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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신인감독 10인의 출사표 - 이시명

▒감독이 되기까지 이시명 감독은 일명 ‘한양대 필름 르네상스’를 주도한 영화학도 중 하나였다. 정지우, 김용균, 김영준 등 88학번 동기들은 모두 70∼80편에 달하는 작품을 만들었고, 애니메이션, 액션, 코미디 등 장르도 전례없이 다양했다. 그중에는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이 일상에 법칙처럼 적용되는 해프닝을 다룬 코미디 <말이 씨가 되면>도 있었다. 80년대 학생 작품으로는 드물게 대중성과 감각을 갖췄다고 평가받은 이 작품으로, 이시명 감독은 상도 타고 후배들 사이에 ‘스타’가 됐다. 중학교 때 비디오카메라로 도둑 잡는 액션영화를 찍은 이래, 이시명 감독은 재학 시절 거의 모든 장르 영화를 직접 만들었다. 하고 싶은 영화, 할 수 있는 영화를 찾고, 착실히 공부하는 과정이었던 셈이다. 장길수 감독의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의 연출부로 시작, 강우석 감독의 <마누라 죽이기> <투캅스2>의 조연출을 거쳤고, 98년 <여고괴담>의 연출 의뢰를 받았다. 그러나 공포물을 보는 것조차 힘겨워하는 그에겐 무리였다. 이시명 감독이 꿈꾸던 프로젝트는 단군과 고주몽을 이어주는 해모수의 설화와 시간 여행을 다룬 SF물이었지만, IMF가 닥치고 영화판에 돈이 마르면서, 그 기획들이 현실이 될 길은 요원해졌다. 그러던 중 김익상 프로듀서로부터 ‘시간여행에 관한 대체 역사물’ 아이템을 건네받았다. 운명처럼, 그가 준비해온 두 이야기를 한데 버무려놓은 듯한 영화였다. 그렇게 시작된 는 가시화되기까지, 투자사가 삼부엔터테인먼트에서 튜브엔터테인먼트로, 프로듀서가 김익상씨에서 김윤영씨로 바뀌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3년 가까이 지연된 이 프로젝트에 대해 소문도 많았지만, 그 사이 이시명 감독은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3개국 헌팅과 프로덕션 디자인 작업을 꼼꼼히 진행했다. 튼실한 드라마는 기본이고, 그 위에 볼거리를 얹겠다며, 연출의 ‘정석’을 이야기하는 이시명 감독 앞에, “신인으로서 50억원짜리 블록버스터를 만드는 부담이 크지 않느냐”는 우려는 무색해진다. ▒어떤 영화를 만들것인가 이시명 감독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늘 바뀐다고 한다. 앨런 파커, 우디 앨런, 스탠리 큐브릭, 오우삼, 틴토 브라스 등 그가 좋아하는 감독 명단을 보면, 도무지 어떤 영화를 만들려는지 그 취향을 종잡을 수가 없다. 꼭 하고 싶은 일이 ‘해모수’ 설화를 <엑스칼리버> 분위기로 영화화하는 것이라니, 역사물에 지대한 관심이 있는 것도 같지만 그런 것만도 아니라고 한다. 도 ‘조선독립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가정, 그 소재보다는 “지금 다루고 싶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집어넣을 공간이 있다”는 사실에 이끌렸다. <영웅본색> <첩혈쌍웅> 등 홀린 듯이 봤던 오우삼의 영화들, 그런 정서를 담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 조선계 일본인 경찰 사카모토는 자신의 정체성 때문에, 절친한 일본인 친구 사이고와 대립해야 하고, 다른 역사 속에서 연인 사이였던 오혜린을 알아보지 못하는 비운의 인물. 그를 통해 우정과 사랑, 운명과 역사를 이야기하려 한다. 2009년이라는 가까운 미래에 벌어지는 이야기인 만큼 SF적인 요소가 있지만, 비주얼에만 힘을 쏟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미술의 컨셉은 3∼4년 정도 앞선 디자인에, 밤신과 비내리는 낮신이 주를 이뤄 전반적인 톤을 어둡게 잡았다. 현재 양수리 제1스튜디오에 후레이센진의 테러가 벌어질 이토 회관의 세트를 짓고 있으며, 테스트 촬영과 인서트 촬영을 진행하고 있다. 특수효과 촬영을 포함하면 100회를 훌쩍 넘길, 머나먼 여정을 이제 막 떠난 것이다. ▒은 어떤 영화 2009년 광화문엔 조선총독부 건물이 버티고 있고, 이순신 장군 대신 이토 히로부미의 동상이 서 있다. 동아시아 일대는 100년 전에 ‘일본제국’으로 통합됐고, 조선도 지구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조선독립군의 후예들인 반정부 레지스탕스 후레이센진들이 간간이 굵직한 테러를 벌일 뿐. 일본의 경제와 정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이노우에 재단의 파티장에 후레이센진들이 침투하자, 사카모토(장동건)와 사이고(나카무라 도오루)를 비롯한 특수수사요원들이 이들을 진압한다. 사카모토는 후레이센진들의 테러 목적이 불분명하다는 데 의문을 품고 나름의 조사를 벌이지만, 사건을 축소은폐하려는 상층부는 그에게 정직 처분을 내리고, 선배 경관 살해 누명까지 씌운다. 절친한 동료 사이고는 사카모토의 탈출을 돕고, 다신 돌아오지 말라고 경고한다. 도피하던 사카모토는 후레이센진의 아지트에 흘러들고, 이노우에 재단을 둘러싼 음모를 접하고, 자신의 기억과 민족의 역사가 조작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박은영 기자 cinepark@hani.co.kr

“이 죄인들을 용서해 주시오”

한국영화회고록 19회- 유현목 “유현목 감독은 사탄이다!” 이 글은 당시 유력한 기독교신문(주간지)에 실린 커다란 글자의 표제였다. 또한 이 글을 쓴 이는 당대 기독교 음악계의 거두였고 지금은 고인이 된 분이다.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나에게 악마라니? 경악한 나는 차츰 잔잔한 웃음으로 바뀌면서 기사내용을 끝까지 읽었다. 1965년 나의 작품인 <순교자>가 기독교계에 파문을 던진 것이다. 문제가 된 대목은 “하나님은 없다”는 주인공 신 목사의 대사와 인민군에 학살당하는 열두 목사가 비굴하게 살려달라고 하면서 최후를 맞는 장면이었다. 이 작품은 재미작가 리처드 E. 김(김은국)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했다. 실존주의적 경향의 소설 <순교자>는 당시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리를 끌며 베스트셀러가 된 문제작이었다. 곧이어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에서도, 그리고 한국에서도 베스트셀러에 오를 정도였다. 나는 곧 영화화하기로 결정하고 무신론적 입장이 아니라 스웨덴의 잉마르 베리만 감독이 줄곧 테마로 삼았던 ‘하나님이여 숨어계시지 마시고 우리에게 모습을 보여주시고 은총과 구원을 베풀어 주시옵소서’와 같은 맥락으로 해석하면서 각색작업에 착수했다. 흥행물이 아니어서 지방흥행사들은 시나리오 읽기도 어렵고 무겁고 난해하다는 이유로 좀체 지원하려 하지 않아서 결국은 내가 제작자 겸 감독으로 어려운 출발을 했다. 어느 독지가가 그때 돈 200만원을 내줬고, 스탭, 캐스트들은 후불제 약속에 응해줬다. 큰 규모의 오픈세트들은 재료값만 받고 제작해주는 등 고마운 상황에서 제작을 끝낼 수가 있었다. 60년대 당시의 평균 제작비는 대충 800만원대였는데 냉면값이 500원이던 시절이다. 이 작품은 한국전쟁 중, 국군이 평양에 진군했을 때 그 정보장교들이 12인의 목사들이 무참히 순교당한 현장을 목격하고 그 진상을 파헤쳐 나가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원래는 목사가 14명이었는데, 두명의 목사가 살아남았다. 김진규가 분한 신 목사와 젊은 미친 목사였다. 신 목사는, 그 열두 목사들은 끝끝내 하나님을 버리지 않는다고 해서 총살당했다며 지극히 성스러운 순교자들이라고 칭송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왜 총살현장에서 살아남았는가란 추궁에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때문에 모든 신도들은 신 목사에게 의혹을 품고 격분하면서 돌팔매질을 하며 매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순교현장을 진두지휘했던 인민군 첩보장교가 평양에 침입했다가 잡혀서 진상을 밝힌다. 그의 말에 의하면 열두 목사들은 총부리 앞에서 살려달라고, 하나님은 없다고 애걸복걸하는 비겁한 꼴을 보여서 쏴죽였고, 젊은 목사는 존경하는 목사들이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바람에 미쳐버려서 살려주었다는 것이었다. 신 목사만이 당당히 하나님은 계신다라고 외치며 하늘을 향하여 “이 죄인들을 용서해 주시오”라고 큰소리로 기도를 올렸고, 인민군 첩보장교는 이제야 참다운 성직자를 만났다며 그를 살려주었다고 증언했다. 그뒤로 신 목사는 고통받는 민중을 향하여 “하나님을 굳건히 믿으시오. 그러면 구원을 얻을 것이요, 절망으로부터 해방될 것입니다”라는 설교를 끊임없이 계속한다. 그러나 동족상잔의 참혹한 전쟁상황에서 민중은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더욱더 절망의 늪으로 빠지기만 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신 목사는 “하나님은 없다. 그러나 굳건한 신앙을 가지고 인간을 사랑하라”고 절규한다. 이와 같은 줄거리는 실제 있었던 사실이 아니고 다만 ‘서로 사랑하라’라는 테마를 부각시키기 위한 허구의 극적 구성일 뿐이다. 한 개인인 성직자가 무신론으로 변절했다고 해서 엄연한 신의 존재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또한 그러한 순교자들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 줄거리가 마치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착각하는 기독교인들의 반발은 심했다. 순교자들을 모독했다고 흥분하는 상황이었다. 서울의 지식인들은 주제의식을 이해하며 많이 관람했지만 지방에서는 교인들이 극장 앞에서 같은 교인들이 접근해 오면 “악마의 영화”라고 선전하면서 한사코 돌려보냈다. 그리하여 제작을 겸했던 나는 흥행에 실패하여 빚만 짊어지게 되었고 모든 스탭들에게도 후불제의 약속을 어겼기에 이 글을 통해서 양해를 바라며 죄송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또한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참다운 ‘사랑’을 강조하며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를 전언하려던 연출의도를 마저 읽지 못하고 반발했던 교인들에게 뒤늦게나마 깊은 이해를 바라는 바이다.

[저메키스]오락과 예술 사이, 환상의 저편

<캐스트 어웨이>가 또 2억달러 이상을 벌어들였다. 톰 행크스 혼자 한 시간 이상을 떠들고, 혼자 뛰어다니는 ‘무인도영화’가 그만한 돈을 벌어들일 영화가 되리라고는 쉽게 상상할 수가 없다. 아무리 톰 행크스 주연에,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러나 로버트 저메키스는 <백 투 더 퓨처> 이후 할리우드의 주류에서 조금씩 엇나간 작품들로 승부해왔다. 지독하게 씁쓸한 <죽어야 사는 여자>나 변형된 미국 현대사를 그린 <포레스트 검프> 등등. 모든 작품이 성공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포레스트 검프> 이후 로버트 저메키스는 만드는 작품들마다 흥행은 물론 화제를 모으는 데도 성공했다. 로버트 저메키스는 스필버그처럼 거창하게 떠들지는 않지만, 일관되게 자신의 작품을 만들어온 ‘작가’로 부족하지 않다. 물론 <왓 라이즈 비니스>처럼, 그냥 기분풀이, 또는 테크닉 실험용으로 만드는 아무 의미없는 ‘상업영화’가 필모그래피에 끼어 있다는 것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어쨌거나 <캐스트 어웨이>는 다시 한번 로버트 저메키스의 진가를 보여준 영화다. <캐스트 어웨이>가 <로빈슨 크루소>나 <이녹 아든>의 변형이라는 데는 그다지 동의할 수 없다. <캐스트 어웨이>는 생존의 기록을 보여주지 않는다. 무인도에서 생존의 조건을 마련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척의 모습을 잠시 보여주다가, 시간은 훌쩍 4년 뒤로 넘어가 버린다. 만약 근대정신의 수호자였던 <로빈슨 크루소>의 21세기판을 원했다면, 척이 무인도의 ‘시공간’을 어떻게 지배해가는지를 보여주었을 것이다. 그의 고독과 처절한 투쟁을 원했다면, 자살 앞에서 번민하는 극적인 순간을 보여주지 않을 이유가 없다. <캐스트 어웨이>는 근대를 초월한, 시간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한다. 가볍다고? 물론 가볍지만 그건 <포레스트 검프>의 깃털처럼 자유로운 바람 속을 거니는 사색의 결과다. 무한한 시간 속, 바다가 육지라면 <캐스트 어웨이>는 무인도에 홀로 남겨진 한 남자의 생존의 기록이 아니라, 격리된 시간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한 남자의 궤적이다. <캐스트 어웨이>의 첫 머리는 페덱스의 간부로서, ‘시간’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고 믿는 척의 일상을 보여준다. 언제나 수첩을 꺼내들고 미래의 일을 계획하고, 정확한 약속을 잡고, 모든 것을 완벽하게 마무리짓는다. 시간이 더디게 돌아가는 것만 같은 러시아에서도 척의 위력은 여지없이 발휘된다. 언제 어디서나 일정한,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진 시간은 척의 모든 것이다. 그러나 척은 ‘금방 다시 올게’라는 약혼녀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 병에 걸린 친구의 아내를 위해 전문의의 연락처를 알아주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못한다. 망망대해에 홀로 남겨진 척에게는 오로지 시간만이 존재한다. 그러나 더이상 척은 시간을 지배하지 못한다. 무한대로 주어진 시간 속에서, 척은 새로운 ‘시간’과의 투쟁을 해야만 한다. 세상에서 척의 시간은 타인들과 공유하는 시간이었다.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시간은 비로소 의미를 가졌다. 그러나 무인도에서의 시간은 오로지 척에게만 주어진 것이다. 척이 무인도에 있는 동안, 척을 아는 모든 사람들은 그를 땅에, 마음에 묻었다. 그들의 시간에서 척은 이미 사라진 존재였다. 4년 만에 돌아온 척은, 지나간 시간이 서로 다름을 깨달아야만 했다. 자신이 처절하게 싸우는 동안, 타인들은 그를 잊으려 했다. 척이 돌아온다고 해서 그 시간이, 온전하게 봉합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켈리는 치과의사와 결혼했고, 친구의 아내는 죽었다. 그가 지킬 수 있는 약속은 아무것도 없다. 아니 단 하나 유일하게 뜯지 않은 화물, 천사의 날개만이 그가 지킬 수 있는 약속이었다. 그는 지나간 시간을 받아들이고, 교차로에서 자신이 지나가야 할 또다른 시간을 생각한다. 이 길로 가면 어떤 시간이 기다리고 있을까. 만약 내가 그때 비행기를 타지 않고 켈리와 함께 있었다면, 지금의 시간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흥미롭게도 이런 주제는, 로버트 저메키스의 출세작인 <백 투 더 퓨처> 3부작에서 이미 거론된 것이다. 어머니가 좀스러운 아버지와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어떻게 됐을까. 스포츠 승부조작으로 떼돈을 번 악당이 미래사회를 지배한다면 어떻게 될까. 로버트 저메키스의 말처럼 코미디, 어드벤처, 과학, 사색, 청춘, 로큰롤, 시간여행, 역사 등 모든 장르가 총괄돼 있는 <백 투 더 퓨처>는 가변적인 미래, 우연적인 세계를 가벼우면서도 신랄하게 그려낸다. 로버트 저메키스의 최고작인 <포레스트 검프> 역시 시간의 의미를 탐구한다. <포레스트 검프>는 60년대 이후 미국의 역사를, ‘다른’ 시간으로 재구성한다. 용광로처럼 들끓다가, 아이스 스톰처럼 일순간에 싸늘해진 미국의 현대사는 포레스트 검프의 시간을 통해서, 다른 모습으로 그려진다. 시간은, 로버트 저메키스의 일관된 관심이었다. 그는 ‘영화의 과거사’를 궁금해 하는 관객을 위해, <백 투 더 퓨처>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그의 전사가 궁금하다. 로버트 저메키스는 전형적인 영화광 세대다. 그의 페이트론이자 스승이었던 스티븐 스필버그가 그랬듯이. 1952년 시카고에서 태어난 로버트 저메키스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8mm영화를 찍으며 영화감독을 꿈꾸었고, USC에서 영화를 공부했다. 스필버그를 처음 만난 것도 학부 마지막 해, 유니버설에서 현장학습을 하던 때였다. 스필버그는 막 <슈거랜드 특급>을 만든 뒤였다. 하지만 스필버그는 그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고, 로버트 저메키스를 평생의 파트너인 밥 게일과 함께 <너의 손을 잡고 싶어>의 시나리오를 들고 다니던 때에 만난 것으로 알고 있다. 비틀스가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할 당시의 열광적인 비틀스 마니아의 소동을 그린 <너의 손을 잡고 싶어>의 시나리오에 흡족해 한 스필버그는 차기작인 코미디영화 의 시나리오를 부탁한다. 은 흥행에 실패하고, 비평에서도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지만 몇개의 에피소드가 종횡무진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의 활달함은 높이 살 만했다. 로맨스 소설가가 어처구니없는 모험에 휘말리는 코미디 <로맨싱 스톤>(1984)의 성공 이후 로버트 저메키스는 흥행감독으로 자리를 굳혔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오락영화의 모든 것을 담은 영화’라고 극찬했던 <백 투 더 퓨처>는 3부작으로 만들어지면서, 저메키스 영화의 전형이 되었다. 베이비붐 세대의 추억과 꿈을 훌륭하게 재현한 <백 투 더 퓨처>는 겁쟁이라고 불리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평범한 고등학생 마티가 시간여행을 벌이며 성장하는 영화다. 베이비붐 세대처럼 어른이 돼서도, 여전히 과거의 꿈과 기억을 되풀이하는 영화. 그러면서 저메키스는 자신의 영화 속에 몽상만이 아니라 악몽까지 재현한다. <백 투 더 퓨처> 2편에서 마티는 자신의 실수로 모든 미래가 바뀌었음을 알게 된다. 미래에서 악몽을 본 마티는 현재로 돌아오고, 정신없이 과거와 미래를 되풀이하면서 현실을 교정하려 한다. 신산한 모험을 겪은 <백 투 더 퓨처>가 3편에서 서부극의 시대로 돌아간 것은, 저메키스와 함께 스필버그의 수제자인 론 하워드가 <파 앤 어웨이>에서 서부개척시대를 다룬 것과 동일한 이유다. 저메키스와 하워드 그리고 스필버그를 포함한 베이비붐 세대는 서부개척시대를 꿈과 희망이 살아 있던, 누구에게나 공정한 룰이 존재했던 시기라고 억측한다. 그것은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서부극의 환상을 완전히 깨버린 것과는 정반대의 탈정치적인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그들은 프랭크 카프라의 유쾌한 시민정신을 이상으로 삼았고 자신의 영화에 담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유아적인 순진함에서 머물렀다. <백 투 더 퓨처> 역시 그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더 신랄하게, 더 철학적으로 아카데미 각본상 후보에도 올랐던 <백 투 더 퓨처>의 대성공으로 로버트 저메키스는 마음대로 차기작을 고를 수 있는 힘을 갖게 됐다. 저메키스는 실사와 애니메이션의 합성영화 <누가 로저 래빗을 모함했나?>(1988)에 도전했다. <누가 로저 래빗을 모함했나?>는 워너 애니메이션의 캐릭터인 얄미운 토끼 로저 래빗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디즈니의 캐릭터와 달리 노골적인 농담과 액션이 등장하는 워너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들은 밉살스럽고 폭력적이다. 로버트 저메키스가 스티븐 스필버그보다 더 신랄하고, 더 어둡고, 더 철학적인 것처럼. 로버트 저메키스의 야심이 슬쩍 가미된 <누가 로저 래빗을 모함했나?>는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몰린 토끼가 자신의 누명을 벗겨달라며 현실의 인간에게 도움을 청하는 이야기다. 80년대 할리우드 메이저에서 만든 작품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누가 로저 래빗을 모함했나?>는 비틀린 블랙 유머가 가득하다. 이런 경향은 <죽어야 사는 여자>에서 절정에 달한다. 실사와 애니메이션이 절묘하게 결합된 <누가 로저 래빗을 모함했나?>에서 로버트 저메키스는 현실과 환상을 하나의 시공간에 접합하는 놀라운 테크닉을 보여준다. 이후 로버트 저메키스의 영화는 현실과 허구의 접점을 지워버리는 테크닉을 이용하여, 현실의 신비를 가중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TV시리즈 <납골당의 미스터리>로 유년 시절의 취향이던 B급 호러영화에 대한 애정을 표시하고, 로버트 저메키스는 할리우드를 조롱하는 어두운 판타지 <죽어야 사는 여자>를 만들었다. 당대 최고의 연기파 배우 메릴 스트립과 역시 당대 최고의 섹스 어필 골디 혼에 액션 영웅 브루스 윌리스를 기용하여, 기존의 스타 이미지를 완전하게 부숴버린다. 그들은 영원한 젊음에 집착하고, ‘신비의 묘약’에 의존하여 젊음을 지탱한다. 그러나 결과는 텅텅 비어버린,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육체뿐이다. 그건 마치 첨단 테크놀로지에만 의존하고 자신의 영혼을 갉아먹은 할리우드에 대한 조롱처럼 들린다. 가장 앞선 특수효과를 이용하여, 로버트 저메키스는 물질성에 사로잡힌 인간의 헛된 욕망을 공격하고 있다. 로버트 저메키스의 야심찬 현대사회 비판은 <포레스트 검프>에서 계속된다. 미국 내에서만 3억3천만달러를 벌어들인 <포레스트 검프>(1994)는 로버트 저메키스에게 아카데미 감독상을, 톰 행크스에게 남우주연상을 안겨주었다. 아이큐 75의 포레스트 검프가 파란만장한 미국의 현대사를 관통하면서, 새로운 시선으로 과거를 재편하는 <포레스트 검프>는 새로운 미국의 신화가 되었다. 진보적인 민권운동이 이끌었던 60년대에서, 포레스트 검프는 우직함 하나로 영웅이 된다. 모든 현대사의 이정표마다 검프는 불쑥불쑥 얼굴을 내민다. 그것이 과연, 미국 현대사의 한 흐름인 민권운동에 대한 조롱일까. 로버트 저메키스는 원작의 신랄함을 오히려 줄이고 완만한 굴곡으로, 검프의 역사를 그려냈다. 혹시 <포레스트 검프>는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에 언제나 있었던, 그러나 결코 자신의 이름을 남기지 않았던 대다수 보통 사람들의 대명사는 아닐까. 역사의 구비구비를 돌고 돌아 결국 길가 벤치 위에 앉아 있는 포레스트 검프와, 바람에 실려 하릴없이 허공을 날아다니던 깃털은 하나의 다른 존재는 아닐까. 그게 그냥 ‘생각없는’, 혹은 ‘즉자적인’ 몸짓에 불과할까. 사회주의 혁명은 자본주의로 가는, 가장 멀고 험한 길이라는 우스개 소리도 있는데. 테크놀로지, 허구를 현실처럼 논란 많은 정치성은 무시한다 해도, 사실과 허구를 완벽하게 결합시켜놓은 <포레스트 검프>의 테크놀로지만은 눈부셨다. 케네디와 닉슨 등 과거 인물과 만나는 검프, 죽의 장막을 넘어 베이징에서 탁구시합을 벌이는 검프 등 역사의 현장을 담은 필름에 톰 행크스를 끼워넣은 테크닉은 정말 정교했다. 로버트 저메키스에게 테크닉은 단순한 기술적 진보만이 아니다. 검프를 케네디와 인사시키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영화는 허구라는 고정관념이 허물어진다. 어쩌면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필름으로 남아 있지 않는, 이미 존재했던 과거가 아닐까. 우리가 보지 못했던 시간을 <포레스트 검프>가 재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까지 드는 것이다. 그 철학적인 테크닉은 97년작 <콘택트>에서 더욱 발전한다. 로버트 저메키스는 <콘택트>에서 클린턴 대통령을 카메오로 출연시켰다. 직접 출연한 것이 아니라 클린턴의 실제 영상을 따와서 배경화면과 합성하고, 컴퓨터로 변조하여 외계인과의 만남을 앞두고 침착하라는 연설을 하게 만든 것이다. CNN 기자 25명이 직접 출연하고, 실제 CNN 프로그램인 <래리 킹 쇼> <크로스 파이어>를 영화 속에 삽입하여 <콘택트>의 상황이 마치 사실처럼 인식되게 만든다. 칼 세이건의 미망인이자 작가인 앤 드루얀도 실명으로 <콘택트>에 삽입된 <크로스 파이어>에 출연해 외계인의 존재에 대해 토론을 벌인다. 허구는 사실이 아니지만, 사실적인 개연성을 지니고 있다. ‘사실’처럼 관객에게 호소하여, 공감을 느끼거나 카타르시스에 동참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영화나 소설 등 허구를 다루는 매체의 일반적인 특성이다. 그러나 TV의 보도 프로그램은 간혹 혼란을 느끼게 한다. 실제 벌어진 사건을 설명하면서 ‘실제 사건과는 관련 없음’이라든가, ‘자료화면’을 보여주면 시청자는 혼란을 느낀다. ‘재연 드라마’나 ‘사건 25시’ 미국에서 자주 방영되는 뉴스프로그램의 ‘추격장면’ 같은 것들도 그렇다. 그것은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시청자는 오히려 허구의 가상현실처럼 느낀다. 역으로 현실이 허구처럼 과장되고, 치장되어 보여지는 것이다. 로버트 저메키스는 <누가 로저 래빗을 모함했나?>부터 일관되게 환상을 통하여 현실을 재구성하는 방법을 택했다. ‘현실’의 소재를 이용하여 ‘환상’을 창조하고, 그 환상을 통해 관객을 새로운 ‘현실’로 인도하면서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한 것이다. <콘택트>에서 앨리가 만난 것은 외계인이지만, 그것은 다른 얼굴의 자신, 다른 시간을 거친 자신이기도 한다. 그녀는 이미 죽은 자신의 부친을 만난 것이다. 마치 <캐스트 어웨이>에서 척의 동료들이, 이미 마음 속에 묻어버린 척을 받아들이는 낯섦처럼. 그렇다면 척의 무인도는 어쩌면, 엘리의 외계인이 아닐까. 그들은 미지의 경험을 통하여, 새로운 시공간의 체험을 통하여 새로운 자신을 만난다. 쉬어가는 영화들? 진정한 장인정신 그런데 로버트 저메키스는 <캐스트 어웨이>를 만들던 도중에 <왓 라이즈 비니스>를 만들었다. 무인도에서 4년의 세월을 보낸 뒤 달라진 척을 연기하기 위해 톰 행크스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톰 행크스가 식이요법과 운동으로 20kg여를 감량할 동안, 로버트 저메키스는 <왓 라이즈 비니스>를 만들었다. 그리고 톰 행크스의 준비가 끝나자 다시 <캐스트 어웨이>의 나머지를 찍었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쉰들러 리스트>와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중간에 <쥬라기 공원>을 찍으며 ‘테크닉’이 녹슬지 않았나 실험해본 것처럼. 그들에게 영화란, 때로 오락이고, 때로 예술이다. 그걸 결정짓는 것은 어디까지나 ‘선택’에 달려 있다. 그러나 <캐스트 어웨이>의 의미심장한 질문과 달리, <왓 라이즈 비니스>에는 어떤 심층이 없다. <왓 라이즈 비니스>는 철저한 상업영화, 철저한 오락영화다. <왓 라이즈 비니스>의 탄생에는 이유가 있다. 로버트 저메키스는 1998년 제작자 스티브 스타키, 잭 랍케와 함께 프로덕션 이미지무버스를 설립했다. 기획회의에서 로버트 저메키스는 서스펜스물을 만들고 싶다고 제안했다. 마침 드림웍스에서 클라크 그레그의 <왓 라이즈 비니스>를 보여주었고, 저메키스는 바로 승낙했다. <납골당의 미스터리>라는 TV시리즈를 제작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로버트 저메키스는 ‘싸구려’ 오락영화의 열렬한 팬이기도 하다. 베이비붐 세대는 어디까지나 팝 컬처의 자식인 것이다. 그 증거로 <왓 라이즈 비니스>는 딱 들어맞는다. <왓 라이즈 비니스>는 히치콕을 비롯한 스릴러 장르의 모든 것을 전수받은 장인의 세련된 작품이다. 자신의 서명이 굳이 필요하지는 않지만, 누구나 선뜻 손에 집어들 만큼 유려한. 로버트 저메키스가 번들거리는 80년대를 지나, X세대의 90년대를 거치고, 21세기에도 유효한 상업영화감독으로 존재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철저한 장인의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동시에 로버트 저메키스는 자신만의 철학도 지니고 있다. 교차로에 서 있는 척의 모습처럼, 로버트 저메키스는 어느 길로 가든 많은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 때로 그것이 폭풍우라 해도,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무인도에 갇혀 있는 동안, 로버트 저메키스는 자기만의 시간을 유지하며 진정한 ‘휴식’을 취할 만한 인간이다. 전혀 다른 영화 <캐스트 어웨이>와 <왓 라이즈 비니스>가 하나의 시간 속에 공존하는 것처럼. 김봉석 기자lotus@hani.co.kr

코믹터치의 휴먼드라마

충무로 시나리오의 역사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사실들을 몇 가지 발견할 수 있다. 먼저 눈에 띄는 현상은 80년대 후반부터 확연해지는 세대간의 단절이다. 60년대의 작가들 중 70년대까지 활동한 사람들은 무수히 많은 반면 80년대의 작가들 중 90년대 이후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극히 드문 것이다. 그 원인에 대한 본격적인 규명은 훗날의 영화사가들에게 맡겨야겠지만 추측건대 아마도 80년대 후반부터 정착되기 시작한 젊은 기획자들 중심의 프로듀서시스템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이 젊은 기획자들이 한국 영화제작의 중심에 서게 된 90년대 이후에는 80년대 이전 작가들에게 작품활동을 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해는 할 수 있지만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다. 90년대 이후의 또다른 특징으로는 시나리오를 직접 쓰는 감독들이 대거 등장했다는 것을 꼽을 수 있다. 일단 시나리오를 쓰는 능력만 검증받으면 너나없이 모두 감독 겸업 선언을 하고 나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하나의 트렌드처럼 굳어가고 있는 현상이다. 이 역시 복잡다단한 요인들이 결합돼 나타난 현상인데 그 결과 전업적인 시나리오작가들의 영역은 대폭 축소되지 않을 수 없었다. 덕분에 90년대 이후에는 80년대 이전처럼 다작(多作)을 하는 작가들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선배세대의 작가들과는 절연되고, 제작편수는 줄어들고, 감독들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니, 웬만한 열정과 재능만으로는 작가로서 살아남기 힘든 곳이 바로 충무로다. 박계옥은 그런 격동의 90년대 중반에 데뷔하여 30살이 되기 전에 무려 8편의 작품들을 극장에 올린 전형적인 신세대 작가다. 박계옥이 영화의 세계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은 동국대 국문과 재학 시절 학내 영화동아리 ‘디딤돌’의 회원으로 활동하면서부터이다. 대학 졸업 이후 그는 영상작가전문교육원에 다니면서 쓴 습작시나리오를 가지고 영화사들을 순방하다가 당시 기획시대의 프로듀서로 일하던 차승재를 만나 충무로와 인연을 맺게 된다. 박계옥이 <너무 많이 본 사내 이야기>로 삼성영상사업단 캐치원 개국기념 시나리오공모에 입선한 것은 이미 차승재와 함께 <깡패수업>의 시나리오를 발전시키고 있던 중이었다. 기획시대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영화사인 우노필름을 차린 차승재는 창립작품인 <돈을 갖고 튀어라>의 시나리오작업에도 박계옥을 참여시킨다. 이 두 작품이 모두 흥행에 성공함으로써 그는 코믹액션에 강한 신세대 작가로 자신의 존재를 충무로에 알리면서 현재 싸이더스라는 대기업으로 성장한 우노필름의 개국공신이 된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이런 이미지가 그리 탐탁지 않은 눈치다. “코믹터치가 있다고 해서 모두 코미디로 분류하는 것은 옳지 않아요. 저는 코미디보다는 휴먼드라마에 가까운 작품을 써왔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한순간의 오해로 운명이 뒤바뀐 건달과 의사의 이야기인 <스카이닥터>나 판사인 아버지와 변호사인 아들의 이야기인 <박대박>을 보면 그의 항변에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포장은 코미디이지만 내용은 캐릭터드라마인 것이다. 고등학교의 문제아들과 음악교사를 다룬 <짱>이나 죽어가는 아버지와 어린 아들의 교감을 다룬 <남자이야기>를 보면 상업영화의 컨벤션 안에서도 따뜻함과 희망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왕성한 창작력의 젊은 작가는 지난해 차태현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SBS 미니시리즈 <쥴리엣의 남자>를 발표함으로써 방송사쪽으로도 그 활동영역을 넓혔다. 아무래도 영화보다는 자체 검열의 수위가 높은 것이 공중파 방송이고 보니 나름대로 마음고생도 심했던 모양이지만 그런대로 높은 시청률을 확보해 성공적인 데뷔였다는 것이 중평이다. 대표작을 꼽아달라고 하니 박계옥은 지레 손을 훼훼 내저으며 난색을 표한다. “저는 이제 30대 초반이 되었고 아직도 신인작가일 뿐입니다. 그동안의 작품들이 흡족치 못했던 것도 에누리 없는 사실이고요. 언젠가 자신있게 대표작을 꼽을 수 있을 때까지 쓰고 또 써야죠.” ▣ 시나리오 필모그래피 1995년 김상진의 <돈을 갖고 튀어라> ⓥ 96년 김상진의 <깡패수업> ⓥ 97년 전찬호의 <스카이닥터> ⓥ 양영철의 <박대박> ⓥ 양윤호의 <미스터 콘돔> ⓥ 98년 김상진의 <투캅스3> ⓥ 양윤호의 <짱> ⓥ 심승보의 <남자이야기> ⓥ 2000년 장문일의 <행복한 장의사> ⓥ ⓥ는 비디오 출시작

무인도에 불어온 ‘착한 남자’ 바람, <캐스트 어웨이>의 톰 행크스

톰 행크스를 ‘나이스 가이’라고 부르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까. 멀게는 <스플래시>, 가깝게는 <포레스트 검프>부터 <그린 마일>까지 순수하고 선량하면서도 강직한 캐릭터를 그가 도맡아왔기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전형적인 할리우드 남성 스타와는 달리, 그는 자신의 영웅적인 행동 밑바닥에 자리한 두려움과 유약함을 보여줌으로써 오히려 관객의 마음을 끌어당겼다. 그가 연기한 <필라델피아>의 베케트, <포레스트 검프>의 검프, <아폴로13>의 로벨,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밀러 대위 등은 모두 외부적 환경이나 적과 맞서기 위해 이보다 훨씬 어려운 스스로와의 투쟁을 겪어야 했던 인물이었다. 결국 그의 ‘나이스 가이’ 이미지는 지적이진 않지만 사려깊어 보이는 인상과, 근육질은 아니지만 자신의 믿음을 관철시키는 행동력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신작 <캐스트 어웨이>는 이같은 그의 페르소나가 가장 잘 드러난 영화인지도 모른다. 그가 연기한 주인공 척 놀랜드는 페덱스의 해결사로 시간을 정복하기 위해 태어난 듯 열정적으로 일을 하던 중 어느 날 갑자기 무인도에 조난된다. 겉으로 평온해 보이는 이곳에서 그는 무한한 시간과 절대적 고독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적을 만나게 된다. <캐스트 어웨이>에서 톰 행크스는 조직할 시간이나 상대할 사람이 없는 이곳이 얼마나 두려움과 외로움을 주는가를,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치열하게 스스로와 맞부닥치는 한 인간의 실존적 투쟁을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연기 상대라곤 나무와 바람뿐이었다. 마치 무성영화를 만드는 것 같았다”고 설명하는 그는 절박한 상황에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최대치의 용기와 결단을 맨몸뚱이로 소화했다. 사실 <캐스트 어웨이> 속 톰 행크스의 모습이 실감나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영화의 아이디어는 7년 전 그 스스로 제시한 것이기 때문. 당시 그가 20세기 폭스사에 <정글의 척>이라는 제목으로 제안했을 때 이 영화는 지금보다 훨씬 철학적이며 실존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섬에 고립된 인물은 그의 또다른 자아였던 같다”는 폭스 부사장 엘리자베스 게이블러의 이야기처럼, 이 영화는 당시 그의 고민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슈퍼스타로 부상하며 유명세 때문에 바깥 출입도 제대로 할 수 없게 된 그의 고립감이 묻어 있다는 이야기다. 이런 탓인지 영화에 임하는 그의 모습은 영화 속 척 놀랜드의 분투처럼, ‘톰 행크스를 상대로 한 톰 행크스의 싸움’에 다름 아니었다. 피지섬에서 조난 초기 상황을 촬영할 때 225파운드였던 그의 몸무게는 8개월 뒤 다시 본격적인 무인도 로케이션에 들어가면서 170파운드로 줄어 있었다. 영화 속 주인공처럼 코코넛과 해물만으로 식사를 하며 다이어트를 했던 것. 또 작업에 몰두한 나머지 촬영 도중 입은 오른쪽 다리의 상처를 방치했다가 세균이 몸 속으로 퍼져 생명을 잃을 뻔도 했다. 이 작품의 촬영이 끝난 직후 행크스의 얼굴에서 웃음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는 소문도 들리니 그가 얼마나 이 작업에 몰두했는지 알 수 있다. 골든글로브상에 이어 그가 최초로 세 번째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뒤는 남자 주연배우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당연한 일. 이렇게 커다란 작품을 끝내놓은 상황에서도 그는 포레스트 검프처럼 여전히 앞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현재 그는 올 봄 미국에서 를 통해 방영될 예정인 1억2천만달러짜리 10부작 미니시리즈 <밴드 오브 브러더스>에 스티븐 스필버그와 함께 프로듀서로 참여하는 동시에, 이 미니시리즈의 다섯 번째 이야기를 직접 감독하고 있다. 또 곧바로 샘 멘데스의 새 영화 <지옥으로 가는 길>에 동참하게 된다.

스크린을 향해 한글을 쏴라!...송미선

◆개인 프로필 1971년생 1990년 한성대학교 문헌정보학과 입학 1996년 한겨례 문화학교 3기 영화제작학교 입학 1997년 영화터 ‘창’ 설립, <필름컬처> 주간영화제 참여 1998년 제2회 부천영화제 오퍼레이터 1999년 제3회 부천영화제 오퍼레이터, 다큐멘터영화제 2000년 제4회 부천영화제 기술팀 스탭, ‘오슨 웰스 회고전’ 기술팀 2001년 제3회 여성영화제 기술팀 스탭, ‘오즈 야스지로 회고전’ 기술팀 올해로 서른두살이 된 송미선씨. 맞선을 보라는 부모님의 성화가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건만 매번 자신의 직업을 상대에게 설명하는 일이 부쩍 번거롭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기자나 선생이라고 하면 단박에 고개를 끄덕일 텐데 “자막일 하는데요” 하면 한참 뜸을 들이다 “아, 번역하는 거요” 하고 엉뚱한 데를 짚기 일쑤다. 하긴 자신도 영화일을 시작하기 전엔, 자막담당이라고 하면 “와, 영어 하난 끝내주겠군” 했으니까. 각종 영화제를 돌며 자막일을 본 게 벌써 6년째다. 프로그래머가 식탁을 차리고 홍보가 초대를 하는 일이라면, 자막은 차려진 음악의 맛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침과 같다. 침없인 아무 맛도 느낄 수 없듯 다른 언어권의 영화를 우리말로 온전히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게 자막일이다. 한국의 영화제 자막처리 방식은 일반극장 상영때나 외국영화제와는 사뭇 다르다. 극장용과 달리 빌려다 쓰는 필름에 자막을 입힐 수가 없다. ‘희귀문자’인 한글자막을 출품자들이 입혀 놓을 리도 없다. 컴퓨터를 이용해 자막 영상을 화면에 쏘는 간접처리 방식이 개발된 건 영화제 사람들에겐 굉장한 희소식이었다. 필름 위에 매겨진 타임코드에 따라 자막이 시작되고 끝나는 점을 ‘찍은’ 뒤, 적절한 길이로 다듬어진 번역자막을 영사기를 이용해 스크린 한쪽에다 띄우는 것이다. 상영장 어딘가에서 컴퓨터를 매만지고 있는 이가 있다면, 그가 바로 자막담당이다. 돌이켜보면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다섯해였다. 지난해 ‘오슨 웰스 회고전’ 때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등골이 찌르르한다. 프로그램을 다 짜놓은 노트북이 극장 안에서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 무단취득자를 원망할 틈도 없이 부랴부랴 빌려온 데스크 탑에서 작업하던 중 파일이 깨지는 바람에 1시간여 만에 상영이 중단됐다. 부천영화제 사무국까지 가서 다른 저장파일을 들고오긴 했지만 관객에게 미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초창기 실수에 비하면 양반이다. 3시간짜리 영화 상영 내내 대사와 자막이 맞지 않아 패닉상태에 이른 적도 있으니까. 얼마전 ‘오즈 야스지로 회고전’ 자막 담당석에 앉으며, 그는 지난해의 실수를 만회하리라 절치부심했었다. 다행히, 깔끔한 마무리에 모두들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가 자막일을 시작하게 된 건 솔직히 우연에 가까웠다. 한성대 문헌정보학과를 졸업하고 2년동안 여러 직업을 전전하던 그에게 96년 개봉된 <쥬라기 공원>은, 구질구질한 삶을 한번에 날려버릴 엄청난 돈방석으로 비쳐졌다. 그동안 틈틈이 모아둔 돈으로 한겨레 영화제작학교에 덜컥 등록을 했고, 그 무렵 현재 부천영화제 기술팀을 이끌고 있는 김시천씨를 만났다. 한동안 그 밑에서 일을 배우던 송미선씨에게 제일 먼저 주어진 기회는 부천영화제의 ‘점찍기’ 아르바이트였다. 자막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뒤 <필름컬처>영화제, 다큐멘터리영화제, 여성영화제 등 각종 영화제에서 활약하며 ‘퀸 오브 자막’으로 불리기에 이르렀다. 그런 그에게 남은 바람이 있다면 사람들이 자막을 읽으며 그 속에 남모를 땀과 정성이 스며 있음을 한번쯤 떠올려 주는 것이다. 심지현/ 객원기자 simssisi@dreamx.net

한국멜로의 황금시대, 별이지다, <춘향전>의 홍성기 감독

한국영화계의 황금기를 일구었던 원로감독 홍성기씨가 2월3일 타계했다. 홍성기 감독은 86년 고혈압으로 쓰러진 뒤 오랜 와병 끝에, 2월3일 오전 11시20분경 경기도 수원시 자택에서 78년의 생을 마쳤다. 우연의 일치지만 마침 EBS <한국영화걸작선>에서 그의 <춘향전> 방영을 30여분 앞두고 있던 시점이었고, 갑작스런 별세로 이 방송은 뜻밖에 고인에 대한 추모의 자리가 됐다. 홍성기 감독은 80년대 이후 연출에서 손을 떼고 충무로와 별 왕래가 없었던 데다가 오랜 투병생활로 칩거해온 터. 임권택 감독은 “멜로드라마를 많이 찍으면서 신상옥 감독과 함께 당대 한국영화를 열성적으로 이끌던 분이 오랫동안 작품활동 안 하다가 갑자기 돌아가셔서 안타깝기 그지없다”고 조의를 표했다. 삼성서울병원에 5일간 마련된 빈소에는 고인과 오래 함께 작업했던 심우섭 감독, 방기환 조명감독 등 평소의 지인들을 중심으로 김수용, 임권택 감독을 비롯한 영화인들이 다녀갔고, 장례는 지난 2월7일 한국영화인장으로 치러졌다. 요즘 영화세대에게는 생소하겠지만, 홍성기 감독은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멜로드라마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감독이다. 1949년 <여성일기>로 데뷔한 이래 80년 <내가 버린 여자 2>까지 모두 26편의 영화를 만들었고, <별아 내 가슴에> <비극은 없다> 등 인기스타를 내세운 화려하고 세련된 감각의 멜로물로 신상옥 감독과 당대 멜로드라마의 쌍벽을 이뤘다. 1924년생인 홍성기 감독은 공무원 집안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철도국 공무원인 아버지를 따라 이사를 다녔던 그는 만주에서 중학교를 나왔고, 신경 건국대학교 정경학과 2년을 수료한 뒤 만주국립영화학원에서 영화를 공부했다. 시대극으로 유명한 일본의 우치다 도무 감독의 연출부를 거쳤고, 해방 뒤 귀국해 고려영화사에 들어갔다. 당시 <자유만세>를 찍고 있던 최인규 감독의 연출부로 일했는데, 이때 촬영을 맡고 있던 한형모, 미술부의 신상옥 등 훗날 비슷한 시기에 주목받게 되는 감독들을 만난다. 영화인력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이라고는 없었던 국내 실정에서, 이미 촬영과 편집 등 기술적인 훈련을 쌓은 그는 보기드문 재원이었다. 심우섭 감독의 회고에 따르면, <자유만세>를 찍을 때 한형모 촬영감독이 시위조로 촬영을 일시 거부한 적이 있는데, 최 감독이 홍성기 감독에게 대신 촬영을 맡기는 바람에 이틀 만에 돌아온 에피소드도 있었다고. 영화 테크닉을 지닌 인력이 드물었던 환경에서 그는 비교적 빨리 충무로의 도제시스템에서 독립할 수 있었고, 1949년 국내 최초의 컬러영화로 기록되는 16mm 작품 <여성일기>로 데뷔했다. 친구의 오빠를 사랑하지만 유부남임을 알게 되자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고 보육원 사업에 전념하는 여성을 그린 <여성일기>는, 뒷날 스타가 된 황정순의 데뷔작이기도 하다. 전쟁의 여파로 군사물과 반공영화가 주류를 이루던 54년에 만든 공군 소재의 두 번째 영화 <출격명령>을 제외하면, 그의 영화는 전형적인 멜로드라마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한센병에 걸린 시인 한하운의 사랑을 모티브로 한 55년작 <열애>, 불륜의 도피행각을 벌이지만 결국 가정으로 돌아오는 소설가의 이야기인 <실락원의 별>과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벌이는 젊은이들의 사랑을 그린 <청춘극장> 등 김내성의 베스트셀러를 각색한 영화, TV가 없던 당시 많은 인기를 끌었던 라디오 드라마를 각색한 <산 넘어 바다 건너> 등 대중적인 감수성에 충실한 상업적 멜로드라마로, 전후의 혼란 속에 위안거리를 찾던 대중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고인의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낭송했던 영화평론가 김종원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50년대 중반부터 60년대 초반까지 약 8년간 가장 잘 나가는 대표적인 흥행감독”이었으며, “당시 멜로드라마의 상징적인 존재”였다. 특히 박계주의 인기 신문연재소설을 각색한 1958년작 <별아 내 가슴에>는 외아들을 키우며 독립운동을 하러 떠난 남편을 20년간 기다리는 여인의 눈물겨운 사연으로 대단한 인기를 끌었고, 이후 한국영화 붐에 일조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이 영화의 성공 뒤 그는 그동안 영화에서 짝을 이뤄온 주연배우 김지미씨와 결혼하면서 연예계의 뉴스메이커로 떠오르기도 했다. 당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였지만, 철저한 상업영화 공식에 충실한 그의 작품은 평단에서 이렇다할 인정을 받지 못했다. 게다가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과 맞붙어 화제를 모았던 <춘향전>이 흥행에 참패하면서,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피해가 컸다는 게 지인들의 말이다. 61년 1월에 개봉한 <춘향전>과 <성춘향>의 흥행대결은 당대의 화젯거리였다. 두 작품 모두 국내에서 처음 시도된 컬러 시네마스코프 영화이며, 최인규 감독 문하 동인이면서 당대의 라이벌격인 홍성기, 신상옥 감독이 각각 부인이자 당대 최고의 여배우인 김지미, 최은희를 내세워 만든 영화란 점이 세인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개봉 전에는 흥행 귀재였던 홍성기 감독의 <춘향전>이 더 많은 기대를 모았으나, 뚜껑을 열어본 결과 열흘 늦게 극장에 걸린 <성춘향>에 관객이 몰렸다. 우선 캐스팅에서 주인공 이도령 역에 신인급이던 신귀식을 내세운 <춘향전>이 당대의 스타 김진규를 내세운 <성춘향>에 밀렸고, 허장강과 도금봉이 연기한 <성춘향>의 코믹한 방자와 향단이가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한 데 비해 진지한 이미지로 알려진 김동원이 연기한 <춘향전>의 방자가 어색했던 것도 실패의 주된 이유였다. “<춘향전> 끝나고 충격을 엄청나게 받았다”고 당시 홍성기 감독을 회고하는 심 감독은, “신필림에서도 만든다니까 먼저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초조해서 급하게 만들었겠지만, 그래도 <성춘향>의 코믹성 대신 우리 특유의 잔잔한 사랑이야기가 더 있다”며 당시 관객의 외면이 아쉽다고 말했다. <춘향전>의 실패 이후에도 <에밀레종> 같은 시대물, <별은 멀어도> 같은 멜로드라마를 만들긴 했지만, 이렇다할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진지한 문예영화와 사극이 대세를 이룬 60년대가 지나는 동안 그의 영화는 점차 관객에게서 멀어졌고, 김지미씨와의 결혼도 파경을 맞는 등 그의 영화인생 말년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다. 70년에 <너와 내가 아픔을 같이 했을 때>를 만든 뒤 10년의 침묵 끝에 다시 메가폰을 잡았지만, <내가 버린 여자2>라는 졸속 멜로드라마 속편 기획을 마지막으로 의욕을 잃고 영화를 접었다. 1955년 <애인>부터 촬영부로 들어가 <실락원의 별> <재생> <길은 멀어도> 등 5편 이상의 영화를 촬영하고, 틈틈이 편집을 도맡아하며 홍성기 감독과 함께 작업해온 심우섭 감독은, 그가 “한마디로 다정다감한 분”이라고 기억한다. “정에 약해서 누구든 어려우면 주머니에 있는 돈을 세지도 않고 줘버리고, 누가 사정을 하면 자르질 못하는” 성격이라며, 배우나 스탭을 쓸 때도 인정에 이끌려 적당한 인력을 쓰지 못할 경우가 생길 정도였다고. 하지만 카메라의 메커니즘을 잘 아는 감독이라 앵글까지 다 그려진 꼼꼼한 콘티 구성과 편집, 촬영 등에 재주가 많고, 배우의 연기 조절에 능한 감독이었다는 게 그의 말이다. 김수용 감독 역시 전성기 홍 감독의 영화가 “콘티 확실하고, 연기 지도가 좋고, 투자도 많이 한 수준급 멜로드라마”라며, “화려한 대작들로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초반에 어떤 브릿지 역할을 했던 1급 감독”이라고 그에 대해 회고했다. 작품성에선 높은 성가를 누리지 못한다 해도 홍성기 감독은 한국영화 황금기의 토양을 가꾸었다. 전후의 폐허 아래서 곤궁과 불안에 지친 한국인들에게 그는 따뜻한 벗 같은 멜로의 세계를 선사했고, 맞은편에선 김기영, 유현목 등 미학적 에너지로 충만한 감독들이 자기만의 작품세계를 펼쳐나가고 있었다. 한국영화의 전성기로 일컬어지는 1960년대엔 그 모든 것이 공존하며 꿈틀거렸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