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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마론인형에서 배우로, <킬 빌 Vol.2>의 대릴 한나

<블레이드 러너>(1982)의 여자 안드로이드를 기억하는가. <킬 빌>의 애꾸눈 킬러로 등장한 대릴 한나를 발견하는 순간 그 이미지가 곧바로 떠오른다. 탐스러운 금발을 푸석푸석한 파마로 대신하고, 짙은 눈화장으로 표정을 숨긴 채, 기계 같은 몸을 무기처럼 사용했던 <블레이드 러너>의 프리스 이후, 긴다리를 하늘거리는 푸른 지느러미 속에 감춘 <스플래쉬>(84)의 ‘인어공주’를 지나, <투명인간의 사랑>(1992), <투 머치>(1996) 등 금발 미녀의 몇 가지 변주만을 보여준 영화까지, 흘러가는 세월 속에 금방이라도 잊혀질 듯했던 그가 그렇게 돌아왔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눈, 거짓말 같은 금발, 그리고 더욱 거짓말 같은 몸을 가진 이 배우는 자신의 신체를 왜곡한 캐릭터를 연기할 때에 비로소 빛을 발한다. 이번에는 검은 안대로 푸른 눈을 가리고, 모든 감정을 얼굴에서 지워버렸다. 저마다의 사연을 남기고 죽어간 데들리 바이퍼 단원(딸 앞에서 살해된 버니타, 어린 시절 부모의 죽음을 목격했던 오렌 이시, 브라이드가 안겨준 배신감에 엄청난 학살을 감행했던 빌)들에 비해 별다른 과거가 없는 엘르 드라이버는 다소 밋밋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들에게는 없지만 그만이 가진 것들이 있다. 브라이드를 살해하려 병원에 침투한 뒤 간호사복과 함께 안대까지 ‘간호사용’으로 바꾸는 센스(?), 혹독한 훈련을 못 견디고 사부에게 대들어 단번에 ‘눈알 뽑힌’ 뒤, 가차없이 스승을 독살해버리는 ‘성깔’ 등이 그것이다. 물론 우마 서먼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그를 향한 타란티노의 배려 또한 만만치 않았을 것임을 깨닫게 되는 증거들이다. 런던에서 연극 공연 중이던 대릴 한나를 찾은 타란티노는 앞뒤 설명도 없이 “당신을 모델로 한 캐릭터가 등장하는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며 출연제의를 했다. “그는 시나리오를 보내주기 전에 75개가 넘는 비디오 테이프들을 보내줬고, 나는 공부하는 기분으로 70년대 홍콩영화, 일본 애니메이션, 스파게티 웨스턴 등을 봤다. 예전부터 타란티노 감독의 광팬이었기 때문에, 나에게 그 시간은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가능한 그가 작업하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려고 했다.” 자신이 연출한 단편 <최후의 만찬(The Last Supper)이 베를린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받기도 했던 이 감독지망생은, 내용은 구체적으로 밝힐 수 없지만, 앞으로 다큐멘터리 작업을 할 것이라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대릴 한나는 이제야 자신의 이미지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를 깨닫게 된 것 같다.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전율의 텔레파시>(The Fury, 1978)로 데뷔한 이후 30년이 걸린 일이다. 그는 최근 미국 독립영화계의 대부 존 세일즈(<메이트원>) 감독의 최근작 〈Casa de los babys>(2003)과 그 감독의 차기작 <은빛 도시>(Silver City)에 출연했다.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마이클과 마크 폴리시 형제의 기괴한 작품 〈Northfork>에는 “꽃”(말 그대로!)으로 등장했다. 모험을 즐기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고등학교 동창회에 가보면 어떤 친구는 폭삭 늙었는데 어떤 친구는 몇 십년 전과 그대로다. 전자는 ‘난 이제 배울 게 없어. 그냥 여기 눌러 앉아도 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고, 후자는 계속해서 배우고 성장하려고 애쓰는 이들이다. 나는 아직도 모든 것을 더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등, 다른 단계로 스스로를 끌어올리는 것은 너무나 재밌는 일이다.” 완벽한 외모를 가진 여배우가 진짜 연기생활을 시작하는 것은 30대 이후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 할리우드의 생리인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그 시작을 할 수 있는 배우들도 한정된 상황. 관객의 입장에서 지금의 대릴 한나는, 기꺼이 시선이 가는 배우가 되어가고 있다.

[LA] 그들이 없는 재난을 상상하라!

4월 마지막 주, LA 도심 곳곳에 수상쩍은 가두 광고판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할리우드에서 한 라티노 시민의 항의로 광고판이 철거되고, 미디어가 앞다퉈 사건을 보도하기에 이르렀는데. 문제의 광고는 “5월13일, 캘리포니아엔 단 한명의 멕시코인도 없을 것이다- 확인 www.adaywithoutamexican.com”이라는 해괴한 내용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불법 라티노 이민자들에 대한 주정부의 각종 법안이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 가운에 이 의문스런 광고는 5월13일 개봉하는 <멕시코인이 없는 하루>(A Day without a Mexican)의 홍보용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어느 날 아침 깨어보니, 캘리포니아의 모든 라티노(라틴계 사람)가 사라져버렸다면. 라티노 인구가 총인구의 34%에 육박하는 캘리포니아의 상황에선 이것이야말로 재난이다. 이 독특한 재난영화는 입소문을 타고 캘리포니아의 56개 스크린에서 개봉 첫주 스크린당 평균 1만달러의 수입을 올리며 <트로이>에 이어 흥행 2위에 올랐다. 비록 이 영화가 불법 이민 노동자라는 민감한 문제에 대한 똑 부러진 해답은 제시하지 않지만 가정부, 식당, 공사장의 온갖 허드렛일을 맡아하는 불법 이주 노동자부터 교사, 경찰관, LA다저스의 선수들, 주지사에 이르기까지 라티노가 몽땅 사라진 캘리포니아의 아노미 상태를 신랄한 풍자와 코미디를 곁들인 가짜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그려내고 있다. TV 미디어와 디지털 비디오의 미학을 효과적으로 차용해 일반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어렵지 않은 비판의 목소리를 들려준 이 영화의 감독은 멕시코 출신의 세르지오 아라우. 마지막 라티노 생존자로 출연한 부인 야렐리 아리즈멘디와 함께 1998년에 만든 동명의 단편영화를 리메이크했다. 캘리포니아 전 주지사 시절, 불법 이민자들의 사회복지 혜택을 제한하는 법안 187에 대한 비판으로 만들어진 단편영화를 리메이크하기까지 4년이 걸린 것은 제작비 확보의 어려움이었다. 하도 당연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라티노 이민자들의 존재를 “보이게” 하고 싶었다는 제작진의 소망에 관심을 가질 할리우드 스튜디오가 있을 리 만무해서, 개인 자금과 멕시코의 각종 단체에서 받은 지원금으로 150만달러의 제작금을 충당할 수 있었다고. 결국 투자, 제작, 배급에 이르기까지 순수 멕시코의 파워로 만들어진 최초의 멕시코산 영어영화가 되었다. 크레딧에서 눈에 띄는 것은 처음으로 영화 배급에 참여한 텔레비사 시네(Televisa Cine)사이다. 라틴아메리카의 미디어 산업을 장악하고 있는 멕시코 제일의 미디어 재벌, 텔레비사는 라티노 관객의 파워를 증명한 이번 영화의 흥행 성공에 고무되어 올해 안으로 몇편의 영화를 더 배급할 것이라고. 없을 때 아쉬운 자들의 목소리는 곧 미주 다른 지역으로 확대 개봉될 예정이다.

영상자료원 DVD·VHS 열람료 비판에 대한 반론

지난호 <씨네21>에 실린 ‘고전영화 DVD와 VHS 열람 입방아’(454호 26쪽 리포트 인사이드 충무로)라는 제하의 기사는 한국영상자료원의 “고전영화 DVD와 VHS 열람료가 지나치게 비싸 이용자들에게 불만을 사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이에 거명된 한국영상자료원의 실무자로서 해명하고자 한다. 한국영상자료원(이하 영상자료원)에서 이 영화들을 열람할 수 있기 전까지 내방객들이 고전영화를 접할 수 있는 방법은 상영회를 통하거나 영화필름을 시사실에서 열람하는 것이었다. 전자는 비교적 비용이 저렴(2천원)하지만 프로그램 일정에 맞춰야 원하는 영화를 볼 수 있었으며, 후자는 사전 이용신청 절차를 거쳐 고가의 비용인 대관료와 필름사용료로 약 20만원(스텐백 사용의 경우 약 15만원)를 부담해야 했다. 참고로 외국의 경우는 부담이 더 큰 것으로 알고 있다. 영상자료원은 지난 5년여 동안 고전영화를 중심으로 영화필름 600여편의 텔레시네 작업을 진행해왔으며 지난해에 처음으로 이중 36편을 DVD로 제작했다. 지난해에 저작권법이 개정되면서 자료원 보유 자료에 대한 자체 디지털 복제와 내부에서의 열람이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료원 고전영화 이용자 수는 많지 않다. 아니, 우리가 들인 노력에 비하면 실망스러울 정도로 적다. 영화과 학생들조차 페이퍼 제출 등의 이유로 일시적으로만 몰려든다. 상영회 또한 1회에서 3회로 횟수를 늘렸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관람률은 기대 이하다. 이는 프로그램과 홍보문제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얼마나 보편적인 목소리를 지난주 기사가 담았는가에 대해 회의를 가지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영상자료원은 한명의 목소리라도 발전의 계기로 삼고자 한다. 따라서 좀더 전향적이면서도 합리적인 열람 방식과 쿠폰제, 회원제 할인 운영 등 서비스 개선을 검토할 계획이다. 고전영화의 이용률이 높아진다면 전용 부스도 확대할 것이며, 열람이 용이하도록 모니터링 시스템도 보완할 것이다. 자료원은 올해 100편의 DVD제작을 진행 중이며, 또한 저작권 시효가 만료되어 현재 온라인 서비스가 되고 있는 초창기 영화들을 대상으로 빠르면 올해 하반기부터 DVD 출시도 기획 중이다. 어떤 분들은 자료의 복제를 이상적인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자료원이 제작한 영상물을 공공 및 학교 도서관에 배포하고 이용자에게 복사 제공해주자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행 저작권법을 위반한 서비스를 할 수는 없다. 도서관 문헌자료 원문에 대한 보상금 제도와 같이 영상물에 대한 보상금 제도가 포함되도록 저작권법 개정이 이루어져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열람료 자체에 대한 불만은 ‘인류 공통의 유산 그리고 국민의 자료’에 대한 이용 권리의식보다 수혜자 부담의 의무에 대한 의식이 낮은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본다. 현행 열람료를 극장 입장료(7천원)나 자료원 행사 입장료(2천원) 그리고 자료실 이용료(500원)와 비교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는 생각이다. 수십명, 수백명을 대상으로 하는 상영과 비교하는 것도 그렇지만, 희소가치가 있는 자료의 재생산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현재의 5천원은 한명이 보든 두명이 보든, 혹은 빔 프로젝트 사용료를 별도로 지불한다면 100명 이상이 보든 모두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금액이다. 귀중한 자료라면 그것이 마멸될 순간을 대비한 최소한의 비용을 부담하는 것이야말로 공동체 문화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클로드 미셀 “문화다양성 협약, 출발부터 강력해야”

CCD총회참석 '프랑스 공연예술노조 위원장' 올해 칸영화제에서 비정규직 노동자 처우개선 시위를 벌인 프랑스 공연예술노조의 클로드 미셸(49) 위원장이 4일까지 열리는 ‘제3회 국제문화전문가단체(CCD) 총회’ 참석차 한국에 왔다. 사회학 교수에서 유럽의회 문화 담당 의원, 프랑스 영화감독노조연맹 대표 등 문화운동가로 나선 클로드 미셸은, 프랑스가 현재 WTO 무역협상에서 문화상품의 예외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미국의 움직임에 반대하는 유럽의 대표국가임을 감안할 때 매우 비중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칸영화에 운영위원도 10년째 맡고 있다는 그를 지난 1일 만났다. 프랑스에서 문화다양성 보장을 위한 운동이 시작된 건 언제부터인가. 97년 다자간무역협상이 시도됐을 때, 문화상품 예외를 인정받기 위해 문화단체들의 위원회를 만들었다. 정부는 이 문제에 소홀한 상태였다. 그때 문화단체들의 운동 덕택에 98년 다자간무역협상이 결렬됐다. 그래서 한동안 뜸했는데, 2000년 들어 WTO 협상을 앞두고 다시 전열을 정비할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2001년 9월 몬트리올에서 열린 ‘1차 CCD총회’에 참석하고 2002년 파리에서 2차 총회를 열었다. 문화다양성과 관련해 한국에선 스크린쿼터가 최대 쟁점인데, 프랑스는 어떤 쟁점이 있는가. 텔레비전에서 영화를 방영할 때 일정 비율을 유럽연합 영화를 틀도록 하는 텔레비전 쿼터제와 영화관람료에 영화지원기금을 물리는 것, 데뷔 감독에게 제작비를 지원해주는 보조금 지급제도 등이 미국 요구와 상충될 소지가 있다. 또 몇몇 감독들은 최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이 극장을 점령해 예술영화들이 개봉할 공간이 없어지는 현상에 분개해 한국의 스크린쿼터 같은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내고 있다. 텔레비전 쿼터제는 유럽연합 법안으로 채택했으나 의무적인 건 아니어서 다른 나라들은 쓰지 않고 있다. 문화다양성 보장을 위한 운동이 유럽 다른 나라에선 프랑스 만큼 활발하지가 않다. 내년 유네스코 총회에서 채택하려고 하는 ‘문화다양성 협약’의 의미는. 문화다양성을 보장받을 국제법이 없다. 선언문, 결의문만 많다. 미국이 움직임에 맞설 수 있는 강력한 법제도가 필요하다. 그게 유네스코 협약이다. 야심찬 계획이지만 처음부터 강력하게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임범 기자, 사진 CCD총회 제공

[비평릴레이] <여.친.소>, 김소영 영화평론가

<내 여자 친구를 소개합니다>를 비평적으로 소개할 필요를 절실하게 느끼기는 좀 힘들다. 그러나 아시아를 잇는 한국의 대중문화, 아시아 상호간의 대중문화교류를 이해하는 텍스트로서는 중요하다. <내 여자 친구를 소개합니다>(이하 여친소)의 전작이라고 할 수 있는 <엽기적인 그녀>가 홍콩, 대만, 일본, 타이의 젊은 관객들에게 한국 영화를 감정적으로 친밀하게 받아들이게 만드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영화진흥위원회 자료를 보면 중국에서 <엽기적인 그녀>는 <나의 야만적인 여자 친구>라는 제목으로 발매되었다. 불법 DVD 판매이긴 하지만 300만장에서 1000만장까지 DVD가 유통되면서 중국권의 젊은 관객들에게 엽기발랄한 이미지의 전지현이 알려지게 된다. 대만에서 <엽기적인 그녀>를 본 젊은 여성들은 엽기적인 여자 친구가 되고 싶어 했고, 홍콩의 젊은 남자 관객들의 호응도 열렬했다. 아시아에서 할리우드의 문화지배가 허물어지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동아시아와 동남 아시아에서 일어난 일본 대중문화에 대한 열풍과 맞물린다. 이어 1990년대 말, 한국의 텔레비전 드라마와 가요가 한류라는 명칭으로 유통되기 시작하고, <쉬리>와 <공동경비구역 JSA>가 주목을 끌면서, 한국 영화는 일본 등을 비롯한 아시아 시장에서 주목을 받게 된다. 123분 상영시간 고역. 그러나 관심을 보낼 필요는 있다 <여친소>는 이렇게 <엽기적인 그녀>의 연장선에서 아시아의 젊은 관객들에게 다가가려 한다. 홍콩의 제작자가 제작비를 부담하고, 홍콩, 중국, 한국에서 동시 개봉을 하는 등 <여친소>는 한국 영화가 범아시아적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가질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사례 연구를 제공할 수 있다. <엽기적인 그녀>의 핵심인 성 역할의 전도는 <여친소>에서도 두드러진 요소다. 능동적이다 못해 폭력적인 여자와 심약하고 착한 남자가 벌이는 (헛)소동이 멜로드라마와 액션 장르의 관행들을 적극적으로 취하면서, 개연성이 없는 사건들을 그럴 듯하게 포장해낸다. 영화가 시작되면, 여자 경찰인 경진(전지현)은 곧 고등학교 선생님이 될 명우(장혁)를 소매치기로 오인해 경찰서로 끌고 온다. 이후 명우는 경진의 구타와 구박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남자친구가 된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범인 검거 현장에 경진을 돕는답시고 서성거리다가 가슴에 총을 맞고 죽게 되는데, 이후 영화는 <고스트>의 관행을 따라 죽은 남자 친구가 살아있는 여자 친구의 지킴이가 되는 고스트 러브 스토리로 변한다. 로맨틱 코미디라고 자신의 장르를 소개함에도 불구하고, <여친소>에서 흥미로운 점은 젊은 남녀의 로맨스가 결코 어떠한 성적 접촉으로도 이어지지 않는데 있다. 명우가 키스를 하려하자 경진은 심지어 불쏘시개로 그의 입술에 화상을 내기도 한다. 엽기 속의 이해 불가능한 ‘순수‘가 감독 곽재용의 로맨틱 코미디의 핵심인 셈이다. 이렇게 사회적으로는 성인이지만, 관계 속에서는 미성숙한 남녀의 이야기가 스타 만들기와 홍보 등을 통해 아시아 영화로 자신을 재포장해 내는 과정을 증후적으로 읽어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반면 억지춘향의 순수와 엽기를 123분의 상영시간 동안 지켜보아야 하는 것은 고역이다. 그러나 <겨울연가>의 배용준과 <여친소>의 전지현이 제조해내는 순정과 엽기 문화가 왜 아시아의 젊은 관객들을 사로잡고 있는가에 진정한 관심을 보낼 필요는 있다. 그들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대중문화 지배 속에 있던 아시아에서 생성되고 있는 새로운 대중문화의 기류를 읽을 수 있는 풍향계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개의 정체성 두겹의 눈, 아시아의 한인감독들 [2]

<당시> “자신만의 방식으로 대중에게 사랑받는 방법을 찾아낼 것” 오기처럼 시작하게 된 〈11세>의 촬영 첫날, “미리 준비했던 시나리오는 현장에서 방해만 될 뿐이었다. 모든 것이 내가 머릿속으로 생각하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주변의 스탭들은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이건 처음이니까 연습하는 셈 쳐라’라고 말했지만, 최선을 다하려던 영화를 연습으로 찍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오전 내내 헤매고 버벅대던 그가 오후부터 전열을 가다듬었다. 현장에서, 배우로부터, 처음부터 다시 생각했다. ‘영화만의 흐름과 리듬은 무엇일까. 쓸데없는 이야기는 버리고, 정서만을 남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는 천천히 영화를 완성하면서, 자신만의 대답을 찾아갔다. 그리고 〈11세>는 아무런 대사도 없이 음향과 실험적인 음악만으로 풍부한 사운드를 재현하는 영화, 이야기는 모호하지만 영화적 의미로 꽉 차 있는 영화가 되었다. 두 번째 영화이자 첫 번째 장편인 <당시>는 여기서 더욱 나아간다. 그 누구도 찍지 않았던 방식으로 인물을 배치하고, 카메라를 들이대고,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유일한 배경이 되는 주인공의 집 구조는 도저히 파악되지 않고, 인물들은 언제나 뒤늦게 등장하여 뒷모습이나 깜깜한 옆모습을 보이며, 배우들은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움직일 뿐이다. 영화교육을 받은 바도 없고, 그 어떤 작가영화도 눈여겨 보지 않았던 그는 온전히 자신의 느낌과 감정을 기준으로 영화를 찍고 있었다. 장률 감독은 뒤늦게 시작한 영화가 너무나 즐겁고 신기하다. 찍고 싶은 영화가 너무 많아서 겨울배경인 영화를 한시라도 빨리 찍기 위해 여름을 배경으로 고쳐서 촬영에 들어갈 정도. “내맘에 맞지 않는 것이면, 아무리 남들이 좋은 것이라 해도 가장 힘든 일”이라고 느끼는 그에게는 내로라 하는 거장의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는 조급함도 없고, 그들이 영화를 찍는 방법에도 관심이 없다. 그의 영화에 그 흔한 시점숏도, 리버스숏도, 인서트도 존재하지 않게 된 것, 영원처럼 컷이 길어진 것은 감독의 마음속에서 그 인물이 그처럼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영화는 그렇게 감독의 진심을 담고 있다. 2003년 영화진흥위원회 키네코 지원작으로 <당시>가 선정될 무렵, 이 영화에 대한 심사위원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일부는 허우샤오시엔의 아류 같아 흥미없다고 했고, 누군가는 너무나 아트과(科)라며 일단 판단을 보류했다. 어떤 이는 그처럼 새로운 방식으로 영화를 찍어낸 감독의 용기를 칭찬했고, 다른 사람은 한편의 시처럼 풍부한 행간을 만들어낸 영화의 형식에 매료됐다. 한편 부산영화제프로그래머 김지석씨가 6월2일 베이징을 방문하여 <망종>을 촬영 중인 장률 감독을 만날 예정이다. <당시>의 완성이 늦어져서 부산영화제에서 상영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그는, “<당시>는 수많은 영화제 관계자들이 눈독을 들일 만한 놀라운 영화였지만, 대중과의 소통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번에 찍고 있는 <망종>은 그러한 부분을 최대한 보강하여 대중성을 추구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고, 장률 감독의 영화적 재능을 알기에 그것이 전혀 거짓이 아닐 것임을 믿는다. 그래서 이 영화에 더욱 기대가 된다”고 말한다. <망종>이 부산영화제에서 상영될지의 여부는 김지석 프로그래머의 이번 베이징행에서 판가름날 예정. 장률 감독은 이제 두편의 영화를 만들었을 뿐이다. 그런 그에게 어떤 스타일이나 일관성을 부여하고 이를 평가하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다. 그것은 “영화마다 만드는 방법은 모두 다르다. 매번 찾는 수밖에 없다”라고 말하는 장률 감독도 꺼릴 만한 일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자신만의 것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쉽게 지치지 않고, 손쉬운 길을 선택해 우리를 실망시키지도 않는다. 매번 영화를 찍을 때마다 자신이 목표로 하는 바와 그것을 위한 방법을 고민했고, 그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는 장률 감독.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명확히 아는, 현명한 감독의 필수조건을 이미 갖추고 있었다. “중국 사람들은 처음에는 친해지기 어려워도 한번 누군가를 믿으면 끝까지 가는 사람들이다. 나는 그가 나와 전속으로 작업을 하면서, 중국에서 가질 수 있는 더 좋은 기회를 놓치고 있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한국과의 작업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대중에게 사랑받는 방법을 찾아낼 것이며,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애정도 잃지 않을 것이다.” 그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한 최두영씨의 말이다. <당시>는 어떤 영화 간결한 문체, 풍부한 감정 〈11세>(2000): 한 사내와 한 소년이 터널 밖으로 걸어나온다. 사내는 공사가 중단된 공터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아 끝없는 졸음에 몸을 맡기고, 소년은 또래아이들의 공놀이를 멍하니 바라볼 뿐, 그들 속에 감히 섞이지 못한다. 해는 저물고, 모두가 떠난 공터에서 혼자서 공을 차는 소년. 그러나 불도저로 자신의 공을 덮어버리는 사내의 또 다른 폭력 앞에 소년은 또다시 무기력해진다. 영화를 보고나면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소년은 왜 따돌림을 받는 것이며, 계속해서 졸고 있는 이 남자는 누구인지, 그리고 공사는 왜 중단돼 있는지. 정답은 없다. 소년은 소수민족일 수도 있고, 그저 가난한 건지도 모른다. 남자는 소년의 아버지일 수도 있고, 선생일 수도 있고, 관료일 수도 있으며, 그냥 일자리를 잃고 동네에 머물게 된 중년 사내인지도 모른다. 대답은 온전히 관객의 몫이다. <당시>(唐詩, 2003): 손을 다쳐 소매치기를 할 수 없게 된 한 남자의 집에 제자인 듯한 여자가 불쑥불쑥 찾아온다. 여자는 마지막으로 한탕을 성공시켜 이곳을 뜨자고 부추기지만 남자는 결국 정해진 시각, 정해진 장소에 나가지 않는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당시(唐詩)는 중국 문학사 내에서, 엄격한 형식이 최고조에 달했을 무렵의 산물이다. 5언 절구, 혹은 7언 절구의 시는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지만, 그 안에는 천지(天地)가 있고 산수(山水)가 있다. 그리고 희로애락의 변화무쌍한 감정들은 자연에 빗대어 무심하게 드러난다. 영화의 형식은 ‘당시’처럼 엄격하기 그지없다. 언제나 프레임 내 프레임 속에 배치된 인물들, 절제된 대사만으로 고독을 표현하는 전개방식, 무표정하게 극심한 감정들을 표현하는 배우의 움직임…. ‘당시’의 간결한 문체가 풍부한 감성을 돋보이게 만들듯이, 영화 <당시>의 무표정함은 주인공의 처절한 감정을 섬세하게 극대화시킨다. 감독은 이어, <송사>(宋詞) <원곡>(元曲)으로 이어지는 중국 문학 3부작을 계획 중이다. 최두영 인터뷰 -장률은 참 큰 사람이다 =〈11세>의 촬영 이후 장률 감독의 모든 영화적 행보는 최두영(42)씨로 인해 가능해졌다고 보아야 한다. 색보정기사로 잘 나가던 와중에, <화석의 언덕> 등 독립영화를 촬영하고, 장편영화 <오구>의 촬영감독과 프로듀서였던 그는 현재 장률 감독의 평생 제작자를 자처하고 있는 상황이며, 장률 감독에게는 영화에 대한 결심을 지탱하는 쐐기와도 같은 존재다. 〈11세>의 후반작업을 총괄했고, <당시>의 제작과 배급을 맡았으며, <망종>의 제작과 영화 후반작업을 책임질 예정이다. 감독과 제작자이기 이전에 10년지기 친구 못지않은 그들 사이의 신뢰를 보고 있으면, 백아와 종자기의 만남이 이처럼 애틋했을까 싶다. -장률 감독과 만나게 된 계기는. =2000년 겨울. 이전부터 장률 감독과 평소에 알고 지내던 감독 한 사람이, 중국동포가 만든 단편의 후반작업을 도와달라고 부탁했고, 〈11세>의 비디오 편집본을 처음 봤다. 너무 느낌이 좋아서 꼭 완성을 돕고 싶었고, 그 이후 영화의 편집, 믹싱, 텔레시테, 색보정 등을 한국에서 할 수 있게 해줬다. -장률 감독의 첫인상이 어땠나. =(장)률이는 처음부터 이상할 정도로 편했다. 대륙적인 기질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그는 참 큰 사람이다. 같이 있으면 나의 순수했던 70년대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하지만 내가 본격적으로 그 친구의 작업의 제작을 맡게 되면서, 일 때문에 우정이 깨지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된다. -‘두엔터테인먼트’라는 회사를 만들었다고 하던데. =장률의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서 만든 회사다. 요즘에는 사무실 유지비라도 벌어야 된다는 생각에 배우 매니지먼트도 겸하고 있다. <효자동 이발사> <발레교습소> <남극일기> 등에 출연하는 조연들이 이 회사 출신들이다. -프로듀서로서, 감독에게 영향력을 행사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그가 나에게 전적으로 제작쪽을 위임하면서 나름대로 손해를 감수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손해를 감수하고 있는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나의 일부를 누군가에게 준다는 것은 결국 그에 대한 믿음과 그리움이 아닐까. 어떤 영화를 만들든 그것은 전적으로 그에게 달려 있다. -전작인 <당시>로 미뤄볼 때, 다음 영화 <망종>의 상업적 성공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남들은 웃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리 둘은 이 영화로 돈도 많이 벌고 행복해질 거라고 믿는다. -개인적인 계획이 궁금하다. 계속 제작을 할 생각인가. =내가 제작을 하게 된 것은 내 친구를 돕기 위해서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촬영감독으로 알려지는 것이 내 인생 최대의 목표다. 올해 <중원> 촬영을 마치면 촬영을 한편쯤 하고 싶고, 나중에 장률 감독이 한국에서 영화를 혹시 찍게 되면, 내가 촬영을 해주기로 약속도 했다. 그것 때문에 아주 관계가 파탄나는 게 아닌가 싶기는 하지만. (웃음)

두개의 정체성 두겹의 눈, 아시아의 한인감독들 [3]

두번째 조우_ 재일동포 3세 리상일 감독 소통과 자극의 문을 두드리다 어떤 이에게 ‘재일’이란 단어는 삶의 굴레였다. 오직 가족들의 생존을 위해 일본사회 밑바닥에서, 때론 불법의 일도 가리지 않아야 했던 재일동포 1세들. 그들은 ‘고난’의 상징이었고 차별의 대상이었다. 세월이 흘렀다. 보통 재일동포 2세, 대부분 3세인 영화감독들에게 ‘재일’은 굴레가 아니다. 아마도 영상에서 그 상징적인 모습은 최양일 감독의 블랙코미디 터치 가득한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1993)일 것이다. 재일동포는 여전히 차별받는 존재지만, 거기에 절망하거나 또는 정치적인 대항을 하는 의미는 엷어졌다. 흠, 그래, 나 재일동포다. 그래서? 자신을 재일동포라고 ‘커밍아웃’하는 단계를 넘어서, 재일동포 감독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보편적인 ‘마이너리티’가 보는 일본사회를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재일’이란 창을 통해, 나아가 ‘마이너리티’라는 창을 통해 일본사회에 간절히 말걸고 싶어한다. 최양일 이후의 포스트세대들은 더더욱 분화를 보이고 있고 보일 게 틀림없다. 재일동포 감독이라는 공통점을 제외한다면 이들은 정말 각개약진 중이다. <윤의 거리>(각본)에서 재일동포의 초상을 그렸던 <지구>(감독)의 김수길(43) 감독은 올 여름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보낸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모은 <천의 바람이 되어-천국에의 편지>를 개봉할 예정이다. 텔레비전에서 SMAP의 연예프로를 오랜 기간 연출하고, <기묘한 이야기>의 텔레비전 시리즈, <학교괴담>의 비디오특별판 연출을 담당했던 리토시오(40)도 자신의 첫 장편 데뷔작을 찍고 있는 중이다. 원작은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 할 만한 <아버지의 백드롭>으로 악역 프로레슬러인 아버지와 초등학교 아들의 이야기다. 그 최전선에 서 있는 리상일 감독과 구수연 감독을 만났다. 리상일(30) 감독의 이름은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 않다. 그의 중편 <청>과 첫 장편 데뷔작 <보더라인>은 모두 부산국제영화제에 초대됐다. 조선학교에 다니는 재일동포 고교생들을 그린 <청>은 2000년 일본 피아영화제에서 그랑프리 등 4개상을 석권했고 부산을 비롯해 로테르담, 뉴욕영화제 등에도 초대됐다. 영화평론가 사토 다다오는 지난해 일본에서 개봉한 <보더라인>을 ‘올해의 베스트 10’ 가운데 하나로 꼽기도 했다. 오는 7월10일 일본에선 그의 신작 〈69>이 개봉한다. 이를테면 독립영화 형태였던 이전 작품과 달리 이번 작품은 면면이 화려하기 그지없는 ‘메이저영화’다. 도에이가 배급하는 이 작품의 두 주연으로 요즘 일본에서 가장 인기있고 주목받는 젊은 스타 츠마부키 사토시(<워터보이즈>)와 안도 마사노부(<키즈리턴> <사토라레>)를 앞세웠고, 무엇보다 원작이 1987년 출간된 무라카미 류의 자전적인 동명의 베스트셀러라는 점에서 벌써부터 화제가 되고 있다. 니가타현에서 재일동포 3세로 태어난 그는 고등학교까지 10년을 요코하마의 조선학교에 다니던 시절, “어른스런 소년이었던 편”이었다. “당시 남자친구들에게 화제는 파친코 아니면 담배였다. 둘 다 관심이 없었으니 쉬는 시간에도 혼자 소설만 읽고 있었다.” 〈69>에서 남자 고등학생들의 시끌벅적한 모습엔 그 시절, 리 감독이 곁눈질하던 친구들의 모습이 묻어 있다. 대학 졸업을 앞뒀던 청년은 무조건 시네콰논의 이봉우 사장을 찾아갔다. “영화를 찍고 싶습니다.” 이 사장의 소개로 현장경험을 쌓던 그는 역시 이 사장의 권유대로 일본영화학교에 진학한다. 3년의 수업을 마치고 만든 졸업작품이 바로 <청>이었다. <당시> <청>의 제목은 일본어로도 ‘아오이’가 아니라 ‘청’이다. 일본에서 재일동포를 경멸하며 얘기할 때 “바보나 청이나 (똑같다)”라는 말이 있다. “일본어 속담 중에 ‘냄새 나는 곳에 뚜껑을 덮는다’라는 말이 있다. 악취가 나는데 뚜껑을 덮으면 덮을수록 냄새는 더 지독해지지 않는가. 조금이라도 뚜껑을 열어 악취가 바람에 날아가게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리 감독에겐 ‘청’이란 비분강개해야 할 차별의 상징어가 아니다. 그냥 그렇게 불리는 걸, 거꾸로 스스로 이름 붙이는 것이다. 대성은 조선학교의 야구부원이다. 누나가 결혼상대라며 일본인 남자를 데려오자 부모는 불같이 화를 내며, 어릴 때부터 친했던 여자동급생은 일본 학생과 교제한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이지메당한다. 리 감독은 모교로부터 촬영협조를 기대했지만 “학교를 나쁘게 그렸다”는 이유로 영화에 나오는 학교는 교실 따로, 운동장 따로, 여러 곳을 전전해야 했다. 출연진들은 대부분 일본인들이다. <청>은 일본전국고교야구선수권 대회에 출전하는 과정을 통해 ‘재일 조선인’으로서의 자기 존재를 찾는 청춘의 이야기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고3 학생이 청년으로, 성인으로 자기를 발견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평소엔 별로 재일동포라는 인식을 하지 못한다. 일단 생김새부터 별 차이가 없으니…. 아마 느낀다면, 지금처럼 이런 인터뷰를 하는 때가 아닐까.” 그는 재일동포들에게 ‘정체성’을 묻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편이다. “정체성이란 점점 사라져가는 단어 아닌가. 정체성은 인종이나 국적에 따라 구별되는 게 아니다. 자기가 무얼 하고 싶은지, 어디에 가고 싶은지에 따라 이야기하는 것 아닐까.” 경계에 서서 응시하다 <보더라인> <보더라인>에서 리 감독은 일본사회의 경계(보더라인)에 서 있는 사람들을 엇갈리며 그려낸다. 아버지를 살해한 고교생과 그가 만나는 택시 운전사, 딸을 집에 두고 가출한 중년의 야쿠자와 딸의 입원비를 위해 수금비를 들고 달아난 아버지, 이지메당하는 어린아이와 남편의 해고를 눈앞에 둔 주부, 아버지가 실종된 이후 자포자기해 원조교제를 하다가 퇴학당한 여자 중학생의 이야기가 서로 스쳐 지나간다. 〈69>까지 세 작품 모두 분위기가 다르지만, 리 감독 작품의 인물들은 “큰 틀의 밖에 서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는 자신과 같은 마이너리티 영화가 갖는 가장 큰 미덕을 “객관성”이라고 한마디로 얘기했다. “조선학교에 다니면서, 일본에 살면서도 일본과 전혀 다른 공간에서 컸기 때문에 일본이 어떤 나라인지 보기에 쉬운 포지션이다. 메인스트림에 속하기보다는 거기에서 떨어져나와 어딘가에서 응시하는 게 나의 영화다.” 〈69> 또한 그에겐 단지 60년대를 그리는 복고풍의 청춘영화가 아니라 2004년 일본사회에 대해 말을 거는 과정이다. 리 감독은 “지금 젊은이들에겐 정열, 자신의 가치관에 대한 신념 같은 게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그 시기는 다양한, 각자의 가치관이 있던 시대였다”며 “그걸 지금의 일본 젊은이들에게 전해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전공투 등을 비롯한 학생운동이 정말 무데뽀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대항하는 에너지가 있었기에 저항받는 그 대상이 잘못됐다는 것을 결국 입증할 수 있었던” 시대라는 것이다. “그 시절에는 ‘절대적’이란 말이 있었다. 절대로 아버지가 옳고, 절대적으로 선생님이 옳고. 권위주의가 좋다는 것이 아니라 아래 세대에게 전할 룰이 있었다는 얘기다. 룰이라는 게 있어야 젊은 세대는 존경하기도 하고 거꾸로 그걸 부수거나 부정하기도 하며 새로운 것을 만들어간다. 그에 비해 지금은 이상하게 평등하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아마 그 최소단위일 텐데, 그들에게 ‘대립’도 없다. 그저 커뮤니케이션이 되지 않는 거다.” 이제까지 자신이 각본을 쓰고, 스탭과 배우들을 끌어모았던 전작들과 달리 〈69>은 프로듀서의 제의에서 시작됐다. 아직도 현장에서 10년 넘게 경험을 쌓아 40살이 다 되어 데뷔하는 감독이 수두룩하고 작품 하나 내놓는 데 몇년씩 걸리는 일본에서 그는 예외적 존재로 보인다. 〈69>이 개봉도 하기 전, 그는 여름 크랭크인을 예정으로 새로운 영화 시나리오 작업에 매달리고 있다. 이번엔 “20대처럼 여러 가능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길이 확실히 정해지지 않은 중도한파 같은 30살 전후, 내 또래의 인물의 이야기”라고 했다. 분위기는 〈69>의 밝은 분위기에서 <보더라인>쪽으로 다시 돌아갈 것 같다고. 개인적으로 그는 하드보일드나 필름누아르를 좋아한다. <쎄븐> 이래 가장 충격을 받은 영화로 <살인의 추억>을 꼽았다. 그에게 일본은 참으로 이상한 나라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갖는 게 아니라 텔레비전에 비치는 영상만을 보고 그에 따를 뿐이다. 지난번 이라크에서 일본인 납치사건에 대해 ‘자기책임론’ 등의 반응이 그 단적인 예라며 “상상력이 부족한 나라”라고 웃는다. 북한에 대해 비난을 퍼붓던 시기 총련계 여학생들을 이지메하는 것도 결국 마찬가지다. 하지만, 영화감독으로서 그에겐 “이 나라가 모자란 게 많은 게 희망”이며 영화로 그릴 가치가 있다. “편의점에 가면 모두 갖춰져 있는 듯 보이지만” 희망이란 건 자기가 찾지 않으면 안 되듯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이기에. 태어나고 자란 일본사회에 대해 그는 ‘애증’을 감추지 않았다. 〈69>는 어떤 영화 일본 젊은이들에게 정열과 신념을 1969년 파리를 비롯한 전세계에 혁명의 기운이 넘실거리던 그해, 일본에선 도쿄대학 학생들의 야스다 강당 봉쇄가 경찰에 의해 강제해제되며 전공투가 중심이 되었던 전투적인 학생운동이 상징적인 막을 내렸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나가사키 사세보엔 68년 미국 해군의 원자력함 엔터프라이즈호가 입항해 격렬한 충돌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뿐인가. 그 시기 젊은이들에겐 ‘여자-패션-요리’가 주요화제였고, 야시꾸리한 프로그램 〈11PM>이 인기를 누리며 주간지 <헤이본 판치>는 바이블이었다. 〈69>에서 고교생들은 가치관이 혼재하던 그 시대를 좌충우돌 질주한다. 겐(쓰마부키 도시오)은 언제나 교실청소는 내팽겨친 채 친구들을 모아놓고 여자 얘기로 허풍을 떠는 고3 악동 학생. 어느 날 바지를 입고 매스게임을 연습하던 같은 고등학교 여학생들을 보고, 결심한다. “그렇다! 여자의 탄력있는 몸은 바닷가를 달리기 위해 있는 법. 저들을 해방시켜주자!” 록음악과 영화를 상영하는 축제를 계획하고 내친 김에 한눈에 반한 여학생 ‘레이디 제인’을 주연으로 영화를 찍으려던 겐. 촬영카메라를 빌리러 간 당시 학생운동 본부에서 장난처럼 시작된 일은, 급기야 학교 옥상을 바리케이드로 봉쇄하는 작전에까지 치닫는다. 야스다 강당 봉쇄사건의 기억이 지워지지 않았던 69년 여름, 학생들의 장난은 온 매스컴을 타게 된다. 원작의 내용을 충실히 옮긴 편이지만, 영상이 갖는 힘은 이 밝은 분위기의 청춘영화를 어느 순간 가슴 뭉클하게 만들어버린다. “상상력에 권력을!”이라고 쓰인 플래카드 사이로, 밤에 잠입한 학교 건물에 폭력적인 교사들을 고발하는 내용을 장난처럼 페인트로 휘갈길 때, 시대의 커다란 목소리에 파묻혀버릴 수도 있었던 개인들의 모습이 또렷이 떠오른다. 이처럼 개인과 시대의 엇갈림이야말로 영화가 바치는 1969년 당시에 대한 헌사다. 어찌보면 아무 생각없이 사는 것 같은 청춘들과 혼란스러운 가치관의 시대처럼 보이던 당시상황이 빚어내는 충돌은 시대와 개인을 모두 한눈에 들어오게 한다. 그래서 명랑한 분위기의 이 영화는 끊임없이 웃음이 터져나오는 상황으로 이어지지만, 그 유머엔 품격이 있다. 크림(Cream)의 노래 등 영화 전편에 흐르는 록음악과 오프닝 타이틀의 그래픽도 매력적이다.

[팝콘&콜라] “나도 게이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남자와 여자가 꿈꾸는 관계의 차이를 그린 소설 <체리브라썸>(이청해 지음)의 여자 주인공 동희는 오랫만에 만난 초등학교 동창 도현에게 게이 친구를 소개시켜달라고 말한다. 결혼을 앞둔 이성애자 여자가 동성애자 남자를 말하는 게이를 친구로 사귀고 싶다는 말에 도현은 아연해 한다. “쌔고 쌘” 여자친구를 마다하고 “칙칙하게 게이를 찾는” 이유에 대해 동희는 말한다. “동성의 친구도 중요하지만 이성의 친구가 반드시 필요해. 만약 부부(애인) 간의 불화를 의논한다고 쳐봐. 동성의 친구는 이해에 한계가 있어. 상대방의 입장을 잘 모른다구. 자기도 같은 성이니까.” 게이 친구. 동성 친구도 애인도 아닌 새로운 친구 유형에 대한 관심이 이성애자 여성들 사이에서 점차 늘어나고 있다. 동희 뿐 아니라 많은 젊은 여성들에게 영화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에서 주인공 여자의 막무가내 결혼작전을 지도편달하고 결국 혼자남은 여자를 다독여주는 게이 친구는 “나도 한명쯤 사귀었으면”하는 친구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매력적인 게이 친구가 등장한 지는 제법 됐다. 젊은 여성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케이블 텔레비전 드라마 <섹스 앤 시티>에서 순한 게이친구 스탠포드는 주인공 캐리가 연애에 실패하고 침울해 할 때마다 파티에 함께 데려가 기분전환을 도와주는 선의를 발휘한다. 최근 방영을 시작한 케이블 드라마 <윌 앤 그레이스>에서 한 지붕에 사는 동성애자 남성 윌과 이성애자 여성 그레이스는, 동거를 하면서도 성적인 불편함이나 긴장을 느낄 필요가 없는 남자친구 관계에 대한 여성들의 호기심과 선망에 모락모락 불을 지피고 있다. 괜찮은 게이 친구의 등장은 한국 영화나 드라마에도 낯설지 않다. 몇달 전 종영한 드라마 <완전한 사랑>이 젊은 여성의 눈길을 잡은 사연은 죽어가는 아내에 대한 남편의 절절한 사모곡이 아니라 무모한 짝사랑을 하는 지나에게 따뜻하면서도 어른스러운 조언자 역할을 하는 게이 친구의 존재였다. 방영 당시 이 드라마의 게시판에는 “나도 저런 남자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찬사와 부러움의 글들이 자주 올라왔다. 물론 미디어에서 그려지는 게이 친구의 모습과 이들에 대한 여성들의 호감이 판타지라는 비판도 있다. 여자라고 모두 여성의식이 높거나 섬세함을 지니고 있지 않듯이 창조적인 직업에 경제적 여유를 가지고 있으며 여자보다 더 여자같은 감성과 깊은 사려를 품고 있는 게이도 극히 일부이거나 미디어에서 조작한 이미지라는 지적이다. 게이 커뮤니티에서는 동성애에 대한 이해없이 게이 판타지만으로 게이 남성들을 쫓아다니는 여성들을 부정적으로 일컫는 ‘페그 헤그(fag-hag)’라는 속어가 쓰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젊은 이성애자 여성들에게 늘어나고 있는 게이 친구를 단지 멋이나 유행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는 이유들이 있다. 게이 친구를 가진 여성들은 “성적 긴장없이 남성의 시선으로 나에게 조언을 해줄 수 있으면서도, 보통의 남자들과는 나누기 힘든 이야기들을 편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동성애 심리학>을 쓴 심리학자 윤가현 교수(전남대 심리학)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전통적 성역할이 허물어지고 있는 시대를 반영하는 새로운 친구 유형”이며 “이성애자 여성들이 남성보다 게이 친구에 더 많은 호감을 가지고 있는 현상은 변하는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는 남성들의 의식이나 관습에 대한 거부감의 한 징후로도 읽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설사 판타지라고 해도 맘좋은 게이 친구 한명쯤 곁에 있었으면 하는 여성들의 욕망이 허영심이나 겉멋만은 아닌 시대가 오고 있다.

공포와 에로티시즘 사이, 해머 호러의 진수, <해머 호러 컬렉션>

<해머 호러 컬렉션> Hammer Horror Collection 1957∼70년 감독 테렌스 피셔, 제임스 버나드 상영시간 540분(6 디스크) 화면포맷 1.85:1, 2.35:1 아나모픽 음성포맷 DD 2.0 영어 자막 워너홈비디오(미국) 출시사 예고편 외 1935년 영국에서 설립된 해머스튜디오는 영화 역사상 가장 흥미로운 영화제작사 중 하나이다. 1980년대 재정난으로 텔레비전 시리즈를 제작하는 처지로 강등되기 전까지 해머스튜디오의 작품들은 오직 공포, SF, 범죄, 모험 등의 B급 장르영화에 충실해왔으며, 그 장르만의 고집을 “해머 스타일”로 불릴 수 있는 독특한 영화적 스타일과 저예산의 제작 방식으로 풀어냄으로써 세월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많은 컬트적인 추종을 거느리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피터 쿠싱과 크리스토퍼 리라는 걸출한 호러 배우와의 지속적인 공동작업으로 이루어낸 해머 특유의 고딕 공포영화의 아우라는 1930년대 유니버설 공포영화를 뛰어넘는 또 다른 호러 전통의 탄생이라 할 만큼 독특한 문화사적, 영화사적 위치를 점유하고 있기도 하다. 50∼60년대 서구사회 변혁의 메타포가 녹아 있는 해머의 드라큘라와 프랑켄슈타인은 고전적인 텍스트가 공포영화 장르의 관습과 사회변혁의 맥락에서 어떻게 발현되고 관계맺으며 재해석될 수 있는지에 대해 많은 해답을 우리에게 제시해주고 있다. 현재 권리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해머 작품 중에서 워너브러더스는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 중에서 비교적 양질의 해머 작품 10여편에 대한 권리를 확보하고 있는데, 이번에 출시된 해머 컬렉션은 이중에서도 완성도 높은 작품만을 엄선해 묶은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의 저주>(The Curse of Frankenstein), <미이라>(The Mummy), <드라큘라>(Horror of Dracula)(이중 <프랑켄슈타인의 저주>는 국내 출시되어 있다)는 기존에 출시된 개별 타이틀을 묶은 것으로 모두 1950년대 말의 중기 해머스튜디오를 대표하는 작품들이다. 이 작품들은 동명의 1930년대 유니버설 공포영화의 리메이크로 기존 공포영화의 스토리라인과 양식이 해머스튜디오 특유의 스타일로 형성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관 속에서 나온 드라큘라>(Dracula Has Risen from the Grave), <프랑켄슈타인은 파괴되어야 한다>(Frankenstein Must Be Destroyed) <드라큘라의 피>(Taste the Blood of Dracula) 등 세 작품은 이번에 새로 출시된 작품들로서, 1960년대 말 해머 공포영화 최전성기의 실력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특히 <관 속에서 나온 드라큘라>와 <드라큘라의 피>는 우리나라 올드팬의 뇌리 속에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작품으로, 해머 특유의 공포감과 에로티시즘 사이의 가늘고 위험한 경계선에 대한 탐미적 고찰이 돋보이는 작품들이다. 이번 해머 컬렉션은 최상의 화질로 트랜스퍼되었을 뿐 아니라 기존 낱장 버전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출시되어 해머 마니아뿐 아니라 누구라도 해머 전설과 명성과 실체를 확인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특히 해머 스튜디오의 전성기였던 1950년대와 60년대 두 시기로 구분하여 작품을 비교 감상해 보면 좋을 듯싶다. 이교동

30년 전 충무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

70년대 10년차 조감독 K씨의 하루 과거여행 대신여관에서 아침 잠을 깨다 K는 요즘 술을 먹다 말고 종종 정신을 잃는다. 간밤에도 동료 P군의 등에 업혀 이곳까지 왔던 것 같다. 보나마나 충무로(주1) 대신여관 202호일 것이다. 벌써 3일째 외박이다. 스카라극장 뒤편 대폿집에서 삿대질한 것까진 기억이 난다. 그뿐이다. 누구랑 언성 높이며 싸웠는지는 도통 모르겠다. “내가 뭘 어쨌다고 이러시는 겁니까?” P가 잠꼬대를 한다. 만사 무덤덤한 P인데, 꿈에서만큼은 그도 성깔을 돋우나 보다. ‘상대가 혹시 나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K는 무거운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방의 불을 켠다. P는 얼굴만 내놓은 채 때가 꼬질꼬질한 이불을 몸에 두르고 있다. 고치를 만들고 있는 누에 같기도 해서 K는 웃는다. 괘종시계가 곧 4시를 가리키기 직전이다. 거울을 보니 웃음이 가신다. 땀과 먼지로 번지르르, 누리끼끼한 머리. 까치집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누가 보기라도 하듯 K는 머리 속을 헤집는다. 갑자기 두통이 밀려온다. 통금(주2)해제를 알리는 사이렌이 앵앵거린다. 전 국민의 기상소리이기도 한 사이렌에 K의 뇌수는 엇박 장단으로 요란하게 출렁인다. “오늘은 로케가 어디여?” 어둠 속에서 누군가 K에게 아는 척한다. 공동세면장에서 푸석한 얼굴에 물을 적시다 말고 K는 고개를 든다. 가만보니 입담 좋기로 소문난 S다. 얼마 전에 조감독이 됐는데 그뒤로는 동급이라고 반말이다. ‘확 세숫물을 이 놈 면상에 끼얹어버려.’ 빈정대는 놈을 혼내주고 싶지만 시비 걸어봤자 자신에게 좋을 일 아니라고 K는 마음을 다잡는다. 충무로밥 먹은 지 10년차 조감독에게 돌아올 것이라곤 ‘못난 놈’이라는 수근거림밖에는 없을 테니. “이제는 장가들어야제.” 편지에 여염집 처자의 흑백 사진을 매번 동봉하시는 어머니 얼굴이 불현듯 떠올라 K는 수건으로 얼굴을 빡빡 문지른다. 워커(주3)로 갈아신고 여관을 빠져나오니 벌써 새벽 4시30분. 쓰린 속을 멀건 국물로 채우려고 제일옥부터 찾는다. 몇년째 내리 충무로가 불황이어선지 한눈에도 빈자리가 더 많다. 앉아 있는 이들은 얼굴을 잘 모르는 뜨내기들 투성이. 언제나 파이프 물고 중절모 쓰고 백구두 신어 눈길을 끄는 단역배우(주4)만이 아는 얼굴이다. 이 모든 것이 TV(주5) 탓이다. ‘벗기기, 눈물짜기, 베끼기 아니면 할 줄 아는 게 무어냐’고 힐난하지 않나. 충무로는 저질영화의 온상이라는 달갑지 않은 최근의 세평이지만 K는 신경쓰지 않으려 한다. 다 한때 충무로에 몸담다가 TV로 옮겨간 철새들의 험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그는 믿고 있다. # 충무로통신 청맥다방에 집결 청맥다방(주6)만큼은 그래도 북적인다. 일찌감치 아침식사를 해치운 스탭들이 삼삼오오 패를 지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XX이가 통 안 보이네.” “이 사람아. 그것도 모르나. 지난번에 잽혀서 군대 갔잖아.” 군입대 기피(주7)하다 끝내 징집된 Y 소식이다. 충무로 참새들의 방아찧기는 쉴새없이 이어진다. 주먹 좋기로 장안에 소문난 액션스타 OOO이 촬영을 펑크낸 뒤 적반하장격으로 만취한 상태에서 새벽에 감독의 집에 찾아가 “이 바닥에 발을 못 붙이게 하겠다”며 폭언을 퍼붓고 소동을 벌였다는 이야기가 그 다음이다. 어제는 청와대 앞에서 도둑촬영(주8)을 하다 경찰의 제지에 공보실에서 대한뉴스 찍으러 나왔다고 거짓말을 해 위기를 모면했다는 이야기가 그 다음. 육감적인 몸매로 유명한 OOO가 이번 영화에서 완전히 벗었네, 안 벗었네 하는 논란까지 이를라치면 심지어 멱살잡이라도 할 듯 하다. 이곳 청맥다방 구석에선 손 하나 까딱 안 해도 어젯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할 수 있다. 집합시간이 다 된 듯해서 눈을 떴더니 차가운 커피가 놓여져 있다. 시키지 않아도 언제나 놓이는 커피. 숭늉 마시듯 텁텁한 목구멍으로 후루룩 넘기고 나오는데 레지가 초면이다. 얼굴이 곱상한게 배우지망생인 듯하다. 묻지 않아도 알겠다. 그녀 또한 보따리 짐을 싸들고 혈혈단신 상경(주9)해 물어물어 이곳까지 흘러들어왔을 거다. “차값은 달아둬” 주인 아지메가 ‘밀린 외상값은 언제 줄 거냐’고 닦달할 찰나, K는 날쌘 맹수처럼 다방을 빠져나온다. 뒤통수가 따갑다. 주1 l 충무로 일제시대 명동과 함께 일본인 상권 지역으로 번성했지만,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완전히 폐허가 됐다. 1950년대 말 변순제라는 제작자가 이곳에 서라벌영화사를 차린 것이 영화사로는 처음이라 한다. 명동에 머물렀던 유명 영화제작자들도 상가가 형성되어 지가가 오르자, 1960년대부터 이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진 왼쪽에 있는 명동칼국수는 김지미의 단골집. 여배우로는 드물게 김지미는 충무로 나들이를 자주 했는데 이유는 이 칼국수를 먹기 위해서라고. 주2 ㅣ 통행금지1960, 70년대 충무로에는 60개에 달하는 여관이 있었다. 이들 여관의 성업이 가능했던 건 다름 아닌 통행금지 덕. 1년364일(성탄 전야는 예외였다)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는 출타금지였다. 작가와 감독이 시나리오 각색을 위해 동신여관을, 스탭과 엑스트라 등은 숙소로 대신여관, 태창여관 등을 주로 이용했다 한다. 주3 ㅣ 워커 현장 스탭들의 차림은 주로 군용물자로 해결했다. 신발은 웬만해선 닳지 않는 워커. 위 아래는 1970년대까지도 변색시킨 군복을 입고 다녔다. 제대한 이들이 팔아넘긴 군복을 사들여 검은색으로 물들인 다음 다시 시장에 내다파는 이들이 청계천변에 따로 있을 정도였다. 주4 ㅣ 단역배우 단역배우로 김칠성씨는 서대문형무소 뒤 하꼬방에 살았다. 말끔한 멋쟁이 양복 차림의 그는 매일 해뜨기 전에 출근했다가 통금시간이 다 되어서야 퇴근하는 걸로 유명했는데, 누군가 이유를 물었더니 “사람들한테 꿈을 주는 직업인데 후줄근하게 사는 것을 보일 수 없어서 그랬다”고 답했다 한다. 주5 ㅣ TV1970년대에 영화는 텔레비전을 추격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1968년 텔레비전 수상기가 불과 12만대 정도에 머물렀던 것이 1973년에는 무려 130만대로 껑충 뛰었다. <영화잡지> 등도 1970년대 들어 전과 달리 브라운관이 배출한 스타들에 주목하고, 연속극 제작 현장 탐방기사를 적극적으로 실었다. 주6 ㅣ 다방스타다방은 액션배우들이, 청맥다방은 스탭들이, 수도다방은 지방흥행사들이, 벤허다방은 감독들이 주로 드나들었다. 이중 계산대 옆에 시나리오가 수북이 쌓여 있었던 청맥다방은 충무로 인력시장이라 불렸다. 이곳의 주인 아지메는 뛰어난 기억력의 소유자. 연락이 쉽지 않았던 그 시절 수백개의 전화번호를 외워 목구멍이 포도청인 영화인들의 길잡이 노릇을 해줬다. 사진은 1960년 충무로 스타다방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배우 전택이와 노경희. 부부인 이들은 <춘향전>(1955), <애원의 고백>(1957) 등에 함께 출연했다. 주7 ㅣ 병역기피 이순신의 시호를 따왔지만, 충무로는 대표적인 군 기피자 집합이기도 했다. 로케다 뭐다 해서 팔도 유랑을 하는 데다 거처 또한 명확지 않으니 징집 대상자라 해도 좀처럼 잡을 수가 없었을 것. 촬영하러 가다 검문소에서 제지당하면 제작부장이 나서 얼마간의 돈을 쥐어주며 눈 감아달라고 통사정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주8 ㅣ 도둑촬영 카메라 들고 튀어라! 영상위원회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도둑촬영은 빈번했다. 1960, 70년대 카메라를 드리워선 안 되는 첫번째 금기 대상이 청와대. 김수용 감독은 그 앞 은행나무 길을 몰래 찍었다가 윤정희의 팬이었던 박근혜씨가 영화를 보자고 했고, 그에 앞서 영화를 본 대통령 비서실에 의해 하룻밤 철창 신세를 진 적 있다. 주9 ㅣ 상경 1960년대 서울역에는 큼지막한 트렁크에 꿈을 담아 무작정 상경하는 소녀들을 꾸짖어 돌려보내려는 경찰까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