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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특별전 갖는 피터 쿠벨카의 영화세계

영화언어의 기본 단위는 숏이 아니라 개개의 ‘프레임’, 쿠벨카는 리듬과 매체의 물질성이 강조된 일련의 ‘운율적’ 영화들(<아데바> <슈베하터> <아르눌프 라이너>)과 사진적 이미지의 병치 및 충돌에 의해 풍부한 함의를 띠게 되는 ‘은유적’영화(<우리의 아프리카 여행>)로 이를 실천한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를 방문한 오스트리아 영화감독 피터 쿠벨카는 실험영화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혁신자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인물이다. 지독한 과작(寡作)의 영화작가로 알려져 있는 그는 재작년에 26년 만의 신작 <시와 진실>을 내놓아 조용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 13분짜리 컬러영화는 텔레비전 광고를 위해 촬영되었으나 사용되지 않은 필름들을 쿠벨카가 직접 찾아내 모은 것으로, 운율적 반복과 리듬감, 그리고 필름이라는 매체에 대한 유물론적 인식 등등, 그야말로 ‘쿠벨카적’이라고 불릴만한 것의 진수들이 모두 담겨있는 작품이다. 쿠벨카 스스로가 “나의 진정한 계승자”라고 인정한 바 있는 오스트리아 영화박물관 - 쿠벨카는 이 기관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 의 알렉산더 호바트는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은 헌사를 바치기도 했다. “일련의 ‘운율적 영화’들과 <우리의 아프리카 여행>(1966)으로 대표되는 ‘은유적 영화’들의 단계를 거쳐, 쿠벨카는 이제 ‘형이상학적 영화’라고 불릴 수 있을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 것처럼 보인다.” <시와 진실>을 발표하기 이전에 쿠벨카가 만든 영화들은 고작 6편에 지나지 않으며, 전작을 다 합쳐도 상영시간이 채 60분이 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게다가 그의 필모그래피에는 상영시간이 1~2분에 지나지 않는 ‘초’단편영화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런 경력의 쿠벨카가 실험영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혁신자 가운데 하나이자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부상하게 되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쿠벨카의 중요성은 그의 영향력에서가 아니라 그의 영화작업 자체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라는 점은 말할 필요도 없다. ‘영화의 본질’(essence of cinema)을 파헤치기 위한 그의 집요한 노력은 그의 작업 전체를 관통하는 일련의 테제들을 이끌어내게 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영화는 실재의 직접적인 흔적인 동시에 ‘언어’이기도 하다는 것, 이러한 영화언어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는 (에이젠슈타인 이후 많은 사람들이 믿어왔던 것처럼) ‘숏’이 아니라 개개의 ‘프레임’이라는 것, 결국 영화적 기호작용의 ‘본질’은 숏과 숏 사이가 아니라 프레임들 사이에 놓여 있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테제의 실천은 우선 리듬과 매체의 물질성이 강조된 일련의 ‘운율적’(metric) 영화들 - <아데바> <슈베하터> <아르눌프 라이너> -을 통해 이루어졌고, 지시적 속성을 지닌 사진적 이미지의 병치 및 충돌에 의해 풍부한 함의를 띠게 되는 ‘은유적’(metaphoric) 영화 - <우리의 아프리카 여행> - 들이 그 뒤를 잇게 된다. 피터 쿠벨카는 유럽출신의 영화작가이기는 하지만 요나스 메카스, 스탠 브래키지 등의 도움을 얻어 미국에서 활동 - 주로 강연 - 하기 시작하면서 북미권의 실험영화 작가들에게 서서히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는데, 특히 1960년대 이후 아방가르드 영화계의 이슈로 떠오른 유물론적 ‘구조영화’(structural film)의 선구자로서의 쿠벨카의 위치는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쿠벨카가 꼭 과거의 영화작가라는 뜻은 아니다. 그는 영화작업을 거의 그만둔 이후에도 차세대의 영화작가들을 가르치고 영화상영 및 교육 프로그램 등을 기획하면서 끊임없이 자신만의 ‘영화작업’을 계속해왔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오스트리아 영화작가 가운데 하나이자 쿠벨카가 매우 재능 있는 필름메이커로 꼽고 있는 마틴 아놀드는 쿠벨카 특유의 차이 나는 반복을 보다 미시적이고 미분화된 수준에서 수행함으로써 운율적 반복과 리듬을 통한 정서의 창출이라고 하는 쿠벨카적 기획을 잇고 있다. 쿠벨카의 신작 <시와 진실>을 어떤 점에선 마틴 아놀드와 같은 젊은 세대의 작업들에 대한 노장의 현재적 응답으로 간주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한편 오늘날의 쿠벨카는 영화감독이라고 하는 특정한 영역에 자신을 가두기를 거부하며 - 그 자신의 표현대로라면 ‘탈전문화’(de-specialization) - 음악, 요리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중이다. 이때 우리는 비단 한 명의 시네아스트가 아닌 거대한 교양으로 무장한 르네상스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기동전함 나데시코> 리마스터판 2006년 발매

그간 소문으로만 무성했던 일본 애니메이션 <기동전함 나데시코>의 재발매가 공식으로 발표됐다. <기동전함 나데시코>는 일본에서 1996년 첫 방영 이래 지금껏 꾸준한 인기를 누리고 있는 TV 애니메이션으로, 국내에서도 방영되어 많은 팬들을 양산한 SF 시리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등 이전의 인기 작품들을 패러디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작품성과 재미를 인정받았는데, 특히 극중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차가운 미소녀 ‘루리’는 역대 애니메이션 캐릭터들 중에서 인기 순위 1위에 오를 정도였다. 최근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가 기존의 인기 작품들을 업그레이드시켜 재출시하는 추세를 보이는 가운데, DVD로서 그리 좋은 화질이 아니었던 <기동전함 나데시코> 역시 재발매된다는 이야기가 팬들 사이에 퍼져있었다. 제작사인 스타차일드의 공식 홈페이지에 따르면, HD 텔레시네를 통한 고화질과 새롭게 녹음한 돌비 디지털 5.1 채널 음향으로 2006년 봄에 선보일 예정이다. 한편 <기동전함 나데시코>는 다우리 엔터테인먼트를 통해 국내에 발매된 바 있는데, <신세기 에반게리온 리뉴얼> <자이언트 로보 리마스터판> 같은 다른 일본 애니메이션 타이틀과 마찬가지로 재발매 버전이 국내에도 출시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What's Up] 미국 인디언족의 인디언영화 제작 투자 붐

미국영화에 등장하는 인디언은 대체로 백인 주인공의 적이었다. 잔인하고, 더럽고 낙후된 종족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고 있다. 현존하는 미국 인디언족들이 이미지 쇄신을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할리우드 투자시장에 적극 뛰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릭 슈로더 감독의 <검은 구름>(2004)이 한 예다. 미국 올림픽 복싱팀 소속 나바호족 인디언 선수를 소재로 한 영화 <검은 구름>의 제작비 100만달러는 미국 전역 12개 인디언 부족이 결합하여 내놓은 것이다. 한편, 텔레비전용 다큐멘터리 <미국춤의 세계>는 뉴욕 오네이다 인디언족이 와 협력하여 제작한 작품이다. <미국 인디언 춤의 세계>는 최초로 인디언족이 제작비 전액(35만달러)을 투자하여 네트워크 TV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가 됐다. 이런 움직임은 그동안 인디언족의 문화를 왜곡해온 할리우드영화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됐다. 오네이다족의 대변인 레이 할브리터는 “우리는 사업을 이해하고 백인들에게 우리를 이해시키기 위해 영화를 시작한 것뿐이다. 오로지 수익만이 우리의 동기는 아니었다”고 말하면서 “우리가 실제로 무언가를 산업적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프로듀서로 참여한 인디언족 소니 스카이호크도 “할리우드는 무한정 타락한 편협한 현명함으로 마치 언제나 우리가 없는 것처럼 생각해왔다”면서 종족 문화적 주권을 바로잡아 확립하는 것에 큰 의의가 있음을 강조했다. 그렇다면 인디언족들의 할리우드 제작 투자 붐을 가능하게 한 산업적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의 투자를 가능하게 한 것은 무상 카지노 산업의 성장에서 비롯됐다. 인디언족의 땅에 도박장을 허락한 1988년 연방법이 인디언들에게 돈을 쥐어준 것이다. 전국인디언게임연합에 따르면 인디언족들은 2004년에만 1850만달러를 거둬들여 2003년보다 10% 상승한 수익을 올렸다. 당분간 인디언족의 투자 경향은 다큐멘터리에 집중될 것으로 예상된다. 인디언 신문 <종족의 소리>의 편집자이자 라코타 부족의 일원인 프랭크 킹은 “좀더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형식이기 때문에 인디언 부족들은 다큐멘터리 프로젝트에 더욱 흔쾌히 투자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시아 영화 기행: 타이 [7] - 위시트 사사타니앙 인터뷰

“우스꽝스러운 도시 방콕을 보여주고 싶었다” <시티즌 독>의 위시트 사사타니앙 감독 부산국제영화제 김지석 프로그래머의 말에 따르면, 위시트 사사나티앙(41)은 ‘올림픽 감독’이다. 4년 만에 한번씩 신작을 내놓기 때문이다. 타이 최대의 광고회사 필름팩토리의 주력 감독으로 일하고 있는(코카콜라, 나이키 등 유명 브랜드의 광고를 도맡고 있다) 그는 “영화로는 밥먹고 살기 어려울 것 같아서” 광고 일을 놓지 못하고 가끔 취미로 영화를 만든다고 말하지만, 최근작 <시티즌 독>(Citizen Dog)을 본 이들이라면 지독할 정도로 완벽성을 기하는 성미 탓에 과작의 감독이 됐을 것이라고 쉽사리 추측할 수 있다. 6개월 이상 후반작업을 했다는 <시티즌 독>(타이에선 지난해 12월 개봉했다)은 데뷔작 <검은 호랑이의 눈물>과는 또 다른 판타지의 세계로 보는 이를 안내하는 영화. 타이 고유의 의상, 건축물 등의 색감에서 뽑아낸 화려한 비주얼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침이 나온다. 잇단 회의 때문에 1시간이나 기다리게 했던 것이 미안했는지 그는 인터뷰를 마친 뒤 선물이라며 칸에서 뿌렸던 <검은 호랑이의 눈물> 홍보용 티슈와 엽서를 손에 쥐어줬다. -광고와 영화를 어떻게 병행하나. =<검은 호랑이의 눈물> 만들 때 회사를 그만뒀다 다시 돌아왔다. 이번에는 나고 들고 그런 꼴 보기 싫었는지 하려면 해라, 뭐 그렇게 봐준 것 같다. -<시티즌 독>을 떠올린 계기는. =동화나 우화를 만들고 싶었는데. 일단 시골에서 공장을 다니던 한 청년이 잘린 손가락을 찾기 위해 방콕에 오게 된다는 설정을 끼적여놨었다. 그런데 소설가인 아내가 보고서 러브스토리를 집어넣고 인물들과 에피소드들을 늘려 먼저 출판했다. -아이템을 도용당한 것 아닌가. 보상은 받았나. =못 받았다. 나중에 편집본 보고서 진행이 너무 빠르다, 두 인물의 사랑 감정이 전해지지 않는다, 이 부분에서 음악을 써라, 뭐 그런 참견만 했다. (웃음) -포드가 방콕에 와서 통조림 공장에 취직한 뒤 일하는 장면은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에서 따왔는데. =기계 앞에서 왜소한 사람의 모습을 그만큼 잘 대비해서 보여준 장면은 없지 않나. 꿈이라곤 없는 포드나 꿈만 먹고사는 진이나 모두 찰리 채플린의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인물들이다. 처음엔 영화제목을 아예 <모던 독>이라고 붙이려 했었다. -포드와 진 외에 등장하는 엉뚱한 캐릭터들이 많다. =방콕이라는 도시가 우스꽝스러운 곳이다. 갑자기 도시가 팽창하면서 근대와 전근대가 기형적으로 몸을 섞고 있다. 창녀촌 옆에 절이 있고, 부촌과 빈촌이 맞붙어 있다. 그런 도시에 사는 사람들 중엔 이상한 사람들이 자연스레 많다. 포드처럼 몸은 컸지만 나이를 먹지 않은 이들이 있고, 진처럼 마트에 가면 물건은 사지도 않고 종일 물건을 반듯이 진열하는 데 열중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풍경을 보여주고 싶었다. -<시티즌 독>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도시에 솟은 거대한 쓰레기 산이다. =언눗이라는 곳에 대규모 쓰레기 매립장이 있다. 어느 날 그곳에서 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는 걸 봤다. 무척이나 예뻤다. 영화 속의 쓰레기 산은 그런 느낌이다. 그런 희망이 없다면 이 나쁜 세상에서 누가 살 수 있겠냐. 꿈을 좇아봤자 행복이 없는데 왜 달려야만 하느냐, 행복은 곁에 있는데 말이다, 뭐 그런 이야길 전하고 싶었다. -잘린 손가락이 자신의 주인을 알아보고, 포드의 할머니가 도마뱀으로 환생하고, 하늘에서 헬멧이 쏟아지고. 당신의 영화 중간중간에는 생뚱맞은 판타지 장면들이 수시로 등장한다. =머릿속에 떠오른 공상들을 그대로 보여준 것뿐이다.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세상에선 비일비재하게 일어나지 않나. 좀 과장해서 그런 걸 표현하고 싶었다. -영화를 볼 때 포드(Pod)와 진(Jin), 철자는 다르지만 두 주인공들의 이름에서 느닷없이 ‘Ford’와 ‘Jean’이 떠올랐다. 두 사람 모두 대량생산 체제 아래 부속품 같은 존재로 살아가는 인물들 아닌가. =하하. 가수 두명의 이름을 그냥 따온 것이다. 처음엔 실제 가수 두 사람을 출연시키려고 했는데 무산됐다. 영어로 써서 그렇지 포드의 타이 이름은 뽓이다. -<검은 호랑이의 눈물>은 당신이 유년 시절 보고 다녔을 1950년대 타이 서부극에서 비롯된 것이다. =톤부리라는 강가에서 자랐는데, 어렸을 적에 극장에 가보지 못했다. 극장도 많지 않았고, 돈도 없었다. 행사나 축제 때 천막 이동극장에서 보여주는 무료영화들이 전부였는데, 타이 서부극뿐만 아니라 홍콩영화, 할리우드영화도 심심찮게 틀어줬다. 변사의 설명으로 <카사블랑카> 같은 영화도 거기서 봤고, 쇼브러더스의 외팔이 시리즈도 거기서 봤다. -당신의 영화들에서 보이는 색들은 좀처럼 볼 수 없는 것들이다. =타이적인 인물, 타이적인 의상, 타이적인 무늬, 타이적인 색감이 뭔지 고민했다. 우리에게도 소중한 것들이 남아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이 사용했던 물건들에 쓰였던 색들을 가져왔다. 지금도 지방에 가면 광고판 하나에 20가지 색을 쓰기도 한다. 유행 좋아하는 요즘 관객이 내 영화를 보면 모두 촌스럽다고 한다. (웃음) 텔레시네 작업을 거쳐 광고에서 많이 쓰는 다빈치 프로그램을 갖고서 색감을 일일이 지정하고 조절한 결과다. <시티즌 독>은 CG 분량도 많은 편이라 전작보다 후반작업 기간이 배가 됐다. -당신의 영화에서 색은 인물들의 감정을 전하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맞다. 꿈많은 진은 푸른색 옷만 입고 다니고, 꿈없는 포드는 밤색 옷만 입고 다닌다. 단 어떤 장면에선 그런 도식을 비틀기도 했다. 블루는 우울함을 나타낸다는 도식 대신 핑크로 그 느낌을 전달하기도 했다. 폐기물로 가득 찬 진의 집은 그래서 핑크로 도배되어 있다. 배우들에게도 그래서 움직임을 크게 하지 말라고 했다. 깜짝 놀라더라도 일반적인 표정을 짓지 말고 눈만 두번 깜박여라 하는 식으로 주문했다. 신인배우가 아니었다면 답답해 했을 거다. 다행히 극중 인물들처럼 움직임이 크지 않고 말수도 굉장히 적은 배우들이었다. -다음 영화는 언제쯤 만들 예정인가. =부산영화제 PPP에 냈던 <핫 칠리(남플리) 소스>이긴 한데. 타이 민담에서 아이디어를 빌려온 영화로, 대규모 예산이 필요해서 7년이 걸릴지 10년이 걸릴지 모르겠다.

현실엔 드문 드라마속 ‘악녀’ 들 여성에 대한 부정적 의식 심어

여성의 적은 여성이다.”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텔레비전 드라마들을 보면 누가 만들어냈는지도 모를 이 말이 실감이 난다. 에스비에스 월화 드라마 <불량주부>에서의 ‘은미’를 비롯해 문화방송 수목 드라마 <신입사원>에서의 ‘현아’, 그리고 한국방송 일일 드라마 <어여쁜 당신>에서의 ‘희주’가 바로 같은 여성이면서 여성을 괴롭히는 적들이다. <불량주부>에서 미나의 직장동료 은미(강정화)는 도대체 왜 직장을 다니는지 의아심이 들 정도로 회사 일을 하는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고, 오로지 미나를 괴롭히기 위해 회사를 다니는 것처럼 묘사된다. 은미는 자신이 마음에 둔 회사 기획실장 선우(조연우)가 미나에게 관심을 보이자, 사사건건 미나에게 트집을 잡고 다른 동료들을 부추겨 미나를 따돌린다. 아무리 드라마라지만 이런 은미의 모습은 비현실적일 뿐 아니라 직장여성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심어주기에 모자람이 없다. <신입사원>에서 엘케이그룹 회장의 딸 현아(이소연)도 아버지의 ‘빽’으로 입사한 뒤 엘리트 사원 봉삼(오지호)을 사이에 두고 회사 동료인 미옥(한가인)과 연적 관계를 이루며 미옥을 괴롭힌다. 일류대를 졸업하고 해외유학까지 다녀온 현아는 미옥이 상고를 졸업한 사실을 들먹이며 무시하고, 계약직인 미옥이 재계약을 못해 퇴사하도록 일을 꾸민다. 그런데도 봉삼과의 관계가 잘 풀리지 않자 바로 사표를 던져버린다. 대기업에 취직한 해외유학파 여성이 직장에서의 남자 문제 때문에 그리 쉽게 사표를 낸다는 게 이해가 잘 가질 않는다. 현아 역시 드라마를 보는 이들에게 여성은 직장생활도 취미처럼 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을까 우려된다. <어여쁜 당신>에서 인영(이보영)의 남편 기준(김승수)을 잊지 못하는 희주(오주은)는 거의 스토커 수준이다. 기준을 출장지까지 쫓아가는가 하면 이미 결혼한 옛 애인의 집을 제집 드나들 듯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다른 여성에게 빼앗긴 희주의 심정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지만, 남의 남편을 계속 따라다니는 희주의 행동은 상식을 넘어선 것으로 인영을 고통스럽게 한다. 희주 역시 ‘여성=비이성적’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주는 대표적 인물로 꼽을 만하다. 남녀의 삼각관계를 다루는 드라마에서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는 설정 만큼 시청률을 높이는 데 좋은 모티브도 없을 것이다. 삼각관계의 한 축을 형성하는 악녀는 당당한 커리어 우먼이거나 모든 것을 가졌음에도, 여주인공을 좋아하는 남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자신을 망가뜨리면서까지 음모를 꾸미고 사건을 일으키며 드라마의 갈등을 만든다. 시청자는 여주인공이 어떻게 위기에서 벗어날까 궁금해하며 드라마를 지켜보는 것이다. 그런데 시청자들이 이런 여성들의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보다 보면 무의식적으로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과 부정적 의식을 내면화할 수 있다. 드라마의 특성상 시청자는 현실세계에서 드라마 속 허구세계로 빨려들어가게 돼 드라마 속의 가치관과 규범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이 여성인 드라마 작가들이 이런 점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극본을 쓰길 기대해본다.

우리 시대의 도덕적 아바타, 문근영

다소 진부하고 따분한 이야기부터 시작해보자. 19살 소녀 문근영은 ‘나무랄 데 없는’ 스타다. 이 표현이 스타에게 어울리지는 않지만, 문근영에게는 딱 맞는다. 예쁘고, 연기도 나쁘지 않고, 공부도 열심이고, 착하고, 성실하다. 심지어 그 나이에는 하기 어려운 기부와 선행을 끊임없이 베푼다. 스크린의 이미지와 일상생활이 일치해서 연예인의 살생부 X파일을 오히려 스타덤의 디딤돌로 만든 거의 유일한 배우다. 그러니까 감추고 싶은 소문이 무성한 연예계에서 뒷이야기를 미담으로 채울 수 있는 인물이 문근영이다. ‘미’가 아닌 ‘선’으로 스타가 된 배우 귀엽고 깜찍한 스타는 이전에도 있었지만 그녀에게는 다른 점이 많다. 부모님 모두 안정된 직장을 갖고 있기에 많은 여자 스타들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붙곤 하는 소녀 가장이 아니다. 외할아버지가 좌파 통일운동가였다는 등등의 집안 내력과 광주 출신이라는 태생도 이제는 더이상 금기가 아니며, 오히려 한국 현대사의 비극 속에서도 맑고 건강하게 자라난 대견한 소녀로서 긍정적인 이미지를 더해준다. 오디션에 친구 따라갔다가 또는 길거리에서 우연히 감독에게 발탁되었다는 그 흔한 연예계 신데렐라 입문기를 인터뷰에서 읊조리지도 않는다. 대신 탤런트가 꿈이어서 연기학원에 다녔다고 말한다. 완벽한 외모나 천재적인 재능이 아니라 대역부터 출발해 차근차근 연기실력과 자신의 이미지를 쌓아왔다. 이 당연한 과정을 생략한 것처럼 보이는 스타들과 달리, 문근영은 신데렐라 신화를 반복하지 않는다. 노력 끝에 재능을 발휘하고 스타로 성공했으면서도 인기가 떨어질까 조바심치기보다는 ‘정말 배우가 될 소질이 있는지’ 근심스러워 계속 연기를 할지 망설인다. 교양이 사라진 시대에 대학교의 교양 수업을 기대하고, 스타의 프리미엄을 활용해 대학을 선택하기보다는 인기없는 국문학과와 사학과가 좋다고 하고,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다고 한다. 배우가 되려고 온몸을 뜯어고치고 스타 되기를 로또당첨처럼 열망하는 세태에도 불구하고 마치 언제든 미련없이 스타의 자리에서 내려올 준비가 되어 있다는 태도를 보인다. 돈에 미쳐버린 사회에 살면서도, 문근영의 부모는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말하고, 어린 딸이 돈을 많이 버는 걸 반기지 않으며 딸의 수입으로 부자가 될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문근영은 돈에 대한 집착이 없는 듯 수시로 거액을 기부한다. 촬영장에는 할머니를 모시고 다니고, 출연결정에는 할머니와 엄마의 의견이 절대적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수많은 배우들 가운데 오직 문근영 단 한명만이 이런 식으로 설명된다. 사실 문근영을 흉내내기는 쉽지 않다. 문근영의 아름다움은 현실에서 실천하는 내면의 아름다움이 이미지의 힘을 빌려 더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근영의 모든 것들은 평범하며 정상적인 범주를 벗어난 것이 아니다. 학생은 공부를 열심히 하고, 사람은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 청소년은 하고 싶은 일에 따라 진로를 선택하고, 부모는 자식을 이용해 축재를 하려 해서는 안 되고, 일정한 부는 사회로 환원되어야 한다. 그러나 출연료를 선뜻 사회에 기부하는 스타와 자식이 돈을 너무 많이 벌어서 인생을 망칠지 모른다고 걱정하는 스타의 부모는 매우 드물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도 하지 못하는 그런 일들을 문근영은 아무렇지 않게 해낸다. 평범하고 상식적인 것들이 총체적으로 한데 모여 문근영이라는 스타의 ‘분위기’(Aura)를 형성할 때, 문근영은 대한민국 스타로는 드물게 우리에게 ‘윤리적 숭고함’의 대상이 된다. 그러니까 문근영은 ‘미’(美)가 아니라 ‘선’(善)으로 스타가 된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김지운 감독의 말처럼 ‘주변 인물들에게 죄의식을 불어넣는 배우’가 되고, 따라서 ‘안티’를 걸기는 쉽지 않다. ‘국민의 여동생’, 그 기이한 판타지 되돌아보면 문근영은 비교할 만한 모델이 없는 스타다. 최진실처럼 귀엽고 깜찍하지만 그늘이 없고, 김태희 같은 모범생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세련되지 않고 소박하다. 여배우 지망생들이 제2의 전지현을 지향하며 형성한 자장권에서도 벗어나 있다. 그렇다고 손예진에서 한가인으로 이어지는 청순가련형도 아니다. 스타의 계보 속에서 친족관계를 찾기 어려운 현재의 문근영에게 딱 맞는 수식어는 ‘국민의 여동생’(SBS ‘야심만만’의 카피)이다. 지금까지 출연한 영화 <연애소설> <장화, 홍련> <어린 신부> <댄서의 순정>에서 문근영은 계속 여동생으로 등장했다. 300여만명의 관객을 동원한 <어린 신부>와 문근영의 힘을 기대하는 <댄서의 순정>에서, 그녀는 여동생이면서 어린 신부가 된다. 할아버지의 뜻을 거역 못하는 착한 손녀 보은은 16살에 억지 결혼을 하고(<어린 신부>), 댄스 스포츠 선수로 성공하려는 채린은 19살에 위장 결혼을 한다(<댄서의 순정>). 보은과 채린은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남자와 같이 살면서 조금씩 사랑의 감정을 느끼기 시작하지만 두 영화 모두 변변한 키스장면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보은은 유부녀이기에 같은 또래 남학생과의 연애도 금지된다. 고등학교 1학년인 보은은 성에 대해 완전히 무지하고 곧 20살 성인이 될 채린은 가짜 남편과의 성관계를 상상하며 무서워 벌벌 떤다. 그들은 섹스 상대가 아니라 업어주어야 할 귀여운 여동생이다. 그런데 사실 성적인 것은 그들이 아니라 문근영에게 금지된 것이다. 우리는 <어린 신부>의 타이틀 장면처럼 그녀가 차라리 (웨딩드레스를 입은) 초등학생이기를 바란다. 그녀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결정적인 노래 <난 아직 사랑을 몰라>의 가사처럼, 아직(혹은 끝내!) 사랑을 모르기를 바란다. 미성년자에게 결혼을 강요한 다음 성관계를 금지하는 건 정말 기이한 판타지이다(칸트와 함께 사드를?). 여기에는 (한국사회에서) 어른이 되는 것은 곧 타락이라는 전제가 있다. 그래서 문근영 자신도 ‘어른이 되는 건 부담스럽고 순수를 잃는 것 같아 싫다’고 말하는데, 어쩌면 아무도 그녀의(특히 상징적인 의미에서의) 스무살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어린아이 같은 어른, 어른 같은 어린아이로서의 문근영을 좋아한다. 기이한 판타지 위에 스무살을 눈앞에 둔 문근영의 스타덤은 위태롭게 자리하고 있다. 여기서 문근영은 아마도 할리우드의 전설적인 아역스타 셜리 템플과 비교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깜찍하고 귀여운 꼬마 셜리 템플은 1930년대 경제 대공황 시기에 환상적인 춤과 노래로 피폐한 미국인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위로해줌으로써 스타덤에 올랐다. 십대 소녀 문근영은 오랫동안의 경제 침체로 고통스러워하는 한국사회에서 셜리 템플 같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문근영의 스타덤을 둘러싼 현상에는 좀더 다른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최근 몇년 동안 한국영화는 과거를 다루면서 ‘기억’보다는 ‘추억’에 집착했다. 폭압적인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청소년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 시대를 ‘순수의 시대’로 자리매김하면서 돌아가고 싶은 시절로 만들었다(<친구> <해적, 디스코왕 되다> <몽정기> <품행제로> 등등).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는 기억상실증이 유행이다. 남자주인공이 교통사고를 당해 13살의 기억을 안고 깨어나거나(<봄날>), 여자주인공이 역시 교통사고로 기억상실증에 걸려 18살 된다(<열여덟 스물아홉>). 청소년들이 주인공일 때 1980년대 한국사회의 다사다난한 현실이 지워지듯이, 주인공들의 정신연령이 더이상 어른이 아닐 때 드라마의 갈등은 수면 아래로 잠복한다. 한편에는 미숙한 인물들이 주인공인 드라마(<원더풀 라이프>의 철없는 부모, <불량주부>의 살림이 서툰 남자 주부, <신입사원>의 실력이 모자란 신입사원)과 문근영의 영화 <어린 신부>와 <댄서의 순정>이 있다. 그들은 기억상실증과 미숙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로 인해 잘못을 용서받고 책임에서 벗어난다. 보은과 채린도 결혼을 했지만 결혼한 어른으로서의 역할은 면제받는다. 그러니까 이 모든 현상이 총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건 유아상태로 퇴행하고 싶은 욕구이다. 어른으로서 해야 할 행동과 책임을 회피하고, 현실에 직면하지 않고 과거로 후퇴해서 변화를 피하려는 욕구이다. 아이들은 책임질 필요가 없으며, 여동생은 언제든 언니나 오빠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다. 나쁜 어른이 되느니 착한 아이로 남으렴? 문근영은 결국 한국사회가 요구하는 도덕적 아이콘의 아바타이다. 이 아바타의 훌륭한 점은 선을 현실 속에서 자발적으로 수행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녀가 계속 그렇게 하기를 바라지만, 어른이 되면 그렇게 하지 못할 거라고 염려하면서 그녀가 어른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는 문근영처럼 살고 싶지만 비겁하게도 문근영처럼 살지 못하기 때문에, 그녀에게 가짜 애인, 가짜 남편만 부여하면서 성숙한 어린아이로, 여동생으로 언제까지 우리 곁에 남기를 바란다. 문근영의 스타 이미지를 최대한 활용한 <댄서의 순정>에서, 채린은 꿈꾸던 성공을 눈앞에 두고서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사랑을 선택한다. 그러나 그녀 앞에 놓인 현실은 가혹하다. 채린의 남편 영세는 앞날의 불행을 예고하듯 (또는 성관계의 불가능성을 암시하듯) 끝까지 한쪽 다리를 전다. 채린과 영세의 불행을 초래한 인물들은 여전히 건재하고, 두 사람의 공간 밖에는 살벌한 정글이 버티고 있다. 영화는 채린을 기어이 그 속에 집어넣고 사랑이라는 숭고함을 빌려 희생을 강요한다. 채린이 순진한 옌볜 처녀이기 때문에 그러한 선택이 리얼리티를 획득한다고 믿는다면, 문근영이 아직 (나쁜) 어른이 아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현실의 믿음이 영화로 전염된 것이다. 그렇게 문근영의 스타 이미지는 숭고함과 희생 사이에서 소비된다. <댄서의 순정>의 결말은 스타 문근영 앞에 놓인 한계와 앞날의 불투명함을 예고한다. 채린은 착하고 순수하기 때문에 미래의 기회를 잡지 못한다. 채린처럼, 문근영이 스타로 장식된 숭고함과 희생의 그물망에 포획되어 좋은 배우로 성장할 기회를 놓칠까 걱정스럽다. 문근영이 건강하고 성숙한 어른이 되고 ‘국민의 여동생’이 아니라 ‘국민의 배우’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녀와 함께 우리도 진짜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녀를 스타덤에 올려놓고 대리만족을 느끼며 소비하기를 그만두고 우리도 그녀처럼 밝고 건강하고 희망차게 살았으면 좋겠다. 스타라는 신기루만으로 갈증을 채우기에는 실재의 사막은 너무나 삭막하기 때문이다.

KBS1 ‘TV, 책을 말하다’ 새 진행자 김미화ㆍ장정일씨

한국방송 봄 프로그램 개편에서 1텔레비전의 서평 프로그램 (매주 목요일 오후 10시) 진행자가 코미디언 김미화씨와 소설가 장정일씨로 바뀌어 12일부터 공동 진행에 나선다. 장씨는 <너에게 나를 보낸다>, <장정일의 독서일기>, <삼국지 해제> 등의 저자이다. 10일 오후 한국방송 본관에서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김미화·장정일씨를 만났다. 의 배기형 프로듀서는 “새 진행자로 책을 진지하게 많이 읽는 장정일 선생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며, “장 선생이 시청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데다 달변이 아니어서 진행자로 조금 미진한 점은, 방송 경험이 많고 대중적인 친근감이 있는 김미화씨가 보완해줄 것으로 판단한다”고 말했다. 김미화씨는 책을 많이 읽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아 망설이지 않고 진행자 제안을 승낙했다고 입을 열었다. “바쁜 방송 일정 때문에 책 읽을 시간이 많지는 않았어요. 책에 대해 전문적인 식견이 부족한 만큼 모르는 부분은 장정일 선생이나 우리 프로그램의 독서 전문가들에게서 도움을 받겠습니다.” 그는 앞으로 프로그램을 시청자들의 눈높이에 맞춰 편안하게 진행해나가겠다고 말했다. “의 애청자로서 ‘어렵다’ ‘전문가들만 보는 프로그램’이라고 느낄 때가 많았어요. 책을 읽지 않은 시청자의 처지에서 궁금한 점과 호기심 등을 대신 물어본다는 생각으로 진행하겠습니다.” 장정일씨는 평소 언론에 나서기를 아주 싫어하는 성격임에도 이번에 방송을 진행하게 된 데 대해 “원래 책과 텔레비전, 책 읽는 독자와 텔레비전 시청자는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왔지만, 텔레비전을 이용해 사람들이 책을 많이 읽도록 하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진행을 수락했다”고 밝혔다. “매주 신문에서 소개하는 책들은 천편일률적입니다. 책 몇권을 집중해서 조명하는 경향이 강하지요. 앞으로 우리 프로그램에서는 어떤 책을 정해놓기보다, 5·18과 관련한 책, 월드컵과 관련한 책 등 시의성을 살린 주제를 정해 관련서적을 소개함으로써 시청자들이 친근감을 느끼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학력이 있고 많이 배운 사람들만 책을 열심히 읽는 게 아니라 학력이 높지 않은 저 같은 사람도 책을 좋아하고 많이 읽는다는 메시지가 시청자들에게 전달돼, 쉽게 책에 접근할 수 있게 하는 용기를 주고 싶다”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혈의 누>를 말하다 [1]

“마지막 영화라는 심정으로 죽어라 달렸다” 김대승 감독은 스스로 소심한 인간형이라고 털어놓는다. 이전 인터뷰에서 “프린트를 뜬 이상 감독이 할 수 있는 건 없다”고 말했던 그는 요즘도 쉽사리 맘을 놓지 못하는 눈치였다. 대담 첫머리에 국내 극장들의 열악한 상영 여건에 대해 한바탕 성토한 그는 여러 차례 “내 영화를 볼수록 부끄러워 죽겠다”고 했다. 대담자가 “<혈의 누>는 요즘 영화들이 갖추지 못한 보기 드문 미덕을 갖고 있다”고 해도 “아직 멀었다”며 겸손의 손사래를 쳤다. 아마 5월9일 개봉을 한 다음에도 그의 소심함은 다음 영화를 내놓기 전까지 계속될 것 같다. “한 장면 한 장면 꼬치꼬치 물어볼까봐 사실 겁났다. 한 차례 기자시사회밖에 없어 그나마 다행이다.” (웃음) 영화에 관해선 소심하고, 깐깐하고, 고집불통인 김대승 감독과 “<혈의 누>는 역사 미스터리에 멜로를 끼워넣고 그 아래 신랄한 사회비판까지 깔아놓은 정직하고 뚝심있는 영화”라고 평가한 김봉석 영화평론가가 만나 이야길 나눴다. 김봉석 | 프린트를 뜬 뒤에도 여러 차례 영화를 봤을 텐데. 무슨 생각이 들던가. 김대승 | 왜 내가 2.35 대 1로 찍었을까 싶더라. 한국의 극장 환경이 한심한 수준이 아닌가. 좌우가 잘려나가니 프레임 안에 있던 인물이 바깥에서 들어오는 식이 돼버린다. 기술시사하는데 싱크가 안 맞아서 녹음실에 따졌는데 알고 보니 사운드가 16프레임 선행하는 걸 극장쪽에서 모르고 램프를 맞춰놨더라. 디테일한 것이지만 극장 영사기에 따라서 사운드의 하이(high)음이 다 깎여서 나오는 경우도 있다. 램프 밝기가 다 다르다보니 인물들의 얼굴색도 제각각이다. 그렇다고 가장 환경이 좋은 극장에 맞춰서 프린트를 뜰 수도 없는 일이고. 국제표준규격을 서둘러 적용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김봉석 | 영화진흥위원회에서 그런 걸 해야 하는 건데. 김대승 | 심의도 문제다. 요즘은 아비드 편집이 일반화되어 있어서 비디오테이프로 작업하잖나. 그런데 여전히 필름으로 찍어서 심의 받으라고 한다. 개봉일이 정해져도 감독은 욕심낼 수밖에 없는 게 영화인데 심의에 내기 위해 다 되지도 않은 CG를 출력해서 프린트 뜬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돈은 돈대로 시간은 시간대로 뺏긴다. 심의를 해야겠다면 자기네들이 작업실에 와서 보던가. (웃음) 김봉석 | 사실 외국 가서 영화 보면 분통 터질 때가 있다. 한국에서 볼 때와 완전히 다르니까. 현상도 마찬가지다. 박찬욱 감독, 김지운 감독 등도 LA에서 프린트를 하나 떠왔는데 아주 다른 영화가 됐다고 하더라. 김대승 | 1.85 대 1로 찍었다고 해도 제대로 구현될 것 같지 않다. 어떤 근거인지 모르겠으나 한국 극장의 스크린 가로세로 비율은 2 대 1로 일률적으로 맞춰놓은 것 아닌가 싶다. 좌우를 맞추면 위아래가 잘린다. 위아래를 맞추면 이번엔 좌우가 잘린다. 그나마 오른쪽은 덜 잘린다. 외화 자막 때문에. 자기네가 앵글을 바꾸는 경우도 있다. <서편제> 텔레시네 작업 때 기절할 뻔했는데 창작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앵글을 바꿔버렸다. 그런 무식한 짓이 어딨나 했는데, 지금도 크게 달라진 건 없는 것 같다. 김봉석 | 2.35 대 1로 찍은 영화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스크린이 서울에 2군데밖에 없다고 들었다. 김대승 | 기자시사 전에 극장을 멀티플렉스로 바꾸려고 했더니 현상하신 분이 ‘거기는 포커스가 반이 나가요’ 하더라. “이번 영화는 염치에 관한 이야기다” 김봉석 | <혈의 누>를 연출한다고 했을 때 모두들 좀 의아해했었다. 멜로판타지라 할 수 있는 <번지점프를 하다>로 데뷔한 감독이 미스터리 시대극에 고어장면도 많은 영화를 차기작으로 한다고 하니까. 김대승 | 어느 정도 위치에 오른 감독이라면 적절한 의구심이지만 난 이제 영화 2편 만든 신인감독 아닌가. 모색하고 탐색하고 뭐 그런 과정에 있는 건데. 김봉석 | 그런데 <혈의 누>를 보고 나니까 <번지점프를 하다>와 유사성이 보이더라.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도 비슷하고 과거를 통해서 현재가 재구성되는 플롯도 그러하고. 처음에 <혈의 누>를 어떤 영화로 만들고 싶었는지가 궁금하다. 김대승 | 닷새간 다섯 인물들이 다섯 가지 방식으로 살해된다는 이야기가 매력적이었다. 그뒤론 그 이야기 안에 어떤 주제를 담을 것인가 고민했다. 전작이 사랑을 지키지 못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라고 한다면 이번 영화는 염치에 관한 이야기로 만들려고 했다. 장르적으로 접근하되 그 안에 하고 싶은 다른 이야길 두고 싶었다는 점에서 2편의 영화가 통하는 부분이 있다. 전작의 동성애 코드나 이번 영화의 고어장면이나 내가 말하고 싶은 목표지점으로 가기 위한 에스컬레이터 같은 장치들일 뿐이다. 김봉석 | 스릴러라는 장르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나. 김대승 | 없었다. 만날 <샤이닝> 이야기 하는 게 사실 그 영화가 좋아서이기도 하지만 그쪽 유의 영화들을 별로 본 게 없어서이기도 하다. 사실 청룡열차도 잘 못 탄다. 그래서 지금은 인과관계의 디테일이 중요한 장르인데 만든 영화를 보면 그런 점을 지나치게 쉽게 본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장르에 대한 지식만으로 영화를 만든 것은 아닌가 자문하고 있다. 김봉석 | 영화 속 시대배경은 조선시대 말기다. 특별히 그 시대에 주목한 이유가 있다면. 김대승 | 처음에 이원재 작가가 쓴 시나리오는 시대적 배경이 조선시대 정조가 승하한 다음이었는데 부가 탐욕을 낳는다는 설정이 재밌었다. 자본이 축적되고 중인계급이 성장하고 동시에 서구 문물이 쏟아져 들어오고 그런데 조선은 여전히 비합리적인 가치들이 지배하고. 그런 충돌들을 다룰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과거를 끌어오는 게 과거를 이야기하기 위함은 아니잖나. 현실에 대한 어떤 발언을 하고 싶어서인데. 캐스팅 하는 과정에서 어떤 배우가 양복 입고 싶다면서 구한말로 바꾸면 안 되느냐고 하더라. 그렇게 했어도 큰 문제가 없었다고 본다. 보도자료에 보면 1808년이라고 되어 있긴 한데 영화에 꼭 그 시기를 담아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다. 김봉석 | 무당이 굿하는 장면이 처음에 나온다. 그녀의 입을 통해 풀려져 나온 강 객주의 저주는 이 섬에서 뭔가 큰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암시이기도 하다. 사람들을 호도한다고 하는 수사관 원규와 봉건시대 비이성과 광기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무당의 갈등은 그러나 영화 후반부로 가면 애매해진다. 김대승 | 제의나 굿이 죽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모두 산 사람을 위로하는 것이다. 사실 이 섬을 지배하는 광기는 무당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무당은 사람들의 광기를 드러나게 하는 매개이자 때론 원규의 상처를 치유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중립적인 인물이라고 봐야 한다. 섬 주민들의 광기를 조종하는 건 그들 마음속의 양심없음, 염치없음이지 무당이 아니잖나. 그런 점에서 무당의 역할을 키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봤다. 김봉석 | 영화의 막바지에 혈우(血雨)가 내리는 장면은 그럼 어떻게 봐야 하나. 김대승 | 염치 이야길 해야 할 것 같다. 한번은 교통사고가 났다. 신호대기 하는데 앞 차가 갑자기 후진해서 내 차를 받은 거다. ‘백미러도 안 보고 이 사람 뭐 하는 거야’ 그랬는데 할아버지가 오시더니 ‘아, 미안해. 하하. 좀 긁혔네. 칠하면 되겠네’ 하시더라. 그래서 ‘웃지 마세요. 남의 차 받아놓고 재밌으세요?’ 하고 정색하고 말했던 적이 있다. 또 한번은 술 취해서 새벽 4시쯤에 집에 갔는데 엘리베이터가 빨리 안 내려오는 거다. 오줌도 마렵고, 오바이트도 쏠리는데. 한층한층 내려오기에 누가 장난치는구나 싶었다. 신문배달 하는 아르바이트 학생이었는데 말로는 못했지만 속으로 째려봤었다. 그런 짓 하고 나면 며칠을 앓는다. 내가 강자의 입장에서 염치없는 짓을 한 거구나. 그런데 내가 39살 먹기까지 저지른 잘못이 이것뿐이겠나. 마지막 장면에서 내 눈에도, 원규의 눈에도,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핏빛이어야 한다고 생각한 건 염치 때문이다.

코믹하고 시적인 아마게돈, <지구를 지켜라!>

한국의 시나리오 작가 겸 영화감독, 장준환의 멋지고 장난기어린, 약간은 피비린내나고 자꾸 웃겨주며 예측하기 힘든 첫 극영화에는 광적인 음모들이 가득하다. <지구를 지켜라!>는 엉성하게 만든 공상과학 장비들로 무장한 두 괴짜가 중년의 사업계 거물을 지하주차장에서 납치하며 시작한다. 장준환의 초기 단편, <2001 이매진>의 주인공은 자신이 존 레넌의 환생이라고 믿었는데 이 영화에서 35살의 영화감독은 훨씬 더 망상에 들린 반영웅을 설정한다. 이병구는 자신이 일하던 화학회사의 사장, 강만식이 외계인, 더 정확히, 안드로메다 성운의 왕자라고 믿는다. 지구는 이 외계인들에게 넘어가 다음 월식 때 파괴될 터이다. 병구가 약간 어벙하고 느릿한 여자 동료인 순이에게 설명하듯 그야말로 강만식은 외계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놈이다. 일단 병구와 순이가 강만식을 별스럽고도 별스러운 다 쓰러져가는 산장에 가둔 다음 병구는 강만식이 안드로메다인임을 증명하기 위해 물파스를 발에 발라댄다. 어쩌면 지구의 구세주일지도 모르는 병구가 별 표정없는 포로를 고문하기 위해 끊임없이 옹알대는 허튼소리들을 통해 <지구를 지켜라!>는 마니아적인 분위기를 강화시켜간다. 병구가 양봉을 하고 순이는 한때 외줄타기 공연자였으며 병구를 “오빠”로 부른다는 사실들은 혼란을 가중시킨다. 요즘 개봉된 다른 한국영화, 박찬욱의 <올드보이>처럼 장준환의 영화도 복수, 환각, 그랑기뇰(Grand-Guignol)의 자극적인 혼합이다. <지구를 지켜라!>는 박찬욱의 2002년 스릴러, <복수는 나의 것>에 나온 주연배우(신하균)도 같고 분위기가 어딘가 닮아 있지만 모든 면이 땀으로 칠해진 듯한 매끈한 환상곡, <올드보이>보다 덜 짓누른다. <지구를 지켜라!>는 굴곡진 한국의 최근사를 언급하고 있지만 장준환은 느긋하게 영화를 끌어간다. 뉴웨이브적인 이 한편의 영화는 스틸 사진들, 감시용 카메라, 특수효과, 뉴스장면들과 반복되어 들려오는 불협적인 편곡의 노래, <오버 더 레인보우>를 능숙하게 사용하고 있다. 괴상하게 나가다 마음을 졸이게 하고 가학적으로 돌변하는 <지구를 지켜라!>는 그 기지와 인물들 속에서만 일관성을 유지한다. 영화에는 여러 미친 사람이 나오는데, 병구의 산장에 들렀다가 개가 사람의 뼈를 뜯고 있는 것을 볼 때까지 이상한 점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독특한 형사도 그중 하나다. 영화는 환경에 대한 과장된 히스테리를 보여주며, 섬뜩하게 하는 <양들의 침묵>식 수사물로 시작되어 인류 역사를 가장 가능한 한 잔혹한 면에서 되돌아보다가 <외계의 제9호 계획>(Plan 9 from Outer Space)와 언더그라운드 풍자작가인 크레그 발드윈의 언저리 어딘가에 놓이며 끝난다. 장준환은 지금까지 내가 본 가장 우스꽝스러운 공룡의 멸종 이론과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패러디를 시도하고 있고 윌리엄 버로(미국의 실험소설작가- 역자)를 위해 만들어진, 공장 제어실 아마게돈의 코미디가 있다. 이 섬뜩하고 사나우며 바쁜 구경거리가 지닌 가장 뛰어난 점은 이 영화가 얼마나 진지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감동적이고 시적일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병구의 (산업재해로 코마에 빠진) 어머니가 환상 속에서 병구만이 지구를 구할 수 있다고 말할 때나 지구가 터져버릴지라도 텔레비전이 영영 늘 우리를 기억하리라는 생각이 어떻게 서글프지 않을 수 있을까? (2005. 4. 19 짐 호버먼은 미국 영화평단에서 대안영화의 옹호자로 가장 명망이 높은 평론가로 <빌리지 보이스>에 기고하고 있습니다. <씨네21>과 <빌리지 보이스>는 기사교류 관계에 있습니다.)

<4월 이야기>의 감독 이와이 순지와 배우 마쓰 다카코

도쿄의 풍경은 큰 변화가 없다. 번화가엔 높은 굽의 구두에 카우보이 모자, 헐렁한 루즈삭스를 신은 여고생들이 여전히 거리를 누빈다. 번잡한 시내를 벗어나 호텔 회견장에 들어서니 연애만화 같은 한쌍이 기다리고 있었다. <4월 이야기>의 이와이 순지 (38) 감독과 배우 마쓰 다카코(松たか子, 22). 배우, 감독이 아니라 오누이 같기도 하고, 진짜 ‘연인’처럼 꼭 어울리는 분위기라 해야 할까. 이와이 순지 감독은 약간 몽롱한 눈동자에 느린 말투로 인터뷰에 응했다. 질문을 던지는 상대방의 시선을 물끄러미 응시하면서. 최근엔 극장용 영화보다 뮤직비디오에 치중하는 느낌이다. 일본을 방문하고 있을 당시 공중파 TV에선 감독이 인기 그룹 Glay의 뮤직비디오를 작업하게 되었다는 소식이 연예계 뉴스로 다뤄지고 있었다. 마쓰 다카코 역시 승승장구. 지난해에 <선보고 결혼하기>라는 드라마에 출연했는데 방송사에서 연기상을 받는 등 부산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인터뷰는 일반적인 질문들로 채워질 수밖에 없었지만, 그들의 ‘예쁜’ 인상은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다. 하늘에 벚꽃이 흩날리는 4월, 도쿄서 만난 베스트 커플. -감독의 <러브레터>는 한국에서 이제까지 개봉한 일본영화 중 가장 흥행성적이 좋다. 소감이 어떤가. 이와이 | 기쁜 일이다. 영화를 개봉하기 전엔 과연 한국에서 어떤 반응을 얻을지 은근히 걱정했다. 기대보다 좋은 성적을 거둬서 다행이라고 여긴다. 우연히 이런 프로그램을 본 적 있다. 일본 공중파 텔레비전에서 방송한 것인데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이 내 영화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있었다. ‘<러브레터> 같은 영화를 우리가 못 만들 리 없다.’ 정도의 내용이었던 것 같다. 대통령마저 내 영화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감동스러웠다. 기분좋은 일이다. -한국엔 이와이 감독 팬이 많다. <4월 이야기>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부탁한다. 이와이 | <4월 이야기>는 <러브레터>보다 몇년 뒤에 만들었는데, 새롭게 해보자는 기분으로 만든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대단한 의미는 없다. 방에 걸어두고 싶은 한폭의 그림 같은 영화 정도로 생각해달라. 요즘 한국과 일본은 점차 하나의 문화권이 되어간다는 인상이 짙다. 일본에서 만든 영화지만 한국 젊은이들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영화일 것이다. -배우 입장에서 <4월 이야기>를 말한다면. 마쓰 | 나 자신이 10대를 마감할 무렵에 찍은 영화다. 최소한의 스탭으로 만든 영화라 촬영장에선 늘 힘든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따뜻한 분위기에서 만든 영화라는 자부심이 있다. 이와이 감독과는 <4월 이야기>로 처음 만났지만 신뢰할 수 있는 연출자였다. 뭐라고 할까. 영화를 시작하기도 전에 감독은 이미 <4월 이야기>의 모든 것을 머릿속에 지니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믿고 일할 수 있었다. 감독이 말했듯,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동세대 젊은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감독이 <4월 이야기>에서 특별히 의도한 게 있다면 무엇일까. 이와이 | 난 영화에서처럼 고향을 떠나 다른 곳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요코하마라는 곳에서. 그리 많지 않은 나이에 혼자서 생활 전부를 책임졌던 거다. 멋진 일이었다. 그런 기분을 영화에 고스란히 담고 싶었다. 마치 인생이 처음 출발하는 순간을 화면에 담고 싶었다고 할까. -마쓰 다카코를 주연배우로 캐스팅한 이유가 궁금하다. 이와이 | 음, 다른 이유보다 평소 좋아했던 배우니까. <4월 이야기>는 실제 도쿄에서 4월에 촬영한 영화다. 평소 마쓰 다카코의 이미지를 좋아했고 이런 배우라면 꼭 한번 같이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감독은 평소 순정만화 같은 영화를 많이 만드는 편인데. 이와이 | 순정만화를 좋아하는 편이다. 물론 다른 방식의 영화를 만든 적도 있다. <러브레터>나 <4월 이야기>가 내 영화세계의 전부라고 여기진 않는다. -배우로서 영화에 특별히 담고 싶었던 게 있었나. 마쓰 | 글쎄. 영화를 보면서 관객 역시 ‘아, 나 역시 이런 기분 느낀 적 있어’라는 반응을 보였으면 좋겠다. 누구나 나이를 불문하고 사람을 만나 가슴이 두근거렸던 체험이 있을 터다. 그런 추억을 조금이라도 되살리면서 극장에서 나올 수 있다면 만족한다. 관객 역시 영화를 보면서 마음이 슬며시 움직이고 무언가 느낄 수 있다면 나로서도 흡족할 것이다. (웃음) 솔직히 말하겠다. 두 사람을 한꺼번에 인터뷰했지만, 이와이 순지에겐 무심한 편이었다. 마쓰 다카코에게로 자꾸만 시선이 향했으니까. 단아한 인상에 곧은 태도, 사람을 ‘기분좋게’ 만드는 미소를 지을줄 아는 여배우였다, 그녀는. 마쓰 다카코의 부친 마쓰모토 고시로는 일본에서 이름난 가부키 배우. 대대로 가부키를 연기하는 집안인데 그녀의 오빠 역시 일본에서 가부키 배우 겸 영화배우로 활동중이다. 마쓰 다카코가 연예계에 데뷔했을 적부터 일본에선 꽤 화젯거리가 되기도 했다. 집안 내력이 좋은 홍보수단이 된 셈이다. 마쓰 다카코는 신세대의 발랄함과 청순한 이미지를 겸비했다. 트렌디 드라마 <러브 제너레이션>에서 독립심 강한 ‘리코’라는 여성을 연기해 신드롬을 일으켰다. CF모델과 가수로도 활약중이다. 발라드 계열의 노래를 주로 부르는데 작사, 작곡을 겸하면서 남다른 재능을 과시하고 있기도 하다. 최근 발매된 싱글은 <언제나, 벚꽃의 비(雨)>. 마쓰 다카코는 이와이 순지의 <4월 이야기>에서 첫사랑을 찾아 용감하게 도쿄로 상경한 여학생을 연기했다. ‘사랑의 기적’ 운운하면서 말이다. 실제로 사랑의 기적을 믿느냐는 우문에, 그녀는 “네!”라고 크게 대답해 대기하던 매니지먼트 스탭들이 함빡 웃음을 짓게 만들었다. -영화에서 특별히 좋아하는 장면이 있다면. 마쓰 | <4월 이야기>의 거의 끝장면이다. 평소 짝사랑하던 학교 선배와 만난 뒤 비를 맞는 장면이다. 선배가 여러 가지 우산을 가져와 일일이 펴가면서 골라주는 대목이다. (웃음) 빨간색도 있고, 여러 색이 섞인 우산도 있고. 한 사람의 여자로서 가장 행복한 기분을 느끼는 순간이 그런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래서 제일 좋아하는 장면이다. - 영화 속 캐릭터가 실제 성격과 흡사한가. 마쓰 | <4월 이야기>를 작업하면서 감독이나 다른 스탭들이 참 자상하게 대해줬다. 영화를 찍기 전엔 과연 이 영화가 나에게 꼭 맞는 영화일지 의심스럽기도 했는데 스탭들의 정성에 깊이 감동했다. 지금와서 보면, 영화를 찍을 당시 난 잠시 우즈키라는 인물이 되어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영화를 찍은 배경도 실제 4월이었기 때문에 영화에 동화될 수 있었다. -영화 출연은 두 번째인데 자신의 연기를 자평한다면. 마쓰 | 영화는 텔레비전 드라마처럼 그때그때 모니터를 하기 힘들다. 완성본만 갖고 사후적으로 평가할 수 있기 때문에 나중에 후회해도 별 소용없다. 그래서 촬영할 때마다 순간순간 최선을 다한다는 생각으로 임했다. 여유가 없는 작업이긴 했지만 참 신선한 체험이기도 했다. 어쩌면 내 짧은 연기인생에서 최고의 순간에 찍은 영화일지도 모른다는 자격지심이 들기도 한다. -이와이 순지 감독 영화에 대해 평소 좋은 느낌을 갖고 있었나. 마쓰 | 감독의 작품은 사실 <4월 이야기>를 찍기 전엔 본 영화가 없었다. 처음 본 것이 CF였는데 그랜드피아노가 등장하는 CF였다. 평소 피아노를 좋아하기 때문에 특별히 기억에 남았다. 보면서 화면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었다. -영화에서 직접 피아노를 연주하기도 했는데. 마쓰 | 유치원 때부터 연주했다. 중간에 쉰 경험도 있지만 아직도 피아노 치는 걸 즐기는 편이다. 이와이 순지 감독은 전형적인 미소년형이다. 30대 후반의 나이인데도 얼굴 표정이나 헤어스타일은 청년의 그것이다. 상대편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태도도 호기심어린 소년의 얼굴이다. 이와이 순지 감독의 프로필은 더이상의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뮤직비디오와 텔레비전 드라마, 극영화를 오가며 바쁘게 활동중이다. 영화에 관한 글도 틈틈이 쓰는데 에세이를 단행본으로 낸 적도 있다. 음악에도 소질이 있어 작업하는 영화음악에 많은 부분 관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인지 이와이 감독의 영화에 입혀지는 음악은 늘 같은 빛깔의, 화사한 선율일 경우가 많다. 이와이 감독은 <4월 이야기>에 나오는, 벚꽃이 눈송이가 날리듯 떨어져내리는 장면을 “다른 효과없이 자연풍경 그대로 찍은 것”이라고 한다. 그의 영화는 늘 기억의 여린 부분을 건드린다. 첫사랑, 누군가를 만나는 들뜸, 그리고 상실의 아픔까지. 만화에서 음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지닌 ‘감성파’ 감독인 탓에, 이와이 순지와의 문답과정은 유쾌한 시간이었다. -감독의 영화를 보면 재미난 주변 캐릭터가 많은 편이다. <러브레터>에서도 학창 시절의 주변 캐릭터가 그렇고, <4월 이야기>도 비슷하다. 이와이 | 평소에 주변 사람들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는 편이다. 재미난 캐릭터가 있으면 잘 봐뒀다가 영화에 반영하곤 한다. 사람들을 관찰하는 게 버릇이라고 할까. -시나리오에서 영화 편집까지 도맡아 하는 편인데. 이와이 | 학창 시절부터 이런저런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뮤직비디오 스타일로 음악을 깔고 거기에 화면을 입히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때 직접 콘티에서 편집까지 도맡아 했던 버릇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 아닌가 싶다. 스스로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 하나의 스타일로 굳어버린 느낌이다. -<4월 이야기>를 보면 영화 속 영화로 사무라이들이 나오는 시대극이 있다. 직접 찍은 영화로 안다. 이와이 | 이 영화를 위해 직접 만든 것이다. 의미는 없는데. (웃음) 다른 감독들은 영화 속 영화를 다른 감독들의 작품으로 대충 집어넣곤 한다. 난 좀 다르게 해봤다. 낯선 화면이 갑자기 나올 때 관객의 반응이 궁금했다고 할까. 관객이 꽤 지루해 하는 것 같았다. 의미는 없다. (웃음) 하지만 나름대로 애착이 가는 장면이긴 하다. 다음 영화는 시대극을 만들기로 잠정적으로 예상하고 있는데 아직 확정된 건 없다. -영화에서 굳이 무사시노라는 지명을 택한 이유는. 이와이 | 일본인들에게 무사시노라는 지명은, 특히 도쿄에 사는 사람들에겐 특정한 지명보다 일반적인 의미가 있다. 그냥 시의 외곽을 뜻한다. 그러면서 어떤 그리움의 대상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감독은 평소 만화도 즐겨볼 것 같은데. 추천작을 꼽아 달라. 이와이 | (한참 생각하다가) 글쎄…, 뭐가 있나. <슬램덩크>가 있고 <미야모토 무사시> 정도? 특별하게 큰 애착을 갖는 만화가 많은 편은 아니다. 마쓰 | 만화보다는 영화를 좋아한다. 어려서부터 영화를 즐겨본 편이다. 좋아했던 영화를 꼽으라면 펠리니 감독의 <길> 정도 아닐까. 여배우 줄리에타 마시나의 연기가 좋았다. 몸짓만으로 삶의 고통과 안타까움을 관객에게 전했기 때문이다. - 배우로서 드라마와 영화, 어느 쪽이 매력있나. 마쓰 | 글쎄. 그저 좋은 기회가 있을 때 일을 하자는 주의다. 눈앞의 일을 하나하나 해결해가는 게 제일 좋은 방법 아닐까. 감독이 생각하는 나의 이미지가 배우로서 도움이 된다면 언제든 영화를 할 용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