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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제 55회 베를린영화제 총결산 [3]

히틀러 다룬 <몰락>부터 히로히토 일본 천황 다룬 <태양>까지 제55회를 맞는 베를린영화제의 경쟁부문은 그 어떤 해보다도 화제작이 적었다. 베를린에서 화려하게 첫선을 보이리라던 <에비에이터>는 이미 개봉되어버렸고, 또 다른 할리우드영화 <하이츠>(Heights)는 경쟁부문에서 취소되기도 했다. 함께 영화제에 참석했던 남편과 나는 베를린에서 본 최고의 작품은 아파트에서 16인치 텔레비전으로 본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그녀에게>라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볼 정도였다. 권력자를 인간으로 조명한 최초의 영화들 그러나 어떤 영화제든 적어도 한번은 참으로 기이한 영화가 숨어 있다 튀어나오는 마법상자 같은 면이 있게 마련이다. 올해에도 그랬다. 공교롭게도 나는 한달 동안 자그마치 네편이나 권력과 죽음이라는 주제를 바탕으로 하는 아주 유사한 영화들을 한국과 베를린에서 연이어 보게 되었다. 그것들은 환영처럼 최면처럼 역사의 순간들을 콜라주해서 이어붙여 거대한 뫼비우스 띠를 만들어내는 것 같았다. 이들 영화에서 박정희의 마지막 날은 유흥으로 시작해 암살로 끝을 맺었고, 히틀러의 마지막 날은 휘몰아치는 폭탄 세례로 시작해 자살로 끝을 맺었으며, 미테랑의 마지막 날은 적막으로 시작해 적막으로 끝이 났다. 일본 천황은 1945년 8월15일에야 태양의 신에서 인간이 된 것으로 보였다. 그들 영화들은 각각 <그때 그 사람들>, 독일영화 <몰락>, 프랑스영화 <미테랑 대통령의 말년>, 러시아영화 <태양>. 이건 할리우드가 위인들의 전기영화에 몰두하듯, 전세계적으로 불어닥친 유행처럼 아니면 우연히 내게 닥친 행운 같은 것은 아닌가. 게다가 <미테랑 대통령의 말년>은 프랑스가 최초로 다루고 있는 현대의 대통령이며, <태양>에서도 일본 천황 역시 스크린에서 감히 클로즈업 상태로 얼굴을 드러낸 최초의 영화라는 것이다. 이들 영화들은 ‘최초’와 ‘인간’이라는 데 방점을 찍는 대외 전략까지도 쌍둥이처럼 닮아 있었다. 히틀러의 마지막 날 <몰락> 먼저 지하벙커 속에서 독일의 패전을 눈앞에 둔 히틀러의 최후를 다룬 <몰락>은 히틀러를 인간적으로 그렸다 해서 개봉 때부터 화제가 되었던 작품. 베를린영화제에서는 요즈음 개봉된 독일영화만을 묶어서 상영하는 저먼시네마 부문에서 상영되었다. 히틀러를 포함하는 괴벨스와 제3제국의 붕괴를 다룬 이 영화에서, 히틀러는 아이들의 볼을 꼬집고 부하들의 항복에는 분노하는 ‘인간’으로 등장한다. 애초 생각한 것보다 몰락은 히틀러를 옹호한다기보다 히틀러의 양면성을 보여주는 데 더 주력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공평할 것 같다. 정부였던 에바 브라운은 ‘15년간 알았으나 도저히 알 수 없는 남자. 자기 앞에서는 개와 채식 이야기를 좋아하는 남자’라고 히틀러를 평가한다. <엑스페리먼트>로 감독 데뷔를 한 올리버 히르쉬비겔 감독은 히틀러의 자살을 축으로 제3제국 고위관리들에게 돌림병처럼 번진 자살과 파멸의 도돌이표를 두 시간 가까이 쉴새없는 폭탄음과 함께 광시곡풍으로 연주한다. <몰락>에서 거대한 전쟁의 신은 끊임없이 죽음의 낫을 휘두르는 망나니의 광적인 춤사위를 춘다. 지옥도에 가까운 베를린 시민의 상황과 절망적으로 마지막 파티를 여는 에바 브라운의 춤이 교차편집되고, 특히 괴벨스와 그의 부인이 자신의 6명의 아이들을 수면제로 잠들게 한 뒤, 하나하나 죽이는 장면은 신의 맷돌은 천천히 구르지만 그 어느 낱알도 놓치지 않음을 여실히 절감하게 했다. 노대통령의 여명 <미테랑 대통령의 말년> 그러나 죽음의 광시곡이 있다면 삶의 여유도 있는 법. 히틀러가 최후의 그 순간을 맞을 즈음 청년 미테랑은 자신의 경력에서 가장 중요한 바탕이 될 일을 하고 있었다. 바로 레지스탕스 운동을 벌여서 드골을 만났던 것. 유럽 전역에서 사회주의가 몰락할 때 프랑스 최초로 사회주의를 실험했던 이 청년은 14년간이나 샹젤리제궁의 주인이었던 최장수 대통령이 된다. 작고한 프랑수아 미테랑 전 대통령의 말년을 다룬 로베르 게디기앙 감독의 <미테랑 대통령의 말년>(원제 <샹 드 마르스의 산책>)은 80% 이상의 미테랑의 수다로 채워져 있다. 그는 자신의 자서전을 대필할 기자에게 ‘몇살이냐?’고 묻고는 ‘30살’이라고 하자 ‘그 나이에 나는 장관이었다’고 웃는다. ‘모델은 보기만 하고 만질 수가 없으니 배우나 흑발의 아가씨를 그것도 서른살 이하의 여자는 자기가 특별한 줄 아니까 서른살 이상의 여자를 사귀라’고 충고하는 이 대통령은 권력자의 진실을 파헤치려는 기자와 교묘한 기싸움을 죽을 때까지 벌인다. 한 권력자의 말년의 초상화이자 동시에 문학과 정치와 역사와 여자에 대한 미테랑의 개인적인 논평서처럼 보이는 이 영화에서 모든 권력을 쥐었으나 죽음을 앞둔 대통령과 어떤 권력도 없지만 창창한 삶을 눈앞에 둔 청년 기자는 모든 면에서 대비된다. 당연히 영화는 베를린에서 최초로 소개되었지만 반응은 프랑스가 훨씬 뜨거웠다. 프랑스 현지 언론들은 영화가 혼외정사 및 숨겨놓은 딸의 존재 등 미테랑의 가장 예민한 사생활의 진창을 교묘히 피해갔다며 힐책했고 게디기앙 감독은 나는 “미테랑에 대해 사람들이 어떤 결론을 내리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들이 사회와 정치에 대해 심사숙고하기만을 바랐을 뿐이다”라고 응대했다. 이 독일, 프랑스 정치영화의 대결에는 콧수염뿐 아니라 손을 떨며 극도로 흥분한 히틀러의 모습까지도 똑같이 재현해낸 독일의 대표 배우 브루노 간츠와 부드러운 웃음을 흘리며 끊임없이 수다를 떠는 미테랑 역의 미셸 부케 두 사람 중 누가 더 톱 도그(Top dog: 최고 권력자)를 잘 재현했는지에 대한 비교도 빠지지 않는다. 인간이 되고 싶은 천황 <태양> 이에 비하면 러시아 감독 알렉산더 소쿠로프는 일본 천황을 아주 곤죽으로 만들어놓는다(그런데 이 칸의 아들은 어찌하여 베를린까지 와서 자신의 신작을 공개했을까?). 천황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미제 초콜릿과 공습으로 얻어진 초콜릿을 비교하는 어린아이 같은 면이 있는가 하면, 맥아더 앞에서는 수만명의 목숨을 살릴 수 있는 결정을 내리는 진중한 신사로 변모한다. 솔직히 소쿠로프의 <태양>은 차이밍량의 <떠다니는 구름>과 함께 경쟁작 중 유일하게 내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의 관계, 권력과 사랑의 문제에 접근했던 <몰로흐> 그리고 레닌의 말년을 통해 권력과 도덕의 문제를 다루었던 <타우루스>에 이어 소쿠로프는 권력과 인간의 문제를 실험한다. 소쿠로프식 영화미학을 다시 한번 극한으로 밀어올린다. 이 영화는 일체 인공조명이 배제된 채 촬영되었다(이러한 방식은 미카엘 하네케가 <늑대의 시간>에서 실험했던 것인데 그는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태양 자신인 일본 천황이 온 방안을 환하게 비추어야 할 터인데 말이다. 영화의 제목 ‘태양’은 이 영화가 일본 천황에 대한 영화일 뿐 아니라 소쿠로프가 실험하는 ‘빛’의 예술임을 이중적으로 암시한다. 전쟁의 마지막 날, 무엇보다도 신에서 인간으로 간절히 하강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일황 자신이다. <태양>의 시사가 끝나자 옆자리에 앉았던 일본인 기자는 “이 영화는 천황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일본에 대한 이야기”라며 흥분했다. 정치적 올바름에 집착하는 베를린 개인적으로 나는 이 모든 권력자들의 최후를 보며, 감독들이 이토록 권력자들의 최후에 매료되는 까닭은 권력이 섹스처럼 본질적으로 어떤 희열과 죽음 같은 허무를 함께 경험하는 몇 안 되는 체험이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제 독일에서 히틀러와 소피 숄의 최후는 나란히 한 영화제를 장식한다(소피 숄은 지하 단체인 백장미단을 만들어 오빠인 한스 숄과 함께 반나치 운동을 하다 사형당한 독일의 유관순 같은 인물이다). 롤랜드 에머리히를 단장으로 한 심사단은 내가 보기에는 철저히 바른 생활 영화인 소피 숄에게 은곰상과 여우주연상을 안겼다. 독일, 이 창백한 어머니는 ‘정치적으로 올바른’에 집착한 나머지 다른 모든 영화적 실험들은 잊은 것일까? 그게 내가 아는 올해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의 진실이다. 아쉽게도 여전히 역사의 부채에 허리가 부서지는 독일, 베를린영화제에서 유대인 수용소에서 노는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같은 작품은 당분간 구경하기 힘들 것 같다. 영포럼 부문 결산 세계는 넓고 영화는 많다 35회를 맞는 베를린영화제의 영포럼 부문은 베를린이 전세계에서 발견한 젊은 영화인의 피를 수혈하는 통로로서, 재기발랄하고 창의적인 영화, 실험적인 영화를 표방하고 나선 분야이다.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구분을 하지 않고, 신인감독의 작품이 위주인 포럼에서 올해는 33개국에서 날아온 39편의 작품이 상영되었다. 일단 포럼의 수장인 크리스토퍼 테레헤히터는 첫날 가진 스크린 데일리에서 이미 <여자, 정혜>를 영포럼의 강력한 추천작으로 뽑았을 만큼 한국영화에 대한 배려가 극진한 편이었다. <여자, 정혜> 외에도 특히 주목을 받은 화제작으로는 미카 카우리스마키가 감독한 브라질의 도시 뮤직인 코로에 대한 다큐, 일종의 브라질판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인 <브라질레이리노>, 인도의 가장 중요한 3대 감독 중 하나인 야쉬 코프라의 신나는 발리우드 뮤지컬 <비어 자라>, 자신의 가족을 배우로 해 단 23개 신만으로 영화를 만든 중국의 류지아인 감독의 <옥사이드>, 그리고 거장임에도 불구하고 신인감독 못지않게 몸의 움직임에 대한 실험적인 다큐를 만든 클레어 드니의 <마틸데를 향하여> 등이 있었다. 이 밖에도 베를린의 세 배우를 중심으로 그들의 현재 삶과 연기가 맺고 있는 불가분의 관계를 세명의 감독이 각각 연출한 <베를린 스토리>가 좋은 반응을 얻었고, 정체 불명의 동양 남자의 아이를 가진 한 젊은 미혼모를 둘러싼 가족들의 소동담을 그린 <쿵후에게 미안해>는 좀처럼 만나볼 수 없는 크로아티아영화였다. 개인적으로 영포럼 분야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받은 작품은 공교롭게도 두편 다 중국영화였는데, 그 하나는 중국에서 각종 영화제의 촬영상을 휩쓸고 있는 <커커실리>와 몽골의 대초원을 배경으로 어느 날 처음 본 물건인 탁구공을 둘러싼 한 소년의 성장영화 <몽고리안 핑퐁>이었다. 티베트의 고원을 배경으로 가도가도 끝없는 야생의 땅 커커실리에서 일명 산악 순찰대라 불리는 민간환경보호단체와 밀렵꾼 사이의 피비린내나는 전쟁을 그린 <커커실리>는 그 장대한 촬영과 압도적인 자연으로 인해 <아타나주아> 이후 가장 장쾌한 영화 경험을 맛보게 했다. <몽고리안 핑퐁>의 경우 닝하오 감독의 연출력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서구화되는 몽골 대초원의 삶을 유머러스하게 다루고 있는 수작이다.

[What’s Up] 돌연 촬영 연기 발표한 <유칼립투스>, 진짜 원인은?

독립영화 또는 저예산영화에 대스타가 참여하는 것은 좋은 일이기만 한 걸까. 최근 촬영이 무기 연기된 <유칼립투스>의 사례는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유칼립투스>는 침체된 호주영화의 재도약을 위해 러셀 크로와 니콜 키드먼이 매우 적은 개런티로 출연키로 했다는 점 때문에 화제가 됐던 프로젝트. 1800만달러라는 저예산으로 제작되는 이 영화에서 크로는 20만달러 조금 넘는 금액을 받는 대신 이그재큐티브 프로듀서라는 지위를 갖고 영화 전반에 관여해왔다. 하지만 이 영화의 제작사인 폭스 서치라이트는 크랭크인을 불과 사흘 앞둔 2월11일 돌연 무기 연기를 발표했다. 이로 인해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주에 수백만달러를 들여 제작한 세트는 무용지물이 됐고, 80여명의 스탭들은 졸지에 실업자로 전락했다. 서치라이트가 내세운 공식 이유는 “시나리오가 아직 완벽하게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 서치라이트는 이번 결정이 자사뿐 아니라 시나리오를 직접 쓴 감독 조슬린 무어하우스와 두명의 스타, 프로듀서 모두의 ‘집단적 결정’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촬영을 코앞에 두고 시나리오 문제가 불거지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인 탓에 궁색한 변명으로 여겨지고 있다. 호주 언론들은 크로와 무어하우스가 줄곧 영화를 놓고 대립해왔다는 점을 들어 크로의 책임론을 제기하고 있다. 한 신문은 크로가 감독에게 시나리오에서 자신의 비중을 늘려달라고 요구한 것이 이번 사태의 빌미가 됐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출연할 예정이던 휴고 위빙 또한 영국 <데일리 텔레그래프>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이 시나리오가 완벽하다고 본다. 서치라이트는 크로가 시나리오의 특정 부분을 고칠 것을 주장했다는 진실을 밝혀야 한다”다고 말했다. 스스로 물러난 무어하우스 대신 크로가 직접 이 영화를 연출할 것이라는 주장이 호주 언론을 타고 있는 가운데, 크로는 브루스 베레스퍼드나 프레드 스케피시를 감독으로 원한다는 보도도 나오고 있다. 앞으로 독립영화에 출연하겠다는 스타에겐 감독에 대한 충성 서약을 요구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뉴저먼 시네마 기수 파스빈더 회고전

독일 뉴저먼시네마의 기수인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1945~82)의 탄생 60주년을 맞아 그의 영화 24편을 가져다 트는 대규모 회고전이 8일부터 31일까지 서울 안국동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다. 파스빈더 회고전은 그동안 전주국제영화제의 특별전을 비롯해, 국내에서도 몇차례 열렸지만 규모가 이처럼 크지는 못했다. 시네마테크 문화학교서울이 주한 독일문화원과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와 공동으로 주최하는 이번 행사는 파스빈더가 69년 데뷔한 뒤 82년 37살로 요절할 때까지 13년 동안 모든 열정을 태워 구축한 그의 영화세계를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는 드문 기회다. 파스빈더는 전후 독일 사회에 잔존해 있는 파시즘과, 산업화와 함께 새롭게 야기된 소외에 주목하면서 다양한 형식 안에 자기 시각을 녹여 영화화했다. 이번 행사는 데뷔작 <사랑은 죽음보다 차갑다>와 <카첼마허> 등의 초기작, <왜 R씨는 미쳐 날뛰는가?> 같은 실험성 높은 영화, 멜로영화의 형식을 빌어 좀더 대중적인 어법으로 접근한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와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 <베로니카 포스의 갈망>까지 그의 대표작을 망라하고 있다. 이 가운데 <성스러운 창녀에 주목하다> <미국인 병사> <악마의 양조법> <퀴스터 부인의 천국여행> 등 8편은 국내 스크린으로 처음 소개된다. 아울러 1920년대 후반 공황상태에 있던 독일 사회를 파헤친 파스빈더의 13부작 텔레비전 시리즈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전편이 행사 막바지인 30~31일 이틀동안 상영된다. 에필로그까지 포함해 상영시간이 총 15시간에 달하는 이 작품은 이번 회고전 티켓 소지자에 한해 무료 선착순으로 상영한다. (02)743-6003, 720-9782. www.cinematheque.seoul.kr

미학을 넘어 테크놀로지까지 영화사 총망라, <옥스포드 세계 영화사>

예쁜 옷가지나 향기로운 요리에 홀릴 때처럼, 참을 수 없는 소유욕을 발동시키는 책들이 있다. 번역 소식이 들려온 지 약 4년 만에 한국어판이 출간된 <옥스포드 세계 영화사>도 그렇다. 영화 탄생 100주년에 즈음한 1996년 영국 옥스퍼드대학 출판부에서 펴낸 이 책은 방대하고 미덥다. 영화사에 대한 균형 있는- 논쟁을 거쳐 어느 정도 공인된- 지식과 신중한 견해들을 연대와 지역 순서로 정리한 서랍을 연상하면 비슷하다. “이 책만 독파하면 영화사는 완전 정복”이라는 무모한 야심으로 장만할 법한 책이지만, <옥스포드 세계 영화사>의 실제 쓰임새는 1만개에 달하는 필요한 항목을 그때그때 뒤적이는 참고서일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지식 검색용 사전식 구성 대신 ‘스토리텔링’을 고집한다. 영화사의 기술적 발명, 산업과 제도, 장르와 작가가 어떻게 등장하고 진화하고 때로 도태되었는지, 여러 장의 흐름을 연결해 읽을 수 있는 하나의 이야기로 들려준다. 80명의 필진 가운데에는 더글러스 고머리, 데이비드 보드웰, 리처드 몰트비, 비비언 소브첵, 토마스 엘새서, 지넷 뱅상도 등등 영화학도의 필독서 목록에서 눈에 익은 이름들이 즐비하다. 예를 들어 <하드 코어>의 저자 린다 윌리엄스가 쓴 ‘섹스와 선정성’에 관한 장, <할리우드 장르>의 저자 토마스 샤츠가 쓴 ‘할리우드: 스튜디오 체제의 대승리’ 같은 장은, 해당 분야에 정통한 귄위자가 쉽게 요약한 강의록을 읽는 흐뭇함을 선사한다. 장 뤽 고다르부터 할리우드 제작 규약을 만든 윌 헤이스까지 영화사의 중요인물 140명을 가려 별도로 정리한 박스들은, 미니 전기 및 인명사전으로 유용하다. 1천 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이 가장 솔깃한 대목은, 영화 테크놀로지가 어떻게 할리우드와 세계 영화사의 고비를 이루는 물적 토대를 제공했는지 솜씨 좋게 설명할 때다. 1930년부터 1960년까지를 포괄한 2장의 ‘테크놀러지와 혁신’, 3장 초반의 ‘텔레비전의 보급에 대응한 영화의 새로운 기술’ 항목이 그렇다. ‘월드 시네마의 역사’라는 제목에 걸맞게 이 책은 중국, 일본은 물론 터키, 인도네시아의 내셔널 시네마까지 소개해 관심있는 서구 독자들 사이에 환대받았으나 한국영화 항목은 누락됐다. 번역은 고루 정돈돼 있지만, 오독의 여지를 남기는 직역과 오자도 간혹 눈에 띈다. 통상 작은따옴표를 쓰는 자리에 꺾쇠를 쓴 표기법도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 오래 읽힐 요량으로 단단히 제본되고 간결하게 디자인한 책의 외양은 매력적이다. 단단한 재질의 책날개 여분도 묵직한 책장의 부피를 감당하는 책갈피로 제격이다.

[스크린 속 나의 연인] <몽빠르나스의 등불> 제라르 필립

내 인생이 여기까지 오게 된 이유 중에 중요한 한 남자가 있다. <적과 흑>의 주인공, 프랑스 배우 ‘제라르 필립’이다. 중학교에 입학하자, 손가락이 가늘고 섬세했던 여자 미술 선생이 소질이 보인다며 내게 미대에 갈 것을 부추겼다. 덕분에 흥분해서, 거의 매일 미술실에 홀로 남아 늦도록 그림을 그리고, 풍광이 아름다워서 외롭지만 그럭저럭 견딜 만하다고 느끼게 했던 중학교 교정을 터벅터벅 걸어나오던 그 시절. 순수 미술을 하는 ‘화가’는 나의 꿈이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어느 봄날 토요일 밤, ‘주말의 명화’에서 제라르 필립을 만났다. 모두 잠든 안방에 숨어들어가, 17인치짜리 금성사 로고가 선명한 텔레비전을 어둠속에서 마주하고 영화 <몽빠르나스의 등불>을 보았다. 후기인상파의 한 사람이었던 모딜리아니의 삶을 다룬 전기영화였다. 고흐 이상으로 절대적 빈곤과 드라마틱한 삶을 요절로 마친, 그리고 사춘기 소녀를 단박에 사로잡을 미모의 화가 모딜리아니가 제라르 필립에 의해 내 앞에 나타났다. 내방 돌아와 꺽꺽대며 울었다, 물 한잔으로 와인흉내 내보며… 얇은 입술에 작은 얼굴, 검은 고수머리의 그는 내가 어렵게 구한 화집 따위에 엄지손톱만한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모딜리아니의 생, 그 너머를 보여주고 있었다. 혼자 무릎을 싸안고, 그 영화를 집어삼켜버린 나는 동생의 코 고는 소리가 낮게 깔리고 있는 내 방으로 돌아와 괜히 꺽꺽대며 울다가, 목젖을 움직이지도 않고 와인 한 잔을 아주아주 조용히 삼켰던 그를 떠올리며, 물 한잔으로 그를 흉내내어 보다가 잠이 들었다. 그 주말의 밤 이후, 내 꿈은 그림 그리는 사람에서 ‘영화 만드는 이’로 바뀌었다. 사춘기 소녀가 본, 빼어나게 잘 만든 한 편의 전기 영화는 영화라는 매체가 그 어떤 것보다 매력적이라고 속삭여 주었던 것이다. 미술실을 드나드는 대신, 영화에 목매여 헤매던 내게 제라르 필립은 고맙게도 이후, 영화 속 애인들을 소개해 주는 구실까지 했다. 소녀의 ‘꿈’도 바꿔버린 그가 난생처음으로 ‘이성적 매력’의 세계까지 일깨워준 셈이었다. 학창 시절 내내 현실의 ‘이성 애인’은 사귀어 보지도 못한 내게 ‘몬티’라는 애칭으로 더 유명했던 <사랑아, 나는 통곡한다>의 몽고메리 클리프트처럼, 유사 제라르 필립 같은 배우, 이를테면 선병질적인 느낌의 얼굴에 우울한 표정, 다소 마른 몸으로 소녀적 취향에 어필하는 사람이 현실의 대체제였다. 사춘기가 지나고 열심히 주워섬긴 남자들은 취향이 바뀌어 ‘근육질(!)’이었다. <미스터 굿바를 찾아서>, <아메리칸 지골로>의 리처드 기어가 그 대표격. <브레드레스>에서 쫙 달라붙는 체크 무늬 바지에 튀어나온 엉덩이, 댄스하듯 흐느적거리는 불량한 걸음걸이의 리처드 기어는 가장 섹시한 이성이었다. <이유없는 반항>으로 호주에서 할리우드로 넘어가 로 스타가 된 러셀 크로가 그 뒤를 이었다. 대체로 좀 작은 눈에 촘촘한 속눈썹, 각진 턱의 얼굴에 두춤하고 넓은 어깨, 부피가 있어 보이는 몸집의 리처드 기어류의 배우들이 날 흥분시켰다. 최근엔 <오만과 편견>의 미스터 다시,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콜린 퍼스가 좋아졌다. 무뚝뚝하게 꽉 다문 입술에 다소 유연하지 못한 매너의 콜린 퍼스 덕분에 <셰익스피어 인 러브>도 다시 챙겨 보았다. 대체로 빼어난 연기력과 지적인 영혼의 소유자이거나 영화사에 오롯이 기록될 걸작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보다는, 내 취향으로 ‘섹시한 매력’이 풍기는 남자들을 좋아했던 것 같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도, 영화 일을 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새로이 스크린 속의 남자들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이 어리석지만 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 현실에서 그나마 위로가 되는 듯싶다. 한 소녀의 인생을 바꾸는데 톡톡히 한몫을 한 남자 ‘제라르 필립’으로부터 스크린 속 남성 편력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외신기자클럽] 절제된 형식으로 완성한 9시간 다큐 (+불어원문)

눈이 내린다. 기차가 버려진 거대한 금속 도시를 가로지른다. 이따금씩 연기 기둥이 회색빛으로 낮게 깔린 하늘을 스쳐지나간다. 왕빙 감독의 첫 작품인, 아홉 시간이 넘는 중국영화의 낯선 물체인 <철서구>는 그렇게 시작하며 다큐멘터리 역사의 중요한 획을 긋는다. 1년6개월간, 이 젊은 감독은 중국 북부 선양의 한 공업도시의 마지막을 찍었다. 그는 한때 100만명에 이르는 노동자들이 고용됐던 어마어마한 작업장인, 마오쩌둥 시대가 만들어낸 이 괴물의 마지막 순간과 노동자들이 거주했던 티엑시의 사라짐을 그린다. SF영화의 실제 풍경을 가진 티엑시는 철길로 둘러싸여 있는데, 그것들은 엄청난 이동촬영에 이용되고 작품의 구조를 이루기도 한다. 즉, <철서구>는 <녹>, <철로> 그리고 <폐허>라는 제목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어떤 순서로든지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영화는 닫힌 이야기 구조의 원을 이루고 있다. <철서구>는 진정한 정치영화는 아니다. 어떤 내레이션도 없고, 왕빙 감독은 노동자들의 운명에 관한, 굴착기에 의해 부서진 판잣집(가건물)들의 비참함에 관한 어떤 논평도 하지 않는다. 감독의 몸에 기댄 디지털카메라는 단순한 눈, 렌즈가 되어 잔해 속으로 나아가고 그 현장의 증인들을 만나고 그들과 공감을 나누지만, 결코 판단하거나 동정은 하지 않는다. 우리도 그들 속에 빠져들어 운명을 함께한다. 왕빙 감독은 이렇게 숙명적인 분위기를 창조한다. 즉, 한 인생 전체가 마치 소용돌이에 휘말린 것처럼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지워져버리고, 주민들은 한명씩 한명씩 사라진다. 따라서 영화 속엔 뒤엎어진 석고가루 봉투의, 메말라 부스러진 대들보의 먼지로 가득 차 있고, 그것은 연기로 사라져버린 한 세계의 주체이다. 무엇보다도 <철서구>는 그 내용이 전복적이다. 이 작품은 미디어에선 거의 부재하는 또 하나의 중국을 보여준다. 티엑시에는 일하는 사람이라곤 없고, 젊은이들은 희망없이 살며, 모두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만 사로잡혀 있거나 단지 작은 속임수만으로 살아남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 인물의 다음과 같은 말처럼. “난 과도기에 있어요… 5년 전부터.” 일상적으로 우리가 듣는 중국의 역동성과 성장률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시선을 붙들어 매는 것은 바로 형식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왕빙 감독은 한 구역의 삶 1년6개월을 이야기하기 위해 아홉 시간이나 필요로 했을까? 아주 단순한 경험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 즉 만약 당신이 기차에서 창 밖을 볼 때, 기차가 빠르면 빠를수록 또렷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런데 감독은 이 원형 구조를 통해 시간을 늦추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실제론 단 한번만 찍은 중국의 새해를 부분마다 한번씩 보아 세번을 보게 된다. 그것은 단순한 잔꾀가 아니라 매우 뛰어난 영화작가의 발명인 절제된 형식이다. 그의 영화는 몇몇의 현대영화들과는 반대되는데, 속도와 간결함에 광적으로 사로잡혀 결국은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고 끝내는 것이 본질로 향하는 것이라고 믿는 텔레비전과는 무엇보다도 반대된다. 왕빙 감독은 사건을 압축하고 줄이는 대신에, 확장하고 속도를 줄여 느리게 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리고 불현듯, 그는 보이게 만든다. 그는 이 독특한 역설을 이해한 것이다. 다시 말해, 1년 만에 한 거주지와 주민이 사라지는 것 같은 급격한 사건을 세세히 이야기하기 위해선 아홉 시간은 족히 필요했다는. 이 영화는 올 여름 프랑스의 한 예술영화 전용관에서 상영돼 큰 성공을 거두었다. DVD로 막 출시되었고, 이 독특한 작품을 소장해 각 부분을 가능한 한 모든 방향으로 보고 또 보려는 사람들이 많다. 낡은 세상의 무너짐을 보여줌으로써 왕빙 감독은 하나의 강력하고 혁신적인 영화 작품을 창조해냈다. A l’ouest des rails Il neige. Le train longe une énorme ville de métal désertée. De temps en temps, des colonnes de fumée effleurent le ciel gris et bas. Ainsi commence « À l’ouest des rails », premier film de Wang Bing, ovni cinématographique chinois de plus de neuf heures, date importante dans l’histoire du documentaire. Pendant un an et demi, le jeune réalisateur a filmé l’agonie d’une cité industrielle de la ville de Shenyang au nord de la Chine. Il décrit les derniers instants de ce monstre maoïste, paquebot gigantesque qui employa jusqu’à un million d’ouvriers, et la disparition du quartier de Tiexi où ils logeaient. Véritable paysage de science fiction, Tiexi est ceinturé par une ligne de chemin de fer qui servira de travelling géant au cinéaste et de structure à l’œuvre : « A l’ouest des rails » se divise en trois parties, intitulées « Rouille », « Rails » et « Vestiges », qui peuvent se voir dans n’importe quel ordre. Le film forme donc un cercle, un récit fermé sur lui-même. « A l’ouest des rails » n’est pas vraiment un film politique. Il n’y a pas de voix off, Wang Bing ne livre aucun commentaire sur le sort des ouvriers, sur la misère des baraques détruites par les pelleteuses. La caméra DV appuyée contre le ventre du cinéaste devient un pur œil, objectif qui avance dans les décombres, rencontre des témoins, sympathise avec eux, mais jamais ne juge ou ne plaint. Nous sommes plongés parmi eux, liés à leur destin. Wang Bing crée ainsi un climat de fatalité : toute une vie s’efface sans laisser de traces, un à un les habitants disparaissent, comme emportés dans un tourbillon. Il y a donc beaucoup de poussière dans le film (des sacs de plâtres renversés, des poutres qui s’effritent…), motif d’un monde qui part en fumée. « A l’ouest des rails » bouleverse tout d’abord par son contenu. Il donne à voir une Chine quasiment absente des médias. Personne ne travaille à Tiexi, les jeunes sont sans espoir, tous semblent occupés à ne rien faire ou à survivre de petites combines. Comme dit l’un des personnages : « je suis dans une période de transition… depuis cinq ans. » On est bien loin des taux de croissance et du dynamisme chinois dont on entend parler quotidiennement. Puis, c’est la forme qui interpelle le regard. En effet, pourquoi Wang Bing avait-il besoin de neuf heures pour relater un an et demi de la vie d’un quartier ? Il nous faut partir d’une expérience très simple : si vous regardez à la fenêtre d’un train, vous constaterez que plus on va vite, moins on voit clair. Or, Wang Bing, par cette structure en cercle, ralentit le temps. Nous assistons ainsi à trois nouvel ans chinois (un par partie) alors qu’il n’en a filmé qu’un seul. Il ne s’agit pas d’une astuce mais d’une invention de très grand cinéaste, une forme de sagesse aussi. Son film s’oppose à un certain cinéma moderne mais surtout à la télévision qui, obsédé par la vitesse et la concision, finit par ne plus rien montrer en croyant aller à l’essentiel. Au lieu de compresser les événements, de tout réduire, Wang Bing a choisi de dilater, freiner, ralentir. Et soudain, il rend visible. Il a compris ce paradoxe extraordinaire : il fallait bien neuf heures pour raconter en détail un événement aussi fulgurant que la disparition d’une cité et de sa population en un an. Ce film a connu un grand succès dans le circuit « arts et essais » cet été en France. Il vient de sortir en dvd et nombreux sont ceux qui ont envie de posséder cet objet étrange, le voir et le revoir par partie, dans tous les sens possibles. En montrant l’effondrement d’un monde ancien, Wang Bing a su créer une œuvre cinématographique puissante et novatrice.

정훈이, 영화가 만화를 만났을때…

만화가 정훈이(33)씨가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 따위를 패러디해 10여년 간 영화 주간지 씨네21에 연재해 온 ‘정훈이 만화’가 책으로 추려져 나왔다. 정훈이의 내 멋대로 시네마(12000원)와 정훈이의 뒹굴뒹굴 안방극장(11000원) 두 권이다. 주인공 남기남. 티브이, 영화 속에 푹 빠져있는데 거동조차 부담돼 보이는 앙바틈한 풍채로 오지랖도 넓다. <옥탑방 고양이>는 물론 <반헬싱>, <트로이> 등 최근의 영화까지 넘나든다. <다모>의 남기남. 상처받았다. 포졸이라는 이유로 ‘다모’(김꽃달)의 사랑을 받기는커녕 면박까지 당한 탓이다. 좌포청 종사관이 부러울 법한데 무관 시험을 보기로 한 건 당연하다. 욕심만 있을 뿐 실력이 없는 건지 오십견이 온 건지 시간은 많이 흘렀고 어느새 활을 당기기조차 어렵다. 정씨의 <인어 아가씨>에도 드라마 주인공 아리영의 <인어 아가씨>만큼 애증이 담겨있다. 붕어아가씨는 붕어탕집 아들로 인해 자신이 사랑하는 붕어 대왕을 잃는다. 붕어탕집 며느리가 되어 복수할 날만을 꼽는데 붕어탕만 30년을 연구했다는 시어머니가 그를 몰라볼 리 없다. 책에는 붕어아가씨의 위기가 유쾌, 유장하게 그려져 있다. 정씨가 이렇게 익숙한 것을 비틀고, 정해져 있는 답을 뒤집는 패러디가 지금까지 400편을 넘는다. “첫 데뷔작은 티브이 보는 일에 소명의식을 느껴 ‘TV 중독증’에 걸린 실업자의 이야기였다. … 결국 내가 티브이 시청에 직업적 소명의식(?)을 느끼며 살게 된 셈”이라고 할 만큼 그의 전공분야는 미디어다. ‘시각’이 압도하는 현대사회에서 매체에 의해 주입된 이미지야말로 개성을 훼손하며 대중을 획일화하는 막강한 수단일 것이다. 정씨의 미디어 패러디가 지닌 의미를 음미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책은 계몽·사회풍자형이라기보다 그저 ‘썰렁한’ 패러디로서 억눌린 시선과 잠재한 상상을 드러내는 데 무게를 더한다. “허리 물론 없”고 “직업도 없”으면서 “은근히 예민”한 남기남과 그의 덩치를 고스란히 빼닮은 채 “츄리닝티, 앙큼한 눈빛”의 “잘난 체”까지 하는 ‘김꽃달’, “남기남 부려먹기”가 장기인 ‘씨네박’이 대표 인물인데, 푸근한 생김새부터 그 취지에 어울린다. 이끼북스 펴냄.

<주먹이 운다> 최민식·류승범 인터뷰

스무살 차이의 두 남자가 사각의 링에서 대결한다. 4월1일 개봉하는 <주먹이 운다>(류승완 감독)에서 인간 샌드백을 자처하는 거리의 복서로, 살인죄를 지은 소년교도소의 수감자로 삶의 구석자리에 밀려난 두 남자, 마흔두살의 강태식과 스물두살의 유상환은 세상을 향해, 가족을 향해 자신을 입증하기 위해 링에서 조우한다. 두 인물이 유일하게 만나는 마지막 장면의 신인왕전에서 연출없는 ‘생짜’의 난타전을 벌인 두 배우 최민식(43)과 류승범(25), 두 배우의 만남은 한국 남자배우계의 중견급 대표선수와 20대 대표선수라고 할 만한 인물들의 연기 대결이라는 점에서도 주목을 끈다. 17일 오전 인터뷰에 10분 늦은 류승범이 방에 들어오자마자 무릎꿇고 두손을 들면서 미안함을 표시하자 최민식은 삼촌같은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장난스럽게 핀잔을 줬다. 류승범 까마득한 선배, 심적인 부담 “너에게 충실해라” 한마디에 좁은 국도가 고속도로처럼… 이날을 기다려왔다 최민식:“영화를 하기 전 사석에서 한번 만난 게 전부인 사이였지만 승범이는 오래 전부터 함께 작업을 해보고 싶은 배우였다. 전작들에서 또래 배우들에게서 찾기 힘든 확신과 유연성을 봤다. 아니나 다를까, 같이 찍으면서 후배라는 생각보다 ‘오호, 그래?’라는 수평적인 긴장감을 주더라. 그런게 연기 뿐 아니라 영화 전반에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다. 역시 ‘이기적인’ 내가 남는 장사를 한 것같다(웃음).” 류승범:“까마득한 선배와 함께 작업하는데 심적 부담이 전혀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 준비하면서 어떤 방향으로 가야할 지 많이 걱정하고 헤맸는데 최선배한테 “근본적으로 너와 나는 다른 인간이고, 다른 배우다. 너는 너의 캐릭터에 솔직하면 그게 전부”라고 했던 말을 들으면서 좁은 국도같던 시야가 고속도로처럼 확장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때부터 잡생각을 털면서 내가 극중에서 만나는 인물들에 몰두할 수 있었다.” 이겨야 O·K나는 마지막 대결 장면, 이렇게 ‘싸웠다’ 류: 감독님이 촬영 전에 여러 번 전화해서 “정말 (연출없이) 그냥 가도 되는 거냐?” 말하며 불안해했다. 최선배가 전부터 “그냥 때리고 맞으면서 가면 되지” 라고 말해서 그렇게 하기로는 했지만 짧지도 않은 씬에서 정교한 액션연출없이 간다는 게 사실 불가능하지 않나.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말이 해결책이 됐다. 찍다가 잠깐 쉬는 중간에 모니터를 보니까 자꾸 내가 밀리더라. 이러면 안되는데 하면서 마지막 라운드는 오로지 이겨야 한다는 심정으로 죽기살기로 덤볐다. 말이 그렇지 옆에 있던 카메라가 뒤로 빠질 때는 죽었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진짜 무섭더라. 최민식 생존의 링에서 싸우다 퇴출 누울 자리 한평 없는 이 시대 아버지들을 위해… 최:“권투는 액션과 리액션이 너무나 선명한 경기다. 경기에서 처음 만날 때까지 두 인물이 끌어온 정서가 있는데 만약 합의된 액션으로 간다면 그 정서가 흐트러지거나 약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6라운드에서 파김치가 된 승범이가 나를 밀자 나도 모르게 “밀지마, 씨발”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모든 게 설정에는 없었던 애드립이었다. 그런 의외성이 인물의 정서를 전달하는 매우 중요했고 호흡이 잘 맞아서 오히려 쉽게 끝낼 수 있었던 장면이었다. 그런데 짜식, 힘이 진짜 세더라구. 부럽더군. 나도 옛날에는 저랬는데 싶으면서(웃음).” 류:사실 마지막 라운드에서 형한테 엄청 미안했다. 그래도 어떡하겠나. 안 그러면 오케이가 안나는데(웃음).” 이런 인물, 이런 영화 최:강태식은 이 시대의 아버지같은 인물이다. 생존이라는 사각의 링에서 머리가 깨지도록 싸워온. 그리고나서 40대에 사회로부터 퇴출돼 발뻗고 누울 자리 한 평 얻을 수 없는. 오죽하면 40대 돌연사가 세계 1등일까. <주먹이 운다>는 이런 아버지들에 보내는 연가같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사정 딱한 아버지들이 영화를 보면서 위로받고, 또 그들의 자식들이 영화를 보면서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해서 한번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다. 류:종종 <인간극장> 같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면 아, 나처럼 힘들게 사는 사람이 있구나, 나보다 더 힘들게 사는 사람도 있네 이런 생각을 짧게나마 하면서 내 처지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된다. 영화라는 매체가 사람의 전부를 움직이거나 변화시킬 수는 없겠지만 <주먹이 운다>를 보면서 자신이 패배했다고 또는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짧은 위안이라도 얻어갔으면 한다.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노동자계급이여, 파랑새는 어디 있는가?

당신들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고 있다. 아니, 실망하고 좌절하고 있다. 당신들의 일각에서 벌어진 부패를 두고 노동귀족을 거론하는 것도 도를 넘어선 지적은 아닐 것이다. 운동이 비즈니스로 전락하고 노동자의 힘이 권력으로 타락할 때 남는 것은 절망과 냉소뿐이라는 것을 나는 절감하고 있다. 절망과 냉소의 깊이는 이 부패를 두고 정부와 언론의 음모, 그리고 침소봉대로 대응하는 모습에서 그 바닥조차 짐작할 수 없는 심정이었다. 또한 이런 타락과 배신의 풍토가 만연해 있지는 않을 것임을 확신할 수 없는 내 자신이 너무도 고통스럽다. 당신들의 지적처럼 “자본이 노동운동을 말살하기 위해 노조간부를 매수함으로써 민주노조를 말살하려던 건 예견된 상황이었고, 정권은 이를 활용하고 있다”고 인정하더라도 결론은 달라질 것이 없다. 자본이 노동운동을 말살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 적이 언제 어느 때에 있었던가. 노조간부를 매수하려 노력하지 않았던 적이 언제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자본이 민주노조를 말살하려 하지 않았던 적이 언제 있었던가. 정치권력이 그것을 활용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때가 또 언제 있었던가. 그 모든 것들은 자본의 천성적이고 근본적인 욕망이 아니던가. 내가 절망스러운 것은 자본의 그런 욕망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빈번하게 승리를 거두어왔다는 사실이고, 너무도 당연하게 당신들도 그렇게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이 못내 괴로운 것이다. 진실을 말한다면 당신들은 자본에 화살을 돌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들 스스로의 타락한 심장을 향해 그 화살을 겨누어야 하는 것이다. 도대체 한때 그토록 충만하게 여겨졌던 노동자계급의 대의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새로운 세상을 창조할 주역으로서 당신들의 대의는 지금 어느 쓰레기통에 처박혀 있는가. 실질 최저생계비를 저 멀리 웃도는 고임금 노동자들을 무한한 임금인상의 탐욕 속으로 밀어넣는 것이 민주노조운동이라면,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실업자들, 외국인노동자들을 그토록 홀대하는 것이 민주노조운동이라면 노동자계급의 대의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며, 무엇보다 당신들이 자본과 정치권력을 비난할 권리는 또 어디에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당신들도 알고 있는 것처럼 한때 노동조합은 예외없이 어용노조였던 시기가 있었다. 그 시기에 노동조합이란 노무관리조직의 하나에 불과했고 조합장의 자리란 뒷돈을 착복할 수 있는 노예권력을 보장받는 자리일 뿐이었다. 돌이켜본다면 민주노조운동은 그 모든 배신과 부정, 부패의 쓰레기 속에서 장미처럼 피어난 운동이었다. 그리고 그 길고 길었던 어둠의 세월을 헤치고 달려, 오늘 여기 이 자리에까지 올 수 있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깊고 깊은 어둠이 우리 앞에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진정으로 고통스러운 것은 운동이 도처에서 불온한 탐욕에 무릎을 꿇고 도덕성을 상실해가고 있는 이 시대에 최후의 보루로 여겨졌던 노동운동마저 그 함정에 빠지고 있는 것을 목도해야 하는 것이고, 노동자만이 새로운 세상을 창조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과 희망이 파열음을 내며 너무도 잔인하게 균열하고 있다는 것이다. 탐욕이라는 자본의 유혹에 단호하게 맞서 싸울 수 없다면 당신들은 결코 우리의 꿈과 희망을 실현할 수 없을 것이다. 탐욕이라는 유혹에 무릎을 꿇는 순간 당신들은 계급의 영혼을 기꺼이 자본에 헌정하게 될 것이고 머지않아 자본주의의 탄생 이후 세계노동운동사가 그토록 집요하게 반복해 나열했던 종장을 향해 내달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비참한 것은 우리 모두가 당신들의 뒤를 쫓아 똑같은 길을 달리게 되리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 도대체 텔레비전 인치를 늘리고 아파트 평수를 늘리고 좀더 좋은 물건을 소비하고, 좀더 좋은 음식을 먹고, 좀더 비싼 옷을 입는 것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고통받고 억압받는 동료들의 처지를 외면해도 좋을 만큼 행복해지는 것인지 나는 진정으로 회의하고 있지만 당신들이 그것을 원한다면, 그럼으로 자본의 배부른 노예가 되기를 원한다면 나 역시 그 길을 따라갈 것이다. 나는 여전히 당신들이 새로운 세상을 창조할 주역임을 믿고 있으니까.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의 당신들이 그 꿈을 이룰 것이라고 여전히 믿고 있으니까.

TV 시리즈 DVD 특집 (2) - 선과 악의 뒤틀린 미로 <카니발>

모든 건 데이빗 린치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990년, 할리우드 초현실주의 거장인 데이빗 린치가 라는 제목의 시리즈를 내놓았을 때, 그는 미국 텔레비전 세계의 새 영역을 창조했다. 그 세계는 매력적이고 불가해한 사건들로 가득하지만 결코 분명한 해답은 주어지지 않은 곳이었고 시청자들은 결말과 진상보다 미로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체험 자체를 즐겨야만 했다. 이후 수많은 시리즈들이 그 뒤를 이었다. 아마 린치의 가장 성공적인 직계후손은 크리스 카터일 것이다. 그가 90년대에 내놓은 두 편의 시리즈 과 은 음모론과 종말론의 골격으로 쌓아올린 불가해의 미로였다. 라스 폰 트리어가 덴마크의 컴컴한 병원복도들로 창조한 시리즈의 세계도 린치의 영향에서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세계는 결코 운영하기 쉬운 곳이 아니었다. 결말이 분명한 영화와는 달리 이 세계의 시리즈들은 살아남기 위해 상어처럼 헤엄치며 결코 진상에 도달하지 말아야 했다. 린치는 의 결말을 거의 방치했다. 카터는 자신의 세계에 지나치게 매혹된 나머지 의 후반 시즌에 그 불가해함의 매력을 거의 완벽하게 날려버렸다. 그 최종 결과는 근사하게 시작된 수수께끼에 대한 졸렬하고 시시한 해답이었다. 시리즈는 해답을 제시하기도 전에 중단되었다. 과연 폰 트리어가 시리즈를 완성할 생각이나 있는지도 모르겠고. 주연 배우 한 명이 죽어버렸고 시간도 꽤 흘렀으니 3부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다. 린치 역시 신작 시리즈 에서 상당한 애를 먹었다. 결국 그는 시리즈를 포기하고 파일럿 영화를 재편집해 추가장면들을 넣어 극장용 영화로 만들었다. 는 매혹적인 영화였지만 가능할 수도 있었던 시리즈의 잠재적 가능성을 생각해보면 그냥 아쉽기만 하다. 그런데 지금은 이런 생각이 든다. 왜 린치는 갑갑한 공중파 방송들만 건드리고 HBO와 같은 케이블은 시도해보지 않았는지? (또는 왜 린치의 기획이 케이블에서는 먹히지 않았는지?) 오늘 이야기할 HBO 시리즈 이 이 정도의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곳이라면 역시 충분히 성장할 가능성이 있었을 텐데? 일단 의 설정을 간단히 정리해보기로 하자. 시리즈의 시대 배경은 대공황시대였던 1934년의 미국이다. 어머니를 잃고 살던 집도 은행에 빼앗긴 주인공 벤 호킨스는 우연히 만난 카니발 패거리들에 섞여 미국 전역을 누비게 된다. 늘 트레일러 안에 박혀 있고 리더인 샘슨을 통해 간접적으로 의사를 전달하는 매니지먼트라는 인물에 의해 통제되는 카니발은 속임수와 사기로 들끓는 곳이지만 그 거짓 경이 속에 진짜 마법이 숨겨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잠시 그 카니발의 멤버였던 헨리 스커더라는 인물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 벤은 그의 뒤를 추적하다 자신이 무언가 거대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대리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시리즈에는 거의 연결되지 않는 또 다른 스토리 라인이 있다. 이 스토리의 주인공은 캘리포니아의 감리교 목사인 저스틴 크로우이다. 처음엔 그는 마을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마을에 떠돌이 노동자들을 위한 교회를 세우려는 열성적인 목사이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일련의 신비스러운 경험을 겪은 그는 자기에게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거대한 힘이 숨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1시즌에서 벤과 크로우 목사는 단 한 번도 직접 만나지 않지만 시리즈는 이야기가 계속되는 동안 이들이 앞으로 있을 선과 악의 대결에서 만날 것이라는 암시를 계속 뿌린다. 은 일종의 예술적 잡탕찌개와 같다. 이 시리즈가 다루는 초현실적인 세계는 HP 러브크래프트와 스티븐 킹의 영향에 듬뿍 절어있다. 유랑 카니발 세계에 대한 미국적인 매혹은 레이 브래드베리의 단편들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30년대 대공황기의 미국을 그리는 시점은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텔레비전 시리즈라는 형식을 통해 미스터리의 미로를 쌓아올리는 수법은 부인할 수 없는 데이빗 린치의 방식이다. 유랑 카니발의 난쟁이 리더인 샘슨을 연기하는 마이클 J 앤더슨 역시 린치의 에서 물려받은 것이다. 요약정리 한다면 이 시리즈의 크리에이터인 다니엘 노프는 일단 남들에게서 물려받은 찌꺼기들을 주워 모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기만의 스토리와 스타일을 구축하는 것은 그 다음 일인 것이다. 의 1시즌은 그 때문에 상당히 덜컹거린다. 적어도 전반부는 그렇다. 환상을 구축하는 방식은 거장인 데이빗 린치를 서툴게 모방한 티가 역력하고 적당히 암시를 풀어 기대와 긴장감을 조성하는 방식도 그냥 뻣뻣하다. 이런 뻣뻣함이 극복되는 건 시리즈가 그 자체의 스토리를 얻기 시작하고 그에 기대어 스타일이 굳어지는 ‘바빌론’ 에피소드부터이다. 그러나 그 뒤에도 이 시리즈가 아주 새로운 영역을 구축했다고 하기는 어렵다. 의 예술적 성취는 아직까지 비교적 평이하게 얻을 수 있는 기성품 예술적 도구들을 재능 있는 인력들을 이용해 효율적으로 구축했다는 데 있는 듯하다. 을 특징짓는 것은 그 기독교적인 세계관이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처럼 노골적인 기독교 텔레비전 시리즈라는 건 아니다. 시리즈는 종종 지옥과 종말에 대한 기독교도들의 공포심을 자극하기도 하고 툭하면 성경을 인용하며 수상쩍을 정도로 그와 유사한 이야기들을 늘어놓긴 하지만 그만큼이나 자주 근본주의 기독교의 편협함과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기독교는 늘 이야기의 중심에 있다. 직접 언급되지 않는다고 해도 메시아에 대한 믿음, 동정녀 탄생, 죽은 자의 부활, 세례요한, 바빌론의 창녀들과 같은 성경의 요소들은 조금씩 변형되어 의 우주에 끊임없이 찾아온다. 어떻게 보면 은 오컬트 신봉자의 눈을 통해 본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이다. 설정은 기독교 세계관에서 출발하지만 정작 기술되는 이야기는 마니교나 조로아스터교와 같은 이교도들의 세계관에 더 기울어 있다. 끝없이 이어지는 선과 악의 대결이라는 구도 자체가 그렇다. 심지어 이 시리즈에서는 과연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에 대한 확신도 분명히 가질 수 없다. 우리가 벤 호킨스에 동조하는 이유는 그가 주인공이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없다. 정의와 신에 대한 열정에 불타는 신심 깊은 목사 저스틴 크로우가 악마여야 한다는 논리는 또 뭔가? 다니엘 노프의 첫 번째 성취는 데이빗 린치식 미로를 선악 구도의 이야기에 도입했다는 데 있다. 카니발의 미로는 도덕적인 미로이다. 어느 누구도 분명히 자신이 옳은 편에 서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심지어 그들이 섬기는 대상 (여기서는 수수께끼의 매니지먼트가 그 역할을 한다)이 신인지 악마인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의 확신을 넘어서는 힘을 가지고 있고 그걸 활용해야 하는 것이다. 의 가장 큰 공포는 자신의 존재와 행동에 대한 공포이다. 기독교 세계관과는 점점 멀어진다. 신심 깊은 신자들은 누군가가 자신의 의지를 거스르는 운명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는 일은 없다고 믿을테니. 은 반대로 운명이 그렇다면 당사자가 아무리 저항한다고 해도 결국 자신의 역할을 맡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여기서 이야기는 은근히 미국 수퍼 히어로 코믹북과 비슷해진다. 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접어들면 시리즈는 성경보다는 이나 에 더 가까워진다. 벤과 크로우는 모두 인간을 넘어서는 엄청난 능력을 얻게 된 초인들이다. 대부분의 엄청난 힘들이 그런 것처럼 이들의 힘에는 늘 부작용과 반작용이 있다. 특히 벤의 경우 무언가를 얻으려면 그만한 다른 것을 희생해야 한다. 소녀의 다리를 고치려면 주변의 곡물들이 죽고 친구의 팔을 고치면 강의 물고기들이 죽어 떠오른다. 벤은 어떻게 자신에게 주어진 힘을 사용할 것인가? 이는 모든 미국 수퍼 히어로 코믹북의 중요한 주제이다. 설정이 주인공의 자유의지를 제한하긴 하지만 이 시리즈 역시 그 주제를 그대로 물려받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와 수퍼 히어로 코믹북. 이 두 가지 주제 덕택에 이라는 시리즈는 굉장히 미국적인 작품이 된다. 그냥 미국적인 작품인 것이 아니라 9/11 사태 이후의 현대 미국 사회에 대한 썩 그럴싸한 비판이 되어주는 것이다. 은 지옥과 종말의 공포에 휘말린 사람들의 광신적 믿음과 그에 대한 회의에 대한 이야기이며, 지나치게 큰 권력을 가진 존재가 자신의 행동에 어떻게 책임을 지느냐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두 가지의 주제는 모두 강한 현재성을 띤다. 카니발과 개신교 교회라는 비교적 상반되어 보이는 두 세계는 이런 회의와 고민에 적절한 힘을 실어준다. 한마디로 두 세계 사이에는 어떤 질적 수준의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노프는 시치미를 뚝 떼고 종종 이 두 세계를 섞어놓는다. 우리의 선량한 목사 양반은 신으로부터 내려온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협박과 사기, 마법을 일삼는다. 가짜 기적을 일삼는 부흥회는 보다 솔직한 사기꾼들인 카니발 사람들에 의해 모방되는데, 놀랍게도 그곳은 진짜 기적이 행해질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선의는 드물고 악은 어디에나 존재하며 기괴함과 열광은 언제나 찬탄의 대상이 된다. 시리즈가 회를 거듭할수록 카니발의 종교적 색채는 점점 짙어지고 결국 진정한 종교적 희열과 고통과 열광의 무대가 된다. 그러는 동안 제도권 교회가 꼼꼼하게 쌓아올린 선과 악, 기독교와 이교의 벽은 붕괴된다. 그 붕괴과정 중 만들어지는 불쾌한 미로는 이라는 시리즈가 제공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다. 은 지금 아직 미완성인 작품이다. 국내에서는 1시즌이 방영되었고 미국에서는 2시즌이 거의 끝나가고 있다. 이 시리즈가 선과 악의 전쟁을 다루는 작품이라고 친다면, 1시즌은 선전포고까지 다루었다고 보면 된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야기는 막 분위기를 잡는 수준에서 끝난다. 이 과연 자신이 원하는 수준에 도달할 수 있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니엘 노프가 처음 이 시리즈를 기획했을 때 6시즌 정도의 길이를 생각했다고 하는데, 지금 사정을 보면 그 정도 길이까지 이어지지는 못할 것 같다. 과연 3시즌이 이어질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만약 정말로 2시즌으로 끝난다면 은 바람만 열심히 잡아놓고 끝난 시리즈로 남을지도 모른다. 시리즈가 원래 목표로 삼았던 6시즌까지 도달한다면? 그 결과 역시 미지수이다. 앞에서 말했듯, 이런 시리즈의 힘과 매력은 불가해의 세계를 탐험하는 중간의 여정에 있기 때문이다. 노프가 과연 이 모호한 세계에 걸맞는 결말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데이빗 린치, 크리스 카터, 라스 폰 트리어와 같은 대단한 인물들도 못해냈던 일이다. 노프가 항해을 무사히 마친다면 그건 선배들을 넘어서는 굉장한 성취가 될 것이다. 출연진 소개 벤 호킨즈를 연기한 닉 스탈은 멜 깁슨의 감독/주연작 < The Man Without a Face >에서 깁슨의 상대역 소년을 연기하며 주목을 받았다. 이후로 잠시 주춤하던 그의 경력은 과 와 같은 영화들에 출연하면서 조금씩 뜨기 시작했다. 국내에 가장 잘 알려진 영화는 에드워드 펄롱의 뒤를 이어 미래의 구세주 존 코너를 연기한 .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의 역할에 끌려다니는 미래의 구세주라는 의 역할은 같은 해에 출연한 의 벤 호킨즈 역과 여러 면에서 유사하다. 장르 영화팬들이라면 저스틴 크로우 목사를 연기한 클랜시 브라운은 익숙한 인물이다. 에서 빅터 크루거를, 에서 프랑켄슈타인의 괴물로 나온 사람이 바로 그다. 그의 굵직한 목소리는 니켈로디온의 히트 애니메이션 시리즈 에서 언제나 들을 수 있다. 주인공 스폰지밥의 탐욕스러운 고용주인 집게 사장의 목소리 연기를 하는 사람이 바로 브라운이다. 눈먼 독심술사 러즈 교수를 연기한 패트릭 보쇼는 5개 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옥스퍼드 학자 출신이다. 에릭 로메르의 두 번째 모럴 이야기인 으로 영화계에 데뷔한 그는 빔 벤더스, 디안느 퀴리, 안제이 즈왑스키와 같은 유럽 감독들의 영화에 출연했다. 90년대 이후 그는 주로 미국에서 활동했는데, 장르 팬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역할은 시리즈의 악역 시드니이다. 식물인간 어머니 아폴로니아와 텔레파시로 연결되어 있는 카드 점쟁이인 소피를 연기한 클리아 듀발은 최근 가장 주목받는 인디 영화계의 젊은 연기자들 중 한 명이다. 국내에서는 로버트 로드리게스의 , 존 카펜터의 , 제임스 맨골드의 와 같은 장르 영화들이나 역시 맨골드의 와 같은 할리우드 영화들의 조연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 Thirteen Conversations About One Thing >이나 , < The Laramie Project >와 같은 인디 영화작품들의 출연작들도 만만치 않다. 최근에 듀발은 사라 미셸 겔러가 주연한 의 할리우드 리메이크 판에 출연했다. 카니발의 리더 샘슨을 연기한 마이클 J. 앤더슨은 전설적인 컬트 시리즈 시리즈를 통해 데이빗 린치의 비틀린 미의식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현재 그는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왜소증 배우이기도 하다. 이후 그는 , 크리스틴 크룩 주연의 , 소프 오페라 시리즈인 에 출연했다. 뱀 놀리는 댄서인 루디를 연기한 아드리안느 바르보는 으로 브로드웨이에 데뷔했다. 72년에 시트콤 < Maude >로 텔레비전에 데뷔한 바르보는 79년에 결혼한 두 번째 남편인 존 카펜터의 영화인 와 조지 로메로의 와 같은 장르 호러물에 주로 출연했다. 크로우 목사의 누나 아이리스를 연기한 에이미 매디건은 배우 에드 해리스의 아내이다. 영화로는 남편과 공연한 , 그리고 , 와 같은 영화들이 있다.. 존 새비지는 , , 와 같은 힘있는 7,80년대의 미국 영화로 영화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장르 팬들에게 가장 기억될만한 작품은 그가 도널드 라이데커로 출연했던 제임스 카메론의 텔레비전 시리즈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