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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연가> 신드롬, 그 기억상실의 스토리

인기 드라마의 그림자는 길다. 일주일에 두번 하는 미니시리즈를 시청자들은 언제나 곁에 두려고 한다. 핸드폰에 <겨울연가> 삽입곡을 다운받고 갑자기 따뜻해진 날씨에도 배용준 목도리를 흉내내고 최지우 폴라리스 목걸이를 산다. 미장원에 모여 의견을 나누고 전화로 수다를 떤다. <가을동화>로 비슷한 종류의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던 윤석호 PD가 <겨울연가>를 시작할 때 KBS는 건물 한면을 채우는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대문짝만하게 걸린 기대감이었다. KBS의 기대감 섞인 홍보는 계속됐다. <겨울연가> 방송 뒤 서버 다운을 보도한 뉴스, <서세원쇼>가 출연자를 불러서 한 토크쇼, <연예가 중계>의 5차례 촬영현장 방문기 등. 한회 학습으로 끝내는 복잡한 스토리 <겨울연가>의 스토리 라인은 복잡하지만 이야기는 단순하다. 한국인 시청자들의 그간에 갈고 닦은 노하우로 한회를 학습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간파할 수 있는 이야기라는 말이다. 시청자들이 궁금해하도록 마련하는 장치까지도 예전 드라마에서 익히 보던 것이다. 시청자들은 궁금해하지만 결론은 인습과 관습으로 움직인다. 미용실에 들르는 것으로 혹은 친구를 만나서 수다를 떠는 것으로 스토리를 모두 익혔겠지만 반복하면 이렇다. 준상(배용준)은 피아니스트 어머니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 어머니가 다녔던 고등학교로 전학온다. 준상이 아버지에 대한 비밀을 풀기 위해서다. 그곳에서 유진(최지우)을 만나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채린(박솔미)은 준상에게 한눈에 반하고, 상혁(박용하)은 유진을 좋아하지만 둘은 고배를 마시게 된다. 준상은 자신의 아버지가 유진의 아버지라는 생각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미국으로 가려고 한다. 그러나 준상은 공항으로 가는 택시에서 내려 유진과의 약속장소로 가고 중간에 교통사고가 나고 만다. 10년 뒤, 건축기사가 된 유진은 권위의 건축상을 받고 스키장을 소유한 기업의 혈족에다가 미남이기까지한 궁금증의 이민형을 만난다. 그는 준상과 똑같이 생겼다. 그는 채린의 애인이다. 채린은 둘의 사랑을 방해하기 위해서 기를 쓰지만 둘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다. 하지만 사랑을 포기하고 민형은 미국으로 가려하고 그 순간 교통사고를 당한다. 그리고는 자기가 준상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낸다. 기억을 조금씩 찾는 중에 그는 헤어지려는 순간 잃었던 기억이 유진과 이복이라는 사실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헤어질 결심을 한다. 하지만 준상과 상혁이 이복 사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두번의 사고로 기억을 잃고 다시 찾는 사건은 의학계에 희귀한 케이스로 보고될 만하지만 이런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에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관대하다. 하지만 <겨울연가>는 이 관대함마저 넘어선다. 스토리라인이 심각한 결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하나의 벽돌을 쌓아 점점 이야기가 올라선다는 (유진과 준상의 직업이기도 한) 건축적인 사고방식으로 바라보면 이 건축물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다. 네덜란드 소년이 안간힘으로 버티고 서있거나 띠엄띠엄 돌을 놓아 기하학적인 무늬를 그리는 징검다리 정도가 이 건축물의 최종 완성물일 것이다. 눈 속에 뒹굴던 장갑은 발이 달렸던 것일까? 목재가 바닥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젖는다면서 벽에 기대어 세우라고 작업부들에게 지시하는 장면은 유진이 직업인의 면모를 보여주는 몇 안 되는 장면들 중의 하나다. 안전사고를 가장 소중히 여기는 건축현장에서 누가 건축자재를 세울 것인가. 따로 보관장소에 두든지, 비닐을 깔고 그쪽으로 옮길 것이다. 이 디테일은 세웠던 건축자재가 넘어지고 유진이 준상을 대신하여 다치도록 그래서 유진이 준상에 대한 오해를 푸는 장치로 이용하기 위해서 깔아놓은(건축자재는 세워놓은) 것이다. 준상이 유진에게 주기로 한 장갑은 사고가 나는 순간 얼음 위에 뒹군다. 하지만 10년 뒤 그 장갑은 그때 입었던 준상의 코트 속에 들어 있다. 코트 속에서 꺼낸 장갑은 준상과 유진이 사랑의 기억을 되살리는 중요한 장치로 등장한다. 그런데 이 코트는 어떻게 하여 10년 뒤에도 남아 있었던 것일까. 기억을 조작하기로 마음먹은 어머니가 왜 춘천의 집을 팔지 않고 (준상이 기억을 되찾을 수 있도록) 준상의 물건까지 남겨두는 배려를 했을까. 피아니스트로서 너무 바빠서 그런 데 관심을 쓸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처음 만나는 순간 누구를 닮았다는 금방 튀어나올 수 있는 말을 하지 않는 바람에 채린이 음모와 음모를 반복하는 것은 보이는 시간만 존재하는 드라마에서 당연하다고 해두는 편이 마음이 편하겠다. 시체도 없이 장례식을 치루고는 이상하다고 의심하지 않는 아이들. 처음 맞는 죽음이라서 장례식장에 가지 않아도 혹은 장례식이 없어도 사람이 죽어서 사라질 수 있다고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살아돌아왔다는 제자를 만난 선생님이 놀라지 않는 것도 별로 놀랍지 않다. 너무 많은 제자를 둔 터라, 뻔질나게 학교를 찾아가는 학생들 상혁이나 유진 이외에는 기억하지 못해서인지도 모른다. 치명적인 약점은 강준상이 이민형이 된 사연. 외국에서 지내는 것은 세월을 채우는 방식으로 자주 이용된다. 하지만 그런 편한 방식으로 채운 10년은 (드라마에 등장하는) 타로카드 점 치는 사람이나 도를 아시냐고 묻는 아줌마나 믿을 만큼 ‘운명적’이다. 잃어버린 기억은 최면을 걸어서 재생했다고 한다. 미국은 기억만 만들어내면 친구가 없어도 아는 사람이 없어도 완벽하게 상황이 시뮬레이션되는 놀라운 첨단국가인가 보다. 연변이라면 모를까. 그런 것에 비하면 미국에서 생활한 민형과 프랑스에서 유학하던 채린이 만난 것은 유럽과 미국간의 거리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포 사회가 이렇게 좁다는 것을 표현한 (간만에 보이는) 현실적인 설정으로 보인다. 시청자의 기억상실을 강요하는 것은 잇닿은 장면에 있기도 하다.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울부짖는 유진, 장면이 바뀌어 강가에서의 장례식, 장례식이 끝난 뒤 상혁이 유진을 집에 데려다 준다. 여기서 상혁이 말한다. “유진아, 차라리 나는 네가 울었으면 좋겠어.” 기억상실증은 상혁이 걸린 것일까? 아름답지? 그러니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잊어줘 윤석호 PD의 아름다운 화면은 정평이 나 있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화면은 줄거리의 취약함을 가릴지는 모르지만 극복하지는 못한다. 더 나아가 아름다운 화면이 무시한 디테일 역시 종종 시청자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채린의 부티크에서 웨딩드레스를 맞추고 있는 유진, 그 순간 민형이 들어온다. 민형은 “정장을 싫어 함”에도 양복을 입고 있다. 양복을 입어야 할 공식행사가 있다는 언질도 비치지 않았다. 그가 양복을 입은 이유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와 예복을 입은 신랑의 만남을 화면에 담기 위해서다. 스키장에 간 준상과 유진은 또 한번 웨딩드레스와 예복을 입는다. 불안함에 휩싸인 준상이 갑자기 결혼하자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엉겁결에 합의하고 성당에 섰을 때 그들은 말끔하게 예식복 차림이다. 스키장에 일하러 왔음이 분명한 이 연인의 짐가방 어디에 웨딩드레스가 들어 있었을까. 12회의 마지막 장면, 길을 가다가 부딪힌 민형과 유진이 빨간색을 배경으로 서 있다. 공사중인 건물에서 길게 늘인 빨간색 천막이 이렇게 예쁘구나 하는 감탄이 나오는 장면. 이 엔딩에 곁들인 대사는 민형이 자신이 준상이라고 고백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13회가 뜨면서 12회의 엔딩이 이어지는데 유진은 이렇게 말한다. “이러지 마세요. 이런 식으로 사람 놀리는 거 아니에요.” 그리고 상혁은 그 순간을 목격하고 준상의 마음을 자신이 이해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자신도 절실하게 준상이 되고 싶어서라는 것이다. 이 빨간색을 배경으로 한 절실한 대사는 배경의 아름다움에 묻혀버리고 마는 것이다. 시청자들은 이런 오해를 받는 준상을 불쌍해하며 그 상황을 기억할 수 있을까? 빨간색은 기억에 떠오를 것 같다. 그러다가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할 것이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겨울연가> 신드롬을 해석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3월9일에는 <겨울연가 콘서트>가 방송을 탔는데, 이 <겨울연가 콘서트>는 상혁이 자신이 기획한 음악프로그램 콘서트에서 유진을 구속하려는 조바심에서 프로포즈를 하는 장면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드라마에서는 3∼5분 정도로 짧게 방영된 것인데 이 장면을 위해서 ENG카메라가 아니라 중계차를 동원하여 찍었다. 방영분을 위해서는 각도를 달리하면서 몇개 컷을 따고 들어가면 되지만 그렇게하면 콘서트의 현장감이 사라진다는 이유에서 진짜 콘서트를 마련한 것이다. 원래는 방영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얼굴없는 가수’로 활동하기로 했던 류가 출연한 이 콘서트는 그의 얼굴이 공중파를 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겨울연가 콘서트>에는 중간중간에 음악회를 즐기는 <겨울연가>의 극중 인물이 된 배우들도 앉아 있다. 극중의 콘서트를 재현한 진짜 콘서트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면서 환상을 강화한다. 이 상황의 아이러니를 주목해보라. 극중에서 사적인 목적을 위해서 공적인 방송을 유린한(사실 이런 일을 한 것이 한두번이 아니다) 상혁(박용하)이 잠시 뒤 유진(최지우)에게 결혼할 생각이 없다는 말을 듣게 되는 이 콘서트는 대외적으로 <겨울연가>의 히트곡을 듣고 ‘배우’도 보는 상품이 되었다. 거창한 욕심이 부른 트릭이었기 때문에 더욱더 진정성이 없어보이지만 이 콘서트는 드라마의 상품성을 포장한다. 지금의 이 신드롬은 분명히 <겨울연가>에 바탕을 둔 것이겠지만, 잊으라고 잊으라고 반복주문을 외면서 가능하다. <가을동화> 로케이션 장소로 가는 연인들은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고싶다고 한다. 그들이 한명은 병으로 죽고 한명은 교통사고로 죽는 스토리를 염두에 두고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지에 승부를 둔 어떤 드라마는 스토리를 아무리 엉망으로 짓더라도 ‘첫사랑’의 추억에 잠기게할 수 있다는 용기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겨울연가>가 설득력이 있다면 첫사랑은 원래 먼 기억 속에 있어서 구체적인 사실은 절단된 채 떠오르는 이미지라는 사실이다. 드라마는 이래서 참 편리하다. 구둘래 kuskus@dreamx.net▶ <겨울연가> 신드롬, 그 기억상실의 스토리 ▶ 윤석호 PD 인터뷰

승리보다 값진 팀워크 <우정의 그라운드>

월드컵이 다가오고 있다. 바야흐로 월드컵 무드다, 라고 쓰려고 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닌 것 같아서 말을 바꿨다. 광적인 축구 팬이 아닌 탓에 혼자 국민적 열기를 못 느끼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돌 맞으려나?). 잘못 말했다가는 다칠지도 모르니 내 경우에 한정시켜 말하자면, 정부와 미디어가 주도하는 열기가 나한테까지는 전달되지 않는 느낌, 먹고살기도 바쁜 데 월드컵에 신경쓸 겨를이 어디 있단 말이냐, 이런 심정이다. 월드컵 개최지 국민으로서 바람직하지 못한(?) 내 자세를 새삼 들먹인 건 이번에 소개하는 <우정의 그라운드> 때문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축구 애니메이션이다. KBS 미디어와 드림키드넷이 기획한 <우정의 그라운드>는 KBS2TV를 통해 매주 목요일 오후 5시30분에 방영되는 26부작 시리즈. 지난 2월21일 첫방영을 시작한 이 작품은 일본 에서 매주 월요일 6시 <킥 오프 2002>란 제목으로 동시에 소개되고 있다. 한국과 일본에서 함께 전파를 타고 있지만 기획과 제작, 투자 일체는 한국이 담당하고 있다. 어느 작품이 그리 쉽게 나오겠냐마는 <우정의 그라운드>는 방영까지 유독 굴곡이 많았다. 애초 KBS 미디어와 기획을 추진하던 나이트스톰미디어가 여러 사정으로 문을 닫았고, 기획을 이끌던 김대중 감독이 각종 복잡한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나이트스톰미디어의 스탭들이 다시 모여 드림키드넷을 설립하는 동안 KBS 미디어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획을 이끌었고, 손오공이 투자를 결정하면서 빛을 보게 된 것이다.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라는 시류에 맞춰 제작된 작품인 만큼 <우정의 그라운드>에는 두 나라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일단 무대는 이탈리아다. 18살의 한국인 강찬은 이탈리아의 아마추어 축구팀 몬테로저에 국비로 유학 온다. 매사 자신만만하고 강인해서 팀은 물론 작품 전반에서 든든한 역할을 한다. 강찬이 확고한 목표의식으로 축구에 임하는 반면 같은 팀에 소속된 일본인 주인공 겐이치는 ‘재미’로 축구를 한다. 실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매사 무심하고 시니컬한 그는 과연 축구가 자신의 길인지 한동안 방황한다. 팀에서 함께 따돌림당하기도 하고, 고민도 함께하면서 친해진 두 사람이 장차 이야기의 흐름을 주도한다. 각각 포지션은 스트라이커와 미드필더. 그러나 팀 플레이인 축구에서 두 사람만 돋보여서는 안 될 일. 같은 팀에 소속된 포워드이자 주장인 벨페로와 미드필더인 파오로 역시 주요 캐릭터다. 인간적 결함을 지닌 등장인물들은 함께 울고 웃으면서 팀워크를 다져간다. 여기에 히로인으로 등장하는 겐이치의 여동생 미키도 눈여겨보자. 결국 강찬과 겐이치는 각자 고국으로 돌아가 대표팀 선수로 활약하게 되는데, 두 사람의 승부가 어떻게 끝날지 궁금하다(설마 무승부는 아니겠지?). 를 비롯해 해외 작품의 경험이 많은 김대중 감독이 이끄는 만큼 <우정의 그라운드>에서 눈에 띄게 어색한 부분은 없다. 유려한 움직임과 이야기 전개는 감독의 축적된 경험이 아니면 지켜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곳곳에서 효과를 발하는 컴퓨터그래픽 합성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충분한 로케이션과 동작 연구가 아쉬운 건 사실이다. 유독 힘든 산고가 아니었다면 커버됐을 테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담당 작품 주제가의 작사를 도맡아하던 KBS 미디어 이원희 프로듀서가 이번에도 펜을 잡았다. 그의 작사가 일본에 그대로 소개되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월드컵 취재를 위해 몇년 전부터 한국어를 배우고 있거나, 월드컵 후원사 마크가 찍힌 새 명함을 자랑스레 내미는 일본인 친구들에 비해 열정이 모자랄지는 몰라도, 월드컵이 시작되면 나 역시 목 터져라 한국을 응원할 거다. 다만, 종로 길거리에서 떡볶이를 먹을 수 없는 것은 유감이다. 떡볶이 돌리도! 김일림/ 월간 <뉴타입> 기자 illim@korea.com

`이와이 순지` O.S.T 베스트

바야흐로 때는 봄. 지난해 내내 불어댄 모음앨범 열풍이 음반업계를 황사처럼 뒤덮고 있는 중. O.S.T 음반업계라고 그 바람을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봄에 어떤 영화음악을 모아야 대중에게 다가가기가 쉬울 것인가. 이번엔 음반기획자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본다. 그들에게는 터지느냐, 안 터지느냐, 그게 문제다. 그 정답 중의 하나가 바로 ‘이와이 지’ 모음집이 아닐까. <러브 레터>의 빅히트는 우리나라에서도 ‘이와이 월드’라는 일본풍의 신조어를 낯설지 않게 만들었다. 그 감각적인 화면에 붙었던 감각적인 멜로디를 모은 앨범. 음…. 여자친구가 남자친구에게, 남자친구가 여자친구에게 선물하기 딱 좋다, 뭐 그렇게 생각했을까. 하여간, 일본 젊은 감각의 대중적 표본인 이와이 순지 영화들에 쓰인 음악을 한데 모은 앨범이 달뜬 봄 시즌을 겨냥하여 나왔다. <언두> 같은 그의 초기 단편에서부터 <러브 레터>나 에 이르기까지 꽤 많은 영화를 망라하고 있어 이 감각적인 신인류가 영화 속에서 어떻게 음악을 다루는지 한눈에 조망해볼 수 있다. 모두 6편의 영화에서 26곡을 뽑아 실었다. 그의 O.S.T 모음집에서 단연 눈에 띄는 이름은 ‘레미디오스’(Remedios). 이들이 이렇게 유명해진 뒤에도 계속 베일에 싸여져 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대중적으로는 ‘베일에 가려져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프로젝트 그룹으로 알려진 이 음악집단, 혹은 개인의 음악은 뉴에이지적인 깔끔함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 그 깔끔함은 상당히 퇴폐적이다. 이와이 순지의 깔끔한 화면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이 깔끔함은, 자기 상처나 기억, 내밀한 공간에 대한 신경증적인 집착을 타자에 대한 이해나 배려보다 앞세우는 철학으로부터 나온다. 뉴에이지의 퇴폐도 마찬가지로 거기서 비롯된다. 사람들은 레미디오스의 음악을 매우 서정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이들의 음악은 음악적으로 매우 중성적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감정을 표현한다기보다는 감정이 화면에서 표현되도록 조장하는 음악. 이런 정도의 피아노 선율, 스트링 선율은 사실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다. 멜로디 하나로 완전히 끝내버리는 촌철살인을 이들의 음악에서는 구경할 수 없다. 그런데도 왜 뇌리에는 그토록 아름다운 음악으로 새겨져 있을까. 그것은 화면 때문이다. 화면 속에서 그렇게 기능하도록 짜여진 음악이다. 이런 걸 보면 매우 흥미로운 가설 하나가 성립한다. 사람들은 음악의 인식을 단지 소리에 의해서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음악의 아름다움이 때로는 그 음악이 흐르던 공간, 혹은 장면의 아름다움과 겹쳐 인식된다. 이런 공감각이 무의식중에 작용한다는 사실을 영화음악을 하는 사람이면 철저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연구대상 중의 하나다.

`폭력의 가속도 갈데까지 가봤다`, 박찬욱 감독과의 인터뷰

<공동경비구역 JSA>의 박찬욱(39) 감독이 만든 네 번째 장편 <복수는 나의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 15일 첫 시사회장에 나온 박 감독은 “기술 시사때 보니 내 취향에 딱 맞는 영화”라고 자평했다. - `복수는 나의 것`이란 제목의 출전이 있나. = 구약성서 <신명기>에서 야훼가 “유대민족을 괴롭히는 인간들은 내가 다 처치하겠다”고 선언한다. 정의는 내가 세워줄 테니 사사로이 너희들끼리 그러지 말라는 신의 말씀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선 주인공들이 ‘신이 대신 보낸 처형자’라도 된 양 서로에게 앙갚음한다. - 착한 인물들이 너무 극심한 악행으로 치달리는 게 아닌가. = 사람들은 무언가 사태가 어긋나면 그 원인을 자기 바깥에서 찾으려 한다. 사회에 책임을 돌리거나 신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럴수록 증오는 증폭된다. 그런 사람이 휘두르는 폭력은 더욱 극악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악행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내가 왜 이렇게 나쁜 놈으로 변해가는가 하는 분노까지 가중된다. 그런 폭력의 가속화를 표현해보려 했다. - 결말이 너무 끔찍하다. = 어정쩡하게 절충해선 안되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관객들도 이젠 갈 데까지 확실하게 가보는 걸 더 요구한다고 생각했다. - 영화 속에서 인과율(원인과 결과)이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치달린다. = 합리적 논리보다는 공상이나 궤변이 사람들을 지배하는 경우가 많다. 유괴를 통해 돈을 받아내는 게 “바람직한 자본의 이동이자 화폐 가치의 극대화”라는 영미의 궤변이나, “너 착한 놈인 줄 안다. 그러니까 (‘살려주겠다’가 아니라) 내가 너 죽이는 마음 이해하지?”라는 동진의 대사가 그런 예이다. 생각이나 행동의 사소한 차이가 예측할 수 없는 결과를 불러일으키고 그 새로운 사태가 또 다른 낯선 사태를 낳는다고 생각했다. - 서로 얽매인 인연으로 인해 헤어나기 어려운 수렁에 빠져드는 점은 <공동…>과 <복수…>의 공통분모인 듯하다. = (요즘 내가 잘 쓰는 말로) “어찌어찌 되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는 상황이다. <공동…>에선 이병헌이 망설이다 어느 새 북한 땅을 밟아버린 “자신을 발견한다.” <복수>에선 그런 상황을 시종 밀고나간 셈이다. -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의 질긴 사슬을 그린 듯 보이기도 한다. = 의도한 바는 아니다. 벗어날 수 없는 이상한 운명에 대한 이야기이므로 그런 해석도 가능하겠다. - 자기 취향에 맞는 영화라 했는데, 어떤 점에서 그런가. = 절제된 표현, 과감한 생략, 끝까지 밀어붙이는 태도가 그런 점일 것이다. 연기든 연출이든 싫어하는 게 네 가지 있다. 잔재주, 똥폼, 똥무게, 겉멋 따위가 그것이다. 그런 게 배제된 작품을 좋아한다. - ‘복수’라는 정서가 한국인과 좀 안 어울리는 구석이 있지 않나. = <장화홍련전>도 있고…. 우리 민족이 좀 덜 극악스럽긴 하지만, 그런 심리가 아주 없는 민족은 없다고 본다. 극악한 심리나 복수심도 사람 마음의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박 감독은 영화도 영화지만 “송강호 배두나 신하균의 연기는 이들이 현재 단계에서 보여줄 수 있는 최상의 연기라고 자신할 수 있다”고 평한다. 그는 다음 작품을 위해 인혁당 사건과 이내창 사건 등 사회적 주제에 대한 자료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흡혈귀 공포영화’와 ‘3류 감독 이야기’ 등도 그가 ‘그의 것’으로 만져내고 싶은 소재다.

이범수의 `서른세살의 쿠데타` [1]

첫작품으로 일약 스타가 되는 배우들도 많은 충무로에서, 12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천천히 스타덤을 향한 지난한 코스를 밟아온 배우가 있다. 이범수가 그렇다. 1990년, 대학 3학년일 때 영화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그는 12년이 지난 서른셋에야 처음으로 주연으로서 자신의 이름을 포스터에 새겼다. 20대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관통한 뒤 30대 중반에 이르는 시간. 성실하고 착실하게 영화에 몸담았던 그에게 12년은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각종 인터뷰에서 “영화에 단역, 조역, 주연이 따로 있냐”는 말을 유난히 많이 하던 배우. 그런 그라, 주연이 된 것에 대해 담담할 법도 하건만, 웬걸. 이제사 밝히는 바, 그는 처음부터 주연을 향한 욕망에 몸사래쳤었다. 쉬 드러내지 않았을 뿐. 자꾸만 지연되곤 하는 욕망이 있었기에, 더욱 길었던 12년. 그 시간들은 이범수 스스로 말하는 것처럼 “우수한 성적으로 이수해낸 훈련과정”이라거나 “오너가 되기 전 수위나 경리로 일해본 실무경험의 시간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말들보다 더 진솔하게 들리는 건, “혼자서 이만큼 왔으면 잘한 것 아니냐”하는 읊조림 같은 한 문장이다. 육사의 꿈을 접고 연극영화과로 연극영화과 출신의 배우들이 대부분 거쳐온, 배우를 꿈꾸던 유년기, 혹은 사춘기가 이범수에게는 없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이범수는 군인이 되기를 원했다. 그의 꿈은 육군사관학도였다. 형제없이 외동아들로 태어난 이범수는, ‘남자다움’을 선망하던 소년이었다. 부모님이 출생신고도 몇달 기다렸다 할 만큼 허약한 상태로 태어났지만, 크면서 그는 어릴 적의 골골함을 만회하고도 남을 만큼 튼튼해졌고, 초등학교 때는 스피드 스케이트 선수로 겨울마다 얼음장을 지치기 바빴다. 공부도 곧잘 해서 중고등학교 때까지 반장을 많이 했다. 하지만 ‘범생’과는 아니었고 “조용히 하라고 했는데 안 하면 가만 놔두지 않는” 터프한 리더격이었다. 리더십에다 유머감각이 가미된 성격으로 또래집단을 쥐락펴락하던 그는 성격을 살려 육사를 가려 했다. 그러나 몸에 흉터가 있으면 입학이 안 된다는 입학규정이 그의 진로를 수정했다. 남들의 시선을 잘 이끄는 성격을 살리는 직업이 뭐가 있을까. 평범한 회사원이 되기란 너무나 싫었다. 고민하다가 배우라는 직업을 생각해냈다. 1988년, 그는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연극연기 전공학생으로 입학했다. 훤칠한 키와 미끈한 얼굴없이, 그는 오로지 연기력으로 학교의 동료들과 선생님들 사이에 인정을 받아나갔다. 2학년 때 4학년들의 작품 <햄릿>에서 주인공 햄릿 역을 맡았을 정도로, 그는 연기에서만큼은 ‘톱’이었다. 동기들은 스키장으로, 해외로 놀러다닐 때도 그래서 더욱 연극에 몰두하던 학창 시절. 그는 마치 유명배우처럼 빡빡한 스케줄 따라 4년 내내 연극을 했고, 그렇게 한 23편의 작품들은 지금의 그에게 든든한 실험자료가 되어준다. 부조리극, 서사극, 코미디, 비극, 뮤지컬. 거의 모든 장르의 연극을 직접 해보면서, 그는 자신이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못하나 스스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중앙대 연극영화과에서 내가 톱이었는데, 내가 햄릿이었는데…” 하는 자의식은 지금까지도 이범수를 따라다닌다. 심지어 그는 단역만 하던 시절, “미적분까지 잘하는 나더러 덧셈 뺄셈만 하라고 하다니…” 하는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다. 어쩌면 학교 울타리 바깥, 사회와의 첫대면이었던 첫영화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1990)에서의 배역부터가 그에게는 너무 작은 것이었을지 모른다. 1학년 때부터 방송계며 영화계를 기웃거리던 동기들과 스스로를 구분하던 그는, 3학년 때 ‘나도 한번 해보자’ 하는 생각에 무작정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 영화사를 찾아갔다. 그리고 대뜸 말했다. “주인공을 시켜달라”고. 그런 행동이 얼마나 황당한 짓으로 받아들여졌을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시기도 좋지 않았다. 캐스팅이 이미 다 끝난 상태에 듣도 보도 못한 한 대학생이 찾아와 주연자리를 내놓으라니. 그냥 돌아가는 그의 발길을 잡은 건, 스탭 중 과 선배들이었다. 그의 용기를 가상히 여긴 선배들은 그에게 ‘주인공 친구 종구’ 자리를 제안했고, 그 역으로 그는 영화데뷔를 하게 됐다. 이듬해 <열일곱살의 쿠데타>는 연락이 와서 출연한 경우. 그나마 스케이트 타는 학생 역이, 스피드 스케이트 선수였던 그의 경력이 소문나 들어온 것이었다. 필모그래피- 경찰2, 웨이터, 공사장 깡패 여기까지가 이범수 필모그래피의 짤막한 인트로다. 학교를 졸업한 뒤, 그는 1992년 겨울 육군 현역으로 군대에 들어갔다. 제대한 건 95년 초. 가진 건 학교 때의 화려한 기억과 선후배들의 인맥뿐. 매니저도 뭣도 없는 초짜 배우 이범수는 몸으로 뛰기 시작했다. <정글쥬스>의 조민호 감독이 당시 조감독이던 <개같은 날의 오후>가 직업전선에 뛰어든 그의 첫영화였다. 거기서 그는 지금보다 훨씬 통통한 얼굴에 모자까지 눌러써서 알아보기 힘든, ‘경찰2’ 역으로 3신 정도 나온다. 장미아파트에 사는 여자들이 이웃여자의 폭력적인 남편을 때려눕힌 뒤 현장에 달려온 경찰 중 한명. “지금 있는 이 자리에 그대로 계십시오” 하는데 모두들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버려 당황하는 그 경찰이다. 다음 작품 <은행나무 침대>에는 딱 한신에 출연. 한석규의 친구로, 심혜진 생일 파티 때 바람잡아주는 연기를 했다. 직접 찾아가서 배역을 따내던 것에 비해, 이 작품의 캐스팅은 좀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학교 선배이던 강제규 감독의 부름을 받고 간 것이었으니 말이다. <지상만가>(1997)에서 이범수는 대사도 제법 있고 혼자서 나오는 장면도 있는, 조금 큰 단역을 맡았다. 이병헌과 같은 호프집에서 일하는 웨이터. 살이 많이 빠지고 꽁지머리를 한 그의 모습은, 최근 모습과 비슷하다. 하지만 <접속>(1997)에서의 퀵서비스 배달원, <퇴마록>(1998)에서의 느끼한 바람둥이 부티, <남자의 향기>(1998)에서의 폼생폼사 공사장 깡패 선글라스. 이후 그가 따낸 역들은 대부분 스쳐지나가는 단역들이었다. 이런 영화들을 그는 개봉관에 가서 보지 않았다. “내가 인정하지 않는 배우들 옆에서 양에 안 차게 잠깐씩 연기를 하는 내 모습을 정말이지 보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기를 4년이었다. 4년 정도 지속된 단역 시기에 종지부를 찍은 건,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1998)에서 운전사 삼식이 역을 따면서부터였다. 조연이라고 말할 수 있는 역이 들어와 기쁘기도 했지만, 예상치 않은 복병이 그의 마음을 후벼팠다. 극중 주인공 임창정의 캐릭터 이름이 ‘범수’였던 것이다. ‘삼식이’는, ‘범수’에 무심할 수 없었다. “원래 이름이 범수인데, 얼마나 내가 하고 싶었겠어요. 감독이 범수 이리와 봐, 그러면 임창정씨랑 저랑 둘이 같이 감독쪽으로 고개를 돌렸어요. 그럴 때마다 얼마나 민망하던지….” 이범수가 수면 위로 떠오른 건, 그 스스로 ‘연기인생의 첫번째 획’이라고 말하는 작품, <태양은 없다>(1998)를 통해서였다. <태양은 없다>는 배역을 따는 것에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 작품이었다. 특기인 ‘무작정 찾아가기’부터 ‘삼고초려’, ‘이사람 저사람 앞에 연기력 알리기’ 등 갖가지 전략을 다 썼다. 처음 김성수 감독을 찾아갔을 때, 오디션은 이미 끝나 있었다. 초창기에는 무조건 주연을 요청했지만, 이미 이때쯤은 그런 게 “현실적으로 통할 수 없는 일이란 걸 깨달”은 이후였다. 그는 감독 앞에서, 영화사 사람 앞에서, 네번인가 거듭 연기테스트를 받은 뒤 겨우 김성수 감독의 지지를 등에 업고 <태양은 없다>에 출연할 수 있었다. 그가 연기테스트를 받던 당시 옆방에선 이미 그 역에 캐스팅된 다른 배우가 대본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배역이 바뀌었다. [이범수 출연작] 2002 <일단 뛰어!> 2002 <정글쥬스> 2001 <번지점프를 하다> 2000 <하면 된다> 2000 <아나키스트> 1999 <러브> 1999 <신장개업> 1998 <태양은 없다> 1998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1998 <남자의 향기> 1998 <퇴마록> 1997 <접속> 1997 <지상만가> 1996 <은행나무 침대> 1995 <개같은 날의 오후> 1991 <열일곱살의 쿠데타> 1990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

고영민 감독의 고군분투 영화찍기로 본 독립영화의 경제학 (2)

“인간관계로 땜빵”하기 고영민 감독은 한국으로 돌아와 끙끙 앓았다. 어렵게 마련한 제작비의 태반을 날린 데다 스탭들 고생은 고생대로 시켰다는 자책이 컸던 것. 수중에 남은 돈도 별로 없어 모든 걸 포기하려는데, 주변의 누군가가 그랬다. “훔쳐서라도 찍으라”고. 여기서 주저앉으면 이 작품이 평생 가슴에 응어리로 남아 홧병날 거라고. 그래서 1200만원의 빚을 내고 팀을 거의 새로 짜다시피하여 떠난 것이 2001년 4월의 재촬영이다. 그러나 두번째 로케이션에서도 뜻대로 다 찍지 못했고, 빠듯한 예산으로 후반작업할 것을 뻔히 앞둔 마음은 착잡했다. 물질적으로 더이상 솟아날 구멍을 찾을 수 없던 이때, 그에게 희망이 되어준 것은 ‘사람’의 힘이다. 배우나 스탭들도 개런티 없이 뭉쳐 고생한 사람들이지만, 영화아카데미 후배·동기들에게 부탁해 학교 편집실을 이용하거나 작업비용을 깎는 식으로 다시 한번 도움을 받았다. 그야말로 돈이 비는 구멍을 인간관계로 땜빵했던 것. 부산영화제 상영날 아침에나마 프린트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욕하면서도 결국 도와주는” 사람들 덕분이었다. "단편인데 대충 하지?" 고영민 감독은 ‘독립영화감독’으로 불리기를 주저한다. 자신의 영화가 독립영화 고유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지도 의문이거니와, 제작과정에서 규모가 커지며 정말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고 신세를 졌기 때문이다. “진짜 혼자서 ‘독립’적으로 찍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시스템 밖에서 찍으려다보니 더욱 누군가에게 의존해서 만들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 그의 얘기다. 그리고 자신은 운이 좋아 도움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지만, 넉넉지 않은 지원금의 기회가 박하게 주어지는 현실은 단편영화 감독들에게 아직도 팍팍하다고 본다. 를 찍으면서 고영민 감독이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단편인데 대충 하라”는 것. 두번이나 해외촬영을 나가는 그에게 영화계 밖에 있는 사람들은 “돈도 안 되는 영화를 갖고 돈만 쓴다”며, 그리고 독립영화 찍는 사람들은 “독립영화계 분위기를 흐려놓는다”며 혀를 찼다. 사실 일리있는 말들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욕먹어가면서도 물러설 수 없을 만큼 이 영화에 대한 그의 애착은 강했다. 완벽주의적인 성격도 한몫 했다. “코미디니까, 적당히 높은 산에서 얼렁뚱땅 찍어서 대강 웃길 수는 있었겠죠. 하지만 단편이기 때문에 더 치밀하고 세심해야한다고 생각했어요. 조금만 더 애쓰면 이런저런 그림들 만들어낼 수 있는데, 싶어서 포기할 수 없었죠.” 굽힐 줄 모르는 인간의 욕심을 영화로 비틀고 있기는 하지만, 실은 그 역시 대단한 욕심의 소유자인지도 모른다. 다음 영화도 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 “한 영화에 쏟을 수 있는 에너지를 100이라 하면 그중 7∼80은 돈 모으는 데 바친 것 같다”는 고영민 감독의 이번 영화결산은 ‘소모전’이라는 것. 백방으로 아득바득 뛰었지만, 제작비 유치의 성과보다는 에너지 소모만 커서 결국 영화 전체에는 해가 되었다는 게 그의 결론이다. 촬영이 지연되고 한번 실패를 겪는 바람에 스탭을 해산시켰다가 다시 모은 일도 안타까운 점이었다. 사실 감독이 프로듀서 역할까지 함께한 것도 힘을 모으기로 했던 프로듀서가 촬영 준비기간이 길어지면서 중간에 이탈했기 때문. 제작비 준비 등 프로듀서 노릇으로 진이 빠지고, 정작 촬영현장에서 감독으로 뛰어야할 때 힘을 쏟을 수 없었던, 비뚤어진 1인2역이었다. 단편영화 작업을 다시 한다면 충무로 시스템 안에서 영화사 소속으로 작품을 찍거나, 아예 제작비가 거의 들어가지 않는 소품을 선택하겠다는 게 그의 결론이다. 돈만큼이나 큰 힘이 되었던 인적 리소스의 재충전도 중요한 문제. “사람들한테 너무 잘못한 게 많아서 두번 다시는 안 도와줄 것 같아요. 앞으로는 갚아야지.” 1200만원 빚은 독립단편영화제에서 받은 1000만원 상금으로 거의 청산한 상태다. “이런 궁상스럽고 암울한 얘기 그만했으면 좋겠네요. 그냥 바람은 젊은 사람들이 빚 안 지고 영화 찍을 수 있었으면, 하는 거예요.” 고영민 감독에게 지난 영화만들기가 힘든 시간으로만 기억되는 것은 아니다. 1년반 동안 흡사 무전여행을 한 것처럼, 넉넉하고 안락한 여행에서는 결코 만날 수 없을 많은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절박한 상황 속에서 쉬어갈 수 있고, 전진할 수 있는 힘을 얻었던 곳은 그 ‘사람들’ 사이라고 그는 말한다. 고영민 감독은 해외 영화제 등을 겨냥해 5월까지 사운드와 자막을 재작업할 계획을 갖고 있다. 거기에 산이 있기 때문에 오른다는 사람들처럼, 그는 또 묵묵히 영화를 만들 것이다. 앞으로는 영화를 계속해서 만들어나갈 힘을, 그는 또 어디서 얻을까. 글 황선우 jiver@hani.co.kr 사진 이혜정 hyejung@hani.co.kr▶ 고영민 감독의 고군분투 영화찍기로 본 독립영화의 경제학 (1) ▶ 고영민 감독의 고군분투 영화찍기로 본 독립영화의 경제학 (2) ▶ 독립영화 지원, 어떻게 이루어지나 ▶ 다른 단편.독립 영화들 어떻게 찍고 있나

고영민 감독의 고군분투 영화찍기로 본 독립영화의 경제학 (1)

세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에 도전하는 산악인의 이야기를 영화로 찍는 일은, 그 자체가 험난한 산을 오르는 과정이었다. 고영민 감독의 . 이 영화는 작년 제27회 독립단편영화제에서 최우수상의 영광을 누렸으나, 완성되기까지 2년의 제작기간은 눈밭을 헤치고 얼음비탈에 미끄러지는 춥고 굴곡진 길이었다. 영화 속 등반이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보다 1m 더 높은 ‘가상의’ 목표를 향하는 반면, 영화 만들기는 현실 여건의 장애물들과 부대끼며 이룬 싸움과 타협의 결과인 것이다. 감독이 “무전여행 같았다”고 말하는 그 배고픈 여정의 대차대조표까지 들추며 지나온 길을 낱낱이 복기하는 것은 잔인한 일이 될지도 모르나, 이 땅에서 단편영화를 만드는 이들이 넘고있는 봉우리의 굴곡진 지형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있다. 편집자 콧물 방울이 턱까지 흐르기도 전에 얼어붙을 것 같은 혹한의 설산. 매서운 바람 속을 뚫고 위태로운 발걸음을 옮기는 등반대원 앞에, 먼저 출발한 동료가 고지를 눈앞에 두고 싸늘하게 쓰러져 있다. 대원은 동료의 옷에서 태극기를 꺼내품는다. 여기까지는 사뭇 진지하고 경건하기까지한 휴먼드라마인가 싶다. 그러나 이야기는 갑자기 반전을 맞는다. 천신만고 끝에 정상을 정복한 대원, 간직했던 태극기를 꺼내들고 이 감격적인 순간을 찍어 역사에 남기려하지만 쉽지 않다. 카메라가 쓰러져서, 태극기가 얼굴을 가려서, 셀프타이밍을 놓쳐서 번번이 실패하며 분위기는 우스꽝스러워지기 시작한다. 연발하는 좌절에 따라 관객들의 웃음이 잦아지는가 싶다가, 결국 마지막 장면에서는 사진을 찍지 못하고 대원이 숨지는 것으로 영화는 맺음한다. (연출 고영민, 35mm, 12분)는 이렇게 탄력있는 12분으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인간의 욕심과 허영을 깔끔한 코미디로 그려낸 이 작품은, 독립단편영화답지 않은 세련된 품새를 보여준다. 한눈에 봐도 외국에서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규모가 그렇고, 눈덮인 산맥 줄기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산 정상을 넓은 화면으로 시원하게 담아낸 35mm 필름의 스케일이 그렇다. 지난 2월 아트선재센터에서 있었던 <독립영화, 관객을 만나다> 전에서 무대 인사를 하는 고영민 감독의 얼굴은 붉었다. 그리고 그 뺨의 홍조가 관객들 앞에서 자기 영화에 대한 애정을 애써 숨기느라, 혹은 드러내느라 열이 오른 작가의 수줍음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곧 알게 되었다. 촬영 1주일, -7kg 인터뷰를 위해 다시 만났을 때도 고영민 감독의 얼굴은 여전히 발갰다. 를 찍으면서 추위에 피부가 노출되어 한달 정도는 활동이 힘들 정도의 동상을 입은 것이라고. 그리고 그는 얼굴 동상 정도는 대수로운 일이었다며, 촬영 당시 이야기의 말문을 열었다. 지난해 4월. 동계올림픽 개최지인 일본 나가노의 북알프스 지역에서 진행된 의 촬영은 그야말로 악전고투였다. 카메라는 외상으로 빌리고, 비행기삯만 겨우 챙기고서 한국에서 가져간 쌀과 김치로 버티며 15일을 난다는 빡빡한 일정. 온통 눈천지인 산을 꼭대기까지 오르는 이야기이니 감독을 비롯해 촬영진 모두가 아마추어 산악인이 되어야하는 건 당연했다. 해발 2400m의 텐트에서 자고, 일어나면 얼어있는 신발끈을 호호 녹여 묶고서 3010m의 촬영지까지 산을 오르내리는 데만 꼬박 6시간이 걸렸다. 부실한 식사로 추위를 견디며 촬영하는 것만도 큰일인데 매일 등반 아닌 등반까지. 스탭들 모두 살이 7∼8kg씩 빠지고, 일주일을 넘기면서는 하나둘 나가떨어지기 시작했다. 변덕스런 날씨와 엄청난 체력소모 때문에 결국 돌아오는 날 아침까지 촬영을 했음에도 원하는 결말을 찍지 못한 채 철수해야 했다. 과욕의 도전이었다. 현지의 돌발요소들을 미리 계산에 넣지 못한 실수도 뼈아팠지만, 제작비가 좀더 넉넉했더라면 스탭들을 덜 고생시키며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 또한 크디컸다. 영화가 덜컹댈 때마다, ‘제작비’ 문제는 그 알파와 오메가에 걸려있었다. 계획서를 들고 ‘영업’ 뛰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고영민 감독의 제작비 고민은 영화진흥위원회 독립영화 부문 지원작으로 당선되면서부터였다. 지원금만으로는 부족한 나머지 예산을 충당해야했기 때문에, “돈 걱정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던 셈. 가 영진위 하반기 제작지원작으로 뽑혀 600만원의 지원금을 받은 1999년 11월 직후부터는 프리프로덕션 작업과 함께 투자자 유치를 위해 발로 뛰는 ‘영업’의 날들이었다. 2000년 초까지는 촬영장소 헌팅을 다녔다. 처음에는 당연히 국내의 산들을 염두에 두었다. 주말마다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으로 각지의 산을 떠도는 것은 물론, 영화의 특성상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전망을 살펴야했기 때문에 매번 꼭대기까지 올랐다(그는 그때까지 등산이라고는 해본 적도 없는 데다 고소공포증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기후조건에서 ‘세상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1m 위’를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문제에 부딪쳤다. 해발 8849m의 고지는 수목이 전혀 자라지 못하며 눈과 얼음으로 덮여있다. 앵글이 좁은 샷들은 소금이나 밀가루를 동원해서 커버한다고 해도,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산 전체의 조망까지 해결할 방도가 난감했다. CG비용은 비용대로 들면서 완성도는 떨어질 우려가 있는 것. 그리고 힘겨운 도전의 과정과 꼭대기에 오르고나서 소동의 아이러니를 그림만으로 표현해야하기에 우리나라 산들의 눈에 익은 지형은 화면에서 전달하는 힘이 떨어질 거라는 부분도 걱정이었다. 결국 그는 마지막으로 오른 한라산 정상에서, 외국으로 나가야겠다고 결론내렸다. 독립영화를 해외에서 찍는다는 이례적인 결정은 이런 고민 끝에 이루어졌다. 해외 로케를 결정하면서 몇배로 늘어난 예산의 부담을 안고, 먼저 영화 속에 등장하는 등반장비 협찬에 나섰다. 고산등반 전문장비들은 물론 스탭들이 사용할 등산화며 방한복도 필요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등반장비 업체들을 거의 다 다녀도 협조해준다는 곳이 없었다. 언제 어디서 개봉할지도 모르는 작은 영화에 고가의 물건을 내놓을 수 없다는 것. 결국 등반전문가들을 만나 각개격파하는 식으로 도움을 구했고, 등산 관련 잡지의 발행인이 본인 장비를 흔쾌히 빌려주어 촬영이 가능했다. 영화 속에서 중요한 소품으로 등장하는 폴라로이드 카메라는 SK글로벌의 지원을 받았다. 현물지원은 해결되었다해도 파이낸싱은 산 넘어 산이었다. 시나리오에 자신이 있던 고영민 감독은 처음엔 자신만만했다. 투자자를 찾기가 어렵지 않으리라 보고, 빵빵하게 준비한 자료집을 들고 제작비 마련을 위해 뛰었던 것. 그러나 메이저 영화사들부터 한창 열기가 뜨겁던 인터넷 닷컴기업들까지, 줄잡아 30여 군데를 최고 서너번씩 돌아다녔는데도 별 소득이 없었다. 제작비 유치에 성공한 곳은 LG화재 한 군데뿐. 등반대원의 옷소매에 적힌 로고에서 회사명을 드러내는 방식의 PPL로 300만원을 지원했다. 보람없는 시간이 7월까지 꼬박 반년을 이어가면서 “빚지고는 영화 안 찍는다”던 평소 그의 신조도 “젊어서 아니면 언제 빚져보냐”로 바뀌었다. 그러나 10월에 다시 한번 영진위의 지원금을 얻어, 당장 빚을 지는 일은 없게 되었다. 이번에는 장편 애니메이션 시나리오 공모부문. 여기서 받은 우수상 상금 1천만원에, 인츠닷컴 시나리오 공모에서 받은 200여만원, 애초의 영진위 지원금 600만원까지 얼추 1800만원을 시나리오와 영화기획서 공모를 통해 모았다. 총 2200만원. 이 정도면 촬영에 착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좌절한 헌팅, 실패한 첫 로케이션 처음 촬영장소로 물망에 올랐던 곳은 뉴질랜드. <반지의 제왕> 촬영 시기가 1999년에서 2000년 사이였으니, 잘 하면 같은 땅덩이의 이쪽저쪽에서 나란히 영화를 찍을 뻔한 셈이다. 국립공원 소장에게 이메일을 보내 도움을 구하고, 그 주변 스키장들에 직접 공문을 띄우며 협조를 요청할 때만해도 가능성이 보였다. 그러나 2000년 3월의 현지 헌팅길에서 부딪친 것은 역시 돈 문제. 뉴질랜드 국립공원에서는 매일 촬영비를 내는 것과 함께 안전요원 몇 사람 이상이 촬영에 동행할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장소협찬비에 인건비 부담까지 지게된다는 얘기에 결국 포기하고 차선책으로 향한 곳이 일본 나가노다. 현지 한국인이 일본 관광청과 다리를 놓아주어 접촉하게된 나가노의 북알프스는 뉴질랜드에서 부딪치던 조건들이 모두 자유로운 것으로 보였다. 사용료 없이도 마음대로 찍을 수 있다는 데다, “스스로 안전을 책임지겠다”라는 각서 하나로 무사통과여서 안전비용이 덜 든다는 점 또한 다행스러웠다. 2001년 1월, 세부조건들이 서로 합의되자마자 고영민 감독은 사전방문 없이 바로 촬영에 나섰다. 준비만 길었던 영화, 어서 촬영에 나서고 싶은 마음에다 뉴질랜드 헌팅에서 헛걸음하고 돈만 날린 것을 만회해볼 작정이 합해졌던 것이다. 그러나 헌팅비 100만∼200만원을 아끼려던 의도는 결국 더 큰 손실을 낳았다. 영하 수십도까지 내려가는 1월의 악천후를 감안하지 못했던 것. 2∼3m씩 눈이 내리고, 스탭들이 눈구덩이 속을 뚫고 들어가면 카메라가 얼어서 멈추어버렸다. 촬영팀은 현지의 상황에 대해 몰랐고, 중간 섭외를 맡아준 한국인은 영화촬영의 메커니즘에 대해 알지 못했던 서로의 무지가 낳은 악재였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하는 심정으로 버티다가 결국 스탭들이 조난당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총 2100만원의 제작비 중 1700만원을 날리고, 애써 찍어온 필름도 배우가 다쳐 교체되면서 버릴 수밖에 없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했다. ▶ 고영민 감독의 고군분투 영화찍기로 본 독립영화의 경제학 (1) ▶ 고영민 감독의 고군분투 영화찍기로 본 독립영화의 경제학 (2) ▶ 독립영화 지원, 어떻게 이루어지나 ▶ 다른 단편.독립 영화들 어떻게 찍고 있나

<로얄 테넌바움>과 웨스 앤더슨 [1]

천재 가족 테넌바움 가에 바치는 엘레지 <로얄 테넌바움>은 어디서 본 듯하지만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 영화다. 그러나 이제 세 편의 영화를 완성한 감독 웨스 앤더슨에게 “지금 죽어도 영화사에 기록될 감독”이라는 칭찬과 “유아적 자기도취”라는 폄하는 <로얄 테넌바움>이 처음이 아니다. 그의 전작 <바틀 로켓>과 <빌 머레이의 맥스 군, 사랑에 빠지다>는 조용하지만 인상적인 파문을 일으키며 그가 할 하틀리와 쿠엔틴 타란티노 이후 가장 독창적인 세계를 이룰 미국 인디 영화계의 멤버가 될 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자아내왔다. 뒤늦게 우리가 스크린에서 처음 만나는, 그러나 앞으로 오랫동안 영화 팬들의 머릿 속에 머무를 듯한 예감을 던지는 새로운 재능 웨스 앤더슨 감독을,<로얄 테넌바움>의 3월29일 개봉에 앞서 소개한다. ‘위대한 테넌바움가의 사람들’을 만나 보시렵니까? 영화 <로얄 테넌바움>의 내레이터 알렉 볼드윈의 세련된 안내를 따라 뉴욕의 아처 애비뉴 모퉁이를 돌면 어린 시절 동화책에서 튀어나와 우리를 놀라게 했던 입체그림 같은 붉은 벽돌집이 관객을 맞는다. 이 집의 실내장식가는 여백의 미라곤 모르는 위인이다. 그림 액자가 들어찬 분홍색 벽, <포브스> 묶음부터 그리스 비극까지 가로누운 책들로 빈틈없는 선반, 기계식 넥타이 걸이와 드럼 세트, 쳇바퀴를 돌리는 달마티안 생쥐. 여기가 바로 17년 전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천재 삼남매가 유년의 기억을 밀봉하고 뿔뿔이 흩어져간 테넌바움 저택이다. 그러나 우리를 제일 먼저 사로잡는 궁금증은 전설적인 테넌바움 남매들의 사연이 아니라, 이 기막힌 ‘인형의 집’을 도대체 어떤 아이가 만들었을까하는 질문이다. 문제의 아이는 올해 서른두살이 된 웨스 앤더슨. <로얄 테넌바움>은 1996년의 <바틀 로켓>과 1998년의 <빌 머레이의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에 이은 그의 세번째 영화다. 도서관 대출장면으로 시작해 소설을 한 챕터씩 넘기듯 전개되는 <로얄 테넌바움>은 웬만한 관객이라면 평생 본 가장 이상한 영화 다섯편 안에 들 만한 명물이다. 타블로(tableau: 독립된 평면 위에 완성된 회화 작품)들의 퍼레이드로 일관하는 질리도록 꼼꼼한 미장센 탓만은 아니다. 오언 윌슨과 웨스 앤더슨이 함께 쓴 각본은 도무지 관객이 안심하고 울거나 웃거나 둘 중 하나만 하도록 한순간도 내버려두지 않으며 숏은 잘게 쪼개져 있으나 영화의 호흡은 백수의 콧노래처럼 흐느적거린다. 구성요소들을 뜯어서 설명할수록 영화의 실상에서는 자꾸만 멀어지는 얄궂은 영화가 <로얄 테넌바움>이다. 이같은 난감함은 감독의 데뷔작인 <바틀 로켓>의 제작자 폴리 플랫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손에 들어오는 대부분의 시나리오는 이미 만들어진 영화의 창백한 모방이다. 그러나 그들의 시나리오는 생전 본 적이 없는 종류였다. 독특하고 불균질했으며 총명했다.” 그렇다면 웨스 앤더슨과 그의 단짝 오언 윌슨은 테넌바움가의 또 다른 신동일까? ‘또라이’ 소년, 영화를 사귀다 “처음 봤을 때 열일곱살쯤 됐나 싶었다”고 테넌바움가의 안주인 에슬린으로 분한 안젤리카 휴스턴은 180cm가 넘는 깡마른 몸에 걸친 셔츠를 바지 밖으로 반쯤 빼놓고 다니는 웨스 앤더슨 감독과의 첫만남을 그렇게 회상한다. 앤더슨의 성장기에 우리가 관심을 가진다면 그것은 가족관계가 평생을 좌우한다는 결정론을 믿어서가 아니라, 서른두살 앤더슨 감독 안에 우표를 수집하고 BB탄 총을 갖고 노는 소년 웨스가 고스란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 잘못인가요?” “솔직히 너희 때문에 희생한 면은 있지만 그 때문은 아니다.” 별거를 작정한 아버지 로얄 테넌바움이 삼남매와 마주앉은 영화 속 한 장면은, 웨스 앤더슨의 개인적 기억이기도 하다. 1977년 앤더슨의 부모가 이혼했을 무렵, 그의 담임인 토르다 선생은 마침 명상이니 마사지를 동원한 혁신적인 교육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부모의 이혼을 인생의 재난으로 받아들여 급우들에게 비밀로 하고 거짓말과 난폭한 돌발행위로 학교생활을 유지했던 웨스를 담임선생은 자신이 해결해야 할 과제로 여겼고 그의 배려 덕에 열살의 웨스는 알라모 전투를 재연한 전쟁극, <인디아나 존스>의 외전, <목없는 기수>(<슬리피 할로우>의 원작) 등등 온갖 희한한 장르의 희곡을 써서 주연까지 겸했다.그리고 원치 않는 친구들에게 자신의 사인을 강제로 나눠주며 만족스런 학창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앤더슨의 모교에서 촬영된 두번째 영화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의 야심만만한 자칭 천재 맥스 피셔는 앤더슨의 작은 분신이다. <로얄 테넌바움>의 에슬린과 똑같이 고고학자로서 교육열이 남달랐던 앤더슨의 어머니가 아들의 과외활동을 지지한 것은 물론이다. 영화광에서 연극과 문학으로 관심을 돌렸던 웨스 앤더슨은 텍사스대학에 진학할 무렵 철학을 전공으로 선택했다. 가난한 대학생 웨스는 텍사스대학의 방임형 커리큘럼과 인문학 연구소를 십분 활용하며 F. 스콧 피츠제럴드, 프랑수아 트뤼포 같은 흥미로운 인물들을 독학했다. 그러나 앤더슨 인생 최대의 사건은 어느 나른한 시나리오 작법 수업시간에 터지고 말았다. 앤더슨의 모든 영화를 같이 쓰고 연기할 다시 없는 동지 오언 윌슨을 만난 것이다. 수업시간에 발표라곤 하지 않는 서로를 “제 잘난 멋으로 사는 참여의식도 없는 놈”이라고 여기며 한 학기 동안 말도 안 걸었던 두 사람은 곧 그들이, 같은 것을 보고 웃고 같은 것을 보고 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둘은 이내 룸메이트가 됐고 윌슨의 형제 앤드루와 루크도 패거리에 끼어들었다. 몇 백달러의 돈과 윌슨의 형인 앤드루가 다니던 광고회사에서 얻은 16mm 필름이 첫영화 <바틀 로켓>의 도화선에 불을 댕겼다. 당시 앤더슨은 텍사스 지역 케이블TV를 위해 ‘실없는’ 단편을 만들며 영화제작의 기술적인 측면을 수련한 참이었다. 14분짜리 단편 <바틀 로켓>을 본 제작자 폴리 플랫과 제임스 L. 브룩스는 댈러스까지 앤더슨과 윌슨을 찾아왔다. 선댄스 시나리오 작가 연구소에서 완성된 장편용 각본은 앤더슨이 워드 프로세서의 서체 크기를 잘못 지정하는 바람에 대하서사극 분량을 넘어버렸지만 제작자들은 이 얼떨떨한 젊은이에게서 미더운 무엇을 발견했다.500만달러가 투자된 장편 <바틀 로켓>은 결국 100만달러가 못 되는 돈을 버는 데 그쳤지만 할리우드 내부자 사이에 팬을 확보해 웨스 앤더슨과 윌슨 형제의 영화경력에 물꼬를 텄다. 2년 뒤 디즈니는 1100만달러 예산의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 제작에 나섰고 <바틀 로켓>에 반한 빌 머레이의 에이전트가 캐스팅을 수월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늘어난 예산 대신 개성을 덜어내는 불운을 겪지 않았던 웨스 앤더슨은 케빈 스미스가 그랬듯 친구들의 그룹으로 구성된 <바틀 로켓>의 스탭, 배우- 오언 윌슨과 앤더슨이 시간을 죽였던 커피숍 주인, 앤더슨의 여자친구까지- 를 이어받아 두번째, 세번째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가 일부 평론가로부터 그해 가장 아름답고 지적인 영화라는 찬사를 따낼 무렵 웨스 앤더슨과 오언 윌슨 콤비는 벌써 할리우드 마을 주민들의 의식 속에서 ‘원더키드’ 벤 애플렉과 맷 데이먼 커플 옆자리에 자리잡고 있었다.

<복수는 나의 것> [4] - 제작기 ②

10월 10월9일 드디어 난곡 촬영을 마치다. 처음에 감독님이, 만든 비로 커버하기엔 너무 앵글이 넓으니 진짜 비를 기다렸다가 찍자고 했을 때, 과연 그런 방법이 가능할까 의심했었는데 무사히 해낸 셈이다. 당연히 모두들 즐거워했지만 나로서는 오늘이 최악의 날이었다. 온몸이 쫄딱 젖은 채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는데 촬영 김 기사님이 갑자기 부르시는 게 아닌가. 가보니 저기 저 물건을 좀 치우라고 하셨다. 김 기사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돌아보니 거기 놓인 것은… 그것은 정녕… 아아!… 한 무더기 똥이었다. 서울에 마지막 남은 대규모 빈민촌인 이곳은 화장실을 제대로 못 갖춘 집이 많아서 골목마다 아이들이 싸놓은 똥이 많다. 프레임에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단지 감독님이 지나가다가 밟았다는 이유만으로 그걸 치우라시다니…. 나도 집에 가면 귀염받는 아들인데, 그래도 4년제 대학도 나오고 나름대로…. 아아! 감독이 되는 길이 과연 이토록 멀고도 험하단 말인가! 나, 그래도 이 악물고 다 치웠다. -한장혁(연출부) 10월15일 순창 촬영 5일차. 아침을 먹는데 갑자기 보배식당 아줌마가 쳐들어왔다. 60인분 밥값을 물어내라고 난동을 부린다. 보배식당은 이제 물렸다고 하도 스탭들이 아우성을 치는 바람에 중앙식당으로 바꾼 것이 화근이었다. 오늘 아침은 주문하지도 않았는데 자기들이 알아서 차려놓고 물어내라고 생떼를 쓰니 이거야 원…. 일단 도망부터 치고 봤는데 나중에는 촬영현장까지 가죽장갑 낀 어깨들을 데리고 몰려왔다. 나를 내놓으라고 스탭들한테 소리소리지르고 나는 버스에 숨고…. 무섭다… 살고 싶다…. -채화석(제작부) 10월16일 태어나서 첫번채 운동홰 날이엇다. 역씨 아빠는 오시지 않앗다. 촤령 가서 못 오신 것이다. 미준이 아빠(편자 주- 곽경택 감독)는 오셧는데…. 교장선생님이 꼭 오라고 편지까지 보내셧는데 우리 아빠는 너무햇다. 내가 꼭뚜가시춤 추는 것도 안 보고. 미준이가 너무 부럽고 너무 슬퍼서 엉엉 울엇다. 집에 와서 <카드캡터 체리> 보고 잣다. -박서우(감독의 딸) 10월22일 뇌성마비 장애인 연기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힘든데, 자꾸 그 차가운 물에 들어갔다 나오라고 하는 통에 다리에 쥐가 나서 죽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보다 더 나를 분통 터지게 만드는 건 박 감독님의 태도다. 어느 배우나 그렇듯이 나 역시 한 테이크가 끝나면 감독 눈치부터 살핀다. ‘이걸로 끝인가?’, 혹은 ‘나빴나?’ 그가 나를 보며 빙그레 웃는다. ‘아, 끝이구나!’ 그가 다가와 어깨를 두드린다. “수고했다, 다리는 괜찮니?” 나는 감격해서 외친다. “괜찮습니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래… 그럼, 한번만 더 해보지 않으련?” -류승범(배우, 우정출연) 10월24일 내가 물에 빠저죽는 장면을 직었다. 연출부 옵바들은 시체처럼 눈도 감빡이지 말고 가만이 잇으라고 하셨지만 너무 추우니까 살이 막 저절로 떨렷다. 구경군 중에 어떤 애들이 야, 잘 좀 해바바 하고 놀렸다. 그래서 나는 야, 니가 와서 해바바 하고 소리질렀다. 정식이 옵바가 두나 언니 같은 진자 배우가 될라면 이 정도는 참아야 된다고 해서 꾹꾹 참아따. -한보배(아역배우) 11월 11월4일 분당 촬영. 며칠 만에 다시 찍으러 왔더니 건물에 갑자기 없던 대문이 달렸다. 연출부는 연결이 튄다며 대문을 없애야 한다고 아우성이고 제작부는 남의 집 대문을 어떻게 없애느냐고 한숨이다. 결국 집주인 승낙을 받아 일단 떼었다가 나중에 도로 붙여주기로 했던 모양인데 이번엔 어떻게 떼느냐가 문제였다. 결국 내가 나서서 떼어주었다. 도대체 이 영화는 나 없으면 어떻게 찍으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노승회(키그립) 11월6일 강호 형 집으로 설정된 분당 촬영중이다. 집 앞길을 찍으려니 이미 계절이 바뀌어 여름 분위기가 안 난다고 난리들이다. 다른 건 어떻게 피해가겠는데 대문 바로 앞에 선 은행나무가 문제다. 잎이 벌써 다 져버렸으니. 하는 수 없이 조화 파는 가게 가서 플라스틱으로 만든 가짜 은행잎을 잔뜩 사다가 가지마다 붙여버렸다. 여기는 이런 식으로 커버한다지만 나머지 장면들은 다 어떻게 하나…. 이무영 감독 부부가 놀러오셨다. 댁이 근처라고 한다. -정식(연출부) 11월9일 이천 폐건물을 찍던 중에 감독이 또 변덕을 부렸다. 갑자기 시나리오에도 없는 장면을 만들어내더니 빨리 그걸 찍으러 가자는 거다. 신하균이 발가벗고 히치하이킹하는 장면을 찍자는 거다. 해는 벌써 다 떨어져 가는데 장소 헌팅도 안 돼 있는 길거리 장면을 찍자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래도 하는 수 없이 대여섯명만 출발했다. 조명도, 동시녹음도 없이, 연출부, 제작부도 도착 못한 상황에서 장소 고르고 카메라 세팅하고 신하균 옷 벗고 리허설도 없이 두컷을 찍었다. 삼십분 안에 말이다. 해가 거의 진 상황에서 노출이 안 나오는데 반사판도 없어서 공책만한 우리 그레이 카드판 뒷면을 이리저리 비쳐가며 찍었다. 이건 무슨 학생들 단편영화도 아니고…. 이래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기세훈(촬영부) 11월13일 다시 순창에. 여기 촬영은 정말이지 악몽 같다. 아침에 안개 걷히면 열한시, 오후에 네시 반이면 해 떨어져, 결국 밥 먹는 시간 빼면 하루에 다섯 시간도 못 찍는 셈이다. 거기다 때때로 비오죠, 걸핏하면 흐리죠…. 찍을 분량은 엄청난데, 답이 안 나온다. 결국 ‘매우 복잡한 카메라워크와 현란한 편집으로 이루어진 마지막 액션신’은 숏 수를 대폭 줄여버렸다. 줄여놓고 들여다보니, ‘왜 내가 진작 이렇게 안 했지?’ 하는 생각이 든다. -박찬욱(감독) 11월14일 다시 순창에. 여기 촬영은 정말이지 꿈결같다. 아침에 안개 걷히면 열한시, 오후에 네시 반이면 해 떨어져, 결국 밥 먹는 시간 빼면 하루에 다섯 시간도 못 찍는 셈이다. 그러니 매일 다섯시만 되면 촬영쫑, 바로 식당에서 한잔씩 걸치기 시작하면 아무리 오래 마셔도 시계 보면 기껏해야 열시 정도다. 이튿날 일찍 일어날 필요도 없으니까 마음껏 수다 떨고 원없이 놀아도 된다. 아, 매일 이런 촬영만 했으면! -송수인(미술팀) 11월15일 기자들이 몰려왔다. 전라도 순창까지 내려오다니 대단한 열성들이다. 구경꾼도 없이 우리끼리 한가롭게 찍다가 갑자기 주위가 어수선해지니까 잘 적응이 안 됐다. 게다가 어떤 여자기자 하나는 우리 오야지 의자에 허락도 없이 척 앉더니 서랍에서 과자를 마구 꺼내 먹어버렸다. 그게 어떤 과자인가, 제작부 눈치 봐가며 몰래몰래 빼돌렸던 그 ‘초코 찰떡파이’, 다른 스탭들한테 욕먹어가며 악착같이 쟁여놨던 그 ‘오징어 땅콩’, 아무리 먹고 싶어도 오직 오야지한테 잘 보이려는 마음 하나로 꾹꾹 눌러 참았던 그 ‘홈런볼’…. -이은주(동시녹음부) 11월16일 야외촬영이라 별로 할 일이 없어 마니또 게임을 준비했다. 모든 배우, 스탭들 이름을 적은 쪽지를 단지에 넣고 하나씩 고르게 한 다음 자기가 뽑은 사람한테 잘해주기 게임이다. 물론 상대가 모르게 해야 한다. 모두들 너무 좋아해서 ‘마추위’ 위원장으로서 책임감을 느낀다. -안성현(미술부) 11월21일 모두 마니또 때문에 난리들이다. 틈만 나면 자기 마니또가 어떤 문자 메시지를 보냈느니 무슨 선물을 전해왔느니 온통 그런 얘기들 나누느라고 야단법석이다. 현장에 웃음꽃이 끊이지 않는다. 나도 강호 오빠한테 밤마다 문자를 보내고 있다. 오늘은, ‘좋은 꿈 꾸세요. 당신의 마니또로부터.’ 그나저나 내 마니또는 누굴까, 궁금해 죽겠다. -권수경(분장팀) 11월27일 드디어 ‘마니또의 밤’이 열렸다. ‘마추위’의 활약은 대단했다. 며칠에 걸쳐 모든 배우 스탭들을 일일이 인터뷰해서 현장편집기로 편집하고 커피숍 빌리고 대형 모니터 설치하고 음식 준비하고 다 했다. 인터뷰 내용은, 각자 자기가 뽑은 사람을 밝히고 그 사람을 칭찬하고, 이 영화를 만드는 감회가 어떤지를 밝히는 내용이었다. 이름 뽑은 순서에 따라 릴레이되는 식이었는데 그동안 그토록 궁금해왔던 이름들이 공개될 때마다 장내는 폭소의 도가니로 변하곤 했다. 내 평생 가장 많이 웃어본 한 시간 반이었다. 공교롭게도 서로 상대방 이름을 뽑은 두 사람, 즉 마니또 커플이 탄생하면 데이트 비용 5만원을 지원하는 제도도 있었는데 소품팀 석호 형하고 내가 뽑혔다. 사람들 앞에서 진한 키스를 해야 돈을 준다는 조건이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해버렸다. -김양수(촬영부) 11월29일 길고도 길었던 순창에서의 마지막 날이자 <복수…> 전체 촬영 종료일. 열아홉 나이에 생전 처음 일해본 영화현장도 이젠 빠이빠이다. 배우, 스탭 언니 오빠들과 기념촬영하고 차로 돌아오는데 눈물이 나려고 했다. 하늘도 내 맘을 아시는지 비가 왔다. 첫촬영 때도 그러더니. 첫날이나 끝날 비오면 흥행이 잘된다는 충무로 말이 있고 하니 우리는 두배로 잘되겠다고 사람들이 한마디씩 하자 감독님은 그건 비오면 촬영 공치니까 자위하려고 충무로 사람들이 지어낸 얘기라고 하셨다. 그래도 우리 <복수…>를 많은 사람들이 봐줬으면 좋겠다. 뭐니뭐니해도 내 첫작품인데…. -김보연(의상팀) 2002년 1 ~ 3월 1월8일 보배식당 아줌마가 또 전화했다. 매일이다. 미치겠다. 오늘은, 자기 시아주버니가 청와대 출입기잔데 거기다 얘기해서 영화사를 박살내버리겠단다. -채화석(제작부) 2월26일 <복수는 나의 것> 소리를 만드느라 연일 밤샘이다. 감독은, 이 영화가 그림 바깥에서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따라서 그것들을 소리로 다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말은 멋있지. 하지만 그 얘긴, 다시 말해 골탕 좀 먹어보라는 거다. -김창섭(사운드 디자이너) 2월29일 내심 짐작은 했지만 막상 사실로 확인하고 나니 괜히 화가 막 난다. 조명부 오승철과 미술부 안성현, 연출부 한장혁과 동시녹음부 이은주…. <복수는 나의 것> 현장에서 탄생한 두 커플…. 아! 현장에서 나한테 잘 보일까 무서워 눈만 마주치면 슬금슬금 피하곤 했던 그 많은 남자 스탭들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찍히면 죽는다’나? 내가 나이 좀 먹었기로서니 그렇게까지 괄시를 하다니! 다음 작품 에서는 좀더 분발해야겠다. 거기는 일단 야구단이 많이 나오니까 남자 숫자도 충분히 확보된다고 봐야 한다. 다섯팀만 나와도 벌써 마흔다섯놈 아닌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렌다. -송종희(분장) 3월1일 분당 이무영네 놀러갔다가 밥 먹으러 나가는 길이었다. 차 타고 우리가 촬영했던 동네를 지나치게 되었는데, 장수영(편자 주- 이무영의 아내)이 제법 센티멘털하게 한숨 쉬며 하는 말. “이제 완전히 봄인가봐…. 저 은행나무 좀 봐요, 새 잎이 다 났잖아….” 난 이렇게 중얼거렸을 뿐이다. “그러네….” -박찬욱(감독)

<복수는 나의 것> [3] - 제작기 ①

“대단한 놈이다, 이런 괴상한 영화를 주저없이 택하다니!” 감독의 고민과 미학적 의도가 중심이 되는 영화 제작기에 익숙해 있던 우리는 박찬욱 감독이 여기 쓴 <복수는 나의 것> 제작기에 통쾌하게 한방 먹었다.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라는 교과서적 문구를 뒤로 젖혀놓고 그는 영화 촬영현장의 진정한 마술이 어디 있는지 보여준다. 처음 감독을 만나 출연 약속을 하는 순간 두나의 어머니가 느꼈을 감상에서, 얻어터지는 연기를 하면서 이를 악무는 배우의 독기에서, 오랫동안 집을 비운 아빠를 기다리는 어린 딸의 마음에서, 감독이 되겠노라 온갖 불합리한 요구를 묵묵히 참아야 하는 연출부 막내의 성실성에서, 엉성한 현장 분위기를 잡아보겠다며 연기지도를 하는 류승완 감독의 자세에서, 서로를 위로하기 위해 마니또를 제안하는 애정에서, 기계장치에 불과한 카메라는, 셀룰로이드에 불과한 필름은 사람의 말을 배우고 혼을 얻고 육신의 몸짓을 따라한다. 영화가 마술인 것은 그래서인지 모른다. <복수는 나의 것>이 나오기까지 그들이 경험한 이 에피소드들은 이제 술자리의 안주가 되고 사부의 전설이 되고 자신의 명함이 될 것이다. 슬쩍 그들의 이야기를 엿듣는 것만으로도 영화 촬영현장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으로 다가온다. 2001년 1 ~ 7월 1월25일 영화 <파괴된 사나이> 일로 박찬욱 감독을 만났다. 두나와 감독의 첫만남. 사진에서보다 키도 작고 배도 많이 나왔다. 퍽 맘이 놓인다. 딸래미 옆에 앉혀놓고, 처음 보는 남자와 함께, 무슨 체위를 취하느니 어느 부위를 노출하네 마네 따위의 얘기를 주고받으려니 민망하기도 했지만 어쩌랴, 어차피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인걸. -김화영(배두나 엄마) 1월28일 하균이가 <파괴된 사나이>를 받자마자 바로 읽고 바로 연락했다고 한다. 하겠다고. 대단한 놈이다, 그런 괴상한 영화를 주저없이 택하다니! 어쨌든 이로써 난 빠져도 되게 생겼다. 살았다. -송강호(배우) 5월11일 이제 다 이루었다! 송강호로부터 오케이 사인이 온 것이다. 나흘 전, 그에게 각본을 또 보냈다고 털어놓았을 때 감독이 너는 자존심도 없냐고 지랄하던 일이 떠오른다. 그때 난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다. 송강호가 수정된 각본을 읽고 갑자기 맘이 바뀔 수도 있는 거 아니냐”고 대꾸했었지. 그런데 지금 결과를 봐라, 찬욱이 걔는 인생을 모른다. -이재순(프로듀서) 6월4일 영화의 주무대인 류의 고향이 전라도 순창으로 정해지다. 최근 몇달 동안 제작부와 연출부가 강원팀과 전라/경상팀으로 양분되어 전국을 샅샅이 뒤지고 다닌 결실이다. 처음엔 강원팀의 우세가 점쳐지더니 전라/경상팀이 역전승을 거두고야 말았다. 감독님이, 기막힌 절경보다는 평범하고 소박한 풍경쪽의 손을 들어주셨던 것이다. -이연욱(제작부장) 6월21일 박찬욱의 새 각본을 함께 손봤다. 말로는 미니멀한 영화를 지향한다면서 설명적인 장면들이 너무 많았다. 그래 한 스무신쯤 없애줬더니 안 된다며 막 발버둥을 친다. 내 작품 쓸 땐 가차없이 칼질을 해대던 그가, 제 눈의 들보는 못 본다. 그냥 두면 나중에 저 혼자 도로 살려놓을까봐 아예 과감하게 블록 설정해서 몽땅 딜리트시켜버렸다. 제목을 <복수는 나의 것>으로 바꾸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다. -이무영(공동각본) 7월15일 00아파트 섭외 실패. 처음엔 호의적으로 나오던 자치회에서, <정사>의 티비 방영 이후 180도 입장을 바꿔버렸다. 자기네 아파트가 너무 가난하게 나오더라는 것이다. 그 방송 직후 당시 촬영 허가를 내줬던 자치회장이 잘렸다고 한다. 천상 새로 헌팅해야 할 것 같다. 감독님 좌절할 텐데 어쩌나…. -손세훈(제작실장) 8월 8월13일 첫촬영부터 장난이 아니다. 버티고개역, 그 긴 에스컬레이터 측벽의 형광등 60개를 다 갈아끼웠다. 역무원들이 나한테만 난간 무너진다고 내려오라고 난리다. 이 컷, 편집에서 잘리기만 해봐라. -권명환(조명부) 8월14일 첫촬영 분량 데일리를 확인했는데, 에스컬레이터의 롱숏은 아무래도 괜히 찍은 것 같다. 조명부가 고생을 좀 하긴 했지만 하는 수 없지, 뭐. -박찬욱(감독) 8월17일 드디어 사고가 터지기 시작하는구나. 촬영 때 가장 두려운 게 인명사고인데, 세상에, 달리는 차의 보닛이 열리다니, 그것도 고속도로에서. 병원에 달려가 봤더니 다행히 큰 외상은 없어 보였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 조감독의 한마디가 나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려 버린다. “사장님… 우리 촬영 시작했어요?” “뭐어?!!” 옆에서 연출부가 염장을 지른다. “아유, 말도 마세요. 아까는 남편한테 연락했다고 하니까 자기가 시집을 갔느냐고 그러던 걸요, 뭐….” 교통사고 환자에게 순간적인 기억상실증세는 흔히 있는 일이라고 떠드는 의사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주여, 이재순 피디, 오재원 미술감독, 안성현 미술부, 그리고 특히 이소영 조감독을 굽어살피소서. -임진규(제작자) 8월17일 이 피디 차가 뙤약볕 아래 주차돼 있기에 너무 더울 것 같아서 이 부장 차로 바꿔 탔더니 그쪽 차만 사고를 당했다. 기억을 잃고 횡설수설하는 소영이를 보며 내심,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생각했다. -박찬욱(감독) 8월18일 소영의 기억이 돌아오고 있다. 이제는 더이상 간호사한테 저 처음 보는 아저씨 좀 내보내달라고 안 그런다. -유흥삼(조감독의 남편) 8월19일 공무원 아파트의 발코니 장면을 찍는데 감독이 이랬단다. 배경으로 저 아래 멀리 보이는 학교 운동장에 흙먼지 일으키면서 축구하는 사람들이 보였으면 좋겠다고. 연출부의 지원 요청을 받고 가서, 완전히 개처럼 뛰어다녔다. 매니저가 이런 거까지 해야 하나 생각하면서 터덜터덜 올라오는데 지나가는 촬영부 지들끼리 하는 말, “그거, 하나두 안 보이는데 왜 시켰나 몰라…?” -김양래(신하균 매니저) 8월20일 보배가 카에서 크라잉하는 신을 찍었다. 제대로 안 운다고 그 에잇 이어즈 올드밖에 안 된 애를 어시스턴트 디렉터가 얼마나 구박하던지, 할리우드에서 일을 배운 나로서는 정말이지 임배리싱했다. 큰소리 질러서 겁주고, 프레임 바깥에서 막 꼬집고, 똑바로 못하면 파이어시켜버린다고 블랙메일하고…. 할리우드에서 저렇게 했으면 촤일드 어뷰즈로 당장 쑤우 당했을 거다. 코리안 크루들은 정말 다 미친놈들 같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건 보배였다. 촬영이 끝나고 내가 미안하다고 대신 어폴로자이즈했더니 씨익 웃으면서 “저 울리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 다 알아요.” 이러는 게 아닌가. 오 마이 갓! -김병일(촬영감독) 8월22일 현장에 병헌 오빠가 놀러왔다. 감독님이, 현정이 너 때문에 불렀다며 놀렸지만 난 마냥 좋기만 했다. 평소 남자 스탭들로부터 뻔뻔하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 내가 왜 오빠 앞에만 서면 말도 제대로 못하고 쭈뼛거리기만 하는지…. 아, <공동경비구역 JSA>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그때는 매일 오빠 얼굴을 만질 수 있었는데…. -김현정(분장팀) 8월25일 편집실 조수로 컴컴한 방에 종일 틀어박혀 일하다가 현장에 나오니 정말 신난다, 고 생각했는데…. 금호역 출구장면을 나름대로 편집을 해서 보여드렸다. 끼니도 건너뛰고 열심히 했다. 감독이 제대로 못 찍은 것도 교묘한 편집으로 표 안 나게 만들었다. 솔직히 말해 나, 정말 칭찬 한마디 들을 줄 알았다. 그랬는데 감독님, 스윽 한번 들여다보더니 돌아서 가며 하는 말, “넌 왜 내 생각하고 거꾸로만 붙이는지 모르겠다…. 콘티 안 보니?” -곽정아(현장편집) 9월 9월2일 부검실 앞 잔디밭으로 설정된 보라매 공원 촬영. 조용한 분위기에서 송강호가 흐느끼고 최 반장이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장면인데, 막상 현장에 가봤더니 한쪽에선 경로잔치, 반대쪽에선 판촉행사, 멀리 힙합댄싱팀의 연습장까지, 완전히 소음의 아수라장이었다. 아주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이승철(프로덕션 사운드 믹서) 9월3일 부검실을 찍다가 한바탕 중단 소동이 벌어졌다. 갑자기 감독님이, 강호 오빠가 입은 잠바의 상표를 떼어버리라는 거다. 전에 미리 허락받지 않았냐고 항변했지만 자기가 언제 그랬느냐며 오리발을 내밀고 막무가내였다. 스탭들은 다 나만 쳐다보지, 쪽팔려서 죽는 줄 알았다. 상표를 떼고 그 자리를 표 안 나게 처리하고 있는데 자꾸 눈물이 났다. 감독님은 왜 나만 미워하는 걸까? -신승희(의상팀) 9월9일 장기밀매조직 사무실 촬영. 마취된 채 강간위기에 놓인 아가씨 역을 하는 아가씨가 에로비디오 찍으러 가버리는 바람에 촬영이 중단되었다. 한숨만 쉬고 있는데 감독님이 찾으신다는 말이 들렸다. 예감이 안 좋았다. 역시 그랬다. 시트로 몸을 가리고 맨 팔다리만 내놓고 있으면 벌거벗고 누운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는 얘기였다. “아, 그러면 되겠구나!… 근데 그 대역은 누가 하죠?” 대답은 안 하고 빤히 내 얼굴만 바라보던 감독님의 그 느끼한 표정. 결국 민소매 상의 입고 반바지 입고 시트 뒤집어쓰고 누웠다. 모처럼 푹 잤다. -김나성(스크립터) 9월13일 박 감독님 현장에 놀러갔다. 배두나가 신하균을 두들겨패는 장면을 찍는데, 감독이나 배우들이나 어찌나 버벅대던지. 보다보다 하도 답답해서 내가 좀 해보면 안 되겠냐고 그랬다. 허락을 받아서 약간의 동작을 지도해 보였다. 일동 기립박수를 기대하며 천천히 몸을 돌리는데 스탭들 모두 팔짱끼고 묵묵히 지켜보며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게 아닌가! 심지어 “저건 좀 아니잖아?” 하고 동료에게 속삭이는 연출부도 있었다. 아, 명랑액션의 길은 이토록 멀고도 험하단 말인가. 그래도 박 감독님은 나 하는 대로 그냥 내버려둔다. 아마 직접 연출하기가 귀찮기 때문이리라. 듣기로는 마지막 장면이 매우 복잡한 카메라워크와 현란한 편집으로 이루어진 액션신이라는데 저런 자세로 어떻게 찍으려는 건지….걱정된다. -류승완(우정출연, 영화감독) 9월15일 배두나 방 조명을 미리 다 세팅해놓고 나와서 놀았다. 남자 스탭들은 현장에 못 있게 하니까 하루종일 밖에 나가 족구만 했다. 만날 정사신만 찍으면 좋겠다. -문형준(조명부) 9월18일 두나 전기고문하는 장면을 찍다. 전기 잘 통하라고 귀에 침을 살짝 묻히는 장면을 찍는데 두나가 아주 몸부림을 치고 온통 난리를 부렸다. 어떤 테이크 때는 진짜 못 참겠는지, 카메라 돌아가고 있는데 “잠깐만!” 하고 소리를 지를 정도였다. 하도 치를 떨며 말을 해서 그런지 발음까지 분명치 않았다. 당연히 감독님은 거기서 카메라를 멈추지 않았고, 아마도 그 테이크를 편집에 사용할 것이다. 실감나니까. 그렇지만 나는 몹시 기분이 언짢았다. 두나는, 제 귀에 내 혀가 닿는 게 그렇게도 싫었을까? 생각할수록 기분 나쁘네, 그거…. -송강호(배우) 9월19일 그에게 점점 다가가는 자신을 느끼기 시작한다. -배두나(배우) 9월19일 드디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전기충격으로 기절한 내가 강호 형한테 무방비로 구타당하는 장면. 무식하게 풀숏/롱테이크로 콘티를 짜놓은 감독님이나 진짜로 사정없이 때릴 테니 조금만 참으라는 강호 형이나, 정말이지 남 생각 진짜 안 해주는 인간들이다. 무슨 애도 아니고, 나도 액션장면 얼마든지 찍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그냥 가만 누운 채 일방적으로 맞고만 있어야 한다는 상황은 좀 다르지 않은가. 여기서 중요한 건 눈을 감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정작 맞을 때보다 언제 어느 방향에서 날아올지 모르는 발길질과 주먹질을 기다리는 그 침묵과 암흑의 순간이야말로 진짜로 무서운 시간인 것이다. 게다가 그 송강호라는 명배우는 리허설 때 다르고 실제 촬영 때 다르고, 촬영 때도 테이크마다 다르게 연기하기로 유명하신 바로 그분 아닌가, 이건 예상도 안 되고…. 미치겠다. -신하균(배우) 9월20일 티저 포스터 촬영 빵꾸나다. 스튜디오에 나타난 하균씨 얼굴을 보고 기절하는 줄 알았다. 온통 멍들고 군데군데 찢어지고 이건 아주 난리가 아니다. 어떻게 된 거냐고 그랬더니 어제 촬영하다가 강호씨한테 맞아가지고 그랬다고 한다. 영화도 좋지만 어떻게 애를 그렇게 만드나…. -이재용(포스터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