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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이제는 시민의 방송

시민의 힘으로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신문을 만든다는 건 80년대 말, 믿기 힘들 만큼 엄청난 창조적인 꿈이었다. ‘6만주주’가 성금을 모아서 정말로 하나의 신문을 만든 사건은 세계언론사에도 없는 일이었다. 프랑스의 <르 몽드>도 시민이 만든 신문은 아니었다. 나치에 협력한 신문사를 정부가 접수하여 양심적 지식인들에게 불하해서 태어난 신문이었고, 스페인의 <엘 파이스>는 프랑코 독재에 저항하던 이들이 만들었다지만 한국과 같은 폭넓은 열망과 지지 위에서 출발하지는 않았다. 알다시피 한국 민주화운동의 결실이라고 해도 과히 틀리지 않는 그 신문이 <씨네21>의 모태이다. 출발 때의 목적과 의지가 출발 이후 과정 모두를 물론 합리화하지는 않는다. 다만 어떠한 시행착오를 했더라도 본질을 놓치지 않으려는 노력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 이 신문의 하루하루에는 애초 신문을 탄생시킨 우리 사회의 이상을 발전시켜가는 의무와 권리가 새겨져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다음의 꿈은 방송이었다. 달리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전파매체의 힘을 지금과 같은 구조에 맡겨놓을 수만은 없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그건 신문 만들기보다 더 무모한 희망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한겨레> 창간일이기도 한 5월15일, ‘시민이 만드는 - 시민방송’이 창립대회를 갖는다. “전파의 생산과 소유ㆍ유통ㆍ소비에 시민이 직접 참여하는 공익방송”이며, “아시아는 물론 세계에서도 처음으로 시민이 주체가 되어 만드는 디지털 위성방송”이다. 백낙청 재단법인 시민방송 이사장은 그 소개장에서 이 방송을 통해 “단순한 비판을 넘어선 대안언론, 대안문화”를 창출하리라 약속하고 있다. 시민이 프로그램 제작에 직접 참여하는 온전한 의미의 액세스 프로그램도 ‘Ctv’를 통해 보게 되리라. 오는 12월, 시민방송은 전파를 첫 송출할 예정이란다. 컴퓨터 제작 시스템 덕에 시민들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으로 전국적 일간지 창간에 뛰어들 수 있었다면, 시민의 텔레비전 방송은 위성과 디지털 방송이라는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실현가능한 프로젝트가 되었다. 시민방송은 그 자금확보를 위해 ‘옛날’처럼 시민모금을 시작했다. 기술독점에 대항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참으로 뿌리뽑힐 줄 모르는 우리의 희망이라니!

글쎄, 손끝을 보지 말라니까

며칠 전 ‘오늘 한 일은 없지만 끼니는 때워야지’ 하면서 식당에 들어갔다가 텔레비전에서 <조용한 가족>을 방영한다는 예고편을 보게 되었다. 처음엔, ‘아니 공중파에서 <조용한 가족>을?’ 하면서 놀랐다가 주말의 ‘명화’라기에 더욱 놀랐다. ‘아… <조용한 가족>이 이번주 주말의 ‘명화’로 선정됐구나.’ 혼자 이런 생각을 하며 감개무량한 마음으로 주말을 기다리게 되었다. 항상 그랬지만 주말은 찾아왔고 명화를 하는 시간이 되어서 모든 전화기의 배터리를 제거한 다음- 그 시간에 누가 나한테 전화를 걸어, “지금 뭐하냐?” 물어보면 대답하기 쑥스러워서- 방 안의 조명도 알맞게 맞춰놓고 몇번인가 자세를 고쳐잡으며 어서 명화하기를 기다렸다. 지루한 광고 때문에 잡았던 자세가 그새 흐트러지긴 했지만, 속으로 ‘명화라서 광고가 많이 붙은 모양이군’ 하면서 별 불평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광고 하나하나를 지켜보았다. 드디어, 화면이 바뀌어 시퍼런 배경에 ‘19세 미만 관람 불가’라는 자막이 ‘19세 미만의 올곧은 가치관과 정신을 가진 사람은 관람하기에 적당치 않은 작품으로…’ 어쩌고 하는 문구와 함께 떠올랐다. 난 씨익 웃으며 ‘그럼 그렇지. 그래도 코믹잔혹극인데’ 하면서 19세 미만 관람 불가 자막에 오히려 안도감을 느꼈다. <조용한 가족>을 공중파에서 한다는 것 자체에 의심을 가졌던 나로선 거의 ‘노커트’라고 생각하면 되겠네, 했다가 어김없이 잘려나간 잔혹하고 에로틱한 장면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4년 전 <조용한 가족>을 만들고 연출부에 작품평을 해보라고 했다가 연출부 막내한테 코믹잔혹극인지 알았는데 코믹잔잔극이라는 등 온갖 멸시와 수모를 당한 뒤 평생 마음의 상처로 남아 그 앙갚음으로 아직까지 연출부로 부려먹으려는 상황인데 정말 그나마 거기서 차 떼고 포 떼니까 마와 상으로 지그재그로 가게 생긴 꼴이 되었다. 그렇게 커팅을 자의적으로 한다면 보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영화를 띄엄띄엄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렇다면 영화 <친구>를 예로 들어보자(다른 감독의 영화를 끌어들여 죄송하지만, 요즘 워낙 뜨고 있어서). 그 영화의 잔혹한 장면 중 하나인 장동건이 칼 맞는 장면을 뺀다면, 장동건이 비오는 날 우산을 안 가지고와서 우산장수를 불렀는데 우산장수가 달려와 우산대로 장동건을 마구 찌르자 장동건이 “고마해라, 많이 묵었다”라고 하는 상황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요즘 뜨는 음료 CF의 경우, 정우성이 차에 치어 얼굴에 큰 부상을 당해 누워 있자 정우성을 친 장쯔이가 놀라며 차에 친 정우성에게 달려가는 것처럼 볼 수도 있는 것이다. 항상 예가 적당치 않아서 미안하지만, 어쨌든 만든 사람 입장에서 못나도 내 자식인데 팔다리 뚝뚝 떨어진 자식을 바라보는 마음이 그렇게 편하지만은 않았다. 그럼 19세 미만 관람 불가는 왜 그렇게 첫 화면부터 무시무시하게 써놓은 걸까?(사실, 전 시간을 통해 가장 무서운 장면이기도 했다) 우리나라는 극장에 가는 19살 이상인 사람들과 비디오 보는 19살 이상인 사람들 그리고 텔레비전을 보는 19살 이상인 사람들이 다 다르다는 얘기라는 것인지 알 듯 모를 듯했다. 물론 부분적으로 잘려나간 장면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게 아니다. 내가 <조용한 가족>을 만들면서 가장 신경썼던 것들, 그 모든 잔혹하고 에로틱하고 호러적인 컨벤션들을 낄낄거리는 유머로, 하나의 의도된 농담처럼 보이게 하고자 한 것인데, 이렇게 창작자의 기본 컨셉을 흔들어놓고, 개인적인 작풍이라 할 수 있는 영화적 ‘유희정신’이 부정되고 몰이해되었다는 것이 아쉽고 착잡했다는 말이다. 손끝을 보지 말고 손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으면 좋겠다.… 그래도 빨리 끝나니까 좋긴 좋았다. 김지운/ 영화감독·<조용한 가족> <반칙왕>

다시 대종상

다시 제38회 대종상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대종상 문제를 다룬 어느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끝부분을 우연히 보게 됐는데, 우리집 텔레비전 수상기는 사랑받아 마땅한 우리의 대종상이 신구세대의 갈등에 희생이 되고 말았다고 단정하고 있었다. 세대간의 화합을 강권하고 있었다. 정말 대종상은 세대갈등에 상처입은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극단적으로 보면 대종상의 역사는 온갖 로비설과 음모설이 서식해온 어두운 터널이었다. 오죽하면 당대의 활동성 높은 영화인들이 대종상을 거부하자는 집단적 움직임을 두어번씩 되풀이했을까. 불공정심사 의혹으로 상처입고, 운영비조차 마련 못해 해걸이를 하는 수모까지 당한 상. 철지난 냉전논리로 냉전이데올로기에 찌든 당국의 검열을 통과한 영화조차 빨간 딱지를 붙여 시상대 진출을 막던 상. 빛나는 영화의 싹을 발견할 힘을 잃은(아니면 시력이 애초부터 없었던) 노안을 과시하던 상. 빈사 상태의 대종상을 새숨을 불어넣어 긴급구조해온 건 언제나 영화였다. 대종상은 이따금 상 자체와 무관하게 뻗어나가는 한국영화의 뿌리를 잡고 자기가 파놓은 함정을 벗어나곤 했으니까. 대종상의 생존력은, 그래도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상을 갖고 싶다는 영화인들의 소망과 하루저녁 스타탄생의 경주를 기다리는 우리들의 욕망에서 나오는 건 아닌지. 신구가 화합하여 대종상을 살리자는 제안 역시, 대대적인 기획의 산물이라기보다는 그런 소박한 바람의 표현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것은 대종상 문제의 본질을 비껴간 오답이다. 영화상이란 어떤 의미에서건 일종의 비평적 기능을, 영화의 가치와 의미를 나름대로 읽어내 관객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게 마련이다. 발견하고, 선택한 영화를 옹호하고, 격려하는 것, 그 일을 제대로 했느냐 못 했느냐가 그 상의 정당성을 결정한다. 올해 인터넷을 통해 관객들 사이로 유례없이 빠르게, 폭넓게 번져간 대종상 시비는 바로 그 역할에 관한 부정적 평가에서 비롯됐다. 왜 대종상은 그런 결과를 보여주었는지, 누구 또는 무엇 때문인지를 정확하게 갈라보는 대신 ‘아버지에게 효도를!’만을 외친다면, 상처는 속으로 곪아들어갈 뿐이다. 무슨 희망으로 대종상을 다시 얘기하느냐는 힐난의 소리도 들린다. 그러고 보면 나 역시, 대종상의 자랑스럽지 못한 수명연장에 일조하고 있는 셈이니 책임을 면하기 어렵겠다. 그러니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대종상의 문제를 근본부터 다시 점검하자.

칸 영화제 | 아메리카의 드림 누아르

“미국영화는 고전적 예술이다. 그렇다면 왜 가장 찬미할 만한 것, 즉 이런 저런 감독의 재능뿐 아니라 그 시스템의 천재성을 찬미하지 않는가?” 앙드레 바쟁의 이같은 말을 오늘날 미국영화에 적용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판단일까? 할리우드의 오랜 장르 전통을 높이 평가한 그의 말은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릇된 것이 아니다. 적어도 올해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오른 5편의 미국영화는 프랑스 평론가의 혜안을 뒷받침한다. 개막작인 바즈 루어먼의 <물랑루즈>는 버스비 버클리, 빈센트 미넬리의 뮤지컬 전통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영화이다. 드림웍스의 애니메이션 <슈렉>은 어떤가? 디즈니에서 비롯된 귀엽고 예쁜 캐릭터들이 없었다면 <슈렉>의 못생긴 주인공이 돋보일 수 있었을까? 여기에 조엘 코언의 <거기에 없던 남자>, 데이비드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 숀 펜의 <서약>은 필름누아르의 역사와 떼놓고 생각하는 게 불가능한 작품들이다. 올해 칸 경쟁부문의 미국영화들은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하면서 영화 속 인물의 깊이를 만들어냈다. 그들은 반복되는 행동과 중첩된 이미지만으로 거대한 의미가 배어나오는 영화를 만들었고 그로 인해 올해 칸은 미국영화의 저력을 확인하는 자리가 됐다. 영화제 기간 동안 가장 좋은 평가를 받은 영화들이기에 조엘 코언과 데이비드 린치의 감독상 공동수상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영화가 개인예술의 차원을 넘어선 어떤 지점에 있다는 걸 보여준 예이기도 하다. 회색공간 속 이발사의 추락 - 코언의 <거기에 없던 남자> 조엘 코언의 <거기에 없던 남자>(The Man Who Wasn’t There)는 40년대 필름누아르의 분위기를 의도적으로 재현한 작품이다. 물론 코언 형제에게 이런 시도가 처음은 아니다. <분노의 저격자> <밀러스 크로싱> <파고>로 이어지는 범죄영화에서 그들은 장르의 규칙을 자유자재로 넘나들었다. 지난해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자기식으로 해석한 유쾌하고 화사한 뮤지컬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를 내놓았던 코언 형제는 <거기에 없던 남자>에서 다시 한번 <파고>의 회색공간으로 회귀했다. 흑백으로 찍은 이번 영화에서 중심에 놓인 인물은 에드 크레인이라는 이발사다. 빌리 밥 손튼이 연기한 이 사람은 하얀 가운을 입은 채 시종 아무 표정없는 얼굴로 등장한다. 배경은 1949년 여름 캘리포니아 북쪽 소도시, 크레인은 하루 종일 손님들 머리만 쳐다보는 무료한 일상에서 벗어나길 바라는데 어느 날 이발소를 찾은 한 남자가 드라이크리닝을 하는 기계가 떼돈을 벌어줄 거라며 바람을 넣는다. 1만달러만 있으면 지긋지긋한 이발소 생활을 청산할 수 있다고 생각한 크레인은 아내가 바람핀다는 사실을 알고 아내의 정부이자 그녀의 직장상사(제임스 갠돌피니)에게 협박편지를 쓴다. 1만달러만 내놓으면 사실을 눈감아주겠다는 협박은 제대로 먹혀 원하던 돈을 얻지만 크레인은 아내의 정부에게 꼬리를 밟힌다. 정부는 크레인을 불러놓고 “당신은 대체 어떤 종류의 인간이냐”며 화를 낸다. 아내의 부정을 이용해 돈을 벌려던 크레인의 행동은 <파고>에서 아내를 납치해 한몫 잡으려던 남자와 비슷하다. 사소한 이기심과 돈에 대한 집착이 예상치 못한 결과로 이어지는데 <거기에 없던 남자>의 크레인은 우발적으로 아내의 정부를 죽이고 만다. 남자가 죽자 엉뚱하게도 아내가 살인범으로 몰리고 억울한 아내는 자살을 택한다. 한번 나쁜 길로 들어선 크레인의 삶은 꼬일 대로 꼬여 엉킨 매듭을 풀 수 없는 상황에 이르고 만다. 줄거리로 보면 <파고>와 흡사하지만 <거기에 없던 남자>를 이끄는 것은 탐정의 시선이 아니다. 코언 형제는 여기서 평범한 어떤 남자의 자그마한 욕망과 그로 인해 비롯된 아찔한 추락을 그린다. 그들은 이것이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이중배상> <밀드레드 퍼스> 등의 원작소설을 쓴 하드보일드 작가 제임스 M. 케인의 세계에서 따온 것”이라고 밝혔다. 범죄소설이면서 갱이나 형사가 아니라 일상적인 인물이 주인공이라는 사실이 코언 형제의 의도와 부합한 것이다. 어쨌든 <거기에 없던 남자>는 ‘에드 크레인의 초상’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캐릭터 탐구에 충실한 영화이면서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게끔 대상과의 거리를 유지한 작품이다. 기자회견장에서 에드 크레인을 연기한 빌리 밥 손튼은 “험프리 보가트에게 영감을 많이 얻었다”고 말했다. 마음은 천국과 지옥을 오가면서도 어떤 표정 변화도 보이지 않는 태도도 그렇지만 장면마다 담배를 피는 설정에서도 험프리 보가트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프랑스의 <프리미어> <텔레라마> <렉스프레스> 등이 이 영화에 최고평점을 줬으며 <포지티프>의 미셸 시망도 별 4개를 헌사했다. 악몽과 유머의 뫼비우스 띠 -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 <거기에 없던 남자>가 그리는 것도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이지만 이 분야의 독창성 면에서 데이비드 린치를 능가할 감독을 찾기란 쉽지 않다. 코언이 아주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방식으로 장르의 틀을 빌린 반면 린치는 <이레이저 헤드> 시절부터 개척한 자기만의 스타일로 미국의 악몽을 보여준다. 신작 <멀홀랜드 드라이브>(Mulholland Drive)는 린치가 <블루 벨벳> <트윈픽스> <로스트 하이웨이>의 세계로 돌아갔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필름누아르와 공포영화의 경계에서 우리가 현실이라 믿는 평화로운 세계가 얼마나 무시무시하고 불안한 것인지 설파했던 린치는 이번 영화에서 할리우드를 동경하던 어떤 여인의 몰락에 초점을 맞춘다. 영화가 시작되면 한쪽에 ‘할리우드’라는 간판이 걸려 있고 다른 한편으로 대도시 LA의 야경이 보이는 한적한 비탈길을 달리는 리무진이 시야에 들어온다. 리무진 뒷좌석에 앉은 검은 머리 미인이 영문을 모른 채 살해되기 직전 마주 오던 자동차가 리무진을 들이받는다. 우연한 충돌사고로 목숨을 건진 여자는 언덕 아래 아담한 집에 몰래 숨는다. 이때 화면이 바뀌면 이제 막 LA 공항에 내린 또다른 여자가 등장한다. 금발머리에 귀엽고 천진난만한 표정의 그녀는 배우가 되기 위해 LA에 도착, 휴가 동안 집을 비운 숙모댁을 찾는다. 물론 그 집은 사고를 당한 여인이 숨은 곳. 금발 여자는 숙모집에 숨어 있는 그녀가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다는 걸 깨닫고 그녀의 기억을 되찾아주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흩어진 단서들을 좇으며 두 여자는 대도시 LA를 움직이는 알 수 없는 거대한 힘과 마주친다. 영화는 검은 머리 여인이 자기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 리타 헤이워스 주연의 <길다> 포스터를 보며 “내 이름은 리타”라고 말하는 순간, 명백한 필름누아르의 표식을 드러낸다. 두 여인이 악의 정체를 향해 한발씩 다가설 때마다 그들 내부의 비밀이 하나둘 밝혀지며, 치명적인 유혹이 끝없는 타락을 향한 입구가 된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원래 미국 방송사 <`ABC`>에서 미니시리즈로 제작하기로 했던 작품이다. 그러나 <`ABC`>가 파일럿 프로그램을 보고 제작을 포기한 탓에 프랑스의 카날플러스가 인수해 영화로 만들어지게 됐다. 린치는 이번 영화에서도 붉은 베일 뒤의 난장이를 등장시킨다. <트윈픽?gt;와 <로스트 하이웨이>에서 그랬듯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초현실적인 힘을 지닌 악마이다. 수수께기를 던져놓고 추리가 진행되는 동안 관객의 상상을 뛰어넘는 의외의 답을 내놓는 전개방식도 전작의 연장선에 있다. 이번 영화의 플롯 역시 뫼비우스의 띠처럼 앞뒤가 뒤틀려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미로이다. 그러나 좀처럼 어둠에서 벗어나지 않던 <로스트 하이웨이>와 달리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밝고 화사하며 유머러스한 면까지 있다. 여전히 악몽이긴 하나 린치의 이번 영화에는 누구나 한번쯤 이루고 싶은, 허망하지만 매력적인 꿈이 있다. <스크린 인터내셔널>의 에마뉘엘 레비는 “린치의 컬트팬들을 만족시키겠지만 비평가와 관객은 찬반양론으로 나뉠 영화”라고 말했는데 한 가지 덧붙이자면 전작 <스트레이트 스토리>와 함께 린치의 팬을 늘리는 데 기여할 영화이기도 하다. 잊어버려, 제리 블랙 - 숀 펜의 <서약> 수상작에 끼지는 못했지만 숀 펜의 <서약> 역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영화이다. <인디안 러너>와 <크로싱 가드>를 연출, 감독으로서도 재능있다는 평가를 받은 숀 펜이지만 세 번째 영화에서 그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팀 로빈스의 대를 이을 만한 깊이있는 연출력을 보여준다. <서약>의 주인공은 잭 니콜슨이 연기하는 은퇴 직전의 형사 제리 블랙이다. 내일이면 경찰배지를 반납할 제리 블랙은 살인사건 현장에 나간다. 희생자는 8살된 여자아이. 처참하게 난자당한 시신을 목격한 제리 블랙에게 희생자의 부모를 만나 딸의 죽음을 알리라는 임무가 주어진다. 그는 딸의 살해 사실을 듣고 오열하는 부모에게 반드시 범인을 잡겠노라 맹세한다. 용의자는 의외로 쉽게 잡히지만 경찰서에서 자살하고 만다. 사건수사는 그것으로 종결되지만 제리 블랙의 마음은 편치 않다. 은퇴한 뒤에도 그는 수사망을 피해 잠적한 진범이 있을 거란 의심을 지우지 않는다. 제리 블랙은 어린 여자아이를 노린 범인이 조만간 나타나리라 여기며 다음 범행장소로 예상되는 마을 입구 주유소를 사들여 길목을 지킨다. <서약>은 제리 블랙의 강박관념이 ‘미친 짓’이 아니라는 걸 암시하지만 등장인물들은 누구도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 진실은 영영 밝혀지지 않고 제리 블랙은 모든 이의 기억에 한낱 ‘미친놈’으로 남을 뿐이다. 형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수많은 영화가 있지만 <서약>(Pledge)은 선악대결이나 액션이 아니라 선의를 인정받지 못하는 어떤 인간에 집중하는 영화이다. 필름누아르의 탐정과 형사들이 겪는 쓸쓸한 말로라고 할까? <서약>에서 잭 니콜슨은 팜므파탈의 유혹을 받지 않는다. 그러기엔 이미 너무 많이 늙었고 힘도 없다. 대신 그는 가족을 갖고 싶어한다. 예쁜 딸과 함께 사는 외로운 여인(로빈 라이트 펜)을 만났을 때 남자는 그것이 이뤄질 거라 기대한다. 그러나 평화와 안식을 얻었다고 생각한 순간 그의 인생은 양심과 의무감에 발목잡혀 순식간에 곤두박질한다. 그리하여 영화의 오프닝과 엔딩을 장식하는, 폐허가 된 주유소에서 정말 미친 사람처럼 웃는 잭 니콜슨의 표정은 잊기 힘든 이미지이다. 로만 폴란스키의 <차이나타운>에서 탐정이었던 잭 니콜슨이 맞는 이 비극적 종말은 “잊어버려, 제이크. 여기는 차이나타운이잖아”라는 대사를 되씹게 만든다.칸=글 남동철 기자·사진 손홍주 기자·통역 이수원 ▶ 제 54회 칸 영화제 ▶ 수상 결과 ▶ 문 밖의 화제작들 ▶ 찬밥신세 된 영국과 독일영화들 ▶ 칸 마켓의 한국영화들 ▶ 황금종려상 <아들의 방> 감독 인터뷰 ▶ 심사위원대상 <피아노 선생님> 감독 & 배우 인터뷰 ▶ 아메리카의 드림 누아르 ▶ <거기에 없던 남자> 감독 조엘 코언 & 에단 코언 ▶ <멀홀랜드 드라이브> 감독 데이비드 린치 ▶ <서약> 감독 숀 펜 ▶ 3인의 거장, 세가지 지혜 ▶ <나는 집으로 간다> 감독 마뇰 드 올리베이라 ▶ <붉은 다리 밑의 따듯한 물> 인터뷰 ▶ <알게 되리라> 감독 자크 리베트 ▶ 아시아 작가주의 최전선 ▶ <거기 몇시니?> 감독 차이밍량 ▶ <밀레니엄 맘보> 감독 허우샤오시엔 ▶ <간다하르> 감독 모흐센 마흐말바프

이유있는 반항?

<공포의 외인구단>의 하국상은 왜 죽음을 무릅쓴 지옥훈련을 감행했을까? <미녀는 괴로워>의 칸나는 왜 거액을 쏟아부어 전신 성형을 해야만 했을까? <타짜>의 도일출이 24시간 궤짝 감금을 겪으면서도, 끝끝내 포커를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모두들 자신들을 꼼짝 못하게 얽어놓았던 지독한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누군가 만화란 ‘허풍과 과장의 예술’이라고 말하지만, 그 극한의 인물들을 창조하기 위해서도 그들 내면의 콤플렉스는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장치다. 성형미인, 외모 콤플렉스의 승리자? 흔히들 군인들은 치마만 두르면 침을 흘린다고 하지만, 사실 요즘에는 그렇지도 않다고 한다. 오히려 휴가를 나와서 여자들을 만나면 실망감에 치를 떤다는 것이다. 이유인즉슨, 매일 텔레비전에서 미모의 늘씬한 여자들만 보다보니 사회의 평균치에 적응할 수가 없기 때문. 비주얼의 시대, 그래서 외모나 신체에 대한 콤플렉스는 만화주인공들이 가장 많이 겪고 있는 고민이기도 하다. 고전적으로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던 여성들이 사고로 인해 그 아름다움을 잃어버리면서 고통받는 경우들이 많다. <디자이너>에서는 각광받는 신진 모델로 출세 가도를 달리던 아미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친 뒤 절망에 빠지게 된다. <유리 가면>의 쓰끼가게 선생은 화재로 인해 얼굴 절반에 치명적인 화상을 입고 긴 머리로 가리고 다닐 수밖에 없다. 이러한 외모의 변화는 그들의 성격에도 심대한 변화를 주게 된다. 그전까지 항상 세상의 주목을 받으며 인생을 평화롭고 밝게만 보던 여주인공들은 이빨을 깨물고 자신의 능력을 고양시키지 않으면 인생의 그늘 속에서 썩어갈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아미는 모델에서 디자이너로, 쓰끼가게는 연기자에서 연기 선생으로 제2의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유리가면>의 마야나 <캔디캔디>의 캔디는 다소 평범한 외모임에도 불구하고, 밝고 끈기있는 태도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적어도 평범하기는 했다. 진짜 못생기고 뚱뚱한 여자들의 서러움을 대변해주지는 못했다. 그런데 최근 젊은 여성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이른바 ‘성형미인’ 만화들은 외모 콤플렉스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다. <미녀는 괴로워>의 칸나나 <`ol 비주얼족`> 의 마에는 주목받지 못하는 선천적인 외모의 한계를 과학의 힘으로 ‘극복’하고자 전신 성형을 감행한 주인공들이다. 과거의 만화라면 분명히 그 ‘못생겼던 전력’이 드러나 망신당하는 신세가 될 게 뻔하지만, 이제 그녀들은 당당히 아름다워질 권리를 주장한다. <`ol 비주얼족`> 에서는 ‘남자에게 뒤지지 않으려면 능력’이라고 주장하는 호리기리까지 성형미인의 대열에 끌어들인다. 플러스의 에너지, 쾌활한 승부 그러나 세상은 이처럼 밝고 쾌활하게 진행되어가는 것만도 아닐 것이다. <그린 힐>의 제18화 ‘애벌레의 슬픔’편에서는 자신이 아직 피어나지 못한 애벌레라고 여기는 못생긴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나온다. 그는 자신만큼 추악한 외모를 지니고도 매일 포르노 잡지와 바나나를 사가는 오카를 경멸하며, 자신은 언젠가 성형수술로 미남인 본모습을 찾을 수 있으리라 여긴다. 하지만 의사들은 고개를 젓고, 오카는 그를 형제라고 부르며 달려와 ‘포기’할 것을 종용한다. 그것이 현실이다. 오카의 철학을 들어보라. “추남인 자신을 받아들이면 그때부턴 천국이야, 천국. 왜냐면 잃을 게 없거든.” 자포자기의 오카와 신체혁명의 칸나, 어느 쪽이 좀더 나은 해결책일까? 그래도 그들은 문제가 무엇인지는 안다. 그러나 ‘숨겨진 감정의 응어리’인 콤플렉스는 좀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경우들도 있다. 공포의 콤플렉스 군단인 <공포의 외인구단>에서 혼혈, 불구, 추남과 같은 외면적인 콤플렉스의 주인공들보다 고치기 어려운 것은 철저한 ‘기사 콤플렉스’에 빠진 오혜성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만화의 남성들 모두가 걸려 있는 ‘승리 콤플렉스’는 독자들까지 감염시키고 만다. 90년대 이후의 만화들이 밝아진 데에는 어느 정도 이 승리에 대한 강박을 벗어던졌기 때문이 아닐까 여겨진다. <슬램덩크>의 강백호는 지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이기는 것이 좋아서 싸운다. 마이너스의 에너지가 아니라 플러스의 에너지다. 산왕 신현철과의 맞대결에서 스스로 패배 콤플렉스에 걸린 북산의 채치수를 구원한 것은, 한때 그와의 싸움에서 패배해 ‘2인자의 콤플렉스’가 무엇인지를 잘 아는 변덕규이다. 그는 횟집 주방장 모습으로 나타나 채치수에게 생선 밑에 깔리는 무 역할을 하라고 한다. 1등주의의 콤플렉스를 역할과 분업 모델로 해결해나가는 것이다. 베스트 플레이어가 될 수 없다면, 능남의 경태처럼 ‘핵심 체크’를 하는 스포츠 평론가라도 될 수 있다. 마더 콤플렉스에서 관음증 환자까지 그러나 무의식에 내재하는 복합적인 콤플렉스들이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방향으로 전화해갈 때, 그것은 수많은 ‘범죄만화’를 양산해낸다. <소년탐정 김전일>과 같은 만화에서 범죄자들의 엽기적인 살인에 대한 논리적 동기가 부족할 때는 어린 시절의 심리적 충격을 빈번하게 끌어들인다. 게다가 <다중인격탐정 사이코>나 <지뢰진>은 그 주인공들이 정신질환에 가까운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심리호러만화라면 더욱 풍부한 임상 자료들을 모아낼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극단적인 주인공들이 판을 치는 만화의 세계야말로 최악의 정신병동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은하철도 999>의 철이는 마더 콤플렉스, <타이거마스크>는 연기성 인격장해, <닥터 슬럼프>는 관음증 환자이다.이명석|프로젝트 사탕발림 운영중 www.sugarspray.com

반성을 회의(懷疑)함

텔레비전을 보려고 쇼파에 길게 누워 있는데 벽에 걸었던 달력이 툭하고 떨어진다. ‘저게 이유없이 왜 떨어졌지?’ ‘못을 잘못 박았나?’ ‘허어, 정말 이상한 일일세….’ 얼른 일어나 무엇이 잘못됐는지 살펴보면 되는데 꼼짝하기 싫은 나는 그냥 그 자세로 계속 궁리만 하였다. 궁리만 한 게 아니고 벽이며 못이며 달력에다 대고 화까지 냈다. 혀를 차며 신경을 끄고 텔레비전을 보다가 무슨 미국 방송의 한 장면이 순간, 깨우침을 얻게 하였다. 라고 하기엔 좀 거창하고 많이 반성하게 했다. 그 장면은 한 건전하게 생긴 미국의 바른생활 아저씨 하나가 창고에서 공구함을 가지고 집안으로 들어와 땀을 뻘뻘 흘리며 집안의 선반과 창틀을 보수하는 장면이었다. 그때 난 아, 저게 미국의 프론티어정신, 존 웨인과 게리 쿠퍼 아저씨들의 정신, 그 정신의 생활화가 바로 저것이구나 하면서 뭔지 모를 의기충천함에 벌떡 일어나 떨어진 달력을 줍고 못질했던 곳을 찾다가 깜짝 놀랐다. 분명히 벽에다 못을 대고 망치질을 했는데 그 깊이가 곰보자국보다 더 얕아서 하마터면 못질한 곳을 찾지 못할 뻔했다. 속으로 못 끝에다 접착제를 발라도 이거보단 낫겠다 하는 생각이 얼핏 스쳐 지나갔다. 나는 다시 화면 안에 꼼꼼하게 식탁과 선반을 보수하는 그 미국인의 근면성을 보면서 얼굴을 붉혔다. 참고로 내 얼굴이 붉어질 때는 부끄러워서 붉어지기도 하지만 전혀 아무 일도 없는데 얼굴이 저 혼자 붉어지기도 한다. 아무튼, 그런데 생각해보니 매번, 비숫한 장면을 볼 때마다 그런 반성을 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그 전에도 반성은 많이 했었다. 문제는 반성이 아니고 실행력이었다. 늘 이런 생각을 머릿속에 가지고 다니다가 어느날 내 스스로에게 실행력을 보여줄 기회가 생겼다. 차를 타고 가는데 한쪽 바퀴에서 덜덜덜거리며 이상한 소리가 났다. 느낌상, 한쪽 바퀴에 무언가 달라붙은 것 같았다. 평소라면 바퀴에 삽자루가 꽂혀 있어도 귀찮아서 그냥 집까지 가는 나로선 그때 문득 그 ‘반성했던 것’이 떠올라 차를 후미진 길 한쪽에 세웠다. 내려서 보니까 아닌 게 아니라 엄지 굵기의 나사 하나가 박혀 있는 게 보였고 나는 몇년 전부터 뒤트렁크에 고이 모셔놓고 한번도 꺼내보지 않던 공구함을 열었다. 그때가 새벽 3시가 조금 넘었을 때였다. 주변엔 인적도 차도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나는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그 미국인 아저씨의 이마에 맺힌 땀을 상기하면서, 또한 반성하면서, 그 시간 그곳에서 아주 깊게 박힌 나사못을 빼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하다가 포기할 만도 했는데 고비 때마다 그 아저씨의 이마에 맺힌 땀을 또다시 떠올렸다. 그러다가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아주 깊숙이 박혀 빠질지 모르던 나사못이 쓩하고 빠져나갔다. 뿌듯했다. 해냈다는 성취감에 돌아서는데, 갑자기 푸우우 하는 소리를 내며 타이어의 바람이 걷잡을 수 없이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당황한 나는 허겁지겁 새는 곳을 막으려고 손을 갖다 됐지만 타이어는 만화처럼 ‘쭈우욱’ 하면서 오그라들었다. 인적도 없고 차량도 없었다. ‘가만,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새벽에 내가 한 짓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그런 굵기의 나사못을 빼면 바람 빠지는 게 당연한 거였다. 철퍼덕 철퍼덕 소리를 내며 완전히 가라앉은 차를 조금씩 몰고가 겨우 문닫힌 자동차 정비업소 앞에 세워놓을 수 있었다. 집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반성도 자주 하면 습관이 되고, 습관화된 반성이 내용없이 내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고, 그 관성화가 엉뚱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낄낄거리다가 그래도 너무한 거 아냐, 하면서 스스로 내 상태를 심각하게 생각해봤다. 그러면서 이 세상의 모든 반성적 행위들, 칼럼이며 일기장이며 고해성사며 자정선언이며 책임을 지고 사퇴하는 것이며 고발이며 조롱과 풍자 등을 생각해보았다. 확실히 반성과 실행 사이에 무엇인가 필요한 것이 있었다. 택시를 타고선 내 차가 서 있는 곳을 힐끗 쳐다보았다. 내 차는 현대차인데 대우서비스센터 앞에 놓고 온 게 보였다. 김지운/ 영화감독·<조용한 가족> <반칙왕>

페티시즘

제가 진짜 로맨스라는 것을 처음으로 인식한 건 대프니 뒤 모리에의 소설 <레베카>를 읽으면서부터였습니다. 네, 전 <레베카>를 소설부터 먼저 보았습니다. 초등학교 때 낱권으로 샀던 동서문화사의 세계문학전집 중 한권이었지요. 영화를 본 건 몇달 뒤였습니다. 사실 좀 일찍 볼 수도 있었는데, 주말 밤마다 텔레비전에 붙어 있다가 잠시 야간 시청을 금지당했었답니다. 그날이 아직도 기억나요. 잭 레먼 주연의 <아반티!>가 한창 클라이맥스를 향해 질주하던 중이었지요. 전 아직도 그 영화가 어떻게 끝나는지 모른답니다. 다시 <레베카> 이야기로 돌아가죠. 로맨스이야기를 하다 말았는데…. 아, 맞아. 이름없는 주인공과 맥시밀리언 드 윈터의 로맨스가 그렇게 강렬했냐고요? 천만에요. 저 자신이 꽤 서툴고 수줍은 사람이라 종종 그 이름없는 주인공에 감정이입이 되기는 합니다만 로맨스까지 접어들면 전혀 감이 안 와요. 게다가 맥시밀리언 드 윈터는 꼭 카본 카피한 로체스터 같은 사람으로, 개성도 매력도 없습니다. 영화 속의 로렌스 올리비에 역시 참 심심했지요. 전 맥시밀리언 드 윈터가 무슨 일을 당하건 신경도 쓰고 싶지 않았습니다. 뻣뻣하기가 정장차림의 마네킹과 맞먹었으니까요. 진짜 제가 로맨틱한 존재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덴버스 부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로맨티시즘을 확 깨워놓은 장면은…. 아마 많이들 짐작하셨을 겁니다. <셀룰로이드 클로젯>에서 한번 인용한 뒤로 다들 이 장면 이야기만 하니까요. 소설 속에서는 덴버스 부인과 주인공이 두 번째 만나는 장면입니다. 덴버스 부인이 레베카의 침실에서 죽은 여자 주인의 속옷과 잠옷을 하나하나 꺼내 주인공에 내밀면서 설명하는 장면 말입니다. 소설 속에서는 거의 대사로만 일관하지만 영화 속에서는 더욱 분명했습니다. 덴버스 부인은 정말로 레베카의 속옷을 쓰다듬고 있었으니까요. 주디스 앤더슨의 매섭고 건조한 용모 때문에 그 이미지의 대조는 더욱 분명했고… 아름다웠습니다. 물론 전 ‘죽음을 초월한 사랑’ 운운에는 이미 익숙했습니다. <폭풍의 언덕> 같은 비극적으로 끝나는 로맨스소설을 줄줄 읽다보면 다들 익숙해지지요. 하지만 덴버스 부인은 조금 달랐습니다. 덴버스 부인의 사랑은 지극히 관능적이고 육체적이었습니다. 사랑의 대상은 오래 전에 고기 밥이 되어 하얀 뼈만 남았는데도 말이에요. 죽은 주인에 대한 덴버스 부인의 사랑은 다른 비극적 연애소설들처럼 육체를 초월한 정신적인 사랑으로 이어지는 대신 오히려 더 육감적이 되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덴버스 부인의 패러독스는 제가 알고 있는 세계의 규칙과 전혀 맞지 않는 것이어서 굉장히 오랫동안 제 기억에 남았습니다. 아마 제가 온갖 종류의 페티시즘에 집착하는 것도 그 때문이겠지요. 최초로 접한 진짜 로맨스의 느낌이 무뚝뚝한 중년 아줌마의 속옷 페티시와 연결돼 있었으니 말입니다. 적어도 제 머릿속에서 페티시스트들은 더 창의적인 연인들입니다. 눈앞에 버티고 있는 육체에 생각없이 흥분하는 ‘정상적인’ 사람들과는 달리 자신의 육체적 사랑을 무언가 다른 것들로 변형시키는 것이니까요. 어떻게 생각해보면 시에서 크게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답니다. djuna01@hanmail.net

미이라 2

■ STORY 기원전 3067년. 파라오에게 도전했다가 패퇴한 스콜피온 킹(더 록)은 죽음의 신 아누비스와 영혼을 건 계약을 맺고 복수에 성공하는 대신 암흑에 결박된다. 5천년이 흐른 1933년. 9년 전 모험 이후 결혼한 릭(브렌단 프레이저)과 에블린(레이첼 와이즈)은 탐사중 스콜피온 킹의 팔찌를 손에 넣는다. 한편 부활에 실패했던 이모텝(아돌프 보슬루)을 깨우고 스콜피온 킹과 대결시켜 아누비스 군대를 수하에 두게 하려는 이모텝의 신도들은 팔찌를 찾아 릭과 에블린의 런던 집을 습격하고 아들 알렉스를 납치한다. 릭 부부 일행은 알렉스를 살리고 종말을 막기 위해 이집트로 떠나고 그 여정에서 에블린은 전생을 기억해낸다. ■ Review 내세에서 다시 살아나려면 육신도 보존돼야 할 거라 믿고 고대 이집트인들이 착안한 발명품이 바로 미이라임을 되짚어보면, <미이라2>만큼 스스로 선택한 제재에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한 영화도 찾기 힘들 것이다. <미이라2>를 지배하는 아이디어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부활 또는 ‘재활용’이기 때문이다. 감독 스티븐 소머즈를 위시해 전편의 촬영, 편집, 미술 스탭이 모두 재소집돼 만들어낸 <미이라2>는 초여름의 슬리퍼히트(세계 박스오피스 4억1400만달러)를 기록했던 전편의 캐릭터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건 아랑곳 않고 죄다 불러모은다. 그리고 그 주인공 중 한명은 말 그대로 죽다 살아나며, 악역인 이모텝과 아낙 수 나문은 1,2편에 걸쳐 세번 죽는 수난까지 겪는다. 스티븐 소머즈 감독은 액션과 에피소드, 캐릭터와 농담도 전편과 일일이 요철을 맞추는 모범생 기질을 발휘한다. 전편의 고대 치정극은 2편에서 다른 시점으로 반복되고 릭과 에블린의 아들 알렉스는 처녀 시절 엄마가 책장을 넘어뜨린 모양 그대로 사원 돌기둥으로 도미노 게임을 벌이며, 미워할 수 없는 기회주의자 조나단은 변함없이 가는 곳마다 금세 들통날 허풍을 떤다. 한편 아들 알렉스의 등장은 세대에 걸쳐 반복, 유전되는 모험담의 ‘네버 엔딩 스토리’적 속성을 강조한다. 인디애나 존스가 결국 아버지를 모험에 끌어들였듯이. 2편에서도 살 파먹는 풍뎅이 떼는 여전히 번성하고, 이모텝은 모래 대신 물 가면을 뒤집어쓰고 노호한다. <쥬라기 공원2>의 꼬마 공룡을 닮은 꼬마 미이라 떼의 수풀 습격, <와호장룡>의 장쯔이와 양자경처럼 무기를 바꿔가며 결투하는 아낙 수 나문과 에블린, <이집트 왕자>의 갈라진 홍해를 연상시키는 물의 절벽, 달을 배경으로 나는 비행선의 낯익은 실루엣, 날아오는 칼을 잡고 벽과 천장을 타는 무중력 액션 등등 보는 동안 머리를 스쳐가는 과거 영화도 숱하게 많아 세어보는 재미도 시들해질 지경이다. 그러나 전편 <미이라> 또한 태생이 과거 할리우드 모험물과 루카스-스필버그 조의 처방을 꼼꼼히 답습한 영화였음에 생각이 미치면, 이런 식의 ‘있다 없다’ 게임은 부질없는 유희일 뿐이다. 해묵은 어드벤처 내러티브와 재미가 검증된 액션 시퀀스들의 다이제스트판 같은 <미이라2>는 동일한 차림표의 상을 훨씬 푸짐하고 떡 벌어지게 차려내는 방식으로 손님을 접대한다. 지옥에서 살아난 적은 전편보다 더 살벌하고, 군중신에 동원된 병사의 머릿수는 더 많으며, 전투 시퀀스는 더 길다. 이 부분에 있어서 컴퓨터그래픽으로 전신 마사지를 받다시피한 <미이라2>는 이집트학보다 조지 루카스의 ILM(Industrial Light & Magic)에 더 큰 빚을 지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 혹시 장르를 애니메이션으로 구분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고민에 잠시 심각해질 정도. 스콜피온 킹과 이모텝과 릭, 아누비스의 병사들과 아데스의 군대, 에블린과 아낙 수 나문 등이 태그 매치를 벌이는 최후의 결전은 마치 스포츠경기의 플레이오프전을 다원 생중계로 보는 것 같은 클라이맥스를 연출한다. 서비스정신도 투철하다. 시시콜콜 액션을 참견하며 액센트를 넣는 앨런 실베스트리의 음악과 스포츠음료 광고처럼 클로즈업과 느린 화면으로 놓치지 말 부분을 짚어주는 카메라는 관객의 노력을 최소한으로 줄여준다. <미이라2>가 내세우는 신무기는 1편에 비해 몰라보게 향상된 주인공들의 전투력, 3D 게임기처럼 홀로그램 영상을 투사하는 팔찌, 그리고 인기 정상의 프로레슬러 더 록을 캐스팅한 반인반수의 스콜피온. 그러나 바이킹도 한 시간쯤 타면 졸린 법이다. 전편에 비해 아기자기한 액션의 재미는 대체로 반감된 속편에서 가장 솔깃한 시퀀스는 이집트의 장대한 유적지를 벗어나 따분한 런던 거리에서 벌어지는 2층 버스의 오밀조밀한 액션장면이다. ‘롤러코스터 같은’이라는 표현은 상투어가 된 지 오래지만 <미이라2>는 그야말로 몸을 움직이기 싫어하는 사람을 위한 놀이동산 같은 영화다. 동굴에서 장애물을 피해 뛰고 구르는 이른바 ‘인디애나 존스 라이드’부터 열기구, 청룡열차, 공중에서 급류타는 후룸라이드까지 골고루 갖춰진 이 테마파크에서는 줄을 서 기다릴 필요도 없다. 그저 놀이기구에서 놀이기구로 옮겨갈 뿐, 이 공원에는 쉬어갈 벤치도 파라솔도 없다. 그래서 “왜 당신네들은 도무지 땅에 발을 붙이고 있지 못하는 거요?” 파라오 경호전사의 후손 아데스의 물음은 영화 <미이라2>에게 되돌려진다. <미이라2>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단순히 조립된 오락영화를 자임하지만 그 사실을 스스로도 모르지 않고 만들었음을 강조하는 자존심도 끝끝내 세운다. “다 아는 뻔한 스토리야.” “이번에 뭐였냐구? 뭐 미이라랑, 피그미랑, 또 큰 벌레들이랑, 늘 똑같지 뭐.” 이들은 <미이라2>가 자주 되풀이하는 대사다. 릭은, “당신은 섬세한 남자가 못 되는군요”라는 아내의 잔소리에 “우리한테는 섬세할 시간이 없어”라고 대꾸한다. <미이라2>의 영웅들은 부식하다 만 해골들로부터, 나일강의 물살로부터, 무너지는 사원의 기둥으로부터, 심지어 떠오르는 태양빛으로부터 끝없이 도망치고, 다시 관객은 그들의 도주 속으로 끝없이 도피한다. 도대체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이렇게 열심히, 최대한 화려하게 도망치고 있는 것일까.김혜리 기자 감독 스티븐 소머즈 “이번엔 더 크고, 더 재미있게” “지금까지 내가 만든 가장 복잡한 영화였다.” 영화전문지 <팡고리아>와의 인터뷰에서 <미이라2>에 대해 스티븐 소머즈 감독(39)이 밝힌 소감이다. 소머즈가 겪은 어려움의 대부분은 영화 전체를 뒤덮고 있는 컴퓨터그래픽 캐릭터와 특수효과에서 비롯됐다. 스탭은 100명이 넘어도 완성된 그림을 머릿속에 넣고 있는 사람은 감독뿐이었기에 소머즈는 그들을 드라마 속에서 종합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캐릭터들과 씨름을 벌여야 했던 것. 그러나 <미이라2>는 소머즈의 가장 복잡한 영화일지는 몰라도 가장 고생스런 영화는 아니었을 것이다. 데뷔작인 저예산 독립영화 <잡을 테면 잡아봐>의 가난도 없었고 모로코, 요르단의 사하라 사막지역과 영국 셰퍼튼 스튜디오에서 이루어진 촬영도 인도에서 영화를 찍어본 경험이 있는 소머즈 감독으로서는 낯설지 않은 곤란이었기 때문이다. <미이라>로 일약 흥행사로 떠오른 소머즈는 괴물과 야수의 기습이 곁들여지는 판타지적 공포가 있는 모험물로 필모그래피를 채워온 감독. 미네소타 출신인 소머즈는 스페인의 세빌랴대학을 졸업한 뒤 연극배우로서, 록밴드 매니저로서 유럽을 주유하다 USC에서 텔레비전과 영화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독립영화 방식으로 제작한 데뷔작 이후 월트 디즈니에서 <허클베리 핀의 모험> <정글 북> 등 소년 관객을 겨냥한 모험영화를 연출했으며, 한편으로는 B급 액션영화의 각본을 썼다. <미이라> 시리즈 전에 연출한 <딥 라이징>은 바다 괴물과 벌이는 사투를 그린 스릴러. <미이라2>의 제작에 임하면서 소머즈 감독은 전편에서 관객이 가장 좋아한 장면 10개를 뽑아 재연하고 확대하는 전략을 쓸 정도로 “더 크고 더 재밌게” 만든다는 원칙에 순응했다. 소머즈 감독의 차기작은 <미이라2>에서 스콜피온 킹 역을 맡은 인기 레슬러 더 록의 스타 비히클인 <스콜피온 킹>으로, 역시 유니버설이 제작해 금년 안에 개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