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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트랜스젠더 소재 지상파 드라마 다양성 인정하는 성숙함 엿보여

<한강수타령> 후속으로 방송되고 있는 문화방송의 연작드라마 <떨리는 가슴> 제2화 ‘기쁨’ 편(작가 정형수·연출 고동선)이 트랜스젠더를 소재로 다뤄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기쁨’ 편은 성적 소수자인 트랜스젠더가 이끌어가는 가족 관계와 화해, 사랑, 해프닝 등을 휴머니즘적 시각으로 담아냈다. 지상파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트랜스젠더를 다룬 것은 <떨리는 가슴>이 처음이다. 실제 성전환자가 트랜스젠더 역의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하리수는 성전환 수술을 받고 남자 김창호에서 여자 김혜정으로 변신한 트랜스젠더 역으로 출연했다. 성적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모른 채 어릴 때부터 여자처럼 살던 창호는 집을 떠난 지 2년 만에 성전환 수술을 받고 혜정이라는 이름으로 가족 앞에 나타난다. “자신은 창호의 형일 뿐 혜정의 오빠는 아니다. 더이상 우리는 가족이 아니다”라며 혜정을 거부하는 김창완의 냉대 속에 고개 숙이는 하리수의 연기는 실제 트랜스젠더인 하리수의 상황을 연상시키며 시청자들에게 감동을 안겼다. 방송이 나간 뒤 이 드라마 시청자 게시판에는 6백여개가 넘는 의견이 올라와 시청자들의 높은 관심을 보여주었다. 트랜스젠더라는 우리 사회의 소수자 문제를 다룬 드라마에 감동을 받았다거나, 트랜스젠더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었다는 등 대부분 긍정적인 내용들이었다. 드라마 제작진은 트랜스젠더를 소재로 삼았다고 해서, 드라마를 통해 사회적·철학적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집착하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오히려 그보다는 작은 선물을 주고받을 때 느껴지는 소박한 기쁨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그것을 떳떳하게 인정받을 때 느껴지는 뿌듯한 기쁨까지, 살면서 기쁨으로 가슴이 떨리는 순간을 포착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고 한다. 게시판에는 ‘기쁨’ 편이 트랜스젠더를 미화하고 있는 것 아니냐, 주말 온가족이 시청하는 시간대에 자녀와 함께 보기에 교육적으로 좋지 않다는 등 부정적인 글을 올린 시청자들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극중에서 혜정의 상황은 미화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트랜스젠더라는 사회적 소수자의 고민과 고통, 그들에 대한 사회의 편견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가족에게조차 거부당하며, 부당해고가 되어 부당함을 항의해도 주변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고, 사람들의 가십거리밖에 되지 않는 그들의 모습을 리얼하게 그렸다. 작가는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사회의 편견과 부당함에 대해, 창완의 “걔도 사람이야”라는 대사로 사회적 소수자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행복추구권이 있다는 것을 얘기하고 있다. 한 시청자는 “외동으로 자라 자기들밖에 모르고 자신들과 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왕따같은 것을 만들어내는 아이들에게 세상은 어우러져 살아야 행복하다는 것을, 또 일반인과 조금 다른 사회적 소수자들도 인간답게 살아야 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좋은 드라마였다”는 글을 남겼다. 트랜스젠더는 우리 사회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사람들로,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범죄자가 아니다. 성 정체성이 다수의 사람들과 다를 뿐이다. “난 분명히 여성인데 사람들은 트랜스젠더라 불러요”라는 혜정의 대사는 시청자들에게 사회적 소수자의 문제를 그들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도록 했다. 그동안 금기시돼온 소재들이 지상파에서 자주 다뤄져, 다양성을 폭넓게 인정하는 성숙한 사회로 나아가는 걸음이 빨라질 것을 기대해본다.

[인터뷰] <역전의 명수> 정준호

“잘 되던 못 되던 내 탓인 영화”란다. <역전의 명수> 개봉(15일)을 앞둔 정준호(35)는 1인2역의 여운이 아직 남아있는 것처럼, 초조한 듯 초연한 듯 상반된 표정을 번갈아 내비치며 새 영화 얘기를 풀어갔다. 정준호는 이 영화에서 2분17초 차이로 태어난 쌍둥이 형제 명수·현수 역할을 맡았다. 현수는 출세에 눈이 멀어 애인도 양심도 내던진 서울대 법대 출신 변호사고, 명수는 국밥 마는 어머니한테 빌붙어 사는 역전 ‘죽돌이’. 현수는 ‘잘될 놈에게 몰아주라’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집안의 기대와 지원을 한몸에 받는다. 반면 명수는 ‘여자 말을 잘 듣자’는 가훈에 따라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현수 대신 군대와 감옥 가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한편, 명수 앞에 나타난 ‘현수가 버린 여자’ 순희(윤소이)는 현수와 똑같이 생긴 명수를 이용해 부모의 원수를 갚으려 한다. 명수는 ‘거사가 끝나면 한 번 자주겠다’는 순희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고 영문도 모른 채 은행털기와 폭행치상에 휘말리지만 인생은 뜻밖에 역전의 발판을 마련한다. 선악구분 확연한 쌍둥이 형제, 연기 자평 55점…아쉽지만 뿌듯 정준호는 1인2역에 대한 욕심 때문에 제발로 제작자를 찾아가 배역을 따냈다. 하지만 이미 영화 <두사부일체>와 드라마 <안녕 내 사랑>에서 ‘일자무식 의리파’와 ‘비열한 악역’을 연기한 적이 있는 정준호에게도, 한 영화 안에서 선·악으로 확연히 구분되는 두 캐릭터를 소화하는 것은 녹록치 않았다. “명수는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돌보며 자신을 헌신하는 사랑의 화신이고, 현수는 성공과 야망을 위해 가족을 희생시키는 욕망의 화신입니다.” 정준호는 판이한 두 캐릭터를 소화하기 위해 그간 쌓아온 경험과 상상력을 총동원했다. “대접 톡톡히 받고 자란 장남이라,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명수를 백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능력만 된다면 조건 좋은 여자 만나고 싶고, 또 현실적으로 가능하다면 군대건 감옥이건 누군가 대신 가주길 바라는 게 사람 마음이겠죠. 현수도 십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경험과 상상력에 덧붙여, 정준호는 <범죄의 재구성>과 <인어공주>를 보며 박신양과 전도연의 1인2역을 사전 연습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번째 1인2역에 대한 자기평가는 55점. 특히 현수 역할에 대한 아쉬움이 크다고 했다. “현수가 나쁜 동생으로 변할 수 밖에 없었던 현실적인 이유와 콤플렉스 등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것 같아요. 시나리오의 한계도 있었고, 연기도 부족했습니다. 촬영이 고되고 힘들어 ‘빨리 끝내고 자야지’ 하는 마음으로 찍은 장면들이 있는데, 영화 보는 내내 후회했습니다.” 하지만 정준호는 “<역전의 명수>는 영악하고 세련되게 만들 수 있는 길을 애써 피해간 순박한 사랑 영화”라며 “순박한 영화를 끌고 가는 순박한 1인2역 연기에 애정을 가져달라”고 애교섞인 주문을 덧붙였다. 연기생활 10년 만에 아쉽지만 뿌듯한 1인2역을 마친 정준호는 올 여름 브라운관으로 돌아간다. 6년 만에 드라마로 복귀하는 이유는 “어머니가 텔레비전 드라마를 좋아하시기 때문”. <가문의 영광>에서 호흡을 맞췄던 김정은과 드라마 <루루공주>에서 다시 커플이 된다. 연말에는 정웅인·정운택 등 <두사부일체> 멤버들과 함께 속편 <투사불일체>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다.

코믹드라마 <신입사원> <불량주부> 속 사회풍자

눈물나는 현실이 왜 이렇게 웃기지? 요즘 텔레비전 채널마다 코믹물 일색이다. 이런 가운데 단순한 웃음이 아니라, 사회 현실을 풍자해 뭉클한 웃음을 주는 드라마들이 시청자들의 인기를 얻고 있다. 화제의 드라마는 문화방송의 <신입사원>(극본 김기호 이선미·연출 한희)과 에스비에스의 <불량주부>(극본 강은정 설준석·연출 유인식 장태유). 청년실업 문제를 주요 소재로 한 <신입사원>은 내세울 것 없는 학벌과 배경을 가진 ‘강호’(문정혁)가 LK라는 대기업에 우연찮게 입사해 직장생활을 하면서 겪는 에피소드를 그리고 있다. 강호는 LK그룹 입사시험에서 전산착오로 필기시험 만점을 받아 면접을 보게 된다. 면접관이 영어로 질문을 하자 강호는 옆사람에게 무슨 뜻인지 물어본 뒤 당당하게 한국어로 답을 한다. 즐겨 읽는 책을 물어보자 ‘무협지와 만화책’이라고 답하고, 경제와 관련한 질문에는 ‘생각해본 적 없다’고 대답해 면접장을 경악으로 몰아넣지만, 회사 전무는 강호가 필기시험 만점자라는 선입관에 사로잡혀 강호가 무슨 말을 해도 기특하게만 본다. 입사에 성공한 강호는 신입사원 연수과정에서 조직폭력배와 맞닥뜨리게 되는데, 무서워하거나 기죽지 않고 오히려 회사 물건을 팔 수 있는 기회로 역이용하는 적극성과 대담함을 보여준다. 이렇게 황당한 설정에도, 이 드라마는 일류대학을 나오고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공부형’ 인재들만 대기업에 입사하는 현실을 재미있게 풍자해 시청자들에게 대리만족을 준다는 평을 받고 있다. 한 시청자는 시청자 의견난에서 “비록 영어는 잘 못하지만 임기응변과 순발력으로 어떤 환경에서도 바보스러울 만큼 꿋꿋하고 당당한 강호 같은 인물이 이 시대를 끌어갈 원동력이 아닐까요?”라고 반문했다. <신입사원>은 하청업체의 접대 관행, 학연에 의한 줄타기, 비정규직 문제 등 기업에 만연한 잘못된 관행도 꼬집는다. 특히 아침회의에서 “조직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문 과장의 주문에 “그러면 회사와 조직폭력배가 다른 점이 무엇이냐?”고 따지는 강호의 모습은 직장인들의 막힌 가슴을 뚫어주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지난 14일엔 일방적으로 해고 통보를 받은 계약직 직원 미옥(한가인)이 1인 시위를 벌이고 강호가 이를 적극적으로 돕는 내용이 방송되자, 계약직 경험자로서 계약직의 비애를 현실감있게 그려 공감이 간다는 시청자들의 의견이 많았다. <불량주부>도 잘 나가던 영업과장 구수한(손창민)이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고 실업자가 되면서 전업주부로 바뀌어가는 모습을 통해 ‘조기 실업’ 문제를 다뤄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 ‘사오정’ ‘38선’ 같은 말이 유행하는 시대에 남편들이 겪는 고민과 말못할 괴로움, 그리고 아내들이 직장과 살림, 육아라는 삼중고를 동시에 짊어져야 하는 현실을 생활 속에서 푹 익혀진 에피소드로 보여주며 가슴 뭉클한 웃음을 자아낸다. 구수한이 주문을 따내기 위해 스타킹을 머리에 쓴 채 노래를 부르고 권투선수 흉내를 내거나, 해고 사실을 아내에게 숨기고 주차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아파트부녀회장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마스크를 쓰는 장면, 찜질방 노래경연대회에서 경품을 타려고 아줌마들 앞에서 춤추고 노래 부르는 모습 등은 절로 웃음이 나게 하면서도 코끝을 찡하게 했다. <신입사원>과 <불량주부> 두 드라마가 시청자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이유는 현실에서 낚은 듯한 인물들의 행동과 대사, 그리고 웃길 때는 웃기면서도 시원한 곳을 긁어주는 풍자의 묘미가 잘 어우러졌기 때문일 것이다. 시청자들은 이 드라마들이 단순한 코믹 드라마에 그치지 않고, 강한 사회 풍자와 메시지를 전달하는 드라마로 좋은 결실을 맺길 기대하고 있다. 안방극장 ‘로맨틱 코미디’ 넘실 실패위험 적은탓…실험정신 아쉬워 요즘 안방 극장이 코믹 드라마로 넘쳐나고 있다. 경제난으로 가뜩이나 살기 힘든 시절이라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드라마가 많은 게 꼭 나쁘기만 한 건 아니지만, 드라마가 너무 가벼워지는 게 아니냐는 평가도 많다. 현재 방송 3사가 방영 중인 월화 미니시리즈만 보더라도 모두가 로맨틱 코미디물이다. 한국방송의 <열여덟 스물아홉>, 문화방송의 <원더풀 라이프>, 에스비에스의 <불량주부>는 내용면에선 차이가 있지만 로맨틱 코미디물이라는 점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 수목 미니시리즈도 사정은 비슷해 문화방송이 <신입사원>을 방영 중이며, 에스비에스는 지난 13일부터 명랑 학원물인 <건빵선생과 별사탕>으로 흐름을 이었다. 왜 이처럼 방송사마다 로맨틱 코미디풍 드라마가 넘쳐나는 걸까? 시청률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방송사들이 로맨틱 코미디물은 시청률이 안정적으로 나온다고 믿기 때문이라는 것이 미디어 비평가들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문화방송의 <영웅시대>나 <슬픈연가>, 에스비에스의 <세잎클로버> 같은 대작이나 블록버스터 드라마는 흥행에 실패한 데 반해 지난해 방영된 <파리의 연인>과 <풀하우스>, <결혼하고 싶은 여자> 등의 로맨틱 코미디풍 드라마는 큰 인기를 얻었다. 올 들어서도 <쾌걸춘향>이 히트를 치자 방송사마다 로맨틱 드라마가 상대적으로 위험 부담이 적다는 공감대를 이뤘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하지만 아무리 로맨틱 코미디가 재미있다고 해도 채널마다 비슷비슷한 드라마가 계속 나온다면 시청자들이 식상해할 가능성이 크다. 코믹 드라마 붐에 대해 한 드라마 피디는 “유행은 말 그대로 일시적인 것”이라며, “실험정신으로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는 드라마가 진정으로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는다는 점을 제작진들이 빨리 깨달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가부장 신화의 복음서, <주먹이 운다>

아무래도 한국 남성에게는 재기전이 필요하다. 경제위기가 불러온 가부장의 실패를 한방에 만회할 재기전이 필요하다. <주먹이 운다>는 ‘칙칙한’ 과거에서 벗어나 ‘신인왕’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은 한국 남성의 욕망을 담은 영화적 재기전이다. 남성들은 다시 가족의 ‘왕’으로 돌아가기 위해 주먹을 휘두르고, 윗몸을 일으키고, 피를 흘린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죄사함을 받는다. <주먹이 운다>는 21세기 서두부터 인기리에 상영되고 있는 한국영화 남성 재기전 시리즈의 2005년 봄시즌이다. 시리즈의 배경은 과거의 무대를 벗어나 오늘의 현실로 옮겨왔다. 이제는 직설법이다. 사업에 실패한 중년도 재기해야 하고, 범죄의 나락에 떨어졌던 청년도 일어서야 한다. 물론 시절이 시절인 만큼 예전의 영화를 온전히 되찾기는 어렵다. 감히 ‘세계 챔피언’은 꿈꾸지 못하지만, ‘신인왕’은 욕심낼 만한 현실이다. 한때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가부장의 권위가 추락했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출구가 보이지 않는 불황이 장기화되면서 가부장의 권위는 ‘그래도’ 다시 기댈 언덕으로 떠올랐다. 가부장제를 의심했던 가족조차 가부장제의 향수에 시달린다. 가부장의 권위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려 한다. 우리가 길들여진 가부장적 심정은 그토록 도저하다. <주먹이 운다>를 보면서 우리는 또다시 가부장제의 주술에 걸린다. 영화를 보러 가는 길에 용산역 광장에서 마이크에 대고 “짐진 자들이여 내게로 오라”를 외치는 사람들을 보았기 때문일까? 영화 초반에 인간 샌드백 강태식이 “울분에 가득 찬 모든 이들이여, 내게로 오라”고 외치자 <주먹이 운다>가 꼭 종교영화처럼 느껴졌다. 남자들이 온몸으로 고된 시련의 과정을 겪어내고, 가혹한 시련에서 뼈아픈 깨달음을 얻고, 우리는 남자들의 죄를 사하여 주고, 마침내 남자들을 다시 우리의 믿음직한 지도자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그린 종교영화 말이다. 영화를 보고 나니 “울분에 가득 찬 이들이여, 내게로 오라”는 대사는 “세상에 대한 울분에 가득 찬 관객이여, <주먹이 운다>를 보라”는 뜻으로도 이해됐다. <주먹이 운다>에는 우리가 보고 싶어하는 모든 것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아빠(혹은 아들) 힘내세요, 우리가 믿잖아요 권투라는 80년대 복고, 피칠갑하는 남성 신파, 어떠한 고난도 이겨내는 가족주의까지, <주먹이 운다>는 최근 한국영화의 흥행 코드를 빠지지 않고 담고 있다. 잘 팔리는 재료들을 골고루 담아 만든 감동의 종합선물세트다. 그 재료들에 색다른 조미료도 첨가하지 않았다. 되도록 익숙한 방식으로 요리한다. 그래서 적당히 입맛에 맞지만, 강렬한 뒷맛을 남기지는 않는다. 볼 때는 눈물겹지만, 금방 잊혀진다. 일단 불행의 레퍼토리가 뻔하다. 불효자의 아버지는 돌아가신다. 설마 할머니까지 아프지는 않겠지 하는 순간 할머니는 병상에 누워 있다. 실패한 가부장의 아들은 아버지를 외면하고, 아내는 남편을 버린다. 그 모든 것들은 너무나 통속적이지만(혹은 통속적이어서) 너무나 간절한 욕망의 대상이다. 물론 통속적일 수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통속적’이라는 고투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것이 문제다. 영화는 그저 마지막 감동 한방을 위해 관객을 정신없이 코너로 몰고 간다. 강태식의 캐릭터는 한때 사랑받다가 이제는 버림받은 자들을 겹쳐 만든다. 왕년의 권투선수나 실패한 가부장이나 버림받긴 마찬가지다. 먹고살 만해진 국민이 맞으면서 싸우던 권투선수를 잊었고, 생활고를 겪는 가족은 돈 못 버는 가부장을 원망한다. 이중의 실패는 강태식의 비극을 만들어낸다. 권투선수 강태식이 “우리 국민들이 정말 우리한테 이러면 안 돼”라고 말할 때 “가족들이 나한테 이러면 안 돼”라는 가부장의 하소연이 겹쳐진다. 소년원의 류상환(류승완)은 지극한 사랑을 받지만 지독한 실망으로 돌려주는 인물이다. 상환의 불행도 너무나 익숙하다. 할머니와 아버지의 거듭된 불행은 신문 사회면의 상투적 기사를 떠올리게 한다. 양아치 어법은 여전히 생생하지만, 몇몇 대사는 새롭지 않다. “빠나마의 홍수환”이나 “88올림픽의 김광선”은 이제 닳고닳은 관용어구처럼 들린다. 상환이 자신을 괴롭히는 소년원 동기의 귀를 물어뜯는 장면에서는 타이슨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주먹이 운다>는 지나치게 불행을 설득하려 한다. 강태식의 불행을 묵묵히 지켜보는 국숫집 주인 상철(천호진)의 한마디는 역설적으로 설득력을 얻는다. 상철은 희망을 잃고 술주정 부리는 강태식에게 “야 강태식, 이 세상에 사연 있는 사람, 너 하나뿐이 아냐”라고 쏘아붙인다. 누군가는 이 말이야말로 <주먹이 운다>에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고 일갈했다. 우리는 모두 사연이 있는 사람들이어서 영화를 자기 이야기로 느끼고 눈물 흘린다. 우리는 또한 모두 사연이 있는 사람들이어서 영화의 아름다운 결말에 허탈하기도 하다. 그 모든 흥행 코드들을 모아놓았으니 감독이 ‘웰메이드’ 하면 흥행은 따놓은 당상이다. 영화는 웰메이드됐고, 관객을 울게 한다. 하지만 영화관을 나서면서 아쉬움은 커진다. 류승완 없는 류승완 영화였음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주먹이 운다>에는 비주류의 재기는 휘발되고 주류의 욕망이 남아 있다. 블록버스터가 되고 싶은 욕망이 너무 강렬하다. <주먹이 운다>는 짐작할 만한 결말로 끝난다. 지독한 시련에 증폭되던 갈등은 손쉽게 봉합된다. 두 주인공의 가족들은 한명도 빠짐없이 링 주변에 모여서 눈물을 흘리고, 영화의 출연진 일동은 신인왕전이 중계되는 텔레비전 앞에서 응원에 열을 올린다. 강태식의 ‘프레셔스’인 은메달을 빼앗아갔던 피도 눈물도 없는 조폭도, 류상환을 끝까지 ‘갈구던’ 소년원생들도 옹기종기 모여앉아 인간 승리의 드라마에 마음을 졸인다. 모든 갈등은 봉합되고, 순식간에 ‘우리는 하나’가 된다. 그리고 두명의 신인왕이 탄생한다. 승패가 갈라놓을 수 없는. 신인왕전의 진정한 심판이었던 강태식의 아들과 류상환의 할머니는 돌아온 탕아들을 기꺼이 끌어안는다. 아들은 “아빠가 뭐가 미안해”를 울부짖으면서 아버지를 부둥켜 안고, 할머니는 ‘모큐슈라’의 한국어 번역어인 “내 새끼”를 되뇌면서 손자를 감싸안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죄사함을 받고 가족의 중심으로 다시 돌아온다. 추신. <밀리언 달러 베이비>와 <주먹이 운다>는 우연히 권투를 소재로 가족 이야기를 하는 공통점이 있다. 영화의 소재는 같지만 영화의 선택은 다르다. 아웃사이더 출신 한국 감독은 전통가족을 복원하고, 메이저 출신 미국 감독은 일종의 대안가족을 선택한다. 아이러니한 선택이다. 역시 현실은 무섭다. 가족의 위기가 오래된 미국에서는 보수적인 감독조차 (생각이 있다면) 진보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고, 가족이 아직 신화로 남아 있는 한국에서는 ‘과격하지’ 않으면 전통적인 결말 너머의 상상력은 갖기 힘들다. 현실은 상상력을 잠식한다. 그래도 아쉽다.

오! 영화에 빠진 광란이여, <몽상가들>

아둔할지 몰라도 잊혀지지 않을, 젊음과 시네필리아, 68년 5월 학생 운동에 대한 찬가인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은 경쾌한 박자로 시작해 에디트 피아프의 떨리는 “Non, je ne regrette rien”으로 끝난다. 당신이 영웅적 유아론(唯我論), 끊임없는 섹스(혹은 풍성한 누드장면들)와 시네필리아에 대한 실내악적 탐닉을 후회하건 안 하건 우습기까지 한 이 영화는 분명히 베르톨루치의 작품이다. 아마 1968년 이후 젊은이들의 “척하기”가 이처럼 텅 비었던 적이 있던가. 멍하니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같이 잘생긴 얼굴로 호감스런 느릿함을 지닌 촌놈, 매튜(마이클 피트)는 파리의 시네마테크에서 한쌍의 남매, 거만하고 묘한 이자벨(에바 그린)과 낭만적이고 빤히 바라보는 테오(루이 가렐)를 만난다. <추한 미국인>(The Ugly American, 1963)이 <무서운 아이들>(Les Enfants Terribles, 1950)을 만나다. (실제 배우들도 프랑스 영화계의 유명인들의 자녀들이듯) 유명한 시인의 아이들인 이자벨과 테오는 샴쌍둥이처럼 서로 얽혀 있다. 예쁜 어깨에 나 있는 상처가 둘이 한때 연결되어 있었음을 시사한다. 매튜는 이자벨의 라이터와 식탁보의 패턴 사이의 신비한 우주적인 관계를 설법해 진지하고 주름진 아버지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 하룻밤을 지내도록 초대를 받는데 아마 그건 마약도 하지 않고 몽롱해질 수 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리라. 부모는 다음날 긴 휴가를 떠나고 매튜는 집에 남는다. 매튜의 여정은 길고 낯설까? 길버트 아데어의 (영화보다 더 미묘하고 모순적이며 총명한) 소설을 각색한 <몽상가들>은 청소년기의 신성함이 짙게 깔려 있지만 시대의 여운은 전혀 없다. 빛은 꿀처럼 떨어져내리고 재니스 조플린은 스테레오에서 고양이처럼 으르렁거리고 있지만 이자벨의 옷은 너무 세련되고 마오쩌둥은 우스꽝스럽게 여기저기에 널려 있다. 끊임없는 표시들에도, 진정 영화는 <인터뷰>나 <베니티 페어> 잡지의 접혀 있는 광고 사진처럼 지금 펼쳐질 듯하다. (출처야 무엇이든 간에 추모 밴드의 작품인 듯한) 클래식 로큰롤로 치장되고 영화 클립들로 처발라져 있는 <몽상가들>은 때때로 서툰 <포레스트 검프> 같다. 베르톨루치는 당대의 뉴스릴과 나이 든(<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의 순진한 시네필리아 정신이었던) 장 피에르 레오의 선동적인 연설을 섞어 시네마테크의 설립자, 앙리 랑글루아의 해고를 보여준다. 더욱 지독하게 베루톨루치는 다양한 30년대와 60년대 영화(<네 멋대로 해라>(breathless, 1960)가 가장 거슬린다) 파편들을 집어넣어 주인공들의 세계관을 보여준다.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매튜와 테오가 버스터 키튼과 찰리 채플린에 대해 비교하여 논쟁하는 장면이다. 가장 악용된 삽입은 브레송의 <무셰트>(Mouchette, 1967)이다. 근친상간인 듯 보이는 쌍둥이에게 영화 퀴즈가 항상 떠나질 않고 비오는 오후는 계속된다. 테오가 이자벨이 흉내낸 마릴렌 디트리히의 <푸른 천사>(The Blue Angel, 1930)에 나오는 고릴라 춤을 맞히지 못했을 때 자기 침실 벽에 신전처럼 걸린 <푸른 천사> 포스터 앞에서 공개적으로 자위를 하도록 벌칙을 받는다. 곧 이자벨도 테오가 흉내낸 폴 무니의 <스카페이스>의 죽음을 맞히지 못하고 매튜에게 호의를 베풀게 된다. 뚱한 테오가 오믈렛을 만들고 미국인이 부엌 바닥에서 도도한 이자벨의 몸 위에 오르는 동안 거리에서 일어나는 혁명! <몽상가들>은 나쁘지만 비슷하게 과장되었던 <리틀 부다>나 <스틸링 뷰티>와 달리 지루하지 않다. 베루톨루치는 매혹적인 아파트를 보여주는 기술적 도전을 뛰어넘는다. 셋이 욕조에서 마약에 취해 있을 때에도 카메라는 이들과 함께 몽롱해져간다. 하지만 남자아이들이 동성애를 하리라고 기대는 너무 기대마시라. <몽상가들>은 베루톨루치의 뉴에이지식 “나릿님” 판타지였던 <하나의 선택>처럼 눈치없게 거슬리진 않으니까. 다만 만취해 있을 뿐이다. 가장 어처구니없는 장면을 꼽는다면 난 데이트 장면을 고르련다. 매튜와 이자벨이 뒷줄에 앉아 <여자는 도울 수 없어>(The Girl Can’t help it, 1956)를 보면서 서로를 애무하고 거리로 나와 키스하고 있는 동안 상점 진열장 속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장면들은 다시금, 혁명! 오, 영화에 빠진 광란이여! 시작 부분에 나오는 입을 쩍 벌리고 <충격의 복도>(Shock Corridor, 1963)를 보던 시네마테크의 관객이 잘 꾸며낸 마지막 장면과 어울리며 비애를 느끼게 한다. 결국 베르톨루치는 이 “무서운 아이들”이 자기들이 찾던 영화를 발견했다고 알려주는 것이다. 바로 ‘혁명’이라는 영화를!!! 놀란 매튜를 불운한 관객으로 남기고 영화 속으로 들어가는 아이들. 바로 그때 <몽상가들>은 60년대의 삶에 대한 느낌을, 이 영화는 아닐지라도, 하나의 영화로 구체화한다.

‘KBS 프리미어’ 시리즈 네번째 영화 <브라더스>

형제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가운데 십중팔구는 형과 동생의 상반된 캐릭터를 극명하게 대비시킨다. 모범적인 형과 끊임없이 비교 당해 삐딱해진 동생, 속물스러운 형과는 달리 세상의 때가 전혀 묻지 않은 동생…. 그러나 대부분 끝에 가서는 형과 동생 가운데 어두운 쪽이 밝은 쪽으로 동화돼 둘이 손잡고 환하게 웃으며 자막이 올라가는 식이다. 극장 개봉과 텔레비전 방영을 같은 날 하는 ‘KBS 프리미어’ 시리즈의 네 번째 영화 는 전혀 다른 방식의 형제 이야기다. 처음에는 비슷하게 나가는 듯하다가 뒷부분에선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어릴 때부터 모두의 본보기가 돼온 형 미카엘(율리히 톰슨)과 부모의 편애 속에 비딱해진 동생 야닉(니콜라이 리 카스)은 모든 면에서 비교가 되는 사이. 아내와 사랑스러운 두 딸, 늙으신 부모 앞에서 자상한 남편이자 아버지, 아들의 역할에 늘 충실한 형은 교도소에서 갓 출소한 동생마저도 사랑으로 감싸안는다. 어느날 직업군인으로 아프가니스탄 전장에 가게 된 형이 헬기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가족은 견디기 힘든 슬픔에 빠진다. 형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뒤늦게 깨달은 동생은 엉망이었던 삶을 추스르고 형의 가족을 돌보기 시작한다. 날로 변해가는 동생이 형의 빈 자리를 채워나가면서 서로 깊이 알게 된 동생과 형수 사이에서는 묘한 유대감이 싹트고, 조카들은 삼촌을 아빠처럼 따르게 된다. 한편, 기적적으로 살아난 형은 적에게 포로로 잡히고 거기서 평생 지울 수 없는 충격적인 사건을 겪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지만, 그는 이미 예의 그 미카엘이 아니다. 아내와 동생 사이를 끊임없이 의심하던 그는 점점 광폭해지고 평온하던 가정은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든다. <브라더스>는 사람의 심성이 외적인 변화요인에 의해 어디까지 바뀔 수 있는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형과 동생의 심성이 서로 뒤바뀌게 되는 계기와 과정이 충분히 설득력 있게 다가오며 억지스러운 해피엔딩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덴마크 영화로 2005년 선댄스 영화제에서 관객상을 수상했다. 수잔 비에르 감독. 23일 단성사 개봉.

기발 엽기발랄 ‘썬데이서울’

전북 진안군의 한적한 시골길가에 자리잡은 한 주유소. 살랑대는 봄바람 위로 이상하리만치 스산한 기운이 감돈다. 주유소 안에는 두 무리의 사람들이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은 채 서로를 노려보고 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다. 봉태규를 중심으로 늘어선 껄렁한 젊은이들은 그렇다 쳐도, 이청아와 함께 선 남자들은 삼국시대 도인을 떠올리게 하는 차림새부터 심상치않다. 게다가 두 무리의 가운데 진을 치고 심판인 양 관망하는 듯한 한 가족의 모습에선 엽기스러운 분위기마저 풍긴다. 일촉즉발의 팽팽한 긴장감 틈새로 묘하게도 코믹스러운 기운이 솔솔 피어오르는 순간, “컷!” 하는 외침이 적막을 깬다. 제작·출연진 모두 노개런티, 다시보는 정소녀 김추련 지난 18일, <썬데이서울>의 제작진은 모든 등장인물들이 영화 전체를 통털어 단 한번 한자리에 모이는 장면을 찍었다. 각 무리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세가지 이야기들이 절묘하게 합쳐지는 순간이다. 영화의 중심축은 세가지 각기 다른 사건들을 차례로 목격하게 되는 두 청년. 이들이 마주하게 되는 상황들은, 외계인이 지구에서 암약하고 있다는 음모론을 다룬 영화 <맨 인 블랙>이나 텔레비전 시리즈물 <엑스 파일> 못지 않게 그럴듯하면서 황당하다. “너무 안정적 구도로만 가는 한국영화에서 발상의 틀을 깨부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어요. 새로운 시도는 예술영화에서만 하는 게 아니거든요. 왜, 만화에서도 이현세·허영만 등의 정극보다는 <이나중 탁구부> 같이 황당하게 홀딱 깨는 만화가 더 재밌잖아요. 이런 식의 새로움을 영화로 보여주고 싶었던 거죠.” <품행제로>와 <에스 다이어리>의 프로듀서를 맡았던 박성훈(36) 감독은 자신의 첫 연출작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썬데이서울>은 80여명의 모든 제작진과 출연진이 선개런티를 한푼도 받지 않고 촬영에 들어간 것으로도 화제를 모은다. 이는 마당발을 자랑하는 박 감독의 힘이다. 한손에는 직접 쓴 기발한 시나리오를, 다른 한손에는 인간관계를 무기 삼아 들고 찾아온 박 감독의 제의를 뿌리치기는 누구도 쉽지 않았을 터다. “제작비를 줄이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모두가 영화에 애정을 갖고 임하도록 하는 게 더 큰 목적이었어요. 선개런티 없이 개봉 뒤 흥행 수익을 나누기로 한 거죠. 배우와 스태프들이 모두 투자자로 나선 셈이라고나 할까요?” 영화의 실제작비는 모든 촬영을 마친 지금까지 7억원 가량밖에 안들었다. “프로듀서로서 제작비를 계산해보니 처음에는 30억원 정도 나왔어요. 새로운 시도에 따른 위험부담을 줄이기 위해 최대한 거품을 빼다보니 이렇게까지 줄더라고요. 사실 스타시스템 등으로 한국영화 제작비가 너무 부풀려진 측면이 있었던 거죠.” 15년 이상의 공백을 깨고 돌아온 정소녀와 김추련의 캐스팅도 박 감독의 남다른 생각에서 나왔다. “흔히 배우가 없다고들 하지만, 조금만 달리 생각하면 좋은 배우가 많거든요. 예전에 날렸지만 지금은 잊혀진 배우 가운데 비중있는 조역을 잘 소화해낼 분들이 굉장히 많아요. 이런 분들을 너무 홀대해온 현실이 안타까웠어요.” 정소녀와 김추련은 “너무나도 진지하고 열심인 후배들로부터 배우는 자세로 열심히 임했다”고 출연 소감을 밝혔다. 이날 촬영분을 끝으로 크랭크업된 <썬데이서울>은 막바지 작업을 거쳐 오는 8월께 개봉된다.

[외신기자클럽] 낯선 억양을 접하는 즐거움 (+불어원문)

한국 영화에 있어 한국어의 다양함이 큰 역할을 한다고 할 때, 한국 관객들은 외국 배우들이 한국 영화에서 한국어를 말하는 것을 들을 기회가 아주 적다. 이런 결핍은 막연하게 나마 텔레비전 쇼 프로에서 충족되지만, 한국 관객들에게 있어 외국인 스타가 한국어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을 지켜 본다는 것은 미지의 경험으로 남아 있다. 반면에 그것은 서구에서는 꽤 흔한 일이다. 프랑스의 경우를 살펴 보도록 하자. 모든 사람들이 오드리 헵번을 좋아하지만, 프랑스인은 그녀와 어느 정도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봄이 뽕데자르 위에서 자신을 한창 뽐낼 때면 빠리의 영화광들은 그녀를 생각한다. <사브리나>를 시작으로 <샤레이드> 또는 <하오의 연정>을 거쳐 <퍼니 페이스>까지, 적지 않은 그녀의 영화는 빠리 생활의 즐거움을 발견하도록 이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녀는 프랑스어를 아주 잘 하고 그녀의 대사에는 종종 맛깔스러운 프랑스어가 있었다. 따라서 프랑스 사람들은 그녀가 ‘mon cher’, ‘rive gauche’를 발음할 때나 또는 험프리 보가트를 위해 ‘장미빛 인생’(La vie en rose)을 낮은 목소리로 노래할 때의 그녀가 ‘r’발음을 하는 방법에 매우 민감하다. 프랑스 사람들과 프랑스어권 사람들이 오드리 헵번의 이런 매력의 특혜 받은 대상이다. 그녀는 우리와 가깝다는 인상을 준다. 많은 여배우들은 (그리고 보다 드물게 몇몇 남자 배우들도) 그들의 전 연기 생활을 통해 그들의 말씨로 프랑스 영화를 풍요롭게 하며 뚝 떨어진 몇몇 단어의 경험을 뛰어 넘어 밀고 나갔다. 예를 들어 누벨 바그는 <네 멋대로 해라>에서 ‘지저분하다는 게 뭐야?’라고 어눌하게 말하는 진 시버그의 영어식 억양과 겨우 알아차릴 수 있을까 말까 한 말씨로 덴마크인 안나 카리나가 아주 부드러운 낯섦으로 문장들을 또박또박 발음하는 것에 많이 빚지고 있다. 오늘날 프랑스어권 국가는 영향력을 많이 잃었지만, 프랑스 사람들은 여전히 외국인들이 프랑스어를 발음하는 방식에 호기심을 갖고 있다. 우크라이나 출신의 젊은 배우 올가 큐리렌코에게 많은 기대를 걸고 있는데, 그녀는 요꼬 오가와의 일본 단편 소설을 각색한 함부르크를 무대로 한 디안느 베르트랑의 특이한 영화 <약지 손가락>으로 강한 인상을 주었다. 수줍은 듯한 그녀의 말투는 천진난만함, 이국 정조 그리고 신비감의 터치를 작품에 가져다 주며 인물의 연약함을 강조한다. (영화에서 그녀의 출신은 전혀 명시되지 않는다.) <노보>에서 약간은 넋이 나간 남자를 연기한 스페인 배우 에두아르도 노리에가의 (<오픈 유어 아이즈>의 주인공)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프랑스어를 할 줄 몰라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그는 대사를 외워서 했다. 쟝-삐에르 리모젱 감독은 병(주인공은 3분마다 기억을 잃어 버린다.)에 걸린 인물을 잘 드러내기 위해 배우의 연약함에 기댄다. 최근 장 만옥은 <클린>에서 프랑스어로 연기를 했다. 올리비에 아싸이야스 감독은 영어에서 프랑스어로 옮겨가는 과정을 통해 주인공이 흔들림에서 구원의 길로 나아가는 것을 보여준다. 언어는 여행승차권이다. 그것은 영상과 추억을 감싸 안는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모니카 벨루치가 프랑스에서 거둔 성공에 가끔 놀라와 한다. 그들은 이탈리아 식으로 발음된 구르는 ‘r’음과 노래하는 듯한 ‘e’음을 듣는 프랑스 사람들의 즐거움을 알 수가 없다. 벨루치의 분절법은 (그리고 어느 정도 아지아 아르젠토나 로베르토 베니니의 분절법도…) 프랑스인들이 그토록 좋아했던 치네치타의 영화로 그들을 돌려 보낸다. 그들의 억양은 소피아 로렌, 마르첼로 마스트로이얀니 또는 크라우디아 카르디날레의 메아리를 일깨운다. 스페인인이든 영국인, 이탈리아인, 포르투갈인이든 프랑스 영화는 불어를 배운 배우들에게 좋은 역할을 줌으로써 보답했다. 그 대신에 억양만으론 충분치 않다. 이 배우들은 그들의 분절법의 이국 정서가 단지 상투성을 실어 나르는데 사용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프랑스인들 못지 않게 갈고 닦아야만 한다. 자신의 언어가 아닌 외국어로 연기 경력을 쌓기 위해선 자신의 억양을 하나의 도구로 인식해야만 하고, 전형적인 형태를 뛰어 넘기 위해선 그것을 지혜롭게 이용해야 한다. 여기에서 나는 서구 영화에 있어 특수한 부분에 대한 몇 가지 즉흥적인 견해를 선보였다. 아시아 영화들을 보면서 기실 내 나라의 영화를 다른 관점에서 보게 됐다. 다음 번에는 금발 여배우들에 관해 이야기하려 한다. 나는 금발의 중요성을 이해하기 위해 한국에 가서 금발 여배우가 없는 영화를 발견해야만 했다. Specificites du cinema occidental. 1 : plaisir de l’accent etranger. Si le cinema coreen joue beaucoup sur la variete de sa langue, ses spectateurs ont peu l’occasion d’entendre le coreen parle par des etrangers au cinema. Ce manque est vaguement comble par des shows teles, mais pour le spectateur coreen, observer une star etrangere s’exprimer dans sa langue reste une experience inedite. Elle est en revanche assez frequente en Occident. Je vais tacher de decrire l’exemple francais. Tout le monde aime Audrey Hepburn mais les francais ont noue avec elle une relation quasi intime. Quand le printemps pointe son nez sur le Pont des Arts, le cinephile parisien ne peut s’empecher de songer a Audrey. Il faut dire que de Sabrina a Funny Face en passant par Charade ou Love in the afternoon, une bonne part de ses films l’amene a decouvrir les plaisirs de la vie a Paris. Elle parlait tres bien notre langue et ses dialogues etaient souvent pimentes de francais. Nous sommes donc sensibles a sa facon craquante de prononcer les ≪ r ≫ lorsqu’elle dit ≪ mon cher ≫, ≪ rive gauche ≫ ou lorsqu’elle chantonne ≪ La vie en rose ≫ pour Humphrey Bogart. Francais et francophones sont les cibles privilegiees de cette facette du charme d’Audrey Hepburn. Elle semble proche de nous. De nombreuses comediennes (et plus rarement quelques comediens) ont pousse l’experience au-dela de mots isoles, enrichissant notre cinema de leur accent tout au long de leur carriere. La Nouvelle Vague doit par exemple beaucoup a l’accent anglais de Jean Seberg balbutiant ≪ c’est quoi degueulasse ?≫ dans A bout de souffle et a la danoise Anna Karina dont l’accent, a peine perceptible, scande les phrases d’une douce etrangete. Aujourd’hui, la francophonie a perdu de son influence, mais les francais sont toujours curieux de la facon dont les etrangers prononcent leur langue. On attend beaucoup d’une jeune actrice ukrainienne, Olga Kurylenko, qui creve l’ecran dans L’annulaire, curieux film de Diane Bertrand situe a Hambourg et adapte d’une nouvelle japonaise de Yoko Ogawa. Sa diction timide accentue la fragilite du personnage, apportant une touche de candeur, d’exotisme et de mystere au projet (son origine n’est jamais precisee dans le film). Il en va de meme pour l’espagnol Eduardo Noriega (Ouvre les yeux) qui joue un homme un peu paume dans Novo. Ne parlant pas francais, il recite son texte d’oreille sans savoir ce qu’il dit. Le cineaste Jean-Pierre Limosin s’appuie sur la fragilite du comedien pour illustrer la maladie qui frappe le personnage (il perd la memoire toutes les trois minutes). Recemment, Maggie Cheung jouait en francais dans Clean. Le passage de l’anglais au francais permettait a Olivier Assayas de montrer le basculement de l’heroine vers la redemption. Les langues sont des carnets de voyages. Elles renferment des images et des souvenirs. Les italiens sont souvent surpris du triomphe de Monica Bellucci en France. Ils ne peuvent pas saisir le plaisir que nous avons d’entendre notre langue parlee ≪ a l’italienne ≫, ces roulements de ≪ r ≫ et ces ≪ e ≫ chantants. Le phrase de Bellucci (et dans une moindre mesure celui d’Asia Argento ou Roberto Benigni…) nous renvoie au cinema de Cinecita que nous avons tant aime. Ses intonations eveillent les echos de Sophia Lauren, Marcelo Mastroianni ou Claudia Cardinale. Espagnols, anglais, italiens, portugais, le cinema francais a recompense de beaux roles ceux qui ont appris sa langue. En retour, l’accent ne suffit pas. Ces comediens ont du s’escrimer autant que les francais pour que l’exotisme de leur phrase ne serve pas uniquement de vehicule a cliches. Pour faire carriere dans une autre langue que la sienne il faut considerer son accent comme un instrument, en jouer intelligemment pour s’elever au dessus des archetypes. J’entame ici quelques reflexions impromptues sur des details specifiques au cinema occidental. En frequentant le cinema asiatique je vois en effet celui de mon pays d’un autre point de vue. La prochaine fois, je vous parlerai des blondes. Il m’a fallu aller en Coree, decouvrir un cinema sans blondes, pour saisir leur importance…

그때 그 소녀의 10년만의 외출, <선데이 서울>의 배우 정소녀

시간이 많이 흘렀어도 이런 이름을 잊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정소녀. 사실 연기자보다는 텔레비전 오락프로그램의 명사회자로 더 잘 알려져 있던 그녀다. 하지만 근 10년 동안 영화 나들이를 하지 않았던 것이 꼭 역이 들어오지 않아서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굉장히 나이가 많아 보일 거라고 생각을 했는지 와서 보고 나더니 그냥 가더라고요. 나도 사실 대학생 딸이 있는데….” 이렇게 그 사이 들어온 역 중에는 실제로 그녀와 같은 연배의 엄마 역할도 있었지만 ‘너무 젊어 보이는 탓에’ 인연이 닿지 않았다. 이번 영화 <선데이 서울>의 출연은 경우가 좀 달랐다. “영화 자체가 70, 8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감독은 오랫동안 보이지 않던 배우를 찾는 것 같았고”, 그녀의 입장에서도 “얘기를 쭉 듣다보니 굉장한 야심을 갖고 있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어서 잠깐 출연해도 보람있을 것 같았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노개런티가 아니었다면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일하는 재미가 먼저라는 말이다. 탤런트로 시작하여 사회자를 맡게 된 대한민국 여자 연예인 1호인 만큼 “연기자보다는 사회자가 더 편하다”고 생각하는 쪽이고, “연기는 탁 풀고 몰입을 해야 하는데, 정돈된 거 좋아하고, 게다가 스스로 내 연기를 보고도 저게 아닌데 할 때가 있어서… 활발하게 연기활동 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거”라고도 말하는 정소녀가 이번에는 굉장히 편했다고 한다. 영화 속에 잠시 등장하는 이상한 가족의 엄마 역할에 꽤 재미있어 하는 눈치다. 그런데 문득 궁금해지는 건, 영화 제목이 <선데이 서울>이라…. 70, 80년대 활동했던 여자 연예인치고 이 가십 잡지에 이름 한번 안 올린 사람이 있을까? 그랬더니 옛날이야기 한 토막이 흘러나온다. “그렇죠. 잡지 이름이었죠. 예전에 제가 <선데이 서울>에 아주 단골손님이었죠. (웃음) 이때 주간지들이 날개 돋친 듯이 나갔었죠. 한창 활동 때는 매주 다른 잡지 표지에 번갈아 실렸어요. 거의 한주도 안 빼놓고 내 기사가 다 나왔죠. 칭찬도 있었지만, 거의 다 가십이죠. 고고장에서 누구누구 연기자들하고 모여서 밤새 놀았다더라, 이런 거. 그때 사실 우리는 남자하고 잘 어울리지도 않았는데 무슨 큰 기사처럼 그렇게 내고 그러니까, 20대 초반 나이였는데 억울하더라고… 그렇게 덤터기 쓰고… 가면 모든 돈은 내가 다 지불하고선… 소문은 나쁘게 나니까….” 지금은 그냥 웃으면서 할 수 있는 옛날이야기다. 지금 그녀에게 <선데이 서울>은 잡지가 아니라 영화다. 갑자기 걸려오는 전화. “영화 출연한다는 말을 듣고 여기 저기 방송사에서 전화가 온다”고 한다. 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망설이고 있는데, 옆에 있는 누군가가 다리가 참 예쁘세요, 라고 말한다. 소녀처럼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