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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동현의 유쾌한 판타스포르투 영화제 기행 (2)

판타스포르투에 날아든 한국의 꿈들 호텔에 짐을 풀고서는 홍보용 딱지와 영화포스터를 들고서 극장을 다시 찾았다. 그때 지난번 공항에서 나를 마중 나왔던 스탭이 반가운 얼굴로 다가와서는 가방은 잘 있냐며 환히 웃는다. 그의 첫인사말에 어찌나 미안하던지 그리곤 순간, 그때 고맙다는 인사로 건넸던 컵라면이 생각나서 먹어봤냐고 물어보니, 매운 줄 모르고 바로 먹었다가 매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단다. 어찌나 미안스럽던지, 정확한 사용법을 알려주지 않는 선물은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생활의 지혜를 깨달으며 그와 헤어지고는 이곳저곳 상영관을 돌아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자원봉사자인 듯한 사람이 내 영화포스터를 들고 와서는 사인을 해달란다. 약간은 창피한 맘에 난 안 유명하다고 사인은 무슨 사인이냐고 하니, 지금 안 유명할 뿐이지 미래에는 어찌될지 모른다며 피터 잭슨도 92년엔 아무도 몰라보는 무명이었지만, 지금은 바빠서 오지도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나? 그러면서 나보고 언제 유명해질지 모른다며 자신의 아버지 것까지 부탁하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누가 알았으랴? 내가 영화를 찍어서는 꿈에서나 그리던 판타스틱영화제에 와서 이렇게 사인까지 하고 있을 줄 말이다. ‘그래, 나도 열심히 영화 찍어서 이 사람이 기대하는 그런 좋은 감독이 되어야겠구나’ 뭐, 이런 ‘바른생각’을 잠시하고는 영화를 찾아보기로 맘먹고 극장으로 들어갔다. 이곳에는 판타스틱영화만을 상영하는 판타스틱 장·단편 부문과 비판타스틱영화들을 상영하는 뉴디렉터스 부문 그리고 뮤직비디오 부문과 파노라마 그리고 몇개의 특별전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자랑스럽게도 판타스틱 경쟁에 <소름>, 뉴디렉터스 부문에 <나도 아내가 있으면 좋겠다> <물고기자리>, 파노라마 부문에 <나비> <친구> <해피앤드> 등이 그리고 단편부문에는 유일한 아시아영화로 <외계의 제19호 계획> 등 무려 7편의 한국영화들이 초청되어 상영되고 있었다. 그러나 다소 아쉬웠던 점은 사람들이 몰리는 저녁시간대에 상영하는 영화들이 많지 않아서 많은 관객과 만나지 못했던 점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경쟁부문의 <소름> 등은 심사위원단은 물론 각국 기자들에게서 호평을 받으며 영화제 마지막날까지 높은 관심을 끌었고,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낮시간대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관객이 찾아와서 객석에 가득 찬 웃음소리와 함께 성공적으로 상영을 마쳤다. 카를로스 사우라를 찾아랏 영화제에서 홀로 며칠을 보낸 뒤 포르투 부시장의 초청칵테일 오찬이 있던 날 <소름>의 윤종찬 감독, 황서식 촬영감독, 최석재 조명감독 그리고 <나도 아내가…>의 박흥식 감독 일행과 만났다. 나로서는 근 20일 만에 처음 상봉하는 한국인이었기에 너무나도 반가웠지만, 그분들 또한 반갑게 맞아주셔서 정말 감사했다. 이날의 오찬은 스페인의 레알 마드리드와 포르투 축구팀간의 경기결과에 불만을 품은 어떤 사람이 시청에 폭발물을 설치했다는 제보 때문에 부시장이 다시 시청으로 폭발물 찾으러 가는 통에 흐지부지 끝나긴 했지만, 그동안 몰랐던 게스트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자리이기도 했고, 전날 상영된 <소름>의 반응을 알 수 있었던 자리였다. 오찬 내내 윤종찬 감독은 여러 기자들은 물론 함께 초청된 감독들에게까지 관심을 받았고, 오찬이 끝난 뒤에도 인터뷰가 이어졌다. 영화제에서는 나름대로 이날 오찬 같이 매일매일 유명한 포르투 와인공장 방문 및 유람선 관광 등의 게스트들을 위한 관광 프로그램들을 마련해놓고 있어서 하루에 두세 시간의 일정으로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그 투어 중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바로 카를로스 사우라 감독에 관한 것인데, 첫날 오찬 때부터 다른 게스트들에 비해서 연로하신 한 노인분이 손자와 함께 조용히 사람들 곁에 있다가 사라지곤 했는데, 우리 일행은 영화제 관련되는 공무원이거나 아니면 영화사 사장 정도지 않겠나 뭐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박흥식 감독의 인터뷰 시간이 되어서 리볼리의 인터뷰 장소에 가니 그 전 시간 인터뷰를 그 할아버지가 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런데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굉장한 취재진이 빼곡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TV방송사에다가 처음 보는 기자들까지 말이다. ‘아니, 저 할아버지 우리랑 함께 다녔던 분인데….’ 순간 시야에 잡힌 기자들 손에 쥐어져 있는 팸플릿. 카를로스 사우라의 <브뉘엘>. 앗, 그 노인이 바로 그 유명한 거장 카를로스 사우라였던 것이다. 그 순간 바로 달려가서는 감독님 영화 좋아한다며 사인도 받고, 사진도 찍고, 사우라 영화에 광팬을 자처하는 박흥식 감독도 <나도 아내가…> 포스터 앞에서 사우라와 함께 사진도 찍고. 전날까지 무관심했던 아시아 청년들이 갑자기 떼로 달려와서는 사인공세에 사진까지 함께 찍어대니 사우라 감독은 과연 우리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지금 생각해도 즐거운 해프닝이 아닐 수 없다. <외계의…>의 처절한 상영 윤 감독님 일행이 떠나신 날 저녁 내내 영화의 상영이 있었다. 그 전날부터 상영되었던 단편경쟁작들의 수준이 워낙 뛰어나서 상에 대한 마음은 비운 지 오래였지만, 가급적 어깨는 나란히 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에 마지막 남은 포스터와 딱지를 챙겨들고는 미리 극장으로 향했다. 이미 이전에 뿌렸던 딱지들은 모두 동이 난 터라 몇개 남지 않은 딱지는 상영관 앞 부스에만 비치하고는 상영시간을 기다렸다. 제발 많은 사람들이 와야 할 텐데, 하는 맘으로 앉아 있는데 상영시간이 다 되어가도 몇 사람 보이질 않았다. 차라리 사람들이 없는 게 나을 수 있겠다, 뭐 이런 생각을 잠시 하고 있을 때쯤 언제 들어왔는지 극장 안에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 심지어 바닥에 앉아서 보는 사람은 물론, 서서 보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로 말이다. 역시 딱지 홍보효과가 있기는 있어나 보다. 영화를 떠나서 뿌듯함과 함께 영화 상영이 시작되었는데 이건 웬일? 앞의 35mm 단편들의 빵빵한 사운드와 깨끗한 화면과 너무나도 차이가 나는 나의 16mm 화면. 화면은 너무 어두워서 누가 드라큘라인지 미라인지도 몰라볼 지경인데다 소리는 또 얼마나 작던지. 갑자기 얼굴이 달아오르면서 영사실로 뛰어들어갔지만, 뭔 말이 통해야지. 그저 볼륨만 계속 높여달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근데 포커스는 영어가 아닌가? 삔이라고 해야 하남? 아무튼 결국 처절하게 상영된 나의 영화는 그런 대로 많은 사람들의 웃음을 이끌어내긴 했지만, 내 영화의 100% 완벽한 상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상영 뒤 마리오 도민스크 집행위원장이 직접 찾아와서 사과를 하긴 했지만, 그게 이들의 잘못인 것만은 아니지 않겠는가? 유일한 16mm 작품인데, 불러준 것만으로 감사해야지 하면서 아쉽지만, 그럭저럭 맘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비행기가 취소됐다고? 영화제의 마지막날, 모든 영화 상영도 끝나고, 스탭들 줄 선물도 두둑이 샀고, 이젠 떠나기만 하면 되는 날, 부천영화제의 송유진 프로그래머와 마지막 점심을 나누면서 공항으로 향한 나. 근데 이건 또 웬일? 10일 전에 비행기가 취소되었단다. 으악! 내일 입학식인데. 아무리 통사정을 해도 그 여자 뭔 말인지 구시렁대면서 내일 비행기 타란다. 또다시 묵직한 짐을 짊어메고는 리볼리 극장에 나타난 나. 아마도 판타스포르투 역사상 이런 게스트가 또 있으랴? 첫날엔 가방 잃어버려, 마지막에 비행기 취소. 아, 기구하기도 한 나의 운명이여! 그래도 그 덕에 송유진 프로그래머의 재치넘치는 <소름> 대리 수상장면도 볼 수 있었고, 마지막 폐막파티도 보긴 했지만, 소중한 입학식을 놓쳐버린 것은 지금도 아쉽다. 이렇게 나의 26일간의 처절한 판타스틱 기행은 끝이 났다. 마지막으로 항상 감독들 뒷바라지에 힘든 영진위 해외진흥부 분들께 공개적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면서 나에게 사인받은 그 포르투갈 스탭의 바람처럼 좋은 감독이 되어 다시 판토스포르투를 찾을 날을 고대하면서 못난 글을 마감한다. 올라!민동현/ 독립영화감독·<지우개따먹기> <외계의 제19호 계획> 연출 ◀ 이전 페이지

<생활의 발견>의 감독 홍상수 [1]

드디어 폐쇄회로를 벗어나다 홍상수 감독의 네번째 작품 <생활의 발견>이 드디어 공개됐다. 지난 3월4일 첫시사회에서 선보인 <생활의 발견>은 충분히 홍상수적이지만 이전과 확연히 달라졌다. 홍상수는 더이상 출구 없는 미로에 자기를 가둬두지 않고, 자신의 인물들과 세상을 거닐기 시작했다. 이건 홍상수의 새로운 단계다. <생활의 발견> 작품평, 그리고 어느 전작에서보다 감독의 모습이 짙게 배인 주연 김상경에게 홍상수와의 조우기를 들었다. <생활의 발견>은 3월22일 개봉한다. 편집자 개인적인 기억 하나. 1996년, 낯선 감독의 이상한 제목의 영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만났다. 도시인의 추레한 일상을 담은 풍경에 걸맞는, 어딘지 옛날 극장 냄새가 나는 코아아트홀에서. 신나게 웃으며, 가슴 한 구석에 서늘한 바람이 지나간 걸 느끼며 나오니, 찬바람이 거리를 휘감고 있었다. ‘닮지 않았어?’, ‘똑같아.’ 그런 말들을 내뱉으며 반추해본 홍상수의 데뷔작은, 가급적이면 만나고 싶지 않던 우리의, 아니 나의 자화상이었다. 3류의 인생을 살아가는(그게 굳이 나쁘다거나 창피하지는 않은), 질척거리는 일상에서 맴돌고 있는. 홍상수 영화에는 늘 그런 기운이 있었다. ‘지리멸렬하고 파편적인 삶’, 상호연관되어 있으면서도 의미없는 우연과 반복, 냉소주의와 멀찍한 시선, 일상으로 쌓아올린 인물들의 두터움, 익숙한 영화적 관습을 근저부터 뒤흔들기 등등. 그것은 해외에서도 찬사를 받는, 홍상수 영화의 브랜드 가치였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강원도의 힘> <오! 수정>에 이르기까지, 홍상수의 영화는 단 한번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의 영화는 늘 다른 걸음과 표정으로 다가왔다. 한결같으면서도, 어딘가 변한 모습. ‘질보다는 양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홍상수의 말은, 그의 영화에서 증명된다. 그의 영화는 전작과 질적으로 다른 명백한 도약을 시도하지 않는다. 그냥 자신의 길을 가면, 그 지나온 길의 풍경과 거리만큼이 새롭게 아로새겨진다. 발걸음 가는 대는, 마음 가는 대로 <생활의 발견>은 홍상수 영화의 전작들과 많이 닮아 있으면서, 또 다르다. 전작들은 형식적인 치밀함이 두드러졌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네명의 인물들을 종횡으로 어지럽게 얽어놓으며 파국으로 몰고간다. <강원도의 힘>은 동시간에 벌어지는 상황을 잘게 이어붙이며 지리멸렬한 삶을 관찰한다. <오! 수정>은 동일한 사건을 서로 다른 두개의 기억으로 재현한다. 얼핏 보기에는 어디에나 있을 법한 일상의 표면을 죽 훑어내리는 것에 불과하지만, 그 내부에는 의식적인 조립과 부연이 섬세하게 덧대어져 있었다. 형식주의는 아니지만, 인물들의 욕망과 동선은 철저하게 조응하고 있었다. 하지만 <생활의 발견>에서 인물들은 허허롭게 돌아다닌다. 길을 가다가, 평소에 익숙하던 길에서 벗어나 낯선 길로 접어들었을 때의 자유로움과 낯섬이 배어난다. 목적지를 향해 가다가, 아무 데나 마음 내키는 역에서 그냥 내렸을 때의 한가로움 같은 것. <생활의 발견>의 경수는 그냥 이리저리 헤매다닌다. 그러다 여자를 만나고, 섹스 혹은 사랑을 하고, 떠나간다. 이 인물은 어딘가에 치우침이나 회한이 없다. 그냥 발 닿는 대로, 마음이 이끄는 대로 간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이토록 자유로운 발걸음은 이전에 없었다. <오! 수정>까지의 인물들은 늘 무언가에 얽매여 있고, 죽음의 그림자에 한발을 들이밀고 있거나, 지긋지긋한 일상에서 도망치고 싶어했다. 하지만 <생활의 발견>의 경수, 명숙, 선영은 그냥 살아간다. ‘매일매일을 열심히 살기로 했어요’라는 명숙의 말은 농담처럼 울리지만, 치열한 진담이다. 그들은 살아간다. 어리석게 살아가지만, 그것 또한 치열하다. 홍상수 영화의 인물들은 이제 감독의 손으로만 조종되는 인형이 아니다. 홍상수는 더이상 그들을 비상구 없는 미로에서 맴돌게 하는 ‘잔혹한 신’이 아니다. 캐스팅을 거절당한 경수는 충동적으로 선배를 찾아 춘천으로 간다. 그 곳에서 배우인 경수를 좋아한다는 명숙을 만나고, 이런저런 소동을 벌인 뒤 고향인 부산으로 가다가, 옆자리에 앉았던 선영을 쫓아 경주에 내린다. <생활의 발견>은 이 짧은 여행의 기록이다. 에피소드나 기억을 곰곰이 따져볼 필요도 없다. 그냥 따라가기만 하면, 모든 것이 보이고 모든 것이 드러난다. ‘이전 영화들에서는 구성면에서 인위성이 있었다. 매번 하다보니 다른 걸 해보고 싶어서’ 만들어진 <생활의 발견>은 말 그대로, 행동과 인식의 자연스러움을 따라간다. <생활의 발견>에서 가장 튀는 인물은 명숙이다. 처음 본 남자를 앉혀두고 면전에서 살사를 추고, 술을 마시다가 그녀를 좋아하는 남자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경수에게 “우리 어색한 거 깨게 뽀뽀나 할까요?”라고 말을 던지고, 섹스를 하고나서 난데없이 ‘사랑하지 않죠?’ ‘사랑하지 않는 거야’라며 토라지는 명숙을 보고 있으면 어이없어 웃음을 터트리다가, 그게 현실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우리들 주변의 수많은 인물들에서 추출된, 아주 풍성한 인물. 그들은 우리를 닮았고, 우리는 그들을 닮았다. <생활의 발견>의 인물은 한층 더 우리 곁으로 다가앉았다. “신비, 끝내 모를 것” <생활의 발견>은 전작과 약간 달리, 완성된 시나리오 없이 트리트먼트만으로 크랭크인을 했다. 현장에 가서 그 순간의 느낌으로 대사와 상황을 만들어낸 것이다. 전작들도 현장에서 상황과 대사를 바꾸기는 했지만, 모든 것을 즉흥적인 직관에 맡긴 것은 <생활의 발견>이 처음이다. 홍상수 감독이 트리트먼트 서문에 붙여둔 메모에는 이런 말들이 있었다. 사람들 보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라 해놓고, 놔두고 보면 서로들 서로를 흉내내고 있는 걸 보게 될 것이다. - 에릭 호퍼(1902-1983) 우리 행동의 부조리함은 거의가 다 우리가 흉내내서는 안 될 것- 그게 사람이든 뭐든- 을 흉내내려고 하는 데서 기인한다. - 사무엘 존슨(1709-1784) 그 메모처럼, <생활의 발견>에서 핵심적인 시제(詩題)를 끌어낸다면 ‘모방’(넓은 의미에서의)이다. “아는 사람 중에 술 마시면 몸을 흔드는 사람이 있었다. 지금은 그 사람을 만나지도 않는데, 어느 순간 보니까 그 사람 하던 걸 내가 하더라. 술 먹으면서 흔들고. 모방이란 것을, 그런 패턴으로 조각들을 이어붙여보면 어떨까. 우연이랄까 이런 것도 그것과 연결되는데 내가 말하는 모방은 넓은 의미다. 아주 하찮은 것. 남자가 춘천에서 오리배를 보고 경주에서 오리배를 또 본다. 한 인간이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사회에서 요즘 오리배가 유행하는 것이다. 서로 다른 여자 두명의 편지에도 ‘내 안의 당신, 당신 안의 나’라는 똑같은 표현이 나온다. 동시대의 두 여자가 사랑의 표현으로 그런 걸 쓴다는 것도 모방이다. 남자가 ‘사람되기 힘들지만 괴물은 되지 맙시다’라는 말 따라하는 것도 그렇고. 마지막에 영화의 결말을 맺는 모방은 청평사 설화이야기다. 공주가 밥 가지러 온다고 절에 들어갔다가 나오지 않고 기다리던 뱀이 들어가려다가 천둥번개가 치니까 문 앞에서 돌아나온다. 경수가 그 여자 집 앞에 갔을 때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했을 것 아닌가. 그 설화가, 내 꼴이 꼭 뱀 같네. 그런 생각을 하고, 그게 굉장히 신비스럽게 다가왔을 것 같다. 그 패턴에 권위를 부여해서 행동을 결정해서 가는 것이다. 그런 것도 모방이다. 설화가 보여주는 이야기 패턴을 자기가 모방한다고 생각한 거다.” 홍상수의 영화는 지금까지, ‘냉소적’ 혹은 ‘비관주의적’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맞는 말이다. 홍상수가 창조해낸 인물들은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끊임없이 무거운 돌을 굴리고 있다. 그곳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은 있지만, 비루한 삶에서 결코 헤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과 <강원도의 힘>의 인물들은 분명히 그렇다. 하지만 <오! 수정>의 수정은 약간 다르다. 수정은 비상을 꿈꾼다. 어쩌면 우연이라고 믿는 남자와 달리, 그녀는 모든 것을 ‘의도’대로 끌고 나간다. 신분의 상승을 위해서,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수정의 욕망은, 온갖 계산된 행동은 그러나 추해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그녀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고, 누구나 택하는 일상의 거울일 뿐이다. 날개를 꿈꾸지 않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수정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치열하게 원하고 또 행동한 것이다. 하지만 그 의도는, 어쩌면 우연이 아닐까. “우연이란 신비함과 관계가 있다. 신비주의 이런 게 아니라. 세상에는 우리가 우리 능력으로 알 수 있는 것들이 결정돼 있다. 끝내 모를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게 나한테는 신비다. 자기가 알 수 있는 것과 알 수 없는 것을 구분짓고, 알 수 없는 것을 인정하고 사는 것. 그런 태도를 좋아한다. 그걸 신비라고 이름 붙였는데, 그런 것을 생각하게 되는 과정에서 자꾸 관찰되는 게 우연이다. 우연이 세상에서 인정받고 있지 못하지만 사실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가 자기 능력의 결과라고 믿고 있는 것도 사실은 우연의 조합으로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그가 너그러워졌다, 서글해졌다 홍상수의 영화는 세상의 ‘보편적인’ 기준으로 보기에는 꽤 삐딱하지만, 비관적이라고 하기는 힘들다. 다만 방법이 다를 뿐이다. “우리 사람되기 힘들지만”이라는 대사는, 농담이 아니다. 홍상수는 영웅이나, 어떤 역할모델을 거부한다. “미화되고 어떤 모델들을 자꾸 상정해서 보여주고 이런 것이 더 좋은 방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잘됐다고 하는 사람들을 흉내낸다고 되는 게 아니다. 그 사람들은 운이 좋은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처럼 되고 싶어도 우리는 안 된다. 한 개인이 그 상태에 있기까지 엄청나게 많은 조각의 엘리멘터리들이 쌓여서 나아간 건데, 운도 좋아서. 그렇게 멋있어진 사람 자꾸 본다고 그렇게 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자꾸 그렇게 믿고 싶어한다. 모델을 보여주면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대다수가 그렇지 못하고 끙끙대고 사는 사람들인데. 자꾸 된다고 환상을 갖고 그러는 것보다 자기를 과감하게 인정하게끔 해서 자기만의 꽃을 개화해서 살아야하지 않을까. 기계적인 이데올로기나 통상적으로 수용하는 지혜나 이런 것들이 갖는 편파적인 태도가 있다. 그건 어떤 사람들에게는 좋은 것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방법론상으로 잘 안 통한다. 그런 것들보다는 자기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자기의 몸과 마음의 생김새를 인정하고 거기서 새로 시작하게 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 마음에서…” 만들어진 것이, <생활의 발견>의 초라하지만 솔직한 사람들이다. 하룻밤에 무슨 사랑이냐고 비웃다가는, 자신도 똑같이 ‘사랑한다’를 남용하고. 잘 나가는 남편을 절대로 버릴 수 없지만, 욕망도 포기할 수는 없고. <생활의 발견>에서는 ‘난 과정을 믿고 거기에 건다’던 홍상수의 태도가, 한결 너그러워졌다. 이번에는 집요하게 인물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붙이거나 복마전을 헤매게 하지 않는다. 깨달음이나 변신을 의도하지도 않는다. 그저 마라톤 선수처럼 꾸준하게 달려간다. ‘정체성은 물질적’이란 말대로, 인간의 물질성을 침착하게 관찰한다. 배우가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에 공명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준다. 풀어놓고, 본성을 찾아 움직이게 만든다. 그동안 홍상수의 영화에 나온 배우들이, ‘절정의 연기’를 보여준 것은 우연이 아니다. 홍상수는 뼈대 위에 찰흙을 계속 덧붙여나가는 방식으로 인물을 만든다. 연이은 덧붙임의 과정에서 인물의 풍성함이 살아난다. 대사 하나, 움직임 하나에 집중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동화된다. 그 인물들의 일상이 곧 그들이고, 그것이 연기자에게 침투한다. 인물들을 악착같이 몰아붙이던 전작과 달리, 느긋하게 연기자를 방목하는 <생활의 발견>을 보고 나서는 우울하지가 않다. 어쩐지 술잔이라도 기울여야할 것 같은, 과거의 막막함이 누그러들었다. 공간의 의미도 한결 느슨해졌다. 사람들이 놀러가는 곳. 유흥지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춘천과 경주에서, 경수는 여인들에게 작업 들어가는 데 소일한다. 익숙한 공간은, 홍상수의 영화에서도 비틀려서 투영된다. 빨간 조명이 켜진 술집의 쪽방처럼 의미가 탈색된 공간일 뿐이다. 일상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아무리 멀리 가도 도망칠 수 없는 세상. 그곳에서 경수는 회전문을 돌아나오는 뱀처럼, 비를 맞으며 여인의 집 앞에서 돌아선다. 그 설화를 떠올려도, 아마도 경수에게 깨달음같은 일은 없었을 것이다. 돌아나와서도, 다시 고향인 부산이나 생활의 현장인 서울로 돌아와서도 변함없이 살아왔던 일상을 반복할 것이다. <생활의 발견>은 역사적인 발견을 보여주는 영화가 아니다. 그냥 내가 ‘누군가를 모방하고 있다’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일상적인 ‘표면의 영화’다. “진실은 표면에 있으며, 영화는 표면을 담아내는 데 가장 적합한 예술”이란 말처럼. 나는 개인적으로 <오! 수정>을 많이 좋아했고, 하나의 정점에 이르렀다고 생각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홍상수의 인물탐구는 비슷하다. 그건 마치 경찰서의 ‘심문’과 비슷하다. 묻고, 또 묻고, 지칠 때까지 캐물어 원하는 답을 얻어내는 것. 아니 듣지 않아도, 그 과정 자체가 요구하는 답이 이미 존재하는 것. 홍상수의 답은 언제나 만족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 수정> 이후에는 조금 다른 답을 듣고 싶었다. 변화가 아니라, 걸어온 거리만큼의 다른 풍경을. <생활의 발견>은 같은 듯, 다른 답이다. 인간에 대한 홍상수의 태도는 변함없지만, 눈매가 서글해졌다고나 할까. 외면하고 싶은 생각보다는, 한데 어울리고 싶은 영화다.

리메이크, 하고 또 하고

코언형제 신작 비롯 10여편 물망, <오션스 일레븐> 등 흥행에 힘입어 열기 가열할리우드에 재활용이 대유행이다. 한때 대중적으로 또는 비평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던 고전들의 리메이크 유행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최근 들어 점점 가열되고 있는 것. <버라이어티> 최근호는 현재 제작 진행중인 리메이크작 리스트를 공개하면서, 할리우드 리메이크 트렌드의 원인을 짚어냈다. 현재 리메이크가 진행되고 있는 작품 중에서 비교적 윤곽이 뚜렷이 잡힌 것들로는 코언 형제의 <갬빗>과 조너선 드미의 <찰리의 진실>이 있다. 1966년작인 <갬빗>은 마이클 케인과 셜리 매클레인이 뜨내기 강도로 출연한 로맨틱코미디. 개봉을 앞두고 있는 <찰리의 진실>은 캐리 그랜트와 오드리 헵번이 주연했던 63년작 <샤레이드>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이 밖에도 앨프리드 히치콕의 <서스피션>, 제인 폰다 주연의 <바바렐라>, 어린이들의 영원한 고전 <찰리와 초콜릿 공장>, 컬트가 된 공포영화 <텍사스 살인마>, 제임스 스튜어트 주연의 <하비>의 리메이크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이전에 리메이크된 적 있는 작품들도 타깃에서 벗어나긴 힘들다. 앨프리드 히치콕의 <스트레인저>은 3번이나 리메이크됐지만, 현재 워너에서 다시 제작중이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황야의 7인>으로 리메이크된 바 있지만, 최근 MGM과 미라맥스가 새로운 리메이크를 시도하고 있다. 프랑스의 <세 남자와 아기 바구니>와 스페인의 <오픈 유어 아이스>에 이어, 최근 노르웨이의 <슬립워커>와 독일의 <엑스페리먼트> 등 미국 밖에서 만들어진 작품들에 대한 리메이크 작업도 활발한 편이다. 최근 할리우드의 리메이크 유행은 지난해 <오션스 일레븐>과 <혹성탈출> 등 리메이크작들의 성공에 고무된 바 크다. 이들 두 작품이 전세계적으로 벌어들인 수익이 6억9800만달러에 이르니, 스튜디오와 프로듀서가 눈독을 들일 만하다. 그러나 이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프로젝트 개발비가 상승하고 있고, 투자자들이 갈수록 블록버스터 프랜차이즈를 원하기 때문이다.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은 그 자체로 브랜드가 된 과거의 흥행작을 리메이크하는 것. 따라서 9천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유니버설사나 6500편에 달하는 라이브러리를 보유하고 있는 워너브러더스가 리메이크 제작에 비교적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다. 좀더 긍정적인 이유도 있다. 참신한 아이템을 찾아 헤매는 이들에게 고전은 때로 새로운 영감을 선사하기도 한다. <갬빗>의 리메이크를 진행중인 유니버설사의 입장이 그렇다. “최근 몇년간 반복돼온 로맨틱코미디의 컨벤션을 벗어난, 전혀 색다르고 신선한 작품이 될 것이라는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것.그러나 작품성이나 흥행성이 검증된 원작영화라고 해서, 성공적인 리메이크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노먼 주이슨의 75년작 SF액션을 리메이크한 <롤러볼>이나 빌리 와일더의 걸작 로맨틱코미디를 리메이크한 <사브리나>, 앨프리드 히치콕의 대표적인 스릴러를 리메이크한 <싸이코> 등 실패한 케이스가 적지 않다. 또 걸작 고전의 리메이크일수록 팬들의 반감을 감수해야 하는 어려움도 따른다. 리메이크를 제작 진행중인 프로듀서들은 대부분 “원작과 다르거나 더 낫거나 혹은 그 둘 다”임을 확신하지만, 그것은 무엇보다 향후 몇년 동안 속편과 리메이크의 홍수에 시달려야 할 관객의 바람인 것이다. 박은영

철새들의 `위대한` 생존의 날개짓

세상엔 황량한 바람 소리와 날개 퍼덕이는 소리밖에 없는 듯하다. 인간들이 아귀다툼을 벌이는 시간에도, 모두들 잠들어 있는 시간에도 그들은 날고 또 난다. <위대한 비상>은 지난 96년 <마이크로 코스모스>를 통해 신비스런 곤충의 세계를 보여줬던 팀들이 3년에 걸쳐 담아낸 `지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행자'들의 이야기다. 철새들의 여행이 `위대한' 건 무엇보다도 그것이 생존을 위한 싸움이기 때문이다. 중간 경유지에서 태어난 새끼들도 날갯짓을 익히고 이내 미지의 길을 떠난다. 단지 해와 별을 지표삼아…, 오로지 살기 위해. 영화에는 회색기러기, 황새, 흰머리수리, 흰뺨기러기 등 35종의 철새가 등장한다. 이동거리는 천차만별이다. 바라보기 안타까울 정도로 짧은 물질로 바다 속에서 1천㎞를 이동하는 킹펭귄이 있는가 하면, 2만㎞를 시원스레 날아가는 북극제비갈매기도 있다. 세계적인 조류학자들이 결정한 철새들의 알을 전세계에서 1천여개 채집해왔다. 여기에 새들의 `유모'로 선정된 40여명의 사람들이 알에서 깨어나기 전부터 새들과 대화를 나누고, 엔진소리와 카메라 소리 등을 들려줬다. 배역을 제대로 소화하도록 훈련시키는 과정이었다. 그 결과 다 자란 새들은 `유모'와 `카메라'가 탄 경비행기 곁을 날며 영화의 주역 역할을 능숙하게 해냈다. 제작진은 극지대 빙하에서 아프리카 모래사막까지, 전세계 36개국 175개지역을 돌며 일반영화의 100배인 150만자 필름에 담아냈다. 그 덕에 새들의 속도감과 인간의 땅을 내려다 보는 새들의 시선이 보는 이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무너져 내리는 빙하나 황야를 달리는 말들의 모습 등 서사적인 화면들도 장관이지만 때론 발레의 군무를 하듯, 때론 사랑싸움을 하듯 벌이는 새들의 장난스런 모습 또한 빼놓을 수 장면이다. 서정적인 음악과 함께 2시간의 신비로운 철새들의 여행에 동행한 당신은 어깨가 뻐근해짐을 느낄 것이다. 마치 당신이 날기라도 했듯이. 감독 자크 페랭, 29일 개봉. 김영희 기자dora@hani.co.kr

POSCO CF 촬영현장

“쥴레! 밀크 티? 블랙 티?” 찻주전자를 들고 벌판을 누비는 인도인 청년이 인사말과 함께 차를 권한다. 새벽 3시에 일어나 촬영준비를 시작한 스탭들이 차 한잔으로 몸을 녹일 즈음, 그제야 설산 너머로 동이 트고 동자승들을 태운 버스가 도착한다. 인근 라마사원에 살고 있는 예닐곱살부터 열여섯살까지의 동자승들이 바로 이날 찍을 광고의 모델. 바람부는 먼 언덕을 그들이 오르자, 사이언빛 벌판과 붉은 승복자락이 어우러지면서 모니터는 금세 아름다운 색감으로 물이 오른다. 여기는 인도 북서쪽 라닥 지방의 레(Leh). 히말라야 산기슭 해발 4천m 이상 고산지대에 자리한 ‘리틀 티벳’마을이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반문명 보고서 <오래된 미래> 이후 유럽인들이 즐겨찾아온 정신적 휴양지이자 인접한 파키스탄과 대치상태인 인도 최전방이기도 한 독특한 곳이다. 델리에서 비행기로 한 시간 거리. 그 한 시간 동안 비행기는 히말라야 산맥을 넘는데, 겨울이면 마날리에서 이어지는 육로가 끊겨 하루 한번뿐인 이 비행기가 유일한 외지와의 교통수단이 된다. “세상 모두를 하나되게 하는 언어, 축구”, “작은 공 하나가 세상 모두를 만나게 합니다”를 카피로 하는 이 광고는, 포스코가 유니세프를 통해 오지 및 분쟁지역 어린이들에게 축구공을 나눠주는 활동을 알리고자 제작됐다. 동자승들이 나오는 ‘실타래’편과 아프가니스탄 어린이들이 나오는 ‘깡통’편 모두 현지 어린이들이 축구하는 모습을 담아내는 다분히 다큐적인 광고. 촬영은 2월22일부터 25일까지 나흘간 이뤄졌다. 촬영현장의 모습은, 흔히 보지 못할 진귀한 것이었다. 건조한 영하의 추위에 대비하다 보니 미쉐린 타이어 모델처럼 껴입고만 스탭들과 뛰어다니기에 거추장스러운지 반팔차림을 택한 동자승들부터, 넓은 벌판 위를 가로지르는 기자재들의 전깃줄까지. 어린이들의 자연스런 모습을 담기 위해 카메라는 피사체로부터 수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설치됐고, 600mm 망원렌즈는 먼 설산과 스탁나라는 이름의 작은 라마사원, 동자승들이 축구하며 일으키는 붉은 먼지를 하나의 그림 안에 잡아냈다. 난징 니마, 징징 분조 등 재미있는 이름들의 아이들은 멀리 있는 카메라에 신경쓰지 않고 축구에 열중. 골인이 되면 환호를 하고 땀이 나면 승복의 숄을 벗어던지며 법회 대신 축구만 하는 하루를 맘껏 즐겼다. 젊은 남자 스탭들과 무산소로 에베레스트를 등정했다는 현지 촌로 한분, 그리고 스물여섯살의 큰스님이 그들을 통솔했다. 감독과 모델 사이의 의사소통은 몇 단계를 거쳐야 했다. 감독이 곁에 있는 스탭에게 지시를 하면 그가 무전기로 언덕 위에 있는 다른 한국인 스탭에게 전달, 영어를 하는 스탭이 다시 현지 촌로 할아버지에게 이야기를 하면, 그가 힌디어로 동자승들에게 이야기하는 식이었다. 복잡한 과정이었지만 신속하게 이루어졌고, 영화촬영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신과 신 사이 오랜 기다림의 시간은 없었다. 현장에서 식사는 캐터링이 해결했다. 한쪽에 천막을 치고 현지 요리사들이 요리를 했고, 설산이 바라다보이는 들판 위에 테이블을 펴고 앉아 멋진 야외식사를 하곤 했다. 메뉴야 현지인들은 커리와 닭고기 등 현지음식이었고, 인도향에 익숙지 않은 한국인들은 햇반과 사발면, 양념고추장과 볶은김치, 김, 통조림에 담긴 정어리나 참치로 이루어진 한식. 지역특산물인 살구로 만든 수정과는 후식으로 그만이었다. 문제는 화장실이었다. 허허벌판에 화장실이 있을 리 만무. 남자들은 작은 바위 등 지형지물을 이용했지만, 여자의 경우 차를 타고 멀리 있는 산 뒤로 돌아가거나 심지어 군인들이 파놓은 참호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해질 무렵, 세계에서 가장 높은 포장도로인 ‘히말라야 프로젝트 도로’의 한 자락을 달려 레의 숙소로 돌아오는 길. 랜드 크루저에 몸을 실은 제작진들은 어느새 라다키들처럼 얼굴이 검게 타 있었고, 고산병 따위는 잊은 지 오래였다. 오지에서 광고찍기. 15초, 20초로 편집돼 전파를 탈 짧은 광고지만, 그 제작현장은 여느 영화촬영장 못지않게 치열했고 꼼꼼했다. 짧은 몇 장면에 가장 좋은 것만을 담아야 하는 광고는 어쩌면 본래 영화보다 더욱 긴장을 요하는 매체일지 모른다. 영화기자의 눈에 그 작업광경은, 레의 풍광만큼이나 낯설고 신선했다. 하쿠호도제일이 기획하고 호주의 베이스캠프와 인도의 카스 무비메이커가 진행, 프로덕션 쥬가 제작한 이 광고는 4월부터 TV에서 볼 수 있다. 레=글 최수임·사진 김기영/ 하쿠호도제일 PD 감독 김종원 키아로스타미처럼… 김종원(45) 감독의 별명은 ‘광고계의 임권택’이다. 자연, 동물, 어린이 등이 등장하는 휴머니즘적인 광고에 있어 국내에서 가장 인정받는 감독으로, 롱테이크를 즐겨 쓴다. 주요 작품으로는 ‘레간자 풍뎅이’편, ‘레조 안을 보라’편, ‘디오스 밀밭’편, ‘화이트 인터뷰’편, ‘삼성 르노자동차 누구시길래’편, ‘SK텔레콤 친구’편, ‘김삿갓 소주’편 등이 있다. 포스코 광고 시리즈 중에서는 ‘철길’편이 그의 작품. <어둠의 자식들> <바람불어 좋은 날>에서 조감독을 하기도 한 그는 이번 광고에 대해 “전혀 꾸미지 않은 다큐 같은 맛을 내려고 했다. 2년 전 딕시 곰파에서 ‘레조 안을 보라’편을 찍을 때 본 축구하는 꼬마들의 모습과 영화 <컵>에서 인상을 받아 만드는 작품이다”라며 연출의도를 밝혔다. 사진설명 1. 아프가니스탄 난민촌을 배경으로 공 없이 깡통으로 축구하는 어린이들을 그리는 ‘깡통’ 편은 레 근처에 적합한 장소가 없어, 사막지대에 세트를 짓고 촬영됐다. 인도 스탭들이 세트를 설치하는 모습. 실제 난민촌의 모습을 모델로 만들어진 세트는 모니터 속에서 실감있는 거리풍경으로 되살아났다. 2. 모니터 앞에 모인 스탭들. 맨 왼쪽 모자 쓴 아저씨는 렌즈 하나 갈아끼울 때도 회의를 하던, ‘컬트’ 기자재담당 트리오 중 한 명. 그 옆 썬글래스 낀 멋쟁이 인도 아주머니는 카스 무비메이커 소속의 의상 코디네이터 아루나다. 맨 오른쪽 뒤 안경쓴 승려가 딕시 곰파의 스물여섯 살짜리 젊은 교사. 가운데가 김종원 감독, 그 오른쪽은 기획사 하쿠호도제일의 윤성원 AE다. 3. 아프가니스탄계 어린이들이 모니터에 나온 자신의 모습을 보고 즐거워하고 있다. 같은 지역에 살고 있지만 외모와 복장이 사뭇 다른 라다키들과 아프가니스탄인들. 티없이 맑은 표정만은 같았다. 4. 실타래가 아닌 진짜 공으로 리허설을 하다 공이 개울에 빠져버렸다. 승복을 걷고 물에 들어가 공을 건네는 한 동자승의 모습.

개봉하는 <이것은 서태지가 아니다> 개봉한 전명산 감독

6mm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다큐멘터리 한편이 개봉한다. 3월15일부터 19일까지 아트선재센터(02-733-8945)에서 상영하는 서태지의 팬덤에 관한 130분짜리 다큐 <이것은 서태지가 아니다>가 그 주인공. 개봉 하루 전날 만난 전명산 감독은 정신없이 바쁜 상황을 “30분밖에 못 잤어요”라는 한마디로 갈음한다. 2000년 8월29일. 서태지가 4년7개월간의 미국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온 날이자, 전명산 감독이 <이것은 서태지가 아니다>를 찍기 시작한 날이다. “그냥 우연이었죠.” 사회학과 대학원을 다니다 “현실을 바로 보기에 이론은 무용하다”는 생각에 허허롭게 공부에서 손놓고 있던 그해 여름, 디지털카메라인 소니 VX-2000을 사서 뭔가를 찍어보고 싶었던 그는 서태지 귀국을 취재하러 공항에 나가는 잡지사 기자 친구를 따라나섰다. 포토라인에서 서태지를 기다리던 중 그의 카메라가 포착한 것은 몇 천명에 이르는 질서정연한 군중, 그리고 그들의 무반주 합창. “검게 물든 입술 정직한 사람들의 시대는 갔어/ 숱한 가식 속에서 오늘은 아우성을 들을 수 있어….” <시대유감>은 절규처럼 귀를 때렸고, 그 순간 서태지 대신 서태지의 팬들에게 붙박인 카메라는 이후 1년6개월 동안 그들의 뒤를 따라다녔다. 사실 지난해 11월 부산영화제에서 상영되었던 <이것은…>은 객석의 호흥을 얻어 곧바로 서울상영을 추진했다. 그러나 연말이 되면서 극장 성수기와 맞물리는 바람에 2월로 밀렸다. 대관, 음향설비 문제 등이 해결되었을 때 ‘등급부여’라는 또 하나의 복병을 만났다. 영진위로, 문화관광부로 쫓아다녔지만 그들의 반응은 한결같이 “처음이라서…”. 지금까지 6mm영화에 등급을 부여한 예가 없었던 것이다. 등급부여 규정도 모호해서 여기저기 쫓아다니느라 한달여를 보냈고, 우여곡절 끝에 겨우 전체 관람가 등급을 받았다. 왜 극장개봉을 고집하느냐고 묻자 “만들면 보여주고 싶은 건 당연한 것 아닌가요? 관객이 분명하게 있는 작품이잖아요.” 극장이라는 몇 백석짜리 커다란 공간을 원했던 건 1차 관객인 서태지 팬들에게 ‘예우를 다해, 형식을 갖춰서’ 상영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서태지의 열혈팬은 아니었다는 전명산 감독은 <이것은…>을 찍으면서 만난 서태지 팬들에 대해서는 ‘열혈호감’을 표한다. “한국사회에서 독특한 사람들이에요. 갖고 있는 에너지도 엄청나고, <시대유감> 사태에서 보듯이 젊은 세대들 중 뭔가를 해서 이겨본 유일한 청년집단이죠. 가까이서 보면 언론에 비친 모습과 너무나 달라요.” 영화개봉을 위해 혼자 뛰면서 느낀 불만 하나. “정부에서 디지털 상영관을 만들어주면 좋겠더라고요. 어떡하다보니 ‘감독’ 타이틀을 달았지만, 앞으로도 그 길을 갈지는 미지수다. 영상에 관심있고 <이것은…>도 카메라 한대와 컴퓨터 한대로 또닥또닥 만들어냈을 정도로 기계에도 관심이 있으니 내친 김에 영화의 길을 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지금은 학문의 길을 접고 미래에의 자유를 스스로에게 허했을 뿐. 글 위정훈 oscarl@hani.co.kr·사진 이혜정 hyejung@hani.co.kr

늙은 기자의 노래

나는 1973년에 신문기자 노릇을 시작했다. 긴급조치와 유신통치의 시절이었다. 1979년 가을에, 박정희 대통령은 살해되었다. 80년 봄부터, 모든 억눌렸던 것들이 폭발했다. 그해 봄은 위태로웠다. 노동조합의 민주화와 근로조건의 인간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연일 시가지를 마비시켰다. 그때, 나는 무력한 기자로서 현장에 있었다. 2002년 봄에 나는 다시 사건기자로서 현장으로 돌아왔다. 현장에 투입된 그날부터 공기업 노조들의 파업과 집회가 시작되었다. 철도노동자들은 건국대학교 운동장에 모였다. 봄바람이 흙먼지를 날렸다. 나는 이틀 동안 현장을 지켰다. 노동자들은 ‘민영화 반대’와 ‘24시간 맞교대 철폐’를 부르짖었다. 24시간 맞교대는 30년 전의 취재현장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또 24시간 연속근무에 따른 수많은 인간고의 문제도 30년 전과 다르지 않았다. 유신시대의 투쟁구호를 그들은 30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외치고 있었다. 24시간 맞교대는 인간의 몸의 조건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 노동제도이다. 소나 말을 24시간씩 맞교대시킨다면 노동조건의 문제는 제기되지 않을 것이다. 몸의 조건은 평등하다. 24시간 맞교대는 하루나 이틀이라면 몰라도 그 직업을 생애로 삼아야하는 사람들이 몸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노동제도라는 것은 자명하다. 그 자명함에는 이념이나 노선이 끼어들 여지가 없어 보인다. 진보이기 때문에 24시간 맞교대가 부당하고, 보수이기 때문에 그것이 타당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진보나 보수를 내세우며 말을 소비하지 않더라도, 그러한 노동제도는 인간이 인간이기 때문에 감당할 수 없는 것이고, 인간이 인간에게 그런 방식의 노동을 요구할 수는 없는 것이고, 더구나 국가가 그 방식을 제도화해서 시행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토록 분명하게도 부당한 것들의 부당함이 보이지 않도록 가로막는 것이 이른바 이념이라는 것이었을까. 다시 돌아온 취재현장의 아우성과 흙먼지 속에서 나는 난감하였다. 노선과 지향성을 입에 담지 않더라도, 인간에 대한 가장 초보적인 감수성만이라도 작동되고 있었다면 이 사회는 한 시대의 무지몽매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노동자들은 30년 전의 투쟁구호를 여전히 외쳤다. 함성을 지르고 주먹을 내두르는 노동자들의 머리 위로 흙먼지가 회오리쳤다. 젊은 전경들이 길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식판을 끌어안고 점심을 먹었다. 30년 동안, 아마도 그보다 더 오랜 세월 동안, 이 사회는 앞서 넘어진 바로 그 자리에 계속해서 넘어지고 있구나, 흙먼지 속에서 점심을 먹는 전경들의 모습이 그런 생각들을 일깨워주었다. 나는 전경들이 밥을 먹는 거리의 중국식당에서 짬뽕으로 점심을 먹었다. 인공조미료가 역겨운 누린내를 풍겼다. 전경들의 식판 위로 먼지는 계속 날아들었고, 두부가 뜬 그들의 된장국은 바람 속에서 금방 식어버렸다. 인간에 대한 가장 큰 죄악은 인간에 대한 둔감함이라고, 그 역겨운 짬뽕 국물이 나에게 말해주고 있었다. 그 다음날, 노사협상은 타결되었다. ‘민영화 철회’는 쌍방의 입장을 세워가며 어물어물 넘어갔지만, 24시간 맞교대는 3교대 방식으로 개선해 나가기로 합의하였다. 노동자들은 작업장으로 돌아갔다. 철도 파업은 사흘 만에 끝났지만, 그 사흘 동안 막대한 경제적 손실이 발생하고 사회적 갈등은 증폭되었다. 그 경제적 손실을 화폐로 계산한 금액은 24시간 맞교대를 3교대로 바꾸는 데 드는 비용보다 더 많아보였다. 명백히 잘못된 것들을 고쳐나가는데, 이처럼 막대한 손실과 갈등을 대가로 치루어야 하는 것이 이른바 발전의 원리인 것인가. 어째서 인간이 인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인간이 인간의 몸을 들여다보지 못하고, 그 단순하고 명백한 사실에 따르지 않고, 아니라고 뻣대어가면서 한 시대를 허송세월하는 것일까. 인간의 말을 도저히 알아듣지 못하던 인간들이 어째서 한바탕 ‘본때’를 보이고 나면 비로소 말을 알아듣는 것일까. 기어이 ‘본때’를 보여야 명백히 그릇된 일들을 바로잡을 수 있다면 그 ‘본때 보이기’는 또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인지, 다른 길은 정말로 없는 것인지, 말의 힘과 말의 소통능력으로 현실을 조금씩 바꾸어나갈 수는 없는 것인지…. 흙먼지 속에서 마감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 노동조건의 개선을 절규하는 무수한 담론과 소설과 시와 음악이 있었다. 결국 개선은 ‘본때’의 힘에 의해 이루어졌다. 노동자들의 성취 내용을 송고하면서 늙은 글쟁이는 비통했다. 말로 세상을 바꾸는 일은 이처럼 어려워야 하는가.김훈/ 소설가·한겨레 사회부 기자 hoonk@hani.co.kr

김형태의 오! 컬트 <잉글리쉬맨>

중국 속담 중에 우인동산(愚人動山)이란 말이 있다. 어리석은 사람이 산을 옮긴다라는 뜻인데, 이야기의 기원은 이렇다. 옛날 중국 어느 지방에 한 노인네가 살고 있었는데 그 양반이 살고 있는 마을엔 커다란 산이 하나 있어서 다른 마을로 가려면 늘 먼길을 돌아서 가야만 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노인네가 손수레를 끌고 나오더니 산모퉁이 한쪽 끄트머리에서부터 흙을 퍼 나르더란다. 동네사람들이 “뭐하시는 겁니까”라고 묻자 노인네는 “산을 옮기려고 그러네”라고 말했단다. 마을사람들은 황당해하며 “노인네가 어느 세월에 이 산을 다 퍼 옮기겠다는 것이냐”며 정신나간 사람 취급을 했을 것은 당연한 일. 그러나 그 노인네 왈, “내가 다 못하면 내 아들이 할 것이고 내 아들이 다 못하면 내 손자가 할 것이고, 결국엔 이 산이 다 옮겨질 걸세”라고 했다고 한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실제로 그런 어리석은 일들을 오래 전부터 실천하고 있었다. 잘 알려진 대로 네덜란드는 땅이 좁고 해수면보다 낮아서 늘 간척사업을 하면서 국토를 관리하고 확장해나가야 하는 운명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바닷물에 젖은 땅을 간척사업으로 농사지을 수 있는 소금기 없는 땅으로 만드는 데에는 대략 100년의 기간이 소모된다고 한다. 바닷물을 막고 풍차로 물을 퍼내고 다시 빗물을 받아서 소금기를 희석시켜 다시 퍼올려서 버리고 다시 또 빗물을 받아서 다시 씻어내는 일을 약 100년간 반복해야 온전한 ‘국토’가 된다는 것이다. 우인동산이란 말이 중국에서는 속담으로 존재할지 모르겠지만 네덜란드에서는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으로 실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200살 정도 되는 것도 아닐진대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연구대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나에게 그 무엇보다도 연구대상인 나라는 다름 아닌 바로 이 땅. 대한민국이다. 산을 퍼 옮겼거나 바다를 육지로 바꾸거나 몇 백년 걸릴 사업을 서슴지 않고 시작할 줄 알기 때문이 아니라, 자칭 5천년 역사를 지나오면서도 정말 지지리도 변하지 않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국토는 바람처럼 왔다가고 해류처럼 흘러가는 게 아니다. 이 땅 위에서 5천년을 넘게 살아온 것처럼 앞으로도 한민족이 멸종할 때까지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갈 것이다. 그렇다면 살아가면서 집안을 고치고 마을길도 넓히듯이, 땅덩이도 불편하면 고쳐나가고 모자라면 채워넣고 보기흉한 것은 가꿔나가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게으르고 이기적인 자아도취자들은 노래만 부르고 있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라고, “금수강산 옥토낙원”이라고, 사계절이 뚜렷하고 가을하늘은 세계제일이라고, 정말 그런가? 한반도 연간 기온차 40도. 이런 기후는 생명체는 물론이고 자동차, 건축물에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제공한다. 자동차나 건축물의 수명이 다른 나라보다 짧은 이유가 꼭 날림공사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의 늙으신 부모님들은 신경통부터 류머티즘, 골다공증, 오십견통, 중풍 등등 온갖 노환을 앓고 계신다. 왜냐하면 1년에 환절기를 네번이나 겪어야 하는 기후 속에서 평생을 살아오셨으니까 골병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현실적으로는 금수강산 옥토낙원이라고 노래할 처지가 아니란 말이다. 나는 예언가가 아니지만 여름이 오면 올해도 어김없이 장마가 닥칠 것이란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올해도 사람들이 실종될 것이고 도시와 마을이 물에 잠길 것이고 도로가 붕괴되는 재난이 닥칠 것이다. 몇달 뒤에 일어날 재앙을 우리는 뻔히 알고 있다.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5천번이 반복되도록 대책이 없다면, 이 민족은 과연 연구대상이 아닐 수 없다. 영화 <잉글리쉬맨>은 <언덕에 올라갔으나 산에서 내려온 어떤 영국인>이라는 기이한 이름(영화의 원제이기도 하다)을 가진 사람과 마을사람들이 그 지방의 언덕을 산으로 바꾸는 일화를 다루고 있다. 단지 자부심이란 것 때문에 평지의 흙을 퍼다가 산을 쌓는다니, 내 밥그릇 챙기는 일 외에는 고개도 안 돌리는 한반도민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 과연 우인동산이라는 말이 제격인 듯싶다. 그럼 우리는 너무 똑똑해서 탈인가? 김형태/ 황신혜밴드 리더 http://www.hshband.net

<오스모시스 존스>(Osmosis Jones)

2001년, 감독 피터 패럴리, 바비 패럴리 출연 빌 머레이, 크리스 록, 로렌스 피시번, 몰리 샤논, 엘레나 프랭클린 장르 코미디애니메이션 (워너)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의 감독 패럴리 형제의 유머는 주로 ‘몸’에 얽힌 난처함이나 역설에서 비롯된다. 지저분하고, 엽기적인 배설물에 얽힌 농담들. <오스모시스 존스>도 다르지 않다. 차이는 인간의 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것. 출렁거리는 위액, 벌겋게 타오르는 염증, 홍수처럼 밀어닥치는 콧물 등이 배경화면으로 펼쳐진다. ‘역겨운 광경’이기는 하지만 패럴리 형제도 이미 주류에 진입한 지 오래라, 그걸 애니메이션으로 처리한다. 몸 속의 세포들을 의인화해서 기상천외한 드라마를 전개시킨다. 동물원에서 일하는 프랭크(빌 머레이)는 식생활이 엉망진창이고, 운동이라곤 조금도 하지 않는 게으른 인간이다. 딸인 셰인이 늘 옆에서 충고를 하지만 듣지 않는다. 그 덕에 몸 속 곳곳이 고장나고, 엉망진창이 됐다. 프랭크의 몸을 관장하는 시장은 건강이 악화된 것을 숨기고, 자신의 임기를 연장하기 위해 부정을 저지른다. 반면 상대 후보가 공약으로 내세운 것은 채식과 일정한 운동. 어느 날 프랭크가 땅에 떨어진 계란을 먹는 바람에 치명적인 바이러스 트락스가 몸 속에 들어온다. 트락스의 목표는 최단시간 내에 프랭크를 사망으로 몰고 가 ‘의학사’에 이름을 남기는 것이다. 트락스가 몰래 잠입한 것을 눈치챈 경찰 백혈구 오스모시스 존스는, 감기약으로 투입된 드릭스와 함께 파국을 막는다(‘오스모시스’는 화학용어 ‘삼투’라는 뜻으로, 존스가 자유롭게 몸 안을 다니는 능력을 말한다). <플라이> <비디오드롬>의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특기는 몸의 안과 밖을 바꾸는 것이다. 안이 밖이 되는 장면은 좀 끔찍하고 비위가 상한다. 하지만 <오스모시스 존스>에서 애니메이션으로 묘사된 몸 속(위장이나 간, 소화액이나 염증 등)을 보는 일은 오히려 환상적이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인간의 생리현상과 신진대사를 일종의 사회적인 활동으로 치환하여 묘사하는 상상력은 기발하고 에너지가 넘친다. 이를테면 사람이 무엇을 먹으면 위장으로 간다. <오스모시스 존스>에서 위장은 외부에서 무엇인가가 도착하는 공항이다. 반대로 방광은 세포들이 바깥으로 나가는 항구다. 세포와 백혈구, 적혈구, 심지어 변절한 바이러스까지도 프랭크의 몸 속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며 ‘사회’를 구성한다. 범죄도 있고, 낙오자도 있다. 화사한 애니메이션말고 패럴리 형제는 실사장면에서 악취미를 드러낸다. 안 그래도 지저분하게 생긴 빌 머레이가 토하고, 콧물을 들이키고, 여드름이 튀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속이 부담스러워진다. 관습이 된 화장실 유머는 진부하지만, 애니메이션만은 흥미롭고 기발하다. 요즘 재미있는 애니메이션은 늘 디즈니 바깥에서 나온다. 김봉석/ 영화평론가 lotusid@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