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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9404)

<아폴로 13> <아마데우스> 재개봉

아이맥스 포맷으로 변환·디렉터스 컷 등의 방식으로 시장성 인정받은 작품들 재개봉 러시<아폴로 13>과 <아마데우스>가 다시 미국 극장가에 걸린다. 할리우드에서는 속편 제작 및 고전 리메이크가 활기를 띠는 가운데, 이미 개봉했던 영화들을 재개봉하는 리바이벌이 또 하나의 유행으로 떠오르는 추세. 특히 2000년 하반기부터 2001년에 걸쳐 세계적으로 재개봉되면서 1억달러 이상을 벌어들인 <엑소시스트>의 성공 이후, 이같은 재개봉 시도가 점점 늘고 있다. 지난 3월19일 스티븐 스필버그의 를 20주년 기념으로 재개봉한 유니버설은, 이매진엔터테인먼트와 함께 론 하워드의 95년작 <아폴로 13>을 올 여름에 재개봉할 것이라고 밝혔다. 현재 워너에서 판권을 갖고 있는 밀로스 포먼의 85년작 <아마데우스>도 4월에 재개봉될 예정이다.재개봉된 <엑소시스트>가 73년 개봉 당시 빠졌던 스파이더 워크 장면 등 11분을 추가하고 디지털 리마스터링으로 새 단장해 관심을 끌었던 것처럼, <아폴로 13>과 <아마데우스>도 조금씩 달라진다. 우선 <아폴로 13>은 보통 극장에 걸리는 35mm 네거티브 필름을 70mm 아이맥스 포맷으로 변환하는 공정을 거쳐 선보일 예정. 예전에도 워너의 <매트릭스>나 유니버설의 <쥬라기 공원3>, 드림웍스의 <글래디에이터> 등이 아이맥스 영화관에서 재개봉된 적은 있었지만, 이들은 모두 35mm 필름을 단순 블로우업한 것이었다.새로운 <아폴로 13>은 블로우업이 아니라 아이맥스사에서 보유한 기술로 아예 70mm 아이맥스 영화로 재손질한 버전. 영화사에서 편당 200∼300만달러를 부담해야 하는 공정이지만, 보통 실사영화보다 영상의 폭이 두배 이상 넓고 전체적인 해상도도 높아졌다는 게 관계자들의 말이다. 한편 올 하반기에 2장짜리로 새롭게 나올 DVD에 앞서 재개봉되는 <아마데우스>는, 지금껏 공개되지 않았던 20분 분량을 추가한 디렉터스컷이다. 이들 작품들이 어떤 성과를 얻을지를 두고 봐야겠지만, 제작비가 따로 필요없고 어느 정도 시장성을 검증받은 기존 영화들의 재개봉 바람은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황혜림

[LA리포트]낯선 영화들의 섹시한 도발

<너네 엄마도 마찬가지야> 개봉, 아시아·라틴아메리카 영화들 상승세 기대강제규 감독의 <쉬리>가 미국 개봉을 시작했을 때 나 <뉴욕타임스>가 연예면의 커버스토리를 할애해가면서 관심을 기울였던 이유는 이 영화가 명백히 할리우드 주류영화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외국영화=예술영화’라는 등식이 자연스럽게 성립해 있는 이곳에서, 영화로는 불모지로 알려져왔고 늘 정치적인 이슈로만 언론을 장식했던 한국이라는 곳에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다름없는 액션과 로맨스가 있는 첨단의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점이 이곳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이다. 3월10일자 연예면 캘린더의 커버스토리는 <쉬리> 외에도 그동안 가난이나 정치적인 시련을 겪은 제3세계 국가들이 자신들의 정치·사회적인 이슈에서 벗어나 섹시하면서도 쿨한, 그래서 할리우드영화와 어깨를 겨룰 만한 영화들을 만들고 있음에 주목했다.이 기사는 15일 미국 개봉을 앞둔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새 영화 <너네 엄마도 마찬가지야>(원제 <이 투 마마 탐비엔>)에 초점을 맞추어 그동안 미국인들이 라틴아메리카나 중동, 아시아 국가들의 영화에 대해 갖고 있던 선입견들이 깨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영화는 멕시코의 두 틴에이저가 해변에서 중년의 섹시한 부인을 만나 우정과 섹스를 동시에 키워가는 여정을 담은 영화로, 멕시코 본국에서는 지나친 노출과 청소년 섹스장면 등으로 등급 논란을 일으켰으며, 미국에서도 등급없이 개봉됐다. 는 이미 미국에서 <위대한 유산>(1998)을 만든 뒤 멕시코로 복귀한 쿠아론 감독의 이 영화가 10대의 성이야기를 다룬 할리우드의 <아메리칸 파이> 등과 같은 감성을 가지고 있다면서, 쿠아론 감독 외에도 알레한드로 곤잘레스(<아모레스 페로스>), 기예르모 델 토로(<악마의 둥뼈>), 살바도르 카라스코(<디 아더 컨퀘스트>) 등 30∼40대 감독들이 이와 비슷한 정서로 멕시코영화에 새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쉬리>와 마찬가지로 자국 내에서 큰 흥행 성공을 거둔 뒤 미국시장에서의 흥행여부를 노크하려 하고 있다. <너네 엄마도 마찬가지야>는 지난해 <아모레스 페로스>를 제치고 멕시코영화 역대흥행 2위에 올랐다. 흥미로운 것은 이 기사가 멕시코영화의 발전을 위해서는, 한국영화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 범아시아영화인의 연대를 라틴아메리카에서도 전수받아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한국과 일본, 중국 등이 감독과 배우 스탭들을 공유해 해외시장을 넓히고 역량을 넓혀나가고 있다면서 같은 방식으로 라틴아메리카 각국의 영화인들이 뭉친다면, 최근 부쩍 늘어난 미국 관객의 외국영화에 대한 관심과 맞물려 라틴영화들이 미국시장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가능성이 많다고 전망했다. 이 기사는 멕시코 감독들의 영화 외에도 한국의 <나쁜 남자> <꽃섬> <조폭 마누라> <봄날은 간다> <생활의 발견> 등의 영화를 비롯해 아르헨티나의 루크레시아 마르텔 감독의 <라 시에네가>, 보스니아 데니스 타노빅의 <노 맨스 랜드>, 이란 마지드 마지디의 <바란>, 모흐센 마흐말바프의 <칸다하르>, 대만 차이밍량의 <거기는 지금 몇시니?> 등을 자국영화 산업계에 활력을 주고 있는 작품으로 꼽았다. LA=이윤정 통신원

[Review] 위대한 비상

■ Story 호숫가에서 쉬고 있던 한 무리의 기러기들이 인기척에 놀라 날아오른다. 그중 한 마리가 낚시 그물에 다리가 걸린 채 퍼덕이자 달려온 소년이 그물을 끊어준다. 그물조각을 징표처럼 발목에 단 기러기와 함께, 지중해에서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이르는 회색기러기의 이동이 시작된다. 검은목두루미도, 백황새도, 백조도, 생존을 위해 철새들은 제각각 북반구쪽 고향의 봄을 찾아 수천 킬로미터의 기나긴 비행에 오른다. ■ Review 막연히 한두번쯤 하늘을 나는 꿈을 가져본 날개 없는 족속들에게, <위대한 비상>은 아주 특별한 시야를 열어주는 영화다. 인간의 말로는 ‘귀환의 약속’이라 표현된 철새들의 이동을 따라가는 이 다큐멘터리를 보자면, 종종 마치 그 무리의 옆에서 함께 날고 있는 일원이 된 듯한 느낌에 빠질 정도다. 바람에 흔들리는 깃털의 미세한 떨림까지 엿볼 수 있는 클로즈업에서 노을진 하늘과 더불어 스크린을 가득 메운 수많은 새들의 롱숏에 이르기까지, 카메라는 철새들의 여행에 더없이 친밀한 동행으로 나선다. 파리의 에펠탑과 뉴욕의 마천루 숲을 멀리 내려다보며, 도시에서 부대끼는 인간의 삶을 훌쩍 떠나 하늘과 땅과 자연의 우주가 얼마나 넓은지를 새삼 일깨우면서 말이다. 도입부에 낚시 그물을 징표로 얻은 기러기가 다시 돌아오기까지 계속되는 <위대한 비상>의 여정은, 헤아리기 힘들 만큼 많은 새들이 주인공이다. 주연배우를 알아볼 수 있을 리 만무하고, 약간의 내레이션 외에는 대사도 없지만, 그들만의 우주에서 벌어지는 드라마와 캐릭터를 조금씩 발견해가는 과정은 뜻밖에 흥미진진하다. 눈밭에서 날씬한 다리 끝으로 사뿐사뿐 걷는 두루미의 우아한 군무, 비행에 서툰 새끼들의 연습을 위해 바위 끝으로 모는 어미새, 새끼를 잃고 망연자실한 듯한 킹 펭귄 한쌍의 뒷모습. 날개가 부러진 채 낙오된 새가 바닷게에게 먹히는 장면까지, 철새들의 날갯짓을 따라 고달픈 생존의 이야기와 함께 인간의 시야 너머 자연의 수많은 빛깔을 펼쳐보이기 때문이다. 남극의 얼음바다부터 사막과 아프리카의 열대우림까지, 더없이 풍부한 표정과 색을 띠는 풍광은 순간순간 무료할 틈을 잊게 하는 또 다른 주인공. <마이크로코스모스>에서 곤충들의 소우주를 현미경 같은 섬세함으로 포착한 바 있는 제작진은, 세계 36개국 175개 지역을 돌며 35종에 이르는 철새들의 여정을 담기 위해 꼬박 5년을 들였다. 각지에서 1천여 마리 이상의 새들을 모집해 알에서부터 부화시키고, 그들을 따라 14명의 촬영감독과 조류학자, 파일럿 등 150여명의 스탭들이 3년간 촬영했다고. 끈질긴 인내와 관찰로 길어올린 영상은, ‘위대한 여행자’들과 함께 아직도 다 헤아릴 수 없는 자연의 품을 돌아보게 한다. 황혜림 blauex@hani.co.kr

윤석호 PD 인터뷰

만났을 때 PD는 19부 대본을 읽는 것으로 강행군의 중간을 메꾸고 있었다. 19일 방송될 20회 마지막 대본은 2월13일 수요일 현재 나오지 않은 상태. 윤석호 PD의 드라마는 현대적 화면 방식과 화려한 색감을 보여 시각적 완성도가 높다. <느낌> <컬러> <웨딩드레스> <프로포즈> <초대> <가을동화>가 그가 만들어낸 감정이 살아있는 윤석호표 드라마들. 13일 백상예술상에서 윤석호 PD는 <겨울연가>로 드라마 연출상을 받았다. KBS 별관에 플래카드가 크게 걸려있던데 그만큼 회사에서 작품에 기대를 했다는 뜻일 것이다. <가을동화>가 끝난 뒤가 데스크 직전이었다. 승진을 안하면 불만이고, 승진을 하면 작품을 할 수 없고. <가을동화>가 성공해서, 사람들이 충고하기도, 지금이 나가는 타이밍이다라고 하더라. 노선잡는데 헤매다가 나왔다. 외부에서 제작을 하니까 “너 역할 해야 돼” 하는 말을 듣지만, 별 수 없다. 좋아하는 걸 하는 수밖에. 따져보고 어떻게 할까 하는 것은 우리같이 정서감을 갖고 작업하는 사람들은 못할 짓이다. 잘하고 익숙한 것을 해야지. 아예 쉽게 결정은 한 것 같다. 컬러 시리즈 <화이트>가 이창훈이 첫사랑 애인을 잃고 그와 닮은 여자를 만나 사랑을 하게 되는 이야기였는데, 연출할 때 좋은 기분으로 했다. 이 설정에서 죽음이 아니라 기억상실로 가자고 했고, 20부작이라 그것만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기가 힘들 것 같아 이복이라는 설정을 집어 넣었다. 그런 장치가 많을수록 기댈 데가 많아 대본을 꾸미기는 좋다. 시각적 디테일에 신경을 많이 쓴다. 시각적 관심이 높다. 건물이 좋다고 그러면 일부러 찾아가서 보는 편이다. 칼라 시트를 가지고 다니면서 냉장고 색깔이 칙칙하면 붙여서 촬영하기도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겉멋이 없고 내용이 실한 것을 좋아한다. 포장하는 것을 가볍다고 여긴다. 하지만 그래서 전봇대를 이상한 곳에다 박고, 스카이라인이 무너지도록 어울리지 않는 건물을 지어댄다. 그건 시각적 훈련이 얼마나 되었는가의 문제다. 디자인도 상품이 된다. 한류 열풍에서 알 수 있듯 그들이 드라마 내의 의상과 생활에 관심을 많이 둬서 인기가 있지 않나. 누가 본다고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마음에 안 들면 기다린다. 마지막 여행 장면도 둘이 바닷가를 걷는다만 하고 끝낼 수도 있는 거지만, 예쁘게 보이게 하려고 갈매기를 불러 모았다. 그러면서 시간을 보내니 대사씬 하면서 밤을 새우게 되고 일이 많아진다. 라디오 드라마도 아닌데 색채를 보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유독 집착을 한다. 장면을 위해서 설정을 스토리 속에 집어 넣는다. 명장면을 꼽는다면. 첫키스하는 장면이 좋다. 대본에는 가로등 아래서의 키스였는데, 남이섬의 가로등이 예쁘지 않았다. 대본이 미리 받아서 어떻게 하면 기억에 남는 장면을 만들 수 있을까 하고 고민을 많이 했는데 현장에서 아이디어가 나왔다. 꼬마 눈사람을 보고, 끈적끈적한 게 아니라 새가 모이를 집어먹듯이 그렇게 콕하는 뽀뽀였다. 그리고 스키장 제설차 장면도 좋다. 제설차는 하루종일 눈을 뿌린다. 밤촬영을 하다가 발견한 것이었다. 결론은 정해졌나. 작가와 통화해서 대강의 라인은 결정되었지만, 아직 대본이 나오지는 않았다. 이전에 했던 드라마들이 큰 관계설정을 한 뒤 조금씩 상황이 변화하는 것이었던 데 비해, 이번 드라마에서는 이복과 기억상실이라는 두가지 큰 요소를 가져가게 되니까 어렵다. 19부, 20부에서는 이복이 아닌 게 밝혀지고 여운있는 해피엔딩으로 가기 전에 몇가지 장치를 고심중이다. 18부가 이복이라는 것을 유진이 알게 되는 장면으로 끝나고 나서 시청자들이 게시판에 항의글을 많이 남겼다. 우리는 이복이 아니라는 설정이기 때문에 둘을 키스도 시키고, 끈적끈적한 시선으로 바라보게도 한 것이지만, 트릭이 너무 세서 그런지 시청자들이 힘겨워한다. 정색을 하는 바람에 시청자들도 정색을 하고 쫒아왔다. 풀면서 해도 됐을 텐데. 연장방송 하자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15부쯤에서 좀 느려졌다가, 지금 수습하느라고 한창 바쁘기도 하다. <겨울연가>의 성공요인은 무엇일까. 논문식으로 정리를 한다면 외부적인 요인과 내부적인 요인이 있을 것 같다. 외부적인 요인은 작년 한해 사극이 너무 많아서 순수 멜로 드라마에 대한 시청자들의 갈증이 많았다는 것이다. 내부적인 요인은 첫사랑을 다뤘다는 것이다. 할머니에게도 첫사랑은 있으니깐. 나이를 먹어도 자기는 젊다고 생각하는 법이다. 다양한 사랑의 풍속도가 나와도 첫사랑은 다른 사랑이다. 깨끗하고 순수하고. 주인공 조와 테리는 쾌활하게 은행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돈가방을 들고 유유히 나온다.<내일을 향해 쏴라>의 코미디 버전을 보여주는 듯하더니, 케이트가 등장하면서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로 분위기가 바뀌고, 이내 미국판 <줄과 짐>으로 흘러간다. 별로 새로울 것은 없지만, 단단한 시나리오와 풍부한 캐릭터라는 기본에 충실한 영화. 100년 전 일어난 도끼살인사건과 그 진실을 쫓는 현재의 사진기자, 그리고 사진기자를 둘러싼 미묘한 애정관계 등, <웨이트 오브 워터>는 현재와 미래 그리고 사실과 허구 사이를 교차편집으로 누빈다. 초반엔 맥빠진 스릴러처럼 진행되지만, 사건이 진행되면서 일면식조차 없던 과거의 여성과 커뮤니케이션 상태에 이르는 진의 심리적 긴장이 스크린을 점차 옥죄어간다.▶ <겨울연가> 신드롬, 그 기억상실의 스토리 ▶ 윤석호 PD 인터뷰

서글픈 백수, <복수는 나의 것>의 신하균

<엽기적인 그녀>의 촬영을 끝낸 차태현과의 인터뷰중이었다. 시종일관 명랑활달하게 모든 대답을 이어가던 그의 얼굴에서 잠시 낯선 긴장의 표정이 스쳤다. “사실 다른 배우를 보면서 긴장하는 법이 별로 없거든요. 그런데 <공동경비구역 JSA>의 하균이 형(신하균)을 보는데, 순간 떨리는 거예요. 아, 큰일났구나. 저렇게 돼야 되는데, 갑자기 걱정이 밀려오더라고요.” 신하균은 그랬다. 한국영화의 허리를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는 최민식, 설경구, 송강호, 유오성의 바통을 이어받을 다음주자들 사이에서 그의 존재는 위협적일 만큼 강렬한 어떤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신하균에 대한 무형의 기대는 <…JSA> 이후 1년 반 만에 확실한 증거를 탄생시켰다. 신이 쥐어준 송곳을 원수의 목에 내리꽂고, 복수의 칼날로 도려낸 신장을 소금에 찍어 어그적어그적 씹어삼키는 이 남자의 건조한 표정 속엔 해맑게 미소짓던 우리의 미소년은 이미 증발해버렸다. 병으로 죽어가는 누나를 살리기 위해 해서는 아니 될 유괴를 하고, 지지리 운도 없이 아이의 죽음마저 맞게 되는 <복수는 나의 것>의 류는 태초부터 악마성을 지닌 것이 아니라 상황 속에 서서히 그리고 조금씩 파괴되어가는 인간. “제가 표현은 잘 못해도 이해는 잘하는 편이거든요. 감독님과의 대화 속에 충분히 이 영화를 받아들였고 결국 류가 변화하는 부분, 그 어디에도 방점을 찍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언제 어디서부터 변화되었는지, 나도 관객도 모르게…. 사실 굳이 알려하지도, 굳이 계산하려고 하지도 않았어요. 이 영화는 그런 영화가 아니거든요.” 대사도 없는 빈 여백을 어떻게 채워나갈까, 혼자 짊어진 많은 신들은 어떻게 만들어낼까. 외로움도 절반, 즐거움도 절반이었던 촬영장이었다. “대사가 없으니 오히려 기가 많이 뺏겨요. 한순간도 뱉어내지 못하고 머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어휴, 진이 빠지는 연기였죠. 살도 쭉쭉 내렸고… .” 쾌감이 거세된 복수는 처연하다. 자살한 누나를 안고 “어어억… 꺼어억” 울부짖던 류가 장기밀매업자를 찾아내 살해하는 대목에서, 옆구리가 열리고 창자가 쏟아지는 잔혹함에 눈살이 찌푸려지기보다 그 모든 행위들이 왠지 서글퍼지는 것도 그런 이유다. 사랑은 모방이라 홍상수 감독이 말했던가. <복수는 나의 것>에 출연하기까지를 묻는 질문에 신하균은 신년호 배두나와의 인터뷰에서 들었던 똑같은 대답을 날린다. “이런 시나리오가 다른 데 안 가고 저한테 처음 와서 참 다행이에요.” 촬영이 끝난 뒤 사랑을 꽃피운 이들이라지만, 이미 캐스팅 단계부터 무언가 강한 운명의 끈이 서로를 이끌었던 것일까. “여배우들은 아무래도 어렵잖아요. 말 한마디 건네기도 조심스럽고…. 게다가 형들하고만 작업해오다가 나보다 어린 여배우와의 작업이라니 왜 걱정이 없었겠어요. 하지만 그런 우려는 첫촬영부터 깨졌어요. 사람들이 편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배려하는 모습이랄까, 똘똘하게 자기 역할 잘해내는 모습이 기특해보이기도 했어요. 그리고 시나리오에서 잘 보여지지 않았던 영미라는 캐릭터가 영화에서 그만큼 드러난 것도 배두나였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경찰로 가득 찬 엘리베이터 안, 이미 시체가 된 영미는 들것에 누워 세워져 있고, 도피중인 류는 흘러내린 시트 사이로 드러난 죽은 영미의 얼굴을 본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옆구리를 누른 채 시트사이로 몰래 영미의 손을 움켜쥐는 류. ‘비정하기 짝이 없는’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감상적인 이 엘리베이터 신은(어린 연인들을 향한 박찬욱 감독의 배려라고까지 느껴지는) 그 어떤 멜로영화 이상으로 짠한 아픔을 전달한다. “홍콩영화라면 바로 시체 들쳐업고 오토바이 태우고 달려가야 되는데…. 그래, 영미야! 이제 니 복수는 내가 해주마! 하고….” (웃음) “이제 신하균을 다른 사무실에 고가에 파는 일만 남았다.” 그의 오랜 벗인 장진 감독의 짓궂은 농담은 그의 가치가 어느 정도 고속성장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충무로 제작자들 사이에서 “캐스팅하고 싶은 배우” 1순위에 올라 있는 신하균에겐 <복수는 나의 것> 개봉 즈음에 이미 대부분의 촬영을 마친 차기작 <서프라이즈>를 포함해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가 촬영을 기다리고 있고 광고, 뮤직비디오 등의 제안 또한 끊이질 않는다. “이제 새로운 부담감이 생겨요. 그 전에는 별로 설명하고 말하지 않아도 나를 잘 알고 통하는 사람들과 작업해왔다면, 갈수록 그런 건 기대하기 힘들겠죠? 하지만 추구하는 바가 통하는 상대를 만날 수 있는 상태를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제 몫인 것 같아요.” 물론 5월에 개봉하는 ‘필름있수다’의 상업단편프로젝트 <사방의적>(가제)에선 노개런티로 출연했고, 11월이면 장진을 비롯한 수다의 형들과 함께 연극을 올릴 테지만, 그를 키웠던 항구는 어서 빨리 새로운 항해를 떠나라고 등을 떠밀 것이다. “쭉 이렇게 연기하고 밥벌어먹고 살고 싶어요. 나중에 아기분유도 연기해서 번 돈으로 사고… 하하하.” 그의 소박한듯 의미심장한 바람은 성사될 가능성이 충분해 보인다. 극중 영미의 말을 빌리자면 “백푸로… 확실히…”.

할리우드가 투자 · 배급하는 <실미도> 제작하는 한맥영화 대표 김형준

“축하합니다. 할리우드가 투자, 배급하는 첫영화의 프로듀서가 되셨네요.” 처음에 한맥영화 대표 김형준(43)씨는 콜럼비아 한국 지사장 권혁조씨의 전화가 무엇을 뜻하는지 감을 못 잡았다. 요즘처럼 투자사가 즐비한 시대에 직배사가 투자한다는 것 자체가 큰 뉴스는 아니다. 그러나 이번 결정이 본사 차원에서 진행된 것이고 연출자로 강우석 감독이 나섰으며 시네마서비스가 국내 배급을 한다면 얘기가 조금 다르다. 한마디로 <실미도>는 한국영화의 해외진출을 가늠할 또 다른 시금석인 셈이다. 제작자인 김형준씨로서는 감회가 새롭다. <동감> 이후 2년 만에 제작하는 작품이며 1990년대 초부터 부침을 거듭한 자신의 영화사업에서 비로소 결실을 맺을 기회인 것이다. <실미도> 외에도 그는 올해 한국영화 3편을 제작할 계획이다. “올해는 파워 50위 안에 들어야될 텐데…”라는 말도 그냥 해보는 소리 같진 않다. 김형준씨에게 2002년이 어느 해보다 바쁜 한해가 될 것은 분명해보인다. <실미도> 프로젝트는 언제 어떻게 시작된 기획인가. 실미도 사건을 영화로 만들려던 사람들은 예전부터 많이 있었다. 영화세상 안동규 대표가 김영빈 감독과 함께 10년 전에 만들려고 했던 적도 있고 김종학 프로듀서도 준비했던 걸로 알고 있다. TV드라마에서도 잠깐 등장했고. 그러나 내가 실미도 사건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3년 전이다. 처음엔 제작자인 임상수씨가 백동호씨의 소설 <실미도>를 건네주며 어떠냐고 물었다. 나는 그걸 극동스크린 대표 김승씨에게 보여줬는데 열흘 뒤에 김승씨가 작가와 계약했다며 들고 왔다. 그러면서 극동스크린에서 진행했는데 일이 진척이 안 됐다. 우여곡절이 많은데 김호선 감독이 연출한다고 기사가 나기도 했다. 다시 내게 넘어온 것은 지난해 초였다. 시나리오가 6가지 버전으로 만들어졌는데 역사적 사실을 픽션으로 다시 만든다는 게 그리 쉽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타이타닉>이 모범적인 사례라고 생각해서 멜로적 요소를 많이 담으려고 했다. 콜럼비아 영화사가 투자하게 된 것은 어떤 계기였나. 콜럼비아 한국 지사도 4년 전부터 한국영화를 제작하려고 했다더라. 우리 영화사에서 준비하는 작품들 시나리오를 콜럼비아 권혁조 사장에게 보여줬는데 다 마음에 들어했다. 나는 시나리오를 쓰면 영문번역까지 미리 해놓는 편인데 특히 <실미도>에 관심을 많이 보였다. 권혁조 사장이 본사에 보내보겠다고 했고 그뒤 2달간 소식이 없었다. 지난해 12월에 본사에서 회의를 했는데 투자 결정이 났다는 연락이 왔다. 감독을 구하는 게 문제였는데 연출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았다. 강우석 감독을 만난 것은 2주 전이다. 시나리오를 읽어보더니 “하고 싶긴 한데 지금 시네마서비스 합병 직후라 남의 돈 받아서 다른 회사 작품을 연출하긴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서 콜럼비아에 다시 확인해봤다. 국내 배급을 시네마서비스로 해도 되겠느냐고. 콜럼비아에서 오케이했고 그러자 강우석 감독도 하겠다고 나섰다. 수익배분은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나. 소니픽처스와 한맥영화가 전세계 배급에서 나오는 수익을 50 대 50으로 나눈다. 한국 배급은 시네마서비스가 맡고 소니픽처스는 해외 배급 수수료를 경비에 포함시켜 수익을 계산한다. 제작비 규모가 정확히 나오지 않은 상태라 앞으로 어떤 변동이 있을 수는 있다. 예를 들면 시네마서비스가 추가 투자자로 나선다든가 하는. 연출자로 강우석 감독을 점찍은 이유는 무엇인가? 평소의 친분이 작용한 것인가. 두 가지를 눈여겨봤다. 첫번째는 그의 연출력이다. <공공의 적>을 보면서 강 감독이 이 정도 코미디를 연출할 수 있다면 정극도 분명 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두번째는 강 감독이 아직 성취하지 못한 것을 이루도록 돕고 싶었다. 누군가 딴 감독이 <실미도>를 연출해서 한국을 대표하는 상업영화 감독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한다면 강 감독은 자신이 했으면 하고 많이 아쉬워할 사람이다. 나는 강 감독이 승승장구하는 걸 옆에서 지켜보면서 지금까지 한번도 손 벌려본 적이 없다. 이광훈 감독의 <천년호>를 제작하려고 시네마서비스와 공식적인 관계를 맺어봤는데 일하기 편한 사람이었다. 강우석 팬이 아니라 강우석 편이 됐다. 실제 실미도 사건과 영화가 어떻게 같고 다른지 궁금하다. 실미도 사건은 71년 8월23일 일어났다. 박정희 정권이 만든 대북침투부대가 대통령 면담을 하겠다며 서울로 오다가 대방동 유한양행 앞에서 교전 끝에 전원 폭사한 사건이다. 이 부대가 만들어진 것은 김신조 등 북한 무장공비들이 청와대로 침투하다 사살된 사건이 일어난 직후였다. 당시 사형수 31명을 뽑아 실미도에서 특수훈련을 시켰다. 3년간 비인간적인 훈련만 받던 그들이 탈출을 기도했던 것이다. 영화는 실화에 멜로드라마적 설정을 더할 계획이다. 당시 사건이 남긴 몇 가지 의문점에 대해서도 영화적 해석을 내릴 것이다. 시나리오는 이미 나와 있는데 촬영 준비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강 감독이 다시 각색을 하고 있고 실미도 헌팅도 시작했다. 과거 국방부 소유였던 실미도가 지금은 사유지가 돼서 협의할 일이 많다. 스탭 구성은 대충 이뤄졌다. <공공의 적> 제작진이 대거 참여할 것 같고 촬영은 <상하이 트라이어드>와 <인생>을 찍은 루예, 무술감독은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에 참여한 위엔탁이 하기로 했다. 8월에 촬영에 들어가서 여름, 가을, 겨울 사계를 담아 내년 2월까지 찍을 예정이다. <실미도> 얘기는 그만하고 개인적인 얘기로 넘어가보자. 김 대표는 어떻게 영화일을 시작하게 됐나. 사실 난 대학에서 재정학을 공부했던 사람이고 영화를 하리라고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던 사람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미국에서 살았는데 삼촌이 현진영화사를 하고 있었다. 현진영화사는 배창호 감독의 <꼬방동네 사람들>, 이장호 감독의 <일송정 푸른 솔은> 등을 제작한 영화사로 80년대 초부터 활동했다. 미국에 있으면서 현진영화사의 영화 수입을 도와줬는데 그러다가 점점 영화일에 깊이 개입하게 됐다. 처음 제작과 관련된 일을 한 것은 <미스터 맘마> 시나리오를 쓴 것이다. 강 감독이 채 완성도 안 된 <미스터 맘마> 시나리오를 보고 영화로 만들어버렸다. 처음 제작한 영화가 <가슴달린 남자>인데 이 영화도 내가 시나리오를 썼다. 시나리오를 쓰다가 제작자가 된 경우는 많지 않은데 어떻게 시나리오 쓰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나. 사실 미국에서 오래 살다와서 한글을 잘 몰랐다. 처음 시나리오 쓴 거 보면 철자법도 틀리고 가관이었다. 영화 수입하고 자막 번역하면서 시나리오를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 거 같다. 당시까진 지문이 많이 들어간 시나리오가 거의 없었는데 나는 지문이 많이 들어간 시나리오를 썼다. 묘사가 자세하니까 연출하기 좋은 점이 있었을 거다. 그렇게 해서 <미스터 맘마>가 영화로 만들어지는 걸 보니 자신감도 생기고.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같은 영화를 수입해서 번역하는 일을 했는데 내가 번역한 대목에서 관객이 웃으면 내가 웃긴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왜 딴따라 하려는지 알겠고 이래서 창작을 하고 제작을 하고 연출을 하는구나 싶더라. <가슴달린 남자> 이후로 <사랑하기 좋은 날>을 만들었고 한동안 슬럼프였다. <사랑하기 좋은 날>이 흥행에서 실패하고 <피아노맨> <죽이는 이야기>까지 내리 흥행이 안 됐다. <죽이는 이야기>가 치명적이었는데 투자사가 손을 떼는 바람에 손해를 혼자 고스란히 안아야 했다. 마침 IMF가 터진 때라 차비가 없어서 길바닥에서 잔 적도 있다. 그뒤로 만든 영화가 <링>과 <동감>인데 최근 2년간 제작한 영화는 없었다. 여전히 만회가 힘들었던 시기였나 보다. <약속>과 <거짓말>도 사실 내가 제작하려고 준비하다 회사 부도나는 바람에 신씨네로 넘어간 프로젝트들이다. 97년에 수입, 배급한 <지아이 제인>이 성공해서 좀 숨통이 트였지만 <링>과 <동감>을 제작한 뒤로 수입, 배급한 영화 8편의 흥행성적이 신통치 못했다. <겟 카터> <패밀리맨> <브링 잇 온> <기프트> 등의 영화인데 특히 이 타격이 컸다. 당시엔 최소 한달에 1편씩 배급하는 회사를 목표로 삼고 있어서 외화 수입을 많이 했다. 지금은 다른 회사들이 잘 하고 있으니까 내가 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돌이켜보면 내가 영화사업 하면서 날린 돈이 100억원쯤 되지 않나 싶다. 아버지가 예전에 방위산업체를 운영해서 돈이 좀 있었는데 이래저래 다 써버린 셈이다. 올해가 한맥영화로서는 대단히 중요한 시기인 거 같다 올해는 파워 50위 안에 꼭 들어야 할 텐데. (웃음) <실미도> 외에 이광훈 감독이 연출할 <천년호>가 있고 송경식 감독의 <대한민국 헌법 제1조>가 있다. 공동제작하는 <개밥그릇>이라는 영화도 있고. 모두 4편인데 사실 내 꿈은 한국 감독 데리고 할리우드에 가서 영화 만드는 것이다. 우리 문화가 해외에 나가서 팔려야지 지금처럼만 하면 동네잔치밖에 안 된다. 제작자로서 큰물에서 놀 수 있는 발판을 만들고 싶다. 그런 면에서 <실미도>를 하는 것은 큰 짐을 지는 일이다. 내가 잘 못하면 다음 기회가 없어질 것이라는 부담이 크다. 콜럼비아 입장에서 보면 내가 돈을 벌어줘야 한국영화에 계속 투자할 게 아닌가. 글 남동철 namdong@hani.co.kr·사진 정진환 jungjh@hani.co.kr

김은형의 오! 컬트 <플란다스의 개>

지난해 ‘씨네21이 틀렸다’라는 창간특집을 읽고 난 다음 <플란다스의 개>를 봤다. 실은 봐야지, 봐야지 노래만 하다가 텔레비전에서 방영할 때야 봤다. 그냥 봤다고 하면 될 걸 자랑도 아닌 나의 게으름을 늘어놓는 이유가 있다. 2000년 초 개봉 때 봤다면 무심코 지나갔을지 모를 반가운 얼굴을 만났기 때문이다. 나는 현남이의 친구를 연기한 고수희씨의 열렬한 팬이다. 이 영화가 개봉한 지 1년 뒤쯤 이 배우의 팬이 됐으니 결과적으로 나에게는 나중에 비디오로 보는 게 훨씬 좋았던 셈이다. 고수희씨에게는 조금 미안한 이야기가 될 수 있지만, 내가 그녀에게 반한 건 그녀의 고향이면서 주무대인 대학로가 아니라 시트콤 <세친구>에서였다. 고수희는 <세친구>에 조역으로 여러 번 등장했다. 그중 인상적인 에피소드를 하나 들자면 헬스클럽에 다니기 시작한 고수희가 윤다훈에게 끈끈한 눈길을 보내자 이를 포착한 안연홍과의 한판 대결이었다. 알겠지만 안연홍이 연적들과 싸우는 장면은 대체로 ‘노려본다’→‘함께 화장실 간다’→‘상대방의 처참한 몰골 클로즈업’으로 끝난다. 그런데 고수희의 건장한 체격에 주눅든 안연홍이 이번에는 읍소작전으로 나갔다. “흑, 전 이미 윤 실장님에게 순결을 바쳤어요.” 심드렁한 표정의 고수희는 가느다란 담배를 피워 물며 ‘쿨’하게 응답한다. “어쩌라고∼.” 이 장면에서 나는 그녀에게 뿅 갔다. 대본작가에 힘입은 바 크겠지만 고수희에게는 여느 뚱녀 코믹 캐릭터들과 달리 기품이 있어보였고, 귀여운 섹시함도 살짝 느껴졌다. 그녀라면 밥을 솥째 들고 먹거나, 남자한테 눈길 한번 받는 것만으로도 턱이 땅 끝까지 떨어지는, 식상한 뚱녀 캐릭터 따위는 도도하게 거절할 것이라 믿어졌다. 정치적으로 올바르다는 것이 아니라 드라마 속 고정관념의 허를 찔렀다는 면에서 그녀의 등장은 신선하고 통쾌했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그녀는 나를 배반하지 않았다. 현남 친구 뚱녀를 연기한 고수희는 배우 이름순으로는 이성재, 배두나, 변희봉, 김호정에 이어 다섯번째로 등장하는 주요 배역이었다. 이모가 운영하는 작은 문방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그녀는 신문의 낱말맞추기와 간간이 즐기는 ‘옥상담배’맛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청춘이다. 뚱녀는 퍼즐 정답 ‘결초보은’을 ‘결초보훈’이라고 생각하는 현남에게 “야, 이 무식한 년아”라는 욕을 서슴지 않지만 먹은 걸 다 토하고 자신에게 기대 잠든 현남의 머리카락을 얌전한 손길로 추스려주는 아이다. 둘은 동네 통닭집에서 맥주를 마시고 장난삼아 주차된 차의 옆거울을 떼어 훔쳐 달아나기도 하고, 그 좁은 문방구 안에서 음악을 틀어놓고 술을 마시며 춤을 추기도 한다. 그 모습은 우스꽝스럽고, 사랑스럽고, 쓸쓸하다. 특히 둘이 작은 배낭을 메고- 그 속에 들어 있는 훔친 옆거울을 꺼내 보며 손거울인 양 얼굴 매무새를 고치기도 한다- 산에 오르는 마지막 장면은 그들을 비추는 가을볕처럼 너무나 허허롭고도 아름다워서 그대로 포스터에 담아 벽에 걸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이러한 현남과 뚱녀의 장면들만 떼어놓는다면 <플란다스의 개>는 <고양이를 부탁해>의 사촌언니뻘쯤 되는 스무살 여자애들의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우리 주변의 스무살 가운데는 팔등신의 지영이나 혜주보다 건장한 뚱녀를 만나기가 더 쉽다는 점에서 <플란더스의 개>는 <고양이…>보다 사실적인 이야기일 수 있다. 남자배우들에 비하면 여전히 여자배우들의 외모에는 엄격하고 연기에는 관대한 충무로에서 내가 본 고수희씨가 살과 완전히 무관한 역할을 맡기는 당분간 힘들 것 같다. 그러나 나는 <플란다스의 개>에서처럼 살보다는 눈빛과 표정이 도드라지는 그런 연기를 하는 그녀를 어서 만나고 싶다. 정치적으로 올바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이상 지겹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김은형/ <한겨레21> 기자

<퓨처라마>(Futurama)

1999년, 감독 매트 그로닝 장르 애니메이션 (폭스) 미래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이미 수많은 영화와 만화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미래세계는 호기심을 자극한다. 미래사회는 이렇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 첫소설은 휴고 건즈백의 (Ralph 124C41+, 1911)이었다. 미래사회의 이런저런 풍경들이 그려진 그 소설이 1911년에 발표되었다는 사실에 더욱 놀랐다. 상상력이란 가지고 있는 지식에 기반하기도 하지만, 기존의 상식과 발상을 도발했을 때 더욱 놀라움을 준다. 발랄하고 때로 기괴한 상상력은 철저하게 논리로 다듬어진 ‘예측’보다, 아름답고 또 황홀한 느낌을 준다. <심슨 가족>의 창조자 매트 그로닝이 만든 <퓨처라마>는 ‘상상력’이란 점에서, 정말 엽기적이다. 로봇이 사는 집은 관을 수직으로 세워놓은 듯한, 성인 남자 세명이 들어가면 꽉 차는 공간이다. 음 그렇군, 하며 보는데, 갑자기 로봇이 ‘벽장이 있다’고 말하며 문을 연다. 그 안에는 보통 아파트만한 공간이 텅 비어 있다. 단순한 발상의 역전이지만 이런 작고 도발적인 상상력이 <퓨처라마>의 윤기를 더해준다. <심슨 가족>에서 기상천외한 가족의 캐릭터가 벌이는 진기한 사고들을 거침없이 펼쳐보였던 매트 그로닝은, <퓨처라마>에서 시공을 초월하며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미래의 파노라마를 깔끔하게 전개한다. 1999년 12월31일 집도 없고, 애인은 바람나고, 자전거도 도둑맞은 프라이는 인간냉동보존 연구소에 피자배달을 간다. 사고로 냉동이 되어 1천년 뒤에 깨어난 프라이는 외눈박이 외계인이자 공무원인 릴라를 만난다. 릴라는 유전자로 직업을 결정하고, 몸에 그 직업 칩을 박는 일을 하고 있다. 새로운 인생에 고무되어 있던 프라이는 다시 배달부로 직업이 나오자 도망을 친다. 도중에 골통 로봇 벤더를 만나 친구가 되고, 프라이를 쫓던 릴라는 획일적인 삶에 환멸을 느껴 칩을 빼버리고 팀에 합류한다. 직업이 없어 체포될 위기에 놓인 프라이 일행은 유일한 친척이라는 판스워드 교수를 찾아간다. 그리고 판스워드 교수가 운영하는 플래닛 익스프레스에 취직을 한다. 프라이가 어릴 때부터 원하던 ‘우주 여행’을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의 공식적인 직업은 여전히 ‘배달부’. 아무리 위험한 외계의 행성이라도, 절대로 사고없이 화물을 운송하는 직업이다. 이번에 나온 <퓨처라마>는 <웰컴 투 퓨처>와 <릴라는 원더우먼>, 두편이다. 프라이가 천년 뒤의 세계로 가는 에피소드로 시작하여 달세계여행, 외계판 노아의 방주사건, 로봇 행성 등 황당한 사건들을 담고 있다. 1999년 방영이 시작된 <퓨처라마>는 에미상 2개 부문을 수상했고, 2000년 피플스 초이스 어워드 ‘가장 좋아하는 신설 시리즈’ 후보에도 오르는 등 여전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심슨 가족>의 미래판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놀라운’ 애니메이션. 김봉석/ 영화평론가 lotusid@hanmail.net

커피 한잔 더 드릴까요? <카페 알파>

상업애니메이션, 특히 일본 애니메이션들은 소비자(시청자)의 시선과 관심을 얻어내기 위해 전개속도나 이미지의 전환이 매우 빠른 작품이 주류다. 15분에서 5분 정도에 한 에피소드가 끝나는 경우가 많다보니 스토리는 더욱 가팔라지게 마련이다. 이렇다보니 많은 애니메이션들이 캐릭터의 매력에 의존한 코믹물이나 현란한 액션이 가미된 로봇 및 SF물로 제작되고 있다. ‘멸망해가는 고도 문명사회’와 ‘여자 로봇’이라는 소재가 등장하는 애니메이션을 만든다면 어떤 작품이 나올까. 아마도 시로 마사무네의 <공각 기동대>나 <애플시드> 같은 액션물이나 <메트로폴리스>나 <로봇 카니발> 같은 문명비판적인 SF판타지물이 되는 것이 기본일 것이다. 하지만 아시나노 히토시의 원작만화 <요코하마 쇼핑 기행>(국내 소개명 <카페 알파>)을 바탕으로 제작된 동명 애니메이션에서는 이 두 가지 요소가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그 흔한 총격신이나 격투신이 등장하지 않는다. ‘조용히 종말해가는 세상’으로 표현된, 점점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일본의 모습은 일반적으로 상상되는 파괴된 거대한 마천루 숲이나 각종 기계의 잔해들의 모습이 아닌 한적한 시골 풍경 그대로. 주인공인 로봇 ‘알파’ 역시 엄청난 괴력을 지녔다든지 눈에서 광선이 나오는 이미지가 아니라, 커피와 물고기장식은 좋아하지만 육류나 우유는 못 먹고 가끔 추억에 울고 웃는 지극히 ‘인간’다운 모습으로 나온다. 알파는 주인이 멀리 여행을 떠나버려 혼자서 자신과 똑같은 이름을 지닌 카페를 지킨다. 카페는 몇 안 되는 동네사람들 이외에는 거의 손님이 없는 한적한 곳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알파는 가끔씩 스쿠터를 타고 동네 근처를 돌아다니거나 생필품을 사러 인근 시장에 가는 것 외에는 원두를 갈아 자신이 마시는 커피를 만드는 게 일이다(이 카페에서 만들어지는 커피의 80%는 알파가 마신다). 1번째 에피소드인 ‘오전2/2’와 2번째 에피소드인 ‘오후1/1’에서 약 20분간 벌어지는 스토리라고 해봤자, 코코네라는 로봇이 중간중간 차를 얻어 타면서 카페를 찾아와 주인의 메시지와 선물을 전해주고는 다시 만날 약속을 하며 떠난다는 평이한 얘기다. 5번째 에피소드인 ‘바람이 불고 있다’에서는 아침에 일어나 마실 커피 타기 위한 준비를 하다가 밤이 되면서 밤바다의 파도소리를 즐긴다는 스토리가 전부. 도저히 상업용 애니메이션이 될 것 같지 않지만, 이 작품을 보다보면 여러 가지 복선과 사고로 어렵게 설명하려던 사람과 사람간의 ‘만남’이나 ‘정’, 그리고 최근 들어서 애니메이션상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여유로움’을 느끼게 해준다. 비록 저예산으로 만들어져 원작의 유려한 풍경이나 여유로운 인물선을 100% 즐기지는 못하지만, 파란 하늘 위로 조용히 흘러가는 구름을 안으며 발길 닿는 데로 스쿠터를 몰고가는 ‘알파’의 모습이나 일본의 유명한 듀엣 기타리스트인 ‘GONTITI’가 프로듀싱한 맑은 배경음악은 원작 팬들이 이 작품에 가지는 애정을 한층 더 높여주는 요소가 되고 있다. ‘알파’가 ‘로봇’으로 설정된 이유는, 바로 ‘인간다움’에 대한 고민과 느릿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하지 않는 ‘여유’와 ‘약속’의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마감에 쫓기는 작가나 기자에게 ‘여유’를 가지라고 하면 화를 낼지도 모르지만 단 몇분, 몇초조차도 참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현대의 생활 속에서 한순간만이라도 하늘을 보고 심호흡을 하는 여유를 가질 수 있다면 세상의 사고의 절반 이상은 줄 것이다. 애니메이션을 보다보면 그 캐릭터나 장면이 오래 남는 경우는 있어도 장소에 대한 집착은 별로 느끼지 않는 편이지만, ‘카페 알파’는 가능하다면 꼭 한번 방문해 그날의 유일한 손님이 되고 싶다. 김세준/ 만화 애니메이션 칼럼니스트 neoeva@hitel.net

한영희 <作家 일흔일곱의 풍경>

한영희는 30년 경력의 사진기자다. 그에게 사진 취재를 당한 적이 한번 있는데, 어찌나 집요하고 주문이 많은지, 화를 내기 직전까지 갔었다. 작가를 배우 취급하다니…. ‘배우’가 ‘작가’보다 낮은 직업이라는 게 아니라, 각기 할 일이 다르다는 뜻으로 나는 발끈했었다. 뭐, 그렇단들, 시‘창작’과 시‘낭독’은 다르다고 아무리 주장한들 축시나 추도시, 기념시를 쓰고나면 어쩔 수 없이 식장에서 읽을밖에 없었던 경험을 숱하게 갖고 있는 나로서야 취재를 거부할 용기는 애당초 없었던 것인지 모른다. 그런데, 그가 찍은 나의 사진을 보니 정말 ‘나에게 예술적’이다. 그의 흔적은 전혀 없고 내가 나에게 나의 풍경을 전달해온다. 대단하다, 참. 당신의 이런 면을 찍은 사진기자 혹은 작가는 없었는데…. 마누라도 영 신기한 모양인지 자꾸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찍은 문인 일흔일곱명의 사진을 모아 얼마 전 책을 냈다. 책 제목은 (과연) ‘作家 일흔 일곱의 풍경’인데, ‘박경리에서 김영하에 이르는’ 시인, 소설가들의 얼굴과 그 표정의 주변을 담은 사진들은 참으로 기묘한 매력을 발한다. 그것은 작가 내면의 풍경화라는 말로 매우 부족하다. 풍경의. 분위기가 아스라이 흩어질 듯하면서도 ‘풍경 자체의 깊이’를 심화시키는데, 마치 작가의 글쓰기와 맞먹는 ‘사진 쓰기’를, 그것도 글-시간적인 매력을 능가하는 사진-공간적으로 펼치는 속으로 내가 빨려가듯, 그렇게 (나의 혹은 사진 주인공의)글-사진 쓰기와 회오리 바람으로 아니면 격렬한 섹스로 뒤섞여드는 듯하다. 남녀노소 불문이고 미추 불문인 그 ‘합쳐짐의 혼미한 감격’ 어디쯤에서 ‘문학-예술 궁극의 목표는 성(性)의 극복’이라는 명제가 완성될 듯, 아니 이미 오래 전에 완성된 듯싶다. 77명 중에 반은 내가 잘 아는 사람들이고 반의반은 대충 아는 사람, 나머지는 모르는 사람들이다. ‘잘 아는’ 경우 낯익음이 와락 징허게 밀려오는데 그게 언뜻 낯설지만 그것을 압도하며 감동적이다. ‘대충 아는’ 경우 대충 안다는 사실이 죄송할 정도로 뭔가 뿌듯한 ‘노역의 기쁨’이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밀려든다. ‘모르는’ 경우는? 낯섦이 편안하다. 아주 오래 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것을 나는 ‘오래된, 다정한 모뉴멘털리티’라 부르고 싶다. 그리고, 그러나 압권은 공지영과 조경란의 사진, 여성문학이 한때의 유행이나 ‘베스트셀러물’이 아니라 간고하고 따듯한, 헐벗고 풍성한 존재의 한 본질이라는 점을 이토록 극명하게 표현한 ‘논문’을 난 본 적이 없다. 덤으로, 황지우 글도 근래 드믄 명문. 김정환/ 시인·소설가 maydapoe@thrnne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