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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강우석·강제규 흥행 제왕 ‘강·강의 결투’

이런 라이벌이 또 있을까. 영화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는 지금 영화계를 넘어 한국 사회 전체를 떠들썩하게 하고 있다. 이 두 영화를 만든 강우석과 강제규는 한국 영화시장의 규모를 번갈아가며 늘려 왔다. 한국 영화가 아직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주눅들어 있던 99년, 강제규 감독은 <쉬리>로 500만명 관객선을 돌파하는 전국 597만명의 흥행기록을 썼다. 2~3년에 한번 극장에 올까말까 하는 사람들을 대거 끌어들인 것이다. 그리고 5년 뒤, 강우석 감독은 <실미도>로 900만명을 넘어 1000만명 고지 점령을 코앞에 두고 있다. <실미도> 상영관에선 수십년 만에 영화를 보러왔다는 60~70대도 눈에 뜨인다. <실미도> 개봉 뒤 불과 40여 일 만에 다시 강제규 감독이 <태극기 휘날리며>를 들고 나타나 <실미도>보다 빠른 속도로 첫 주말 흥행 170만명을 넘어서면서 바짝 따라붙고 있다. 감독이, 한국 영화 제작비의 상한선을 깨는 대작의 제작까지 직접 맡으면서 흥행의 상한선까지 교대로 깨나가는 이런 일은 외국에서도 전례를 찾기 힘들 듯하다. 그 두 주인공을 지난 9일 함께 만났다. 약속장소인 신라호텔 커피숍에 강우석 감독이 먼저 들어왔다. 바로 뒤 강제규 감독이 나타나자 한마디 한다. “넌 왜 매번 나보다 늦게 오냐”(강우석 감독이 강제규 감독보다 한살 위다.) “아냐, 형. 6분 전에 왔어.” 그러면서 둘이 웃는다. 자존심 세고, 지기 싫어하는 기질로 치면 이 둘만한 라이벌이 없음을 충무로가 다 안다. 그렇게 모두 알고 있음을 자신들도 알기 때문에 둘이 웃는다. 둘은 영화계에서 알게 된 지 30년이 다 돼가고, 강우석 감독 영화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의 시나리오를 아직 데뷔전인 강제규 감독이 쓰기도 했다. 감독에 더해 직접 제작, 배급까지 나섰던 강우석 감독은 90년대 중반부터 충무로의 1인자가 됐지만, 독립심 강한 강제규 감독은 독자노선을 걸어갔다. 그리고 <쉬리>로 한국 영화사의 한 획을 그었다. 그러나 제작자로서 강제규는 제작한 영화의 물량이나 개별 영화의 흥행에서 충무로의 공룡 시네마서비스를 이끄는 강우석과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수년간 충무로 파워 부동의 1인자인 강우석은 <공공의 적>으로 다시 감독을 시작했고, <실미도>로 흥행 지존의 자리까지 얻었다. 그건 내 자리라는 듯, 강제규도 다시 감독으로 돌아와 <태극기 휘날리며>를 세차게 휘날리며 쫓아간다. 이 둘의 모습이 꼭 영화같다. 강우석 강제규가 털어놓는 실미도, 태극기. 관객 1000만 힘찬 <태극기...> 할리우드랑 붙어볼 만. 흔들림없는 <실미도> 편안한 감동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 강우석 | <태극기 휘날리며>는 내가 찍을 수 있는 영화가 아니다. 보통 사람들은 엄두가 나질 않아 못하는 걸 엄두를 낸다는 것만으로도 존경할 만하다. <쉬리>나 <은행나무 침대>도 대본 보면 다들 포기할 작품들 아니었나. <태극기…> 보면서 화면 퀄리티도 그렇고 이제 못할 게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반지의 제왕> 보고 입을 벌렸던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군중 신이 다르냐. <라이언 일병 구하기>나 <블랙 호크 다운> 보면서 느끼는 진짜 전쟁이라는 느낌, 거기 비해 뭐가 뒤지냐. 벌써부터 할리우드 영화에 심취해 있는 일본 관객들의 반응이 어떨지 궁금해진다.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처럼 자신있게 밀어붙여도 후회 없을 것 같다. 드라마는 내가 찍기 어렵겠다 싶은 게 뭐냐면 어둡다. 따뜻하고 예쁜 형제애를 담고 있음에도 점점 탁해지고 힘이 들어가고 슬프다. <실미도>의 드라마는 웃을 수 있는 구석이 있다. 편하고 나른하게 가는 상황이 있다. 이 영화는 전쟁상황 속에서 동생 살리려 애쓰는 걸 보면서 힘들어지기 시작한다. 나같으면 견디기 힘드니까 내 터치로 가볍게 갔을 텐데 그게 이 영화에 맞았을까. 스타일이 다른 거다. 강간·훈련·탈출병 학살…실제 들은대로 찍었으면‘등급 보류’나왔을 것 강제규 | 지금까지 형(강우석 감독) 작품을 보면 형이 가지고 있는 영화적 색이 분명히 있다. 나는 몇편 못했고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내 영화는 힘이 많이 들어가 있다. 드문드문 나오니까 세게 힘줘도 봐줄 만하지 않았을까. 형처럼 많은 작품하면서 나처럼 하면, 만드는 사람 스스로가 부담을 느낄 것이다. 형은 많이 해왔기 때문에 버릴 것 버리고 가볍게 가고 그래서 편하게 만들 수 있었을 거다. 강우석 | 나같으면 화면 색을 가볍게 바꿨을 거다. <실미도>가 끔찍한 이야기인데도 편하게 봤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건 화면 자체가 라이트했기 때문이다. <태극기…>는 화면이 흔들리고 파편이 날아오면서 전쟁 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파워풀하다. 팔 다리 잘려 나가는 장면도 나는 찍기 싫다. 그게 영화 만드는 성격 차이일 텐데, 제규(강제규 감독)는 사람이 불타는 걸 직접 보여주지만 나는 못 보여준다. 원래 이 친구가 나보다 잔인하거든.(웃음) 강제규 | 내 기준에서는 많이 푼 거다. 형은 더 풀었겠지만. 난 스필버그의 표현 중에 ‘넌 스톱 슈퍼 액션’이란 말을 매우 좋아한다. 두시간 동안 롤러코스터 타고 가는듯한 느낌을 좋아해서 과할 만큼 몰고 가는 게 내 스타일이다. 때로 웃음, 관조가 필요한데 난 그걸 잘 못한다. 공형진을 캐스팅한 게 그런 고민의 결과다. 두 형제의 이야기가 너무 처절해서 주변 인물을 가볍게 가려고 한 거다. 그런데 팬 사이트에는 공형진을 빨리 죽였다고 원망이 쏟아진다.(웃음) 강우석 | 딱 적당한 부분에서 죽었지. 나는 격렬한 전투신보다 전쟁나기 전에 식구들이 물가에서 노는 장면, 진석이가 돌아왔을 때 엄마가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 같은 따듯한 장면이 더 기억난다. 그런 따듯한 화면이 좀 더 많았더라면 하는 개인적인 아쉬움이 있다. 강제규 | <실미도>는 이야기 구조에 흐트러짐이 없고 방향성에 혼선의 여지 없이 끝까지 가져간 게 성공을 가져온 가장 큰 힘 같다. 형의 원래 스타일이 미장센 같은 데 큰 중요성을 안 두고 찍는 걸 알았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서는 큰 기대를 안 했다. 예쁘게 포장하거나 어떤 영화적 미학을 발휘하지 않고 다큐멘터리 찍듯 찍겠다는 얘기도 전해 들었다. 만약 다른 영화 찍으면서 그렇게 했다면 안 맞았을 수도 있겠지만 소재가 실미도 사건이니까 그렇게 가도 분명히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다. 나는 영화 찍을 때 다른 것들 신경을 많이 쓰니까 <실미도>에서 부분적으로 아쉬운 게 있었지만 그게 영화의 감동과 느낌을 갉아먹지 않았다고 본다. 370만의 민군 죽고 행불 이데올로기 별 뜻 없었던 소시민의 전쟁에서 출발 강우석 | 제규가 찍었으면 아주 살벌한 영화가 됐을 거다.(웃음) 촬영 전 자료조사할 때 강간, 훈련, 사고사, 탈출병 학살 이야기 같은 걸 들으면서 진저리를 쳤고, 얘기 듣다가 그만 하라고 자른 적도 있다. 실제로 들은 대로 찍었으면 ‘18살이상 관람가’이거나 ‘등급 보류’가 나왔을 거다. 제규 같으면 시체 태워서 먹고 하는 것까지 다 찍었을 거다.(웃음) 나는 사실성보다 이야기에 중점을 뒀다. 선과 악, 피와 아의 구별에만 충실하고 과잉된 부분은 배제하려 했다. 좀 더 사실적이냐 아니냐는 문제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봤다. 처음에는 화면에도 신경썼고 기간도 길게 잡았는데 이게 아니다 싶어 그뒤부터 날기 시작했다. 후회하지 않는다. 이렇게 찍은 게 오히려 보는 이에게 편안함을 주는 게 있다고 본다. 강제규 | <태극기…>의 경우, 텔레비전에서 보니까 극장 나오는 관객 한 분이 우리가 조국 지키기 위해서 빨갱이와 열심히 싸웠는데 그런 부분 없어서 아쉽다는 말을 하더라. 예상했던 것이긴 한데, 촬영 전에 자료조사 해보니까 370만 민과 군이 사망, 행불됐다. 민간인 사상자가 많았고 전쟁 자체가 민군이 결합된 혼합전 양상이었다. 사상이나 이데올로기에 비중을 두지 않던 소시민, 국가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던 이들의 전쟁이었다는 생각에서 이데올로기적인 접근을 피했다. 절대다수의 국민들이 겪고 느낀 전쟁을 표현하고 싶었다. 물론 사상에 경도돼서 의지로 싸운 군인들도 있었다. 그들에게는 아쉬울 수 있지만 역사적 사실, 진실이라는 측면에 근접해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가 가진 전쟁이미지를 다 지우고 영점에서 출발했다. 관객 1천만명 시대 강우석 | 나는 영화 한편이 동원할 수 있는 마지노선이 600만명이라고 봤다. 800만명 넘은 <친구>도 부산 경남지역의 폭발적인 호응에 힘입은 일종의 이변 같았다. 그래도 <실미도>에 관객 몰리는 것 보면서 1000만명 가보자는 생각을 했다. 한번 1000만명이 들면 1000만명은 아무 때나 나올 수 있다. 이전 흥행작들은 300만명까지 논스톱으로 가다가 거기서 멈춰서 500만명까지 한참 걸린다. 지금은 계속 달린다. 이제는 마지노선이 600만명이 아닌 것 같다. 장르 영화는 300만~400만명이 한계다. 그게 더 들 때는 어떤 의미가 붙어서 사회현상이 됐을 때다. <투캅스>를 나는 사회고발영화로 찍은 게 아닌데, 언론이 그렇게 봤다. <실미도>도 할리우드 영화 <록> 같은 거랑 붙어보자고 만들었다. 그런데 자료조사 하다보니까 뭐 이런 나라가 다 있나 싶었다. 사회적 사건이나 실화를 다룬 영화는 조심스럽게, 솔직하게 찍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히 사회고발 안해도 과거의 아팠던 부분 보여주니까 잘 만들고 못 만들고를 떠나 느끼는 관객의 분노와, 지금은 그래도 낳은 시대에 산다는 안도감 같은 게 생기는 것같다. 찍을 땐 그것까지 예상하지는 못하고 드라마틱한 소재의 경쟁력만 봤을 뿐인데 사회현상이 되니까 나도 헷갈린다. 강제규 | 우리가 격동의 세월을 지나왔는데 선배들의 아픔, 상처, 이런데 대한 사회적 배려장치가 너무 없었다. 그런데 대한 보상심리가 <실미도>에 작용하지 않았을까. <실미도>는 잘 만들고 못 만들고를 떠나서 요즘 관객들 취향으로 보면 한계가 있을 거라는 시선이 있었다. 그게 아니었던 거다. 과거의 아픔, 고통에 동참하는 데에 인색했다는 공감이 생긴 거다. <태극기…> 준비하면서도 반성 많이 했다. 나는 아버지가 6·25 때 군인이었고, 삼촌이 월남전에 참전했다. 그런데 내가 얼마나 관심을 가져 왔는가. 아마 형도 <실미도> 만들고 고맙다는 이야기 많이 들었을 거다. 그게 가식적인 말이 아니라 영화에 대한 공감이자 그동안 당신들은 뭐하고 있었냐는 질타일 수도 있다. 너도나도 과거만 얽매일까, 이상한 대작주의 부를까 부담스럽고 염려스럽다 강우석 | 그런데 <실미도>나 <태극기…>를 계기로 후배들이 너도 나도 심각한 과거, 10·26, 5·16 등을 영화소재로 끌어낼까봐 부담스럽다. 벌써 그런 기획에 대한 소문들이 들려오는데, 이 두편이 이상한 대작 지향주의를 불러올까봐 영화적 역기능이 우려된다. 강제규 | 우리 사회는 아직 다양성이 덜 인정되는 구석이 있다. 누가 뭘 잘해서 터지면 다 따라가고 그런 게 문제다. 내가 나중에 또 이런 영화를 찍으면 ‘저 인간은 그냥 저런 거 하는구나’ 하면 되는데 ‘너만 찍냐’ 이러면 곤란하지 않나.(웃음) 나는 1천만명 시대가 소중한 게, 파이가 커지면 그게 동력이 돼 더 다양한 기획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지금 중년을 소재로 한 영화는 위험성이 너무 크지만 30~40대가 준비된 관객이 되면 그런 영화가 나올 거다. 1000만관객 파이 커진만큼 다양한 기획 동력도 세져 30·40대 관객 더 끌어낼거다 강우석 | 제규에게도 이야기했지만 <태극기…>가 크게 터져서 <실미도>를 잊혀지게 했으면 좋겠다. 나는 영화를 계속 찍고 싶다. 1년에 한편씩 꼭 개봉하고 싶다. 앞으로 제작에 관여는 하겠지만 돈은 안 만질 거다. 올해 말엔 <공공의 적> 2편이 나올 거고. 스필버그는 영화마다 수익 2억달러를 넘기면서도 계속 찍는다. 그게 의미가 있지 제임스 카메론처럼 <타이타닉> 하나 찍고 ‘아이 엠 더 킹 오브 더 월드’ 하면서 놀면 뭐하나. 흥행 성적에 신경쓰는 건 딱 어느 선까지만 하고 빨리 새 걸로 넘어가야 한다. 투자, 배급, 제작자에서 감독으로 돌아왔을 때 격려하고 밀어주는 게 언론이 할 일 아닌가. 강제규 | 형이 주변 감독들 영화하도록 자리 만들고 격려하고 영화 양산하도록 한 데 대해 박수를 보내야 한다. 나는 그걸 못할 것같다. 몇년 동안 비슷하게 해보려고 했는데 제대로 안됐다. 이젠 좀 더 철저하게 감독쪽으로 가려 한다. <쉬리> 찍고 나서 5년만에 새 영화 내놓은 것에 대해 반성 많이 했다. 이건 배신이다(웃음). 아무리 늦어도 2년에 한편씩은 찍어야지. 형처럼 머리가 빨리 돌아가고 부지런하면 1년에 한편도 되겠지만. 강우석 | 나도 너처럼 잔인하게 찍으려면 2년에 한편이야.(웃음)

[외신기자클럽] 낯선 영화들에게서 더 멀어진 스크린 (+불어원문)

우리 동네 비디오 가게의 액션 코너에서 <2009 로스트 메모리즈>라는 제목이 붙은 낯선 물건을 발견했다. 수입한 한국 DVD가 아니라 프랑스 시장을 대상으로 특별 제작된 버전으로, 프랑스어 자막, 프랑스어 녹음, 특별부록 등이 갖춰진 것이었다. 원칙적으로는 프랑스 관객이 한국영화를 더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어 기뻐할 일이다. 그렇지만 나는 심정이 복잡했다. 는 프랑스에서 개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비디오 유통망에 나오게 된 것은 극장 배급의 길을 영영 닫아버린 것이다. 내 앞에 있었던 그 DVD만이 프랑스에서 이 영화를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셈이다. 비디오 유통망은 스크린을 둘러싼 격렬한 쟁탈전에 비해 위험부담이 적다. 극장에서는 언론, 광고, 홍보물 담당 등으로 이루어진 홍보팀이 몇주 동안이나 공들인 노력을 몇 시간 만에 무너질 수 있다. 비디오는 마케팅 비용이 거의 들지 않고, 매장 코너에서 무한정으로 진열되어 홍보도 되고 장기 대여가능성도 보장된다. 얼마나 많은 영화들이 DVD 판촉만을 위해서 극장 개봉을 하는가? 극장 개봉은 점점 시사회처럼 여겨져, DVD, 기내 상영, 호텔방에서의 유료상영(pay-per-view), 텔레비전, 인터넷 등으로 거듭날 다목적 멀티미디어 상품의 탄생을 화려하고 거창하게 알리는 행사가 되고 있다. 그러니 비용이 많이 드는 준비단계를 생략한들 어떤가? dvdrama.com이라는 사이트의 평론가들은 이 영화의 프랑스판과 한국판 DVD를 비교했는데, 프랑스 출시 버전이 한국 버전보다 훨씬 밝다는 결론을 내렸다. 감독과 촬영감독은 대형 화면의 스크린을 위해 어두운 조명을 만들었지만, 배급사는 작은 화면으로 그 작품을 처음 만나는 프랑스인들의 눈이 최대로 편안한 게 낫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다른 영화들도 이같은 방식으로 출시되었거나 출시 예정이다. <공동경비구역 JSA> <피도 눈물도 없이> <화산고>…. 출시 목록은 대형 스크린에서 우선적으로 스펙터클한 즐거움을 주도록 만든 대작들이 포함된다. 이유는 이를 통해 제작 뒷얘기, 특수효과 등을 설명하는 부록을 늘릴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이 영화들은 극장 관객을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말들을 한다. 프랑스에서 알려진 한국 감독은 홍상수 감독과 임권택 감독이다. 극장에 상영되는 아시아영화들은 화염 특수효과 같은 것에는 관심이 적은 마니아 관객만을 대상으로 하게 될 것이라는 거다. 설득당하지 않은 채 나는 DVD 상자를 미래를 예측하는 수정구슬처럼 바라보았다. 특정영화들만이 스크린으로 등장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고 나머지 영화들은 바로 컴퓨터, 텔레비전, 휴대폰 등으로 나오는 세상, 이미지 하나하나가 조금씩 더 그 영화를 만든 사람들의 손에서 멀어져버리는 세상. 그런 세상을 예언하는 구슬로 말이다. Rencontre prémonitoire J’ai croisé au rayon action du vidéo store de ma rue un étrange objet intitulé « 2009 Lost Memories ». Il ne s’agissait pas du dvd coréen importé mais d’une version destinée spécialement au marché français avec sous-titres, version doublée, bonus exclusifs etc. Il faut en principe se réjouir d’un accès plus facile aux films coréens pour le public français. Cependant, je restais mitigé : « 2009 Lost Memories » n’est jamais sorti dans l’Hexagone. En s’ouvrant au circuit vidéo, il s’est fermé à tout jamais le chemin des salles. J’avais devant moi le seul moyen de le voir en France. Le circuit vidéo comporte moins de risques que la compétition violente des grands écrans où en quelques heures peuvent s’effondrer des semaines d’énergie dépensées par une équipe d’attachés de presse, de publicitaires, de colleurs d’affiches… En vidéo il n’y a presque aucun frais de marketing, la durée d’exposition illimitée sur les rayons fait office de promotion et assure une rentabilité à long terme. Combien de films ne sortent en salle que pour lancer la promotion du dvd ? La sortie sur grand écran fait de plus en plus figure d’avant-première. Elle signe la naissance en grande pompe d’un produit multimédia qui comportera différentes vies : dvd, diffusion dans les avions, pay-per view dans les hôtels, télévision, Internet… alors pourquoi ne pas sauter la coûteuse étape préliminaire ? Les critiques du site dvdrama.com ont comparé les dvd coréens et français du film et constaté que la version hexagonale est plus lumineuse que l’originale. L’éclairage sombre avait été composé par le réalisateur et le chef opérateur pour le grand écran. Les distributeurs ont jugé bon d’optimiser le confort visuel des français qui découvrent l’œuvre pour la première fois sur petit écran. D’autres films sont déjà sortis ou sortiront de cette façon : « J.S.A », « No blood, no tears », « Volcano High »… la liste comporte de gros budgets a priori destinés surtout au plaisir du spectacle sur grand écran. La raison en est qu’ils permettent de multiplier les bonus expliquant les coulisses du tournage, les effets spéciaux…On me dit souvent que ces films ne trouveraient de toute façon pas de public en salle. En France, les réalisateurs coréens connus sont Hong Sang-soo et Im Kwont’aek. Le cinéma asiatique en salle ne s’adresserait qu’à un public cinéphile peu porté sur la pyrotechnie. Sans en être convaincu, je regardais cette boîte comme une boule de cristal, objet prémonitoire d’un monde où certains films auront le privilège d’aboutir sur des grands écrans, où d’autres atterriront directement sur des ordinateurs, des télévisions, des téléphones portables… un monde où les images échapperont encore un peu plus à leurs créateurs. Adrien Gombeaud Critique et journaliste à la revue Positif Traduit par Youngin Ki

[해외단신] <심슨 가족>, 장편애니메이션 제작 外

◆<심슨 가족>, 장편애니메이션 제작 텔레비전 만화 시리즈 <심슨 가족>이 드디어 장편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질 전망이다. 이미 작품에 대한 구체적인 작업이 진행 중이며, 이 시리즈의 수장 맷 그로니와 제임스 L. 브룩스가 시나리오 작가들을 선두지휘하고 있다. <심슨 가족> 영화화 계획은 1990년 시도되었다가 실패한 적이 있다. ◆아카데미 대표, 오스카상 지연중계 계획 맹비난 2월29일에 열리는 오스카상 시상식을 중계하는 가 5초 지연중계 방식을 결정하자 미국영화과학아카데미 대표 프랭크 피어슨이 강하게 반발했다. 피어슨은 지연중계가 검열을 포함한다며 “라이브쇼는 라이브로 하거나 하지 말거나 둘 중 하나”라고 비난했다. 의 결정은 재닛 잭슨의 슈퍼볼 소동 이후 정치적 압력에 의한 것이다. 피어슨은 또 “자본, 윤리, 법적 딜레마”라며 유감을 표시했다. 는 묵묵부답. ◆로렌스 피시번, <분노의 13번가> 출연 존 카펜터의 76년작 <분노의 13번가>의 리메이크작에 로렌스 피시번과 에단 호크가 동참한다. 4월에 촬영될 새로운 <분노의 13번가>는 프랑스 감독 장 프랑수아 리쉐의 미국 진출작이다. 로렌스 피시번은 갱으로, 에단 호크는 경찰로 분한다. ◆롤랜드 에머리히 신작 <고질라> <인디펜던스 데이>를 연출한 롤랜드 에머리히가 성노예에 대한 고발 영화 <더 걸스 넥스트 도어>를 감독할 예정이다. <더 걸스 넥스트 도어>는 올해 1월25일치 <뉴욕타임스>에 실렸던 아시아 및 히스패닉계 소녀들을 착취하는 미국 내 섹스산업에 대한 폭로 기사를 원안으로 한다. <투모로우>의 후반작업 중인 롤랜드 애머리히는 현재 그 기사를 쓴 피터 랜즈만과 함께 구체적인 스토리를 구상 중이다. ◆<마스터 앤드 커맨더>, 런던영화평론가협회 작품상 런던영화평론가협회가 <마스터 앤드 커맨더: 위대한 정복자>의 손을 들어줬다. 영국 신문 및 잡지에 글을 기고하는 100명의 평론가들로 구성된 이 단체는 작품상을 비롯하여 폴 베타니에게 영국 남우주연상을, 공동각본을 맡은 피터 위어와 존 콜리에게 각본상을 몰아줬다. 한편,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은 단 한 부문도 수상하지 못했다. ◆할리우드, 영국 출판인 커닝엄에게 구애 J. K. 롤링, 코넬리아 푼케 등 아동문학 베스트셀러 작가를 발굴한 영국 출판인 배리 커닝엄을 파트너로 맞기 위해 뉴라인과 미라맥스가 경쟁 중이다. 커닝엄은 블룸스버리 출판사 재직시 <해리 포터> 1권을 발굴, 출판했고 지난해에는 독일 작가 코넬리아 푼케의 <잉크하트> <도둑의 제왕>이 미국 서점가를 강타해 주목받았다. 두 영화사는 커닝엄의 회사 치킨하우스가 영화, 연극, TV 판권을 관리하고 있는 작가들의 책에 관한 영화화 우선권을 포함하는 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교섭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컴캐스트 디즈니 인수 의사 밝혀 미국 최대 케이블TV회사 컴캐스트가 디즈니를 인수하겠다고 나섰다. 이 회사 최고경영자 브라이언 로버츠는 2월11일 541억달러 규모의 컴캐스트 주식을 지급하고 119억달러 규모의 디즈니 부채를 인수하는 방식으로 월트 디즈니를 인수하겠다고 공개제의했다. 이 합병이 성사된다면 수년 전 AOL 타임워너 합병에 이어 또 하나의 거대 미디어그룹이 탄생하게 된다. 디즈니쪽은 “컴캐스트의 제안을 면밀하게 평가하겠다”고 밝혔다.

최종 관심사는 역시 콘텐츠, 명필름 이사 이은

강제규와 손잡고 MK버팔로 탄생시킨, 명필름 이사 이은 <태극기 휘날리며>의 성공에 기뻐하는 영화인이 제작진과 강제규필름 직원만은 아니다. 그리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입을 다물지 못할 이들이 있으니 바로 명필름 사람들이다. 얼마 전 강제규필름과 결합해 MK버팔로라는 새 회사를 만든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자동적으로 <태극기 휘날리며>는 명필름의 영화가 된 셈이다. 명필름 이사인 이은 감독은 이런 계약을 이끈 인물이다. 사업다각화를 노리는 수공구업체 세신버팔로와 명필름과 마찬가지로 증권시장 자력진출이 좌절된 강제규필름을 묶는 일을 성사시킨 것이다. <태극기 휘날리며> 개봉에 가려져 크게 두드러지지 않고 있지만 이번 계약이 미칠 영향은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명필름, 강제규필름이 합친 규모에다 앞으로 특정 배급사가 이들 영화의 유통을 전담한다면 일정한 지각변동이 불가피할 것이다. 이은 감독에게 궁금한 것은 이런 변화의 밑그림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가였다. 명필름의 브레인으로서 그가 꿈꾸는 MK버팔로의 미래와 명필름의 변화에 대해 들어봤다. -MK버팔로 설립의 핵심은 강제규필름과 명필름이 합친다는 얘기 같다. 그렇다면 상당히 큰 규모의 영화사가 되고 신규사업 진출이나 확장을 예상하게 되는데 크게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림은 아직 안 나왔고, 원칙만 나온 상황이다. 강제규 감독은 제작하는 역량이 출중하고, 명필름은 제작관리를 효과적으로 한 경험이 있으니까 ‘콘텐츠’라는 이름으로 통합되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판단이다. 이것이 다른 한국영화 주체들의 노력을 통해 긍정적으로 전개되는 전체 상황에서는 자연스럽게 아시아 시장을 겨냥한 포석도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단적으로 CJ나 시네마서비스 같은 메이저 모델을 지향하는 건가? 독자적인 투자, 배급사로도 기능하는 것 아닌가. =배급이나 극장이 문제인데 콘텐츠 중심의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하는 것이 기본적인 목적이라서 유통이나 수직 통합의 관점에 관해서는 아직 특별한 뜻이 없다. 관심의 대상은 창의적이고 경쟁력 있는 콘텐츠일 따름이다. 배급과 제공을 대칭점으로 보면, 이러한 구분에서 우리도 제공사의 위치까지는 가겠다는 판단이다. 배급의 경우는 가급적 전략적 제휴 개념으로 접근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일괄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유리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쇼박스나 롯데시네마와 결합한다면 상당한 지각변동이 예상되는데. =가급적이면 남에게 폐를 안 끼치면서 순리대로 할 것이다. 한국 영화산업의 시장전망과 경쟁력 있는 구도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지금 순리는 개봉된 <태극기 휘날리며>에 집중하는 것이다. -안정적으로 제작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두 영화사가 결합을 선택한 제일 큰 이유일 것이다. 한편에서는 상장기업의 논리만을 따르다보면 제작 면에서 안 좋은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우려가 있다. =형식 논리에 불과하다. 사업에서 근본적인 성패는 시장에서의 자체 경쟁력에 좌우될 뿐이다. 상장과 비상장이라는 구분은 그 사업의 성패를 결정하는 요소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상장과 비상장의 차이는 사업을 잘한다는 가정에서 더 많은 기회를 확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는 점 정도다. -세신버팔로의 김문학 대표와 알던 사이라는데 어떤 과정을 통해 이러한 결합이 이루어졌는가. =중·고등학교 동기였지만 학창 시절에는 잘 모르고 지내다가 지난해에 골프 치다가 재회했다. 강제규 감독과는 지난해 3월부터 합의가 되었고 당시에 다른 코스닥 기업들과도 접촉했다. -강제규필름말고도 다른 영화사와 결합하는 것도 염두에 뒀을 텐데, 강제규 감독과 마음이 맞은 건 언제였나. =강제규 감독과 같이 작업하자는 이야기는 역사가 길다. 1992년이었나? 방배동 장산곶매 시절 친구들인 장윤현, 오창환과 더불어 장이오 프로덕션이라는 이름을 걸고 있었다. 심재명 대표와 명필름 만들기 전인데 강제규 감독이 비디오 공포영화를 찍던 영화발전소 시절이다. 사무실이 건물 하나 건너 있으면서 둘 다 후배들 데리고 힘든 시절이었기 때문에 “합치자”는 말을 자주 했다. 반쯤은 농담처럼. 그랬는데 여기까지 오게 됐다. -명필름이 올해 가장 먼저 내놓을 영화는. =흔쾌히 답하기가 어렵다. 내부에서 시나리오를 개발할 때 작업의 완성도를 1부터 5 정도의 수치로 평가하는데 3 정도의 수준이면 제작 일정을 수립한다. 현재 사정은 1.0 정도 버전이 많아서 라인업의 순서에 대한 확답을 하는 것은 시기상조다. 현대물은 가급적 빨리 진행하고 <노근리 다리>나 <아리랑> 같은 시대적 배경을 지닌 작품은 신중하게 꼼꼼한 고증을 거치는 방식으로 가져갈 생각이다. -명필름은 이제까지 같은 감독과 작업을 지속하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올해 준비하는 작품을 보면 임상수, 임순례, 최호, 김현석 감독 등이 다시 명필름에서 찍는다. 어떤 변화를 예고하고 있는데 어떤 의미인가. =전작을 통해 PD와 감독 사이에 이루어진 기존의 커뮤니케이션도 일종의 경쟁력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영화사마다 각각 감독을 안는 방식이 있다. 싸이더스는 감독에 대해 장기적인 전망을 갖고 배려하는 편이고, 영화사 봄은 감독과의 신뢰 혹은 인간관계가 좋은 편이고. 명필름의 경우는 합리적인 관행을 확보하면서 프로젝트별 기여도를 객관화하는 방식으로 일할 생각이다. 영화의 성격에 따라 감독의 지분이 달라지겠지만 신인감독을 발굴하는 프로젝트와 달리 4명 감독과는 일정한 신뢰를 구축한 터라 장기적으로 함께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예전엔 뭐 장기적인 생각 같은 거 할 겨를이 별로 없었던 거고. -<욕망>이 개봉한다. <욕망>처럼 상업적인 매력이 부족한 프로젝트는 돌파구가 쉽지 않다. 앞으로도 이런 영화를 만들 텐데 어떤 대안을 갖고 있나. =비주류 프로젝트의 가능성은 시장 다양성의 문제와 직결된다고 본다. ‘웰메이드’나 ‘트렌드’를 좇는 영화만이 살아남는 것이 현실이다. 비주류 프로젝트는 프로듀서로서 이상주의의 일종이라고도 생각한다. 나쁘게 말하면 오만, 좋게 말하자면 도전정신. 임순례 감독이 준비하는 <무림고수>도 그런 분류에 속할 것이고, 심보경 이사가 진행하는 다큐멘터리 스타일의 DJ. DOC 이야기도 그 한 예다. 앞으로는 <영매>의 경우나 <송환>을 참고할 것이다. 단관 개봉이나 디지털 시장도 가능성이 생겨야 한다. 영진위의 새로운 지원책인 텔레비전용 극영화 지원을 이용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DJ. DOC 프로젝트는 TV와 영화를 동시에 노리는 방향도 가능하다. -상장기업이 됨으로써 비주류 프로젝트가 어려워질 거라는 우려도 있다. =기업에 대한 주주들의 다양한 의견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너무 가벼운 영화에 대한 경계도 너무 무거운 영화의 경계도 있을 수 있겠으나 비윤리적이거나 비합리적인 행동을 통해 기업에 해를 끼치는 상황을 제외한다면 영화의 리스크는 단지 상존하는 환경이라고 생각한다. 개발 작품의 수가 많을수록 기업 내의 안정성을 도모할 수 있다. 강제규필름의 프로젝트는 올해 <몽정기2> <쉬리2>인데, 명필름 영화를 보완하는 역할이 가능할 것이다. -정계 진출설이 있다. 열린우리당에서 공천대상으로 삼았다던데. =스크린쿼터 비대위를 열심히 했고 그러니까 그런 말이 나왔나 본데. 일단은 영화계를 걱정하는 분들 가운데 그동안 쭉 있던 논리가 ‘영화계에서 누군가 국회위원이 되는 것이 거창하게 보면 국익이고, 영화계에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라는 거였다. 그런 사람을 찾는 중에 내가 거론이 된 것이고. 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지 그런 건 못하니까 안 되겠다 이런 거다. 구체적으로 당에서 뭔가를 제의하고 거절하고 이런 건 아니다. 누군가 해주면 좋겠지만. 개인적으로 정치에 관심이 없고 성향적으로 학교 다닐 때 항상 한번은 백기완 찍고, 한번은 디제이 찍고 살아온 성향에 불과하다. 난 차떼기가 정권을 잡아서는 안 된다고 믿는 보통 시민일 뿐이다.

<귀여운 여인>

요새 영화계 풍경은 한 극장에서 대여섯개씩 스크린을 잡고 있는 <태극기 휘날리며> 때문에 입이 귀에 걸린 사람과 눈꼬리가 귀에 닿는 사람으로 나뉜다. 자잘하고 사랑스런 영화들은 태풍 <실미도>를 피해 2월이면 극장에 나서볼까 했다가 핵폭풍을 또 만나 한없이 표류하는 중이다. 봄기운이나 들어야 이들에게도 햇살이 들려나. 이런 판국을 보며 블록버스터는 나쁘다고 하자니 우습고 시장 논리니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것도 단순하다. 하나마나한 모범답안으로 체면치레하자면, 우리는 지금 영화산업의 제2차 폭발기를 맞아 새로운 문제에 직면한 것이고 문제가 생겼으니 답을 찾아야 하고 답은 목마른 자가 우물 파는 심정으로 달려들고 옆에서 거들어야 한다. 나는 요즘 우물을 파는 대신 틈만 나면 등짝을 바닥에 붙인 채 눈만 가자미처럼 옆으로 돌리고 누워 텔레비전을 보는 중이다. 그랬더니 재미있었다. <대장금>만 잘 만드는 게 아니라 몇몇 드라마, 오락, 다큐멘터리에 이르기까지 한국 텔레비전의 발전도 장난이 아니었다. 그중에 가장 신기한 것은 MBC 일일드라마 <귀여운 여인>이다. 이야기의 골격은 성격 까다로운 부잣집 사람들과 착하고 심지 굳은 가난한 사람들이 우연히 만나 서로 반했는데 결혼을 하자니 여간 장벽이 많은 게 아니라는, 멜로드라마의 전형이다. 처음엔 좀 심심했다. 그러다 극중 인물들에 대한 감정이입이 시작됐는데 놀랍게도 그 대상이 고약한 부잣집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 정도 부자가 되려면 로또 당첨밖에 길이 없는 형편이니 이상한 일이었다. 주말 한때 드러누우신 부처님 같은 자세로 곰곰 생각을 한 결과 그럴싸한 답이 떠올랐다. 이 드라마는 한국적인 부르주아 멘털리티에 대해 설득력 있는 묘사를 하는 중인 것이다. 언뜻 단조로워 보이던 부잣집 사람들은 다른 계급 출신의 여성들이 접근해오자 자부심과 방어의식, 콤플렉스, 죄책감으로 균열을 일으킨다. 거기에는 한국의 신흥 부르주아지가 형성된 사회역사적 맥락, 아버지/가문/계급의 질서를 교란하는 작은아들, 그 질서의 완벽한 계승자로 보이던 맏아들의 내적 소외, 모성의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방어적 히스테리 같은 것들이 오목조목 펼쳐진다. 덕분에 ‘귀엽다’고 전제되긴 해도 캐릭터가 맨송맨송한 내 편인 ‘여인’들보다 저쪽 편 사람들의 분열과 소란이 훨씬 흥미로워진 것이다. 이들이 통째로 파국을 맞는 결론은 아마도 <하녀>(1961)를 만든 김기영 감독이나 부림직한 배짱일 테지만, 이 쩍 벌어진 구멍을 작가가 어떻게 봉합해나가려고 시도할지, 그 자체도 자못 궁금하다.

[인터뷰] <그녀를 믿지 마세요> 강동원

“내가 특별히 잘났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어휴, 그렇게 못생긴 줄 몰랐어요. 감독님이 정말 미웠다니까요. 상상 속의 느끼버전에서도 대본에선 ‘올백머리’가 아니었는데 억지로 시키고….” 이렇게 망가질줄 몰랐다니까요 〈그녀를 믿지 마세요〉에서 최희철을 연기한 강동원(23)에게 첫 영화의 시사 소감을 묻자 대뜸 나오는 대답이 너무 솔직()해서 약간 당황스럽다. 이렇게 말하는 건 강동원을 ‘두번 죽이는 일’이 되겠지만, 실제로 만나본 강동원은 지금까지 시에프와 텔레비전 드라마를 통해 그가 연기해온 도시적 꽃미남보다는 최희철에 더 가까운 이미지였다. 일단 어눌하고 느린 말투가 그렇고, 앞뒤 재기보다는 순간순간 솔직한 감정을 드러낸다는 점도 그렇다. 어리바리함과 어릴 적 신동 소리를 들었던 영특함이 공존한다는 것도. (강동원은 지난주 문화방송 오락 프로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브레인 서바이버’ 꼭지에 출연해 1등을 했다) 가장자리서 빛나는 연기 알았죠 연기를 시작한 이유를 묻자 옆에 앉은 영화 홍보 직원 눈치를 슬쩍 보면서 “영화나 드라마도 별로 안 좋아했는데 어떡하다 배우가 됐는지 내가 생각해도 웃겨요. 얼마 전에는 〈장화, 홍련〉 보고 싱크대 밑 귀신이 자꾸 생각나서 잠도 못 잤어요”라고 대답하거나, 여학생 팬들의 반응이 장난 아닐 것 같다고 하자 “이상하게 저는 정말 여성팬밖에 없어요. 남자들이 나를 재수없어하나 봐”라고 느릿느릿 하는 이야기를 듣는 동안 도시의 꽃미남은 저 멀리 날아가고 시골 약사 최희철이 앞에 앉아 있다. 아이돌 스타들의 수직상승은 어제오늘 일도 아니지만 강동원의 짧은 배우 이력은 유독 화려해 보인다. 2000년 길거리 캐스팅으로 모델일을 시작한 뒤 그는 지난해 〈위풍당당 그녀〉에서 비중 있는 조역을, 〈1%의 어떤 것〉에서 주연을 맡았고, 첫 영화 〈그녀를 믿지 마세요〉에서도 주인공으로 데뷔했다. 수월하게 주인공 자리에 오른 만큼 큰 부담을 느끼지 않는 것도 당연해 보인다. 심각하게 이야기할 만한 연기관은 없지만 “싫증을 금방 느끼고 끈기있게 하는 일이 별로 없는데 중·고등학교 때 축구했던 것말고는 유일하게 점점 재미있어지는 게 연기인 것 같다”고 그는 말한다. “아직 연기도 잘 못하는데 다른 걸 어떻게 해요. 그냥 한 우물만 팔래요.” 최희철식으로 자신의 포부를 이야기하는 그는 식구들로 출연했던 노장 선배들과 함께 이번 영화를 하면서 “조명 한가운데 서는 것보다 있는 듯 없는 듯 조명 가장자리나 바깥에서 빛나는 연기의 소중함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다음엔 <늑대의 유혹> 기대하세요 강동원은 지금 지난해 11월 〈그녀를 믿지 마세요〉의 촬영을 끝낸 직후 들어간 〈늑대의 유혹〉 촬영에 다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청춘 로맨스물인 이 영화에서 그는 얼짱, 싸움짱에 우울한 상처를 가진 “순정만화 주인공 같은” 정태성 역을 맡았다. 〈그녀를…〉에서 망가진 이미지를 회복할 수 있겠다고 말하니 얼굴이 환해진다. “맞아요. 그러니까 〈그녀를 믿지 마세요〉 본 관객들, 이 영화도 꼭 보러 오셔야 돼요.” 첫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두번째 영화까지 전속력으로 질주해온 그는 〈늑대의 유혹〉이 개봉하는 올여름쯤 혼자 멀리멀리 여행을 가서 한두달 푹 쉬고 돌아올 계획이란다.

남성 노스탤지어 영화의 불안과 강박 [5] - 유운성

과거와 추억에 대한 반복되는 오해 거짓 기억과 거짓 치유 유운성/ 영화평론가 akeldama@netian.com 최근의 한국영화가 역사와 기억, 혹은 노스탤지어의 문제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하는 건 벌써부터 진부하게 들린다. 아니, 그게 얼마나 되었다고? 게다가 이를 주제로 삼은 비평적 분석들도 이미 꽤 되는 것 같다. 이런 글들은 대부분 동시대의 과거지향적 한국영화들에 나타난 미숙하고 퇴행적인 징후들을 지적한다. 동시대 한국영화들이 어떤 식으로든 과거재현의 문제에 매달리고 있으며 스크린은 점점 그 재현된 과거와 대중의 욕망이 한데 만나 얽히고 융합되고 때로는 충돌하는 경합의 장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뿐인가? 영화적으로 재현된 과거와 대중의 욕망이 뒤섞이는 저 스크린은 과거의 영화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절대적이고 숭고한 만신전이 아니다. 매끈한 육체를 지닌 스타급 남자배우들의 육체가 단련되기도 하고 상처입기도 함으로써 매혹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선사하는 이 스크린, 그곳을 지배하는 것은 오직 표면에만 천착하는 텔레비주얼한 이미지 혹은 비디오-이미지들이다. 역시 진부한 이야기다. 플래시백? 플라시보! 그러니 잠시나마 좀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되돌아가보자. 영화가 과거를 재현한다고 말할 때 정확히 우리는 어떤 과거를 지칭하는 것일까? 물론 (고전적인 개념의) 영화를 통해 재현되는 것은, 실시간 스크린(real-time screen)에서 떠오르는 텔레비주얼한 이미지가 아닌 이상 모두가 과거의 이미지들이다. 우리는 지금 상대적으로 그보다는 좀더 먼 과거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역사로서의 과거? 기억으로서의 과거? 공적역사와 사적기억의 대립을 설정하고 나면 논의는 쉬워진다. 영화 속에 재현된 다양한 발화주체들의 사적기억을 보듬어 안으면서 공적역사의 균열을 섬세하게 탐색하는 영화는 당연히 상찬된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몇몇 목소리들의 억압을 감행했다는 사실이 감지되거나(<말죽거리 잔혹사>), 지나치게 사적기억에 밀착하면서 역사를 탈색시켰다는 혐의가 발견될 때(<친구>) 그것은 사유의 천박함의 증거가 된다. 여기서 문제제기하고 싶은 것은 동시대 과거지향적 한국영화들이 어떤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면, 그것은 공적역사와 사적기억의 조율의 실패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과거의 다양한 범주들을 그 고유의 자리에서 이탈시켜 어울리지 않는 문맥 속에 가져다두는 데서 그 한계의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혹은 이 영화들이 불러들이는 과거와 대중의 기억, 그리고 개개인의 추억 사이에서 벌어지는 오해가 지루하게 반복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의 ‘영화적 사회’에서 영화들이 불러일으키는 플래시백 효과를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때이다. 혹시 그것은 우리를 오도하는 환상을 구태여 추억이라고 부르면서 과거의 상처, 죄의식, 그리고 부채감을 떨쳐내기 위한 거짓된 몸짓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때 플래시백 효과란 결국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 아무런 약효도 없는 가짜 약을 진짜 약인 것처럼 속여 환자에게 복용시켰을 때 환자의 병세가 호전되는 현상을 일컬음. 위약효과라고도 한다- 에 불과한 것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거짓 기억의 영화들 우선 과거의 다양한 범주들을 좀더 공적인 것에서부터 사적인 것의 순으로 나열해보자. 일단 단선적이고 인과관계에 따라 기술되는 공식적인 역사가 있다. 다음은 비록 공식적으로 사료화되지는 않았을지라도 대중의 뇌리에 잠재적으로 각인되어 있는 비인칭적(impersonal) 기억이 있다. 이 기억은 종종 불균질적이고 다수적인 것들의 공존으로 특징지어지는데- 따라서 다중(多衆·multitude)의 기억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과거지향적 한국영화들은 어떤 식으로든 대중의 이러한 비인칭적 기억을 자극하고자 한다. 이보다 더 사적인 것에 속하는 과거는 개개인들이 지니고 있는 사적인 역사들로 미시사적 연구의 대상이 될 법한 것들이다. 마지막 범주는 역사나 기억이라기보다는 추억이라고 불러야 옳을 것이다. 단편적이고 조직화되어 있지 않지만 강력한 반짝임 같은 것으로 남아 있는 극히 개인적인 과거의 이미지들 말이다. 추억 앞에서 재현은 무력해진다. 혹은 추억은 재현의 강요와는 무관하게 자신만의 과거를 불러들인다. 좀더 관심을 좁혀 <친구> <해적, 디스코왕 되다> <품행제로> 그리고 <말죽거리 잔혹사>에 이르는 이른바 ‘노스탤지어 영화’들에 관해 말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위의 목록에 과거의 범주 한 가지를 더 추가해야 한다. 사실 노스탤지어라는 말은 이 영화들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하기에는 다소간 부적절한 용어가 아닐 수 없다. 이들이 과연 우리의 반짝이는 추억을 붙드는 영화들이란 말인가? 날카로운 반짝임을 무디게 하고 남은 것은 무용담이다. 날카로움이 사라진 자리가 크면 클수록 ‘사나이’들의 몸짓은 더더욱 격한 것이 되어갈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멋들어지게 춤추고, 부수고, 찢고, 베고 해봐야 사라진 추억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사실상 이런 영화들은 ‘○○○세대에 바쳐진 영화’가 아니라 추억이 없는 세대에 바쳐진 영화들이다. 개개인의 수많은 추억들은 단조로운 거짓 기억 앞에서 제물이 된다. 그런데도 그 영화들을 통해 재현된 과거는 여하간 추억이라 불린다. 차라리 우리는 이들 영화를 ‘거짓 기억(false memory)의 영화’들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디테일은 사라진다. 더 정확하게는 이러한 재현으로부터 우리가 바르트적인 푼크툼(punctum)을 발견할 가능성은 사라진다. 대신 얼른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환유적 대상들- 교련시간, 복장검사, 폭력적인 교사들, 패싸움, 디스코 그리고 이소룡 기타 등등- 이 우리 눈으로 불쑥 침범해 들어온다. 문제는 우리가 이 환유적 대상이 범람하는 것을 흔히 디테일로 착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속임수를 알아차리기도 전에 숏은 바뀌고 인물들은 날뛴다. 인물들은 점점 멜로드라마의 세계로 진입해 들어가기 시작하고, 환유적 대상들은 과장되고 변형되어 고달프고 억압적이었던 시대를 뜻하는 거대한 상징물이 된다. 또한 실재했던 환유적 대상들을 요소로 취하는 허구적 관계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면서 이들 영화의 재현은 우리가 차마 마주하길 두려워하는 과거를 대신하는 거짓 기억으로 전환된다. 우리는 과거와 대면하는 대신 상상적으로 이 대상들만을 처리하면 된다. 트라우마 내세우기 여기까지의 논의를 통해 짐작했겠지만, 추억을 가장한 거짓 기억은 어느새 비인칭적인 대중의 기억에까지 스며들기 시작한다. 때로 그것은 실재했던 환유적 대상들을 요소로 취하는 허구적 관계들을 향한 허구적 저항을 ‘억압적이었던 과거’를 향한 발언으로 내세우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교련복은 벗어던질 수 있어도 기억에 문신처럼 새겨진, 의식의 약한 틈을 뚫고 끝없이 반복해서 빠져나오는 외상(trauma)은 결코 지워버릴 수 없는 법이다. 혹은 <해적, 디스코왕 되다>에서처럼 의도적으로 공식적 역사나 대중적 기억에 대한 거리두기의 전략이 취해지기도 하지만, 이건 자신도 모르게 그 시기를 지나쳐오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가 스스로의 당혹스러움- 그 시기를 지나쳐온 이라면 응당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되는 죄의식, 부채감, 상실의 감정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데서 오는 당혹감. 혹은 아무런 외상도 없다는 데서 생기는 허구적인 외상- 을 감추기 위해 휘감은 가장(假裝)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우리에게 각인된 외상의 기원이 무엇인가를 물어보기 위해 과거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영화가 외상에 역사성을 부여하려 하면 할수록 그건 점점 더 기이한 방향으로 치닫게 된다. 이때 우리는 사실은 존재하지도 않는 기원을 어떻게든 만들어내야 하고 일부러라도 스스로에게 상처를 내야 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이상하지 않은가? 이른바 ‘노스탤지어 영화’들이 흔히들 생각하듯 탈역사적, 반역사적, 혹은 무역사적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어떤 영화들보다도 더더욱 외상을 내세우고 그 기원에 집착함으로써 지나치게 역사적이고자 하기 때문에 한계를 지니게 된다는 점이 말이다. 여기서 ‘노스탤지어 영화’들은 <살인의 추억>이나 <실미도> 같은 ‘역사실화극’들과도 만난다. ‘추억으로서의 영화’는 아직껏 없었던 대신 추억과는 다른 과거의 범주들을 어떻게든 추억으로 위장해 보여주려는 영화들만이 존재한다. 참으로 이상한 플래시백이다. ▶ 남성 노스탤지어 영화의 불안과 강박 [1] ▶ 남성 노스탤지어 영화의 불안과 강박 [2] - 이동진 ▶ 남성 노스탤지어 영화의 불안과 강박 [3] - 정한석 ▶ 남성 노스탤지어 영화의 불안과 강박 [4] - 심영섭 ▶ 남성 노스탤지어 영화의 불안과 강박 [5] - 유운성

[파리] <아르테>, 영화지원 정책 본격화

“유럽인들을 위해 문화적, 세계적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기획, 제작, 방영할 것”을 슬로건으로 삼고 있는 프랑스-독일 중심의 유럽 합작 텔레비전 채널인 <아르테>(Arte)는 1991년 창사 이후 10여년 동안 유럽의 가장 영향력 있는 문화예술 채널로서 기능해오면서 동시에 영화분야(제작 및 배급)에도 관심을 보여왔다. 2003년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아르테>는 연간 총매출액의 약 5% 이상을 영화에 투자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는 프랑스의 다른 텔레비전 채널들의 투자비율(약 3.2 %)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수치다. 제롬 클레망 <아르테> 회장은 2004년 2월3일 공식발표를 통해 향후 <아르테>의 영화지원 정책을 표명했다. <아르테>는 앞으로 연간 20여편의 비상업적 독립 장편영화에 대한 지속적인 제작 지원과 함께 창작 다큐멘터리에 대한 지원을 약속했다. 이러한 정책을 기반으로 <아르테>는 2004년에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연작영화, 샹탈 애커만의 <내일 우리는 이사간다> 등을 공동 제작했으며, 현재 베누아 자코, 왕가위, 로베르 게디기안, 라스 폰 트리에, 올리비에 아사야스 등의 영화들이 <아르테>의 지원에 힘입어 제작 중에 있다. 정보와 지식의 전달을 주요 목적으로 하는 방송 다큐와는 달리, 창작 다큐멘터리는 사물과 현상에 대한 작가 고유의 관점과 관객과의 문제의식의 공유라는 특성을 지닌다. 2003년 니콜라 필리베르의 다큐멘터리 <마지막 수업>(사진)의 세계적 성공에 고무된 <아르테>는 앞으로 1년에 3편의 창작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계획이다. 지난해 칸영화제에 초청되고 2004년 2월 상영관 개봉 뒤 관객의 호응을 얻고 있는 캄보디아 출신 시네아스트 리티 판의 는 <아르테>가 공동 제작한 창작 다큐멘터리이다.

영화사 신문 제32호 (1975∼1976년)

존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의 유작이 된 <살로, 소돔의 120일>. 파졸리니는 이 영화 촬영을 끝내고 3주 뒤 , 그의 영화배경으로 여러 차례 등장했던 오스티아 해변에서 처참한 시신으로 발견했다. 파졸리니, 의문의 죽음 시체에 난 상처 단독범행 의구심 파시스트 테러 가능성 등 '배후설 제기 누가 파졸리니를 죽였는가? 이탈리아 경찰이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의 살해를 17살 소년 피노 펠로시의 단독 범행으로 잠정 결론지었음에도 불구하고 파졸리니의 죽음을 둘러싼 의구심은 점점 커져만 가고있다. 펠로시의 단독 범행으로 보기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펠로시의 뒤에 ‘누군가’ 있다는, 이른바 배후설이 제기되고 있다. 파졸리니는 1976년 11월2일, 로마 근교의 오스티아 해안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의 시신은 형체를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 만큼 처참하게 훼손되어 있었으며 가슴에는 자동차 바퀴가 지나간 흔적이 있었다. 이에 경찰은 파졸리니가 심하게 얻어맞은 뒤 자동차로 가슴을 치인 것으로 추정했다. 사건 직후 살인 용의자로 검거된 피노 펠로시는 “파졸리니가 죽을 때까지 때렸다”라고 시인했지만 “차로 친 기억은 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펠로시는 파졸리니의 <살로, 소돔의 120일>(Sal o le 120 Grinate di Sodoma)에 출연하기도 했던 소년으로 동성애자인 파졸리니는 사건 당일 밤 오스티아 해안 근처의 빈민가에서 그를 ‘픽업’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경찰은 이번 사건을 ‘성범죄’로 단순 결론지었다. 하지만 곧 의문들이 제기됐다. <에우로페로>는 “펠로시 혼자가 아니다. 범인은 두명의 폭주족이며, 마약세계의 깡패들이 개입되어 있다”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심지어 <코리에레>는 파졸리니의 죽음을 “충동적인 자살”이라고 추측했다. 이같은 의문들이 제기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17살 소년이 혼자만의 힘으로 성인 남성을 때려죽였다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가족들은 정황상 누군가 파졸리니를 붙잡고 여러 명이 함께 두들겨패지 않고는 그렇게 심한 상처를 입힐 수 없다고 주장했다. 파졸리니에게 ‘적’이 많았다는 점도 이러한 배후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좌파였던 파졸리니는 소설과 시, 영화를 통해 이탈리아 정부와 지배계급을 정면으로 비판해왔다. 죽기 일주일 전에도 그는 “모든 지배계급을 재판에 회부해야 한다”라는 ‘급진적인’ 글을 발표했다. 이같은 행보가 여당인 기독교민주당과 급부상 중인 네오파시스트 집단의 심기를 건드렸음은 불을 보듯 뻔하다. 1971년 군부와 네오파시스트 집단이 쿠데타를 기도한 뒤 지금까지 이탈리아 정국은 혼란 상태이며, 그 와중에서 극우파의 테러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결국 이러한 정치 상황이 파졸리니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이번 배후설의 핵심이다. 하지만 펠로시의 배후에 대한 수사는 아직 이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영화, 이렇게만 파시오 마케팅의 승리로 기록된 <죠스>의 흥행 신기록 27살의 애송이 감독이 만든 영화 한편의 대성공으로 할리우드는 지금, ‘마케팅’에 미쳐 있다. 이 영화가 흥행 신기록을 거둠에 따라 때로는 영화를 만드는 것보다 파는 것이 더 중요할 수도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제작자 리처드 D. 자눅이 이 영화 한편으로 그의 아버지이자 전설적인 제작자인 대릴 자눅이 평생 번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벌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죠스>가 바로 그 영화다. 유니버설은 <죠스>를 개봉하면서 대대적인 마케팅 전략을 펼쳤다. <죠스> 제작비 1200만달러의 1/5 수준인 250만달러를 마케팅 비용으로 쏟아부었으며, 그 대부분을 개봉 1주일 전에 몰아서 썼다. 우선 개봉 전 관객에게 <죠스>를 인식시키기 위해 다방면으로 홍보전을 펼쳤다. 무려 70만달러를 들여 텔레비전 프라임 타임대에 광고를 내보내는가 하면, 스탭들이 개봉 8개월 전부터 토크 쇼에 출연해 <죠스> 홍보에 열올렸으며, 죠스가 입을 쩍 벌리고 있는 간명하고도 강렬한 포스터로 거리를 도배하고 존 윌리엄스가 만든 주제음악을 라디오로 내보냈다. 사전에 판권 계약을 한 원작소설은 개봉에 맞추어 출판되었다. 또한 유니버설은 <죠스>를 ‘와이드릴리즈’했다. 지금껏 와이드릴리즈는 별볼일 없는 영화를 개봉하면서 나쁜 입소문이나 리뷰가 나돌기 전에 제작비를 회수하기 위해 취하던 전략이었다. 하지만 유니버설은 와이드릴리즈가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법이 될 거라고 확신하고는 1975년 6월20일 북미 전역, 464개의 개봉관에 <죠스>를 풀었다. 관련 상품들도 흥행에 바람몰이 노릇을 했다. 곧 사운드트랙, 티셔츠, 플라스틱 컵, 비치 타월, 상어 복장, 포스터 등 갖가지 상품들이 영화와 함께 끼워팔기(tie-ins) 품목에 올랐다. 이같은 홍보전에 힘입어 <죠스>는 2500만명의 관객을 불러모으며 모두 1억2950만달러를 벌어들였다. 아듀, 버너드 허먼 영화음악가 버너드 허먼이 1976년 12월25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64살. 13살에 작곡상을 수상하고 20살에 자신의 오케스트라를 설립했던 허만은 30년대 오슨 웰스의 라디오 프로그램을 위해 곡을 썼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허만은 웰스의 데뷔작 <시민 케인>의 음악을 맡으면서 영화에 발을 들여놓았으며, 이후 <싸이코> <현기증> <새> 등 히치콕 영화 9편에 음악을 작곡했다. 그의 유작은 마틴 스코시즈의 <택시 드라이버>. 그는 이 영화의 녹음을 끝낸 지 몇 시간 뒤에 세상을 떴다. 한편, 마틴 스코시즈는 <택시 드라이버>를 허만에게 바치겠다고 밝혔다. 그리말디, <1900년> 후폭풍 불까 '노심초사' 흥행 참패로 신작일정 줄줄이 삐걱… 유럽예술영화계까지 할리우드 투자 위축될까 걱정 이탈리아의 명제작자 알베르토 그리말디가 요즘 고민에 빠졌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신작 <1900년>이 흥행에 참패하면서 그의 이후 일정이 차질을 빚게 된 탓이다. 당장 대시엘 해밋의 <피의 수확>을 영화화하기로 한 베르톨루치의 차기작 프로젝트가 엎어졌다. 그리말디가 제작하고 세르지오 레오네가 연출하기로 한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는 제작이 연기되었다. 하지만 더욱 큰 걱정은 <1900년>의 실패로 유럽예술영화에 대한 할리우드의 투자가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과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사들간에는 광범위한 합작이 시도돼왔다. 프랑스 누벨바그 감독들,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감독들 등 수많은 유럽 감독들이 미국의 자본으로 영화를 만들어왔다. 할리우드의 투자가 가장 활성화된 곳은 이탈리아였다. 예컨대 1968년 이탈리아영화에 투자된 900억리라 가운데 이탈리아 자본은 220억리라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미국의 자본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분위기에서 알베르토 그리말디는 1967년 미국 유나이티드 아티스츠사와 계약을 맺고 미국-유럽 합작영화들을 만들어왔다. 파졸리니의 <켄터베리 이야기> <데카메론> <아라비안 나이트> 등이 그가 제작한 영화들이다. 그리말디의 목표는 위대한 예술영화 감독들을 상업영화의 세계로 끌어들이고 그럼으로써 “영상예술과 스펙터클을 결합하는 것”이었다. 1972년 그리말디는 베르톨루치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를 제작한다. 이 영화는 X등급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만 4천만달러의 수익을 거두어들였다. <파리…>의 성공으로 자신감을 갖게 된 그리말디와 베르톨루치는 대작인 <1900년>의 제작에 돌입했다. 그리말디는 제작비를 높이기 위해 파라마운트, 폭스, 유나이티드 아티스츠 등 세 회사에 영화를 팔았다. 하지만 완성된 영화를 본 스튜디오 관계자들은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상영시간이 무려 6시간15분이었던 것이다. 계약 당시 할리우드 영화사들은 이 영화의 상영시간이 3시간20분을 넘어선 안 된다고 못 박았던 터였다. <1900년>의 편집을 둘러싼 논란은 끝내 법정 공방으로까지 비화됐다. 그리고 메이저 영화사들은 상영시간을 4시간8분으로 축소한 버전을 극장가에 풀었다. 하지만 <1900년>은 비평에서도, 흥행에서도 죽을 쑤고 말았다. 그러자 영화사들은 그에 대한 ‘응보’로 그리말디의 신작에 대한 투자를 철회했다. 영화계 '우먼파워' 물결 메자로스 <어돕션>으로 베를린 그랑프리 <인디아송> 등 페미니즘영화 잇따라 발표 여성의 눈으로 세계를 보라! 최근 들어 여성감독들의 스크린 진출이 괄목상대하고 있는 가운데, 베를린영화제에서 여성감독이 영예의 그랑프리를 차지했다. 헝가리 여성감독 마르타 메자로스의 <어돕션>이 1975년 7월8일 폐막한 베를린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했다. 베를린영화제에서 여성감독이 그랑프리를 차지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마르타 메자로스의 <어돕션>은 유부남 애인의 아이를 갖고 싶어하는 43살의 독신여성 케이트와 그녀의 삶에 갑자기 뛰어들어온 보호소 소녀들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여성의 일상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흑백영화다. 메자로스는 남편인 미클로시 얀초, 이스트만 자보와 함께 헝가리를 대표하는 영화감독으로 평가받고 있다. <어돕션>의 그랑프리 수상은 여성영화의 현주소를 가늠하게 하는 시금석의 의미를 갖는다. 60년대 중반 다큐멘터리를 중심으로 시작된 여성영화는 질과 양에서 급성장하고 있다. 1975년 한해만 살펴보아도 모더니즘영화의 사건으로 평가받는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인디아송>, 샹탈 애커만의 <잔느 딜망>, 마가레타 폰 그레타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영예> 등이 발표되어 페미니즘 비평가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또한 이론진영에서는 로라 멀비가 ‘시각적 쾌락과 내러티브’라는 논쟁적인 글을 발표했다. 베리만, 무니치에 안착하다 스웨덴의 대표 감독, 조국을 등지고 독일에 정착하게 된 사연 <마술 피리>. 잉마르 베리만이 스웨덴에서 마지막으로 만든 영화다. 스웨덴을 대표하는 감독 잉마르 베리만이 마침내 독일 무니치에 정착했다. 스웨덴을 등진 뒤 여러 곳을 떠돌던 베리만은 “스톡홀롬의 분위기가 물씬 나는” 무니치를 제2의 고향으로 택했다. 베리만이 스웨덴을 떠나게 된 건 느닷없이 벌어진 세금포탈 사건 때문이었다. 외국에 유령 회사를 차려 세금을 포탈했다는 게 그에게 덧씌워진 혐의였다. 1976년 1월30일, 베리만이 4월 프리미어를 앞두고 <죽음의 춤>을 연습하고 있던 극장에 경찰이 들이닥친다. ‘용의자’인 베리만이 도주할 것을 우려해 극장 입구를 봉쇄한 경찰은 세금포탈 혐의로 베리만을 연행해갔다. 사단은 이렇다. 베리만은 1967년 스웨덴 은행의 허가 아래 스위스에 ‘페르소나 리미티드’라는 재단법인을 설립한다. 페데리코 펠리니와 함께 신작 <러브 듀엣>을 찍기 위해서였지만 이 프로젝트는 무산됐다. 이어 추진하던 영화마저 무산되자 그는 법인을 해산했다. 하지만 스웨덴 국세청은 “페르소나 리미티드가 한 일이 없으므로 세금포탈을 위해 설립한 유령 회사로 볼 수밖에 없다”고 단정지었다. 그리고는 쉽게 연락이 닿지 않는 베리만을 붙잡기 위해 극장을 급습했던 것이다. 베리만은 <죽음의 춤> 연습에 몰두하느라 외부와 거의 연락을 끊고 지냈다. 이날 베리만은 경찰에 끌려가 3시간 동안 조사를 받은 뒤 집으로 돌려보내졌다. 이때 그를 따라온 경찰은 그의 아파트를 뒤져 개인문서와 여권 등을 압수해갔다. 하지만 경찰은 그에게서 특별한 혐의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 일은 베리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그날 이후 누군가에게 쫓기는 망상에 시달리던 그는 정신병원에 입원해 2달간 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퇴원 뒤 3월22일치 <엑스프레센>에 실린 서한을 통해 스웨덴을 떠날 계획임을 밝혔다. 이 서한에서 그는 “창작을 할 수 없으면 존재할 수도 없는데, 이 나라에서는 더이상 창작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라고 밝혔다. 정부에 대한 강한 불신도 숨기지 않았다. 스웨덴을 떠난 베리만은 파리로 갔고, 파리를 거쳐 다시 로스앤젤레스로 갔다. 할리우드의 스튜디오를 둘러본 그는, 하지만 미국에서는 영화를 만들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 다시 유럽으로 돌아와 여러 나라의 수도를 떠돌다 무니치를 망명지로 선택했다. 호금전의 <협녀>, 칸에서 기술 인정 호금전의 <협녀>가 1975년 칸영화제에서 기술대상을 수상했다. 1966년 <대취협>으로 데뷔한 이래 무술영화 장르를 크게 혁신해온 호금전 감독이 대만으로 이주, 무술영화를 위한 스튜디오를 설립해 만든 <협녀>는 제작에 3년이 걸린 대작. 홍콩에서는 이미 1971년에 개봉됐다. 소련 자본 ‘구로사와’표 영화, 미국서 수상 구로사와 아키라가 소련 자본으로 만든 영화로 미국 아카데미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 <도데스카덴>의 실패 이후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던 구로사와는 소련의 모스필름에서 제작한 <데루스 우잘라>로 1976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다. <데루스 우잘라>는 이미 1975년 모스크바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편집인 이유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