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내가 찾는 영화 정보를 손쉽게!

‘텔레@CASHFILTER365자금세탁문의trc20구매대행자금세탁문의trc20구매대행' 검색결과

기사/뉴스(1997)

[외신기자클럽] 아시아를 알아야, 한류를 안다 (+영어 원문)

한류가 2010년에도 계속 붐을 일으킨다면, 그 이유: 한국 대중문화는 강한 경제적 인프라의 지탱을 받으며 후한 정부 지원을 받는다. 한국 영화인과 예술인들은 정열적이며, 교육과 경험이 풍부하며, 대체로 검열로부터 자유롭다. 한국 제작사들은 계속해서 위험을 부담하며 영화와 드라마와 두드러진 대중문화의 다른 형태들을 지원하고 있다. 한류가 2010년에 잊혀진 유행이 된다면, 그 이유: 한국 제작사들은 위험을 더이상 부담하지 않으며 똑같은 종류의 영화와 드라마를 매년 반복해서 생산해낸다. “일방적인” 현상이라 인식된 한류에 대한 풀뿌리 수준의 반발이 나타난다. 중국은 일관성 있게 효율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하여 좀더 젊고, 쿨하고, 다른 아시아 나라들과 더욱 잘 통하는 번드르르한 영화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독자도 나와 같다면 아마 “한류”란 말을 계속 반복해서 듣는 것도 지겨워지고 있을 것이다. 이제 정부도 덩달아 일에 뛰어들어 아시아 전역에 퍼져나가는 한국 대중문화를 강력히 지원하겠다고 선언하고 있으며, 이미 믿을 수 없는 금액의 자금이 소비되는 상황이다. 대부분의 정부지원 사례와 마찬가지로, 제일 효과적으로 쓰이는 돈은 이미 성공적인 프로젝트들을 강화하는 데(관광 진흥 등) 들어갈 것이며, 훨씬 더 높은 금액이 무에서 창출되는 새로운 야망의 프로젝트들을 만들어나가는 데 낭비될 것이다(‘한류우드’?). 그렇지만 한국 정부와 영화와 텔레비전 업계들은 한류가 한국에서 창안된 것이 아니란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물론, 그 영화와 TV드라마와 음악은 모두 ‘메이드 인 코리아’지만, 한류 현상 자체는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 태어난 것이다. 예를 들어 홍콩에서 한국 대중 문화상품들은 홍콩 평론가들과 배급업자, 웹마스터, 기자, 팬클럽, 가정주부들의 노력으로 소개되고 마케팅되며 평가되고 지탱되고 있다. 한류를 둘러싼 관심과 인기가 앞으로도 계속될지 여부는 한국에서 내린 어떤 결정보다도 각 지역의 상황에 걸려 있을 것이다. 한류 지원을 책임지는 공·사의 관리들이 이 현상의 진정한 원동력이 되는 주체들이 누군지 초점을 맞추기보다 관광객에게 팔 새로운 것들을 생각해내는 데 너무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닌지 궁금하다. 사실, 한류가 유지되는 것을 보장하는 최선의 방법은 한국이 문화적으로 아시아 타국들과 좀더 가깝게 융합되는 것이다. 장동건을 주연으로 한 <무극>과 같은 전 아시아적인 제작물들은- 특히 한류가 빛을 잃는다면 -‘순수’ 한국영화보다 스타를 알리는 데 훨씬 더 확실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비즈니스 측면에선, 한국과 아시아 타국의 회사들이 협력하여 콘텐츠를 생산할 경우, 타국에서의 홍보가 좀더 효과적으로 진행될 것이다. 이것은 이미 어느 정도 일어나고 있는 일이지만, 결정적인 효과를 가지려면 훨씬 더 확장되어야 할 일이다. 그리고 일반 한국인이 아시아 타국에서 오는 대중음악이나 영화에 마음을 더 연다면, 아시아 전역에 걸친 좀더 넓은 문화적 트렌드에 대한 감을 개발하는 것이 더욱 쉬워질 것이다(친선을 약간 전개하는 효과도 있으리란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한국 대중문화가 현재 성공적인 것은 해외에서 새롭고 색다르다는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이지만, 이 새로움은 사라져갈 것이다. 그렇게 되고 나서 한국이 같은 관객을 끌어들일 생각이면 갑자기 아시아 문화 트렌드에 대한 감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한국 관객은 미야자키 하야오나 주성치와 같은 유명한 이름들 외에 아시아 타국에서 나온 문화상품에는 관심이 별로 없는 것 같다. 한국 가수가 대만에 가면 흠모하는 군중이 마중나온다. 그런데 대만 가수가 서울을 방문하면 누가 인식이나 하는지 모르겠다. 어떤 한국인들은 이것이 자랑스럽게 얘기하지만, 한류가 2010년에 이르러서 머나먼 기억이 돼버린다면 가장 근본적인 이유 중에 이런 무관심이 랭킹을 차지할 것이다. It's the year 2010. Does anyone even remember the word "hallyu" anymore? Reasons why hallyu is still be booming in 2010: Korean pop culture is supported by a strong economic infrastructure with generous government support. Korean filmmakers and artists are passionate, well-trained, and largely free of censorship. Korean production companies continue to take risks, supporting films, dramas and other forms of pop culture that stand out from the crowd. Reasons why hallyu is a forgotten fad in 2010: Korean production companies stop taking risks, turning out the same kind of films and dramas year after year. A grassroots backlash emerges against hallyu, as it is perceived as being a "one way" phenomenon. China gets its act together, and starts putting out glossy films that are younger, cooler, and more in touch with the rest of Asia. If you're like me, you're probably growing sick of hearing the word "hallyu" over and over again. The government has now jumped into the game, declaring its strong support of the spread of Korean pop culture throughout Asia, and incredible amounts of money are already being spent. As with most cases of government support, the most effective money will be spent on strengthening projects that are already successful (promoting tourism, etc.), while far greater sums will be wasted on trying to build ambitious new projects from scratch (Hallywood?). Yet the Korean government, and the film and TV industries, should remember that hallyu is not something that was created in Korea. Of course, the films, TV dramas and music are all "made in Korea," but the hallyu phenomenon itself was born in other Asian countries. In Hong Kong, for example, Korean pop culture products are introduced, marketed, evaluated, and sustained by the efforts of Hong Kong critics, distributors, webmasters, journalists, fan clubs, teenagers, and housewives. Whether or not the buzz surrounding hallyu continues into the future will depend more on local conditions than on any decisions made in Korea. Sometimes I wonder if the public and private officials in charge of supporting hallyu are too focused on dreaming up new things to sell to tourists, instead of focusing on who is really driving the phenomenon. Actually, the best way to ensure the continuation of hallyu would be for Korea to integrate a bit more closely into the rest of Asia, in a cultural sense. Pan-Asian productions such as The Promise, starring Jang Dong-gun, can be a far more reliable means of promoting a star than a "pure" Korean production - particularly if hallyu fades. On a business level, if Korean and Asian companies work together to create content, then they will be more effectively promoted in other countries. To a certain extent this is already happening, but it needs to expand much further if it is to have a deciding impact. Meanwhile if ordinary Koreans were to become more open-minded towards pop music and films from other Asian countries, then it would be easier to develop a sense of broader cultural trends throughout Asia (not to mention spreading a bit of goodwill). Korean pop culture is successful right now because it is perceived abroad as being new and different, but soon this newness will fade. When that happens, Korea will suddenly need to have a sense of Asian cultural trends if it expects to reach these same audiences. Except for the biggest names, such as Miyazaki Hayao or Stephen Chow, Korean audiences often seem little interested in the cultural products produced by other Asian countries. If a Korean pop star travels to Taiwan, she's met by adoring crowds. Yet if a Taiwanese pop star visits Seoul, does anyone even notice? Some Koreans talk about this like it is something to be proud of, but if hallyu has become a distant memory by 2010, this sort of indifference will rank as one of the most fundamental reasons.

<사구> 원작에 충실한 미니시리즈

기회가 왔을 때 데이비드 린치가 멋지게 영화를 하나 뽑아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유감스럽게도 프랭크 허버트의 <사구>는 린치가 능숙하게 다룰만한 원작은 아니었다. 스케일은 징그럽게 컸으며 제작비를 뽑기 위해 끝없는 타협이 요구되었다. 결국 린치의 작품은 어정쩡하게 편집되고 형편없는 특수효과가 날아다니는 범작이 되고 말았다. 물론 흥행에서도 말아먹었고. 린치 팬들도 실망이 컸겠지만 진짜로 실망한 사람들은 프랭크 허버트의 팬들이었다. 드디어 그네들이 몇 십 년 동안 사랑하던 소설이 영화화될 기회를 잡았는데 나온 결과물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색한 영화였으니 분통이 터질 수밖에. 그래도 세상이 망하라는 법은 없다. 존 해리슨이라는 야심찬 인물이 허버트의 소설을 텔레비전 미니시리즈로 만들 계획을 세웠으니까. 이 작품은 1999년 싸이파이 채널을 통해 방영되었고 반응이 좋아서 속편도 나왔다. 이야기는 어떠냐고? 린치의 영화와 같다. 살벌하기 짝이 없는 모래행성 아라키스에서 온갖 정치적 암투가 벌어진다. 사악한 하코넨 남작에 의해 아버지를 잃고 자기도 거의 암살당할 뻔한 주인공 폴은 수많은 역경 끝에 원주민의 리더가 되고 결국 그들의 메시아가 된다. 물론 이야기는 이보다 훨씬 복잡하지만 그건 직접 보면서 즐길 일이다. 두 편의 작품들을 비교한다면 해리슨의 작품 쪽이 더 이야기가 즐길 만 하다. 비교적 넉넉한 러닝타임의 덕을 보고 있기도 하지만 해리슨에게 린치만큼의 예술적 야심이나 개성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허버트의 소설을 정성껏 받아들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만 열심히 한다. 영화는 린치의 작품보다 원작에 충실하고 더 정상적이다. 허버트의 소설 팬들에겐 린치의 영화보다 해리슨의 시리즈를 더 추천하고 싶다. 괴상한 건 비주얼이다. 전설적인 비토리오 스토라로가 이 영화의 촬영을 담당하고 있는데, 어렵게 구한 거물에게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였는지 특수 효과가 아주 괴상하다. 일반적인 방식인 블루 스크린이나 그린 스크린을 쓰는 대신 행성의 배경을 표현하기 위해 스튜디오 벽에 벽화를 그려 넣은 것이다. 이 특수효과는 너무 노골적이고 복고적이라 오히려 신선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감상을 방해하기도 한다. 두 편의 다큐멘터리와 갤러리로 구성된 부록들은 그냥 예의만 차리는 편. 다큐멘터리엔 한글 자막이 지원되지 않는다.

전 <씨네21> 편집장이었던 신임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 안정숙

지인들에 따르면, 안정숙(54)씨는 궂은일을 결국엔 마다하지 못하는 성격이다. 백발이 될 때까지 평기자로 남겠다던 그의 고집은 5년 전 <씨네21> 편집장을 떠안게 되면서 깨졌고, 쉰 넘어 카메라를 잡겠다던 그의 꿈도 최근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으면서 멀어졌다. 임기 시작 3일째인 5월31일. 앞으로 3년 동안 3기 영진위를 이끌게 된 안정숙 신임 위원장을 만났지만, 바쁜 업무 때문에 인터뷰는 수시로 끊겼고 뒷전으로 밀렸다. “업무혁신 관련 부서가 있는데 어떻게 돌아가는 거죠?” “모태펀드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요?” 개인적으로 가장 궁금했던 질문을 이제 겨우 해결했다는 안 위원장은 “바깥에선 영진위가 하는 일이 뭔지 대략 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들어와보니 모르는 것 투성이”라며, 아직 업무 보고(본인은 위원장 교육 프로그램이라고 말한)를 받지 못했고 다른 위원들과의 협의 사항인 사안도 있어 앞으로 영진위의 나아갈 방향에 대한 구체적인 질문은 다음으로 미뤄달라고 했다. 대신 그는 곁에서 일했던 동료들에게도 좀처럼 털어놓지 않았던 다소 사적인 질문들에 관해선 비교적 자세히 털어놨다. -허리 세우고, 핸들에 얼굴을 묻은 채 전방을 주시하는 평소의 운전자세가, 그동안 차 얻어타는 후배들에겐 사실 좀 불편했고, 불안했다. 이젠 관용차를 타고 다니는지. =혼자 다니는 것보다 좀 불편하다. 그래도 주차하는 시간을 아낄 수 있어 좋은 점도 있다. -저런 고급 의자는 싫어하지 않나. =<씨네21>에서도 그래서 바꿨잖나. 컴퓨터 치는 것도 난 (모니터에) 바짝 붙어서 치는 스타일이라서 저런 의자는 좀 불편하다. 영진위에는 김봉석씨처럼 수면을 취하기 위해서 기꺼이 의자를 바꿔줄 만한 사람이 아직 없는 것 같다. -위원들이 왜 위원장으로 뽑았다고 생각하나. =현장에서 직접 경험을 쌓으면서 (영진위의) 필요를 발견하는 영화인들이 맡았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기자가 현장과 가깝다고 하지만 아무래도 체감온도가 다르고 또 현장과는 벽이 있게 마련이니까. 영화인들도 그걸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누가 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다들 작품을 해야 한다, 다른 책임을 맡은 지 얼마 안 됐다, 그렇게들 고사해서 결국 나 같은 영화계 구경꾼이 이 자리에 앉게 된 것 같다. -위원직만 하더라도 많이 망설였던 것으로 아는데. =<송환>처럼 뛰어난 작품을 하겠다는 건 아니었고 그냥 일기 같은, 에세이 같은 사적 다큐나 만들면서 시간을 보내도 좋을 것이다 생각하고 푸른영상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돼 그렇게 된 거니까. 음… 내가 쉰다섯인가. 1951년생인데. 여자 나이를 이렇게 공개하다니. (웃음) 3년 지나면 쉰여덟이다. 내가 결심이 굳은 사람도 아니고. 이번에 하지 않으면 3년 뒤의 나를 보장 못하겠고, 그래서 많이 망설였다. -영진위 일을 하겠다고 맘먹은 계기가 있나. =지금으로선 관찰하고 발굴하고 길을 찾고 전망하고 여태껏 해왔던 직업적 특성을 영진위에서 발휘해보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고, 열심히 하겠다는 생각뿐이다. -잠깐이지만 1기 때도 위원으로 활동했다. =활동을 했다고 말 못하지. 그때는 모든 사안을 두고 변화를 추구하는 쪽과 거부하는 쪽의 긴장과 갈등이 워낙 심했으니까. 생산적인 논쟁을 거의 못했고, 자괴감에 결국 정지영 감독, 문성근씨 등하고 같이 중도에 그만뒀다. 다행히 후반기부터 이용관 부위원장이 위원들과 함께 코피 터지게 일하면서 안정적인 2기로 넘어올 수 있었고, 3기까지 온 것 같다. -영진위는 1기의 경우 산업에, 2기는 문화 또는 공공쪽에 포커스를 맞추겠다고 했고, 그 기조 아래서 사업을 펼쳤다. 이견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체로 영화계 안팎의 여론 자체가 영진위의 그런 정책 방향에 동의했다고 본다. 하지만 3기의 경우, 양쪽의 이해와 요구들이 격하게 부딪치는 것 같다. 부담이 전보다 더 클 것 같은데. =1기는 내부 갈등으로 인해 동력이 분산되는 일이 계속 있었고, 재원, 인력, 시간이 부족하다보니 일을 본격적으로 하기까지 꽤 오래 걸렸던 것 같다. 또 어디부터 손대야 할지 모를 정도로 많은 사안들이 놓여져 있었고. 일단 시급한 일부터 풀어갈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투자조합 사업 같은 경우가 그러하다. 그때는 언제 대기업들이 나갈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팽배했고 안정적인 제작자본을 확보하는 게 중요했다. 2기의 경우, 1기 때 우선 순위에서 밀렸던 공공, 문화쪽에 관심을 갖긴 했는데 아무래도 재원문제 때문에 완벽하게 지원을 해주진 못했을 것이다. 3기의 경우, 재원을 어떻게 확보하느냐가 관건이다. 문예진흥기금도 없어졌고, 유럽처럼 방송의 이익 몇 퍼센트를 영화에 지원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면 국고지원의 몫이 더 늘어나야 하는데. 현재로선 돈 끌어모으는 일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지원 방향은 산업과 문화 어느 쪽이 더 중요하고 시급하고 그렇게 판단할 사안은 아니고 동시에 고민할 문제다. -영화계 안팎의 의견을 어떻게 수렴할 것인가. =사견이지만, 대토론회 형태는 아닌 것 같다. 필요한 사안도 있겠지만. 이번 위원들 면면을 보면 화학구조가 괜찮은 것 같다. 각자 의견을 개진하는 것뿐 아니라 각 분야의 대표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의견 수렴에는 어려움이 없을 거라고 본다. -2003년에 기자를 그만두고 LA에서 1년 동안 영화공부를 했는데. =스스로 A급 기자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자 일이 나에게는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씨네21>에 있다가 신문사로 돌아와보니 이 일 말고 다른 일을 하면 어떨까 싶더라. 한때 가판대만 보면 <한겨레>를 맨 앞으로 끄집어내놓던 꼬맹이 아들도 다 커서 나보고 <한겨레>는 엄마 없어도 나온다고 하질 않나. 그러던 차에 연수 기회가 있었다. 1년 코스인 USC 영화·텔레비전 스쿨의 영화이론과 객원연구원 자리였는데. 말이 연구원이지 학교 와도 그만, 안 와도 그만, 골프 쳐도 그만, 낚시 해도 그만인 처지였다. -가기 전에 무엇을 배우고 싶다는 열망 같은 게 있었나. =그때는 뭘 해야 할지 몰랐다. 그냥 새로운 생각을 하나쯤 얻어서 오자. 조직에 얽매이지 않고 혼자 있어도 된다는 안도감 같은 것도 얻고 싶었고. 사실 그쪽 학교에서 ‘너, 왜 오려고 하는데?’라고 묻는데, 지원서에 그냥 필름 보존이라고 적었다. 필름 프리저베이션을 하려면 UCLA로 가야 하는데 그것도 모르고 쓴 거다. 어쨌든 30년 가까이 쉴 틈 없이 일에 쫓기다가 혼자 딱 떨어져 학교에 가서 영화만 보고 책만 보고 하니까 기막힌 신선놀음이더라. 브레히트의 희곡에 보면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왜 발표하지 않느냐는 제자에게 “학문은 지 재미로 하는 거다”라고 말하는 대사가 있는데, 딱 그 재미다. 큰 강의 위주로 들었는데, 마이클 레노프 교수의 다큐멘터리 강의가 특히 재밌었다. 내 짧은 영어로 3분의 1이나 알아들었는지 모르지만. 다큐멘터리를 영화학 내부로 끌어들여 본격적으로 연구한 사람 중 한명인데, 그거 들으면서 다큐멘터리 하면 재밌겠네 싶었다. -미국 가서 영어는 많이 늘었나. 누가 그러는데 단어가 쓰인 포스트 잇으로 자동차를 도배했다던데. =남동철 편집장이 그랬나? 모르는 단어가 너무 많아서 그런 건데 한번 붙여놓고 바꿔 붙인 적이 없다. 외운 것도 다 까먹었고. 변명을 하자면, LA에 가면 통역해줄 친구들도 바글바글하고 하다보니 독립적으로 영어 쓸 수 있는 환경이 아니더라. 그래서 지금은 그런다. LA에서 영어 배웠다는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평소 다큐멘터리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위원장직을 맡기 전에도 푸른영상에 출근했다. =다큐멘터리에 대한 관심은 좀 오래됐다. 87년엔가 뒤늦게 80년 광주 비디오를 봤는데 충격이었다. 이후 좋은 다큐를 보면 관심이 갔고, 내가 이런 걸 좋아하는구나 싶더라. 푸른영상은 어떻게 된 거냐면, <송환>이 선댄스에 갔잖나. 임권택 감독에 관한 책을 써서 국내에서도 유명한 데이비드 제임스 교수가 그때 김동원 감독을 USC로 초청했다. 상영도 하고 관객과의 대화도 하고 그랬는데 거기서 만나서 ‘나 한국 가면 푸른영상에서 받아줄 거냐’ 물었더니 그러겠다고 하더라. 나중에 안 것이지만 김동원 감독이 푸른영상의 실력자가 아니더라. 전원 합의제다보니 지원서도 내서 합격하면 한달 동안 자원봉사하고 6개월 동안 수습 끝내야 정회원이 되는 건데. 그래서 자원봉사부터 시작한 거다. -자원봉사 일이 구체적으로 뭐였나. =자원봉사 일이 뭐냐고 나도 물었었다. 그랬더니 “다큐멘터리 많이 보세요” 하더라. 편집을 위해 사전에 데이터를 받는 일도 하고, 인터뷰 번호 매겨가면서 대사도 풀고 그랬다. 나중에는 기합이 빠져서 농땡이 많이 쳤지만. 조선희, 최보은에게는 내가 서치도 하고, 로깅 작업도 하고 그런다고 자랑했는데 더이상 궁금해하지 않더라. 어쩌면 옛날에는 영화를 많이 만들고 싶은데 시간이 없다고 툴툴거렸는데, 시간이 많아지니까 내가 만들고 싶은 게 이건가, 회의도 들고 어쩌면 거기서 도망쳐 나오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언제였나. =1973년인가. 프랑스영화주간이란 행사를 조선호텔에서 했다. <쥴 앤 짐>을 그때 거기서 봤다. 감독이 누군지도 모르고 봤었다. 그때 신문들은 누벨바그가 뭔지 소개도 안 하던 때니까. 그러고나서 대전에 가서 독일어 선생을 하다가 1977년에 한국일보에 입사했다. 프랑스 문화원이 근처에 있어서 점심시간에 영화보러 갈 기회가 많았는데, 사실 <무도회의 수첩>이니 <장미빛 인생>이니 <밤의 문>이니 그런 감상적인 영화들을 보러 갔었는데 거기서 <도살자>니 <네멋대로 해라>니 <히로시마 내사랑>이니 하는 영화들을 본 거지. 그러면서 ‘어… 어… 어…, 영화도 예술이네’ 했던 거다. 잘 모르지만 한번 관심을 가져봐, 했던 거고. -그 관심이 이어져 서른 넘어 영화과에 입학한 건가. =사실 위대한 작품 보면 주눅들어서 접근이 어렵잖나. 고다르 영화 보면서 영화 만들겠단 생각은 못했다. 그런데 언젠가 아주 평범한 프랑스 코미디영화를 봤는데, 지금도 제목은 기억 안 나고, 상쾌한 영화긴 했는데 보고 나서 ‘어 저 정도는 나도 만들 수 있지 않나’ 싶었다. 80년 7월30일에 해직되고 난 뒤였을 것이다. 기자 생활 한 건 3년밖에 안 됐지만 80년에 그만둔 기자들은 다들 언젠가 신문사로 복귀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고, 그래서 다른 일을 해도 부수적인 것처럼 느꼈었다. 다른 직장에 다니고 있었던 나도 별로 애착이 없었고, 그렇다면 이 기회에 영화를 한번 만들어봐 하는 마음으로 서울예대 85학번으로 편입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내가 정말 영화를 굉장히 잘 만들 줄 알았다. -그런데 들어가보니 아니었나? 학교 다니면서 단편 작업을 했을 텐데. =하나는 <봄소풍>이라는 제목이었고, 또 하나는 <창밖에서>였나. 기말 발표회 앞두고 가편집 한 거 보고 있는데 그때 누가 들어와서 너무 당황한 나머지 영사기 렌즈를 손으로 막은 적도 있다. 되게 못 만들었다. 상영 뒤에 전혀 반응이 없었고, 나중에 한 후배가 자신의 영화에 내 영화의 한 장면을 인용했다는 말을 듣긴 했다. 치졸하지, 라는 대사 앞에 끼워넣었다고 해서 언젠가 복수하겠다고 맘먹었는데 결국 못했다. -<한겨레> 입사 이후, 15년 가까이 문화부에서만 일했다. =젊었을 때는 문화부가 싫었다. 그거 하려고 기자 한 건 아니니까. 그런데 해직 이후 1년 반이지만 영화공부도 하고 그러면서 문화쪽으로 관심이 고정되어버린 거지. <한겨레>에 와서도 다른 기회를 가져보지 않아서 문화부에 정착을 한 것일 수도 있고, 또 기질상 잘 맞아서일 수도 있고. 당시 문화부에 고종석, 조선희 이런 친구들이 있었는데 같이 떠들고 그러는 분위기가 좋았다. 매일매일이 MT고, 학습이고 그랬으니까. 서커스 기사를 문화면에 넣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이런 것 가지고도 논쟁을 벌였던 시기였다. -영화기자 시절, 취재원들에게 당황스러울 정도로 깍듯하게 대했다고 하던데. =특별한 건 없다. <한국일보> 해직 동기들끼리 다시 기자 하게 되면서 무슨 특권을 가진 것처럼 행동하진 말자고 하긴 했지만. 아마 그런 말 하는 사람들은 영화를 하고 싶어서 힘들게 노력하던 사람들이었을 테고, 내 입장에선 그런 모습들이 보기 좋았고, 그래서 호기심을 유지하며 취재를 한 결과일 순 있겠지. -평기자로 남기를 고집했던 이유는 뭔가. =지금 생각하면 싸구려 낭만인 것 같은데. 입사했을 때 30년 뒤에도 머리 허연 평기자로 남고 싶었다. 조직이 정한 단계를 밟기도 싫었고. 원래 책임을 맡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 스타일이기도 하다. 고등학교 땐가. 선생이 반장하라고 했는데 아버지가 전근 가신다고 해서 면한 적이 있다. 5월쯤 돼 선생이 전학 안 가는 나를 이상하게 여겨 ‘아버지 전근 안 가시냐?’고 묻기에 ‘이미 전근 가셨어요. 전 자취해요’ 그랬었다. 게다가 어느 날 남편이 정치를 한다고 하니까. 공연한 오해를 받기 싫었다. 바르게 처신한다고 하더라도 만에 하나 남에게 이상한 손가락질을 받을 수도 있잖나. 찜찜한 거지. <씨네21>은 상관없을 줄 알아서 간 건데. 편집장이 나서야 한다는 대선후보 인터뷰 때 고민하다 결국 뒤로 빠져야 했다. -기자 일 하다보면 때론 ‘기생하는 자’의 비참함 같은 게 있다. 창작에 대한 갈증을 갖고 있는 이에겐 특히 더할 텐데. 일하면서 갈등은 없었나. =<한겨레> 기자였잖나. 그 정열이 지금은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다 그랬지만 자나깨나 <한겨레>, 눈 떠도 눈 감아도 꿈 꿔도 <한겨레>, 뭐 그랬다. 그랬으니 자의식이 싹틀 기회가 없었지. 그런 말 있잖나. 없는 집에선 자식들이 공부라도 잘해야 한다고. <한겨레>가 아무것도 없으니까 우린 기사라도 잘 써야 한다, 뭐 그랬었다. 93년이었을 텐데. 아버지가 투병 중에 하루는 ‘정숙아, 니 글은 언제 쓸래?’ 하셔서 ‘저, 만날 써요. 기명기사 나오잖아요’ 했던 적이 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내가 글 잘 쓰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버진 ‘아니, 니 글 언제 쓸 거냐고, 제발 니 글 보고 싶다’고 계속 그러셨고. 암으로 돌아가시고 나서야 처음으로 내가 글 쓴다는 행위가 뭔지 곰곰이 따져보게 되더라. 그뒤로 글 말곤 딴 일을 벌이진 못했다. -영화기자 하면서 만났던 이들 중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누가 있나. 스승 같은, 때론 친구 같은. =임권택 감독님을 참 좋아했다. 서울예대 다닐 때 현장 가서 밑에서 연출부 하고 싶은 감독이었다. 장선우, 박광수 감독은 시대가 바뀌었지만 <한겨레> 시작할 때 함께 영화를 시작했던 사람들이라 동시대를 살았다는 느낌이 있고. 뒤통수 얻어맞은 듯한 영화를 만들어 질투와 경외심을 갖게 했던 홍상수 감독과의 인터뷰도 좋았고. 좋은 영화 만든 감독들과의 만남은 다 그랬다. 정지영 감독 같은 경우엔 <남부군> 지방 촬영 끝내면 피곤할 텐데 서울 올라와서 각종 성명서 내던 열정이 맨먼저 떠오르고. 김혜준 국장(현 영진위 사무국장)은 외국에서 한밤중에 전화해서 뭘 물어볼 정도로 살아 있는 데이터베이스였고. 아, 그리고 유영길 촬영감독. 그분이 눈이 되게 형형하잖나. 인터뷰 첫머리에 80년 광주 이야길 하시면서 자신이 필름을 전달하러 송정에 가던 날 광주에서 발포가 있었다고, 그런데 카메라 기자가 아무도 없었다는 이야길 하시던 때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유작인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보면 거기 한국의 빛이 잡혀 있잖나. 촬영할 때 필름 색온도를 계산한 거는 아닐 테고, 경험이 쌓여서 그런 것일 텐데, 처마 끝에 떨어지는 빛, 골목의 빛을 보면서 내가 경험한 오후의 빛이다, 그런 느낌을 받았었다. -신문 만들다가 잡지를 만들었을 때 어떤 재미가 있던가. =깊이 볼 수 있다는 재미는 있는데 피가 마르지. <한겨레>가 어떤 기사를 썼는지가 그날 부수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진 않지만, 주간지는 편집이든 문체든 독자들 꼬시려고 악을 써야 하니까. -악 쓰다보면 짜증이 날 때도 있었을 텐데. 화를 좀처럼 내지 않았던 것 같다. 부처님 혹은 호호 아줌마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고. =<씨네21> 간다고 할 때 신문 문화부 후배들이 나한테 한 이야기가 있다. ‘안 선배, 여기서처럼 성질 부리지 마세요.’ 울끈불끈 성질 내지 말자, 이번 기회에 성격 개조하자 다짐했지. -개인적으로 영진위에서 일하면서 해보고 싶은 것이 있다면. =한국영화가 영화제에서 상받는 것뿐만 아니라 외국 극장에서도 활발히 상영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국내에선 시네마테크들이 많이 생겨서 좋은 프로그램 많이 돌려볼 수 있으면 좋겠고. 한국영화의 난관들을 풀어가지 못하면 영진위가 일을 잘 못해서라고 욕먹을 텐데, 힘 모아서 또 다른 도약의 발판을 만드는 데 일조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장호 [48] - 안타까운 흥행작, <어우동>

영화감독이 인터뷰에서 자주 받는 질문 중에 하나가 자신의 연출 가운데 가장 아끼는 작품이 무엇이냐?라는 것이다. 일본의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은 어떤 인터뷰에선가 “차기작”이라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나도 가끔 그렇게 대답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한다. 지난 작품들은 이미 여러 사람에게 공개됐다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자랑스러운 마음보다 참담한 마음에 가깝다. 지난 시절의 한국 영화판처럼 연출자의 의도를 50%도 반영하기 어려운 척박한 문화풍토에선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진실이다. 그래서 그게 최선이 아니라는 자존심이 고개를 든다. 차라리 불쌍한 작품이 어떤 것이냐고 묻는다면 여러 작품이 떠오른다. 흥행이 안 된 작품, 또 흥행은 잘됐지만 평자들에게 평가를 얻지 못한 작품, 관객에게 잘못 이해된 작품… 등 아쉬움이 있는 작품들이 더러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영화 <어우동>이다. <어우동>은 내가 만든 영화 가운데 가장 관객을 많이 끌어낸 영화였지만 내가 바랐던 올바른 평가는 받지 못했다. 나는 <어우동>을 연출하면서 우리 시대극의 변천사를 상당히 의식했다. 종래 시대극의 모습을 바꾸는 일은 쉽지 않다. 텔레비전과 영화에서 사극들은 대개 전에 만들어 놓았던 의상과 소도구를 대부분 그대로 이용하게 된다. 수많은 엑스트라들이 사용하는 의상이나 소도구까지 철저히 새로 제작하려면 엄청난 경비가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인공이나 조연급의 의상과 소도구 일부분만 제작하는 것이 상례인데 어쩔 수 없이 기존의 형태를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궁중사극을 많이 만들었던 60년대 신필림의 경우에도 철저한 고증보다 웬만하면 거의 같은 형태의 의상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시장에 나와 있는 싸구려 원단을 사용하게 되므로 시대에 맞지 않는 인공염료의 색감이 그대로 드러나 미학적으로도 문제가 많았다. 그러나 혁명적인 제작이 아니고서는 바꿀 길이 요원하다. 나는 신필림 시절의 시대극과 결별하고픈 욕망이 너무 커서 태흥영화사 이태원 사장을 설득해 엑스트라의 의상까지 모두 새로 제작하기로 결정했다. 우선 천연염료의 느낌을 주기 위해 원단부터 면과 무명을 주로 사용했고 지금까지 양반의 도포나 바지저고리에 흔히 이용했던 옥색이나 회색. 또는 연보라, 연분홍, 흰색 등을 피하고 복식사에서 밝힌 것처럼 잿빛, 쪽빛, 그리고 갈색 등 지금껏 영화나 TV에서 보여주지 못했던 천연염료의 느낌을 과감하게 사용했다. 또 궁궐에서 착용한 공복 역시 청색, 홍색 모두 서양의 인공염료의 색감이 그대로 노출되어 천박스럽기만 했던 것을 천연염료의 은은함과 깊이를 살리기 위해 어두운 청, 홍으로 힘들여 만들었다. 충무로 영화판에는 참으로 오랜 세월 살아 있는 역사처럼 영화 의상만 전담했던 이혜윤 여사가 있다. 내 청년 시절엔 충무로 영화판에서 흔히 짱구 아줌마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그분의 영화의상 한평생에 <어우동>의 의상과 소도구의 대변혁은 잊을 수 없는 사건 가운데 하나라고 감히 확신한다. <어우동>의 의상 고증은 고 석주선 교수가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한복연구가 이헌정씨의 솜씨와 성의로 아주 큰 성공을 이루어냈다. 특히 기생 전모를 비롯한 독특한 장신구들을 직접 제작해준 전통복식 연구가인 허영씨의 도움이 컸다. 영화 <어우동>의 대성공은 그뒤 한국영화와 TV에서 사극의 모습을 다양한 시대 고증에 충실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고 자신한다. 영화 의상의 기초가 되는 엑스트라의 복식들이 다양해졌으므로 선택의 폭이 널널해진 것이다. 개봉과 함께 단성사 앞에는 이보희의 얼굴을 복제한 어우동의 마네킹이 대형 유리상자 속에서 예쁜 전통 한복의 옷맵시를 뽐내게 되었다. <어우동>의 인기는 대단했다. 신인 여배우 이보희의 인기는 금세 정상으로 올라섰다. 연일 계속되는 매진은 <무릎과 무릎 사이>에 이어 다시 나에게 횡재의 길을 열어놓았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이상한 투서에 의해 영화 <어우동>은 한국영화 검열역사에 다시 없는 난센스 해프닝을 일으켰다. 영화관에서 한참 인기리에 상영중인 <어우동>의 필름이 다시 공연윤리위원회에 실려가 대폭 삭제되었다. 뿐만 아니었다. 당시의 공연윤리위원장 최창봉씨는 <어우동> 때문에 불명예스럽게 전격 경질되고 말았다. 그렇게 된 내막은 너무 어처구니가 없게도 모든 게 감사원장의 명령 때문이었다. 그 이름을 영영 잊을 수 없는 당시의 감사원장은 군장성 출신의 황영시라는 사람이었다. 누군가 영화인 중에서 이 사람에게 투서를 보냈는데 그 내용은 영화 <어우동>이 민중사관에 의해 만들어진 운동권의 의식화된 영화로 현 대통령을 조선조의 왕으로 비유한 불손한 영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영화 <어우동>은 왕의 권위에 섹스로 도전하는 상징적 성애의 장면들이 여기저기 잘려나가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도 괘씸하기 짝이 없는 행패에 속수무책으로 그저 당했던 분하기 그지없는 기억들이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는 정말 불과 얼마 안 되는 매우 짧은 시간이다.

KBS 새주말극 ‘슬픔이여 안녕’ 출연 가수 김동완

“주말 드라마는 오랜 기간 방영되기에 출연하고 싶었어요. 연말에 방송이 끝날 때쯤이면 배역에 완전히 동화돼 있을 것 같아요.” 11일 첫 전파를 타는 한국방송 2텔레비전 주말극 <슬픔이여 안녕>(극본 최현경·연출 문보현)에서 다시 연기자로 나선 그룹 ‘신화’ 멤버 김동완(25·사진)은 안방극장에 자주 얼굴을 내밀고 싶은 마음을 이렇게 내비쳤다. 김동완을 7일 오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만났다. 그는 이 드라마에서 지방대 졸업 뒤 집안 일을 거들며 취업 준비를 하다 장서영(박선영 분)과 사랑을 키워가는 한정우 역을 맡았다. 한정우는 천성이 느긋하고 배포가 두둑하며 기죽고는 못 사는 성격이다. 얼마 전 끝난 문화방송의 <신입사원>에서 에릭이 열연했던 강호를 연상시키는 캐릭터다. “에릭은 멋있잖아요. 분위기도 있고요. 제가 만약 <불새>에서 에릭이 맡았던 역을 연기했다면 그런 분위기가 안 나왔겠죠.” 김동완은 같은 ‘신화’ 멤버이면서 연기자로 활동하는 에릭의 장점을 칭찬하면서도 “감성적인 표정 연기는 내가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라며 에릭에게 밀리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보였다. 그의 자신감처럼 이제 김동완의 이름 앞에 ‘연기자’라는 타이틀을 붙여도 괜찮을 듯싶다. 그는 그동안 영화 <돌려차기>와 한국방송 드라마 <천국의 아이들>을 통해 연기자로서 신고식을 치렀고, 최근 문화방송 드라마 <떨리는 가슴>에서 “연기가 어색하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다. “가수로서는 신화 멤버 6명이 텔레비전에 함께 나오다가 드라마에선 저 혼자 크게 나오니까 좋더라고요. 예전에 드라마에 출연했을 때는 하지 않았던 대본 분석도 요즘은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에서는 배우로서의 긴장감이 느껴졌다. 김동완은 서로 다른 성격의 네 형제가 힘을 합해 몰락한 집안을 일으켜 세우는 과정을 그린 이번 드라마에서 막내인 한정우에 대해 “되는 일이 없지만 항상 희망에 부풀어 있는 건강한 인물”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정우가 긍정적이고 털털한 성격의 자신과 닮았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는 “주말 드라마이기 때문에 시청자들의 연령층이 높다는 점도 신경쓰인다”며 “이번 기회를 통해 어른들이 ‘김동완이 연기자구나’라는 생각을 확실히 가지도록 열심히 연기하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KTV, 시사다큐 시리즈 ‘라이프’ 1년간 방영

케이블 텔레비전 KTV가 세계화에 따른 빈곤, 소외, 기아, 질병 등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내년 5월 말까지 장기 방영한다. 한국정책방송 KTV는 세계 각 나라의 생활환경 문제를 다룬 영국 <비비시월드>의 시사 다큐 시리즈 <라이프>를 지난 3일 처음 방송한 데 이어, 내년 5월 말까지 매주 금요일 저녁 6시30분 방영한다고 9일 밝혔다. 영국 환경영상재단 TVE 제작 아프리카 등 소외 지역 조명 총 52편으로 구성된 <라이프>는 영국의 환경영상재단인 ‘TVE’가 세계화의 이면에 가려진 빈곤이라는 문제에 대해 세계인의 관심을 유도하고 해결책을 찾아보기 위해 제작했다. 주로 가난한 나라나 내전 등으로 경제난을 겪고 있는 지역, 특정 집단의 인권이 억압되고 있는 나라가 취재 대상이다. 이들 지역 소외계층의 경제, 의료, 교육 등 일상 생활환경과 문제점을 밀착 취재했다. 첫 회 방송된 ‘여성으로 살아가기’에서는, 94년 전세계 지도자 179명이 카이로에 모여 여성들의 인권 향상에 서명한 이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케냐, 나이지리아 4개 국 여성들의 삶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살펴보았다. 카이로 회의는 ‘모든 국가가 여성에 대한 모든 형태의 차별을 제거하기 위한 모든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선언했음에도 이 4개 나라들의 여성 인권 상황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음을 이날 방송은 잘 보여주었다. 10일 방송될 ‘에이즈와의 전쟁’편에서는 20년이 넘게 에이즈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잠비아와, 새롭게 에이즈 위험 지역으로 지정된 우크라이나를 찾아가 에이즈 감염 현황과 퇴치 노력을 살펴본다. 이어 17일 전파를 탈 ‘우간다 빈곤층의 삶’에선 독재정권의 부패와 내전으로 파산한 우간다가, 96년 무세베니 대통령 집권 이후 절대 빈곤층이 절반으로 감소하는 등 성공을 이뤄내고 있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달의 마지막 금요일인 24일엔 ‘터키의 교육개혁’이 방송된다. 터키 동부의 투르크족 소녀들은 정부의 교육개혁 의지에도 불구하고 부모들의 관습과 생활고 때문에 제도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에선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것이 더 나은 생활 여건을 만들 수 있다는 정부의 주장이 주민들을 설득해내 교육개혁이 성공을 거둘 수 있을지 전망해본다. 이밖에도 <라이프>는 ‘세계화와 브라질’ ‘평화와 화해의 손짓, 부룬디’ 등의 방송을 준비하고 있다.

최초의 떨림, <정사>

올 4월28일부터 5월4일까지 일주일 동안 열리는 전주국제영화제가 채 두달도 안 남았다. 영화제 준비하랴 절반은 영화학교인 영상원 원장노릇도 같이 해야 하니 몸을 두쪽으로 나누고 싶은 심정이다. <씨네21> 기자로부터 ‘내 인생의 영화’란에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서 응하기는 했지만 난감하다. 도대체 무슨 영화에 대해 써야 하지. 단순히 기억에 남는 영화라든가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영화를 이야기하면 될까. 그러나 과연 영화가 내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쳤단 말인가. 영화는 젊음과 특권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영화 관객은 젊다. 젊음은 영화를 열망하고 영화는 젊음을 매혹시키며 그 매혹을 바탕으로 살아나간다. 영화가 갖는 ‘일과성’도 영화와 젊음과의 친연성을 보여주는 한 측면이라 볼 수 있다. 요즈음은 비디오테이프를 통해 아무 때나 원할 때 볼 수 있다고 하지만 영화는 역시 극장에서 ‘제때에’ 보아야 한다. 계절이 한번 지나가듯 그 계절과 함께 영화는 극장가를 스치고 지나간다. 영화가 이렇게 한번 스치고 지날 때 사람들의 삶과 영화와의 우연한 만남이 이루어진다. 영화에도 이른바 고전이라는 것이 있어서 이런 고전적 영화는 두고두고 보아도 여전히 감동을 줄 수 있다고 말하지만 내 경험으로는 이는 순수한 감동이라기보다는 지적인 만족에 더 가까운 것으로 생각된다. 영화 관람은 연애와도 같은 것이어서 반복해 보았을 때는 최초의 만남에서와 같은 감동을 느낄 수 없다. 영화가 주는 감동은 신선한 것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곧 퇴색하는 것 같다. 오로지 그 신선함은 영화를 본 사람의 기억 속에만 살아 있다. 그래서 옛날에 보고 감격했던 영화를 다시 보면 마치 머릿속에만 그리던 옛 애인을 오랜만에 만나 실망하듯 실망하는 수가 많다. 보는 사람이 변한 것인가 영화가 퇴색한 것인가. ‘내 인생의 영화’라는 제목은 그래서 ‘내 젊음의 영화’라는 말과 동의어로 생각된다. 나이를 먹어서 영화가 내게 이미 과거형이 된 것인가. 젊은 나를 매혹시켰던 영화들은 어떤 것들이었나. 영화는 기억과 무슨 관계를 갖고 있을까. 영화의 회상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영화에 관련된 일로 정신없이 바쁘면서도 정작 나 자신의 영화는 챙기지 못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갑자기 들었다. 심지어 극장에 가서 영화 볼 시간도 내기 힘들지 않은가. 그런데 ‘내 젊음의 영화’에 대해 글을 쓴다니. 어쨌든 기억 속에서 맨 먼저 떠오른 것은 안토니오니의 <정사>다. 이 영화를 처음 본 것은 1963년 대학에 입학하던 해 봄, 19살, 성인이 되었다고 처음 자각할 때, 황폐하고 빈곤한 대학을 보고 절망하고 있을 무렵이다. 중앙극장에서 우연히 본 이 영화는 매우 놀라웠다. 어떻게 이해했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때 받은 느낌이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영화 전체가 무척 세련돼 보였다. 영화주제가도 모니카 비티도 멋있었다. 스크린마저 특별한 광채로 하얗게 빛나는 것 같았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영화에 대해 부러운 감정마저 느꼈던 것 같다. 마치 영화 자체가 질투심이 불러일으킬 정도로 눈부시게 멋있는 사람인 양. 문자 그대로 자신이 흔들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최초의 떨림과 같은 것이었다. 그 매혹은 아주 새롭고 낯선 것이었다. 전에 다른 영화에서 맛보았던 멜로적 감동이나 액션의 박진감, 또는 장면의 현란함과는 다른 성격의 독특한 감각과 정서, 끝없이 추락하는 것 같은 현기증 같은 것이었다. 혼란스러우면서도 도취되는 느낌. 매혹과 그 매혹을 차단하는 브레히트적 소외효과가 동시에 작용하고 있었던 것일까. 당시에는 그런 단어나 개념을 전혀 몰랐지만 이른바 영화의 모더니티를 무의식적으로 감지했던 것일까. 확실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이 영화는 분명 새로운 영화, 아니 영화의 새로운 존재방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느껴졌다. 대학초년생 특유의 스노비즘에 휩쓸려 감동을 과장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전에 안토니오니라는 이름도 몰랐고 서구에서 특별하게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라는 사실도 몰랐다. 연애를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여자가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사춘기를 완전하게 벗어나지도 못한 젊은이가 정사의 허망함을 통해 사람 사이의 소통의 불가능성에 대해 말하는 영화에 전율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삶의 건조함과 황량함이 스크린 위에서 멋있고 세련된 형태로 보여진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이율배반적이다. 자기기만이 끼어 들어갔던 것일까. 인생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달리 어찌할 바도 모르는 젊음의 혼동이 영화의 스크린에 투사되었던 것인가. 흑백 장면들의 조형적 아름다움에 그저 막연하게 감탄했던 것인가. 그뒤 한참 동안 이 영화의 유명한 주제가를 다방이나 라디오에서 듣게 되면 그 최초의 떨림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 느낌을 은밀하게 간직하려 했다. 왠지 부끄러운 것 같아 남에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이 영화를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텔레비전에서 한두어번 다시 보았고 각 장면이나 스토리도 잘 기억나지만 그 최초의 떨림을 다시 경험한 것 같지는 않다. 아니면 그 느낌을 쑥스럽다고 스스로 억압했는지도 모른다.

창조주 콤플렉스라는 이름의 함정, <스타워즈>

한국 <버피>(한국 방영명 <미녀와 뱀파이어>) 팬들 중 날 싫어하는 사람들이 꽤 될 거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난 내 <버피> 에피소드 리뷰에 분노하며 내 리뷰 사이트로 연결되어 있는 링크를 지워버리자고 주장하던 팬 커뮤니티 회원들을 몇명 알고 있다. 그들에겐 내가 당시 6, 7시즌에 박했던 게 팬으로서 배반행위로 느껴졌던 모양이다. 아마 날 팬의 가면을 뒤집어쓴 안티팬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이 눈을 딱 감고 7시즌이 6시즌 때 잠시 주저앉았던 시리즈를 멋지게 회복했다고 아무리 믿고 싶어도, 6시즌 이후 이 시리즈가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었고 7시즌 이후 계속 바닥을 향해 달려갔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팬층이 더 넓은 의 애호가들은 조금 더 솔직할 것이다. 어디까지가 이 시리즈의 전성기였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겠지만 그래도 이 시리즈의 마지막 3시즌이 재능과 시간의 낭비였다는 사실을 당당하게 부인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운좋게 그럴 수 있는 나쁜 기억력의 소유자라고 해도 과연 피날레 에피소드의 허망함까지 잊을 수 있을까? 이건 텔레비전 세계에선 그렇게 드문 일이 아니다. 히트작인 텔레비전 시리즈들은 대부분 필요 이상으로 수명이 길다. 마지막 시즌까지 이전의 창의력과 매력을 그대로 유지하는 시리즈는 거의 없다. 대부분 그들은 조금 더 나간다. 그게 자의건 타의건 간에. 하지만 <버피>나 은 일반적인 시리즈들이 갖추고 있지 않은 핸디캡을 하나 더 가지고 있다. 그건 이들이 기본적으로 판타지/호러/SF라는 것이다. 두 작품들 모두 우리 세계와 외양은 비슷하지만 속은 전혀 다른 환상 세계를 다루고 있다. <앨리의 사랑 만들기>의 작가들은 기껏해야 보스턴이라는 실제 공간에 살짝 괴팍한 변호사들을 끼워넣었을 뿐이다. 하지만 <버피>와 의 작가들은 고유의 법칙이 존재하는 자기들만의 세계를 창조했다. 이런 식의 작품을 쓰는 사람들은 대부분 창조주 콤플렉스에 시달린다. 그들은 더이상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그들이 시리즈를 이어가는 동안 창조한 우주는 너무 근사하고 멋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세계의 법칙과 운명을 좌우하는 전능자인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그들은 이야기나 캐릭터보다는 우주 자체에 매달리게 된다. 수많은 이 장르의 작가들이 콤플렉스의 희생자가 된다. 아이작 아시모프와 같은 거장들도 예외는 아니다. 아니, 아이작 아시모프야말로 이 콤플렉스의 최대 희생자이다. 그의 후기작들이 재미없는 건 나이 들어 필력이 떨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물론 그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괜히 잘 연결되지 않는 그의 전작들을 연결해 하나의 거대한 역사를 만들려는 허망한 시도에 발목이 잡혔기 때문이다. 왜 이들은 실패하는 걸까? 그건 그들이 만든 우주가 사실 별게 아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그들의 이야기도 그들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깊이있는 것도 아니다. <버피>는 기껏해야 금발머리 치어리더가 뱀파이어를 사냥하는 재미있는 코미디액션이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은 기껏해야 심리역사학이라는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활용한 깜찍한 단편 모음집이다. 에서 매력적인 것은 외계인과 흡혈귀들이 공존하는 정체불명의 미로 자체이지 그 해답은 아니다. 제대로 정신이 박힌 작가라면 아무리 자기 시리즈가 인기가 많아도 아이디어와 캐릭터에 집중하지, 괜히 쓸데없이 자신의 우주와 설정을 과대평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장르의 작가들은 대부분 팬들이 형성한 좁은 컬트 그룹 안에서 과대망상증에 빠지게 마련이다. 그 결과는? 이야기는 지루해지며 주제는 생뚱맞아진다. 캐릭터들은 엉겁결에 우주의 운명을 짊어지고 헉헉거리다가 이전의 매력까지 날려버린다. 결정적으로 시리즈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 이상의 것을 질겅질겅 씹어 삼키다가 심한 소화불량에 빠지고 만다. 선배들의 실수담 그대로 따른 조지 루카스 자, 그럼 <스타워즈>에 대해 이야기해보기로 하자. 아마 여러분들 중 상당수는 <스타워즈 에피소드3: 시스의 복수>가 미적지근했던 앞의 두 프리퀄들이 망쳐놓았던 시리즈의 위상을 어느 정도 회복한 작품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나도 그 사실을 아주 부정하고 싶지도 않고. 그러나 아무리 우리가 이 작품에 관대하고 싶어도 한계는 있다. 결국 우리가 보고 칭찬하는 영화는 조지 루카스가 만든 실제의 영화가 아니라 우리가 보고 싶었고 오래전부터 결말을 알고 있었던 친숙한 이야기라는 것을. 그리스 비극에 비유한다면, 관객이 정말 좋아한 건 눈앞에서 상연되는 소포클레스의 연극이 아니라 오이디푸스 왕의 이야기 자체였던 셈이다. 루카스는 자신의 히트작에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걸까? 아시모프나, 조스 위든, 크리스 카터가 저지른 실수들을 거의 그대로 저질렀다. 너무 모범적이어서 나중에 반면교사의 교과서로 써먹을 수 있을 정도다. 우선 그는 자신이 다루는 세계를 과대평가했다. <스타워즈>의 우주는 결코 그렇게 새롭거나 신선하거나 대단한 의미가 있는 곳은 아니다. 은하 제국과 그에 대항하는 저항군이라는 설정은 펄프 작가들이 몇십년 동안이나 써먹었던 아이디어다. SF와 구닥다리 판타지의 결합 역시 특별히 신기한 게 아니고. 조셉 캠벨 주니어 이야기는 꺼내지도 마시길. 요새 SF나 판타지를 쓰려는 작가들 중 조셉 캠벨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을 안 읽은 사람이 어디 있나? 이것들은 모두 루카스가 엄청나게 잘한 일이 아니다. 그는 그냥 조심성 있는 풋내기 작가들이 대부분 그러는 것처럼 모범적으로 굴었을 뿐이다. <스타워즈>에서 루카스의 공헌은 뻔한 스페이스 오페라의 세계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그 세계를 영상 매체를 통해 기가 막히게 구현했다는 데에 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는 동안 루카스는 모두가 아는 그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언젠가부터 그는 자신의 우주가 포스트 모던한 잡탕찌개가 아닌 독자적인 깊이와 철학을 갖춘 무언가 대단한 곳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기가 만든 캐릭터들도 과대평가했다. 물론 나도 오리지널 시리즈의 다스 베이더를 좋아한다. 그는 멋있는 악당이고 목소리도 근사하며 뒤집어쓴 검은 가면도 죽인다. 돈만 충분히 있다면 나도 성게군처럼 다스 베이더 목소리 변조 가면을 사서 쓰고 놀고 싶다. 하지만 루카스는 왜 다스 베이더가 그렇게 인기있는 인물인지 까먹고 있었다. 다스 베이더의 매력은 루카스가 ‘정교하게’ 묘사한 캐릭터에 있는 게 아니라 설정과 폼과 미스터리에 있다. 관객은 오비완 케노비와 아나킨 스카이워커의 마지막 결투에 대해 피상적인 호기심을 품고 있긴 했지만 다스 베이더의 캐릭터 자체에 대해서는 별 생각도, 관심도 없었다. 결정적으로 그는 자신의 작가적 능력을 과대평가했다. 아마 그는 오리지널 시리즈에서도 잘했으니 이번에도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프리퀄의 세계와 오리지널 시리즈의 세계는 전혀 다르다. 오리지널 시리즈의 각본을 쓸 때, 루카스는 자신의 능력의 범위를 넘지 않았다. 오리지널 삼부작의 플롯과 갈등, 인물들은 단순했으며 종종 이야기가 어두운 쪽으로 빠지긴 했어도 바보스러운 만화적 유머를 잃은 적이 없었다. <스타워즈>는 기본적으로 어린아이도 즐길 수 있는 단순하고 소박한 이야기였다. 딱하게도 프리퀄에선 모든 게 그의 능력 밖이었다. 이 이야기는 고도로 복잡한 플롯과 그에 어울리는 복잡한 인물과 갈등들, 깊이있는 정치철학, 결정적으로 그들을 표현할 수 있는 세련된 대사가 필요했다. 한마디로 오리지널 시리즈가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들이다. 루카스가 제정신이었다면 그는 이 삼부작을 직접 쓰는 일 따위는 하지도 않았다. 그게 또 논리적으로 이치에 맞는 일이기도 하다. 그는 비전이 있는 프로듀서이며 기획자이며 리더이다.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더 능력있고 테크닉도 뛰어난 사람들을 고용해 부려먹는 게 그가 가장 잘하는 일이다. 슬프게도 루카스는 자기 발로 함정에 들어갔다. 왜 이렇게 똑똑한 사람이 그런 잘못을 저질렀느냐고 묻는다면, 이미 난 위에 답변을 했다. 이 장르에서 인기있는 시리즈의 발명가이면서 창조주 콤플렉스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으려면 그냥 똑똑한 것만 가지곤 어림없다. 아니, 이 함정 자체가 똑똑한 사람들만 골라서 빠트리게 디자인되어 있다. 처음부터 성공적인 SF/판타지 시리즈라는 것 자체가 그런 악순환의 함정을 품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처음부터 없었던 걸까? 아마 루카스가 다른 작가들과 감독들을 기용했다고 해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여전히 루카스의 ‘비전’은 남아 있었을 것이고 작가들 역시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을 테니까. 증거도 있다. <스타워즈 에피소드2: 클론의 습격>과 <시스의 복수>를 연결하는 겐디 타르타코프스키의 애니메이션 시리즈 <클론 워즈>를 보라. 여전히 타르타코프스키의 번뜩이는 스타일이 돋보이는 작품이긴 하지만 그 역시 루카스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있지 못하다. 그나마 해답 비슷한 건 경쟁 시리즈인 <스타트렉>에 있는 것 같다. <스타트렉>의 우주가 여러 편의 스핀 오프 시리즈를 내며 수십년간 수준저하 없이, 아니 상당한 수준의 질적 성장을 이룩하기까지 하며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그 세계의 창조주인 진 로젠버리한테서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팬들은 잘 이야기하지 않는 비밀이지만, <스타트렉: 넥스트 제너레이션>에서 로젠버리의 영향력은 미미하다. <스타트렉: 넥스트 제너레이션> 이후의 우주를 구축한 사람들은 로젠버리가 아니라 릭 버먼이나 브래넌 브래가 같은 그의 후배들이다. <스타트렉> 우주가 절정을 구가할 때 로젠버리는 살아 있지도 않았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로젠버리가 <스타트렉: 넥스트 제너레이션>을 위해 낸 아이디어 대부분은 받아들여지지도 않았다. <스타워즈> 우주가 앞으로도 가치있는 상상력의 공간으로 살아남길 바란다고? 해답은 하나다. 루카스가 포기하거나 죽을 때까지 기다리라. 하지만 그건 앞으로 한동안 어림없는 일이니 한 가지 대안을 내놓겠다. <스타워즈> 우주를 무대로 하되, 스카이워커 가족에서 될 수 있는 한 멀리 떨어진 변두리를 배경으로 독자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낸 뒤, 루카스에게 가져가는 것이다. 이야기가 충분히 좋다면 아마 루카스도 여기엔 큰 간섭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 정도로 그의 비전이 상처받는 일은 없을 테니.

[팝콘&콜라] 영화판의 소리없는 실력자 이동통신사 입김에 극장 ‘들썩’

영화 관람료는 보통 7천원이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새 이동통신사 카드로 할인을 받아 5천원에 영화를 보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 영화인회의의 최근 조사 결과를 보면, 에스케이(SK)텔레콤 카드와 케이티에프(KTF) 카드로 할인을 받은 관객들이 각각 26.5%와 10%를 차지했다. 둘을 합치면, 3명 가운데 1명이 할인된 값으로 영화를 봤다는 얘기다. 그런데 에스케이텔레콤이 7월부터 일부 극장에 대한 할인제도를 폐지하겠다고 밝히면서 극장가에 비상이 걸렸다. 에스케이텔레콤 홈페이지를 보면, 7월부터 메가박스와 프리머스 극장체인에 대한 할인서비스를 중지한다고 나와 있다. 한정된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내기 위해 할인 서비스 제휴업체를 조정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경우 상당수 관객들이 할인제도가 계속 유지되는 시지브이(CGV)와 롯데시네마로 몰릴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아도 지난해 말을 기준으로 각각 23%와 11%로 관객점유율 1·2위를 차지한 이들 극장 체인의 독주가 더욱 심화될 듯하다. 관객들 입장에서야 어느 극장에서든 간에 할인된 값으로 영화를 볼 수 있으면 된다. 그러나 문제는 이동통신사의 입김이 극장가의 판도를 뒤흔들고, 이는 결국 전체 영화계 판도의 흔들림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식으로 일부 극장 체인에게 힘이 집중될 경우 영화 컨텐츠를 만들고 공급하는 쪽에 대해 우월적인 지위를 갖게 되고, 이 때문에 전체 영화 산업의 공정성과 안정성이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외국영화에 비해 제작사에게 불리하게 돼있는 한국영화 부율(관람료를 투자·배급·제작사와 극장이 나눠갖는 비율)을 조정하는 문제 또한 일부 힘있는 극장 쪽에 휘둘릴 가능성도 높다. 이동통신사 카드 할인제도에 대한 극장 당사자들의 불만도 높다. 처음에는 이동통신사가 할인에 따른 손실 전액을 부담했지만, 할인 관객이 늘어나면서 점차 극장 쪽에 부담을 떠넘기기 시작해, 지금은 절반 가까이를 극장이 부담하도록 하고 있다. 극장 쪽에선 받아들이자니 부담스럽고 포기하자니 관객이 줄 것 같은 할인 제도가 ‘계륵’처럼 여겨질 만도 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극장이고 제작자고 할 것 없이 영화계 전체에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나오고 있다. 영화인회의, 극장협회, 제작자협회 등은 조만간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할 예정이다. 사실 이동통신사 입장에선 고객들에게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뭐가 잘못이냐고 항변할 수 있다. 물론 소비자 입장에서도 할인제도는 반길 일이다. 하지만 이동통신사 스스로 보유하고 있는 고객 수의 힘을 이용해 다른 업계의 지형도까지 좌지우지하는 상황은 그리 반길 일만은 아니다. 해당 업계가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응하는 할인제도보다는 차라리 그 비용으로 휴대전화 요금을 깎아주는 걸 고객은 더 바라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