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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궁금해 죽겠어!

여러분이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을 읽고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아니, 그건 너무 구하기 쉬워서 안 되겠다. 여러분이 헌책방에서 구한 마저리 앨링검의 절판된 추리소설을 기차에서 읽고 있었다고 생각해보세요. 한창 미스터리가 무르익어갈 때 잠시 책을 의자에 놔두고 화장실에 다녀왔는데, 돌아와서 보니 그 책이 사라지고 없어졌다고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아직 수집해야 할 증거는 산더미 같고 범인도 궁금한데, 그 책의 나머지를 읽을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는 거예요. 오래 전에 저한테 비슷한 일이 일어난 적 있었습니다. <`AFKN`>에서 하는 오토 플레밍거의 <로라>를 보고 있었지요. 아름다운 디자이너 로라가 얼굴에 총을 맞은 시체가 되어 누워 있고 우리의 맥퍼슨 형사가 차근차근 사건을 수사하던 중이었습니다. 용의자들이 하나하나 줄지어 등장하기 시작하고 결정적인 1차 반전(그게 뭐냐고요? 그건 알려드릴 수 없군요)이 일어나는 바로 그 순간… 그만 정전이 되어버렸답니다. 1시간 뒤 다시 전기가 들어왔지만 이미 영화는 끝난 뒤였습니다. 못하는 영어로 간신히 분위기로 때려가며 사건을 따라가고 있었는데, 그 모든 노력이 허사였던 거예요. 애꿎은 텔레비전에 주먹질을 해봐야 제 손만 아플 뿐이었지요. 물론 전에도 이런 식으로 끝을 놓친 영화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 영화들은 <로라>처럼 추리영화가 아니었습니다. 정체불명의 살인범을 뒤에 남겨놓지는 않았지요. 전에 끝을 못 본 <아반티!>라는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사실 전 그 영화 끝이 그렇게 궁금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텔레비전에서 해준다면 시간을 기억해서 잭 레먼 아빠 장례식에 어떤 소동이 일어났는지 한번 확인해보기는 하겠죠. 그러나 비디오를 사서 하나하나 확인할 생각은 없어요. 토막난 <로라>는 잊을 만하면 툭툭 튀어나와 저를 괴롭혔습니다. 한번 그 영화를 찾아 비디오 가게들을 뒤지기도 했어요. 모 비디오 가이드에 그 영화가 <라우라>라는 제목으로 나왔다는 정보를 읽었으니까요. 전 아직도 그 정보가 사실인지 모르겠습니다. 진짜 <로라>일 수도 있고 이탈리아 에로영화인 <라우라>의 잘못된 정보일 수도 있겠죠. 결국 <로라>는 제가 인터넷으로 구입한 최초의 비디오들 중 하나가 되었는데(물론 같은 주연배우가 등장하는 <유령과 뮤어 부인>도 자극제가 되었겠지만요) 결말을 확인할 때 기분이 정말 좋더군요. 십여년에 걸친 미스터리가 결국 풀린 셈이었으니까요. 물론 범인의 정체는 그렇게까지 놀라운 것은 아니었고 저 역시 어느 정도 짐작했던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즐거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로라>는 제가 기억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영화였고 그 영화의 진짜 알맹이는 그 얄미운 정전이 끊어먹은 후반부였습니다. 얼마 전에 인터넷을 통해 최근에 재발굴된 이 영화의 원작인 베라 카스파리의 동명소설을 구입했습니다. 막 왈도 라이데커가 내레이터인 제1부를 읽기 시작하는 중이랍니다. 감회가 새로워요. 책 앞에 인쇄된 진 티어니의 사진을 손톱으로 툭툭 치기만 해도 추억이 방울방울 솟아오르는군요. djuna01@hanmail.net

베트남, 한국영화 쇼크의 현장

■ 한국배우들 최고의 인기 구가 드라마 선풍은 패션으로 이어져 <찜>이 기록적인 흥행을 세운 나라, 영화 잡지를 펼치면 한국 배우들로 도배된 나라, 인기연예인 10명을 뽑으면 8명이 한국 배우인 나라, TV엔 한국 드라마가 쉼 없이 방영되는 나라. 한국보다 한국 배우와 한국 영화를 더 좋아하는 베트남을 찾아갔다. 30여년전, 미처 말을 걸기도 전에 적이 되어 만났으나, 이젠 영화와 드라마로 한국의 마음이 가장 깊이 전해지는 나라가 된 베트남은, 느리지만 즐겁게 영화를 알아가고 있었다.-편집자 ‘깜온’은 ‘감사합니다’라는 말이다. 유럽 선교사가 만들었다는 귁구(國語)의 알파벳 외양과 달리 ‘깜온’은 중국말 ‘감은’(感恩)에서 왔다. 웃 사람에게 ‘깜온’ 할 때 붙이는 ‘신’은 ‘심’(心)에서 왔다. 베트남은 우리에게는 미망의 나라다. 서로의 근친을 알아채기 전, 우리는 그곳에 적으로 갔다. 그리고 사회주의 국가 베트남, 보트 피플이 빠져나온 암흑의 나라로 우리는 베트남을 치환했다. 구경꾼이 되어 밟은 베트남, 두리안과 리찌, 쫌쫌, 망커우, 망쿳의 과육을 대하며 그새 또 과거가 잊혀진다. 이 향기 짙은 나라의 체제가 사회주의였을까. 일년에 삼모작을 해내는 땅덩어리가, 들판에 지천으로 벌어지는 열매가 그들 사회주의 혁명전쟁의 영웅이었다는 점을 뜸들여 돌이키면서, 착각은 이방인의 나라의 체질에서 왔겠거니, 한다. 한국은 베트남전에 적으로 참전했다. 한국경제인들이 가끔 베트남신문과 TV에 등장하는데, 예외없이 구타사건으로다. 현재 한국은 경제진출규모 4위에 산업재해 - 구타사건 60%라는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선한 웃음은 무방비로 피어난다. 그들은 코레에, 한국에 웃음을 짓는다. 그 웃음이 이유일 것이다. 베트남전 승리의 원동력 구찌터널의 기념품 상점에는 세븐 업과 코카콜라 캔으로 만든 가방이 전시되어 있다. 베트남전에서도 그랬다 한다. 미군 비행기가 추락하면 그것을 해체해서 생활물품을 만들어 썼다. 거기서 나온 링으로 반지를 만들어 끼고, 철빗을 만들어 쓰면서 그들은 그 웃음을 지었을 것이다. 김일성대학과 김책공대를 졸업한 비엔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나쁜 것은 나쁜 것이고 상품이 좋은 것은 좋은 것이다.” 그들의 아량을 이야기하고서야 한국영화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를 통해 묶은 상처를 치유코자 94년 10월 결성된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은 베트남의 현실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진정한 친구들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진 모임이다. 젊은 작가들은 베트남에 관한 소설을 펴내고 영화를 만들자는데 의견을 모았다. 고엽제 피해에 시달리는 인물을 통해 베트남 전쟁을 돌아보는 이대환의 소설 <슬로우 불릿>이 그런 취지에서 올해 초 먼저 나왔다. 소설과는 별도로 모임회원들은 영화 <슬로우 불릿>의 시나리오 작업을 진행중이다. <내일을 여는 집> <십년전>의 소설가 방현석씨가 조우필름에서 제작할 이 영화 시나리오의 대표집필가이다. 그는 취재차 여러번 베트남을 방문했고 현지인들은 ‘새로운 베트남 영화’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 속 깊은 관심을 표했다. 그렇게 하여 ‘유람차’ ‘견학차’ 준비한 베트남행에 ‘…젊은 작가들의 모임’ 주최 ‘베트남 - 한국 문학인 교류의 밤’과 ‘베트남-한국 영화인 간담회’ 일정이 보태졌다. 무덥기 전 작가들과 조우필름 기획자들은 베트남을 찾았다. 6월 6일 호치민시의 훈방호텔에서 열린 한국-베트남 영화인 간담회는 예상 밖의 환영 열기로 가득했다. 원 록 쾅 해방영화사 사장, 뉴엔 반 홍 훈방대학교 총장, 팜 웅어잉 정 감독, 수어 끙 감독, 아시아태평양영화제 최우수 여우상 수상자이기도 한 홍안과 팬들을 몰고다니는 인기배우 꾸 잉 건, 배우 작위를 받은 최고 배우 태안 등과 기자와 학생 등 300여명이 참석해서 좁은 행사장은 북새통을 이뤘다. 전날 아마라호텔에서 열린 ‘베트남-한국 문학인 교류의 밤’에서 상영된 장편다큐멘터리 <농부의 팔>의 감독 반레를 이 자리에서 만날 수 있었다. 반레 감독은 자신을 꼭 시인으로 소개한다. 베트남전에 17살의 어린 나이로 참전한 그는 그 전쟁에서 시인이 되고 싶었던 친구를 잃었다. 그 친구의 이름을 따 시인이 된 그는 자신이 영화와 관련하여 소개될 때에도 ‘시인 반레’라고 한다. 올해 베트남 최고 감독상을 받은 반레 감독은 지난해 구수정 <한겨레21> 통신원을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 <원혼의 유언>을 만들었다. 일년에 5∼7편 만들어진다는 35mm 장편영화, 그중 하나인 이 영화는 과거 베트남전의 과오를 씻기 위한 한국인의 노력을 그린 영화다. 그가 올해 완성한 <농부의 팔>은 고엽제 이후의 삶을 사진으로 찍는 일본 사진작가 다카무라 오로가 주인공이다. 그가 읊는 다큐멘터리 내레이션의 마지막은 이렇다. “문명의 시대에 사람을 죽이는 것이 중세와 다른 점은 거기에 있다. 사람을 살아 있는 상태에서 천천히 죽이는 것. 미국인들은 말한다. 과거는 바꿀 수 없다. 그러나 미래는? 우리는 그 변화를 주시하고 경청할 것이다.” <슬로우 불릿>은 그 ‘바꿀 수 없는’ 과거를 새롭게 바라봄으로써 미래를 만들고자 한다. 베트남전을 새롭게 해석하는 영화이고, 베트남에 사과를 구하려는 영화다. 두나라 영화인 모임에서 작가 방현석씨는 “기존의 베트남 전쟁 영화들이 자극적이었다면, 이 영화는 숙성과 곰삭힘의 미학을 담을 것이다. 충동이 아니라 깊은 곳으로부터 희망을 건져내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폭력이 지배하는 상황 속에서, 담뱃갑 속에 씨를 심고 꽃을 피우는 아름다운 사람의 식물적 저항을 그리겠다”고 밝혀 베트남 영화인들의 공감을 얻었다. 호치민시에서 격주간으로 발행되는 영화잡지 <디엔 안 탄포 호치민>의 팜 투이 넌 편집장은 “전쟁의 기억과 연관된 한국인의 얼굴은 두 가지였다”고 말한다. “베트남에서 철수할 때 두고 간 부인을 찾으러 오는 참전군인을 그린 한국영화를 본 적 있다. 낭만적 측면을 강조한 영화였는데, 그런 사람은 현실에는 많지 않다. 반면 베트남 영화에서 한국인은 언제나 무표정한 얼굴로 사람을 잔인하게 살상하는 군인이었다.” <슬로우 불릿>은 그처럼 갈등하는 기억을 화해시키는 일을 해낼 수 있을까. 베트남 기자들은 시나리오 완성 즉시 번역해달라는 부탁이 득달같다. 한국배우, 혈액형까지 궁금 어쩌면, 베트남과 한국의 화해는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베트남인들은 한국영화를, 한국배우를 사랑한다. 인편에 부탁해서 구한 것일까. 호치민시의 한 상점에 붙은 한국판 <연풍연가> 포스터에서 장동건이 행인들의 시선을 붙잡는다. 장동건의 <친구> 소식도 이곳 사람들에겐 이미 ‘다 아는 얘기’라 선물이 되지 않는다. 흔히 ‘시네’라고 부르는 영화잡지들이 벌써 기사화했다. 가판대의 영화잡지에서 한국배우들의 사진을 찾는 것도 어렵지 않다. 격주간지 <디엔 안 키 트룽> 6월1일치에는 김호진과 이영애가 함께 실렸다. 송윤아와 안재욱, 이정재, 차인표, 오연수, 배용준 등의 사진과 송혜교, 차태현, 손지창의 프로필이, <사랑의 전설>로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이승연의 브로마이드가, 김소연과 원빈의 혈액형부터 신장까지 적혀 있는 팬서비스용 페이지가 있다. TV가 오락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베트남에서 한국드라마는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이걸 우리는 한국 쇼크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말로 한국에 대한 열풍을 설명할 수가 없다. 쇼크는 오래 가지 않는 것인데, 이런 쇼크가 벌써 5년 넘게 지속되고 있다.” 일간지 <사이공 해방>의 기자 낌 엉의 말이다. 한국 텔레비전드라마는 94년 <의가형제> 이후 <모래시계> <별은 내 가슴에> <사랑을 그대 품 안에> <불꽃> <모델> <가을동화> <사랑해 당신을> 등이 방영됐다.한국드라마는 대략 하나씩 번갈아가며 2개 방송사의 전파를 타는데 현재 <사랑의 전설>과 <불꽃>이 방영중이다. 한국 텔레비전드라마는 방송되기만 하면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한다. 인기조사를 하면 10위 안에 8명의 한국배우가 이름을 올리기도 한다, 알려진 대로 베트남에서 장동건의 인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워낙 많은 드라마가 끊임없이 방영되는 것을 보고 궁금했던 것일까, 일간지 <사이공 해방>의 뉴롱 기자는 “한국에서 영화는 50편 정도 제작되는데 드라마는 도대체 얼마나 제작되느냐“고 묻는다. 미니시리즈에 주말연속극에 일일드라마에 아침드라마에 주간드라마까지 3개 방송사가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있으니, 베트남에서 한국드라마 쇼크는 오래 지속될 것 같다. 한국드라마는 베트남에 ‘패션’이라는 것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토마토> 방송 뒤 하노이에는 김희선이 들고다니던 요요와 함께 바바리가 유행했다. 짧은 봄과 가을, 입을 리 없는 바바리를 그들은 샀다. 미용실에는 한국배우들이 걸려 있다.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키며 저렇게 해달라고 말한다. 그래서 머리에 색깔을 들인 사람 또한 뜨문뜨문 보인다. 50이 넘은 베트남 최고의 배우인 태안은 한국배우의 연기에 매료되었다. 태안은 <인도차이나>에 출연한 배우이자 호치민시 영화위원회 집행위원장이다. 태안은 장동건이 베트남에 왔을 때 호텔에 몰려든 인파에 자신도 섞여 있었노라고 고백했다. “한국배우들의 연기를 보면서 진심으로 감복한다. 너무 아름답고 재능있다”고 소감을 덧붙인다. 팜 투이 년은 이런 한국드라마의 인기 비결을 “전통과 종교가 비슷한 문화적 배경”에서 찾는다. “유럽이나 미국의 드라마와 달리 한국드라마에는 가족과 사회에서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유교적 영향이 배어 있다. 한국드라마는 정절과 인간애, 우정 등을 중요시한다. 그것은 아시아 사람들의 주요한 특징이다. 20년 전에는 홍콩과 대만의 드라마 역시 그런 배경 아래 베트남 관객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베트남 사람들이 한국영화를 보면 그들은 자기 나라 드라마인 듯 편안함을 느낀다. 거기다가 한국드라마는 캐스팅에 주력한다. 연기도 잘하지만 잘생긴 배우들이 많다. 다른 인기 요소로는 매력적인 줄거리와 아름다운 영상 그리고 훌륭한 음향효과와 음악을 들 수 있을 듯하다.” 텔레비전에서 발생한 스타파워는 드디어 극장으로까지 전염됐다. 최근의 사례는 <찜>의 개봉이다. <찜>은 <마음을 다 바친 사랑>이란 제목으로 900석 규모의 하노이 탕탄극장에서 지난 3월1일부터 4월15일까지 한달 반이나 상영되었다. 베트남 극장가에서는 보기드문 장기상영이었다. <`Forever`>라는 노래로 몇달간 베스트셀러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안재욱이 출연한 탓도 있지만, 파 투이 년 편집장은 “<찜>이 경쾌한 영화였던 것이 히트요인인 것 같다”고 분석한다. TV드라마 <가을동화>에 비판적인 견해를 썼다가 독자의 엄청난 항의를 받기도 했다는 그는 <찜>에서 한국 주류영화 이야기구조의 새로운 면을 발견했다. “한국에는 주인공이 극의 끝에 병에 걸려 죽고, 사랑하는 남녀가 울리기 위한 목적으로 이끌어가는 고전적인 영화만 있다고 생각했는데 <찜>은 달랐다.”이 인기에 힘입어 김혜수가 출연한 1991년 작품 <잃어버린 너>가 호치민시의 탕농극장에서 지각 개봉하기도 했다. 그들만의 ‘씨네’, 그들만의 극장 베트남에서 ‘씨네’라는 말은 ‘영화’와 드라마를 통칭한다. 영화사 또한 영화와 TV드라마, CF를 함께 만든다. 우리가 영화하면 떠올리는 35mm영화는 베트남 문화사업국의 지원으로 일년에 6∼7편 정도 만들어진다. 연간 1~2편 씩 만들어내는 남쪽 호치민 해방영화사와 북쪽 하노이의 베트남영화사가 가장 큰 규모의 영화사다. 베트남에서는 “극장 가자”는 한마디에 뺨을 맞을 수도 있다. 어둠 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책임지겠다는 동의가 이루어졌을 때야 맘먹고 하는 제안이다. 몇몇 극장은 두 가지 좌석이 구분되는데, 그들 사이의 애정을 돈독히 하는 행위의 ‘편함’과 ‘불편함’이 기준이다. 붕타우에서 만난 팅은 유창한 영어를 구사해서 떠듬떠듬이나마 통역 없이 나눴던 유일한 대화의 주인공. “극장에 자주 가느냐”는 말에 머쓱한 웃음을 먼저 짓더니, “자주 가지는 않는다”며 자신을 변호하는 말을 덧붙인다. “극장에선 영화를 보면서 동시에 방해받지 않고 사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극장은 그렇게 ‘은밀함’을 연상시키는 공간이다. 7개의 스크린이 있는 ‘멀티플렉스’ 호치민의 탕송난극장 앞에서 사진을 찍자 둘씩 짝지은 연인들이 기둥 뒤로 숨고 앵글 밖으로 밀려나며 쭈뼛거린다. 결국 극장 관리인이 나왔다. “여기서는 사진을 찍으면 안 된다. 그것이 규칙이다.” 이 멀티플렉스는 한 극장에 50개의 좌석이 있는데 모두 비디오로 상영되고 있다.베트남은 비디오나 CD로 영화가 수입된다. 호치민 9개 대극장 중 탕농극장만 프린트 상영을 한다. 국영배급사(fafilm, Film Distributing Center)도 비디오 배급에 주력한다. 그외에도 개인적으로 수입되고 유통되는 시장은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 <타이타닉> 같은 경우도 비디오로 돌았다. 비디오가 필름을 대체한다는 것이 베트남영화의 열악한 환경을 말해주는 건 아닐까. 돌아오는 대답은 담담했다. “비디오가 등장하기 이전에는 베트남의 모든 극장에서도 35mm 영사기를 사용했다. 80년대 초반 베트남 영화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대만과 홍콩영화가 비디오로 보급되었고, 사회주의권 영화를 주로 수입하던 국영배급사 또한 필름을 수입하지 않았다. 영사기는 지금도 극장에 남아 있다. 더 훌륭한 화질의 영화를 필름으로 상영할 필요가 생기면, 이 극장들도 좀더 훌륭한 영사기를 구비하게 될 것이다.” 판 투이 년은 비디오가 보급되기 이전에는 극장에서 필름을 틀 수밖에 없었지만 비디오라는 싼 매체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필름을 굳이 틀 필요가 없어졌다고 말한다. 이것도 사회주의이념의 한 단면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더 많은 사람들이 적은 비용으로 즐길 수 있는 비디오는 더 혁명적이라고. 그것이 비록 화질이 필름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어쨌든, 캄보디아 전쟁과 미국의 봉쇄정책으로 극도의 빈곤을 강요당하는 상황에서 값싼 비디오는 영화에 대한 베트남의 욕구를 채워주는 유용한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86년 베트남식 개방정책 도이모이가 시작된 이후, 부분적 시장경제가 도입되고 경제개발이 추진되면서 제대로 된 영상시스템과 음향설비를 갖춘 극장이 생겨났다. 하노이의 국가영화상영센터(1200석)와 탕탄극장이 그것이다. 이익이 난다고 판단이 되는 영화는 프린트로 수입해서 이곳에서 상영한다. <찜>도 그런 영화였다. 호치민시의 탕농극장 역시 필름상영극장이다. 여기서 필름으로 상영된 <미이라2>는 일주일 만에 2500명의 관객을 동원해 ‘최고의 흥행’을 기록한 영화가 되었다. 이제 이 흥행기록은 수시로 깨질 것이다. 베트남 영화산업은 출발선에 있다. 베트남 영화는 아직 극장과 관객의 갈증을 채워줄 수량을 확보하지 못했다. 그래서, 베트남 영화인들은 그들 영화의 미래를 묻자, 대답을 하기에 앞서 한국 스크린쿼터의 비결부터 묻는다. 충무로는, 여의도는 베트남의 할리우드가 될 것인가, 한국영화열풍으로 먼저 다가온 그들과 진정한 화해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연대를 모색할 것인가. 오늘의 베트남은 그런 질문 하나를 한국영화를 향해 던지고 있었다. 팜 투이 년(Pham Thuy Nhan) <디엔 안 탄포 호치민> 편집장 인터뷰 “불이 붙어야 연기도 날 텐데” 베트남에는 전국 규모의 잡지는 없고 도시 단위의 영화잡지가 있다. 호치민에만도 6개의 영화잡지가 있다. 대부분 ‘영화’를 뜻하는 ‘디엔 안’으로 제호가 시작된다. 해방영화사에서 만드는 <디엔 안 탄포 호치민>(Dien Anh Thanh Pho Hochiminh)은 호치민뿐만 아니라 파리와 런던의 베트남사회에서도 읽히는 잡지. 편집장 판 투이 년은 직함이 많다. 베트남 최고의 극작가이자, 해방영화사 편집실장이고 베트남 문인회 작가이다. ‘해방’ 이전, 그러니까 베트남 통일 이전에는 영화학교에서 영화를 가르쳤다. 한국영화감독에 비해서 베트남의 감독들이 늙었다고 농담을 하시는데. + 베트남에서 젊은 감독이라고 한다면 모두 40대를 넘긴 사람들이다. 베트남에서 만들어지는 영화 수가 적기 때문에 감독이 된다는 것도 어렵다. ‘감독’이란 호칭은 어느 정도 인증의 경향이 있어서 영화를 만들고서도 감독이라는 호칭을 부를 수 없다고 여겨지는 경우도 있다. 86년 도이모이 이후 창작분위기가 쇄신되었고 이런 분위기에서 감독들이 유명한 작품들을 생산하였다. 우리가 젊은 감독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현재 베트남을 이끌어가는 영화감독들로 중국의 5세대감독과 비슷한 연배다. 비엣 린(<유랑 서커스단> 1998, <충쿠> 1999), 르 호앙(<먼 여행> 1997), 뉴엥 빈 손, 다오 바 선(드라마 <머나먼 쏭바강> 베트남 감독), 루이 투엥 닝, 부엉 뒹, 뿌이 띠엥 선, 휴엔 딴 반(<슬픈 인생>, 1999) 등은 세계영화계에서 인정받는 젊은 감독으로 거론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당 낫 민(<구아바의 계절> <향수> <강가의 소녀> )은 ‘늙은’ 감독이긴 하지만 빼놓을 수 없을 듯하다. 남과 북의 영화 경향이 어떻게 다른가. + 이에 대한 설명은 베트남의 영화역사가 될 것 같은데. 1975년 이전은 북부와 남부로 갈라져 있었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영화생산방식이 갈라졌다. 북부는 정책상 필요한 영화를 많이 만드는데 남부는 민간 영화사들이 많았다. 하지만 해방 뒤 남부와 북부 모두 사회주의베트남 체제로 가게 되었다. 그때부터 민영의 참여는 사라졌고 남과 북에 센터 역할을 하는 영화사를 건립하였다. 북쪽이 베트남영화사이고 남쪽이 해방영화사이다. 해방영화사는 전쟁 때 설립되어서 해방 뒤 재설립된 것이다. 그때 전국적으로 40개의 영화사가 설립되었다. 해방영화사는 50% 정도가 영화활동을 했던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그것이 86년 도이모이 이후의 경향의 맹아를 간직하고 있었다. 외국에서 들어오는 자본의 경우 남쪽과 합작한다. 법적으로는 모든 영화사들이 국영이지만 내용적으로 아닌 것이 많았다. 뒤에 돈을 대는 돈줄이 있는 것이다. 베트남 영화산업의 당면과제는 무엇일까. + 80년대 초반, 몇년간 홍콩영화가 큰 인기를 끌었고, 홍콩영화가 시들해지자 자국영화에 대한 요구가 생겼다. 이때 작은 영화사들에서 홍콩영화를 본떠 비디오를 제작했다. 이것이 베트남영화 상업화의 시작이다. 리용이라는 배우는 도요타자동차를 사는 등 지금의 장동건 같은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정부에서는 이런 붐에 무관심했고 올바른 방향으로 활용하지 못했다. 베트남영화 발전을 위한 내재적 힘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래서 도이모이 이후 할리우드영화가 들어오자 불이 꺼져버렸다. 요즘에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영화사들도 많다. 영화개방은 영화산업에 깊은 좌절을 주었다. 다른 아시아 국가와 마찬가지로 베트남도 할리우드, 홍콩과 경쟁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그렇지만 베트남영화는 프랑스 아미앵, 베를린, 싱가포르 등의 국제영화제에서 예술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일년에 생산되는 6∼7편을 제외하면 모두다 TV물들이다. 이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 모든 배우와 감독들은 베트남 영화산업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영화산업이 비중있는 사업의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현재로서는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지금은 대중적인 오락 여가 문화를 TV가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이 없으면 연기도 없다”는 베트남 속담처럼 말이다. 호치민=글·사진 구둘래/ 객원기자 ·통역 구수정 <한겨레21> 통신원

프랑스영화 대약진

■ 상반지 점유율 55% 돌파, 일각에선 상업적 대작주의 경계 자국영화 시장점유율 55%! 할리우드영화를 저주하는 프랑스영화인들의 기원이 하늘에 닿아서일까. 프랑스영화의 믿기 어려운 질주가 멈출 줄 모르고 있다. 지난주 서울에서 열린 프랑스영화제에 온 프랑스감독들도 그랬지만, 대부분의 프랑스영화인들은 반할리우드 혹은 문화적 다양성의 열혈 전도사들이다. 국제영화제에서 할리우드영화의 패권주의를 비난하거나 자유무역시대에도 문화의 예외성이 옹호돼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거나 한국의 스크린쿼터투쟁을 입이 마르게 칭송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이 프랑스영화인이다(유사 할리우드 키드인 뤽 베송조차 그랬다). 그러나 막상 프랑스관객은 별로 귀담아듣지 않았던 모양이다. 1996년 37%를 넘어섰던 자국 시장점유율이 28.5%까지 떨어진 것이다. 그런데 올해 들어서자마자 <늑대의 후예> 등을 필두로 프랑스영화들이 엄청난 기세를 올리고 있는 것이다. 작품의 힘이 이룬 이유있는 흥행 아멜리에 지난 52주간의 흥행순위를 보면, 박스오피스에서 10위 안에 톱을 포함 프랑스영화가 5편을 차지해 시장점유율 55%를 주도했다. 이 수치는 지난해(28.5%)의 거의 두배. 여기엔 전국 800만명에 가까운 관객을 모은 코미디 <거짓말을 한다면, 진실2>와 <플래카드>, 액션 스펙터클 <늑대의 후예>, 우화적인 색채를 띤 코미디 <아멜리에>의 대대적인 성공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외에도 올 개봉작 중 <루브르의 유령, 벨페고어> <야마카지> <몽파르나스 탑> 등이 전국적으로 200만명의 관객을 모아 지난 5개월간 전국적으로 100만명 이상의 관객을 모은 프랑스영화 수는 10편에 이른다. 이는 전국 1000만명을 넘긴 <택시2>와 같은 예외적인 성공을 빼고는 1년 동안 전국 100만명을 넘긴 영화가 7편에 지나지 않던 지난해와 좋은 대조를 이룬다. 프랑스영화 시장점유율이 50%를 넘은 것은 20년 전인 82년의 53.8% 이후 올해가 처음이다. 현재 프랑스에선 이런 현상에 대한 요인분석과 이 상태가 계속 유지될 수 있을지에 대한 조심스런 전망이 나오고 있다. 작품 외적인 요인으로는 우선 패스제도의 성공이 꼽히고 있다. 지난해 3월 말 UGC에 의해 시작된 고몽과 MK2까지 동참한 패스는 한달에 98프랑만 내면 동일 체인 내 극장에서는 무제한적으로 영화를 볼 수 있는 제도. 패스 발행 이후 UGC 22.3%, 고몽 9.3%, MK2 8.7%씩 관객 수가 증가해 전체적으로 지난해 관객 수가 7.5% 늘어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대형복합관으로 몰리는 젊은이들에게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비해 프랑스영화는 2순위였는데 패스가 등장한 이후 우선순위 개념 자체가 많이 사라졌다. 흥행가능성이 있는 영화들의 배급망이 훨씬 넓어졌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요인. 지난해의 경우 <택시2>를 제외하고 흥행영화의 평균 프린트 수는 451벌이었는데 올해는 526벌로 증가했다. <거짓말을 한다면, 진실2>의 경우 전편의 성공에 힘입어 전편보다 3배에 해당하는 781벌의 프린트가 준비됐다. 올 상반기에 상대적으로 상업성이 강한 미국영화가 적었다는 점도 한 요인으로 지적된다. 거짓말을 한다면 그러나 무엇보다 작품 자체의 힘이 성공의 뿌리다. 다양한 종류의 프랑스영화가 이 시기에 동시에 개봉된 것이다. 전통적인 프랑스코미디(<거짓말을 한다면, 진실2> <플래카드>), 할리우드형 블록버스터(<늑대의 후예> <루브르의 유령 벨페고어>), ‘작가주의적 코미디’로 불리는 영화들(<아멜리에>)이 올해 상반기에 개봉한 영화들이다. 이외에 프랑수아 오종의 <모래밑에서>와 같은 저예산 작가영화들도 전국적으로 60만∼80만명에 달하는 관객을 모으는 성공을 거뒀다. 이중에서도 코미디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문화예술 종합지 <텔레라마>는 최근 1급스타가 나오지 않는 코미디들의 꾸준한 성공에 초점을 맞춘 특집기사를 내보냈다. 이 기사는 코미디영화가 프랑스영화의 시장점유율이 떨어진 시기에 구원병과 같은 역할을 하다 몇년간 고갈상태에 빠졌는데 최근 다시 회생하며 흥행보증수표가 되었다고 지적한다. 프랑스의 코미디영화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전통적인 코미디와 최근 등장한 작가주의적 코미디로 나뉜다. 기준은 얼마나 영화가 일상에 바탕을 두느냐는 것. 유대인집단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정신없는 단순한 주인공들이 황당한 사기를 당한 뒤 멋지게 복수하는 이야기인 <거짓말을 한다면, 진실2>를 보면서 관객은 쉴새없이 웃지만 그 웃음이 자신에게로 되돌아오지 않는다. 반면 작가주의적 코미디의 대표적 작품으로 꼽히는 지난해 흥행 2위인 <타인의 취향>의 경우 관객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인물들이 남의 시선과 평가에 평소답지 않은 제스처를 시도하는 대목에서 대부분의 유머가 나오는데 정신없이 웃다보면 씁쓸함이 남는다. 현실적인 등장인물의 상황에 동일시된 관객이 결국은 자기를 향해 웃고 있다는 자각이 어느 틈인가에 들기 때문이다. 이처럼 ‘작가주의적인 코미디’의 성공을 놓고 <타인의 취향>의 제작자인 샬 가소는 이런 영화들이 일상에 대한 냉철하지만 웃음어린 관점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대중과 소통없인 예술도 없다 늑대의 후예 그러나 비평가들은 새로운 세대의 등장에 주목해 최근 프랑스영화 흥행물결의 시작은 마티외 카소비츠의 <크림슨 리버>라고 보고 있다. <무빙 픽처스> 최근호에 따르면 프랑스인들이 자국영화에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된 출발점이 <크림슨 리버>라는 것이다. 장 르노, 벵상 카셀이 주연을 맡은 <크림슨 리버>는 외딴 산 속 마을의 엽기적 살인사건을 다룬 스릴러로 개봉 첫주 100만명에 가까운 관객을 불러모았다. 프랑스비평가들이 보기에 뻔뻔스러울 만큼 상업적인 유사 할리우드영화 <크림슨 리버>의 대성공은 프랑스영화계의 기류를 바꿔놓았다. 레전드 엔터프라이즈의 프로듀서 알랭 골드먼은 “영화제작자들이 최근 그들이 자기 만족보다 관객이 무엇을 원하는가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프랑스영화는 더이상 지식층들의 손 안에 있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다. 약간 과장이 섞여 있다 해도 골드먼의 말을 전적으로 부인하긴 힘들다. 올해의 흥행작인 <아멜리에> <늑대의 후예> <루브르의 유령, 벨페고어>는 <크림슨 리버>와 마찬가지로 상대적으로 높은 제작비에다 가파른 편집과 화려한 시각적 스타일로 젊은 관객의 감각과 소통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렇다면 프랑스영화 붐의 진정한 주역은 새로운 세대의 감독들이 만들어내는 감각적인 대작들이라고 보는 편이 정확할 것 같다. 비평가들의 비판에 아랑곳하지 않는 이들은 상대적으로 작가주의와 지적 태도가 존중되던 프랑스영화계를 유보없는 대중주의로 이끌어 산업적 부흥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을 ‘뉴뉴웨이브’라고 명명하고 그들의 기수로 마티외 카소비츠를 지목한 조너선 롬니의 논의는 흥미롭다. 롬니는 카소비츠를 80년대 시네마 뒤 룩의 후예라고 본다. 시네마 뒤 룩은 한국에 누벨이마주로 소개된 뤽 베송(<서브웨이> <니키타>)과 장 자크 베넥스(<디바> <베티블루>) 등 광고와 만화에 영향받고 감각적이고 화려한 비주얼과 상업성에 몰두한 감독들의 작품경향을 일컫는 단어다. 이들은 “대중과 소통하지 않는 예술은 쓸모없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고, 소신대로 상업적 성공을 거뒀다. 잘 알려진 대로 베넥스는 그뒤 부진했지만 뤽 베송은 국제적인 흥행사로 발돋움하면서 많은 후배감독을 거느려 베송학파라는 조어까지 만들어졌다. 데뷔작 <증오>가 칸 감독상을 받으면서 한때 젊은 작가로 오해된 마티외 카소비츠는 실제로 <쥬라기 공원> 티셔츠를 입고 다니면서 자신이 “스티븐 스필버그의 천재성을 알아본 첫 세대”라고 주장하는 인물. 그의 세 번째 작품 <크림슨 리버>는 프랑스적인 요소는 거의 없으며 포스트 매트릭스적인 액션시퀀스와 본드 스타일의 살인장면이 특징인 시네마 뒤 룩의 최신판이라는 게 조너선 롬니의 견해다. <크림슨 리버>는 카소비츠의 단골배우인 벵상 카셀과 뤽 베송의 단골배우인 장 르노가 공동주연을 맡아 선배 뒤 룩 세대와의 상징적 연대를 보여주고 있다고 롬니는 덧붙이고 있다. 배우이기도 한 카소비츠가 출연한 장 피에르 주네의 <아멜리에>는 할리우드적인 요소는 별로 없지만 비주얼과 정서적 호소력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선 <크림슨 리버>와 같은 범주에 묶일 수 있다. ‘반영화’인가 돌파구인가 몽파르나스 탑 프랑스영화의 상업적 약진은 예술영화적 전통의 전통을 소망하는 프랑스비평가들에게 그리 행복한 일만은 아니다. 일찍이 뤽 베송과 장 자크 베넥스를 “누벨바그의 역사적 유산을 파괴한 감독들”로 의심한 비평가들은, 1997년 카소비츠, 주네, 장 쿠넹 등 젊은 감독들은 ‘신경과민자들’로 명명했다. 장 쿠넹의 <도베르만>을 둘러싸고는 <르몽드>의 비판론과 프랑스판 <프리미어>의 옹호론이 맞서기도 했다. 칸 출품이 거절된 올해의 화제작 <아멜리에>을 두고는 <리베라시옹>이 극우적 프로파간다라고 맹공하고 나섰다.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개인 관람을 요청할 만큼 화제가 됐던 <아멜리에>를 <리베라시옹>의 세르주 카간스키는 성적, 인종적, 문화적 다양성을 지워버려 오늘의 프랑스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반영화’라고까지 극언하고 있다. <루브르의 유령, 벨페고어>는 프랑스의 대표적 비평지 <카이에 뒤 시네마>에 의해 뤽 베송 학파의 어리석은 산물로 평가됐다. 이외에도 코스튬 드라마와 호러와 무협을 뒤섞은 <늑대의 후예>, 뤽 베송의 새로운 배급사 유로파가 배급하는 사무라이 같은 거리의 아이들에 관한 영화 <야마카시>, 특수효과 담당 출신 피토프의 대작 <비독>도 평론가들의 호의를 결코 얻을 수 없지만 흥행가도를 질주하고 있는 작품들. 평론가들의 독설에도 불구하고 이 새로운 경향의 작품들은 극장가를 제압하며 프랑스영화의 점유율을 높여주고 있다. 멀티플렉스시대에 발맞춰 더욱 시각적으로 세련되고 더욱 감정적이며 더 높은 제작비가 투입된 프랑스의 뉴뉴웨이브 기세가 한동안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외관에 몰두하는 대작들이 다양한 영화들을 몰아내고 프랑스영화산업을 제패하기를 프랑스영화인들은 원하진 않고 있다. 성지혜/ 파리 통신원 허문영 기자 moon8@hani.co.kr ▶ 프랑스영화 대약진 ▶ 인터뷰 - 감독 장 자크 베넥스 ▶ 인터뷰 - 감독 제라크 코르비오 & 배우 보리스 테랄 ▶ 인터뷰 - CNC 부국장 마크 니콜라

부천영화제 | 부천초이스 (Puchon Choice)

죽어버려, 날 지루하게 하지 말고! 티어스 오브 더 블랙 타이거 Tears of the Black Tiger 타이| 감독 위시트 사사나티엥| 100분| 2001년 상류층인 룸포이의 가정은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방콕을 피해 수판부리라는 시골로 들어간다. 둠의 아버지는 그들에게 임시거처를 마련해 준다. 도시처녀 룸포이와 수줍은 시골 소년 둠은 서로에게 애틋한 감정을 느끼게 되고, 9년 뒤 그들은 방콕의 대학생으로 다시 만난다. 둠은 룸포이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싸움을 벌이다 대학에서 쫓겨나지만 열심히 돈을 벌어 다시 그녀와 만나 결혼할 것을 약속한다. 고향으로 돌아온 둠은 아버지가 도적떼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음을 알게 된다. 둠은 복수에 불타는 갱스터가 된다. ‘블랙 타이거’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는 둠. 조직 속에서의 배신과 암투 속에서 사랑을 지키려는 둠의 운명은 점점 비극 속으로 휘말려 들어간다. <티어스 오브 더 블랙 타이거>의 복고풍 색채는 의도적으로 화려하게 채색한 세트 사용과 필름을 베타테이프로 옮긴 뒤 후반작업을 통해 색을 덧입힘으로써 얻어낸 것이다. 위시트 사사나티엥은 여기에다 60년대식 타이영화의 전통과 연극무대의 차용으로 타이식 스파게티 웨스턴이라고 불릴 만한 독특한 작품을 탄생시켰다. 히어로즈 인 러브 戀愛起義 홍콩·중국| 감독 윙쉬야, 사정봉, 풍덕륜외| 출연 샬린 초이, 로렌스 초우| 85분| 2001년 <히어로즈 인 러브>는 네편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옴니버스영화다. 각 에피소드들은 다소 실험적인 연출스타일을 지닌다. <히어로즈 인 러브>는 오늘날 홍콩영화의 영역을 확장해 보려는 새로운 시도라 할 만하다. 1부 ‘유괴’는 윙쉬야가 감독한 20분짜리 레즈비언영화. 관습적이지 않은 스타일이 돋보인다. 2부 ‘내 사랑’은 대중의 우상인 니콜라스 체(사정봉)와 스티븐 펑(풍덕륜)이 감독을 맡아 관객의 관심을 끈다. 총을 사랑하는 한 청년에 관한 이야기. 약간은 아마추어적인 24분간의 에피소드. 3부 ‘Oh G!’는 디스크자키인 GC 구바이가 연출한 에피소드로 가장 관습적인 내러티브를 지니는 모던하고 도시적인 첫사랑 이야기다. 주연 샬린 초이와 로렌스 초우 모두 신인으로, 자연스럽고 뛰어난 연기를 선보인다. 마지막 4부는 ‘TBC’란 제목의 5분짜리 에피소드로, 제작자인 잔 람브(Jan Lamb)가 감독. 세 에피소드를 연결시키려고 시도했지만 <히어로즈 인 러브>의 각 에피소드들이 결핍하고 있는 깊이를 보강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나비 The Butterfly 한국| 문승욱| 김호정, 강혜정| 106분| 2001 모든 기억을 지우고 싶다. 가능만 하다면 이건 자기 살해의 가장 완벽한 방법이다. <나비>의 한국계 독일인 안나에겐 기억이 죽음 같아서 자살과 완전한 망각 외엔 출구가 없다. 다행히 <나비>의 무대인 가까운 미래의 서울엔 망각의 바이러스가 살고 있고, 영리한 장사꾼들은 망각 바이러스를 찾아 떠나는 패키지 여행상품까지 마련해두었다. 독일에서 온 안나를 가이드 유키와 운전사 K가 맞는다. 납중독자인 유키는 의사의 심각한 경고에도 7개월된 아기를 지우지 않았다. 과거를 잃어버린 K는 기억을 찾아줄 친지를 찾고 있다. 망각의 바이러스를 나비가 인도하며, 나비가 있는 곳엔 어김없이 지독한 산성비가 내린다. 세 사람의 젖은 겨울옷 같은 여정이 시작된다. <이방인>으로 장편 데뷔한 문승욱 감독은 6mm 디지털카메라에 2000년 서울의 모습 그대로를 온기없는 미래공간으로 담는다. 때론 씻어내야 할 독과 한기로, 때론 양수처럼 따뜻한 보금자리로, 때론 고통스런 영적 세척제로 탈바꿈하는 물의 유동하는 이미지에 실려, 이 낯설고 낯익은 공간은 어느새 보는 사람의 어두운 기억에 더운 손을 내민다. 뛰어난 연극배우였던 김호정(안나 역)의 깊은 눈매는 여배우가 미모와 관능을 치장하지 않고도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음을 새삼스레 수긍케 한다. 동기화는 빈곤하지만 <나비>는 섬세하게 포착되고 편집된 화면 곳곳에 묻어 있는, 만든 이의 진심을 외면하기 힘든 영화다. 커먼 웰쓰 Common Wealth 스페인| 감독 알렉스 드 라 이글레시아| 출연 카르멘 마우라| 104분| 2000년 퇴직한 남편을 내심 답답해 하며 욕구불만에 빠져 있는 부동산 중개인 훌리아. 거래 매물인 고급 아파트에서 몰래 만찬을 즐기며 우울한 생활에 낙을 만들어보려던 그녀는, 주인이 죽은 이웃 아파트에서 우연히 300만달러를 발견한다. 그러나 문제의 아파트 주민들은 <악령의 씨>의 이웃과 <오리엔탈 특급 살인사건>의 승객 못지않은 가공할 결속력을 자랑하는 집단. ‘공공의 복지’, 아니 ‘공공의 재산’을 뜨내기에게 빼앗기지 않으려는 주민들은 돈가방을 든 훌리아와 필사의 추격전을 벌인다. 임자없는 돈뭉텅이를 둘러싼 설정은 <쉘로우 그레이브>와 비슷하지만, <야수의 날> <액션 무탕트>의 알렉스 드 라 이글레시아 감독은 <커먼 웰쓰>를 암울하면서도 통쾌한 스페인풍 블랙코미디로 완성했다. “그냥 죽여라, 날 지루하게 만들지 말고!” 같은 대사가 자연스러운. 쇼크와 스릴을 살리면서도 집단 신경증과 괴짜 인물들의 개성, 부부간의 미묘한 심리를 모두 소홀함 없이 묘사한 <커먼 웰쓰>는 입가에선 웃음이 삐져나오고 팔뚝에서는 소름이 돋는 영화다. 호텔 스플렌디드 Hotel Splendide 영국-프랑스| 감독 테렌스 그로스| 출연 토니 콜레트, 다니엘 크레이그| 95분| 2000년 정상성의 세계로부터 동떨어져 안으로 밀폐된 자족적 소우주는 판타지영화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세팅이다. <호텔 스플렌디드>는 <사이코>의 노먼 베이츠 못지않게 죽은 어머니의 그림자에 사로잡힌 남자가 관리하는 외딴 섬의 불건강한 호텔에서 벌어지는 드라마. 엄격한 규칙과 맛없는 메뉴, 진흙 목욕요법을 고집하는 블랑쉐 가족이 경영하는 호텔 스플렌디드에서는 투숙객도 범상치 않다. 물을 겁내는 스탠리, 온몸을 배트맨 같은 옷으로 가리고 사는 과민 피부의 소유자 세르게이는 탈출을 꿈꾸나 매번 실패한다. 그러나 죽은 창업자 블랑쉐 부인에게 해고됐던 요리사 캐스가 돌아와 생기있는 요리를 식탁에 올리기 시작하면서 호텔은 보이지 않는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이낏빛 고딕 건축물과 생물처럼 신음하는 파이프들도 등장인물 못지않은 연기를 보여주는 이 영화는 각각의 장면은 주네와 카로의 <델리카트슨 사람들>을, 테마면에서는 <초콜렛>의 맛을 떠올리게 한다. 결말부에는 떠들썩한 체크아웃이 기다리고 있다. 뉴질랜드 이불 도난 사건 Price of Milk 뉴질랜드| 감독 해리 싱클레어| 출연 다니엘 코맥, 칼 어반| 87분| 2000년 우유가 버터가 되도록 사랑을 나누는 젖소농장의 두 연인 루신다와 롭의 달콤한 약혼 밀월은 소심한 루신다가 연인의 애정을 무리한 방법으로 시험하던 날부터 균열을 일으키고 루신다가 애지중지하던 퀼트 이불을 도둑맞은 날부터 붕괴하기 시작한다. 그녀의 차에 치일 뻔한 마오리족 할머니의 집에서 사라진 퀼트를 발견한 루신다는 이불을 돌려달라고 요구하지만 그 대가로 롭의 사랑을 어려운 시험에 들게 하고, 루신다의 단짝친구까지 연적으로 돌변한다. 여기서 ‘철없는 약혼녀’ 루신다의 이야기는 인어공주와 신데렐라의 슬픔을 빌려온 현대의 동화로 탈바꿈한다. 남미가 아닌 뉴질랜드를 무대로 한 마술적 리얼리즘의 연애담 <뉴질랜드 이불 도난 사건>은 지난 부천영화제에서 인기를 끌었던 <시암 선셋>처럼 바보스럽지만 자꾸 정이 가는 로맨틱코미디. 모스크바 오케스트라의 언밸런스한 음악도 영화의 엉뚱한 분위기를 부추긴다. 광장공포증 때문에 종이 상자를 한사코 쓰고 다니는 수줍은 강아지는 보기 드물게 기발하고 사랑스러운 조연. 시체유기 자장가 3 Chinesen Mit dem Kontrabass 독일| 감독 클라우스 크래머| 출연 보리스 알지노빅, 클라우디아 미켈센| 88분| 1999년 필름이 끊긴 사이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혼성 트리오의 시체유기 소동극인 이 영화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동거하는 여자친구의 시체를 발견한 소심한 마마보이 건축사 폴과 그의 충실한 두 단짝친구가 겪는 수난의 희극이다. 폴이 창업한 회사의 첫 수주를 자축하는 동안, 애인 가비는 다른 남자를 아파트에 끌어들였다가 남자의 스텝이 엉키는 바람에 가구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즉사한다. 숙취에서 깨어난 폴은 자기가 죽였을지도 모르는 가비의 시신에 기겁해 의사인 친구 막스의 도움을 청하고 둘은 톱, 믹서, 냉장고, 수세식 변기 등 가재도구를 용도변경해 시체 없애기(?)에 나선다. 여러모로 부천영화제 초청작 <형사에겐 디저트가 없다>와 비슷한 설계도를 가진 이 영화에서도, 눈치없는 가족과 이웃이 무시로 들이닥쳐 주인공들의 애를 태운다. 독일의 유명 코미디배우들이 분한 주인공 삼인조는 “(광우병 때문에) 요즘 고기는 믿을 수 있어야죠”라는 대사를 읊거나 노래 <마이 걸>이 흐르는 가운데 연인의 뼛가루를 도시 곳곳에 뿌리고 다니며 폭소를 자아낸다. 공포의 집 House on Terror Tract 미국| 감독 랜스 W.드레슨, 클린트 허치슨| 출연 존 리터, 데이비드 들루이즈| 97분| 2000년 <어메이징 스토리>류의 옴니버스 구성과 텔레비전 드라마의 양식을 취한 교외 괴담. 겉보기엔 평화로운 중산층 주거지로 신혼부부를 안내하는 부동산 중개인 봅 카터는 얼핏 쾌활해 보이지만 실은 성과급제를 택한 회사로부터 시달리는 절박한 처지다. 그러나 그가 보여주는 근사한 세채의 집은 저마다 도저히 팔리기 힘든 기괴한 내력을 갖고 있다. 첫 번째 집은 아내의 정사를 덮치기 위해 함정을 놓았다가 죽음을 맞은 남편과 그 혼령의 믿기 힘든 복수담의 현장이고, 두 번째 집은 외동딸의 사랑을 앗아간 사악한 원숭이와 혈투를 벌이다 모든 것을 잃은 남자가 살았던 곳이다. 세 번째 집에는 노파 가면을 쓴 살인자의 범죄를 예지하는 한 청년과 그를 상담한 여의사의 핏자국이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순진한 ‘아메리칸 드림’을 조롱하는 내용이지만 그보다 “뭔가 좋은 것을 가지려면 그것의 역사를 함께 받아들여야 한다”거나 “많은 행복한 이야기도 있었지만 사람들이 신경쓰는 건 한번의 불행뿐”이라는 주인공의 투덜거림이 더 기억에 남는다. 턴 The Turn 일본| 감독 히라야마 히데유키| 출연 미추코 바이쇼, 리호 마키세| 111분| 일본 모래시계 모양 로고와 ‘시간’이라 명명된 동판화로 시작되는 <턴>은 <사랑의 블랙홀>의 아이디어와 <동감> <프리퀀시>의 정서, 사랑하는 대상으로부터 영영 분리된 <러브레터>의 아득한 단절감이 어우러진 영화다. 어머니와 단 둘이 살면서 판화를 제작하는 아가씨 마키는 대형 교통사고를 겪은 순간, 사고 직전인 오후 2시15분을 기점으로 영원히 반복되는 하루에 갇힌다. 다른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고 날씨도 그대로인 텅 빈 세계에서 절대고독과 싸우던 마키는 어느날 ‘저쪽 세상’에서 걸려온 청년의 전화를 통해 현실로 이어지는 가느다란 끈을 갖게 되고 현실의 자신이 혼수상태임을 알게 된다. 다른 우주에 속한 두 남녀가 전망좋은 레스토랑에서 ‘여행자’를 지켜준다는 식물원의 나무 앞에서, 보이지 않는 상대와 만나는 삽화들이 무척 예쁜 <턴>은 순정만화의 향기를 낸다. 그러나 진공의 세계에 홀로 남겨진 채 시간을 지워나가며 문득문득 영원한 미아가 되는 공포에 가위눌리는 마키의 상황 자체는 꽤 넓은 폭을 지닌 은유이기도 하다. 허문영 기자 김혜리 기자 김영덕/부천영화제 프로그래머 ▶ 제5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 부천초이스 (Puchon Choice) ▶ 월드 판타스틱 시네마 (World fantastic cinema) ▶ 제한구역 (Forbidden Zone) ▶ 패밀리 섹션 (Family Section) ▶ 판타스틱 단편걸작선 ▶ 몇 개의 회고전들 ▶ 부천초이스 단편부문 ▶ ‘할리우드 고전 공포영화 특별전’ 등

기부할 권리, 알 권리

때가 때이니만큼 비얘기로 시작해야겠다. 농토도 모자라 농심(農心)까지 바짝 태우던 가뭄이 해갈되는가 싶더니 또 수해소식이 달려왔다. 하늘의 심중을 헤아릴 길이 없어 늘 허둥대는 우리의 모습이 딱하기만 하다. 정부는 올해도 ‘역시나’ 긴급성 재해대책을 꾸리느라 분주한데, ‘100년 만의 가뭄’이니 ‘5년 주기의 한국 가뭄과 10년 주기의 아시아 가뭄이 맞물린 살인적인 가뭄’이니 하는 숨막히는 뉴스 뒤에 성금소식 역시 빠질 수 없다. 사실 요즘같은 때야 ‘성금의 계절’이 따로 없다. 그야말로 시도 때도 구분하지 않는 성금폭격에 국민들 쌈짓돈이 숫제 ‘준 공금’이 된 듯 하다. 가만히 헤아려보면 고놈의 편리한 ‘ARS’(Automatic Response System)가 톡톡히 한몫한다. 은행에 가서 계좌이체를 하거나 직접 언론사를 방문해 모금함을 채우는 번거로움이, 성금에 동참하지 못하는 양심의 괴로움과 비긴다면 비약일까. 이럴 때, 발끝의 전화기를 집어드는 편리함과 초단위로 성금액수가 올라가는 화면 앞에서 한몫 거들고 싶어지는 게 당신 혼자뿐이랴. 게다가 한정된 기회(1회)와 한정된 액수(1천원)는 당신의 마음뿐만 아니라 주머니까지 여유롭게 만들어준다. 지난 6월8일부터 23일까지 방송협회와 신문협회가 주관하여 46개 신문사와 32개 방송사에서 실시한 ‘양수기를 보냅시다’ 모금운동에서 전체 모금액 140여억원 가운데 5%인 7억여원 정도가 ARS(700-1004)를 통해 모금됐다. 7억원 가운데 실제 거둘 수 있는 액수는 70∼80%인 5억여원에 불과하다. 국민들의 경제적 부담을 덜고, 한편으론 어린이들의 장난전화를 방지하기 위해 전화 1대당 1통화로 제한한 덕에 여러 번 전화를 걸어도 최종입금되는 돈은 1천원이다. 따라서 텔레비전 화면에서 올라가는 액수와 실제 입금액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으며, 성금액이 함께 부과되는 전화료 자체가 체납되는 경우도 많아서 액면 그대로의 액수를 기대하긴 힘들다는 게 관계자의 설명이다. 이렇게 모아진 돈들은 일단 재해성금으로 분류되어 행자부 관할 전국재해대책본부로 송금된 뒤, 알려졌다시피 200곳의 암반 관정과 4천여대의 양수기를 구입하는 데 쓴다는 계획이었다. 전화료 고지서가 발부되고 전화료가 납부되기까지 두달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므로 당장 시급한 돈은 정부에서 미리 지급하고 모아진 성금으로 갚는 방식을 채택했단다. 현재 우리나라 모금법(정식 명칭은 기부금품모집법)은 모금행위의 목적을 크게 4가지로 구분하는데, 그 안에서 가뭄과 같은 재난 구휼사업은 행자부 관할로, 불우이웃돕기 등의 자선사업은 보건복지부 산하 사회복지 공동모금회의 관할로 나뉘어 있다. 이번에 신문협회와 방송협회가 모은 성금의 수령자는 행자부 소속의 재해대책협의회였다. KBS1TV <사랑의 리퀘스트>(한상길 연출 700-0600)나 EBS <효도우미>(서준 연출 700-0700)을 통해 모인 성금은 공동모금회의 관리를 거치게 된다. 성금의 관리처가 나뉘다보니 감사도 제각각이다. <사랑의 리퀘스트>의 경우 방송 한회(50분 분량)당 모금액수가 1억원이 넘고 지난 3년간 약 200억원의 성금이 모였지만, 한달에 한번 열리는 후원금 운영위원회(위원장 한국복지재단 회장 이하 11명)에서 후원금 지원방법에 대한 심의와 수혜자 결정만이 이뤄질 뿐 체계적인 회계감사는 아직 못하고 있다고 관계자들은 밝혔다. 재해성금의 운영체계는 좀더 복잡하다. 행자부에서 거둬들인 재해성금은 기획예산처로 넘어가 재해대책기금 예산안에 포함되며, 다시 양수기 구입을 위해 농림부로 넘어간다. 이번 ‘양수기를 보냅시다’ 모금운동의 경우, 행자부의 공문 요청으로 신문협회와 방송협회가 앞장서긴 했지만, 일부 언론사에서 따로 모금접수창구를 만들어 사세를 과시할 목적으로 사용했다는 추문이 돌기도 했다. 모금이 종료된 6월23일은 장마가 시작된 시점이다. 농림부는 18일 양수기를 1차 지급했다. 17일부터 3일동안 내린 비로 가뭄지역의 해갈이 얼추 이루어졌다니까, 가뭄에 시달린 농민들이 참으로 고마워하기 어렵게 됐다. 뒤이어 이른 수마가 농가를 덮쳐 이번엔 당장 수해기금을 모았어야 했나. 성금을 낸 국민들도 허탈해질 일이다. 얼마 전 각국 국민들의 기부문화에 대한 한 조사연구결과가 발표됐다. 미국 국민 한 사람의 한해 평균기부금 액수는 600달러, 우리돈으로 약 80만원가량이다. 한국은 10만원이 조금 못 미치는 액수였다. 사실 한국사람들처럼 성금에 꼬박꼬박 참여하는 국민이 또 있을까. 딴죽걸 생각은 추호도 없다. “역시 한국사람은…” 하는 투로 혀를 차는 해설에 동의하고 싶지도 않다. 오히려 ‘우리’가 기특하고 대견하다고나 할까, 너무 순박하다고나 할까. 제 구실도 못하는 성금을 꼬박꼬박 불입하는 일을 해마다, 철마다 되풀이하고 있으니 말이다. 다시 또 텔레비전 화면에 ARS 모금번호가 뜬다. 전화번호를 다시 누를까. 손가락이 움직이기 전, 떠오르는 생각. 성금접수창구의 단일화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모인 돈이 제 값을 할 수 있도록 제 때, 제곳에 쓰여야 한다. 시민단체와 민간인들도 참여할 수만 있다면 운영위원으로 동석해 돈의 쓰임새를 논할 수 있었으면 한다. 모인 돈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전화 다이얼을 누르는 국민이 상세히 알아야 한다. 좀더 투명해져야 한다. 심지현/ 객원기자 simssisi@dreamx.net

뽕짝, 질긴 청춘의 노래

<下水戀歌>/ DMR 발매 그들이 3집을 발매했다. 우는 호도들, 다시 말하면 우는 호구들, 다시 말해 ‘크라잉 너트’이다. 이들은 델리 스파이스와 더불어 인디신의 팬들과 그 바깥의 팬들을 공유하고 있는 대표적인 밴드. 그런 밴드의 숫자는 한국 가요계 풍토 속에서 가장 전위적인 인디밴드의 숫자보다도 훨씬 적다. 따라서 어떤 면에선 더 각별하고 힘겨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친구들이라 할 수도 있다. 이번 앨범에서 그들은 “나의 지랄 같은 염병할 인생에 삼라만상의 꼬이고 또 꼬였던 돌아오지 않는 청춘의 여름날”(<양귀비>)을 노래한다. 웬 뽕짝 같은 신세타령인가. 펑크하는 아이들의 가사치고는 지나치게 감상적이지 않은가. 그들은 “꽃을 피워” 달란다. 웬 꽃. 하긴 크라잉 너트는 공전의 히트곡 <말달리자>에서부터 줄곧 ‘청춘’을 노래했다. 그 청춘은 자기도 모르게 달려야만 하는 청춘이다. 달려야만 한다는 건 우선 몸이 그렇게 길길이 뛰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 그래서 몸의 청춘, 슬픈 청춘이다. 또 하나, 달려야만 한다고 강요하는 세상의 요구 앞에서 무력한 청춘이다. “이러다가 늙는 거지 그땔 위해 일해야”(<말달리자>)한다는 걸 그들은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의 세대적 송가가 되기 위해선 이들 특유의 코믹하고 긍정적인 비약이 필요했다. 그들은 그러면서도 뜬금없이 “우리는 달려야 돼 거짓에 싸워야 돼”라고, 의무형으로라도 말한다. 그 슬픔과 무력함과 인디적 의무감의 복합체가 바로 크라잉 너트이다. 이번 앨범을 들으면 그러한 크라잉 너트가 좀더 통속적으로 형식화되고 있다는 느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2집 때 스스로를 “서커스 매직 유랑단”이라 규정함으로써 그 통속적인 형식화가 본격화되더니 이번엔 약간의 복고와 촌스러움과 감상적인 싸구려 판타지가 섞인 특유의 통속화가 자기 식의 표현법을 굳히고 있는 듯하다. 그들은 러시아 민요풍의 마이너 코드와 2박자의 쿵짝거리는 리듬을 지닌 ‘한국형 뽕펑크’에서부터 70년대 대학가요제 노래들에서 들을 수 있는 촌스러운 한국형 모던 록까지, 여러 음악적 코드를 이용할 줄 아는 친구들이 되었다. 그 코드들은 웃기는 복합기호이다. 멜로디는 동요의 것이다. “옛날에 어떤 아이가 떡을 싸들고 왔는데 떡 속에 온통 돌덩이”(<웃기지도 않는 이야기>) 같은 노래가 잘 들려준다. 그 노래의 중간에는 “옛날의 금잔디 동산에 매기” 하는 가사도 나온다. 이들은 유치원 때부터 대학까지, 꽤 열심히 보통 아이들처럼 열심히 산 친구들이다. 학교에서 배운 것들말고 나머지 것은 대부분 텔레비전에서 배운 것들이다. “지나가던 과객이 물 좀 주소 여인네가 쪽박을 깨네…”(<지독한 노래>) 뭐 이런 가사들. 텔레비전에서 이들은 각종 2류스러운 스타일을 배웠고 기억 속에 들어 있는 그 스타일들을 재생한다. 그 모든 것들이 합하여 한국식 ‘펑크’가 출발한 자리에 뽕끼 서린 이들만의 뽕짝이 자리잡고 있다는 생각이다. 특히 감상적이려고 할 때 뽕짝은 엄청나게 질긴 생명력을 발휘해 이 모던한 시대의 청춘마저 거기에 발목이 잡힌다. <밤이 깊었네>에서는 그러한 뽕끼가 페이소스의 경지에까지 이르고 있다. 기억들을 동원해 기억을 배반하고 결국은 그 기억 속의 청춘처럼 지나가 버리는 일. 때로는 사물놀이를 접목시킬 만큼 음악적으로 시도하고 있는 것들도 많지만 아직도 그들은 그러한 음악적 섭렵을 통해 방황하고 있다. 그 방황 속에서 이들의 ‘하수연가’(下水戀歌)는 여전히 자신들의 성장기를 그려내고 있는 중이다. 이들의 골수에 박힌 코미디가 알고 보면 진지한 이유는 거기에 있다. 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

드림웍스 국내서도 디즈니 누를까

올해, 여름을 겨냥한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들이 유난히 불꽃튀기는 흥행싸움을 벌이고 있지만, 아무래도 진정한 승자는 애니메이션이 될 전망이다. 할리우드의 애니메이션으로는 처음으로 칸영화제 본선에 올랐고 비평과 흥행 모두 큰 성공을 이루고 있는 <슈렉>(드림웍스 제작)을 시작으로, 디지털 배우가 실제 배우를 능가할 수 있다는 도전장을 내건 <파이널 판타지>(컬럼비아 제작), 재패니메이션의 상징처럼 되버린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이웃집 토토로> 등이 이달중에 차례로 개봉된다. 이런 와중에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전통을 철저히 조롱하고 나선 <슈렉>(6일 개봉)의 드림웍스와, <아틀란티스: 잃어버린 제국>(14일 개봉)의 디즈니가 한발 앞서 벌이는 2파전이 여러모로 흥미롭다. <슈렉>을 제작한 제프리 카첸버그는 <인어공주>로 디즈니에게 큰 영광을 안겨줬음에도 디즈니 안의 권력다툼에서 서럽게 밀려난 뒤 스티븐 스필버그와 손잡고 드림웍스를 만든 인물이다. 카첸버그는 <개미> <엘도라도> 등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차별화한 작품을 만들며 디즈니를 견제해왔는데, <슈렉>으로 결정타를 날리는 데 성공했다. 6월말 기준으로 <슈렉>의 미국 내 흥행수익은 2억2천만달러를 넘어섰지만, <아틀란티스…>는 6천만달러에 조금 못미쳤다. 서울에서만 22만명의 관객을 동원한 <슈렉>의 첫 주말 개봉성적(6~7일)으로 볼 때, 이런 구도는 국내에서도 다시 벌어질 가능성이 짙지만 변수가 아주 없는 건 아니다. <슈렉>의 가장 큰 매력이 오히려 단점으로 작용할지 모른다는 작은 징후와, <아틀란티스…>의 흥행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알 수 없는 조용한 `표절 시비'가 그렇다. <슈렉>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영웅적인 캐릭터들과 이야기틀을 깔아뭉개는 작전을 구사해 인기를 얻었다. 신데렐라, 백설공주, 로빈훗 등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미녀와 야수>의 결말을 거꾸로 뒤집어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식이다. 하지만 디즈니 상품에 오래도록 맛들여온 국내 아동들이 거부반응을 일으킨다면? 실제로 <슈렉>의 개봉전 시사회에서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극히 일부이지만 `엽기발랄'한 주인공들의 장난과 결말에 불만스런 울음이 터져나왔던 것이다. 정작 미국의 아동들은 손벽치며 즐겁게 본 장면을 국내 아동들이 낯설어할 수도 있다는 상황은 꽤 역설적이다. <아틀란티스…>는 일본 가이낙스가 만든 텔레비전 시리즈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와 주요 캐릭터와 일부 설정이 닮았다는 이유로 구설수에 올랐다. 인터넷을 통해 진행된 표절시비는 디즈니의 공식적인 대응을 끌어내지 못할 정도로 이렇다할 파급력을 보이진 못했다. 두 작품 모두 <해저 2만리>를 참고하긴 했으나 구체적인 내용까지 닮은 건 아니다. 다만 <…나디아>가 국내에서 적잖은 인기를 누렸다는 점에서 그 여파가 주목된다. 이성욱 기자

제5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김홍준 집행위원장

“어떤 호칭으로 불리는 것이 제일 편하세요?”라고 묻자, 김홍준(44) 감독은 ‘감독’도 ‘위원장’도 ‘(영진)위원’도 ‘선생님’도 모두 다 편하다고 말했다. <장미빛 인생> 그리고 <정글 스토리>. 삶의 꺼칠한 얼굴을 맨살 그대로 렌즈에 담은 아주 리얼한 영화를 만들었던 김 감독은, 지난 2월27일부로 판타지영화 축제의 호스트가 됐다. 할 일이 주어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해버린다는 그에게, 7월12일 개막하는 영화제 준비가 ‘시뮬레이션 훈련’ 단계에 들어가고, EBS의 <한국영화 걸작선>을 몰아서 녹화하느라 밤을 새면서 영진위 일과 영상원 학생들 성적까지 처리하는 요즘은 ‘게으름 지수’가 마이너스로 치닫는 나날이다. 인터뷰 도중에도 연방 울어대는 휴대폰에 응하며 종이 케이스가 끼워진 다이어리를 꺼내 0.7밀리 샤프펜슬로 스케줄을 채워 가는 김홍준 위원장에게 수첩이 예스럽다고 참견하자 금세 “물에 젖어도 되고 전자파도 발생하지 않는다”며 합리적으로 설명해준다. 그의 말 속에서 언제나 혼돈은 정리되고 문제는 명백해지며, 해결 방안은 가능성의 순서대로 단정하게 늘어선다. 긴 시간을 들여 올해와 더 먼 미래의 부천영화제를 위한 명료한 도면의 두루마리를 펴보인 그는, 인터넷으로 주문한 스탠리 큐브릭의 DVD 세트가 막 배달됐다고 소년처럼 자랑하며 자리를 떴다. -언젠가부터 영화를 둘러싼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하고 있다. =부천영화제 일을 1997년에 처음 맡았고, 영상원의 객원 전임이 된 것은 1998년, 영화진흥위원은 2000년에 시작했다. 본디 이렇게 동시에 많은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인데, 책임감의 힘이 크다. 문제는 여러 일을 하다보니 쉬지 못한다는 것이지만 이제 다른 쪽 일로 모드를 전환하면 그것이 곧 한쪽 일의 휴식이 되는 것 같다. 영진위가 한창 어려웠고 부천영화제 집행위원장까지 맡아 평생 가장 힘들었던 올해 초는 마침 학교가 방학이었다. 그런데 수업이 없어 고민에 계속 빠져 있게 되니 그게 오히려 곤욕이더라. -프로그래머를 사퇴하게 했던 원인은 해소됐나. 지역사회의 요구와 마찰이 있었던 건 아닌가. =프로그래머로서 일이 더이상 새롭지 않다고 느꼈고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사퇴의 이유였다. 하지만 지금은 내 영화를 찍는 일이 그리 절박하지는 않다. 부천 지역사회도 균질적 집단이 아니고 시민들 안에도 영화제를 대하는 다양한 성향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가능하면 각 집단의 요구를 수용하고 일관된 목소리로 설득하는 창구 역할을 할 것이다. -프로그래머로서 일할 때와 차이는. =영화제에 맞는 작품과 게스트 섭외를 공격적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 프로그래머의 일이었다면, 집행위원장으로서는 살림꾼 노릇을 하고 싶다. ‘업무 플로’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 사무국 부서별로 각기 갖게 마련인 욕심을 갈등이나 충돌이 아닌 합력으로 이끌어내는 것이 첫째다. 영화제를 만들어가는 업무들은 이질적이지만 서로 유기적으로 연관이 안 되면 곧장 카오스다. 예컨대 작품 수가 늘어나면 번역, 출판, 카탈로그, 자원활동가, 상영팀으로 연쇄 과부하가 걸리고 결국 펑크가 나 관객에게 피해를 주는 거다. 한편으로는 영화제 집행부 책임자로서 어떻게 인적 자원과 인프라를 안정시킬지 구체적 마스터플랜을 제시하는 바람직한 리더가 되려고 한다. 그래서 요즘은 책방 가면 괜히 ‘훌륭한 리더가 되는 법’ 같은 책을 기웃거리게 된다. (웃음) 프로그래머를 할 때에는 개인 김홍준의 취향이 반영될 수밖에 없어 김홍준 영화제라는 말도 들었는데 집행위원장은 반대로 스탭들의 눈치를 보는 사람이다. 집행위원장이라는 우리말은 왠지 관료적인 느낌을 주는데, 정확한 비유인지 모르겠지만 영화제가 영화라면 프로그래머는 감독이고 집행위원장은 익제큐티브 프로듀서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유바리와 도쿄판타스틱페스티벌의 요이치 고마즈자와 집행위원장은 ‘페스티벌 프로듀서’라는 신직종을 만들어냈는데 말되는 표현이다. -영진위의 경험이 집행위원장직 수행에 도움이 되나. =실질적으로 큰 도움이 됐다. 공적 기구 안에서 예산, 조직, 정책을 조율하는 법이라든가, 정관, 규정, 협약 같은 것에 대한 감을 공부할 수 있었다. 또 하나 는 것은 회의 진행하는 요령이고. 대학 다닐 때 답사간 마을에서 만난 이장님은 몇살 때 결혼하고, 집사고, 이장이 되겠다는 계획을 이미 스무살 때 완벽하게 짜놓고 그대로 사신 분이었다. 나로 말하자면 이분과 정확하게 반대의 인간형이다. 초등학교 때도 누가 장래희망을 물으면 ‘편의상’ 과학자가 될래요 했지만 그냥 접대용 멘트였다. 지금도 내겐 뭐가 되기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몇살쯤엔 기어이 무엇을 성취해야지 하는 개념이 없다. 그런데 지나고보니 마치 모든 일을 예정한 것 같다. 감독이 되기 위해 영화동아리에 들고, 영화제 집행위원장이 되기 위해 공공 기관에서 일을 하고 교수가 되기 위해 책을 쓴 것 같지 않은가. (웃음) 어쨌거나 반복을 싫어하고 호기심이 많고 냉소적이기 때문에 낙천적일 수 있는 나에게 지금 사는 방식은 잘 맞는 것 같다. -부천영화제에서 오래 일할 생각인 것 같다. =‘종신직’이라는 농담 섞인 표현도 썼지만, 집행위원장으로서 영화제 10주년은 맞이하고 싶다. 그래서 10주년 되는 해에 역대 페스티벌 레이디를 다 초청하면 “부천영화제에 스타가 없다”는 말은 다시 안 나오지 않을까? (웃음) -여느 해보다 프로그램의 색깔이 다양하다. 특히 월드 판타스틱 시네마 부문에는 언뜻 봐서 ‘판타스틱’이란 표현에 딱 들어맞지 않는 영화들도 있다. =지난해가 도발적이라면 올해는 전체적으로 다양성을 강조한 프로그램이다. 그건 우리가 의도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세계적으로 그런 영화들이 나와줘야 가능한 일인데 흐름과 맞아떨어졌다. 경쟁부문 부천 초이스는 ‘판타스틱’을 좁은 의미로 해석한 영화들을 모은 섹션이고 해당 장르 안에서 경력을 쌓았으나 덜 알려진 감독을 알리는 의미가 있다. 반면 월드 판타스틱은 판타지의 정의에 구애받지 않는 대중성에 초점을 둔다. 판타스틱영화제를 장르로 규정된 영화제로 보거나 마니아들을 위한 영화제로 보는 생각은 수능시험적 발성이다. 중요한 건 수용의 맥락이다. 예를 들어 <스탠리 큐브릭: 영화 속의 인생> 같은 다큐멘터리도 부천에서 틀면 관객에게 다르게 다가간다. -올해의 빅 이슈인 호금전 회고전의 의의를 말한다면. =아시아의 판타스틱영화제인 부천영화제가 아시아와 판타스틱이라는 두 화두를 결합하고 과거 영화를 복원 회고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측면에서 호금전만한 대상은 없다. 타이밍 면에서는 물론 <와호장룡>의 바람을 탔다. 부천에 오니 의외로 이런 보물이 있구나라는 사람이 있으면 행복하겠다. 한국 로케이션 촬영한 호금전의 영화는 한국적 공간의 재해석도 보여줄 것이다. 전혀 예비지식이 없는 관객도 호금전 영화 속에서 불국사 단청을 발견하고 흥미를 느낄 거다. 이번 부천영화제의 숨은 테마는 인연이다. 제2대 페스티벌 레이디 추상미, 제2회 경쟁 장편 심사위원장 존 베리와의 인연이 특별 상영을 통해 부활하고, 국제영화제라면 의무사항이라 볼 수 있는 자국영화 회고전은 선배 세대와의 인연을 더듬는 자리다. 호금전 회고전도 그렇다. 김영덕 프로그래머의 추억도 <씨네21> 기사를 읽고 알았지만, 나 역시 중1 때 생전 처음 본 홍콩영화가 <방랑의 결투>였고 그것이 <대취협>임을 지난해에야 알았다. 그 이후 고등학교 갈 때까지 한국에 수입된 칼싸움영화는 다 봤다. 나약한 모범생이었던 나의 억눌린 폭력성을 만족시켜준 건지.(웃음) 실은 1회 때부터 감독 오마주를 호금전에게 바치고 싶었지만 주변에서 무리라고 다들 말렸다. 호금전 회고전의 성사는 이제 부천영화제에 그만한 내공이 생겼다는 증거다. -부천은 축제의 성격이 강한 영화제다. 영화가 아직은 공동체적 경험이라고 생각하는가. =디지털이 부상하면서 영화를 제작하고 수용하는 방식은 점점 개인화하고 있다. 테크놀로지를 파는 쪽에서도 그걸 강조한다. 그 뒤에 숨어 있는 것은 매체 민주주의라기보다 시장 확장의 의도다. 브뤼셀영화제를 가보니 그쪽 사람들은 디지털을 하나의 테크놀로지로서 관심을 가질 뿐 지각변동이 올 듯 요란을 떨지 않더라. 영화가 예술이자 산업으로서 영상산업의 종가 역할을 했던 시대가 가고 물적 토대가 바뀌면서 영화제의 역할도 달라진다. 영화제는 사회적 의의로 봐서도 도리어 아날로그로 가는 방향이 맞지 않나 싶다. -그와 관련해 ‘메이드 인 코리아’ 섹션에서 인터넷영화를 굳이 스크린에서 상영하는 뜻이 궁금하다. =파편화된 맥락에서 소비되는 인터넷영화를 집단적 경험의 장인 극장으로 끌어들이는 셈이다. 영화는 복제물일지 몰라도 관람은 극장이 어디냐 관객이 누구냐에 따라 하나하나의 상영이 라이브 퍼포먼스다. 이제 35mm와 화질 구분이 안 되는 디지털영화가 프로젝터로 상영되는 시대가 오면, 영화제를 가야만 영사사고를 경험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영사사고, 그거 얼마나 재미있는 건지 모르지?”하면서 말이다. 즉 영화제가 영화의 고전들을 창작자가 의도하는 형태로 영화를 수용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되어가는 것이다. 교회 제단화. 귀족 초상화가 맥락에서 떨어져나와 같은 작가의 작품이라는 이유만으로 박제화되어 나란히 걸려 있는 미술관과 달리, 영화제에서 필름을 튼다는 것은 그 영화가 태어나서 살았던 공간을 관객만 바꿔 고스란히 재현하는 것이다. 내가 있는 한 부천영화제는 아날로그의 전통을 이어가고 싶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단편 상영작을 동영상으로 미리 틀지말자고 했다. 앞서가는 ‘퇴행’이랄까. -회고전의 한국영화는 젊은 관객에게는 오히려 이국적인 오락이 될 것 같다. =영화 교육, 영화 수용에 단절이 없던 미국의 영화광이라면 고전 할리우드영화를 주말에 TV만 틀어도, 비디오 가게만 가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미국에는 산업적 연속성, 유럽에는 문화적 연속성이 있는 반면 한국영화의 70, 80년대는 단절이다. 각국 영화제를 다녀봐도 ‘화합’이라는 갈등을 전제로 한 정치적 용어를 영화계에 쓰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그래서 옛날 한국영화를 본다는 것은 한국영화로서는 자신의 옛모습을 보는 일인 동시에 낯선 일이다. 어찌 보면 타자의 영화이며 한국어를 사용하는 외국영화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한국영화에 대해 국내외 관심이 고조된 지금이, 한국영화를 단순히 복고취향이나 호사가적 관심, 자기 비하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영화 자체로서 재발견, 재평가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1930년대 유니버설 호러나 해머 호러 같은 특수한 회고전을 부천에 기대하는 사람도 많다. =기획이 좋아도 문제는 섭외다. 미라맥스가 호금전 영화 판권을 전부 사들이려 한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모르긴 해도 아마 흩어져 있는 판권 소유자 수십명에게 팩스하다가 지쳤을 것이다. (웃음) 스탠리 큐브릭 회고전도 여러 영화제가 약속까지 받아놓았지만 워너가 올 스톱시켰다. -해외 판타스틱영화제들과 프로그램 교류성과를 자평한다면 =판타스틱영화제는 비주류의 대안영화제들인 까닭에 우정을 강조한다. 무엇보다 서로 친구가 되어 영화를 추천하고 섭외를 돕는 인적 네트워크가 구축된 점이 중요하다. 부천영화제는 유럽판타지필름페스티벌연합의 준회원이고, 헬싱키를 필두로 판타스포르투, 브뤼셀, 판타아시아, 북미의 유일한 판타스틱영화제인 몬트리올에서 한국영화 스페셜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지금까지는 홍콩영화로 버텼는데 어떡하냐고 걱정하는 그들에게 한국영화가 대안이 될 거라고 말했다. -여름에 열리는 부천영화제의 고충은 한국영화 프로그래밍이다. 이번 부천에 출품된 <나비>와 <소름>에 대한 소감은. =영화가 그 영화제에 도움이 되느냐, 그리고 영화제가 그 영화에 도움이 되느냐 하는 판단에 따르면 <나비>와 <소름>은 그 기준에 부합하는 작품이었다. 그리고 각각 경쟁작과 폐막작으로 상영되는 것이 각 영화에 도움이 된다고 보았다. 진정성이 드러나는 영화가 상대적으로 적은 요즈음 미덕이 있는 영화들이라고 영화를 오래 봐온 관객으로서 느꼈다. -예산이 24억5천만원이다. 영화제 기간 시설에 장기적으로 투자할 계획은 없나. =부천의 문제는 영화 전용관이 아닌 공공 시설을 이용하기 때문에 상시적으로 영화관으로서 닦고 조이고 기름칠 수 없다는 점이다. 시설이 영화제 재산이 아니기 때문에 영화제 예산으로 교체할 수 없고 그렇다고 건물 운영주가 영화제를 위해 자기 예산을 투입하기도 어렵다. 올해는 스크린 교체, 영사기 보수, 렌즈 확보를 영화제 예산으로 하기로 했다. 그러나 공영 건물에서 영화제를 하는 장점도 있다. 타이베이영화제에 갔더니 직배사가 운영하는 멀티플렉스 2∼3관에 세들어 행사를 치르는 모습이 딱했다. 멀티플렉스 때문에 관객의 기대치가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영화를 볼 때 화질이 전부가 아니듯 시설이 다는 아니다. -사무국이 연중 상설 운영되지 않는 데에서 오는 어려움이나 영화제 노하우가 잘 축적되지 않는다는 고민이 있을 것이다. =운영 노하우의 매뉴얼화는 90%쯤 이루어졌다. 이제 문제는 시스템을 채워주는 인력을 어떻게 안고 가느냐다. 영화제 치르는 것만 일이라면 사무국은 프로그램팀을 제외하고 6개월 이상 일할 이유가 없다. 전문성을 생각하면 상설 조직이 필요하지만 단기간의 연례 행사를 치르는 효율을 생각하면 반대라는 데에 고민이 있다. 영화제 사무국이 영화제 행사뿐 아니라 영화제로 조직된 인프라와 인적 자원을 이용할 수 있는 다른 사업을 통해 상시적으로 시민과 만나 지역 문화, 경제, 영상 문화 안에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중이다. 예컨대 부천영화제가 꼬마 영화제와 시네마테크의 프로그래밍을 맡는다거나 부천 미디어센터 같은 기관을 통해 시민들에게 매체 교육을 실시하고 시민들이 영상 기자재를 사용해 매체 민주화를 이끌어나갈 수 있게 한다거나. 이런 식으로 사업을 다각화하면 본래의 목적에 부합하면서도 영화제 스탭들의 개인적 전망이나 재원 확보에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별도 합의된 바는 없지만 집행위원장으로서 이러한 내용을 제안해 놓은 상태다. 신자유주의 원산지인 미국에서도 공적 서비스 기관의 성과는 이익의 폭이 아니라 기관의 원래 목적에 부합하는 사업으로 얼마나 많은 인구를 끌어들였느냐로 평가된다. -EBS <한국영화 걸작선>에 대한 애착은. =기술적인 문제를 제쳐두더라도 텔레비전에서 한국영화가 제대로 대접 못 받는 것은 제대로 포장이 안 됐기 때문이다. 자의적인 가위질이 분명한데 맥락에 대한 아무런 안내가 없고 엔딩 크레디트도 뜨기 전에 광고가 치고 들어온다. 이래서는 영화를 이미 알고 애정을 가진 극소수를 제외하면 부정적 인식만 확산될 뿐이다. <한국영화 걸작선>의 진행 섭외를 거절못한 것은, 감히 말하건대 영화에 대한 존경을 갖고 필름을 원형대로 보여주는 것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유일한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같은 경비로 텔레시네를 새로 뜨고 극장 협찬으로 촬영을 하고 원로 영화인들 인터뷰를 따는 데 모든 스탭이 인건비 개념없이 일하고 있다. 가끔은 레터박스로 시네마스코프 화면을 내보내면 “왜 가려서 보여주냐”고 항의하는 어르신도 있다. (웃음) 이 프로그램의 예기치 못한 수확은 워낙 판권 섭외가 어려워 가능한 영화를 다 틀다보니 라이브러리가 완벽했다면 간과했을 영화 중에 보석을 발견한다는 점이다. 이번 부천영화제에서도 상영되는 <아! 백범 김구 선생>의 전창근 감독님 영화에서 대단한 진정성을 보았고, 임권택 감독님이 20대에 만든 영화, 유현목 감독님의 코미디를 보는 재미도 대단하다. 영화한다는 사람으로서 창피하지만 허장강이라는 배우가 세계 영화사를 통틀어 최고의 배우임을 재발견했고 김지미, 전계현 같은 옛날 여배우들의 매혹도 발견했다. <한국영화 걸작선>을 통해 영화인협회의 원로 영화인들이 당신들의 작업에 대해 몸담았던 한국영화의 시대에 대해 자부심을 갖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자화상 같은 영화를 한번쯤 찍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의 자전적 이야기라기보다 내가 자란 시대가 제대로 대변된 걸 본 기억이 별로 없어서였다. 무시험 고교 진학 세대로서는 전혀 모르는 1970년대 후반 일류 고등학교의 문화를 그려보고 싶다. 하도 엘리트 의식을 주입해서 축구를 해도, 놀아도, 예술제를 해도 꼭 일등하고 잘해야 하는 아이들에겐 참 재미있는 면이 있었다. 반마다 작은 예술가들이 있었고 나는 그런 애들을 동경하며 <종합영어> 대신 <한국회화 소사>를 학교에서 읽던 ‘딜레탕트’였는데, 문학상 휩쓸고 나팔 불던 친구들도 다들 의사가 되고 법관이 됐다. 동창회에 가면 나는 연예계 대표 인사 대접을 받는다. 아마 장르는 코믹멜로 판타지가 될 것 같다. (웃음)

<슈렉>과 드림웍스 애니메이션 전략 [3]

원더키드, 마침내 마법을 훔치다 <슈렉>의 영주 파콰드는 악당이다. 게다가 키가 아주 작고 얼굴은 큰데 매우 못생겼다. <슈렉> 시사회가 열린 직후부터 파콰드의 모델이 디즈니 회장 마이클 아이스너라는 소문이 나돌면서 미국의 점잖은 언론들도 이를 앞다퉈 보도했다. 아이스너를 골려먹으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눈으로는 아무리 봐도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해서 미국 언론의 단정적인 태도가 좀 의아스럽다. 물론 <슈렉>이 흉한 외모를 찬미하는 정치적 올바름을 과시하면서도, 유독 파콰드의 작은 키만은 계속 조롱의 대상으로 삼는 게 수상쩍긴 하지만. 어쨌거나 미국 언론의 호들갑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그들은 <슈렉>의 제작자이며 드림웍스의 실질적인 리더 제프리 카첸버그와 마이클 아이스너의 30년 묵은 애증관계를 목격해왔다. 1999년 5월에는 카첸버그가 디즈니를 상대로 낸 2억5천만달러(추정액)짜리 소송에서 승소한 일도 있다. 무엇보다 눈부신 성공신화의 주인공으로 추앙되다가 아이스너와의 불화로 디즈니를 뛰쳐나온 카첸버그로선 디즈니와 아이스너를 제압하려는 욕망을 떨치기 힘들 만했다. 카첸버그는 갖가지 인터뷰에서 파콰드와 아이스너의 닮은꼴에 대해선 “난센스”라고 말하면서도, “우리(드림웍스)에게 없는 것은 디즈니가 종종 이뤄온 흥행기록 경신”이라며 날선 경쟁심을 감추지 않았다. <슈렉>은 카첸버그에게 드림웍스 7년의 어떤 성과보다 큰 기쁨을 준 선물이 될 만하다.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것도 영광이지만, 경쟁작인 디즈니의 <아틀란티스>가 1986년 이래 디즈니 애니메이션 사상 최악의 성적표를 기록하는 동안 <슈렉>은 흥행수익 2억달러를 넘기면서 올 여름 박스오피스 챔피언 자리까지 넘보게 된 것이다. 카첸버그는 자신의 주전공인 애니메이션으로, 도저히 무너질 것처럼 보이지 않던 애니메이션 왕국을 함락시킨 셈이다. 물론 승부는 단판이 아니며 디즈니는 재역전을 이룰 만한 내공을 여전히 갖고 있지만, 1998년 <개미>가 디즈니의 <벅스 라이프>의 아이디어 도용이라는 의심을 샀고 지난해 <엘도라도>가 실패하면서 체면을 구겼던 카첸버그로선 이번의 역전승은 그것만으로도 감개무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주간지 <인더스터리 스탠더드>는 ‘미키 마우스의 최악의 악몽’이라는 제목 아래 이렇게 썼다. “카첸버그는 디즈니와 갈라선 뒤부터 이 마법의 왕국에서 마법을 훔치려고 애써왔다. <슈렉>으로 마침내 그는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카첸버그&아이스너, 세기의 복식조가 되기까지 1950년 뉴욕생인 제프리 카첸버그는 영악한 소년이었다. 뉴욕 시장 후보로 나선 공화당 정객 존 린제이의 선거운동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한 게 14살 때였으니 세속적 성공에 놀랄 만큼 일찍 눈뜬 셈이다. 카첸버그는 지속적으로 린제이 진영에 참여했고 선거자금을 관리할 정도로 린제이의 신임을 얻었지만, 린제이가 대통령후보 지명전에서 닉슨에게 패하자 그는 현명하게도 쇼비즈니스로 눈을 돌렸다. 카첸버그는 처음엔 에이전트가 될 생각으로 인터내셔널 페이머스 에이전시에 잠시 들어갔다가 1년 만에 관두고 24살 때 파라마운트의 젊은 사장 배리 딜러의 조수로 들어갔다. 2년 뒤 배리 딜러는 또다른 젊은 인재 마이클 아이스너를 ABC에서 스카우트했다. 할리우드를 떠들썩하게 만들 두 수재의 파트너십은 이렇게 시작됐다. 배리 딜러의 지휘 아래 76년 파라마운트는 1년 만에 흥행실적 1위의 스튜디오가 됐고, 카첸버그는 고속승진을 거듭하며 마케팅 담당, 텔레비전 담당을 거쳤다. 마침내 <스타트렉> 시리즈의 영화화 임무가 그에게 떨어졌다. <클로스 인카운터> <스타워즈> 등 다른 스튜디오들의 성공적인 SF에 파라마운트가 자극받은 것이다. 카첸버그는 최초 예산 1800만달러를 들고 고집세고 늙은 배우들, 특수효과 경험이 전혀 없는 감독 로버트 와이즈와 악전고투를 벌여가며 스케줄대로 제작을 마쳤다. 그러나 제작비는 4500만달러로 치솟았다. 당시 평균제작비가 1천만달러 정도였으니 경영 재난이 우려됐지만, <스타트렉>은 8천만달러를 벌어들이는 대성공을 거둬 원더키드 카첸버그의 명성을 드높였다. <그리스2>의 실패 이후 제작담당 이사 돈 심슨이 밀려나자 82년 카첸버그가 어린 나이에 그 자리를 차지했고, 일중독자라는 소리를 들어가며 아이스너의 마스터플랜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둘의 파트너십은 <레이더스> <사관과 신사> 등을 잇따라 성공시켜 파라마운트의 기세를 80년대 초까지 이어갔다. 그러나 84년 배리 딜러가 갑자기 20세기폭스로 자리를 옮기자, 아이스너는 디즈니 회장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들였고 망설임 없이 34살에 불과한 카첸버그를 디즈니의 스튜디오 책임자로 기용했다. 당시 디즈니는 쇠락해가는 왕국이었다. 실적에서 메이저 중 말석을 못 면했고, 테마파크의 수입도 뚝 떨어져 기업사냥꾼들의 인수합병 메뉴 앞머리에 오르는 신세가 됐다. 당시 디즈니엔 디즈니 순수주의자들이라고 불리는 전통파들이 완강히 버티고 있었다. 이들은 디즈니 테마파크에 <스타워즈>와 <인디아나 존스>의 테마를 들여오자 “월트라면 그런 꼭두각시를 빌리는 짓은 하지 않으며 오히려 캐릭터를 창조해낼 것”이라며 반발할 정도로 66년에 사망한 창업주 월트 디즈니에의 향수에만 빠져 있었다. <애니메이션의 천재 디즈니의 비밀>이란 책에서 한 직원은 “외부인이 들어와 우리의 뺨이라도 때려서 정신을 차리게 해줄 필요가 있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이들의 뺨을 때려 정신들게 한 외부인이 다름 아닌 아이스너와 카첸버그였다. 디즈니 재건작전, 200% 성공 카첸버그 같은 사람을 상사로 모시고 사는 일은 누구라도 선뜻 반기기 힘들 것이다. 아침 6시에 출근하기, 일요일에도 일하기, 툭하면 회의하기, 없던 일 만들어내기가 그의 습관이요 일과였다. 디즈니영화가 개봉하면 직원들은 전국의 상영관을 돌아다니며 로비 장식까지 점검해야 했다. 디즈니의 신화와 자존심을 복원한 탁월한 지도자였지만 그는 존경만 하기엔 너무 ‘위협적인’인물이었다. <…디즈니의 비밀>에 따르면 94년 그의 사임이 알려지자 “사내의 많은 이들은 카첸버그와의 이별을 마치 자전거에서 연습용 바퀴를 떼어내는 것처럼 느꼈고 그런 의미에서 그의 사임을 기뻐했다”고 한다. 하지만 또다른 사람들에겐 그는 “없으면 불편한 자연의 힘”이 됐다. 그를 따르는 수십명의 직원들은 그와 함께 드림웍스로 옮겨갔고, 남은 직원들도 몸값이 뛰어오르는 망외의 기쁨을 누렸다. 이 덕에 카첸버그는 잠시나마 디즈니 애니메이터들 사이에서 ‘성자 제프리’로 불렸다. 카첸버그의 최대 업적은 무엇보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소생시켰다는 점일 것이다. <인어공주>를 비롯 <미녀와 야수> <알라딘> <라이온 킹>으로 이어지는 히트 행진은 추억의 레퍼토리였던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당대의 팝 아이콘이란 명예를 돌려주었으며, 디즈니는 아이스너-카첸버그 체제가 들어선 지 10년 만에 최고의 메이저 자리에 올랐다. 디즈니의 전통을 폐기하지 않으면서도 변화한 대중의 감각을 민감하게 반영한 까닭이다. 좀더 자연스럽고 빨라진 동작의 캐릭터들엔 X세대의 발칙함이 가미됐고, 흥겹고 모던한 음악과 굽이치는 이야기의 재미는 어른들까지 매혹시켰다. <가디언>의 앤드루 풀버는 <제시카와 로저 래빗>(1988)이 카첸버그 이력의 분기점이라고 말했다. 음모가 판치는 이야기에 실사와 애니메이션을 절묘하게 결합하면서도 결국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판타지를 찬미하는 이 획기적인 영화는 애초 예산을 두배나 초과하는 고투 끝에 완성됐다. 이 일을 통해 카첸버그는 자신의 일, 특히 애니메이션을 사랑하기 시작했다고 술회했다. 그러나 감독 로버트 저메키스의 구상을 처음부터 싫어했던 아이스너는 카첸버그와 “미친 듯한 언쟁”을 수차례 벌였고, 이 세기의 복식조에 심각한 이견이 있음을 드러냈다. 어쨌거나 외적으로 두 사람의 디즈니 재건작전은 완벽한 성공 가도를 달려갔다. 특히 <라이온 킹>(1994)은 미국 박스오피스에서만 3억1200만달러의 수익을 올려 카첸버그 이력의 정점을 이뤘다. 카첸버그는 실사영화에서도 거의 실패를 몰랐다. <귀여운 여인> <시스터 액트>는 저렴한 제작비에다 발랄한 컨셉으로 모두 극장수익 1억달러를 훌쩍 넘겼으며, 반디즈니적인 영화 <펄프 픽션>에까지 손대 칸 황금종려상과 흥행 대박이라는 믿기 힘든 성과를 낚아올렸다(미라맥스와 디즈니 자회사 터치스톤이 공동제작한 <펄프픽션>은 카첸버그로서도 선뜻 응하기 힘든 프로젝트였다. 미라맥스의 와인스타인 형제가 이 프로젝트를 설명했을 때, 카첸버그는 “20분 동안 웃었다”고 한다). ‘디즈니’를 벗어나, ‘디즈니’에 맞서다 1994년 10월 카첸버그는 디즈니를 나와 최고의 흥행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음반업계의 거두 데이비드 게펜과 자타공인의 ‘드림팀’을 구성 드림웍스를 창립했다. 카첸버그가 디즈니를 떠난 이유는 아이스너 회장의 암묵적 불신임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제작담당 사장이던 넘버2 프랭크 웰스가 헬기 사고로 사망했는데도, 아이스너는 넘버3 카첸버그를 승진시키지 않고 자신이 웰스의 자리를 접수한 것이다. 19년의 파트너십이었지만 카첸버그가 아이스너가 더이상 다루기 힘든 거물로 성장한 까닭으로 관측됐다. 결국 넘버2와 3을 한꺼번에 잃은 아이스너가 충격으로 심장질환을 앓다 채식주의자가 됐다는 후일담도 있다. 카첸버그는 제작수입의 2%를 보너스로 준다는 약정 불이행을 근거로 디즈니를 고소해 아이스너의 상처를 깊게 했다. <엘도라도>를 빼면 드림웍스에서 카첸버그가 제작한 <개미> <이집트 왕자> <치킨 런>은 일정한 성공을 거뒀지만 디즈니 시절의 위업에 비하면 아무래도 왜소했다. 드림웍스의 <딥 임팩트>가 디즈니의 <아마겟돈>의 아이디어를 도용해 먼저 개봉했다는 의심을 받았는데, 이 패턴은 <개미>와 <벅스 라이프>에서도 반복됐다. 디즈니가 의구심을 제기하고 카첸버그는 “허위사실 유포”라고 맞섰지만, 사실 여부를 떠나 드림웍스의 이미지에 좋은 영향을 미치긴 힘들었다. 소송까지 겹쳐 아이스너와 카첸버그는 돌이킬 수 없는 앙숙이 된 것으로 비쳐졌다. 둘 중에서도 내로라 할 만한 독창적 작품을 못내놓고 있던 카첸버그의 심기가 더 불편했을 것이란 짐작을 하기란 어렵지 않다. 스필버그가 관여한 실사영화 <아메리칸 뷰티> <글래디에이터>가 작품성과 흥행에서 성가를 드높였다는 것도 초조해할 만한 일이었다. 총제작기간 5년이 걸린 <슈렉>이 칸에 초청되자 카첸버그는 “나는 우리 영화가 아카데미를 휩쓰는 것보다 칸 경쟁에 진출한 게 훨씬 영광스럽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반면 아이스너의 디즈니는 피터 슈나이더 사장을 해임하고 애니메이션 예산을 25% 삭감하는 등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7년 전 드림웍스가 창립될 때 <타임>의 리처드 콜리스는 “1920년대의 디즈니 이후론 어떤 메이저도 새로 태어나지 않았는데, 만일 이 규칙을 깬다면 그건 카첸버그 팀일 것이다”라고 썼는데, 콜리스의 예측은 점점 현실에 가까워지고 있다. 그리고 그 지휘봉은 카첸버그가 쥐고 있다. 디즈니에서 일하던 91년 초 카첸버그는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 멘털리티가 위험수위다. 예전처럼 온건하고 스토리 중심의 영화로 돌아가야 한다”는 내용의 내부용 메모를 돌렸다가 외부로 유출돼 언론에 크게 보도된 적이 있다. 스튜디오 책임자에 의한 최초의 블록버스터 마인드 반성이라는 점에서 화제가 됐지만, 그 메모가 대작화 경향을 되돌리진 못했다. 메이저로 군림한다 해도 드림웍스라면 80년대 이후의 스튜디오들이 피하지 못한 대물숭배의 위험에 쉽게 빠질 것 같진 않다. 카첸버그는 그의 파트너 스필버그와 마찬가지로 아주 단단하고 알뜰하게 그리고 다양한 메뉴로 승부하고 있다. 관객으로서도 이 편이 훨씬 재미있다. 그러고보면 카첸버그는 이제야 아이스너의 진정한 라이벌로 우뚝 선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