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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3세대 영화광 시대가 왔다 [2]

‘권위’가 아닌 자유로운 소통을 추구한다 이처럼 이전 세대 영화광들이 닦아놓은 터전 위에서, ‘이C’ 같은 신세대 영화광들은 누릴 것이 많아졌다. 특히 개인의 취향과 기호가 중요해지면서, 이에 따라 영화를 보는 방식도 다양해지고 있다. DVD와 인터넷, 개봉관과 시네마테크, 영화제 등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면서, 영화광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에 가장 적합한 포맷을 찾아 이를 고집하고 있다. “영화는 필름으로 봐야 한다”는 믿음과 ‘고전영화’에 대한 갈망이 깊은 이들은 이즈음 한달에 한번꼴로 열리는 명감독 회고전을 문지방 닳도록 드나든다. “자주 보이는 얼굴들이 있는 걸 보면, 안정적인 관객층이 형성된 것 같다”는 것이 문화학교 서울 사무국장 김노경씨의 조심스러운 분석. 그러나 ‘네임 밸류’가 높은 감독의 회고전에도 ‘대표작’이랄 만한 특정 작품에 관객이 폭주하는 현상에 대해선 “몇몇 대표작만 보고 그 감독을 다 알았다고 믿고 싶어하는 건 아닐까” 하는 우려를 비치기도 한다. 반면, 동시대의 화제작을 남보다 ‘먼저’ 보고 싶어하는 이들은 자기만의 공간에서 DVD와 디빅에 탐닉한다. 90년대 중반, 국내 개봉이 불가능해 보였던 왕가위의 <해피 투게더>와 이와이 순지의 <러브레터>의 상영회가 매번 인산인해를 이뤘던 것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예술영화전용관의 관객이 “영화적으로 우월하다는 자부심이 대단한 것 같아서” 이질적으로 느껴진다는 ‘나 홀로 감상파’들은 자기만의 고유한 라이브러리를 만드는 데 공을 들인다. 고전영화, 드라마, 액션, 애니메이션 등 좋아하는 장르를 무한정 파고드는 경향들이 이들 ‘소장파’ 사이에 두드러진다. 젊은 세대가 DVD에 열광하는 또 다른 이유를, DVD 칼럼니스트 모은영씨는 “음질과 화질이 뛰어나다는 것은 물론, 챕터별 장면별 감상이 용이하다는 점에서 MTV의 짧은 클립에 익숙한 요즘 세대 감성에 잘 맞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취향과 기호의 차이가 중요해진 것은 물론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1995년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을 계기로 불어닥친 예술영화 붐이 사그라질 무렵, PC통신에는 다양한 동호회가 생겨났고, 고전영화는 물론 장르영화 애호가들도 활약하기 시작했다. “문화원 세대가 영화를 숭배했다면, 통신세대는 영화를 유희했다. 또한 비평의 사각지대에 있는 영화들을 발견하고 재조명해 스펙트럼을 넓혔다고나 할까. 작가주의에 대한 강박없이 잡탕으로 영화를 봤고, 모든 영화를 똑같이 여겼다.” 평론가로 등단하기 전, 유니텔에서 ‘씨네키드’라는 아이디로 활약했던 심영섭씨의 회고다. 그런데 이즈음엔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영화동호회도 해체 국면을 맞았다. 고전영화 동호회, 호러영화 동호회, 이와이 순지 동호회, 한국영화 동호회 등 ‘소문난’ 모임들이 더러 있지만, 이즈음의 추세는 “1인 미디어”라 일컬어지는 블로그로 옮겨가고 있다는 것이다. 블로그의 특징은 블로그의 주인 혼자만이 글을 쓸 수 있고, 원하는 경우 트랙백을 걸어 비슷한 주제로 타인과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는, 이런 커뮤니케이션에서 사라져가는 문화는 영화광들 사이의 ‘진검승부’다. 백과사전식 영화 교양에 집착하던 1세대, ‘영퀴방’에서 잡학다식을 겨루던 2세대와 달리, 이들은 영화에 대한 지식이나 교양을 남과 겨룰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못 본 영화에 대한 콤플렉스 같은 것도 없다. 한 대학생 영화광의 말마따나, 그들의 눈에는 “작가주의라는 정통적 흐름에 집착”하는 전 세대 영화광들의 잣대가 “권위적”으로 비칠 뿐이다. 1세대 영화광들이 평단은 물론 영화제와 영화정책 분야에 포진해 있고, 비디오로 영화를 섭렵한 영화광 출신 감독들이 쏟아져나오고 있는 이즈음, 새로운 시대의 영화광들은 그들이 소모한 영화들을 어떤 생산 활동으로 치환해낼까. 하나의 ‘문화’로 묶어내기엔 너무나 개인적이고 다양한 3세대 영화광들의 모습을 관찰하는 일은 미래의 한국영화를 전망하는 또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영화주의자’ 당신을 사랑합니다 영화광 1세대 정성일이 미지의 신세대 영화광에게 부치는 편지 영화를 사랑하는 당신에게 이 글을 드립니다. 우리들은 영화를 사랑하면서, 서로 알지 못하면서도, 그 상상의 우정으로 서로를 (애타게) 그리워하면서 영화관의 옆자리에 앉아 같은 순간 마치 텔레파시가 통한다는 듯이 눈물을 흘리거나 큰소리로 함께 응원하면서 웃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언제나 마치 숨이 멎을 듯이, ‘죽여주는’ 장면을 만날 때, 바로 그 순간 누군가 아, 하는 탄성을 내지르면 정말 행복해집니다. 혹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새로운 이름 앞에서 열렬히 환호를 보내며 그가 미래의 거장임을 확신하는 그 열정 앞에서 언제나 마음속의 사랑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그건 사랑없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 결심은 아무것도 바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는 진정 한자리에서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영화를 사랑하는 건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랑이 그런 것처럼 이 마음을 다한 행위는 그 어떤 이해관계를 노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을 뒤로 미루고 채플린을 보기 위해, 드레이어를 보기 위해, 스트로하임을 보기 위해, 에이젠슈테인을 보기 위해, 존 포드를 보기 위해, 오즈를 보기 위해, 장 르누아르를 보기 위해, 히치콕을 보기 위해, 프리츠 랑을 보기 위해, 브뉘엘을 보기 위해, 에른스트 루비치를 보기 위해, 요리스 이벤스를 보기 위해, 자크 타티를 보기 위해, 라울 월시를 보기 위해, 막스 오퓔스를 보기 위해, 하워드 혹스를 보기 위해, 브레송을 보기 위해, 보리스 바르네트를 보기 위해, 로셀리니를 보기 위해, 고다르를 보기 위해, 케네스 앵거를 보기 위해, 타르코프스키를 보기 위해, 장 외스타슈를 보기 위해, 파스빈더를 보기 위해, 올리베이라를 보기 위해, 허우샤오시엔을 보기 위해(거기에는 당신이 좋아하는 이름을 얼마든지 더 열거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 명단은 끝나서는 안 되는 목록입니다). 헐레벌떡 숨이 턱에 차도록 달려왔을 때 거기에는 오직 그 영화를 보고 싶다는 사랑의 감정 이외의 다른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혹은 낮에 흘린 노동의 소금에 옷이 절어 지친 몸을 이끌고 기어이 마지막 회에 도착해서 안도의 한숨을 조심스러이 내쉬면서 안락한 의자에 앉을 때 아, 참으로 행복하다고 느낀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친구인 것입니다. 거기에서 이데올로기를 말해야 한다면 저는 기꺼이 네 그렇습니다, 저는 영화주의자입니다, 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건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 한마디입니다. 그러므로 영화를 보면서 그렇게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은 친구이며, 동지이며, 연인인 것입니다. 혹은 거기서 함께 그 어떤 장면의 순간 환희를 느낄 때 그것이야말로 그 자리에서 함께 나누는 키스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오늘도 당신을 영화관에서 만나고 싶습니다. 그리고 같은 순간 당신과 함께 감탄의 탄성과 행복한 한숨을 내쉬고 싶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천사년 사월 정성일 씀.

MP3로의 대전환 시대, 새로운 상황을 창출하라

MP3 시대의 문턱에서 뮤지션들에게 전하는 충고 시간과 장소의 제약을 넘어서 복제되고 전송되는 ‘음악파일의 시대’는 이미 도달했다. 사람들은 음반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파일을 소비하고, 음반업자들은 울상이 되어 불법 다운로드가 음악을 죽이고 있다고 격분한다. 과연 음악파일의 시대가 음악을 살해하고 있는가, 아니면 이 새로운 시대는 음악을 음반업자들의 탐욕으로부터 탈출시키고 있는가. 이 글은 대변혁을 맞이한 음반시장에서 뮤지션들이 취해야 할 행동에 대한 금쪽같은 충고다. Free your mind! Free your music! 편집자 1. 매체의 전환기 음반업 종사자들은 극단적인 불황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그에 따라 뮤지션들도 덩달아 우울해한다. 그러나 그 ‘우울’은 어쩌면, 뮤지션의 입장에서 보자면, 조장된 것인지도 모른다. 누가 조장하나? 음반업자들이다. 그들은 숨이 막힌다고 말한다. 아무도 CD를 사지 않는다. 사기는커녕 굽는다. 굽는다는 건 소비자들이 직접 CD를 만든다는 말이다. 사야 할 사람들이 CD를 만드니 일삼고 팔려고 CD를 생산하는 사람들이 준비한 CD가 잘 팔릴 리가 없다. 물론 아직도 사람들은 CD를 사긴 산다. 그러나 일종의 ‘장서용’이지 소리를 소비하는 일상의 차원에서의 구매는 아니다. 일상의 소리 소비는 파일형태로 넘어가 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음반시장은 불황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여기서 혼동하지 말아야 하는 대목이 있다. 음반시장은 불황이지만 음악 자체의 유통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활발하다. 아마도 지금, 음반을 사야 하던 시대보다 음악을 듣는 대중의 음악 듣는 시야는 훨씬 넓어졌을 것이다. 음반시장이 불황인 것은 음악을 만들고 듣는 사람들이 없어져서가 아니다. 음반시장이 음악을 만들고 듣는 사람들의 ‘행위’를 포괄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음악을 만들고 듣는 행위의 패턴이 음반시장 바깥에서 자리매겨지고 있다. 조금 냉정하게 이야기하자면, 음반시장의 불황은 다른 무엇이 잘못돼서라기보다 음반시장 자체의 역사적 사명이 숨을 거두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은 음반 이외의 음악유통 행위에 ‘불법적’이라는 단서를 달기가 그리 어렵지 않지만 그것은 과도기의 현상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은 매체의 대전환이다. 음악에 관한 한 지금을 ‘MP3 시대의 문턱’이라 불러도 좋을 듯하다. 왜 문턱이냐면, 아직 그 소통의 공식적이고도 일반적인 질서나 규율 같은 것이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MP3 시대가 되면 확실히 ‘음반’이라는 개념은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질 것이고 대신 MP3 같은 ‘다운로더블 파일’(downloadable file) 형태의 유통이 음악 저작물의 주요 ‘미디어’로 등극할 것이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그 대전환의 과정이다. 음반 시장은 불황, 음악의 유통은 활발 200년 전의 음악계를 지배한 매체는 ‘악보’였다. 악보는 공연 이외에 작곡자를 연주자나 청중에게 연결해주는 유일한 매체였다. 악보는 특히 작곡가에게 유리한 매체이다. 연주자는 악보에 기재된 대로 연주해야 하고 듣는 사람은 악보대로 연주한 연주자의 음악을 들었다. 작곡가가 콩나물대가리 하나를 한칸 내려 그리면 노래는 그렇게 변했다. 작곡가는 엿장수다. 그래서 주로 작곡가와 악보판매업자들 사이 계약이 이루어졌다. 브람스가 유명한 작곡가가 된 뒤 아버지에게 책을 줄 때 돈을 살짝 넣어주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러던 것이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상황은 바뀐다. 음반이라는 새로운 매체가 등장한 것이다. 1877년 발명왕 에디슨이 ‘납관’(蠟管)식 구식 축음기인 ‘포노그라프’(Phonograph)를 발명했고 이 기계에 의해 최초로 음악이 녹음된다. 10년 뒤인 1887년 7월14일, EMI의 전신인 미국회사 북미 포노그라프(North American Phonograph)가 설립되었고 그해 9월26일, 설립자인 에밀 베를리너는 기존의 실린더형 축음기와는 전혀 방식이 다른 ‘그라모폰’(Gramophone)을 발명하여 특허를 얻어냈고 1890년에는 오늘날의 레코드 형식인 ‘그라모폰 음반’을 시판하게 되었다. 이러면서 향후 100년간 음악계를 지배하게 될 ‘음반의 시대’가 열린다. 음반의 시대는 단연 연주자나 가수들의 시대이다. 음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소리의 보존 가능성이다. 추상적인 기호들이 그려져 있는 악보와는 달리 음반에는 소리 자체가 녹음되어 있다. 콘서트홀에서나 들을 수 있었던 카루소 같은 유명한 가수의 노래를 집에서도 듣게 된다. 그리하여 예전과는 달리 주로 연주자와 음반판매업자들 사이에 계약이 이루어진다. 작곡가들은 그만큼 불리해진 셈이다. 악보를 팔면 직접 받을 수 있었던 인세를 연주자나 가수들과 나눠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음반의 소비량이 늘어나면서 작곡가 역시 덕을 보게 된다. 이른바 ‘대중음악’의 시대인 것이다. 노래 하나 잘 만들어 떼부자가 되는 작곡가가 생기고, 노래 하나 잘 불러 떼돈 버는 가수들이 생긴다. 다 대중의 덕을 봐서 그렇다. 아날로그 음반의 시대는 CD의 발명과 함께 디지털 음반 시대로 넘어간다. 1970년 6월에 영국의 텔덱(Teldec)사와 독일의 텔레풍켄(Telefunken)사가 공동으로 압전식(壓電式) 비디오 디스크를 개발했고, 1972년 8월에는 미국의 RCA사가 정전식(靜電式)을, 같은 해 9월에는 네덜란드 필립스사가 광학식 비디오 디스크를 개발했다. 그것이 지금의 CD가 되었다. CD는 아날로그 전기 신호를 디지털 신호로 변환하여 보존한다. 아무리 틀어도 음반이 닳지 않는다. 생산도, 시스템만 갖추면 훨씬 쉽다. 크기도 작아 보관하기도 좋다. 그러나 디지털 음반의 시대는 다시 디지털 파일의 시대를 필연적으로 예고하고 있다. 본질적으로 CD에 저장된 데이터와 파일형태로 온라인을 떠도는 데이터는 같다. 압축이나 코덱이 다를지 몰라도 그것들은 그저 데이터들인 것이다. 그것들은 초고속으로 복제되고 복제되면서 데이터의 상실률도 거의 없다. 전송을 통해 시간이나 장소의 제약을 넘어 유통된다. 누가 누구와 계약하는 시대가 아니다. 주인없는 파일들이 전세계의 온라인을 배회한다. 물론 그것들은 주인이 있어야 하는 파일들이지만 복제에 복제를 거듭한 끝에 주인의 얼굴이 지워진다. 거기에 주인의 얼굴을 희미하게나마 새겨넣는 문제가 아티스트나 업자들에 의해 제기된다. 2. 이 선생의 LP 듣기와 K군의 파일 듣기 이 선생 듣고 싶은 소중한 LP를 선반에서 꺼낸다. 재킷 안에는 속포장지가 있다. 음반이 긁히지 않도록, 속포장지에서 조심스럽게 비닐 음반을 꺼내어 턴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LP 표면을 닦는 부드러운 천이나 솔로 일단 한번 닦는다. 그러고나서 조심스럽게 바늘을 LP 위에 놓고 틱, 틱, 하는 노이즈가 조금씩 이는 것을 들으며 약간은 흥분된 마음으로 음악이 시작되기를 기다린다. 드디어 음악이 시작된다. 명반이다. 불후의 명연주다. 이 선생의 방 안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육중한 스피커에서 시원하고 따뜻한 아날로그 신호들이 나와 이 선생의 귀에 가 닿는다. 이 선생은 감동한다. 가끔 재킷을 펼쳐본다. 재킷 역시 예술이다. 대문짝만한 재킷의 표면에 그려진 그림이 예술이고 안쪽의 디자인도 예술이다. 웅장한 재킷을 쳐다보며 음악에 관한 정보를 얻기도 하지만 이 선생이 얻는 것은 무엇보다도 만족이다. 20여분 남짓, 음악이 흐르다가 이내 ‘Side A’가 끝이 난다. 이 선생은 B면을 마저 들을 것인지 새로운 음반을 꺼낼 것인지 약간 고민에 빠진다. 고민하는 와중에도 역시 명반이라는 감탄은 사라지지 않는다. 연주, 녹음, 재킷의 수준, 그 모든 것의 완성도가 이 선생의 마음에 일종의 충만감을 준다. 음반을 다시 재킷에 넣기 전에, 먼지를 한번 더 닦는 것을 잊지 않는다. K군 하드디스크 안에 몇 기가의 MP3 파일들이 저장되어 있다. 그것들을 빨리빨리 듣지 않으면 자꾸 쓰레기처럼 쌓인다. 쓰레기처럼 쌓이면 어느 노래가 어디에 들어 있는지 절대 알 수 없다. 다운받아놓고 시간이 흐르면 누구의 무슨 노래인지 가물가물해진다. 그렇게 가물가물한 파일들이 수천개. 사실 그중 많은 수의 노래는 듣지도 않고 폴더째 통째로 휴지통에 드래그하여 내다버린다. 거의 모든 노래를 20초 이상 듣지 않는다. 내 하드에 들어 있는 노래들을 모두 다 들으려면 내 인생의 상당 부분을 할애해야 한다. 물론 노래의 처음을 많이 듣지만, 드래그하여 중간 부분도 한번, 끝부분도 한번 듣는다. 뚝, 뚝, 노래는 끊기고 노래의 전체 구조는 내 감각의 자장 밖에 있다. 컴퓨터 스피커는 좋지도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다. 예전의 스피커와 비교하면 그것들은 스피커도 아니다. 음악을 듣는 환경은 그런 의미에서는 오히려 열악해졌다. 그러나 스피커가 좋아서도 안 된다. MP3 파일의 음질 때문이다. 이 정도가 딱 적당하다. 이름도 없는 수많은 숫자뭉치 덩이. 노래들이 꼭 정충 같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무방향성의 그 수많은 정충들이 하드 안에서 바글거린다. 하드 안에 있는 것 같지만 실은 그것들은 지금도 끝없이 어디엔가로, 누군가에게로 가고 있다. 당나귀니 뭐니 하는 프로그램을 걸어놓고 있으면 도저히 하루에 다 들을 수 없는 양의 노래들이 뜬다. 물리적으로 그렇다. e-donkey는 오늘밤에도 무거운 짐을 실어 나르느라 잠을 자지 못한다. K군은 당나귀에게 일을 시켜놓고 방금 전 잠들었다. 동녘이 어스름, 밝아온다. ‘듣고 보관하기’에서 ‘듣고 버리기’로 파일은 너무 간접적이고 무가치하고 손쉽다. 아무리 좋은 음악이라도 MP3 파일은 귀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공연 현장을 찾는 일에는 예전보다 더 적극적이다. 생생함. 음반을 사지 않은 지 꽤 오래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음반시장은 불황을 호소한다. 그런데 음악을 듣는 사람들의 저변은 오히려 더 넓어졌다고 할 수 있다. 나 역시, MP3 아니면 찾아 듣기 힘든 노래들을 많이 찾아 들었다. 희귀한 노래들도 MP3 때문에 그리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판 구하려고 동두천까지 나다니던 때가 있었다. 물론 지금도 파일 찾으려고 밤새 인터넷을 헤매는 젊은이들은 많다. 그러나 예전만큼 수고스럽지는 않다. 나보다 당나귀가 더 수고한다. K군의 아버지 방에 있는 장서 옆에는 LP의 무덤이 있다. 엄마는 먼지 날린다며 그 무덤을 처분할 것을 원하지만 아버지는 반대다. 그 무덤에 들어가 자기도 죽을 모양이다. K군은 가끔 그 LP들도 듣는다. 복고풍이다. 그러나 새로 나온 음악은 무조건 파일부터 찾는다. 그러나 오래 쌓아놓지는 않는다. 그러기에는 양이 너무 많다. 하도 다운을 많이 받다보니 가끔 컴퓨터가 완전히 맛이 가서 윈도즈를 새로 깔아야 한다. 그래서 통째로 날아가버리는 수도 있다. 채우는 것도 일이지만 무엇보다도 비워놔야 한다. 빨리빨리 지워 없애야 한다. 파일 듣기는 텅 비움의 실천이기도 하다. 3. 돈의 방향 음악계는 매체의 대전환을 다른 어떤 장르보다도 선도하고 있다. 영화도 내려받아서 보는 사람들이 꽤 많지만 파일이 너무 크고 시간도 걸려 아직은 파일 형태의 유통이 그리 대단하지는 않다. 또 무엇보다도 ‘극장에 가는 일’ 자체가 하나의 세리머니이다. 연인들, 가족들, 나들이 겸 극장은 여전히 사람들의 ‘밖에 나가기’의 중요한 코스다. 그러나 음악은 매체의 전환을 끌고 나가기에 딱 적당하다. 파일 크기도 적당하고 무엇보다도 포터블이다. i-POD나 기타 MP3 플레이어로 들고 다니며 들을 수 있다. 아직은 이 바닥에 룰이 없다. 기존의 저작권법은 새로운 단계로의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파일은 ‘물건’이 아니다. 파일 이름이 있는 숫자의 덩어리일 뿐이다. 기존의 ‘카피라이트’는 권리를 소유하고 있는 주체와 그 권리가 새겨진 ‘객체’를 모두 상정하고 있다. 파일의 시대에는 그 ‘객체’의 실체가 없다. 1960년대에 프랑스의 롤랑 바르트 같은 사람은 저자의 죽음을 말했다. 그는 작품을 쓰는 저자의 행위가 이미 일종의 ‘읽기’라고 했다. 그래서 텍스트는 창조되지 않고 구성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제는 객관적인 ‘텍스트’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포괄적 구도의 거래에 관한 룰을 세워라 파일의 시대에는 현실적으로 다운로드하려는 행위, 즉 내려받을 것을 수락하는 클릭의 행위와 저작권자의 권리를 연결해야 하는데, 아직 마땅하게 정해진 것이 없다. 이 세상의 그 수많은 클릭에 어떻게 다 돈을 매긴단 말인가. 플랫폼을 만드는 일이 우선 진행 중이다. 데이터베이스의 데이터베이스, 노래들의 목록을 전체적으로 골격지우는 데이터베이스가 필요하다. 파일의 시대에는 온라인상에서의 분류가 제일 중요하다. 제대로 분류되는 순간 방향은 잡힌다. 엔드 유저가 클릭킹하는 행위와 창작자가 만드는 행위가 연결된다. 지난 2004년 1월, 전설적인 록 뮤지션인 피터 가브리엘과 브라이언 이노가 ‘온라인 뮤직 선언문’을 전세계에 배포했다. 이름하여 MUDDA(Magnificent Union of Digitally Downloading Artists). 그들은 이제 뮤지션들이 음반업자를 떠나 독자적인 망을 구축할 때가 왔다고 선언한다. 브라이언 이노는 “지금 이용가능한 가능성을 아티스트들이 재빨리 파악하여 손에 쥐지 않는 한 룰은 아티스트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채 정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벌써 사람들은 오해하고 있다. 그 오해는 분명 업자들이 조장한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클릭하여 내려받는 엔드 유저만이 아티스트에게 돈을 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아직 정리되지는 않았으나, 그 중간 단계에 있는 거점들도 창작자에게 돈을 물어야 할 책임이 있는 건 분명하다. 가령 초고속 인터넷망을 까는 ‘망업자’가 있다고 해보자. K군이 초고속 인터넷을 방 안에 기를 쓰고 깐 이유는, 무엇보다도 내려받기의 속도 때문이다. 그렇다면 K군의 음악 듣는 행위는 일정하게 초고속 인터넷망 업자의 이윤창출에 도움을 주었다. 그렇다면 K군이 음악가에게 주어야 할 돈의 일부는 망업자들이 나눠내야 한다. 포괄적인 구도의 거래에 관한 룰이 세워지고 있는 중이다. 엔드 유저나 엔드 유저들이 우글거리는 P2P 정거장만을 고소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음반업자들이 그 고소에 가장 적극적인데, 사태를 잘못 읽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동안 음반업자들이 얼마나 뮤지션들의 돈을 뜯어왔는가. 손톱만큼의 인세를 뮤지션에게 주어가며 자기들은 뮤지션이 버는 떼돈의 몇십 곱절을 쌓아왔다. 오히려 온라인 뮤직의 시대는 뮤지션들이 그런 업자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뮤지션들에게는 음반시장의 불황이 둘도 없는 기회이다. 이 대변화의 시기에, 모험심을 가지고 새로운 상황을 창출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 즐거운 일이 어디에 있겠나. 글 성기완/ 음악칼럼니스트 · 사진 임민철

비벤디 유니버설과 NBC, 지난 12일 합병

비벤디 유니버설과 NBC가 지난 5월12일 장기간 끌어온 합병 절차를 마무리했다. 2003년 10월 합의된 조건에 따라 NBC의 모회사 제너럴 일렉트릭(이하 GE)은 비벤디 유니버설에 현금 34억달러를 지급하고 비벤디의 부채 17억달러도 떠맡았다. 합작 그룹 지분의 20%는 비벤디가 나머지는 GE가 소유한다. 이번 합병으로 비벤디는 유니버설 인수 이후 시달려온 부채 부담을 덜고, 메이저 방송사 중 유일하게 제작사를 거느린 미디어 그룹 멤버가 아니었던 NBC는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얻었다. 디즈니와 바이어콤의 합병과 유사한 이번 합작으로 탄생한 시장 5위 규모의 미디어 그룹 안에는, 유니버설 영화 및 TV 스튜디오, NBC, 텔레문도 네트워크와 CNBC, USA 네트워크, Sci Fi 채널, 브라보, 유니버설 테마파크의 일부 지분이 포함된다. 그룹의 CEO로 NBC 회장이자 GE의 부사장인 로버트 라이트가 임명된 가운데, 비벤디 출신의 유일한 간부인 유니버설 스튜디오 사장 론 메이어는 “두 기업의 문화 차이는 염려하지 않는다”며 유니버설의 기존 제작방식에 대해 변화를 요청받은 바 없다고 밝혔다. NBC 유니버설이 기대하는 합병 효과는, 콘텐츠의 공격적 활용과 상호 프로모션, 그리고 배급사와의 좀더 유리한 협상이다. <할리우드 리포터>는, 메릴 린치 애널리스트 제시카 레이프 코언이 NBC 유니버설의 합병 시너지를 4억∼5억달러로 평가했고 그중 2/3는 비용절감에서 비롯될 것으로 전망했다고 보도했다. 합병 뒤 감원 계획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으나 최대 500명, 전체 인력(1만5천명)의 3%를 넘지 않을 것으로 알려졌다.

자막의 한계를 넘은 ‘소리의 예술’, <벨빌의 자매들>

음향을 성공적으로 활용한 애니메이션 <벨빌의 자매들> 이른바 “외국영화”라는 것이 “자막의 한계”라는 저주를 벗어날 수 있을까? 마임으로는 불가능하겠지만 소리를 통해서는 가능하지 않을까? 이러한 “미키마우스적”, 혹은 “자크 타티적” 정신이 프랑스-벨기에-캐나다 공동제작 애니메이션 <벨빌의 자매들>(Belleville Rendez-vous)과 헝가리 특산 애니메이션 <허키>를 통해 되살아나고 있다. 눈부시도록 독특한 데뷔 장편이라고 할 수 있는 두 작품은 모두 풍성한 음향적 표현을 통해 대사를 배제한 채 성공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해준다. <니모를 찾아서>나 <루니 툰: 백 인 액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해의 가장 독창적이고 탁월한 장편애니메이션은 실벵 쇼메 감독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그는 한때 만화작가였다) 영광스러운 복고풍의 애니메이션 <벨빌의 자매들>이 아닌가 한다. 할리우드산 애니메이션 중에서 이 정도로 훌륭한 작품은 최근작들 중에서 <아이언 자이언트> 정도가 아닐까 싶은데, 두 작품 모두 최근의 대세인 3D보다는 “만화스러운” 2차원적 이미지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영화는 30년대 프라이셔 형제의 만담 만화를 천재적으로 혼성 모방해 스크레치를 입혀 완성한 장면으로 시작한다. 늘였다 줄였다를 반복하는 과장되고 우스꽝스러운 이미지가 한바탕 지나가면 곧이어 올스타 버라이어티 쇼가 시작되는데, 장고 라인하르트나 조세핀 베이커, (탭댄스용 신발 한짝에 푹 파묻힌) 프레드 에스터같이 커리커처로 부활한 과거 명사들을 위한 공연이 리드미컬하게 이어진다. 하지만 정작 무대 위의 주인공은 감염될 듯한 즉흥 노래로 은근한 흥분과 희미하게 배설의 쾌감마저 제공하는 세 쌍둥이 가수들이다. 화면은 정적으로 분리되고, 드골 시대의 언제쯤인가에 (쇼메 감독은 1963년생이다) 이 쇼를 텔레비전으로 바라보던 늙은 노파 수자와 그녀의 우울해 보이고 날카로운 콧대의 손자 챔피온은 더한 결핍의 상태에 남겨진다. 할머니와 챔피언, 그리고 밉살스럽게 짖어대는 그들의 애완견 부르노는 기차가 지나가는 철교 때문에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어느 고립된 집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그들의 세계에서 그 세 쌍둥이 가수들은 스케치된 스토리북 스타일의 이미지로 바뀌어 있다. 로널드 실을 연상시키는 가늘고 긴 라인들과 호리호리한 외양의 이 캐릭터들은 솜으로 꽉 채워진 형상에 그 색조는 억제된 가을의 톤이다. 거의 대사가 없는 <벨빌의 자매들>은 말하자면 “이야기적 장치에 주안하고 있는 이야기적 장치(?)”이자 “동작에 대해서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는 움직이는 만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수자 할머니의 걸음걸이 하나하나는 거추장스러운 교정용 신발을 통해 강조되고 있고 환상적인 자전거타기 선수인 챔피언은 할머니에 의한 섭생법의 일환으로 자전거타기를 (그가 정체불명의 두 사내에게 납치되어 거대한 수송선으로 끌려가는 순간까지도) 멈추지 않는다. 배는 바다 위에 무뎌져가는 불꽃처럼 얹혀 있고 도저히 멈춰 세울 수 없는 수자 할머니와 부르노는 그들을 쫓아 패달을 밟으며 태풍과 고래를 피해 흡사 벨빌의 뉴욕(혹은 퀘벡)과 같은 도시에 다다른다. 둔감하기 그지없는 항구의 여신상은 그들이 뚱땡이들의 도시에 들어서고 있음을 예고하는데 (쇼메의 캐릭터들은 악당들이 모듈 모양으로 각 져 있는 것처럼 몇몇 전형적인 시각적 아이디어에 기반하고 있다) 흡사 부르클린 다리와 같은 곳에서 지내던 수자 할머니는 (늙었지만 여전히 노래하고 있는) 세쌍둥이 가수들에게 발견되게 되고, 이 노파들은 그녀를 그들의 지저분한 주택으로 데려가 개구리 스프를 대접한다. (아이들은 아마 이 장면 속의 디테일들을 몹시 즐길 것이다.) 그 사이 챔피언은 악당들이 가상의 자전거 도박을 벌이는 지하 세계의 한 나이트클럽에 억류되어 있었는데 경주의 배경은 옛날 영화의 원시적인 스크린 투사 방식으로 장치되어 있다. <벨빌의 자매들>는 탈출한 인물들이 도망치고 차고 받는 추격전 속의 추격전으로 끝을 맺는다. 모든 애니메이션은 불가피하게 편집광적이고, <벨빌의 자매들> 역시 이 점에서는 겨우 신선해 보일 정도이다. 영화는 불쾌하지만 익살스럽고, 그로테스크하지만 즐겁다. 반복을 거듭하며, 결코 귀엽지 않지만 비싸게 굴지도 않는다. 영화의 대단원에서 할머니들은 신문을 두드리고 냉장고와 진공청소기를 이용해 당신이 반드시 체험해두어야만 할 소음의 협주를 들려준다.

[외신기자클럽] 터키 영화 ‘발견’의 즐거움 (+영어원문)

영화제를 찾아가는 일을 여전히 보람있게 해주는 것은 발견의 즐거움이다. 최근에 본인에게 그런 발견의 즐거움이 또 있었다. 지리적, 문화적으로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있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매력적인 도시 중 하나인 이스탄불에서 말이다. 23년 전 이스탄불국제영화제가 시작했을 당시만 해도 군사정권 아래 터키는 꽤 규모있는 상업영화 산업을 갖고 있었다. 연간 제작편수는 70년대에 TV에 자리를 빼앗겨 200편 이하로 줄어들어 있었다. 그러나 일마즈 귀니나 제키 외크텐 같은 좌파감독들이 이끄는 ‘대안적인’, 더 예술적인 경향의 영화가 등장하기 시작하여 진지하게 지방과 노동자들의 생활을 비추었다. 서구 영화제는 이들 영화를 너무나 좋아했다. 거칠고 투박한 아름다움을 지닌 풍광 속에 ‘이국적인’ 농촌생활을 보여주면서도 서양 예술영화의 공식에 충실했고, (한층 더해서) 터키 정부의 탄압을 받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같은 시기 중국에서도 유사한 영화를 몇편 만들어내고 있었다). 말하자면 아시아 예술영화가 서양에 도착한 것이었고, 용감한 작가들은 자유를 사랑하는 서구 세계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같은 시기 터키 상업영화 산업은 비디오 출현에 심각한 타격을 받았고 그뒤로 회복되지 못했다. 현재 제작편수는 연간 8∼15편밖에 안 되고 그 가운데 소수의 작품이 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곤 한다. 올해는 이름있는 두명의 감독인 예심 우스타올루와 제키 데미르퀴뷔즈가 신작을 들고 나타났다. <구름을 기다리며>(Waiting for the Clouds)(사진)와 <대기실>(The Waiting Room)이었는데, 두 작품 모두 준수한 정도에 그쳤고 활기와 참신함이 떨어졌다. 대신 가장 놀라운 사건은 49살 무명감독의 처녀작이었다. 이 감독은 이스탄불에서 동남쪽으로 200km 떨어진 마을에서 태어나 여전히 그곳에 살고 있다. 아흐멧 울루자이(Ahmet Ulucay)의 <수박껍질로 만든 배>(Boats out of Watermelon Rinds)는 60년대 중반 시골 소도시의, 영화와 여자들에 미친 두 소년에 대한 반자전적인 영화이다. (불행히도) 비디오로 찍어 필름으로 옮겨진 이 영화는 모든 출연진의 연기가 고르고 편집이 매끄러워 크나큰 매력을 발산한다. 또 이 영화는 외국인들의 ‘이국취향’에 영합하지 않고 당시의 실제 농촌생활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점에서는 자의식 강한 80년대 예술영화보다는 60년대, 70년대 정통 터키 상업영화에 더 가깝다. 이 작품은 이스탄불영화제 국내 경쟁부문에서 최우수상을 탔다.3년 전, <비죈텔레>(Vizontele)라는 인물 중심 코미디가 70년대 중반 어느 마을에 텔레비전(‘비전텔레’)이 들어오면서 생기는 변화를 그리면서 350만명이라는 믿기 어려운 숫자의 관객을 끌어모았다. 이에 못지않게 재미있는 속편 <비죈텔레 투우바>(Vizontele Tuuba)는 지난해 200만명 이상 보았다. 그리고 최근에는 <학교>(School)가 개봉해서 젊은 터키 관객층을 대상으로 하는 터키 최초의 학원공포물이 되었다. 터키만의 방식대로 터키만의 관객을 재발견하면서, 터키 영화계는 뭔가 확연히 꿈틀거리고 있다. 그리고 그런 발전에 동참하고 놀라워하는 일은 정말 즐겁다. The pleasure of discovery is what makes going to film festivals still worthwhile. For me, it happened again recently - in Istanbul, one of the world's most ancient, stunning cities that geographically and culturally has always straddled Europe and Asia. When the Intl. Istanbul Film Festival was founded 23 years ago, Turkey still had a large commercial film industry and the country was run by a military-supervised government. Annual production, eaten away by TV during the '70s, was down to less than 200 features a year. But there were the beginnings of a "alternative," more artistic cinema, led by leftist directors like Yilmaz Guney and Zeki Okten, that focused on rural and working-class life in a serious way. Western festivals loved these movies: they showed "exotic" peasant life in ruggedly beautiful landscapes, obeyed western rules of art cinema, and (even better) were often banned by the Turkish government. (At the same time, China was also making a small number of similar films.) Asian art cinema had "arrived," and its brave filmmakers could be championed by the freedom-loving West. At the same time, Turkey's commercial film industry was being clobbered by the arrival of video, and never really recovered: production is now between 8-15 features a year, a small number of which show at international festivals. This year, two name directors, Yesim Ustaoglu and Zeki Demirkubuz, had new films - "Waiting for the Clouds" and "The Waiting Room." But both proved to be only respectable, lacking vigor and freshness. Instead, the big surprise was a first feature by an unknown, 49-year-old filmmaker who still lives in the village he was born in, 200 kilometres southeast of Istanbul. "Boats out of Watermelon Rinds," by Ahmet Ulucay, is a semi-autobiographical movie about two boys, obsessed with film and girls, in a country town during the mid-'60s. Shot (unfortunately) on video, but transferred to film, it's beautifully played by the whole cast, smoothly edited and has buckets of charm. It's also based in real rural life of the period without pandering to foreign tastes for "exoticism." In this respect it's closer to oldstyle Turkish commercial cinema of the '60s and '70s than the self-consciously arty movies of the '80s. The film deservedly won Best Film in the Istanbul festival's national competition. Three years ago, "Vizontele," a character comedy about the impact of TV ("vision-telly") on a village in the mid-'70s, drew an incredible 3.5 million admissions; the sequel, the equally enjoyable "Vizontele Tuuba," drew more than 2 million admissions last year. And recently released was "School," the country's first college-slasher movie, specifically tailored to young, local viewers. Something is definitely stirring in Turkish cinema as it rediscovers its own audience on its own terms. And it's a pleasure to share in, and be surprised by, such a development.

<하류인생> 혹은 임권택 [4]

정성일 | 영화를 찍는다는 문제만 갖고 얘길 하면, 이제 대부분의 한국 감독들에게 60년대는 사회적 공간이거나 상상적 공간이지, 경험한 공간은 아닙니다. 감독님이 1960년대를 다룰 수 있는 마지막 세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류인생>을 보러오는 관객은 텔레비전이나 자료로만 알고 있을 텐데, 감독님께서 이 젊은 세대를 설득하기 위해 배려한 부분들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임권택 | 이런 생각을 해요. 그 시대를 총체적으로 정리하는 것은 책으로도 충분한 거예요. 60년대라는 시대를 찍을 때, 고증하는 것이 중요한 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고. 단지, 건달이든 누구든 실제의 삶을 영화 안에 드러내야 하기 때문에 리얼리티가 필요해진 거예요. 기왕이면 우리가 체험했던 실상, 그때의 생생한 모습을 충실히 함으로써 영화를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들지 않겠는가 한 것이죠. 정성일 | 제가 <하류인생>에서 매우 신기하게 생각했던 점 중 하나는 <족보> 이후에, <태백산맥>을 예외로 치면, <하류인생>이 유일하게 플래시백을 쓰지 않은 영화라는 점입니다. 플래시백은 감독님의 스타일이자 인장 같은 것이었는데, 이 영화는 시작하면 한눈팔지 않고 일직선으로 곧장 나아갑니다. 감독님 영화의 어떤 변화를 예고하게 되는 것인지요? 임권택 | 진작에도 내 영화에 대해서 그런 지적들이 있었지만, 나는 지금까지 인위적이고 드라마틱한 운행에 대해 멀어지고자 노력을 해왔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번에야말로 그 시대의 삶의 편편을 꾸밈없이 찍어내는 과정에서 쌓여가는 그런 덕목을 갖춘 영화를 해보고 싶었단 말이죠. 어떻게 그 강렬한 드라마 같은 추진력을 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에 나는 주력했던 거요. 도리없이 덤덤할 수밖에 없는 일상에 어떻게 힘을 실어서 추진력을 줄 것인가, 그런 데에 가장 힘을 들인 작품인 거요. 정성일 | 그렇다면, <취화선> <서편제> 같은 구조, 그러한 과거와 현재의 복잡한 시제에 대해서 감독님께서 싫증을 느끼신 것은 아닌지요. 임권택 | 내가 플래시백을 이용할 때는 속도를 주기 위해서라고. 순서대로 가다보면 설명해야 할 것이 많아지고 영화도 길어지고, 영화 운행하는 속도가 느려지기 때문에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플래시백을 썼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것도 한두번이에요. <취화선> <서편제>가 다 그런 형식 아니에요. 물론 그걸 임권택표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또다시 그런 방식으로 해나간다면… 그게 무어 좋은 것이라고 만날 붙들고 늘어질 필요가 없잖아요. 아마도 기왕의 내 영화들과는 <하류인생>이 상당히 느낌이 다르게 보이지 않았을까 생각을 하고 있어요. 정성일 |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감독님 영화에 적응됐다고 생각하면 또 다시 낯설어지는군요. 임권택 | 아니, 난 또 그러기 위해서 죽을 지경이라고. (웃음) 정성일 | 이 영화의 시작을 1957년으로 잡으셨는데, 휴전이 지난 지 채 4년밖에 안 된 지점에서 시작하는 영화거든요.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한국전쟁에 대한 상처 같은 것을 완전히 배제한 뒤에 시작한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그리고 1972년에 영화를 끝내는데, 그러니까 역사의 연속성 속에서 시간들이 있기보다는, 감독님의 큰 시간 속에서 이 시간을 잘라내서 찍었다는 느낌도 있거든요. 임권택 | 명동이라는 거리가 전쟁 바로 그때에는 영화 속에 드러난 그런 거리가 아니었어요. 전쟁의 상흔이 처참하리만큼 드러나 있던 때란 말이에요. 내가 전쟁의 상흔, 그런 쪽에 관심을 가졌더라면 명동거리 세트가 지금처럼 지어져서는 안 되지. 폭격의 흔적이라도 드러나야 마땅하지. 그러나 그런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다루고는 있지만, 주제는 한 인간의 몰락을 추적해가는 영화란 말이에요. 전쟁이 남긴 그 흔적들까지 힘을 들여서 표현할 필요가 없는 영화예요, 이 영화는. 난 그렇게 판단을 했다고. 정성일 | 1957년을 시작 기점으로 잡으셨을 때 이 영화는 어떤 장점이 생기는 건가요? 임권택 | 1957년이 중요한 게 아니고, 유신을 어떤 나이에 맞느냐, 태웅이 어떤 사업을 할 때 맞느냐, 권력과 어떻게 유착되어 있는 시점일 것이냐가 중요한 것이었지. 거기서 필요한 것은 아직은 정신적인 맑음이 살아 있는 시점이요. 이 영화는 사람이 점점 탁해져가는 거니까. 정성일 | <하류인생>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감독님 영화 중에서 신이 가장 많은 영화가 되지 않을까 하는 점입니다. 임권택 | 어, 나도 신 넘버를 보고 놀랐다니까. 정성일 | 예, 186신에까지 이르고, 대부분의 숏이 대단히 짧습니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정말 빠른 영화라는 걸 알 수 있는데, 예전 영화들에 비하면 구조들도 굉장히 심플하게 가져간 영화입니다. 가령, <취화선>이 몽타주와 미장센을 혼융한 방식의 영화라면, <하류인생>은 몽타주만으로 만든 영화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특히 상필이 미도극장 앞에서 〈007 위기일발>을 보고 나오다가 총맞는 장면에서 총쏘는 인서트 컷을 넣은 걸 보고, 이제 감독님이 이쪽으로 완전히 옮겨오셨구나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몽타주 영화로 완전히 옮겨오게 된 확신 같은 것이 있으십니까? 임권택 | 어쨌거나 이게 폭력적인 영화 아니요, 삶 자체가 폭력적이라고, 암투고. 처음부터 폭력을 다뤄요, 이 영화는. 그런 일관성이 필요한 거예요. <취화선>의 인물들처럼 그림이 주는 감흥이나, 아름다움을 여유롭게 느껴갈 만한 삶들이 아니란 말이에요. <취화선>은 미술을 하고, 미적인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지만, 이 영화 인물들은 그림 감상하는 법이 없잖아요. 그런 사람들에 대한 얘기를 하니까 그럴 수밖에. 이건 속도가 필요한 영화인 거예요. 정성일 | 저는 이 영화를 기점으로 감독님이 몽타주 영화로 넘어오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거든요. 임권택 | 그거는 또 해봐야 할 텐데, 전 작품들의 유장함과는 내가 벌써 이별을 하고 있는 것 같애. 유장함이라도 전의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단 말이에요. 정성일 | 그럼, 작품이 요구한다면 미장센 중심의 영화로 다시 돌아올수도 있겠네요. 임권택 | 그럼요, 그럴 수도 있죠. 정성일 | 저는 신중현씨의 곡 <님은 먼 곳에>가 쓰이는 대목들이 매우 인상적이었는데, 첫 번째는 태웅이 혜옥에게 카페에서 반지를 건네주는 장면에서였습니다. 음악이 쓰이는 방법이 매우 특별하구나 생각했습니다. 단지 카페 안에서의 배경음악일 뿐만 아니라 바깥의 싸움에 뛰어들 때도 여전히 음악이 흐르고, 그걸 내려다보는 혜옥의 얼굴에까지 그 음악이 뒤쫓아가서 붙을 때, 이 노래는 태웅의 노래가 아니라 사실은 혜옥의 노래구나 생각했습니다. 가사를 생각해보면 태웅이라는 사람이 참 먼 곳에 있구나 하고 느끼도록 가사를 맞췄다는 느낌도 있거든요. 임권택 | 그러니까 그 노래는 사실과는 무관하게 두고 있어요. 물론 설정상으로는 태웅이가 미리 틀어달라고 카페에 부탁을 해놨겠죠. 하지만 바깥에 싸움하는 데까지 그렇게 들릴 수가 없잖아요. 그러나 그 노래를 앞세우면서 태웅과 혜옥의 사랑 감정을 조금 강제로 만들어가는 수단으로서 사용한 거요. 상식적으로 보면 둘이 부부가 될 수가 없잖아요. 사회적 여건 같은 걸 봐도 그렇고. 그 곡의 가사가 갖고 있는 점이 맞아떨어지고 있다고. 신분이나 여건상 아픔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사이라는 것이 가사로 드러나고 있는데, 나는 그걸 오히려 거꾸로 이용하고 있는 거요. 사랑의 감정을 북돋우는 데에. 정성일 | 하지만, 두 번째 <님은 먼 곳에>가 사용된 부분은 좀 낯선 것 같던데요. 임권택 | 아니 그건 낯선 게 아니고, 무리수를 둔 거예요. 사실 그렇게 쓰면 안 되는 거요. 영화라는 게 참 우습다고. 예고편에서 그 음악을 썼다고. 그리고 예고편이 떴고. 이건 완전히 작전상 쓴 거예요, 작전상. 그러는 수가 있어요, 영화를 하다보면. 정성일 | 세 번째 <님은 먼 곳에>가 쓰인 부분은 태웅이 정보부 부장 뒤치다꺼리를 해주려다 머리가 깨지고 난 뒤에 아이들과 남아 있을 때 흐르는데요, 여기서도 음악을 붙여 쓴 이유가 있으실 것 같은데요. 임권택 | 태웅이는 외도를 하고도 아내가 가출했다고 오히려 화내는 놈 아니요. 하지만, 그런 외도가 두 사람 사이를 망칠 만큼은 아닌 거 아니요. 그거를 어디서부터 다시 봐야 하냐 하면, 애낳는 장면 있죠. 그걸 필요 이상으로 길게 찍었다고. 부부로서 깊은 가정 안에서의 신뢰나 믿음을 거기서부터 출발시키고 있단 말이에요. 자기 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존재를 사랑하는 마음을 환기시키기 위해서는 그 음악밖에 더 있겠어요. 정성일 | 태웅과 혜옥이 같이 나오는 장면에서 의외로 태웅의 등을 잡아서 혜옥의 얼굴을 긴 시간 동안 보여주는 숏들이 있었습니다. 이 순간에는 태웅이 아니라 혜옥의 얼굴을 보라, 라는 의미인 것 같은데요. 그때 태웅의 얼굴보다 혜옥의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신 것 같습니다. 임권택 | 당연히 중요한 게, 혜옥이는 태웅이에게 누나이자 어머니인 대단히 중요한 존재라고. 그런데 혜옥이 등장하는 장면이 영화 속에는 많지 않다고. 태웅은 1시간40여분 동안 계속 나오는데, 그런 데서까지 보여줄 필요는 없는 거요.

칸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 박찬욱이 박찬욱을 말하다

<공동경비구역 JSA>의 한국영화 흥행기록 경신, <복수는 나의 것>의 비평적 찬사, 상업영화의 룰을 깬 <올드 보이>의 흥행성공과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수상. 대중에게 알려져 있는 박찬욱(41)은 그야말로 ‘흥행과 명예’를 한 손에 거머쥔 ‘희귀한’ 감독이다.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거장의 탄생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천운을 타고난 사람도 아니고, 거장이라고 이름붙이기에는 아직 나이는 젊고 할 일은 많은 감독이다. 칸영화제에서 싸들고 온 박수와 찬사의 짐을 미처 풀기도 전에 그는 최근 촬영을 끝낸 옴니버스 영화 <쓰리, 몬스터>의 후반작업을 시작했고, 칸에서도 바쁜 일정 가운데 짬짬이 쓰다가 돌아온 <친절한 금자씨>(가제)의 시나리오 작업을 마무리할 예정이다. <친절한 금자씨>는 <올드보이> 국내 시사회 당시 “또 복수냐”는 기자들의 반복되는 질문에 홧김에 “복수 3부작을 만들겠다”고 호언하면서 정말로 3부작이 돼 버린 복수시리즈의 마지막편이다. 복수극보다는 속죄의 드라마가 강조될 이 영화의 주인공은 이영애. 칸에서 돌아온 직후인 26일 캐스팅이 확정됐다. 주인공이 정해진 마당에 그의 발걸음은 더욱 빨라져야 한다. 또한 칸에서부터 이어지고 있는 할리우드로부터의 러브콜은 그가 고민해야 하는 여러가지 과제 중의 하나로 덧붙여졌다. 이 모든 찬사와 분주함은 어느날 갑자기 그에게 찾아온 것이 아니다. ‘이상한 상업영화’ <올드보이>가 어느날 갑자기 만들어지지 않은 것처럼. 그가 오늘, 한국영화의 가장 예외적인 자리에 앉게 되기까지의 시간, 인간 박찬욱과 감독 박찬욱이 걸어온 길을 그의 목소리를 통해 들어본다. 미술사학자를 꿈꾸던 착실한 모범생, 영화를 만나다. 좋은 예술가들은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이 많다는 데 난 그런 게 없어요. 작품에 서정성이 부족한 이유가 그래서인가(웃음) 특별하지는 않았지만 비교적 문화적인 환경에서 자란 편이었죠. 부모 양가가 5대째 서울에서 산 서울 토박이였고.(박 감독의 아버지는 건축과 교수였던 박돈서 전 아주대 공대 학장이며, 큰 아버지는 박승서 전 대한변협 회장이다.) 아버지를 따라 어릴 때 전시회를 많이 다녔던 기억이 나요. 친가가 미술에 소질이 있었던 것같은데 그 재능은 동생(박찬경씨는 화가 겸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이 더 이어받았고. 10대땐 영화보다 미술에 빠져 친구따라 극장 순례 공부 접어 그에 비하면 영화는 별로 많이 보러 다니지 않았어요. 텔레비전 주말의 명화를 자주 봤고 극장에서 봤던 영화는 007시리즈가 생각나네요. 그걸 보고 초등학생때 콘티 북처럼 스토리를 만들어서 공상하고 그랬어요. 반면 무협영화는 거의 안 봤어요. 장철이 누군지도 몰랐고, 이소룡 영화도 <용쟁호투>만 봤으니까. 그땐 미술에 더 관심이 많았어요. 엘 그레코나 카라바치오, 고야, 주세페 디 리베라 같은 화가들의 그림에 푹 빠졌죠. 고문받는 사람들이라든나 화살에 온몸이 수십바늘 찔리는 순교화라든가, 그로테스크하고 드라마틱한 면에 매료됐던 것같아요. 그 영향은 지금 내 영화와 연결되는 지점이 분명 있지요. 그런데 실기에는 재능이 빼어나질 않아서 미술사학자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철학과를 선택했어요. 성적이요 의사가 되라는 어머니의 권유로 이과에 갔다가 도저히 적성에 안맞아서 고3때 문과로 옮겼어요. 착실한 모범생이 그때부터 엇나가기 시작한 건데(웃음), 제일 친했던 친구가 영화를 좋아해서 그 친구의 인도 아래 의정부까지 영화보러 다니느라 공부는 아예 접었죠. 그때부터 영화광이 됐지만 영화과 진학을 하지 않은 이유는 엄두가 안나더라고요. 영화는 터프가이들만 하는 건 줄 알았죠. (웃음) 대학시절 <현기증>과 데모대 사이에서 현기증을 느끼다 고등학교가 악몽같아서 대학진학은 해방 그 자체였지요. 머리도 기르고 옷도 별나게 입고 다녔어요. 검은 터틀넥 스웨터에 두꺼운 은목걸이하고, 오스카 와일드 책 들고 다니고. 그런데 학생 운동이 치열하던 그때 한 학기 다녀보니까 분위기가 이게 아닌 거에요. 그때부터는 교련복만 입고 다녔어요. (웃음) 그래도 운동하던 선배들에게 이미 찍혀서 나를 제껴놓더라구요. 그때가 가장 충격이 컸어요. 친했던 친구들은 모두 운동하는 서클에 들어갔고, 자기들끼리 쑥덕거리기다가 내가 가면 다른 이야를 하고. 같이 해보자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어요. 진짜 고독했죠. 서강대 도서관에 영화원서가 많은 편이었는데 책을 빌리면 도서카드에 언제나 몇명의 이름이 반복해 등장했죠. 문과대 바닥이 좁으니까 금방 사귀게 됐고, 이 친구들 통해서 정성일, 강한섭, 전양준, 김소영 같은 선배들을 알게 됐어요. 그러면서 학교에 영화동아리를 만드는데 참여했어요. 원서강독하고 문화원 다니면서 정성일, 전양준 선배의 구라에 많이 놀아나고(웃음), 유학가 있는 김홍준이라는 천재가 한국영화를 구원할 것이다라는 이야기도 듣고. 그때 쯤 <영화언어>라는 비평지가 창간됐는데 가서 잔심부름도 하고 그랬죠. 감독이 되기로 결심을 한 것도 그때였어요. 한 신부 교수님이 영화를 좋아해서 소장비디오로 정기 상영회를 열었는데 그때 히치콕의 <현기증>을 보면서 완전히 마음을 빼앗겼어요.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인을 쫓는 미행장면이나 여자가 미술관에 가서 죽은 여인의 초상화를 보는 장면에 넋이 나갔죠. 또 그 영화를 보고 나서 라면을 먹으러 갔는데 거기서 우연히 같은 영화를 본 지금의 아내(김은희), 그때는 이대생이었는데, 를 친구한테 소개받은 거예요. <현기증>은 여러모로 제 인생의 영화가 된 셈이지요. 그런데 그때는 조직에 몸담고 있지 않았어도 모두가 돌을 던지던 시기라 저 역시 맨날 그러고 살았어요. 이쪽 가서는 최루탄에 도망다니고, 저쪽 가서는 히치콕에 열광하는 게 혼란스러웠죠. 저예산 B급에 열광 또 쓴잔, 시나리오 들고 영화사 전전 데뷔에서 <공동경비구역 JSA>까지 졸업하자마자 선배들한테 부탁해서 이장호 감독의 제작사(판 영화사) 연출부 막내로 들어갔어요. 유영진 감독의 <깜동>이라는 영화였는데 세컨드가 곽재용 감독, 막내가 저였죠. 그 연으로 곽 감독의 데뷔작 <비오는 날의 수채화>의 조감독을 했죠. 그런데 독립영화처럼 찍던 <비오는…>의 현장이 너무 힘들어서 촬영이 끝날 때쯤에 제가 뛰쳐나왔어요. 그때 영화를 때려치우려고 했는데 생각해놓은 스토리가 있어서 각본이라도 써보고 그만 둬야겠다 싶더라구요. 노조파괴전문가인 제임스 리를 모델로 쓴 하드보일드 미스테리였는데 다 쓰고 보니까 마음에 드는 거예요. ‘이런 재능을 썩히면 한국영화에 큰 손실이다’라고 혼자 생각하고는(웃음) 어떻게든 다시 해보자고 마음을 먹었죠. 그리곤 구멍가게만한 영화수입사에 취직을 했어요. 돈 모으면 영화 찍게 해준다는 말에 혹했죠. 외화 고르고, 자막번역하고, 보도자료 쓰고 온갖 잡일 다 했죠. 심지어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빈센트>가 길어서 극장에서 잘라달고 했을 땐 그 영화 편집까지 했어요. 누군가 저질러야 할 범죄라면 업자보다는 그래도 내가 하는 게 낳을 것같다고 생각한 거죠. 돈이 좀 모이니까 대표가 약속을 지켜줘서 첫 영화 <달은 해가 꾸는 꿈>을 찍게 됐죠. 조건은 유덕화의 <천장지구> 냄새가 나는 통속적인 멜로드라마를 만들어 달라는 거였고. 그때 이미 저예산 B무비에 열광했기 때문에 그런 조건을 거절하는 건 상업영화 감독이 아니라고 생각했죠. 어떤 악조건에서도 창조성은 발휘될 수 있다…. 그런데 최재성으로 내정했던 남자주인공이 갑자기 이승철로 바뀌면서 갈등이 생겼죠. 결과적으로 이승철은 힘닿는 한에서 프로답게 했고, 다들 열심히 했어요. 이승철이 방송출연이 금지됐던 때라 팬들이 극장으로 몰려올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첫회는 그랬어요. 첫회만(웃음). 스탭들끼리 우리가 해냈다고 감격했는데 2회부터 텅텅 비었어요. 서른에 데뷔했다 싶어 좋아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죠. 다음 영화 <삼인조> 찍을 때까지는 계속 글쓰면서 보낸 시간이었어요. 그 적은 원고료와 아내의 지독한 알뜰함으로 근근히 살았지요. 그 사이에 엎어진 시나리오는 셀 수도 없어요. 제작이 확정된 다음에 파놓았던 명함만 열개가 넘었으니까. 95년쯤인가 안동규(영화세상 대표)형이 프랑스에서 <레옹>을 보고 와서는 그 영화처럼 폭력적인 총싸움 영화를 만들자고 하더군요. 나야 안봤으니까 상상도 안되고, 마침 그 전에 해보고 싶었던 기획이 이종대, 문도석의 칼빈총 강도사건이어서 그걸 모티브로 <삼인조>를 준비하게 됐죠. 처음 시나리오는 완전히 달랐어요. 거칠고 난폭하게 가려고 했죠. 직전에 봤던 아벨 페라라 같은 감독의 영향도 있었고. 그런데 중간에 제작사가 바뀌고 시간을 끌면서 영화가 변질돼 주류영화에 가까워져 버린거지요. 제작자 탓이라기보다는 제가 잘 못한 거죠.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첫 영화보다 <삼인조>가 훨씬 후회되고 더 한심하게 느껴져요. 결국 두번째 영화도 흥행, 비평 모두 실패했죠. 보통같으면 그게 유작이 됐을 거에요. 복수 완결편 주연은 이영애, 편집권 배제 할리우드행 갈등 또다시 시나리오 몇개씩 가방에 넣어서 제작자들 찾아다니는 보따리 장사 생활을 시작했어요. 그때 명필름 심재명 대표한테 설명했던 아이템중에 <복수는 나의 것>도 있었는데 거절당했고. 그런데 심 대표가 <삼인조>를 잘봤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소설 의 감독을 제안해왔고 소재나 미스테리 플롯이 괜찮아 보여서 덥석 한다고 덤빈 거죠. 안한다면 또 어떡하겠어요(웃음). <공동경비구역 JSA> 이후의 이야기는 많이 알려진 거고. 독특한 상업영화를 만들고 싶다. 전에는 내가 상업영화감독이라고 말할 때 입장료 받고 내 영화 보여주는 감독이라고 생각했는데 갈수록 의미가 좁아지는 것같아요. 좀더 적극적으로 관객들이 즐거워하는 영화를 만들자는 건데 가장 큰 이유는 배우와 스탭들이예요. 칭찬받고 상받는 것도 좋지만 흥행보다 이 친구들에게 용기와 자신감을 주는 건 없거든요.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맥빠져하는 건 정말 괴로운 일이죠. 다만 상업영화이되, 독특한 상업영화를 하자는 생각이예요. 흥행도 독특해야 잘되잖아요. 또 관습에만 매달리면 만드는 일도 지루해지니까. 할리우드 진출이 망설여지는 이유도 그 때문이예요. 칸에서 할리우드 관계자들이 감독 제안을 해오면서 하는 말이 최종 편집권을 보장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갈등하고 있죠. 만약 한다면 웨스턴이나 에스에프를 찍어보고 싶고, 그쪽에 그런 말도 했어요. 한국에서 찍을 수 있는 영화를 굳이 할리우드까지 가서 할 이유는 없잖아요. 박찬욱은... 1963년 8월23일 서울출생 건국대부속중학교, 영동고등학교 1987년 서강대 철학과 졸업(82학번) 작품 <달은 해가 꾸는 꿈>(1992) <삼인조>(1997) <공동경비구역 JSA>(2000) <복수는 나의 것>(2001) <여섯개의 시선-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2003) <올드 보이>(2003)

영상자료원 5월3일부터 서비스, 비싼 열람료에 이용자들 불만 토로

한국영상자료원(이사장 이효인, 이하 영상자료원)의 고전영화 DVD와 VHS 열람료가 지나치게 비싸 이용자들에게 불만을 사고 있다. 영상자료원은 지난해 김기영 감독의 <하녀>(사진)(1960), 신상옥 감독의 <연산군>(1961) 등 영화제가 아니면 쉽게 만날 수 없는 1950, 60년대 한국영화 52편을 선정해 DVD와 VHS로 제작했고, 올해 5월3일부터서 일반인들에게 열람을 허용해 주목받았으나, 열람료가 편당 5천원이나 돼 이용자들이 열람을 꺼리고 있는 실정이다. 참고로 영상자료원이 주최하는 상영회의 관람료가 2천원이고, 일반 비디오 자료의 열람료가 500원이다. 이에 비하면 열람료가 지나치게 높은 것이 사실. 영화과에 재학 중인 한 학생은 “저변을 넓히고 공공성을 강화해야 할 영상자료원에서 극장 관람료에 버금가는 가격으로 비디오물의 관람료를 책정한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영상자료원쪽은 제작에 들어간 비용을 고려한 가격이라고 항변한다. 영상자료원 보존2팀의 이선희 팀장은 “텔레시네까지 포함해서 1편의 영화를 DVD로 제작하려면 150만원이 들어간다”며 “편당 300회 열람한다는 가정 아래 가격을 5천원으로 책정했다”고 해명했다. 열람료를 낮추기 위해선 상식적으론 해당 DVD와 VHS를 복사해 영화진흥위원회 및 대학 도서관 등에 배포, 열람케 하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이 팀장은 이마저도 “영상자료원이 법적으로 도서관에 속해서 수익사업을 할 수 없으므로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시장에 정식 출시하는 건 저작권 문제를 해결하기가 어려운데다 소비자들의 호응이 낮아 더욱 요원한 방법. 영상자료원은 앞으로 주무부처인 문화관광부로부터 지원을 받아 연간 100편씩 고전영화를 DVD로 제작할 계획이며, 라이브러리가 풍부해지면 열람 횟수도 늘어나고 따라서 열람료 또한 낮아질 것이라고 하지만 지금 이용자들에겐 먼 미래에 대한 이야기처럼 들리는 것이 사실이다.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한 지점이다.

[파리] 독립다큐멘터리의 활로는 어디에?

파리 생미셸의 한 작은 극장에서는 두달 전부터 <국경의 작가들>(Ecrivains des frontieres)이라는 영화가 상영 중이다. 매일 저녁 7시 상영이 끝나고 나면 관객은 이 영화를 만든 사미르 압달라와 호세 레이네스와 함께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우리가 만든 영화가 좋았다면, 그것에 생명을 불어넣어주기 위해 이 포스터를 여러분들이 가는 곳에 붙여주세요.” 영화관람 뒤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가는 관객에게 압달라와 레이네스는 절실한 부탁의 말을 전한다. 텔레비전 채널이나 영화시장의 개입없이 만들어진 독립다큐멘터리로서 <국경의 작가들>은 파리 시내 단 하나의 극장에서 개봉한 뒤 한달 만에 4천명의 관객 수를 기록한다. 이러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일반 극장이나 멀티플렉스에서는 상영되기가 어려운 형편이다. 한편의 영화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단지 만들어지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관객을 만나지 못한 영화는 완전한 것이 되지 못한다. 비디오로 촬영된 독립다큐멘터리와 극영화들, 규격화의 범주를 벗어난 내용과 형식을 지닌 영화들은 기존의 상영 및 배급 시스템 아래에서는 관객과의 만남의 기회를 가지기가 쉽지 않다. 예컨대, 35mm 필름의 포맷이 규격처럼 되어 있는 대다수 일반 극장들의 상영 시스템에 들어가기 위해서 비디오나 디지털로 제작된 영화들은 키네스코파주(kinescopage: 비디오 밴드를 영화필름 위로 옮기는 과정)를 거쳐야 하며, 이 과정에 들어가는 비용이 전체 제작비용을 초과하는 경우도 있을 만큼 비용문제는 만만치 않은 과제이다. 설사 이러한 과정을 거친다 하더라도 영화의 내용이나 길이 또는 형식이 규격을 벗어난다면 여전히 그 영화는 관객을 만나기가 어렵다. DV카메라와 디지털 매체의 대중화에 따라 소규모의 독립적 영화제작의 가능성은 급속히 늘어났고 독립적 제작 여건을 지닌 많은 시네아스트들이 다양한 대안적 작업들을 하고 있지만, 이러한 영화들이 세상의 빛을 보기 위해서는 상영을 포함한 배급 시스템의 개혁이 필요하다. 현재 프랑스 내에서는 영화제(특히 리옹 뉴제네레이션영화제), 유토피아(Utopia)와 MK2의 독립영화 전용관, 다큐멘터리스트협회(Addoc) 등 여러 기관들이 규격을 벗어난 다양한 형식과 내용의 영화들을 위한 상영 및 배급 시스템(비디오 및 디지털 프로젝션)을 마련하기 위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칸의 거리에서 만난 <올드보이>의 최민식

<올드보이>가 레드 카펫을 밟기 하루 전인 5월14일 밤 10시, 배우 최민식을 만났다. 일부러 늦은 밤을 택한 건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한낮의 크로와제트 거리는 인파로 미어터진다. 그렇다고 그를 반라가 즐비한 해변가에 세워놓는 건 예의가 아니다. 둘째, 그가 어둠이 내린 칸의 거리에 서 있기만 해도 그림이 될 것 같았다. 배우 최민식은 새 작품에 들어가면 언론과의 접촉을 완전히 끊다시피한다.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었던 그를 지면으로 초대해준 건 뜻밖에도 칸이었다. 그는 기꺼이 <씨네21>과 함께 칸의 뒷골목을 누비고 다녔다. 이야기는 가볍게 시작됐으나 ‘배우는 죽는 순간 창작의 작업이 끝난다’는 말을 나누기에 이르렀다. 2년 만에 칸에 오니까 어떤가. 솔직히 별 감응이 없다. 한번 겪어봐서 그런가. 기분 좋은 건 정말 뜻밖의 경사라서. 난 비경쟁으로 확정됐다고 들었었다. 영화의 특색이나 모양새에서 순수히 영화적 의미로만 어필했구나, 소통이 됐구나 하는 의미에서 기쁘다. <올드보이>가 장르영화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다. 칸도 변화를 모색한다고 들었다. 지난해 라인업이 아주 안 좋았다고 하던데. 현재 세계의 주류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영화들 중심으로 기획하지 않았나 싶은데, 그런 점에서 <올드보이>를 택한 게 아닐까 싶다. 한국 현역 감독 중에서 가장 스타일리시하고 자유분방한 감독을 말이다. 배우로서 영화제에 가는 게 어떤 기분일까. 아무래도 감독 중심의 영화제인데. 칸! 칸! 영화제 명성이 대단하다. 뭔가 수상하면 굉장한 명예이기도 하고. 이런 현실적인 면이 있지만 그것보다는 이제 우리 이야기가 세계의 사람들과 소통하는구나, 그런 소통의 장에 당당히 참석한다는 데 의미를 둔다. 영화에 대해 설명하기보다는 영화를 보고 어떻게 느꼈는지 들으러 왔다. 촬영 중인 <꽃피는 봄이 오면>의 현우 캐릭터에 몰입해야 하는데 <올드보이>의 ‘오대수’를 다시 기억해야 하는 게 혹시 방해가 되지 않을까. 그렇지는 않다. 그러면 너무 피곤하게 작업하게 되는 거고. <꽃피는…>은 50% 정도 찍었다. 몰입보다는 오랜만에 친구들하고 막걸리 한잔 하는 기분으로 편하게 찍고 있어서 괜찮다. 이상하게도 <파이란> <올드보이> <꽃피는…>의 주인공은 깊은 나락으로 추락한 상태에서 로맨스를 시작한다. <꽃피는…>은 나락까지는 아닌데. 그럼 패배감? <꽃피는…>의 현우는 일상적인 피로에 지쳐 있다. 잘 나가는 뮤지션은 아니지만 아주 불행한 건 아니고, 전형적인 비극을 안고 있는 캐릭터도 아니다. 누가 봐도 그 정도의 피로감을 안고 사는 인물이다.?? 얘기를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네.?? 이번에는 해피엔딩인가. 글쎄, <올드보이>나 <파이란>에선 목졸려 죽거나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갖고 살아가야 했지만, 여기선 뭔가 다시 시작한다. 완전히 정리되고 회복되기보다 나름대로 해법을 찾아서. 우리 인생사가 그렇지 않나. 무 자르듯 여기까지 고생했고 이제부터 행복 시작, 그런 게 아니라 여기저기 찢어지고 흠집나고 긁히는 상황에서 뭔가 재정비해서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영화가 그래선지 얼굴에서 여유와 편안함이 느껴진다. 아무래도 배우는 배역에 따라서 삶의 모양새가 조금씩 달라진다. 그러면 개인 최민식의 피로감은. 70, 80은 늘 안고 살아가는 것 같다. 떨어지거나 올라가는 것 없이. 사는 것 자체가 피곤하니까. <올드보이> 이후 <꽃피는…>의 선택이 의외의 선택이라는 반응이 많지 않았나. 많이 들었다. 그렇지만 중요한 건 나의 선택이지. 그 전에는 자극적이고 센 영화들이었다. <파이란>도 사실은 세거든, 서정성을 많이 담았지만 감정의 진폭이 큰. <올드보이>는 말할 것도 없고. 육체적으로 쉰다기보다 정신적으로 해방되고 싶은, 그러니까 다른 음식을 맛보고 싶은, 청양고추에 고추장에 비벼먹다 속도 좀 쓰리고 그러니까 이번에는 부드러운 죽으로 좀 달래고 싶었다. 한겨울에 바깥에서 오들오들 떨다가 방에 들어와 아랫목에 손 넣으면 훈훈해져서 옷도 안 벗고 잠들어버리는 느낌의 시나리오였다. 항상 그랬듯이 흥행여부와 상관없이 시나리오가 준 서정성이나 일상사들이 굉장히 설득력 있게 와닿았다. 그런 말랑말랑한 세상에 스스로를 달래고 추스려야 하지 않나 하는. (웃음) 다음번 음식은 뭐가 될까. 그건 아직 알 수 없지. 수상 여부에 대한 생각은. 칸영화제라는 고유명사가 개개인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는 천차만별이다. 상 못 받아 안달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주 담담한 이들도 있고. 만에 하나 <올드보이>로 누군가 상을 탄다면 축하받을 만한 일이고 팀으로서 영광된 일이나 운동선수처럼 금메달이 목표가 될 수는 없다. 칸에서 상받았다고 그 사람의 작품세계가 완성되는 게 아니니까. 이놈의 일은 죽을 때까지, 밑도 끝도 없이 계속 더 뭔가를, 다른 이야기를 추구해야 한다. 운동선수가 금메달을 받으면 최고의 기량을 인정받는 거지만 여기는 뭔가 새롭고 공감을 같이 했다는 개념에서 상을 주는 영화제니까. 상을 받는 게 결코 종착역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끝없이 가야 한다는 건 부담인가, 더욱 욕망을 자극하는 것인가. 예컨대, 최고를 위한, 외형적으로 세상이 규정한, 칸 그랑프리라고 하면 어쩌면 가장 우수한 영화라는 인정일 수 있으나, 배우로서 연기 인생의 완성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연출가로서도 마찬가지고. 난 거기를 올라갈 거야, 난 그것만 잡으면 끝나, 이런 건 없다. 내가 지금 40대이지만 30대의 연기, 20대의 연기, 처음 연극 시작했을 때의 기분, 생각들과 비교하면 정말 너무나도 엄청난 차이가 있다. 더 나이를 먹어서 카메라 앞에, 연극 무대에 섰을 때의 그때 받아들이는 정서는, 사람에 대한 분석은, 세상에 대한 이해는 또 다를 것이다. 우리는 태생적으로 완성이 없다. 죽으면 끝난다. 배우는 죽어야 창작의 작업이 끝난다. 그걸 고통의 연속이라고 받아들이나 즐거움으로 여기나. 고통이라고 정의내릴 수는 없고… 알아가는 작업이다. 사람에 대해, 세상에 대해. 허무맹랑한 이야기든 사실적인 영화든 다 사람이 나오지 않나. 사람이 존재함으로써 있을 법한 이야기들. SF든 호러든. 우리 인생도 힘든 게 있으면 즐겁고 기쁠 때도 있듯이. 그 배역에 들어가 그 인물로서 살려고 할 때, 비록 픽션이지만, 염세적으로 라이프사이클이 변한다. 폭력적이다 그러면 터프해지는 것 같고, 민감한 인물이면 텔레비전을 보면서 별일도 아닌 것에 찡해지기도 하고. 난 이런 표현을 즐겨쓰는데, 음악인은 악기를 통해 표현한다면, 우리는 생겨먹은 몸이, 사고방식과 인생관이 악기다. 그래서 내 기분이 꿀꿀하면 몰입이 안 돼. 애로사항이 많은 악기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