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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까불지마>로 감독데뷔 오지명

“아, 영화봤어요? 어때, 후지지?” <까불지마>로 감독 데뷔한 배우 오지명(65)씨는 오랜 코믹 연기의 관록에서 나온 것인지 “후지니까”, “쭈글쭈글한 늙은이들”, “칙칙하잖아”라는 표현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주 썼다. 여느 감독이 자신의 작품이나 배우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좀 당황스러웠겠지만 오히려 킥킥 웃음이 나왔다. 본심이라기 보다는 쑥스러움에서 나온 표현일 터이다. 시사회 때 “보기 민망해서 앉아있기도 뭐하고 그냥 들락날락하며 담배만 피웠다”는 말을 들으니 심증이 굳어졌다. 세명의 중년건달 좌충우돌 그가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까불지마>는 15년 동안 감방생활을 같이한 중년의 두 건달과 똘마니가 유명 가수의 보디가드가 되면서 벌어지는 좌충우돌 이야기를 담은 영화. 세련되거나 ‘웰메이드’하지는 않지만 권위 따위는 저 멀리 내던져버리고 팔랑팔랑 뛰는 “늙은이”들을 보는 게 의외로 즐겁기도 하다. “본래는 감독이 아니라 제작을 한번 해보려고 했어요. 큰 화면에서 내 코미디를 한번 보여주고 싶은 욕심도 있었고. 근데 감독 구하기가 쉽지 않더라고. 투자사에서 직접 해보라고 제안을 받았는데 뭐 그냥 너나나나 하면 되는 거지 별거 있겠냐 편하게 생각하고 덤벼들었지. 처음에는 좀 텃새도 받고 했는데 재미있고 보람도 있더라고.” 감옥에서 나온 세 명의 중년 건달이라는 설정은 몇 년 전 그가 출연을 제안 받았던 작품에서 따왔다. “그때는 코미디도 아니고 해서 거절했는데 마침 생각이 나서 제작사(씨네월드)에 전화를 해봤지. 선뜻 가져가라고 하길래 고마워서 <황산벌>에 출연했던 거예요.” 함께 출연한 최불암씨는 “다들 연극무대에서 방송으로 떠날 때 끝까지 버티다가 제일 마지막에 함께 간 동료”라는 각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다. 최불암은 코미디 더 해야하는데 “나는 최불암이가 좀 더 코미디를 해주길 바랐는데 영 민망한지 버티더라고. 그게 좀 아쉽지. 그래도 감독이 돼 보니까, 배우를 존중하게 되더라구. 텔레비전 할 때 PD가 배우들 의견 안 듣고 일방통행 하는 게 못마땅했었거든.” 노주현씨를 섭외한 건 “최불암하고 내가 구질구질하고 칙칙해 보이니까, 화면이 좀 훤해지는 뺀질한 인물을 넣자는 생각”에서였는데 노씨는 도리어 본인에게 코미디 분량이 적은 게 불만이었다고. 그가 연기한 ‘개떡’은 그가 출연해 온 시트콤 캐릭터보다 훨씬 더 주책 맞고 경박스러운 인물이지만 오랫동안 해보고 싶었던 인물이었다고 한다. “좀 모지라고, 말주변도 없고, 그런 게 나랑 비슷하지. 그래도 그런 사람들이 욕심도 많지 않고, 순수하잖아요. 난 그런 게 좋아” 내가 이래봬도 액션배우 출신 젊은 관객들에게는 이 영화에서 오씨의 격투 연기가 생경해보이겠지만, 그는 “맨날 치고 받기만 하고, 돈도 별로 안줘서” 70년대 중반 영화계를 떠날 때까지 십년 동안 150편의 액션영화를 찍은 ‘액션스타’출신이다. <까불지마>의 목욕탕씬에서 60대 같지 않은 ‘갑빠’를 보여주는데 그 비결을 물으니 “운동은 뭐, 그냥 삐끗하는 거 방지하는 정도로 집에서 스트레칭 정도만 하지”라고 다시 쑥스러운 듯 팔을 내저으며 답했다.

건강검진

40 중반을 넘기면서부터 나는 아내의 손에 이끌려 2년마다 한번씩 건강검진을 받으러 병원에 가는 신세가 되었다. 혈관과 간에 문제가 있던 분의 아들이고, 그 유전적 기질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일 중독자에 각종 기호품의 중독자인 나로서는 싫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중년의 나이로 건강검진을 받다보면 사람이 산다는 것의 구차함을 새삼 느끼게 된다. 낯선 의사 앞에서 옷을 벗어 평소에 나 자신조차 잘 들여다보지 않았던 내 몸을 드러내야 하고, 보이지 않는 몸의 구석구석에 카메라와 집게가 달린 호스를 꾸겨넣어야 하고, 나밖에는 아무도 볼 일이 없는 액체와 분비물들을 뽑아서 이름 석자가 적힌 통에 담아 제출해야 한다. 남에게 보여주지 않던 것들을 보여주는 이 과정들은, 당하는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압수수색이고 능욕이다. 다만 나는 그것을 자발적으로, 게다가 적지 않은 비용을 지불하면서 하고 있을 뿐이다. 내가 어떤 내면세계를 갖고 있는지 사회적으로 어떤 인간인지는 여기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는 뼈와 살로 이루어진 길고 어두운 터널을 갖고 있는 동물, 열량을 섭취 소비하는 메커니즘, 수명이 절반 이상 소모된 중고품 기계로 다뤄진다. 철저한 유물론의 관점에서 정신적인 요소는 심리적 스트레스와 같이 신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소만이 부분적으로 고려된다. 자동차를 점검하는 정비사나 범죄혐의자를 조사하는 수사관의 시선에 나는 내 몸을 맡긴다. 낯선 손길과 이물질들이 마음대로 내 몸을 이리저리 헤집을 수 있도록 그들의 지시에 협조한다. 멀쩡하다가 갑자기 생각지도 않았던 병에 걸려 쓰러지는 경우에 대한 공포가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한다. 주위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우리를 떠나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신문과 텔레비전에서 제공되는 갖가지 의학지식들은 우리의 두려움에 과학적인 근거를 부여하고 그것을 증폭시킨다. 건강검진은 나와 내 몸 사이에 평소와는 다른 관계를 만든다. 잠정적으로나마 우리는 둘로 분열된다. 나의 몸은 나의 일부분이지만 ‘나 자신은 아닌’ 대상물이 된다. 위든 간이든 심장이든 나는 내 속에 있으면서 수십년간 나를 부양해온 나의 충실한 동업자들을 신뢰할 수 없는 모반의 용의자로 취급하는 데 동의해야 한다. 나를 구성하는 일부분으로서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왔던 나의 몸은 검진을 의뢰한 나와 따로 분리되어 관찰과 취조, 분석의 대상이 된다. 영원히 내 편인 줄 알았던, 아니 나 자신인 줄 알았던 몸이 실은 구석구석에서 반란의 음모를 꾸미고 있는 의혹덩어리로, 경계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몸이 획책하는 배신은 통상 내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느리게 진행되는 것이어서 아직 아무 징후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안심할 수 없다. 가능한 모든 부위를 용의선상에 올려놓고 이 잡듯이 수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초음파니 내시경이니 시티촬영이니 하는 첨단 장비와 기술이 이 작업을 돕는다. 몸이 감춰온 모든 것을 백일하에 드러내고 그 결백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검사의 목적은 문제가 될 만한 부분을 미리 발견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반란이 다른 부위로 확산되지 않도록 제거하기 위한 것이다. 위기에 처하면 꼬리를 잘라버리고 도주하는 도마뱀처럼 나의 몸은 제거나 교체가 가능한 부품들의 집합이며, 그것들을 연결하는 메커니즘은 인공적으로 재구성될 수 있다. 검사가 끝나면 나는 다시 내 몸과 평소의 관계를 회복한다. 며칠 자제했던 술도 마시고 서로의 손상된 자존심을 위로한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몸은 그 능욕의 기억을 지우는 듯하다. 그러나 나는 마음 한구석에서 여전히 그것이 언젠가 등 뒤로부터 나를 치리라는 의심을 지우지 못한다. 우리는 몸에 관한한 의처증 환자들이다. 글, 드로잉 안규철/ 미술가

[외신기자클럽] 실속없는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어영화상, (+영어원문)

매년 이맘때쯤 할리우드는 가장 자아도취적인 기간, 바로 아카데미상 시상식에 이르는 기간에 접어든다. 업계 전문지 광고에 거대한 금액이 지출되며, LA와 뉴욕에서 런던까지 시사실 예약들이 꽉꽉 찬다. 이런 모든 대소동에 작은 사이드쇼가 되는 것은 최우수 외국어영화 부문이다. 아카데미상이 그저 지역 행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는 할리우드의 상징적 시도다(사실 지역 행사지만, 이건 나중에 더 얘기하겠다). 아카데미 시상식이 생긴 지 20년 만인 1947년에서야 이 부문이 처음 도입됐다. 첫 수상작은 이탈리아 감독 비토리오 데 시카의 네오리얼리즘 걸작 <구두닦이>(Shoeshine Boys)였다. 그 이후로 가장 많이 수상한 나라는 이탈리아와 프랑스로, 각국이 오스카상 한 다스 정도씩 타갔으며, 부문은 거의 독점적으로 유럽영화에 의해 지배돼왔다. 아시아에서 가장 많이 수상한 나라는 일본으로, 1951년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이 수상한 오스카상 3개는 1951∼55년 4년간 동안 한꺼번에 다 탄 것이다. 45년이 지나서야- 반복하지만 ‘45년’- 아시아영화가 다시 부문상을 수상했다. 2000년, 리안 감독의 <와호장룡>이다. 대만 후보작을 표방했지만, <와호장룡>은 사실상 할리우드 기반의 콜럼비아픽처스가 홍콩지사를 통해 비중있게 투자한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외국어영화치고 미국에서 흥행에 크게 성공한 편이었다. 이 두 가지 사실은 의미가 깊다. 요즘 외국어영화 부문상을 타려면 많은 돈 또는 많은 영향력이 있어야 하고, 강력한 미국 배급사는 거의 필수다. 대부분의 비용을 분담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시스템(텔레비전, 인터뷰 등)을 할리우드 수준에서 활용하고 다루기 위해서다. 외국어영화는 수상으로 이익을 보는 일이 적다(이미 자국에선 개봉이 됐으니). 출품국가의 영화업계를 알리고, 영화를 만든 이들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일 외에는 이득이 없다. 주로 이익을 받는 쪽은 미국 배급사다. 이런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매년 전 세계에 걸친 많은 국가들이 영화를 출품하면서 예술성이나 국내 흥행 성공이나 순수한 애국심으로 승자가 결정되리라 생각한다. 대체로 이런 것은 아카데미의 투표자들에게는 소용이 없다. 이들은 늙어가는 집단으로, 외국어영화 부문에서 유럽영화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유럽을 그림같이 그리며,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영화, 촬영이 잘된 영화- 사실, 유럽을 배경으로 한 할리우드영화와 상당히 비슷한 영화를 선호하는 것이다. 일부 업계 사람들은 이를 깨닫고 있다. 몇년 전 아시아영화 세일즈 대리인이자 프로듀서인 사람과의 대화가 생생히 기억난다. 그의 영화는 높은 평을 받는 예술영화로 그 부문에 출품됐다. 필자는 솔직히 그 작품이 후보에 오를 가망성이 없다고 말했고, 그 세일즈 대리인은 거기에 들어갈 돈을 생각하면서 한숨을 쉬고는 “나도 아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했다. 애국심과 감독의 자존심을 챙겨주는 것은 돈이 많이 드는 일이다. 올해 출품된 49편의 목록 중에 한국 출품작 <태극기 휘날리며>(사진)만 어리석은 선택인 것은 아니다. 전쟁통의 남자들에 관한 영화가 외국어 영화 부문에 수상한 일은 전무하다.(보스니아 작품 <노 맨스 랜드>가 2001년 수상했지만 이는 같은 장르라 하기 어렵다.) 대신, 중국의 이국적인 <연인>이나 스페인의 훌륭한 <더 시 인사이드>(The Sea Inside)나 프랑스의 훈훈한 <레 코리스트>(Les choristes)가 2005년 1월25일 발표될 최종 5편의 후보작에 들어가는지를 살펴보라. 그런데, 어떻게 되든 누가 상관이나 하냐고. At this time of year, Hollywood enters its most navel-gazing period - the run-up to the Academy Awards. Huge sums are spent on ads in trade papers, and screening rooms from Los Angeles and New York to London are booked solid. A small sideshow to all this hoopla is the Best Foreign Film category - Hollywood's token attempt to prove that the Academy Awards are not just a local event. (They are - but more on that subject later.) It was only in 1947, 20 years after the Academy Awards were invented, that the category was first introduced. The first winner was Italian director Vittorio De Sica's neo-realist masterpiece "Shoeshine Boys." Since then the biggest winners have been Italy and France, with about a dozen Oscars each, and the category has been almost exclusively dominated by European films. The biggest Asian winner is Japan, starting with Akira Kurosawa's "Rashomon" in 1951. But Japan won all three of its Oscars during a four-year period, 1951-55. It was to be another 45 years - repeat, 45 years - before an Asian film again won in the category: Ang Lee's "Crouching Tiger, Hidden Dragon" in 2000. Though billed as representing Taiwan, "CTHD" was actually heavily financed by Hollywood-based Columbia Pictures, through its Hong Kong arm. And for a foreign-language movie, the film was also a huge box-office success in the US. Both facts are significant. Nowadays, it takes a lot of money or a lot of influence to win the Foreign Film Oscar, and a powerful US distributor is virtually a requirement, not only for sharing the majority of the costs but also for working the system (TV, interviews) at a Hollywood level. Foreign films benefit little from winning (they've already been released locally), apart from raising the profile of a country's industry and massaging the egos of the filmmakers. The main beneficiary is the US distributor. Despite all that, every year countries around the world submit their movies thinking that either artistry, local box-office success or sheer patriotism will win the day. Mostly, none of these count with the Academy's voters, an ageing group who, with the Foreign Film category, tend to favour movies from Europe that give a picturesque view of the region, are heartwarming, and nicely photographed - in fact, much like Hollywood films set in Europe. Some industry people realize this. I vividly remember a conversation a few years ago with an Asian sales agent/producer whose film, a highly regarded art movie, had been submitted for the category. I frankly said it had no chance of even being nominated, and the sales agent sighed, thinking of the money about to be spent, and said, "I know, but I have to do my best." Patriotism and directors' egos are expensive things to service. This year's South Korean entry, "Taegukgi," is not the only silly choice in the list of 49 foreign movies submitted. There are plenty of other local hits that don't stand the slightest chance of winning, and no movie about men in war has ever won the Foreign Film category. (The Bosnian production, "No Man's Land," which won in 2001, was hardly in the same genre.) Instead, look for titles like China's exotic "House of Flying Daggers," Spain's deeply worthy "The Sea Inside" and France's heartwarming "Les choristes" to make the final five nominations announced on January 25. And who really cares anyway?

제17회 암스테르담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방문기

암스테르담에서는 알겠다. 영화에 반한 그 청년이 왜 그토록 비의 리듬에 몰두했는지를.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 지난 11월18일부터 28일까지 열린 제17회 암스테르담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IDFA)는 비 속에서 개막돼, 오가는 빗줄기에 젖어 있었다. 빗줄기는 그때의 빗줄기가 아니겠지만, 그때의 거리는 곳곳에 남아 있었다. 요리스 이벤스들이 영화에 관한 토론으로 밤을 지샜다던 살롱들이 영화제가 열리는 광장 주변에서 여전히 손님을 맞고, 푸도프킨의 <어머니> 상영을 당국이 금지하자, 이벤스들이 모여 ‘대책회의’를 했다는 아메리칸 호텔에는 다큐멘터리 마켓, 독스 포 세일이 차려졌다. 여전한 것은 또 있다. 현실을, 현실의 변화를 포착하려던 다큐의 정신이다. ‘변화’는 올 IDFA에서 중요한 표제어였다. ‘벽에 붙은 파리처럼’ 현실로 60년대 미국 다큐멘터리사에서 솟아오른 ‘시네마베리테’(혹은 다이렉트시네마) 감독들이 암스테르담에 나타났다. 존 F. 케네디가 말 그대로 새로운 별로 떠오른 민주당 대통령 후보경선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의 고전 <프라이머리>의 존 드루와 리처드 리콕, 앨 메이슬스와 <티티컷 폴리>로 시네마베리테에 합류한 프레드릭 와이즈먼, 그 흐름의 막내 조앤 처칠이 한 테이블에 앉아 벌인 토론은 그 자체로 진기한 광경이었다. 바다 건너 프랑스에서 누벨바그와 시네마베리테의 주인공들이 그랬듯, 이들은 가벼워진 카메라를 들고 ‘현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조용하게, 관찰자로서. “벽에 붙은 파리처럼”이란 좌우명 아래 <해피 마더스 데이> <돈 룩 백> <세일즈맨> <호스피탈> 등 일련의 작품으로 다큐멘터리사의 한장을 만들어냈다. 파리처럼 대상을 지켜보며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포착하겠다는 그들 카메라의 존재가 정말로 대상을 변화시키지 않았을까? 40년 뒤의 토론장에서도 질문은 되풀이됐다. “<그레이가든>의 인물들이 카메라가 없었어도 그렇게 극적인 행동을 했을까?” 앨 메이슬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어리석은 질문이다. 그 모습이 그대로 그들의 현실이다. 카메라가 대상을 변화시킨다고? 그런 일은 없었다.” 와이즈먼과 드루가 동조했다. 팔순의 리콕이 조용히 끼어든다. “페네베이커가 <크라이시스>를 찍는데, 케네디가 힐끗 카메라를 바라보더라는 거야. 그걸 의식하고 있다는 거지. 그래서 촬영을 하다말고 페네베이커가 소리를 죽이고, 카메라 렌즈를 밑으로 숙였다는군. 사람들이 카메라에 반응하기는 해.” 장편 대상, 삼대의 생생한 삶을 포착한 <달의 형상> △ <크라이시스><달의 형상> 네덜란드 감독 레오나르드 레텔 헤름리히의 <달의 형상>은 올해의 개막작으로 초반부터 화제의 초점이 되더니, 장편부문 대상 요리스 이벤스상을 받았다. 어머니가 인도네시아 태생인 감독의 카메라는 어머니의 고향에서 만난 한 가족, 어머니와 아들과 손녀딸 삼대의 삶 속에 깊이 스며들었다. 어머니의 원에 따라 이들은 자카르타의 빈민가로 이사하지만 어머니는 결국 적응하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땅 한뼘 없는 고향, 일감을 찾아 이 논 저 논을 떠도는 생활이지만 감독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달의 형상’은 이슬람의 상징. 어머니는 기독교, 아들은 결혼을 위해 개종한 이슬람 교도다. 극영화보다 삶이 생생하게 포착된 것은 차치하고(다큐멘터리니까) 이야기는 밀도있고, 아름답다. 조너선 스탁과 제임스 브라바존의 <라이베리아, 언시빌 워>는 찰스 테일러 전 대통령이 망명하기 직전의 라이베리아 내전을 현장취재했다. 반군과 정부군 양쪽에서 촬영을 진행하며 내전의 참상을 포착하는 데 성공해 장편부문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았다. 신인상과 단편상 실버 울프 상은 루마니아의 일레나 스탄술레스크의 <다리>와 안드레이 파브노프의 <게오르기와 나비>에 각각 돌아갔다. 관객은 194편의 영화 가운데 댄 올먼, 사라 프라이스, 트리스 스미스 감독의 <예스멘>에 관객상을 보냈다. 언론 자유 그리고 대안의 미디어 시네마베리테 토론장, “마이클 무어의 <화씨 9/11> 이후 미국 다큐멘터리들이 극장 진입에 성공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노 감독들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마이클 무어는 다큐 감독이 아니라 코멘테이터”라고 리콕이, “이같은 현상은 일시적인 것”이라고 와이즈먼이 답했다. 하지만 미국에서 시작된 다큐멘터리의 바람은 IDFA를 고무시켰다. “<화씨 9/11>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앨리 덕스 집행위원장은 “올해는 어쨌든 다큐멘터리의 해”라고 불렀다. △ <다윈의 악몽><끔찍하게 정상적인> <아웃폭스트> (Weapons of Mass Deception: 대량기만무기. 대량살상무기와 이니셜을 같이 한 말유희) <예스멘> <월드 어코딩 투 부시> <대통령 사냥> <콘트롤 룸> 등 지난 미국 대선과정에서 상영된 반부시 다큐멘터리들이 올 영화제의 ‘현실반영’ 부문에 줄줄이 옮겨졌다. 김동원 감독의 <송환> 역시 이 부문에 초청됐다. 대자본에 장악된 미국 주류언론을 비판한 의 대니 셰프터 감독은 “대선에는 졌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다”라고 미국의 다큐 부흥 현상을 가리켰다. “미국인의 70%가 현재의 미디어를 불신하고 있다. 다큐의 성공은 사람들이 주류언론과 다른 미디어에 목말라하고 있다는 증좌다. 한번 인터넷 사이트 미디어채널(mediachannel.org)에 들어가봐라. 1300개의 미디어 그룹이 현재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예스멘>이나 <다윈의 악몽>처럼 세계무역기구(WTO)와 세계화를 풍자, 비판하는 영화들 역시 대안미디어로서 다큐가 지닌 가능성을 확장해가고 있었다. 사적인, 지극히 사적인 다큐의 등장 카메라가 싸졌다. 분쟁과 환경파괴의 현장으로 달려가기에 캠코더는 얼마나 가벼운가. 한편으로 기술의 진화는 사적인, 지극히 사적인 다큐멘터리의 등장을 부추겼다. 칼레스타 데이비스는 25년 전 어린 시절에 당한 성희롱의 상처를 안고 자랐다. 그는 가족의 친구였던 가해자를 찾아가 감춰둔 이야기를 밝히기로 작정한다. <끔찍하게 정상적인>은 그렇게 진행된다. 다큐멘터리는 데이비스가 정신적 상처를 치유해가는 과정이 됐다. 음주와 마약, 폭력으로 얼룩진 청소년기를 보낸 트라비스 클로제의 방황은 아버지의 억압에서 시작됐다.클로제가 이제 아버지가 됐다. 그는 아들에게 자신의 고통을 대물림하지 않으려면 아버지를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수단으로 카메라를 택한다. <아버지에서 아들로>는 그 결과물이다. 덧붙이는 말 다시 리콕. “빌어먹을 방송사를 기웃거리지 않아도 캠코더만 있으면 영화를 찍을 수 있다. 필름으로는 안 돌아간다.” 그런 방송이 다큐멘터리의 근거지가 될 수도 있었다. 올 IDFA에는 ‘톱 10: 야니 랑브로엑’ 부문이 있었다. 30년 이상 텔레비전의 다큐멘터리 선정을 담당해온 랑브로엑이 그 작품 가운데 고른 명편을 여기서 선보였다. 이 주옥같은 다큐들을 텔레비전에서 방영해왔다는 거지! 집행위원장 엘리 덕스 인터뷰 “다큐가 네덜란드 사람의 성향에 맞나 보다” 폐막식이 끝난 다음날, 영화제 본부가 있는 드 발리의 카페는 빈자리가 없었다. 영화제 내내 그랬듯이. 인터뷰를 위해 폐쇄된 프레스센터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인터뷰 도중, <오퍼레이터의 유령>의 여성감독이 이곳까지 찾아와 인사를 한다. “이런 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이 여성이라서 자랑스럽다”면서 덧붙이는 말. “상영이 끝나서 홀가분하게 영화 좀 보려니, 모두 매진이다. 내년에는 표 구하기가 좀더 쉬워졌으면 좋겠다.” 폐막식 뒤 이틀 동안 포스트 페스티벌이 진행되는 상황이었다. “매표가 문제는 문제”라는 집행위원장 엘리 덕스의 말이 행복하게 들렸다. 극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인데 말이다. 요리스 이벤스의 도시라서 이런가. 다큐멘터리는 네덜란드 사람들의 성향에 맞는 영화인 듯싶다. 렘브란트를 봐라. 사실주의를 추구했다. 낭만은 우리 몫이 아닌가보다. 요리스 이벤스 같은 다큐멘터리의 대가가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래서 다큐멘터리영화제를 시작했나. 사실은 젊어서 교육 비디오일을 했는데, 다큐멘터리의 전통이 강한 이 나라 사람들이 다큐멘터리에 관해 잘 모르더라. 그 충격에 영화제를 하기로 했는데, 반응은 차가웠다. 암스테르담 시당국조차 다큐라면 지원이 곤란하다는 거였다. 세명의 여자가 그럼 우리끼리 하지, 하고 시작했다. 상영작이 겨우 40편, 내 나이가 스물일곱이었다. 영화제가 관객을 교육한 건가. 그렇게까지야. 교육이라면, 영화제가 문화정책당국의 지원을 받아 8살부터 18살까지 어린이 청소년을 대상으로 다큐 교육을 한다.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판별시키는 일부터 시작해 리뷰까지 쓰게 만든다. 스스로 생각하는 이 영화제의 성과라면. 전세계 다큐멘터리가 모여 통로를 찾는 장이 되었다는 것. 올해엔 90여개 페스티벌의 프로그래머나 디렉터들이 참가했다. 지지난해 요리스 이벤스상 수상작 <체크포인트>의 경우 세계 67개국 페스티벌이나 텔레비전에 소개되거나 팔렸다. 올 국제 게스트는 2300명으로 로테르담영화제보다 많았다. 매스터 클래스나 디베이트, 토크쇼 등 토론이 참 왕성했는데. 다큐멘터리는 그 자체로서 이미 논쟁이고, 토론은 그 외연이자 목적이다. 세상에는 서로 다른 신념과 종교와 정치적 입장이 엄연히 존재한다. 우리는 그 생각들을 암스테르담에 모두 불러내 대화를 꾀한다. 나치즘과 근본주의까지. 나치즘이라고 말했나. 그렇다. 올해 상영된 <아라키멘터리> 같은 포르노그라피까지. 그 생각들 사이의 차이를 인정하고, 토론을 통해 공통점을 찾아나가자는 것이다. 지난 1998년 얀 프리만 기금을 만들어 개발도상국 다큐멘터리를 지원하는 것도 국가통제만 있고 지원은 없는 나라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다. 그렇게 지원받아 제작된 영화 가운데 27편이 올해 영화제에서 상영됐다. 한국영화의 소개는 부진하다 싶은데. 아, 한국 다큐멘터리의 정보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부산영화제에도 가봤는데, 우리 마감이 끝난 뒤라서 다큐를 가져올 수가 없었다. 돌아가거든 많은 영화와 정보들을 좀 보내달라고 한국 감독들에게 말해주지 않겠나?

한국 온 <카이에 뒤 시네마> 편집장 장 미쉘 프로동

특집기사 준비차 방한한 <카이에 뒤 시네마> 편집장 장 미쉘 프로동 <르몽드>의 영화부문 책임을 맡고 있던 장 미셸 프로동은 2003년 7월 역사 깊은 영화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의 새 편집장으로 부임했다(첫 번째 편집장의 글을 쓴 건 9월이다). 약 1년 반이 지난 지금, 2005년 1월호 특집기사로 한국영화를 싣기 위해 그가 한국에 왔다. 1980년대부터 폭넓게 아시아영화를 주목해온 <카이에 뒤 시네마>의 일관된 편집방향과 한국영화에 많은 애정을 지닌 장 미셸 프로동 개인의 관심이 동석한 결과이다. 4박5일 중 4일째 되는 날 그를 만났고, 개인에 관한 궁금증에서 시작하여 <카이에 뒤 시네마>의 현재, 그리고 한국영화에 관한 의견을 물어보는 자리로 진행되었다. 세계 영화역사의 커다란 사건이자 동력이 되어온 <카이에 뒤 시네마>의 편집장을 만나 밖으로부터 다시 안을 되돌아본다. <씨네21>에 몇 차례 기고한 적이 있지만, 공식 인터뷰는 처음인 것 같다. 우선 개인적인 경력이 궁금하다. 시사 주간지 <르포앵>에서 일하다가 <르몽드>의 영화기자로 옮겼다고 알고 있는데, 언제 어떤 계기를 통해서였나. 사실 영화평론을 하기 전까지 많은 일들을 했다. 10년 정도 대안 교육자로 일한 적이 있고, 사진작가도 했었다. 1983년부터 <르포앵>에 들어가서 영화기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몇년이 지나 <르포앵>의 영화 섹션 책임자가 됐고, 1990년에는 <르몽드>에서 오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있었다. 유력 신문인 <르몽드>에서라면 다른 곳에서 할 수 없는 특별한 기획들을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옮기게 됐다. 13년 동안 그곳에서 영화기자를 했고, 1995년부터는 영화부문의 책임자로 일했다. 그리고 2003년부터 <카이에 뒤 시네마>로 옮겨 편집장을 맡고 있다. 어떤 경로를 통해 영화공부를 해왔는가. 특별히 영화공부를 어떻게 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관객으로서 열심히 영화를 보러다닌 것밖에 없다. 영화평론가가 되겠다거나, 영화에 대한 글을 쓰겠다는 생각을 하기 전인 14살, 15살 때부터 이미 열성적인 영화관객이었다.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본 것이 내게는 가장 큰 공부였다. 한 가지 꼽자면 어린 시절부터 <카이에 뒤 시네마>를 열심히 읽었다는 점이다. 영화에 대한 사유를 바로 이 잡지에서 배웠다고도 말할 수 있다. 영화에 관한 사유와 정치에 관한 사유가 어떻게 어우러질 것인가에 대해 <카이에 뒤 시네마>를 보면서 많이 고민하게 됐다. 말하자면 전형적인 시네필의 길을 걸어온 셈인데, 영화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기 시작한 그 시절에 촉발제가 됐다고 할 만한 작품들은 무엇이 있나. 너무나 많은 영화가 있지만, 굳이 꼽자면 고다르, 펠리니와 파졸리니, 글라우버 로샤, 에이젠슈테인, 프리츠 랑, 오슨 웰스, 그리고 70년대 특히 내게 중요했던 감독은 장 외스타슈, 오시마 나기사 등이다. 말했듯이 2003년부터 <카이에 뒤 시네마>의 편집장을 맡았다. 2000년에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카이에 뒤 시네마>의 전 편집장 샤를 테송은 “2000년 12월31일을 기점으로 <르몽드>의 지분이 82%가 될 것”이라고 말했었다. 당시 <카이에 뒤 시네마>에 어떤 변화의 바람이 일었던 것이며, 현재 <르몽드>와 <카이에 뒤 시네마>의 운영관계는 어떠한 형태로 이뤄지고 있는가. 90년대 말에 <카이에 뒤 시네마>를 둘러싸고 몇 가지 문제들이 생겨났다. <카이에 뒤 시네마>의 주주들이 지분을 팔려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문제는 그 대상이 <카이에 뒤 시네마>를 인수하여 이름은 유지하되, <프리미어>나 <스튜디오>처럼 상업적인 기사들을 실을 욕심을 가진 매체들이었다는 점이다. 알다시피, <카이에 뒤 시네마>는 가장 품격있는 잡지이기 때문에 그 제목과 역사의 무게를 자기들의 장점처럼 업고가면서 상업화할 생각이었던 거다. 그 일로 당시 편집장이었던 세르주 투비아나가 나를 찾아왔고, 다른 언론사로 넘어가지 않도록 <르몽드>가 사달라고 부탁했다. <르몽드>에서 <카이에 뒤 시네마>를 인수하면 적어도 편집권을 보장해주지 않겠느냐고 했다. 나는 몇달 동안 끈질기게 <카이에 뒤 시네마>를 살려야 한다고 당시 <르몽드>의 사장을 설득했다. 몇 개월간의 설득 끝에 지분을 사기로 결단을 내렸지만, 사장은 한 가지 조건을 붙였다. 나보고 <카이에 뒤 시네마>에 가서 편집장을 맡으라는 것이었다. 나는 거절했다. 내가 편집장을 맡기보다는 기존의 편집진에게 편집권을 보장해주는 것이 더 올바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가 98년, 99년쯤이었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서 <카이에 뒤 시네마>는 또다시 여러 문제들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경제적인 문제, <카이에 뒤 시네마>와 <르몽드> 사이의 의견 충돌, 기사에 대한 불만스런 지적 등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그러자 <카이에 뒤 시네마>를 다른 곳으로 팔아버리자는 목소리가 다시 높아졌다. 마찬가지로 이때 사겠다고 나선 매체들은 90년대와 같이 상업적인 목적을 가진 곳들이었다. 그래서 몇달 동안 다시 매달려 팔지 못하도록 설득했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편집장의 자리를 맡으라는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가 2003년 7월1일이었다. 그렇다면 당신이 편집장을 맡은 이후 새롭게 주력한 편집방향은 무엇이었나. 내가 편집장을 맡기 이전에 <카이에 뒤 시네마>는 텔레비전 드라마, 비디오 게임, 리얼리티 쇼, 뮤직비디오 등에 관심분야를 넓혀가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영역을 넓히면서 진짜 다뤄야 할 영화에 대한 관심도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나는 <카이에 뒤 시네마>의 핵심 토대가 여전히 영화라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도 다른 영상물에 대한 기사를 다루기는 하지만, 예전처럼 방향만 넓히는 것이 아니라 영화에 대한 사유를 기점으로 하는 편집방향을 갖고 가려 한다. 물론, <카이에 뒤 시네마>의 역사는 영화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총체적인 영상물에 대한 잡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언제나 갖고 있다 상업적인 고충은 없나. 그 문제는 언제나 있어왔다. <카이에 뒤 시네마>는 잡지와 평론지의 중간 위치에 있기 때문에 일반 잡지보다는 좀 많이 팔리고, 평론지보다는 좀 적게 팔리는 경향이 있다. 그 점에서 <르몽드>의 도움이 크다. 현재 <카이에 뒤 시네마>의 사업 중 중요한 것 하나가 내년 1월부터 인터넷 사이트를 열려는 계획이다. 최초 발행됐던 1951년부터 현재 2004년까지의 모든 글을 읽을 수 있도록 작업 중이다. <르몽드>는 돈을 벌어들이는 수단으로 <카이에 뒤 시네마>를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역사적 위치와 품격을 지키는 정도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그다지 수익성에 연연하지 않으면서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고 있다. 11월호 표지는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열대병>이었다. 개봉작 소개 특집기사 중에서도 이 영화에 대한 할애도가 컸다. 필진 10명 중 6명이 그 영화에 별 넷을 줬고, 그중 한명이 당신이다. 예컨대, 아핏차퐁의 <열대병>처럼 <카이에 뒤 시네마>의 편집진이 공통적으로 관심을 쏟고 있는 아시아 감독은 누구인가. 나뿐만 아니라 우리 편집진은 지난 10년간 세계 영화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일들은 모두 아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판단한다. <카이에 뒤 시네마>는 80년대 이후 아시아영화에 꾸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그것은 지금도 여전하다. 지아장커, 왕빙, 리팅팜, 허우샤오시엔, 차이밍량, 왕가위, 티엔주앙주앙, 기타노 다케시, 미이케 다카시, 그리고 한국의 홍상수 등이 우리의 명단이다.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에 대해서는 개봉 당시 비중있는 기사를 쓴 바 있다. 물론 임권택 감독이 이 명단에 포함된다. 한국영화 특집기사를 준비한다고 들었다. 좀더 구체적인 설명을 부탁한다. 내년 1월호에 낼 생각이다. 한국의 시네아스트들에 대해 자세히 조명하고, 주목할 만한 영화들에 대한 정보를 얻고, 한국의 영화 시스템, 특히 산업적인 시스템과 영화제작 지원부문에 대해 자세하게 알아보는 등등의 총체적인 밑그림을 얻기 위해 왔다. 실제로 한국영화가 프랑스에서 인기를 높여가고 있긴 하지만, 아직까지는 대부분의 관객에게 영화 한편, 또는 감독 한명이라는 식으로 알려져 있는 정도다. 한국영화의 전체 지형도를 그려서 프랑스 관객에게 좀더 심화된 지식을 얻게 해주려는 목적을 갖고 왔다. 또 한 가지, 내년 1월에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한국영화 50편을 갖고 규모가 꽤 큰 회고전을 연다. 알다시피 <카이에 뒤 시네마>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와 협력관계에 있다. 그 회고전을 위한 실무적인 절차들의 처리도 이번 방문 목적 중 하나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영화가 지닌 어떤 요인들이 당신을 이곳으로 불러들이게 된 것인가. 개별로서의 한국영화도 인상적이지만 그보다 나의 관심은 전체로서의 한국영화다. 흥미롭게 생각되는 몇 가지 면면들이 있다. 한국영화는 독창성, 다양성, 역동성을 갖고 있다. 영화제에서 만나게 되는 한국영화들을 보면 예술성을 가지면서도 관객을 외면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발견해내는 점들이 인상적이다. 또 하나는 영화 지원 시스템이다. 프랑스와 똑같지는 않지만 한국은 우리와 유사한 영화 보호 철학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국의 영화를 보호하고 있으면서도, 아시아영화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하고 있고, 그 상황에서 다른 아시아영화들을 도와주고 지원하는 위치에까지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번 취재 기간 동안 어떤 영화감독들을 만났나. 중요성이 아니라 만난 순서대로 이야기하자면 이창동, 임권택, 홍상수, 장선우, 장준환 감독을 만났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독특한 개성을 갖고 있다고 느꼈다. 각자 성향이 매우 달랐고, 하고자 하는 영화가 모두 달랐다. 봉준호, 김기덕 감독 역시 리스트에 있었지만 봉준호 감독은 차기작 준비 때문에 만나기가 어려웠고, 김기덕 감독은 지방에서 강의가 많아서 만날 시간이 없었다. 이번에 취재를 하면서 한국영화에 대해 새롭게 깨닫게 된 점이 있을 것 같다. 예술가들만 만난 것이 아니라 제작자, 배급자, 영진위, 문광부 사람들도 같이 만났는데, 개별 예술세계를 이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한국영화의 포괄적인 시스템을 이해하고자 하는 바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제 등에서는 볼 수 없었던 <실미도>를 DVD로 본 것은 좋은 기회였다. <실미도>가 개인적인 예술세계를 다룬 여타 영화들과 동등한 수준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 영화가 갖고 있는 역사적 중요도에는 관심이 갔다. 그렇게 많은 관객과 만나게 한 방법과 스타일을 고려했을 때 다른 예술영화들만큼이나 중요한 영화라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그게 새로운 경험 중 하나였다. 한국영화에 대한 전반적인 관점이 바뀐 것은 아니지만, 경제적인 측면에 관해서도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그중 하나가 수익구조다. 외국은 수익창출의 구조 중 상영관 이외의 텔레비전이나 DVD의 수익구조가 높은 편인데, 한국은 아직 상영수익 중심이라는 점이 다른 지역과의 차이점인 것 같다. 한국의 시네아스트에 관한 세 가지 질문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임권택 감독에 대한 열렬한 지지자로 알고 있다. 첫 번째, 임권택 감독에 대한 당신 개인의 의견을 듣고 싶다. 개인적으로 임권택 감독의 영화를 좋아한다. 물론 모든 영화를 다 본 것은 아니지만, 그의 영화 대개는 한 국가의 역사를 짊어지고, 역사와 영화가 어떤 관계를 가질 것인가, 영화가 역사에 어떻게 참여할 것인가의 문제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영화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임권택 감독이 99편 모두 걸작이 아니라고 겸손하게 말한 것처럼, 나 역시 내가 본 영화들 모두가 걸작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역사적인 사건을 재현하면서도, 인간 사이의 관계, 종교에 대한 물음, 가족에 대한 성찰 등 한국적인 것들을 다루는 그의 영화는 국가와 민족과 영화와 문명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계기가 되어 내게는 소중하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마치 존 포드가 그의 영화에서 미국을 다루고, 르누아르가 그의 영화에서 프랑스를 다룬 것처럼, 임권택 감독은 그만큼의 무게로 자신의 영화에서 한국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카이에 뒤 시네마> 편집진은 공통적으로 홍상수 감독에게 대단한 애착을 갖고 있다. <카이에 뒤 시네마>는 홍상수 감독의 무엇을 주목하는가. 내가 홍상수 감독에게 깊은 인상을 갖게 된 건 이미 <카이에 뒤 시네마>에 들어오기 전 <르몽드>에서 일할 때 봤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부터였다. 사실 홍상수 감독에 대한 호의적인 시선들은 <카이에 뒤 시네마>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프랑스 비평계의 상당 부분이 그의 작품에 호의적이다. 그가 특별히 주목받는 이유가 있다. 특히 아시아영화가 그런 경우가 많은데, 그는 모던한 질문을 던지는 감독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란 어떤 것인가, 캐릭터란 무엇인가의 규정에서 독창적인 면을 갖고 있다. 인물들간의 심리적인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뿐 아니라, 관객으로 하여금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을 믿어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거리두기를 만드는 새로운 영화체험을 제공하는 영화다. 인간관계, 특히 남녀관계의 이야기를 펼치는 방법은 타 문화권 사람이 봐도 동의할 정도로 예민하고 날카롭다. 말하자면 홍상수는 시네마토그래피의 한 형태를 창조해내는 아주 용기있는 감독에 속한다. 세 번째, 유럽에서 김기덕 감독은 높은 관심의 대상이다. 그러나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만큼은 홍상수 감독에 비교해 김기덕 감독이 덜 다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카이에 뒤 시네마>가 홍상수 감독에 비해 김기덕 감독을 덜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를 비롯해서 <카이에 뒤 시네마>의 편집진이 홍상수의 영화보다 김기덕의 영화를 덜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다. 덜 다루는 이유는 그만큼 덜 좋아하기 때문이다. 물론 김기덕의 영화에는 흥미로운 점들이 많이 있다. 그의 영화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강한 에너지, 그것은 특히 분노, 노여움에 가까운데, 그 에너지를 영화적으로 번역하고 해석하려는 움직임이 있는 영화라고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예술적인 도구들, 장치들이 다소 제한되어 있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김기덕 영화가 무엇을 보여줄 것인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하는 점에서 예측이 가능하다. 물론 김기덕은 관객에게 쇼크주는 것을 잘하는 듯하지만 김기덕 영화 안에서 벌어지는 쇼크들은 사실 좀 제한되어 있는 것 같다. 홍상수 영화의 다양성과 비교할 때 그 쇼크의 효과가 제한적인 것 같다.

한국방송사의 산 증인, KBS 성우 1기생들

“이 자리가 어떤 자리냔 말야? 서울 바닥이 전쟁으로 얼룩진 지금의 이라크 같은 시절에, 남자 열 사람 여자 열 사람이 만나서 오늘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이란 말야. 그래 현명한 친구들은 5년 지난 쯤에 벌써 알아보고 다들 전업을 했는데 병신들만 오갈 데 없어 50년을 한 자리에서 고추 먹고 맴맴 했다. 자기 책상 하나 없이 외투 입은 채로 밤낮 뜨내기처럼 왔다갔다 하면서 평생을 보냈어. 나 없으면 방송국 쓰러질 것 같은 착각을 하면서 말야.”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50년 전 일이다. 1954년 12월 서울 중앙방송(한국방송 전신) 성우 1기 공개모집에서 남녀 20명이 합격통지서를 받았다. 오승룡, 박용기, 김수일, 고은정, 김소원씨 등이 그들이다. 텔레비전이 없던 시절 라디오 성우는 최고의 스타였다. 애청자들은 라디오 드라마를 들으며, 시름 많던 세월을 살아냈다. 오는 26일 한국방송 1라디오 〈만남〉 방송입문 50돌을 맞은 이들이 다시 모였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라디오 드라마로 풀어낸다. 영화배우 엄앵란 목소리로 유명한 성우 고은정씨가 대본을 쓰고, 성우 1기들이 모두 출연한다. 이미 세상을 떠난 신원균, 이창환씨도 드라마에 다시 불려나온다. 제목은 <만남>. 드라마는 화자(고은정)가 왕서방(신원균의 별명)을 만나면서 시작된다. 원두커피 애호가로 “죽어서 관 뚜껑 열면 커피만 철철 넘칠 거”라는 말까지 듣던 왕서방에게 화자는 손수 커피를 대접하면서 추억 속으로 빠져든다. 50년대 ‘신문쟁이’들 많이 모이던 상록수 다방, 명동 은하수 다방에 앉아 담배연기 품어내던 백성희씨, 문인들 모이던 청자다방…. 화자는 상록수 다방에서 신익희씨를 떠올린다. “난 상록수 하면 신익희씨 유해가 기차로 서울에 실려오던 날을 잊을 수가 없어. 가랑비가 흩뿌리는 먹구름 낀 날씨에 비통해하는 서울 시민이 서울역으로 모두 몰려가다시피해서 거리가 텅텅 비었는데, 우리만 상록수에 앉아 있었잖아.” 왕서방이 살아왔다는 말에, 박공(박용기)과 오발탄(오승룡), 수일(김수일), 소원(김소원)이 믿을 수 없다며 모여든다. “좋았던 시절, 라디오 드라마 전성 시대”도 있었다고 기억을 되살린다. “어떻게 보면 누릴만큼 누렸지 뭐. 60년대 초부터 갑자기 민간방송이 우후죽순으로 생기면서 방송사마다 드라마 아니면 쓰러졌잖아? 저녁부터 아침까지 시보 울릴 때마다 드라마였지. 드라마 제목을 아예 7시 드라마, 8시 드라마, 9시, 10시, 11시 그랬으니까….” 그랬다. 56년 한국 최초의 주간 연속극 <청실홍실>로 이들은 본격적인 방송 활동을 시작했다. 이어 57년 <산 넘어 바다 건너>, 58년 <장희빈> 등 요즘의 텔레비전 드라마 <대장금> <다모>에 견줄 만한 드라마들이 줄지었다. 순수 문예창작물로 지금도 방송되고 있는 <케이비에스 무대>도 57년 만들어져, 한국 최장수 방송 프로그램으로 자리잡았다. 60년대 들면서 문화방송, 동양방송, 동아방송 등 민방이 잇달아 개국하면서, 동양·동아 두 민방은 14개의 드라마를 편성하면서 치열한 대결을 펼치기도 했다. 현재 지상파 3사의 라디오 드라마는 한국방송이 5편, 문화방송은 1편, 에스비에스는 한 편도 없다. 라디오 드라마 <만남>으로 한국 방송사의 한 줄기를 엮은 성우 1기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만남>은 오는 26일 밤 11시10분 한국방송 제1라디오 <케이비에스 무대>를 통해 방송된다.

독립영화제 초청작 <거친마루> 김진성 감독

사이버 공간에서 사람을 만나고 대화하고, 사랑에 빠지기까지 하는 디지털 세상의 한구석에서는 문자 그대로 무림고수가 되기 위해 땀을 흘리며 야생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왠지 지금 이 시대에 한참 뒤처져 있는 것 같은 이 무술인들은 어떻게 세상과 만나면서 무림지존의 꿈을 이뤄가고 있을까? 10일 개막한 서울독립영화제의 초청작 〈거칠마루〉는 현재형으로서의 무술인과 그들의 한판 ‘맞장’을 경쾌하게, 그러나 한줌의 과장 없이 그린 극영화다. “2000년도 쯤인가? 고수를 찾아 맞장뜨러 다니는 사람들을 다룬 ‘무림일기-고수를 찾아서’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인간극장을 보다가 영화로 만들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요? 어휴 저야 그 세계와는 거리가 멀죠.” 주변 사람들이 너무 공무원 같다는 통에 수염까지 길렀지만 여전히 ‘참한’ 눈빛을 가리지 못하는 김진성(40) 감독. 눈썰미 있는 독자라면 이 이름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그는 2002년 〈서프라이즈〉라는 로맨틱코미디로 충무로에 ‘입봉’한 감독이다. “〈서프라이즈〉 마치고 촬영 준비에 들어갔죠. 영화진흥공사(그는 이곳에 ‘공무원’으로 6년 동안 일했다)를 그만두면서 1년에 세편씩 꼭 찍어야지 맘먹었는데 충무로만 바라보면 2~3년에 한편 찍기도 힘들잖아요. 후배들이 십시일반해서 거둬준 3500만원 들고 그냥 달려들었죠.” “마이너영화 자유러워 좋아”2002년 ‘서프라이즈’로 입봉 인터넷상의 무술인 동호회에서 신화처럼 떠도는 아이디인 ‘거칠마루’와 한판 붙기 위해 8명의 고수들이 모이는 〈거칠마루〉는 대역도 와이어도 없는 100% 순도의 디지털 무협영화다. 주인공 격인 태식은 그가 봤던 ‘인간극장’의 실제 주인공이었고, 한명의 연극배우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가 우슈, 합기도, 무에타이 등 국내외의 무술경기에서 ‘챔피언’ 한번 쯤은 ‘먹어본’ 무술인들이다. 앞으로도 할리우드의 조엘 슈마허나 거스 밴 샌트처럼 메이저와 마이너를 오가면서 영화를 찍을 생각이라는 김 감독의 창고에는 거의 완성된 시나리오 두편을 비롯해 트리트먼트만 30여편, 시놉시스까지 합하면 200여편이 수북이 쌓여 있다. “메이저건 마이너건 가장 힘든 건 돈문제인 것 같아요. 〈거칠마루〉도 막판에 쓰레기통에 넣을까 고민에 빠지기도 했죠. 그래도 충무로보다는 훨씬 자유로워서 좋아요.” 현재 청어람과 〈거칠마루〉의 개봉을 논의 중인 김 감독은 단관 개봉이나 300~400개관 개봉 사이의 영화가 전무하다시피 한 한국 극장가에 30~40개관으로 관객과 만날 수 있는 영화들이 늘어나는 데 〈거칠마루〉가 일조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2004년은 할리우드 여성 수난의 해

셰리 랜싱 은퇴 뒤 암울한 여성의 입지… 여성 고용 전망도 어두워 <할리우드 리포터>가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00’ 리스트를 발표했다. 1위는 디즈니-ABC 텔레비전 그룹 대표인 앤 스위니가 차지했고, 2위는 소니픽처스 부사장 에이미 파스칼이 차지했다. 3위는 CBS 파라마운트 네트워크 텔레비전 대표 낸시 텔럼, 4위는 MTV 네트워크 대표 주디 맥그래스, 5위는 유니버설 픽처스 대표 스테이시 스나이더다. <할리우드 리포터> 편집장 로버트 J. 다울링은 “각 분야에서 최고의 지위에 오른 이들이 임시직과 데스크 안내원, 어시스턴트 등으로 출발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면서 “이들은 성(性)이 아니라 지성과 자기 확신, 용기 때문에 성공을 얻었다”고 평가했다. <할리우드 리포터>는 리스트를 분석한 기획기사에서 “2004년은 여러모로 여성에게 힘들었던 한해”였다고 결론지었다. 가장 상징적인 사건은 13년 동안 단 한번도 리스트에서 빠져본 적이 없는 파라마운트 픽처스 대표 셰리 랜싱의 은퇴다. 다울링은 랜싱에 대해 “어떤 일을 하던, 재능있는 여성은 지도자가 될 수 있고, 영감을 줄 수 있고,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며 “그는 스타일과 우아한 태도로, 재능있는 산업지도자의 모습을 구체화했다”고 아쉬운 마음을 표했다. <할리우드 리포터>가 랜싱의 은퇴를 “한 시대의 종말”이라고 표현한 것은 점점 좁아지고 있는 여성의 입지와도 관련이 있다. 디즈니 CEO인 마이클 아이즈너의 후계자로 멕 휘트먼이 거론되고 있는 좋은 징조도 있지만, 현실은 대체로 암울하다. 라이프타임즈 엔터테인먼트 대표 캐롤 블랙과 E! 엔터테인먼트 CEO 민디 허먼, ABC 엔터테인먼트 대표 수잔 라인 등이 올해 타의가 섞인 은퇴를 선언해야 했다. 여성 고용의 전망도 밝지는 않다. 샌디에이고주립대학 교수 마사 로젠은 엔터테인먼트 업계를 조사한 연례보고서에서 작가와 감독, 프로듀서, 편집기사, 촬영감독 등 핵심적인 부문의 여성인력 고용비율이 지난 여섯 시즌 동안 정체상태였다고 지적했다. 이런 현상은 TV보다 영화업계에서 더 심각하다. 주요 배역 중에서 여성 캐릭터는 남성의 1/2에 불과하고, 50·60대에 이르면 그 비율은 1/4까지 떨어진다. 2003년 흥행순위 250위 안에 드는 영화 중 1/5이 주요 부문에 여성인력을 전혀 고용하지 않았다. 미국배우조합 의장 멜리사 길버트는 “가장 막강한 소비자 계층인 40대 여성이 연예산업에서 소외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는 말로 불만을 표하기도 했다. <할리우드 리포터>는 이와 함께 최고의 수입을 올리는 여배우들의 리스트도 발표했다. 1위는 개런티 2천만달러를 받는 줄리아 로버츠. <할리우드 리포터>는 마이크 니콜스의 <클로저>에 출연하고 쌍둥이를 출산한 줄리아 로버츠가 최고의 한해를 누렸다고 평가했다. 2위의 카메론 디아즈는 로버츠처럼 2천만달러를 받지만, 올해 <슈렉2>의 목소리 출연 말고는 영화가 없다는 점에서 한 계단 밀려났다. 3위의 니콜 키드먼, 4위의 리즈 위더스푼, 5위의 드루 배리모어는 모두 개런티 1500만달러를 받는 여배우들. 할리 베리는 1400만달러를 받아 6위에 올랐고, 개런티 1200만달러를 받는 샌드라 불럭과 안젤리나 졸리, 르네 젤위거, 제니퍼 로페즈가 차례로 7위부터 10위까지를 기록했다.

SBS ‘문예피디’ 이종한의 <토지>

요즘 주말 밤 ‘9시 뉴스’가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는 풍문이 들려온다. 토·일요일 밤 8시45분 방송되는 에스비에스 드라마 <토지> 때문이란다. 지난 12일 6회까지 나온 <토지>가 벌써 시청률 20%를 넘어섰다. 원작 대하소설 <토지>의 뛰어난 작품성과 재미를 생각하면 대단한 수치가 아니라고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 김현주나 유준상 등 주요 연기자들이 아닌 아역 배우들이 등장하고 있어 <토지>의 ‘폭발력’은 본격화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1979년과 87년에 이어 세번째로 드라마화될 정도로 원작이 ‘대단하다’는 것쯤이야 당연한 요인일 터다. 1897년 한가위부터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격하게 요동쳐온 한국근대사를 21권에 담은 이 대작은 빛나는 역사의식과 밑바탕을 면면히 흐르는 ‘생명 사상’이 작품성을 담보한다. 이에 더해 맛깔진 말발·글발에 재밌는 이야기까지 얹혀 완성됐다. 1년 넘는 준비기간·연기파 배우, 일부 미숙한 사투리는 ‘옥에 티’ 일단 틀은 갖춰진 것. 그러나 영상을 입히고, 이야기를 드라마에 맞게 재구성하는 것은 오롯이 연출자의 몫이다. 그런 점에서 연출자 이종한(52) 피디(위 사진)의 내공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피디는 이른바 대표적인 ‘문예 피디’다. 작품성 높은 문학작품들을 드라마로 구현해내는 데 뛰어난 솜씨를 보여왔다. 에스비에스 창사초기 방영웅 원작의 <분례기>(1992년), 이문구 원작의 <관촌수필>(1993년)과 2000년 방송되며 높은 인기를 끌었던 박영한 원작의 <왕룽의 대지>가 그 예다. 이 피디는 작가의 혼이 담긴 원작의 본질과 문학성을 텔레비전 영상으로 재구성해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안다. 그래서 이 피디는 “갈수록 함부로 시작할 게 아니었다는 걸 실감한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독자들은 소설을 읽으며 풍부한 상상을 하는데, 드라마는 상상 속의 장면을 영상으로 바꿔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드라마는 새로운 창작이 되어야 하지요.” 무엇보다 그는 원작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토지>는 세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가 ‘생명 사상’이고, 둘째가 ‘한’이며, 셋째가 ‘자연’이죠. 모든 생명을 가진 이들이 똑같이 소중하다는 것이 ‘생명 사상’이고 동학 사상인 겁니다. 유한한 인간은 한을 품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토지>에는 자연도 담겨있습니다.” 소설 <토지>가 있는 그대로 영상의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이 피디가 직접 느끼고 재해석한 <토지>가 드라마로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뜻이다. 연출자가 원작에 끌려가지 않고 원작의 본질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독립적인 재해석에 나서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원작의 무게에 짓눌려, ‘이야기’도 ‘영상’도 모두 놓치는 경우가 허다한 까닭이다. 이런 점에서 이 피디의 연출력이 초기부터 높은 인기를 끌고 있는 <토지>의 힘이라는 것이 많은 이들의 평가다. 지난 봄 촬영된 3·4회와 지난해 가을 찍은 6·7회 등 우리 나라 4계절의 영상미가 아름답게 구현된 것이나 빠른 속도감 속에서 박진감 넘치게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 등이 그의 연출력을 설명한다. 이와 함께 1년이 훌쩍 넘는 철저한 준비기간과 김갑수·김여진·김미숙·유해진·박지일 등 ‘얼굴’ 아닌 연기로 승부하는 배우들 등이 큰 구실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가운데 ‘옥에 티’가 있다면, 시청자들이 지적하고 있는 일부 출연자들의 미숙한 ‘사투리’ 연기일 게다. 이제 6회를 마친 <토지>가 앞으로 어떤 성과를 이룰지, ‘9시 뉴스’들은 어느 수준의 비명을 지르게 될지 시청자들의 관심이 모이고 있다.

3사 토크쇼 하향평준화

밤마다 연예인들의 ‘말장난’이 텔레비전에 넘쳐나고 있다. 몇몇 방송에서 시작한 ‘연예인 신변잡기’ 위주 프로그램이 다른 방송으로 번져가는 한편, 같은 방송사에서도 ‘자가복제’ 프로가 생겨나고 있는 탓이다. 앞서 나름의 신선한 포맷으로 시작한 연예오락 프로도, 시청률 경쟁에만 빠져 낮은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프로그램의 뒤를 쫓아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고 있다는 것이 큰 문제다. 이에 따라 비슷한 프로그램들이 지상파 3사에 무려 5개로 늘었다. 진행자나 출연자도 ‘그 밥에 그 나물’이고 내용도 ‘연예인 사생활’ 아니면 ‘영화·음반 홍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시청률 경쟁에 서로 베기면서 특색잃어, 출연진·진행자 겹치기…시시껄렁 집담 잔치 연예인 말장난으로 크게 성공한 프로그램은 에스비에스의 <야심만만>이다. 지난해 2월 첫 방송을 시작한 <야심만만>은 설문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한 토크쇼로, 시청률만 놓고 보면 큰 성공을 거뒀다. 그러자 다른 방송사들도 경쟁적으로 비슷한 프로그램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지난달 방송을 시작한 한국방송의 <상상플러스>. “인터넷을 통해 시청자와 호흡할 수 있는 중간 다리 역할을 하는 프로그램”이라는 기획의도로, ‘리플 문화’를 이용한다고는 하지만 연예인들의 잡다한 일상사가 주요 이야깃거리로 등장한다. 에스비에스는 <야심만만>에 이어 <즐겨찾기>로 ‘자가복제’ 프로를 하나 더 추가했다. 지난 5월 첫 방송을 시작할 땐, 진행자와 출연자가 함께 노래를 만들어 부르는 포맷으로 참신하게 출발했지만, 10월께 ‘토크’를 강화하면서 <야심만만>과 다를 바가 없어졌다. 문화방송 <놀러와>도 다르지 않다. 지난 5월 첫회를 내보낼 때만 해도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할 듯 싶었으나 역시나 연예인들의 ‘시시껄렁한 잡담’이 주된 내용으로 돼버렸다. <야심만만>보다 오래된 한국방송 <해피투게더>도 처음 ‘쟁반 노래방’에서 학창시절 노래를 다시 배워보는 산뜻한 시도로 사랑을 받았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책가방 토크’로 무게 중심이 옮겨졌다. 결국, 월요일 밤 <야심만만>으로 시작해 화요일 밤 <상상플러스> <즐겨찾기>, 목요일 <해피투게더>, 토요일 <놀러와>로 이어지는 일일 토크쇼처럼 되어 버렸다. 한 방송 관계자는 “<야심만만>이 높은 시청률을 올리자, 다른 프로그램들도 ‘울며 겨자 먹기’로 쫓아가는 양상”이라며 “새로운 오락프로 형식에 대한 아이디어 고갈과 시청률 지상주의가 문제”라고 말했다. 연예인들의 겹치기 출연에 대한 비판과 영화·음반 홍보 일색이라는 지적도 줄을 잇는다. 지난 14일 <즐겨찾기>에 출연한 이성재와 김현주는 18일 <놀러와>에 이어 20일 <야심만만>에도 겹쳐 나온다. 또 20일 <야심만만>에 나올 예정인 댄스그룹 ‘지오디’는 이미 16일 <해피투게더>에 나온 바 있다. 윤계상·김민정도 영화 홍보차 지난달 <즐겨찾기>(16일) <해피투게더>(18일) <놀러와>(20일) <야심만만>(29일 등)에 잇따라 나왔다. 염정아·이지훈도 자신들이 출연한 영화 개봉을 앞두고 지난달 2일 <즐겨찾기>를 시작으로 <놀러와> <해피투게더> <야심만만> 등에 연이어 나왔다. 이쯤되면 토크쇼라기보다 ‘영화홍보쇼’라는 비난을 받아도 달리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이에 대해 한 담당 피디는 “연예인 섭외가 어려워, 영화 홍보라는 ‘인센티브’ 없인 프로그램 제작이 어려운 형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말 잘하는 연예인 몇 명으로 시청률 올리기 경쟁에 나서고, 특정 포맷을 무비판적으로 따라다니는 연예오락 프로 제작 행태는 근절돼야 한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키워가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