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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회 베를린 영화제

◆베를린영화제 2월7일 개막, 개막작 <문 앞의 적> 체념한 염세주의자의 눈동자 같은 회색 하늘과 그로부터 묵묵히 땅을 향해 수직을 긋는 빗줄기. 무뚝뚝한 바람을 베어낼 듯 모서리를 살벌하게 벼른 마천루와 사방 공사장에서 날아든 흙모래로 혼미한 그 발치의 보도블록. 베를리날레 팔라스트로 향하는 포츠담 광장 역에서 둘러보는 베를린 신도심의 풍경은 하릴없이 거대한 세트의 그것이다. 한편의 영화가 남긴 자취를 거둬내고 다른 영화를 찍기 위한 망치질 소리가 을씨년스러운. 하긴, 굳이 반세기 모퉁이를 돌아서가 아니더라도 22년간 영화제를 꾸려온 집행위원장 모리츠 데 하델른을 올해로 떠나보내는 베를린영화제로서는 이번 51회 행사는 정말 새로운 ‘필름’을 준비해야 하는 순간이다. 출품작 600여편, 라틴과 일본영화 강세 옛 포츠담 거리를 따라 포럼, 파노라마, 특별전 부문 상영관으로 쓰이는 시네맥스 극장을 지나면 무엇인가 간절히 갖고 싶어하는 듯 앞발을 치켜든 노란 곰의 깃발이 펄럭이는 마를레네 디트리히 광장. 지난해 전통의 초 팔라스트를 떠나 새 보금자리를 튼 베를린영화제는 2월7일 저녁 7시 이곳에서 포츠담 광장 시대 두 번째 페스티벌의 묵직한 커튼을 걷었다. 호스트로서 마지막 임무를 수행하는 데 하델른 집행위원장은 협찬사 메르세데스 벤츠의 리무진을 타고 속속 도착한 개막작 <문 앞의 적> 팀과 아르민 뮐러슈탈, 마리아 슈라더, 재클린 비셋 등 영화인과 정계 인사 등을 문간에서 일일이 악수와 포옹으로 맞았다. 황금곰상 수상자 로만 폴란스키를 제외하면 눈이 번쩍 뜨이는 게스트는 거의 없어 할리우드 배우조합 파업으로 스타들이 스케줄에 박차를 가해 베를린영화제 초청 전선에 먹구름이 끼고 있다는 소문에 믿음을 더했다. 휴대폰으로 주드 로의 일거수 일투족을 친구에게 중계하는 10대 소녀부터 휠체어를 탄 노인까지 모여 든 시민들은 비교적 점잖게 손님들을 환대했다. 이어진 개막식에서 감기로 불참한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를 대신해 참석한 줄리안 니다-뤼벨린 연방 문화 미디어 장관과 에버하르트 디프겐 베를린 시장은 나란히 베를린을 세계적 영화도시로 만든 데 하델른 집행위원장을 치하하기에 바빴다. 올해의 600여 출품작 중 3500여 기자단의 ‘스토킹’ 속에 귀족 대우를 받을 장편 경쟁작은 모두 스물세편. 영국 및 아일랜드 국적 영화가 네 자리를 차지했고 근래 베를린이 소홀했던 이탈리아, 스페인, 아르헨티나 등 라틴계영화와 일본영화를 각별히 챙겼다. 칸과 베니스의 자국 중심주의와 차별화된 성숙함을 보이려는 제스처인지 독일영화는 다문화 정체성을 다룬 그리스 합작 저예산영화 <마이 스위트 홈> 단 한편이 선정됐다. 대신 할리우드에 맞장을 뜨는 독일의 저력을 과시하는 사명은 9500만달러라는 유럽 영화사상 최대 제작비가 든 독일 국적의 개막작 <문 앞의 적>의 몫으로 돌아갔고, 사이드 섹션에도 50여편의 풍성한 독일영화 프로그램이 배치됐다. 스티븐 소더버그, 거스 반 산트, 스파이크 리 등 미국 인디 신 출신 감독의 영화로 미국 경쟁작 엔트리를 채움으로써 생긴 할리우드에 대한 허기는 비경쟁 특별 상영작인 <한니발> <퀼즈> 이 보충한다. 1961년 은곰상을 수상한 <마부>와 <땡볕>(1985), <길소뜸>(1986), <화엄경>(1994), <태백산맥>(1995),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6)에 이어 장편 경쟁작으로 선정된 한국의 <공동경비구역 JSA>는 박찬욱 감독과 다섯명의 주연배우가 자리한 가운데 12일 기자회견과 베를리날레 팔라스트 공식 시사를 갖는다. 이들에게 트로피를 배분할 경쟁부문 심사위원장은 할리우드 스튜디오 사장 출신으로서는 전례없이 국제영화제 심사위원단을 이끌게 된 20세기폭스 전 사장 빌 메카닉. 폭스 재직시 <타이타닉>부터 <소년은 울지 않는다>까지 다양한 규모의 영화를 성공시키고 현재 팬데모니움이라는 독립제작 배급사 설립을 추진중인 메카닉은 공식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돈을 버는 흥미로운 영화”가 만들고 싶은 영화임을 밝혔으며 “블록버스터와 ‘부티크’ 영화를 분리시켜 생각지 않는” 자신의 판단기준이 베를린영화제 인선의 원인이었으리라고 짐작했다. <...JSA>는 장편 경쟁작,<눈물><반칙왕>도 소개 경쟁부문 외곽에서 그해 유럽의 아트하우스 극장에 상영될 영화를 발굴하는 노릇을 하는 파노라마 부문은 올해 42개국의 작품을 소개한다. 우리 영화로는 임상수 감독의 <눈물>이 파노라마 부문에서 상영 뒤 관객, 기자와 대화하는 시간을 가질 예정. 김지운 감독의 <반칙왕>도 포럼 부문에서 소개된다. 이 밖에 올 베를린영화제에서는 영화사상 두명의 악명높은 완벽주의자를 회고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메트로폴리스> 복원판을 비롯해 독일영화 아카이브에 남아 있는 모든 영화를 상영하는 프리츠 랑 회고전과 스탠리 큐브릭의 인간적 면모를 기록한 다큐멘터리 <스탠리 큐브릭- 영화 속의 삶>(톰 크루즈 내레이션) 공개가 그것. 특히 <스탠리 큐브릭- 영화 속의 삶>은 베를린영화제 주상영관에서 최초로 상영되는 비디오 작품으로 기록되면서 디지털영화 시대 국제영화제의 변화된 미래상을 짐작케 하는 하나의 신호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 큐브릭은 공교롭게도 이번 영화제에서 열리는 커크 더글러스 오마주전에도 <영광의 길> <스파르타커스> 등의 연출작을 포함시키고 있어 마를레네 디트리히 광장에는 영화제 내내 그의 그림자가 어른거릴 전망이다. 영화제가 3일째로 접어들면서 베를리날레 팔라스트 프레스 구역은 미비한 시설에 대한 기자들의 불평, 소더버그의 <트래픽>에 대한 호평 그리고 담배연기로 점점 더 자욱해지고 있다. 분주한 것은 일반 관객도 마찬가지. 사흘 전 예매만 가능한 상영장 옆 쇼핑몰 아르카덴에 설치된 일반 매표소에는 <문 앞의 적> <트래픽> <초콜릿>을 필두로 회고전의 <닥터 마부제>, 베를린의 역사를 짚은 파노라마 상영작 <베를린 바빌론> 등의 매진을 알리는 가위표가 차곡차곡 늘어나고 있다. 매표 게시판 앞에서 만난 20대 청년 시미온은 “경쟁부문 영화는 어쨌거나 몇달 뒤면 개봉을 하니까 사실 카펫 밟는 행사 이상의 의미는 없다. 파노라마가 잘 보면 보물창고다”라면서도 <초콜릿>과 <클레임>의 표를 구한 것이 꽤 즐거운 눈치다. 기대가 이루어지는 기쁨과 황당한 실망을 맛보는 재미, 복병에 습격을 받는 스릴. 생각해보면 축제란 원래 그런 것이었다. 앞으로 열흘간 이 광장에서도 누군가는 영화예술의 죽음을 개탄할 것이고 누군가는 어느 날 밤 문득 ‘내 인생의 영화’를 만날 것이다. 베를린=김혜리 기자 vermeer@hani.co.kr ◆경쟁부문 출품작 <베이징 자전거> (Beijing Bicycle)(중국, 왕샤오슈아이) <베틀넛 뷰티> (Betelnut Beauty)(대만/중국, 린쳉셍) <공동경비구역 JSA> (Joint Security Area)(한국, 박찬욱) <클로에> (Chloe)(일본, 리주 고) <이누가미> (Inugami)(일본, 하라다 마사토) <늪> (La Cienaga)(아르헨티나, 루크레시아 마르텔) <리틀 세네갈> (Little Senegal)(알제리/세네갈, 라키드 부카레프) <내 누이에게> (A Ma Soeur)(프랑스, 카트린 브레야) <펠릭스와 로라> (Felix et Lola)(프랑스, 파트리스 르콩트) <인티머시> (Intimacy)(프랑스, 파트리스 셰로) <무지한 요정> (Le Fate Ignoranti)(이탈리아, 페르잔 오즈페텍) <말레나> (Malena>)(이탈리아, 쥬세페 토르나토레) <초콜릿> (Chocolat)(영국, 라세 할스트롬) <클레임> (The Claim)(영국, 마이클 윈터보텀) <파나마의 재단사> (The Tailor of Panama)(영국, 존 부어맨) <위트> (Wit)(영국, 마이크 니콜스) <초급자를 위한 이태리어> (Italiensk for Begyndere)(덴마크, 론 셔피그) <바로 당신이야> (Una Historiade Entonces)(스페인, 호세 루이스 가르시) <바이저> (Weiser)(폴란드, 보이첵 마르체브스키) <마이 스위트 홈> (My Sweet Home)(독일/그리스, 필리포스 치토스) <뱀부즐드> (Bamboozled)(미국, 스파이크 리) <파인딩 포레스터> (Finding Forrester)(미국, 거스 반 산트) <트래픽> (Traffic)(미국, 스티븐 소더버그)

가족시네마 <고추말리기>

◆<고추 말리기> 주인공들이 말하는 ‘가족시네마’ 만들기 그리고 못다한 이야기 “너무 좋았지. 니 아빠는 영화 보면서 웃지 말라고 그러더만은, 할머니는 눈물이 절로 나왔지. 옛날에 살려면 다 그렇잖아. 그걸 똑같이 만들었으니까,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그러니까 나도 몰래 눈물이 줄줄…. 날더러 소감을 이야기하라고 그러는데, 내가 할말이 뭐가 있어. 여러분들 왔으니까 감사하다고 그러구, 아무것도 모르는 할머니를 이런 영광의 자리에 불러줘서 고맙다 그랬지 뭐.” “그럼, 할머니는 완전히 출세한 거여. 딸이 인제 출세해야지.” 세상에 누구나 ‘책 한권’ 쓸 수 있는 그런 이야기를 품은 사람 사이가 가족 말고 또 어디 있을까. 여군이 되고팠던 엄마, 시인이 되고팠던 할머니에게서 나고 자란 장희선(28) 감독은 스물여섯 ‘과년’한 나이에 술술 그 책 한권을 써내고야 말았다. 엄마와 딸이 있고,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있고, 그리고 손녀딸과 그녀를 엄마 대신 키워준 할머니가 있는 집. 어느 관계 하나 수월하지 않은 가족이야기를, 평소 뒹굴던 광명 ‘집구석’에서 장희선 감독이 엄마, 할머니와 함께 뒹굴거리며 영화로 찍은 건 ‘등잔 밑’을 밝히는, 매우 현명한 일이었다. 장희선 감독은 백일이 갓 되었을 때,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 맡겨져 대학 졸업할 무렵까지 할머니 손에 자랐다. 희선씨를 낳은 지 열달 만에 바로 동생이 태어났고, 식당을 하며 시할머니를 모시던 엄마는 희선씨까지 함께 기르기에는 힘이 벅찼기 때문이었다. 한 동네에 살면서 매일 보다시피 하긴 했지만, 다 자라 집에 들어와도 되었을 때도 장희선 감독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진 할머니네 있기를 고집했다고 한다. 가슴이 부풀기 시작하고 첫 생리를 맞을 때 곁에 있었던 할머니는 장희선 감독에겐 또다른 엄마나 마찬가지였나보다. 늦여름, 집안 가득했던 매운 고추내음 갓난아기 때 떠나 스물이 넘어 돌아온 엄마네 집. 어느 늦여름날 할머니는 아들네 집 한가득 매운 고추내를 풍기고 있었다. 홀로 고추를 널어 말리는 그 뒷모습이 눈에 밟혔을 때, 그때 장희선 감독은 20대의 한창나이였다. 잠자고 밥먹고 박차고 나가 넓은 세상 싸돌아다니기 바쁜, ‘미운’ 스물여섯 말이다. “전에는 할아버지랑 같이 하던 일인데….” 홀로 된 할머니가 그제서야 한명의 ‘여자’로 보이기 시작했다. 왠지 코끝이 싸해진 장희선씨는 영화‘한답시고’ 어울리던 친구들 열댓명을 집안으로 불러들여 범상치 않은 자신의 가족, 할머니와 어머니의 발가벗은 일상에 카메라를 들이댔다. 카메라는 꾹꾹 눌러놓았던 그들의 속내를 기민하게 담아냈다. 출연료를 지불하기는커녕, 스탭들 밥해먹이느라고 배우들을 ‘골병’들게 만들며 찍은 가히 ‘인류학적’인 영화 <고추말리기>는 그렇게 혈연관계를 십분 이용한 것이었다. 1999년 8월, 실한 고추들이 햇살을 받으며, 빗줄기를 피해가며 바짝 말라가는 동안에 촬영이 진행된 영화 <고추말리기>는 54분의 상영시간 동안 스물여섯 한 여자의 눅진한 가족사를 매운 손놀림으로 펼쳐놓는다. 영화 속, 살살 꼬셔가며 일광욕시켜서 낸 이 가족에게서 나는 단내는 가족과 부대껴본 이들이라면 누구나 아는 바로 그 ‘우리집 냄새’에 다름 아니다. “밥해준다고 죄 깍두기하고 김치하고 다 해놨는데, 밥들 자시고 왔어? 너도 먹었어?” “내가 그랬잖아, 영화만 뜨면 저 뒤에 가서 파티해 준다고. 아유, 손님들 먹으라고 한 건데 쟤가 다 먹네. 넌 그만 먹어.” 집안에 들어서니 자작자작 부침개 부치는 소리가 요란하다. 영화제작소 청년이 있는 서울 합정동에서 장희선 감독, 인츠닷컴 기획팀의 정유정씨와 합류한 <씨네21>팀이 막 경기도 광명시의 장 감독 집을 찾은 참이다. 그런데, 이 집은 영화에 나온 철산동의 그 아파트가 아니다. 영화를 찍은 직후 아파트를 팔고서 뒷동산이 있는, 고추말리기가 한결 수월할 듯한 하안동의 주택으로 이사를 했다고 장 감독이 설명을 한다. “금강산도 식후경인데 먹고들 하자구요.” 어머니(설정원·50)가 김치굴전과 딸기, 방울토마토를 한상 가득 차려낸다. “나는 우리 희선이가 살 빼서 시집가는 게 소원이야.” 바쁜 젓가락질 새로 예의 잔소리가 파닥파닥 튄다. 딱, 영화에서 보던 그대로다. 어쩜, 나랑 똑 같네 장희선 감독이 스물여섯에 찍은 16mm 중편 <고추말리기>는 이제야 개봉을 하지만 이미 국내외 영화제에서는 잘 알려진 작품이었다. 할머니, 엄마, 딸 세 여자의 사는 이야기를 사실적이고도 가슴 시리게 담아내 깊은 인상을 주었다. 여성영화제, 부산영화제, 한국독립단편영화제 등에서 상영, 여러 상을 받았고, 베를린 인터내셔널 포럼 NETPAC에서는 ‘특별언급’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집안에 있는 엄마, 할머니에게 그런 것들은 먼 일. 서울서 시사회가 열리고, 극장개봉을 하게 된 요즘에야 영화의 존재를 실감하게 된다. <고추말리기>를 찍은 게 햇수로 3년 전. 영화 만들 때만 해도 가족과 함께 살던 장희선 감독은 집을 나가 영화제작소 청년 사무실에서 기거하고 있고(가족의 증언에 따르면 한달에 한번 집에 올까말까 한다고), 건축자재 판매업을 하던 어머니는 아파트를 판 값으로 아버지와 함께 찜질방을 운영하고 있다. 할머니(최천수·75)만이 여전하다. “극장에만 걸리면 감독인가? 사람들이 많이 보러 와서 영화가 크게 돼야 감독이지.” 엄마는 아직 욕심이 많지만, 할머니에게는 가족 얘기를 영화로 찍은 손녀딸이 그저 고마울 뿐이다. “옛날에 우리 살 때 복잡했잖아. 희선아, 할머니는 공부를 많이 했으면 시를 한편 썼으면 좋겠다, 내가 그랬다구. 근데 얘가 원풀이를 해줬잖아. 영화가 얼마나 가정영화야? 내 그걸 보구서 감동했다구, 진짜.” 맘에 쏙 드는 ‘가정영화’를 찍어준 손녀딸 등허리를 어루만지던 할머니는 ‘이주의 개봉작’에 <고추말리기>가 난 <씨네21>을 보고는 감회가 또 새로운가보다.(옥상에서 고추 말리는 자신의 사진을 가리키며) “어쩜, 나랑 똑같네.” 깔깔깔 웃으며 손녀딸이 맞장구친다. “똑같은 게 아니고 할머니 사진이잖아.” “다리 한짝 뻗고 있는 이 사진을 썼대, 왜….” 어머니도 그참에 한마디. “맞아, 포스터도 야. 왜 허구 많은 사진 놨두고 머리도 대충대충 올리고 찍은 그 사진을 썼다니?” 가족 사이에 이야기꽃이 피고, 살다보니 이제 한참 돼버린, 영화찍던 ‘그때’로 눈길이 거슬러간다. 벌써 상 위의 딸기는 몸뚱이보다 꼭지가 많다. “나는, 그게 이렇게 극장에 걸리게 될 줄은 몰랐지. 얘가 용인대학교 대학원 다닐 때, 장난으로 그냥 하는 작품인 줄 알고, 딸이 영상학과니까 거기에 필요한 거 뭐 하나보다 하고 찍어준 거라구. 진짜 영화를 찍는다구 하구 마음을 먹고 했으면 아마 조금 더 잘했을 거야. 말이 그렇지 허구한날 열댓명이 들끓고 들락날락하고 해먹이고, 열두시, 한시, 두시까지 하고 그러니까는, 눈곱만 떼고 찍은 거야, 그게 다. 밥하다 연기하고, 연기하다 밥하구. 해서 짊어지고 관악산엘 가질 않나. 스탭들도 집에 안 갔어. 먹고 자구 먹고 자구. 무슨 장면에선가 화장한 게 겨우 처음 나오더라구.” 집에서 가족과 함께 영화를 찍는 일은, 게다가 가족 그 자신에 대한 영화를 찍는 일은 비단 스탭 밥 해먹이는 일이 아니더라도 무지하게 많은 에너지가 드는 일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세월 속에 쌓여온 많은 이야기, 풀지 못한 지난한 감정들, 그것을 가두며, 또 때로는 그것에도 불구하고 가족을 지키는 굳건한 일상들…. 그 모든 것에 상처를 내지 않으며 그 모든 것을 끄집어내는 ‘가족시네마’ 만들기. “나는 엄마가 밉다. 그런데 가끔 불쌍하다. 나는 할머니가 좋다. 그런데 가끔 짜증난다.” 장희선 감독이 <고추말리기>를 구상한 이유에 대해 “가족 내에서 가장 이중적이고 힘든 할머니와 엄마의 관계”, 그 복잡함을 든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너무도 많은 사랑을 주셨지만, 할머니는 계속 엄마의 성격이나 행동에 대한 험담을 하셨고, 내가 잘못하면 “엄마 딸 아니랄까봐. 어떻게 니 엄마랑 똑같니?”라고 꾸짖으셨다. 그렇게 자라서 그런지 엄마의 성격이 싫었다. 엄마와 닮은 나의 성격이 싫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 아빠와 함께 살게 되면서 생기는 스트레스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엄마와는 이야기를 나눌 만큼 친밀하지도 않았고, 엄마는 만날 때마다 살빼라는 구박만 했다. 그런데 가끔씩 만나게 되는 한 중년 여자로서의 엄마의 모습, 힘든 일이 있어도 남들처럼 이야기 상대가 되지 못하는 딸인 것이 미안했다.-프로덕션 노트 중에서 조각난 가족사를 엮는 세가지 방식 처음엔 할머니 입장에서 생각하는 편이었던 장감독은 영화를 다 찍어가면서 점점 엄마를 이해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고 한다. 엄마 자신은 “영화 하기 전하고 나중하고 변한 거 하나 없어”, 하지만, 이 가족에게 <고추말리기> 작업은 쌓여왔던 무엇인가가 터져나오는 큰 의식이었음에 분명하다. ‘시집살이’에 대해 할머니와 엄마가 각각 ‘엇갈린 증언’을 하는 장면에서 보이던 긴장은 다시 일상 속으로 꼭 묻혀 버렸지만, 이제 이들은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말을 차마 못 하는지, 알고 또 모른 척하고 있었다. 극영화, 인터뷰, 메이킹 필름. 세 가지 다른 양식으로 찍은 부분들이 퀼트 조각을 잇듯 조합돼 있는 <고추말리기>의 구성방식은 이런 ‘복잡한’ 이야기들을 효과적으로 풀어내기 위해 장감독이 생각해낸 것이다. 극영화 부분에서 장감독은 화면 안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 뮤지컬 배우 박준면씨가 ‘희선’ 역을 맡았다. 영화에는 장감독이 직접 이 배우를 캐스팅하는 장면도 삽입돼 있다. 그럼으로써 영화는 ‘희선’ 역만은 실제 인물이 연기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인터뷰 부분은 극영화 연출을 하는 장감독이 직접 촬영하기 어려워 단편작업을 하던 이혁래씨에게 촬영을 맡겼다. 이 역시 엄마와 할머니가 인터뷰어에게 존대를 쓰는 말투로 짐작이 된다. 뒷부분에서 장희선 감독은 직접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세 부분의 촬영은 모두 적나라하게 일상의 풍경이 드러난 집안팎에서 진행됐다. 식구들은 침대에 누워있거나, 옥상에서 고추를 널고 있거나, 추석날 전을 부치고 있거나 하며, 한 집 안에 있어도 각자의 공간을 가지고 각자의 목소리를 낸다. “아이구, 이게 영화야? 좀 멋있는 이야기를 찍어라” 등등 카메라 뒤에서나 할 얘기들 역시 메이킹 필름이 고스란히 담아냈다. 인터뷰 부분 중, “엄마, 내가 보고 싶지 않았어?” “아니, 안 보고 싶었어” 하는, 장 감독이 엄마를 직접 인터뷰한, <고추말리기>에서 가장 찡한 장면이기도 한 이 장면은 아, 이 영화가 이 순간을 위해 달려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때로는 코믹하게, 때로는 평범하게 흐르던 영화가 잡아낸 클라이맥스다. “그때 얼마나 복잡했니. 엄마가 카메라 안 찍을 때 그때 다 얘기해줄게.” 힘겹게 마무리된 인터뷰의 뒷얘기가 불쑥 궁금해졌다. “아, 그거? 뭐… 영화니까 그렇게 얘기한 거지. 하긴 뭘 해…. (웃음) 이 다음에 이 영화가 성공해 갖구 본작, 진짜 대작할 때 다 해줄 거야. 그땐 아예 시나리오부터 내가 맡지 뭐, 조감독을 할까?” 몇년이 지나도 힘든 얘기는 여전히 힘든 법인가보다. 장 감독과 엄마 사이에 못다한 얘기는 아직 많고, 나중에 얘기해주겠다던 그 ‘나중’은 아직 오지 않은 듯했다. 할머니 역시 “사람 산 얘기를 어떻게 다 하냐”며 영화에서 못다한 얘기가 많다고 했다.“할머니도요, 친척집에서 살았어요.” 스치듯 던지는 장희선 감독의 말이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경우야 많이 다르지만, 장 감독의 할머니 역시 친부모의 손에 자라질 못했다 한다.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엄마가 재가한 뒤 친척집에서 살았던 할머니는 그 몇십년 동안 재가한 엄마를 용서하지 못해 한번도 만나지 않고 지냈다. “더 많이 알았으면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저도 영화하면서, 그리고 이렇게 인터뷰하면서 많은 것들을 새로 알게 됐어요.” 가족의 일원이지만, 장희선 감독은 조금은 심리적인 거리를 두고 가족영화 만들기며 인터뷰까지, 모든 상황을 조감하는 눈치였다. “아이구 할 얘기가 이렇게 많으니 시리즈를 만들어야겠네”, 그런 장감독 옆에서 엄마와 할머니가 다시 연기 이야기를 펼친다. “그거 시나리오 보고 한 거 아니야. 대충대충 했어. 힘들어 죽겠는데, 제발 좀 빨리 하구 갔으면 좋겠는데, 그러구 그냥 즉석에서 한 거야. 애드립이야. 나는 애드립으로 하고, 할머니는 외워갖고 하고. 할머니는 노력파, 나는 연기파.” “나는 희선 엄마 영화하는데, 영화를 보고 나서 뭐에 감동했냐면, 희선 엄마가 그 옛날에 할아버지 바람난 얘기를 하거든, 나는 간혹 가다 생각하곤 했는데, 그게 아주 잘 들어갔더라구. 자식이나 어머니나, 다 연기자 해도 되겠다, 그 생각을 했어.” “할머니는 앞으로 계속하시죠, 뭐.” “나? 나는 하라면 잘하것지.” “아이, 내가 감독이 딸이니까 그렇게 자연스럽게 된 거지, 남이 했으면….” “그럴까? 내 생각에 영화는 괜찮은 것 같은데, 젊은 사람들이 많이 좀 볼까? 보면 배울 것도 많은 것 같은데. 이 할머니는, 영화 보니깐 살아가는 게, 그게 가슴에 와닿더라구.” 가슴에 와닿는 살아가는 이야기… 무슨 이야기가 가슴에 저렸는지, 언제부턴가 자리를 종종 뜨던 어머니는 어느새 마루 가득 앨범을 모아놓고 있었다. 아픈 얘길랑은 관두고 사진 보며 ‘옛날 얘기’나 하자는 듯, 음식상이 비워진 자리에 이제 ‘2부’ 순서로 ‘사진 파티’가 차려지고 있었다. <고추말리기>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한 아버지도 어느새 집에 와 창고에서 앨범 꺼내는 일을 전담하고 있었다. “그전에 가난하게 살았으니깐, 우리 손주딸은 잘생기고, 돈 많고, 그런 사람 만나 시집갔으면, 그런 생각을 했지. 근데 이렇게 감독을 한다니깐, 감독이 됐으니까 인제….” “영화가 성공을 해야 감독이 되지, 아직은 뭐.” “아직 안 됐어, 그럼?” “개봉하는데 이제 손님이 많아야 성공한 거지. 마지막 한 단계가 남았다고 생각해야지. 정지우 감독, 그 사람도 청년에서 한 거잖아. 근데 됐잖아, <해피엔드> 그걸로. 우리 희선이도 여성계에서 한명 돼야지, 이제. 걱정이다, 떠야 할 텐데. 극장이 미어지고 그래야지. 그래서 독립영화도, 단편영화도, 그리고 여자도 된다고, 그래서 여자세상이 와야 하는데.” 가족,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얘기가 이쯤 되니 동석한 인츠닷컴의 관계자가 귓속말로 불안을 토로한다. “실망하시면 어떡해요, 저희는 그게 제일 걱정이에요.” <고추말리기>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대학로에서 매춘하다가 토막살해당한 여고생 아직 대학로에 있다>에 이어 ‘인츠 인큐베이팅 무비 3호’로 선정된 덕에 독립영화로서는 흔치 않게 개봉관에 걸리게 됐다. 독립영화일 뿐더러 할머니말대로 ‘가정영화’인 <고추말리기>를 극장에 거는 것에 대해 장감독은 수월하지만은 않은 심경이다. “운전 조심해라”, 신신당부를 뒤로 하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 장희선 감독의 차엔 ‘초보운전’이라는 쪽지가 차 뒤 유리창에서도 꼭 제일 안 보이는 자리에 쑥스럽다는 듯 붙여져 있다. 힘들게 관계맺으며 살아온 "할머니와 엄마와 나", 그 이야기를 역시 힘들게 노출시켜 이제 많은 이들에게 보이려는 장희선 감독. 대학원 졸업작품으로 요즘 ‘노망든 할머니’에 대한 영화를 생각 중인 그에게는 아직도 가족에 관해 하고픈, 그리고 듣고픈 진실이 많은 듯했다. 최수임 기자 sooeem@hani.co.kr

클레르몽 페랑에서 만난 한국영화

올해의 여러 회고전 가운데 국가별 행사는 스페인(16편)과 한국(22편)전 두 가지였는데, 관심의 초점은 한국이었다. 1992년 유럽에서 최초로 열렸던 페사로영화제의 장편 회고전에 비할 수 있는 단편영화사의 획기적인 사건으로 봐도 틀린 말은 아니다. 이번 행사를 준비한 로페와 고낭에게 회고전을 열게 된 동기를 물어봤다. “클레르몽 페랑 영화제에 소개된 한국 작품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최근 수상까지 할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지난해에 한국에 들렀을 때 한국영화의 넘쳐나는 에너지와 자국의 영화를 지키려는 영화인들의 굳은 의지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스크린쿼터 문제만 해도 프랑스에선 텔레비전 쿼터에 그치지만 문제를 바라보는 데 두 나라 사이에는 공통점이 많다고 생각했다. 단편영화가 1년에 400편씩 나온다는 데도 놀랐다.” 이번 회고전이 크게 성사된 데는 진흥위원회의 지원이 큰 도움이 됐다. 유길촌 진흥위원장은 20여명의 젊은 감독들 그리고 영진위 국제부의 직원 두명을 데리고 현지를 방문하여 영접에서 외교 문제까지 열심히 뒷바라지를 해줬고, 그 결과 영화제 참가자들과의 대화가 만족할 만큼 잘 이뤄졌다. 아무튼 감독, 배우, 제작자, 배급자 등 50명에 가까운 단편영화인들이 클레르몽 페랑에 갑자기 한국 바람을 일으켰다. 한 가지 아쉬웠던 건 한국영화의 토론장에 초대된 발제자의 준비가 미비해 기대했던 만큼의 효과를 보지 못한 점이다. 한편 한국에서 처음으로 심사위원으로 참가한 황규덕 감독은 “요즘 이곳 술집이나 식당에 들르면 사람들이 한국영화에 대해 말하는 걸 자주 듣게 된다. 한국영화에 대한 열기를 피부로 느낀다. 한국영화는 이제 국제무대에 오를 준비가 돼 있는 듯하다”고 말했다. 영화진흥위원회 부설 영화아카데미 교수이기도 한 황 감독은 “이번 영진위의 도움은 단편영화의 국제진출 차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고 자평 아닌 자평을 더하기도 했다. 그의 눈에 비친 클레르몽페랑은 어땠을까. “이곳 관객의 열성은 부산영화제와 비슷하다. 그러나 유치원생에서 노인에 이르는 여러 세대가 어울리는 진풍경은 부산에 없다. 그게 너무 부럽다.”

김홍준·정성일의 종횡4담 [4] - 21세기 영화

21세기 영화, 디지털 종교에 투항하다 디지털 신화가 목청 높이 외쳐지고 있다. 무엇보다 할리우드가 디지털의 가능성을 점점 현실화하고 있다. 몇몇 진지한 시네아스트들도 디지털에서 영화의 미래를 보고 있다. 인터넷 비지니스라면 남부럽지 않은 한국에선 디지털이 거의 종교적 신뢰를 얻고 있다. 과연 디지털은 셀룰로이드를 대체할 것인가. 대체한다면, 그 이후의 영화도 우리가 영화라고 알고 있는 것과 동질의 것일 수 있을까. 김 | 산업적 측면에서 디지털의 효용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매체 민주화다. 극장용 영화 못지않은 화질의 영화를 디지털로 찍는다는 건 기술적으로 산업적으로 가능한 일이다. 감독이란 정체성을 가지고 볼 때 나는 배급에서 산업적 통제가 여전하리라고 본다. 유통방식의 외양만 바뀌는 것일 뿐이며 디지털이 만인이 영화를 찍고 만인이 즐기는 시대를 가져오리라는 기대는 섣부르다. 세번의 새 테크놀로지가 등장한 경험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8mm가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나도 영화를 찍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흥분했다. 그러나 기술적 한계도 있었지만 대안적 배급망을 만들어 더 많은 이들을 만나는 데 실패했다. 개인적으로도 군부독재 시대에 과외가 금지되는 바람에, 8mm로 영화를 만들겠다는 계획이 무산돼 얄라셩에 들어가 공공자금으로 만들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가 캠코더의 등장이다. 8mm영화의 배급 한계를 해결할 매체가 나왔다고, 또 흥분했고, 노동자뉴스단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지만, 틈새에 불과했다. 복사가 용이하고 대량 배포가 가능해졌지만, 일반인들이 미학적으로 산업적인 대안을 만들어가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디지털이 등장했다. 매체 민주화에 대한 희망은 이전과 똑같다. 망령처럼. 그리고 이번엔 설득력도 있다. 디지털로 8mm의 단점을 비디오가 해결했고, 그것이 다시 업그레이드된 데다가 인터넷과 결합했다. 그러나 매체 민주화를 이루는 데 있어 테크놀로지가 필요조건은 될 수 있어도 충분 조건은 될 수 없다. 면밀한 전략없는 막연한 기대인 것이다. 구조적인 무브먼트로 사회적으로 받쳐줄 때 매체 민주화에도 기여할 수 있다. 정 |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공존하게 된다는 뜻인가. 아니면 테크놀로지의 진화 발전 과정에서, 상업적인 영화와 홈무비와 아트하우스가 분류될 전망이라는 뜻인가. 김 | 상업적 스크리닝 포맷은 달라질 거다. 필름 영사기의 수명이 다하기 전에 경제적이고 기술적으로도 우월한 디지털 영사가 그 자리를 대체할 것이다. 더이상 프린트로 배급하지 않게 될 때, 디지털화되지 않은 영화는 필름 아카이브에서나 볼 수 있겠지. 프로덕션도 대체하게 될 테지만 카메라의 대체는 별 의미가 없다. 조명과 달리와 크레인과 사운드 레코딩은 여전히 필요할 것이고, 큰 변화는 없으리라고 본다. 또 인터넷이든 뭐든, 배급망에서 상업적 네트워크를 거치지 않고 생산자와 소비자, 창작자와 관객이 직접 소통하는 게 가능해질 거다. B양과 O양의 예가, 왜곡된 방식으로 이런 가능성을 미리 보여줬다. 무명의 고등학생이 만든 영화가 수익을 만들어낼 수도 있을 거고, 영화제에서 평이 좋은 영화가 있었다면, 관객이 인터넷을 통해 전자상거래 방식으로 DVD든 뭐든 사들일 수 있을 거다. 10년 뒤면 그런 세상이 올 거다. 물론 영화가 만들어지고 영화제에 간다는 전제하의 얘기지만. 그러나 매체의 유토피아는 오지 않을 것 같다. 개인의 예술이 대중과 만날 수 있으려면, 일정 정도의 예산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산업을 거치지 않고 관객과 직접 만날 수 있겠는지, 회의가 든다. 테크놀로지에 집착하는 건 바보짓이다. 선택할 문제이지, 고민할 문제는 아니다. 정 | 난 내가 영화의 죽음을 목격하는 세대가 아닐까 싶다. 영화가 가장 짧은 생명력을 가진 예술이 되지 않을까. 르네상스 시대에 회화가 가진 위치를 생각해 보면 아날로그영화가 프레스코화처럼 되지 않을까 싶다. 캔버스가 등장하고 이동이 가능해졌다는 건, 회화가 자유로워졌다는 얘기인 동시에 회화의 죽음이 왔다는 얘기다. 미술관으로 가고 박물관으로 가고, 프레스코엔 소수의 감상자만 남았다. 캔버스의 등장이 디지털의 등장과 같은 결과를 초래하진 않을까. 그 순간 미디어 민주주의는 이뤄지겠지만, 필름 민주주의는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필름이 미디어가 되면 더이상 영화가 아니다. 일기장이 소설이 아니고, 낙서가 그림이 아니듯, 디지털의 등장이 아날로그를 대체하진 못할 것이다. 그런 영화를 볼 수 있는 곳은 영화제뿐이겠지. 최근 할리우드영화는 내러티브가 죽고 이미지만 집적되고 있다. 게임과 채팅이 확산되면서 영화가 뮤직비디오가 돼가고 있다. 사람들 손에 쥐어진 디지털은 개인적 기억을 재현하는 수단이 되고, 그것이 인터넷으로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살아생전에 그런 변화를 목격할 것 같다. 19세기에 존재했던 산업이 새 산업 때문에 무너졌는데, 20세기 산업이 21세기에도 그 이상 존속될 거라 믿는 건 순진한 생각이다. 미디어는 영화를 흡수하고 해체할 것이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공존하는 시대에 영화는 개념이 될 것이고, 그 순간 그 예술의 죽음을 목격하게 될 것 같다. 김 | 전 지구적인 현상이다. 한국적 상황과 관계없이 휩쓸리겠지만, 여기 한국적인 현상이 있긴 하다. 독립영화, 단편영화가 개인영화가 돼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80년대의 전제는, 집단이 공모하는 영화였고, 공동체적인 사고였다. 90년대 이후 디지털로 단편의 한계를 벗어났고 개인영화가 비로소 가능해졌다. 단편을 통해 주류로 진입하기도 한다. 예술행위, 창작행위를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지금이 호기일 수 있다. 코스닥, 닷컴이 뜰 때 영화사이트가 많이 만들어져 인터넷용영화도 많이 만들어졌다. <다찌마와 Lee>처럼 제도권에서 인정받은 감독을 데려오는 경우도 있지만 반짝하고 없어진 사이트 중에는 상업적인 목표를 두고 공모한, 파악되지 않은 인터넷영화도 많다. 그건 하나의 가능성이다. 그런 사람들끼리의 연대는 재밌는 현상이다. 정 | 비극은, 디지털영화로 옮겨가면서, 더이상 우리 시대의 대가가 없다는 거다. 오즈, 브레송, 칼 드레이어, 에이젠슈테인 같은. 거장의 시대는 디지털과 함께 끝나버릴 것 같다. 우릴 매혹시키는 순간이 되풀이될까. 나는 현대음악은 듣기 힘들어서 못 듣는다. 디지털영화가 계속 만들어져도, 사람들은 ‘결국 날 매혹시킨 건 20세기영화였어’라고 말할 것 같다. 디지털 세대가 <시민 케인> 같은 영화를 만들 것 같진 않다. 난 앤디 워홀을 보고 싶은 게 아니라 17, 18세기 거장들의 그림을 보고 싶은 거다. 벤야민은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인 영화에 아우라가 없다고 했지만 이젠 정말 아우라가 없는 것들, 키치적인 것들만 만들어지지 않을까. 이건 예술지상주의나 복고주의일지도, 그래서 형식에 시달리는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이상향으로 생각하던 것들이 죽음을 맞게 된다는 생각을 하면, 슬프다. 김 | 한국에서 시네마테크를 시작하려는 이들을 보면 이중적인 생각이 든다. 영화가 죽는 시대에 저들은 전 세기의 위대한 유산인 영화의 전달을 위한 구도자의 길을 가려는 것일까, 아니면 아무도 원치 않는 일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시네마테크가 잘되려면, 필름으로 보는 것에 대한 매혹이 있어야 하는데 디지털이 보급돼 필름이 사치스런 경험이 되기엔 너무 빠르고, 좋은 고전의 길잡이 노릇을 하기엔 너무 느리다. 상태 나쁜 프린트로 보느니, 상태 좋은 DVD로 볼 것 아닌가. 틈새시장으로서의 상업성을 시네마테크라는 이름으로 만들어내기엔, 말이 주는 역사성이 애매하고 시대착오적이란 느낌이 든다. 정 | 시네마테크는 비밀결사단체다. 나만 소외받고 있는 게 아니구나, 위로받고 그들끼리 벌이는 일종의 세레모니다. 영화 보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한자리에서 친구들과 만난다는 의미가 클 것이다. 고등학생 영화제에 참석한 적이 있다. 20여편을 보면서 작품들 사이에 극심한 차이가 있다는 걸 알았다. 10년 이상으로 보이는 그 차이들은, 알고보니 카메라의 기종 차이가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게 강남과 강북의 차이더라. 영화가 계급을 결정하고, 아니 계급이 이미 영화를 결정하고 있었다. 강북 아이들이 만든 영화에는 강남 아이들이 보여준 테크닉을 쓰고 싶다는 의도가 역력했지만, 상상력이나 예술적 창조성으로 돌파해내진 못했다. 하이텔 전성기의 마지막 순간에 통신을 하면서 강북은 강북끼리 강남은 강남끼리, 노는 방법에도 계급적 차이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일상의 표현조차도 자본으로, 디지털을 바탕으로 한 자본으로 하고 있었다. 디지털 미디어 전개 방식에서 그걸 발견하곤 끔찍했다. 극장가는 건 모두에게 평등한 일이었지만, 미디어 엑세스권은 평등하지 않다. 계급의 차이까지 위장할 순 없다.

김홍준·정성일의 종횡4담 [5] - 영화광·에필로그

영화광, 영화사와 결별하다 오즈와 존 포드와 고다르와 대결하지 않는 영화광, 영화사에 대한 콤플렉스를 깨끗이 지운 영화광, 대신 카메라를 들고 학교와 거리를 누비는 영화광의 시대가 왔다. 백과사전식 영화 교양에 몰두한 전 시대의 영화광은 이제 몰락의 운명을 걸을 것인가. 새로운 영화광들이 만들 영화세상은 어떤 것인가. 김 | 우리 세대엔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절망과 환상이 있었다. 지금은 환상을 용납하지 않는다. 취향과 기호만이 있을 뿐이다. 그땐 취향과 기호를 떠난 공감대가 있었다. 다르면 적대시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개인 취향이 다르고 좋아하는 영화가 달라도, 별 문제는 아니었다. 계급적 차이도 없었고. 토론이 벌어져도 싸움은 없었다. 끼리끼리 모여야 한다는 생각도 안 했다. 고다르든, 안토니오니든, 파스빈더든, 그들을 좋아하는 순간, 우린 한울타리 안에 있었다. 정 | 트뤼포는 ‘내가 내일 종신형을 받는다 할지라도 누군가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공격한다면 항소장 쓰는 걸 중지하고 그 영화를 옹호할 것이다’라고 했다. 요즘은 모여서 바로 영화를 만든다. 우린 그러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예전엔 영화를 공유했지만 지금은 영화를 창작한다. 그들이 모두 감독을 꿈꾸는 건 아니다. 만들고 틀고 자기들끼리 좋아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좋아하는 영화제목을 열거하고 애정을 고백했는데, 그러던 것이 고색창연하게 느껴질 만큼 영화광 세대 차가 벌어져 있다. 예전엔 못 본 영화제목을 기억했다가 기어이 달려가 보곤 했다. 요즘 영화광들은 못 본 영화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다. 우리 때는 단과 급이 있었다. 누가 고다르 운운하면 또다른 이가 장 마리스트라우프를 언급하고, 그런 식의 진검승부를 했다. 구로사와를 얘기하면 7급, 오즈를 얘기하면 3급, 스즈키 세이준을 얘기하면 1급이었다. (웃음) 그런데 영화광으로의 깊이보다는 취향의 차이가 중요해지는 식으로, 지형도가 바뀌고 있다. 그건 바람직하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천국이라고 말하기엔, DVD의 고전 마켓이 형성돼 있지 않아 제한적인 얘기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김 | 우리 세대의 영화광들은 스노비즘에 치기도 결합돼 조금 복잡했던 것 같다. 남보다 먼저 알고 싶어했고, 진검승부를 하고 싶어했고. 남은 게 하나 있긴 하다. 옛날 한국영화다. 보는 이가 없고 본 이가 없어 낯선, 미지의 영토다. 그것마저 <한국영화걸작선>으로 그 통로가 열린다. 유행이라면, 90년대 초에는 외국 예술영화를 알고 있는 게 중요했고, 90년대 이후에는 SF나 호러 같은 장르영화를 얼마나 구석구석 찾아내느냐가 중요해졌다. 마지막 남은 것이 옛날 한국영화다. 영퀴방에 ‘57년작, 황정순 주연의 영화’가 문제로 올라가는,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 정 | 10대에는 영화관에서의 단속을 무릅쓰면서까지 볼 만큼, 한국영화가 매혹적이지 못했다. 한국영화보다 걸리면 외화보다 처벌이 셌다. (웃음) 한 친구가 박노식 주연의 <자크를 채워라>를 보다가 걸렸는데 선생님이 무슨 영화 보다 그랬냐고 하니까, 반말하기 뭣 했는지, ‘자크를 채웁시다’라고 해서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와 가장 큰 차이점, 지금은 정보와 지식이 넘쳐난다는 거다. 당시 우린 아무것도 알지 못했고 그걸 하나씩 보물섬 찾듯이 찾아갔다. 느리긴 했지만 지식과 정보에 대해 생각할 시간은 충분했다. 지금은 지식보다 정보로 쌓이는 추세고 영화정보지를 읽는 것만으로도 벅찰 지경이다. 지금의 영화광에겐 ‘광’이라고 할 만큼 억압과 저항, 그 사이의 변증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저항할 것이 있는가. 영화의 힘은 불순한 거다. <카이에 뒤 시네마>의 교육 특집기사를 보니, 프랑스가 세계 최초로 영화를 정규교육 과정에 넣으려 하고 있다는데, 그 반대 의견이 흥미로웠다. 영화는 보지 말라고 하니까 더 매혹적이고, 힘을 얻는 것이다, 문학도 학교에서 가르치니까 찾는 사람이 없는데, 왜 영화를 벌써 박물관으로 보내려 하느냐, 그런 얘기였다. 지금 영화는 공식문화가 돼버려, 매력적인 대상이 되기엔 힘이 부족한 것 같다. 김 | 매혹과 열정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옛날 한국영화를 수단방법 가리지 말고 봐라. 모르는 거니까, 흥분할 수 있다. 둘째. 제도교육으로 배우려 하지 말아라. 나는 8mm 카메라의 작동법만 알고 영화라는 걸 찍었다. 편집이나 쇼트 개념은, 나중에 차례로 배웠고, 1년 뒤에 드라마를 찍었다. 그게 최고의 교육이다. 영화의 역사를 몸으로 느껴야 한다. 조명에서 편집까지, 뤼미에르부터 타란티노까지, 몸으로 느낄 기회를 처음부터 박탈해선 안 된다. 이미 알고 있는 건 못 잊을 망정 만들 때 순박한 영화부터 복잡한 영화까지 밟아보는 게 어떨까. 그럼 영화가 재밌을 수 있지 않을까. 정 | 책을 버리고 카메라를 들어라? 그리고 거리로 나와라? 김 | 배우려 하지 말라는 거다. 에필로그 김 | 오랜만에 정성일을 만나니, 영화를 찍어야 한다는 초조함이 든다. 내 영화를 만들고 싶은 것은, 태어나서 가장 즐겁게 한 일이기 때문이다. 정체성 이전에 작업의 즐거움의 문제다. 즐거움을 얻기 위해 치러야 하는 것들 때문에 도망다닌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최저 수준으로는 영화를 벗어나 엉뚱한 감투를 쓰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최고 수준으로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나 자신도 내 영화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러려면 끊어야 할 것들, 내려놓아야 할 책임들이 많다. 돈 벌어야 한다는 제작자와 예술해야 한다는 감독이 만들어내는 긴장의 영화가, 나를 건강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정 | 7년 동안 해왔던 <키노> 편집장을 그만두고, 전주영화제를 그만두고,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됐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내 좌표를 다시 설정해야 할 것 같다. 내 나이에, 허우샤오시엔은 <비정성시>를 찍었더라. 반성하고 있다. 그런 작품을 지금 당장 만든다는 건 언감생심이지만, 나는 그 고민에 비슷하게 닿기라도 했는가. 며칠 전, 다시 한번 <비정성시>를 봤다. 사임이 결정되던 그 다음날. 모든 걸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주는 건, 다시 영화였다. 독자들도 그런 영화가 한편씩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 나이를 생각해 보고, 어떤 감독이든 그가 그 나이에 만든 영화를 찾아보고, 그 사람들과 같이 세상을 살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길 바란다. 김 |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좌절하겠다. 정 | 같은 근심을 하게 되겠지.

이런 터무니없는 사기극!

로버트 저메키스의 <캐스트 어웨이>는 업데이트된 <로빈슨 크루소>로서, 이 영화에서 톰 행크스는 이제 막 미국의 연인인 헬렌 헌트와 약혼한 다혈질의 페데랄 익스프레스 지점장(manager)으로, 크리스마스날 회사 화물비행기가 폭풍속에 조난돼 떨어지는 바람에 남태평양 무인도에 떨어진다. <타이타닉>의 클라이맥스를 10분으로 축약시켜 노골적으로 베껴먹은 비행기 조난 장면은 참으로 초스피드 배송서비스 회사의 특징을 잘 배운 결과라고 하겠다. 톰 행크스가 당도한 흰모래 백사장이 눈부신 해변은 그 자신만을 위한 맞춤 클럽메드(유명 휴양지)라고 해야겠다. 섬 생활을 아주 곤혹스럽고 복잡하게 만드는 건 깨지지 않는 코코넛과 마치 시한폭탄처럼 생존자의 머리를 쪼아대는 충치 정도이다. <로빈슨 크루소>는 실용적인 중산층의 윤리와 미덕에 바치는 찬가였으며 그 성실한 영웅으로 하여금(그리고 그가 대표하는 그 국가로 하여금) 무(無)로부터 문명을 재창조해내게끔 하였으나 <캐스트 어웨이>는 문명의 핵심에서 무를 들여다보는 힘이 훨씬 약하다. 다행히도 몇 가지 깨지지 않는 페덱스 상자들이 해변으로 밀려오는데 거기엔 척 보기에 아무 쓸모없어보이는 배구공이 들어 있다. 행크스는 그걸 집어들고 거죽에 얼굴을 그려넣으며, 그 공은 덕분에 친구 겸 애완동물 겸 우상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 정도의 프로덕트 플레이스먼트도 모자라, 행크스는 그 공을 상표명인 윌슨으로 부른다. 비록 <캐스트 어웨이>가 톰 행크스의 극단적인 솔로연기에 아주 많이 기대고 있긴 하지만 그의 움직이지 않는 ‘프라이데이’는 올해 최고의 조연배우로 주목받아야 마땅하다. 최소한, 윌슨은 톰 행크스에게 이 영화에서 가장 감정적으로 잡아 비트는 장면의 프리텍스트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 생경한 자급자족 생활로 4년을 섬에서 보낸 톰 행스는 드디어 뗏목을 완성해 탈출하게 된다. 드넓은 대양으로 열심히 노를 저으며 저 뒤의 푸르른 감옥을 돌아보는 이 장면은 정말 완전 공상과학 그 자체다. 그는 단짝친구 윌슨과 함께 이제 우주로 나아가는 것이다. 톰 행크스가 문명으로 돌아온 뒤의 일들은 이보다 더 기가 막혀서, 저메키스는 대체 어떻게 저런 괴상망칙한 신들을 만들어냈을까 의아스러울 정도다. 그러나 저메키스는 마치 자기가 최고로 비타협적이고 모질고 쓸쓸한 인간존재조건을 그려냈다는 듯, 대단히 부풀려진 낙관으로 영화를 맺어버린다. 정말 경이로운 삶이라 아니할 수 없다. 올림포스의 순수한 눈으로 코언 형제를 보라. <파고>와 <위대한 레보스키>에서 이 어마어마하게 똑똑한 형제는 그들이 우월감을 느끼지 못할 만한 캐릭터를 골라 다루는 위험을 택했다. 이 전략은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에서 폐기되었다. 이 영화는 세명의 백인 바보들(조지 클루니, 존 터투로, 팀 블레이크 넬슨)이 범죄조직을 떠나 30년대 후반의 미시시피로 탈출하는 이야기로서 자그맣고 멍청한 조크다. 기본적으로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는 멍청한 사관후보생, 좀비 종교인,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유색인종 소년, 시끄러운 은행털이범 등을 망라하며 딥 사우스(미국 최남단지역)의 상투적인 그저그런 유색인들 얘기를 따뜻이 그려보려고 했나보다. 미술디자인 등은 대단하지만, 나는 하시라도??? 이놈의 깜짝선물상자를 쾅 하고 닫아버리고 싶은 충동에 싸였다. 그저 이들의 연기란 이리저리 찌그러뜨려 우스꽝스런 표정의 얼굴을 만드는 데 국한돼 있으며 클루니는 중년시기 버트 레이놀즈의 느끼한 매력을 흘릴 뿐이다. 코언 형제의 이 인형극을 개략적으로 말하자면 랠프 스탠리의 슬픔에 찬 절규를, 살상을 자행하는 KKK의 입에 얹어놓은 형국이랄까? 허무주의를 깔고 말하자면, 나는 코언 형제가 그들의 잔혹한 질서를 감쪽같은 사기극의 혼돈에 얹어두는 것을 보느니, 스파이크 리가 까다롭고 독선적이고 밉살맞은 시나리오를 가지고 뭔가 깽판을 치는 것이 백배 더 보고 싶다.(2000.12.20)

전통문화의 지지자, 세태풍자의 달인

맹진사는 세도가가 되려는 야심에 판사집 아들을 사위로 맞으려 한다.그러나 겨우 혼약을 받아놨더니 그 집 아들이 절름발이라는 소문이 나돈다. 진퇴양난에 빠진 맹진사는 결국 잔꾀를 낸답시고 딸의 몸종을 대신 시집보내는데 막상 결혼식 당일날 확인해보니 상대는 늠름한 청년이었다. 1943년에 집필된 오영진의 오리지널 시나리오 <맹진사댁 경사>의 스토리라인이다. 흥겨운 전통문화 속에 배꼽잡는 세태풍자를 솜씨좋게 버무려넣은 이 작품은 1956년 이병일 감독에 의하여 <시집가는 날>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면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고, 베를린영화제와 시드니영화제에 출품되었으며, 아시아영화제에서 각본상과 희극상을 수상하는 등 각계의 상찬을 한몸에 받은 당대의 수작이다. 1962년과 1977년에는 각각 이용민과 김응천에 의해 리메이크되었으며, 현재까지도 각종 연극무대나 방송사의 마당극으로 끊임없이 재해석되어 명실공히 우리 시대의 고전으로 자리잡고 있다. 오영진 작품세계의 핵을 이루고 있는 것은 전통문화의 영상화와 통렬한 세태풍자이다. <시집가는 날>에서 행복하게 결합돼 있던 이 양대 축은 이후의 작품에서 각기 다른 식으로 변주된다. 전통문화의 탐구와 영상화는 <배뱅이굿>과 <대심청전> 그리고 <한네의 승천>으로 이어지며, 통렬한 세태풍자는 오리지널 희곡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를 영화화한 <인생차압>에서 그 정점을 보여준다. 사기와 횡령 그리고 탈세를 일삼던 악덕기업주 이중생이 위장자살쇼를 벌이려다 일이 꼬이는 바람에 예기치 못했던 최후를 맞게 되는 과정을 그린 것이 김승호 주연의 <인생차압>인데, 이중생이 김우중으로 바뀌었을 뿐 지겹게도 반복되는 이 나라의 파렴치한 천민자본주의의 속성을 코미디 형식에 담은 세태풍자극이다. 역시 당시 혼란스러웠던 1950년대의 세태를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이 작품에는 코미디의 요소가 전혀 없다. 악질두목에게 착취당하고 있는 10대의 소매치기집단을 다루고 있는데, 당시 7살의 안성기가 화면의 한귀퉁이를 차지하고 있어 이채롭다. 오영진은 파란만장한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헤쳐온 사람이다. 평양에서 출생한 그는 광주학생운동에 가담하는 바람에 양정사립보통학교에서 평양고등학교로 전학가게 된다. 경성제국대학(현재의 서울대) 문과에 재학중일 때부터 단편소설들을 발표하며 문재를 날리던 그는 졸업 직후인 1938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발성영화제작소에 입사하여 도요다 시로오(豊田四郞) 감독의 연출부로 활동하면서 틈틈이 <조선일보>나 <조광> 등에 선진영화이론의 소개와 영화평들을 발표한다. 1945년 해방 당시 평양에 있는 그의 집에는 조만식이 기거하고 있었다. 그의 부친인 오윤선 장로가 평양숭인상업학교를 운영하고 있던 민족운동가였던 인연이다. 지식인 청년 오영진은 조만식을 도와 평남건준위를 건설하고 그해 겨울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여 중앙위원에 임명된다. 그러나 소군정하의 북한정치현실은 그에게 고통만을 안겨주었다. 오영진은 북한내무성으로부터 발탁되나 이를 거절하고 월남한다. 1948년에는 남파된 테러리스트로부터 3발의 총탄을 맞는 끔찍한 사고를 당하나 구사일생으로 목숨만은 건진다. 이후 그가 열렬한 반공주의자가 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오영진은 살아 생전 10편의 시나리오와 14편의 희곡 그리고 110편에 이르는 영화평론을 남겼다. 일찌감치 영화에 뜻을 둔 그가 그토록 과작의 시나리오만을 남긴 데에는 또다른 일화가 있다. 1959년 그의 원작 <청년>을 제작자 임화수가 제멋대로 왜곡하여 이승만을 미화시킨 <독립협회와 이승만>으로 만들었다. 오영진은 거액의 원작료를 돌려주며 개봉불허를 고집했으나 당시의 정권과 유착된 큰 주먹이었던 임화수를 당해낼 재간은 없었다. 결국 영화는 개봉되고 오영진은 그런 영화현실에 염증을 느껴 충무로와 거의 인연을 끊다시피했다고 한다. 그의 사후 15년 만에 범한서적에서 6권짜리 <오영진 전집>을 출간하였는데 이중 제3권과 제4권에 그의 시나리오들이 실려 있다. 심산 | 시나리오 작가 besmart@netsgo.com ◈시나리오 필모그래피 1956년 이병일의 <시집가는 날> ⓥ ★ 1957년 양주남의 <배뱅이굿> 1958년 유현목의 <인생차압> 1959년 김기영의 ★ 1962년 이용민의 <맹진사댁 경사> 이형표의 <대심청전> 1965년 정창화의 <살인명령> 1977년 하길종의 <한네의 승천> ★ 김응천의 <시집가는 날> ⓥ는 비디오출시작 ★는 자(타)선 대표작

사회에서 개인으로,어쩌면 변절?

제2차 세계대전 뒤 비토리오 데 시카의 이탈리아영화 <자전거 도둑>을 피난처 부산 변두리의 중앙극장에서 관람한 나는 감동한 나머지 충격을 받은 채 극장을 나섰다. 당시의 극장 앞에는 사람 키 깊이의 도랑이 있었는데 나는 몽유병자처럼 흐느적거리며 걷다가 그 더러운 도랑에 빠지고 말았다. 일어서려 하지 않는 나를 여러 사람들이 팔을 뻗쳐 겨우 끌어올릴 수 있었다. 그때는 조감독 시절이었는데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 계열의 작품들에 심취하면서 장차 감독이 되면 이처럼 사회적 리얼리즘으로 방향을 잡아 성취하려 했다. 그래서 만든 것이 <잃어버린 청춘>(1957), <오발탄>(1961), <잉여인간>(1964) 등이었는데 주로 사회적 부조리를 리얼리즘 터치로 묘사하여 당시 긍정적 반응을 받았다. 다만 50년대의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에서 보여준 몽타주의 거부를 나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또한 뉴스나 다큐멘터리 수법에 가까운 촬영수법도 바꾸어 영상적인 상징과 암유를 중요시했던 차이는 있지만 그 네오리얼리즘의 정신과 주제의식은 계승했다고 자부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급격한 경제적 부흥과 함께 그 네오리얼리즘의 경향이 10년을 넘지 못하고 50년대 중반에 거의 자취를 감춘 것처럼, 그리고 네오리얼리즘의 영화작가들이 대부분 방향을 바꾸어 인간을 중심으로 한 휴머니즘과 같은 경향으로 옮긴 것처럼, 나 또한 나이를 많이 먹은 탓인지 <순교자>(1964), <한>(1967), <사람의 아들>(1980)과 같은 관념적 세계로 전향한 셈이다. 즉 나의 영화연출 역정에서 전반기는 사회성으로, 후반기는 정신세계로 양분할 수가 있다. 일부 평자들은 유 감독이 작가주의를 포기했다고 유감을 표시했다. 즉, 애당초 사회 부조리를 추구했다면 끝까지 파고들어가야지 변절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생애를 살아가면서 세계관이나 인생관도 바뀔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어린 소년 시절에는 몹시 병약한 몰골이었다. 자폐증과 고독을 안은 채 산과 들로 헤매면서 신비주의에 탐닉한 바가 있었다. 잡초와 들꽃에서 신의 섭리와 존재를 확신했고 또한 샤머니즘에도 관심을 쏟는 편이었다. 그러한 관심을 갖고 만든 것이 <한>(1967), <옛날옛적에 훠이 훠어이>(1978), <장마>(1979) 같은 무속적인 것들이 있었다. <한>은 우리 민족의 역사가 ‘한’의 역사였다고 할 만큼 쌓여온 ‘한’을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세 가지 에피소드에 묶은 옴니버스 형식이었다. 이 방식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시도되는 것이었다. 이 작품은 일종의 ‘괴담영화’이지만 귀신 같은 것은 나오지 않고 서정적이고 토속적인 흐름에 몽환적인 내용을 실었다. 그래서 나는 종래의 연출기법, 즉 카메라의 심한 움직임이나 몽타주의 빈번한 사용 등을 일체 삼가하는 연출기법을 시도했다. 대신 동양적인 서정성과 신비의 세계를 살리기 위해 동양화의 특성이라 할 ‘여백의 구도’와 안개(스모크)의 효과를 노렸고 되도록 근접촬영을 피하면서 원경의 롱테이크로 ‘옛날옛적 우리 조상들의 이야기’라는 이미지를 극대화하려고 노력했다. 이처럼 샤머니즘의 이야기를 신비적으로 영상처리하는 것이 당시 관객에게는 이색적이었던 모양이다. 또한 처음 시도된 세 가지 이야기의 옴니버스영화라는 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데다가 당시 주간지에서 어느 정신분석학자의 학술적 접근의 글이 두 페이지에 걸쳐 소개되는 바람에 이 영화는 명보극장 앞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호황을 누렸다. 단일극장에서 17만명이라는 흥행성과를 올렸는데, 그때 서울인구가 400만명이었으니 당시로서는 대박이었다. 한편 홍콩에서 서울로 자리를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독일대사관의 문정관이 이 작품을 보고 하는 말이 홍콩의 괴담영화 즉 귀신영화들을 많이 보았는데 천박한 오락영화들이었지만 이 <한>은 동양적 유현(幽玄)의 미학을 잘 나타냈다고 하면서 즉석에서 독일 정부 초청을 수락해 달라고 했다. 연합군에 패망한 독일영화계는 참으로 저조했다. 연합군쪽이 거대한 UFA의 체제인 삼위일체 즉, 제작, 배급, 극장의 합리적 운용을 분열시켜 독일영화발전을 마비시킨 결과라고 했다. 독일의 썰렁한 여러 스튜디오를 둘러보면서 강인했던 독일정신을 꺾기 위해 자유민주주의로 상징되는 미국영화를 확산시켜 독일을 교화하려는 의도를 읽을 수 있었다. 유현목|영화감독·1925년생·<오발탄> <막차로 온 손님들> 등 연출

여체를 향한 적나라한 시선

Les Liaisons Dangereuses 1959년, 감독 로제 바딤 출연 잔 모로, 제라르 필립 EBS 2월17일(토) 밤 9시 “여자가 섹스를 한 뒤 돈을 원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왜 그녀를 매춘부라고 생각하겠는가?” 로제 바딤 감독이 필모그래피보다 브리지트 바르도, 카트린 드뇌브, 제인 폰다 등으로 이어진 여배우들과의 추문으로 더 명성을 얻었다는 사실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데뷔작 <그리고 신은 여자를 창조했다>에서 화면을 꽉 채우는 브리지트 바르도의 육체의 스펙터클을 과시했던 바딤 감독은 앙드레 바쟁 같은 평론가로부터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근본적으로 치졸한 영화”라는 험담을 들었음에도 그의 필모그래피는 이후 큰 변화가 없었다. 로제 바딤 감독의 1959년작 <위험한 관계>는 18세기 프랑스 작가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소설을 영화로 각색한 것이다. 중세시대 유럽 귀족의 퇴폐적인 성생활을 묘사한 이 원작은 이후 스티븐 프리어즈 감독이 동명의 영화를 만들었으며 최근 청춘영화로 개작된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변형된 바 있다. <위험한 관계>는 배경을 스위스의 한 스키장으로 옮겨놓는다. 줄리에트와 발몽의 관계 역시 혼외정사를 일삼는 부부로 바뀌었다. 줄리에트와 발몽은 항상 쾌락을 찾아다닌다. 둘은 각각 다른 파트너와 불륜관계를 맺고 있으며 서로의 경험을 번갈아 들려주기도 한다. 여기엔 한 가지 규칙이 있다. 결코 파트너와 사랑에 빠져선 안 된다는 것. 줄리에트는 신앙심 싶은 마리안을 발견한 뒤 발몽에게 그녀의 순결을 짓밟으라고 부추긴다. 마리안에게 접근한 발몽이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면서 사태는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줄거리에서 짐작할 수 있듯, <위험한 관계>는 그리 훌륭한 각색을 거친 영화라고는 할 수 없다. 원작소설에서 빛을 발했던 쾌락에 대한 찬탄의 태도는 그대로 빌려오고 있되, 사랑에 대한 비유라든가 도덕적 감정교육에 대한 통찰력은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로제 바딤은 여성을 고혹적이고 아름다운 ‘정물’로서 포착하곤 했던 재주를 여전히 과시하고 있다. 잔 모로 등의 여배우가 반라와 전라의 모습으로 출연하고 있는데 그녀들의 가슴, 그리고 손과 발에 이르는 신체 부분에 대한 카메라의 집요한 관찰은 가히 페티시즘의 절정이라는 수식어를 달기에 부족함이 없다. <위험한 관계>는 개봉 당시 프랑스 비평가들로부터 “형편없는 실패작”이라는 만장일치에 가까운 평을 들었다. 문학과 영화 사이의 관계, 즉 이미지와 텍스트 사이의 창의적 충실성에 명백하게 위반된다는 것이다. 하기사 원작을 어느 바람둥이의 극히 평범한(!) 처녀성 훔치기의 내용으로 뒤바꿔놓은 것은 로제 바딤 감독의 패착이긴 하지만 영화는 의외의 부분에서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스키장이 자본주의적인 쾌락을 가장 잘 상징하는 공간으로서 설정된다는 것, 그리고 재즈피아니스트 시로니어스 몽크의 명쾌하게 귀를 두드리는 영화음악 등이 좋은 사례다. 무엇보다 <위험한 관계>는 어쩌면 프랑스라는 국가의 표층적 이미지일 수 있는, 다시 말해서 낭만성과 향락의 외투를 걸친 영화감독 로제 바딤의 은근한 자기고백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실패작이다. 김의찬/ 영화평론가 nuage01@hitel.net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

이상하게도 여성만화가들의 작품에서 여성주인공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특히나 대작, 그중에서도 판타지적인 경향의 작품쪽으로 가면 그 정도는 더욱 심하다. 어딜 가나 방긋방긋 꽃돌이 미소년들이 범람하고 있다. 그런데 바꾸어 들여다보면, 수많은 남성만화가들이 최강의 여전사를 만들어내기 위해 밤잠을 설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기묘한 역전이다. 여자보다 아름다운 남자들의 세계 반대편에는, 남자 따위는 가소롭다며 단칼에 날려버리는 여전사들이 맹렬한 질주를 거듭하고 있다. 태초에 데즈카 오사무가 ‘소녀들을 위한 만화가 있으라’ 하여, <리본의 기사>(<사파이어 왕자>)가 나타났다. 천사의 실수로 여자의 몸으로 태어나버린 그녀는, 왕자의 행세를 하며 용감하게 칼을 휘둘러 적들을 물리친다. 그러나 천사가 피리를 불면 금세 여성의 섬세한 감수성이 되살아나, 비리비리 힘이 빠져 꽃 속에 파묻혀 버린다. 남자는 칼, 여자는 꽃이라는 고전적인 남녀관에, 그래도 세상을 휘어잡아보려는 여성의 희망이 이 남장 여전사 속에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싸움엔 강하지만 사랑엔 약해? 여성만화가인 이케다 리요코는 프랑스혁명의 격동 속에 오스칼(<베르사유의 장미>)이라는 남장 여전사를 등장시켜 그뒤를 잇게 했다. 용맹함과 검술에서는 남자에게 뒤지지 않지만, 언제나 사랑 때문에 고뇌하고 약해지는…. 본질적으로 로맨스만화인 이 작품에서 아름다워지고 싶고, 남자에게 사랑받고자 하는 여자의 꿈은 세상의 주체로 서고 싶은 전사의 껍질 아래에서 끊임없이 비극의 충동질을 해댄다. 이후 여성만화가들은 점점 여성주인공을 버려나가고, 기껏해야 양성구유의 존재들로 변모시켜 나갔다. 그래도 남장 여전사의 깊은 전통은 남아 있어, 쌍둥이 오빠의 역할을 대신하는 가짜 <바사라>가 긴 칼을 빼들고 사막 위를 내달리고 있다. 싸움엔 강하지만 사랑에는 약한 여전사들은 남성작가들의 작품에서도 쉽게 등장한다. 미래세계의 여전사인 <총몽>의 엔젤은 튼튼한 강철 근육에 화성의 기갑술이라는 고도의 무술을 익히고 있는 최강의 여전사로 등장한다. 그녀는 자기 덩치의 수십배나 되는 살인 로봇들을 가볍게 물리치고, 쟈렘이라는 지배세계에 도전한다. 그러나 항상 그녀는 연애 감정이라는 복병을 만나고, 그것은 마치 손오공의 머리띠처럼 치명적인 급소의 역할을 한다. 물론 <크라잉 프리맨>과 같은 남성전사의 만화에서도 여자와의 로맨스가 비극의 단초를 마련하곤 하지만, 남성만화의 여전사는 너무나 패턴화되어 있다는 인상을 지워버리기 어렵다. 화려한 필력으로 박진감 넘치게 피와 살을 흩뿌리고 있는 두 만화 <베르세르크>와 <무한의 주인>에서도 남성주의적인 여성관은 잘 드러난다. 이들 작품의 조연급으로 등장하는 여자들은 상당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언제나 남자에게 기대고 있으며 남자의 위기를 초래한다. 특히 <베르세르크>의 캐스커는 남자들의 여전사관이 가지고 있는 역겨울 정도로 단순하고 패쇄적인 패턴을 잘 보여준다. 그녀는 그리피스에 의해 목숨을 구하고, 그로 인해 전사로 키워진다. 용맹한 매의 단에서도 그녀를 이길 자는 그리피스밖에 없다. 그러나 가츠에게 불의의 패배를 당한다. 강자만이 여전사를 얻는다? 그녀는 자기를 이긴 두 남자 사이에서 로맨스의 시계추 역할을 한다. 그리고 가끔 독자들에게 눈요기를 시켜주고, 처음 드레스를 입고 나와서는 “그러고보면 벌써 몇년이나 스커트를 입은 적이 없어. 근육도 이렇게 불었고…, 역시 이상하지” 하며 가츠 앞에서 한숨을 내쉰다. 겉으로는 강하지만 자기보다 강한 남자에겐 한없이 여성스럽고 나약한, 남자들이 너무나 바라는 기쁨조 여성전사다. 링 위에서 옷 벗길 즐겨하는 여성 프로레슬러와 같다. 그러나 <공각기동대>의 쿠사나기 소령에 와서 그 전형성이 조금 변화하기는 한다. 원작만화에서 사이버 레즈비언 섹스를 즐기는 등, 그녀는 어느 정도 남성독자의 눈요기 역할을 하고는 있지만 성격상 남성에 대해 종속적이지는 않다. 쾌활한 성격으로 귀찮은 남자는 한 주먹에 날려버리는 독립적이고 현대적인 성격으로 잘 무장되어 있다. 이러한 독립성은 한 남자에 집착하지 않는 프리섹스형의 여전사들에게 좀더 잘 드러난다. 사실 시로우 마사무네의 <도미니온> <어플리즈드> <공각기동대> 등은 일본 전래의 작품보다는 서구의 SF물과 밀착되어 있는 편인데, 그쪽의 현대적인 팜므 파탈과도 흡사해보인다. 여전사, 자유를 향해 날다 그런 면에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절대 남자에게 종속적이지 않으며 성적인 노리개 역할도 하지 않는 완전한 자유의 여전사 이미지를 가장 잘 드러낸 작품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로맨스나 섹스 코드가 빠져 있다. 나우시카와 페지테의 왕자도 건강한 우정의 단계를 넘어서지 않고, 그래도 로맨스를 찾는다면 황녀 쿠샤나와 부관 쿠로토가 좀더 낌새가 보인다. 그러나 워낙 쿠사냐의 카리스마가 강하고 우월하다. 어쩐지 나우시카는 연애와 결혼의 단계를 뛰어넘어 만인의 어머니가 된 순결한 여신으로도 보인다. 한편으로는 여전사로서 격렬한 전투를 수행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비심으로 모두를 감화시키는…. 그래서 나우시카는 소년들의 이상적인 자아형태인 로봇, 거신병을 자신의 아이처럼 생각한다. 이것은 <파이브 스타 스토리즈>의 파티마들이 모터 헤드를 ‘내 아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최근의 화제작 <최종병기 그녀>에는 지독히 사랑에 약한 여전사가 등장해, 극단의 아이러니를 만들어낸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만화는 <좋은 사람>의 다카하시 신이 그려내는 기이한 로맨스이니까. 별다른 이유도 없이 자위대의 최종병기로 개조된 소녀. 그러나 그녀는 이제 막 풋사랑에 빠진 여학생. 자신의 성장해가는 몸, 점점 강해지는 힘이 두려워 견딜 수 없고 그것을 남자친구에게 보여주기 싫어 고뇌한다. 강해지기 싫지만, 힘 따위는 필요없지만, 점점 강해져가는 가장 비극적인 여전사다. 이명석/ 프로젝트 사탕발림 운영중 www.sugarspray.com