어울려 예측 불능의 사건들을 만들어낸다. 그 과정에서 일상은 아주 리얼하고 쪼잔하게, 망상은 대단히 거대하고 과격하게 탁구공을 튀긴다. 강호의 무림 고수가 고양이에게 참패하고 마는 묘권(描拳), 고양이가 나무를 긁는 바람에 벌어지는 지구 종말의 아마겟돈과 같은 에피소드에서는 고양이의 능력을 가공할 정도로 끌어올리지만, 오징어 냄새나 낚싯대의 멸치만으로 인간에게 농간당하고 마는 고양이의 비참한 모습도 쾌활하게 묘사한다. <캣>은 현실파와 망상파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선상의 동물만화라 할 수 있지만, 고양이 자체를 과도하게 의인화하지 않고 주변의 세계가 알아서 고양이에게 종속되도록 하는 점이 절묘한 유머의 긴장을 만들어낸다. 최근 <납골당 모녀>에서도 컬트적인 개그 감각을 선보이고는 있지만, 강현준의 발랄한 유머가 깃든 고양이 만화를 계속 이어서 보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당근있어요? <센타로의 일기> 일러스트레이터인 주인공 바쿠가 미니 토끼인 센타로를 키우면서 겪게 되는 갖가지 사건들이 아기자기하게 펼쳐진다. 작은 몸집이지만 타고난 건강 체질로 항상 이런저런 사고를 벌이게 되는 센타로. 처음에는 토끼에 대해 잘 몰라 허둥대던 바쿠도 점차 이 놀라운 가족에 적응해가게 되는데, 서로 다른 습성의 존재들이 서로를 이해해가는 과정은 언제나 흥미롭다. 만화 속에는 토끼 이외의 여러 반려동물들이 등장하는데, 토끼와 고양이가 친구가 되어가는 과정의 에피소드가 특별히 재미있다. 고양이는 사냥을 통해 먹이를 섭취하는 육식동물로 이 작은 토끼 정도는 먹이가 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나름의 우정을 가지고 접해야 한다는 것이 현실. 그래서 고양이는 토끼를 보고 야성에 번뜩이며 ‘본능!’이라고 손을 내밀다가, ‘우정!’이라며 이성을 회복하기를 반복한다. 토끼 역시 인간의 꽁치를 훔쳐먹는 고양이를 보고 자신의 채식 습성에 대해 고민하기는 마찬가지다. 이 만화의 여러 소재들이 ‘사고’ 혹은 ‘사건’과 연결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반려동물과 함께 살아가는 일이 결코 쉽지는 않다. 자기 몸이 아프면 동물들의 밥을 챙겨주지 못해 더욱 걱정이 되고, 동물들까지 아픈 경우가 없지 않다. 자신없는 사람들은 섣불리 동물 식구를 들이는 것보다는 동물만화로 만족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토끼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유머가 유행했을 때 <당근있어요?>라는 제목의 해적판으로 나온 작품. 모두 24권으로 동물만화로는 거의 최장의 작품에 속한다. 싸워!… 아니 싸우지 마 <하얀 전사 리키> <이겨라 벤> 스페인에 가서도 동물 학대라는 이유만으로도 투우 보기를 극력 사양했던 나이기에, 이 만화들을 동물 애호인들에게 감히 권할 수 있을까 의심스럽긴 하다. 그러나 이것도 동물과 우리가 관계맺고 있는 하나의 방법인 것은 사실이다. <하얀 전사 리키>와 <이겨라 벤>은 투견을 소재로 하는 한·일 만화다. 두 만화의 성격은 아주 비슷하다. 둘 다 1970∼80년대 열혈만화의 분위기로 깊은 우정을 나눈 소년과 개가 투견에 도전하고 승리해가는 이야기다. 가혹하다 싶을 정도의 스파르타식 훈련이 벌어지고, 흡사 ‘마구(魔球)만화’를 보는 듯한 필살기가 펼쳐진다. 라이벌들 역시 만만치 않지만, 주인공은 여러 핸디캡을 극복하며 그들을 물리쳐간다. 인간의 전투 본능을 해소하기 위해 개를 내세우는 ‘투견’에 동의하지는 못하지만, 그 처절한 과정에서 개와 인간이 나누는 우정만큼은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투견장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가면서도 싸움을 계속하는 개들, 그리고 그들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항복의 표시를 하지 못하는 주인들. 적어도 이 만화가 추구하는 주제는 분명하다. 투견과 주인의 사랑과 우정이 담긴 관계가 아니면, 그들은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낼 수 없다. 그 반려견 흉포하다 <생각하는 개> 사실파의 동물 주인공이라고 해서 인간에게 건방진 행동을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엄청난 오산이다. 현실 속에서는 약자인 동물 주인공이 만화를 통해 인간 머리 위에 설 때 생겨나는 유머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만화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듯하다. 다이몬지는 어느 모로 보나 완벽한 중년의 남자다. 직장으로 보자면 일류 출판사의 존경받는 편집장이며, 가정으로 보자면 아름다운 아내와 귀여운 딸로부터 알뜰한 사랑을 받는 가장이다. 그런데 비오는 밤 종이상자에 버려진 강아지 한 마리를 ‘완전한 선의로’ 집에 데려온 것이 그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되고 만다. 눈 깜짝할 사이에 신장 85cm, 체중 83kg의 대형견으로 자라난 (그러나 아직도 자라고 있는) 개 몬지로는 마치 다이몬지의 권위를 깔아뭉개는 것이 존재의 목적인 듯 그를 무지막지한 발로 밟으려 하는 것이다. 반려동물은 작고 귀엽다는 이미지는 여기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인간의 덩치보다 클 뿐 아니라 때론 자신의 방식으로 인간을 속여먹을 정도의 지능을 가진 동물은 어떤 방법으로도 통제가 되지 않는다. 침실에서 아내의 옆자리를 빼앗고, 아끼는 잠옷에 초대형의 변을 보고, 암캐의 냄새를 맡더니 내 몸에 ‘마운트’까지 한다. 물론 다이몬지를 제외하고는 모두에게 귀엽고 큰 개일 뿐이다. 동물의 편애와 기만 역시 만만치 않다는 것을 이 만화를 통해 똑똑히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밖의 사실파 동물 주인공들 미소년 아니면 누더기 견, 무엇을 키우시겠습니까? <무당 거미> <황금 박쥐> <토끼> <미운 오리 왕자님>의 공통점은? 제목과는 달리 동물 주인공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만화라는 점이다. 반면에 만화의 전면을 장악하지는 않지만, 인간 세계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의 모습을 매우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보여주는 조연급의 주인공들이 적지 않다. 해롤드 사쿠이시의 <벡>은 록 뮤지션이 되고 싶어하는 소년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지만, 제목과 같은 이름의 ‘벡’이라는 개가 등장한다. 온몸이 누더기처럼 기워져 있어 보기에도 불량스러워 보이지만, 주인공에게는 특별히 불친절하다. 야마시타 가즈미의 <천재 유교수의 생활>에서는 유 교수와 고양이 타마와의 관계가 매우 독특하게 그려져 있다. 어쩌면 이 만화에서 유 교수와 가장 평등하게 맞서는 존재가 고양이일지도 모른다. 특히 타마가 사라진 뒤 그를 추적하는 미스터리극의 구성에서, 고양이가 이 집 저 집에서 서로 다른 이름으로 서로 다른 존재로 행동해왔다는 점이 재미있다. 정준규의 <얼렁뚱땅 하이파이브>에는 주인공 소년이 ‘반찬이’라고 부르는 비루먹은 피학대 강아지가 나온다. 소년이 부르면 미친 척하는 등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가장 비열한 행동까지 감내해야 한다. 한국 전통의 강아지상이라고나 할까. 모치즈키 미네타로의 <카오루의 일기>에 나오는 고양이도 카오루로부터 ‘건전지를 넣는 로봇’ 취급을 받으며 가벼운 학대를 당한다. 후루야 미노루의 <이나중 탁구부>에서 이자와와 마에노가 닭 대신 키우는 산체나 <너는 펫>에서 미모의 30대 전문직 여성인 스미레에게 사육당하는 미소년 모모 등 인간이지만 인간에게 사육당하는 경우도 간혹 발견할 수 있다. 반려동물을 키워본 사람이라면 모두들 한번쯤 이렇게 편안히 살아보았으면 하는 상상을 해보았을 것이다.

[비평 릴레이] <페이 첵> - 정성일 영화평론가

필립 K. 딕의 팬 사이트( www.philipkdickfans.com) 입구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다. “리얼리티는 ‘단지’ 관점일 뿐이다.” 이보다 더 그의 소설에 대해서 잘 설명할 수 있는 말은 없다. 진실은 항상 저 너머에 있는 그의 소설에서 우리는 종종 길을 잃어버릴 것이며, 언제나 피해자인 내가 찾아낸 범인은 나 자신이다(<토탈 리콜>). 혹은 구조 안의 블랙홀 속에서 최악의 결과를 피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만큼 나쁜 결과는 필연적이 되어간다(<마이너리티 리포트>). 결국 세상은 환상의 시나리오이며, 그 안에서 주어진 나의 배역이 밝혀진 마지막 순간은 이미 때늦은 존재론적 대답이다(<블레이드 런너>). 빈틈없는 시간 안에서 의지와 무능력이 숨바꼭질을 벌이는 이 기괴한 놀이가 제 시간을 만나기 위해서는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포스트모더니즘이 도착하자 영화는 필립 K. 딕을 끌어냈으며, 할리우드는 그의 이름을 빙자해서 멋대로 각색하였다. 열혈 팬들은 비분강개하였고, 대학원생들은 이론적 각색을 동원해서 라캉과 보드리야르의 비빔밥으로 만들었다. 그러는 동안 명단은 점점 불어났으며, 각색은 종잡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여기에 오우삼이 할리우드에서 6번째 만든 영화 <페이 첵>은 필립 K. 딕 소설의 (텔레비전물을 제외하고) 8번째 영화화이다. 먼저 오우삼 버전. 미래세계. 프로그램 분해공학자 제닝스(벤 애플렉)는 알콤이라는 거대기업으로부터 9천만달러의 주식을 ‘페이 첵’(급료)으로 제공받는 대신 3년 동안의 기억을 삭제한다는 조건이 붙은 일을 한다. 그러나 보수를 찾기 위해 은행을 갔을 때 제닝스는 자신이 직접 서명한 주식포기각서와 그 대신 보관한 19개의 하찮은 물건이 든 봉투를 받는다. 게다가 총을 든 사나이에게 쫓기기까지 한다. 그리고 위기가 닥칠 때마다 하찮은 물건들은 그를 구하는 구사일생의 도구가 된다. 제닝스는 레이첼(우마 서먼)을 다시 만나면서 이 모든 것이 자신의 결정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가 3년 동안 개발한 것은 미래를 보는 프로그램이었으며, 그 결과가 핵전쟁이라는 것을 알고 그것을 막기 위해 제닝스는 ‘자신이 미리 본 미래를 따라가면서’ 악전고투한 것이다. 물론 ‘완벽한’ 해피 엔딩. 그 다음은 필립 K 딕의 버전. ‘거의 2년 동안’ 레이첵 회사에서 일을 하고 기억을 삭제 당한 제닝스가 살고 있는 미래는 강력한 정부에 의한 관리사회이다. 제닝스는 ‘페이첵’ 5만불(환율상승) 대신 7개의 하찮은 물건을 받았고, 정부의 추적을 당하는 제닝스는 ‘의문의 여인’ 켈리와 함께 레트릭 본사로 찾아간다. 그리고 거기서 담판을 지을 작정이다. 자신을 회사의 운영진에 포함시켜 달라고. 거기서 제닝스의 목표는 그들과 함께 미래에 있을 정부에 대항하는 혁명을 준비하는 것이다. 결국 ‘불길한’ 엔딩. 이 둘 사이의 차이는 미래가 아니라 자기 시대와의 매듭에 있다. 필립 K. 딕이 1953년에 쓴 소설은 냉전시대의 창백한 아메리칸 ‘드림’의 히스테리이다. 그 세상은 조지 오웰적 비전과 매카시즘의 공포가 가득 찬 구조의 억압과 엄격한 예정인과율의 세계이다. 그 안에서 제닝스는 사실상 필름 누아르의 주인공처럼 전모를 알 길이 없는 위기에 빠져든다. 그리고 질문한다. 미래는 어디에 있는가 결국 이 질문은 불만족스러운 ‘드림’이다. 오우삼이 2004년에 만든 영화는 이라크 전쟁시대의 비만한 아메리칸 드림의 판타지이다. 여기서 미국은 세상의 시간을 걱정하고, 질서를 되찾기 위해 잉여를 제거해야 한다는 자기 중심의 강박증에 빠진다. 그래서 제닝스는 사실상 슬랩스틱 코미디의 주인공처럼 맹목적인 액션에 매달린 채 주어진 상황의 비극적 현실을 잊는다. 그리고 대답한다. 미래는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이 대답은 불가능한 ‘드림’이다. 불만족과 불가능 사이에서 왕복 달리기를 하며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 ‘미국’이라는 침대 위의 끔찍한 몽유병의 나르시시즘. 그 옆에서 횡설수설하는 남의 잠꼬대를 참고 들어주는 것은 정말 지겨운 일이다. 그런데 참, 오우삼 당신은 왜 그 침대에 ‘비둘기를 날리며’ 함께 누워 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