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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비평 릴레이] <철수 영희>, 김소영 영화평론가

간단한 산술로 하자면 단관이 아닌 멀티플렉스 극장이 각처에 늘어났으니 관객이 볼 영화도 다양해져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정 반대다. 관객 층을 정확히 ‘기획’한 영화가 아니면 이제 극장을 찾기란 매우 어렵다. 관객이 비기획 영화를 극장에서 보기 힘들어진 것이다. 아트플러스 시네마 네트워크는 이러한 곤궁으로부터 출발한다. 소위 미개봉, 저예산 영화 상영극장 네트워크인 아트플러스는 8월 27일부터 10월 7일까지 국내 저예산 미개봉작 10여편을 아트플러스 체인 8개 극장에서 상영한다. ‘아트 플러스의 선택 2004 하나 더 +’ 라는 다소 암기하기 힘든 제목의 이 릴레이 상영은 서울 하이퍼텍 나다와 뤼미에르 극장에서 시작해 목포 제일극장, 프리머스 제주, DMC 부산, 광주 극장, 서울 씨어터 2.0과 안산 시네마이즈로 이어진다고 한다. 저예산 상영관 ‘아트플러스’가 상영한 초등학교 친구들 담백한 추억이야기 현재 영화 아카데미 출신의 감독 20명이, 영화 아카데미 20주년을 기념해 따로 또 같이 만든 <이공 프로젝트>를 비롯해서 ><썬데이@서울> (오명훈 감독) 그리고 <신성일의 행방불명>(신재인 감독) 등의 장편 독립영화가 상영되고 있다. 단관 극장 상영과 비디오 유통 그리고 텔레비전 방영이라는 연속체 안에서 영화가 관람되었던 90년대의 상황과 비교해, 현재는 홈 씨어터의 보급, 인터넷을 통한 영화 파일 공유 등으로 개봉관의 영향력이 줄어들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메가박스 극장이 위치한 코엑스 몰이 보여주는 것처럼 극장이 고급 상가를 갖춘 대형 소비 공간으로 포섭됨에 따라 영화는 점점 지배적 소비문화 패턴에 맞춘 기획을 하게 되고, 개봉관은 영화들을 전시하는 강력한 쇼윈도로 기능한다. 이런 와중에 저예산 장편영화의 배급망이 선을 보이는 것은 정말 환영할 만한 일이다. 이번 ‘아트 플러스의 선택’에서 가족들 모두가 선택할 수 있는 영화가 있다. 1989년 <꼴찌에서 일등까지 우리 반을 찾습니다>로 일찌감치 고등학교 교육 현장을 찾아갔던 황규덕 감독의 <철수 영희>가 그것이다. 이 영화는 멀티플렉스 극장 소비문화가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소위 금융 자본이 지배하는 후기 산업 사회와는 멀찌감치 떨어져 보이는 대전 대덕 초등학교 4학년의 세계를 담고 있다. 영화는 부모가 교통사고를 당해 꽃집을 하는 할머니와 살게 된 영희의 전학으로 시작된다. 모두 똑같은 푸른 색 운동복을 입고 집단 체조를 하지만 초등학교 4학년 아이들의 세계 역시 계층적 위화감으로 살짝 짓눌려있다. 유리라는 아이는 극성 엄마를 등에 업고 할머니와 함께 꽃집에 살고 있는 영희를 왕따하려 한다. 그러나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영희는 유리의 질투에도 불구하고 반장을 맡게 된다. 한편, 영희의 짝 철수는, 집에서 기르는 앵무새에게 ‘철수 바보’ 소리를 듣고 살뿐만 아니라 고무줄 끊기 등 온갖 고전적 장난을 도맡아 하는 장난꾸러기다. 그러나 영희를 좋아하게 되면서 철수는 변해 간다. 이윽고 영화의 구조는 ‘증여’를 모티브로 정점에 오르면서 모든 소소한 갈등들을 감싸 안게 되는데, 말하자면 초등학교 4학년 아이들이 상대에게 줄 수 있는 최상의 것을 서로에게 선물하는 것이다. 초가을 바람이 슬며시 새드는 이 즈음, <철수 영희>는 가족들 모두가 함께 볼 수 있는 담백한 재미가 있는 선물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초등학교 친구들 생각이 간절했다.

귀여운 부조리 애니메이션, <맥덜>

2001년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아 홍콩에서 개봉한 뒤 큰 호응을 이끌어낸 애니메이션 <맥덜>은 2편 <맥덜: 파인애플 빵의 왕자>의 제작과 3편 <맥덜: 우당>을 기획하게 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현재는 텔레비젼 교육용 프로그램을 준비 중일 정도로 홍콩에서 인기가 있다. 간단하게 말해 <맥덜>은 우선 귀여운 애니메이션이다. 돼지의 모습을 갖춘 주인공들은 징그럽기보다는 충분히 호감이 갈 만한 표정들을 보여준다. 몇개의 챕터로 나눠져 있으며, 둔하고 바보 같지만 착한 아들 맥덜과 억척스럽게 세상을 살아나가는 엄마 맥빙 여사, 이 모자를 중심으로 재치있는 에피소드들을 선보인다. 한 가지 느낌만으로 포획되지 않는 다양한 감성의 전달을 시도한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맥덜>이 보여주는 세계는 근본적으로 부조리하다. 영민한 아이에게 보여주기에는 잔인한 구석까지 갖춘 애니메이션이다(<맥덜>의 등급은 전체 관람가이다). 물론 이런 설명은 영화가 표면적으로 난해하거나 공포스럽기 때문에 필요해진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부조리하다는 말인가? “주윤발이나 양조위처럼 잘생긴 아이를 낳게 해달라”는 운명의 기도를 거절당하고, 어쩔 수 없이 운만 좋고 둔한 아이 맥덜을 자식으로 얻은 어머니 맥빙 여사는 변하지 않는 법칙들이 이 세상을 맡고 있다고 믿는다. 정확히 무엇인지 실체를 알지는 못하지만, 그것을 향해 무조건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중에 맥빙 여사가 아들 맥덜에게 가르치는 것은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교훈이다. “옛날에 거짓말쟁이가 있었는데 어느 날 죽었단다. 옛날에 공부 열심히 하는 소년이 있었는데 커서 부자가 됐단다. 옛날에 말 안 듣는 소년이 있었는데 발목을 삐었단다.” 맥빙 여사는 침대 옆에서 아들 맥덜에게 잘되라고 동화책을 읽어준다. “엄마, 졸려요”라고 하소연해봤자, “옛날에 잠 많은 소년이 있었는데 다음날 죽었단다” 하는 식의 무서운 동화 한줄만 더 들려줄 뿐이다. 아픈 맥덜에게 다 나으면 몰디브 해변으로 데려다준다고 꼬셔 약을 먹이더니, “다 나으면 가기로 했잖아요” 하고 묻자, “아니, 부자 되면 가기로 했지”라고 거짓말을 한다. “그럼 우리 언제 부자 돼요?” 하고 물으면 무심하게 텔레비전을 보며 “꿈에서나”라고 대답한다. 억척스런 엄마와 순진한 아들 사이의 이 동문서답 사이에서 웃음은 터져나온다. 그러나 그 웃음은 슬픈 것이다. 부자가 되어야만 모든 일이 순조로워지고, 부자는 결코 될 수 없다. 이 모순의 문장이 지닌 변할 수 없는 사실 때문에, 부조리한 현실을 지탱하는 불가능성 때문에, 엽기적인 동문서답은 웃음과 함께 슬픈 감정을 끌어낸다. <맥덜>의 주인공들이 순간마다 구슬프게 보이는 이유이다. 그러나 맥빙 여사는 맥덜을 사랑한다. 맥덜이 열심히 연습하는 만두치기(중국의 전통놀이)가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될 수 있게 해달라고 안 되는 영어로 올림픽 집행위원회에 편지까지 보낼 정도이다. 당연히 엄마 역시 아들에게 몰디브를 구경시켜주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것은 현실 불가능이다. 돈이 없다. 그 순간에 그들 모자에게 꿈을 이룰 수 있도록 해주는 방식은 역시 부조리하다. 꿈에서나 부자가 될 수 있다고? 그래야 몰디브에 갈 수 있다고? 그럼 꿈을 보여주지. 맥덜은 엄마와 함께 케이블카나 다니는 시내의 공원을 다녀올 뿐이지만 그곳이 몰디브였다고 믿게 된다. 그렇게 행복을 찾는 부조리한 믿음은 여러 장면에 나눠져 있다. 그런 장면들은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설명을 덧붙이기보다 환상 속에서 즐거워하는 맥덜의 즐거운 동심을 보여줌으로써 충분한 동의를 만끽하게 한다. 그렇게 <맥덜>은 부조리한 세상에 부조리한 방식으로 대처하면서 희망을 잃지 않는다. <맥덜>에는 두 목소리의 화자가 등장하는데 한명은 어린 맥덜이고, 또 한명은 어른 맥덜이다. 그러면서 <맥덜>은 어른의 시점에서 과거를 상기하는 방식으로, 어린아이가 미래를 향해서 소망을 품는 방식으로 동시에 진행된다. 뚜렷하게 그 둘 사이를 구분짓는 경계는 없다. 그것은 마치 길을 걷는 맥덜 모자에게서 뻗어나와 도시를 가로질러 홍콩의 하늘 어딘가로 올라가 내려다본 뒤에 다시 그들에게로 되돌아오기를 되풀이하는 조감숏의 형식적 의미와도 일치한다. 그렇게 화면은 그 도시 안에 살고 있는 맥덜 모자와 그들이 살고 있는 세계를 부지런히 오가면서 보여준다. 마치 과거와 미래를 부지런히 오가면서 삶에 대해 이야기하듯이. 그건 역시 실망과 희망을 오가는 <맥덜>의 방식과도 같다. <맥덜>은 그렇게 독창적인 캐릭터들과 그들의 부족함의 현실과 그 부족함을 채워주는 소망의 이미지를 통해 부조리한 이 세계의 어두운 면을 따뜻하게 보여주는 기술을 터득한다. :: 토 우엔 감독 인터뷰 “우리의 성공은 기적에 가깝다” <맥덜>에는 두 목소리의 화자가 등장하는데 한명은 어린 맥덜이고, 또 한명은 어른 맥덜이다. 그러면서 <맥덜>은 어른의 시점에서 과거를 상기하는 방식으로, 어린아이가 미래를 향해서 소망을 품는 방식으로 동시에 진행된다. 뚜렷하게 그 둘 사이를 구분짓는 경계는 없다. 그것은 마치 길을 걷는 맥덜 모자에게서 뻗어나와 도시를 가로질러 홍콩의 하늘 어딘가로 올라가 내려다본 뒤에 다시 그들에게로 되돌아오기를 되풀이하는 조감숏의 형식적 의미와도 일치한다. 그렇게 화면은 그 도시 안에 살고 있는 맥덜 모자와 그들이 살고 있는 세계를 부지런히 오가면서 보여준다. 마치 과거와 미래를 부지런히 오가면서 삶에 대해 이야기하듯이. 그건 역시 실망과 희망을 오가는 <맥덜>의 방식과도 같다. <맥덜>은 그렇게 독창적인 캐릭터들과 그들의 부족함의 현실과 그 부족함을 채워주는 소망의 이미지를 통해 부조리한 이 세계의 어두운 면을 따뜻하게 보여주는 기술을 터득한다.

제4회 광주국제영화제 추천작 퍼레이드 [3]

<괴담> 시네마스코프의 탄생은 텔레비전의 상업적 도전에서 비롯됐다. 1950년대 들어서자 미국의 텔레비전 문화는 극장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발목을 잡았고, 할리우드는 그 타개책으로 영사화면의 크기와 비율을 혁신한다. 그중, 이십세기 폭스사에서 만들어진 2.35:1 비율의 시네마스코프는 곧 와이드스크린의 대명사가 되었다. 최초의 시네마스코프영화 <성의>(1953) 이후 할리우드는 주로 스펙터클 장르에 이 장치를 활용했다. 그래서 역사물, 전쟁영화, 서부영화, 뮤지컬, 코미디 등에 많이 사용됐다. 상업적인 목적에서 시작했지만 시네마스코프의 활용은 곧 미학에도 영감을 주었다. 이번 13편의 ‘와이드스크린 특별전’ 상영작들은 원초적인 영화보기의 감각을 자극할 뿐만 아니라 어떻게 작가들이 그 기술과 조화를 이루었는지를 보여주는 목록이다. 프랑스의 비평가들이 추앙하기 전까지 그저 그런 상업영화 감독 정도로 여겨졌던 니콜라스 레이는 시네마스코프의 대단한 활용가였다. 이번 상영작 중 <실물보다 큰>(1956), <파티 걸>(1958)이 그의 작품이다. <실물보다 큰>은 평범하게 살아가던 한 남자가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미친 듯이 약에 취해 점점 과대망상의 범죄자로 변해간다는 내용의 영화다. 니콜라스 레이는 세트 및 색채를 절묘하게 조화시켜 독창적인 시네마스코프 화면을 만들어낸다. 한 변호사가 우연히 댄서를 만나게 되면서 점점 더 사건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영화 <파티 걸>에서도 그 점은 빛을 발한다. 이 영화는 멜로드라마적 감수성과 필름누아르의 형식미를 함께 보여준다. <천국이 허락한 모든 것> <바람결에 씌어진> 등으로 고전적 멜로드라마의 한축을 만든 더글러스 서크의 영화 <사랑할 때와 죽을 때>(1958)는 전쟁의 스펙터클을 보여주는 동시에 멜로드라마의 스토리를 담는다. 독일 병사 에른스트는 러시아와의 전쟁 중 겨우 휴가를 얻어 고향을 찾는다. 그러나 집은 불타 없어진 지 오래다. 우연히 엘리자베스를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힘든 시대는 그들의 사랑을 쉽게 이루어지게 놔두지 않는다. 더글러스 서크의 멜로드라마에 흠뻑 취해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목록이다. 시네마스코프는 스펙터클 장르영화를 터전으로 삼은 할리우드 배경의 감독들에게만 유용했던 것은 아니다.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효시로 인정받는 <강박관념>(1942)으로 데뷔한 이후 <베니스에서의 죽음> <루드비히 2세> 등 치명적인 매혹의 화면을 만들어낸 이탈리아 감독 루키노 비스콘티에게도 시네마스코프는 유용한 장치였다. 이번 상영작 <레오파드>(1963)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이 영화는 19세기 국가통일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이탈리아 시실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시대의 힘에 밀려 점점 더 몰락해가는 귀족계급의 씁쓸한 마지막을 그려내기 위해 루키노 비스콘티는 꼼꼼하게 의상과 풍습 등을 재현해낸다. 유미주의적 역사극이 웅장한 화면 안에 담겨 있다. 한편, 일본 작품 두편 역시 눈길을 끈다. 2시간44분짜리 영화 고바야시 마사키의 <괴담>(1964)은 옛날부터 전해오는 일본의 괴담 4가지를 들려주면서 긴 러닝타임을 잊게 한다. 마치 귀신이 날아다니고, 피가 흐를 듯한 느낌을 주지만 원색의 이미지들과 기묘한 이야기 구성은 아름다움마저 선사한다. <괴담>은 기괴한 이야기들의 연쇄 속에서 미학을 발견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이다. 고바야시 마사키의 이 영화는 칸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기도 했다. 또, 나루세 미키오의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1960) 역시 매혹적인 화면을 선보인다. 나루세 미키오의 히로인이라고 불릴 만한 다카미네 히데코가 긴자거리에서 호스티스로 일하는 여주인공 게이코로 등장한다. 영화의 제목처럼 1960년대 일본의 사회 안으로 들어서는 여성의 전환기를 시네마스코프 화면으로 잡아낸다.

어리석고 어리석도다, <터미널>

실화의 엉뚱함과 스필버그식 유머가 사라진 <터미널> 케네디 국제공항에 무한정 잔류된 국적없는 동유럽 여행객에 대한 코미디 <터미널>의 보도자료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사뮈엘 베케트식 주제를 가볍게 다뤘을지도 모른다는 인상을 준다. 두려워하지 마시라,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더 가볍게 다룬 것도 아니니까. “<캐치 미 이프 유 캔> 이후”라는 보도자료에는 감독이 “관중이 웃고 울며 세상에 대해 좋게 느낄 수 있는 영화를 하나 더 만들고 싶었다”고 인용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톰 행크스의 빅토르 나보스키는 처음에 녹슨 플랜터스 땅콩 캔을 손으로 찌그러뜨리고 미국 세관을 통과할 때 가상의 동유럽 언어를 지껄이며 꾸부정하게 걷고 털이 성성 난 냄새나는 시골 사람으로 등장한다. (가상의) 고향 크라코지아에 혁명이 일어나 비자가 취소되자 나보스키는 면도를 깨끗하게 하고선 성공적이고 근사한 악센트를 가진 영국 신사가 된다. 아마 로빈 윌리엄스를 염두에 두었던 배역 같은데 행크스의 이국땅의 이방인은 레이건 시절의 훈훈한 영화, <허드슨 강의 모스크바>에서 윌리엄스가 연기한 게걸스럽게 먹는 러시아 이민자를 똑 닮아 있다. 똑똑하면서도 멍청한, 세계화의 영웅이자 희생자인 나보스키는 로빈슨 크루소가 (혹은 행크스가 <캐스트 어웨이>에서 맡은 인물처럼) 외딴 섬에서 살았듯이 공항에서 거주하지만, 크루소와는 달리 격분한 터미널 보안 책임자, 프랭크 딕슨(스탠리 투치)에 의해 뉴욕을 돌아다닐 수 있는 몇번의 기회를 갖는다. 나보스키가 동전을 돌려받기 위해 어느 버튼을 눌러야 하는지를 배우는 모습이 모니터되면서 터미널 건물은 거대한 실험 상자를 환기시킨다. 행크스는 특히 보안 카메라를 통해 우아한 신체 연기를 보여준다. 고립되어 있던 크루소와는 달리 나보스키는 많은 프라이데이(<로빈슨 크루소>에서 크루소를 돕는 원주민- 역자)들을 만난다. 많은 인종의 친구들을 사귀게 되는데 이들 중 쿠마 팔란이 연기한 피해망상의 조그만 청소부는 참 거슬리는 인물이다. 이들은 직장을 배경으로 한 시트콤처럼 영화를 끌고가며 나보스키가 아름답고 예민한 스튜어디스(캐서린 제타 존스)와 플라토닉한 연정을 갖도록 돕고 나보스키가 세관원들과 겪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인종의 도가니로서의 전통적인 미국을 보여준다. 상업적 성공이 암담한 영화 <터미널>에서 딕슨은 수표를 써주며 “미국이 너무 많은 사람을 가둬서 더이상 설자리도 없다”고 말한다. 엉터리 같은 상황(얼마나 어리석은가는 영화 종반에 가서야 드러난다)과 많은 비논리적인 우연들을 보여주지만 이 영화는 문서를 잃고 1988년 이후 샤를 드골 공항의 빨간 벤치에서 거주한 (망명 신분을 얻었지만 수년째 공항 떠나기를 거부하고 있는) 이란 태생의 여행자 메르한 카리미 나세리의 실제 이야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같은 이야기에 근거해 1993년 프랑스의 코미디영화와 나세리 자신이 나오는 2001년 영국의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드림웍스 역시 나세리에게 돈을 지불해 이야기를 샀지만 이야기가 갖고 있는 엉뚱함들은 영화에서 대부분 사라지고 없다. 웃기려고 노력하지만 웃기지는 못하는 <터미널>의 유머들은 젖어서 미끄러운 바닥에서 얼마나 많이 엉덩방아를 찧게 할 수 있는가 하는 계산에 주로 기초해 있다. 거대한 세트는 공학적 경이이지만 나보스키에겐 단순한 지능검사장이 아니다. 이런 공간을 자크 타티라면 어떻게 사용했을까 궁금하지만 스필버그는 주로 간접광고(PPL)를 위해 사용했다(텔레비전 이미지나 회사 로고를 집어넣는 데 스필버그만한 사람이 있을까?). 냉혹한 행동주의자인 감독은 강아지를 쓰다듬고 존 윌리엄스의 달콤한 멜로디로 관객을 싸구려 감상에 젖게 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보도자료는 “나보스키의 이야기에 즉시 호감을 느꼈다”는 스필버그의 상투적인 말을 인용하고 있다.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터미날>은 9·11 이후 공항에서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불안을 반영하고 있다. 차라리 나보스키를 중동인이나 동남아시아인 혹은 보스니아 여행객으로 만들었다면 이 진부한 영화에 어느 정도 인간의 고뇌를 더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2004년 6월14일. 짐 호버먼은 미국 영화평단에서 대안영화의 옹호자로 가장 명망이 높은 평론가로 <빌리지 보이스>에 기고하고 있습니다. <씨네21>과 <빌리지 보이스>는 기사교류 관계에 있습니다.)

성(性)관련 TV프로, 10대 섹스 부추긴다

성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TV 프로그램을 많이 보는 10대청소년이 그렇지 않은 청소년보다 성관계를 시작할 가능성이 2배 가량 높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미국의 싱크탱크인 '랜드 코프'에 소속된 행동과학자 레베카 콜린스의 연구팀이 '소아학' 9월호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TV 섹스물에 많이 노출된 12-17세 청소년이 열정적인 키스나 오럴 섹스 등 비성교성 행위를 시작할 가능성도 높아진다. 연구팀은 <섹스 앤드 시티>(사진), <프렌즈> 등 성적 내용이 풍부한 것으로 자체 분류한 23개의 TV 프로그램을 선정한 뒤, 2001년과 2002년 두 차례에 걸쳐 미 전역의 청소년 1천792명에게 얼마나 자주 이 프로그램을 시청했는지와 어떤 다양한 성적인 활동을 했는지 등에 대해 물었다. 두 차례의 설문조사 결과 조사기간에 성관계를 맺었다고 응답한 10대 청소년의숫자는 18%에서 36%로 2배나 늘어났으며, 섹스 이외의 성적 경험을 했다는 응답자수도 62%에서 75%로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연구팀은 전했다. 연구팀은 나이가 많거나 나이든 친구를 두었거나 학교 성적이 낮은 청소년이 섹스를 시작할 가능성이 높았지만, 텔레비전도 청소년의 섹스활동에 여전히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콜린스는 "성에 대한 단순한 이야기를 담은 TV 프로그램에 노출되더라도 성적인행위들을 묘사한 프로그램에 노출됐을 때와 똑같은 위험과 놓이게 된다"고 말했다. TV는 일상생활에서 성이 실제보다 더 중심적인 요소라는 환상을 만들어 낼 수있으며 그 결과 청소년들이 성적인 행위를 시작하게 된다고 콜린스는 덧붙였다.(시카고 AP=연합뉴스)

<귀신이 산다>의 차승원 인터뷰

“왜 또 코미디냐는 저한테 왜 삼시 세끼를 먹느냐와 똑같은 질문이예요. 할 수 있는 거 하는 게 무슨 잘못도 아닌데 말이죠.” 새영화 <귀신이 산다>(감독 김상진,17일 개봉)로 돌아온 배우 차승원(33)이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왜 또 코미디냐?”인 건 당연할 수도 있다. <신라의 달밤> 이후 <광복절 특사> <라이터를 켜라> <선생 김봉두>와 이번 영화까지 내리 다섯 영화를 코미디만 했으니까. 그러나 <귀신이 산다>의 박필기 역이 차승원이 지금까지 해온 연기의 답습이라고 단정짓는다면 그건 냉정한 평가이기에 앞서 자신의 부족한 눈썰미를 시인하는 꼴이 된다. <귀신이 산다>는 지금껏 그가 해왔던 캐릭터 코미디와는 다른 영화다. 쉽게 말해 박필기는 ‘못말리는’ ‘어리버리한’ ‘앞뒤 안가리는’ 따위의 특별한 ‘캐릭터’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 아니다. 평범한 회사원인 그의 특징이라면 내 집 마련에 대한 의지가 강한 정도. 그러나 대한민국 사람 중에 내 집 마련의 꿈이 없는 사람이 얼마나 있나. “박필기는 정말 평범한 남자예요. 애써서 소원을 이뤘는데 자기로서는 어쩔 수 없는 힘이 자기가 이룬 것을 빼앗아가려는 거죠. 얼마나 속상하고 무섭겠어요. 그건 전혀 웃긴 게 아니거든요.” 천신만고끝 내 집 장만했더니 귀신이 자기집이라고 나가래 영화가 시작되고 한시간 가까이 차승원은 그야말로 혼자 연기한다. 필기와 ‘주택분쟁’에 나서게 되는 귀신(장서희)은 아직 등장하지 않고 움직이는 소파, <링>처럼 배우를 토하는 텔레비전, 위치가 뒤바뀐 손발과 싸우는 필기의 연기는 마임처럼 보인다. 상황은 갈수록 황당해지는데 필기는 갈수록 처절해진다. “더 절실하게, 더 진지하게”는 이번 영화에서 그의 연기 모토였다. “놀라서 도망가는 장면 하나에서도 웃기게 가려면 얼마든지 그렇게 갈수도 있어요. 그런 생각도 들죠. 여기서 내가 좀 더 하면 재미있을 것같은데…. 제 생각에 코미디 영화의 가장 치명적인 독은 그런 거예요. 배우가 웃기려고 하는 순간 영화는 망가지는 거죠.” 짧지만 이야기 중간에 툭툭 내놓는 그의 ‘코미디론’이 가장 중요시하는 건 ‘실생활’이다. 이제 몸 전체를 도는 피의 순환처럼 자연스러워진 그의 코믹 리듬이 빛을 발하는 것도 이런 순간이다. 이를테면 슈퍼에 가서 악착같이 10%를 할인받는 때나 직장 상사(장항선)의 면박에 ‘뻘줌’해 할 때, 거꾸로 매달린 귀신에게 무심코 “너 얼굴 시뻘개졌어” 이야기할 때 피식피식 나오는 웃음이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더 절실하게 더 진지하게”배우가 웃기려면 망가지죠 다시 “왜 또 코미디냐?”라는 질문으로 돌아간다면 여기에는 오로지 망가지기 위해 존재하기에는 완벽한 체격과 그 자체로 누아르 영화 포스터가 되는 강렬한 인상에 대한 아쉬움도 묻어 있다. 이에 화답하듯 그는 차기작인 스릴러 사극 <혈의 누>(김대승 감독)에서 ‘짠한’스타일의 냉혈한으로 출연한다. 그러나 ‘변신’으로 포장하지는 말기를 부탁한다. “한없이 가벼운 것도 싫지만, 반대로 무거운 것도 싫어요. 그 경계를 지켜나가는 게 앞으로의 연기에 대한 답안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진지함과 가벼움 사이에서 ‘일관성’을 지켜나가는 게 배우로서 뿐 아니라 생활인으로서 가장 소중하다고 말하는 차승원은 속없는 허허실실 웃음의 폭과 깊이를 잴 줄 아는 배우처럼 보인다.

[파리] 빛과 소리의 예술, 장애인도 함께 즐긴다

영화 <홀랜드 오퍼스>(1995)의 마지막 신에는 음악가인 아버지가 청각장애를 겪고 있는 아들을 위해 자신이 작곡한 음악을 빛을 통해 들려주는 장면이 나온다. 파리시는 오는 9월22일 시각장애인과 청각장애인을 위해 상영관 두곳에 특수시설을 갖출 예정이다. 파리 6구에 위치해 있는 아를르켕 극장 3개의 상영관 중 두곳이 이번 프로젝트의 대상이다. 아를르켕 극장은 그동안 한국영화를 비롯한 제3세계영화의 상영에 관심을 가져온 특색있는 극장이다. 청각장애인을 위한 특수자막과 시각장애인을 위한 오디오 디스크립션 등의 특수시설이 갖추어지면 그동안 영화관람에서 소외되었던 사람들도 극장을 찾을 수 있게 된다. 9월22일 첫 상영회에서는 올해 칸영화제 공식경쟁 부문에 오른 아녜스 자우이의 <이미지처럼>(2004)이 실제로 청각언어 장애를 겪고 있는 배우 에마뉘엘 라보리가 참석한다. 텔레비전이나 비디오 또는 케이블채널 등은 청각장애인을 위한 특수자막이 상대적으로 보편화되어 있다. 하지만 시각장애인을 위한 배려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번 프로젝트의 특징 중 하나는 시각장애인에게까지도 영화관람의 기회를 제공하려는 데 있다. 시청각 장애인을 위한 특별상영은 주중 1일 1회, 주말 1일 2회에 걸쳐 이루어진다. 오디오 디스크립션과 사운드를 설명해주는 특수자막을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은 영화 한편당 7500유로 정도이며 이 비용은 파리시가 부담한다. 한편 적외선 헤드셋의 설비를 위해서는 돌비가 2만유로의 금액을 후원할 예정이다. 파리시는 이번 프로젝트를 출발점으로 향후에는 좀더 많은 극장에 이러한 시스템이 확산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특히 이번 프로젝트는 시청각 장애인은 물론 시력과 청력이 쇠퇴한 노년층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빛과 소리의 매체인 영화를 시청각 장애가 있는 사람들까지도 향유할 수 있다면 영화의 가능성은 좀더 넓어질 것이다.

<호텔 비너스> 배우 초난강의 남다른 한국사랑

<호텔 비너스>는 솔직히 당혹스럽다. 모든 배우들이 한국어 대사를 하는 일본영화라는 점, 무엇보다 무엇을 위해 저들은 (힘들게) 한국어를 하고 있나라는 의문 때문이다. 어쨌든 이건 초난강(구사나기 쓰요시·30)을 만나야 풀릴 일이었다. 그 없이는 생각도 하기 어려웠을 초유의 시도니까. 최근 몇년간 영화 <환생>, 드라마 <나와 그녀와 그녀의 살아가는 길> 등을 통해 일본에선 단순히 인기그룹 스맙(SMAP)의 멤버가 아니라 진지하고 따뜻함을 지닌 ‘배우’로 확실히 자기 이미지를 구축한 초난강의 한국 사랑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후지TV>가 2001년 시작한 심야 정보다큐멘터리 <초난강>(NHK의 한국어 교육 프로그램을 빼놓고 일본 지상파에서 한국어로 진행된 첫 프로그램!)은 애초 6개월 방영예정이었지만 3년 반 넘게 이어지고 있다. 볼터치에 촌스러운 의상의 초난강이 2002년 한국어 음반을 발매하고 한국 텔레비전에 코믹한 모습으로 출연한 것도 이 프로그램의 ‘기획’이지만, 재일동포, 병역문제 등 ‘연예오락’을 뛰어넘는 주제들도 꾸준히 등장시켰다. 11월 방영될 <후지TV>의 특집드라마 <해협을 건너는 바이올린>에서 초난강은 온갖 차별 속에서 바이올린 제작자로 성공한 실존 재일동포 진창현 역을 맡는다. 이쯤되면 심술궂은 궁금증이 든다. 한국을 좋아한다고? 도대체 어디가 얼마나 좋다는 거지? 한국어 실력은 얼마나 될까? 지난 9월2일 저녁, <스맙×스맙>의 연 이틀 녹화를 막 끝낸 그를 도쿄드라마센터에서 만났다. <호텔 비너스>의 한국 개봉을 앞두고 “조금 긴장돼요, 그리고 영광입니다”라던 그는 이내 <씨네21>을 보고 “와, 송강호다, 유지태다… 대단한 배우들이에요”라고 반색했다. 대답의 7할 이상이 일본어였지만, 인터뷰도 한국어 학습인 양 그는 가끔씩 한국어 표현을 되물어가며 혼자 몇번씩 되뇌었다. <호텔 비너스>를 기획한 배경은 무엇이었나. 처음부터 대규모 개봉(일본에선 최종 150개관 상영, 9억엔의 수입을 올리는 성공을 거뒀다)을 생각했나. <초난강>을 시작하면서 우리끼리 비디오영화라도 한편 만들고 끝내자고 다짐했던 게 시작이다. 이번엔 ‘처음’인 게 많다. 한국어 대사에 일본어 자막(일본 개봉 당시)이 깔리는 일본영화라는 점부터, 감독도 각본도 영화는 처음이다. 보통이라면 상식이나 고정관념을 따를 텐데 전부 처음인 사람들이 모여 다른 데 신경 쓰지 않고 한번 해보자라는 마음에서 출발했던 게 좋았던 것 같다. 촬영과정에서 무리는 없었나. 블라디보스토크의 촬영은 단 열흘이었다고 들었다. 역시 배우들은 다르더라. 나는 한국어에 대해선 상대적으로 마음의 여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촬영에 들어가니 나카타니 미키를 비롯해 모두 해내는 거다. 거꾸로 내가 초조해질 정도였다. 외국어로 연기하는 건 배우에게 불리한 부분 아닌가. 하지만 그런 것에 상관하지 않고 뭔가 재미있는 게 나오지 않을까 하는 일치감 같은 게 현장에 넘쳤다. 낮에는 촬영, 밤에는 탭댄스 연습으로 열흘을 보냈다. 일본어였다면 보는 이들이 훨씬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설정이 한국과 전혀 상관없다는 점도 보는 이들에겐 당혹스러울 것 같고, 인물의 성격이나 관계도 이해하기 쉽지 않다. 물론 완벽한 (한국어) 발음은 안 된다. 하지만 오히려 이국적인 설정, 거기에서 해볼 의욕이 생겼다. 시간도 공간도 알 수 없는 무국적의 상황에서 모두 ‘한국어’라는 하나의 키를 갖고 소통하는 것을 통해 여러 가지 의미를 ‘발신’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일본어로 하면 그저 보통영화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었다고 할까. 한국에서 어떻게 볼지 긴장되기도 하지만, 어쨌든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 아닌가. 좀 실패하면 ‘난 몰라’ 하지, 뭐. (웃음) 초난강에게 한국의 모든 것은 “각코 이이”(멋있다) 한마디로 통한다. 배우도, 한글도, 지저분한 뒷골목조차 그에겐 “각코 이이”다. 타인의 눈을 통해 나를 보는 건 흥미로운 경험이다. “각코 이이”를 연발하며 가볍게 흥분까지 하는 초난강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지겨워하고 눈살 찌푸렸던 일상적인 시간과 공간도 새롭게 느껴진다. <초난강> 프로그램의 당신과 실제 초난강엔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해하는 한국인들이 있다. 사실 <쉬리>를 통해 한석규를 알고 한국영화와 음악을 좋아하게 됐지만, 프로그램 처음엔 한국어를 못했다. 지금은 조금 하지만. 또 깊은 역사인식 같은 것도 없었다. 무지했다고 해야 할까. 물론 프로그램을 하며 공부를 하게 됐지만, 오히려 일반적인 상식이나 선입견 같은 게 없어 눈에 보이는 그대로 한국을 좋아하게 된 것 같다. 지금의 한류 붐에 대해 느낌이 각별할 것 같다. 정말 <초난강>을 시작할 땐 지금과 같은 붐은 상상도 못했다. 그저 나는 내가 좋아하는 한국, 그러니까 개인의 ‘취미’로 프로그램을 할 수 있어 무척 신나했다. 나 혼자 속으로 ‘자식들… 한국영화랑 한국어가 얼마나 멋있는데… 너희는 모르지?’ 이러면서 말이다. 한류는 사실 때늦은 감이 있다. 물론 일시적인 붐으로 끝날 수도 있다. 거기서 흥미를 잃는 사람도 있다면, 그것도 그대로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 가운데 정말 한국을 사랑하게 되는 사람도 있는 거고. 모두 자신의 취향대로 선택하는 거다. 한국에 가면 뭐가 좋나. 전부 다. 한국에 딱 내리면 내 얼굴색이 달라진다고들 한다. ‘마늘파워’인가? 인천공항에서 내리면 한적한 한강변을 따라 차가 북적대는 도심으로 들어가게 되지 않나. 내겐 한국인의 조용하면서도 정열적인 두 가지 이미지와 자연스레 연결된다. 묵는 호텔 앞에 단골 식당이 있는데 이른 시간 아침식사를 하러 가면 식당주인이 우리와 같이 밥을 먹는다. 일본에선 손님 앞에선 밥 먹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 그것도 멋있다. (웃음) 웬만한 한국영화는 다 본다고 들었다. 처음 한국을 좋아하게 된 계기도 영화였고. 어떤 점에 끌렸나. 한국 배우들에겐 일본 배우와는 좀 다른 매력을 느꼈다. 내면적인 강함이 번져나오는 듯한 느낌. 나도 한국어로 발음해보고 싶다, 공연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배우들은 내 안에 있던 에너지, 혼 같은 걸 흔들어놓는 것 같다. 물론 어떨 땐 한국영화에서 좀더 감정을 억눌렀으면 하는 부분도 있다. 그건 연기를 하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폭발적인 상황이더라도 내면의 강함이나 분노나 슬픔을 억누르며 전달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가 있지 않나. 하여튼 한국영화는 ‘볼티지’가 높다. 일본인 안엔 숨겨져 있는 부분이고. 같이 일해보고 싶은 감독을 꼽으라면… 강제규 감독인데, 너무 유명해졌다. 배역을 고를 때 자신의 잣대는. 가리지는 않는데 원래 관객에게 에너지를 느끼게 하는 영화를 좋아한다. 사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걸 고집하는 족족 실패하는 타입이다. 중학교 축제 때 내가 주장한 기획이 대실패였다. “누가 하자 했어? 초난이지?” 이런 식이다. 주어진 일에서 최선을 다하는 게 나한테 맞는 방식인 것 같다. 배역도 대부분 주변의 의견으로 정한다. 그런 점에서 <초난강>은 예외다. 내가 정말 하고 싶어서 했는데 성공한 유일한 사례다. (웃음) <호텔 비너스>엔 상대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서툴지만 자신의 방식대로 타인에게 말을 거는 정성이 그대로 전해진다. “이 정도로 하니 내 애정을 알아줘”라는 떼쓰기가 아니다. 누가 알아줄 것도 아닌데 한국차를 타고 다니는 이 일본 스타는 “언젠가 꼭 서울에서 살아보고 싶다”며 “연예인을 그만둬도 한국과의 교류는 계속 하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