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내가 찾는 영화 정보를 손쉽게!

‘텔레@UPCOIN24테더송금업체컬쳐랜드코인구매테더송금업체컬쳐랜드코인구매' 검색결과

기사/뉴스(1997)

[파리] 더빙은 영화에 대한 모독인가?

프랑스에서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가면 영화 제목과 시간 밑에 약어로 표기된 몇 글자가 눈에 띈다. 눈 여겨 살펴보면 ‘VOST’ 또는 ‘VF’라고 적혀 있는 이 약자들은 영화가 원어로 불어 자막과 함께(VOST) 상영되는지 아니면 불어로 더빙이 되어(VF: 이 경우에는 원어가 불어로 된 경우와 외국어를 불어로 더빙한 경우를 공히 포함한다) 상영되는지를 표시해준다. 최근에는 대부분의 극장에서 원어를 불어 자막과 함께 상영하는 경우가 많지만, 시간대에 따라 불어로 더빙된 필름을 상영하는 극장들도 있다. 텔레비전의 경우, <아르테>와 같은 특정 채널의 특정 시간대를 제외하고 외국영화는 대부분 불어로 더빙되어 방영된다. 더빙은 불어로 ‘두블라주’(Le doublage)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중의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더빙이라는 뜻과 함께 연극이나 영화에 있어서 등장인물의 대역을 의미하기도 한다. 프랑스에서 외국영화를 불어로 더빙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1930년대 초부터이며, 1947년에는 외국영화의 경우 프라스어로 더빙을 할 것을 의무화하는 법률이 제정되기도 한다. 이는 불어와 프랑스 문화를 보호하려는 정책의 일환이기도 하지만 더빙이 프랑스 영화산업에 끼치는 경제적인 효과를 고려한 것이기도 하다. 이후 프랑스는 더빙에 있어서 세계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한다. 프랑스에서 더빙의 가장 성공적인 경우로 예를 드는 것은 루이 말의 연기 지도를 받고 미셸 뒤쇼소이가 말론 브랜도의 목소리 연기를 맡았던 영화 <대부>(사진)이다. 현재 프랑스에는 40여개에 달하는 더빙 전문 회사가 있으며, 약 600명에 달하는 더빙 전문 배우들이 있다. 무성영화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사운드가 영화에 등장한 이래로 영화는 이미지와 소리의 예술이 되었다. “한편의 영화가 전세계에 배급될 때, 자막과 함께 상영되면 그 영화는 본래의 힘의 15%를 잃는 반면, 잘 처리된 더빙과 함께 상영된다면 10%의 힘만을 잃는다”(앨프리드 히치콕). “더빙은 영화에 있어서 오욕이다”(장 르누아르). 이 두 인용구는 영화에 있어서 더빙에 대한 대립적인 견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실제로 더빙에 대한 인식은 세대에 따라(프랑스의 경우 연령층이 높아질수록 더빙을 선호한다), 또 매체나 영화의 성격에 따라(텔레비전이나 외국 시트콤 또는 애니메이션의 경우 더빙을 많이 하고 있다) 다르게 나타난다.

세계가 바라보는 한국영화 [5] - 일본 ②

<키네마준보> 6월 하순호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거듭 되는 만남의 유예 - 우다가와 유키히로/ 영화평론가 현재 한국영화의 융성은 90년대 말부터 시작된 것이지만, 한국영화가 새로워졌다는 선명한 느낌을 최초로 준 것은 허준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였다. 그 이전의 한국영화가 전반적으로 감정표현이 터무니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심한 경향이 있었던 데 비해 상당히 억제되고 자연스러운 게 신선했기 때문이다.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이재용 감독도 허 감독처럼 98년에 데뷔했고, 나이는 2살 아래인 65년생이다. 그도 억제하는 스타일이 특징이다. 하지만 영화 제작 스타일을 보면 허 감독과 대조적이라 해도 좋을 만큼 다르다. 허 감독이 등장인물의 감정, 기분을 되도록 자연스러운 감촉으로 전하기 위해 과장된 몸짓을 배제하는 데 비해 이 감독은 장면의 자연스러운 분위기보다도 작품 전체의 구도와 계획을 우선시한다. 그의 데뷔작 <정사>는 주연배우인 이정재와 이미숙이 심야의 공항에서 둘만 있게 되는 장면부터 시작하지만 여기서 둘은 아직 만나지 않는다. 거기에선 그저 함께 있게 된 관계없는 두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만남은 다음으로 유예되고 사랑이 시작되는 것은 또 그 다음이다. 일본에선 2001년 먼저 공개됐던 두 번째 작품 <순애보>에선, 만남이 늦춰지는 것이 더욱 철저해진다. 서울의 공무원 이정재와 도쿄 여고생 다치바나 미사토의 일상이 어떤 접점도 없이 반복되며 그려지고 실제 만남은 끝나기 직전에 이뤄져 거의 연애영화라고 말하기 힘든 기묘한 영화였다. 사랑의 만남을 되도록 뒤로 미루려고 하는 이재용의 구도는 면밀히 계산된 구성과 섬세한 손질로 달성된다. 고요한 표정 아래 마음의 열정을 품고서 주인공들은 만남을 기다린다. 세 번째 작품 <스캔들…>에선 이전 두 작품과 같은 구도는 눈에 띄지 않는다. 배용준과 전도연은 영화가 시작하면 곧 만나고 이미숙과는 이미 잘 아는 사이다. 구도와 계획의 주체는 작자로부터 등장인물로 옮겨졌다. 라클로의 원작 <위험한 관계>를 본떠 이조시대의 연애유희에 숙련된 여자와 남자가 순진하고 정조 높은 여자를 노리는 게임을 꾸민다. 계획은 있지만 감정은 억제되고, 작자의 의도는 눈에 띄지 않는 ‘쿨’한 스타일이 유지된다. 그리하여 여기서도 사실은 만남의 유예가 일어난다. 부도덕한 계획이 자신들도 예상하지 못했던 진실한 사랑과의 만남을, 나중에 일으키고 말기 때문이다. <키네마준보> 6월 하순호 <실미도> 액션의 극한에서 개인의 존엄을 묻는 역작 - 이토 다카시/ 아시아 오락문화 연구가 1968년 4월, 한국 정부는 사형수와 무기징역수 등으로 특수부대를 편성했다. 무인도에 모여 3년에 걸친 가혹한 훈련을 받은 그들의 임무는 단 하나. 북한에 잠입해 김일성 주석을 암살하는 것이었다. 설정만 보고 어떤 이는 로버트 알드리치의 <특공대작전>을, 어떤 이는 히지가타 데쓰토가 만든 자주영화의 쾌작 <특공임협자위대>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실미도>는 이런 통쾌한 액션의 계보로 연결될 수 없는 작품이다. 이런 전대미문의 설정이 사실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강우석 감독은 “재미있고 우스운 영화가 돼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지만, 사실 <실미도>는 그 말대로 장식적인 구도나 기교적인 편집으로 작가성을 과시하지 않는, 거칠고 세련되지 않은 영화로 완성됐다. 그렇다고 시종 무겁고 괴로운 공기가 짓누르는 ‘사회파식’ 고발영화라는 것은 아니다. 관객서비스랍시고 필요없는 여성 캐릭터를 삽입한다든지, 쉬어가는 회상신을 집어넣는 잘못된 계산은 배제하면서도, 부원들이 훈련받는 장면까지는 모험소설적인 기분까지 든다. ‘사실에 근거한 영화’라는 무게가 효과를 발휘하는 건 후반이다. 섬에서 가혹한 훈련이 계속되는 사이 한반도의 정치 상황은 대결로부터 대화로 옮겨가고 특수부대는 무용지물을 넘어 방해물이 된다. ‘범죄자로 죽을 것이냐, 영웅이 될 것이냐’며 몰아세우던 국가가 이번엔 ‘이제 너희들은 필요없다’며 그 존재를 말살하려는 것이다. 이런 부조리에 남성들의 혼이 타오른다. 그들의 마음에 남아 있던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이 일어선다. 적은 국가권력, 표적은 청와대. 목숨을 건 반란이 시작된다. 그 싸움은 복수를 위한 것도, 살아남기 위한 것도 아니다. 다만 자신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 그래서 그 싸움의 한가운데 부대원들은 자신의 피로 이름을 써 남긴다. 대원에 설경구, 지휘관 안성기라는 연기파를 모아놓은 연기진이 여기서 살아난다. 이 영화가 액션영화의 포장 아래서도 어떤 인간도 존엄하며 그것을 짓밟는 어떤 이도 용서받을 수 없다는 보편적인 주제를 달성하는 것은 그들의 연기력이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투캅스>를 봤을 때 실망했고 평이 좋았던 <공공의 적>에도 별로 공감 못했지만, 이번만은 강우석에게 경의를 표한다. <실미도>는 존 프랑켄하이머를 비롯해 지금은 사라진 기골 있는 영화작가의 작업, 또는 조지 C. 스콧의 분노 넘치는 역작 <격노>를 계승하는 작품이다. 한국의 현대사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돼야 할 사실을 품고 있는 것일까. 영화예술 407호 2004년 봄호 <태극기 휘날리며> 화려한 가식미, 한국전쟁의 본질을 흐리다 - 모리모토 수이치/ 프리 저널리스트 강제규 감독의 전작 <쉬리>가 일본에서 공개된 지 4년이 지났다. 남북 분단의 현실과 러브스토리를 엮어가며 할리우드에 뒤지지 않는 액션 묘사와 스펙터클을 더해 오락영화로서 대단한 카타르시스를 안겨주었다.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방영돼 무심코 채널을 돌리다가 보았지만, 어느덧 영화에 푹 빠져 끝까지 보고 말았다. 한석규와 김윤진 등 배우진, 특히 인민군을 연기한 최민식은 매력적이라 테러리스트라지만 무심결에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 <쉬리>의 광채는 아직도 퇴색하지 않았다. 그 강제규 감독의 신작 <태극기 휘날리며>는 지난 4월3일 기준으로 1109만명을 동원해, 한국에서 최고의 관객 기록을 세웠다. 대략 국민의 4분의 1이 보았다는 계산이 나온다. 처음부터 세계 배급을 염두에 두고 전례가 없는 규모로 촬영했으며,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형제애를 그렸다고 한다. 초대작이라는 선전문구에 일말의 불안을 안고 보았더니…. 결혼을 앞둔 형 진태는 아버지가 죽은 뒤 구두닦이를 해 가계를 지탱하면서 동생 진석의 대학 진학에 꿈을 건다. 일만 하는 어머니, 약혼자의 동생들과 함께 가난하지만 행복한 생활을 해왔지만 전쟁이 터지자 형제는 강제 징용을 당하고 만다. 진태는 전투에서 공을 세워 동생을 제대시키려는 생각으로 귀신처럼 싸우며 화려한 전과를 올려간다. 부하의 죽음에도 개의치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포로를 학대한다. 진석은 형의 그런 변모와 형의 희생으로 전쟁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으로 반발하지만…. 미국과 중국의 개입으로 공격과 수비가 정신없을 정도로 바뀌는 역사적 사실에 바탕해 그려낸 전투장면은 과연 시간과 돈을 투자한 만큼 박력이 있었지만,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너무나 유사해 흥미가 줄어들고 말았다. 설정과 묘사에서 노골적이기 그지없는 미국영화를 모방하는 것이 한국영화의 활력이라고 너그럽게 봐주는 시기는 지났다고 생각했건만. 그 가운데 서울의 점령군이 남북 진영으로 교체될 때마다 인민재판으로 격렬한 보복전쟁을 벌인 것을 시사하는 장면이 있어 잔혹한 전투장면보다도 더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1천만 이산가족의 문제를 포함해 전쟁의 말할 수 없는 부분과 현대에 대한 영향에까지 파고든 묘사를 기대한 사람들이 한국에서도 적지 않았던 모양이지만, 극중에선 깨끗하게(?) 비켜갔다. 거기까지 갔더라면 파탄이 있더라도 괴작이 됐을지도 모르지만, 감독 자신이 복잡한 구성은 피해 어느 정도 도식화된 스토리로 말하는 것을 선택한 면이 있다. ‘격화소양’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게끔 영화는 어디까지나 형제 두 사람의 이야기에 수렴된다. 그 밖의 등장인물은 그들의 갈등을 높이기 위한 역할만 우선돼 각각의 캐릭터를 개성 있게 그려냈던 <쉬리>에 비해 떨어지는 느낌이다. 역시 대작인 만큼 미리 최대공약수로 정리되는 운명을 거스르진 못했나보다고 한탄을 했지만 2시간 반의 상영시간이 결코 고통스러웠던 것은 아니다. <쉬리>에서 보여줬던 세련된 연출과 적확한 묘사의 화려한 맛은 건재하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엔 대작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좀더 마음대로 만든 작품을 보고 싶다.

세계가 바라보는 한국영화 [6] - 프랑스

<카이에 뒤 시네마> 590호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불가시성을 향해가는 홍상수- 실뱅 쿠물/ 영화평론가 창조자가 자유를 행하는 순간에 그 자유의 일부가 부족할 수 있다는 것이 의외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배우 유지태가 전해준 홍상수의 다음 말을 생각한다면 그 모순은 약해진다. “사람들은 제가 현실에 대한 영화를 만든다고 하죠. 착각입니다. 전 제가 생각해낸 구성에 따라 영화를 만듭니다.” 창조자 자신의 전권을 선언하자마자 그 뒤를 잇는 것은 바로 구성이다. 그것은 ‘현실’에 휩쓸려가는 금덩이가 걸러질 수도 안 걸러질 수도 있는 체가 되어준다. 이번에는 홍 감독이 무엇을 가져올 것인가? 자신을 위로해주는 청년의 스웨터 속으로 가소로운 듯 울고 있는 젊은 여자의 코. 베드신의 리듬에 따라 요동치는 분홍색 이불의 끝부분. 앞장면에서 자기는 절대, 절대, 절대로 부천에 안 가겠다고 장담하던 친구 곁에 앉아 부천을 향해 택시 타고 가는 청년의 보일 듯 말 듯한 미소. 별것 아니기도 하고, 많은 것이기도 하다. 최소한으로 보자면 일련의 가슴 뭉클한 묘사다. 최대한으로 보자면 전작에서 가져온 테마들, 나아가 전체 서사의 주요 부분들이다. 그러나 <생활의 발견>의 ‘밀착과 환기(통풍/공간두기)의 균형’(<카이에 뒤 시네마> 586호) 이후 이번에 이 이야기를 실어가는 것은 환기이다. 확실히, 환기를 통해 편집에서 의외로 가장 아름다운 발견들을 하게 된다. 또 다른 침실장면 뒤에 떠오르는 공항의 하늘, 몰이해가 섞인 부드러운 시선 다음에 내리는 눈, 청년이 여자의 신랄한 독설에 당하고 자기방어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클로즈업으로 보이는 꽃무더기. 환기는 이번에는 컷 안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편이다. 대화장면에서 대화를 지배하고 이끌어가는 사람은 항상 화면의 왼쪽에 위치한다. 처음에 인물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더니 카메라는 곧 이동해서 왼쪽으로 더 기울어지며 약간 왜곡 효과를 주고, 다른 곳에 있고 싶어하는 이의 물리적인 존재감을 확대한다. 그 결과 심정적 장점으로는 그 인물의 불편함을 더해주고, 교육적 장점으로는 장면의 가독성을 유도한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에 알게 된다. 잊혀지지 않는 식당의 말싸움 장면에서 그 사건의 진정한 패자는 공격받는 이가 아니라는 것을. 후퇴라는 인상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영화의 한 대사가 실마리가 될 수 있다. “둘이 같이 들이닥치는 건 웃기잖아.” 예비감독인 헌준이 문호에게 선화가 일하는 술집 안으로 따라오지 않게 하려 하면서 하는 말이다. (동시등장의 시각적 효과를 예상하는) 연출가의 말이기도 하지만 라이벌에 대해 우위를 차지하려는 기만이 가득한 옹색한 술수이기도 하다. 실마리는 홍 감독이 자신만의 수완을 경계하고 감독으로서 갖고 있는 재능을 비웃기 시작했다는 것에 있다. 형식에 대한 관심에서 떠난 그는 시간에 따라 점점 그 형태에 머물게 될 테고 언젠가 고전주의, 달리 말해 불가시성에 이르게 될 것이다. 어떤 점에서는 이는 이미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가 전하는 ‘메시지’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세 사람의 이야기는 엄정함, 의무감, 곧은 감정, 이런 것은 모두 옛날 일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제 우리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그냥 가는 대로 두자. 마시고, 아무렇게나, 어떻게든, 서로 사랑하고, 그러다 보면 알게 될 테지. 앗, 눈이 오는군. 영화라는 층위에서는 촬영감독이 ‘과거/현재’, ‘꿈/현실’ 사이의 구분을 너무 구현하지 못하게 한 것은 실수이다. 그때부터는 두 시기와 세 계절이 은근히 섞여가서 여름에 갑자기 눈이 오기 시작하는 것에 대해 거의 무감각해지게 된다. 구성의 불가시성을 노리는 홍 감독은 그 구성이 가진 표현력을 뺏어버린다. 자신의 자유를 확인하는 바로 그 행위 가운데 자유를 제한하는 일에 가담하는 것이다. 구성 중인 작품이라는 층위에서는, 반면 이 위기로서의 영화는 매우 자극이 된다. 한때 중간 단계로 인식되던 그 일말의 ‘물렁함’(무기력함)조차 흥분과 다음에 올 것에 대한 즐거운 기다림의 원천이 된다. 비평의 기준이 구체에서 전체로 옮겨가고 있기 때문에 이 영화를 결국에는 그 자체로서 좋아할 수 있게 하는 두 가지를 주장해본다. 바로 소주와 신도시다. 소주는 말콤 로리에게 테킬라가 그랬듯이, 베를렌에게 압생트가 그랬듯이, 홍상수에게 술이자 세계관이다. 투명하게, 정신 속에 맑고 푸르게 흐르고 있다. 신도시를 이해하려면 거기서 자랐어야 할지 모른다. 부천은 다른 신도시처럼 낮에 하얗고 저녁에 붉은 같은 색과, 같은 불빛에, 같은 가능한/불가능한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곳이다. 도시도 아니고 시골도 아니라는 것, 그곳에서 펼쳐지는 것들과 거기서 진행되는 것들이 전에 알려진 그 어떤 것과도 닮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퍽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 중에 소주와 신도시의 공통점은 정상적인 시공간의 인식을 깨고, 명상이나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아름다움이나 우리 속에 설레는 에너지 같은 것에 깃든 듯한 고유한 지속성을 안겨준다는 데 있다. 지속에 대한 이 작업이 형태의 불가시성을 향하는 홍상수와 함께할 것임이 틀림없다. <리베라시옹> 2004년 5월17일자 <올드보이> 맥이 없는 스릴러, 밀려드는 피로감 - 필립 아쥬리/ 영화평론가 쿠엔틴 타란티노가 <올드보이>를 칸영화제 수상작으로 선정한 이후 이를 둘러싸고 이견이 분분하다. 일본 만화를 각색한 별난 한국영화 <올드보이>는 모든 장르와 해괴한 짓들(불법감금, 만두 먹는 장면, 옥상 자살 소동 등)로 이루어졌으며, 이 영화를 보려면 다른 영화들보다 네배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영화가 모든 사람에게 팝콘과 콜라를 먹으며 즐기는 것이 될 수는 없다. 영화를 보는 눈이 어느 정도 갖추어진 관객에게 <올드보이>는 되지도 않는 이야기일 뿐이다. <올드보이>를 둘러싼 견해는 극단적으로 달라진다. <복수는 나의 것>이 호평을 얻은 뒤 생긴 박찬욱의 프랑스 팬클럽은 한계를 두려워하지 않는 감독의 의지를 열렬히 지지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이들(박찬욱 팬클럽을 제외한 지구의 모든 사람들)에게 <올드보이>는 별다른 관심거리조차 되지 않는다. 비디오 게임의 리듬으로 두 시간이 지나갈 뿐 이야기와 상황 전개에서 개연성이나 치밀함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어쨌든 <올드보이>는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하는 영화이다. <카이에 뒤 시네마> 591호 <살인의 추억> 역사를 비추는 어두운 거울 - 앙트완 티리용/ 영화평론가 제목에서 말해주듯 <살인의 추억>은 사건 당시의 자료들이 픽션을 통해서 어떻게 다시 세상에 나오는지를 보여준다. 영화 속에 나오는 사건의 장소들은 망각의 장소들이며, 이 장소들은 영화를 시작하게 하고 고고학적인 의미를 지닌 채 결론을 맺게 한다. 이러한 장소들에서 시작된 영화의 도입부에는 어떠한 용이함도 보이지 않는다. 봉준호는 이 장소들을 복잡한 이야기와 범죄수사물 영화의 액션, 그리고 역사를 가시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끈질긴 작업에 유기적으로 연계하려는 과감함을 보여준다. <살인의 추억>에는 연쇄살인범을 다룬 할리우드 장르영화에서 볼 수 있는 두 가지가 빠져 있다. 첫째, 노력의 결실, 즉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수사의 결말이 없다. 둘째, 규칙적인 데쿠파주, 즉 수사의 노하우나 현란한 테크놀로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봉준호의 미장센은 한편으로는 힘과 폭력,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스꽝스럽게 반복되는 실수의 코믹함을 끌어낼 줄을 안다. 범죄수사물 영화의 복잡한 장치는 요란하게 시작됐다가 썰렁하게 끝나는 고풍스런 코믹 연극 무대가 된다. <살인의 추억>에서는 같은 장르에 지나치게 많이 나오는 주검의 규칙적인 발견이나 형사와 범인의 만남 대신 좁혀지지 않는 시간의 간극이 게임을 만들어준다. 라디오 프로에서 흘러나오는 메시지는 매번 사건을 예고해주지만 형사들은 늘 한발 늦는다. <살인의 추억>은 서로 만나지 않는 극들로 이루어진 영화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시 한국의 정치 상황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방해하는 일련의 냉혹한 현실을 암시해준다. 간간이 들려오는 민방위 훈련 경보 소리, 텔레비전 뉴스 화면 등이 당시의 상황을 드러내주는 다큐멘터리적 요소들로 드러난다.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가면 속에 감추어진 역사는 따로 있지 않고 수사가 진행되는 방향을 따라 나란히 전개되며, 이것은 <살인의 추억>을 성공의 길로 이끈다. 전체주의 시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획일화 정책을 위해 망각을 유도하는 시기에 이러한 기억은 드문 것이다. 그리고 봉준호와 같은 시네아스트가 장르영화와 역사 한편에 숨겨진 기억 사이에 교차하는 긴장관계 위에 하나의 정치를 구성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니다.

재미교포 만화감독 피터 정의 <이온 플럭스> 영화화

재미교포 애니메이션 감독 피터 정(Peter Chung)의 출세작 <이온 플럭스(Aeon Flux)>가 실사 영화로 제작된다. 피플지 최근호에 따르면 지난 95년 미국 MTV에 방영돼 인기를 끌었던 애니메이션 시리즈 <이온 플럭스>가 영화화된다. 2000년 <걸파이트>로 선댄스 영화제 대상을 받았고 칸영화제에서도 주목을 받았던 일본계 미국 여류감독 캐린 쿠사마(Karyn Kusama)가 감독하고 영화 <몬스터(Monster)>로 올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샤를리즈 테론(Charlize Theron)이 주연을 맡는다. 이달 중순 베를린에서 첫 촬영에 들어갈 예정. <이온 플럭스>는 MTV의 텔레비전 시리즈로 제작된, 총 7개 에피소드로 구성된성인 애니메이션. 원제는 극중 여주인공의 이름이다. '이온'은 '영원'이란 뜻이고,'플럭스'는 '흐름'이란 말. 깡마르고 각진 얼굴, 그러나 육감적이고 차가운 여전사로 시간과 공간이 불분명한 미래 도시에서 살아가는 특수요원 이온 플럭스. 이 작품은 정의의 편인지 악의 편인지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녀가 그 누구보다도 강력한 힘과 뛰어난 두뇌로 선과 악의 모호한 경계에서 전체주의 국가의 상징적 인물인 트레버 일당과 대결을 벌이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피터 정(오른쪽 사진)은 기발한 상상력으로 애니메이션의 본고장 미국에서도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 전세계적으로 마니아층을 거느리고 있는 애니메이션 작가. 선과 악의 대결구도가 뚜렷한 권선징악적 내용의 기존 애니메이션과는 달리 그의 작품은 선과 악의 경계 자체가 모호한 게 특징. <이온 플럭스>에서도 여주인공이 악당에게 패배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나 관객의 허를 찌른다. 피터 정은 외무공무원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여러 나라를 옮겨 다니며 살았다. 미국에 정착한 중학교 시절부터 애니메이션에 빠졌고 고교시절에는 직접 만화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1979년부터 칼아츠(캘리포니아 아트 스쿨)에서 애니메이션을 공부하고 1981년에 디즈니 스튜디오에서 일했으나 2년 후 퇴사한 뒤 안티디즈니적인 작품을 많이 만들며 명성을 쌓았다. 지난해에는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 페스티벌(SICAF) 심사위원으로 한국을 찾았고, 최근 개봉한 허영만의 동명만화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망치>의 스토리보드 작업에도 참여하는 등 한국 애니메이션 제작사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지난해 <애니 매트릭스>에 이어 얼마전 개봉한 데이비드 토히 감독의 영화 <리딕-헬리온 최후의 빛>의 애니메이션 버전인 <애니 리딕-다크 퓨어리(The Riddick Animated-Dark Fury)>로 한국팬들을 만났다. (서울=연합뉴스)

양키 고 홈, 위드 미

“양키 고 홈.” 영화 <헤드윅>의 주인공 ‘한셀’의 망토 오른쪽에 적힌 글귀다. 한셀은 ‘미국물’이 든 동독 꼬마였다. 어릴 때부터 미군 라디오 방송에 빠졌다. 데이비드 보위에 열광했고, 루 리드가 우상이었다. 그는 베를린의 철조망을 넘어 아메리칸드림을 꿈꾼다. 미군 흑인 병사가 그의 꿈을 현실로 바꿀 청혼을 한다. 한셀이 ‘여자’가 되는 조건으로. 한셀은 성전환 수술을 받고 헤드윅이 된다. 동독을 떠나기 전, 한셀이 드랙쇼를 하다 망토를 펼친다. 그 망토의 오른쪽에는 “양키 고 홈”, 왼쪽에는 “위드 미”가 박혀 있다. 태어난 땅에서 자기 자신으로 살지 못하는 이들의 슬픔을 이토록 간결하게 요약한 말을 본 적이 없다. 더구나 ‘진보’물까지 먹은 성소수자라면, 양키에 대한 감정은 양가적일 수밖에 없다. 양키도 싫지만, 한국이 더 싫은 자들의 비애. 나의 ‘접시’는 한셀의 라디오다. 요즘 미국병이 단단히 들었다. 날마다 미국 드라마만 보고, 미국 토크쇼만 즐긴다. ‘접시’를 달고 난 뒤에 생긴 병이다. 접시와 케이블을 타고 퍼지는 일종의 돌림병이다. 나야 케이블 텔레비전도 안 들어오는 후진 아파트에 살다가 겨우 한해 전 접시를 달고 미국물이 들었지만, 이미 수많은 언니 오빠들이 집에 앉아서 미국물을 먹었다고 한다. 겨우 <프렌즈>와 <섹스 & 시티>에 맛을 들일 무렵, 이미 두 시리즈는 굿바이를 준비하고 있었다. 뒤늦게나마 ‘어메리칸’ 프렌즈를 알게 되고, 뉴요커의 환상에 빠진 것만으로 감사할 따름이다. 딱 1년만, 뉴욕에서 살아보는 것은 새로운 꿈이 됐다. 늦은 귀가 탓이 크다. 도저히 밤 10시에 시작하는 SBS 드라마 스페셜도, MBC 특집기획 드라마도 볼 수가 없다. 어제 나가서 오늘 들어오니까. 집에 도착하면 공중파에는 시시껄렁한 프로그램들만 나온다. 채널은 당연히 위성방송으로 넘어간다. 자정 넘어 시작하는 OCN의 <섹스 & 시티>를 보면 ‘다행’이다. 대개 도착해서 리모컨을 누르면 온스타일의 <오프라 윈프리 쇼>가 나오고 있다. 새벽 1시를 넘긴 시간, 마침 어머니는 방에서 주무신다. 지상 최대의 토크쇼, <오프라 윈프리 쇼>는 생각보다 시시했다. 박장대소할 유머도, 뒤집어지는 구성도 없었다. 오프라의 진행도 유연하긴 했지만, 탁월하지는 않았다. 다만 섭외력이 탁월했다. 마돈나와 비욘세라니. 그들이 오프라를 만나는 일은 단순한 인터뷰가 아니었다. 일종의 ‘의례’였다. 여왕을 알현하고 귀족 작위라도 받는 분위기다. 그래서 오프라를 보면 ‘알고 있던’ 아메리칸드림을 ‘느끼게’ 된다. 그의 50번째 생일파티 방송을 보면서였다. 정말 오프라는 미합중국의 ‘공주’더라. 책 제목처럼 <신화가 된 여자>였다. 존 트래볼타가 사회를 보고, 티나 터너와 스티비 원더가 축가를 부르고, 래리 킹이 축하인사를 하러 5시간을 날아오고. 축하 영상을 보내온 스타들은 넘쳐났다. 톰 행크스, 짐 캐리, 니콜 키드먼…. ‘시간 관계상’ <섹스 & 시티>의 네 주인공은 한꺼번에 인사를 했다. 참, 생일 아침에는 넬슨 만델라가 축하전화를 걸었고, 낸시 레이건도 생일파티에 참석했다. 며칠 동안 성대한 파티가 계속됐다(생일파티 다음회의 제목은 ‘Behind the scenes of Oprah’s Birthday Weekend’였다. 생일 주간!). <오프라 윈프리 쇼>는 끊임없이 속삭인다. ‘너도 노력하면 그처럼 아메리칸드림을 이룰 수 있다’고. ‘뚱뚱한 10대 흑인 미혼모에서 매력적인 50대 연예재벌이 된 그녀를 보라’고. 게다가 ‘그는 남아공의 굶주리는 어린이를 돕는 천사’라고. 달콤한 꿈으로 돈 드는 복지를 대신하는 미국사회의 속삭임이다. 그래서 세계에서 돈을 가장 많이 버는 연예인 오프라 윈프리가 2003년에 벌어들였다는 1억4천만달러(1624억원)는 미국사회가 지출하는 일종의 복지비용처럼 보인다. 이처럼 아메리칸드림은 허상이다. 하지만 나는 나의 미국병이 부끄럽지 않다. 친미도 싫지만 반미도 마뜩찮기 때문이다. 오히려 일부 민족주의자의 반미 선동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들의 노래 <퍼킹 USA>를 혐오한다. 여성주의자 정희진씨의 지적처럼, 미군이 한국 여성들을 강간했으니 한국 남성도 미국(정확히는 여성)을 ‘퍼크’하자는 민족주의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우리도 이만큼 컸으니 미국에 한번 ‘개겨’보자는 정서는 반미가 아니다. 단지 ‘양키포비아’일 뿐이다. 얼치기 애국주의가 판치는 한, ‘소수자’들에게 미국은 여전히 ‘오! 꿈의 나라’다. 나의 슬로건은 ‘양키 고 홈, 위드 미’. 오늘도 접시를 타고 아메리칸드림을 꿈꾼다. 신윤동욱/ <한겨레21> 기자 syuk@hani.co.kr

英 영화인,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최고 영국영화

<러브 액츄얼리>를 비롯 최악의 영화는 대부분 최근작이 차지 영국의 유명 영화인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고(故)데이비드 린 감독의 오스카 수상작 <아라비아의 로렌스>(사진)가 최고의 영국영화로 꼽혔다고 데일리 텔레그래프 인터넷판이 15일 보도했다. 피터 오툴이 신비로운 T.E.로렌스 역할을 맡았던 1962년작 이 영화는 데이비드 린의 다른 고전 영화 4편과 함께 10위권에 들었다. 린 감독이 연출한 셀리아 존슨과 트레버 하워드 주연의 음울한 애정영화 <밀회>는 2위를 차지했으며 <위대한 유산은> 3위, <콰이강의 다리>는 7위를 차지했다. 린 감독의 부인은 14일 밤 설문결과를 환영하며 작고한 남편 린 감독을 가리켜 '자신의 꿈을 스크린에 펼쳐 놓는 방법을 알았던 몽상가'라고 표현했다. 린 부인은 "데이비드는 엄청나게 높은 기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자신을 거의 실패자라고 여겼다. 그의 영화들은 결함이 있는 주인공들과 복합적인 관계들을 다루고 있으며 주인공들은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상황에 커다란 두려움을 가지고 대처한다"며 "이 영화들이 삶의 문제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오래 남았다"고 말했다. 10위권에 든 나머지 영화들은 영국영화계가 극단적 사실주의와 사회풍자, 고전문학의 각색에 굳게 기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캐럴 리드 감독의 1949년 작 <제3의 사나이>가 공동 3위에 올랐으며 <레이디킬러> <친절한 마음과 화관> <케스>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삶과 죽음의 문제> <네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이 10위권 안에 들었다. 선데이 텔레그래프지가 영국 영화계를 기리기 위해 실시한 이번 조사에는 230명의 배우와 영화 기술진, 시나리오 작가, 감독들이 참여해 여러 부문에서 가장 좋아하는 영국 영화 10편, 배우 5명씩을 뽑았다. 이번 조사 결과는 영국영화의 전성기가 끝났다는 관점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10위권에 든 영화 중 가장 최근 작품인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만 해도 이미 10년 전의 영화이며 20위권에 든 영화 중 상대적으로 최근 작품인 <트레인스포팅>도 1996년 작품이다. 반대로 최악의 영국영화 10선은 작년에 개봉한 <러브 액츄얼리>등 모두 최근 영화들이 차지했다. 각각의 부문을 살펴보면, 최고의 007영화로는 숀 코너리가 최초로 본드로 출연한 영화가 차지했으며 최고의 로맨스 영화에는 <밀회>가 선정됐다. 데이비드 린 감독은 최고의 감독으로 선정됐으나 세계 영화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영국인으로는 히치콕 감독과 찰리 채플린이 꼽혔다. 007영화에서 M역으로 알려져 있는 주디 덴치는 가장 좋아하는 여배우로 뽑혔으며 비비안 리는 세계 영화계 영향을 가장 크게 준 영국 여배우로 뽑혔다. 알렉 기네스는 로런스 올리비에와 캐리 그랜트를 근소한 차로 앞서 세계 영화계에 가장 영향을 크게 준 영국 남우로 뽑혔다.(서울=연합뉴스)

아담하고 흉포한 성지침서, <팻 걸>

프랑스 여성감독 카트린 브레이야의 스크린은, 이를테면, 포르노적 복음서다. 단단하게 발기한 남성의 성기를 거침없이 들이대고, 여성의 몸을 유린하고서야 ‘복음’을 외친다.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이러이러한 방식으로 구원, 아니 해방될 수 있다고. 마치 물에 기름을 들이붓고 불을 질러서 물의 순수성을 증명하려는 듯 그의 영화는 양립불가능의 재료로 뭉쳐진 세계처럼 보인다. 우리를 처음 도발했던 <로망스>(1999)와 제한상영관 공식 1호 상영작이 된 <지옥의 해부>(2004)만 놓고보면 그렇다. 게다가 <로망스>는 대단히 교훈적으로, <지옥의 해부>는 지나치게 관념적으로 성큼성큼 다가왔기에 그의 복음은 가짜처럼 보일 지경이다. 그렇다면 그의 필모그래피 중간쯤에 있는 <팻 걸>이야말로 그와 그의 복음을 이해하기에 적당하다. 바캉스 떠난 10대 소녀의 첫 경험 체험기를 통해 그의 정신적, 육체적 기원이 온전히 드러나는데, 이건 <로망스>에서 뿌옇게 처리돼 시야에서 사라졌던 성기와 체모의 진면목이 <팻 걸>에 와서야 제 모습을 보이게 된 것과 비슷하다. 또 세 모녀의 긴 귀갓길에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이상한 긴장감은 대단히 영화적이어서 웬만한 스릴러를 무색하게 만드는데, 이건 영상에 대한 부족한 재능을 지적 상투성으로 감추려는 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불식시킨다. 여자: 보봐르를 읽어보세요. 훌륭한 글들이죠. 전 바르도를 좋아해요. 하지만 그 여자도 섹스문제죠. 사회자: 왜 이런 문제를 연구하시나요? 여자: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문제니까요. 그건 인류의 원초적인 문제이고 그 단계에선 누구도 완벽할 수 없어요. 세상이 혼란스럽기 때문에 다른 문제들은 훨씬 복잡하죠. <팻 걸>은 난데없이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인터뷰를 길게 보여준다. 섹스문제야말로 모든 길로 통할 수 있는 ‘마스터 키’라는 주장에 10대 소녀였던 카트린 브레이야는 환희를 느낀 적이 있다. 소녀 시절의 카트린 브레이야는 배우이자 가수였던 로라 베티의 선동적인 노래에 ‘감복’했었고, 그의 노래를 ‘팻 걸’ 아나이스에게 부르게 하고 싶었으나 원하는 곡을 찾을 수 없었다. 대신 이 인터뷰 장면을 발견하고 영화에 삽입했다. 그리고 자신이 10대 시절 써두었던 노래를 아나이스에게 부르게 한다. “밤이나 낮이나 너무 심심해. 만약 내가 꿈꿀 상대를 찾을 수만 있다면 살았든 죽었든 남자든 시체든 짐승이든 상관없는데….” 살집이 잔뜩 오른 아나이스는 10대 소녀 카트린 브레이야의 귀환이다. 시체든 짐승이든 상대를 찾을 수만 있다면 상관없다는 아나이스의 욕망은 멋진 로맨스의 환상에 젖어 있는 언니 엘레나의 그것에 비해 더할 나위 없이 올바르다, 는 것이 <팻 걸>의 명확한 결론이다. 카트린 브레이야는 10대부터 이미 확신범이었다. 아나이스는 얼굴도, 몸매도 예쁘기 그지없는 언니 엘레나에게 거듭 자신의 확신을 들려준다. “첫 경험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대충 해야 한다”는 걸, 그래야 “그 사랑이 거짓인 걸 깨닫고 상처받는 일이 없다”고, “여자는 비누랑 달라서 닳아 없어지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경험으로 성숙해지고 남자도 더 큰 기쁨을 얻게 된다”고. 엘레나는 아나이스의 이 복음을 외면한 탓에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잘생긴 대학생의 꾐에 빠져 낭패를 본다. 그뿐이랴. 복음을 떠받들지 않으면 그 이상의 천벌을 받는다는 걸, 카트린 브레이야는 극히 충격적인 방식으로 설파한다. 그뿐이랴. 파리로 돌아가면 처녀성을 잃은 너의 몸을 아빠가 검사할 거라고 엘레나를 위협하던 어머니도 함께 ‘지옥’으로 보내버린다. <팻 걸>에 이르러 궁금증이 모두 풀리는 건 아니다. <로망스>와 <지옥의 해부>에도 반복되는 질문. 왜 그는 일회용 배설을 위한 남자의 사탕발림을 혐오하면서도 발기된 남자의 성기를 어김없이 노출시켜야만할까. 또 여자에게 해방된 쾌락을 선사하는 남자는 ‘평균형’이 아니라 사도마조히스트로 현신할까. <로망스>에서 여성의 욕망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다가서는 중년의 교장 로베르토는 사디스트였고, <지옥의 해부>에선 여성의 성기에 막대기를 꽂는 탐험을 감행하던 게이였으며, <팻 걸>에선 살인강간범이다. 혹시 그는 남성을 동급 인간으로 수용하기보다 그들의 성기와 거친 손만을 필요한 도구로서 인정하겠다는 건 아닐까? 엘레나에게 몹쓸 형벌을 내리기는 하지만 엘레나와 아나이스의 밀고 당기는 자매애만큼은 부정하기 않기에 더욱 그런 답안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카트린 브레이야는 지적 상투성에 기댄 선동가가 아니라 의기충천한 전복자임에 틀림없다. :: <팻 걸>의 두 배우 자연스런 연기의 아나이스, 매혹적인 눈빛의 록산느 카트린 브레이야는 <팻걸>을 실제에서 가져왔다. 언론을 통해 보도된 사건 하나를 머리 속에 보관해두었는데 그것이 수영장에서 우연히 본 장면과 스파크를 일으켰다. “어느 날 호텔 수영장에서 보게 된 모습이 출발이었다. 살찐 사춘기 소녀가 수영장을 왔다갔다하며 마치 상상의 소년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듯 혼잣말을 하고 있는 장면. 그리고 소녀의 부모와 언니가 수영장 한켠에 있었다.” 아나이스는 그 소녀로부터 탄생했고, 극중 이름과 같은 아나이스 르부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이 수영장 장면을 그대로 재현했다. <팻 걸>은 아나이스 르부의 데뷔작이다. “캐스팅 중이던 카트린 브레이야를 만나게 됐죠. 마침내 세명이 남았고, 카트린은 우리에게 각본을 전부 읽게 했어요. 거기서 내 자신의 일부를 발견할 수 있었지만 그 캐릭터가 실제의 나는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아나이스 르부가 아닌 아나이스는 생각하기 힘들 만큼 자연스런 연기를 보여준다. 엘레나 역의 록산느 메스키다는 매혹적인 눈을 가졌다. <팻 걸>에서 엘레나의 눈빛은 ‘허당’이지만 실제의 그는 그렇지 않은 듯. “난 이 시나리오를 학교에서 읽었요. 이야기가 나를 매우 혼란스럽게 했지요. 그렇게 아주 기묘한 상태로 학교 주위를 걷다가 이야기 안에서 작동하는 흥미로운 뭔가를 발견했어요. 난 <로망스>도 보았는데 상스럽다기보다 대단히 순수한 뭔가를 보여주고 있었어요. <팻 걸>은 꽤 노골적인 순간이 있긴 하지만 <로망스>보다는 훨씬 부드럽죠.” 록산느 메스키다는 <팻 걸>로 시카고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카트린 브레이야의 또 다른 작품 <섹스 이즈 코미디>에서 훨씬 성숙한 모습으로 거대한 가짜 페니스 앞에서 난감해하는 영화 속 배우 캐릭터를 맡았다

전형적인 눈요깃감 블록버스터, <아이,로봇>

프로야스의 <아이, 로봇>이 아시모프의 이름값을 못하는 까닭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아이작 아시모프의 명성에 대해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아시모프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SF 작가이다. 하지만 그게 SF 작가로서 그의 가치를 정당화시켜주는가? 답은 아니라는 것이다. SF 황금기의 다른 ‘거장들’과 비교해도 아시모프는 상당히 떨어진다. 그는 아서 C. 클라크처럼 압도적인 비전으로 독자들을 흥분시킬 능력도 없고, 로버트 A. 하인라인처럼 근사한 이야기꾼도 아니다. 평생 동안 쓴 몇백권이나 되는 책들 중 SF 소설은 몇 작품 되지 않고, 그중 괜찮은 작품들도 똑똑한 십대 소년이 골방에서 쓴 작문 숙제 같다는 느낌을 준다. 그의 책들은 명쾌하고 재미있으며 아이디어가 풍부하지만 문학적 깊이나 입체적인 매력은 없다. 영화로 만들기에는 까다로운 아시모프의 소설 그러나 SF 팬덤에 속한 수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여전히 아시모프에 대해 좋은 기억을 품고 있다. 나에게 그는 40년대 할리우드영화에 나올 법한 작은 동네의 괴짜 약사 같은 사람이다. 독특하지만 사람 좋고 은근히 아는 것도 많은 동네 토박이 할아버지를 상상해보라. SF 독자들에게 아시모프는 그런 약사 할아버지처럼 친근한 일상의 일부이다. 심지어 그의 작품들이 정말 좋을 필요는 없다. 그의 작품들이 좋건 싫건 아시모프는 여전히 우리의 중요한 일부이고 SF 장르에서 아시모프의 존재를 무시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가 괜찮은 작가로서, 좋은 편집자로서, 일급의 SF 팬으로서 활동한 결과물들은 장르의 일부로 남았다. 그의 작품들이 은근히 다른 장르와 전환이 쉽지 않기 때문에 그런 독점적인 느낌이 더욱 강한 것일 수도 있다. 클라크나 하인라인의 소설들은 훌륭한 SF영화로 만들어질 가능성이 있고 실제로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와 같은 걸작들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아시모프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아직도 <파운데이션> 시리즈가 영화화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원작 그대로 살리면 영화가 엄청 재미없어지기 때문이다. 은하 제국이 멸망하는 거창한 역사적 격동기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똑똑하고 말 잘하는 사람들이 골방 안에서 끝도 없이 떠들어대는 내용이니 이를 어찌하란 말인지? 그러나 할리우드는 명성을 그대로 낭비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더구나 지금처럼 디지털 특수 효과가 발달하고 SF가 인기있는 장르가 된 시대에 SF계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의 이름을 팔아먹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게 비정상적인 일이다. 최근 들어 아시모프의 이름들이 심심치 않게 할리우드영화의 크레딧이나 제작발표회에 나타나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위에 언급된 문제들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알렉스 프로야스의 <아이, 로봇>은 원작을 무시하는 방법을 택했다. 무례한 짓 같지만 따지고보면 이치에 맞는다. 어차피 아시모프의 소설을 순진무구하게 각색해서 인기있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만들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의 <아이, 로봇> 단편집에서 가장 핵심인 건 개별 이야기들이 아니라 로봇 공학 3원칙이라는 개념이고, 그렇다면 아시모프가 만든 세계의 일반 규칙들만 빌려와 새로 이야기를 쓰는 건 꽤 그럴싸한 생각이다. 이런 시도는 프로야스가 처음도 아니다. 이미 60년대 텔레비전 시리즈의 고전 <아우터 리미츠>에서는 <아이, 로봇>이라는 제목의 유명한 오리지널 에피소드를 방영한 적 있었다. 주인공 로봇 이름이 아담 링크이고 살인죄로 몰린 로봇의 이야기였으니 이언도 바인더의 소설 영향이 더 컸겠지만 그래도 로봇 소설들의 연속성을 고려해보면 이치에 맞는 제목이었다. 게다가 프로야스와 야키바 골드먼은 아시모프의 원작들을 꽤 읽은 게 분명하다. 영화 곳곳에 아시모프의 원작에서 빌려온 사건들과 개념들이 발견된다. 일단 알프레드 래닝과 수잔 캘빈은 원작 <아이, 로봇>에도 등장하는 인물들이며 성격도 비슷하다. 로봇에 선입견을 가진 형사가 로봇과 관련된 살인사건에 연결되면서 로봇에 대한 선입견을 접는다는 설정은 아시모프의 장편 <강철 도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영화에서 사건의 기본 동기를 제공해주는 특정 개념은 아시모프의 후기 로봇 시리즈에 나오는 ‘로봇 공학 제0법칙’(“로봇은 인류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되며, 위험에 처해 있는 인류를 방관해서도 안 된다.”)을 먼저 가져와 자기식으로 사용한 것이다. 이 정도면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 사전 준비는 한 셈이다. 원작의 재료는 가져왔으나 매력은 살리지 못하다 하지만 예의있게 굴었다고 해서 그들이 꼭 좋은 각색자/각본가라는 법은 없다. 각색에서 중요한 것은 표면적인 예의가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설정을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리고 <아이, 로봇>는 여기서 한참 모자란다. 일단 영화가 전형적인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라는 점은 용서하고 넘어가자. 그 사람들도 어쩔 수 없이 특수효과에 들인 돈을 멀티플렉스 관객의 주머니에서 뽑아내야 할 테니까. 윌 스미스가 연기한 터프한 로봇 혐오자 형사 스프너는 재수없고 매력도 없으며 스타의 기존 이미지를 잘 활용한 것도 아니지만 그 역시 내가 신경써야 할 부분은 아니다. 아우디 간접 선전임이 너무나도 노골적인 추적신과 같은 것에 대해서도 간섭할 까닭이 없다. <아이, 로봇>의 가장 큰 문제점은 영화가 원작의 기본 재료는 상당히 많이 가져왔지만 그 기본 재료들의 매력이 어디에 있는지 놓쳤다는 것이다. 아시모프의 소설들은 대부분 논리 게임이다. 그의 세계에서 로봇 공학 3원칙이 그처럼 신성시되었던 것도 그렇지 않으면 게임의 재미가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로봇 공학 3원칙은 단순하지만 흥미로운 딜레마들을 만들어냈다. 로봇들에게 로봇 공학 3원칙은 행동의 동기를 제공했다. 대닐 올리버나 지스카드와 같은 로봇들이 적극적으로 인류의 안녕에 관심을 가졌던 것도 제1원칙 때문이었다. 하지만 로봇 공학 3원칙은 그런 자유의지에 입각한 그들의 행동을 제한하기도 했다. 언뜻 보면 정연한 규율로 통제하는 것 같은 이 법칙이 복잡한 실제 세상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어떤 딜레마들을 만들어내고 그것들이 어떻게 해소되는가는 아시모프의 소설들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여기서 논리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아시모프의 소설들에서 갈등은 지극히 논리적이기 때문이다. 프로야스의 <아이, 로봇>에는 그런 논리가 결여되어 있다. 언뜻 보기에 프로야스는 아시모프의 발명품들을 그대로 가져와 쓰고 있다. 인류를 구하기 위해 그들의 자유를 제한하겠다는 인공 지능 비키의 논리는 후반 <로봇> 시리즈에서 개별 인간들보다 인류를 우선하는 제0원칙을 제시한 지스카드의 논리와 거의 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반항적인 로봇 서니 역시 앤드루 마틴과 닮은 구석이 있고. 문제는 그 해결 방법이다. 프로야스의 영화에서 비키는 제0원칙을 만들어내자마자 잽싸게 그걸 상위 원칙으로 만들어버리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인간을 위한 안전 규칙인 제3원칙이 그처럼 쉽게 망가지는 게 말이 되는가? 제0원칙을 만든 지스카드는 인류를 구하기 위한 거창한 선택을 했으나 인간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하위 원칙인 1원칙 때문에 죽었다. 제0원칙은 로봇 공학 3원칙의 정연한 수학적 아름다움을 망쳐버렸다는 게 내 생각이지만, 자신의 행동을 규정하는 법칙에서 논리적으로 더 상위인 원칙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행동하다 결국은 낡은 원칙의 희생자가 되는 지스카드의 이야기는 드라마, 그것도 썩 그럴싸한 드라마였다. 왜 이 엄청난 갈등의 기회를 잡았으면서도 그 기회를 그냥 포기해버리는가? 비키가 ‘악당’이어서? 3원칙을 어길 수 있는 서니의 존재에 대한 해결책은 어떤가? 그건 서니가 로봇 공학 제3원칙을 위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벌써부터 하품이 나오기 시작한다. 이건 바둑을 두는 척하다가 갑자기 상대편의 바둑알들을 알까기로 날려버리는 것과 같다. 거창한 미스터리를 품은 극적인 드라마처럼 보여서 결말까지 기다렸더니 처음부터 수수께끼는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갈등도 시원치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물을 수밖에 없다. 도대체 3원칙은 왜 가져왔는가? 로봇에 대한 영화의 불가지론적인 접근법에 대해서는 정말 할말이 없다. 물론 여러분은 자연인으로서 영혼이나 신과 같은 초월적인 개념을 믿을 수 있고 나는 그걸 비난할 생각 따위는 전혀 없다. 먼저 생각한 사람이 프로야스인지 골드먼인지는 몰라도 ‘기계 속의 유령’ 개념을 로봇의 자연 진화를 설명하는 데 가져온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서니의 독특함을 설명하기 위해 ‘설명불가’를 끌어들이고 무의미한 인간성의 모방을 영혼과 독특함의 근거로 삼는 것에 대해서는 한마디 해야겠다. 왜 정면대결할 수 있는 기회를 피하고 비겁하게 불가지론 뒤에 숨는 것인지? 우리가 모른다고 해서 그것이 더 가치있거나 초월적이라는 법은 없다. 적어도 아시모프는 그의 독특한 로봇들을 설명하기 위해 신비주의나 불가지론을 들고나온 적이 없었다. 그는 정정당당하게 그들의 양전자 두뇌와 로봇 공학 3원칙을 가지고 그 과정을 똑똑히 설명했다. 그리고 그건 그의 로봇 소설들이 가진 큰 장점 중 하나였다. 아까도 말했지만 아이작 아시모프를 과대평가할 필요는 없다. 마찬가지로 그의 로봇 공학 3원칙의 의미를 과대평가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와 3원칙을 어떻게 평가하건, 그들은 이미 중요한 장르의 일부이며 그들은 자연인 아시모프가 죽은 이후에도 끊임없이 살아남았고 발전했다. 그 발전의 과정은 인공지능과 로봇을 다룬 수많은 SF에 반영되어 있다. 프로야스 역시 그 발전을 반영할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는 대신 전형적인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공식 속으로 숨어버렸다. 물론 전형적인 눈요깃감 블록버스터도 있기는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만들기 위해 꼭 아시모프의 이름을 끌어올 까닭은 없는 것이다.

김부선은 죄가 없다

영화배우 김부선이 대마초를 피웠다는 혐의로 구속되었다. 1983년 향정신성 의약품관리법 위반으로 구속된 이후 5번째의 감방행이었다. 으레 그렇듯이 처음 두번은 벌금형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8년 동일한 혐의로 다시 구속된 이 불굴의 대마적 여배우는 실형을 선고받고 8개월을 살아야 했다. 그리고 원모어 타임. 1998년 다시 구속. 어쩐 일인지 이번에는 400만원의 벌금형으로 감방살이를 모면했다. 그렇다면 2004년 김부선의 운명은? 수사관의 난입에 5층에서 몸을 날려 도주한 그녀는 다음날 자수했고 다행스럽게도 며칠 전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일단 검찰의 후의에 감사한다. 이제 남은 것은 재판이다. 김부선의 혐의는 지난 2002년부터 최근까지(아마도 2004년 6월 정도까지) 7회에 걸쳐 대마초를 흡연한 것이다. 2년 동안 7번. 후하게 쳐도 석달에 한번 꼴이다. 개그맨 신동엽 역시 1년 남짓 동안 7번에 걸쳐 대마초를 피웠다고 해서 구속된 바 있다. 1년 동안 7번? 영화배우 박중훈은 한달에 4번으로 1994년에, 가수 강산에는 ‘상습’적으로 피웠다고 해서 2000년 구속되었다(음, 이 정도는 돼야). 1975년 대마초 파동 이래 대한민국 국민들은 잊을 만하면 한번씩 대마초 파동을 타고 있다. 놀이동산의 롤러코스터도 이만큼 타면 싫증을 내게 마련이어서 사람들은 이제 면역이 되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식상했다. 대검찰청 마약수사부 감독들에게 충심으로 말해야 한다. 백날 배우를 바꾸어보라. 도통 시나리오를 바꾸지 않으니 무슨 재간으로 손님을 끌겠는가. 당신들만의 독점적인 스크린쿼터로? 솔직히 말한다면 나는 대마초가 합법화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별일이 없었다면 이번에도 이렇게 투덜거리거나 비아냥거리며 지나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그럴 수가 없다. 김부선 때문이다. 지금도 눈에 선하다. 동일 전과4범의 이 여배우가 대마초를 피운 혐의로 구속된 것을 두고 언제나처럼 호들갑을 떨어대는 텔레비전 뉴스가 여배우의 지난 과거를 비추고 있었다. 1983년의 자료필름이 흘러가는 동안 나는 부끄러웠다. 김부선은 수사관들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끌려가면서 개떼처럼 몰려온 텔레비전 방송사의 카메라 앞에서 의연하고 당당했다.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카메라를 피하지 않던 그녀의 눈길. 아, 그 빛바랜 자료필름에서 김부선은 양심범이었다. 그녀는 불알달린 누구처럼 찔찔 눈물을 짜지도 않았고 운동모를 눌러쓰거나 오리털 파커의 깃을 올리지도 않았다. 당당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조금은 상기된 표정이었지만 입가에 약간의 어색한 미소를 띠며 그녀는 그렇게 대마초를 ‘악의 풀’로 매도하는 세상의 횡포 앞에 의연한 자세로 맞서고 있었다. 용기를 내어 말해보자. 대마초를 피우는 것이 무슨 얼어죽을 죄인가? 대한민국은 1948년 이래 지금까지 6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독점적으로, 근자에는 공사(公社)적으로 담배를 팔아왔다. 담배는 술과 더불어 세계보건기구가 공인한 마약 중의 마약이다. 지난 30년 동안 수많은 연구결과들이 대마초가 담배보다 매우(!) 덜 해롭고 중독성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왔다. 5천년 동안 대마초 때문에 죽은 인간이 고작 1명에 그칠 때 담배는 2000년 한해에만 3만5천명의 대한민국 국민을 사망에 이르도록 했다. 더 큰 죄악은 국가가 배우와 가수들을 칠성판에 올려놓고 그들의 양심과 인간성을 난자했다는 것이다. 도대체 강산에와 같은 가수가 “죄를 지으면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한다는 진리를 알게 됐다”고 매스컴 앞에서 중얼거릴 때 그의 양심이, 그의 예술적 자존심이 온전할 수 있었다고 우리는 믿을 수 있을 것인가. 박중훈이 기자회견석상에서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떨구는 치욕을 감수하고도 얼마든지 훌륭한 배우가 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을 것인가. 천만에. 그들은 고춧가루 물수건과 목욕탕, 군용발전기가 동원되지 않았을 뿐 분명히 반인간적이고 반문화적인 법과 매스컴의 더러운 고문에 굴복해 아무런 대가없이 영혼을 팔아버린 파우스트가 되어버렸다. 보석으로 풀려난 김부선이 스크린으로 무사귀환하기 위해서는 역시 마찬가지의 통과의례를 거쳐야 할 것으로 보인다. 나는 그녀가 굴복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기를 바라지만 그러기에 그녀는 너무도 오랫동안 고통받아야 했고 또 너무 빈곤하게 살아야 했다. 때문에 나는 영화계와 음악계가 한마음으로 김부선의 문제에 대해 공공연하게 조직적으로 대응해주기를 진심으로 바라마지 않는다. 왜? 지난 30년 동안 당신들이 가장 큰 피해자들 아니었던가. 쥐구멍에 고개를 처박고 전전긍긍 찔찔 짜온 세월이 30년이라면 이제는 쥐라도 못할 일이다. 유재현/ 소설가·<시하눅빌 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