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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어느 ‘노빠’의 열광

사실 나는 ‘노빠’다. 노무현 빠돌이? 설마. 말 많은 오빠는 딱 질색이다. 나는 노회찬 빠돌이다. 요즘 텔레비전 토론회에서 바짝 뜬 민주노동당 총선 선거대책본부장 노회찬 오빠 말이다. 이럴 수가. 유구한 내 빠돌이 인생에서 머리 빠진 오빠는 처음이다. 심지어 말도 많다. 그런데 입놀림 하나하나에 뻑간다. 용필 오빠 빠돌이를 하던 소녀 시절에도, 젝스키스 못잡아먹어 안달이던 HOT 빠순이 시절에도 오빠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이렇게 자지러진 적은 없었다. 심지어 눈물까지 찔끔거리기는 궁상도 떤다. 고백하건대 텔레비전 토론회 보는 사람들을 경멸해왔다. 절대 그런 지루한 인간들하고는 연애 안 할 거다, 다짐할 필요조차 없었다. 당연히 안 할 거니까. <한밤의 TV연예> 할 시간에 을 보다니. 말이 되는가. 그랬던 내가, 토요일 저녁 채널을 돌리다 오빠에게 필이 꽂혀버렸다. 그 운명의 순간은 이랬다. 4월3일 KBS <생방송 심야토론>에 나온 한나라당 의원이 정동영 의장의 노인 비하 발언을 물고늘어지면서 노인복지를 거론하자, 노회찬 오빠 왈.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야기시킨 탄핵으로 우리 국민 평균 수명이 단축됐어요. 그거 어떻게 책임질 겁니까? 지금 노인문제를 토론할 때가 아니라 말이에요”. 아∼싸, 촌철살인! 방청객 일동, 박장대소. 이어 국회 출석률이 무척 낮았던 자민련 의원에게는 “4년 동안 학교도 안 가고 안 보이시더만, 이제와 가지고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꾸짖는다. 앗, 능숙한 애드리브! 이번엔 웃기다 울린다. 노 대통령과 4당 대표가 룸살롱에서 800만원어치 술 먹은 것을 지적하며 “며칠 전에 월 70만원 생계비를 받는 소녀가장이 자살을 했어요. 2시간 동안 800만원 먹었으면요, 그건 1년치 생계비예요. 이런 핏발 선 투표용지가 지금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침내 감동의 물결에 마침표를 찍는 마지막 정리 발언. “유권자 여러분 행복해지기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노회찬 오빠의 데뷔는 화려했다. 3월 초 오빠가 토론회에 나오자 포털 사이트에 ‘노회찬 어록’이 뜨고, 언론에 노회찬 신드롬이 몰아쳤다. 날렵한 빠돌이들은 ‘노회찬 국회보내기 운동본부’ 카페를 만들었다. 요즘 우리 노빠들은 오빠의 스케줄을 챙기고, 오빠의 동영상을 뿌리느라 여념이 없다. 알고 보니 오빠의 명성은 오래전부터 ‘언더그라운드’에서 자자했단다. 오빠는 30년 동안 거리의 정치연설로, 강당의 토론회로 단련된 ‘준비된’ 만담꾼이다. 하루이틀에 급조된 스타가 아니란 말이다. 단지 밀어주는 당이 없어서 텔레비전에 못 나왔을 뿐. 그동안 오빠에게도 ‘안 좋은 추억’은 참 많다. 많은 언더그라운드 ‘동지’들이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금배지를 좇아 떠났다. 대부분은 ‘DJ 기획’을 거쳐서 ‘원조 노빠 기획’으로 옮겨갔다. 어떤 오빠들은 ‘딴나라 엔터테인먼트’로 막가기도 했다. 모든 빠순이의 목표가 연말 시상식에서 오빠의 품에 트로피를 안기는 것이듯, 우리 노빠의 목표도 오직 오빠의 가슴에 금배지를 달아주는 일이다. 하지만 쉽지만은 않다. 우리 오빠가 10대 가수, 아니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10번 안에 들기는 했는데, 그 순번이 너무 늦다. 무려 8번. 오빠가 금배지를 달려면 민주노동당에 13% 이상의 지지율이 필요하다. 여차하면, 재주는 우리 오빠가 넘고, 국회의원은 다른 오빠가 하게 생겼다. 이건 에이스 빼고, 대표팀을 월드컵에 내보내는 꼴이다. 노회찬은 진보정당의 홍명보이고, 안정환이다. 오빠는 “행복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고 했다. 나는 “속 터지는 것을 두려워하자”고 호소한다. 앞으로 ‘테레비’에서 오빠를 자주 못 보면 속 터질 것 같다. 오빠가 금배지를 단다면? 꺄∼악! 추신. MBC 개표방송에 대한 안 좋은 추억이 있어요. 92년 총선이었죠. 전 밤새 개표방송을 봤어요. 물론 내가 응원하는 당은 추풍낙엽이었죠. 그런데 새벽 2∼3시쯤 갑자기 강원도 춘천에 오렌지색이 칠해진 거예요. 전 너무나 놀랐죠. 제가 응원하는 민중당 색깔이었거든요.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였어요. 잠시 뒤 정정 방송이 나오고, 전 눈물을 흘렸죠. 텔레비전을 보고, “너 지금 나 놀리냐?”라며 화를 냈지만 소용 없었죠. 그로부터 8년 뒤. 역시 새벽 2∼3시쯤이었어요. MBC 아나운서가 울산 북구의 민주노동당 후보와 당선 인터뷰를 하고 있는 거예요. 눈물이 나오려고 했죠. 그러나 역시나, 였어요. 잠시 뒤 당선자가 바뀌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죠. 그 소식을 들은 나는 “이건 나를 두번 죽이는 일”이라고 울부짖었지만, 텔레비전은 대답이 없었죠. 설마 저를 세번 죽이지는 않겠죠? ㅋㅋㅋ 신윤동욱/ <한겨레> 기자 syuk@hani.co.kr

무삭제의 즐거움, 킬 빌 Vol.1

<킬 빌 Vol.1> Kill Bill Vol.1 2003년 감독 쿠엔틴 타란티노 상영시간 111분 화면포맷 2.35:1 아나모픽 음성포맷 DTS & DD 5.1 영어 자막 한글, 영어 출시사 미라맥스, 스팩트럼 타란티노가 자신의 두터운 영화 수첩을 뒤적여 작성한 리스트를 토대로 만든 프라이빗 액션 컴필레이션인 <킬 빌>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할 만큼 많은 평론과 정보들이 나왔으므로, 여기에서는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DVD쪽에 초점을 맞춰 분석해보았다. 영화와 별도로 신청되었던 DVD에 대한 심의가 다행히도 무삭제로 통과된 덕분에 극장에서 심의로 인해 삭제되었던 12초 분량은 모두 복원되었다. 하지만 판본 자체는 청엽정 결투장면의 일부가 흑백으로 처리된 미국·아시아 버전이며, 유일하게 올 컬러인 일본판 버전은 아쉽게도 수록되지 않았다. DVD는 미라맥스 본사에서 보내준 HD 마스터를 토대로 제작된 탓에 HD적인 특성이 두드러지는 화질을 보여준다. 아나모픽 2.35:1 영상은 원색의 콘트라스트와 색 농도가 매우 높고, 채도와 순도도 도드라지는 청명하면서도 선연한 색감을 보여준다. HD보다 영상 입자가 현저하게 적은 DVD 포맷의 한계 때문에 선명도는 평균적인 수준에 머물렀지만, 투명도와 질감 표현력은 HD에 육박할 정도이고, 시각적인 해상도도 무척 높게 느껴진다. 필름의 입자감이 균일하게 두드러지는 점은 오히려 작품의 분위기에 매우 잘 부합된다. 극장에서의 필름이 의외로 지저분했기 때문에 DVD 영상의 만족도가 상대적으로 더 높다. 영상에 어울리게 박력있게 믹싱된 DTS 5.1 채널 사운드는 일본도의 청명하면서도 밀도 높은 금속성 파열음과 총소리의 강력한 임팩트감, 격투신의 묵직한 타격음 등의 효과음들을 날카롭고 위압적으로 들려준다. 저음도 묵직하고 강력하다. 볼륨이 높은 배경음악도 넓고 두텁게 펼쳐진다. 서플먼트는 제작 다큐멘터리와 촬영 광경, 인터뷰 모음, 하이라이트 장면들, 뮤직비디오, 예고편, 포토갤러리로 미국판보다는 좀더 많지만, 기대했던 것보다는 훨씬 단출한 편이다.김태진 그동안 HD로 텔레시네한 몇몇 DVD들의 감수를 맡았던 경험에 의하면 국내 DVD 제작사들의 HD 오소링 기술은 아직 불안한 점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미라맥스 본사에서 <킬 빌>의 마스터를 HD로 보내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심 우려도 했었지만, 완성된 QC는 다행히도 HD의 장점이 잘 살아난 빼어난 색감을 보여주어 무척 만족스러우며, 벌써부터 HD 방영이 기다려질 정도이다. 혹독한 육체적 괴로움을 강인한 의지와 예술적 열정으로 극복해나간 프리다 칼로의 삶을 완성도 높은 영상으로 그려낸 <프리다>는 짙은 유화 같은 톤과 필름라이크한 질감이 매력적이고, <사마리아>도 기대 이상으로 준수한 화질을 보여주었다. 앨런 파큘라의 <암살자들>을 이번주에 다루지 못한 점이 아쉽다. 선택은 <킬 빌 vol.1>이다. 새로 출시되는 DVD보다 할인 판매되는 DVD가 더 설치는 판국이 1년을 넘어섰다. 불법 출시되는 DVD에 대해선 매번 말하기가 괴로울 정도다. 이런 와중에 신작 DVD를 선택하고 리뷰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 다시 한번 마음을 다져본다. 이번주에 주목할 만한 DVD는 단연 <킬 빌 Vol.1>이다. 국내 상영시 프린트의 상태가 좋지 않았는지, DVD의 화사한 색감에 깜짝 놀랐다. <프리다>는 어쩐 일로 극장에서 뒷부분만 보았으나 인상은 깊었던 작품인데, 전체를 본 뒤 더 큰 매력을 느꼈다. 이번주엔 두 작품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이다. 앨런 파큘라의 <암살단>은 원래 리뷰 대상이었지만 현 시점에서 다루는 게 이상하단 이유로(그러니까 필자의 자체 검열에 의해) 리뷰에서 빠졌음을 밝힌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올해가 결혼 10주년이 되는 해다. 그래서 DVD vs DVD를 적으며 몇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베리만이 관심을 신이 아닌 인간에게 돌린 영화들은 내게 너무 잔인하다. 올리베이라처럼 살고 싶지만 그러나 베리만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는다면 10년 뒤 요한의 처지에 이를지도 모르겠다. 은 홀리 헌터의 연기가 돋보인다. 하지만 북미판과는 달리 국내판은 부록 전무다. 더빙 번역이 부담스럽더라도 부록은 그대로 담겨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프리다>는 좋아하는 퀘이 형제가 제작에 참여하여 더욱 기다렸던 작품이다. 김기덕의 10번째 작품이 DVD로 출시되었다. 각기 다른 출시사를 통하여 그의 작품들이 출시되었지만 그도 이젠 박스세트를 가질 때쯤 되지 않았을까. 이번주 선택은 <킬 빌 vol.1>이다. 사운드도 좋지만 화질이 극장에서보다 뛰어나다.

[비평릴레이] <인 더 컷> -김소영 영화평론가

인 더 컷, 그 제목부터 물어보자. 상처 안에 무엇이 있는 걸까 혹은 무엇이 상처를 만들고 있는 걸까. 수잔나 무어의 동명의 스릴러 소설이 바탕이 되었는데, 소설처럼 영화는 열정적인 관객과 적대적인 그들을 동시에 생성시키는 것 같다. 영화의 제목 <인 더 컷>은 영화 크레디트 타이틀에서 스케이트 날이 잘라낸 빙판 조각을 의미하지만, 좀더 은유적으로는 상처, 혹은 외상 속에 웅크리고 있는 피로 물든 그 무엇이다. 제인 캠피온의 영화는 포스트 911의 뉴욕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미 대량 파괴가 일어난 뉴욕의 디스토피아적 거리는, 여자들을 대상으로 잔혹한 연쇄 토막 살인이 일어나는 스릴러의 배경으로 완벽할 만큼 음산하다. 골목에 쌓인 검은 색 쓰레기 봉투는 갑자기 무엇이 터져 나올 듯 하나하나가 의심스러워 보인다. 촬영 감독 디온 비브의 빛의 강한 대비와 골목들을 강조한 누아르적 화면과 대담한 커팅은 뉴욕이라는 도시를 공포의 민속지로 바꾼다. 불가능한 욕망의 구조속으로 풍덩, 동화 같기도하고 정신분석 같기도 도리스 데이의 ‘케 세라 세라’를 단조로 바꿔 노래하면서 영화는 시작하는데, 그 노래 속에서 소녀는 묻는다. “엄마, 난 자라 무엇이 될까요” 엄마는 답한다. “맘대로 하렴.” 그래서 정말 <인 더 컷>의 두 명의 여자들은 맘대로 한다. 연쇄 살인범인지도 모를 남자와 섹스에 빠지고, 기혼자와 사랑에 빠진다. 물론 여자들이 제 멋대로 살기에 세상은 잔혹하다. 그런 여자들을 살해하고 싶은 충동에 빠진 남자가 있는 것이다. 이제 유년기를 함께 헤쳐 온 두 명의 여자들이 영화 안으로 소개된다. 프래니 (맥 라이언)와 폴린(제니퍼 제이슨 리)은 이복 자매로 서로에게 다정하고 솔직하다. 제니퍼 제이슨 리는 이제 마흔이 넘었지만 여전히 소녀처럼 콧소리를 섞어 말하고, 금방 무너져내릴 듯하지만, 제멋대로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맥 라이언은 예의 애교스런 콧잔등 주름을 버리고, 슬랭(비속어)과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에 탐닉한 영문학을 가르치는 선생님으로 등장한다. 맨해튼을 배경으로 한 텔레비전 드라마 <섹스 앤드 더 시티>의 가벼운 성애 판타지와는 달리, <인 더 컷>은 강성이다. 지하철의 모든 글자들을 다 읽고 다니는 프래니는 슬랭 수집차 바에 들렸다가 한 여자와 팔에 문신을 한 남자가 오럴 섹스에 빠져있는 것을 목격한다. 연쇄 살인 수사를 위해 자신을 찾아온 형사 말로이(마크 러팔로)의 손목에서 그 문신을 발견한 프래니는 자신이 응시한 장면, 그 행위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 때문에 말로이에게 끌린다. 거침없이 남성적 슬랭을 구사할 뿐만 아니라, 원하는 것을 해주겠다는 행위에 대한 약속 때문에 프래니는 말로이라는 위험한 욕망의 대상으로부터 떠나지 못한다. 위태로운 지경에 처해 있기는 제니퍼 제이슨 리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을 낳았던 어머니를 생각해 한번만이라도 결혼하고 싶다고 말하지만 기혼자를 사랑한다. 이렇게 불가능한 욕망의 구조 속으로 빠져드는 두 사람에 대한 배경으로 영화는 동화 같기도 하고 정신분석 같기도 한 장면들을 보여준다. 영화 초반부 프래니의 어머니가 낭만적으로 구애받던 장면이 재생되면서, 아버지의 스케이트 날은 어머니의 다리를 세 동강으로 자른다. 이성애적 사랑의 양날, 낭만과 잔혹, 매혹과 죽음이라는 이중무가 악몽의 동화로 재연되는 것이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프레니 그리고 그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어머니를 둔 폴린의 상처가 이런 이성애의 근본적 외상에 더해지면서 영화는 자기 설명을 마친다. 제인 캠피온은 스릴러 <인 더 컷>을 <클루트>(앨런 파큘라, 1971)의 선상에서, 여성주의적으로 해석하고, 로맨틱 코미디의 여주인공 맥 라이언의 이미지를 전복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영화를 장르 신봉주의자와 반여성주의자로부터 구출한다. 주류 속에서 주류에 대한 치명적 도전이다. 인 더 컷.

도시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무림고수들의 대결, <아라한 장풍대작전>

중국의 3대 기서로 꼽히는 책으로 <봉신연의>란 작품이 있다. 우리에게 강태공으로 알려진 태공망이 무왕을 도와 600년간 존립했던 은나라를 멸하고 주왕조를 구축한 역사적 사실을 도교적 세계관으로 각색한 소설이다. 신선과 요괴와 도사가 대거 등장하는 이 책은 유교적 전통이 뿌리 깊은 국내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수많은 무협소설에 영감을 불어넣었다. 류승완 감독이 얼마나 의식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라한 장풍대작전>의 저변에 깔린 사고는 <봉신연의>와 다르지 않다. 지금, 이곳 서울 도심 한복판에도 신선이 살고 있다. 다만 일반인이 모를 뿐이다. <아라한 장풍대작전>은 그렇게 첫운을 뗀다. 누구나 한번쯤 길에서 “도에 관심 있으십니까?”라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숨가쁜 일상에서 귀담아 듣기 힘든 그 말을 <아라한 장풍대작전>은 액션코미디의 쾌감에 실어나른다. 여주인공 의진(윤소이)이 빌딩숲을 붕 날아오르는 순간 다가오는 짜릿한 흥분이 이 영화의 엉뚱한 상상력에 눈을 돌리게 만드는 것이다. <아라한 장풍대작전>의 이야기는 간단히 말하면 힘없는 말단 경찰 상환(류승범)이 우연히 도의 세계에 입문, 악당을 물리친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단순하지만 그게 사실이다. 수많은 액션영화가 착한 주인공과 악한의 대결을 그린 작품들이다. 이 영화의 매력은 이런 기본구조를 엉뚱한 곳에서 펼친다는 점에 있다. 장풍, 경공술, 점혈, 주화입마, 공중부양 등 무협소설의 용어가 2004년 서울 한복판에서 혈겁을 불러온다. 그러기 위해 류승완 감독은 크게 두 가지 포석을 깔아둔다. 첫째, 칠선의 존재다. 태초에 7명의 도인이 있었고 그중 흑운(정두홍)이 인간계의 분쟁에 뛰어들었다가 다른 도인들에 의해 봉인됐다는 이야기다. 선계의 규율을 어기고 칼을 들었던 흑운은 선계의 최고경지에 이르는 아라한으로 가는 열쇠를 탐냈던 인물로 2004년 부활하여 아직 살아 있는 5명의 도인을 위협한다. 이것이 과거사라면 현재는 상환과 의진의 이야기다. 자운(안성기)의 딸 의진은 아라한으로 가는 열쇠를 이어받을 인물이지만 혼자로는 부족하다. 전설에 따르면 아라한은 마루치와 아라치, 두 남녀의 힘으로 지켜질 것이다. 의진이 아라치라면 상환은 마루치가 돼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정말일까? 비실거리고 허둥대는 상환을 보면 믿기지 않지만 자운은 상환의 몸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발견한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야기라고 느끼는 건 당연하다. 류승완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나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그랬듯 장르영화에 대한 매혹을 숨기지 않는 감독이다. <스파이더 맨> <매트릭스> <저수지의 개들> <터미네이터> 같은 할리우드영화는 물론 성룡이나 서극, 주성치 영화의 흔적을 <아라한 장풍대작전>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감독은 이런 영화를 자기 식으로 버무리면서 코미디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소림축구>의 전략과 유사하다. 쇠락한 소림사 고수들이 축구를 한다는 발상에서 웃음이 잉태되듯 <아라한 장풍대작전>은 현실에서 퇴물로, 낙오자로 인정받는 인물들에게 초능력에 가까운 힘이 있다는 전제로 미소를 머금게 만든다. 고층건물에 매달려 창문을 닦는 미화원, 층층이 밥상을 머리에 이고 가는 아줌마, 짐칸 크기의 수십배되는 물건을 자전거에 싣고 가는 아저씨 등 자기 일에서 어떤 경지에 이른 인물을 모두 도인으로 보는 이 영화의 기본 전제는 훌륭한 유머가 되기 충분한 것이다. 번번이 당하며 사는 어수룩한 주인공이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는 인물로 거듭나는 이야기도 관객의 공감을 얻기 좋은 소재다. <반칙왕>의 송강호와 전혀 다른 이미지지만 류승범은 그런 인물로 잘 어울린다. 전음입밀(일종의 텔레파시)의 수법으로 자운이 상환에게 메시지를 전할 때 상환의 대사 같은 경우는 장내를 폭소로 몰고갈 것이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부분부분 흥미롭다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호기심을 끌 만큼 벌여놓은 이야기는 지나치게 단순해지고 액션의 쾌감도 시간이 지날수록 반감된다. 전작들에서 캐릭터의 매력을 정확히 짚어냈던 류승완의 내공도 이번 영화에서 잘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상환이 대적해야 할 악당으로 흑운을 선택한 것은 패착으로 보인다. 흑운이 누구인가? 인간계의 분란을 해결하기 위해 선계의 규율을 어긴 이단아, 혹은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준 프로메테우스가 아닌가? 당연히 비애를 느껴야 할 이 인물에서 영화는 눈물 한 방울 흘릴 여지를 안 준다. 또한 굳이 애꿎은 흑운을 비난하는 이유도 납득하기 힘들다. 드라마의 병법에 따르면 궁핍한 삶을 묵묵히 버티고 있는 도인들을 괴롭히는 자들을 응징하는 편이 옳다. 덧붙이자면 <아라한 장풍대작전>은 상환이 장풍을 배우러 갔다가 세상을 구하는 영웅이 되는 이야기다. 그런데 마지막 대결까지 상환은 장풍을 쓰지 못한다. 제목에 넣은 장풍이 허풍이었던 걸까? <아라한 장풍대작전>은 그럴듯한 허풍이긴 하지만 끝내 장풍을 날리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한다. :: <아라한 장풍대작전>의 조연배우들 안성기부터 무술감독 정두홍까지 류승완의 영화는 대체로 조연의 비중이 높다. <아라한 장풍대작전>에서 중요한 조연은 칠선의 남은 오인방 자운, 무운, 육봉, 설운, 반야가인이다. 의진의 아버지로 아라한으로 가는 열쇠를 지키는 인물 자운은 안성기가 맡았다. 극중 상환이 장풍 배우는 가격을 묻자 “그게 바람 크기에 따라 달라서”라고 말하는 대목은 안성기의 애드리브로 만든 장면. 상환을 가르치는 도장의 주인 무운으로 나온 인물은 베테랑 연극배우 윤주상. <쉬리>의 첩보국 국장, <유령>의 잠수함 함장으로 낯익다. 예전에 태권도를 배웠다는 윤주상은 <아라한 장풍대작전>에서 젊은 배우들도 힘들어 하는 와이어액션을 선보인다. 육봉과 설운은 <피도 눈물도 없이>에 나왔던 김영인, 백찬기다.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빚독촉을 하러 다니는 나이든 건달로 나왔던 두 사람은 70∼80년대 액션영화에서 직접 스턴트를 하며 연기를 했던 배우들. 김영인은 <시라소니> <김두한> 등의 영화에서 이대근, 김희라 등의 대역 연기를 하기도 했으며 백찬기는 <수사반장>에서 악역을 단골로 맡아 익숙한 얼굴이다. 류승완 감독이 <피도 눈물도 없이>를 연출하며 재발견한 셈이다. 700서비스로 주역풀이를 해주며 돈을 버는 반야가인은 TV드라마로 친숙한 김지영. <행복한 장의사> <파이란> <그녀를 믿지 마세요> 등 영화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다섯명의 착한 도사들과 맞서는 흑운은 무술감독 정두홍이 맡았다. 이번에도 <피도 눈물도 없이>처럼 악역연기를 보여준다. 이 밖에 파출소장으로 임하룡, 순경으로 박윤배 등이 나오며 윤도현, 봉태규, 이춘연, 이외수 등이 카메오로 나온다.

향수를 자극하는 70년대 인기 형사극의 재탕, <스타스키와 허치>

70년대 말 미국에서 방영됐던 <스타스키와 허치>는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모았던 형사물 시리즈다. 두 주인공의 목소리를 더빙했던 배한성, 양지운이라는 성우 스타까지 만들어낸 이 드라마는 통쾌한 액션이나 정교한 줄거리, 사건해결보다는 서로 승강이를 벌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쏟았던 두 사람의 코믹한 모습에 집중했다. 이 시리즈를 리메이크한 영화 <스타스키와 허치>는 시대배경부터 이야기까지 텔레비전 드라마가 방영되던 70년대를 그대로 따라간다. 꼬불꼬불 파마머리와 꼭 끼는 청바지의 스타스키와 넓은 깃 셔츠를 입는 허치의 옷차림이나 사사건건 아웅다웅하는 둘의 모습도 텔레비전에서 보던 그대로다. 7달러가 든 지갑을 훔친 소매치기를 잡기 위해 차 몇대를 거덜내는 ‘오바’형 인간 스타스키(벤 스틸러)와 도시의 안전보다는 개인의 안위를 위해 노력하는 ‘수동’형 인간 허치(오언 윌슨)는 경찰서에서 내놓은 자식이라는 이유로 같은 팀을 이루게 된다. 이들이 파트너를 이룬 첫날 베이시티 해안에서 시체가 한구 떠오르고 살인범을 수사하던 중 두 사람은 대규모 마약거래가 살인의 배후에 있음을 찾아낸다. 액션의 스케일이 크거나 이야기 구조가 복잡한 요즘 액션영화가 3D애니메이션이라면 <스타스키와 허치>는 2D애니메이션 같은 느낌이다. 단순하기 짝이 없는 악당의 행태와 단선적인 이야기 구조, 소박한 액션 등이 요즘 관객에게는 너무 소박하거나 밋밋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치어리더들을 유혹하기 위해 기타를 치며 감미로운 포크송을 부르는 허치나 코카인에 취한 스타스키가 디스코 클럽에서 경연을 벌이는 어처구니없는 춤시합도 웃기기는 하지만 요즘 감각으로는 썰렁하게 느껴질 법하다. 반대로 요즘 영화의 과장된 코미디에 싫증난 관객이라면 한 박자 어긋나는 이들의 코믹 앙상블이 도리어 신선하게 느낄 수도 있다. 이미 여러 편에서 호흡을 맞췄던 벤 스틸러와 오언 윌슨 커플은 10여년을 함께 산 부부처럼 느긋하게 보이는 조화를 이룬다. 그동안 영화에서는 별 재미를 못 봤던 스눕 독이 연기한 허기 베어는 영화 내용에서 사실상의 문제 해결사였듯 납작하게 느껴지는 드라마에서 그나마 요즘 감각의 입체감을 부여하는 인물이다.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제3의 주인공이었던 빨간 자동차 토리노의 여전한 기세와 ‘진짜’ 스타스키와 허치, 폴 마이클 글레이저와 데이비드 솔의 깜짝 등장이 그 옛날 텔레비전 팬들의 향수를 자극한다.

[주말극장가] ‘장르의 성찬’ 즐거운 고민

이번주 주말 극장가 상차림은 일단 많은 반찬 가짓수가 눈을 즐겁게 하는 푸짐한 한정식같다. 한국, 할리우드, 일본, 유럽 등 산지도 각각이고 액션, 애니메이션, 로맨틱 코미디, 심오한 작가주의까지 맛도 다른 작품들이 칠첩반상으로 놓여 어디로 먼저 젓가락질을 해야 할지 고민에 빠지게 한다. 먼저 눈에 띄는 건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피도 눈물도 없이>의 류승완 감독의 신작 <아라한 장풍대작전>이다. 현대의 도시에 사는 도인들의 이야기라는 황당한 발상에서 출발한 이 영화는 대도시의 고층빌딩에서 몸을 가볍게 날리는 경공과 장풍이 등장하는 새로운 형식의 무협물이다. 도시와 도인의 대비, 순진하고 어눌한 액션영웅이라는 부조화가 영화의 전반을 이끌어가며 톡톡 튀는 대사의 발랄함이 영화 이곳저곳에 웃음의 지뢰를 묻어놓고 있는 발랄한 액션물이다. 제6회 서울여성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이미 여성관객들에게 살짝 선보인 제인 캠피언 감독의 <인 더 컷>은 여성의 욕망을 대도시 뒷골목에서 일어나는 살인사건과 연결시켜 기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한없이 건조해보이는 일상을 사는 여교수가 낯선 남자로 인해 숨었던 관능의 욕망을 발견하면서 잔인한 살인사건에 휘말린다는 이야기로, 로맨틱 코미디에서 깜찍공주로만 등장했던 멕 라이언의 180도 연기변신이 인상적인 영화다. 작가주의 영화팬이라면 무엇보다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두번이나 받은 일본의 거장 이마무라 쇼헤이의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의 개봉이 반가울 듯. 성과 생에 대한 노감독의 흥겹고 여유만만한 찬가가 유머러스하게 펼쳐진다. 어린이날을 앞두고 가족 관객을 겨냥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천공의 성 라퓨타>, 괴물잡는 강아지 스쿠비 일행의 소동을 그린 <스쿠비-두 2: 몬스터 대소동>도 밥상에 올라있다. 개봉 신작 리뷰 <스타스키와 허치> 70년대 투갑스 ‘얼렁’개그 ‘뚱땅’ 액션 70년대말 인기 텔레비전 시리즈였던 <스타스키와 허치>의 극장판 리메이크로 벤 스틸러, 오언 윌슨이라는 스타 배우 두명이 출연한다. 그렇다면 화려한 액션, 속도 빠른 개그, 정치한 플롯을 갖출 법한데 이 영화는 이 중 하나도 갖고 있지 않다. 시대 배경을 원전과 똑 같이 70년대로 하고, 통 넓은 판타롱 바지, 빨간 토리노 자동차, 디스코춤을 그대로 재현하는 건 이해가 간다. 향수를 자극함과 아울러, 70년대의 풍광을 그대로 옮겨왔을 때 일어나는 시대착오적인 불균형의 맛이 이 영화와 어울린다.(아무리 70년대식으로 입어도 벤 스틸러와 오언 윌슨은 요즘 사람 같다.) 그런데 이야기나 개그, 액션이 설렁설렁 흘러간다. 스타스키(벤 스틸러)와 허치(오언 윌슨), 두 형사가 파트너가 된 날 베이시티 해안에 시체가 떠오르고 그걸 수사하다가 악질 마약상과 대면하게 되는 줄거리는 평이함 그 자체다. 두 형사의 캐릭터 대비나 둘 간의 갈등과 화해라는 버디 영화의 장치들을 집어 넣었지만 이걸 요즘 감각으로 가다듬는 일 따위를 하지 않는다. 어쩌면 배짱이 있는 영화다. 원전이 버디무비의 고전인데, 가공할 게 뭐 있냐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같다. 그게 밉지 않은 탓에, 심심하고 약간은 썰렁한데도 나름의 유머와 리듬감이 전해진다. 벤 스틸러와 오언 윌슨의 궁합이 잘 맞아서 텔레비전물처럼 둘의 얼굴을 나란히 잡는 화면들을 넉근히 버텨낸다. 오리지널 스타스키와 허치인 폴 마이클 글레이저와 데이비드 솔이 깜짝 출연한다. 지난해 나온 주책맞고 기이한 코미디 <올드 스쿨>의 토드 필립스가 감독했다. 30일 개봉. <엄마는 여자를 좋아해> 엄마의 애인이 젊은 여자‥혹시 나도? 일이면 일, 연애면 연애, 무엇 하나 제대로 풀리는 것 없는 젊은 여성 엘비라(레오노르 와틀링). 아빠와 이혼하고 오랜 세월 독신으로 살아온 엄마의 생일 파티에서 엘비라 세 자매는 엄마에게 애인이 생겼다는 말을 듣는다. 박수를 치며 축하하는 사이 짜잔! 하며 들어온 엄마의 애인. 겨우 자기 또래에다 심지어 여자다. 눈을 의심한 세 자매는 엄마의 진심까지 의심하며 두 사람 갈라놓기 작전에 들어간다.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사지 멀쩡하고 얼굴도 남에게 밀리지 않는 내가 연애를 하지 못하는 건. 엘비라의 이런 고민 위에, 엄마로 인해 자신의 성적 취향에 대한 의심까지 겹친다. 감수성 예민하고 나름대로 진지하게 인생을 고민하는 젊은 여성들에게는 연애도 쉽지 않은 과제다. 그러다 결국 내리는 결론. “내 복에, 얼어죽을 무슨 연애.” 그러나 엘비라가 몰랐던 게 있다. 스스로 많은 걸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 생각으로 만사를 미리 재단해왔던 게 자신을 연애 뿐 아니라 삶 자체로부터 소외시키고 주변부로 밀어내 왔다는 걸. <엄마는 여자를 좋아해>는 동성애, 결혼, 가족제도 등 쉽지 않은 소재들을 끌어오면서도 물 흐르듯 경쾌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네가 아는 게 세상의 전부는 아니야”라고 말하면서. 그러는 사이에 엘비라는 자신이 쌓았던 견고한 성의 문을 하나씩 열고 삶을, 사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행복은 그와 함께 따라온다. 어려운 전제들이 너무 술술 풀려가는 이야기가 판타지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 느낌이 거북하진 않다. 고민의 짐에 눌려 허리가 휘는 젊은 여성이라면 영화가 다정한 격려의 손길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30일 개봉.

존경심에 대하여

최근 한 국제기구의 조사에 따르면 청소년의 어른에 대한 존경심이 가장 낮은 나라가 한국이란다. 아직도 버스에서 자리를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한살이라도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선배대접을 하고, 피 한 방울 안 섞여도 형, 언니, 누나, 아저씨, 아주머니, 할머니, 할아버지라고 제 가족과 다름없이 부르는 이 동방예의지국의 젊은이들이 더이상 어른을 존경하지 않는다. 어른이란 ‘단지 나이가 많은 사람’이며 나이가 많다는 것은 ‘늙었다. 한물갔다. 구식이다. 고리타분하다’ 정도로 생각한다. 어른을 우습게 아는 것은 옛날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옛날에 대해서 우리의 의식은 ‘못산다. 원시적이다. 촌스럽다. 낙후됐다. 더럽다. 싸구려. 무식하다’는 것이 보편 정서가 돼버렸다. 그런 까닭에 옛것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아주 무례하다. 텔레비전에서 10년 전, 20년 전 생활상을 보여주면 폭소를 터트리며 헤어 스타일을 비웃고, 패션을 비웃고, 말투를 비웃는다. 그리고 간혹 옛것이지만 훌륭한 것을 발견할 때는 “그 당시에 어떻게 이런 걸 만들었는지 대단하다”라고 경솔하게 말하곤 한다. ‘그 당시’가 어땠는지 살아본 적도 없는 풋내기들이 함부로 지껄인다.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은 기계들의 속도와 몇 가지 커뮤니케이션 장치들과 화폐가치, 그리고 나빠진 환경이다. 종교가 신에게로 더 가까이 간 것도 아니고, 철학이 더 발전한 것도 없고, 새로운 예술사조가 등장한 것도 없다. 음악, 미술, 영화, 패션 등 창조적인 분야는 오히려 옛것을 반복적으로 모방하기에 급급할 뿐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다. 그래도 나이든 사람은 여전히 우습게 여기고, 옛날은 무조건 지금보다 원시적이었다는 의식을 조장하는 원흉들은 장사꾼들과 정치인들이다. 장사꾼들은 언제나 이렇게 말한다. “이제 새로운 시대! 아직도 그런 걸 쓰십니까. 최첨단 신기술, 신소재. 인생을 업그레이드하세요!” 하루종일 어디서나 떠들어대는 광고들은 언제나 옛것은 후지고 지금 것이 최고라고 까불어댄다. 권력자들도 우리가 옛날엔 얼마나 못살았는지 누누이 강조해야 국민들이 현실에 불만을 덜 가질 터이다. 이렇게 집요한 자본주의 광고의 세뇌공작 속에서 아이들은 철저히 소비자로 길들여진다. 소비자는 왕이므로 그 누구도 존경하지 않는다. 그러나 존경심이 사라져서 슬픈 존재들은 어른들이 아니라 아이들이다. 미래는 역사 속에서 힌트를 얻고, 선배에 대한 동경이 꿈과 용기를 갖게 하며, 어른에 대한 존경만이 그 자신이 어른이 될 수 있는 교양과 인격을 전수해줄 수 있다. 과거를 홀대하고 어른에 대한 존경심이 없는 젊은이들은 사고 싶은 것은 있지만 하고 싶은 일이 없다. 꿈이 없으니 미래가 두렵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과거를 존경해야만 극복될 수 있다. 존경은 성공과 기쁨과 행복을 물려받는 일이다. 김형태/ 무규칙이종예술가 www.thegim.com

한국판 <섹스&시티>? MBC <결혼하고 싶은 여자>

지난달 21일 시작한 문화방송 수목드라마 〈결혼하고 싶은 여자〉(극본 김인영, 연출 권석장)는 제목만 봐서는 그저그런 또하나의 드라마로 짐작하기 쉽다. 결혼을 두고 밀고당기는 뻔한 스토리를 너무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20, 30대 젊은 여성들의 트렌디가 있다 기존 드라마가 배역이나 줄거리에서 젊은층을 대상으로 한 것처럼 보이지만, 기실은 드라마 주 소비층인 40, 50대 아줌마들을 겨냥한 것이 대부분이다. 방송사로서는 텔레비전에 대한 충성도가 높은 중년 여성들의 입맛에 맛는 드라마를 만드는 게 시청률에서 안전하다. 지고지순한 사랑이니,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러브팬터지’가 판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정작 20, 30대 젊은 여성들에게 자기 이야기 같은 드라마는 찾아보기 힘들게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결혼하고 싶은 여자〉는 모처럼 젊은 여성들의 트렌드와 라이프 스타일을 반영한, 이 시대의 진정한 트렌디 드라마라고 할 만하다. 지난해 같은 문화방송에서 방영됐던 〈옥탑방 고양이〉나 〈앞집여자〉와 같은 계보라고 할까. 남자 친구한테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차인 뒤 결혼할 남자를 찾는 방송사 여기자 신영(명세빈), 병든 아버지에 뺑덕어멈 같은 과부 고모와 고모딸까지 부양하며 힘들게 살아가는, 돈도 없고 남자도 없는 순애(이태란), 재벌가로 시집갔으나 남편에 맞서 맞바람을 피우다 파란눈의 아이를 낳은 죄로 시집과 친정에서 쫓겨난 연애박사 승리(변정수) 등 32살 동갑네기 세 친구의 내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살이가 경쾌하면서도 때론 가슴 찡하게 그려진다. 시청자 고미숙씨는 “31살 노처녀입니다. 오랜만에 나를 웃게 해준 것 같아 고마웠어요”라고 이 프로그램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유숙희씨는 “20대는 자신의 미래를 볼 수 있고, 30대는 현재를 보며 공감하고 40, 50대는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이런 드라마 때문”이라고 소감을 남겼다. 20, 30대 여성들의 절대적 지지는 시청자 분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드라마의 시청률은 20% 미만이지만 세대별 시청점유율을 살펴보면 20대 여성과 30대 여성의 시청 점유율이 각각 33%, 30%로 드라마 주력 소비층인 40대와 50대 여성의 시청점유율(각각 23%, 21%)보다 높다고 시청률 조사기관인 티엔에스는 밝혔다. 경쾌함과 쓸쓸함, 세태풍자가 있다 이 드라마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온 글 중 상당수는 “연기자들의 오버도 너무 재밌다” “다뤄지는 이야기들이 무거운데 유쾌함으로 풀어내는 것 같다” 등 드라마가 내세운 웃음의 코드에 적극 반응하는 내용들이다. 사실 그동안 다소곳하고 현모양처 같은 배역만을 맡아 내숭덩어리 이미지를 갖고 있는, 신영 역의 명세빈이 눈꺼풀을 연신 깜빡이며 결혼하고 싶은 남자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연기에 웃음이 터져나온다. 지난해 〈앞집여자〉에 이어 연애박사로 나오는 변정수의 화려한 몸짓도 경쾌하다. 신영과 준호(유준상)가 초등학교 5학년 때 헤어진 이후 20여년 만에 다시 만나는 장면도 다른 드라마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항문이 부어 병원을 찾아간 명세빈의 항문에 손을 집어넣은 사람이 다름아닌 유준상이라는 설정은 차라리 이 시대의 엽기코드와 맞닿아 있다. “너무 오버하는 것 아냐”라는 느낌도 들지만 바로 내숭을 떨지 않는 게 이 드라마의 미덕이자 매력이다. 노골적으로 조건에 집착하는 남녀관계를 드러냄으로써 뒤틀린 관계맺기를 풍자하기도 한다. 치과의사인 남자 친구로부터 “나이 많고 고집 세다”는 이유로 차인 신영은 준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육탄공세를 서슴지 않으나 그는 띠동갑 연예인을 소개시켜달라는 둥 철저하게 속물근성을 보인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편마다 중간에 신영의 일기 같은 내레이션을 삽입해 자칫 시트콤처럼 흐르기 쉬운 분위기를 반전시킨다. 거기에는 한국에서 나이 많은 여성이 홀로 살아가면서 겪는 인생의 팍팍함, 쓸쓸함 같은 것이 잘 드러난다. 승리의 자살을 말리며 세 친구가 목놓아 우는 장면 뒤에 흐르는 내레이션 같은 게 특히 그렇다. “서른 살 넘게 살다 보니 삶의 지혜도 얻게 됩니다. 인생엔 견뎌야 할 때가 있다는 것. 눈보라 친다고 해서 웅크리고 서 있으면 얼어죽는다는 것. 눈 비 바람 맞으면서도 걷고 또 걸어가야 한다는 것. 처절한 고통의 현장에서 눈물콧물 흘리는 이신영이었습니다.” 한국판 〈섹스&시티〉 같다는 얘기도 있다 뉴욕여성 4명의 일과 사랑, 섹스이야기를 절묘하게 그려내 높은 인기를 누리는 미국 시트콤 〈섹스&시티〉. 칼럼니스트 캐리가 헤어진 옛 남자친구를 다시 만나 어떻게든 꼬셔서 ‘섹스’를 하려고 안달하는 장면은 신영이 준호에게 공을 들이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한 남자의 사랑을 원하는 순정파 샬럿은 진순애, 장승리는 자유분방한 애정행각을 벌이는 사만다의 설정과 비슷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프로그램 인터넷 게시판에도 “섹스&시티와 설정이 비슷한 것 같다”는 글이 심심찮게 올라온다. 〈섹스&시티〉가 섹스를,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결혼을 주요 모티브로 한다는 점이 차이점이다. 하지만 두 나라 여성이 처한 현실 때문이겠지만 〈섹스&시티〉의 여성들이 〈결혼하고 싶은 여자〉의 여성들보다 훨씬 진취적이고 도전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결혼하고 싶은 여자〉의 경우 신영과 같은 전문직 여성이 앞뒤 안가리고 결혼에 목을 매는 설정은 바로 드라마의 현실성을 약화시키는 요소이기도 하다. 이 드라마가 기존 드라마의 가치체계를 뒤엎으려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역시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 보이지 않는 것도 이런 보수적 설정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민식과 유지태의 몸만드는 법, <올드보이>

사전을 보면 복수란 자기에게 쓰라린 변을 겪게 한 대상에게 그와 ‘같은’ 고통을 경험하게 갚는 것이라 되어 있다. 함무라비의 동태 복수법에 따라 <복수는 나의 것>의 동진은 류를 죽였고 4인조 테러집단도 동진을 즉결심판했다. 그럼 오대수는 무슨 짓을 했기에 죽지도 않고 사설감옥에서 15년을 썩어야만 했나? 거기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이 쓰치야 가론의 원작만화라면 동태 복수법의 적용을 받는 영화 <올드보이>의 진짜 복수는 출옥 이후에 이루어진다. <복수는 나의 것> DVD 코멘터리를 들으면 류가 누나의 몸을 닦아주는 장면에서 손을 좀더 깊숙이 넣으라는 주문을 했다고 감독이 밝힌다. 근친상간 코드가 은근히 삽입되었다는 얘기다. 그저 지나가는 요소였을 뿐인 이 코드가 <올드보이>에선 복수의 이유이자 방법으로 사용된다. 감금기간이 원작보다 5년이 늘어난 것도 따지고보면 복수를 완성시키기 위해 필요했던 것이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의 복수는 살아남은 자의 것이었으나 <올드보이>의 복수는 그렇지 않다. 양파 껍질같이 끝을 알 수 없는 최면을 통해 결말을 갑자기 호러 분위기로 몰아간 원작을 감안한다면 더욱 그렇다. 이우진의 마지막 물음은 최면술사의 도움으로 오대수가 ‘거울 속으로’ 갔을 가능성을 닫아버린다. <올드보이>에선 복수가 죽은 자의 것이다. 그런데 대수에게 갚은 우진의 복수가 왜 선물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걸까? 일본에서 텔레시네 작업까지 거친 DVD의 화질은 장단점이 있다. 최근 출시된 <자토이치>와도 유사한데 화면의 안정성과 고른 색감은 기대 이상이나 해상력은 기대 이하로 떨어지는 단점을 지닌다. DTS 사운드는 화질보다 만족스러운데 O.S.T의 분리도가 좋다. 얼티미트 에디션이 9월에 발매되기에 이번에 출시된 일반판에는 특별한 부록이 담기지 않았으나 최민식과 유지태의 몸만들기 장면은 다시 보고 싶을 정도로 짜임새가 있다. CD가 포함되지 않은 대신 영상과 함께 음악을 들려주는 ‘뮤직채널’이 포함되었는데 다른 영화들의 제목으로 음악 제목을 만든 것이 흥미롭다. 칸영화제가 5월12일부터 시작된다. 경쟁부문 두편을 영화제보다 먼저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이번주 개봉하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를 극장에서 보고 역시 이번주 출시되는 <올드보이> DVD를 집에서 보면 된다. 조성효 이번주의 선택은 <그들의 첫 번째 영화>라는 이름의 DVD다. 피에르 브롱베르제가 제작을 맡은 일련의 단편들에서 고다르, 멜빌, 피알라, 트뤼포, 레네 등의 이름만 봐도 가슴 설렌다. 지금 열심히 보는 중이어서 리뷰는 다음주에 실릴 예정이다. 다음으로 관심이 가는 DVD는 <영웅본색> 삼부작 박스 세트다. 80년대 후반 홍콩누아르란 말까지 나오게 했던 시리즈의 생명력이 지금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다. 정작 1편을 극장에서 보지 못한 사람이 많을 텐데, 깨끗한 화질의 DVD로 보는 느낌이 새롭다. 그리고 해외 타이틀을 한편 소개한다. 차이밍량의 <안녕, 용문객잔>과 이강생의 <불견>이 대만에서 세트로 출시됐다. 두 사람의 오랜 인연과 원제목 ‘不散, 不見’을 연결해보면 어울리는 기획이며, 홀로그램으로 만들어져 두 작품이 번갈아 표현되는 재킷도 좋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사무라이의 배신을 얘기하는데 에드워드 즈윅은 무사도를 이야기한다. 어쩐지 외부인이 만든 <라스트 사무라이> 이야기가 와닿질 않는다. 이번주의 리뷰작 중엔 ‘이번주의 선택’이 없다. <영웅본색> 삼부작 박스 세트와 삼인삼색의 <뉴욕스토리>, 그리고 누벨바그 감독들과 멜빌, 피알라, 르콩트의 초기 단편이 담긴 <그들의 첫 번째 영화>에 관심이 간다. <올드보이>는 얼티미트 에디션을 기다려보겠다. 한주간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을 접했다.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는 박찬욱의 <올드보이>는 다시 봐도 힘이 넘치는 영화다. 영화 본편만 원한다면 이번에 나올 일반판을 구매하면 되고, 부록에도 똑같은 비중을 둔다면 음성 해설을 비롯해 방대한 양이 수록될 얼티미트 에디션을 기다리면 되겠다. <휴먼 스테인>은 관록의 연기자들을 보는 쏠쏠한 재미가 있고, 오랜만에 다시 보는 권철희 감독의 <월하의 공동묘지>는 현재 DVD로 나온 유일한 한국 고전 공포영화라는 가치가 있다. 박노식, 도금봉, 허장강과 같은 훌륭한 배우들의 연기가 인상 깊다. 이번주 명예의 전당으로 모셨다. 그리고 나의 선택은 <피터 팬>이다. 원작을 충실하게 재현했고, 상상으로 그리던 네버랜드의 모습을 훌륭하게 영상화했다.

가장 일본적이며 가장 세계적인 오즈의 세계

5월에 부산과 서울에서 차례로 만나는 오즈 야스지로 특별전 자신보다 연배가 어린 구로사와 아키라가 베니스영화제에서 수상했다는 소식을 듣고 미조구치 겐지가 경쟁심을 불태웠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들과 함께 일본 영화계의 또 하나의 거목으로 인정받는 오즈 야스지로의 경우에는 해외로부터 인정받는다는 것에 대해 그리 조급해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언젠가는 자신이 이해받을 날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던 그는 50년대 후반쯤에 자신에 대한 서구에서의 긍정적인 평가가 조금씩 고개를 들자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래, ‘우리의 야만인 친구들’도 이해를 했다는 거지?”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본격적인 ‘오즈 붐’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보는 게 옳았다. 그에 대한 (서구에서의) 열광은 그의 죽음 이후로, 특히 70년대 초반 이후에서야 번져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오즈의 세계는 국제적으로는 그처럼 다소 뒤늦게 그 모습을 드러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세계를 접한 이들에게 미약한 파장을 미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사정이 그와 반대라는 건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오즈만의 독자적인 ‘우주’ 우리가 흔히 통상적인 눈높이라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낮은 위치에 자리한 카메라, 그 카메라의, 트릭을 전혀 쓰지 않으며 움직임을 거부한 정적인 시선, 굵직한 굴곡이 없는 길을 따라가는 스토리라인 등, 오즈의 영화들을 본 이들은 그것들에서만 특별히 찾아볼 수 있는 특징들을 캐냈고 오즈적 세계에 대한 상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미묘한 세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를 물었다. 어떤 이들은 오즈는 가장 일본적인 영화감독이고 전통주의자라고 부르면서 불교나 선의 개념들을 끌고와 오즈를 이해하려 했다. 또 어떤 이들은 일본 문화에 대한 특별히 깊은 이해가 없이도 오즈의 영화를 설명할 수 있다고도 논했다. 오즈의 영화는 무엇보다도 영화적 형식에 우리의 시선을 모으는 것이니 만큼 그것에 대한 논의로부터 풍부한 비평적 함의를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식의 논의가 타당한가 하는 복잡하고 곤란한 문제를 일단 논외로 친다면, 오즈의 영화가 실로 다양한 갈래의 목소리를 내게 할 수 있는 영화비평의 풍성한 저장고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물론 오즈의 영화는 이해되어야 하고 연구되어야 할 중요한 비평 텍스트이지만 그 이전에 감상할 작품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실 일본 내에서 오즈는 로베르 브레송이 아니라 존 포드 같은 영화감독이었다. 그는 비록 아주 얕거나 천박한 방식은 취하지 않았을지라도 여하튼 당대의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고자 노력했던 상업영화감독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위대한 것은 시공간의 거리를 넘어서 존재하는 관객의 마음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컨대, 프랑스의 일본영화 전문가인 막스 테시에는 오즈는 우선 이해되고 분석될 대상이 아니라 느끼고 경험해야 할 대상이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오즈의 그 오묘할 수도 있는 세계는 자기 같은 서구인들에게도 절대 불가해한 어떤 것으로 다가오지는 않게 되는 것이다. 이건 오즈의 영화들이 당대 일본 사회의 가족제도나 부모 자식 사이의 관계를 그렸으면서도 그 너머로 자연 앞에 무력한 인간의 근원적인 비애감을 투영해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말해도 될 것 같다. 오즈는 여전히 우리를 감동시킬 줄 아는 세계를 제시했던 영화감독이다. 영화사의 거장들이 대개 그렇듯, 오즈는 영화에 접근하는 자신만의 방식, 그리고 세계를 바라보는 자신만의 시선을 재료로 온전히 자신에게만 속하는 하나의 우주를 만든 사람이었다. 현재까지도 그 우주는 때론 무신경함으로, 또 때론 존경심을 가지고서 자주 모방되어오곤 했다. 그렇다고 해서 모방작이 무턱대고 오즈의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오래전 오즈의 조감독을 지냈던 이마무라 쇼헤이의 이야기에서 입증된다. 그는 오즈 밑에서 일했던 야마모토 고조가 예전의 오즈의 스탭들을 데리고 완전히 오즈 스타일로 찍은 <내 아내의 봄>은 전혀 흥미가 없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이마무라는 이렇게 말한다. “오즈 영화들의 세계는 결국에는 오즈에게만 속했다.” 여전히 흥미로운 비평의 대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영화적 감동의 대상이기도 한 그 독자적인 우주가 다시 한번 우리 곁에 찾아온다. 홍성남/ 영화평론가 gnosis88@yahoo.com <오즈 야스지로 특별전 Homage to Ozu Yasujiro> 주최: 시네마테크 부산, 하이퍼텍 나다 ▷부산 5월8일(토)∼23일(일) 장소: 시네마테크 부산(051-742-5377, 5477) ▷서울 5월28일(금)∼6월10일(목) 장소: 하이퍼텍 나다(02-3672-0181) ▷ 상영시간표 및 문의 http://www.cinematheque.seoul.kr http://www.cinemathequeseoul.org 셋방살이의 기록 長尾紳士錄 1947년l 흑백 l 72분 전쟁이 끝난 뒤 오즈가 처음으로 만든 영화인 <셋방살이의 기록>은 패전 이후 일본의 모습을 유사가족 이야기 안에 담아낸 작품이다. 홀로 살고 있는 중년 여성 타네는 이웃 남자로부터 아버지를 잃은 한 어린아이를 억지로 맡게 된다. 그녀는 항상 뿌루퉁한 표정을 짓고 고집 센 이 아이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둘 사이는 언젠가부터 부모 자식 사이처럼 되어버린다. 패전 뒤의 쓰라린 일본의 표정을 담고 있는 리얼리즘적인 작품이지만 오즈는 따뜻한 유머감각을 발휘해 영화를 마냥 싸늘한 것이 되지 않게 만들었다. 데이비드 보드웰이 “만일 오즈가 이 영화만을 만들었더라도 가장 위대한 영화감독 가운데 하나로 간주되었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하며 극찬한 작품이다. 늦봄 晩春 1949년l 흑백 l 108분 홀로 된 아버지와 그 아버지를 떠나지 않으려는 딸의 이야기를 정제된 형식 안에 담은 <늦봄>은 후기 오즈 영화(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오즈(Our Ozu)”)의 출발점에 해당하는 영화다. 결혼적령기를 지난 여인인 노리코는 아버지를 모시고 살겠다는 마음에 결혼하기를 거부한다. 결국 그녀는 아버지가 재혼을 고려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야 결혼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영화비평가 크리스 후지와라는 <늦봄>을 두고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러브스토리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 바 있다. 아버지와 딸 사이의 ‘러브스토리’를 다룬 이것은 ‘러브스토리’라는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 미묘한 보기와 읽기가 가능한 영화다. 하라 세쓰코가 처음으로 주연을 맡은 오즈의 영화라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동경이야기 東京物語 1953년l 흑백 l 135분 <동경이야기>는 서구에 강한 인상을 남겨준 최초의 오즈 영화로 이후로 오즈의 명실상부한 대표작이 된 작품이다. 초창기에 미국에서 소개되었을 때 붙은 제목(<그들의 첫 번째 동경 여행>)처럼 영화는 자식들을 보러 도쿄에 온 노부부의 이야기를 그린다. 하루하루 살기에 바쁜 자식들은 이들을 귀찮아하고 오히려 그들을 따뜻하게 맞아주는 것은 전쟁 중에 남편을 잃은 며느리이다. <동경이야기>에 대해 오즈 자신은 자식들이 커가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일본 가족 제도의 붕괴를 그리려고 했다고 말한 바 있다. 물론 영화는 급격한 변화를 맞이한 사회의 단면을 다루고 있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서는 삶이라는 것 자체의 덧없음에 대한 감동적인 성찰을 보여주기도 한다. 피안화 彼岸花 1958년l 컬러 l 120분오즈의 첫 번째 컬러영화. 사실 이 영화를 만들 때까지만 해도 오즈는 아직 컬러영화를 만들고 싶은 생각이 없었지만 쇼치쿠사에서 다이에이 소속의 스타 야마모토 후지코를 기용하면서 오즈에게 컬러영화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코닥 필름보다 붉은빛의 아그파 필름을 좋아한 오즈의 취향이 드러난다. <피안화>의 이야기는 대략 <늦봄>의 네거티브쯤에 해당하는 것이다. 딸은 사귀는 남자와 결혼을 하고 싶어하지만 아버지는 결혼을 반대한다. 이 중심축 바깥에다가 미묘한 갈등을 빚는 부모-자식 관계의 작은 이야기를 두개 더 추가함으로써 영화는 좀더 풍요로워졌다. 세대 사이의 갈등을 아름다운 화면 위에다가 코믹하면서도 씁쓸한 향취로 그려낸 걸작. 안녕하세요 お早よう 1959년l 컬러 l 94분 오랫동안 주로 성인 혹은 노인의 시점에서 이야기되는 영화를 만들던 오즈는 자신의 무성 코미디 걸작 <태어나기는 했지만>(1932)을 리메이크한 <안녕하세요>에서 다시 어린아이의 시점으로 돌아왔다. 도쿄 교외에 사는 가정의 두 소년은 부모에게 텔레비전을 사달라고 졸랐다가 거절당하자 침묵의 반항을 행한다. 영화는 그 반항과 그것을 만드는 상황으로부터 주로 웃음을 끌어낸다. 반면 <태어나기는 했지만>에서 웃음을 만들어내는 것은 수치심쪽이었다. 이것만 봐도 <안녕하세요>는 <태어나기는 했지만>을 그대로 리메이크한 영화는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다. 자크 타티식의 코미디 감각이 배어 있는 이 영화는 다른 한편으로는 색채의 다양한 이용에 대한 오즈의 특별한 관심을 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고하야가와가의 가을 小早川家の秋 1961년l 컬러 l 103분 <고하야가와가의 가을>은 쇼치쿠가 아닌 다른 영화사에서 제작한 몇 안 되는 오즈 영화들 가운데 하나다. 영화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어려움을 맞고 있는 한 양조장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늙은 홀아비이며 장성한 세딸을 두고 있는 양조장의 주인 만베이는 최근 들어 외출하는 일이 잦다. 그는 19년 만에 만난 옛 애인에게 다시금 푹 빠져 있는 것이다. 오즈의 필모그래피에서 마지막 두 번째 자리에 위치하는 <고하야가와가의 가을>은 만베이와 그를 둘러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늙어간다는 것, 기대하지 않았으면서 불가피하게 마련인 변화와 마주한다는 것 그리고 삶의 덧없음을 껴안는다는 것 등을 조목조목 성찰하는 영화다. 여기에 담긴 유머와 씁쓸함의 묘한 공존이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일 만하다. 꽁치의 맛 秋刀魚の味 1962년l 컬러 l 113분 오즈의 마지막 작품인 <꽁치의 맛> 역시 그의 몇몇 다른 후기작들처럼 늙는다는 것과 홀로 남는다는 것에 대한 차분한 성찰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그러면서도 여기엔 장난기 다분한 유머도 곁들여져 있다. 여기에서 오즈는 <늦봄>의 상황을 변주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내없이 혼자 살고 있는 회계사 히라야마는 딸에게 어울리는 신랑감을 찾아주려 한다. 결국 그는 딸을 시집보내고 홀로 남게 된다. <꽁치의 맛>이 오즈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중요한 한 가지 이유는 형식의 제의, 혹은 유희를 극단적인 지점까지 밀고 가는 오즈의 면모를 잘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순수하다고 표현할 스타일을 가지고 그는 삶의 우수를 빼어나게 표현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