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내가 찾는 영화 정보를 손쉽게!

‘바람' 검색결과

기사/뉴스(9404)

“개혁은 조용히, 소리소문없이”

“아버지의 영화는 죽었다”고 부르짖은 건 독일만이 아니다. 세계영화사에서 신진 영화인들은 늘 구세대를 극복하기 위한 힘겨운 싸움을 해야 했다. 신구세대의 피할 수 없는 갈등이라는 측면에선 한국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90년대 들어 신인감독들의 대거 등장과 자본환경의 변화는 충무로에서 잔뼈가 굵은 영화인들에게 느닷없는 일이었다. 안타깝게도 프랑스나 독일과 달리 충무로에서 신구세대의 마찰은 미학적 차이에 기인한 게 아니었다. 젊은 영화인들은 새로운 환경에 맞는 정책결정과 집행을 원했지만 사사건건 원로 영화인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스크린쿼터감시단, 등급외 전용관, 영화진흥위원회 구성 등이 그런 문제들이었다. 그결과 영화인을 포괄하는 단체는 영화인협회(이하 영협)와 영화인회의로 갈렸고 영화진흥위원회가 주최하는 포럼에서 폭언이 오가는 일이 벌어지곤 했다. 그리고 영협은 보수성향을 대변하는 단체로서 젊은 영화인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곤 했다. 특히 지난 96년 <애니깽>에 대종상을 몰아준 사건은 영협의 이름에 결정적인 먹칠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최근 유동훈(61) 시나리오작가협회 회장이 새로운 영협 이사장으로 선출됐다. 24년째 시나리오작가협회 회장을 하고 있으며 영협 이사장에 3번째 당선된 그는 어떤 사람인가? ‘선거의 귀재’라는 평판은 혹 기회주의자를 뜻하는 게 아닐까? 과연 그는 벌어질 대로 벌어진 세대간 갈등을 봉합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취임하자마자 올해 대종상영화제를 영화인회의와 공동주최한다고 밝혔다. 앙숙으로 여기던 단체를 포용하는 것으로 신구세대 화합의 첫걸음을 내디딘 셈이다. ‘개혁성향의 보수주의자’라 자처하는 그와의 인터뷰는 ‘건강한 영협이 기대된다’는 희망을 보여준 자리다. =우선 영협 이사장이 된 거 축하한다. -뭐 축하받을 일도 아니다. 개인적으로 보면 이런 일 해서 좋을 게 없다. 영협 이사장을 맡은 게 이번이 3번째인데 왜 3번씩이나 이 자리에 앉아야 되느냐, 당위성에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영화인들이 날 뽑은 이유는 아무래도 그간 급격한 세대교체 속에 불거진 갈등을 무난히 해소할 사람이 필요해서인 것 같다. 내가 지난해 영화축제도 영화인회의와 함께 주최했고, 화합하는 느낌을 준 것 같다. 광열쇠를 가진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열쇠 안 주려고 하면 분란이 생기게 마련이다. 어느 시기에는 광열쇠를 내줘야 집안이 평화로워지는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젊은 영화인들도 적극 포용하려고 한다. =그간 영협은 지극히 보수적인 단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무엇보다 영화계 내부 신구갈등을 어떻게 해소할지 궁금하다. -어렵게 생각 안 하는 게 세대간 갈등은 어느 시대, 어디에서나 있게 마련이다. 어떤 조직이든 젊은층이 선배들을 밟고 올라서게 되는데 문제는 그 과정이 얼마나 부드럽게 되느냐에 있다. 버틸 사람도 조직으로 버티는 게 아니라 능력으로 버티고, 치고 올라오는 젊은이들도 조직적으로 저항할 게 아니라 실력으로 인정받고 그러면 된다. 젊은 영화인들이 영화인회의 같은 조직을 만들어서 영화계 원로들의 공분을 산 것은 양쪽 다 잘못이 있다. 원로들도 그걸 우릴 몰아내려고 하는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받아들였으면 아무 문제없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고 젊은 영화인들도 막무가내로 밀어붙인 면이 있다. 양비론이 되겠지만 역사발전이란 게 다 그런 과정을 거치는 게 아닌가. =이번에 대종상영화제를 영화인회의와 공동주최하기로 했는데 영협 내부에서 이런 결정에 반대하는 입장이 많지 않았나. -물론 내부 반대가 많았다. 하지만 설득이 됐다. 어차피 대종상영화제 수상자는 영화인회의에 속한 사람들이 많은데 우리는 줄 테니 너희들은 받아라, 식으로 되면 꼴이 우습지 않겠냐고 했다. 지난해 영화축제를 공동주최할 때도 영협 내부 반대가 심해서 나 그만두겠다고 그런 적이 있다. 공동의 목표를 위해 힘을 합쳐도 될까말까한데 죽여라 살려라 해서야 되겠는가. 원래 개혁이란 건 조용히 해야 한다. 강력한 슬로건 내걸고 그러면 금방 저항에 부딪힌다. 자연스럽게 소리소문없이 일하는게 좋지, 요란하게 하면 될 일도 안 된다. =<씨네21> 충무로작가열전에서 시나리오 작가 심산씨는 ‘선거의 귀재’라고 표현했던데 20년 이상 시나리오작가협회 회장을 계속하고 3번이나 영협 이사장이 된 비결은 어떤 건가. -지금 24년째 시나리오작가협회 회장을 하고 있는데 그래서 날 독재자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 독재자라면 이렇게 오래 못한다. 작가협회 회장은 지금까지 한번도 경선이 없었다. 37살 때 처음 회장이 됐는데 회장된 지 3달 만에 쿠데타 음모가 한번 있었다. 그때 그런 움직임을 보고 이건 뭔가 나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서 이유가 뭔지 생각해봤다. 역지사지라는 말이 명언인 게 날 몰아내려는 사람들 입장에 서서 그들 얘기에 귀기울이니까 문제가 해결됐다. 내가 대단히 명예욕이 강하거나 다른 욕심이 있는 사람은 아니다. 경제적으로도 가난하고. =영화인이 영협과 영화인회의로 양분돼 반목하게 된 데는 스크린쿼터감시단이나 등급외 전용관 같은 문제에서 부딪쳤기 때문이다. 그간 영협이 현장 영화인들의 바람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는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감시단 문제는 감시단에서 전 김지미 이사장에게 물러나라고 하는 바람에 불거진 일이다. 내가 영협 이사장할 때는 영협이 감시단을 지원하도록 만들었다. 감시단이나 등급외 전용관이나 나는 필요하다고 본다. 영협 안에서 불만을 터트리는 사람이 있는데 내가 못하는 일, 다른 사람이 해주면 좋지 않냐고 말하곤 한다. 영진위 위원 인선 문제도 그렇다. 영협이 모든 걸 장악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물론 지금은 워낙 젊은 영화인 일색이라 상당부분 조화가 깨져 있는 게 오히려 문제다. 최근 영진위 위원 자리에 빈곳이 몇개 생겼는데 가능하면 원로 중에 추천해볼 생각이다. =기존 영협과 다른 태도를 취하고 있는데 스스로 보수주의자라 생각하나, 개혁인사라고 생각하나. -개혁이란 게 보수주의자가 개혁성향을 갖고 있으면 성공확률이 높다. 개혁 일색이면 저항이 세력화돼서 어렵다. 보수주의자들은 나보고 간첩 같다, 양다리 걸친다고 하기도 하지만 난 그런 내 자신을 좋게 생각한다. =영협에서 추진할 새로운 사업들은 어떤 것인가. -첫째는 표준계약관행 도입이다. 시나리오작가협회에서 먼저 시범을 보이면 다른 협회들도 따라올 거라고 보는데 협회가 노조적 성격을 갖도록 하자는 얘기다. 저작권 문제를 협회에 일임하면 협회가 제작자와 교섭하고 계약하는 걸 대행해주는 것이다. 두 번째는 필름오피스 사업이다. 이미 부산에선 성공적으로 진행하고 있지만 로케이션 매니지먼트나 컨설팅 같은 일이다. 필름오피스는 사실 부산보다 영화사가 집중돼 있는 서울이 시급하다. 촬영 때 도로를 막아주고 경찰을 동원하고 각종 허가를 받아내고 하는 일을 대행하는 거다. 이미 서울시, 영진위, 관광공사 등과 추진위원회를 만들어서 1차 회의를 했다. 다음은 영화회관 또는 영화센터 건립인데 지금 있는 영상벤처빌딩은 단순한 사무실 기능밖에 못 한다. 첨단시설을 갖춘 센터가 필요하다는 데 영진위나 영협이나 인식을 같이하고 있다. 네 번째는 복지재단을 영화재단으로 만들어서 영화계 종사자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덜어주는 일이다. 영화인은 어디 가서 재직증명서도 쉽게 못 받고 의료보험도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영화재단이 생기면 저리융자나 학자금융자 같은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본다. =표준계약관행이라는 걸 쉽게 설명하면 어떤 건가. 표준계약서를 만든다는 건가. -작가협회의 예를 들면 저작권집중관리제도다. 예를 들어 음악은 음악저작권협회에서 저작권 관련업무를 전부 대행하는데 작가협회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원래 저작권법에 따르면 작가는 매체가 변할 때마다 저작권을 청구하도록 돼 있다. 예를 들어 영화에서 비디오로, 비디오에서 TV로 옮겨갈 때마다 저작권료를 더 받아야 한다. 하지만 현실에선 어떤 제작자도 그렇게 계약하지 않는다. 개인은 약하니까 작가들이 그냥 넘어가는데 협회가 일을 맡게 되면 불공정한 이런 계약관행이 없어질 것이다. 당장엔 제작자들이 손해보는 일이 되겠지만 작가가 제대로 대접받으면 결과적으로 영화에 도움이 된다. 제작가협회, 영화인회의와 함께 현재 표준계약서를 만들기 위한 협의를 하고 있다. 작가협회에서 이게 정착되면 배우협회나 촬영감독협회 같은 다른 단체도 자연스럽게 표준계약서를 만들 것이다. A급 배우들 개런티 올리는 데 필요한 게 아니라 예를 들면 배우들을 위해 화장실 딸린 차가 현장에 있어야 한다는 조항을 넣는 식이다. =대종상영화제는 어떻게 치를 생각인가. 올해 처음 영화인회의와 공동주최하게 됐는데. -4월이나 5월로 예상하고 있다. 본상 시상식에 앞서 영화축제를 열어서 ‘대종상의 달’이 되도록 하겠다. 아예 예심을 없애고 영화축제기간 동안 관객설문조사를 해서 본선진출작을 가리는 방안도 검토중이다. 예심기능을 대중에게 맡기면서 폭넓은 관심도 유도하고 불필요한 절차도 줄이는 게 좋지 않나 싶다. 보수적, 권위적 성격의 영화제에서 모두가 참여하는 영화제로 바꿔 갈 생각이다. =개인사에 대해 좀 물어보자. 어떻게 시나리오 작가를 하게 됐나. -집안이 가난했는데 공부를 잘하는 편도 아니어서 별뜻없이 서라벌예대 영화과에 들어갔다. 60년대였으니까 감독하려면 연출부로 한 10년 생활해야 하는 시기였다. 집안 형편으로 보면 연출부로 10년씩 돈 못 버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에 시나리오를 쓰자고 생각했다. 학교에서도 혼자 시나리오 공부를 했지만 작가로 입봉하는 것도 그리 쉽지 않았다. 어쨌든 충무로로 가야 된다는 생각에 어머니와 동생들 앞으로 편지 한장 달랑 써놓고 집을 나왔다. ‘3년만 기다려달라. 출세해서 돌아오겠다’는 내용이었는데 정말 3년 조금 못 돼서 작가가 됐다. 첫 작품이 정진우 감독의 <춘희>였는데 당시 관객동원을 28만명쯤 한 히트작이었다. =무작정 충무로에 갔는데 어떻게 3년도 안 돼서 데뷔하게 됐나. -충무로에 가면 예전엔 영화인들이 자주 가는 청맥다방이라는 데가 있었다. 거기서 우연히 나한봉 작가를 만나서 같이 일을 시작했다. 파트너 겸 조수로 일하면서 정진우 감독 영화 시나리오를 많이 썼다. 한번은 나한봉 작가가 아파서 내가 대신 썼는데 그게 정진우 감독 눈에 띄어서 <춘희>를 맡게 됐다. =88년 직배반대운동을 할 때 9개월간 감옥살이도 했는데. -당시 직배저지운동을 하다 구속되니까 검사가 해도 안 될 일을 왜 하냐고 물어보더라.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나도 이렇게 해서 직배가 안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차피 직배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지만 훗날 사람들이 우리 선배들은 백기투항했다고 말하지 않게 하려면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냐고. 난 그때 투쟁이 의미없다고 보지 않는다. 미국영화에 대한 저항감이 어느 정도 각인됐고 그게 한국영화 살리기에 일조했다고 본다. =지금 영화계나 작가들에게 절실한 게 뭐라고 생각하나. -영화계 전체에 희망하는 것은 변별성과 보편성이 함께 가는 것이다. 보편성 없는 영화는 잘될 수 없다. 보편성이라는 건 공감대인데 지나치게 변별성만 앞세워선 힘들다. 타란티노 영화도 보면 보편성에 기반한다. 일본도 보면 새로운 영화가 많이 나오지만 결국 보편적인 영화가 주도하고 원로들이 계속 영화를 만든다. 우리는 쉰살만 돼도 은퇴해서 다양성도 없어지고 보편성도 자꾸 잃어버린다. 작가들한테는 희망이 중요하다는 얘길 많이 한다. 나한테 재능이 있을까 없을까 고민하는 친구들을 많이 접하는데 내가 그렇게 작가생활을 해서 그런지 몰라도 인간에겐 어느 정도 재능은 있다고 본다. 그걸 개발하자면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운동선수들도 겁나면 못한다. 선거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 배우도 연기가 두려우면 못하게 마련이다. 영화해서 잘살 수 있다, 이름을 남길 수 있다, 행복해질 수 있다는 희망이 없으면 버티기 어렵다. 선배들이 할 일은 후배들이 희망을 가질 만한 환경을 만들어주는 일이 아닌가 싶다. 글 남동철 기자namdong@hani.co.kr·사진 정진환 기자jungjh@hani.co.kr

파업이 호황 부른다?

⊙미국 배우조합 등 파업으로 영국영화계 뜻밖 호황 배우조합의 파업과 작가조합의 파업으로 할리우드가 휘청이는 바람에, 영국영화계가 때아닌 호황을 맞았다.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이 파업과 달러 강세 등으로 위축된 미국 대신 영국을 새로운 로케이션 장소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영국은 현지 촬영중인 여름 블록버스터 <미이라2> <툼 레이더> <진주만> 등의 덕으로 이미 7억5천만파운드(11억2500만달러)의 수익을 올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배우들의 파업이 시작되는 여름을 전후로는 영국으로 ‘이전 개업’하는 프로덕션이 더 많아질 것이라는 전망. 어부지리격으로 할리우드 자본이 유입되고 영화계 전반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지만, 영국영화협회와 영국영화위원회는 드러내놓고 반기지 못하는 입장이다. 막강한 영화배우조합의 반발과 비난이 두려워서다. 공식적인 입장 표명은 하지 않고 있지만, 대외적으로는 “돈 벌이를 위해 좋은 관계를 망칠 순 없다”거나, “남의 일거리를 빼앗아, 파업 방해자가 되긴 싫다”고 말해왔다. 미국 배우조합의 파업을 지지하던 영국 배우조합은 그 이상의 연대나 단체 행동은 검토하지 않은 상태로, 다소 소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영국작가조합은 미국작가조합이 어떤 강수를 쓰든, 지지하겠다고 밝힌 상태. 그러나 영국영화계가 할리우드의 위기를 호재로 여기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실제로 영국 배우와 스탭들이 할리우드영화에 투입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은 물론, 미국의 거대 멀티플렉스에 공급될 물량을 영국영화가 상당 부분 충당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이 나돌고 있다. 여름 파업을 데드라인으로 잡고 졸속으로 제작된 미국영화들이 가을 극장에 걸릴 때면, 영국영화들이 상대적으로 미국 대중의 호감을 살 수 있기 때문. 이런 가정은 영화뿐 아니라 TV에도 적용된다. 미국영화배우조합과 작가조합의 계약이 만료되는 오는 6월30일을 기해, 현재 추세대로 전원 파업에 들어가게 되면, TV 연속극과 퀴즈쇼는 물론, 애니메이션 제작과 방영까지 중단될 위기다. 실제로 영국의 유명 TV쇼들은 이미 등의 프로포즈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편당 출연료 2천만달러에서 3천만달러를 호가하는 스타들의 존재 때문인지, 할리우드 배우들의 파업은 널리 지지를 받고 있진 못하다. <필름 언리미티드>는 자신의 애완 도마뱀을 위해 요리사를 고용해달라고 했다는 짐 캐리의 사례를 들며,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노동자들의 단결을 부르짖었을 때는 응석받이 영화배우들까지 이에 동조할 것이라고 예상치 못했을 것”이라고 비아냥거리고 있다. 하지만 미국배우조합의 대변인은 “대부분의 배우들이 가족을 부양하기도 힘들 만큼 턱없이 낮은 개런티를 받고 있다”고 호소하고 있다. 작가들의 파업을 지켜보는 시선은 조금 따뜻한 편이다. 스타들의 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은 반면, 작가들의 개런티는 몇년째 제자리 걸음인 것이 사실. 이들은 자신들의 파업 결의가 급료 문제보다는 위상과 자존심의 문제라고 밝히고 있다. 여하튼 파업이 단기간에 해결되지 않을 전망이고 보면, 남의 가게 불난 덕에 표정관리하며 수입 올리는 영국영화계의 묘한 처지는 얼마간 지속될 것 같다. 박은영 기자

눈물의 시대, 저물다

만화계 큰 별 하나가 졌다. 원로만화가 김종래 화백이 지난달 28일 지병으로 타계한 것(향년 74). 그동안 크고 작은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건강이 허락하는 대로 만화계 행사에 참석해 후배만화가들을 격려해주던 김 화백의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소식에 만화계는 슬픔에 잠겼다. 아마 요즘 독자들은 김종래 화백을 잘 알지 못하리라.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40대 이상의 중장년층 독자라면 김 화백의 <엄마찾아 삼만리>를 읽고 눈물을 흘린 기억이 아직도 생생할 것이다. <엄마찾아 삼만리>(1959년 만화세계사 출간)는 술과 노름으로 방탕한 생활을 하는 아버지 탓에 팔려간 엄마를 찾아 전국을 떠도는 아들의 눈물겨운 이야기.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당시의 슬픈 시대상황과 맞아 떨어지면서 만화사상 유례없는 10판 출간의 신화를 이뤘다. 판매부수 또한 당시로서는 기록적인 1만5천부에 달했다. ▣전통극화의 개척자 김 화백은 박기당과 더불어 만화대본소의 태동기인 1960년대에 한국만화의 전성기를 연 주인공이다. 일본만화풍이 팽배했던 초기 만화계에 독창적인 만화작법을 선보이며 우리 고유의 극화를 완성시켜 ‘전통극화의 개척자’라고 불린다. <엄마 찾아 삼만리> <마음의 왕관> <황금가면> <도망자> <앵무새 왕자> <울지마라 은철아> <눈물의 별밤> <어머니> 등 만화가 생활 25년간 500여종의 작품을 남긴 그는 한국만화의 예술성을 한 단계 끌어올린 작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27년 일본 교토에서 태어난 그는 교토 회화전문학교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뒤, 1946년 귀국했다. 그가 만화와 인연을 맺은 것은 군대 시절. ‘코주부’ 김용환의 후임으로 육군본부 작전국 심리전과에 배속받아 전단을 그렸다. 군에서 제대한 그는 1945년 군대 시절 그린 반공만화 <붉은 땅>이 우연히 출판사 사장의 눈에 띄어 재출간되면서 만화가의 길에 접어들었다. 1955년 첫 창작만화 <박문수전>을 발표하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한 그는 타고난 재능으로 동양화에 바탕을 둔 전형적인 삽화체의 그림들을 완성한다. 이때 내놓은 대표작이 <엄마찾아 삼만리>와 <눈물의 수평선>. 전쟁의 상처와 시대의 아픔을 잔잔하게 다룬 작품들이다. 그의 만화가 전성기를 꽃피운 것은 1960년대. <마음의 왕관> <어머니> <황금가면> <앵무새 왕자> 등 현실사회의 모순을 날카롭게 고발한 이 시기의 작품들은 김 화백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후 그는 비극 일변도의 시대극에 국한되었던 만화의 폭을 넓혀 <곰보부자> <쌍둥이전> <병풍도령> <유도> 등 코믹물과 스포츠 만화 등 다양한 소재의 작품들을 선보였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의 작품세계는 또 한번의 변화를 보여준다. 기존 장편 중심의 형식에서 벗어난 옴니버스 형식의 단편만화를 발표한 것.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도망자>는 1969년 첫편이 나온 이래 1978년까지 무려 10년간 창작된 만화사상 기록적인 작품이다. ▣만화계의 운보, 그가 떠난 뒤안길 하지만 그는 1978년 갑자기 “만화계를 떠나겠다”고 선언해 충격을 안겼다. 매년 5월만 되면 만화가를 마치 죄인 취급하는 데 진력이 난데다 건강에 심각한 적신호가 울리고 있었기 때문. 고민 끝에 만화가를 그만둔 그는 동양화에 전념하지만 갑자기 도진 심장병 탓에 결국 붓을 완전히 놓고 말았다. 그는 만화가 생활 25년간 한재규, 이희재, 홍금보, 박성래, 대철, 박상호 등 20여명의 문하생들을 길러냈다. 그의 교육방법은 대단히 엄격하기로 유명했다. 입문한 지 3년이 될 때까지는 결코 그림을 맡기지 않았고, 3년이 지나서야 겨우 배경 그리는 것을 허용했다. 그의 문하생들은 이런 고난의 과정을 거쳤기에 그림 실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만화계는 김 화백의 부음을 전하면서 착잡함을 느꼈다. 그의 부음 소식과 ‘운보’ 김기창의 부음 소식에 대한 사회의 반응이 너무나 큰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운보의 부음을 대서특필한 것은 물론 연일 특집을 꾸며 운보가 미술계에 끼친 영행을 분석했던 언론이 ‘만화계의 운보’라고 할 수 있는 김 화백의 부음을 다루는 데는 너무 인색했기 때문이다. 김 화백의 장례를 만화인장으로 치루지 못한 것 또한 아쉬움으로 남는다. 만화계에서는 “미리 만화인장을 계획했었으나 김 화백이 예상보다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준비할 시간이 부족했다”고 얘기하지만 김 화백만큼은 만화인장으로 치뤘어야만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또 한 가지. 이번 김 화백의 타계를 계기로 원로만화가들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시급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원로만화가들의 경우 만화는 물론, 참고 자료조차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떠한 형태로든 원로만화가에 대한 정리를 미리 해둘 필요성이 있다. ▣빛이 되어 남은 거목 마지막으로 김 화백의 문하생 출신인 만화가 이희재씨가 스승을 추모하며 한국만화가협회 게시판에 쓴 글을 소개한다. “50년대로부터 우리 만화사의 고유한 페이지를 장식해 오셨던 김종래 선생님. 이천일년 1월28일 오전 운명을 하셨습니다. <엄마찾아 삼만리> <눈물의 별밤> <어머니> <황금가면> <울지마라 은철아> <앵무새 왕자> <곰보부자> <도망자> <내조국> 등 선생이 남긴 만화의 봉오리는 수백편이 넘습니다. 작품 하나하나는 우리의 만화사에 광채가 되어 빛으로 남았습니다. 가장 어려운 시절, 만화라는 사랑으로 세상을 어루만져 주셨던 선생님. 선생님의 독자였던 많은 사람들과 뒤를 잇는 후배들이 잊지 않을 것입니다. 삼가 선생님 영전에 고개숙이며 명복을 비옵니다.” 김이랑/ 만화평론가 dreamy21@lycos.co.kr

존재하는 것과 보이는 것

세상은 보이는 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남에게 보이고 싶은 것’이 있고, ‘그렇게만 봐라’는 권력이 있다. 이 힘에는 저항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너무나 은밀하게 우리의 몸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여기 맞서는 건 자신의 눈을 의심하는 것이다. 어떤 게임의 제작이 발표되면 곧장 이 권력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게임 전문 잡지들이 직·간접적으로 이해를 공유하는 작품을 띄워주는 일이 드물지 않다. 이 게임은 명작이고 걸작이고 대작이다. 이 게임에 대해 나쁜 평을 하는 건 바보이기 때문이다. 다행인 건, 너무 노골적인 경우가 많아서 이런 수법에는 잘 속아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출시되면 이제 홍보전이다. 어떤 게임은 ‘홍보’를 통해 존재와는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 어떤 게임은 ‘홍보’가 없어서 분명 존재하는데도 보이지 못한다. 전통있는 시리즈물이라든가 유통사가 돈이 많다든가 개발자가 유명한 사람이라든가 하는 이유로 몇몇 게임이 선택된다. 온갖 미사여구로 치장된 홍보물이 매체를 가리지 않고 난무한다. 하지만 많은 게임이 잡지 광고 한번 내보지 못하고 사라진다. 심지어 ‘가람과 바람’이 만든 <씰>처럼 유통사에서 홍보자료를 달라는 걸 거부하는 경험을 한 적도 있다. 그리고 게이머의 몸에 각인된 권력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게임이 짊어진 역사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모든 사물은 성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한다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전에 좋았던 시리즈가 변해가고 있는데도 과거에 각인되었던 기억에만 의존한다. ‘스퀘어’의 <파이널 판타지>(이하 파판)는 게임 역사에 영원히 기억될 최고의 롤플레잉 게임 시리즈다. <파판>의 팬들은 개성있는 캐릭터들의 이야기에 때로는 울고 때로는 웃으며 공감대를 가졌다. 하지만 요즘 와서는 명성이 쇠퇴하는 느낌이다. 예를 들어 8편의 여주인공 ‘리노아’는 저항조직의 우두머리라는 설정과 너무나 동떨어진 캐릭터다. 그래서 그녀의 이야기에 몰입할 수가 없다. 하지만 <파판>의 팬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서는 조금의 흠집도 보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전편의 안 좋았던 기억 때문에 새로 나온 시리즈에서 흠집만 잡으려고 혈안이 되는 사람이 있고, 자기가 좋아하는 게임의 라이벌에 대해서는 무조건 트집부터 잡는 사람이 있다. 만일 이 모든 것에서 조금이라도 자유로울 수 있다면 관심법을 쓸 수 있다. 얼음산을 넘고 바늘언덕을 지나 불의 강을 건넜다면 게임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는 건 아니다. 그럴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지금까지 살면서 쌓인 기억들에 의지해 게임을 읽는다. 한창 사랑에 빠진 사람과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 폭력적인 아버지를 죽이고 싶었던 적이 있는 사람과 아버지 같은 사람과 결혼하겠다는 사람은 같은 게임을 다르게 한다. ‘게임’이란 사물은 ‘객관’적으로 존재하지만 사람에 따라, 그리고 같은 사람이라도 시간과 장소와 처지에 따라 모두 다르게 독해한다. 게임을 보는 건 눈과 귀에 들어오는 정보를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게 아니다. 그것들이 자신의 삶 속에 끼어드는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을 자신만의 코드 속에서 연결시킨다. 쉽지 않은 일이고, 다른 사람의 코드에 접속해서 자기 마음대로 재배열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비난도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다시 창조된 게임은 정말 소중한 경험이고, 다음에도 다른 게임을 읽을 수 있게 도와준다. 박상우/ 게임평론가 sugulman@chollian.net

윌로씨에게 생긴 일, 웃음과 비애의 카오스

◈ 어느 작가가 자작(自作)에 대해 말하는 것을 우리는 어느 정도나 믿을 수 있을 것인가? 일차적으로 작품의 의도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작가로부터 이야기를 듣는 것이 어느 정도는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 의도라는 것이 완성된 작품에서 잘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이를테면 작가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것을 우리가 작품에서 발견한다면 우리는 그때에도 작가의 의도를 최우선의 것으로 생각해 그것에 따라야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물론 오늘날 작품 해석의 권한을 여전히 작가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확실히 ‘촌스러운’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작가의 의도와 비평적인 해석간에 엄청난 격차가 존재한다면 그 또한 심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런 경우 대개 작가 스스로 통제하지 못한 어떤 부분이 작품에 스며들게 돼서 생기는데 이러한 ‘과잉의 부분’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우리의 흥미를 자극한다. 낡은 세계관, 혁명적 스타일 자크 타티는 자신이 얼마나 혁신적인 영화를 만들고 있는지를 정작 자신은 깨닫지 못한 인물이었다. 물론 이것은 그가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를 전혀 몰랐다는 뜻은 아니다. 자신의 프티부르주아적인 세계관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방법론에 충실함으로 인해 전례없는 영화형식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처럼 낡은 세계관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 그런 영화를 만들어낸 것은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거의 기적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1967년 그가 ‘괴작’ <플레이타임>을 발표했을 때 자크 리베트는 “이 영화는 자크 타티에임에도 불구하고 혁명적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타티는 1950년대 프랑스영화계에서 일종의 대안적 흐름을 짊어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로베르 브레송과 자주 비견되곤 하지만 두 사람의 기질 및 배경의 차이를 감안하면 그의 위치는 더욱 특이한 것으로 비친다. 확실히 그에게는 브레송 같은 문학적 교양도 그렇다고 종교적인 엄격성도 없다. 따라서 영화가 굳이 개인적인 표현이어야 한다는 신념도 강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물론 그에게도 ‘장인적인 완고함’이라 할 만한 것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반드시 ‘자크 타티’라는 인물에 귀속돼야 하는 그런 유의 것은 아니다). 자크 타티는 1907년 파리의 교외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원래 러시아 출신으로 할아버지대에 파리로 이주했다고 하며 그래서 그의 본명은 자크 타티셰프이다. 부친의 직업은 액자 제조가로 비교적 유복한 편이었다고 한다. 타티는 어렸을 때부터 스포츠에 열광했다고 하는데 특히 럭비와 테니스는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한다. 관찰력이 뛰어났던 그는 여러 스포츠의 동작을 팬터마임으로 해보여 주위 사람들을 웃겼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직업적인 엔터테이너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30년대 초에 그는 뮤직홀에서 정식으로 공연을 하기 시작해 상당한 인기를 끌게 되는데 몇년 뒤에는 뮤직홀에서 번 돈으로 단편영화를 제작하기도 한다. 이때 만든 영화가 르네 클레망이 연출하고 타티가 주연을 맡은 <왼쪽을 주의하라>(1936)였다. 2차대전에 하사관으로 참전했던 그는 전쟁터에서 돌아온 뒤 직접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하고 주위의 친구들을 불러모으기 시작한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것이 바로 <축제의 날>(1949)이다. 아주 적은 예산에다가 몇명을 제외하면 영화 경험이 전무한 스탭들을 모아 만든 이 영화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어 타티로 하여금 영화에 본격적으로 진입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해주었다. 프랑스의 어느 시골 마을을 무대로 한 이 영화에서 타티는 주인공인 우편배달부 프랑수아 역을 맡았다. 영화는 마을의 축제를 위해 만들어진 임시 영화관에서 미국의 발달된 우편배달 시스템에 관한 영화를 본 프랑수아가 자기 혼자 힘으로 미국식으로 편지를 배달하겠다고 나서지만 결국 죽도록(?) 고생만 한다는 이야기이다. 미국인들은 스피드와 규칙성을 모토로 해서 오지에는 심지어 헬리콥터까지 동원해 우편을 배달하지만 교통수단이라곤 고작해야 자전거 한대밖에 없는 프랑수아로선 아무리 열심히 뛰어봐야 한계가 뻔한데다 오히려 사고만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타티는 자신의 트레이드 마트가 되는 어설픈 몸동작을 이 영화에서 유감없이 보여주지만, 허술하긴 하지만 플롯이라 할 만한 것을 가지고 있는 이 영화는 그런 점에서 아직 본격적으로 타티가 자신의 세계를 만들었다고 하기는 힘든 작품이었다. 하지만 2차대전 직후의 프랑스인들이 미국에 대해 가지고 있는 선망과 질시의 감정이 잘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는 역시 흥미로운 작품이라 해야 할 것이다. 과묵한 윌로씨 태어나다 1953년 초에 개봉된 <윌로씨의 휴가>는 ‘타티적 우주’가 최초로 제시된 작품일 뿐 아니라 타티 자신이 만들어내 대중적인 캐릭터가 된 윌로씨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이 본격적으로 타티적인 세계를 보여준다고 말하는 것은 먼저 그 줄거리를 요약하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필요하지도 않다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노르망디 해안의 어느 휴양지로 일단의 사람들이 휴가를 위해 몰려오고 영화의 끝에서 그들은 다시 원래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 굳이 이야기라고 할 만한 것이 있다면 이 휴가기간 동안 사람들은 타티, 즉 윌로씨 때문에 몇번의 해프닝을 겪게 되지만 하지만 그것도 훗날까지 기억할 만한 중요한 일은 물론 아니다. 영화는 그저 여름철 해변가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들을 별다른 연관성 없이 그저 나열하듯이 보여주는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이 물론 이 영화의 비범한 매력 중 하나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느슨함은 정확히 휴가객들의 정신상태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확장하자면 별다른 생각없이 영화관에 간 관객의 심상이기도 할 것이다. 휴가의 초반에는 약간의 기대감을 가질지도 모르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우리는 반복의 시간감각 즉 권태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말의 정확한 의미에서 어떤 목적을 지향하는 휴가라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휴가의 시간은 노동의 시간처럼 기복이 심한 시간이 아니다. 바쟁이 이 영화가 개봉될 당시에 지적했듯이 타티가 그리는 휴가 중의 세계는 “스톱워치로 재는 것이 가능한 그런 부조리한 속도로 진행”하는 것이다. ‘타티적 우주’의 두 번째로 중요한 요소는 그것이 보여지는 어떤 것 즉 풍경(landscape)인 것 이상으로 들려지는 것 즉 음장(soundscape)이라는 점이다. 영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특별히 중요하지도 않은 대사를 포함한 온갖 소리들이 놀랄 만한 명확성과 함께 전달된다. 기차역의 안내방송, 해변가의 바람소리, 놀고 있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등등. 특히 타티의 놀라운 점은 인물의 대사에 결코 특권적인 지위를 부여하지 않고 영화를 구성하는 여러 사운드 요소 중 하나로 다룬다는 점이다. 보통의 영화에서라면 대사는 인물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수단이 된다. 하지만 현실에서 듣는 여러 소리 중 하나와 다름없이 다루어진다면 그것은 ‘말’이라기보다는 ‘소리’에 가까운 것이 되고 이것은 확실히 놀라운 체험이라고 할 만하다. 과연 이 영화에서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는 대개 진부하기 그지없는 것이고 더 흥미로운 것은 윌로씨 자신은 영화의 앞에서 호텔에 체크인할 때 “윌로”라고 짤막하게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부분을 제외하면 전혀 대사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윌로씨를 좀더 잘 표현하는 청각적 기호는 오히려 그의 낡은 자동차가 내는 기괴한 마찰음이다. 휴가지에 윌로씨가 도착했음을 호텔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알리는 역할을 하는 것도 바로 이 자동차가 내는 소리인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의 물리적 현존을 감지하는 데 청각적 체험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이 영화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것이다. 현실은 이미지의 덩어리인 것 이상으로 소리의 덩어리인 것이다. 윌로를 넘어, 현실을 닮은 코미디를 꿈꾸다 1958년에 타티의 세 번째 장편영화인 <나의 아저씨>는 그를 부동의 인기감독으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윌로씨의 캐릭터를 대중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존재로 만들어주었다. 미국을 비롯한 외국에서도 그의 영화는 상당한 관객을 끌어들일 정도가 되어서 그는 국제적인 명성도 동시에 획득했다. 이 영화는 파리를 무대로 아직도 전통적인 삶의 방식이 남아 있는 윌로씨가 사는 중하류층의 거주지역과 현대적인, 더 정확히는 기계화된 삶의 방식이 지배하는 중상류층의 지역을 대비시키고 있다. 윌로씨는 누나가 사는 부자동네에 갔다가 기계들을 제대로 다룰 줄 몰라 한바탕 곤경을 치르게 된다. 날로 기계화되는 현대적인 삶에 대한 비판이라 할 수 있는 이 영화는 그런 점에서 타티의 세계관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윌로씨가 몸담고 있는 옛날 방식의 삶에 대한 노스탤지어로 가득 차 있는 이 영화는 타티의 영화 중 가장 센티멘털하고 ‘따뜻한’ 작품으로 그런 만큼 상당한 대중적인 호응을 받았던 것이다(심지어 외국어영화상이지만 아카데미상까지 받았던 것이다!). 60년대 들어 타티는 그동안의 성공을 발판으로 야심적인 프로젝트에 착수하게 된다. 코미디는 코미디이되 가장 현실에 근접한 그런 코미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리고 타티는 당시 윌로씨라는 캐릭터가 지나치게 성공을 거둔 것에 대해서도 불만을 느끼기 시작했다. 감독인 그보다 윌로씨가 훨씬 유명해짐에 따라 관객이 그의 영화를 보러 오는 것이 아니라 윌로씨를 보기 위해 온다는 것이 명확해진 것이다. 그에 따라 이 신작에서는 윌로씨의 캐릭터가 전의 두 작품에 비해 훨씬 비중이 약해지게 된다. 이 영화는 무엇보다도 파리 시내의 한 구역을 그대로 재현한 세트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그의 전작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큰 제작비를 필요로 했다. 게다가 그는 이 영화를 70mm 시네마스코프에 스테레오로 녹음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결국은 사재를 쏟아붓고도 모자라 빚까지 지면서 겨우 제작비를 마련한 그는 1967년에 <플레이타임>을 완성하게 된다. 영화는 그의 기대와는 달리 참담한 흥행실패를 기록하고 말았다. 아마도 2차대전 이후 프랑스영화계의 최대의 흥행실패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여서 타티는 이때 진 빚으로 죽을 때까지 허덕였다고 한다. 흥행실패에는 타티 자신의 책임도 어느 정도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개봉 당시 이 영화가 최적의 상황에서 상영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70mm 및 스테레오 사운드 설비가 된 극장에서만 개봉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플레이타임>은 왜 흥행에 실패하고 만 것일까. 우선은 윌로씨를 보고싶어하는 관객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한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윌로씨는 물론 이 영화에도 등장하지만 특별히 다른 인물에 비해 비중있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그냥 여러 인물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사실 이 대목은 어찌 보면 관객의 그간의 오해에 어느 정도 원인이 있다고도 할 수 있는 것으로 전작에서도 결코 윌로씨가 통상적인 의미에서는 주인공이라고 하기 힘듦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그가 주인공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흥행실패의 또다른 원인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타티가 관객의 능동성을 너무 과대하게 평가했다는 점이다. <플레이타임>은 무엇보다도 그 정보량의 과다로 보는 사람들을 질리게 하는 작품이다. 다양한 시각적 정보들이 70mm 와이드 스크린의 프레임을 꽉 채우고 있을 뿐 아니라 화면의 전경과 후경을 나누어 다른 사건이 진행되고 있음을 동시에 보여준다. 거기다가 밖에서 훤히 들여다보이는 최신식 아파트를 설계해 일종의 멀티스크린 효과까지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관객은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윌로씨가 이번에는 어떤 ‘사고’를 쳐서 우리를 웃겨줄 것인가를 기대하던 관객은 도대체 무엇을 보고 웃으라는 것인지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실 어찌 보면 <플레이타임>은 바쟁류의 ‘의미의 민주주의’의 전범이 될 만한 영화이다. 화면에 비쳐지는 것들간에 일종의 서열구조를 만들고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관객이 지배적인 의미를 추출해내도록 하는 것이 통상적인 영화 의미의 생성과정이라고 한다면 이 영화는 어떠한 의미에도 특권적인 지위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가히 혁신적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쩌랴. 대다수의 일반 관객에게는 의미의 민주주의라는 것이 아직은 ‘의미의 카오스’로밖에 비치지 않는 것을. 관객은 자신들에게 지워진 무거운 짐을 끌어안고는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던 것이다. <플레이 타임>, 너무 일찍 온 미래 60년대 영화 중 <플레이타임>과 비견할 만한 작품으로는 스탠리 큐브릭의 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당대의 첨단 테크놀로지를 과감하게 도입했다는 점, 그리고 당시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던 미래적 상상력을 충실하게 투영하고 있다는 점 등에서 확실히 두 작품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에는 있으되 <플레이타임>에는 없는 것은 다름 아니라 당대의 관객이 호흡하고 있는 시대적 공기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큐브릭이 의도했든 아니든간에 에는 확실히 당대의 카운터컬처의 초월론적인 부분과 조응하는 요소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이 영화의 컬트적인 인기를 가능케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비해 <플레이타임>이 보여주는 푸른 색조가 감도는 미래형의 고층건물이 만들어내는 기하학적인 미학은 당시의 사회적 상황에서는 너무 난데없는 것처럼 비쳤던 것이다. 마치 외계에서 날아온 이름모를 유성처럼. 영화사적으로 보아 타티가 맥 세네트에서 시작되어 버스터 키튼, 해리 랭든 등으로 이어지는 벌레스크적인 코미디의 전통에 속한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유의 코미디에서 자주 목도하게 되는 몸동작에 대한 과도한 집착 등은 타티에게도 그대로 발견된다. 하지만 타티는 이런 전통을 자기 식으로 수정해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타티가 이들 선배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대목은 그에게 ‘판타지적인 부분’이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결정적인 대목에는 주저없이 비현실적인 상황을 만들어내던 이들과는 달리 타티는 ‘있을 것 같지 않은’ 부분은 철저히 배제한다. 어느 비평가는 그리하여 타티가 이들에 비해 “훨씬 상상력이 없는 작가”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상상력의 결여는 역으로 말하면 타티의 세계가 현실에 대한 엄밀한 관찰하에 구성된 것이라는 것을 입증해주는 것일 게다. 그의 코미디의 핵심은 말하자면 현실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을 그 논리적 극단까지 몰고 간다는 데에 있다. 그리하여 타티의 세계는 자세히 관찰했을 때 우스꽝스럽지 않은 것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새삼 일깨워준다. 고다르가 말한 대로 그는 “문제가 전혀 없는 곳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마는 것이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는 ‘성공적인 코미디’가 관객에게 주어야 할 안전한 거리감까지 무너지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즉 영화 속의 상황에서 어느 정도 관객이 격리돼야 하는 데도 실제로 관객 자신도 코미디의 한 부분이라고 느끼기 시작하면 그것은 결코 보통의 관객에게 웃음을 자아낼 수 있는 상황은 아니게 된다는 것이다. ‘나도 윌로씨처럼 사실은 부적응자일 수 있다’는 깨달음은 결코 즐거운 체험은 아닐 것이다. 거기다가 타티가 자신은 ‘재미있는 영화를 만든다’고 호언하면서 장인적인 자부심을 겉으로 내세우면서도 실제 행동에서는 예술가의 그것에 가까운 행태를 보여주었다는 것도 그에 대한 몰이해를 더욱 부채질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영화에 시네필들이 열광하는 것에 어리둥절해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영화가 어떤 상황에서 상영되는가에 대해 극히 까다롭게 굴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역설은 그가 낡은 프랑스적인 것에 집착하는 그런 기질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마치 인디펜던트 감독처럼 작업을 해야만 했던 그런 상황의 결과로 빚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역설이야말로 그로 하여금 영화사상 가장 급진적인 코미디를 만들도록 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우울한 말년, 윌로보다 먼저 가다 <플레이타임>으로 빚더미 위에 올라앉았던 타티는 그 이후 <트래픽>(1971), <퍼레이드>(1974) 등 두편의 영화를 더 만들게 된다. 윌로씨를 다시 중요한 인물로 배치하는 등 예전의 인기를 되찾기 위해 나름대로 ‘타협한’ 구석들이 보이는 이 영화들은 하지만 예전의 성공을 반복하지는 못한다. 그는 말년에 텔레비전 스튜디오를 무대로 한 <컨퓨전>이란 작품을 만들려고 했지만 결국 제작비를 모으는 데 실패해 촬영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컨퓨전>에서 그는 윌로씨를 등장시킨 다음 바로 죽일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만든 이 캐릭터에 대해 갖고 있던 묘한 애증관계를 완전히 청산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를 죽이기 전에 그 자신이 먼저 죽고 만다. 그는 1982년 쓸쓸히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1970년대 초반 파리에 머물던 영화평론가 조너선 로젠봄은 타티와 인터뷰한 것을 계기로 그의 조수가 되어 잠시 동안이나마 <컨퓨전>의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한 경험을 감동적으로 술회하고 있다. 매일 그의 사무실에 가서 그가 말하는 영화의 아이디어를 듣고 함께 토론하면서 정리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어느 날 드디어 이 영화에서 윌로씨를 죽일 결심을 한 타티는 그 상황을 그에게 설명한다. 텔레비전 스튜디오에서 생방송으로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도중에 방청객으로 가 있던 윌로씨가 방송사에 잠입한 테러리스트가 쏜 총탄에 잘못 맞아 죽는다는 것이다. 생방송 도중이므로 이 사고는 시청자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은밀하게 처리돼야만 한다는 것이다. 카메라 위치를 이리저리 따져본 타티는 결국에는 고개를 젓는다. “역시 돈이 너무 많이 들겠는데.” 그리고는 로젠봄에게 “오늘은 그만 됐네. 돌아가게”라고 말했다. 창 밖을 멍하니 응시하면서 로젠봄의 표현에 의하면 타티는 ‘슬라브적인 멜랑콜리’에 빠져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번 우울에 빠진 타티에게 더이상 말을 거는 것은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임재철/ 영화평론가·<필름컬처> 편집주간marienbad@hanmail.net

영화음악 -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O.S.T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O.S.T/ 드림비트 발매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일상의 진부함을 그나마 숨쉴만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작은 전복, 사랑을 꿈꾸는 영화다. “일상은 하나도 특별할 것이 없지만 사랑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 박흥식 감독의 말. 은행원과 보습학원 강사의 하마터면 그냥 아무 일 없이 지나갈 뻔한 사랑에 반전을 주는 폐쇄회로 카메라. 폐쇄회로 카메라는 이 영화에서 ‘감시-일상’에서 ‘고백-사랑’의 기능으로 소박하게 전복되면서 내러티브를 이끈다. 영화의 음악 역시 ‘일상 속의 작은 전복’을 받쳐주는 감미롭고 평이한 멜로디가 주조를 이룬다. 그 동안 <런 어웨이>를 비롯, <정사> <약속>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용가리> 등 멜로에서 액션에 이르는 여러 장르를 커버하고 있는 조성우 음악감독이 음악을 맡았다. 그는 현재 한국의 영화음악을 주도하고 있는 음악가의 한 사람이다. 이번에도 역시 탄탄한 스코어와 깔끔한 편곡으로 비교적 완성도 있는 사운드 트랙을 선보이고 있다. 또한 따뜻한 이미지를 소유하고 있는 이현우가 주제가에 해당하는 노래를 불러 대중적으로도 접근하기 쉽다. 스타일로는 가벼운 4비트의 재즈가 주조를 이룬다. 처음부터 끝까지, 재즈 스타일을 벗어나는 음악이 별로 들리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는 ‘일관성’을 유지하는데 신경을 많이 쓴 것 같아 보인다. 그런데 과연 재즈 스타일이 이 영화와 아주 긴밀히 연결되느냐 하는 대목은 좀 따져봐야 할 필요가 있다. 가령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를 한 번 떠올려 보자. 이 영화는 미국 사람들 중에 ‘보통 사람’에 해당되는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음악은 해리 코닉 주니어를 앞세운 스탠다드 재즈 풍이 주조를 이루는데, 영화음악은 감미롭기도 하지만 실은 지극히 스탠다드한 미국풍이다. 재즈라는 장르는 미국 사람들에게 하나의 고전적인 표준이다. 그것은 극단적인 심리를 자극하는 촉진제라기보다는 그저 일상적인 담담함의 표현이다. 적당히 유머러스하고 적당히 서글프며 결국 적당히 감동적인, 헐리우드의 스탠다드에 해당하는 멜로물과 그런 식의 스탠다드 재즈는 비교적(상식적인 차원에서 생각해도) 충분한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결론적으로 재즈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통속적인 편안함의 등가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우리 식의 가벼운 터치의 일상적 연애가 재즈를 밑으로 깔고 벌어져야 하는지는 조금 의심스럽다. 우리에게 스탠다드한 재즈, 감미로운 재즈는 무엇인가. 내 생각에 그 스타일은 일상적이기보다는 약간은 허영이 깃든 고급 취향으로 보인다. 물론 음악의 그러한 설정으로 인해 버스 정류장의 황량함은 따스한 기다림과 설레임의 공간으로 변형되고 따라서 영화의 일상적 공간은 황폐한 현실이 아니라 약간의 환상이 스며 있는 아름다운 공간으로 보일지 모르겠다. 어쩌면 음악의 의도는 그 쪽에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는 듯 하다. 그러나 때로 이 영화에 쓰인 재즈는 감미롭긴 하지만 슬쩍, 영화가 본래 노린 것과는 다른 빛깔의 포장재료를 제공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 영화가 보다 철저하게 일상적인 톤을 지켜내고 그 이상의 부자연스러운 감흥을 배제하는 걸 원칙으로 삼으려고 했다면 차라리 재즈가 아니라 더 스탠다드한 우리 발라드여야 하지 않을까. 음악이 덜 달콤하고, 더 통속적이면 어땠을까. 그렇게 되었으면 영화의 톤이 냉소적으로 느껴질 것을 걱정했을까. 음악의 스타일을 선택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제일감으로 떠올린 스타일을 선뜻 적용한 것이 때로는 정답일 때가 있지만, 어떤 때에는 스타일 자체를 심사숙고해야할 때도 있다. 달콤한 재즈? 그래, 사랑 이야기엔 그만이겠지. 그러나, 이게 우리의 일상이라고 생각해보자. 장마철에 빤쓰 바람으로 창밖을 바라보는 아저씨, 라면을 먹는 도중에 ‘밥먹고 있니’라는 엄마의 전화를 받는 아가씨가 나오는 우리 일상 말이다. 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

2001 신인감독 10인의 출사표 - 김대현

▒감독이 되기까지 대학 졸업을 앞둔 88년, 김대현(36) 감독은 신촌의 영화사랑 우리, 동국영화연구소 등을 드나든다. “사회운동을 계속할 수 있을지” 회의가 들수록, 영화는 도피처라기보다 또다른 가능성이었다. 가슴을 치던 <오발탄>을 비롯해서 <돈> <박서방> <마부> <바보들의 행진> 등 유년 시절 보았던 60, 70년대 한국영화의 잔상들이 한없이 피어올랐던 시기이기도 했다. 누구 하나 길잡이 해주는 이가 없어서 일단 영화과 대학원 진학을 결심했지만, 불과 시험이 3주 뒤인지라 영화관련 서적 다섯권을 챙겨 독서실로 잠수한 것만으로는 불안했다. 일주일 남기고서 동국대 유현목 감독을 찾아가 “영화만들게 해달라”고 사정했다. “몽타주 이론은 아나? 네오리얼리즘영화는 본 적 있어?” 유현목 감독이 툭툭 던진 질문이 당일 시험문제였을 줄이야. ‘운좋게’ 동국대 연극영화과 대학원에 입학했지만 수업보다는 졸업을 앞두고 8mm 영화 작업을 하던 김성수, 유하 감독들의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그 인연으로 90년 <그들도 우리처럼>에 합류했다. 탄광촌에 가는 줄도 모르고 노란색 외투를 걸친 철없는 연출부 막내였다. 그래도 ‘현장세례’의 감동은 남았다. 특히 연출부였던 이현승, 김성수, 여균동 감독의 팀워크는 대단했다. 돌아오자마자 윤정모의 <사랑>을 각색해서 16mm영화 <서울길>을 찍었고, 내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열망은 <베를린 리포트>까지만 그의 충무로 수업을 허락했다. 이지상 감독 등과 함께 영화제작소 ‘현실’을 차려 만든 작품들이 <지하생활자> <나마스테 서울> 등이다. 단편영화의 활로는 배급에 있다는 판단 아래 94년 이후에는 인디라인을 만들어 그 활동에만 전념했다. 케이블채널 등에 영화 방영권을 넘기거나 예술영화 전용관에서 상영, 제작비를 회수해서 “단편영화가 재생산될 수 있는 구조를 만든다”는 게 목적이었다. 서울국제독립영화제를 만들어 `단편'에서 `독립'으로 시야를 확장한 것도 맥락은 같았다. 처음과 달리 적자운영으로 5년 만에 접어야 했지만 그는 인디라인의 수명이 다했을뿐이지, 애초 판단이 틀린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영화를 만들것인가 데뷔 준비는 알음알음 알고 지내던 박기형 감독이 <여고괴담>을 끝내고 만든 독립프로덕션 다다에 <아나키스트>의 유영식 감독과 함께 결합하면서부터 시작했다. 원래 데뷔작으로 준비했던 작품은 박기형 감독과 함께 쓰기 시작한 <아버지 죽이기>(가제). 아버지의 가족여행 제안을 들은 자식들이 아버지를 살해하기로 공모한다는 줄기의 블랙코미디였는데, 3고까지 마친 상황에서 비슷한 소재의 <셀레브레이션>이 개봉하는 바람에 미뤄졌다. 만화 <내 파란 세이버>를 발견한 건 99년 여름이었다. 읽고나서 곧바로 박흥용 작가를 찾아갔다. 70, 80년대 시골을 배경으로 한 두 소년의 성장기에 자신의 느낌을 덧붙일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순수했던 삶의 원형이 훼손되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어 있던 10대 시절. 삶의 속도에 휘말려 뒤돌아볼 겨를 없이 허겁지겁 내달려야 했던 20대의 허탈함에 비하면 소진하기 직전의 충만한 에너지를 만끽할 수 있었던 10대는 <내 파란 세이버>의 대한이나 영식만큼 그에게도 강렬한 유혹이었다. 지난해 초부터 각색에 들어가 시나리오 초고를 완성하긴 했지만, “잔잔함을 강조한 탓에 너무 밋밋한 것 같아” 2월까지 시나리오를 매만질 생각이다. 감독은 누구보다 빨리 달리고 싶었던 청춘들의 욕망에 초점을 두긴 하겠지만, 70년대에서 80년대로 진입하는 시기의 사회사적인 배경도 놓치지 않을 생각이다. ▒<내 푸른 세이버>는 어떤 영화 읍내 자전거포에서 살다시피 하는 꼬마 대한은 두살 터울인 동네 형 영식의 자전거를 얻어타며 우정을 쌓아간다. 두 친구는 칼 모양의 그림이 새겨진 유니폼을 입은 사이클 선수를 동경하게 되고, 그처럼 멋진 사이클 선수가 되겠다고 마음먹는다. 10년 뒤, 대한과 영식은 여전히 자전거 경주를 벌이며 실력을 키워간다. 대한은 자전거를 타고 할머니의 심부름으로 정체모를 거지에게 밥을 가져다주고, 영식은 우유배달을 하며 생활을 꾸려간다. 둘이 다니던 학교에 부임한 새 체육 선생은 둘에게 재능이 있음을 발견하고 사이클부를 만들어 가입을 권유한다. 선생의 딸인 미현에게 연정을 느낀 두 친구는 사이클부에 들어간 뒤 혹독한 트레이닝을 받지만, 영식과 달리 자유분방한 대한은 선생의 훈련 방식이 달갑지 않다. 첫 데뷔 경기를 앞두고 대한은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기 위해 도박 경륜에 참가하려다 선생과 미현에게 들키고 결국 사이클부에서 제명된다. 도내 경주대회에서 우승한 영식에게 경주를 제안하는 대한. 폭우 속에서 벌어진 둘의 경쟁은 이후 또다른 상처를 남기게 된다. 이영진 기자 anti@hani.co.kr

2001 신인감독 10인의 출사표 - 장항준

▒감독이 되기까지 <박봉곤 가출사건>의 시나리오 작가로 알려진 장항준(33) 감독은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남들 흉내까지 내면서 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지어내면 실제 있었던 일인 줄 알고 다들 깜쪽같이 속는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훈련된 것이라고 말한다. 고등학교 다닐 때 영화포스터만 보고 보지도 않은 영화스토리를 읊어대면 친구들은 그걸 진짜로 믿곤 했다. 서울예대 연극과에서 그는 졸업 전까지 학교 도서관에 있는 시나리오, 희곡 2천여편을 전부 읽었다. 극작에 흥미를 느껴 영화과 수업도 듣고 틈틈이 습작을 했다. 졸업할 무렵 영화현장을 경험하고 싶어 찾아간 곳이 <비상구가 없다>를 제작중이던 영화사 모가드 코리아. 이때 영화세상 대표인 안동규씨와 인연을 맺었고 연출부 경험을 쌓았다. 하지만 연출부 생활을 계속하기엔 먹고살 길이 막막해서 다른 일을 알아봐야 했다. 방송사 FD로 시작한 지 석달 만에 방송작가로 발탁됐고 <깜짝 비디오쇼> <좋은 친구들> <천일야화> 등 프로그램 대본을 썼다. 그러던 어느 날 안동규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가출한 아내를 찾아나서는 남자이야기를 영화로 만들려고 하는데 시나리오를 쓸 생각이 있냐는. <박봉곤 가출사건>이 그렇게 나온 작품. 그뒤 2년간 매달린 시나리오가 <뛰다가 생각이 나면>이지만 끝내 영화화하지 못했다. 경제적 어려움이 심했던 나날이었고 작가로서 산다는 것이 힘들다는 걸 절감한 때였다. 데뷔작 <불타는 우리집>은 지난해 5월부터 쓴 시나리오. <뛰다가 생각이 나면>이 무산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직접 연출하는 편이 좋겠다고 판단해 연출부를 구성했고 제작사도 직접 선택했다. 연출수업을 착실히 받은 건 아니지만 학창 시절부터 갈고 닦은 극작과 연기훈련이 연출에 대한 자신감을 준 셈이다. ▒어떤 영화를 만들것인가 장항준 감독은 좋아하는 영화로 <대부2> <정복자 펠레> <일 포스티노> 등을 꼽는다. 감동을 줄 수 있는 사람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것이다. 시나리오 데뷔작 <박봉곤 가출사건>과 감독데뷔작 <불타는 우리집>의 공통점도 그런 것이다. 그는 두 영화 모두 코미디라는 사실에 큰 의미를 두지 말라고 말한다. 무거운 이야기를 쉽고 재미있게 풀다보니 코미디 문법을 택한 것일 뿐이다. <불타는 우리집>의 출발점은 우디 앨런의 <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 유>다. 이 영화에는 출옥한 전과자 팀 로스가 어느 중산층 가정에 들어와 소동을 일으키는 이야기가 들어 있다. <불타는 우리집>은 이런 상황을 영화 전체로 확대시킨 모양새다. 평온해 보이는 가정과 험악한 전과자 사이에 일어나는 화학반응을 코믹하게 그릴 <불타는 우리집>은 결국 “세상은 살 만한 곳”이라는 따뜻한 결론을 준비한다. 전과자인 주인공을 얼마나 인간미 넘치게 묘사할지, 엉뚱한 상황전개가 얼마나 자연스런 웃음을 이끌어낼지가 관건일 것이다. ▒<불타는 우리집>은 어떤 영화 주인공은 절도전과 9범에다 바람피우는 아내를 살해한 죄로 6년째 복역중인 팔강. 그는 새로 생긴 전과자 재활프로그램의 대상자가 된다. 세상에 대한 증오로 가석방이 달갑지 않은 팔강이지만 새로운 재활프로그램이 하루빨리 없어지길 바라는 교도소에선 밖에 나가서 말썽피울 게 뻔한 그를 택한다. 재활프로그램은 가석방 전 단계로 전과자가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지 시험하기 위해 모범가정에서 한달간 생활하게 하는 것. 팔강은 가정문제연구소를 운영하는 중석, 죽희 부부의 집에 들어가게 된다. 겉보기에 매우 평화로운 중석, 죽희 부부의 가정. 고등학교 다니는 구근, 매화 남매가 있고 노환으로 거동을 못하는 할아버지가 있는 이 집은 알고보면 가족 각자가 제멋대로다. 남들 눈에 모범가정으로 비치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죽희, 아내 몰래 젊은 여자를 만나는 중석, 매일 근육키우는 일에 열심이지만 학교에선 맞고 다니는 구근, 선생님 앞에선 수줍은 여학생처럼 행동하지만 친구들한테는 거침없이 욕을 내뱉는 매화. 이들 넷은 험상궂고 안하무인인 팔강의 태도에 기겁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팔강과 가족 사이는 조금씩 변화한다. 남동철 기자 namdong@hani.co.kr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